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끝
박남수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노래하는 새…시로 쓴 시론
박남수 시인은 [새]에 대하여 많은 시를썼다. 더구나 그것들은 보통시와 달리 [메타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새에 관한 그 시들은 보통 시가 아니라 시나 시인을 대상으로 한[시로 쓴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여러가지 점에서 시인과 유사한 점이 많다.
[새]의 촉매어는 [운다]와 [날다]이고, 시인의 그것은 [노래하다]와 [상상하다]이다.
[운다]는 시인의 [언어](노래)를 그리고, [날다]는 시인의 [상상력]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땅과 대칭을 이루는 하늘에 속해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라는 [새]의 시작행에서 [새]를 시나 시인으로 바꿔놓아도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새를 죽이는 화살이 2연에 오면 포탄 으로 바뀌고,
3연에서는 철조망과 수용소 그리고 원자탄으로 바뀐다.
화살이라면 몰라도 포탄이나 원자탄은 새를 죽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보다는 [인간]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새에 대한 언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라는 첫연의 시구가 2연에 오면 [아직도 새는 노래한다]로, 그리고 다음에는 다시 [아직도 새는 주장한다]로 바뀐다. 병렬법으로 된 그 언표를 보면 새의 생명은 곧 노래하는 것이고, 노래한다는 것은 자기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시 죽은 일이 없다는 새의 생명은 뒤에 갈수록 인간화하여 주장이라는 말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원자탄이 새를
죽이는 것과 관계가 없듯이 주장이라는 말 역시 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 처음 시작한 새와 화살의 관계가 새와 전쟁무기(포탄, 원자탄)로 추상화하면 새를 가둔 조농 역시 철조망과 수용소처럼 새와는 관련이 없는 인간들의 감금장소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와 인간(시인)이 병렬관계를 이루면서 전 시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시적 구조에서 당연히 문제되는 것은 시의 첫행과 마지막 행에 다같이 반복되어 있는, 무료히 저녁이면 주검의 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돌아오는 포수와 새의 관계인 것이다. [새와 화살]에서 [새와 원자탄]의 관계를 수렴하면 결국 새를 죽이는 [포수]로 수렴된다. 표면상으로는 포수가 새를 쏘아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고, 새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주검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차고 저녁에 돌아오는 포수의 행동을 [무료히]라고 말함으로써 새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말을 정당화한다.
그 짧은 시에 [아직도]라는 말이 네번씩이나 되풀이 해 나오는 것을보아도 알 수 있듯이포수는 어떤 특수한 시대의 한 상황을 대표하는 인간들이라기보다 역사를 지배하고 그 문명을 이끌어 오는 지상적인 힘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뜨겁게 노래하고 자유롭게 날고 무한과 영원의 하늘을 지향하는 생명체, [새=시]의 세계와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인 현실들이다. 포수들은 [저녁에--돌아온다]라는 말에서 매일 매일 아침에 직장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상의 생활, 반복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다. 감동도 꿈도 노래도 없는 산문적인 무료한 나날들은 새를 죽이며 살아가는 반시적인 행동으로 영위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더럽혀진 하늘에 아직도/일군의 새들이 날고 있다.] 우는 새에서 시작하여 나는 새로 끝나 있는 이시의 마지막 상황은 [더럽혀진 하늘]로 요약된다. 물리적인 의미로는 공해로 오염된 자연파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호론적 의미로는 무한 영원 성스러움과 같은 온갖 세속 문화와 대조를 이루는 신성문화의 붕괴 또는 물질과 육체와 땅의 언어에 대한 정신과 영혼의 세계가 더럽혀진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것으로 해석되든 포수는 도식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비시적 환경을 총칭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날이 갈수록 비시또는 반시의 방아쇠를 당긴다. 노래하는 것, 아름다운 것, 순수한 것, 사랑하는것, 작고 가볍고 날개를 가진 모든 것들이 추락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새=시를 조롱이나 철조망과 수용소 속에 가두는 것은 전쟁과정치만이 아니다. 박남수 시인은[새1]이라는 다른 시에서 [새는 울어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포수는 한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포수는 어마어마한 역사, 문명만이 아니라 작게는 시인자신이나 비평가들일 수도 있다. 노랫속에 뜻을 담으려 하는 이데올로기지향, 그리고 억지로 가식하여 시를 꾸미고 풀이하는 시인과 비평가들까지도 실은 새를 죽이는 음모자의 편에 서 있는 자이다.
새의 노래를 노래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듣지 않고 그 속에서 무슨 목적성을 지닌 뜻을 찾으려고 한 그 많은 시비평과 시론가들이야 말로 어쩌면 [몇마디의 이념적 언어로 그 순수를 겨냥한] 포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다시 읽는 한국시]의 마지막 회를 박남수 시인의 새로 끝맺게 된 것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신은 죽었다]가 19세기의 선언이었다면, [시인은 죽었다]는 20세기에의 선언이다. 오역된영화제목이기는 하나 우리는 정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박남수 시인은 [새는 죽은 일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반명제를 내놓는다.
아마도 내 자신이 이 연재에서 보여주려고 하였던 것도 시인들의 부활, 결코 시인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시를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해서 포수들의 옆구리에 찬껍데기뿐인 새의 주검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언젠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오식이 시인을죽인다. 오식을 오독이라고 고쳐도 좋다. 시를 몇가지 틀과 목적론에 의해서 자의로 해석하려는 순간 비평이라는 그납덩이의 언어들은 살아 있는 새의 날개를 찢고 심장을 꿰뚫는다.
그 결과로 단지 껍데기의 주검만이 남는다. 비평가의 허리에 찬 그러한 시의 주검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시에 정독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오독을 낳는 요인이기는 하다. 시는 끝없이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텍스트로, 그 의미는 복합적이며 그 구조는 변형적인 것이다. 새소리를 새소리 그대로 들으려는 노력과 태도만이 더럽혀진 하늘에서도 시를 자유롭게 날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써온 내 자신이 그 [순수를 겨냥해 산탄을 쏜] 그 많은 포수꾼들의 하나일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오발이었을뿐 껍데기의 주검을 허리에 차기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상을 당한 가운데서 이 글을 모두 끝낸다. 나의 아버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셔서 10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죽음이자 마지막 남은 19세기의 죽음이기도 하다. 10년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작은 책자 하나를 남기셨는데, 그 책 제목은 [새는 울되 눈물을 흘리지 않나니--]였다.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 이 말이 왜 이처럼 위안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