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상(禪思想)
초기불교(初期佛敎)의 선정수행(禪定修行)
선사상(禪思想) - 성본스님
선의 역사
선어록이란 무엇인가?
좌선의
2. 선의 유래
3. 선사상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키(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祖師禪)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禪定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이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1. 붓다의 成道前 修行
2. 成道와 禪定
1. 禪定의 意義
2. 禪定說의 諸形態
3. 諸禪定說의 관계성
初期佛敎의 禪定修行
Ⅰ. 들어가는 말
어떻게 해탈에 이를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는 불교사상(佛敎思想)의 주류(主流)와 그 역사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여러 길들이 제시되었고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이에 본고(本考)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띠는 수행도(修行道)의 근원, 즉 해탈도(解脫道)의 원초적 형태를 밝혀 보고자 한
다.
Ⅱ. 붓다의 修行과 成道
《중아함(中阿含)》 <羅摩經>에는 붓다가 두 수승 밑에서 수행하는 장면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어 당시의 붓다의 태도와 수행과정에 대해 잘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羅摩經>의 대응 니카야(Nikaya)인 김준호의 중부(中部) <聖求經> 번역을 인용한다.
이제 알라라 칼라마가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해서 머문다는 그 법(法)을 스스로 자증(自證)하도록 노력하자.' 비구들아, 이렇게 해서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해서 머물게 되었다……."
(웃다카 라마풋다와의 대화 내용도 非想非非想處定을 제외하고는 위와 같음.)
두 스승의 법(法)의 한계를 인식한 붓다는 그들의 곁을 떠나 우루벨라 촌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강 근처에서 홀로 6년간 고행(苦行)을 닦았다고 한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붓다의 고행(苦行)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경전은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게 된 직접적 원인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붓다가 고행시(苦行時) '사선(四禪)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런데 팔리니카야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에는 붓다가 초선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한역 아함에서는 제사선(第四禪)까지를 모두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경전의 작성, 편찬 시기가 다르며 후대에 사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또는 교리체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경전의 윤색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痔든 붓다는 초선(初禪)의 경지를 이미 출가 이전에 체험했던 것 같고, 그러한 선정의 경험이 고행을 포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 成道와 禪定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붓다가 상황에 따라 또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붓다의 성도 과정에 대한 여러 이설(異說)에도 불구하고 그 성도의 근저에는 선정수행(禪定修行)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와 같은 깨달음의 내용들이 모두 선정의 수습에 의해 여실히 관찰되고 체달(體達)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붓다가 어떻게 선정(禪定)에 의거하여 성도(成道)하였는지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증일아함(增一阿含)》 <증상품(增上品)>을 살펴보면, "나는 그 위에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었다. 그때에 나는 탐욕이 풀리고 온갖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없어지고 다만 각과 관이 있어 마음이 첫째 선정에 놀았고 다음에는 각과 관이 모두 없어져 마음이 둘째·셋째 선정에 놀았으며, 보호하는 생각이 청정해지고 근심과 기쁨이 모두 없어져 마음이 넷째 선정에 놀았다. 그때에 나는 이 청정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게 되어 과거에 무수히 변해 내려온 전생 일을 알았다. 나는 곧 스스로 무수한 세상일을 기억하였다. ……또 나는 청정하여 흐림이 없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의 나는 이와 죽는 이, 좋은 세계와 좋은 몸, 나쁜 세계와 나쁜 몸, 혹은 좋고 추한 것은 모두 그 행의 근본을 따른다는 것을 관찰해 알았다. ……그래서 나는 청정하여 흐림이 없는 삼매의 마음으로 번뇌가 다하고 번뇌가 없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가 해탈하였다. 그래서 나고 죽음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태를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알고 곧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었느니라."
선정은 수도상 항상 그 중심이 되는 것으로 불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수행법이다. 선정을 나타내는 말은 Pali어로는 samadhi(定, 定意, 三摩地, 等持, 正受), jhana(禪, 禪那, 精慮, 思惟修), samapatti(定, 三摩鉢底, 等至), samatha(止, 奢摩他), cittekaggata(心一境性), yoga(瑜伽) 등이 있다. 이들 중 jhana는 선(禪)·선나(禪那)·태연나( 衍那)·지아나(持阿那)라고 음사(音寫)되며, 구역(舊譯)에서는 사유수(思惟修)·사유수습(思惟修習)·기악(棄惡)·공덕총림(功德叢林) 등으로, 신역(新譯)에서는 정려(精慮)로 번역되는데 사유수(思惟修)와 정려(精慮)가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보고 있다.
위에 의하면 선정은 jhana의 음사어인 선(禪)과 samadhi의 번역어인 정(定)이 결합된 말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한 선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jhana(禪)는 그 어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jhayati와 jhapeti가 그것이다. jhayati는 '생각하다(think upon)', '명상하다(to meditate)', '불태우다(to burn)'의 뜻이고, jhapeti는 '불태워 버리다(burn up)', '불을 놓다(to set fire to)', '요리하다(to cook)'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불태워 버리다'라는 것은 집중과 통찰을 방해하는 '정신적인 더러움'을 불태워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samadhi(定)의 어원은 sam-a-dha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어근 dha는 '마음이나 주의를 (대상으로)향하게 하거나 고정시키는 것', '숙고하다'라는 뜻이므로 '마음의 통일 또는 집중'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jhana와 samadhi는 공통적으로 '명상', '마음의 집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역 아함에서는 선(禪)과 정(定)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jhana와 samadhi는 분명히 의미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Pali-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jhana는 결코 막연히 명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정신 상태의 특정 단계에 도달하는 특별한 종교적 경험에 관한 기술적 용어라는 것이다. 반면 samadhi는 '집중 집중된, 침착한, 여념이 없는 마음·명상의 상태'라고 설명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선(禪)은 선정수행의 과정적인 면을, 정(定)은 선정수행상의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2) 선정(禪定)의 목적과 의의
비구가 선정에 머물러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다이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라."
위의 경문에서 붓다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오온의 이미지에 대해 참다이 관찰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다문성제자(多聞聲弟子)들은 선정수행으로써 의식의 연기적 발생과정을 참다이 관찰(如實觀察)하여 집착이 멸하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붓다는 비구들에게 선정수행을 힘써 닦아 그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하면 십이연기와 사성제(四聖諦)의 진리가 참다이 밝게 나타난다고도 설한다. 이와 같이 선정수행의 목적은 존재의 요소(五蘊 色·受·想·行·識)와 그것의 생멸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여실히 관찰하는데 있으며 수행자들은 끊임없는 내적 통찰 수행으로 여실지견을 성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여실관찰(如實觀察)은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지혜(智慧)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무엇이었든 선정중의 일이었고 성도 후에도 붓다는 항상 선정수행을 계속한 것을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입멸시(入滅時)에도 제사선(第四禪)에서 반열반(般跡槃)하였다고 하니 초기 불교에 있어 선정수행의 중요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초기 불교 당시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선정수행의 비중을 잘 알 수 있다. 비구(比丘)들의 정명(正命)으로서의 일상은, 하루를 네 시간 단위로 구분하여 비구가 잠을 자는 시간은 중분(中分, 밤 10시부터 새벽 2시) 4시간뿐이고, 후분(後分, 새벽 2시에서 6시)에는 일어나 좌선(坐禪)에 힘쓰고 조분(朝分, 오전 6시에서 10시)에는 선정에서 나와 세면·청소·탁발(托鉢) 등을 행하고, 오분(午分,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에는 오전까지 식사를 마치고 식후의 휴식 및 좌선을 행하며, 석분(夕分, 오후 2시에서 6시)에는 좌선을 하거나 또는 저녁에 좌선에서 나와 다른 비구들이나 신자들을 위한 설법을 하고 초분(初分, 저녁 6시에서 10시)에는 다시 좌선에 힘쓰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이 선정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당시 수행승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를 통해 더욱 생생하고 선명한 선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새들이 통로, 비에 싸인 하늘에 우레 소리 요란할 때, 비구는 홀로 산동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꽃들은 피고 풀빛은 산뜻한데, 무화과나무 무성한 냇가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혀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깊은 밤, 고요한 숲속에 비가 내리고 짐승들이 포효할 때, 비구는 홀로 산굴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건강을 기뻐하고, 고뇌를 없애고, 장애가 없고, 욕심이 없고, 괴로움이 없고, 모든 번뇌를 멸하여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3) 선정(禪定)의 예비적 수행
먼저 《중아함경(中阿含經)》 <상적유경(象跡喩經)>을 보면 붓다는 수행자가 출가하여 범행을 닦아 해탈지견(解脫智見)을 성취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상세히 설하고 있다. 그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에 대한 믿음 → 지극한 신심(信心)에 의한 출가(出家) → 계(戒)의 구족(具足)과 성취(成就) → 지족(知足)의 행(行) → 제근(諸根)의 수호(守護) → 수행승의 위의(威儀)/정명(正命)에 대한 정지(正知) → 원리독거(猿離獨居) → 오개(五蓋)를 끊음 → 사선(四禪) 성취 → 해탈지견(解脫知見)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문을 살펴보면 본격적으로 선정이 실수되어지는 것은 원리독거의 단계부터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전 과정까지를 선정의 예비적 수행덕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수행승으로서의 바른 생활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선정과 지혜의 구족을 가능케 해 주는 중요한 수행덕목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불교 선정의 종류는 각각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지관(止觀)·삼삼매(三三昧)·사무량심(四無量心)·사념처(四念處)·팔해탈(八解脫)·십상(十想)·십편처(十遍處)·십념(十念)·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들 다양한 선정법(禪定法)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한 선정 수행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의미를 파악해 볼 것이다.
1) 사선·사무색정·멸진정
(1) 사선(四禪, Cattari jhanani)
사선(四禪)은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의 네 단계의 선정을 총칭하는 말로서, 선정의 단계 구분은 정신의 통일 상태가 점차 깊고 고요하게 되어 가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사선(四禪)의 연원에 관해서는 당시 선정가들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채용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붓다의 독창적 선관(禪觀)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사선(四禪)은 붓다 성도의 직접적인 계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붓다가 반열반(般跡槃)에 들 때에도 사선에 의거했을 정도로 초기 불교에 있어서 선정수행의 중요한 하나의 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사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 주는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정형화된 서술방식과는 다른 사선(四禪)의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도 있는데 김준호는 <원시불교의 선정설 연구>27)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② 사선(四禪)의 각 단계에서 일체법(一切法)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등으로 관찰할 것.
③ 사선에 의해 생기는 악(惡)에서 벗어난 희열(喜悅)에 집착하지 않을 것.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사선(四禪)의 구체적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선(四禪) 각 단계의 희락(喜樂)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의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실상(實相)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정각(正覺)을 성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색정(四無色定)의 네 가지 선정(禪定)은,
① 공무변처(空無邊處, akasanancayatana)the stage of infinity of space
②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nancayatana)the stage of infinity of perception
③무소유처(無所有處, akincannayatana)the stage of nothingness
④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nnanasannayatana)the stage of neither ideation nor non-ideation
위와 같은 네 가지 처(處, Ayatana)에서 행해진다. 이것은 각각 '허공(虛空)과 같은 무한한 장소', '인식(認識)과 같은 무한한 장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장소', '의식(意識)도 무의식(無意識)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붓다에 의해 이미 비판되었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불교의 선정법으로 채용되고 사선과 함께 대표적 선정 체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것은 아마 당시에 행해지던 선정의 의미와는 다른 관점에서 붓다가 수행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무색정(四無色定)은 원래 사선(四禪)과는 별개의 수행방식이었으나 후대에 선정법이 체계화되면서 점차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결합된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멸진정(滅盡定, nirodha samapatti)은 상수멸정(想受滅定, sannavedayita)이라고도 하는데 이 선정의 단계에서는 수(受)와 상(想)의 작용이 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하게 되면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즉 대립 분별적인 심작용인 상(想)과 고(苦)를 일으키는 원인인 수(受)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멸진정(滅盡定)은 수(受)와 상(想)이 완전히 멸한 경지로 죽은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나 이 정(定)에 들어간 사람은 오근(五根)이 그대로 갖추어져 있고 온기(溫氣)가 사라지지 않으며 생명(生命)이 붙어 있다는 점에서 사자(死者)와는 다르다고 한다. 또한 불교 외에서 최고의 경지라고 여겨지는 무상정(無想定)과는 달리 멸진정에서는 생각[想]과 알음[知]이 완전히 멸(滅)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체계 위에 멸진정(滅盡定)을 부가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의 형식으로 서술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도의 선정에 대해 우위를 보이기 위해 후대에 멸진정(滅盡定)이 부가·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구차제정(九次第定)은 초기 불교의 선정설 가운데 가장 발달된 체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아함(長阿含)》 <십상경(十上經)>에는 구차제정 각지(各支)에서 멸하는 요소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선(二禪)=:각(覺)과 관(觀)이 멸함
= 삼선(三禪)=:희(喜)가 멸함
= 사선(四禪)=:호흡(呼吸)이 멸함
=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색상(色想)이 멸함 -50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공상(空想)이 멸함
=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식상(識想)이 멸함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무소유상(無所有想)이 멸함
= 멸진정(滅盡定)=:상(想)과 수(受)가 멸함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은 안반념(安般念), 또는 간단히 줄여 안반(安般)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정신통일을 이루게 되는 수행법을 말한다. 다음의 경문(經文)을 통해서 구체적인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 음식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음
= 잠에 빠지지 않음
= 한적한 곳에서 모든 시끄러움을 떠남
= 몸이 피로하지 않음
= 눈은 대상을 싫어하거나 즐겨하지 않음
= 관을 따라 즐거이 머뭄
= 신통을 이룸
= 사문과를 얻고 열반에 이름
= 사념처를 만족케 함
3) 사념처(四念處, Cattari satipatthanani)
사념처(四念處)는 사념주(四念住)·사의지(四意止)·사념(四念)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네 가지 관찰 대상인 몸[kaya, 身], 감정[vedana, 受], 마음[citta, 心], 마음의 대상[dhamma, 法]을 명상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사념처 각지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중아함》 <염처경(念處經)>에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명상의 포인트로 삼는다. 즉 호흡의 생멸이나 행주좌와(行住座臥)의 일상적인 움직임, 몸의 불결한 구성성분등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관찰 대상만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방식이다. 곧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미세한 움직임들을 항상 깨인 의식으로 자각하는 수행을 말한다. 수념처(受念處)는 외부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정 그리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감정[樂受·苦受·不苦不樂受]에 주목해서 마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심념처(心念處)는 이러한 고락(苦樂)의 감정이 발생한 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심리적 반응들, 즉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괴로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침울한 마음, 평정한 마음작용 등을 가만히 거리를 두고 내관하는 것이다. 법념처(法念處)는 육입처연기(六入處緣起)를 통해 7일어나는 번뇌나 다섯 가지 수행의 장애인 오개(五蓋),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칠각지(七覺支) 등을 관찰 대상으로 한다.
이상에 의하면, 사념처 수행은 몸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 욕망, 이미지들을 조건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현상으로 면밀히 내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육체와 의식현상의 내적 전개 과정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게되면 아라한과를 얻거나 구경의 지혜를 얻게 된다고 붓다는 설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선정법 가운데 관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지관을 들 수 있다. 지관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Smatha(止)는 동사 sammati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sammati는 영어의 to be appeased, calmed(마음을 진정하다, 가라앉히다), to be cease(그치다), to rest(쉬다), to dwell(오래 머무르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Samtha는 `마음의 고요, 평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Vipassana는 vi와 passati가 결합된 용어로서, vi는 영어의 duality(二元) 또는 separation(分離)의 뜻이고, passati는 영어의 to see(보다) 또는 to find(발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Vipassan은 `분간(分揀)해서 본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분간한다는 것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모든 현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분간한다는 뜻이고, 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관(直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음의 경문들을 살펴보면 지(止)와 관(觀)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선정 수행자는 끊임없는 지관구족(止觀具足)의 수행을 통해 존재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무명을 타파하고 궁극의 해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경전(經典)에는 선정의 한 형식으로서 삼삼매(三三매)와 사종삼매(四種三매)가 설해져 있다. 붓다는 이 삼매(三매)의 수행을 열반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법(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삼삼매(三三매)란 공삼매(空三매), 무상삼매(無相三?=無想三?), 무원삼매(無願三?=無作三?)의 세 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삼매(空三 )란 모든 법은 공(空)하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상삼매(無想三?)란 모든 법이란 전혀 생각할 것도 볼 것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원삼매(無願三?)란 모든 법을 원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특히 붓다는 모든 삼매 중에서 가장 수승한 삼매는 공삼매(空三?)이며 이를 왕삼매(王三?)라고 칭찬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종삼매(四種三?)란 무량(심)삼매(無量三?), 무상(심)삼매(無相三?), 무소유(심)삼매(無所有三?), 공(심)삼매(空三?)를 말한다. 무량심삼매(無量心三?)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히고 두루 인연해 사방(四方)·상하(上下) 모든 곳에 충만하고 일체세간에 두루 인연해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무상심삼매(無相心三?)란 일체 모양을 생각하지 않아서 무상삼매를 몸으로 증득하는 상태이다. 무소유심삼매(無所有心三?)란 이른바 일체 한량이 없는 식입처(識入處)를 건너 소유가 없이 소유가 없는 마음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공심삼매(空心三?)란 세상이 공한 것을 세상이 공하다고 여실히 관찰하고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은 `나'도 아니요 `내것'도 아니라고 관하는 것이다.
삼삼매(三三?)와 사종삼매(四種三?)는 무량심삼매(無量心三?)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사한 체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삼매(三?)의 체계 중에서 공(空), 상(相), 원(願=所有) 등의 개념은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공(空), 식(識), 무소유(無所有),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등의 개념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곧 자무량심(慈無量心)·비무량심(悲無量心)·희무량심(喜無量心)·사무량심(捨無量心)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범실(四梵室)·사범당(四梵堂)·사등심(四等心)·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경문(經文)을 통해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사무량심은 선정수행의 한 형식이라기보다 타수행의 보조 수행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56) 그러나 《장아함(長阿含)》 <삼명경(三明經)>에서 `여래(如來)는 이 사무량심에 유희하면서 스스로 노닌다'고 하며 `사무량심을 행하는 비구는 자재를 얻는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사무량심 또한 열반 성취를 위한 선정의 방편으로서 설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팔해탈(八解脫)은 선정수행의 상태를 그 깊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눈 것이다. 경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경문을 보면 삼해탈(三解脫)까지는 색(色)을 여실히 관찰하여 색(色)에 대한 집착을 끊는 단계이며, 사(四)에서 칠해탈(七解脫)까지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의 세 단계와 동일하고, 팔해탈의 상지멸(想知滅)은 멸진정(滅盡定)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팔해탈 각 단계의 의식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궁극의 목표는 모든 상(想)과 감정(感情)이 소멸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된다.
십념(十念)이란 불(佛)·법(法)·승(僧) 등의 10가지를 내관(內觀)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선정수행의 일종이다. 그 경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십일체처(十一륀處)는 십편처(十遍處)라고도 한다.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에서는 무명(無明)을 끊고 무명을 별지(別知)하고자 하면 이 십일체처를 닦아야 한다고 하고,62) 또한 이 십일체처의 삼매에 들어 청정하게 되면 진실한 이치를 마음에 두어 지극히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게 된다고 한다.
3. 諸禪定說 관계성
<1>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선정 체계
==戒具足成就
==諸根守護 -100
=四無量心 =遠離獨居 敷尼師檀結跏趺坐. -10
= =斷五蓋 [安那般那念·四念處(觀)·不淨觀·十念 등의 수행]
==初禪:不善法을 떠남
==二禪:覺觀(분별사유)이 멸함, 定의 喜樂
= 止·觀=三禪:定의 喜樂 소멸 -10
`==四禪:苦樂의 감정 완전히 消滅, 捨念淸淨
==三明獲得:신통의 지혜로 징험
==解脫
==解脫智見 -17
==斷五蓋 [安那般那念, 四念處(觀), 不淨觀, 十念 등의 수]
==<九次第定>=<八解脫>=<十一륀處>=<三三 >
=四無量心=初禪 :소리가 멸함=內有色想外觀色= (無量心三 )
= =二禪 :覺觀이 멸함=內無色想外觀色
=止·觀 =三禪 :喜가 멸함 =淨解脫 =地水火風無量處(觀) -14
==識無邊處定:空想이 멸함 =無量識處解脫 =識無量處(觀)
==無所有處定:識想이 멸함 =無所有處解脫 ==無願三
==非想非非想處定:無所有想이 멸함=非有想非無想處解脫 =無想三
한편, 도표 <2>의 팔해탈(八解脫), 십일체처(十一륀處), 삼삼매(三三 )는 사무색정(四無色定)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보이고 있는데,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의 체계는 이들 선정법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관(止觀)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은 그 성격상 선정수행의 모든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수행이라고 생각된다.
Ⅳ. 맺는 말
먼저 붓다와 선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붓다는 성도(成道)와 열반시(跡槃時)에 사선(四禪)에 의거하였고 특히 붓다가 출가 이전에 염부수 아래에서 초선(初禪, 四禪)의 경지를 체험하여 그것이 고행에서 선정으로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된 것으로 보아 붓다의 선정의 원초적 형태를 사선(四禪)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붓다 성도의 과정에 관하여 여러 이설(異說)이 있으나 선정의 수행이 그 기본이 됨을 알 수 있었으며 사선(四禪) 삼명획득(三明獲得) 사성제(四聖諦) 여실지견(如實知見) 해탈(解脫)의 성도(成道)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선정의 원형으로서 사선(四禪)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정(禪定)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는 데 앞서 선정의 의미와 선정의 의의 그리고 선정의 예비적 수행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선정을 의미하는 용어로는 선정(禪定), 삼매(三 ), 정려(精慮), 사유수(思惟修), 등지(等至), 심일경성(心一境性), 지관(止觀)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선정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解脫)에 있겠으나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관찰하여 지혜(智慧)를 증득하는 것이 선정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임을 붓다는 강조하고 있다. 또한 당시 수행승들의 일상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선정 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는 선정의 예비적 수행덕목으로 믿음 - 계구족(戒具足) - 감관(感官)의 제어 - 바른생활 숙지(熟知)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선정의 실수만큼이나 중요한 수행의 필수적 요소라 생각된다.
선정(禪定)의 제형태에 있어서는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사념처(四念處), 지관(止觀), 삼삼매(三三 ), 사무량심(四無量心), 팔해탈(八解脫), 십념(十念), 십일체처(十一륀處)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체계가 보이고 있다. 이들은 크게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사념처(四念處), 지관(止觀) 등의 구체적 선정법과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등 선정시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선정설의 두 가지 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초기 불교의 선정(禪定)체계를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선정체계와 사선(四禪)·사무량심(四無色定, 滅盡定)의 선정체계로 나누어 제선정설(諸禪定說)의 관계성을 살펴보았는데 삼삼매(三三 ), 팔해탈(八解脫), 십일체처(十一륀處)의 선정체계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이 후대에 보다 일관된 체계를 갖춘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관(止觀)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수행은 선정의 모든 단계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불교 해탈도(解脫道)의 정수인 선정(禪定)의 원형적 형태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선정의 가장 기본적인 체계를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앞으로는 한역아함(漢譯阿含)과 팔리니카야의 면밀한 비교연구를 통해 초기 불교 전체의 수행체계 속에서 선정이 갖는 의미와 선정설(禪定說)의 전반적 체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사상(禪思想) 목차- 성본 스님
1)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3) 요가와 선정
4) 선불교 성립과 선사상
5) 선불교의 사상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1) 선불교의 실천구조
2) 선수행의 구조
1. 선(禪), 선불교의 의미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과학문명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황금 제일주의로 치달리면서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불신, 혹은 인간 소외의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에 새롭게 눈뜨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처럼 동양의 마음인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예로부터 선의 풍토적인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 등 선불교의 정신에 젖어 있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문화권밖에 있는 서구(西歐)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27년부터 1934년 사이에 영문으로 출판한 스즈키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선학논문집(Essay in Zen Buddhism) 3권을 비롯하여 선불교 관련의 저술과 선과 문화 등, 그 밖에 그의 많은 영문 저술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중심이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세계의 고대문명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도문명의 독창적인 문화의 하나가 일반적으로 요가(yoga)라고 불리는 사유와 명상의 문화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요가의 사유 문화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나 철학, 예술 등 인도의 전문화를 배양시킨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B.C. 3000년에서 B.C. 25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인더스 무명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 요가의 사유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과 성자(聖者)의 흉상(胸像)으로써 확인할 수 잇는 것처럼, 사실 요가 같은 사유의 문화는 B.C. 1500년경에 인도를 침입한 아리야(Arya)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화가 아니고 인도 고대 원주민(토착민)인 드라위다(Dravida)족과 문다(Munda)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사유 명상의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모헨조다로나 하랍빠 등이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활석재(滑石製)로 만들어진 인장에는 신의 모습과 환상적인 그림, 성스러운 나무 등, 반상형(半象形) 문자와 400여 종에 달하는 음절(音節)문자와 표의(表意)문자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는데 아직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모헨조다로에서 출토한 3개의 인장 가운데 수주(獸主, Pasupati)의 모양과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문양들이 보이고 있다.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을 보면, 좌선상(坐禪狀) 위에 양쪽 다리를 편안히 벌리고 앉아 두 손을 양쪽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있으며, 깊은 명상의 세계에 몰입한 성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실제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의 흉상(石製胸像)이 발견되었다. 이 흉상은 B.C. 2000년경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수행승들이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의 맨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 눈은 반쯤 뜨고, 코는 높이, 입은 꼭 다물고 있는 표정의 용모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고 있는 성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의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한 원주민들이 요가 명상의 사유를 통한 종교적인 실천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독창적인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라는 지역에서만 개발하고 발전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와 조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이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에 의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풍토(風土)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예로부터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여 보다 좋은 생활의 지혜와, 정신적 육체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가라는 사유법도 고대 인도인들이 지리적. 기후 풍토적인 생활 환경속에서 생활의 지혜로 이룩한 종교 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사유의 명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 등을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 계절풍이 부는 몬순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년을 주기로 하여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지대이다. 인도에는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 8월까지의 우기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또한 다닐 수도 없다.
인도뿐만 아니라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가정을 꾸미며, 농사일을 하면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인이다. 따라서 대지나 흙, 산천초목은 물론, 눈. 비. 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즉, 인도인들은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세차게 몰려오는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의 은혜를 참고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나 농경지대에서나 비(물)는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산천초목 등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양육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같은 그러한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몬순의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조용히 집안에서 요가 사유의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다니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옮겨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전개되는 요가 선정의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몬순이라는 거센 비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재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神)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며, 괴로움의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잇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요가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나 풍토가 인도인이 정신인 요가, 사유의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예지와 종교적인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을 사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유. 명상하며, 종교적인 인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붓다 당시부터 몬순이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일체 수행승들이 유행을 하지 말고 사원에 머물며 안거하면서 선정(禪定)을 닦도록 하는 수행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간을 하안거(夏安居)라고 한다.
3) 요가(yoga)와 선정(禪定)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을 통하여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여기서 먼저 요가나 선정(禪定)등에 대한 어원과 기본용어 그리고 그 말의 개념부터 정리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요가의 기원은 B.C. 3000년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이나 성자의 흉상 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B.C. 1500년경 아리야인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 사유의 문화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각자의 산란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 방법을 말한다.
요가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uj(연결하다)라는 어근(語根)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영어의 yoke(멍에)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합', '억제' 등의 뜻이며 또 유가라고 음역(音譯)하고 상응(相應)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B.C. 6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우빠니샤드(Katha-Upanisad)"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 사유를 통하여 5가지 감각(感覺)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執持, dharana)을 요가라고 한다.'라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카타-우빠니샤드"에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認識)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을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uktena manasasada)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意)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은 인도의 모든 종교 내지 철학의 모체가 되고 있는 수행법인데, 불교의 선정(禪定)도 붓다가 처음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고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깨달음의 선정과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불교의 기본 수행으로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요가와 같은 말로 선나(禪那, dhyana)와 삼매(三昧, samadhi)라는 말도 우빠니샤드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요가라는 말보다 선나, 혹은 선정, 선이라는 말로 일반화되었으며, 지관(止觀), 선바라밀(禪波羅密, 禪定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선, 혹은 선나라는 말은 범어 dhyana(드야나), 혹은 빨리어 jhana(즈하나)라는 말을 중국의 한자로 음사한 말이다.
한자로 선이란 글자는 원래 땅을 깨끗이 하여 천지의 신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는 의미이며, 또 토지를 열고 다툼 없이 평화스럽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선이라는 한자에는 원래 요가나 드야나와 같은 사유나 명상의 의미는 없는데, 경전을 번역할 때 중국인들이 드야나(dhyana)혹은 즈하나(jhana)라는 말을 선나 혹은 선이라는 말로 음사하면서 새롭게 선정이 요가 사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어 dhyana와 빨리어 jhana는 우빠니샤드에서 yoga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명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dhyana는 중성 명사인데, 이 말의 어근인 dhyai는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이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조용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정려(靜慮)' 혹은 '선사(禪思)'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선사는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나(禪那), 선사(禪思)의 줄인 말이 선(禪)이다.
붓다는 요가라는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당시 브라만들이나 이교도들의 사상과 실천적 차원이 다른 입장에서 불교 선정의 내용을 지관으로 하는 dhyn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의 사상과 실천적인 입장에서 선정이 내용은 지(止, samadhi,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이라고 할 수 있다. 지(止, samadhi)는 '집중하다'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말로 유행되고 있다. 관(觀)은 '지혜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선정은 고대 인도의 요가처럼 고요히 앉아 산란심을 없애는 명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삼매의 경지에서 근원적인 지혜로 일체의 사물과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 지혜로운 자기의 삶을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선은 또 선정(禪定)이라는 술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의 정(定)은 samadhi(三昧)라는 말을 번역한 '집중하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남성명사인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dhyana나 samadhi라는 말에는 모두 선정(禪定)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시불교의 실천덕목인 팔정도의 정정(正定, samma-samadhi)은 samadhi를 번역한 말이나, 대승불교에서 보살도의 실천인 6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은 dhyana를 번역한 말이다.
선은 불교의 정신을 배우고 직접 실천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각각의 시대와 인도나 중국, 한국 등의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선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키(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祖師禪)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禪定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이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전래된 외래의 종교이며 요가 명상법인 선을 중국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이 종교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이 형성된 사실을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주장하고 있는 좌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자.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다음과 같이 좌선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남종(南宗)의 법문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서는 일체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하는 것이다. 즉,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임하여 망념(妄念, 번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座)라고 하며,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고 산란됨이 없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중국 선조의 새로운 좌선에 대한 주장은 인도불교이래 역사적으로 발전된 선의 실천을 종합하고 있는 종래의 북종선(北宗禪)에 대한 남종의 새로운 선사상을 밝히고 있는 유명한 일단이다.
여기서 일체의 경계에 번뇌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고 한 것은 우리들이 본래심(本來心)인 불성이 본래 청정한 그 당체(當體)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나 망상을 퇴치시키는 종래의 선정이나 명상 사유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 일체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일상생활에 흩어지거나 망각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실천 정신은 '열반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과 '금강경', '유마경', '반야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일상생활에서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반야사상을 통합하여 일상생활의 종교로 새롭게 정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도의 요가 명상법이 붓다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통하여 불교의 자각적인 실천 수행법으로 완성되었고, 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들이 이룩한 조사선에서는 일상 생활의 종교인 선불교로 발전시켰다.
사실, 중국 선종 혹은 선불교는 수. 당대의 여러 종파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후대에 성립된 수행 불교의 운동으로 성립되었다.
선의 실천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불법을 체득하는 수행자의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즉, 조사선의 선불교는 종래의 전불교(全佛敎)의 역사적인 입장과 수. 당대의 여러 종파 불교에서 주장한 불교사상 및 실천적인 입장을 전부 종합하여 새롭게 자각적인 종교로서,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 수행을 근본정신으로 하여 전개된 실천불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의 정신을 선의 실천으로 재정립하고 붓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 운동임과 동시에, 이러한 정신을 중국인들의 정신과 풍토에 알맞은 새로운 현실적인 생활종교로 전개한 종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시대에 일상생활 종교인 선불교가 완성될 수 있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 고유의 노. 장자(老壯子)사상과 유교의 현실 긍정 사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현실을 절대 긍정하며 진리를 가까이에서 찾는 현실적인 사유정신과 생활풍토 등이 외래 종교인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과 수행으로 각자 깨닫고, 새롭게 현실적인 일상샐활 종교로 재편함과 동시에 그 가운데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일상의 매사를 본래심으로, 진실된 삶을 자각과 지혜로 창조하는 생활불교의 선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히 번뇌나 산란심을 없애기 위한 좌선의 실천이나 선정을 닦기 위한 종파불교의 하나인 선종의 입장이 아니라, 붓다 이후 종래의 전불교를 선의 사상과 실천으로 종합한 중국불교의 새로운 입장이었기에 선불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생활종교인 선불교를 완성시킨 사람이 남종선의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 ~ 713)이며,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 ~ 788)과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 ~ 790),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 ~ 814)등 당대의 띄어난 선승들이다.
특히 조사선의 대성자인 마조 도일선사는 이러한 생활종교인 선불교의 입장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인간 각자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진실한 도)'라고하는 유명한 조사선의 새로운 도의 정의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를 발전시켜 일상의 종교인 선불교의 사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선의 실천 수행으로 불교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체득한 사람이며, 또한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하여 지혜와 인격으로 불법을 펼치는 당대(當代)의 교화주인 선불교의 새로운 인격을 말한다.
5) 선불교의 사상
불교사상 이외에 또 달리 선불교의 정신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 선불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은 불교 정신의 본질이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을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음을 체득하여 불교의 정신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禪僧)들이 대승불교의 정신을 선의 수행과 실천적인 입장으로 새롭게 정립함과 동시에 이를 현실생활의 종교로 만들어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사상적인 입장과 그 배경을 살펴보자.
선불교의 기본정신은 많고 다양한 대승불교의 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불성과 반야의 공사상 등 대승불교의 정신만을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전개하도록 간소화하고 있다.
즉, 앞에서도 인용한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사상적인 골격은 대승불교의 실천적인 정신의 핵심인 불성(佛性)사상과 반야 공(空)사상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즉,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인 인간 각자 자각의 주체를 깨닫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각된 각자의 불성(本來心)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집착되지 않는 공(空)의 실천을 전개하여 반야(般若)의 지혜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적인 배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 반야경, 유마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대승경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각자 자기의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는 무애자재한 지혜로 자아구명(自我究明)과 중생구제(衆生救濟)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불교에서는 언제나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선의 수행과 실천 방법이나 선사상도 사실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방법과 자각적인 지혜를 전개하는 정신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수행은 결국 각자의 불성을 깨닫기 위한 기본적인 수행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견성(見性)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만법(萬法)의 근원인 연기의 법칙을 관찰하여 깨닫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일체 만법의 근원이 각자의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의 법(心法)을 깨달음으로써 일체의 만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조작하는 것(一切唯心造),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 다만 이 마음이 짓는 것일 뿐(三界虛妄但是心作), 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 십지경에서도 "삼계는 오직 이 마음뿐이다(所言三界 此唯是心)." 라고 설하고 있고, 대승기신론에서도 '한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한 견성(見性)사상의 사상적인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열반경 제35권 가섭보살품등에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라고 한결같이 설하고 있으며, 법화경 제1권 방편품에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것임에 의심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화엄경 제35권 보왕여래성기품에서도 '불자여! 여래(如來)의 지혜, 무상(無相)의 지혜, 무애(無碍)의 지혜는 중생의 몸 가운데(身中)에 구족되어 있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전도(顚倒)된 망상에 뒤덮여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또 화엄경 제10권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도 '마음과 부처 및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衆生心)인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마조어록에서 마조 도일선사도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이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상에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 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이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 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本來心, 불성)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 없으며, 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심(日常心)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平常心)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道)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 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平常心)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일을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 아닌 평상심이 도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이 깨닫고 설한 경전과 어록의 기본 정신을 지금 우리들 각자가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만법이 근원을 스스로 체득하고, 각자 자신의 진실되고 올바른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여 일체이 불안과 불편함이 없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전개하는 일상생활의 종교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각자의 인생관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권위나 형식 등 피상적인 가치관이나 관념에서 탈피하여 각자 인간 본래이 자연 그대로의 존재인 참된 자아인 본래심(佛性)을 깨닫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자기를 깨달음의 주체인 주인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가는 현실성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남의 일이나 외부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문제로 하고 있다. 철저히 '지금 여기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아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임제 의현(? ~ 866)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지금 여기의 자기'가 주위나 경계 환경의 분위기에 끄달리고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심이 주인이 되어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언제, 어디서나 곳에 따라 자각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모두 그대로 진실된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설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선불교의 정신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의 수행과 깨달음인 정각(正覺)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들 각자가 성스러운 인격의 주체인 본래심(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각된 자기가 붓다와 더불어 여러 조사들과 똑 같이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법(正法)이 안목(眼目)을 구족하며,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진리의 세계에 손잡고 우리들 각자의 일상생활속에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유희삼매(游 三昧)의 생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의 수행과 실천생활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붓다와 여러 조사들과 똑같이 반야의 지혜로 각자의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망념(妄念)과 근심 걱정, 초조 등의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여유있게 각자의 인생과 삶을 유희적인 일상생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은 선의 수행을 통해서 각자의 피와 땀으로 전신(全身)을 투쟁하며 사유하고 실천 연마하여 체득한 철저한 확신과 자기 확립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기도와 바람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스스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확립하지 않으며 안 되는 자각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의 본질은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 수행과 자각을 통한 체험으로 자기화시키고, 구체적인 생생한 생활의 지혜로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실천과 수행은 선불교의 기본이며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선의 실천과 수행이라고 해서 불교 이외에 달리 선의 실천과 수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과 수행이 바로 선(禪)이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이러한 불교의 실천 정신을 선의 수행으로 재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각의 종교인 불교의 실천 구조를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의 4단계로 나누어서 체계 있게 정리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信)이란 일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자인 유일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불교(全佛敎)의 가르침과 실천방법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즉,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와 그리고 우리들 각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구족하고 있기에 필경 성불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일체 중생이 법부나 성인이나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확신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신(深信)은 유마경, 관무량수경, 대승기신론 등에서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입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참된 수행과 실천은 범부나 성인이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며,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종지(宗旨)인 것이다. 선불교이 실천은 스스로 심원(深遠)하고도 올바른 신념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믿음(信)은 반드시 불교의 올바른 이해(解)와 실천(行) 그리고 깨달음(證)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며, 자기의 종교적인 삶의 근본이 되고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화엄경 현수품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일체의 공덕을 낳는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대지도록 권1에서 진리의 세계인 불법(佛法)의 큰 바다는 믿음(信)으로서만이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서 능히 건너갈 수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이해(解)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 실천방법 등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이러한 확실한 신심과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한 올바른 수행(行)은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 깨달음이 경지를 각자가 체득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행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 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오로지 좌선의 수행에 전념하며 좌선의 한 가지를 실참(實參)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 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접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體究硏磨)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 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證)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해서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佛法)을 자기화한 것이며 혈육화(血肉化)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 행. 행. 증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도원, 1201 ~ 1253)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수행해 갈 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실천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불교의 사상을 심화하는 바로 그것이며, 불교의 정신을 각자가 자기의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나타나 주객(主客) 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차별심이 모두 탈락된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지혜의 생활이며 참된 삶을 전개하는 사실인 것이다.
선수행은 지극히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방법이다.
인간 사회 문명의 형태에서 벗어나 철저한 자기 자유의 탐구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형체가 없는 마음과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문제이기 때문에 도리어 매일매일 구체적인 생활이 형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 수행의 기본은 좌선(坐禪)과 선문답(禪問答)이다. 좌선을 통한 자기 조명과 선지식(善知識)과의 선문답으로 진실을 깨달아 확인하고, 진리인 정법(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또 좌선을 통한 본래심의 자기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선 수행의 문제인 공안 참구를 통한 선문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러 부처들과 조사들과의 진실한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좌선은 신체적인 수행의 형태이고 선문답은 언어(말)를 통한 구체적인 실천 형태로 볼 수가 있다. 원래 정신적으로 인간 존재의 최후의 조건을 추궁해 가 볼 때 신체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되는데 선의 수행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실천 수행의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선 수행의 기본적인 구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선 수행의 목적은 각자가 일체 만법의 근원인 불성을 자각하고 일체의 차별적인 관념과 개념에서 해탈하고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각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그 수행에 있어서는 결코 자의적이거나 방종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정한 수행 방법의 체계와 행위규범을 엄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적 행위의 규범으로는 첫째, 불교정신에 따른 출가 수행자의 교단 규범인 대소승의 계율이 있고, 선원에는 선원 청규(淸規)가 있다.
그리고 좌선 수행의 좌선법이 있으며, 훌륭한 어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엄격한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과 수행의 방법이 있다. 선의 수행은 먼저 이러한 실천의 행위와 규범을을 준수해야 한다.
종교적인 수행의 출발점이 선각자의 수행과 체험을 통한 말씀을 믿고 올바른 수행으로 그러한 사실과 경지를 추체험(追體驗)을 통하여 확인하고 확신을 얻어 자기의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로 살리며 인격으로 전개하는 것이기에 교주나 종조(宗祖)의 수행 방법과 실천이 똑같은 일정한 규범과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화살로 과녁을 겨냥하는 것처럼, 누구나가 한결같이 똑같은 방법과 행동으로 불법의 목적지인 성불이라는 과녁에 맞추어야 한다. 성불이라는 과녁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게 되면 불교가 아닌 것이며, 외도로 전락되는 것이기에 불법의 수행으로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선 수행자의 한결같은 목적으로 강조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화살의 목표물인 과녁과 같은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 수행의 규범을 원칙으로 한 선수행은 먼저 올바른 스승(선지식)의 문하에 들어가 여법(如法)한 좌선과 수행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자신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구조를 법문(法門), 관문(關門), 무문(無門), 입문(入門), 입격출격(入格出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스승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입문(入門)이라고 하며, 불법을 깨달아 진리의 세계이 문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을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조당집 제5권 운암선사전에 '문(門)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참된 보물이 아니다'라는 설법을 하고 있다. 이 말을 벽암록 제5칙에서는 '종문입자 불시가진(從門入者 不是家珍)'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어떤 보물이나 정신사상, 혹은 아름다운 말이라도 참된 자기의 보물이나 살림살이가 될 수 없다.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無盡藏)한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無門) 혹은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公案集)인 무문관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법의 수행은 철저한 스승이 지시에 따른 수행 방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구조를 입격(入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격(格)은 틀이나 격식(格式)을 기준으로 실천 수행의 구조적인 규칙이나 규범, 혹은 틀을 말한다. 규범과 규칙을 원칙으로 한 실천 수행은 올바른 스승(正史)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여법(如法)한 선 수행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육이나 기술, 예술이 배움에는 먼저 그 어떤 기준이 되는 격식에 자기의 모두를 투입시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체구연마(體究硏磨)시켜서 익히고 숙달시켜야 한다.
즉, 자기 개인의 제 마음의 제 마음대로의 자유와 방종을 모두 버리고 비좁고 부자유스러운 수행의 틀(格式) 속에 뛰어들어가 그 격식과 규칙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 그 부자유스러운 규칙과 격식의 틀이 몸에 익어서 자유스럽게 될 때 마침내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이를 출격(出格) 혹은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는 출격견해인(出格見解人)이라고 하며, 원오심요(圓悟心要)에서는 출격대도인(出格大道人)이라고 한다.
선에 있어서의 자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규범을 익히고 몸에 푹배게 하여 그 수행의 규범을 자유 자재롭게 사용하고 구사하며 자기의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어 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애(無碍) 자재롭게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에 유희(遊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지는 규범이나 법규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경지에서 마음에 내맡긴 채로 자유롭게 거니는 임운자재(任運自在)로 해탈 자재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선 수행이 실천은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단순한 실천행이 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 수행은 일행삼매의 좌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각지 수행으로 실천하는 곳에 다른 불교의 전사상과 정신을 포용하고 응집한 실천이다. 그것은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가지 수행(一行)이지만 불교의 근원인 진리의 세계를 깨달음의 자각으로 전향시키는 질적심화(質的深化)의 수행인 것이다.
즉, 한 가지의 실천 수행을 꾸준히 닦아야만 깊이 있는 깨달음이 경지를 체득할 수가 있다. 단순한 좌선 한 가지만의 실천 수행이라고 해서 폭이 좁고 천박하며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전불교의 정신과 사상을 모두 섭렵하고 충분히 소화한 뒤에 부차적인 것은 모두 제쳐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응집하고 집약하여 좌선의 실천으로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접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한 가지의 수행인 일행(一行)의 좌선은 결국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좌선의 일행으로 모든 불법의 정신을 자기화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행이며 실천법인 것이다.
좌선의 실천 방법을 적은 지남서(指南書)로는 송대(宋代) 종색(宗 )이 지은 좌선의(坐禪儀)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좌선의 기본은 신체를 조절하는 조신(調身),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는 조식(調息), 그리고 번뇌가 없는 자각된 마음을 갖는 조심(調心)에 있다.
이처럼 좌선 수행의 기본적인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간결하며 누구나가 직접 좌선을 참구할 수가 있다. 좌선이 일행삼매를 선 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있음은 단순함과 간결함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번뇌나 두뇌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반대로 전신심(全身心)을 직접 단적으로 부딪쳐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주관과 객관, 자기 자신과 주위의 경계와의 구분과 차별심이 모두 없어져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버린 삼매의 경지는 이러한 좌선의 실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 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 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一事에 絶對를 行함). 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하나, 행위 한 걸음 한 걸음에 청풍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이다.
즉 본래심(本來心)의 자기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에 그대로 본래심의 전체가 그대로 작용되어 구현되는 삶이 바로 선의 수행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 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슬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제록에 임제 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서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잇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體究硏磨)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알 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 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直觀智), 반야(般若)의 지혜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며 진정한 견해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 차별의 2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 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인식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直觀)은 믿음(信)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修正)하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 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信)은 힘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盲目)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兩義性)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선 수행의 실천은 일정한 수행 방법과 양식인 규범이나 좌선법, 청규 등 격식에 규정되어 있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수행도 일행삼매의 좌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자 그러한 기본적인 좌선 수행의 격식과 규범의 생활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 수행은 사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 실천을 반복하고 지속하는 구조로 성립되어 있다. 단기간의 선 수행은 형태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수행의 의미와 효과를 얻기 이해서는 어떤 일정기간의 수행과 지속을 필요로 하게 된다.
지속(持續)이란 수행생활의 끊임없는 연속을 말한다. 즉 좌선이라는 단순한 실천행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계속해 가는 것이며, 마치 나사 모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선 수행의 기본이 된다.
이것은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계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 이렇게 좌선의 수행의 반복과 끊임없는 지속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극히 단순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성적인 사유의 지배를 벗어나 신체가 거의 기계적으로 규범과 격식 속에서 행위 양식에 반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에 서서히 행위 양식을 안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행위) 규범을 무조건 받아들여 기계적으로 박복하여 이론을 제거하고 지속하는 것이 선 수행인 것이며,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의 실천만이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 경지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길을 도(道)라고 말하면서 그 도를 체득하는 수행은 먼저 어떤 형식과 격식에 자기를 집어넣는 일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종의 신체적인 조건을 붙임은 계층적인 구조를 갖춘 인격의 바탕에 습관화한 행위의 여러 특성과 행동 경향을 배양하는 것이 된다.
서경에 '배워서 성(性)이 되도록 한다.'는 습성(習性)이란 말처럼, 선 수행도 좌선의 실천으로 습성화한 자기를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그대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체구연마(體究硏磨), 숙달(熟達), 순숙(純熟)이라고 하며, 장자에서는 많은 연습과 반복된 훈련으로 단련하고 익혀서 자연이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연달자연(練達自然)의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다.
선의 수행은 불법을 각자가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선불교는 수행과 실천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실천과 수행이 없는 선은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불법의 수행과 실천이란 어디가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개개인이 각자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실천 수행은 될 수가 없다.
적어도 종교적인 실천은 깊은 진리의 자각을 수반하고 있다. 선의 문헌들은 모두가 고차원의 실천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선이 수행과 실천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당집 제3권 조과화상전에 조과화상과 백낙천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는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다.
백낙천이 조과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도(道)와 상응할 수 있습니까?
조과화상이 대답했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行)하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백낙천이 말했다.
그 정도의 말씀은 세 살 난 아이라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조과화상이 말했다.
세 살 난 아이가 이 말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나, 팔순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을 실행하기란 어려운 것이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
선종은 교종이 불어종(佛語宗)이라 불리우는 것에 상대하여 불심종(佛心宗)이라 불리운다. 여기에서 불심(佛心)은 불성(佛性)이고 진성(眞性)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그리고 불성은 불(佛)의 본질로서 성불의 선천적인 근거이다.
이와 같은 정과 혜를 통칭하여 선이라 하였다. 그리고 오(悟)라 해도 진성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각지(覺知)하는 것이 아니다. 곧 진성 그 자체에 계합하여 심성 그 자신이 되어 불성 전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깨닫는 심(心)과 깨달아진 진성이 일체(一體)가 되는 체험이다.
두 선인의 정(定)과는 완전히 그 입장을 달리하였지만 불타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보리수나무 밑의 선정에 의한 것이다.
번쇄한 부파불교의 학설은 본래의 종교적인 목적을 낮추어 구원과 수정을 소홀히 하여 현저하게 스스로 형식불교·해석불교에 떨어져 세간의 대중을 떠나 거의 전문가들만의 위안물이 되어 불타의 참된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c) 인도의 초기 대승경전은 반야경·유마경·법화경·화엄경 등이다. 반야경 속의 금강경은 반야의 불가득공(不可得空)을 설하여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응무소주’는 반야개공을 가리키고, ‘이생기심’은 공관을 매개로 한 자기의 각성 곧 불성의 현전을 말한다. 따라서 이 경전은 선문과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선종에서 선자에게 마음을 지니는 방법을 가르칠 때 쓰던 문구이기도 하다.
제4조 도신(道信)의 사적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12살이 지나자 서주 완공산에 들어가 두 스님에게서 10여년간 선을 배웠으며 601년 경에 출가하여 길주사에 머물렀다. 그 후 형산으로 향하는 도중 주위의 만류로 노산의 대림사에 10년간 머물렀으며 초대를 받아 쌍봉산에 들어가 문도 500명 이상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저서에 <보살계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도신의 사상적 입장은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능가사자기> 등에 의하면 그가 천태 지의와 마찬가지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중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불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신의 선은 문하의 홍인(弘忍)에게 계승된다. 그는 황매현 출신으로 7세 때 도신에게 사사하고 마침내 그 법을 이었다. 수행시 낮에는 노역에 종사하고 밤에는 열심히 좌선했다고 한다. 황매현의 동쪽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선을 알렸으므로 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산법문의 사상적 내용을 분명히 알기는 어렵다.
라의 부촉을 받고 이를 동토에 전래한 것이다. 이후로 6대로 계계상승(繼繼相承)하여 동토 제6조 혜능대사(慧能:638~713)에 이르렀는데, 6조대사의 법어집인 <단경(壇經)>은 선종의 돈오견성법을 극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육조의 돈법사상(頓法思想)은 한마디로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룸(識心見性 自成佛道)」에 있다.라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자 말끝에 크게 깨치고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 보았느리라(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一壇經) 고 하여 선종의 돈오견성법을 고취하였으며, 또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다(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壇經)고 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은(內外明徹)경계를 요달하여 구경묘각(究竟妙覺)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해탈이고 반야삼매이며, 곧 이는 무념이라고 하였다. 이 무념은 제 8아뢰야 미세망상까지 탕진한 구경무심(究竟無心)을 일컬으며, 이후 선종은 이 무념을 종취(宗趣)로 삼아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곧 <단경>에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취로 삼는다(比敎門 立無念爲宗)고 분명히 말하였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른다.(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고 하여, 무념의 돈법을 깨치므로써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 구경극칙(究竟極則)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말하기를 나는 이 가르침의 법을 뒷 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한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보아라. 고 하므로써, 바야흐로 조사선의 지취(旨趣)를 보여주고 있다.
선어록이란 무엇인가?
2) 선어록의 형태
3) 선종의 족보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는 좌선의 텍스트는 일본에서 소개된 내용이 주류다. 일찌기 선종 4부록 이라 해서 일본에 전래된 것이 우리나라엔 이희익 선생이 그것을 번역 소개하면서 보급됐었다. 좌선하는 바탕이 중요시 되면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고전은 이 선종 4부록 에 들어 있는 좌선의 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만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수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면 그렇게 한 좌선법을 제공한 전기는 무엇인가. 적어도 경전에 근거해야 설득력을 가지므로 일찍부터 이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돼 있었다. 우선 근거되는 경으론 관무량수경 이 있다.
그래서 옛부터 도를 닦는 수행자들은 자세를 신진대사를 고려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왔다. 요가니 단식법이니 하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 온 것이다.
참선이란 일종의 정신적 수행이므로 자연히 정신집중과 마음 다스리기를 우선한다. 정신통일과 마음조절은 자세가 단정한 데에서 효과적이다. 오히려 자세가 흐트러지면 신진대사가 안돼 병이 침입한다. 자세가 발라야 신진대사가 잘되어 심신이 약해지지 않는다. 수행자들의 가장 많이 앓는 병은 기(氣)가 막혀, 火가 내리고 水가 올라가 기순환돼야 하는 것이 고장나 위는 열나고 아래는 차디 차는 병상을 초래한다. 이를 水火未濟라 하는 바 일종의 신진대사가 안되어 기가 막힌 현상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걸리는 병이라면 위장병이다. 섭생과정에서 문제도 있겠지만 그 근원은 자세의 부조화 때문에 오는 기혈(氣血)의 순환과정에서 발생돼 소화불량이 초래된다. 그 다음이 심장병이다. 모두 자세가 단정치 못해서 초래되는 병들이다. 따라서 자세는 참선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이고 필수적이다. 지금 좌선의 는 그런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그런 중요성 때문에 일찌기 중국의 천태지의 스님은 마하지관 이나 천태소지관 등에서 좌선에서 갖춰야 할 자세를 잘 설명했던 것이다. 이 좌법이 다시 규봉종밀(780-841)에게 전승돼 원각경도량수증의 라는 좌선법을 편찬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종밀 스님에 이르러서 좌선에 따르는 실수적인 방법이 제시됐던 것이다. 종밀이 평생 원각경 연구와 선양에 힘썼고 또한 원각경 을 실천하는 자세로서 수증의 를 지었지만, 그의 명성과 저술이 널리 보급되고 실천되자, 그 수증의 도 수선의 길잡이가 됐던 것이다.
종밀 이후 점차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등의 문하생들이 천하를 뒤흔들자, 수증의 는 정통 조사선의 수습과정에서도 의용돼 형편에 맞는 좌선의 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좌선의 내용은 대여섯 가지나 된다.
2. 禪苑淸規 권8(1202).
3. 禪宗四部錄 , 五味禪 계통, 1, 2와 비슷하다.
4. 勅修百丈淸規 권2(1336), 大正新修大藏經 제48권에 들어 있다. 明代의 重刻이다.
5. 道元의 普勸梵禪儀 등.
앞으로 이 좌선의 를 강의할 것이겠지만, 그 기본 사상은 보살정신에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널리 이웃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 전제된 자기 수행의 첫 자세가짐이다. 수선하고 공부하는 일차적 목표를 보살정신에 둔다는 것은 좌선의 에서 좌선하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바르게 규정하는 핵심이다. 정신상태의 바른 점검이 앞서야 함을 강조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제방에서 좌선의 를 소홀히 하려는 통념이 퍼져 있는데, 이는 좌선하는 ABC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좌선하는 데에도 방식과 형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선당기대비심(先當起大悲心) : 우선 대비심을 일으켜,
발홍서원(發弘誓願) : 큰 서원을 세우고,
정수삼매(精修三昧) : 정교하게 삼매를 닦아,
서도중생(誓度衆生) :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려 할지 언정.
불위일신독구해탈이(不爲一身獨求解脫爾) : 자기 한몸만을 위해선 해탈을 구하지 말지니라.
휴식만사(休息萬事) : 움직이고 머무는 것에 사이를 두지 않는,
신심일여(身心一如 : 몸과 마음의 일치로써,
량기음식(量基飮食) : 음식을 먹을 때도
불다불소(不多不少) : 많이도 적게도 아니하며,
조기수면(調其睡眠) : 잠잘 때도,
부절부자(不節不恣) : 덜도 많이도 아니한다.
어한정처(於閑靜處) : 고용한 곳에서,
후부좌물(厚敷坐物) : 두꺼운 방석을 깔고,
관계의대(寬繫衣帶) : 허리띠를 느슨하게 매고,
영위의재정(令威儀齋整) : 위의를 단정히 한연후(然後) : 후에 결가부좌(結跏趺坐) : 다리를 서로 꼬아 앉되,
선이우족안좌폐상(先以右足安左陛上) :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를 누르고,
좌족안우폐상(左足安右陛上) : 왼쪽 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놓는다.
혹반가부좌역가(或半跏趺坐亦可) : 혹은 반가부좌하는 것도 좋으나,
단이좌족(但以左足) : 다만 왼쪽 발로,
압우족이이(壓右足而已) : 오른쪽 발을 누른다.
차이우수안좌족상(次以右手安左足上) : 다음 오른쪽 손을 왼쪽 발 위에 놓고,
좌장안우장상(左掌安右掌上) :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두고,
이양수대무지면상주(以兩手大拇指面相 ) : 두 엄지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서서거신(徐徐擧身) :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후좌우(前後左右) : 앞과 뒤, 좌우를,
반복요진내정신단좌(反覆搖振乃正身端坐) : 여러번 왔다 갔다 하여 흔들고, 곧 몸을 바르게 해서 곧게 앉는다.
厚( , 7)두터울 후
敷( , 11)펼 부, 퍼질 부, 나눌 부, 두루 부
(肉, , 7)허벅다리 폐, 밥통 폐, 위 폐
拇(手, , 5)엄지손가락 무 (手, , 5)버틸 주, 손가락질할 주
搖(手, , 10)흔들릴 요, 흔들 요, 움직일 요
振(手, , 7)떨칠 진, 움직일 진, 거둘 진, 떨 진
좌선의 란 참선하는 이의 몸과 정신을 바로 잡고 정신통일하게 하는 길잡이 책이다. 좌법을 알려주는 것에는 인도의 요가행법이 있다. 결가부좌하여 심신의 안정과 신진대사를 위해 취하는 자세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와서는 천태지의 스님에 의해 재정리되고 전승되어 선가의 중요한 교과서가 됐다. 그의 小止觀 이 유행되고 선가에 의용됐던 계기는 규봉종밀 스님의 선전에 크게 의지했다. 종밀의 선교일치적 운동은 곧 교계 내외로 환영을 받아 선수행의 지침서로 정착됐던 것이다.
지금 좌선하는 법칙 그 (1)은 우선 앉는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놓고 다시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포개 놓는다. 이렇게 되면 왼쪽 발이 오른쪽 발을 누르는 격이 된다. 반가부좌했을 때도 왼쪽 발이 오른쪽 발과 무릎을 누르는 현족이다. 이것은 중국적인 음양사상이 개입된 흔적이다. 오른쪽은 움직이는 것 즉 양이고 왼쪽도 멈추는 것 즉 음이다. 선을 닦는다 함은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고요히 앉혀야 하므로, 상징적으로 그렇게 양 위에 음이 있는 형상을 지은 것이다. 즉 동(動)을 정(靜)으로 만들려는 요구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손을 둥그렇게 서로 무지와 집게를 맞대어 둥글게 하여 두 발위에 놓는데, 그러면 자연히 단전 앞에 둥근 손 모양이 놓이게 되어 있다. 이것을 일원상(一圓相)이라 하는데, 즉 무념무상이 그곳에 이르러야 함을 갈망하는 상징이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불안정하면 수선이 잘 안되므로, 앞뒤전후로 몸을 움직인 다음 바르게 앉아 곳곳이 응시해야 한다.
령요척두항골절상주(令腰脊頭項骨節相 ) : 허리.등.머리.목.골절이 직선이 되도록 버티어.
장여부도(狀如浮屠) : 부도와 같이 한다.
우부득용신태과(又不得聳身太過) : 또 몸을 지나치게 곤두세워,
령인기급불안(令人氣急不安) : 호흡을 급하게 해 불안하지 않도록 한다.
요령이여견대(要令耳與肩對) : 귀와 어깨는 똑바로 대하고,
비여제대(鼻與臍對) : 코와 배꼽이 직선이 되게 하며,
설주상악순치상착(舌 上 脣齒相着) : 혀는 위턱에 대고 입을 다물도록 한다.
목수미개면혼수(目須微開免昏睡) : 눈은 가늘게 떠서 졸음이 안 오도록 한다.
약득선정기력최승(若得禪定其力最勝) : 선정을 얻으면 그 힘은 강해지리라.
躬(身, 3)몸 궁, 몸소 궁
腰(肉, , 9)허리 요, 찰 요
脊(肉, , 6)등골뼈 척, 조리 척
屠(尸, 9)잡을 도, 무찌를 도, 죽일 도
聳(耳, 11)솟을 용, 솟게할 용, 권할 송, 공경할 송 (齒, 9)잇몸 악
향법운원통선사(向法雲圓通禪師) : 법운원통도
역가인폐목좌선(亦訶人閉目坐禪) : 사람들의 눈 감음을 꾸짖기를,
이위흑산귀굴(以謂黑山鬼窟) : '흑산의 귀신 굴이구나!' 했다.
개유심지달자지언(蓋有深旨達者知焉) : 대체로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니, 달자는 이해하리로다.
신상기정기식기조연후(身相旣定氣息旣調然後) : 몸가짐을 이미 정하고 호흡이 벌써 조화된 후에,
관방제복일체선악도무사량(寬放臍腹一切善惡都無思量) : 하복부를 느슨하게 하고 모든 선악을 생각지 말라.
염기즉각각지즉실(念起卽覺覺之卽失) : 잡념이 일어나면 곧 바로 잡는다.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곧 잃고 만다.
구구망연(九九忘緣) : 오래오래 인연을 잊으면,
자성일편(自成一片) : 스스로 일편을 이루리니,
차좌선지요술야(此坐禪之要術也) : 이것이 좌선의 핵심이다.
절위좌선내안락법문(竊謂坐禪乃安樂法門) : 곰곰이 생각하면, 좌선이란 안락하는 법문이지만,
이인다치질(而人多致疾) : 사람들이 병을 많이 얻으니,
개불선용심고야(蓋不善用心故也) : 대개 마음을 잘못 쓰는 까닭이다.
窟(穴, 8)움 굴, 굴 굴
蓋(艸, , 10)덮을 개, 뚜껑 개, 숭상할 개
焉(火, 7)어찌 언, 이에 언, 이 언, 어조사 언
都(邑, , 9)도읍 도, 있을 도, 거느릴 도, 모두 도
여기선 호흡.몸가짐.마음쓰기 세가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몸가짐이란 자세 취하는 것을 말한다. 단정하게 앉아 호흡과 마음이 안정되도록 힘쓴다. 자세를 단정히 한 다음에는 호흡을 고르게 쉬어야 한다. 호흡조절은 선 수행에서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마음쓰기는 몸가짐과 호흡조절 위에서 행위된다. 마음쓰기가 선 수행의 요체이다. 결국 참선이란 마음쓰기를 익히는 것이요 깨친다는 내용도 사실 그것이다.
우리는 흔히 추상화된 관념을 가지고 분석하며 맞느니 틀리느니 하며 왈가왈부한다. 단순한 지적 놀이로 그치기 쉬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니 산만하고 헷갈리기 일쑤다. 검증할 수 없으니 다른 의견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세상을 어지럽힌다. 다양한 이견들이 공존함은 그런 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 문제를 도외시하고 저너머로 체념하는 도피처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그럴듯하게 변명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간지(奸智)이다. 구름이 오가듯 인생을 무의미한 존재로만 보려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지극히 인생의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서는 그런 이중 문제를 극복한다. 우선 문자 따위를 배격하니 추상화된 관념을 가지고 놀이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문제에 응해서 적절한 행위를 취하곤 한다. 즉 현실에 즉한 이상을 구현하는 발랄한 행위이다. 그것을 위한 입문적 단련이 몸.호흡.마음의 조화이다. 몸과 호흡이 잘 조화돼야 마음의 현실적 깨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조화되면 신진대사가 안되어 선병(禪病)을 얻어 중도에 포기하기 쉽다.
[6] 좌선하는 공덕
직자연사대경안(則自然四大輕安) : 자연히 4대가 편안하여,
정신쾌리정념분명(精神快利正念分明) : 정신이 상쾌하고, 정념이 분명하며,
법미자신(法味資神) : 법미신이 자조해서,
적연청락(寂然淸樂) : 적연히 청락하게 된다.
약이유발명자(若已有發明者) : 만약 이미 발명했다고 하면,
가위여룡득수(可謂如龍得水) :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사호고산(似虎 山) : 호랑이가 산에 든 거와 같다.
약미유발명자(若未有發明者) : 만약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고 하면,
역내인풍취화(亦乃因風吹火) : 바람에 의해 불을 때고,
용력불다(用力不多) : 힘 쓰기를 많이하지 말라.
단변긍심(但辯肯心) :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통할 일이요.
필불상잠(必不相 ) : 반드시 우물쭈물하지 말지니라.
輕(車, 7)가벼울 경, 가벼이할 경
爽(爻, 7)시원할 상, 밝을 상, 굳셀 상
資(貝, 6)재물 자, 노비 자, 바탕 자, 자리 자, 도울 자
(非, 7)기댈 고
(貝, 10)속일 잠
역순만단(逆順萬端) : 역과 순이 만단하다.
단능정념현전(但能正念現前) : 단 정념이 잘 현전하면,
일체불능유애(一切不能留 ) : 모든 것에 걸릴 것이 없다.
여능엄경천태지관규봉수증의(如楞嚴經天台止觀圭峰修證儀) : 능엄경 과
천태의 지관 그리고 규봉종밀의 수증의 에서 가르친,
구명마사(具明魔事) : 마사를 밝히고,
예비불우자(豫備不虞者) : 미리 생각해서 대비하는 이는,
불가부지야(不可不知也) : 가히 알지 못함이 없으리라.
預(頁, 4)미리 예, 즐길 예, 놀 예, 참여할 예
虞( , 7)생각할 우, 근심 우, 걱정 우
서서동신(徐徐動身) : 서서히 몸을 움직여,
안상이기(安詳而起) : 평온하게 일어나고,
부득졸폭(部得卒暴) :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
출정지후(出定之後) : 좌선에서 일어난 뒤에는,
일체사중(一切事中) : 모든 일에 있어서,
상작방편(常作方便) : 늘 주의해서,
호지정력(護持定力) : 선정력을 호지하기를
여호영아(如護 兒) : 어린 아이 다루듯이 하라.
즉정력이성의(卽定力易成矣) : 그러면 정력(定力)으로 쉽게 이룰 것이다.
暴(日, 11)사리울 포, 급할 포, 나타날·나타낼 폭
(女, 14)간난아이 영, 두를 영, 닿을 영
矣(矢, 2)어조사 의
늘 좌선할 땐 숙지해야 할 자세를 밝힌 것이며, 좌선수행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를 꼬고 척추를 반듯이 세우고 호흡을 조용히 쉬며 마음을 가다듬는 절차가 좌선의 기본 자세이다. 그런 다음 화두를 드는데 보통 1시간씩 꼼짝도 않고 좌선하고 약간 쉬는(經行) 것은 말로는 쉬워도 실천으론 어렵다. 쉽지 않으니까 이처럼 강조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심신을 다루어야 하며 그럴 때 정력(定力)이 생겨 지혜가 발하고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동의 신중함은 어디에나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선하는 법을 무시하려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최위급무(最爲急務) : 가장 급하다.
약불안선정려(若不安禪靜慮) : 만약 편안히 좌선하지 못하면,
도저리총수망연(到這裏總須茫然) : 이에 이르러 다 망연하고 말리라.
소이탐주의정랑(所以探珠宜靜浪) : 그러므로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을 고요히 하라.
동수취응난(動水取應難) : 물결이 흔들리면 (구슬을) 찾기 어렵다.
정수징청(定水澄淸) : 물결이 자고 맑아지면,
심주자현(心珠自現) : 마음의 구슬이 나타난다.
고원각경운(故圓覺經云) : 그러므로 원각경 에서 이르되,
무애청정혜(無 淸淨慧) : '무애한 청정지혜는
개의선정생(皆依禪定生) : 다 선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였다.
법화경운(法華經云) : 법화경 에서도 이르되,
재어한처(在於閑處) : '고요한 곳에서
수섭기심(修攝其心) : 그 마음을 닦아
안주부동(安住不動) : 안주 부동함을
여수미산(如須彌山) : 수미산 처럼 하라' 하였다.
浪(水, , 7)물결 랑, 방랑할 랑
澄(水, , 12) 맑을 징, 맑게할 징
필가정연(必假靜緣) : 반드시 바깥 인연에서 고요해야 하며,
좌탈입망(坐脫立亡) : 앉으나 서나
수빙정력(須憑定力) : 정력을 얻어야 한다.
일생취변(一生取辨) : 한 평생 호법하되,
상공차타(尙恐蹉 ) : 조금이라도 그르칠까 두렵도다!
황내천연(況乃遷延) : 하물며 게으르면,
장하적업(將何敵業) : 무엇으로 참선한다고 할까?
고고인운(故古人云) : 그래서 옛날 선지식께서 이르되,
약무정력(若無定力) : 만약 정력을 얻지 못하면,
감복사문(甘伏死門) : '죽음의 두려움을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으니,
엄목공귀(掩目空歸) : 눈을 감으면 헛되이 돌아가
완연유랑(宛然流浪) : 윤회계를 맴돌리라' 하였다.
행제선우(幸諸禪友) : 다행히 모든 선우들이
삼복사문(三復斯文) : 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어서 실천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 : 너나 할 것 없이
동성정각(同成正覺) : 모두 정각을 이루리라.
憑(心, 12)기댈 빙, 의지할 빙, 클 빙, 건널 빙
遷( , , 11)옮길 천, 천도 천
延( , 4)끌 연, 끌릴 연, 늘일 연, 길 연
敵( , 11)원수 적, 적 적, 필적할 적
掩(手, , 8)가릴 엄, 숨길 엄, 비호할 엄
宛( , 5)완연 완, 작을 완, 굽을 완
(강 의)
이제 좌선의 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할 차례다. 끝 부분에서 '이 글을 부지런히 익히면 너나 할것 없이 다 깨치게 되리라'는 구절은 결국 성인의 말씀대로 하면 인생의 아름다운 가치가 실현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동양적 정서를 지닌 동양적 종교 뿐 아니라 서양의 것도 포함된다. 즉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는 잇단 인류의 스승이요 만인의 사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깨쳐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 깨친다는 문제는 중생이 있는 한 끝없이 간구되는 주제이다. 그런 종교적 과제를 푸는 첫 작업에서도 이 좌선의 는 아주 긴요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