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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의 미학_02

醉月 2010. 12. 30. 08:56

사투리의 미학 <11> 부산의 관용적 표현

 
우리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사촌의 잘 됨을 시기하는 우리네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속담은 소위 '배 아프다'는 행위가 고통스럽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시샘의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경우이다. 그러나 '배 아프다'는 행위가 단지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사용했다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당시 화장실의 인분이 농작물의 중요한 거름으로 쓰이던 시절이라 자기네 변소만을 이용하는 구두쇠 영감이 생길 정도로 농사의 자산이었다. 그렇다면 '배 아프다'고 할 때 통시(화장실)에 가서 거름을 만드는 행위는 사촌의 땅에 거름을 주려고 하는 순수한 도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배 아픈 행위는 돈은 못 도와 주어도 거름이라도 부조하겠다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일 수도 있다.

이처럼 속담과 같은 관용적 표현은 특정한 지역이나 환경의 이해 없이는 그 뜻이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그래서 관용적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 말이 만들어진 상황을 고려해 뜻을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관용적 표현은 그 지역의 문화적이고도 역사적 속성을 반영한 그들만의 인식의 방법이다. 또한 관용적 표현은 특정한 상황을 구체적이고 집약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경제적이고도 효율적인 언어 사용의 예이다.

부산말에 "얌생이 몰다"는 말이 있다. '얌생이'는 염소를 뜻하는데, 염소를 몰고 다니는 행위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표현은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우리네 상황을 반영하는 말로 미군물자의 하역과 관련된 지역에서 쓰던 재미있는 암시적 표현이다. 한국 전쟁 당시 피란민들은 어려운 식량사정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았는데, 배고픈 사람들이 미군 물자가 하역되어 보관 중인 곳을 드나들며 물건을 훔치기까지 하면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미군들은 하역장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민간인의 접근을 막았지만, 놓아둔 얌생이가 풀을 뜯다가 철조망 너머로 들어가면 그 염소를 찾으러 가는 것은 허락했다. 유일한 생계 수단인 얌생이를 가지러 가겠다는 데야 미군은 막을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 찾으러 들어간 사람이 미군의 하역 물자를 철조망 밖으로 밀어 내고 자신은 얌생이를 찾아 정문으로 나와 다시 그 물건을 가지고 갔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얌생이 몰다'는 '물건을 훔치다'는 뜻으로 고정된 것이다.

또 '구포밑이 꼬롬하다'는 말은 부산의 지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 지역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말이다. 다 알다시피 '구포의 밑'은 '사상'인데 사상이 불순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사상범으로 시국이 어수선할 때 생긴 표현이다.

관용적 표현은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 벼농사나 뱃일에 맞도록 변화되어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표현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부산 지역에서는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와 같이 쓸모없는 것도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당갈딩기 야시 고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당갈딩기'는 '현미를 찧은 등겨'로 억센 등겨를 말하는 데, 이 등겨도 야시(여우)를 유혹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이다. 이는 부산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곰의 재주'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등겨'를 이용하여 동일한 의미를 좀더 구체적이고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표현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핑비 불 끄는 소리하다'는 표현은 '풍덩이가 불끄는 소리'로 풍뎅이가 웽웽거리며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하지만 소리만 시끄럽고 실속은 없는 행위를 할 경우에 사용한다. 이와 같이 시끄럽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표현으로는 '통 내부리는 소리한다, 새따묵는 소리한다, 뒤퉁스러븐 소리한다' 등 다양하다. 우선 빈 통을 내버리면 소리만 요란하게 퉁탕거리기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다. 새따묵는 소리는 혀 짧은 소리로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며 뒤퉁스러운 경우도 상황에 맞지 않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부산 지방의 관용적 표현은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좀더 은근하며 비유적이고 재미있는 관용적 표현이 많다.

예를 들면 '쌔빠질 놈'이라는 표현이나 '쌔가 만발이 빠질 놈'이라는 뜻은 '혀가 빠질 사람'이란 뜻으로 혀가 축늘어져 죽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해서 드러낸 말인데, 직접적으로 죽을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좀더 완곡한 비유 표현으로 보인다.

또 '헌 주우 가래이 불알같다'는 표현은 바지가 낡아 떨어져 중요한 부분이 자주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경우로 무엇인가 자주 들락 날락할 경우에 쓰이는 표현이다. 다음으로 '안다이 똥파래이'라는 표현은 어디든 날아드는 똥파리 같이 무엇이든지 아는 것처럼 '아무 일이나 끼어드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문 닫고 나왔나 문 열어 두고 나왔나'는 집안의 막내인가 장남인가를 묻는 표현이며, '미그지잡다'는 표현은 '애쓴 결과 진흙탕물에 미끄러졌다'는 뜻이다. 또 '보쌀 소쿠리 쥐눈이다'는 보리쌀 소쿠리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으며 주위를 살피고 있는 쥐눈처럼 잠들 시간이 지난 때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는 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처럼 재미있게 그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수준 높은 언어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은근하면서도 구체적 상황을 제시하므로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관용적 표현은 할아버지에게서 손자에게 전수되어 세대를 이어서 이해된다.

관용적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특정 지역의 언어 환경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므로 전통의 이해와 보존의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요즘같이 핵가족 시대는 세대간의 단절과 함께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서 전수되는 중요한 표현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보다는 상황 중심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 좀더 재미있고 넉넉한 사회를 만드는 기본이다.

#재미로 풀어보는 관용표현

1. 다음 중 "굉장히 좋아하다."는 뜻의 관용어는?
①해 볼시래 하다 ②패악 지긴다 ③칙사리 올라온다 ④볼로 히비다

2. 다음 중 "어렵게 여겨야할 사이"라는 뜻의 관용어는?
①씬밥디이 ②손 아픈 새 ③오새다 ④헌 주우 가래이 불알

3. 다음 중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다"는 뜻의 관용어는?
①팬이 했다 ②땅띠기 한다 ③물새하다 ④난리 굿이다

4. 다음 중 "미구(매구) 오래비 본 듯 한다."는 뜻은?
①반가워 한다 ②낯설어 한다 ③먹고 싶어 한다. ④부끄럽게 여긴다.

5. 다음 중 "보기보다 힘이 없다."는 뜻의 관용어는?
①재주가 메주다 ②허북산이다 ③어간에 방장같다 ④보쌀 소쿠리 쥐눈이다

 

사투리의 미학 <12> 무뚝뚝의 미학

 
 
   관련기사
   경상도의 입버릇말
옛날부터 경상도 사람은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 무뚝뚝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 남자는 여자를 안고 가는 것처럼 다정하게 걸어가고, 경상도 남자는 여자를 뒤에 두고 멀찍이 앞서 가기 때문에 아내를 데리고 길을 가는 모양을 보면 누가 서울 사람이고 경상도 사람인지 금방 구분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경상도 사람이 살갑게 여자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해서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자신이 너무 멀리 가서 여자가 쫓아오지 못하면 뒤를 보고 "빨리 안 오고 뭐하노" 하면서 여자를 기다린다.

이러한 말과 행동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잠시 뒤를 보고 기다리는 행동 속에 여자에 대한 배려가 나타나고, 퉁명스럽게 보이는 말에 나름대로 마음 속에 있는 애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안 오고 뭐하노"는 상대를 질책하거나 나무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서 빨리 오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마음의 정을 강하게 표현하는 어법이다.

이와 같이 경상도 말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정어나 비속어, 과장된 표현을 자주 쓰기 때문에 퉁명스럽거나 무뚝뚝하게 보이는데, 같은 부정적 표현이더라도 그 의미는 부정적인 뜻으로만 해석되지 않으며 그 속에 다른 마음 속의 의미를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먼저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표현에도 그 속에는 반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똑똑해 빠졌다'는 '제 혼자 잘난 척 한다'는 표현이고 '어북 잘하는 갑다'는 '잘함은 인정하되 못마땅하다'는 표현이며, '사장이라카능기'의 '카능기'는 상대가 원하는 수준에서 마음에 안 들 때 쓰는 표현이다. 여기서 '빠졌다'나 '어북', '카능기'는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쓰는 일종의 부정적인 반어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어의 뜻으로 쓰이는 표현은 '언제 오데 에나다 아나 엔가이 업시 우짤라고' 등 다양하다. 또한 경상도 말의 과장적인 표현도 이러한 부정적 반어의 뜻을 가진다. '짜다라 가더라, 쌔애 삐리다, 억시기 좋겠네, 말캉 헛일이다, 천지 빼까리다' 등과 같은 표현에 나타난 '짜다라, 쌔애삐리다, 억시기, 말캉, 천지빼까리' 등은 실제의 상황보다는 과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것은 상대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 별 것 아님을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다음으로 경상도 말에서는 부정어나 비속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는 긍정적인 확인이나 마음의 정을 표현하는 말이 된다. 먼저 부정어를 사용하더라도 부정의 뜻보다는 마음 속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죽 처이라 안 카겠나?' '그기 안 어렵십니까?'에서는 일반적인 물음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거는 내가 안 묵었나?'나 '그거는 내가 묵었다 아이가'에서처럼 내가 주어일 경우에는 자신 그 사실을 확인하거나 시인하는 서술이 되고, '니가 안 묵었나', '니가 묵었다 아이가'에서처럼 너가 주어일 경우에는 너의 행위의 사실 확인의 물음이 된다. 이러한 물음의 형태는 부정적인 뜻으로 해석되기보다는 되물음의 형태로 사실의 확인이나 시인의 의미로 해석된다.

또 비속어 사용 역시 말 그대로 부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망할 가시나, 인정머리없는 영감쟁이, 저런 여시같은 가시나, 빌어먹을 놈, 빙신겉은거 등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같은 비속어는 기대되는 상황이 어긋나거나 잘못될 때, 마음 속의 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반어법이다.

경상도 사람의 기질을 흔히들 '태산고악'(泰山高嶽) 또는 '해중고도'(海中孤島)라고 한다. 이는 큰 산의 봉우리와 같고 바다 중의 외로운 섬과 같이 남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이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적음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상도 사람은 교활한 언어나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말로써 인심을 얻기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나게 해서 상대방에 믿음을 주려는 의도에서 언어 사용이 조심스럽고 은근하다. 결국 경상도 사람이 싸움을 하는 것 같은 언사, 퉁명하게 보이는 표현들도 필요한 부분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 외의 군더더기의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무뚝뚝하고 비사교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은근하고 암시적인 긍정적인 언어인 것이다.

 

사투리의 미학 <13> 부산 사람의 인사말

 
부산 사람이 경부선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있다. 먼저 대구까지는 옆 사람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무뚝뚝하게 있어서 옆 사람도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옆 사람과 어떻게 인사라도 건네면 상황이 달라진다.

대전까지 가기 전에 남이 묻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며, 아버지나 형제가 무엇을 하는지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그 후 소줏잔이라도 나누면 자신의 중요한 밑천을 다 털어 놓는 성격이다. 그래서 쉽게 남을 믿어 버리는 순박함이 본인을 불리하게 만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가 부산 사람이다.

이러한 부산 사람의 기질은 인사말에 잘 반영되어 있다. 부산 사람들은 낯선 사이에서는 등산길이나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칠 경우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피해버리거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낯을 가리는 행위는 비사교적이거나 정이 없는 행동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사실은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근한 경상도 기질 때문이다.

부산 사람은 친한 사이라도 서로 만나면 '어데 가능교?' '장에 나왓능교?' '왔능교' 등 퉁명스럽게 보이는 의례적 인사가 고작이다. 의례적 인사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속내로는 친근함과 다정함이 깊게 담겨 있다. 단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꺼려하는 은근한 기질이 화려한 수식어의 사용이나 교언영색하는 말로 치장된 표현을 기피하게 만든 것이다.

먼저 부산 사람이 건네는 호칭이 '아지매'나 '아재' 등과 같은 친족명칭이 보통의 지칭말로 표현되는 것도 이와 같은 다정함의 표현이다. '아지매'나 '아재'는 다른 지방 사람들이 들으면 삼촌이나 아주머니의 친족의 명칭이지만 부산 사람이 쓰면 같은 친족끼리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보통 명사이다.

또한 '아침 잡샀능교?, 밥묵었나?' 등의 인사말도 배고픈 시절의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은근히 상대를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인사말이다. 특히 '맛이 있나?'보다 '많이 묵었나, 많이 묵어라'를 많이 쓰는 것도 상태의 표현보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그래서 누가 죽었을 때, 죽었다는 말보다 '편이 했다'(편하게 되었다)는 기원적인 의미의 표현을 써서 상대를 위로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조그만 선물을 받았을 경우에도 '고맙데이'라는 말보다 '뭐로 이래 쌌노?''뭐로 이런 걸' 등으로 상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부산사람들의 특성을 반영한 인사말이다. 이러한 우회적인 표현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고향 나이 직장을 캐물어서 자기와의 동질성을 찾으려는 순박함에서 시작되어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기보다 자기 주위의 잘 아는 사람을 내세워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려는 기질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 예로 '고향이 어데요'라고 물어서 상대방이 '아무개 군이다'고 하면 '아 아무개 군에는 내가 잘 아는 사돈의 팔촌이 군수로 있소'라고 말함으로써 군수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상대방에게 보다 우월하게 자기를 과시하려는 우회적인 방법도 자주 쓴다.

그러나 부산 사람들은 상대의 나쁜 점을 덮어 두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려는 인사말도 많다. 특정한 물건이 이상하게 생겨 사람들이 거리끼면 '생긴 거는 그래도 맛은 있데이'하면서 장점을 부각하며, 학력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공부한 거는 없어도 머리는 영리하데이'하면서 긍정적인 면을 선택하여 이야기 한다. 이사한 집이 작아 방이 비좁아도 '소잡아도 개잡아 댔다'(비좁아도 가까워 됐다)는 식으로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을 부각하여 표현함으로써 긍정적인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인사말은 문화적 표상이며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질의 반영물이다. 부산 사람이 도와준 사람에게 자상하고 싹싹하게 인사하기보다는 '고맙심더'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것도 교언영색을 모르는 담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산 사람의 인사말은 근본적이고 퉁명하거나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면서 우회적으로 은근한 표현을 사용하여 상대를 고려한 배려의 입장에서 사용된 언어인 것이다

 

#'기다'는 '그것이다' 준말-멍게·가새표(×)도 해당

'아니다''기다'할 때 '기다'는 표준어일까 사투리일까?

정답은 표준어이다. 우리는 흔히 '기다'하면 사투리로 인식한다. 그러나 '기다'는 '그것이다'의 준말로 사투리 같은 표준어이다.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로 쓰이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개다. 우선 '우렁쉥이'가 원래 표준어였는데 경상도 사투리인 '멍게'도 워낙 많이 쓰이니까 복수 표준어로 등재된 경우이다. 다음으로 '○'와 '×'표 중에 '×표'도 경상도 발음 '가새표'가 표준어이다. (요즘은 '가위표'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한다.)

우리는 흔히 사투리하면 모두 표준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준어에 없는 낱말은 사투리에서 보완해서 사용해야만 우리말의 어휘가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예를 들어 경상도 말의 '꼬꼽하다'하다는 낱말은 물기가 약간 마르다는 뜻으로 표준어에는 없는 표현이다. 또 '꼼밥'은 달걀 속을 비워내고 그 안에 쌀을 채워 밥을 만든 것인데, 이것도 표준어에는 없는 낱말이다. '더듬수'는 '어설프게 하는 일이나 행동'을 뜻하는 경상도 말이지만 표준어는 이러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사투리는 우리말의 발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말의 창고이다. 위의 낱말들이 빨리 표준어로 등재되어 우리말의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보자.

사투리의 미학 <14> 서울말과 부산말

 
한 부산 아이가 아파트 앞에 놀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할머니가 지나가면서 아이에게 "너 이 아파토 사니?"하고 빠른 어투로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대답 대신 울먹이며 "우리 아빠 똥 안 싼다 말이야"라고 말했다. 부산 아이의 귀에는 할머니의 높낮이가 없는 빠른 서울말이 "너희 아빠 똥 싸니?"로 들린 것이다.

또 서울 사람이 '미스 안'을 소개하면서 "얘는 미스 안이야"라고 했다면, 경상도 사람에게는 안씨 처녀가 '처녀'가 아니라 '아줌마'란 정보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는 경상도 말처럼 '안'에 높이를 주지 않고 서울말처럼 길이로만 말할 경우엔 "얘는 미스 아니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말은 길이로 뜻을 구분하기 때문에 높낮이로 구분하는 경상도 사람에겐 평범한 서울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 부산사람은 흔히들 서울말이 바로 표준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서울말이 부산말보다 고상하며 논리적이며 체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표준어는 공식적이면서 가공적인 언어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말로 서울말 자체를 표준어라고 하지 않는다.

표준어는 서로 다른 지역의 말을 하나의 표준을 정해 교육하고, 공식적인 표준으로 정하기 위해서 여러 지방말의 공통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를 가려 뽑아 정한 것이다. 서울말은 부산말, 광주말 등과 같이 여러 지역 사투리의 하나이다. 부산말이 'ㅔ/ㅐ, ㅡ/ㅓ'가 구분 없이 통합 되듯이 서울말도 'ㅡ/ㅓ'를 구분 안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른'을 [으른]으로 발음한다든지, '없다'를 [읍다]로 발음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경상도 사람이 'ㅡ'를 'ㅓ'로 발음하는 데 반해 서울 사람은 반대로 'ㅓ'를 'ㅡ'로 발음하는 차이일 뿐 두 지역 다 표준 발음은 아니다. 또한 서울말에도 '-하고'를 '-허구'로 발음하는 등 엄연히 사투리가 존재한다.

부산 사람들은 서울말이 표준어에 가까워서 좀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들리기 때문에 부산말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막연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산말보다 서울말이 좀더 논리적이면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의 심리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 언어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어휘적인 면을 살펴 보자. 서울말 '찬밥 더운밥 가리지 말고 많이 먹어라'에서 '찬밥'의 상대말은 '더운밥'이다. 그러나 '차다'는 '뜨겁다', '시원하다'는 '덥다'가 상대적 개념이라서 '찬밥-더운밥'은 논리적으로 어긋난 낱말이다. 서울말 '찬밥-더운밥'보다는 부산말 '차분밥-따신밥'이 '찹다-따시다'의 개념이 사용되어 더 논리적이다. 또 음운론적으로도 '춥다, 덥다'를 '추운, 더운'으로 불규칙적으로 활용하는 서울말보다 '추분, 더분'으로 'ㅂ'이 규칙적으로 활용하는 경상도말이 언어 사용에 더 편리할 수 있다.

또한 서울말에는 '싸움을 말리다'나 '옷을 말리다'에서 보듯 '말리다'는 개념이 '싸움'에서 쓰고 '옷'에서도 쓴다. 그러나 부산말에는 '싸움'은 말기고, '옷'은 말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부산말은 '말기다'는 무엇을 하지 말게 하는 것이고, '말리다'는 물기를 날려 없애는 것으로 분화되어 있어서 서울말보다 합리적이다. 낱말이 분화되어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에 더 진화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문법적으로 서울 사람은 부정형을 만들 경우에 '안 춥다'나 '춥지 않다'식으로 '안'을 앞에 놓기도 하고 뒤에 놓기도 한다. 그러나 '밉지 않았다'의 경우엔 '안 밉다'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동사와 형용사의 부정형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경상도 말에서는 '안 그칸다. 안 미얄스럽다, 안 못생겼다, 안 잠온다'는 식으로 부정형 '안'을 앞에만 위치하게 하는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복잡한 문법 규칙을 기억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부정어를 앞에 둠으로써 전달의 명료성을 꾀할 수 있는 지혜로움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막연히 우리 부산말이 서울말에 비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부산말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이 아니라 부산 사람의 생각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부산말과 서울말은 서로 그 지역에 맞도록 변화된, 같으면서도 다른 언어인 것이지 결코 어느 한 쪽 말이 우월하거나 저급한 언어가 아닌 것이다

 

사투리의 미학 <15> 어찌말의 말맛

 
  말이 이렇게 맛깔스러워진다 이말이여~잉
'빨리 오세요'의 사투리 버전

● 싸게 와버리랑께(전라도)
● 빨 와유(충청도)
● 퍼뜩 오이소(경상도)

'빨리 오라'고 하는 말을 서울사람은 '빨리 오세요'하고, 전라도 사람은 '싸게 와버리랑께'로 말한다. 또 충청도 사람은 '빨 와유'라 하고 부산 사람은 '퍼뜩 오이소' 한다. 더러는 이러한 여러 지역말의 비교를 통해 음절수가 가장 적은 것이 충청도 말이기 때문에 충청도 사람이 결코 느리지 않다는 비교 검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들의 틀에 박힌 생각을 의심하게 되는 재미 있는 비교이다.

여기서 '빨리 오라'는 표현의 방언의 차이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요인은 씨끝과 어찌말이다. 즉 '-세요, -랑께, -유, -이소' 등과 같은 각 지역의 특징적인 씨끝이 지역적 차이를 분화하며, 다음으로 '빨리, 싸게, 빨, 퍼뜩'과 같은 어찌말(부사어)이 지역에 따른 특징적인 차이를 강화한다. 보통의 방언 차이라고 하면 씨끝이 다양함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어찌말도 지역적 차이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인이다.

경상도에서도 '유별나다'는 뜻의 어찌말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유별스럽게' 형은 '유달시리(산청 하동 의령), 유달시럽게(의령)' 등으로 쓰이고, '별나다'에서 나온 '별나게' 형은 '별나게(합천 사천), 별시리(통영 거제), 밸나게(밀양), 벨나기(창녕) 등으로 쓰인다. 또한 '뽈쪽스럽다'는 '뿔쪽시리(거창), 뽈축시리(함양 산청), 볼촉시리(함안 김해 고성 창원), 볼촉시럽게(고성), 볼쪽시리(창원), 뺄쭉시리(창원), 벨쭉시리(진양), 벨축시리(하동)'로 변이되어 나타난다. 또 '특별나다' 형은 '떡별나게(남해), 떡별나기(창녕 양산)' 등으로 나타난다.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특별한 낱말은 '거시게'로 주로 남해 지방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처럼 어찌말은 행동이나 동작의 말맛을 풍부하게 하는 일종의 양념말로, 우리말에서는 다른 언어보다 다양하고 섬세하게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어찌말은 상황에 따라 정밀하게 분화된 경우가 많아서 그 쓰임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 말맛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예로 전라도말에서 '싸게'라는 말은 더러 '허벌나게'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하지만 이는 어찌말의 말맛을 모르고 쓴 것이다. 전라도말 '허벌나게'는 '싸게'보다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어찌말이다. 원래 '허벌나다'는 뜻은 '굶주려 음식을 함부로 먹거나 몹시 사정이 딱하거나 가난하여 어떤 것에 욕심을 부리며 천하게 덤비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급하게'의 뜻을 머금고 있는 낱말이다.

부산말에서도 세밀하고도 다양한 말맛을 가진 어찌말이 많이 발달해 있다. 먼저 빠름을 표현하는 어찌말은 '퍼뜩, 얼푼, 어떡, 쌔기' 등 다양하다. '퍼뜩'은 표준어 '빨리'에 해당되는 말로 '걸리는 시간이 짧게, 움직이는 도수가 잦게, 무엇보다 앞서서'의 뜻으로 쓰이는 어찌말이다. '얼푼'은 '가가 누군고 얼푼 생각이 안 난다'에서처럼 표준어 '갑자기'에 해당되는 말로 '생각할 사이 없이'의 뜻으로 쓰이는 어찌말이다. '어떡'은 표준어 '어서'에 해당하는 어찌말로 '어떡 온나, 어떡 주가(어서 다오)'로 쓰인다. '쌔기'는 표준어 '얼른'에 해당되는 어찌말로 '오래 끌지 않고 후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패내끼'는 '재빠르게, 똑바로'의 뜻으로 '패내끼 갓다 온나(재빨리 갔다 오너라)' 이처럼 비슷한 뜻의 어찌말도 상황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

다음으로 많음을 표현하는 어찌말도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주로 쓰는 어찌말로는 '데기(디기), 억시기, 억수로, 태배기, 가뿍, 갑씬, 엉가이, 한거(항거)' 등이 있고 '동띠기, 수태기' 등도 가끔 쓰이는 어찌말이다. '데기'는 '매우, 심하게'의 뜻으로 '데기 캐 네'에서 보듯 정도가 심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억수로, 억시기'는 '아주, 많이'의 뜻으로 '억시기 묵네, 비가 억수로 온다'에서처럼 양이 많음을 나타낸다. 또한 '태배기'는 '억수로'와 같이 많은 양과 수를 표현하는 말이나 '욕을 태배기 얻어 무었다'에서처럼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양으로 드러내는 말에 쓰이는 어찌말이다. '가뿍'은 '가득'의 뜻으로 '가뿍 담아라' 또한 '갑씬'은 '흠뻑'의 뜻으로 '술에 갑씬 취했다'와 같이 쓰인다. 또 '엉가이'는 '아주, 너무나도'의 뜻으로 '엉가이 크다'에서처럼 자신의 기준보다 넘음을 의미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한거(항거)'는 '한가득'의 뜻으로 '물을 한거 부라'처럼 쓴다. '동띠기'는 '동뜨다'라는 순 우리말로 '시간적·공간적 간격이 생기다. 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정말 동띠기 좋네'에서처럼 다른 것과 비교해서 좋음을 드러내는 어찌말이다. 또한 '수태기'는 '아주 많다'는 뜻의 '숱하다'에서 나온 말로 '수태기 많은 사람이 모잇더라'처럼 '많다'는 말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객상시리=엉뚱하게
잊혀지는 어찌말

'객상시리'는 '엉뚱하게'의 뜻이며 '그 사람이 객상시리 그라네'로 쓰이며 '꼽다시' '고스란히, 영락없이'의 뜻으로 '꼽다시 물어 주고 말았다'와 같이 쓰인다. 또 '맥지로(백지로)'는 '괜히, 일부러'의 뜻으로 '맥지로 그란다' 등과 같이 쓰는 어찌말이다.

부산에서 자주 쓰지만 잊혀 가는 어찌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말

용 례

내끼내끼

낱낱이

내끼내끼 줏어라.

매매

꼭꼭, 단단히

매매 씻어라.

발발이

여러번

발발이 기별했다.

벌로

함부로

벌로 씨부리지 마라.

뽀돗이

빠듯하게

뽀돗이 들어 갔다.

엔가이

어지간히

엔가이 해라.

짜다라

그다지, 별로

짜다라 많지는 않더라.

전시내

온통

전시내 사람뿐이다.

제이

천천히

제이 가거래이.

진차이

괜히

진차이 그래 했재.

해까닥

아주 가볍게

해까닥 넘어 갔다.


 사투리의 미학 <16> 욕설의 미학
바람이 차가운 어느 날 부산 처녀와 서울 총각이 공원에서 데이트를 했다. 추위를 느낀 부산 처녀는 사내가 웃옷을 벗어 걸쳐줄 것을 예상하고 서울 총각에게 물어 보았다. "날이 춥지예?"하고 부산 처녀가 물어 보자, 서울 총각은 "별로 안 춥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서울 사내가 눈치 없는 반응을 보이자 부산 처녀가 다시 물었다. "좀 춥지예?" 그러자 서울 총각이 "안 춥습니다. 이까짓 날씨야 봄날이죠"하고 답했다. 이에 자기 뜻대로 안 되자 조금 화난 부산 처녀가 언성을 높였다. "참말로 안 춥능교?" 그러자 서울 총각이 "예 안 춥습니다"하자 이에 화가 난 부산 처녀, "문디. 지랄하네 머스마, 주디가 시퍼렇더만은" 하더란다.

이 유머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과연 서울 총각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만약 서울 총각이 부산 처녀의 마지막 말을 욕으로 들었을 경우엔 둘 사이가 계속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욕으로 듣지 않았다면 서울 총각이 부산 처녀에게 웃옷을 벗어 덮어주었을 것이다. 사실 이 유머 속에 나타난 부산 처녀는 자신의 속마음이 서울 총각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자, "이 남자야, 너의 입술이 파래진 것은 추운 것인데 왜 안 춥다고 하느냐"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부산 처녀는 서울 총각과의 막힌 언로를 답답하게 유지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이면서 직설적인 표현을 통해 체면으로 가려진 서울 총각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려주고 있다. 부산 처녀의 마지막 말은 의사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상스러운 표현이 아니라 소통을 직접적으로 요청하는 표현이다. 이 점에서 욕은 우리 시대의 비합리적인 병폐, 막힌 사회에 대한 의사소통을 뚫어주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기 때문에 상소리가 아니라 강조용법이나 효과적인 전달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결국 경상도 사람이 쓰는 상스런 욕은 저주나 비난의 의미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위의 나타난 '문디, 지랄, 머스마'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 보자.

먼저 '머스마 가시나'의 경우이다. 서울신문의 통계(2005.1.5)에 따르면 경상도 말 '가시나'는 20대의 여성이 가장 듣기 싫은 말 중 9위에 속할 정도로 요즘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비속적 언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쓰는 '머스마' '가시나'는 비속적 의미가 아니고 친근성을 기반으로 한 정감의 말이다.

원래 '머스마'는 '머슴'에서 유래된 남자를 평칭으로 하는 말이고, '가시나'는 '가시버시'의 '가시'(아내)에서 유래된 말로 '여자'를 평칭으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날이 갈수록 'X할 가시나' 'X같은 머스마' 등과 같이 자주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다 보니 호칭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문디야, 문디 손아, 문디같은 기'에서 보이는 '문디'는 원래 '문둥이'의 뜻으로 문둥병이 걸린 것처럼 문드러지고 못생겨서 보기 흉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 말을 외모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기준점에서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람이나 그 잘못된 행태에 대해 주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문디'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쓰지 않고 친한 사람에게만 습관적으로 쓴다.

또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을 '보리 문디'라고 하는 것은 '문디'의 쓰임이 빈번하고 다양해서 쉽게 특징적으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경상도 사람들이 민망한 상태에 처해 있거나 기분 좋을 때도 "문디, 얄굿데이"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문디'가 악의적인 욕으로만 쓰는 말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랄한다'는 원래 간질병의 발작으로 갑자기 몸을 떨고, 입에 거품을 물고 법석을 떠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말은 '지랄 염병'으로 쓰기도 하는데, '염병'은 전염병인 '장티푸스'의 딴말로, 고열이 나고 몸이 떨리는 병이다. 염병이 지랄병과 겹치면 아주 심한 증세가 된다. 또 '지랄 용천한다'에 쓰이는 '용천'은 '문둥병이나 간질병 등의 몹쓸병'을 의미하는데, '지랄'을 더 심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경상도 말 '염병, 지랄, 용천' 등은 실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사용한 말로,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말하는 속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어 전달적인 측면에서 보면, 추상적인 상황을 나열하여 표현하는 것보다 잘 알고 있는 상황으로 비유해서 표현할 경우가 좀 더 확실한 전달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어수선한 상황에서 분별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분별없이 행동한다'든지 '야단을 떨고 있다'는 등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보다 '간질병'으로 비유해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인식하게 하는 것이 전달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더러는 욕을 소통의 포기 혹은 파괴로 인해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며 폭력적인 자위권의 발동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욕은 민중의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바람직하지도 않고 쓰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경상도 사람들이 쓰는 욕은 상대에 대한 관계 유지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소통의 방법이고 효율적인 전달의 수단일 수도 있다. 경상도 사람의 욕이 카타르시스(속 후련함)에 기여하는 한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사투리의 미학 <17> 부산말의 보물상자

 
  내 소설을 표준말로 바꾸니 재미없제? 그라믄 그기 번역문이지, 어디 소설이가!
요산 김정한은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민족의 과제를 양심적으로 그려낸 작가이다. 전통에 대한 관심, 농촌생활과 밀착한 지역·토박이말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이런 작가정신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런데 학교나 방송 등을 통해 표준말이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면, 작가의 뜻과 어긋나게 원래 표현이 훼손되거나 지역·토박이말을 이해하는 독자가 점점 줄어든다.

예를 들어 '고동바'로 허리춤을 졸라맨 김영감은 '탱고리' 수염을 떨며 '제비손'을 넣으려고 하였으나 박영감에게 '물매'만 맞았다고 해보자. 이 말들은 모두 '사하촌'에 나온다. '고동바'는 '고동'과 '바'를 합친 말이다.

여기서 바는 줄이나 끈을 뜻한다. 고동은 논을 맬 때 대나무를 통으로 비스듬히 잘라 손가락에 끼우는 것이다. 그래서 대고동이라고도 한다. 논을 매지 않을 경우 여러 토막의 대고동을 보관하기 위해 한 줄에 끼워 허리에 차기도 했다. 현재 50~60대 이상의 연령층은 이 말을 사용했고 그 뜻도 알고 있을 것이다.

'탱고리'는 올챙이의 경남 방언이다. 사전에 올라있지 않은 '제비손'은 그 뜻을 명확하게 하기 어렵지만 제비처럼 날렵한 손놀림을 뜻한다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다. '물매'는 몰매나 뭇매와 다르다. 물매는 한 사람이 많이 때리는 매이고, 뭇매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덤비며 때리는 매로 몰매라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풀이하면, 고동바를 허리에 찬 김영감이 올챙이 모양의 보잘것없는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박영감을 넘어뜨리려 하다가 오히려 크게 두들겨 맞았다는 뜻이다. 정확할 뿐 아니라, 농민의 생활에 밀착한 작가만이 능히 쓸 수 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요산이 사물의 명칭을 얼마나 정확하게 사용하였는가는 쉽게 확인된다. '항진기'에서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비는 '작달비'라 했다. 또 '미친 날씨는 이따금 개 오줌 싸듯 산돌림을 질끔거렸다'고 했는데, '산돌림'은 산기슭을 따라 여기저기 옮기면서 한 줄기씩 오는 소나기를 뜻한다. '사하촌'의 경우, 일제시대 발표작에서 '궁둥춤'이라 한 것을 해방 후 요산은 '엉덩춤'으로 교체하였다. 앉으면 바닥에 닿는 부분인 궁둥이와 골반에 이어져 있는 볼기의 윗부분인 엉덩이를 명확하게 분별한 것이다.

그런데 '모래톱 이야기'를 읽다 보면, '칠팔월 긴 장마가 아니라' 하루 이틀, 그러나 사흘째부터 억수로 변하더니 광풍까지 겹쳐 폭풍우로 바뀌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1966년 발표 당시의 표기를 보면 '진장마'로 되어 있다. '진장마'는 '긴' 장마라기보다 맑은 날 없이 강우량이 많은 장마를 뜻하며, 이는 강우량이 적거나 맑은 날이 계속되는 마른장마 혹은 건장마에 상대되는 말이다. 따라서 훗날 새로운 판본에서 '긴 장마'로 고친 것은 편집자가 원본의 의미를 오해한 탓이다.

요산은 등장인물의 입말을 최대한 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서술자의 지문에도 지역말이 스며있다. 이는 요산 소설의 문체적 특성인데, 새롭게 조판된 작품집에서 그 원형이 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모래톱 이야기'의 경우, 원래 '아압니더'인 것을 '아입니더'로 고치거나 '아아 아베'를 '아이 아배'로 바꾸었다. 또 '수라도'의 경우, '키운 아아가 아잉기요!'를 '키운 아이가 아잉기요!'라고 고쳤다. 이는 '아아'보다 '아이'라 함으로써 그 뜻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겠지만, 부산·경상도말의 장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이림'을 '이름'으로, '할아부지'를 '할아버지'로, '꼽다시'를 '곱다시'로 고친다면, 살아가는 장소와 관련된 작중인물의 성격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지역말의 음감을 최대로 살려내고자 애쓴 작가의 보람도 사라질 것이다.

순 우리말에 대한 요산의 깊은 애정은 생리적이면서 의식적인 것이다. 오늘날 '모꼬지'라 하면 놀이나 잔치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인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수라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말이다. 주로 시골여자가 나들이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인 '처네',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뜻하는 '벼룻길', 거의 중송아지 만 한 큰 송아지를 뜻하는 '어스럭송아지', 오금까지 찰 만큼 자란 풀이나 나무를 지칭하는 '오금드리 잡목', 날이 샐 무렵에 밥을 짓는 일을 뜻하는 '새벽동자' 등은 점차 그 쓰임새가 줄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지명으로, '냉거랑'의 '거랑'은 경상말로 시내를 뜻한다. '대밭각단'에서 '각단'은 뜸, 즉 동네, 마을의 뜻이다.

'모래톱 이야기'에서 담임교사가 생업에 대해 물었을 때, 건우 어머니는 '물 빠질 땐 개발이싸 늘 안 나가는기요'라고 답한다. 여기서 '개발'은 작은 종류의 조개의 통칭하기도 하고, 썰물 뒤 갯가에서 조개 미역 파래 게 낙지 등을 채취하는 행위를 일컫는 지역말이다. '인간단지'에 보면 문둥이들이 '남은 손가락 사이에 술총을 끼워' 밥을 먹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술총'은 숟가락총, 곧 숟가락 자루를 뜻한다.

이외에도, 언제나 찬물이 솟아 괴거나 들어오는 논배미를 뜻하는 '찬물내기'라든지, 못자리에 거름으로 넣을 풀을 얹는 지게로 '모풀바지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을 뜻하는 '가납사니', 심성이 굳고 억척스러운 사람을 뜻하는 '억척보두', 배꼽 언저리를 뜻하는 '배꼽노리', 천수답을 뜻하는 '별똥지기' 등은 생활 속에서 곱씹어 보아도 좋을 토박이말이다.

지역·토박이말 때문에 작품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데 손해가 있을 수 있다. 또 생활이 바뀌면 말도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의 언어는 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언어는 생각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앞의 이익만 좇을 일은 아니다. 쓰임새가 줄어 그 뜻을 쉽게 알 수 없는 경우라도, 우리의 몫은 지역·토박이말이 어렵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새기고 부려쓰는 일이다.

#원본 사하촌-고동바로 허리춤을 졸라맨 김영감은 탱고리 수염을 떨며 제비손을 넣으려고 하였으나 박영감에게 물매만 맞았다.
#표준어 사하촌-고동바를 허리에 찬 김영감이 올챙이 모양의 보잘것없는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박영감을 넘어뜨리려 하다가 오히려 크게 두들겨 맞았다.

 

사투리의 미학 <18> 부산 사람의 부름말

 
타 지역 사람이 부산에 처음 오면 용광로 같은 융화력에 놀란다고 한다. 또한 타 지역의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도 이 곳 부산이라고들 한다. 부산의 융화력에 대해서는 여러 원인이 있다. 지리적으로 부산은 이질적인 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이다. 여러 이질 문화를 많이 접할 수 있어 이질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강한 곳이다. 그래서 부산은 일본인 거주 지역인 왜관과 미군 부대 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화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을 통해 많은 이주민이 부산으로 오면서 서로간의 협력과 조화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타 지역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나타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이러한 부산의 문화적 속성은 부름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산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보소, 아재요, 아지매요"식으로 다른 지역보다 친족어를 부름말로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아재나 아지매'가 친족어라고 믿는 타 지역 사람들은 부산사람이 말다툼을 할 경우 '아재, 아지매'가 '조카'하고 싸운다고 생각할 정도로 부산에서는 낯선 사람에게도 '아재와 아지매'가 많이 사용된다. 또 부산말에서는 '총각요, 처이야' 등 지칭하려는 대상에 '-야, 요' 등의 토씨를 붙여 친근성을 좀 더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보통 친족어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오빠' 등과 같이 울림소리로 끝나서 그 자체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부산말에서는 울림소리로 끝나는 이러한 친족어에 울림소리인 부름토씨를 한 번 더 붙임으로써 더욱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흔히 다른 지역에서도 친근감이 있는 별명들은 '짱구야'처럼 이름 부름말과 같이 친근감을 나타내 주는 토씨 '-아/-야'가 붙어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부정적 느낌이 드는 별명들은 '짱구'처럼 부름 토씨 없이 단독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부산말은 친근성이 좀 더 보장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친족어에 부름자리 토씨가 붙으면 음절수가 늘어나, 말에 높낮이가 생겨 더욱 부드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그래서 '어무이'보다 '어무이예'가 더 친밀한 느낌을 주는 것처럼, 부산말에서 친족어에 부름자리 토씨가 붙게 되면 부름 토씨가 없는 경우보다 더 부드럽고 친밀한 느낌을 주게 된다.

부산말의 부름 토씨 '-야, -요, -예'는 말할이가 가진 높임의 의도에 따라 달리 선택되어 나타난다. '누우야'(누나야)처럼 '-야'는 말할이가 높임의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 때 붙이게 되는 것이고, '할무이예, 어무이요' 등에서와 같이 '-요, -예'는 말할이가 높임의 의도를 가졌을 때 사용한다. 그런데, '-요'와 '-예'는 어감에 차이가 있다. 즉, '-요'는 '-예'에 비해 말소리의 높이가 낮을 뿐만 아니라 짧게 끊어져서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예'는 '-요'보다 말소리가 높고 말끝에 여운이 생겨 부드럽고 연약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요'나 '-예'가 같은 친족어에 쓰일 수 있다 하더라도 '-요'와 '-예'에서 나타나는 어감이 다르기 때문에 '할배요, 할매요'에서처럼 '-요'는 친족어의 짧은 형태에 잘 붙고, '할아부지예, 할무이예'처럼 '-예'는 원래 형태에 잘 붙어 나타난다.

특히 '예'는 '요'보다 상대를 더 존대하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쓰이게 되면 심한 지방색으로 인해 지적 수준을 의심받게 되고, '요'는 '예'보다 격식을 갖춘 듯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허물없는 사이에서 쓰이게 되면 친밀감에 금이 갔음을 예고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아가씨예, 행수예'처럼 말하는 사람이 갑자기 '아가씨요, 행수요'라고 말한다면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거나 둘 사이의 관계를 격식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이처럼 부산말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족부름말으로 부르는 것과 친족어에 부름 토씨가 붙는 것은 낯선 사람에게 친밀감을 좀더 강하게 하고 익숙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정감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부름말은 낯선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에 친밀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사람의 친밀감 있는 부름말은 부산사람들의 넓은 포용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라 할 수 있다

 

사투리의 미학 <19> 삶의 노래-詩

 
말을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볼 때, 가장 감칠 맛 나는 말은 생활 현장에서 주고받는 일상어일 것이다. 생활 기반이나 공간적 테두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개인적인 의사 전달은, 공식적이고 뭔가 꾸민 것 같은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표준어보다는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지역 사투리가 훨씬 더 친근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갈치 아지매들이 거침없이 사용하는 부산 사투리에 '사용 금지' 규정이라도 내려진다고 가정해 보면, 수족관 속에서 펄펄 뛰던 붕장어나 감시이, 뽈라구들도 갑자기 활기를 잃어버린 어시장의 무거운 분위기에 놀라 몸을 사리는 사태가 찾아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생명감 넘치는 몸부림을 잃어버린 활어는 더 이상 부산의 명물 생선 횟감으로서는 자격 상실이다.

'샛바람반지 하단장 너무칩어서 몬보고 / 나리건너 명호(鳴湖)장 선가(船價)가없어 몬보고 / 골목골목 부산장 질몬찾아 몬보고 /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아파 몬보고 / 미지기짠다 밀양장 다리가아파서 몬보고 / 아가리크다 대구장 너무널러서 몬보고 / 이산저산 양산장 산이많아서 몬보고 / 코풀었다 흥해(興海)장 멋거러버서 몬보고 / 똥쌌다 구례장 냄새가나서 몬보기가' - 장(場)타령

 

부산 지방에서 널리 불려진 장(場)타령이다. 지금도 오시게, 구포, 좌천장 등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5일장 의 이름들이 몇몇 보이기는 하지만, 생활 속에서 장타령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재래 시장의 흥청거림은 과거의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장타령이 보여주는 언어 유희를 곁들인 적절히 반복되는 사투리 사용이야말로 개미 쳇바퀴 돌 듯 살아가던 농경 사회의 우리 조상들에게는, 5일장에 걸었던 부푼 꿈과 현실적 좌절감이 뒤섞인 현장의 애틋한 호소였다. 비록 장타령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노래이긴 하지만, 우리 지방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 부산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친근감이 물씬 배어드는 이웃 소리를 만난 것 같아 한번 흥얼거려 보고 싶은 노래임에 틀림없다.

'언어의 건축'으로 비유되는 시를 쓰는 시인들은, 언어를 깎고 다듬고 손질하고 매만져서 그 정수를 캐내는 사람들이므로 어떤 문학 작품의 작가보다도 언어 사용이 섬세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경상도 시인이라고 해서 경상 방언을, 호남 시인이라고 해서 전라 방언을 남발해서는 좋은 시 본연의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시인이 신중하게 시어를 사용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어가 절차탁마의 큰 산을 넘어야 빛을 발한다고는 하나 깊은 가슴 한가운데서 무의식적으로 울려나오는 꾸밈없는 진실의 외침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 /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내리는데 //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 오냐. 오냐. 오냐. /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박목월 '이별가' 전문)

'뭐락카노'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경상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감정들이 뒤섞였을까. 이를 앞말에 대한 단순한 채근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을 흔히 직설적이고 다혈질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경상도 사람들의 이런 속성은 장점으로도 또는 단점으로도 이야기된다. 그런데 이런 속성을 수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말과 행동 때문일 것이다. 무뚝뚝하고 세련되지 못한 행동과 함께 하는 꾸밈없고 투박한 말투들이 타지역 사람들에게 신중하지 못한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치부된 원인을 제공했으리라. 그러나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서 마지막 유언이 될 지도 모를 대중없는 하소연을 접할 때 던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한마디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뭐락카노, 니 뭐락카노'만큼 절실하면서도 애틋한 말은 흔치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뭐락카노'로 다그친다고 해서 직설적이고 다혈질적이라고 나무랄 경상도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박목월의 '이별가'는 적절하게 엮어놓은 경상도 사투리의 그물 때문에 가장 애절하면서도 감동적인 한 편의 이별시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우 보래이. / 사람 한 평생 / 이렇쿵 살아도 / 저렇쿵 살아도 / 시쿵둥하구나. / 누군 / 왜, 살아 사는 건가. / 그렁저렁 / 그저 살믄 / 오늘같이 기계장도 서고. /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 아우님도 / 만나잖는가베. / 앙 그렁가 잉 / 이 사람아. / 누군 / 왜, 살아 가는 건가 / 그저 살믄 / 오늘 같은 날 / 지게목발 받쳐 놓고 /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 한 잔 술로 / 소회도 풀잖는가. / 그게 다 / 기막히는기라 / 다 그게 / 유정한기라.'(박목월 '杞溪 장날' 전문)

위의 박목월의 '기계 장날'은 현대판 경상도 장타령이다. 세월이 흘렀으니 재래 시장의 풍속도야 세월 따라 많이 변했겠지만, 시장 바닥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세상 산다는 게 뭐 그리 큰 위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순박한 시골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사람들끼리 5일장에서 만나 막걸리 한 사발 주고받으며 쌓이고 쌓인 삶의 더께를 씻어내는 즐거움만큼 큰 삶의 위안도 드물 것이다.

목월은 이러한 삶의 의미를 구수한 사투리로 얽어 놓음으로써 가슴을 울리는 새로운 장타령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 속에서의 사투리는 소설만큼 빈번하게 사용되지도 않고 또 그 역할의 범위도 넓지 못하지만, 적재적소에 시어로 선택된 사투리의 빛남은 한 편 시의 값진 보석임에 틀림없다. 지금 부산에서도 수백 명의 시인들이 나름대로의 시심을 불태우고 있다. 우리 지방의 사투리가 좋은 시 작품에 녹아서 별빛처럼 찬란히 빛날 날을 기대해본다.
 

사투리의 미학 <20> 경상도의 특징어(1)

 
멍 게-'총각(總角)'이란 말은 중국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어린아이의 머리를 양쪽으로 모아서 모가 나게 맨 것을 말한다. 총각은 오늘엔 '결혼하지 않은 성년 남자'란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러한 뜻의 총각이 붙은 말에 '총각김치'가 있다.

'총각김치'를 사전들은 '총각무로 담근 김치'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총각무'란 말이나 '총각김치'란 말은 적어도 그 말을 만든 심리적 과정에서는 같은 출발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처녀림(處女林)이 있대서 꼭 총각림(總角林)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총각김치가 있으면 처녀김치도 있어야 한다고들 더러 익살을 부리기도 하는 이 '총각김치'는 사실은 '청각(靑角)김치'를 그렇게 잘못 쓰고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청각을 넣은 김치여서인지, 그 생긴 모양이 크지도 않고 꼭 고만고만한 데서 붙여진 이름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총각김치'는 아낙네들이 김치를 담그려고 씻으면서 매만지는 사이에 엉뚱하게 아니 실감나게 연상되는 어떤 느낌에서 붙여진 이름이란 복사빛 해석쪽으로 기울어가는 것만 같다. 웃음을 머금게 하는 말이다.

'총각김치'처럼 그 어원을 따져보면 웃음을 띠게 하는 말에 '멍게'가 있다. 독특한 맛으로 우리들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멍게'는 우리 나라 남쪽의 몇몇 지방에서만 식용하였는데 6·25 이후부터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멍게'는 지금은 '우렁쉥이'와 함께 표준어로 대접받고 있지만 아직도 사투리 냄새가 나는 말이다.

1960년대에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음식점의 차림표에 '멍게' 한 접시 얼마, '우렁쉥이' 한 접시 얼마라고 씌어 있기에 어느 손님이 물었다. "주인장, 멍게하고 우렁쉥이는 같은 것인데 왜 두 가지를 다 써 놓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멍게를 찾고 어떤 사람은 우렁쉥이를 찾아서, 우리 집에는 두 가지가 다 있다고 자랑하려고 둘 다 써 두었습니다"란 주인의 답변에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는 얘기다.

아마도 '멍게'를 찾은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부산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었을 것이다.

민간 어원설에 지날지 모르나 이 '멍게'의 어원이 흥미롭다. 국어 사전을 보면 '끝에 가죽이 덮인 남자 어른의 ××'로 풀이된 '우멍거지'란 말이 있다. 포경 수술의 '포경(包莖)'의 순 우리말이다. '멍게'는 이 '우멍거지'에서 온 말이란다. '멍게'의 생김새가 똑 '우멍거지'와 비슷한데 차마 그대로 쓸 수가 없어 가운데 두 자를 떼어 쓴 '멍거'에서 왔다는 것이다. 술좌석에서 웃음 속에 풀이하는 '멍게'의 어원이다.

사실 시장들에서, 까놓지 않은 멍게들이 불그스름한 빛을 띤 채로 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모양을 볼라치면 남자의 어느 부분이 연상되기도 한다. '멍게'란 말은 이를 파는 사람들, 특히 아줌마들이 지어낸 이름으로 생각되는데, 그러고 보면 '멍게'란 말은 '총각김치'란 말과 그 이름을 지은 연유가 비슷해진다.

그러면 '멍거'가 왜 '멍게'가 되었으며, 또 '멍기'라고들 할까.

천지뻬까리-경상도 말의 특징 중의 하나에 모음추이(母音推移·vowel shift) 현상이 있다. 곧 경상도에서는 '파'를 '패'라 하고, '고구마'를 '고(구)매'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멍거'가 '멍게'가 된 것이라 하겠다. 경상도 방언의 특징 중에는 'ㅔ'를 'ㅣ'로 발음하는 현상도 있다. 곧 '네(you)'를 '니'로 발음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으로 '멍게'는 '멍기'로 변한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멍게'는 '우멍거지'의 '멍거'가 '멍게'로 된 것이 '멍기'로도 발음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경상도 방언 중 특이한 말로 '천지뻬까리'가 있다.

어느 지방 사람이 경상도 사람에게 물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쓰는 '천지뻬까리'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건 '쌔비리따(쌔비릿다)'란 뜻이지예."

"그럼 '쌔비리따'는 무슨 뜻입니까?"

"'억수로' 많단 말 아입니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는 얘기가 있다.

'억수로'는 '억수'에서 온 말로 보인다. '억수'는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로 '억수로'는 '억수처럼' 곧 '대단히 많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상도 방언이다.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민중서림, 1982)을 보면 '쌨다'를 '쌓이어 있을 만큼 퍽 흔하다'로, '쌔고쌨다'를 '아주 흔하다'로 풀이하고, '쌔버렸다'는 '쌔고쌨다'의 경상도 방언이라 했다. '새비리따'는 이 '쌔버렸다'가 변한 말로, 이는 경상도의 특별한 말이라 하겠다.

이 두 말들보다 더욱 경상도 말 냄새가 짙은 말로 '천지뻬까리'를 들 수 있다. 우리들 인사말들 중에는 밥 먹는 일을 주제로 한 인사말이 많다. 어떤 이는 이러한 인사말이 지난날의 가난한 삶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천지뻬까리'란 말도 양식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생긴 말이 아닌가 여겨진다.

'낟가리'를 경상도에서는 '뻬까리'라 하는데, 이는 '볏가리'에서 온 말이다. 우리말에서 'ㅕ'는 'ㅔ'로 곧잘 변동한다. '한 병'을 '한 벵'이라 하는 것이 그 예다.

'천지뻬까리'를 더러 '천지삐까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ㅔ'가 'ㅣ'로 변동한 것이다.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이란 뜻 외에 '서울엔 장사가 천지다'에서 보듯 '무척 많음'이란 뜻도 있다. 그러고 보면 '천지뻬까리'는 '무척 많은 볏가리'란 뜻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