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북한 붕괴란 오래된 오판

醉月 2010. 12. 15. 08:48

<출처 : 한겨레 21>

북한 붕괴란 오래된 오판

주관적 희망에 바탕해 북한 급변사태만 기다리는 이명박 정부…
현실성 없는 대북정책 고집해 제2의 연평도 이어질 우려
 
1997년 4월20일, 에어필리핀 특별기가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다. 2명의 노신사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기에 앞서, 한 손에 모자를 든 채 두 팔을 들어 외친다. “대한민국 만세.”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이다. 같은 해 2월 중국 베이징의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망명을 신청한 지 67일 만이다. 역대 북한 최고위직이자 ‘주체사상의 대부’의 망명은 ‘주체사상의 망명’으로 여겨졌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서울 도착 성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북조선은… 기형적 체제로 변질됐으며 경제는 전반적으로 마비 상태에 들어가고… 인민들은 기아에 신음하고…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됐습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석 달을 못 간다’는 주장까지 나오던 북한 붕괴론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당연했다.

 

붕괴 시나리오, 어게인 1994

»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 등 서해 5도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12월3일 오후 백령도에서 군인들이 단거리 지대공유도무기(SAM) ‘천마’를 점검하고 있다.연합 이지은

1994년 10월,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론까지 제기됐던 북핵 위기 뒤 북-미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2개의 경수로를 지어주는 제네바 합의에 이른다. 북한 체제가 10년 이상 걸릴 경수로 완공 전에 붕괴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2010년, 북한 정권은 아직도 건재하다. 오판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북한 붕괴론이 현 정부 고위 외교안보 당국자들의 머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전문을 보면,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2차관이던 지난 2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김정일 사후 2~3년 안에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7월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에게 “김정일은 2015년 이후까지 살 수 없을 것”이라며 “북한이 갑작스레 붕괴할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나? 개인적·공적 생각이 섞여 있다”(백승주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현 정부의 대북 정책과 전략이 이런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실마리를 보여주듯 이들의 발언은 지난 3년간의 정책기조와 퍼즐처럼 맞아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번에 일단이 드러난 대북 인식은 기존의 북한 붕괴론과 판박이다. ‘최고지도자 사망 → 권력투쟁 → 급변사태 → 체제붕괴 → 흡수통일’이라는 논리 구조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1993~95년 북한 식량난이 맞물려 제기됐던 논리와 거의 유사하다. 위기를 초래할 사망의 당사자가 김일성 주석 대신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권력 장악에 실패할 지도자는 김정일에서 아들 김정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 지도부가 경제난을 견디기 어렵고 일부 엘리트의 쿠데타나 민중봉기에 의해 결국 실각할 것이라는 관측도 그대로다.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의 권좌에서 물러나거나 숨지면 쿠바가 무너질 것이라는 미국 내 반쿠바 세력의 쿠바 붕괴론이 연상된다.


북한 붕괴론은 1998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공식 최고지도자에 오르고 식량난 완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등을 거치며 설득력을 잃는 듯했다. 그러나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불거지고 후계 구도가 한동안 드러나지 않으면서 다시 부상했다. 이런 붕괴설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한 전직 안보분야 고위 관료는 “한심하다”고 비판했다. “망상이다”(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미몽이다”(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단히 어설프고 심각하다”(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지적도 나온다. 왜일까?

 

짐작과 달랐던 체제 안정성

» 지난 6월15일, 천영우 당시 외교부 차관(왼쪽)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북한 체제를 오판하고, ‘김정일 사망=북한 붕괴’로 동일시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곧 김정일 위원장이 절대적 권위를 갖고 북한을 통치해온 만큼, 그가 숨지면 북한 체제가 곧바로 무너진다는 판단 착오다.

이른바 북한 급변사태 논의도 붕괴론의 연장선이다. 소련, 루마니아, 폴란드 등의 사례를 보면 체제 권력의 위기, 경제개혁의 실패 또는 극단적 악화, 민중봉기가 체제 전환의 변수다. 북한에도 유효할까? 북한의 치밀한 내부 시스템을 따져보면, 대답은 ‘노’(NO)에 가깝다.

 

 

이번에 일단이 드러난 대북 인식은 기존의 북한 붕괴론과 판박이다. ‘최고지도자 사망 → 권력투쟁 → 급변사태 → 체제붕괴 → 흡수통일’이라는 논리 구조다.

 

 

김정은이 지난 9월28일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북한은 ‘3대 세습’ 공식화에 들어갔다.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고모인 김경희 당경공업부장이 김정은을 돕는 ‘친족 후견체제’를 드러냈다.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는 노동당 대표자회를 하루 앞두고 대장 칭호를 부여받았다. 김일성 일가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에 몸 바친 혁명가족’으로 떠받들어진다. 북한은 1990년 후반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봉기 없이 넘어갔다. 절대적 빈곤은 겪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적고 철저한 통제와 감시가 이뤄지고 있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체제 붕괴로 연결되기는 무리라는 분석이다. 양무진 교수는 “북한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도할 지도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북한은 군부 원로 및 실세가 국방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를 통해 집단적으로 군사·안보를 관장하는 체계다. 김정일 위원장을 빼면 독자적 군대 지휘가 어렵다. 또 경제난과 미국과의 대결 속에서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과거 사회주의권의 붕괴 과정을 봐도 장기간 대규모 유혈사태는 없었고,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북한에서 그 가능성은 더욱 낮다. 오랜 위기에 단련된 북한은 우라늄 농축과 연평도 공격 등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고 협상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 한반도의 불안정을 원하지 않는 중국은 북한을 정치·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후견국임이 연평도 포격 뒤에도 확인됐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온통 까맣다. 문제는 붕괴론에 기초한 ‘희망적 분석’이 대북정책을 오도한다는 사실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의 권력이 198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을 능가할 정도였는데도, 1990년대 북한 붕괴론자들은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해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잘못 파악했다.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사고 때도 통치시스템 붕괴 및 암살기도설이 제기됐다. 최근의 붕괴설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잘못된 정보나 의도적 해석에 따른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북한학)는 “남북관계는 주관적 판단을 최대한 경계해야 하고 객관적 판단이 요구된다”며 “희망적 차원의 접근은 정책 안정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독특한 공산독재 체제에 자유민주 체제 분석의 틀로 접근하면, 북한은 권력의 정당성과 기반이 취약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상한 구조’라는 인식을 넘어설 수 없다.

사실 북한 체제의 붕괴 및 예기치 않은 급변사태 가능성은 과거 정부에서도 대비했다. 정부가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햇볕정책도 북한을 쓰러뜨리려는 술책이라는 북한의 반발을 샀다. 기존 정부도 북한 붕괴라는 시나리오는 더 열심히 대비했다”고 말했다.

 

‘플랜A’로 부적절한 붕괴론

 

문제는 이런 급변사태 대비와 일상적 대북정책을 어떻게 통합시키느냐다. 협상과 외교 등을 통한 일상적 전략, 곧 ‘플랜A’가 우선되고 북한 붕괴 등 비상시에 대비한 ‘플랜B’도 준비해야 하는데, 현 정부에선 플랜B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전직 안보 분야의 한 고위 관료는 “비상계획은 비상계획일 뿐인데, 그 자체가 정책적 판단의 기초가 되면 정상적이고 합리적 정책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급변사태 대비는 당연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 일상적 정책에서 중심이 돼 강하게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다.

북한 붕괴론에 기반을 둔 대북정책은 대화 기피와 강경론으로 이어진다. 곧 무너질 것이므로 압박·공세 정책을 선택하게 한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 뒤에는 북한 정권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떨어질 감을 따기 위해 바람도 부는데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 잡고 아슬아슬하게 감을 따려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북한 붕괴론이 기승을 부리던 1990년대 중·후반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책의 되풀이다.

김연철 교수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 인정해야 대화를 하는데, 곧 붕괴할 테니 무시하고 제재하고 도발에 협상하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근식 교수는 “정부가 북한은 잘못된 주장을 하다가 합의를 어기고 기분 나쁘면 도발한다는 뿌리 깊은 ‘북한 악마론’과 제재하면 북한이 결국 항복하거나 무너진다는 잘못된 인식의 동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의 남북 교류협력 축소와 중단도 북한 붕괴론에 닿아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기아 등으로 붕괴 직전에 있었으나 남한의 지원으로 살아난 만큼, 압박과 공세로 붕괴를 유도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붕괴추진론과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인권유린 등을 알려 대량 탈북을 유도하고 ‘깡패국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도 한 뿌리다. 양무진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다 경제적 지원 요구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위키리크스를 통해 밝혀진 것과 관련해 “붕괴론에 기반을 둔 흡수통일론과 오락가락하는 대북정책은 남북 정상회담 추진의 진정성과 의지 부족은 물론 전략 부재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흡수통일 방관할까

 

김연철 교수는 “흡수통일론은 북한 붕괴론이란 동전의 뒷면이다”라고 지적했다. 체제붕괴론은 북한이 대한민국에 흡수되는 형태로 소멸할 것으로 본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8·15 기념사에서 통일세 신설을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이 곧 무너져 흡수통일된다는 판단에서 그 대책으로 통일세 논의가 제기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기존에도 같은 남한 주도 통일이지만 협상에 의한 합의통일을 상정했다. 이는 자체 붕괴나 붕괴시키려는 전략을 상정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통일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화해-연합-통일’의 연착륙을 상정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달리,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통일비용 논의가 활성화된 것도 붕괴론의 연장선이다. 민주노동당은 8·15 기념사에 대해 “통일세는 북한을 흡수통일하겠다는 극우적 발상과 북한의 급변사태를 대비한 비현실적인 전제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명백히 불순하다”며 “북한은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아닌 통일의 동반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북한 붕괴론에 기반을 둔 고립정책은 북한 체제의 내부적 결속과 폐쇄성 및 적의를 키워놓았다.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저질러 남한 국민 등의 적대감에 불을 질렀다.

 

 

현 정부의 북한 붕괴론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북한이 무너지면 우리가 먹는다’는 안이한 인식에 있다. 북한의 붕괴는 떨어지는 감이 아니다. 감은 위치만 잘 잡고 입만 벌리고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흡수통일은 북한이 원할 때, 그것도 중국 대신 남한을 선택할 때만 가능하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도 1990년 국민투표에서 서독에 편입되겠다는 동독 주민들의 투표로 결정됐다. 독일은 동족상잔의 전쟁도 겪지 않아 원한과 적대감이 적었고 사실상 자유 왕래를 했다. 통일을 하려면 자석처럼, 흡인력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전직 안보 분야 고위 관료는 “중국이라는 대안이 있는데, 북한이 망하면 한국이 접수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급변사태가 나서 한국이 주도하려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남한에 의존할 수 있겠다는 심리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생겨야 하는데 ‘2등 국민’ 취급받을 생각에 남한을 선택하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이 남한 주도의 통일을 용인하는 것은, 그것이 중국에 위험하지 않고 동북아에서 한-미 동맹을 끌어들여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될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김근식 교수는 지난해 논문 ‘북한 급변사태와 남북연합: 통일과정적 접근’에서 “붕괴 후 흡수통일로 분류되는 독일의 경험이 화해협력에 의한 점진적 통일 방식과 역사적으로 결합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며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20여 년에 걸친 교류접촉과 화해협력의 신동방정책이 있었다. 화해협력이라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지속됨으로써 비로소 붕괴 뒤 흡수통일이라는 ‘결과로서의 통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붕괴 기다리다 도발만 당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소원’ ‘민족의 염원’이라는 남북통일은 북한 붕괴라는 급변사태가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과 막대한 통일비용, 이후 부작용을 초래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무진 교수는 “북한 붕괴론에 기반을 둔 대북정책을 바꿀 때까지 대결 국면과 제2, 제3의 연평도는 상존한다”고 우려했다.

연평도 사태 뒤 정부는 연평도에 과도한 무기 배치를 추진하는 등 대북 강경대응론에 휘둘리고 있다. 김관진 국방장관 내정자는 11월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이 추가로 도발하면 “분명히 항공기를 통해 폭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철저한 대응은 필요하지만, 하필 확전을 우려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불안하고 미덥지 않기는 연평도 도발을 저지른 북한 정권만이 아니다.

 

 

참고 문헌

‘북한붕괴론의 어제와 오늘: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북한 붕괴론에 대한 평가’ 이상근, 통일연구, 2008

‘북한 급변사태와 남북연합: 통일과정적 접근’ 김근식, 북한연구학회보, 2009

‘북한 조기붕괴설 부작용 차단과 내재적 접근의 이적논리’ 정용석, 북한, 2010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비밀대화

“위기는 김정일 죽은 뒤 부각”

 

북 정권은 붕괴하는가. 북은 물론, 남한에도 이보다 파괴적인 사안이 없어 보인다. 반도의 100년을 결정한대도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말한 바도, 아는 바도 적다. 그런데 한-미 당국을 오가는 대북 정보는 거칠고 주저 없다. 희망인지 분석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붕괴 시나리오’에 버금가고, 이는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 담론으로 구체화하고 있었다. 다음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외교전문.

»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비밀대화의 일부

① ×××는 김정은이 당을 장악하고 파워 엘리트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낼 능력이 있을지 의문스러워했다. ×××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 사건에 따른 남한 정부의 격동기를 상기하며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이후) 북의 권력 승계 문제는 “100배 이상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이라고 시사했다.

- 지난 2월3일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커트 캠벨이 한국의 북 전문가 5명과 만난 자리

 

②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세습 과정상) 도전은 김정일 위원장이 죽은 뒤 부각될 거라고 보았다. ×××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정치적 음모·긴장이 오랫동안 들끓었으나 왕이 죽은 뒤에야 분출됐다는 걸 상기했다. - 위와 같음

 

③ 천영우 외교부 2차관(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중국이 김정일 사망 뒤 북 정권의 붕괴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이미 무너졌고, 김정일 사망 뒤 “2~3년 안에” 정치적으로도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 지난 2월17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천영우 당시 외교부 2차관의 오찬

 

④ 천영우 차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훨씬 적다고 말했다. 중국은 북한의 정책 변화를 위해 경제적 지렛대를 사용할 “의지가 없으며” 북한 지도부도 이를 “알고 있다”.

- 위와 같음

 

⑤ 외교부 장관(유명환 당시 장관)은 북이 요청하고 모니터링을 받기로 할 때, 남한 정부의 “의미 있는” 식량지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은 그냥 대규모 식량지원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장관은 말했다. 어떤 원조가 있더라도 작은 규모로 이뤄질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 지난 1월11일 유명환 당시 외교부 장관이 미 대북인권특사 로버트 킹을 만난 자리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분쟁의 ‘선’을 평화의 ‘면’으로 바꾸는 ‘10·4 공동선언’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을 돌아보다
점은 선을 당해내기 힘들다. 연평도에 화력이 좋은 최첨단 무기를 배치한다 하더라도, 해안선을 따라 남을 향하고 있는 북의 해안포와 장사정포에 비하면 점에 불과하다. 선이 점 하나를 향해 집중하는 힘과, 점이 선을 향해 분산해야 하는 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선은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선에 대한 이쪽과 저쪽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해 바다 위의 보이지 않는 선인 북방한계선(NLL)은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관련 내용이 없는 선이다. 정전협정 2조 13항은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후도 등 서해 5도의 유엔군 관할만을 명시하고 있다. NLL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마크 클라크가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8월30일 임의로 설정한 선이다. 이 불씨가 번져 서해 5도 주변 해역에서 남북 간의 갈등이 높아지기 시작한 시점은 1973년이다. 북은 군사정전위에서 “서해 5도 도서 주변 수역은 북한의 관할 수역”이라고 주장했다. 1999년 9월 1차 서해교전 이후엔 서해 5도 통행로를 제외한 주변 수역을 북쪽 관할권에 둔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분쟁의 불씨를 품은 모호한 경계

»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너무 늦게 만났다. 2007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등을 담은 10·4 공동선언에 합의했으나 이를 추진할 힘과 시간이 없었다.연합

모호한 선과 그로 인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동유럽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던 무렵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시도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앞두고 남북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해상불가침경계선을 논의했다. 협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북은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을 서쪽으로 연장한 선을 주장했고, 남은 정전협정 이후 20년 가까이 북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NLL을 그대로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합의는 또 모호했다.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합의한다.” ‘쌍방 관할 구역’은 각각의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남북의 평화와 교류협력의 물꼬를 튼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선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합의한 ‘6·15 선언’은 △통일 문제 자주적 해결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 교류협력 활성화 등을 5개항에 담았다. ‘우리 민족끼리’와 ‘연방제’ 등 몇몇 민감한 표현을 두고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를 자처하는 냉전세력들이 공세를 폈지만 6·15 선언은 1994년 북핵 위기 이후 높아진 전쟁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일시에 방향을 전환하는 출발점이 됐다.

선에 대한 남북 간의 합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진전됐다. 노무현 정부는 6·15 선언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행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가져온 안보 환경의 변화에 주목했다.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북한의 동해군단은 고성 위쪽으로 올라갔다. 개성공단 쪽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침의 주요 경로였던 개성에는 북한군 2개 사단이 전진 배치돼 있었다. 개성공단이 만들어진 이후 이들은 개성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서해의 폭탄을 제거하는 평화지대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계획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긴장과 갈등의 선을 평화와 협력의 면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10·4 선언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이 그것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인사의 증언이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동유럽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던 무렵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시도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앞두고 남북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해상불가침경계선을 논의했다.

 

 

“노 전 대통령은 NLL 문제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평화선이라는 이름으로 북과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는데 당장 남한 내부에서부터 반대의 벽에 부딪힐 게 뻔했다. 그렇다면 NLL 문제를 테이블에서 아예 치워버리자, 평화지대를 만들고 서해를 전체적으로 개성공단화하면 남과 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이라는 폭탄을 제거하는 쪽으로 정리가 됐고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구체화됐다.” 분쟁의 씨앗인 선을 면과 공간으로 녹여버리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구상은 10월2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의 3항과 5항으로 문서화됐다. 10·4 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는 1항을 시작으로 6·15 선언보다 훨씬 구체적인 세부 내용을 전문 8개 항에 담았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관한 3항과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 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 간 회담을 금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5. 남과 북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며 민족 내부 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을 빠른 시일 안에 완공하고 2단계 개발에 착수하여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 수송을 시작하고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 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보수 문제를 협의 추진해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

 

 

인천~해주 직항로가 뚫렸다면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는 물거품이 됐지만 여전히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꿀 유력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11월23일 불타는 연평도.주민 제공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해주 지역이다. 해주항은 개성공단에 앞서 유력한 경제특구 후보지로 꼽혔으나 북한 서해함대의 주력부대가 배치된 군사적 요충지여서 무산된 곳이었다.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할 경우 개성과 고성의 사례처럼 북의 군사적 거점이 더 북쪽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남쪽의 인천과 북쪽 해주 사이의 직항로가 생겨 민간 선박이 오갈 경우 군함이 다니면서 전쟁 연습을 하기는 어려워진다.

남북 간의 평화협력지대 제안은 처음이었지만 공동어로구역과 평화공원이라는 개념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분쟁국가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착한’ 해법으로 모색해왔던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홍해 아카바 국제해상평화공원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기지와 군함으로 긴장이 고조됐던 아카바만에는 1994년 중동 평화협정을 계기로 해상평화공원과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유럽의 화약고로 꼽히던 알바니아·몬테네그로·코소보의 접경지역에도, 폴란드·슬로바키아의 접경지역인 타트라 초국경평화공원을 모델로 삼아 발칸평화공원을 만드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식민지배의 상처로 종족 분쟁이 빈번했던 아프리카에서도 이와 유사한 초국경평화공원을 찾아볼 수 있다.

 

 

“남과 북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10·4 공동선언 5항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으로 평화의 바다 합의를 끌어낸 게 불과 3년 전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서울로 돌아와 남북정상선언 이행종합대책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너무 늦게 정상회담이 이뤄졌다”고 아쉬워하며 “최소한 다음 정부가 세부적인 협의를 하면서 진행을 시켜나갈 수 있도록 남북 간에 필요한 협의는 미리 매듭지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상회담 이후 두 달은 남북관계의 전성기라고 부를 만했다. 총리급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이 이뤄지는 등 크고 작은 회담과 행사가 20차례 이상 이어졌다. 상시적 남북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선을 면으로 대체하기 위한 그해 11월 국방장관 회담에서 군은 NLL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임기 말 대통령은 힘이 없었다. 시범실시구역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남북평화의 ‘잃어버린 5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해 12월 ‘비핵개방 3000’ 구상을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남북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지난 정부의 성과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이전의 남북 간 합의는 깡그리 무시했다. NLL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나 북의 포탄이 NLL 남쪽에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가 됐고 급기야 연평도에까지 날아들었다. 국가정보원과 청와대·군 사이에 서해 5도 공격 가능성에 대한 보고가 있었으니 없었느니 하면서 책임을 미루는 것을 보면 안보 중시 정권이라는 스스로의 평가가 무색할 지경이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안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남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 여전히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꿀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선을 벗어나 면으로 바꾸면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된다”며 “다음에 어떤 성격의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캐비닛을 열고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을 다시 꺼내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정권이 수년 안에 스스로 무너지고 남한에 흡수통일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라도, 위기 관리와 지속 가능한 평화체제를 위해 현실 적용 가능성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기간이야말로 ‘잃어버린 5년’이 될지도 모른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MB 정부에 국방정책 기조는 있는가

정예화된 선진강군 육성’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경제논리 앞세운 ‘국방경영 합리화’만 강조
참여정부의 국방 슬로건은 무엇이었을까? 군사 분야나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인터넷을 몇 번 두드려보면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참여정부 국방정책의 목표는 ‘자주국방’이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어떨까?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현 정부가 어떤 목표 아래에서 국방정책을 추진해왔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국방 분야의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들도 아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에 국방 슬로건이 있었던가요?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민주당 관계자)

“내가 지금까지 국방위만 3년을 하고 있는데,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현 정부에는 우리 군을 어떻게 만들겠다, 이런 목표가 없습니다.”(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관계자)

 

국방부 대변인도 모르는 국방 슬로건?

» 2008년 3월12일 국방부 업무보고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군 관계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마지막으로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을 찾았다. 12월2일 오후 기자와 김 대변인 사이에 오간 짧은 질의응답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잘 아시겠지만 참여정부에서는 국방정책과 관련해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슬로건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이명박 정부에도 이같은 국방정책 슬로건이 있나요? 국회 국방위에도 아는 분들이 없어서요.”

“아… 국방백서를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제 코멘트보다는 그게 공식 입장이니까 국방백서를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대변인께서도 잘 모르시는 건지요.”

“그렇게 물으시면 저를 시험하시는 거고, 제가 어설프게 답하는 것보다 거기에 잘 정리해놓았을 테니 그걸 보고 이해하시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답은 ‘정예화된 선진강군’이었다. 국방부는 2008년 3월12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첫 업무보고에서 ‘정예화된 선진강군 육성’을 국방비전으로 보고했다. 짧게 줄이면 ‘선진강군’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국방 슬로건은 그해 국방백서에도 그대로 실렸다.

 

 

현 정부의 국방정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정예화된 선진강군’이라는 국방 슬로건에 제대로 들어맞는 것이 없다. 현 정부의 국방 슬로건을 묻는 질문에 ‘돈 안 주는 국방정책’ ‘국방 다이어트’라는 비아냥 섞인 대답이 돌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강군. 외우기 어렵지 않은 구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국방 슬로건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유는 다시 2008년 3월1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국방부 업무보고 장소는 경기도 용인시 3군사령부였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나 국방부 청사가 아니라 야전사령부를 국방부 업무보고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군의 사기 진작을 감안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지만, 정작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메시지 일색이었다. ‘선진강군’을 말하는 군 관계자들 앞에서 그는 ‘경제’를 강조했다.

“어떤 여건 속에서도 목표로 하는 경제성장을 이뤄야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다.”

“국방개혁은 안보태세 확립의 중요한 요소이면서 동시에 국가 경제발전과도 관련이 된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군의 끊임없는 체질 변화” 대목에도 힘을 주었다. 하루 전인 3월11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낡은 관행과 비효율을 과감하게 털어내라”라며 군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낸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취임할 때부터 이미 군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다수 언론이 선진강군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군 체질 변화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대통령은 그 뒤에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군을 향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군은 예산 낭비가 심한 비효율적 조직이라는 것이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선진강군 위해 국방비 상승폭 꺾는 모순

» 2005~2011년 국방비 지출 현황

‘정예화된 선진강군’의 국방 슬로건을 달성하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에 걸맞은 병력 감축 계획이나 무기체계 현대화 등 구체적인 군사력 건설 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적어도 참여정부 때는 그랬다.

‘협력적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참여정부는 2005년 ‘국방개혁 2020’ 계획을 수립하는 등 15년 뒤인 2020년을 내다보는 국방정책을 제시했고, 또 이를 실천했다. 국방개혁 2020은 당시 68만 명 수준의 병력을 2020년까지 50만 명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군의 규모는 줄이되 현대화 및 첨단화로 자주국방을 이룬다는 국방개혁 2020은 이에 따라 2011년까지 고고도 무인정찰기인 글로벌호크와 2천t급 차기호위함을 도입하기로 하는 등 체계적인 전력 증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정예화된 선진강군’을 국방 슬로건으로 내세운 현 정부의 국방정책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치달았다. 선진강군이 되려면 최신 무기를 도입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방 경영의 효율화’가 우선이라는 대통령의 철학 때문이었다. 군을 책임지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2009년 9월23일 취임하며 ‘강한 군대’가 아니라 ‘국방 경영 합리화’를 가장 앞에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방 경영 합리화. 물론 좋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현 정부의 국방정책이 경영 합리화라는 명분에 맞았는지도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많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관계자의 말이다. “국방 경영의 합리화라면 무엇을 어떻게 합리화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 정부는 국방비를 많이 줄 수 없다는 것 이외에 어떤 합리화 방안을 제시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노무현 정부 때 나온 국방개혁 2020에는 군 구조 개혁과 전력체계 개편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있지 않았나. 지금은 국방비를 줄이라는 것 이외에 방안이 없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이후 국방비 상승폭은 해마다 가파르게 꺾였다. 11월29일 장병완 민주당 의원이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2005~2011년 국방비 지출 현황 자료’를 보면, 참여정부 기간(2005~2008년)에 연평균 8.0%였던 국방비 증가율은 현 정부 들어(2009~2011년) 5.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부는 2009년 ‘국방개혁 2020’을 ‘국방개혁기본계획’으로 수정하며 621조원의 소요 예산을 599조원으로 삭감했다. 예산 삭감 과정에서 줄어든 22조원의 80%인 17조6천억원은 국방개혁의 핵심인 방위력 개선비였다. 공군의 글로벌호크나 해군의 차기호위함 도입 사업이 자연스럽게 현 정부 이후인 2015년 이후로 늦춰지거나 재검토 대상에 올랐다. 대신 2020년까지 50만 명 규모로 줄이기로 했던 병력 감축 계획을 늦춰 2020년까지 51만7천 명 수준을 유지하기로 했다. 애초 병력 감축 계획의 배경은 민간이나 경찰에 이양할 수 있는 군 업무를 덜어내 장기적으로는 경영 합리화를 꾀하겠다는 것이었다. 현 정부는 국방 경영의 합리화를 주장하면서도 이런 사업에는 제동을 걸었다. 이를테면 지난 8월 대통령직속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가 병력 감축 계획에 따라 육군의 해안경계 임무를 해양경찰에 이관하겠다는 군의 계획을 백지화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국방 합리화도 제대로 안 돼

결과적으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국방정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정예화된 선진강군’이라는 슬로건에 제대로 들어맞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국방 경영의 합리화’를 올바르게 추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현 정부의 국방 슬로건을 묻는 질문에 정치권과 군 안팎에서 ‘돈 안 주는 국방정책’ ‘국방 다이어트’라는 비아냥 섞인 대답이 돌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방비 절감 이외엔 목표가 불분명한 국방정책이 가져오는 결과는 뻔하다. 당장 군의 사기 저하와 기강 해이, 복지부동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보수 인사로 분류되는 전직 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양반이 말로만 확고한 안보태세를 강조하지 실제로는 국방부가 국방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불신만 드러내고 있다. 군 통수권자와 군의 신뢰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금은 서로 신뢰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대결은 위험을 키운다

연평도 이후 일단 안정 찾은 시장…
장기화 땐 예전과 달리 ‘코리아 디스카운트’ 커질 수도
“지난 11월23일 북한의 연평도 도발 사태 이후, 한국의 안보 상황에 관심이 많아지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사태가 확산되지 않고 서서

히 안정을 찾아나가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해외 72개국에 설치한 99개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옛 무역관)에서 중요 해외 투자자 및 바이어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다. KOTRA의 설명대로 시장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연평도 사태가 발발한 11월23일 1928.94에서 11월29일 1895.54로 떨어졌다가 12월3일에는 1950.26으로 오히려 올랐다. 또 한국의 신용위험 정도를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사태 당일 107bp에서 11월30일 122bp까지 올라갔지만, 12월1일 111bp로 떨어졌다. 증권가에서도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9년 이후 커진 코리아 디스카운트

» 국내외 주가수익비율(PER) 흐름 (12개월 실적 전망치 기준)

그럼에도 이번 사태는 과거와 다르다는 인식도 함께한다. 북한의 포격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 영토에 직접 가해졌고 민간인 사망자까지 발생했기 때문에 과거 사례와 단순 비교는 무리라는 것이다. KOTRA의 ‘안전하다’는 서한은 역설적으로 ‘북한 리스크’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KOTRA 관계자는 “200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KOTRA 본사 차원에서 이같은 서한을 배포한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해외시장도 이같은 우려를 보여줬다. 일본의 소니는 12월2~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 계획이던 부품구매 상담회를 내년 3월로 연기했고, 혼다자동차와 파나소닉은 한국 출장을 중지시켰다. 삼성전자도 유럽법인을 통해 주요 거래처에 전자우편을 보내 연평도 사태를 설명했다.


이는 한국 경제에 북한 리스크가 엄연히 존재하고, 또한 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으로 외국인들이 한국의 경제가치를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북한 리스크임을 증명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이유로 폭력시위, 노사분쟁과 함께 북한을 꼽았다. 그리고 이를 줄이겠다고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위원회의 활동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올 들어 더욱 커진 셈이다.

주식시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살펴보면, 2009년 초까지 꾸준히 줄다가 이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주요 7개국을 비롯한 선진국 주가 추이를 집계한 MCS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Index) 선진시장과 한국 시장의 주가수익비율(PER)을 비교해보면 한때 근접한 수준까지 이르렀다가 최근에는 30%까지 차이가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그래프 참조). 이에 대해 HMC투자증권의 김중원 책임연구원은 “2004년 이후 2009년 경제회복 시점까지 격차가 줄었다가 최근에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외 신인도에도 악영향

특히 북한 리스크가 한국의 대외 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의 장보형 금융시장팀장은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S&P가 애초에는 12월에 한국의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는데, 연평도 사태 이후 보류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며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만 그럴 경우 북한 리스크는 장기적으로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현재와 같은 대결·대립 상황에서는 북한 리스크가 커질 수밖에 없고, 그 리스크는 자칫 투자자들의 행동을 위축시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키우게 될 것”이라며 “경제를 위해서도 튼튼한 국방과 안보를 통해 평화를 지키는 것과 함께 대화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작업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모두가 패자인 현대전

공포에 바탕한 오판이 낳는 ‘4세대 전쟁’에 승자는 없어…
피해자 목소리 듣는 민주주의가 전쟁 방지
1914년 8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러시아를 격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세계대전으로 번진 전쟁은 잎이 지고 돋기를 거듭한 1918년 11월에야 끝났다. 1951년 5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38선을 돌파해도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중국은 20만여 병력을 투입해 한국전에 뛰어들어 유엔군에 치명타를 날렸다. 2003년 5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항공모함 에이브러햄링컨호에서 이라크전 종료를 선언했다. 오판이었다. 지금까지도 내전은 더 심해졌고, 미군 사상자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베트남, 체첸, 헤즈볼라

“전쟁에는 실수가 있다.” 중동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부총리가 2006년에 말했다. 정치가도 군인도 사람인 만큼 이런저런 오판을 내린다는 뜻이다. 페레스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러나 가장 큰 실수는 전쟁 그 자체다.”

연평도 사태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이 어떤 공격을 하든 ‘몇 배’로 되돌릴 군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투다. 실제로 몇배의 화력을 되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위정자들이 원하는 ‘상대의 패퇴’는 결코 이룰 수 없다. 현대전의 특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통한 응징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성공한 적이 없다.

미국 예비역 대령이자 전쟁학자인 토머스 하메스는 현대전을 ‘4세대 전쟁’이라 부른다. 1세대 전쟁은 근대국가가 상비군을 확립한 19세기의 전쟁이다. 기계화된 화력을 집중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2세대 전쟁이라면, 전략지역에 대한 전격 침략을 도모한 제2차 세계대전이 3세대 전쟁이다. 1~3세대 전쟁의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고 군사력 재창출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구분됐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4세대 전쟁은 다르다. 강대국이 주도한 1~3세대 전쟁과 달리 4세대 전쟁의 주도권은 약소국에 있다. “전쟁의 전략적 목표가 결코 달성될 수 없으며, 달성된다 해도 지급 대가가 엄청 크다는 것을 상대 나라의 정치적 결정권자들이 인식하도록 (약소국이 저항)하는 것”이 4세대 전쟁이다.

미국과 베트남, 소련과 체첸,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전쟁에서 군사강국은 군사적 약소집단을 온전히 패퇴시키지 못했다. 4세대 전쟁은 “몇 달 또는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는 장기전”이다. 전격전을 벌인다 해서 금세 끝나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다 해도, 그 정권을 전복하려는 반군과 게릴라의 저항이 계속된다. 하메스는 “(고가의 첨단무기를 내세워) 어느 나라가 본래부터 (군사적으로)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한다면 곧바로 재앙의 길로 접어든다”고 지적했다.

 


전쟁 불사는 용기가 아니라 오판

» 2009년 2월11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난 직후 미군이 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7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37명의 시민이 부상 당했다. 승자 없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는 ‘4세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다.연합 AP/ HADI MIZBAN

그럼에도 전쟁을 불사하는 용기가 평화를 지킨다는 환상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 샌디에이고대학 존 스토신저 교수는 그 이유를 ‘오인’에 있다고 본다. “현실이 아니라 공포에 기초를 두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희망에 기초해” 전쟁을 시작하지만, 결국 “전쟁 이전보다 악화된 결과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스토신저 교수는 20세기 이후 참전을 결정한 국가 지도자의 공통점을 살핀다. 그들은 상대를 ‘악마’로 보면서 두려워한다. 동시에 상대를 얕잡아보고 대담한 선제 조처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 지도자의 이런 오판이다.

 

실제로 몇배의 화력을 되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위정자들이 원하는 ‘상대의 패퇴’는 결코 이룰 수 없다. 현대전의 특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통한 응징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성공한 적이 없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전쟁의 확률이 높아진다. 양쪽 지도자 모두 이처럼 인식한다면 전쟁은 필연적이다.” 스토신저 교수의 분석 방식을 따르자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확률은 대단히 높은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호전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김정일 정권도 한국 정부의 ‘전쟁 의지’를 확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제 전쟁이 일어나는 보증수표다. 다만 이때의 전쟁은 예고 없이 시작한다. “전쟁은 일종의 우연적 사고에서 시작된다”고 스토신저 교수는 말한다. 군사훈련, 오발 사고 등 사소한 불씨가 상대의 호전성을 의심하는 양쪽 지도자의 전쟁 결단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네오콘과 한국의 뉴라이트는 무력을 동원한 적대국가의 정권 교체, 즉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공공연한 대안으로 내놓고 있지만, 현실에서 이에 성공한 예는 아직 없다. 숱한 전쟁을 치른 미국조차 ‘정권 교체’를 목표로 전쟁을 감행한 경우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의 이라크전뿐이다. 전쟁의 애초 명분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전 이후 이라크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후세인이 독재자인 것은 분명했으나 알 카에다 또는 빈 라덴과는 연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라이벌 관계였다. 어쨌든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이라크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고, 주민들의 반미 감정은 더 높아졌다. 이에 편승한 알 카에다 세력은 오히려 전쟁 이후 이라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7년여 전쟁의 거의 유일한 성과는 후세인을 체포했다는 것인데, 2003년 9월부터 2년 동안만 따져도 이라크 전쟁에서 죽은 민간인은 3781명에 이른다. 근거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미군이 ‘(테러) 용의자’로 딱지 붙인 2040명, 언론인·비정부기구(NGO) 활동가 63명, 민간업자 358명, 외교관·공무원·경찰 181명 등을 더하면 ‘비군인’ 사망자는 6400명이 넘는다. 반면 전사한 군인은 연합군 833명, 이라크·쿠르드군 814명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테러 위협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반미집단이 성장하는 가운데,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이라크 유전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길도 막막해 7년 동안 쏟아부은 막대한 예산을 회수할 방법조차 사라졌다. 이것이 승리한 전쟁일까. “나는 후세인이 전쟁 없이도 무너졌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후세인이 연합군 병사 한 사람의 목숨과도 바꿀 값어치가 없다고 믿는다”고 스토신저 교수는 말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된 전쟁 피해

» 베트남전쟁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베트콩 용의자를 연행하고 있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전은 미군 1만 명, 남베트남군 25만 명, 북베트남군 100만 명,민간인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20세기 세계와 한국>

이 대목에 관한 한 전쟁을 연구한 정치·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대개 일치한다. 영국 런던정경대 매리 캘도어 교수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일본을 점령한 방식대로 이라크에서 새로운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고 말한다. 현대 전쟁의 결과는 예외 없이 “극단적 종파정치의 탄생”이다. 이런 분쟁은 전쟁에 참가한 양쪽 모두에서 시작한다. 20세기 초까지 전쟁에서 민간인과 군인의 사상자 비율은 1 대 8이었다. 반세기 만에 그 비율은 정확히 역전됐다. 무고한 민간인이 죽으면 그에 따른 적개심과 복수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현대 전쟁은 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한다.

실패가 분명해 보이는데도 이른바 ‘정의로운 무력 개입’이 발생하는 배경에는 민주주의의 실패가 있다고 캘도어 교수는 분석한다. “서로 다른 인간 존재 방식이 있다고 믿는 시민주의와 달리, 이른바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은 세계가 동질해야 한다고 믿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반대자를 배제하는 엘리트 집단 안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움직일 때, 전쟁의 결과에 관한 이런 그릇된 정보와 오도된 환상이 확산된다.” 캘도어 교수가 보기에 민주주의 체제일수록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적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전쟁 피해자의 발언권이 배제당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피해는 아래를 향해 가중된다. 다케나카 치하루 일본 릿쿄대 교수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가 아니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분석한다.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하면, 미국이 아니라 이라크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한-미 연합군이 전쟁을 한다면, 그 전투 역시 미국 본토가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날 것이다. 4세대 전쟁 피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간인 사망자는 오로지 한민족의 몫이 될 것이다.

 

원조·개발 프로그램이 진정한 무기

‘풍요로운 세계’와 ‘가난한 세계’의 구분은 한 나라 안에도 존재한다. 이라크 땅 안에서도 각 종파 지도자들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바그다드 시민들은 항상적인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한국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의 서민들이 겪는 희생을 공유한다면 전쟁 선포는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삶의 터전을 잃고 찜질방에 웅크린 사람의 고통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정치권력이 있다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런 공감 능력은 전쟁에 임하는 전근대적 군주와 현대 지도자의 차이다.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유혈사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낌없이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에 비해 우위에 설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그는 통치자의 의지를 구현하는 전쟁의 ‘수단적 가치’를 긍정했다. 그러나 “희생자가 얼마나 됐건 서슴없이 공격하라”는 클라우제비츠에 솔깃해지는 지도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클라우제비츠는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프로이센 장교였다.

200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 전쟁을 연구한 정치학·역사학자들은 다른 주문을 내놓는다. “다른 국가들과 강력한 동맹관계로 묶이는 원조·개발 프로그램은 갈등 제거를 위한 진정한 무기다.”(영국 전쟁사학자 존 키건) “‘외교’를 이해한 나라만 역사에서 생존했다. 일단 무력에 의존하면 그 나라는 급격히 쇠퇴한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아니라 ‘모범’에 의해 가장 잘 전파된다.”(스토신저 샌디에이고대 교수) “침략을 막는다는 선의의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라 해도 전쟁 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양쪽 모두에 그 전보다 더 심한 야만성을 가져다준다.”(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 한반도의 위정자들은 지금 21세기의 충고와 19세기의 유혹 사이에 놓여 있다. 유혹에 흔들려 오판하면, 한반도는 19세기로 돌아갈 것이다.

 

 

참고 문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연세대 출판부),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그린비), <오만한 제국>(당대),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갈라파고스),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철학과현실사),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지호), <전쟁의 탄생>(플래닛미디어), <21세기 전쟁>(한국국방연구원)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포탄은 20대를 쏘았다

20대 설문 결과 ‘안보 불안’ 90.3%, ‘전쟁 위협’ 49.2%…
연평도 사태로 다른 세대보다 반북·반정부 정서 심해져
공포의 11월을 건넜다. 그러나 공포의 끝은 멀고 깊다. 공포 너머 공포다. 한국전쟁 60년 만에 20대가 사실상 ‘전쟁 세대’를 자처하고 있다. 연평도 공격에 따른 불안과 분노가 가장 거칠게 폭발한 세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평도의 비극은 이것이다. ‘1950년 전쟁 세대’의 깊은 상처를 추스르고 화해하며 남북 정상이 만나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12월1일 발표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국민 여론에 미친 영향’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이 20대(35.7%)에서 가장 높았다. 30대(32.5%)는 물론 40대(25.1%), 50대 이상(19.6%)을 크게 앞섰다. 연평도 포격 이후 해병대 지원자(12월1~2일)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가량 증가했다. 가장 위험하다는 수색병과에는 11명 정원인데 이미 66명이 지원했다. 병무청 실무자는 “(추세대로라면) 지난해 12월 해병대 지원율인 2.2 대 1을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공교육에서 자유롭고, 21세기 남북 해빙을 청소년기에 목도한 세대다. 이 극적인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MB 정부의 대응 불신해

» 지난 11월2일 강원도 춘천 102보충대를 통해 신병 입소하는 젊은이들.한겨레 춘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21>은 20대를 대상으로 긴급 설문을 벌였다. 취업정보기관 인쿠르트에 의뢰해 11월29일~12월2일 20대 394명(남 231·여 163)에게 조사했다. EAI의 설문을 원용해, 전체 세대의 응답과 견주고자 했다. EAI는 전체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하되 20대는 156명만 포함했기 때문이다. 표본을 확대해본 결과, 20대의 ‘공포 지수’는 기성세대의 것과 더 벌어졌다. ‘전쟁 세대’로서의 징후가 더 짙었다.

EAI가 설문한 전체 성인 가운데 지금의 전반적 안보 상황을 매우 또는 약간 불안해하는 이들은 81.5%였다. 하지만 ‘20대만의 설문’에선 356명(90.3%)이 불안하다고 말했다. 불안의 근거는 또렷하다. 전쟁 가능성이다. 전체 세대는 26.8%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고 말했으나, 20대는 2명 중 1명꼴(49.2%)로 ‘전쟁 위협’을 느낀다. 특히 20대 여성들의 전쟁 불안(55.8%)이 20대 남성의 것(44.6%)을 압도했다. 안보 상황에 대한 불안감도 여성은 95.7%였다. 남성의 86.6%를 크게 넘는다.

EAI 조사에는 없던 공포의 이유를 따로 물었다. 20대는 ‘국가의 전반적 위기 관리 시스템 부재’(37.1%)를 가장 많이 꼽았다. 천안함 침몰 때와도 크게 다른 것으로 보인다. 원인이 명백하고 사상 초유로 언론 중계가 이뤄진데다, 사상자는 적지만 민간인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북쪽 도발로 남쪽 민간인이 숨진 건 1987년 11월 KAL기 폭파와 이명박 정부 시절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사망 사건(2008년 7월)이 마지막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탈냉전 이후 태어난 세대이고 한반도 내부에서 평화 공존의 환경에서 사회화된 세대”로 20대를 규정하며 “연평도 사태는 이들이 처음 경험한 적대적 경험이고 노골적인 민간 폭격으로 충격이 셀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는 정부의 ‘혼란스러운 대북 대응 방향’에 대한 비판(20.1%)에서 ‘미온적 응징 탓’(19.5%)으로 이어진다. 외교도, 전쟁도 모두 실패한 무능력한 정부를 발견한 데서 온 좌절이 공포의 시작인 셈이다.

‘징집 대상 세대’로서의 불안 확산도 커 보인다. 대학 학보사 기자였던 권소영(22·여)씨는 “학과 친구의 친구가 전사한 서 병장이고, 군대에서 휴가 나오기로 한 친구들이 모두 비상이라며 잠도 못 잔다는 전화를 받거나 하는 식”이라며 “같은 세대로 더 피부에 와닿고, 뭔가 더 무섭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설명한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사회학)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추측하건대 군 징집 대상인 젊은 사람들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가 좀더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며 “그동안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관념적이었다면 이젠 현실적으로 바뀌었고 전쟁 두려움도 현실화됐다”고 분석했다.

 

강경한 대북 대응 지지도 높아

» 설문조사

불안 너머 때로 광기가 되기도 한다. 햇볕정책이 현 사태의 원인이라는 보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몰입한다.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한 사이트에는 ‘연평도 북괴 도발 갤러리’가 11월23일 생겼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나아가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까지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사건 이후 경제교류·관광 등 남북관계 중단을 바라는 목소리도 20대에서 가장 컸다. 전체 세대는 42.5%가 찬성한 반면, 20대는 59.4%가 지지했다. 30대 37.2%, 40대가 40.3%였고, 50대 이상도 46.2%에 그쳤다. 남북관계 중단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20대는 32.5%에 불과해 전체 세대의 53.9%와 격차가 더 컸다.

 

이 국면에서 누구도 얻을 게 없어 보인다. 가장 탈민족적인 세대가 가장 반북적인 세대가 되었다. 가장 탈정치적 세대가 가장 반정부적 세대가 되었다. 일주일 새의 변신이다.

 

 

이 국면에서 누구도 얻을 게 없어 보인다. 가장 탈민족적인 세대가 가장 반북적인 세대가 되었다. 가장 탈정치적 세대가 가장 반정부적 세대가 되었다. 일주일 새의 변신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크게 추락했다. EAI의 전체 설문 결과를 보면, 10월 말 51%의 국정지지율은 11월27일 44.2%로 기울었다. 일부에선 1박2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로 대통령 지지도가 60%대까지 올랐다고 소개되던 차다.

20대의 대통령 지지율 추이는 정밀하게 추적되지 않는다. 다만 ‘20대만의 설문’에서 드러난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26.4%(매우 또는 대체로 잘하고 있다)로 세대별 평가 중 가장 인색하다. EAI 조사에서 전체 지지율은 34.6%였고, 40대는 41.2%, 50대 이상은 62%에 달했다.

20대의 정치·사회적 입장 변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강원택 교수는 “지금은 용서할 수 없고 화가 나는 상황이라 그럴 법한 반응을 보이지만, 단계적 대응으로서 지속적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며 다만 “정치·사회적 판단이나 실제 선거 등에서 후보자의 선택 기준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경제가 가장 큰 주제가 되면서 이명박 후보가 떠오른 것처럼 국가 안보가 주요 이슈가 되면 그에 맞는 누군가 떠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냥, 살고 싶은 소시민”

EAI가 2000년부터 당대의 ‘안보 불안감’을 설문한 이래 2010년 11월은 꼭짓점이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의 18.9%는 이명박 정권 이후 59.2%(2009년 3월 2차 북 핵실험), 66.8%(천안함 침몰), 81.5%(연평도 포격)로 물 끓듯 비등했다. 이를 20대가 앞장서 체화하는 형국이다. 향후 대북 노선을 ‘강경책’으로 요구한 20대는 70%로 전체 세대의 42.7%를 무색하게 한다. 오늘의 상처가 내일의 남북관계에서 어떤 장애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20대들을 보는 어떤 시선은 그래서 아리다. “난 북한을 옹호하지도 않고 전쟁을 종용하지도 않으며 젊은이들을 깊이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멍청함이 북한과의 관계를 망가뜨렸다는 진실과 수많은 주요 이슈들이 오늘의 사건으로 인해 당신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트위터 @more_log)

“전쟁은 현재와 미래까지 지워버립니다. 여러분… 어떻게든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정말 힘들지만, 어떻게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저 좌빨(좌파) 아닙니다. 그냥, 살고 싶은 소시민입니다.” (게임 커뮤니티 ‘루리웹’ 토론방)

공포가 진실을 가릴 때, 가장 공포스러워진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살아남은 자의 공포

포탄에 찢긴 살점이 흩어진 섬, 연평도…
공포의 섬에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난민들
 
»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지 이틀째인 11월 24일 새벽, 불안감에 휩싸인 연평도 주민들이 육지로 피난하기 위해 선착장에 나와 배를 기다리고 있다. 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사람 떠난 섬을 개가 지켰다. 주인 잃은 개들이 거리를 배회하다 허공을 향해 짖었다. 사람이 그리운 것인지 미운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개가 짖어대는 하늘은 아직 미명의 낌새도 비치지 않았다. 11월24일 새벽 4시, 연평도는 어둠이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화약의 잔불이었다. 산마다 불이 붙었다. 전날 낮까지도 연평도 대나루 큰 산에는 갯바람 먹은 솔잎 향기가 그윽했을 것이다. 이제 화약 냄새만 을씨년스럽다.

건물은 찢어졌다. 인간이 만든 삶의 물건은 인간이 만든 죽음의 물건에 간단히 찢겨졌다. 신축 건물 공사장의 컨테이너 사무실도 본모습을 알 수 없게 찢겨졌다. 나중에 이곳에서 민간인 2명의 주검이 발견됐다. 새벽의 어둠과 포탄의 잔불에 눈을 빼앗긴 기자는 차가운 죽음의 증거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망자의 주검이 수습된 뒤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주검이 모두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살점을 보았다. 살점에 포탄 파편이 박혀 있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살점을 보았는데, 어찌 글로 옮겨야 좋을지 산 사람은 알지 못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섭다. 살아남아 대면하는 공포가 죽은 이에 대한 슬픔보다 앞선다. 포탄이 떨어질 때, 연평초등학교 1·2학년 학생은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학교에서 공부하던 3·4학년들은 무서워서 울었다. 대피소로 옮긴 아이들은 오줌을 바지에 지렸다. 아이들을 다독이던 연평초등학교 교무부장 선생님도 “여기 온 지 1년이 안 됐는데, 무섭고 불안하다”고 아이들 안 듣는 곳에서 기자한테만 말했다.

“피란 다녀왔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최경화(65) 할아버지는 예전에 들었다. 부모님의 고향은 평양이었다. 연평도로 들어와 가난한 살림의 둥지를 틀었다. 아들을 낳았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모님은 다섯 살 아들 손을 잡고 육지로 피란했다. 부모님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린 아들은 이제 환갑을 넘겼다. 최경화 할아버지도 어제는 피란을 다녀왔다. 희망근로를 나갔다가 전쟁 났다는 소리에 대피소로 도망갔다. 연평도에서 가난은 대물림됐다. 전쟁만은 대물림되지 않을 줄 알았다.

가난을 피할 것인지 전쟁을 피할 것인지 연평도 주민들은 생각이 많았다. “이제 연평도는 굶어 죽게 생겼어. 외지인들은 아무도 안 올 거야.” 유리창이 모두 깨진 집 앞에서 주민 유현숙(53)씨가 말했다. 이날 오전부터 면사무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곳에 더 이상 살기 싫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김응곤(53)씨는 “연평도에서 이제 살 수 있을지 무섭기만 하다”고 말했다. 부서진 집 앞에 앉아 사발면을 먹던 60대 노인은 ”여유 되는 사람들이야 나가면 되지만, 우리처럼 여유 없는 사람들은 인천에 나가도 지낼 곳이 없다. 무조건 여기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인은 지난 밤 이후 사발면이 첫 끼니였다.

고심은 풀리지 않는데 날은 속절없이 바뀌었다. 25일 아침, 20평이 채 안되는 연평초등학교 옆 대피소에서는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한 주민들이 스티로폼을 잠자리 삼아 군용 담요로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무릎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해. 나는 안 나가도 되죠?” 주황색 점퍼와 헐렁한 일바지 차림의 50대 아주머니는 “나는 안 나가도 되는 거냐”고 기자에게 몇 번을 물었다. “아직 마을에 남은 주민들은 모두 면사무소로 모여주십시오.” 갓 복구된 마을 스피커가 울렸다. 무릎이 아프다는 아주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해경특공대원과 주민대책위원회 주민들은 연평도 남부리와 동부리의 민가 지역을 돌아다니며 남아 있는 이들을 찾았다.

낮 12시, 부두에 주민들이 모였다. 해경 경비정에 올랐다. 죽은 자도 함께 배에 올랐다. 전날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두 명의 관이 배에 실렸다. 육지를 향하는 노인과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소수 주민들만 연평도에 남았다. 오후 5시, 이날의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를 떠나려는데 40대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배에서 내렸다. “여기 해병대 기지에서 근무하는 아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못 가겠어요. 전역이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해병대에 아들을 둔 어머니는 남편이 따라 내릴까 걱정하며 몸을 숨기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부부는, 그리고 모자는 함께 손잡고 섬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빈 거리에 다시 개가 짖었다. 사람이 그리운 것인지 미운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연평도=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11월24일 새벽 4시, 연평도가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화약의 잔불이다. 산마다 불이 붙었다. 화약 냄새가 을씨년스럽다.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 북한의 포격으로 연평도 중심가의 주택들이 처참히 부서졌다.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 11월24일 새벽 연평도 지하대피소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아이 뺨에 입을 맞추고 있다. 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 11월25일 북한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연평도에서 군인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 11월24일 오전 연평도 북쪽 해병대 포대와 막사 사이의 도로에 북한이 23일에 쏜 포탄이 박혀 있다.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 11월24일 새벽 연평도 주민 수십명이 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부둣가에 접안한 해경 선박에 오르고 있다. 연평도 한겨레21 류우종

60년 만의 국지전 부활?

최근 잇따른 3개월 주기 충돌은 1949년 국지전 확산과 닮은꼴…
김정은식 군사주의와 이명박식 강경론이 예고하는 암울한 미래
전면전은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징후가 있다. 한정된 영토·영해·영공에서 제한된 병력이 벌이는 국지전이 먼저 등장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그랬다. 1949년 내내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남북 사이에 전개됐다. 남북의 피해가 적개심으로 무르익은 이듬해 6월25일, 전면전이 시작됐다.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해 적어도 200만 명이 사망·실종한 전쟁이 3년간 이어졌다. 죽은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도 1949년의 국지전을 제어하지 못했다. 일단 전면전이 일어나자 어떤 후회도 부질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2010년, 한반도에서 다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 전투가 반복되고 있다. 또 한 번의 징후가 아닐지, 한반도에 공포가 스멀거린다.

 

 

꽃게잡이 철에만 있었던 충돌의 일상화

»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우리 해군 고속정(왼쪽)과 북한 경비정이 충돌하고 있다. 과거 서해안 충돌은 꽃게잡이 철에만 일어났다.

11월23일, 북한은 연평도를 해안포·방사포로 공격했다. 그 포탄은 지난 1년의 정점이다. 2009년 11월10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국 고속정과 교전했다. 한국 정부는 “북쪽 경비정이 반파되어 겨우 돌아갔다”고 승리의 기운에 겨워했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대청해전’으로 부른다. 북한은 방법을 바꾸었다. 두 달 보름 뒤인 2010년 1월27일, 북한은 해안포와 방사포를 NLL 남쪽 해역에 쏟아부었다. 다시 두 달 뒤인 3월26일, 백령도 부근에서 한국의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공격이라고 단정했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서해에 올해 8월9일, 다시 화약 냄새가 번졌다. 북한의 해안포가 NLL 남쪽 해역을 겨눠 포탄을 날렸다. 두 달이 지난 11월23일, 북한은 해안포·방사포 170여 발을 연평도에 집중 포격했다. 민간인 2명, 군인 2명이 죽었다.

사고 원인에 의문이 제기되는 천안함을 제외하더라도, 북한은 개략 두세 달을 주기 삼아 군사 행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일어난 전투함 교전 이후엔 직접 충돌 대신 포격을 택했다. 해안 포격을 시도한 뒤에는 영토 포격까지 감행했다. 일정한 패턴이 생기는 동시에 그 정도가 깊어지고 있다. 김종대 <디앤디포커스> 편집장은 “과거에 없던 주기적 군사충돌이 새롭게 출현했다. 이는 ‘김정은식 군사주의’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김일성 군사종합대학 포병학과를 다녔다. 북한은 김 부위원장이 “현대군사과학과 기술에 정통한 천재이며, 포병 부문에 매우 정통하고, 입체감과 정확도를 갖춘 군사지도를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후계 공식화 이후 김 부위원장의 첫 공개 활동은 포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것이었다. 김정은 후계 구도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리영호 군 참모총장도 포병 전문가다. 이번 연평도 포격에는 ‘김정은 시대’의 흔적이 강하게 배어난다.

과거에는 달랐다. 서해안의 군사충돌은 6월에만 일어났다. 6월의 서해는 꽃게를 품는다. 꽃게를 잡으려는 남북 어민들은 NLL의 경계를 시험한다. 남북의 전투함이 그 둘레를 지킨다. 그러다 우발적으로 충돌한다. 1999년 6월 이른바 ‘1차 연평해전’은 그렇게 발생했다. 2002년 6월 ‘2차 연평해전’은 3년 전 당한 피해에 앙심을 품은 북이 기습적으로 공격한 성격이 짙다. 다만 그 의도를 꽃게잡이 철에 맞춰 드러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발적 충돌이라는 알리바이를 남기려 했던 것이다.


 

2009년 11월10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국 고속정과 교전했다… 2010년 1월27일, 북한은 해안포와 방사포를 NLL 남쪽 해역에 쏟아부었다… 8월9일, 북한의 해안포가 NLL 남쪽 해역을 겨눠 포탄을 날렸다.

 

반면 지난해 11월부터 이어진 연쇄적 무력충돌은 꽃게잡이와 전혀 상관없다. 김종대 편집장은 “지난 1년간 약 3개월 주기로 5차례에 걸쳐 무력충돌 사건이 반복됐다. 북은 일단 도발했다가 남쪽이 대응하면 빠져나가고, 그 기운이 가라앉으면 다시 군사충돌을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연말까지는 다시 잠잠해지겠지만, 현재의 주기와 상황을 볼 때 내년 초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제 서해 NLL 인근의 무력충돌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변하고 있다. 언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되고 있다. 한반도는 평시 상황에서 준전시 상황으로 넘어가고 있다. 김근식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민간 지역을 포함한 영토를 포격해 전쟁 직전 상황을 연상시키는 카드를 쓰면서 북이 (미국과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며 “수시로 포격을 주고받는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처럼 한반도도 국지전과 민간인 사망이 일상화되는 준전시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1949년 남북 사상자 적어도 1천 명씩

1949년에도 한반도는 준전시 상황이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쓴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을 보면, 당시 무력충돌에 대한 남북의 자료가 있다. 북한은 1949년 10월 발표자료에서 “1월부터 9월까지 남한이 432차례에 걸쳐 4만9천여 명의 군경을 동원해 침범했다”고 밝혔다. 남한은 1949년 11월 발표자료에서 “1월부터 10월까지 북한이 563차례에 걸쳐 7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침범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어느 쪽이 먼저 도발했는지 따지는 것은 힘들지만, 남과 북에서 적어도 각각 1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도발에 나선 크고 작은 전투 부대들은 대부분 상대에 의해 궤멸당했지만 전투는 끊이지 않았다.

1949년 국지전을 대표하는 동시에 최근 상황에 견줄 만한 사건은 ‘292고지 전투’다. 개성 송악산 292고지는 38선 이북의 땅인지 이남의 땅인지 논란이 있었다. 지도마다 그 귀속이 남과 북으로 갈렸다. 1949년 5월4일, 진지 구축 공사를 하고 있던 한국군을 북한군이 기습 공격했다. 한국군이 재탈환하고, 북한군이 반격하고, 한국군이 다시 특공대를 투입하는 등 나흘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직후 주한 미대사는 이승만을 만나 “선제공격을 자제하라”고 말했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38선을 침범해 도발하는 (한국) 부대의 지휘관은 군사법정에 세울 것”이라는 명령을 부대에 시달했다. 그러나 같은 달 21일, 더 큰 전투가 벌어졌다. ‘옹진 전투’였다. 역시 38선 경계에 있는 옹진반도 국사봉을 북한군 1개 중대가 공격해 점령했다. 이를 되찾거나 지키려는 전투가 한 달 동안 계속됐다. 한국군은 7개 대대 병력을 동원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제어하지 못했고, 이승만은 군부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지휘관은 일선 군인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거듭된 전투는 적개심과 복수심을 키웠다. 단호한 응징은 더 큰 응징을 불렀다.

충돌은 38선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옹진반도·개성·의정부 등 서부 지역이 단골 무대가 됐다. 서울과 평양이 맞보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경계선의 불확실성을 빌미 삼고, 서해·서부 지역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1949년은 2010년의 무력충돌과 닮았다. 정 교수는 “1949년 당시 옹진반도를 둘러싼 전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단호한 응징은 심각한 불행을 낳는다

» 지난 11월4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자강도 희천발전소 건설장을 방문한 사진을 공개했다. 촬영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연합

국지전은 적의 전력을 탐색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며, 전면전이 발생할 때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다만 이것은 군사논리다. 국지전이 날마다 일어나지 않는 것은 정치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는 사회·경제적 역량을 전투에 소모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 정치권력이 소모적 국지전을 활용하려 달려들 때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전면전에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국지전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똑같았다”고 말한다. 적대적 분위기를 조성해 정권 유지를 꾀하려는 권부의 계산이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기꺼이 감수하게 만들었다. 김 교수는 “권력승계와 경제가 불안한 상황에 처하면 북은 준전면전 상태로 경제위기를 돌파하려고 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

김종대 편집장의 우려도 이 대목에 있다. 그는 주기적·반복적 포격을 감행하는 ‘김정은식 군사주의’와 작전예규와 교전규칙을 적극적·공세적으로 수정하려는 ‘이명박식 군사주의’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23일 연평도 포격이 발발하기 직전 4시간 동안, 한국군이 서해상에서 3657발의 포격을 하며 사격훈련을 벌였다는 사실이 국회 국방위에 보고된 국방부 자료에서 밝혀졌다. 1시간에 900여 발의 포를 쏘았다는 것인데, 그 규모로 보아 북한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훈련은 북한의 포격으로 중단됐다. 압도적 우위를 과시하려는 이명박식 군사주의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김정은식 군사주의가 정면 충돌한 것이다.

 

김종대 <디앤디포커스> 편집장은 “상대가 쉽게 확전하지 못할 때를 노려 도발하는 방식이 장기적·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면전의 파국을 막으면서도 상대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제한된 링’이 필요한데, 그것은 섬을 포함한 바다고 특히 서해라는 것이다.

 

김 편집장은 “상대가 쉽게 확전하지 못할 때를 노려 도발하는 방식이 장기적·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그 장소는 1949년과 달리 육상이 아닌 바다일 것으로 김 편집장은 예측한다. 전면전의 파국을 막으면서도 상대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제한된 링’이 필요한데, 그것이 섬을 포함한 바다고 특히 서해라는 것이다.

다시 포 사격을 하면 공중폭격으로 타격하겠다는 으름장이 청와대와 군부에서 나오고 있다. 공중폭격은 전면전 직전의 상황이다. 김동춘 교수는 “그 정도가 되면 더 큰 전쟁을 원하지 않는 중국과 미국이 적극 개입할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은 한반도를 다시 한번 미·중의 주도권에 갖다 바치는 일이다.

 

 

남북의 충돌은 미·중의 헤게모니로 이어져

1949년 남북간 국지전이 벌어진 데도, 이듬해 전면전이 발발한 데도 미국·소련이 핵심 변수 노릇을 했다. 소련군은 1948년 10월부터 38선상에서 철수했고, 미군은 1949년 1월부터 철수했다. 두 나라 모두 군사고문단만 한반도에 남겼다. 미·소 무력의 공백 상태에서 남북의 권부는 ‘독자적 무력 사용’의 유혹에 빠져 들었다. 동시에 미·소는 남·북한에 ‘선제공격 불가, 반공격 적극 찬성’의 카드를 내놓았다.

미국 전략첩보부(OSS) 부처장 굿펠로우는 1949년 9월 무렵 서울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남측 주도로 북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라. 그러나 북이 남을 공격한다면 그 결과가 3차 대전이 된다 할지라도 곧장 북으로 진군해야 한다.” 소련의 스탈린은 1949년 3월 김일성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북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된다. 적이 침략의도를 갖고 조만간 침략해올 것이다. 그때 반격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지지할 것이다.” 주변 강대국이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결국 그들의 뜻대로 전면전에 돌입했다.

김종대 편집장은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리는 게 교전규칙이고, 그건 북한도 마찬가지다. 이 고비를 끊어내는 계기를 찾아야지, 그저 단호한 대응만 외치면 (남과 북의) 사람들은 계속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과 북이 단호한 대응을 거듭한 끝에 맞이한 한국전쟁에서 적어도 200만명이 죽었다. 2010년은 분명 달라야 한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전략적 오류로 판명된 전략적 인내

미국이 해결을 미루는 사이 북한 핵능력은 통제 불능 수준으로…
북한 핵 용인 어려운 중국도 애매하긴 마찬가지
한반도 안보 상황이 심상치 않다. 북한이 농축 우라늄 시설을 공개했다. 핵 문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를 공격했다. 젊은 청춘들의 죽음이 슬프다.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안타까운 것은 마땅한 대응 수단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도 인정하듯이 유엔안보리 회부는 성과를 보장하기 어렵다. 중국은 이번 사태를 쌍방 교전으로 정의하고, 남북 모두의 ‘냉정과 자제’를 요구하고 있다. 강력한 대북 결의안을 이끌어 내려면 중국의 협조가 중요한데, 이런 입장이라면 기대하기 어렵다.

 

선택할 카드가 없는 한국 정부

»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11월22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북핵 문제 대응방안을 협의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더 강력한 제재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는 이상, 국제사회의 제재는 효과가 없다. 연평도 사태에도 불구하고, 북-중 경협 현장은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한국의 독자적 제재도 마찬가지다. 이미 천안함 사태를 겪으며 교역과 위탁가공 모두를 중단했다. 인도적 지원도 거의 중단된 상태다. 겨우 남아 있는 것이 개성공단이지만, 문을 닫으면 북한에 주는 제재 효과에 견줘 우리 기업이 입는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제재를 하고 싶어도, 더 이상 제재할 것이 남지 않은 상황,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면 군사적 대응이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일전불사를 외치지만, 대한민국 국민 누가 전쟁을 지지하겠는가? 무력시위를 비롯한 군사적 압박이 효과가 있을까? 북한에 주는 심리적 효과는 적으면서, 오히려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번 사태로 금융시장이 순간적으로 출렁거렸지만 하루 만에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시장 참여자들은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추가적 충돌 가능성이 가시화되면, 또다시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공세적 발언’들이 국내 보수층을 안심시키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국내외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화는 옵션에서 제외했다. 정부가 당분간 대화할 상황도 아니고, 그럴 의사도 없어 보인다. 국내 여론으로 보아 북한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상당 시간 지속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이명박 정부의 임기 내에 의미 있는 남북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앗아가버렸다. 내년이 임기 4년차다. 정상회담을 비롯한 의미 있는 대화를 한다면, 내년 상반기가 적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사라졌다. 외교도 제재도 군사 대응도 그리고 대화조차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국내 정치만 남아버린 암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대화할 수밖에 없는 미국

 

국제적으로는 어떨까? 우선 미국의 상황은 복잡하다. 천안함 국면 때와는 다를 것이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국면 주도에 편승했다. 그리고 천안함 국면을 활용해, 후텐마 기지 조정 문제에서 일본을 굴복시켰다. 한-미 관계에서도 얻을 것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미국 내부에서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재의 효과를 비웃으며, 북한은 농축 우라늄 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기술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발전 수준이고 완성도다. 북한은 영변의 5MW 원자로가 노후화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재빨리 우라늄 농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11월 중순에 미국의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팀이 본 것은 소형 경수로 시설과 이에 필요한 저농축 시설이다. 북한은 현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저농축 공장 시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기급 고농축 시설로 전환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 북한의 핵능력은 이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제재를 유지한 채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아쉬운 것은 북한일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이 오류였음이 드러났다. ‘전략적 인내’는 결국 ‘전략적 무관심’이었을 뿐이다. 이제 오바마 행정부는 관심을 보여야 한다.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 역시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미 강력한 제재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제재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군사적 압력을 행사해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11월23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김태영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해 한국 정부가 자제를 보여준 것에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미국의 바람이다.

 

 

연평도 사태는 결코 보복의 악순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군사적으로 충돌하면, 북한이야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해법은 있다. 긴장의 바다 서해를 어떻게 평화의 바다로 전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 접근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미국 내부에서 중국과 대화하라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고 싶지 않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면 결국 미국은 중국의 협력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대해 6자회담 재개 필요성을 언급하고 연평도 사태에 ‘남과 북 모두의 냉정과 자제’를 강조하고 있지만, 속으로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일부에서 중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묵인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북-중 관계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북한의 핵보유는 결국 동북아 핵 도미노 현상의 근거가 되고 동북아 지역의 항구적 불안정성의 원인이 되기에, 중국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것 또한 중국은 원하지 않는다.

 

 

시간은 평화의 편이 아니다

 

결국 미-중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양국은 개입(Engagement)할 수밖에 없음에 동의할 것이고, 그 구체적인 형태는 6자회담 재개일 것이다. 문제는 협상이 교착된 지난 3년 동안 북한이 판돈을 키웠다는 점이다.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협상은 어려워졌다. 북한은 자체적인 경수로 개발과 저농축 우라늄 시설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방관 정책의 예고된 실패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협상이 이루어지더라도 성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북한은 강화된 핵능력만큼이나 추가적 보상을 요구할 것이고, 미국은 ‘보상해서 협상하는 방식’에 부정적이다.

소극적인 협상 자세로는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 협상 쟁점을 다시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음을. 지금 북한 핵은 동결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그래서 협상이 늦어질수록 그만큼 북한의 핵능력은 강화될 것임을. 그래서 더욱 협상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연평도 사태는 결코 보복의 악순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군사적으로 충돌하면, 북한이야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해법은 있다. 긴장의 바다 서해를 어떻게 평화의 바다로 전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 접근이 나와야 한다. 물론 그 해법이란 노무현 정부가 10·4 정상회담을 통해 마련해놓았다. ??? 어떻게 서해 평화 정착을 이룰 것인가? 그것이 해법이다. 국민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기본 책무이기도 하다. 안보가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즉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 미래는 암울하다. 100년 전처럼 다시 한반도의 운명을 주변 강대국들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슬프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가장 비싼 외교가 가장 싼 전쟁보다 낫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외교가 실패하면 남는 것은 전쟁…
유리집에 살며 돌팔매질하고 다닐 수는 없어”
송민순 민주당 의원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참여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과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을 지냈고, 18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평도 사태가 터진 뒤, 11월25일 오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송 의원은 정부의 안보 무능을 집중적으로 꼬집었다. 아울러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해법은 군사적 대응이 아니라 대화와 외교적 노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 송민순 민주당 의원

-연평도 사태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나.

=군사적·정치적 대응 모두 미흡했다. 서해 연평해전 등을 거친 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또다시 도발한다면 해안포가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예고했다. 그렇다면 우리 군은 당연히 해안포를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를 배치했어야 한다. 북한 포대를 정확히 타격할 수 없는 K9 자주포로 응사할 것이 아니라 정밀타격 무기를 활용했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북한이 알도록 해서 사전에 도발을 억제했어야 하는데, 이런 군사적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확전 자제’ 지시 번복도 논란을 빚고 있다.

=국군 통수권자의 안보 역량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안보 현안만큼은 군 통수권자의 내부적 지시와 대외적 메시지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부적으로는 확전이 되지 않도록 대응하라고 지시하되, 대외적으로는 단호히 응징하라고 언급해야 한다. 그런 메시지를 통해 북쪽에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고, 국민의 정서적 분노도 가라앉힐 수 있다. 내부용과 대외용 발언조차 구분을 못하니 국민은 도대체 (정부를) 믿을 수 없고, 현장에서 충돌하기만 하면 패퇴하는 불상사가 빚어지고 있다.


-민주정권 10년간에도 남북 교전은 있었다.

=그때는 말은 자제하면서도 (교전이 벌어지면) 즉각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게 했다. 국가 안보란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했느냐,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라고 비판하지만, 국민은 보호했다.

-연평도 사태를 패퇴로 규정한다면 책임의 문제가 따를 텐데.

=문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인터뷰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 경질 시점 직전에 이뤄졌다). 천안함 사건이나 이번 사태 모두 마찬가지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이처럼 안보에 균열이 생기면 총선을 실시한다. 2004년 3월 마드리드 열차 테러가 터진 뒤 스페인은 곧바로 총선을 실시해 정권을 바꿨다. 우리 국민 가운데 지금 정부가 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남북 긴장은 휴전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고, 국방 태세는 오히려 악화됐다. 충돌만 빚어지면 패퇴하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국방부 장관은 물론 외교·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 등 안보 라인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때 책임진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안보 정책 전체를 바꾸는 걸 전제로 한다. 정책을 바꾸지 않고 사람만 교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한 교전규칙 전면 보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부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 이후에도 휴전선에 대북 확성기를 설치하고 삐라를 뿌린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정작 발표해놓고 북한이 대북 확성기를 조준 격파하겠다고 하니까 슬며시 뒤로 빠졌다. 이게 도대체 뭔가. 말과 행동이 다르니 국민은 정부를 못 믿고, 북한도 (우리 정부를) 우습게 생각한다. 정부가 말하는 걸 우선 북한이 믿게 해줘야 한다. 우리가 준비 태세를 확실히 갖추고 시그널을 보내야 억지력이 통하는 것이다.

 

 

 

“2004년 3월 마드리드 열차 테러가 터진 뒤 스페인은 곧바로 총선을 실시해 정권을 바꿨다. 우리 국민 가운데 지금 정부가 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북한에서는 “남한이 먼저 북한 영해에 포사격을 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남북이 1992년에 채택한 불가침합의서를 보면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이렇게 돼 있다. 그런데 그 뒤 별도의 합의가 되지 않고 있으니, 북한은 (우리의 서해 북방한계선과 다른) 해상군사분계선을 그어 북한 수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반도 전체의 정치·군사적 신뢰 구축이라는 틀 속에서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 서해평화협력지대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우리가 관할하는 수역의 절반과 북한이 관할하는 수역의 절반을 평화협력지대로 설정해 공동 어로 등을 허용하자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린다.

=현 정부가 전 정부에서 이뤄진 모든 남북 간 합의를 무시하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일단 남북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안정과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가장 비싼 외교가 가장 싼 전쟁보다 낫다. 남북 대화도 외교의 일종으로 본다면 거기에는 비용이 든다. 하지만 그 비용이 아무리 비싸도 전쟁보다는 싸다. 지금 한반도에는 외교가 없다. 외교가 실패하면 남는 것은 전쟁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지금은 평화를 말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당장 포격을 받은 상황에서 외교를 말하고 대화를 강조하면 많은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하는데, 흥분과 감정으로 국가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를 생각해야 한다. 강력한 국방 태세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한 달 뒤에도 한나라당이 군사적 응징만을 외칠 수 있겠는가.

-당장 예정된 것은 서해상 한-미 연합훈련이다.

=군사훈련은 어느 나라든 하는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게 미리 통보함으로써 정세의 안정화를 꾀한 뒤 훈련하는 것이 기본이다. 연평도 사태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미국 항공모함을 서해의 좁은 바다에 띄운다는 것인데, 그걸로 정세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이 과거부터 반발해왔고, 그런다고 북한에 실효성 있는 위협을 줄 수도 없다. 북한이 일본 요코스카 기지에 미군의 막강한 항공모함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연평도를 포격했나. 북한이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집단이었으면 한반도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2년 남짓 남았다. 현 정부에는 송 의원의 지적처럼 남북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남북 간에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기에는 이명박 정부가 너무 나가버렸다. 그렇더라도, 설령 남북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하는 정략적 회담이라도, 대화는 필요하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우리가 잃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연평도에 불이 나고 사람들이 대피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이 많이 놀랐다. 서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북한은 정권의 생존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집단 아닌가. 우리 약점이 바로 화려하지만 유리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리집에 살며 돌팔매질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안 된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출처 : 시사IN>

욱’ 해서 전쟁하면 남북한 ‘훅’ 간다
한반도에 전면전이 터지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한·미 양국이 축적해온 시뮬레이션 자료와 북한군 전쟁 계획을 비교해보았다. 이명박 정부의 국방비 긴축 실태와 일본의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도 이어 점검했다.
[169호] 2010년 12월 04일 (토) 00:24:07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11월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7000만 민족에게 ‘전쟁의 그림자’가 늘 곁에 있음을 실감케 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불타는 연평도를 지켜보던 국민은 기어코 ‘작은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아차렸다. 여기에 일본 교도통신이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책임자가 올해가 가기 전에 경기도 지역에 또다시 포격을 가하겠다고 밝혔다”라고 보도하면서,  전쟁 위기감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전면전을 각오하고 북한을 보복 응징하자’는 대북 초강경론도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한반도 전면 전쟁을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재앙으로 받아들인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판단 능력이나 군의 방어 태세 허점 등에 대한 우려나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그렇지만 대북 강경론자들의 주장처럼 전면전을 각오하고 대북 응징에 나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연평도 포격 도발 1주일여가 지난 12월1일 <시사I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면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3%에 불과했다(26~30쪽 기사 참조). 이는 ‘전면전을 불사’할 경우 한반도에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국민 스스로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진합성 시사IN 이정현

 남북이 전면전을 벌일 경우 첨단 무기로 무장한 한·미 양국 군의 막강한 화력과 전쟁 수행 능력의 압도적인 우위로 결국 한·미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공멸’에 가까운 가공할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 또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번에 연평도를 향해 북한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해안포와 장사정포의 가공할 위력은 전면전 발발 시 최종 승패와 별개로 수도권과 서울 전역이 어떤 상황에 빠질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한·미 양국 군사 전문가들은 그동안 남한의 전쟁 수행 능력 우위와 북한의 억지력 우위라는 ‘비대칭적 군사력 균형’이 전면전을 막는 지렛대였다고 본다. 국력과 경제력·외교력·화력 수준 등이 결합된 총체적 전쟁 수행 능력에서 열세인 북한이 대규모 전쟁을 장기간 수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런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오랜 경제난 속에서도 값비싼 전략무기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유사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공격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다량 개발해 비축해둔 뒤,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무자비한 보복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남북한의 전쟁 ‘작전 계획’을 들여다보니…


그러면 남북한은 각각 전면전에 대비한 군사작전 계획을 어떻게 짜두고 있을까. 먼저 북한은 30여 년 전부터 전면전 작전 계획으로 이른바 ‘5-7 전쟁 계획’을 만들어두었다. 1980년대 마련된 이 계획은 개전 초반 포병 중심으로 장사정포 등을 퍼부은 뒤 기계화 부대를 앞세운 보병의 정규전을 통해 5~7일 이내에 서울과 수도권을 점령한다는 작전 계획이다.

   
휴전선 일대 지하 벙커에 200여 대를 배치한 채 서울과 수도권을 향해 포문을 열어둔 북한 포병의 240mm 방사포대.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보병·포병·기계화부대·특수부대를 합쳐 약 100만명에 이르며, 170여 개 사단 및 여단으로 편제되어 있다. 북한군 전력 중 70% 이상(병력 70만명, 대포 8000문, 탱크 2000대 이상)이 비무장지대에서 160㎞ 이내 지역에 주둔해 있으며, 이 중 60개 사단 및 연대가 평양-원산 라인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 핵심 전력의 절반 이상이 비무장지대 인접 지역에 있는 셈이다. 북한군 전력의 상당 부분은 지하 시설에 있으며 전방에만 지하 시설 4000여 곳을 파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순한 북한군 장교들에 따르면 인민군은 휴전선을 따라 서쪽에서부터 제4(해주 방면)·제2(개성 방면)·제5(철원 방면)·제1군단(동해안 방면)을 배치해놓고 있다. 한·미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인민군의 최초 반격전은 공세가 끝나기 5분 전에 시작된다. 북한 상공을 휘젓던 한·미 연합 첨단 전폭기들이 남쪽으로 기수를 돌릴 때쯤이면 인민군 또한 갱도 진지에 있던 방사포와 자주포 등 야포를 꺼내 일제히 사격한다는 뜻이다. 또 노동미사일과 대포동미사일 등으로 비행장 등 군 시설과 원자력발전소 등을 공격하고, 방사포와 화학탄으로 전방과 수도권을 초토화한 다음, 특수전 부대원 10만여 명을 AN-2 수송기로 저공 남하시켜 수도권을 점령한다. 이와 동시에 6개 항공사단에 배속된 전 항공기가 발진해 한·미 공군 기지와 발전소·계룡대 등 주요 거점을 타격한다.

한·미 연합군의 분석에 따르면 개전과 동시에 가장 위협이 되는 북한군 전력은 포병이다. 북한은 1990년대에 장거리포를 두 배로 늘려 현재 서울을 사정거리 안에 두는 170mm 곡사포 300여 문과 240mm 장사정포(다연장 로켓 발사대) 200여 문 등 대포를 모두 500여 문 보유하고 있다(오른쪽 그림 참조). 북한군은 이들 장거리포를 모두 비무장지대와 인접한 곳에 배치해두고 있다. 북한이 보유한 일반 야포는 총 1만2000여 문에 달하지만, 장사정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낡고 사정거리가 짧아 유사시 경기 북부 지역에 집중 피해를 줄 것으로 우리 군 당국은 평가한다.

   
ⓒ사진공동취재단
연평도 도발 후 서해에서 벌인 한·미 연합훈련 때 핵항모 조지워싱턴함 승조원들이 전투지휘소에서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개전 초 포병 부대가 포격전을 벌이는 동안, 전방지대에 있는 인민군 보병은 갱도 진지에 숨는다. 인민군은 오래전부터 한·미 연합군이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벌일 때마다 갱도 진지로 들어가 이른바 ‘유생역량(有生力量)’을 지켜내는 훈련을 반복해왔다. 갱도 진지는 산속 지하 수백m 깊이에 있는데 식량과 물, 탄약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미군 전투기의 정밀 타격으로 갱도 입구가 무너져 몰살할 경우에 대비해 각기 다른 입구 3개도 만들어놓고 있다고 한다.

북한 ‘서울·수도권 점령 후 협상 전략’ 채택


2000년대 이후 한국군과 주한 미군의 첨단 무기와 해군력·공군력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자 북한의 전쟁 수행 계획에도 변화가 생겼다. 1990년대까지는 이른바 종심 타격을 통해 서로의 군사력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전쟁만을 상정했다. 하지만 걸프전 이후 대화력전이 전쟁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잡는 것을 지켜본 북한은, 과거 전면적인 남침을 통한 점령 방식이던 ‘5-7 계획’에서 ‘제한적 점령 후 협상’ 방식으로 전쟁 대응 계획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개전 초기 전투력을 집중 투입해 서울과 수도권을 점령한 뒤 그 상태에서 협상에 들어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남한 전역을 삽시간에 점령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은 북한이 경제력과 인구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을 점령하면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의 전면전 계획에 대비해 한·미 양국은 5개 작전 계획을 수립해 운용하고 있다. 작전 계획 수립은 모두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주관한다. 한반도 전쟁 관련 작전계획은 모두 앞에 50이 붙는데 이는 한반도를 관할하는 태평양사령부에 부여된 숫자다. 정밀 공습 계획인 작계 5026, 전면전 작전 계획인 5027, 북한 우발 사태 시 개념계획인 작계 5028, 그리고 북한 붕괴 계획인 작계 5029, 전쟁 예비 단계에서 북한 후방 지역을 동요시키는 계획인 작계 5030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 작전은 남북한 전면전쟁을 가정한 작전계획 5027이다. ‘5-7전쟁 계획’에 따라 남침한 북한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밀어낸 뒤 반격해 올라가는 내용을 담은 5027은 2~3년마다 수정보완을 거듭하다가, 1994년 북한 정권 붕괴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고, 1998년에는 북한의 확실한 도발 징후 포착 시 선제공격, 2002년에는 도발 징후 포착 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포함한 수뇌부 제거 및 선제공격 개념이 반영되었다. 2004년에는 북한 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비책이 추가되었다.

최근에는 북한 붕괴 계획인 작계 5029와 연계된 작계 5026이 주목받는다. 북한이 ‘미제의 북침 전략’이라며 가장 크게 반발하는 작계이기도 한 5026은 북한 수뇌부에 대한 족집게식 제거 작전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유사시 전방 지역의 북한 장사정포를 정밀 공격해 수도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북한 정권 수뇌부에 족집게 공격을 가해 전쟁 지휘 능력을 조기에 무력화하며 △핵 및 생물화학 무기, 미사일 기지 공군 기지 지휘소 통신 시설 등을 정밀 타격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조기에 마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B-2 스텔스 폭격기와 F-117 스텔스 전투기를 동원해 전면전 없이 핵심 전략 목표를 정밀 타격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는 항공모함 칼빈슨함과 LA급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과 순항미사일 등으로 북한 방공망을 무력화한 뒤, F-15 전투기 등에서 발사되는 제이담(JDAM) 위성 유도 공대지 미사일로 개전 약 두 시간 이내에 북한 장사정포 진지를 포함한 850여 기의 전략 목표를 무력화시키면서 북진을 수행한다는 전쟁 수행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스마트 폭탄이라 불리는 제이담은 F-15 전투기에 장착한 뒤 위성 항법장치에 따라 미리 입력된 북한 장사정포 지하 갱도를 파괴하는 고성능 폭탄이다. 한국군은 2006년까지 제이담 폭탄 1000여 기를 미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작전은 부시 정부 당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필두로 하는 네오콘 세력이 적극 주창한 전쟁 계획이었다. 이들 네오콘은 이렇게 북한을 일거에 공격하고 나면 북한이 패닉에 빠져 반격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 같은 선제 전쟁 수행 전략은 당시 한국 정부의 반대와, 미국 내 군사 전문가들의 비판에 밀려 수행하지는 못했다. 당시 참여정부는 미국의 이런 공세적 전쟁 수행이 남북한 민족의 파국을 몰고 올 것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 정부, 선제적 타격 전략 세워

이렇게 되자 미국은 일본과 독자적으로 북한 영변 핵시설을 타격하겠다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24~25쪽 기사 참조). 그렇지만 이 전략 역시 미국 내 군사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딪쳐 시행하지는 못했다. 당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영변 원자로와 핵 재처리 시설은 고정 목표라 타격이 가능하지만, 이미 북한이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핵폭탄과 플루토늄 저장 시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 △이미 제조된 핵폭탄과 플루토늄 저장 시설 위치를 파악했다 한들 미군이 보유한 벙커버스터 폭탄에 대비했을 텐데 타격이 가능하겠느냐는 점 △정밀 타격으로 핵시설을 폭발한다고 해도 광범위한 방사능 낙진이 발생해 동해를 거쳐 한국과 일본까지 오염시키는 재앙을 발생시킬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이것이 비현실적인 계획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김정일 위원장을 타깃 삼아 타격할 경우 광적으로 흥분한 북한 지도부가 남한과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를 타격할 우려가 있고, 화학무기와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과 소형 포탄이 서울로 날아들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미국 네오콘의 무책임한 전쟁 도발 시나리오로 배척을 당했다.

   
ⓒXinhua
7월26일 남중국해에서 한·미 합동훈련에 대응해 미사일 발사 훈련을 벌이는 중국군.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공세적 대북 군사 작전 개념은 군에서 다시 부활했다. 2009년 초 국방부는 대통령에게 우리 항공 전력으로 북한의 영토를 타격한다는 선제적 타격 전략을 보고했다.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이 내용은 곧바로 언론에 크게 알려졌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군이 운용하던 작전 예규, 위기 유형별 대응 매트릭스, 각종 국지 도발 계획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초강경 계획이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북한의 영토를 직접 선제 타격하는 구체적 계획이 수립된 것은 적어도 지난 10년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아울러 ‘북한 급변 사태 대비 계획’이라는 이른바 ‘부흥 계획’까지 수립한 사실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수정된 5029 계획안이다. 군부 내 강경론자들은 이렇게 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 우월주의’에 입각한 ‘북한 굴복시키기’가 남한의 국방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북한 군부는 남측의 군사 대비 태세를 시험하고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도발을 시도했다. 연평도 포격 도발은 그 결정판이나 다름없다.

전면전을 불사하고 북한을 압박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는 강경론자들의 주장은 미군을 끌어들인 다음, 정밀 타격과 화력전을 통해 무력으로 북진 통일을 달성하자는 주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전면전 불사론자 중 일부는 만일 미군이 결심만 하면 북한 수복은 물론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까지 펼친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중국이 자동으로 북한을 도와 개입하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는 우리 군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체결한 ‘조·중 상호원조 조약’의 자동 개입 조항에 따라 북한 영토가 침략을 받았을 때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다. 합참에서는 유사시 중국의 지원 규모에 대해 중화인민군 18개 사단 40여 만명과 항공기 800여 대, 함정 150여 척이 북한군을 도와 참전할 것으로 분석한다. 군사 평론가 김종대씨는 “연평도 포격 사태 후 핵항모 조지워싱턴함이 서해에 뜨면서 중국 내 여론 주도층 대다수가 ‘서해가 제2의 타이완해협이 됐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전쟁도 남북한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미국과 중국이 맞붙으면서 국제전 성격으로 변했듯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또다시 미·중 간 대리전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쟁나면 하루 만에 재기불능 후진국으로 전락
[169호] 2010년 12월 04일 (토) 00:24:45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한·미 양국군이 오래전부터 실시한 ‘워 게임’ 시뮬레이션 결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면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93~1994년 이른바 ‘1차 북한 핵 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만든 전쟁 수행 시나리오는 폭격기를 동원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할 경우, 북한이 전면전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 1만7000명과 일본 주둔 미 해병대 1만5000명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이럴 경우 개전 24시간 안에 군인 20만명을 포함해 수도권 중심으로 민간인까지 약 150만명이 사상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군이 개전 초기 5일 이내에 예비군 400만명을 소집해 전선에 투입하고, 미국 본토와 전 세계에 흩어진 미국 육군 등 130만명을 후속으로 한반도에 집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화력과 막대한 병력을 집중시키면 개전 1주일 이내 남북한 군인과 미군을 포함해 군 병력만 최소 100만명이 사상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민간인 피해는 더 극심했다. 개전 24시간 이내에 수도권이 북한 장사정 포탄의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되면 150여 만명 민간인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경제적 손실도 엄청나서, 1994년 당시 화폐가치로 따져 3000억 달러의 피해가 예상되었다. 이 같은 내용의 피해 예측 시뮬레이션이 나오자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사가 백악관에 영변 핵시설 폭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긴급 건의문을 보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특사로 급파하면서 극적으로 전쟁을 모면하고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를 상정한 워 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한 피해 산출은 2004년 우리 군이 다시 실시했다. 이때는 10년 전 피해 추정치보다 1.5배 이상 늘어난 전쟁 피해가 예상되었다. 즉 한반도 전쟁 발발 이후 24시간 이내에 서울 수도권 시민과 국군, 주한 미군을 포함한 사상자가 1994년 추정치 150만명에서 230여 만명으로 늘어났다. 또 잿더미로 변한 나라의 재산 피해도 1조 달러에 이르러 한국은 사실상 재기하기 힘든 후진국으로 전락한다는 결론이었다.

 

 

군은 경고했지만, 청와대는 대책이 없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은 우발적인 공격이 아니다.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긴장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간 군 당국은 북한이 NLL 유역에서 다양한 도발을 하리라 보고했지만, 청와대의 대책은 없었다.

[168호] 2010년 11월 29일 (월) 10:16:00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포격은 연평도가 받았는데 불길은 청와대로 번진 느낌이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맞서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성난 여론 앞에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곤혹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야,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이번 사태와 이명박 대통령의 초기 대응 태도를 놓고 비난이 거세다. 보수 진영은 이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군 통수권자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며,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철저하고 단호한 보복 응징에 나서라고 압박하고 있다. 반면, 야권과 진보 진영은 북한의 이번 도발이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대북정책 실패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북 정책을 재점검하라고 주문한다.

   
ⓒ국방부 재공
11월23일 북한이 발사한 포탄을 맞아 연평도 해병대의 K-9 자주포 진지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급기야 청와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후속 조처를 발표했다. 교전수칙을 개정하고,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에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을 증강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당장 내년에 국방 예산 26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쫓기듯 내놓은 수습책에는 천안함 사태 때부터 인책론에 시달렸으나 이 대통령이 감쌌던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경질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런 후속 조처들이 서해 5도 주변 북방한계선(NLL) 지역에 도사린 분쟁 위험에 대한 근본적인 대비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NLL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30일 유엔사 측이 북한과 접경한 백령도·연평도 등 서해 6개 도서와 북한 해안의 중간지점 해상에 임의로 설정한 선이다. 북한은 NLL에 맞서 서해 5도 남쪽 해상에 군사분계선을 임의로 설정한 뒤, NLL 주변 수역에서 한국군이 훈련하는 것을 자기네 영해 침해라고 우겨왔다.

작년 봄 북한의 해안포 위험 경고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해 5도 주변 수역에서 간헐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정도였다. 현 정부 들어 이 일대가 차츰 ‘죽음의 바다’로 변모해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은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 기존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폐기하고, 북한에 대해 고립·압박 정책과 철저한 무시 전략으로 돌아서면서 NLL에서의 충격적 도발이 잉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포문은 2009년 1월 북한 인민군총참모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서 먼저 열었다. 총참모부가 전면에 나서 ‘대남 전면대결 태세’를 선포하고 초강경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어 조평통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불법적인 것이며 서해 우리 측 영해에 대한 침범 행위가 계속되는 한 우리 혁명적 무력은 세상에 선포한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그대로 고수하게 될 것임을 명백히 밝힌다.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까지 조선 서해에는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 군사분계선만이 존재하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라고 밝혔다. 조평통은 동시에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관련된 기존 모든 합의를 무효화한다”라고 선언해 사실상 전쟁을 불사한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북한의 NLL 도발을 예고하는 일련의 사태가 전개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유사시 대비책이 무엇인지를 국방부에 물었다. 2009년 봄 국방부는 청와대에 북한의 해안포가 증강되고 있다고 보고하며, 북한의 NLL 침범과 서해안 해안포에 의한 우리 함정의 피격 가능성 등 여러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북한이 도발할 경우 육·해·공 전력을 동원해 초전 제압하는 작전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연합뉴스
국방부의 이런 비밀 보고 뒤 보수 일간지 대부분은 일제히 북한 해안포 증강 실태를 도표까지 곁들여가며 보도했다. 북한 4군단이 보유한 지대함 미사일과 장사정포의 제원·위치·개수·이동 동향까지 샅샅이 드러내는 보도가 폭주했다. 연평도 등지에 배치된 우리의 K-9 자주포로 대응 사격을 벌인다는 작전계획도 공개되었다. 2009년 2월16일자 <조선일보> 보도는 압권이었다. “합참과 해군 등 군 당국은 북한이 NLL에서 다시 도발할 경우 백령도 등에 배치된 K-9 자주포, 해군 4500t급 구축함·초계함·호위함 등의 76㎜·127㎜ 함포, 공군 F-15K ·KF-16 전투기 등 지·해·공 전력(戰力)을 총동원해 초기에 제압한다는 계획이다.”

보수 언론의 기밀 누설식 경쟁 보도는 그 뒤로도 무차별로 이어졌다. 3월10일에는 <세계일보>가 이렇게 보도했다. “북한의 NLL 도발 때 우리 군은 F-15K 전투기를 투입해 북 해안포 기지와 함정, 장사정포를 정밀 타격한다는 시나리오를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군 당국이 북한 도발 시 백령도·연평도 등에 배치된 K-9 자주포, 해군 함정의 76㎜·127㎜ 함포, 공군 F-15K·KF-16 전투기 등 지·해·공 전력 가운데 F-15K를 선제 타격 전력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이 같은 보도는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북한이 보유한 수호이 등 전투기 출격 횟수가 갑자기 여섯 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장산곶을 비롯한 북한 내 군사기지에 장사정포와 지대함 미사일 같은 무기들이 부쩍 증가했다. 서해 5도에서 긴장은 이렇게 급격히 고조되어온 것이다.

‘군사적 우월주의에 기초한 북한 굴복시키기’라는 군부의 변화된 대응 기조는 지난해 11월 NLL에서의 군사 충돌로 비화했다.  NLL을 2.2km 남하한 북한 함정에 대해 우리 쪽이 경고 사격을 가하자, 이에 북 함정이 응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함정이 총탄 10발을 맞았다. 그러자 우리 함정은 도주하는 북한 함정을 NLL 너머까지 추격해 약 3분 동안 총포탄 4960발을 퍼부은 끝에 최소 8명을 사망케 했다.

기습 상륙작전 시나리오도

이 충돌에서 크게 당한 북한은 올해 1~3월 한시적으로 NLL 일원 다섯 곳에 ‘통항 금지구역’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해안포 사격훈련을 감행하며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갈수록 군사적 대치와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3월26일 밤, 해군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단을 향해 북상하다가 원인 모를 수중 폭발로 침몰했다. 남한은 민·군 합동조사를 통해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피격됐다고 발표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대치 국면 속에 NLL에서 실전 훈련을 벌이던 우리 군이 11월23일 한국전쟁 이후 최초라는 연평도 포격 도발을 당한 것이다.

과연 정부는 북한 해안포에 의한 직접 공격 가능성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군 소식통들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북한이 임의로 설정한 해상 군사분계선을 사수하기 위해 NLL 유역에서 다양한 도발을 일으킬 것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보냈다고 말한다. 그 양상도 변모해 과거처럼 NLL을 중심으로 남북한 함정끼리 밀어내기 식으로 반복적 도발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한국 함정이나 서해 5도 내 군사 시설을 겨냥한 해안포 사격, 북한군 특수부대의 서해 5도 일부 섬 기습 점령 등 다양한 도발이 벌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던 것이다.

   
ⓒ연합뉴스
1999년 6월15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남북한 해군 함정끼리 무력 충돌한 제1차 연평해전.

지난봄 김열수 교수(국방대)는‘북한의 무력도발 위협, 심리전인가 실체인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서해 5도에 대한 북한의 공격 도발 또는 기습 상륙작전을 예고하고 대비책을 촉구했다. 그는 특히 주민과 해병대 1개 소대만 주둔하고 있는 작은 섬 소청도가 북한 특수작전 부대의 기습 점령에 가장 취약한 곳으로 지목된다고 분석했다. 공기부양정을 이용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악천후나 야음을 틈타 소청도에 기습 상륙해 주민들을 인질로 삼고 버틸 경우, 포격이나 강경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노린 도발도 예상된다는 시나리오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월 발생한 천안함 사건 이후 잇달아 대북 강경 대책을 내놓았지만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대부분 엄포성 구호로 그쳤다(29쪽 딸린 기사 참조). 특히 이번 연평도 포격전의 경우 군 당국이 사건 당일 구체적으로 다가온 북의 도발 징후와 경고음조차 외면하고 무시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북한은 포격 당일 오전, 우리 군에 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강행할 경우 보복 공격하겠다는 전통문을 보냈다. 또 이날 오전과 오후 연평도에서 15.5㎞ 떨어진 북한 개머리 해안포 기지 주변에 방사포 18대가 추가 배치되는 이상 징후 또한 군 당국에 포착되었다. 하지만 군은 ‘전에도 있던 일’이라며 아무런 대응 조처를 하지 않은 채 방심하고 훈련에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군은 바로 이 장사정포를 이용해 11월23일 오후 연평도 포대를 조준 공격해 2대를 고장나게 만든 것이다.

군사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연평도 포격 도발 사태는 서해에서 강도 높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해서 NLL 유역의 군사적 ‘비대칭 위협’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섬과 해역에서 군사작전이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은밀성과 복잡성이 높은 상태에서 연합 해군의 핵 항공모함이 시위를 한다고 이 지역 안보가 궁극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해봤더니…

하루만에 240만명 사상 호전론자들 주장대로 전쟁을 하면 한·미 연합군이 승리한다. 그러나 ‘민족 공멸’의 피해를 피할 길이 없다. 전면전 발생 하루 만에 230여 만명이 사상한다. 경제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진다.

[142호] 2010년 05월 31일 (월) 10:36:13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호전론'이 급격히 힘을 받고 있다. 천안함 사건 직후와 비슷한 양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그 피해를 되돌릴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기사는 천안함 사건 직후인 시사IN 142호에 실린 내용이다(편집자 주). 

한반도에 전쟁 위기감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5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의 천안함 사태에 대한 대북 강경 조처 발표를 기점으로 해서다. 대통령 담화 이후 남북한이 시소게임을 벌이듯 쏟아내는 군사적 긴장 확대 조처는 브레이크 없는 두 기관차가 선로 위에서 마주 보며 돌진하는 형국이다. 남측은 남북 해운합의서 즉각 파기와 제주해협 북한 상선 통행 차단, 북한 지역에 전단 대량 살포, 휴전선 전역에서 대형 확성기를 통한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 한·미 연합 대규모 훈련 실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해상차단훈련 실시 등을 공언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현 사태를 ‘엄중한 전쟁 국면’으로 받아들인다고 엄포를 놓고 결정적인 반격 태세를 갖추라고 전군에 지시했다. 아울러 전군에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하고 이명박 정부 임기 동안에는 모든 대남 관계를 단절하며 통신도 끊고, 개성공단 사무소 폐쇄, 적십자 사업 중단, 남측의 해상 침범에 대한 군사적 조처, 심리전용 확성기에 대한 조준 격파 등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더 나아가 ‘그 어떤 응징과 보복, 대북 제재에 대해서도 즉시 전면전쟁을 포함한 여러 강경 조처로 맞설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맞서 우리 군은 대북 감시 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했다. 또 국방부는 개성공단 내 남한 노동자 억류 사태 시 구출작전 등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청와대 제공
지난 3월30일 천안함 사고 현장을 방문하기 전 백령도 해병대 6여단 상황실에서 천안함 관련 보고를 받는 이명박 대통령(왼쪽).


이런 한반도 상황 전개 속에 뉴욕타임스·로이터·CNN 등 세계 주요 언론은 남북한 긴장 고조 사실을 크게 다루면서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을 일제히 분석기사로 내놓고 있다. 국내외 군사전문가들은 ‘한국이 자제력을 보이는 한’ 전면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남북한 양측이 현재처럼 초강수로만 치닫는다면 휴전선에서 우발적 충돌이 생길 경우 얼마든지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본다.

천안함 사태 대응책으로 전면전도 각오하고 대북 응징에 나서자는 ‘전쟁 불사론’은 이 대통령 담화가 나오기 전부터 극우 보수 진영에 팽배해 있었다. 여기에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천안함 조사 결과 발표를 전후로 연일 전쟁 불사론에 불을 지폈다. 특히 5월20일자 중앙일보는 김진 논설위원이 쓴 칼럼을 통해 ‘국민이 3일만 참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폈다. 그는 “오산·수원의 지휘관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육해공 합동으로 3일 내에 북한 장사정포의 최소 70%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만일 북한이 도발해도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북한의 핵심 목표를 폭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26쪽 인터뷰 기사 참조).

호전론에 기댄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연일 계속되는 보수 세력의 전쟁 불사론 총공세에 자극받았는지 천안함 사태 대응책으로 지난 20여 년간 힘겹게 쌓아올린 남북한 사이의 전쟁 방지용 안전핀을 사실상 뽑아버리는 길을 택했다. 담화 발표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전쟁을 감수하고 강력 대응하라’고 주문하는 이른바 보수 원로들에게 둘러싸여 강경 일변도로 나갈 것임을 과시했다. 대통령이 일부 보수 극우 세력의 호전론(24~26쪽 딸린 기사 참조)에만 기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형국이다.

   
ⓒ사진공동취재단


과연 전면전을 각오하고 모든 남북 관계를 단절한 채 군사 충돌로 치달으면 천안함 사태가 남긴 숙제는 해결될까. 북한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강경하게 밀어붙이라고 대통령을 압박하고, 국민을 선동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상황이 전개되면 나라와 국민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남북한 사이에 전면전쟁이 발생할 경우 첨단무기로 무장한 한·미 양국 군의 막강한 화력과 전쟁 수행능력이 압도적 우위에 있어 결국 한·미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민족의 공멸’에 가까운 가공할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미 양국 군이 오래전부터 실시한 ‘워게임’ 시뮬레이션 결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94년 이른바 ‘1차 북한 핵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만든 전쟁 수행 시나리오에 따르면 폭격기를 동원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할 경우 북한은 전면전으로 대응한다.

시뮬레이션 결과 개전 24시간 안에 군인 20만명을 포함해 수도권 중심으로 약 150만명이 사상할 것이라고 나왔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은 예비군 400만명을 소집해 개전 5일 안에 전선에 투입하고 미국 본토와 전 세계에 흩어진 미 육군 130만명도 한반도에 집결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세계 최고의 화력과 엄청난 병력이 집중되면서 개전 1주일 이내에 남북한 군인과 미군을 포함해 군 병력만 최소한 10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전망됐다.

남한 측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해 전쟁 1주일을 넘어서면 약 5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측됐다. 경제적 손실도 엄청나서 1000억 달러의 손실과 3000억 달러의 피해 복구 비용이 예상된다고 나왔다. 그것도 1994년 당시의 경제 규모를 기준으로 한 미군 측의 피해 예측치였다. 당시 이런 내용의 전쟁 피해 예측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자 주한 미군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가 백악관에 영변 핵시설 폭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긴급 건의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미국 클린턴 정부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특사로 급파하면서 극적으로 전쟁을 모면한 뒤 협상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다.

   
ⓒXinhua
지난해 북한정권 수립 60돌을 기념해 열린 노농적위대 열병식.


남북한이 전쟁을 벌일 경우를 상정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한 피해는 2004년 합동참모본부가 실시한 ‘남북군사력 평가 연구’에서도 다시 산출됐다. 이때는 10년 전 피해 추정치보다 1.5배 이상 늘어난 전쟁 피해가 예상됐다. 즉 한반도 전쟁 발발 이후 24시간 이내에 수도권 시민과 국군, 주한 미군을 포함한 사상자가 1994년 추정치 150만명에서 230여 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나왔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한·미 연합군이 전쟁 초기에 이처럼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다고 스스로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전쟁이 발발한다면 서울과 수도권이 바로 전선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면전이 발발하면 북한은 개전 초기 1만2000여 문의 포로 시간당 포탄 50만 발을 쏟아 붓는다. 그중 장사정포 1000여 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낡고 사정거리가 짧은 박격포라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군 당국은 평가한다. 가장 위협적인 대상은 장사정포로, 북한군은 170mm 자주포 6개 대대(550여 문)와 240mm 방사포 11개 대대(440여 문)를 운영한다. 각각 사정거리 70km와 50km인 두 장사정포는 대부분 남한 수도권과 가까운 휴전선 10km 이내에 집중 배치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은 물론 수원까지 타격이 가능한 장사정포는 전쟁 초기에 시간당 2만4000여 발을 서울에 쏟아 부을 수 있다는 것이 주한 미군의 평가다.

장사정포 사격에 의한 대규모 인명 및 시설 피해는 포탄 폭발에 의한 직접 피해보다 서울과 수도권을 거미줄처럼 잇고 있는 각종 가스관과 유류 저장시설, 전기·통신시설 등이 파괴되면서 초래할 2차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도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이다. 더욱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경우 북한은 한국의 예비군 동원을 저지하기 위해 고폭탄과 화학탄 등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이 경우 수도권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끔찍한 인명피해가 나올 수 있다. 우리 군 당국은 생물화학탄 한 발이 도시에 떨어지면 7000~1만명의 인명 살상력을 갖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Xinhua
올해 4월 군부대 종합훈련을 참관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쟁불사론은 선제공격론의 변형

하지만 한국 군부 내 강경파와 일부 호전적 보수 세력은 한·미 연합군이 막강한 화력과 첨단무기로 북한군의 장사정포 위력을 전쟁 초반에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다고 호언한다. 특히 북한과의 전면전을 가정해 오래전부터 수립해온 전쟁 수행 계획들이 잘 운용되고 있어서 선제 공격을 통해 초전에 북한 수뇌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 피해를 최소화한 상태로 북진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도 서슴없이 내놓는다.

이런 선제 공격론은 부시 행정부 시절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필두로 한 미국 내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에서 구상한 전쟁계획이 모태다. 당시 네오콘은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막강한 첨단 화력으로 북한 핵시설과 평양 김정일 위원장의 거처를 기습 선제공격해 궤멸시키면 북한군은 패닉에 빠져 반격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 보고 한국에 적극 참여를 요구했지만 전면전을 우려한 참여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한·미 양국은 북한을 상대로 5개 전쟁계획을 수립해 운용 중이다. 정밀 공습계획인 작계 5026, 전면전 작전계획인 5027, 개념계획인 작계 5028, 북한 붕괴계획인 작계 5029, 전쟁 예비단계 북한 후방지역 동요계획인 작계 5030 등이다(한반도 전쟁 관련 작전계획은 모두 앞에 50이 붙는데 이는 한반도를 관할하는 태평양사령부에 부여된 숫자다). 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남북한 전면전쟁을 가정한 작전계획이 5027이다. 1974년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휴전선 이북으로 밀어낸 뒤 반격해 올라간다는 내용을 담은 작계 5027은 2~3년마다 수정 보완을 거듭했다. 1994년에는 북한 정권 붕괴에 대한 내용이 추가됐고, 1998년에는 북한의 확실한 도발 징후 포착 시 선제공격, 2002년에는 도발 징후 포착 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포함한 수뇌부 제거 및 선제공격 개념이 반영됐다. 2004년에는 북한 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비책이 추가됐다. 한반도 전쟁 발발 시 미국 증원군 69만명, 함정 160여 척, 항공기 2000여 대가 추가 파병되도록 설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북한 붕괴 계획인 작계 5029와 연계된 작계 5026이 주목된다. 북한이 ‘미제의 북침전쟁 계획’이라며 가장 크게 반발하는 작계이기도 한 5026은 공세적 선제 공격을 위한 ‘북한 수뇌부 족집게식 제거’를 핵심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유사시 전방 지역의 북한 장사정포를 정밀 공격해 수도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북한 정권 수뇌부에 족집게 공격을 가해 전쟁 지휘능력을 조기에 무력화하며 △핵 및 생물화학무기와 미사일기지·공군기지 지휘소의 통신시설 등을 정밀 타격해 전쟁 수행능력을 조기에 마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B-2 스텔스 폭격기와 F-117 스텔스 전투기를 동원해 전면전 없이 핵심 전략 목표를 정밀 타격하는 계획이다. 또 핵항공모함 칼빈슨함과 LA급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 및 순항미사일 등이 북한 방공망을 무력화한 뒤, F-15 전투기 등에서 발사되는 제이담(JDAM) 위성 유도 공대지 미사일이 개전 약 2시간 이내에 북한 장사정포 진지를 포함한 850여 개의 전략 목표를 무력화시킨 후 북진한다는 전쟁 수행계획이다.

   
ⓒ뉴시스
F-15 전투기에 장착해 북한 장사정포 진지를 정밀 타격하기 위해 도입한 제이담(JDAM) 미사일.


스마트 폭탄이라 불리는 제이담은 F-15 전투기에 장착한 뒤 위성 항법장치에 따라 미리 입력된 북한 장사정포 지하 갱도를 파괴하는 공대지 고성능 폭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대응해 위장한 장사정포 갱도를 적잖이 만들어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연합군은 북한 장사정포 진지 위치를 100% 확보하고 있지도 못하며, 북한이 불시에 갱도에서 밖으로 포를 이동할 경우 스마트 폭탄은 빈 갱도만 파괴할 수도 있다.

또 북한은 오래전부터 미국과의 핵전쟁을 상정해 군사시설만이 아니라 산업시설도 지하에 마련해 요새화해왔다. 이들 지하 군사기지는 융단폭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산을 100m 가까이 파고 만들었다. 여기에는 식량·물·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으며 작전 지휘소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걸프전 당시처럼 미군이 토마호크 순양미사일을 발사하거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전폭기로 북한의 레이더 기지를 폭격한다 해도 북한 전역에 구축해놓은 지하 요새를 모두 파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전방의 북한 장사정포 진지 위치 확보율이 70%라는 뜻으로 3일만 참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은 큰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부시 정부 당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필두로 하는 네오콘 세력이 적극 주창한 전쟁계획으로, 그들은 이렇게 북한을 일거에 공격하고 나면 북한이 공황 상태에 빠져 반격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런 선제 전쟁 수행 전략은 당시 한국 정부의 반대와 미국 내 군사 전문가들의 비판에 밀려 수행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미국의 이런 공세적 전쟁 수행이 전면전을 불러 남북한에 공통의 파멸을 몰고 올 것이라며 일축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일본과 독자적으로 북한 영변 핵시설을 타격하겠다는 전략을 들고 나왔지만 미국 내 군사 전문가들의 염려와 반대에 부딪혀 시행하지는 못했다. 당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영변 원자로와 핵 재처리 시설은 고정 목표라 타격이 가능하지만 이미 확보했으리라 추정되는 핵폭탄과 플루토늄 저장시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 이미 제조된 핵폭탄과 플루토늄 저장시설 위치를 파악했다 한들 미군이 보유한 벙커버스터 폭탄에 대비했을 텐데 타격이 가능하겠느냐는 점, 정밀 타격으로 핵시설을 파괴한다 해도 광범위한 방사능 낙진이 발생해 중국·러시아는 물론이고 일본까지 방사능에 오염되는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므로 비현실적 망상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시사IN


아울러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직접 타격을 시도할 경우, 북한 지도부를 광적으로 자극해 북한은 남한과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를 미사일로 타격할 것이고, 화학무기와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 및 소형 포탄이 서울로 날아들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기습 선제공격 전략은 미국 네오콘의 무책임한 전쟁 도발 시나리오라고 배척당했다. 현재 북한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는 전쟁 불사론은 바로 이런 네오콘식 선제 정밀 타격과 전쟁 수행을 통해 무력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주장의 판박이다.

일부 국내 호전론자들은 만일 미군이 결심만 하면 북한 수복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친다. 그들은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는 미국과 중국의 전면전쟁도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비이성적 전쟁 광기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전쟁 터지면 중국군 40여 만명 참전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중국이 자동으로 북한을 도와 개입하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는 우리 군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체결한 ‘조·중 상호 원조조약’의 자동 개입 조항에 따라 북한 영토가 침략을 받았을 때 북한에 군사 지원하기로 돼 있다. 합참에서는 유사시 중화인민군 18개 사단 40여 만명과 항공기 800여 대, 함정 150여 척이 북한군을 도와 참전할 것으로 분석한 뒤 이를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한 바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쟁은 최종 승자가 누구냐와 상관없이 곧 남북한 모두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을 초래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경우 무기체계의 발달로 한국전쟁보다 17배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남북한의 정규군은 175만명으로 한국전쟁 당시보다 6배 이상 늘었고, 각종 첨단무기의 파괴력은 80배 이상 증가한 상황이다. 한국전쟁 당시 3년간의 전쟁으로 인명피해가 500만명에 이르고, 재산피해는 당시 전 가옥의 60%인 293만 호, 건물 5만3000동, 철도·교량 630㎞ 파괴 등이었다. 여기에 17배를 곱하면 호전적 극우세력이 말하는 전면전쟁을 각오하고 북한을 공격할 때 치러야 할 대가가 고스란히 산출된다.

   
ⓒReuter=Newsis
지난해 3월 한·미 합동 ‘키리졸브’ 훈련을 위해 부산항에 들어온 미국 핵항공모함 존스테니스호.

불안한 대피소 저리로 피하라고?

[169호] 2010년 12월 04일 (토) 00:26:33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11월23일 연평도 피격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국민이 난생처음 집에서 가까운 대피소를 찾아보았다. 알고 보니 대피 시설이 서울에만 3920곳, 전국에 2만5700여 곳이나  있었다. 그러나 지하철역이나 대형 건물 지하 시설이 시민 대피소라는 점은 생소했다.

평소 무심히 드나들던 지하철역이나 지하보도를 보면서 ‘전쟁이 터지면 저기로 뛰어들어야겠구나’라고 무서운 상상도 해본다. 그런데 비상등도, 급수 시설도, 화장실도 없는 지하보도 따위가 과연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2010년 대한민국의 겨울이 유난히 으슬으슬하다.

   
ⓒ시사IN 조남진

 

<출처 : weekly경향>

누가 서해 5도를 ‘화약고’로 만들었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군사력을 집중배치 함에 따라 서해 5도는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됐다. 특히 양측이 불과 10여㎞를 사이에 두고 전력을 집중배치하고 있어, 사소한 군사적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건만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의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장면1] 1968년 1월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수도권으로 잠입해 경찰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정부는 같은 수(31명)로 구성된 684부대를 창설해 서해안 외딴섬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들의 임무는 평양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의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장면2] 북한 공작원들이 1983년 10월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순직했다. 당시 육사 12기를 주축으로 한 장교들은 ‘벌초계획’이라는 작전명 하에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는 모의훈련을 진행했다.

한반도가 둘로 갈라진 이후 60여년 동안 남북은 도발과 응징의 역사를 써왔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건만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의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이 우려된다. 결국 피해자는 남북한 주민들이다. 남북한 주민들은 오늘도 분단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다.

연평도 곳곳에 다연장로켓포(MLRS)가 배치돼 있다. |김영민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1월 29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특별담화’를 통해 “북의 도발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며 결기어린 다짐을 했다. 이 대통령의 담화 직후 우리 군은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에 최첨단무기를 배치하는 등 전력 증강에 돌입했다. 지대공미사일인 ‘천마’와 MLRS 다연장로켓포를 새로 배치했다. K-9 자주포 6문을 추가로 늘렸으며, ‘먹통’이었던 레이더를 최신 대포병레이더로 교체했다. 다연장로켓포는 130㎜ 로켓탄 36발을 20초 안에 쏠 수 있는 것으로, 한 번 발사로 축구장 4개 면적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 군 당국은 지상표적 정밀 타격유도무기와 K-55자주포, 음향표적장치 등도 추가로 배치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군은 대북심리전도 재개했다. 군은 최근 경기 연천, 김포와 강원도 철원 대마리 등에서 대북전단지 40여만장을 기구에 달아 북한지역으로 날려보냈다.

북한도 자국 영토 턱밑에 있는 서해 5도로 인해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서해 5도 인근의 북측 섬들과 황해도 일대에 군사와 무기를 집중배치하고 있다. 사곶과 해주, 옹진반도, 개머리, 무도 등 서해 주변에 주요기지가 있다. 이들 기지는 해안포(사거리 12~27㎞)와 방사포(사거리 27㎞), 곡사포(사거리 54㎞)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서해함대 사령부와 예하부대 소속이다.

참여정부 5년 서해상 군사충돌 없어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군사력을 집중배치함에 따라 서해5도는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됐다. 특히 양측이 불과 10여㎞를 사이에 두고 전력을 집중배치하고 있어, 자칫 사소한 군사적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이미 서해에 남북한의 군사력이 밀집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남측 무기의 대대적인 전력증강은 북한의 반작용을 야기해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우려가 있다”며 “또한 면적이 좁은 연평도에 전력을 집중시킬 경우 유사시 북한의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참여정부 때는 양측이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통신채널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이 지역에서 양측의 소통채널이 막혀 이 같은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에 서해에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서해 5도와 NLL지역은 남북간에 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때 북한, 미국, 중국 등 관련국들은 육상의 군사분계선(휴전선)만 확정하고 해상경계선은 합의하지 못했다. 현재의 NLL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8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임의로 설정했다. 당시 유엔군이 점령한 서해의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서해 5도의 북단과 북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에 중간선을 그은 것.

북측은 20여년 동안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며 1973년부터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북한 해군은 NLL을 수없이 넘나들었으며, 우리 군도 예의주시하며 때로는 물리적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 같은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햇볕정책을 만든 김대중 정부 때도 NLL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1차 연평해전(1999년 6월)에서 양측은 서로 경비정을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기를 하던 중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비정이 침몰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북한의 보복공격 성격이 짙은 2차 연평해전의 무대 역시 NLL이었다.

이번 연평도 포격에 대한 북한의 구실도 NLL문제였다. 북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연평도 포격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조선 괴뢰들이 연평도 일대의 우리측 영해에 수십발의 포격을 가하는 군사도발을 감행했다”며 “앞으로 조선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서해협력지대’합의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서해지역에서 분쟁을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했다. 2000년 12월에 개최된 제4차 남북장관급 회담을 통해 남북어업협력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이후 남북수산협력실무협의회(2005년 7월) 등 다양한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지역이 북한 최고의 군사요충지라는 점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안보외교전략비서관은 “북한이 NLL 때문에 자유롭게 서해를 드나들 수 없어 숨이 막힌다고 했다”며 “참여정부 때도 북한이 NLL을 무력화하기 위해 온갖 이상한 행동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1월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참여정부가 고민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 발상의 전환이다. 서해 5도를 포함한 NLL지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선(NLL) 개념을 벗어나 면(지역)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접근이 열매를 맺은 것이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합의한 10·4 공동선언이다. 남북은 10·4 공동선언 3항에서 NLL지역에서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서해협력지대) 설치에 합의했다. 참여정부 마지막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는 “군사적으로 완충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이 항상 염려됐다”며 “이 지역을 양측의 충돌을 막는 완충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당시 남북정상회담의 핵심의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북측은 해상경계선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경제협력을 통해 서해에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남측의 구상을 마침내 수용했다. 서해협력지대에는 ▲해주경제특구 개발 ▲인천~해주 간 직항로 활성화 ▲공동어로수역 설치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는 서해협력지대를 인천~개성공단~해주를 잇는 서해권 삼각 경제벨트로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미래 경제발전의 핵심축으로 상정했다. 해주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에 있어 인천과 분업체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개성공단의 수출항구로서도 적임지였다.

특히 해주경제특구와 관련, 이 특구가 설치됐다면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해주경제특구는 해주 외곽과 인근의 황해도 강령군 일대에 설치될 예정이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실무 총책임을 맡았던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남북한이 해주 외곽과 강령군 일대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의견접근을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주경제특구가 황해도 강령반도 일대에 들어서고, 물류 이동통로로 해주항을 활용하는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해주항은 북한 서해에서 남포 다음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이번 연평도에 포탄을 쏜 개머리진지가 강령군에 있다. 강령군은 북한 서해함대 사령부 예하 8전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사곶과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북한도 남측의 해주경제특구 제안에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해주특구를 제안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국방위원회 관계자를 불러 해주를 열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동안 해주는 북한의 입장에서 무역항보다는 군항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중국 또는 남한에서 해주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백령도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북은 해주경제특구 합의로 경제적 실리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얻어냈다.

공동어로구역 설치도 남북 어민 모두에게 윈·윈할 수 있는 구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NLL지역은 한반도 최대의 꽃게어장이다. 이 지역에서 양측의 크고 작은 충돌도 꽃게 때문이었다. 남북의 어부들이 더 많은 꽃게를 찾아 NLL을 넘다보니 군함이 뒤따라가고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뿐만 아니라 중국 어선들도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공동어로구역 설치는 남북 어부들에게 꽃게를 마음놓고 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이와 관련, 남측은 공동어로 수역을 NLL 기준으로 각각 남과 북의 동일수역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북측에 제시한 공동어로구역은 ▲백령도 북쪽 ▲대청도 동쪽 ▲소청도와 기린도 사이 ▲기린도와 등산곶 사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서해 5도 어민들은 공동어로구역을 어디에다 설치하더라도 무조건 찬성했다”며 “이는 공동어로구역이 기존의 NLL 아래 지역에 있는 어로한계선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꽃게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해협력지대에서 중요한 지역은 또 있다. 개성에 인접해 있는 예성강과 서울을 바다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한강하구다. 남측은 우선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특히 토사가 퇴적된 한강 하구는 모래 채취를 위해 남측 기업들이 탐을 냈던 곳이다. 이밖에 남북은 서해협력지대에 해양평화공원을 만드는 안에도 합의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백령도 일대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서식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물곰이 있는 등 희귀 해양생물이 많다”며 “당시 남북이 해양환경적 측면에서 생태평화수역으로 만드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말했다.

어민 위한 공동어로구역 설치도 구상
10·4선언 이후 남북 당국은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2개월여 동안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접촉했다. 남북 총리회담이 11월 27~29일 개최됐으며, 이어 국방장관 회담(11월 27~29일)과 남북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12월 4~6일)’가 개최됐다. 특히 남측에서는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2007년 남북정상선언 이행종합기획단’을 구성해 구체적 추진방안 강구와 이행상황을 점검했다. 그 결과 문산~봉동 간 남북 화물열차의 정례운행이 시작됐으며, 12월 12~14일 개최된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는 개성공단의 통행·통신·통관 등 3통 문제에 관한 군사적 보장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다.

특히 총리회담에서 NLL지역과 관련, 남북은 서해협력지대추진위원회를 둔다는 데 합의했다. 서해협력지대위 산하에는 ▲해주경제특구 협력분과위 ▲해주항개발협력분과위 ▲공동어로협력분과위 ▲한강하구협력분과위 등 4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해협력지대 논의는 이것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를 불과 3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남북이 정상회담 합의사안을 추동력 있게 밀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상은 이명박 정부 들어 10·4선언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서해협력지대 구상은 민감한 NLL 문제를 넘어 평화수역을 새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보수층의 지지가 필요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NLL 문제와 관련해서는 사수에만 집중했다. 한나라당 등 보수진영은 NLL을 영토주권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NLL 문제를 후속 실무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 자체를 거세게 반대했다.

만약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2006년에만 성사됐더라도 서해협력지대 구상안은 실행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연평도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손자병법을 보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다. 군사력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군사력만 갖고 서해를 긴장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만들 수는 없다.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단기적으로 군사적인 긴장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이 같은 군사적 대치상태가 장기적으로 계속된다면 남북관계에서 또 다른 불상사가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햇볕정책 지속됐다면 극단 대결 막아”

 ㆍ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대북지원으로 남북대결 완화 효과 강조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weekly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과 관련해 “햇볕정책이 지속됐으면 이렇게 남북이 극단적인 대결상황으로까지 가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호전성을 하루 아침에 종식시킬 수는 없지만, 햇볕정책이 북한의 호전성을 고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 5년 동안 북한에 1조4000억원 규모의 현물을 지원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퍼주기’라고 비판한다”며 “그 지원은 북한의 호전성을 줄이고 남북간 대결을 완화하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햇볕정책을 침몰시킨 이명박 정부가 이제 와서 남북관계가 잘못되면 햇볕정책 탓이라고 하면 안 된다”며 이명박 정부에 분통을 터뜨렸다.
북한 전문가인 이 전 장관은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체제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포격을 볼 때 한반도 냉전의 끝자락이 너무나 길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두 가지 요인으로 분석된다. 하나는 지난 3년 동안 이명박 정부 하에서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온 파국적 결과가 이번 사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다. NLL 지역은 남북한 분쟁의 화약고 같은 곳이다. 세계 수준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이후에 남북의 충돌은 NLL 수역에 집중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역은 단호하되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관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 것이 이번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공격한 것 같다. 북한의 공격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추정을 하자면 가장 큰 목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의 리더십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다 아는 것처럼 후계자 김정은의 정통성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김정은이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북한이 결행한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도 후계체제 과정에서 김정은의 강성 리더십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충 김정은의 ‘강성결단’에 대한 내부 선전을 통한 대내적인 리더십 강화작업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예측을 벗어나 이것이 남북관계에도 (연평도 포격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기회 편승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더, 오어(Either, Or) 전략’이다. 즉 이것이 아니면 저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전략이다. 때문에 북한의 도발과 북한의 대외관계 개선 제스처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복합적으로 함께 나오고 있다.”

햇볕정책 기조가 유지됐다면 이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나.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부터 햇볕정책의 승계를 거부했으며, 그 반대인 비핵개방3000정책을 천명했다. 당시 햇볕정책 전문가들도 통일부 자문단에서 대부분 제외됐다. 나는 참여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만약 이 정부가 햇볕정책을 계승했다면, (그리고) 이번 상황에 대해 나보고 책임지라면 질 용의가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3년 전에 햇볕정책 계승을 거부하고 그 반대의 정책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질 일이 없다. 햇볕정책을 침몰시킨 정부가 이제 와서 남북관계가 잘못되니 햇볕정책 탓이라고 하면 안 된다. 햇볕정책이 지속됐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냐는 질문은 가상 상황을 전제로 한 질문이기에 대답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햇볕정책이 지속됐으면 이렇게 남북이 극단적인 대결상황으로까지 가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돈으로 평화를 샀다, 햇볕정책이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물론 햇볕정책 자체가 만능은 아니다. 햇볕정책의 목표는 북한의 호전성을 감소시키고, 남북이 화해·협력으로 나감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이루자는 것이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호전성을 하루 아침에 종식시킬 수는 없지만, 햇볕정책이 북한의 호전성을 고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북한에 1조4000억원 규모의 현물을 지원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퍼주기’라고 비판한다. 그 지원은 북한의 호전성을 줄이고 남북간 대결을 완화하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다. 그것을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것으로 표현한다면, 평화를 살 수 있다면 왜 못 사겠는가. 그동안 박왕자씨 피살 사건, 천안함 사건, 연평도 공격 사건 등이 벌어졌는데 직접적인 피해 말고도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이런 큰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러면 돈으로 평화를 사지 않아서 그랬나. 단순히 돈으로 평화를 살 수는 없다. 합리적인 정책, 전략적인 대북정책이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

연평도 공격과 관련해 지난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합의한 10·4선언 중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안’이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10·4선언에서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이행하기 위해 남북이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간에 관련 협상 틀이 가동되면 그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다. 일각에서 6자회담 무용론을 제기하는데 사실은 6자회담이 가동되는 동안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 6자회담이 가동을 멈추어 기능부전 상태에 빠질 때 북한은 핵실험에 나섰다. 북한이 핵실험한 지난 2006년 10월은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의 북한 자금 동결문제로 6자회담이 가동중단 상태에 있었으며, 지난해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을 때도 6자회담은 휴업상태였다. 즉 6자회담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상황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서해5도에 최첨단 무기를 배치하는 등 전력을 대폭 보강하기로 했다. 서해 5도 지역에 평화가 다시 찾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연평도,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전략적으로 우리가 방어하기 힘든 지역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턱 밑에 우리의 영토가 있기에 큰 위협이라고 여길 것이다. 북한은 황해도 일대에 대한 광범위한 군사배치를 통해 서해 5도를 다양하게 공격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제한되어 있다. 북측은 육지에서 광범위하게 공격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우리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특성상 전략적으로 그게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방어 중심의 작전계획을 짤 수밖에 없다. 서해 5도에서 발생하는 충돌에서 우리가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비전시상황에서 서해 5도에서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는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어태세를 철저히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사실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여권 일각에서는 연평도 포격도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참여정부 때 우리가 독자적으로 갖고 있는 북한의 농축우라늄과 관련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거의 대부분 미국에 의존했다. 그러니 우리가 은폐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다만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을 이유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무효를 주장하고 우리가 10억 달러 이상을 이미 지출한 경수로 건설을 중단해왔기 때문에, 그것이 한반도 안보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안이니 보다 신빙성 있는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한 적은 있다. 지난 2002년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가 방북한 이후에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미국의 확증적 자료는 제시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존재를 알고도 이를 은폐하거나 북한을 편들 이유가 없다. 지난 3년간 북한의 농축우라늄 개발 상황을 제대로 확인도 못하고 작년부터 영변에 건설했다는 농축시설도 까맣게 몰랐던 자신들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고, 그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두려우니까 과거 정권 탓으로 자꾸 돌리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중국이 6자 수석대표 회담을 제안했다. 한·미·일은 사실상 거부했다. 지금 상황에서 6자회담이 유용하다고 보나.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을 막을 때 우리에게 어떤 실익이 있나. 실제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만약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는 것을 막으면 지금껏 그랬듯이 북한은 핵능력을 끊임없이 강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연평도 문제를 잘 관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면을 전환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카드가 없다. 만약 6자회담이 재개되면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 진행을 막을 수 있는 동시에 연평도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다. 앞으로 시간이 좀 경과하면 관련국들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6자회담을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 중국의 영향력이 북한의 호전적 행동을 제어할 정도로 강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국의 영향력은 북한의 경제를 돕고 북핵문제와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쪽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북핵문제의 책임론을 북한의 일방론에서 북한과 미국의 동시 책임론으로 인식을 바꾸면서 대북정책을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강화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이번에 농축우라늄과 관련해서도 중국은 서방과 달리 미온적이다. 이처럼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북한을 직접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앞으로는 이러한 영향력도 커지겠지만). 현 상황은 북한의 체제 존립에 버팀목 역할을 하고,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완화시켜주는 쪽으로 커지고 있다. ”

<글·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무기가 늘수록 평화는 사라진다

ㆍ서해 5도 병력·군비 증강으로 긴장고조 ‘화약고’ 우려

북한의 연평도 공격 이후 정부는 ‘서해5도의 전력보강’으로 대응했다. 정부의 대응에 전문가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첨단무기를 증강 배치하고, 병력을 확대하면서 서해 5도가 항시적인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해가 제2의 대만해협처럼 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북한의 연평도 공격과 관련, 11월 29일 서해에서 있은 한·미 연합훈련 도중 연합훈련 도중 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서 슈퍼호닛 전투기가 이륙하고 있다. |경향신문

 


1958년 8월 23일 중국은 대만해협의 진먼도(金門島, 대·소진먼도 등 12개 섬을 함께 진먼도로 부른다)를 포격했다. 2시간 만에 포탄 4만발이 쏟아졌다. 

대만도 포격으로 대응했고, 미국은 대만해협에 함대를 파견했다. 치열한 포격전에 더해 중국과 대만의 전투기가 공중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포격전은 그 해 10월 5일까지 이어졌다. 진먼도에는 이 기간에 총 475만발의 포탄이 떨어졌다고 기록됐다. 이후에도 연례행사처럼 중국은 매년 진먼도를 포격했고, 대만도 대응 포격을 했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 공격은 1979년 미국과 중국이 국교수립을 하면서 비로소 중단됐다.

대만해협 긴장감 점차 완화 추세
진먼도는 중국 해안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다. 대만의 섬이지만, 중국에 오히려 더 가깝다. 대만 입장에서 진먼도는 중국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최전선 기지인 셈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진먼도가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군비증강 경쟁이 벌어진 배경이다. 대만은 대만해협에 있는 마쭈도(馬祖島)에 크루즈 미사일 중대를 배치할 계획을 발표했다. 진먼도에는 최신예 미사일과 장거리포를 대량 배치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중국은 대만해협과 가까운 난징, 광저우 등지에 탄도미사일 등을 배치한 상태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양국은 첨단무기를 배치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대만의 섬인 진먼도와 마쭈도는 오히려 중국에 더 가깝다. |구굴어스 정보


미국의 존재도 긴장을 높이는 구실을 했다. 1996년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미사일도 발사했다. 미국은 이곳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졌다. 중국은 미국의 개입에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미국은 대만해협의 분쟁 개입을 멈추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서해에서 한·미 연합훈련이 벌어진 것과 대만해협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항공모함을 보낸 것이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만해협에서 벌어졌던 일이 서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만해협과 서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대만해협의 긴장감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서해 5도를 둘러싼 긴장감은 오히려 배가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은 군사적 공격을 중단한 뒤 긴장을 줄이는 대화와 협상을 이어왔다. 중국이 대만과 우편·항공·통상을 서로 개방하는 ‘3통’을 제의하고, 대만은 중국과 ‘접촉·담판·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3불정책’을 허무는 것으로 화답했다. 지난 6월 중국과 대만이 경제를 단일시장으로 통합하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한 것은 긴장완화를 위한 타협과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기본협정 체결은 중국·대만·홍콩을 잇는 거대한 중화경제권의 출범을 알리는 것이다.

서해의 분위기는 대만해협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대화와 타협이 없던 1950년대 대만해협 분위기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단호한 행동’을 거듭 천명하고, 북한이 ‘경기도 공격’을 시사하는 것이 좋은 예다. 한·미의 서해 훈련에 북한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더 있다. 중국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기자에게 “서해상에서 전개된 한·미 연합훈련이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서해를 제2의 대만해협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58년 8월 23일 중국이 대만 진먼도를 포격, 진먼도 26개 촌락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경향신문


중국은 미국이 서해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의 대립 사이에서 미국과의 동맹 결속을 강조하고 있다. 한·미 동맹과 북·중 동맹이라는 대립이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의 핵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는 훈련 장소였던 서해로 진입하지 못하고 동해로 옮겨갔다. 중국이 거세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미국의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했다. 중국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한·미 연합훈련 소식이 알려진 후 양제츠 외교부장의 방한을 취소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어느 일방의 허락 없이 어떠한 군사적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미국의 서해 진입 민감한 반응
서해 5도에 병력 증강을 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종대 「D&D Focus」 편집장은 “서해 5도에 전력을 증강하고, 최신 무기로 요새를 만드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국제적인 비판이다. 만일 북한이 도발했을 때 민간인이 피해를 입으면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서해가 군사기지화가 된다면 북한이 도발할 수 있는 구실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방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 내년도 국방예산으로 당초의 31조2000여억원보다 2.3% 늘어난 31조9000여억원을 제출했다. 자주포, 대포병레이더, 공중조기경보통제기 등에 필요한 예산이다. 서해를 두고 남북의 군사력이 밀집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런 전력 증강이 과연 효율적이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면적이 좁은 연평도에 전력을 집중 배치했을 때 오히려 북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군비확장 경쟁을 벌인 중국과 대만처럼 서해를 두고 한국과 북한이 군비증강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상황도 예견된다.

국회 국방위 민주당 간사인 신학용 의원은 “이번에 K9 자주포, 탄약보급차, 지대지 미사일 등이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군사 기밀상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지만 외국산 미사일도 포함됐다”면서 “사정거리가 긴 것을 왜 섬에 갖다 놓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북한만 자극하고 긴장감만 고조될 수 있다. 백령도와 연평도를 요새화한다고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안보지수는 ‘민감' 경제지표는 ‘둔감’

ㆍ남북 무력충돌 일어나면 한반도 평화지수 급변, 금융시장은 비교적 차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남북의 긴장관계가 장기화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번 북한의 도발이 종전의 사태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 거론된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한 직후 벌어진 점, 휴전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거주지역을 포격한 점, 거기다가 추가도발을 공언하고 있는 점 등이 그렇다. 한국 정부가 퇴로 없는 강공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점, 한·미·일과 북·중 간 대결구도로 이어지고 있는 점 등도 불안요인이다.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11월 25일 청와대에서 긴급 안보·경제점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의 공격 열흘이 지난 지금 금융시장은 일단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경제가 외부의 충격을 원만하게 흡수하는 기초체력을 갖추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과거 ‘북한 리스크’에 대한 학습효과가 금융시장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우리 경제지표에 이미 지정학적 리스크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금융시장이 안정세를 유지하는 요인이라는 게 경제전문가의 시각이다. 이와는 별개로 이번 사태가 장기적인 군사적 공격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금융시장의 요동을 막은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정부가 연평도 포격 다음날인 11월 24일 연·기금을 풀어 4000억원 넘게 주식을 사들인 것도 금융시장 안정에 다소 기여했을 법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계량화한 ‘안보(평화)지수’와 ‘코리아 디스카운트’(특수한 한반도의 안보상황에서 비롯된 경제손실)는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있을까. 방태섭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안보지수가 1대 1의 대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방 연구원은 그러면서도 “경제학자들이 경제지표 분석과 경제예측을 할 때 ‘안보지수’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안보지수와 경제지표 사이에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지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안보상황의 변화가 심하면 안보와 경제의 연관성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그 이유다. 거기다가 한국의 안보상황을 계량화한 ‘안보지수’와 그 지수를 뒷받침하는 각종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증권시장 ‘북한 리스크’ 학습효과
안보지수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2005년부터 분기별로 발표하는 ‘한국안보지수’와 2009년 3·4분기부터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집계한 ‘한반도평화지수’가 있다.

11월 26일 동해상에서 열린 한·미 연합훈련에서 미 핵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 상공으로 미 전투기와 수송기 등이 편대비행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안보지수’는 한·미·중·일·러 등 5개국의 한반도 전문가 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다. 기준지수는 50점이며 50점보다 높으면 긍정적, 50점 미만이면 부정적이다. ‘한반도평화지수’는 전문가 대상의 설문조사(50점)와 안보와 연관된 사건(50점)을 계량화해 매긴다. 한반도평화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남북 대립과 위기상황을, 100에 가까울수록 화해·협력 상태를 나타낸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1992년 이래 지금까지 21회 도발했다. 그 중에서 무력충돌은 두 차례의 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등 6차례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진돗개’ 이상 발령이나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사건’은 세 차례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와 관련한 리스크로 이슈화된 것도 우라늄 고농축시설 공개까지 합치면 세 차례다. 하지만 북한 리스크는 종전에는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예컨대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2002년 6월 29일은 토요일이어서 증권시장이 열리지 않았으나 다음 월요일엔 0.24%가 떨어진 채 장을 시작했다. 이것이 이날 최저가였고 결국은 0.47% 상승한 채 장을 마감했다.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 때도 주가가 3.58% 떨어졌으나 이후 하락폭은 줄어 2.41%
(1319.40)가 빠지는 데 그쳤다. 다음날인 10일에는 9%포인트 반등한 이후 주식시장이 기력을 되찾는 등 안정됐다. 지난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사태 때 시초가에서는 0.91%까지 떨어졌지만 종가는 0.34%(종가 : 1691.99) 하락에 그쳤다. 한 달 뒤 종합주가는 1750선까지 상승했다. 강현기 솔로몬증권투자 애널리스트는 “북한의 도발, 심지어 화력을 동원한 도발의 경우에도 주가지수의 하락폭은 7%를 넘지 않았고, 조정 기간은 길어야 일주일 정도였다”면서 “이번은 민간 포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긴장고조 상태’
반면 ‘안보지수’는 상대적으로 민감하다. 최저값을 보인 한국안보지수는 40.64점이었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2006년 10월 9일 무렵이다. 지난해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뒤 발표된 2009년 3분기 ‘한국안보지수’는 45.59였다. 


남북관계 개선이 되지 않은 채 북한의 화폐개혁에 따른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군사적 긴장이 점차 고조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같은 기간에 발표된 ‘한반도평화지수’는 40.2였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한 뒤 발표된 지수는 46.54였다. 이는 천안함 사태 발생 이전 분기에 발표됐던 50.07보다 3.53포인트나 추락한 것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천안함 사태 이후 당분간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이 없고 북한의 핵 보유 집착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낙폭을 크게 했다”고 분석했다. 

천안함 사태를 반영했던 한반도평화지수는 22.6으로 ‘긴장 고조 상태(20~40)’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천안함 사태 발생 이전 분기보다 7.3포인트가 떨어진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남북관계 경색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평가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안보지수와 경제지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정치·경제·사회·국방·외교까지 포괄하는 개념인 안보지수와 경제지표의 격차가 벌어지면 그만큼 잠재적 불안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남북 대치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육군 중심 개혁, 하늘과 바다는 후순위

ㆍ이명박 정부의 국방계획, 육·해·공군 균형 통합완성형 추구해야

이명박 정부의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내정자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참여정부 시절 국방정책의 핵심인사라는 점이다. 이상희 전 장관은 참여정부 시절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등을 지내면서 군 구조개혁안을 처음 설계했다. 김관진 내정자는 버웰 벨 전 주한미군 사령관과 2012년 전작권 회수에 공동 서명한 인사다. 참여정부 시절 핵심인사가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용된 사례는 국방·외교통상 분야를 제외하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전 정부의 인사를 중용하면서도 전 정부의 정책은 이어받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의 국방개혁안을 수정했다.

참여정부 기조는 ‘협력적 자주국방’

2008년 10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에 열린 기념식에서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과 함께 열병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2월 2일 청와대는 정례브리핑을 통해 12월 둘째 주에 청와대에서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를 열고 국방개혁에 대한 최종 보고를 들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가 밝힌 국방개혁은 2009년 6월 ‘국방개혁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던 것이다. 국방장관이 교체될 정도로 큰 파장을 몰고 온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이번주에 발표될 국방개혁안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과 참여정부 시절 만들어졌던 ‘국방개혁 2020’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국방개혁 2020은 2005년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2006년 12월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로 제정됐다. 윤광웅 전 국방부 장관은 참여정부 국방개혁의 특징을 ‘형식상 법으로 택한 것’ ‘국회와 국민이 한국군의 현대화에 공개적으로 참여하고 그 진행 과정을 주시하게 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참여정부의 국방정책과 국방개혁’이라는 글을 통해서다. 윤 전 장관은 이 글에서 “참여정부의 국방정책은 주권국가로서 자주국방을 추구하면서 한·미 동맹관계도 활용하는 소위 ‘협력적 자주국방’을 근간으로 했다”고 소개했다.

참여정부의 국방개혁 2020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현대전 체계에 맞는 군대를 만든다는 것이다. 현대 무기를 도입해 병력을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2005년 현재 68만 명이던 군인 숫자를 2020년엔 50만 명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었다. 지휘 단계 및 부대수 축소도 포함됐다. 육군의 군사령부, 군단, 사단 감축도 국방개혁의 일환이었다.

반면 지난해 6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된 것으로 알려진 국방개혁 기본계획은 ‘선 전력화 후 부대개편’을 원칙으로 한다. 먼저 전력을 증강한 후 이어 인력과 부대 개편을 한다는 것. 이로 인해 육군의 인력감축이 계획보다 축소됐다. 국방개혁 수정안에서는 육군의 사업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해군과 공군의 사업은 줄줄이 순연됐다. 군 전문가들은 “수정안이 육군에 치중됐다”고 비판했다.

육군 전력증강 신규 사업 눈길
국방개혁 기본계획과 원안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해군의 전력은 뒤로 밀리거나 축소된 경우가 많았다. 해군 전력증강을 위해 계획됐던 KSS III(장보고급) 잠수함은 3척 확보에서 1척으로 축소됐다. 해군의 주요 함정인 호위함, 초계함, 고속정 등도 노후해 교체가 시급한데, 교체는 2011년 이후로 지연됐다. 소해함 추가 사업도 2013~2015년에서 2015~2017년으로 늦춰졌다. 소해헬기도 2012년 도입 예정에서 2014년으로 밀렸다. 이 외에도 해상작전 헬기, 차기상륙함, 상륙공격헬기 등의 전력화 시기가 순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군의 전력화 시점도 뒤로 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신학용 민주당 의원실이 국회입법조사처에 의뢰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전력화가 계획됐던 글로벌호크는 2015~2016년으로 순연됐고, 2013년 전력화를 계획했던 공중급유기 도입도 1년 후로 연기됐다.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좌),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내정자(우)는 참여정부 국방정책의 핵심인사가 이명박 정부에 중용된 사례로 남았지만 참여정부의 국방정책은 이어지지 않았다. |경향신문

그러나 육군의 전력증강 사업은 삭감된 것도 있지만, 새로 착수되는 사업도 있어 눈길을 끈다. 구룡 다연장로켓포를 대체하는 차기 다연장로켓 시스템, 차기 자주포 사업 등은 국방개혁 기본계획에 새롭게 들어간 사업으로 알려졌다. 김종대 「D&D Focus」 편집장은 “재래식 지상전 능력 강화”라고 평가했다. 김 편집장은 “국방개혁 기본계획은 지상전 능력을 강화한 것뿐”이라며 “우리가 주도적으로 미래를 관리하려는 것이 부족하다.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국회 국방위 소속 신학용 민주당 의원도 “미래를 대비하려면 공군을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문제는 돈”이라며 “국방예산의 부족으로 육군의 전력 강화에 중점을 뒀는데, 우리 현실에 맞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무기체계 도입 지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2011년도 예산안 부처별 분석>을 통해 “국방개혁에 따라 전력구조와 함께 지휘구조, 부대구조, 병력구조가 동시에 변화하게 된다”면서 “지휘구조, 부대구조, 병력구조의 개편은 계획대로 추진하면서, 전력구조 개편만 지연될 경우 군 구조 상호간 불균형이 발생해 전력 공백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힌 것.

군 지휘부 개편도 육군 자리 늘리기?
육군의 전력 증강이 “방산업체 로비 때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주포, 다연장포, 전차, 공격용헬기 등의 전력증강 계획이 밀리지 않고 참여정부 계획대로 추진되는 것은 방산업체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것.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연평도에 전력을 증강한다면서 나온 무기들을 보면 국내 방산업체 무기가 많다”면서 “국방개혁 기본계획에서 해군과 공군의 전력은 순연됐지만 육군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국내 방산업체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설명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인력 감축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2020년까지 군 규모를 50만 명으로 줄인다는 계획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51만7000명으로 바뀌었다. 육군 병력은 오히려 1만7000명이 최초의 원안보다 증가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해외파병부대다. 2005년에는 1160명으로 계획됐던 파병부대 규모가 2009년 6월에 3000명으로 늘어났다. 국방개혁의 핵심 목표가 군의 감축인데, 파병부대 규모는 오히려 확대된 것.

군 지휘부 개편안도 말이 많다. 지난해 합참 1차장 자리가 신설됐고, 합참 1차장은 합동작전본부를 관할하게 됐다. 문제는 합참 1차장과 합동작전본부는 육군필수직위로 구상한다는 점. 즉 작전 부분을 육군필수직위화하면 육군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합참 1차장의 신설도 전형적인 육군 자리 늘리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예비역 장성은 “육·해·공 전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전략전술적인 면에서 중요하다”면서 “다만 한정된 예산에서 전략의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육군 전력의 증강이 중심이 된 것 같다. 국방개혁의 기본 방향은 육·해·공군의 전술적인 균형을 맞추는 통합완성형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예비역 소장도 “참여정부의 국방개혁은 미래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은 당장 현실적인 방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원양 해군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연안 해군을 키우자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신학용 의원
“안보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문제”

북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국방개혁 2020’이 관심을 받는데, 이 계획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국방개혁 2020에 맞는 예산지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서 국방개혁을 발표할 때 매년 9%의 국방예산 증가, 7%의 한국 경제성장을 전제로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금융위기 여파로 국방예산 증가가 어려웠다. 일명 부자감세로 세수가 5년 동안 60조원이나 줄어들었고, 4대강 예산을 확보하려다 보니 국방예산이 턱없이 줄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까 국방개혁 2020을 수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국방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게 문제다. 국방개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정부는 미국의 도움만 믿고 개혁을 뒤로 미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방정책에 대한 비판이 높다.
“안보를 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국방정책은 군의 사기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정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측면이 많다. 군의 사기를 올려줘야 하는 것이 뭔지 생각하지 않고, 정치를 먼저 생각하는 게 문제다.”

이명박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국방개혁 기본계획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재래식 지상전 능력만 강화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육·해·공군의 전력증강을 적절히 배분하지 않았다. 북한이 만일 도발하면 공군이 먼저 나선 후 육군이 공격을 하게 된다. 공군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예산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군의 전력은 미국에 계속 의존을 하게 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생긴다. 육군 위주의 국방개혁은 빨리 바꿔야 한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회수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 전작권을 회수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국민의 생각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 모든 것이 한미연합사령부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 군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평시 작전권을 우리가 가져왔지만, 데프콘 3만 되어도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로 간다. 물론 미국의 도움 없이는 공군 전력을 유지할 수 없다. 전작권 환수의 베이스는 한미 동맹이다. 2015년 전작권 회수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

북한의 추가 도발을 예상하나.
“북한의 추가 도발은 있을 것으로 본다. 남북이 평화를 유지하든, 대결국면으로 가든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추가 도발을 할 것이다. 이제는 확전의 위험성도 커졌는데, 이에 대비할 수 있는 보완책을 만들어야 한다. 정전체제에서 만든 교전수칙은 확전의 방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교전수칙을 바꾸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남한 ‘진돗개’는 북한의 ‘폭풍’

진돗개, 데프콘, 워치콘…. 군사적 상황에 대한 용어다. 북한에서도 같은 상황에 대한 용어가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 한국국방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그런 자료를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탈북자 단체를 통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북한의 군사용어를 정리한 논문은 찾을 수 있지만, 경계나 준전시태세를 가리키는 북한의 용어는 찾기 힘들었다. 다만 탈북자 단체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 가장 높은 수위의 단어는 ‘전시태세’다. ‘전시태세 1’은 ‘선전포고를 하거나 직접적 군사행동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나라들 사이의 전쟁관계 또는 전쟁관계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전시태세 2’는 ‘전쟁이 일어난 것과 관련하여 국가가 대내외 분야에서 일련의 긴급조치와 비상대책을 세운 상태’를 말한다. 그다음으로 높은 수위가 ‘준전시태세’로 ‘전시나 다름없이 정세가 조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다음 수위는 ‘폭풍’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일반적으로 부대에서 비상소집을 할 때 사용한다. 폭풍은 1, 2, 3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에 맞게 군인이 대응해야 할 행동지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에서 사용하는 진돗개는 ‘비상경계명령’을 뜻한다. 국지도발에 대비해 특정 지역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한다. 진돗개는 평소 3등급을 유지하는데, 숫자가 낮을수록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규전에 대비한 전투준비태세를 나타내는 용어는 데프콘(Defense Readiness Condition)이다. 데프콘은 모두 5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데프콘 5’가 평상시다. ‘데프콘 4’는 대비 상태로 한국과 북한은 정전 상태이므로 항상 데프콘 4를 유지한다. ‘데프콘 3’은 중대한 긴장 상태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있을 때 발령하고, 이때부터 작전권은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간다. 데프콘 2 상황에서는 전군에 탄약이 지급되고, 데프콘 1은 동원령이 선포된다.

워치콘(Watch Condition)은 북한의 군사 활동을 추적하는 정보감시태세로 4단계로 구분돼 있다. 워치콘의 격상은 한국과 미국 정보당국 간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포탄①이 ‘천안함 북한 소행’ 확증?

ㆍ연평도 포격 포탄에서 숫자 발견되자 국방부 ‘천안함 1번’과 연계

연평도를 공격한 북한의 122㎜ 방사포 로켓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천안함 1번 논란의 재연이다. 논란은 11월 26일, KBS 9시 뉴스가 연평도에서 수거한 방사포 로켓탄 추진체를 방영하면서 비롯됐다. 로켓의 날개가 달린 노즐 부분에 수기(手記)로 보이는 ①번 표기가 발견된 것이다.

숫자 ① 표기는 연평도에 북한이 쏜 방사포 로켓 추진체의 노즐 부분(오른쪽 추진체를 잡고 있는 군인의 왼손 부분에 해당)에서 발견되었다. 11월 28일, 연평도 마을에 떨어진 포탄의 추진체를 해병대 폭발물 처리반이 수거, 운반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인터넷 일각에서 농담처럼 나온 ‘1번 논란이 재연될 것’이라는 예상은 이튿날 국방부의 발표로 정확히 들어맞았다. 11월 27일 국방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122㎜ 방사포탄 노즐 부분에서 손으로 쓴 ‘①’이라는 숫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무기에는 기계로만 글씨를 새기며 설혹 글씨가 있더라도 고열에 녹아서 없어져야 하므로 어뢰는 조작되었다’는 그동안의 북측 주장이 허위임이 명백해졌다”며 “결론적으로 이번에 발견된 숫자 표기에서 보듯 천안함을 피격한 CHT-2D 어뢰는 북한에서 제조, 사용한 것이 명확하고, 천안함은 북한의 어뢰에 피격되어 침몰하였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이 국방부 주장에 힘을 실었다. 조선·동아 등은 “①번 표기의 발견으로 천안함 사건의 책임소재가 뚜렷해졌다”며 천안함 사건 재검증을 주장해온 측을 비난했다.

①이 수기면 북 소행 증명 완료?
천안함 어뢰에 적힌 1번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란은 서재정·이승헌 교수가 6월 1일 경향신문에 공동 게재한 “‘1번’에 대한 과학적 의혹을 제기한다”는 글로부터 촉발되었다. 공동게재 글에서 이들은 “(부식된 어뢰의)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탔어야 하고, ‘1번’이 남아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있어야 한다”며 “이러한 불일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천안함을 둘러싼 과학적 검증 문제는 어뢰와 천안함 프로펠러 등에 붙어 있는 알루미늄 흡착물의 성분과 흡착 경위를 둘러싼 논란으로 확대되었다. 천안함 사건 당시 결정적인 증거로 ‘1번’ 표기를 강조한 쪽은 국방부였다. 하지만 9월 13일 공개된 국방부의 최종 보고서에서는 전체 보고서 분량(205쪽)의 100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약 2.5쪽) 잉크의 성분 분석 결과는 “대부분 국가에서 유사한 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식별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북한이 발사한 추진체 날개 부분에 수기 이외에도 스탬프로 찍힌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숫자가 적혀 있다. |김기남 기자

이와는 별도로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북한산 알루미늄 스크루에 직접 유성매직으로 글씨를 쓰고 토치로 가열하는 실험을 했다. 글자는 쉽게 타버렸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마찬가지였다.

연평도에서 나온 숫자 ①번 표기는 천안함 수기 1번 표기를 둘러싼 논란을 종식시키는 물리적 증거일까. 일단 연평도에 떨어진 122㎜ 방사포 로켓추진체가 북한제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손 글씨는? “수기 여부는 논란의 핵심이 아니었다.” 노종면 언론 3단체(기자협회, PD연합회, 언론노조) 천안함 조사 결과 언론보도 검증위원회 책임연구위원은 “이미 2003년 수거된 북한의 훈련용 경어뢰에서 ‘4호’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었던 것이 지난 5월 공개됐었다”며 “논란이 됐던 것은 1번이라는 글씨가 만약 폭발 전에 적혀 있었다면 타느냐 안 타느냐의 문제였고, 부식된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탔다면 1번이라는 글씨도 타야 한다는 것이 논점”이라고 밝혔다. 언론검증위는 지난 11월 29일 낸 성명에서 “연평도 포탄에서 폭발 전에 쓰인 숫자 ①이 발견되었다면, 그것으로 할 수 있는 판단의 최대치는 ‘북한이 무기에 손으로 숫자를 쓰기도 한다’는 것”이라며 “반론이 나와도 전혀 취재를 하지 않거나 ‘정부 조작’이라는 일부의 과격한 주장에 하나로 묶어버린 언론들이 숫자 ①로 논란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고의적 왜곡이나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11월 29일자 사설에서 ‘버지니아대학의 한인 교수’를 거론해 사실상 이승헌 교수를 지목하며 “알량한 물리학자의 사이비 과학을 개탄한다”고 했다.

이승헌 교수는 어떤 입장일까. 본지는 이승헌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새벽 이 교수는 ‘연평도와 천안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글에서 이 교수는 합조단의 모의 폭발실험 결과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수식을 제시했다.

R(폭약이 터졌을 때 생기는 고온의 버블 반경)=(폭약질량/15g) ⅓×0.25m
정부 주장처럼 천안함 사건 때의 ‘1번 어뢰’가 TNT 350㎏의 폭약을 지녔다면 나올 수 있는 버블의 반경은 7.1m다. 이 교수에 따르면 ‘1번’ 표기는 탄두부에서 5.8m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고온가스에 휩싸여 타버렸어야 한다. 하지만 ‘1번’ 주변 페인트는 탔지만 글씨는 남았다.

北 방사포제원 바탕 계산 ‘①’글씨 탄다

북이 쏜 방사포 로켓에 남겨진 숫자
① 표기는 11월 26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튿날 국방부는 “이로써 천안함 1번 표기 논란은 종식되었다”고 발표했다. |KBS 캡쳐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어떨까. 이 교수는 세계 여러 나라 군대에서 쓰이는 122㎜ 포탄의 제원에 기초해 추정한 결과를 제시했다. 122㎜ 포탄의 길이는 통상적으로 2.8m이고, 폭약의 질량은 포인 경우는 2~3㎏, 로켓의 경우는 5~6㎏이다. 따라서 위의 공식에 따르면 폭발 후 생기는 고온버블의 반경은 1.5~1.8m 사이다. 이 교수의 결론은 “따라서 포탄의 탄두부에서 ① 글씨까지의 거리가 최소 2m는 넘기 때문에 고온버블이 번호를 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설령 국방부 주장대로 포탄의 위력이 TNT 10㎏에 달한다고 하면 고온버블의 반경이 2.2m에 달하기 때문에 번호가 탈 조건이 되는데, 그럴 경우 포탄 위쪽 페인트가 타지 않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① 글씨가 발견된 방사포 추진체는 로켓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북한 방사포 로켓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알려진 제원은 이 교수의 추정치와 다르다. 구 소련의 ‘다련장로켓’ ‘BM-21’을 개량한 것이다. 길이는 약 3m이며 사정리는 약 20㎞다. 탄두중량은 27㎏. 탄두중량 27㎏을 TNT (북측 용어로 뜨로찔)로 간주했을 때 위의 도식에 집어넣으면 약 2.97m가 나온다. 길이가 3m라고 했을 때 ① 글씨가 적혀 있는 부분은 고온버블의 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타게 된다. 이럴 경우 이교수가 밝힌 후자의 모순이 생긴다. 사실 이 경우 또 다른 실험을 해야 한다. 연평도 포격 당시 환경조건이 천안함 때와 달랐고, 결정적으로 물 속과 일반 대기 중 노출되었을 때라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종인 대표는 “근본적으로 폭발환경이 다른데 이걸(연평도 포탄에서 발견된 ① 글씨)로 논란이 종식되었다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종면 천안함 언론검증위원은 “국방부가 연평도 포탄의 ①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면 최소한 연평도 폭발환경은 어땠는지, 동그라미 1번 글씨는 무엇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검증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연평도 사건과 관련된 책임문제 등을 수습한 뒤 정치적 오해가 없는 시기에 발표했다면 ‘천안함 논란 물타기’라는 비판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헌 교수 등의 글에 대한 국방부 입장이 궁금했다. 국방부에는 연평도 사건과 관련한 조사본부가 마련되어 있다. 조사본부는 대변인실을 통해 “(이승헌 교수 등의 주장에 대해) 계속 답변을 해도 그때마다 다른 의혹을 들고 나와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