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백두대간 자락에 누워봅시다

醉月 2010. 3. 4. 08:30

백두대간 자락에 누워봅시다

‘신백두대간 기행’ 첫 회… 백두대간을 25구간으로 나눠 소개하는 1년 여정의 첫걸음
저물어가는 해가 금물 들이는 계곡에서 그를 만났다.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그는 돌무더기에 묻혀 있었다. 그를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20세기 마지막 해 <한겨레21>은 백두대간을 연재했다. 연재의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왕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지만 신라에 귀속됐다. 비단과 금은보화와 함께 신라에 나라를 바치고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됐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역사는 가야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이 왜 지리산 자락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해두지 않았다.

» 첩첩이 겹쳐진 산. 한반도의 모든 산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그 끝은 백두대간과 닿는다. NIKON D90

이긴 자들이 남긴 글은 역사가 되고 진 자들을 추억하는 말은 전설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를 구형왕이라 적고 있고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양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사직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해 백성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당부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줬다고 한다.

양왕 전설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미래를 갈망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끊어지지 않는 능선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의 골짜기와 산은 양왕 전설 이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엔 한결같이 사람답게 살기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환경을 말하고 생태를 논하는 것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10년 전 백두대간 연재에서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이야기와 잘못 알려진 자연을 전했다. 그 뒤 10년, 백두대간에는 여전히 길어내야 할 역사와 문화가 남아 있고, 찾아내야 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사는 길이 있다. <한겨레21>은 다시 백두대간을 간다.

 

<산경표>와 <태백산맥은 없다>의 공

양왕을 만나러 지리산으로 가는 길. 에두르는 길을 잡았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길 3500여 리에서 진부령은 갈 수 있는 백두대간과 갈 수 없는 백두대간을 나누는 지점이다. 1980년대 중반 시작된 백두대간 종주 등반에서 많은 이들이 진부령에서 시작의 각오를 다졌고 끝의 감격을 나눴다. 달이 밝은 밤, 진부령을 내려오는 길. 계곡을 따라 드리워지는 산 그림자는 길고 길어 끝을 알 수 없다. 흐르는 것은 강뿐이 아니다. 산도 흐른다. 산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로 흘러가며 어디서 끝나는가? 다만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길을 내느라 살을 내준 산 사면에 달빛이 비친다. 허옇게 빛나는 바위 벽이 마치 뼈와 같다. “우리 조상은 이 땅을 뼈와 피의 흐름을 가진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인식의 구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통해 잃을 뻔했던, 그 현명했던 땅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 곧 불구가 돼가는 이 강토를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인 <산경표>를 발굴해 백두대간을 복원하는 첫 단추를 끼운 지리연구가 이우형(2001년 작고)씨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이우형씨가 복원해낸 <산경표>는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산경표>(1769)가 기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산들을 족보 식으로 연결해놓은 <산경표>의 원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남아 있지만,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는 산경 개념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지리 인식 체계로 자리잡았음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 백두대간 개념도

이우형씨가 <산경표>를 찾아냄으로써 잊혀질 뻔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를 복원해냈다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는 의사이자 산악인인 조석필씨다. 1993년 조씨는 <산경표를 위하여>라는 책을 자비로 펴냈고,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한 <태백산맥은 없다>를 1997년 4월 펴냄으로써 백두대간이 비로소 세상에서 빛을 보게 만들었다.

족보 식으로 산의 계통을 정리한 <산경표>는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는 우리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를 대표한다. 온 국토의 산을 물길을 넘지 않는 선으로 연결해 나가면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는 13개 큰 줄기로 정리돼 백두대간에 닿는다. 이것이 13정맥이다. 정맥의 이름이 한남금북정맥(한강의 남쪽과 금강의 북쪽)식으로 강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산을 계통화하기 위한 기준을 강에 두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과 13정맥에 강을 품지 않는 산줄기 하나를 정간으로 더하면 총 15개 산줄기로 온 국토의 산들은 정리된다(그림 참조).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으로 요약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는 ‘산수경’(山水經)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산수경은 땅의 생김새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기후나 토양에 따라 달라지는 각 지역의 생활공간을 한눈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 현대적 지리 지식으로는 호남 지방과 영동 지방 등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으나 산수경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옛 지도에서는 그것들을 구별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일본 산맥 체계 가르치는 학교

낙동강을 품는 낙동정맥이 시작하는 백두대간 매봉산에는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와도 가깝다.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의 최상류 지역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점령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랭지 배추밭에 뿌려지는 농약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 농약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등고선이 복잡한 현대의 지도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물길이 산수경에서는 한눈에 드러난다. 산수경으로 지리를 이해했다면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밭은 들어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땅을 수탈해야 할 자원의 창고로 인식하는 일본식 지리 체계는 지질학자에게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생활지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산경표>를 복원하고 알려낸 이우형·조석필씨 같은 이들의 지적이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보통명사로 쉽게 사용되는 요즘도 학교는 여전히 일본인 고토 분지로가 세운 산맥 체계를 가르치고 있다.

매봉산 삼수령을 넘어 첩첩산중의 모퉁이 모퉁이를 이은 길을 달린다. 오랜 가뭄으로 계곡은 지쳤고 봄을 맞는 나무들조차 생기가 없어 보인다. 남사고가 “만인을 살릴 산”으로 칭송했다는 소백산에 흰눈은 여전하지만, 소백산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죽령은 설악산 미시령처럼 새로 뚫린 터널 탓에 잊혀져가고 있다. 길 하나가 바꿔놓는 인심의 변화는 무서웠다. 미시령 초입에서 스스로 캐낸 약초며 버섯을 팔아 삶을 이어가던 약초꾼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조용한 삶을 찾아 도시에서 내려온 또 다른 이들은 새로 지은 펜션 영업을 위해 그토록 경멸했던 도시의 경쟁과 대립의 삶을 산골에서 재현해가고 있었다. 물줄기만 바뀌어도 인심이 바뀐다는 옛 사람들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에둘러가는 길을 서두르기 위해 중앙고속도로에 올랐다. 7시간이나 걸렸던 대구까지의 길이 3시간이면 넉넉했다. 골짜기에 다리를 놓고 산에 구멍을 내 만든 길은 곧은 만큼 빨랐고 빠른 만큼 슬펐다. 모든 길이 번호로 불리는 시대에 ‘울고 넘는 박달재’도 ‘바람도 쉬고 가는 추풍령’도 잊어야 할 추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남으로 3500여 리를 달리며 13개 정맥으로 분기해 온 국토의 뼈대를 이룬다. 금대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칠선봉 등 1천 개가 넘는 산들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백두·고두·마대·두류·금강·설악·오대·태백·소백·속리·덕유·지리 등 1천m가 넘는 고산들을 품고 있는 백두대간. 복원된 <산경표>를 따라 많은 이들이 백두대간 종주를 마쳤고 또 나서고 있다. 그들이 걷는 길은 같지만 얻는 결과는 다르듯이 백두대간은 골마다 마루금마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와 봉우리에는 거대한 백두대간 표지석이 비슷한 모습으로 세워지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지방자치단체마다 발표하는 백두대간 개발계획도 대동소이하다.

 

백두대간 자락에 기대어 전해온 말들

백두대간이 소중한 이유는 골과 능선 곳곳에 밝혀내고 계승해야 할 고귀한 민족문화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가야국 양왕의 이야기를 1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되새길 수 있는 것은 백두대간 자락에 기대어 사람들이 기억하고 전해온 말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오늘에서 끝나지 않고 내일로 이어진다. 그 흐름을 끊지 않고 이어가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 세대의 의무일 것이다. 앞으로 1년간 <한겨레21>은 백두대간을 25개 구간으로 나눠 잊혀져가는,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록한다. 사람과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는 미래를 위해.

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둘레길, 함께 둘레둘레 걷는 길

길을 연 지 1년도 안 돼 수만 명이 다녀간 지리산 둘레길, 800리의 고마움
인월(引月)에서 밤을 맞는다. 늦은 시간 창을 밝히는 빛에 창문을 여니 사위가 환하다. 반달임에도 구름 한 점 없어 빛은 거침이 없고, 산골임에도 너른 들녘은 여과 없이 달빛을 받아들인다. 1380년,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도 저 달을 만났을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운명까지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로 침범해온 왜구를 이곳 인월에서 대파했다. 신통력을 발휘해 달을 끌어내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의 땅이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내력을 설명한다.

»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 당산신앙에는 자연과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전통이 남아 있다.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은 사진 왼쪽 시멘트길로 이어진다.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서 만난 가야의 양왕은 ‘백성을 위해’ 제 나라를 버렸다. 인월에서 만난 이성계는 ‘백성을 위해’ 제 나라를 세웠다. 세월의 거리를 두고 하나의 땅에서 명멸해간 두 왕조의 어느 백성이 더 행복했을까? 속절없음에도 부질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어지럽힌다. 산골의 밤은 땅이 간직한 아픔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평화로웠고 길었다.

 

인월에서 마천 세동마을까지

큰 산 지리산은 그만큼 산자락도 넓어 품은 마을도 많다. 지리산 자락인 3도 5개 시·군의 100개 마을 길을 환형으로 연결해 800리 걷는 길을 조성하는 ‘둘레길’ 사업이 1차 성과로 2개 구간 20여km의 길을 열었고, 지난해 9월에는 여기에 6km의 길을 더했다. 인월에서 시작해 마천의 세동마을까지 둘레길은 지리산을 벗하며 걷는 길이다. 산에 들면 산을 보지 못하는 법. 산을 만나고 싶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길, 자연에 드는 길, 마을과 사람을 잇는 길, 문화와 역사를 잇는 길’로서 지리산 둘레길은 10년 전 백두대간에서 만났던 길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앞사람의 등산화만을 보았다”라는 답을 한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로 백두대간 종주 길에선 속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관조함으로 깨닫고 벗함으로 소중함을 배우는, 그래서 우리 삶을 좀더 가치 있게 하는 여행을 배우고 싶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길은 나무 팻말에 새겨진 빨간색 화살표와 검은색 화살표를 따른다. 빨간색은 인월에서 마천 방향이고 검은색은 그 반대 방향을 안내한다.

처음 만나는 길은 둑길이다. 왼쪽으론 봄을 맞는 남천을, 오른쪽으로는 겨울을 벗어내는 들판을 벗삼는 둑길에서 만나는 바람이 상큼하다. 길은 곧 아스팔트로 이어져 중군마을에 이른다. 임진왜란 당시 전군, 중군, 후군 가운데 중군이 주둔했던 내력으로 마을 이름도 중군이라 불리게 됐다는 마을에서 길은 다시 시멘트길로 바뀐다. 흙길이 아쉽지만 마을의 길은 농기계가 오가는 농로였다. 길지 않은 길에서 길의 세 모습을 만났다. 길은 제 쓸모에 맞게 모습을 갖출 때 아름답다. 걷는 길은 흙길이면 족하고 농기계가 다녀야 하는 농로는 시멘트길로도 제 쓸모를 다한다. 아스팔트길은 자동차를 위한 길이다. 도시 사람에게 흙길이 소중한 것은 일상의 길이 포장길인 탓이다. 도시의 일상이 흙길로 이어진다면 그 불편을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둘레길이 모두 흙길일 수 없는 이유는 그 길이 생활의 공간인 탓이다.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감추며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강요하지 않는 것. 어제와 오늘의 길이 함께하는 둘레길이 가르쳐준 공존의 길이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60번 국도 옆 지름길을 깨우다

중군마을을 지나 임도와 겹쳐지는 둘레길은 백련사를 앞에 두고 산으로 내리막을 탄다. 장항마을로 가는 그 길은 숲으로 이어진 작은 산길이다. 인월과 마천을 잇는 60번 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장항마을 사람들이 인월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번잡했다고 한다. 길은 산비탈을 오르지 않고 에돌며 숲으로 안내한다. 낙엽 이불을 덮은 작은 생명들이 언뜻언뜻 초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좀처럼 꽃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피해 낙엽 이불 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을 터였다. 낙엽을 한 꺼풀 걷어내면 작은 꽃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여린 꽃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다.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쫓는다.

노루목이라는 뜻의 한자말인 장항마을에서 순례자를 맞는 것은 잘생긴 소나무다. 지리산 반야봉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한 소나무는 장항마을 위 당산나무다. 400년은 넘었을 것이라는 소나무의 잘 자란 자태는 당산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겨울을 났으면서도 초록이 싱싱하다.

오랜 민족신앙인 당산신앙은 자연에도 생명과 신격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장항마을 위 당산 소나무는 마을 북쪽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가꾸어져왔다고 한다. 부족한 기운을 보해 넘치는 기운을 막는 우리나라 전통 풍수인 비보풍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소나무 아래에는 여느 당산에서 찾아보기 힘든, 돌로 쌓은 제단이 남아 있다. 제단은 당제를 치르는 신성한 공간이자 당제를 치르고 난 음식을 자연에 기대어 사는 다른 생물들과 나누는 나눔의 자리이기도 하다.

둘레길은 넓고 빠른 60번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오르는 아스팔트를 따른다. 이제처럼 길은 곧 시멘트길로 바뀌고 지리산 큰 자락은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1구간 다랭이 논길이 시작되는 매동마을 뒷산에서 지리산은 V자 모양으로 깊게 골을 파며 첩첩이 겹쳐진다. 그 아래가 뱀사골 계곡이다. 여순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산사람’이 되어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첫 매점에서 만난 김분임 할머니

뱀사골이 보이는 언덕 위 밭에서 걸음걸이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이른 농사일을 시작한다. 밭두렁에 가려질 정도로 작은 몸에 맨손으로 흙을 다듬는 할머니의 표정은 도대체 읽히지 않는다. 낯선 이의 발길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할머니가 살아낸 세월 속에 일제와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가 있을 터였다.

매동마을에서 둘레길은 산비탈로 이어져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을 지나 등구재로 이어진다. 중황마을을 지나는 산길에서 김분임(76) 할머니를 만났다. 둘레길에서 만나게 되는 3곳의 매점 가운데 할머니의 매점이 첫 번째다. 하황마을에서 태어나 중황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산 할머니는 한 번도 지리산 자락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남편이 뱀사골의 ‘산사람’에게 끌려갔다가 이틀 만에 무사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고, 7남매를 두고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앞세우지 않고 모두 건사했으니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연방 웃음을 짓는다. 농사일이 힘들어 동물을 키우다 그도 힘들어 벌을 키웠는데 판로가 없어 걱정하던 참에 사람들이 많이 오니 꿀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좋지 않냐고 말하는 할머니는, 경상도 억양에 전라도 어휘로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중황 사람들이 목기를 만들어 등구재 넘어 마천장을 보기도 하고 마천 사람들이 등구재를 넘어 인월장을 오가기도 했으니 말씨가 섞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중황마을에서 건너 보이는, 천석꾼이 살았다는 상황마을은 인근에서 가장 넓다는 실상사들보다도 더 많은 소출을 내는 땅이다. 비탈이어서 좁아 보이지만 실면적은 실상사들보다 더 넓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만한 비탈에 가득한 다랑이 논은 계곡에 자리잡은 논부터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수백 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만들어졌을 다랑이 논은 일부는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일부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들이 없는 탓도 있지만 더 이상 쌀농사가 먹고살 만한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다랑이 논은 지리산 자락에만 존재하던 경작지가 아니었다. 국토의 64%가 산지인 좁은 땅에서 비탈이라고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두대간 자락에서 다랑이 논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악산 한계령 골짜기에는 다랑이 논에 불을 지필 수 있게 한 아궁이 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추위에 냉해를 입을까봐 논바닥에 온돌을 놓아 아궁이 논이다. 이제 5월이 되고 다랑이 논에도 모내기가 이뤄지면 산은 초록의 바다로 변하게 될 것이다. 초록의 바다를 지탱하는 돌 하나하나는 삶을 살아낸 옛사람들이 남긴 땀의 화석이다. 행여 그 길을 지나게 되면 논을 이룬 돌 하나에 땀 한 바가지가 배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등구재 넘어 만난 풍광에 탄성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거북이를 닮았다는 등구재를 넘어 경상도 함양 땅으로 접어든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인월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던 등구재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잊혀졌던 길이다. 길은 되살아나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립의 땅이 아니라 함께 삶을 일구는 이웃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둘레길 사업은 관광자원으로서 ‘트레일’을 새로 내는 의미를 넘어 길을 소통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는 길은 소통의 공간이자 공유의 장이다. 둘레길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산골의 삶을 만난다. ‘보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사랑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등구재를 내려서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연못은 가뭄으로 말랐지만 여전히 깊어 보인다. 산 아래 창원마을 다랑이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였던 연못은 수로가 이미 망가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제 역할을 이제 다한 듯 보인다. 다만 산속에 자리잡은 탓에 뭇 생명들의 갈증을 달래는 역할은 여전히 할 수 있다. 지날 때 조용하게 지나야 한다는 안내를 따르는 것도 공존의 길에 함께하는 방법이다.

등구재 길을 빠져나오면 저절로 나오는 탄성을 어찌할 수 없다. 갑자기 트이는 시야 한가득 다랑이 논과 그 너머 병풍처럼 선 지리산의 풍광은 아름다움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보여준다. 왼쪽으로 중봉과 하봉을, 오른쪽으로는 제석봉을 거느린 천왕봉의 모습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가 소백산을 지날 때 엎드려 절을 했다는 심정을 이해하게 한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공물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어 창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창원마을에서 둘레길은 한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둘레길이 많은 발길을 모을수록 마을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등구재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놓인 간이 화장실은 그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렇다고 마을 인심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창원마을은 자신들의 당산을 둘레길 순레자들에게 쉼터로 내주었다. 등구재 아래서 만나는 무인쉼터는 인간에 대한 산골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높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격표와 간단한 음료수가 놓인 그 쉼터에는 순례자들의 갈증과 고단한 발을 쉬게 하려는 배려가 넘친다. 그 배려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려면 받은 배려만큼 돌려주는 보은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지나며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스치는 생명들을 귀하게 대하는 정도로도 고마움은 표시할 수 있다.

 

마을 공간을 이방인에게 내준 인심

창원마을에서 1구간이 끝나는 금계마을까지 둘레길은 다랑이 논을 지나고 다시 숲을 지난다. 금계마을 초입에서 만나는 펜션은 아예 한 공간을 떼어내 휴식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천왕봉과 칠선계곡이 두 눈으로 넘치게 들어오는 그 자리엔 비록 낡았지만 피곤한 다리를 쉬기에 충분한 소파가 놓여 있고 커피 향이 유난히 달콤한 자동판매기가 놓여 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상대를 위하는 배려의 모습을 만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계마을에서 지리산 순례길을 마친다. 그러나 ‘산사람의 길’로 이름 붙여진 둘레길 2구간은 금계마을에서 출발해 의중마을을 지나 벽송사를 거쳐 송대마을과 세동마을까지 이어진다. 1구간에서 다랑이 논이 길동무를 해주었다면 2구간에서 길동무는 엄천강이다. 둘레길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의중마을 당산을 지나 마을을 에둘러 숲으로 들어간다. 소나무숲인가 싶으면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고, 오르는가 싶으면 내려서는 길은 자동차길이 생기기 전에 벽송사로 가는 길이었다. 길은 아들과 손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절을 찾는 할머니도 쉽게 오를 정도로 편안하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산사람’들이 야전병원을 운영하던 곳이다. 그 때문에 벽송사는 모두 불태워졌고 지금의 가람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새로 지어져 정갈하다.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은 절답게 절은 조용하다. 시간이 허락해 하룻밤 묶어간다면 둘레길 순례의 의미를 더 각별하게 할 수 있다. 벽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목장생이다. 특히 풍부한 표정은 볼수록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원래의 목장생은 사찰 안 정려각에 보존돼 있다.

벽송사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송진을 채취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나무들이다. 그 상처는 궁핍했던 살림살이의 기억이며 일본 제국주의 착취의 상징이며 혁명을 꿈꾸던 산사람들의 불안하고 긴 밤을 추억한다.

» 금계마을에서 바라본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은 의중마을(맨 왼쪽)을 지나 벽송사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벽송사의 목장생. 다양한 표정과 과감한 조각 기법은 민중미술의 해학과 창의력을 보여준다.

벽송사에서 송대마을로 가는 길은 숲길이다. 돌이 없는 흙길에 낙엽이 소복해 마치 양탄자를 밟고 가듯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마지막 산사람 정순덕씨가 1963년까지 숨어 지내던 선녀굴이 있는 송대마을에서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마을 이름이 견불동이다. 부처를 만난다는 곳이다. 견불동에서 송대마을을 보면 지리산 능선이 마치 누워 있는 부처님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대마을을 지나면 길은 둘레길의 끝인 세동마을까지 임도다. 길은 대부분 내리막이라 마지막 구간의 힘을 덜어준다. 송대마을에서 세동마을로 가는 길에서는 가능한 한 자주 뒤를 돌아봐야 한다. 길 따라 변하는 지리산 풍광이 아름답다.

수직으로 올라 정복할 필요 없어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지리산 둘레길을 기획한 이들은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정복의 길이 아니라 수평으로 눈높이를 맞추고 향유하며 함께 거니는 길’을 꿈꾸고 있다. 길은 앞선 사람의 발자국으로 시작하지만 길을 완성하는 것은 뒤를 따르는 이들의 발걸음이다. 행여 불만을 만나면 위로하고 고개 숙이고, 행여 환대를 만나면 고개 숙이고 감사하며 길을 걸을 일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이제 시작이고 우리에겐 800리 둘레길이 너무나 필요하다.

여행 정보

전 구간은 여유롭게 1박2일로

지리산 둘레길 순례는 대부분 인월에서 시작한다. 안내센터가 자리잡은 탓이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버스를 탄 뒤 인월에서 하차한다. 혹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함양까지 온 뒤 함양에서 인월로 가는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인월에는 찜질방 같은 잠깐 휴식할 장소가 없으니 새벽에 도착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승용차는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 함양IC → 88고속도로(광주 방향) → 지리산 톨게이트를 따르면 된다.

» 둘레길 개념도

좀더 조용하게 걷고 싶다면 세동마을에서 인월 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곳곳에 안내판이 잘 세워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지도와 비상식량 등은 꼭 챙기도록 한다. 지리산 안내센터 홈페이지(www.trail.or.kr)에서 필요한 지도와 정보 등을 내려받을 수 있다.

개통된 전 구간을 돌아보려면 1박2일의 일정을 잡는 편이 길을 서두르지 않게 한다. 익숙한 도시의 편리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을의 민박이나 실상사와 벽송사의 템플스테이를 이용할 수 있고, 인월과 함양에 숙박업소도 여럿 있다. 함양 마천의 창원마을과 금계마을에는 펜션도 영업 중이다. 매동마을(maedong.org), 송전마을(kr.blog.yahoo.com/songjunri), 실상사(www.silsangsa.or.kr), 벽송사(www.amita.pe.kr) 등 홈페이지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