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박석무의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_01

醉月 2009. 11. 4. 08:48

허목-은거당의 옛터를 찾아서(上)

미수 허목이 살았던 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마을. 집 한채 없이 들판으로 변한 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사진작가 황헌만>

길을 나서는 날은 매우 추운 겨울 날씨였다. 동지가 지나 소한(小寒)의 추위가 다가오는 12월28일, 우리 일행은 안내자도 없이 길을 물어 역사의 땅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역사의 비극을 그대로 안고 있는 민통선 안의 비무장지대인 허허로운 벌판이자 산등성이에 흩어져 누워있는 몇몇의 묘소가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라는 마을. 그곳은 양천 허씨들이 대대로 이어온 큰 집성촌(集姓村)으로 6·25 전만 해도 면소재지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도 있었고 물산의 집산지인 시장(市場)까지 열리고 있어 상당히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민족 상잔의 전화가 휩쓸고 가버린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고는 없이 전답만이 질펀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거주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최근에야 통제를 받는 민간인들이 출입하여 제한하는 시간 안에서만 농사를 짓도록 허용되어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출입하는 곳이다. 아! 여기에 오면 민족분단의 비극이 무엇인가라는 아픔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바로 그곳이다. 어찌하여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인 이 마을이 이런 정도의 폐허로 변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 저리는 분단의 비극이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어주었다.

군남 면사무소 앞에서 기다리던 묘소관리인을 만나 별 어려움 없이 민통선의 초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강서리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이래야 집이라고는 없는 질펀한 벌판, 주변의 야산에 듬성듬성 빗돌과 함께 고즈넉이 자리한 묘소들, 거기에 허씨들의 이름난 선조 묘소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여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학자이자 벼슬아치로는 최소한 세분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동애(東崖) 허자(1496~1551)라는 학자, 관인(官人)이다. 조선왕조 초기의 당대의 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공조·이조판서와 좌·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지내다 끝내는 바르고 정직하며 강직한 주장을 펴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죄를 안고 죽었다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된 저명한 사람이 바로 그 마을 출신으로 허씨의 이름을 크게 빛낸 분이다.

허자의 증손자로 관설(觀雪) 허후(許厚:1588~1611)와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1682)이 또 이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니, 두 사람은 아버지들이 형제사이이던 사촌간의 형제였다. 관설, 미수는 허씨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조선왕조 중기 이후의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의 지위에 오른 분들이다. 7세 위의 사촌형인 관설의 큰 영향 아래 유년시절을 보낸 미수 허목은 그 중에서도 더 뛰어나 효종 이후 크게 대립되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의 종장(宗匠)으로 이른바 ‘근기실학파’의 개산조(開山祖)가 되는 분이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은 역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인가. 그런 잔혹한 6·25의 참화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묘소가 온존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비록 빗돌에는 탄흔이 서려 군데군데 빗면을 할퀴었으나 그래도 통째로 비문을 알아볼 정도로 건실하게 서있고 묘소도 둥실하게 누워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랫동안 종적을 알 수 없이 폐허로 방치되던 곳, 후손들만이 민통선 안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역을 단장하고 새롭게 치장하면서 미수와 그 선조 및 후손들의 묘역은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선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단 한곳, 숙종대왕이 위대한 학자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해준 집이 있던 곳. 그곳에서 미수 허목은 만년에 학문과 사상을 마무리짓고 거기에서 88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임금이 은혜롭게 내려준 집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미수는 그 집의 이름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고 화초와 괴석으로 정원을 꾸미고 운치있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제 그 집은 완전히 없어지고 최근에 후손들이 마련한 유적비와 알림판이 흘러간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광막한 들판의 변두리 야산 밑에 집터는 쓸쓸하지만 그곳에서 일세의 노학자가 평생을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곳의 주변을 맴돌면서 깊은 사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 서인과 남인의 대결

‘우의정문정공미수허선생지묘(右議政文正公眉수許先生之墓)’라는 비문이 새겨있는 미수의 묘소 앞에서 우리 일행은 묵념을 올리며 큰 학자이자 정승이라는 높은 벼슬의 정치가의 위업을 기렸다. 미수의 묘소를 중심으로 오른쪽 등성이에는 미수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가 따로 빗돌과 함께 있었고 왼쪽 등성이에는 사촌형 관설 허후의 묘소와 증조부 동애 허자의 묘소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사람의 명성으로도 역사의 땅이 될 이곳에 이름만 대면 금방 알아보는 역사적 인물의 묘소가 즐비해 있었으니 대단한 장소가 아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으로 등극한 해가 1623년이다. 27년째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효종이 임금에 오른 해가 1650년이다. 서인세력의 힘으로 임금이 된 인조가 등극하면서 정치 주도권은 서인들의 손에 있었고 효종시대에도 역시 그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다.

효종시대 특징의 하나가 이른바 ‘산림(山林)’이라는 재야학자들을 고관대작으로 등용하여 ‘산림정치’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다. 비록 출사는 하지 않았지만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면서 심신의 수양에만 힘쓰던 재야 학자이던 허목에게도 최초의 벼슬이 내렸으니 효종 1년이던 1659년의 일이자 허목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조선왕조 벼슬의 위계로는 최하위인 종9품인 참봉이라는 벼슬이었다. 물론 허목은 잠깐 응하고는 바로 사양하고 말았다. 요즘으로 보면 은퇴할 나이에 첫벼슬이 내려졌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학자에게 능참봉의 벼슬을 내리는 것 자체도 대단한 영광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도 학자에 걸맞은 벼슬을 내린 것은 효종8년 허목 63세인 1657년의 일이니 지평(持平)이라는 벼슬이었다. 지평은 언관(言官)의 지위이기 때문에 허목은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고향인 연천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1659년인 65세 때는 바로 효종재위의 마지막 해이자 효종의 붕어로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는 전대미문의 당쟁이 발단한 해였다. 이 해에 허목은 장령(掌令)이라는 더 높은 언관의 지위에 오르고, ‘임금의 덕(君德)’에 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무렵이면 동춘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 등 서인계의 인물들이 산림으로 발탁되어 고위직에 올라 허목을 비롯한 고산 윤선도(1587~1671), 탄옹 권시(權시:1604~1672), 백호 윤휴(1617~1680) 등 남인계 학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당쟁의 와중으로 빠져들었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의 상사(喪事)에 기년(朞年)복이냐 3년복이냐의 문제로 격화된 당쟁은 정권의 향방을 좌우하는 권력쟁취로 변화하여 편안할 날이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한 중간에 남인의 정치적 권력자인 영의정 허적(許積:1610~1682)과 허목과의 분열도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허적은 허목의 12촌의 집안 아우되는 사람으로 애초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오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지위에 올라 권력자가 되었으나 원칙을 중시하는 허목과는 견해가 달라 결국은 탁남
(濁南)으로 청남(淸南)에 속하던 허목과는 불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허목의 3년 설에 허적도 동조하여 같은 남인계의 주장을 폈으나 권력 남용의 우려를 버리지 못한 허목의 지혜가 그를 멀리하였고, 같은 3년 상의 주창자이던 남인계 윤휴도 마찬가지로 허목의 주장을 옹호하고 응원했지만 견해의 차가 벌어져 큰 화란에 휩싸여 참혹한 비극을 맞았던 점도 허목의 지혜가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미수 허목의 연보>
미수 허목의 82세때 초상화.
1595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나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父),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수), 대령노인(台領老人)
아버지는 포천현감을 지낸 허교(許喬), 할아버지는 별제(別提) 허강(許강), 증조부는 찬성허자(許磁), 어머니는 예조정랑 백호 임제(林悌)의 따님인 임씨(林氏), 부인은 영의정, 문충공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인 전주이씨
10세 동몽교관으로부터 글을 배움
19세 전주이씨와 결혼
20세 재야학자 총산(蔥山) 정언옹에 학문을 익힘. 때부터 학자관인이던 용주(龍州)조경(趙絅)과 교류하기 시작. 평생의 학문적인 벗이 됨.
23세 아버지의 근무지인 거창(居昌)에서 생활하면서 스승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제자가 됨. 그 때 종형(從兄) 허후와 동행 이 무렵 모계(茅溪) 문위(文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도 출입.
56세 효종원년에 처음으로 참봉의 벼슬이 내림.
63세 지평(持平)에 임명, 사양하고 나가지 않음.
64세 다시 지평에 임명. 나아가지 않음.
80세 현종이 붕어하고 숙종이 임금에 오르면서 대사헌으로 부름.
81세 다시 대사원,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에 오름
88세 고향인 연천 은거당(恩居堂)에서 별세.
1688년 복관
1689년 고향 연천 근처인 마전(麻田)에 미강서원(嵋江書院) 세움.
1692년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림.

古學으로 송시열에 맞서다-
은거당(恩居堂) 유지(遺址). 허목이 살았던 본가이나 지금은 터만 남아 표지 비석만 서 있다.

# 81세 노인 정치의 한복판으로

1660년, 허목의 나이 65세, 효종을 이어 현종이 임금으로 등극한 해다. 허목은 현종의 어전인 경연(經筵)에서 송시열 일파의 ‘기년설’은 예(禮)를 그르친 잘못이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른바 ‘기해예송’이 발단되면서 현종·숙종대의 당쟁시대가 개막되었다. 시골에 숨어살면서 학문연마에만 전념하던 재야의 학자 허목이 정치의 한복판으로 진입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가 전개됨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세력이나 정치력이 턱없이 미약하던 허목 일파는 송시열 일파를 대적할 세력이 못되었다. 정치적 힘에 밀린 허목은 중앙정계에 있지 못하고 강원도 삼척이라는 외딴 곳의 부사(府使)로 내침을 당했다. 목민관으로서의 1년 반 동안의 삼척생활은 허목의 선정(善政)을 주민에게 선보인 시기였고 능력을 돋보이게 했던 시절이었다. ‘동해송’을 짓고 ‘척주비’를 세워, 그의 글과 글씨가 얼마나 우수하고 뛰어났는지 지금까지도 보여주는 국보급 유물이 되었다. 바다의 해일로 연안 주민들이 큰 피해에 시달릴 때 바닷물이 더 이상 밀려오지 않게 해달라고 해신(海神)에게 아뢴 비문의 내용은 그로 인해 큰 해일이 일지 않아 큰 덕을 입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야 알 길이 없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고향 연천으로 돌아온 허목은 이후 10여 년간을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한다. 1675년,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등극하면서 81세의 노인 허목은 다시 정치의 한복판으로 나와 대사헌, 이조참판, 비국당상이라는 재신(宰臣)의 지위에 오르고 정치와 학문을 주도하는 국가 원로가 된다. 예설(禮說)로 서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남인의 중심인물로 같은 해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라는 대신이 되었으니 세상에 드문 ‘산림정승’이라는 높은 명예까지 얻었다. 고대 중국의 강태공 여상(呂尙)이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 하여 80년을 궁한 선비로 지내다 80이후에 재상으로 다시 80을 보냈다는 전설처럼, 허목은 80이 넘어서야 재상이 되고 대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역시 한 때. 1680년 숙종6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큰 화란이 일어나 영의정 허적이나 이조판서 윤휴 같은 고관대작이 참형으로 죽어갔다. 당시 허목 역시 삭출(削黜)을 당해 고향에서 대죄(待罪)해야 했다. 그러나 허적을 반대했고 윤휴도 비판했던 허목의 지혜로 더 큰 화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2년 뒤에 허목은 세상을 떠났고 오래지 않아 복관(復官)되어 학자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 근기학파의 개산조(開山祖)

미강서원(嵋江書院)의 옛터에 단(壇)을 묻고 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예로부터 남인에는 4명의 선생을 꼽는다. 허목의 평생 동지이자 학우이던 용주 조경, 고산 윤선도, 미수 허목, 백호 윤휴가 바로 그들인데 학문으로나 정치적 영향으로도 그 네 분이 남인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학문적 성격이나 학술사적 계보 때문에 가장 큰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송시열파에서 성리학인 주자학(朱子學) 일변도로 학문의 범위를 한정짓고 정치적 권력마저 독점하고 있을 때, 허목이라는 거목이 나타나 송시열 일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을 제창하게 된다. 이 때 허목은 성리학 위주의 사서(四書) 중시 풍토에서 벗어나 육경(六經)을 학문의 방향으로 새롭게 잡았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다음 세대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공맹(孔孟)의 원시유교에 학문적 비중을 높게 두고, 이른바 ‘실학파’라는 새로운 학파가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가 찾은 허목의 옛집, 은거당(恩居堂)은 그래서 학문과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본거지가 된다.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겨우 기념비만 서 있는 이곳이 역사의 새싹이 돋아난 바로 그곳이었다. 바로 그곳은 주자학의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거론했던 백호 윤휴가 대선배인 허목을 찾아와 학문을 논했던 곳이요, 반계 유형원이 스승 같은 허목을 찾아와 학문과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崗) 정구(鄭逑: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학파’를 열었고, 거기서 조선 후기 실학의 3대 학자라는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이라는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반계·성호·다산이 육경(六經)의 높은 가치에 매력을 느끼고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점은, 곧 고학·고문·고경을 중시한 허목에서 싹텄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고학(古學)을 통한 변혁의 발단

허목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은 ‘기언(記言)’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모두가 ‘문집’이라 했건만, 허목 자신이 ‘기언’이라 정했다. ‘기언’은 원집과 속집을 합해 67권이고 다시 별집(別集)이라 하여 26권이 있으니 도합 93권 25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책 전체의 서문은 자신이 직접 기록했다.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라는 서문의 첫 글귀가 그의 평생을 설명해준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매혹되었을 때, 허목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허목의 상고정신(尙古精神), 즉 옛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못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 교수는 밝혔다. “고문·고서의 ‘고’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적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라는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허목에게서 나왔음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 17세기 당쟁의 시대는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허목이나 송시열보다는 한 세대 이상의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650~1735)는 뒷날 소론(小論)계로 영의정에 이른 큰 인물인데 그가 젊은 시절 두 사람을 직접 만났을 때의 인상을 적은 글이 전한다.

허목 묘 전경
아버지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때인 16세(1665)에 최규서는 71세의 허목을 ‘은거당’으로 찾아뵈었다. 이후 그는 “세 칸의 띠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에는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으로 만들었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글씨를 새겼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의 모습 같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최규서는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대단한 관찰력이다.

최규서는 19세이던 1668년에 62세의 송시열을 뵌 적이 있다. “처음으로 도성 안의 모씨집에서 인사를 올렸다. 골목길에서부터 장터처럼 시끄러웠고, 뜨락이나 마루에도 사람들이 쭉 둘러있었다. 틈이 나는 대로 각자가 방안으로 들어가 어깨와 발을 맞대고 앉을 정도로 빼곡 들어차 있었다. 묻고 대답하는 일에 권태롭지 않았고 책을 끼고 들어가 직접 펴보이며 묻는 사람도 있었다”(‘간재문집’ 병후만록)라는 대목에서 허목의 청고한 모습과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권력의 위세를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영원한 라이벌 허목과 송시열은 남인과 노론의 양편 종장(宗匠)으로 조선왕조 후기 역사의 향방을 좌지우지했다. 끝내는 주도권이 노론에 있었기에 노론은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며 정치를 주도하였다. 반면 남인계열은 정치적 주도권은 빼앗겼으나 학문적으로 고(古)를 숭상하다가 실학이라는 맥을 세상에 전해주는 공을 쌓았다.

그런 문제는 정조 때의 영의정이자 큰 경세가이던 번암 채제공이 정리하였다. 영남의 성리학이나 유학의 논리를 허목이 근기에 전해주자 성호 이익은 그를 사숙(私淑)하여 성호학파를 이루고 실학파의 전통을 세웠다. 게다가 요즘 밝혀진 대로 반계 유형원이 허목의 제자에 가깝도록 직접 학문을 묻고 토론했던 점으로 보면 허목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숙종대왕의 명령으로 경기도에는 미강서원(嵋江書院)이, 전라도 나주시에는 미천서원(眉泉書院)이 세워져 허목의 학문과 사상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해 그런 일도 활발하지 못한 채로 미강서원은 터만 남았고, 미천서원은 덩실하게 서있긴 하나 내용은 너무 빈약할 뿐이니 안타깝기만하다. 어둡던 중세를 벗어나려는 학문적 노력이 허목에게서 발단하였고, 그 뒤를 이은 반계·성호·다산 등의 학문과 사상의 전통이 그대로 오늘날 조선학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우리가 찾았던 ‘은거당’은 분명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면서 한국사상의 한 뿌리임을 인정하게 된다.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표해록(上)

최부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사진작가 황헌만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 이곳에서 553년 전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 자라며 학문과 사상을 익히고 키웠다. 그 인물이 바로 금남 최부(1454~1504)다. 본관은 탐진이고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가 금남(錦南)이다.

최부는 아버지 최택(崔澤)과 어머니 여양 진씨(陳氏) 사이에서 단종2년인 1454년에 태어났다. 동강면 소재지의 이름난 고깃집에서 나주곰탕과 생소고기에 맛있는 점심을 들고 거기서 가까운 성지마을에 우리가 들렀을 때는 오전에 내리던 눈도 그치고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햇볕은 밝게 비치고 있었다.

그 마을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지인과 동행했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하자 최부의 흔적이라고는 ‘금남최선생유허비(錦南崔先生遺墟碑)’라는 비 하나가 서있을 뿐 마을 사람들은 집터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태어난 지 550년이 지났고 세월과 함께 세상은 또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알 길이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고, 더구나 그 마을에는 후손이라고는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허비 주변에는 아직 베어내지 않은 아름드리 노송이 몇 그루 남아있고 수명을 알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느티나무가 두 그루 넉넉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필시 오래된 마을인지라, 그 언저리가 분명 최부가 태어난 집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후손 중에 어떤 분은 유허비의 맞은편 등성이 아래가 옛날의 집터라고 전해온다고 하였다. 그래도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울 때 무언가 근거가 있었기에 그곳에 세우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서 좌우를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최부의 탄생지라고 여겨도 좋을 것 같았다.

최부의 집터에 세워진 금남최선생유허비.
현인이 지나가면 그곳의 산천도 빛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최부 같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벼슬아치이던 어진이가 태어난 곳이건만 마을이 이렇게 처량하게 되어 흔적이 빈약하다니 안타까움을 이길 수 없었다. 무상한 500년의 세월이 만들어 준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 최부가 쓴 중국 표류견문기 ‘표해록’

최부 하면 그의 유명한 표류기인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성종 19년인 1488년에 35세의 최부가 지어 왕에게 바친 책으로,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또 1578년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역경의 서술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대단히 유명해졌고, 일본이나 중국에서까지 번역되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하멜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의 세계적 여행기로 거론되는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
한문으로 된 ‘표해록’과 함께 한글로 번역된 책까지 있었고, 최근에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읽는 사람도 많지 않고 최부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하여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극소수에 이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당대의 학자이자 최부의 외손자인 유희춘은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여러 곳에서 정확하게 밝혔다.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고 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도 했다. 미암 유희춘은 자세한 생애를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라는 제목으로 밝혀놓았다.

“특별한 자질을 타고나 강의(剛毅)하고 정민(精敏)하였다. 어른이 되자 경전을 익혀 글을 짓는데 일반에서 특별히 뛰어났다. 24세에 진사과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29세에 알성급제로 재주 있다는 명예를 드날렸다. 전적(典籍)의 벼슬에 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명백하고 정확한 서술로 당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33세에는 중시(重試)에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다. 34세인 1488년 9월 제주도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선발되어 제주도로 건너가 직무를 수행하다가 35세의 윤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접했다. 급히 고향인 나주로 귀향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태주(台州)에 이르렀다. 천신만고의 고생을 겪고 6월에 한양으로 돌아와 왕에게 ‘표해록’을 지어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추쇄경차관이란 불법자들을 찾아내 문책하는 벼슬아치다. 육지에서 죄를 짓고 제주도로 도망간 범법자들을 찾아내 치죄하려고 파견된 직분이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상인(喪人)으로 집상할 겨를도 없이 6개월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는 왕명으로 표류전말을 올려 바쳐야 했다. 그 뒤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 아버지 상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최부는 효자로서의 본분을 지켜 4년 동안 시묘(侍墓)하는 효성을 다하고서야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39세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 상을 당하고 귀국했으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집상을 해야지 아무리 왕명이라해도 ‘표해록’을 저술한 것은 아들의 도리로 잘못이 있다는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최부를 절대 신임한 성종은 궁중으로 불러 표류전말을 구술하라고 명하여 전말을 듣고 나서는 그 혹독한 고난과 불운한 사정에 감탄하여 선물로 옷을 한 벌 하사하여 지극한 칭찬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41세에는 벼슬아치의 꽃이라는 홍문관 교리에 오르고 같은 해에 대제학에 오를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는 벼슬인 예문관 응교(應校)라는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44세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한창 벼슬에 올라 능력을 발휘하려던 무렵인 45세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간(司諫)으로 연산군의 잘못을 상소하고 고관대작들의 비행을 폭로한 상소를 올리자 미움을 받던 중,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46세에 함경도 단천이라는 나라 북쪽 끝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그처럼 황량한 변방에서 귀양 살면서도 최부는 그곳의 문화와 문명을 개화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많은 교육을 했다. 열심히 연구하고 글을 짓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연산군 10년(1504)인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는 불행을 맞고 말았다. 문장과 학문을 안고 반백에 세상을 마치고 만 것이다.

최부는 어린 시절 진사이던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경사(經史)를 익혔다. 자라서는 일세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당대의 제제다사들과 함께 교육하면서 학문을 깊고 넓게 연구하였다.

사림파의 종장이던 김종직, 그 무렵에 벌써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김종직 문하의 뛰어난 인물들이 비참하게 파멸한 사화가 무오사화요, 갑자사화다. 김일손·최부 등이 귀양가거나 죽임을 당해 사림파가 뿌리째 흔들렸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무도한 연산군의 횡포에 이유 없는 죽임을 당한 최부, 그의 최후에 대해 역사는 그냥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실록 연산군 10년 10월25일의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經史)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로 애통함을 기록하였다.

경전과 역사에 밝고 문사에 뛰어나며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한 데다 나라에 옳고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벼슬아치였기에, 우리는 그를 훌륭한 선비로 추앙하는 것이다.

# 사림파의 대표적 선비

30대의 젊은 관료로서 주자학이나 성리학의 예교(禮敎)정신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개를 지켰던 그는, 젊은 조선 사람의 긍지를 중국에 널리 알린 점만으로도 우리들이 대우해야 할 선조 중의 한 분이었다.

‘표해록’을 번역한 북한의 학자가 말했던 점은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다. “그의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 깊은 학문은 중국 사람들의 경탄과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충의, 부모를 생각하는 애절한 효성, 이는 중국 관원과 인민들과의 응답에서 언제나 솟구쳐 상대방의 심금을 울려마지 않았다. 그는 들놀지 않는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명성 높은 인물들을 자랑하였으며 또 우리나라의 위신을 높였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양반 관료이고 당시의 역사적 제한성 때문에 오늘의 생각과 일치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망망대해의 풍파 속에서 난파 직전의 43명의 동승자들에게 했던 최부의 말을 들어보자. “배 안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 딴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표해록 윤정월 10일조) 그의 마음은 그렇게 철석 같았었다. 미암 유희춘의 제자로 큰 이름을 날린 허균의 형인 허성은 금남에 대해, “웅대한 문장과 곧은 절개로 큰 명성을 날렸다(以雄文直節 致大名)”라는 찬사를 올렸다.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표해록(下)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자리한 금남 최부와 그 아버지 최택의 묘. <사진작가 황헌만>

1488년 윤 정월 초3일, 최부와 그의 일행 43명은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했다. 항구에서 5리쯤 바다로 들어오자 날씨는 변덕을 부렸고 때 아닌 비바람이 치면서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급히 가는 길이어서 회항을 하기도 어려워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날씨는 더욱 악화되면서 43명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고 말았다.

배 안에는 하인이나 종을 포함해서 대부분 하류층으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막말을 하고 도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자학과 성리학의 이론으로 인격까지 갖춘 최부의 인품은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놓일 때에야 그 본디의 성품이 드러나고 인격이 발휘되는 것이다. 경전과 사서에 밝고 고사나 옛일에 넉넉한 지식이 있던 최부는 막돼먹은 사람에게도 인격적 감동을 주어, 참으로 어려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표류하는 뱃속 생활을 해냈다.

윤 정월 12일 해적을 만나 겨우 위기를 벗어나고 마침내 중국의 절강성 영파부(寧波府) 땅에 이르게 되었다. 해적을 만났을 때, 조선의 벼슬아치임을 과시하기 위해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옆사람의 권유를 뿌리치고, 죽음을 당할망정 선비의 도리에 어긋나게 해서는 안된다던 최부의 절조는 대단한 정도였다. 해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때에도 그는 조선선비의 위풍당당함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는 지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한 선비라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의심을 살 것이니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윤정월 16일조)고 끝까지 주장하던 최부의 정신은 이 나라 민족정신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겨우 중국땅에 오르자 이제는 왜구, 즉 왜적으로 의심받아 또 어려움에 봉착했다. 조선의 관인임을 증명하는 온갖 증표를 보여주어 드디어 조선인임을 인정받고 황제를 만나러 북경으로 향할 수 있었다.

# 수차(水車)의 제작법을 배우다

애국자이던 최부, 농사짓는 조국의 백성들에게 이용후생할 마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3월23일 중국의 봉신역(奉新驛)에 이른다. 농부들이 수차를 이용하여 쉽게 논으로 물을 퍼올리는 것을 보고는 최부는 자세히 그 제작법을 배운다. 영·정조 시대에나 등장했던 중국을 통한 과학기술의 보급을 최부는 벌써 그때 실현하였다. 그는 뒷날 고국에 돌아와 벼슬하면서 가뭄이 든 충청도에 파견되어 수차제작법을 가르쳐주어 가뭄을 극복한 큰 공을 세우기에 이른다.

조선의 홍문관 학사라는 이름에 부끄럼 없이 역사와 지리에 밝고 경전과 문학에 밝았던 최부는 철저한 선비적 자세와 생활이 중국의 황제에게까지 인정받아 후한 상품을 받고 끝내 호위를 받으며 그리운 조국 땅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동승했던 43명 전원이 아무 탈 없이 모두 무사히 귀국하였다. 모두가 최부의 인격과 학식,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에서 나온 위대한 생의 부활이었다.
최부 묘소 아래에 있는 제각. <사진작가 황헌만>

# 넘실대는 영산강 강변의 묘소

탄생지를 찾아가 달랑 서있는 ‘유허비’ 하나만을 보고 말았던 우리는 나주와 무안을 잇는 영산강 위의 다리를 건너 최부와 그의 아버지 최택의 묘소가 있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느러지 마을을 찾았다. 필자의 고향 땅이어서 가끔 들른 적이야 있지만, 거기가 바로 역사와 사상의 땅이자 고향임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 사실이다.

왕릉의 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택의 묘소 아래, 크기는 훨씬 작아 아담한 금남 최부의 묘소가 영산강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안내판에는 본디 해남에 최부의 묘소가 있었으나, 해방 후로 후손들의 노력으로 아버지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적혀 있었다. 제각(祭閣)도 덩실하게 서 있어서, 수효도 많지 않은 후손들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나 있었다.

이곳 이산리는 무안군 땅이지만 강 하나만 건너면 나주의 동강면으로 실제로는 최부의 탄생지와 이곳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애초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게 되었고, 효성이 깊었던 아들을 아버지 묘소 아래로 모신 것은 그것을 알고 있던 후손들의 뜻이었으리라.

금남 최부의 묘비 앞면(왼쪽)과 뒷면.
세상에 아직 크게 조명되지 않은 진사 최택과 당대의 학자 관인이던 최부 부자의 묘소는 그렇게 소홀하게 취급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이 넘실대는 하류, 몽탄강(夢灘江)의 바로 곁에 풍광도 아름답게 자리잡은 묘소는 호남의 문화와 학문을 열고, 이용후생의 큰 뜻을 최초로 조국 땅에 뿌린 탁월한 인물의 유골과 혼이 묻혀있는 역사적 땅이라는 것이다.

# 금남의 학문 연원과 학파의 형성

필자는 몇해 전에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17~8세기 호남유학의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호남에 최초로 학문과 의리의 씨앗을 뿌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를 이어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한 학자로는 금남 최부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금남은 나주 태생이지만 해남의 정씨(鄭氏)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해남 출신인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해남윤씨로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을 가르쳐냈다고 하였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해남윤씨 윤효정은 윤행(尹行)·윤구(尹衢)·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나씨의 나질이 또 있다. 이분의 아들 나사침은 호가 금호(錦湖)로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호남의 웅도인 나주 일대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는 영광땅이나 지금은 장성땅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있었다. 금남보다 5세 연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것은 금남보다 9년 뒤여서 송흠은 금남을 대선배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같은 시기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던 두 사람은 같은 호남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 자주 내왕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벼슬 초기에 송흠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왔고, 고향에 체류한다는 금남의 소식을 듣고 금남의 고향집으로 송흠이 인사차 찾아갔다고 한다. 금남이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라에서 관인에게 내주는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금남은 벌컥 화를 내며 나라에 고발하겠다고 송흠을 꾸짖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서울 집에까지는 휴가니 의당 역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자기집에 찾아옴은 사사로운 일이니 역마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가 공사를 구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고향 후배를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문책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청렴하며 공사에 엄격했던 분이 금남이었고, 이런 경계를 받은 송흠은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난 청백리로 고관대작의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송흠의 제자에는 호남의 대학자가 많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이 대부분 송흠 문하에서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힌 분들이었다. 송흠의 학문과 사상 및 청백리 정신이 최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면 호남의 석학들은 대부분 최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고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표해록’의 가치와 중요성은 생략한다.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한 지 오래다.

최부는 직계 후손들의 수도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금남 최부의 고향 마을에서 생가 터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표해록’을 통해 일찍이 세계화정신을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패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정신은 묻혀버릴 수 없는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의리 높고 박학한 학자 금남 최부의 혼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만 우리들의 몫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반계 유형원 ‘반계수록’ 의 산실 (上)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변산반도를 형성한 변산(邊山)의 산자락을 따라 질펀한 평야가 널려 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유형원 선생의 묘소 전경 <사진작가 하세영>

이곳 평야의 상당 부분은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이자 이름 높은 정승이던 하정(夏亭) 유관(柳寬:1346~1433)에게 임금이 내린 토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유관의 6대손인 유성민(柳成民)은 과거에 합격하여 형조정랑을 지낸 분이나, 선조가 물려준 땅을 찾아와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민의 사위이며 뒷날 반계 유형원의 고부(姑夫)이자 스승이던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유형원은 32세 이후로 할아버지가 자주 찾았던 우반동으로 이사와 정착하면서 ‘반계’라는 호를 사용했고, 그의 유명한 대저의 이름도 ‘반계수록’이라고 명명했다.

유형원(柳馨遠)은 본디 서울 태생이다. 1622년 1월21일 외가인 소정릉동, 지금의 정동(貞洞)에서 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시 정릉에 살던 여주 이씨 집안은 학문과 벼슬로 나라에서도 알아주며 떵떵거리던 집안이었고, 이지완의 아들이자 유형원의 외숙인 이원진(1594~1665)은 명문 출신으로 대단한 벼슬아치이자 큰 학자였다. 유성민의 사위인 김세렴은 호조판서를 지낸 고관으로 학문까지 높아 처조카인 유형원의 어린 시절에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 28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유형원이 태어난 다음 해에 이미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 유흠(1596~1623)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자결하는 불행을 맞았다. 반계는 두 살에 고아가 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래서 유형원은 외숙과 고부(姑夫)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에 학문을 익히고, 벼슬보다는 산야에 묻혀 지내는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 더구나 15세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겪으며 아버지도 없이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고초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국제질서의 변동 속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물러나 미래의 설계를 위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외숙 이원진과 고부 김세렴을 통해 기초학문을 닦은 유형원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돈독하게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염원을 잊지 못해 33세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응하지 않았다.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32세에서 5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실학의 비조’라는 호칭에 걸맞게 자기 이후의 모든 실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반계수록’을 완성해놓았다. 31세에 시작하여 49세까지 19년에 걸친 기나긴 천착 속에 불멸의 명저가 탄생했으니, 반계서당이야말로 ‘반계수록’의 보금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소란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산이 아름답고 강이 푸른 우반동. 거기에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기에,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반계의 묘비문이 새겨진 비석의 뒷면.
이 시 한 편을 읽어보면 그의 생각이 어디에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뜻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평야와 들이 있어 농사도 짓고 바닷고기도 낚아서 생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도 놀라 날아가지 않는 갈매기들과 무리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겠노라는, 자연과 전원을 그리워했던 생각이 여실하다.

# 삶의 족적

1673년 52세로 유형원이 세상을 떠났다. 죽은 지 100년 다 되는 1770년에야 ‘반계수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으나, 그 이외의 많은 저서들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근래에 이우성·임형택 두 교수의 노력으로 ‘반계잡고’와 ‘반계일고’가 수집되어 간행되면서 그의 시문(詩文)도 얼마 정도는 읽어볼 수 있고, 그의 연보까지 간행되어 삶의 전체를 대강은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상을 걱정하고 나라를 근심했던 유형원. 그는 산속의 서재에 묻혀 글만 읽고 책만 쓰던 서생의 학자는 아니었다. ‘실학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는 현실과 세상의 실상을 파악해야만 문제를 알아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형원은 글을 읽고 책을 쓰다가는 불현듯 일어나 조선 천지를 유람하는 여행길에 오르던 때가 많았다.

18세에 영의정 심수경의 증손녀와 결혼한 그는 22세에는 경기도 여주로 이사가 살다가 고부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나가자 그를 찾아가 함경도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역사의 옛터를 고루 살피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평안감사로 옮기자 그곳으로 찾아가 평안도 일대를 여행하며 고구려의 옛 도읍과 국토를 유람하기도 했다. 이 무렵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자 정세 파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집에 안주하지 못하고 줄곧 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다.

27세에는 처음으로 경상도 일대를 찾아나섰다. 29세에는 충청도 일대를 여행한다. 30세에는 처음으로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에 올라 세상을 굽어본다. 이 무렵은 아직 조부가 생존하던 때로 명령에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그해에 조부가 세상을 떠났고, 마음 편하게 저술 작업에 착수한다. 상(喪)중에 ‘수록’의 저술에 착수했고, 32세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글을 짓고 부안으로 낙향했다.

반계서당에서 글을 읽고 책을 쓰면서도 때때로 상경하여 세상을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33세에는 진사시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왔고, 34세에도 서울에 왔다. 35세에는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책을 저술했고, 36세에는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일대를 두루 여행하면서 각 곳의 풍토와 물산을 모두 살폈다. 37~38세 무렵에는 정동직(鄭東稷)·배상유(裵尙瑜) 등 친구들과 성리학에 대한 심도 깊은 학문토론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38세에 또 다시 호남지방 여행길에 올라 한 달이 넘는 긴 여행을 했다. 39세에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서울에 왔고, 40세에는 또 다시 영남지방 답사에 나섰다.

#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유형원은 애국자였다. 나라의 강산을 사랑했고, 조국을 사랑했다. 병자호란에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41세에는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보이고 있다.

45세에 다시 서울에 온다. 마침 스승이자 외숙인 태호 이원진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또 서로 만나기를 그렇게도 바라던 미수 허목 선생을 뵈려고 연천으로 찾아갔다. 그해가 1665년이니 44세의 장년인 학자 유형원과 71세의 원로 학자 허목의 해후가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허목의 가까운 제자들이 모두 유형원의 친구들이어서 이미 간접적인 교류야 많았지만 실제로는 처음의 만남이었다. 근기학파의 개산조인 미수와 실학의 비조인 반계의 만남은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수는 반계를 만나 며칠 동안 학문을 토론하면서 그의 깊이를 알아보고 ‘왕좌재(王佐才)’, 즉 임금을 도와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인재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고경(古經)으로 돌아가 현실을 개혁하자는 논리로 두 분의 의견이 모아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편지야 이전부터 주고 받았지만 그때부터 더 자주 편지가 오고갔으며 46세에 또 다시 반계는 미수를 찾아 경기도 연천을 방문한다. 며칠을 묵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구제할 토론을 거듭했다. 49세인 1670년에야 마침내 26권 13책의 ‘반계수록’이 완성되었고 그 대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못한 52세인 1673년 3월19일 꼭두새벽에 아까운 나이로 대학자는 눈을 감고 말았다.

‘반계수록’ 의 산실을 찾아서(下)
-토지공유·선거제 주창… 묘소는 천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의 전경. 실학의 대저 ‘반계수록’은 이곳에서 쓰여졌다. /사진작가 이현석

반계 유형원이 31세에 저술을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한 ‘반계수록’은 한국 학술사에서의 의미로 보아 정말로 획기적인 책이다. 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불철주야 저술 작업을 계속했던 전라도 부안군의 우반동 ‘반계서당’은 그 책의 산실이었기에 참으로 뜻이 깊은 역사의 땅이고 사상의 고향이다. 그렇건만 보존이나 관리 상태는 너무도 등한하고 초라했다. 우리가 반계의 흔적을 찾느라 살펴볼 때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당 건물의 관리도 부실하고, 그곳에 거주하며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었지만 그 보존 상태는 정말로 한심했다.

웬만한 유학자라면 ‘반계수록’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 저서가 조선후기 사회나 현재에 쉽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그 책의 산실이 그처럼 천대받는 모습은 참으로 처참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다.

# ‘반계수록’은?

반계수록
이제 정설로 자리 잡았듯이, 조선 실학의 1조(祖)는 반계 유형원이며 2조는 성호 이익이며 3조는 다산 정약용이다. 반계의 ‘반계수록’으로부터 조선의 실학사상은 본모습을 보였고, 그 이후의 실학자들은 대부분 반계의 경륜과 경세론(經世論) 및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경제사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계수록’의 서문을 짓고, ‘반계유선생전’이라는 전기를 지은 성호 이익이 가장 존숭하고 사숙했던 학자가 반계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지칠 줄 모르며 세상을 경륜하려던 뜻은 유독 반계옹에게서 볼 수 있네…”라는 시를 지어 반계의 학문을 찬양한 다산 정약용도 반계처럼 존숭한 선학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학파가 다르던 연암 박지원도 ‘허생전’에서 세상을 건질 대표적 인물로 반계를 거론했던 점으로 보면 그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반계와 동시대의 인물로 ‘반계수록’을 읽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학자로는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과 그의 뛰어난 제자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1665~1742)이었다. 재야 학자로서 학덕으로 추앙받아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분이 윤증이고, 학문적 역량으로 천거받아 은일 승지에까지 오른 분이 양득중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가 최초로 ‘반계수록’의 진가를 알아주어 끝내는 세상에 공간(公刊)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윤증은 반계보다 7세 연하로, 83세이던 1711년에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동받고 책의 발문을 썼으니 반계가 타계한 38년 뒤의 일이었다.

“‘수록’이라는 책은 고 처사(處士) 유형원군이 지은 책이다. 그 글을 읽어보면 그 규모의 큼과 재식(才識)의 높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이 있는 사람이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그대가 저술했던 공로는 그때에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불멸의 저서가 될 것을 이미 윤증은 예언하고 있었다. 활용할 임자만 만나면 그 책은 천하국가를 다스릴 훌륭한 저서라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윤증에게서 책을 빌려 읽어본 제자 양득중은 더 감탄한 나머지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양득중의 상소가 있기 4년 전에 약산 오광운(吳光運)은 반계수록의 서문을 지은 바 있고 그의 일대기인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1746년에는 홍계희(洪啓禧)가 반계선생전을 지어 그 공덕을 상세히 나열하기도 하였다. 오광운은 “우리나라 같은 조그마한 나라를 위해서 설계했지만 그 범위가 넓고 커서 실제로 천하 만세에 유용한 책이다”라고 찬양하였다. 홍계희는 경세학이야 말할 것 없지만 반계는 성리학에도 밝아 경세학에 근본이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반계학문의 충실한 후계자는 누가 뭐라 해도 성호 이익이다. 성호는 나라를 다스리면서 당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으로 역사 이래 두 사람을 꼽는다면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이라고 확언을 했다. 세상을 경륜할 능력의 소유자도 율곡과 반계를 꼽은 성호의 주장은 옳았다. 그래서 성호는 “조선을 세운 이래로 세상을 경륜할 인재로 말하면 모두가 반계를 첫머리로 꼽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조선 말기의 해사(海史) 홍한주(洪翰周)라는 선비는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조선 500년 동안 가치 높은 책으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허준의 ‘동의보감’, 반계의 ‘반계수록’ 및 이만운의 ‘문헌비고’ 등 네 종류를 지목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경륜할 책으로 그 역량과 경륜은 비록 천백년 뒤라도 종당에는 실행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현실적 타당성을 지녔고, 실제 일에서 반드시 실천할 논리를 지닌 경세서라고 평했다.

# 반계의 사상과 정책

근래에 발견된 반계의 논문으로 ‘정교(政敎)’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반계가 마셨던 샘물. 지금도 마르지 않고 물이 샘솟고 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치를 잘 해도 헛된 일이 되고 만다”라고 하여 통치원리로 토지의 공유와 인재발탁의 방법으로 공변된 천거제도 활용을 강조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토지 공개념과 선거제도를 통한 인재의 등용이니 얼마나 탁견의 예언인가. 대단한 발상이었다.

“토지 공개념이 제대로 실행되면 모든 제도가 바르게 된다. 빈부가 저절로 균등해지고 분배가 저절로 확정되고 호구도 저절로 밝혀지고 군대도 저절로 정돈되어지니 이렇게 한 뒤라야만 백성을 교화하는 정책이 정해질 수 있다”라고 하여 통치 원리가 어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추천제도가 없이 글짓기나 경전 암송하는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뽑는 일 때문에 중세의 긴 밤이 계속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수록’ 이외에도 반계는 한우충동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기총론’, ‘논학물리’, ‘동사강목조례’, ‘군현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다행히 근래에 여기저기서 새로운 저서들이 나타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특히 ‘병서’, ‘음양율려’, ‘성문(星文)’, ‘지리’ 등의 저서가 아직 전해지지 못함은 마음 아픈 일이다.

# 묘소를 찾아서

반계의 생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릉동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반계서당 아니고는 오직 그의 묘소가 유일한 유적지로 전한다. 1673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반계. 처음에는 반계서당 뒤편에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바로 그해에 아버지의 묘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당시로는 경기도 죽산현 죽산읍 북쪽 15리 지점인 용천리 정배산 기슭이었다.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인 듯 반계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묘소 아래에 묻혀있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의 산등성이에 편안히 누워계신다.

설날 며칠 전, 찬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처음으로 찾아간 역사의 유적지 반계 묘소는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어 산길을 헤매야했으니 힘이 들었다. 조그만 묘에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나, 오래된 빗돌에 문인석이 우람하게 지키고 있어 그래도 덜 서운했다. ‘유명조선국 진사증집의겸진선 반계유선생형원지묘(有名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라는 비의 전면 글씨에 그의 간단한 일대기를 적은 뒷면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홍계희 작품이었다. 묘를 쓴 100년 다 되는 1768년에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라는 분이 평소에 반계를 사모하던 터여서 부임하자마자 글을 지어 묘소에서 제를 올리고 여러 선비들의 도움을 받아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2년 뒤인 1770년에는 ‘수록’의 공간과 함께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높은 벼슬의 증직을 내렸으나 이미 세워놓은 비여서 예전의 벼슬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숙부인에 증직된 부인 풍산심씨와 합장으로 금년까지 324년 동안 반계는 묘안에서 눈을 감고 ‘반계수록’에 담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가 실현되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누워 계실 것이다.

반계 유형원, 그가 누구인가. 공리공론의 관념론에 사로잡혀 공언(空言)만 판치던 세상, 문약(文弱)하기 이를 데 없어 끝내 삼전도에서 인조대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던 치욕의 나라, 그런 나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고 변혁시키려던 꿈을 품었다.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 혼이 지금도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데, 그런 위대한 선구적 학자의 묘소가 그렇게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오호통재로다.

위대한 계승자 성호는 반계를 평했다. “반계선생은 호걸의 선비였다. 학문은 천인(天人)을 꿰뚫고 도(道)는 온 인류를 포용하고 있다.… 정치의 실무를 알게 해주는 요결(要訣)이며… 그 강령(綱領)의 웅장함과 절목(節目)의 치밀함은 읽는 이들이 절로 알리라”는 대찬을 바치고 있다.

그렇다. 우리도 그 웅대한 뜻을 따르자. 그래서 부국강병의 길을 열고 남과 북을 통일하고 동과 서도 합해지는 위대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하리라.
 
퇴계 이황-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上)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대하여 동양의 정통학문으로 발전된 유학, 이름하여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상과 학설이 첨가되며 발전도 했으나 때로는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 끝내는 성리학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에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업적이 더해지면서 조선왕조로 승계되었다.

퇴계 이황 당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의 산실이자 조선 성리학의 고향이다. 오른쪽 사진은 퇴계 선생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 성리학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정치와 학문의 기조로 여기면서 통치원리로 정착시켰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세워 공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유학을 강(講)하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세워 선비들을 양성해냈다. 그야말로 유교천국의 나라가 세워진 셈이다.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경상도 예안의 온계리에서 태어나고, 중종 31년인 1536년에 강원 강릉의 북평촌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양대 산맥을 줄기로 하여 참으로 혁혁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른바 영남학파는 퇴계를 존숭하는 학파로,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통을 이으면서 조선 성리학의 두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퇴계는 태어난 다음 해인 6월에 부친을 잃었으니 돌도 지나지 않아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부인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李●)공으로부터 글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는 모두 닦을 수 있었다. 12세에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면 10세 전후에 벌써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여 밥 먹고 잠자는 일까지 잊을 정도였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아도, 약관에 학문이 익었음을 알게 해준다.

28세에 진사가 되고 32세에야 어머니와 형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에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급제 직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37세에 끝내 어머니가 타계하고 말았다. 39세에는 옥당벼슬에 오르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받았다.

학자로서 벼슬살이도 살았던 퇴계는 자신이 해야 할 본령이 학문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여겼다는 뜻이다. 마음이 항상 학문연구와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선비로서 벼슬을 철저히 단념할 수가 없어 임금의 부름에 마지못해 응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퇴계는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에 오르는데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46세 때에 장인상을 당해 하향한 뒤 관직에서 해임되고는 고향에 은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6세 이후부터는 벼슬을 받아도 나가는 경우보다는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50세부터 오늘의 도산서원 터에 하나씩 집을 지으면서 은거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최초에 지은 집이 퇴계라는 개울의 서쪽에 있는 ‘한서암(寒棲菴)’이었다. 그 무렵 좌윤(左尹)벼슬에 있던 형인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유배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벼슬할 생각은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1558년 율곡과의 만남
나아가기를 그렇게 싫어했건만 조정에서 벼슬은 계속 내려졌다. 53세에는 대사성, 54세에는 형조참의, 56세에는 홍문관 부제학, 58세에는 공조참판, 66세에는 공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서 내리기도 하였다. 69세에도 의정부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사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대략의 벼슬살이 경력이다.

퇴계 연보를 보면, 50세의 2월에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은거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를 찾아가 시를 짓고 함께 즐기던 생활의 기록이 있고, 이 무렵에 지은 시 한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심경을 제대로 읊고 있다. 제목이 ‘퇴계(退溪)’라는 시다.

몸이 물러나오니 내 마음이야 편안하나
학문이 후퇴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시내 위에 처음으로 살 곳을 정하고보니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할 일이로세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50세의 노숙한 학자 퇴계의 심경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시냇가에 살 곳을 정해놓으니 몸이야 무척 편안하지만, 행여 학문연구에 등한할까 걱정이 많음을 토로하고 있다. 공자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저것들과 같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당한 그 순간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경계의 뜻이어서, 퇴계도 흐르는 물가에 이르고 보니 허송세월해서는 안된다는 반성의 마음이 앞선다는 생각을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51세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 생활하면서 그 무렵 학자들이 글을 물으려고 찾아오는 수효가 늘어나자 도산서당을 영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던 어느날 조선의 천재로 조야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 율곡 이이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의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다. ‘퇴계집’에는 기록이 없으나 ‘율곡집’에는 그들의 만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율곡의 연보 23세 조항에 나와 있다. ‘봄에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뵙다’라는 대목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해는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는 58세의 노숙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1558년의 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흠모하며 뵙고 싶던 퇴계,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뵙다’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벼슬에서 물러나 제제다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계상서당에 은거하던 퇴계. 근엄한 노학자를 뵙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율곡은 우선 시 한수를 올려 바친다.
시내는 공자 마을 시내에서 갈려나왔고
산봉우리는 주자 살던 무이산처럼 솟았네
생활하는 살림이야 경서가 천권인데
살림집이야 초옥 몇 칸이로다
품은 마음이야 구름 갠 달처럼 열렸고
점잖은 말씀과 웃음 미친 물결도 그치게 하네
어린 제자는 도를 묻고 구하려 함이지
반나절인들 허비하려고 찾아옴 아니올씨다
(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 活計經千卷 行藏屋數間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閒)

퇴계라는 시내는 그 근원이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흘러나왔고, 산은 주자학이 완성된 무이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면, 공자의 학문과 주자의 성리학이 모아진 곳이 바로 퇴계선생이 살고 있는 퇴계라는 시냇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의 그런 높고 큰 학문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왔지 그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퇴계의 높은 학덕과 율곡의 구도정신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학문이 깊고 시를 잘하던 퇴계가 그냥 시를 받고만 말 것인가. 퇴계도 즉각 율곡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몸져 누워있어 문을 닫고 봄도 못 봤더니
그대 오시니 가슴 열려 정신이 깨는구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 알겠으니
지난 세월에 몸 경건하게 하지 못함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잡초 잘 자람 허락하지 않으며
노니는 티끌은 잘 닦아진 거울 그냥 안두네
지나친 표현의 싯귀야 모름지기 깎아내고
노력하고 공부하며 절로 친하게 지내세

평생 공경스럽고 겸허하게 살았던 노학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다. 기묘명현이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외손자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던 율곡은 세상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하던 젊은이였기에 퇴계도 이미 그의 이름을 기억했나 보다. 그래서 율곡의 수작을 들어보고 올린 시를 읽어보자,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알겠네”라며 율곡의 재주를 칭찬해주고, 곧바로 23세의 젊은 천재에게 어른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학(正學)의 공부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문이 제대로 익으면, 마치 잘 자라는 곡식에서 피가 자라지 못하듯이 잡된 학문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하여 한때 불교공부에 몰두했던 율곡에게 넌지시 정학에 분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흘러다니는 티끌이 있다면 아무리 거울을 닦고 갈아도 맑게 남아있지 않는 것이니 잡된 생각을 버려야만 맑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와 주자에 비긴 과장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겸손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대단한 학자들의 대화였다.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下)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퇴계집’을 읽어보며, 그의 학문의 본산인 도산서원 일대를 둘러보고 그가 태어난 마을인 안동 온계리(溫溪里)의 퇴실과 수백 년 동안 누워계시는 묘소를 돌아보고 종손(宗孫)들이 터를 지키며 살아오는 퇴계종택을 둘러보면서, 위대한 학자의 흔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는 큰 교훈을 느끼게 했다. 태어난 지 500년이 넘은 학자! 유적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역사를 외면하고 선현들의 업적을 소홀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풍속에서, 그 정도로 퇴계유적지가 존재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보아져 고마운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퇴계의 이기철학(理氣哲學)

퇴계 학문이 꽃을 피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고택에 ‘도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누가 뭐라 해도 퇴계야말로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임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의 일급 제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퇴계의 이기철학에 문제를 제기하며 7년 동안이나 편지를 통해 학술논쟁을 벌인 찬란한 전통이 있고, 까마득한 후배 율곡 이이가 ‘이발(理發)’이라는 두 글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높은 학술논쟁을 벌였지만, 퇴계학단의 끈질긴 변론과 세력의 힘으로 퇴계학설의 비중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퇴계는 천리의 공심(天理之公)에서 나오는 도심(道心)과 인욕의 사심(人慾之私)에서 나오는 인심(人心)으로 구별하여, 사단(四端)은 도심이고 칠정(七情)은 인심으로 여겨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라주고(四端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七情氣發而理乘之)”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확정되기까지에는 고봉 기대승의 학설이 첨가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율곡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는 말이야 옳지만 ‘이발(理發)’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이런 논쟁이 학파의 분열만이 아니라, 당쟁으로 연계되어 그야말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 지 200년, 다산 정약용은 두 학파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훌륭한 답안이자, 자신의 철학으로 이기논쟁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이라는 짤막한 두 편의 논문은 ‘학자들이 이런 뜻을 살펴 깊이 실천하기’를 염원하면서 논쟁의 종결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퇴계가 말하는 이(理)와 기(氣)는 율곡이 말하는 이와 기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퇴계는 ‘전취(專就)’하여 ‘이기’를 사용했고 율곡은 ‘총집(總執)’하여 ‘이기’를 사용했으니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이 퇴계는 퇴계대로, 율곡은 율곡대로 ‘이기’를 사용하여 자기대로의 학설을 폈던 것이니, 여기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오랫동안 전개되던 두 학자의 시비에 대한 결론을 맺어, 퇴계도 옳고 율곡도 옳다는 윈윈의 멋진 이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퇴계는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공(功)에 일생동안의 힘을 기울였다(退溪一生用力於治心養性之功)”라고 하여 성리학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은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대체로 국조 이래 현실정치에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蓋國朝以來識務之最)’은 바로 율곡 이이였다는 평을 내렸다. 퇴계는 성리학자의 최고봉이고 율곡은 성리학과 함께 통치원리까지 가장 잘 알았던 학자라던 다산과 성호의 평을 오늘의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실익 없는 논쟁은 끝나리라 믿어진다.

# 주자학 전파의 최고 공로자

퇴계 선생의 묘비문.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지었다. / 사진작가 황헌만
퇴계는 충실한 주자학의 계승자였다. 선비라면 의당 학문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택민(澤民)의 공(功)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들의 권유에 의해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벼슬살이도 했던 퇴계, 그라고 택민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으리오마는 허약한 몸으로 언제나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충실한 주자의 제자가 되어 ‘치심양성(治心養性)’의 성리학 논리를 후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공(功)도 만만찮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런 논리의 개발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자였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산서원 일대를 산책해보면, 퇴계가 얼마나 심신수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건물 하나, 연못 하나, 자연 경관 하나하나를 설계하고 배치했는지를 알기에 어렵지 않다. 거기에서 퇴계의 이상(理想)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할 수도 있다. ‘수양에 의해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실천하는 인간상’이었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동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런 인간상의 실현을 위해 일생동안 가장 힘을 기울인 일이 다름 아닌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길이었다. 경에 살며 이치를 궁구함, 바로 그것에 퇴계는 생을 걸고, 도산서원 일대라는 아름답고 고적한 산천과 강산을 사랑하면서 70 평생의 세월을 보냈다. 도산서원 일대를 수도(修道)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 속에 모든 건물을 퇴계의 뜻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 생전의 강학(講學)하던 곳이요,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후학들이 맨 위에 상덕사(尙德祠)를 짓고 퇴계의 신주를 모시며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까지 합해진 전체의 이름이다.

도산서당의 명칭에서 퇴계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서당은 세 칸인데,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했다. 주자의 글에서 인용했다. ‘중용’이나 ‘대학’의 오묘한 뜻을 즐기며 완상하겠노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쪽의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인데, 이것도 주자의 ‘운곡(雲谷)’이라는 시에서 얻어온 글귀다. 산속에 깃들어 살면서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얻겠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덩실하게 서있는 건물의 이름도 모두 거경·궁리를 통한 수양의 길에 도움 되는 내용을 이름으로 삼았다.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가 그러하고, ‘관란헌(觀瀾軒)’이니 ‘농운정사(농雲精舍)’가 모두 그런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서당의 동쪽에는 연못을 만들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우물에 ‘몽천(蒙泉)’이라 이름하고, 몽천 위쪽의 산기슭에 매화·소나무·대나무·국화를 심어 놓고 ‘절우사(節友社)’라 했으며,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 동네 어귀는 ‘곡구암(谷口巖)’이라 했다. 또 여기저기에 대(臺)를 만들어 ‘천연대(天然臺)’,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 하고, 시내의 한 줄기는 ‘탁영담(濯纓潭)’이라, 그 가운데 있는 편편한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이라 이름 했으니, 모두가 수도·수양과 관계없는 것이 없고, 도학적 함의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 수양의 도장 도산서당

1561년은 퇴계가 회갑을 맞은 해다. 모든 세상의 욕심은 다 버리고 오로지 학문연구, 거경·궁리에 생애를 바치기로 마음먹고, 도산서당 일원을 수양의 도장으로 꾸미고 7언 절구 18수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짓고 겸하여 ‘도산기(陶山記)’라는 산문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넉넉하게 밝혔다. 품격 높은 시에 격조 높은 산문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옴소롬히 보여주고 있다. ‘반타석(盤陀石)’이라는 시는 정말로 좋다.

도도히 흐르는 탁류에 살짝 숨더니
물결 가라앉자 분명하게 형체 보이네
저처럼 치고받는 급물살 속에서도
천고의 편편한 바위는 구르지 않다니
참으로 사랑스럽네

(黃濁滔滔便隱形 安流帖帖始分明 可憐如許奔衝裏 千古盤陀不轉傾)

45세에 맞은 을사사화(乙巳士禍), 그런 어려운 난리 속에서도 학문을 향한 염원을 못 버리고 은거하면서 거경·궁리만 일삼았던 퇴계. 마치 개울 가운데의 편편한 바위가, 홍수가 질 때는 몸을 숨겼다가도 끝내 구르지 않다가 물이 가라앉아 개울에 평화가 오면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듯, 숨어살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읊은 시가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지금도 반타석은 개울 가운데에 의젓이 버티고 있으며, 500년 동안 퇴계학문이 버티고 숨 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기’도 세상이 알아주는 명문이다. 산림(山林)에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은자, 그러면서 그 즐거움은 도의를 즐기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즐거움이었으니 역시 성리학자다운 글이었다.

선조 3년, 퇴계 나이 70세인 1570년의 12월에 계상서당에서 고요히 퇴계는 눈을 감았다. 23세의 청년으로 58세의 노선생을 찾아뵈었던 율곡 이이, 퇴계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만사를 짓고 제문을 올려 바쳤다. 그는 퇴계를 이렇게 평했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퇴계유사’)라고 했다. 학자와 시인으로 유명하고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朴淳)은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인도해주어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가 우리 조선에서 찬란하게 다시 밝혀지게 했던 분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퇴계묘지명’)라는 평은 가장 고전적인 퇴계에 대한 찬양으로 정론(正論)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서(上)
-떡잎부터 유별났던 국난타개 영웅-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 창건된 서원으로 고종 시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1년 복원됐다. /사진작가 황헌만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여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것인가. 조선 중기 명종 11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63세로 서거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및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평가해준 후학이나 후배들이 있었기에 실행했던 일에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 후세에 길이 큰 이름을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이른바 조선 4대 문장가 중의 한 분인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대제학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분으로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 하늘이 백사공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을 내어서 책임을 맡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그의 위대함을 설명해주었다. 장유는 또 다른 글 ‘오성부원군이공행장(鰲城府院君李公行狀)’이라는 장문의 이항복 일대기에서 “공은 나라를 유지케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맑고 깨끗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높은 산악처럼 무거웠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이자 사류(士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라는 높은 찬사를 바쳤다.

4대 문장가의 또 다른 한 분으로 대제학에 영의정이라는 고관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1566~1628)은 이항복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인품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유보다는 훨씬 선배이면서 이항복에게는 10년 후배인 그는 ‘오성부원군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에서,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에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위대한 위인의 죽음에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그의 높은 인품을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백사 이항복의 일생

경주이씨로 참찬(參贊)이라는 고관에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전주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사는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20세 전후하여 5세 연하의 당대의 위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친교를 통해서 ‘오성과 한음’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같은 조정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승장구로 벼슬이 올랐지만, 두 사람의 넉넉한 아량과 국량 때문에 서로 간에 경쟁관계임을 잊고 세상을 뜨는 날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대제학에 이조판서와 영의정에 오르는 고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국가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동심협력하여 지혜를 짜내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폭정을 극복해내는 경륜을 발휘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역사에 전해주고 있다.

백사는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잃는 불행을 당한다. 갑자기 고아가 된 백사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큰 뜻을 이루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백사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적인 출생과는 달랐다고 한다. 태어나 며칠 동안을 젖도 빨지 않고 울지도 않았는데 점쟁이가 듣고는 반드시 정승이 될 사람이라고 미리 점을 쳤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인 권철(權轍)은 이항복의 이웃집 노인이었다. 앞으로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임을 알아차린 권정승은 아들 권율(權慄)에게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백사는 19세에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권율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룩한 충장공 권율 장군이 아닌가. 백사와 권장군이 살던 곳은 당시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의 필운대(弼雲臺) 아래에 있던 곳이다. 지금은 종로구 필운동 88번지로 배화여고의 교정으로 포함된 지역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
골목대장이던 백사는 도원수이자 문무에 능한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더욱 공부에 힘쓰고 노력하여 선조 13년인 1580년에 25세로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로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28세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고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

# 율곡의 뛰어난 안목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 잘남과 똑똑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발신(發身)할 길이 없다. 백사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율곡은 백사보다 20세 위의 대선배로 그때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다. 율곡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7인의 당대 인물들을 추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안게 하였으니 7인 모두가 뒷날 고관대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역할을 하는 위인들이 되었다. 뒷날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鄭昌衍), 이항복, 이덕형, 병조참판에 오른 이정립(李廷立), 참찬(參贊)에 이른 오억령(吳億齡)이 그들이다. 이항복·이덕형·이정립은 동방급제로 이른바 경진(庚辰)년의 동방이어서 ‘경진3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말로는 ‘삼총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율곡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백사나 한음은 발탁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며 경륜을 쌓던 백사는 35세인 선조 23년에 마침내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 37세인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승지로서 임금을 모시고 임진강을 무사히 건넌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 오르고 오성군의 군봉을 받았다. 바로 이어서 평양에 도착하자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봉을 쥐게 되었다. 40세에는 이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전란 동안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권(軍權)을 잡고 적군을 물리치는 최대의 지혜를 발휘하였고 다정한 친구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군대의 원병을 요구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병조판서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지원병이 들어오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망한 나라가 중흥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백사의 이런 경륜과 지혜에서 나왔다.

임진왜란 중에 이보다 더 어려운 난국은 중국의 정응태(丁應泰)라는 사람이 조선을 무고하여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여긴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조 31년 마침내 우의정이라는 정승에 오른 이항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필마단기로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 끝내 명과 조선이 틈을 메우고 친한 이웃이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오르고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래서 백사 이항복은 ‘오성대감’이라는 명칭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다

나라를 중흥시킨 뛰어난 호성공신은 세월이 변하자 역적을 추천했다는 누명을 쓰고 낯설고 물선 먼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파란만장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비하는 큰 난리를 일으킨다. 이에 격분한 노대신 이항복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 이항복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나오고, 끝내는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유배명령을 받고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63세의 노정승이던 백사, 북청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며 읊었던 시조는 지금의 우리 가슴도 슬프게 해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원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의롭고 바른 말 한다고 늙은 재상을 귀양보내던 그 악인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그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뛰어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답답한 심정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군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回望千峯鎖去程)’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유배지에 도착한 후 3개월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이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던 유명한 장군 정충신(鄭忠信)이 백사를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했다. 8월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때 이래 지금까지 포천에 고이 잠들고 계신다.
 
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서(下)
산과 들에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날, 우리는 백사선생의 14대 종손(宗孫)인 이상욱(李相旭)씨와 함께 경기도 포천의 백사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당시의 포천군은 백사의 선향(先鄕)이자 고향이다. 조부 때부터 은거했던 곳으로 조부모와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곳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아가던 곳이었고, 뒷날 세상을 뜨자 유언에 따라 자신도 부모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힌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고을의 선비들이 백사의 학덕(學德)을 잊지 못해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시고, 서원을 세워 학문과 덕행을 강(講)하던 화산서원(花山書院)이 자리한 곳이다.

백사 이항복의 신도비.
경기 포천시 가산면(加山面) 방축리 산16의 1에 우리가 도착한 때는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바로 그곳이 현재의 화산서원이 있는 곳이다. 애초 1631년에 서원을 세워 1635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숙종 1년인 1675년에야 나라로부터 ‘화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국가적 서원으로 유지되어왔으나,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다. 해방 후 유림들의 성의로 다시 세워 백사의 영정과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는 가장 정확한 유적지 구실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금남군 정충신장군도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백사 한 분의 위패만 모시고 있다고 한다.

# 묘소 곁의 신도비 보존 허술해

신실(神室)인 인덕전(仁德殿)과 서원인 화산서원에는 백사의 또 다른 호인 필운(弼雲)과 동강(東岡)을 따서 필운재와 동강재를 동서재(東西齋)로 건립하여 선비들의 강학장소가 되기에 넉넉했다. 비록 지금이야 글소리 멈춘 지 오래이고 쓸쓸하고 처량하게 인적이 끊인 장소이지만, 한창 유학이 성대하던 시절에는 그곳 일대의 사림들이 운집하여 백사의 경륜과 학덕을 강하던 명소였음이 분명하다. 서원 양쪽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뒤로하며 종손의 안내에 따라 서원에서 멀지 않은 금현리의 백사선생 묘소를 찾았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푯말은 초라하게 서있으나, 도에서 유지·보존하는 묘소라기에는 너무나 쓸쓸하다. 멀리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끝부분,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서남향의 방향으로 백사와 그의 부인 권씨의 묘소는 쌍분으로 고즈넉이 누워있다. 묘소에서 오른쪽으로 10여m에는 후부인인 오씨의 묘소가 따로 있다. 묘소 앞에서 머리 숙여 묵념을 올린 우리 일행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세상에서 전해지는 대로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명당인가를 둘러보았으나, 우리네의 안목으로 그걸 어떻게 알 길이 있겠는가.

그곳이 참으로 명당이 아니라면 경주이씨 백사공파의 후손들이 그렇게 훌륭함을 자랑할 수 있었으랴.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믿지 않더라도, 착함을 쌓은 집안에는 큰 여경(餘慶)이 있다는 고경(古經)의 말대로 백사의 높은 공덕 때문인지, 백사 이후의 경주이씨 문중은 조선 굴지의 명가(名家)였음은 세상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문중에서 제공한 ‘상신록(相臣錄)’에 의하면 백사 자신이 영의정에 대제학으로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고, 증손자인 세필(世弼)과 세귀(世龜)는 당대의 명인으로 좌찬성과 영의정에 각각 증직되었다. 세귀의 아들인 광좌(光佐)는 대제학과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고, 세필의 아들 태좌(台佐)는 좌의정에 올라 문정(文定)의 시호를 받았다.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역시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후손인 이경일(李敬一)도 좌의정에 이르러 효정(孝定)의 시호를 받았으며, 한말의 고종 때의 유원(裕元)은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로 또다시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이유원의 후손이 대한민국 초대 부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었으니 거명하지 못한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 조선시대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히는 가문이 되었다.

그러한 가문을 일으켰고, 임진왜란과 광해군 시절의 국가적 어려움에 한 치의 굴절 없이 정의롭고 정정당당한 처신으로 정치가의 하는 일이 무엇이고, 학자나 문장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백사의 묘소가 너무나 쓸쓸했다. 당대의 대제학에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선정(先正)인 학자로 칭송받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글씨를 쓰고, 우의정으로 병자호란의 강화도 함락에 순절한 천하의 충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 청음 김상헌의 형)의 전서(篆書)에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雲石 : 운남성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세워진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400년에 가까운 세월이지만 너무 좋은 돌의 질 때문인지 글자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 보물 중 보물이었다. 그런 국보급의 빗돌이 비각 하나 없이 풍우에 시달리면서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니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문화재 당국은 무엇을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묘소. 부인 권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묘소를 둘러보면서 희대의 큰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문인이던 위인의 묘소가 너무 허술하게 보존되는가 여겨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직공원 뒷길로 들어가 필운동의 배화여대를 찾았다. 암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있고, 후손으로 마지막 영의정이던 이유원(李裕元)이 선조의 옛집을 찾은 감회를 적은 시가 또 암벽에 새겨 있었다. 처가이던 권율장군의 집과 나란히 있었다는 전설만 전하고, 학교 부지로 편입된 필운대는 그저 무너질 듯한 암벽만 말없이 버티고 있을 뿐 옛일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탁월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외교관

광해군실록인 왕조실록 128권, 광해군 10년 5월13일자의 기사를 보자. “전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유배된 곳(함경도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文學)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임진왜란에 도승지로서 임금을 호종한 이유로 병조판서에 발탁되어 공로가 가장 컸었다. 평생 동안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은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하기가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라고 사가(史家)는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이항복은 학문이 높고 뛰어난 문장가였다. 문학을 통해 현달했다는, 이른바 ‘문장치신(文章致身)’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꼽히는 사람이 백사다. 완숙한 학문과 도학(道學)의 연마를 통해 높은 수준의 문장가에 이르고, 그런 문장을 바탕으로 나라에 충성심을 바쳐 높은 수준의 공업(功業)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인격을 높이 갖추어 위태로운 국가에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큰 공이 있던 인물이야말로 국가적 시대적 위인으로 추앙할 수 있다.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있고, 선배로는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등이 한 시대를 구제한 분들로 여기는 것이 역사적 평가다. 유성룡의 선배로는 사암 박순이 있고, 한음 이덕형 이후로는 정조 때의 번암 채제공 같은 영의정이 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고 도량과 역량이 뛰어나 정치가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인물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묘소 아래에 있는 백사의 영정사당.

# 당파를 초월한 애국자

백사는 당파를 벗어난 인물이다. 자신의 당이나 남의 당이 없다. 오직 그에게는 국가와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문장과 학문이 우월하여 대제학을 지내고 정치적 역량과 도량이 뛰어나 정치인으로 가장 높은 영의정에 올랐다. 백사는 다섯 살이나 어린 한음 이덕형과 나란히 벼슬길에 올랐으나 이덕형이 훨씬 먼저 대제학(31세)에 오르고 정승의 지위도(38세) 먼저 올랐다. 그렇지만 백사는 경쟁의 대상이나 라이벌로 여겨 시기하거나 모함을 했던 적이 없다. 그런 것은 훨훨 뛰어넘는 높은 수준에 이른 정치가였다. 정치를 하려면 그런 도량이 있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인 한음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기에 그런 훌륭한 우정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사는 자기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덕형의 부음을 듣고 찾아가 시신을 염해주었고,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평생의 삶을 정확하게 평가해주었다.

뛰어난 문장에 인물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안목이 있었기에, 율곡선생의 비문, 사암 박순의 행장, 이순신의 노량비문, 권율장군의 묘지명이 모두 백사의 손에서 나왔다. 도학자 회재 이언적의 문집발문과 묘지명도 그가 썼다. 나라를 건진 불후의 공업(功業)을 이룩한 정치가이면서 도학에 바탕을 둔 문장을 통해 일세의 위인들의 역사적 평가를 담당하는 지위에도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외교적 능력까지 발휘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받아 왜적을 물리쳤다. 의리의 부당함에는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죽을 각오로 광해군의 폐비를 반대하다 북청까지 귀양가서 충성을 바치다가 객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대제학으로 문권을 잡았으며, 영의정으로 나라 정치를 통섭했던 ‘통재(通才)’이던 백사. 그래서 임진왜란을 평정한 호성공신의 일등 중의 일등이었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충신이라해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백사의 애국심, 공평무사한 정치가로서의 깊고 넓은 도량,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친 충성심, 뛰어난 문장과 학문, 이런 높은 공업은 이 나라 민족사상의 바탕이자 영원한 사표다. 더구나 그의 대쪽 같은 선비 정신과 청렴한 공직생활은 민족혼의 큰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上)
-국난극복의 ‘臣’-
한음 이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름만 나오면 바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요, 문인이었다. 겸하여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난 친구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런 멋진 인간관계가 실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람들, 조금 학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서로를 시기하고 반목하거나, 어느 새 서로를 등지며 불화와 배신을 일삼으며 추악한 비방과 악담으로 조용할 날 없이 싸움질만 하는 사례를 볼 때, 오성과 한음의 멋진 우정의 유산은 정말로 값지고 본받아야 할 시대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성의 유적지를 찾은 다음 바로 한음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유적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광해군의 패악스러운 정치가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하던 한음 이덕형은 탈관삭직되어 사제(私第)가 있던 당시의 광주(廣州) 땅,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의 패정에 항의하다가 양주의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던 오성대감 이항복은 한음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사제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哭)하고 한음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아름다운 정을 잊지 않았으며, 무덤 속에 넣은 한음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백사는 한음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 한음의 가계

광주(廣州) 이씨인 한음의 가계는 대단한 명문이다. 고려말엽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했던 이집(李集)은 호가 둔촌(遁村:오늘의 둔촌동에서 살았다)이며 직신(直臣)으로 큰 명성을 얻었던 분이다. 그 아래로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는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이극균은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참살당한 어진 정승으로 세상에 유명했으니 그의 5대손이 바로 한음이다. 여러 곳의 원님을 지낸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琠)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당시의 서울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특한 두뇌를 타고난 한음은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 났고 그를 만나본 어느 누구도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세 때에 외숙인 영의정 유전의 집이 있는 포천의 외가에서 지낼 때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楊士彦)·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양사언의 시에 화답하여, “들은 넓어 저녁빛 엷게 깔리는데 / 물이 맑자 산그림자 가득해라 / 녹음 속에 하이얀 연기 이는데 / 아름다운 풀언덕에 두세채 집이로세(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綠陰白煙起 芳草兩三家)”라고 읊자, 봉래 양사언은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맞수가 아닐세”라고 말하며 뛰어난 한음의 글 솜씨에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면서, 한음의 시는 조선시대에 계속 교과서에 실려서 인구에 회자하는 시가 되었다.

# 31세에 대제학에 오르다

어린 시절부터 시 잘하고 글 잘 짓던 한음은 18세에 생원시에 수석하고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온 나라에 이름을 펄펄 날렸다. 17세에 뛰어난 예언가(豫言家)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의 눈에 들어 토정의 조카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산해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으로 한음의 장인이 되었다. 관상을 잘 보던 토정이 한음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하면서 사위로 삼으라고 권하여 조카인 이산해가 한음을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그대로 전해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마침내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에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했고, 한음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李廷立 : 뒤에 광림군(光林君)에 봉해지고 참판에 오름)도 급제하여, ‘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동방(同榜)으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함께 옥당인 홍문관에 들어가 승승장구로 벼슬길이 트이게 된다.

등급이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술과 문장의 주도권을 쥔 대제학이라는 벼슬은 조선 시절에는 선비들이 가장 선망하는 벼슬이었다. 판서급의 지위로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해서 만조백관의 추앙을 받아야만 그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대체로 노성(老成)한 벼슬아치들이 발탁되게 마련인데, 31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한음은 대제학의 지위에 올랐다. 나이도 젊고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듭 사양했지만, 예조참판에 겸직으로 임명되었으니 조선 500년 동안 31세의 대제학은 한음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그의 역량은 뛰어났고 학문과 문장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해주고 있다.

32세에는 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좌의정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고 도승지로 이항복이 일하고 있을 때여서 이들이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의주로 선조대왕의 파천을 감행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일을 그들이 수행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금과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했고,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그들과 담판하다가 혼자 남게 된 한음은 뒤에 혼자서 평양에 도착하자 숙소도 없어 백사의 숙소에 동숙하면서 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인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백사와 한음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우선 명나라에 원군을 간청하는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의견을 모아 함께 건의하자 명의 원군을 청하기로 정했고 그 대표자로 한음이 선정되어 명나라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한음이 명나라로 떠나던 광경은 정말로 비장했다. 한음을 보내려고 남문 밖으로 나온 백사에게, 한음은 말이 한필이어서 하루에 이틀의 거리를 달리 수 없음을 한탄하자 백사는 타고 있던 말을 풀어주면서 “원군을 청하여 함께 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쌓인 시체더미에서나 찾아야지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오”라고 간곡히 당부하자, “원병을 청해내지 못하면 나는 뼈를 반드시 중국의 노룡산 속에 묻고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오”라고 한음이 굳은 결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들 두 충신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의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한음의 신도비명을 이가원 교수가 한글로 번역한 비문을 새긴 기념비.

# 38세에 정승에 오르다

임진왜란의 참상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다. 사실상 나라는 망한 상태였고 인민의 고통과 시름은 형언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성이 탈환되고 끝내 한양이 수복되어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죽음의 도시인 서울은 사람이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덕망 높은 신하들인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이 힘을 합해주고 백사와 한음이 손을 맞잡고 중흥의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그나마도 나라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란 중에 여러 판서를 역임하던 한음은 38세의 4월에 왕족 아니고는 처음으로 가장 젊은 나이에 우의정에 오른다. 이 일도 역사에 드문 일이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는 동안 숱한 모함과 반목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는 오직 나라와 국민을 살려내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 바쳤다. 정유재란까지 겹쳐 7년의 긴긴 전쟁을 대신의 지위에서 겪은 한음은 갈고 닦은 학문과 인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국난 극복에 생애를 바쳤다.

광해군의 폭정을 만나 그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나라에서 탈관삭직이라는 고난에 처해야 했다.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마련한 운길산 수종사 아랫마을인 송촌리의 사제마을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놓고 아직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유유히 흐르는 용진강(북한강)을 바라보면서 53세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 우리가 찾은 송촌리의 사제마을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우에 시달려 부러지고 찢겨, 한 그루는 밑동만 겨우 살아있고, 한 그루는 그래도 노거수로 살아 황량한 마을에 한음이 살았던 집터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 (下)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춘천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양수리가 나오고 거기서 북쪽으로 나 있는 강이 북한강인데, 용진강(龍津江)이라고도 부른다. 한음 이덕형의 유적지는 그 용진나루를 양쪽으로 하여 두 군데에 널려 있다. 다산이 자신의 집안 정원으로 여기면서 자주 찾았던 운길산의 수종사에서 멀리 떨어진 용진나루 위의 마을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이고 옛날에는 사제(莎堤)라 부르던 마을이다. 다른 하나는 사제마을에서 볼 때 북한강 너머 양평군에 있는 한음의 묘소이다. 한음의 15대 종손인 이시우(李時佑)씨의 안내로 이시우씨의 집 뒷산에 고즈넉이 잠들어 계신 한음의 묘소를 찾았다. 6년 만 지나면 돌아가신 지 400년이 되도록 긴긴 세월 한음은 그의 부인 이씨와 합장으로 그곳에 누워 계신다.

애초에는 한음의 부인 이씨의 묘소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9월에 강원도 안협(安峽)에 피란 중이던 이씨는 왜적이 접근하자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절하는 비운을 당한다. 그런 전란 중에도 정신이 똑바르던 한음은 순절한 부인의 시신을 챙겨 바로 지금의 묘소인 경기도 양근군 중은동(中隱洞)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 중은사(中隱寺)라는 이름난 절이 있던 맞은편의 산이었다. 지금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라 부르는 마을이지만 중은사는 터만 남았고 중은사 절터에 있는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만 한음을 알고 있는 듯 녹음이 짙어 바람에 흐늘거리고 있었다.

뒷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한음은 부인의 묘소 위에 모시고, 자신이 죽으면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은 부부가 어버이 묘소 아래에 함께 계신다. 한음 집안 어른이던 영의정 이준경의 묘소도 근처에 있어 그 골짜기는 정승골로 불리던 곳인데, 정승이던 한음이 또 그곳에 묻혀 ‘정승골’의 이름은 더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의 공, 일제 때 보복당해

묘소의 유적지에는 당대의 대제학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지은 한음의 신도비가 비각 속에 수백 년을 버티며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한음의 반(反) 일본정신에 속상했던 일인들은 일제시대에 한음에게 보복하는 심정으로 신도비를 근처의 개울 속에 처넣었다. 왜경이 무서워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다가 해방된 뒤에야 후손들의 힘으로 다시 신도비를 꺼내다 세웠고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물속에서 닳았던 탓인지 세워진 빗돌이 낡고 닳아 글자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후손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음의 공훈에 보답하려 나라에서 내린 그 많던 사패지도 일제 때 강제로 대부분 강탈당하여 땅 한 평 없는 신세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종손의 말에 의하면 묘소를 관리할 힘도 없었는데 문중에서 노력하여 겨우 묘소 인근에 토지가 약간 마련되어 신도비각과 영정각이 세워져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모습의 한음 영정은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그린 화가 이신흠(李信欽 : 1570~1631)의 솜씨로 그려져 오랜 전란의 와중에도 종손들의 노력으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에는 모사본까지 많이 전해져 쉽게 접할 수 있다.

▲노계 박인로와 함께 노닐은 사제마을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을 세운 한음은 광해군 시절에도 임금의 총애는 식지 않았다. 그러나 소인배들의 무고와 질투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45세인 1605년 무렵에 복잡한 서울을 떠나 편히 쉴 별서(別墅·별장)로 마련한 곳이 한강을 기준으로 부모님 묘소와 반대편 10여리 거리인 용진강 위의 사제마을이었다. 노후의 휴양지로, 아버지를 편히 모실 장소로, 아내의 묘소를 찾기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곳은 한강을 끼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다. 백사 이외에도 당대의 귀인과 명인들이 경치도 즐기고 한음과의 대화를 위해 찾아오던 곳이다.

백사 이항복 다음으로 친했던 사람은 승장(僧將)으로 유명한 송운대사(松雲大師)였다. 그들의 주고받은 편지나 송운이 세상을 뜨자 한음이 바친 제문을 보면 그들이 함께 왜적 퇴치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말년을 함께 지낸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한음과 동갑내기로 무관인 만호(萬戶)라는 하급관료였으나 생각과 사상이 같았기에 그들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가사(歌辭)에 뛰어난 박인로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유명한 ‘사제곡(莎堤曲)’은 한음이 사제마을에 거주할 때 찾아와 즐기면서 지은 곡이라니 대단한 우정으로 여겨진다. 어떤 경우(한음문집의 기록)에는 한음이 지어서 박인로에게 주었다고도 하는데 박인로 문집에는 노계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사제곡의 내용은 충성심 높은 한음이 중상모략으로 탈관삭직되어 병든 몸으로 산골에 머물면서 자신보다는 나라와 임금을 염려하는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제마을에 거처하던 한음의 집은 ‘대아당(大雅堂)’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서실은 ‘애일(愛日)’, 마루는 ‘진일(眞佚)’이라 이름 짓고 따로 ‘이로정(怡老亭)’과 ‘읍수정(●秀亭)’의 정자를 지어 시를 짓고 편히 쉬면서 손님을 맞을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말을 탈 때 오르던 돌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풍우와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였으니 명인의 흔적이 너무나 초라했다.
▲혁혁한 한음의 공, 역사는 증명한다
한음의 묘소에서 가까운 중은사 옛날의 절터에는 한음의 역사가 있다. 그의 후배로 큰 학자이자 벼슬아치이던 용주 조경이 한음의 일대기인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이가원 박사의 번역으로 전문이 중은사 절터에 커다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최근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니 400년을 이어오는 후손들의 위선심이 정말로 따뜻하다. 용주 조경은 그 글에서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세 정승이 임진왜란을 당해 망해가는 나라를 서로 힘을 합쳐 중흥시켰다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한음이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음은 알지 못했다(知有國而不知有身)”라며 한음의 애국충정을 찬양하였다. 쌓은 학문과 축적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와 백성을 건지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는 평가였다.

일생의 지기 백사 이항복은 한음의 묘비문에서 한음의 지식과 인품, 사람됨과 높은 인격을 찬양하면서 그에 대한 바른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남겼다. “근세에 율곡이 돌아가시자 성균관의 학도들이나 말단 군졸들까지 모여들어 슬프게 울었고, 서애 유성룡의 죽음에도 저자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울었으며, 지금 한음공의 이름이 탄핵에 걸려 처벌하자고 빗발치는 상소가 올려지는데 한음이 죽자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은혜를 베풀었기에 위아래 사람 모두가 그렇게 울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이 말했듯이 산 사람에게서는 뜻을 뺏을 수 없듯이 죽은 사람에게서는 명성을 빼앗을 수 없어서 그렇다”라고 설명하면서 한음의 훌륭한 명성도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남녀노소가 죽음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한음과 친했던 친구이며 영남의 대유(大儒)이던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한음의 행장을 짓고 문집에 발문을 지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찬양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또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일생을 정리하였으니, 이만하면 한음은 뒤에 죽은 사람들에 의하여 영원히 죽지 않을 업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찬양문
한음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 뒤에 태어난 한음의 7대 후손에 실학자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이 있다. 바로 그와 막역하게 지냈던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한음의 화상(畵像)에 바치는 찬양의 글을 지었다. 아마 자신이 살던 곳과 가까운 수종사 아래서 살았던 한음이어서 더 가까운 마음으로 찬양사를 바쳤는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높은 정승 지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노성한 선비로 우러렀네
임금의 은총 가슴을 맡길 듯이 친숙했으나
벗들이야 포의한사처럼 가까이 여겼네
유언비어가 몸을 죽일 듯했어도
임금의 마음의 본심을 꿰뚫어 알아주었네
뼈를 깎는 무서운 상소를 올려도
어리석은 임금 광해도 내쫓지 못했네
높은 충성심과 큰 절개가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하늘과 귀신이 돌보고 보살폈어도
누가 그에게 그런 큰 복을 내렸으랴
아름답다 풍성한 광대뼈에 윤기나는 보조개
큰 체구에 근엄함까지 갖추었으니
뒷세상의 사람들
그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을 건가

(故領議政漢陰李公畵像贊)
이만하면 한음 평생의 업적은 제대로 기록되었다. 다만 아무도 그런 글을 읽지도 않고 그런 글이 있는 줄도 모른다. 위인들의 업적이 이렇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아야 되겠는가. 백사의 ‘묘지명’, 창석의 ‘행장’, 용주의 ‘신도비명’에 다산의 ‘화상찬’이면 넉넉한 평자들을 만나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유적지를 살펴본 느낌은 너무나 허전하고 서운하다. 용진나루 위에, 운길산 산자락에 흔적이 겨우 남은 사제의 ‘대아당’이 복원되어 그가 평생의 지기 백사나 노계와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경륜할 계책을 세우던 우국충정의 본뜻을 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음의 5대조 이극균으로부터, 15대 종손 이시우씨 그리고 그 분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22대의 종통(宗統)이 적장손(嫡長孫)으로 이어져 왔다. 이토록 혈통이 이어지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그런 순수한 혈맥이 힘을 발휘하여 한음의 혼이 국태민안의 큰 역할을 해줄 것만 빌고 바란다.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上)
-지금은 분단의 아픔 흐느끼는가-
율곡의 고향인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전경.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자운산자락에는 율곡 선생의 혼이 서려있다. 조선왕조 선조 17년이던 1584년 음력 정월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3월 어느 날 자운산 기슭에 장사지낸 지 어언 423년, 이 긴긴 세월동안 학자이자 경세가이며 우국충정의 애국자이던 그의 혼백은 아직도 산자락을 휘돌며 살아계신 것만 같았다.

하지의 더위가 한창이던 주말, 우리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분인 율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자운서원(紫雲書院) 일대를 돌아보면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면서 역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49세라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한 학자의 양심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이라는 천연의 경계로 남북이 갈라진 이 조국, 그 강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는 율곡의 선향이자 영원한 고향이었다. 도도히 물이 흐르는 강변에는 오래된 수목들이 연륜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우뚝 서서 남북의 통일만 기원하는 듯,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숲속에 우람하게 떠있다. 율곡의 5대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이라는 분이 세워 병란 때에 소실되고 말았지만 후손들의 따뜻한 정은 다시 세우고 또 세웠다. 율곡이 어린 시절 이래 생을 마칠 때까지 틈만 나면 찾아가 시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회포를 풀었던 바로 그 정자가 ‘화석정’이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었으니
시인묵객의 회포 무궁하구려
길게 뻗은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받아 붉구나
산등성이에는 외로운 달이 떠오르고
강 위에는 만리의 바람이 흘러가네
변두리에서 나는 기러기 어디메로 가는고
울음소리 저문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화석정’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이 시는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시로, 바로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쏘이려고 정자에 올라 무심코 읊은 시다. 어린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나이에 그런 시를 읊겠는가. 가을에 지은 율곡의 시와는 다르게 한창 녹음이 짙은 여름의 경치는, 물도 푸르지 않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의 울음도 들리지 않으며, 남북의 분단을 서러워하는 강물만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화석정에서 보이는 임진강. 현판에는 율곡의 화석정시가 걸려있다.

# 율곡이 태어난 강릉의 몽룡실

율곡의 고향은 임진강변의 율곡리다.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찾아간 그날도, 주변의 모든 산에는 밤꽃으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우거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짙은 밤꽃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밤골’이라는 율곡의 이름이 거기서 나왔고 고향마을의 이름을 따라 ‘율곡’이라는 호가 나왔다고 한다. 율곡리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벼슬은 감찰)의 고향이다. 율곡의 아버지는 강릉의 경포대 곁의 천하절경에 살던 사임당 신씨에게 장가들었다. 사임당 신씨의 친정어머니 이씨(李氏)가 기묘사화때의 의리를 지켰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부인으로 거처하던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신씨네 별서였다. 율곡은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이 ‘몽룡실’이고 아이 때의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외할머니 이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낸 율곡은 그래서 태생지는 바로 강릉이었다. 강릉이라는 도시는 바닷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경포대 근처의 오죽헌 일대는 세상에 없는 경치 좋은 곳이다. 그런 산과 강의 기운을 타고 난 율곡, 그가 애초에 천재였음은 모든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더구나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 신씨의 교육을 받고 자란 때문에, 8세 때의 시에서 보는 바처럼 그의 글 솜씨는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기에 넉넉하였다.

13세 이후로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기까지, 그는 아홉번의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벼슬길에 오른 이후로는 참으로 온 정성을 다 해 임금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일생이었다.

# 퇴계를 선학으로 모신 율곡

율곡의 영정.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학자로서야 퇴계와 율곡을 거명하는 일은 참으로 지당하다. 조선은 정치이념을 유교로 정하고 주자학의 다른 이름인 성리학을 학문의 가장 높은 위치에 놓았던 나라였다. 그렇다면 이런 학문의 대표자는 당연히 퇴계와 율곡이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던 퇴계와 율곡은 참으로 미묘한 견해의 차이로 퇴계는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율곡은 기호학파의 종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두 학자의 인간적 신뢰나 상호간의 존경심은 요즘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분명히 달랐다.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원수가 되고 당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은, 그들 두 분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요즘의 정파싸움이나 학자들 간의 싸움과는 본질을 달리했던 것이 그분들의 훌륭한 인간관계였다.

율곡은 23세 때에, 58세의 노학자 퇴계선생을 도산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이틀 동안을 묵으면서 희대의 두 학자는 가슴을 열고 학문과 철학을 논하고 시를 짓고 마음을 합하면서 인생을 토론하였다. 율곡은 먼저 퇴계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퇴계의 학문연원이 바로 공자와 주자에서 흘러왔다는 높은 찬사의 시를 올려 바치자, 퇴계가 답한 시를 보면 얼마나 돈독한 관계가 이룩되었나를 방증해주고 있다. 더구나 율곡은 19세의 1년 동안을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지내다 다시 환속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병이 들어 문을 닫아 봄이 옴을 몰랐는데
그대 오니 마음이 상쾌하게 열렸네
이름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 알았으니
공경스럽게 몸가지지 못함이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피자람 용납지 않고
잘 닦은 거울에는 티끌쯤이야 묻지 못하네
분수에 넘는 칭찬이야 시에서 자르고
공부에 노력하여 친하게 지내보세

8세에 화석정시를 지어 온 세상에 알려진 율곡, 10세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어 문명을 날렸고,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수준 높은 철학논문을 지어 합격했던 율곡의 명성은 퇴계도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틀 동안 함께 자고 묵으면서 긴긴 토론을 계속해보고 사람됨을 제대로 알아본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배가 없음을 알았노라”라는 찬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래로 율곡은 퇴계를 자주 뵙지는 못했으나 일이 있을 때마다 편지로 퇴계의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퇴계는 친절한 답변을 해주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와 유교로 되돌아 온 용기를 높이 평가해주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한때 율곡이 불교와 관계했음을 뒷날의 당쟁파들은 트집잡아 온갖 비방을 했지만 퇴계 같은 대학자는 애초에 율곡의 반성을 그냥 수용하고 전혀 문제 삼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남을 해치고 헐뜯기 좋아하던 당파 사람들은 그 점을 율곡의 약점으로 여겨 시비를 끊지 않고 있었다.

# 우계 성혼과의 돈독한 우정

역사의 땅 파주에는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파평은 지금으로는 파주시의 파평면이다. 그러나 파주의 옛 이름이 파평이다. 파평윤씨의 시조 윤관 장군은 파주가 낳은 고려 때의 최고 인물이다. 율곡은 물론 율곡과 버금가는 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또 파주 출신이다.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 황희정승이 노닐었던 반구정(伴鷗亭)도 파주에 있다. 율곡과 우계는 우계가 한살 위이지만 이들은 10대 때 사귀어 평생을 사귄 친구이자 도반(道伴)으로 영원한 학문토론의 훌륭한 상대자였다.

우계와 율곡은 동서분당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비이성적인 알력이 계속되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약간의 학문적 견해의 차이가 있어 수없이 많은 편지로 오랜 논쟁을 계속했지만 우정에는 한치의 차이 없이 돈독한 애정을 유지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룩했다. 둘이 함께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으며, 세상이 시끄러운 세태에 분개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것인가도 깊숙하게 토론하였다.

# 율곡의 일생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의 생활 근거지는 고향인 파주의 율곡리였다. 22세에 곡산 노씨와 결혼한 율곡은 처가인 황해도 해주도 출입하는데 해주의 석담(石潭)에는 구곡(九曲)의 아름다운 경치의 명승지가 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율곡이라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그곳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칠 서재이자 만년에는 은퇴할 장소로 여겼다. 외조모가 계시던 강릉의 오죽헌, 화석정이 있던 고향 율곡리, 서재가 있던 해주의 석담구곡을 기회 있을 때마다 찾으며 살았던 것이 율곡의 일생이었다.

29세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이조, 호조, 병조판서에 대제학을 역임하고 정승 다음의 우찬성에 올랐으나 반대파들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청주목사와 황해감사의 지방관도 지냈으나 경세의 경륜을 펼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이전투구의 정치판보다는 고요한 ‘은병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낼 욕심은 많았다. 그렇지만 49세라는 너무나 짧은 생애 때문에 그렇게도 경장(更張)하고 싶던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타계하여 자운산자락에 혼백이 남아 맴돌고 있으리니, 천재의 짧은 삶을 무덤 앞에서 애통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下)
-학문과 정치 모두 밝았던 ‘大賢’-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자락에 있는 율곡 이이의 묘소. 부인 노씨와 합장되어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 조선의 대표적 학자와 정치가

조선 500년을 회고해보면 학자도 많고 정치가도 많았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수준 높은 정치가의 반열에 오른 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딱 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바로 율곡 이이였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두려움 없이 군주에게 올바른 정책을 건의하여 국태민안의 세상을 만들기에 온 정력을 바쳤고, 전야(田野)에 물러나서는 학자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조선 성리학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했던 최고 수준의 학자 지위에 올랐다.

학문과 정치를 함께 했던 율곡, 그의 학문적 저술은 한편으로는 학술논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의 방책을 열거한 정책대안서였다. 그가 20세에 금강산에서 돌아와 다시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문제를 타개하겠다던 튼실한 각오를 설파한 글이 다름 아닌 그의 ‘자경문’(自警文)이다. 11조항으로 된 그 글의 첫째 조항은 “먼저 뜻을 크게 세워 성인(聖人)의 행실을 본받기로 한다. 털끝 하나인들 미치지 못하면 내가 하려던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하겠다”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 뒤 벼슬하면서는 본격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바탕에 깔고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올린다. 34세의 9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임금께 올리는데 그 무렵에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급선무의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렸다. 39세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린다. 국가적 근심거리가 7종류에 이른다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사항을 열거하였다.

# 조선 학술사에 빛나는 ‘성학집요’

40세의 9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평생의 대작인 저서를 임금께 바친다. 바로 이 책이야말로 율곡이 학자이자 정치가를 겸한 ‘대현’(大賢)임을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저서다. 이 책은 율곡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서 학문과 정사(政事)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말들을 골라 뽑아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저작한 책이다. ‘학문과 정사’, 학자이면서도 정치가임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5편으로 구성된 그 책을 받아본 선조대왕은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만 보아도 그 책이 지닌 내용과 가치가 어떤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의 홍한주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3대저서로 ‘성학집요’ ‘동의보감’ ‘반계수록’을 열거한 바 있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교과서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의 전경(위). 아래는 자운서원 묘정비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율곡의 저서에 ‘격몽요결’이 있다. 42세 때에 해주의 석담에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지은 책이다. 필자가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배웠던 책의 하나다. ‘격몽요결’은 바로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배웠던 교과서의 대표적인 책이었다. 사서오경을 배우기 전의 초학입문서로서 그만한 영향을 미친 책도 많지 않았다. 율곡의 저서로 빼놓을 수 없는 책의 하나는 46세에 완성한 ‘경연일기’(經筵日記)다. 벼슬하던 시절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이나 임금과의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인들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서 지은 일종의 역사서였다. 이 책도 학문과 정치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대제학의 지위에 있으면서 마친 저술이다.

# 나라를 잊지 못하던 애국자

49세의 1월에 세상을 떠나는 율곡, 바로 앞의 해인 48세의 한 해는 참으로 바쁘고 분주한 해였다. 병조판서의 임무로 시작된 그해 2월에는 ‘시무6조’(時務六條)의 상소를 올려 시급히 해결할 문제를 진언했다.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시오였다. 4월에는 또 ‘봉사’(封事)를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弊政)개혁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공안(貢案)의 개혁을 주장하고 군적(軍籍)을 고치며 군현을 합병하여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제대로 지방을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더 절실한 주장에는 서얼제도를 폐지하고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발탁해서 나라 일을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에는 또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서적 편찬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는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해서 국가경제의 전담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이런 주장의 설명에는 ‘필무실학’(必務實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궁행심득’(躬行心得)해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실학에 힘써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실천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 무렵의 10만 양병설의 주장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율곡의 높은 정치적 경륜은 후세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산림에 숨어서 벼슬을 싫어했던 학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고, 아무런 능력 없이 과거에 급제하여 녹이나 받아먹는 벼슬아치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학자가 율곡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성현을 배워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업을 성취할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충분하게 설파하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조선의 대표적 학자가 바로 율곡이었다. 그래서 먼 뒷날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논문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근세의 이율곡 같은 분은 경장(更張:국가개혁)을 자주 말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옳게 여기지를 않았다. 지금 고찰해보니 명쾌하고 절실한 주장이어서 열에 8~9는 모두 실행이 가능한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식무(識務:현실정치에서 가장 시급한 일)를 가장 잘 이해한 분은 율곡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학문만 연구하던 서생이 아니라 높은 학식으로 세상을 경륜할 가장 큰 역량을 지닌 분이 율곡이었다는 것이다.

# 율곡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조선 500년에 학파의 크기로야 70세로 세상을 마친 퇴계학파를 능가할 학파는 없다. 퇴계학파 다음으로 율곡학파도 대단했다. 제자들의 면면에서 그냥 학파의 성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 대단한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다. 특히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가장 큰 제자로 율곡의 일대기인 ‘행장’을 저작하여 평생의 학문과 정사를 유감없이 서술하였다. 사계는 율곡행장에서 결론으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고 끝을 맺었다.

후배이던 당대의 문장가 월사 이정귀는 율곡의 시장(諡狀)을 지어 반백의 나이도 못된 49세에 세상을 떠나 당시에 본인의 뜻을 다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설교입언(設敎立言)한 내용은 후학들을 계몽해주기에 충분했고 유풍여운은 쇠잔해지는 풍속을 용동시키기에 넉넉했으니 당시에 율곡의 도(道)가 제대로 행해지지는 못했으나 율곡의 은택은 무궁토록 후세에 미치리라고 글을 맺었다.

한음 이덕형의 비문에서 백사 이항복은 율곡,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이 세상을 떴을 때 가장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노라고 했는데, 학문과 정치에 모두 밝았던 이항복은 율곡의 신도비를 지었다. 자운산 일대를 둘러보면 율곡의 묘소와 자운서원 입구에 신도비가 비각 속에 늠름하게 서 있다. 풍우에 마모되어 글자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지만 학문과 정치에 두루 밝았던 율곡의 일생을 넉넉하게 기술했음이 분명하다.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으나 6·25에 소실되고 1970년에 다시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우람하게 서 있다. 율곡-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옴소롬이 새겨져 있다.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율곡의 위대함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이다.

당파싸움 때문에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율곡은 뒤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평생토록 사모하던 정몽주·조광조·이황 등의 혼백과 함께 조선팔도의 모든 고을의 향교인 공자 사당에 배향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역사지리 천년 길 튼 ‘현학’-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있는 한백겸의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광해군 7년은 1615년으로, 그해 가을 7월에 호조참의를 역임하여 통정대부의 위계에 있던 일세의 학자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건만, 벼슬도 버리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샛강과 한강이 합해지던 서울의 서교(西郊)인 수색 근처의 물이촌(勿移村) 사제(私第)에서 뜻을 못 이루고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될 수가 없었다. 몸져 누워있던 병중에도 그는 끝내 세상에 영원히 전해질 책 한 권을 완성했으니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책이 뒷날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그 유명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라는 책이었다.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에서 간행했던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관과 독창적인 견해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개인의 힘으로 정리한 저서는 바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최초였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역사지리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실학의 비조로 ‘반계수록’의 저자이자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의 저자인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바가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라고 말하면서 한백겸의 삼한설(三韓說)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반계가 인정한 학자라면 그분의 학문적 깊이를 알 만하지 않은가. 뒷세상의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백겸의 신도비. 풍수설에 의해 거북이의 머리가 틀어져 있다.
역사지리학의 초창기 연구과정이어서 불충분한 자료 때문에, 한백겸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지적되고 있지만, 특히 그가 확정한 한강이남의 삼한설(三韓說:마한·진한·변한이 한강 이남에 있었다는 학설)은 모든 실학자들이 대체로 긍정했던 부분이었다. 고조선이 만주나 중국 일대에까지 미쳤다는 학설도 한백겸의 주장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그대로 인정한 학설이어서 한백겸의 독창적인 견해가 훌륭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 기전유제설의 학문적 업적

‘동국지리지’는 겨우 60장에 이르는 조그마한 책자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그만한 영향을 미친 저술이 되었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 ‘동국지리지’에 못지않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라는 짤막한 논문과 도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기전도’는 기자(箕子)의 정전(井田)제도가 평양에 유적으로 남아있음을 증명한 그림으로 ‘기전도설발’(유근)과 ‘기전도설후어’(허성)라는 짧은 해설이 붙은 그림이다. 유제설과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연구결과에서 증명되고 있다. ‘반계수록’이나 ‘경세유표’ 등의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균등화로 분배의 공정을 기하자는 것인데, 주자(朱子)가 부인하여 일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實在)가 밝혀져 공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에게 학설의 증빙자료로서의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백겸은 큰 아들로 두 아우가 있었다. 한중겸(韓重謙)과 한준겸(韓浚謙)인데, 중겸은 젊어서 죽고 준겸은 뒤에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인조반정 이후에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대의 고관대작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분이었다. 아우 한준겸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임지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들은 한백겸이 어머니 문병 차 평양을 찾아간다. 그러던 시절에 말로만 전하던 기자의 정전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한백겸은 평양일대를 답사하여 정전제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고 ‘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써서 공전제도를 주장하는 근거를 삼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뒤에 다산 정약용의 비판을 받지만 정(井)자의 모양이 아니고 전(田)자의 모형이었다고 한백겸은 그림으로 그렸다. 다산은 ‘발기자정전도(跋箕子井田圖)’라는 글에서 기자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고 정전제가 전(田)자의 모양일 이유도 없음을 들어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백겸의 비판정신과 실증주의적인 학문태도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구암유고·동국지리지 서문)라고 평하여 한백겸의 이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말해주었다.

# 학자는 저서로 역사를 빛낸다

구암이 세상을 뜨자 위대한 학자의 죽음에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영의정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대제학을 지냈고 뒤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백사 이항복이 최초에 통곡한 사람이다. 백사는 구암보다 4년 뒤에 태어나 3년을 더 살다간 친구인데 구암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우선 구암이 당대의 주역연구의 큰 학자라고 칭송했다.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큰 학자로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그도 뒤에 구암의 묘갈명(신도비명)을 지어 구암이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뛰어난 주역연구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정경세의 묘갈명은 이제는 신도비명으로 바뀌어 한백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섬(釜島:佳麻島) 마을의 입구에 신도비로 우람하게 서있다. 신도비를 안고 산등성이로 오르면 우선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낸 한백겸의 조부 한여필(韓汝弼) 부부의 묘소가 나온다. 바로 그분이 강원도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한백겸의 고향이 되었고 유명한 기호지방의 남인 대가인 한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인데 여주 땅에 한여필의 묘소가 있게 되면서, 한백겸의 아버지인 판관(判官) 한효윤(韓孝胤) 부부의 묘소도 있고, 그 맨 위에 도장(到葬)으로 한백겸 부부의 묘소가 있는 한씨들의 선산이 되었다. 정경세의 비문은 한백겸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을 넉넉하게 기술하여 그의 삶과 인품을 충분히 파악하게 해준다.

# 구암의 이력과 생애

청주 한씨는 대단한 명문이다. 조선초기에 고관대작이 연이어 배출되어 나라 안에서 큰 명성이 있던 성씨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 유명한 선조다. 한상경의 손자 한계희(韓繼禧)는 좌찬성의 고관에 올랐고 그 뒤로도 계속 벼슬하는 후손들이 이어졌다. 그 뒤 한동안 큰 벼슬이 없었는데 마침내 한백겸 형제가 나오면서 다시 크게 번창한다. 한백겸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던 습정(習靜) 민순(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학문연마에 젊음을 바친다. 아버지야 판관벼슬에 일찍 세상을 떴으나 계부인 한효순은 고관대작으로 정승의 지위에 올라 많은 시비가 있던 분이다. 아우 한준겸은 문장에 뛰어난 고관으로 일세에 성망이 높던 분이었으나 한백겸은 과거시험에는 응하지 않고도 학문으로 천거 받아 호조좌랑·형조좌랑을 거쳐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2년여의 목민관 생활을 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51세에는 청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 당상관에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의 당상관직을 수행하고 호조참의라는 벼슬에 이른다. 60세에는 파주목사로 제수 받으나 사직하고 마지막 생애를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64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 한백겸 고향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기에 자신이 아버지 시중을 들면서 목민술을 익혔고, 또 자신이 곡산도호부사라는 목민관을 지낸 경험이 있었기에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한백겸도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낸 덕분으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58세에 ‘공물변통소(貢物變通疏)’라는 상소를 올려 이른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패악스러운 제도 때문에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열거하였다. 바로 이러한 공물변통의 주장은 당시의 대관이던 이원익이 받아들여 강력히 주장하자 공물제도를 개선한 대동법으로 바꾸고 뒷날 김육의 정책으로 반영되어 대동법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백겸의 계부가 정승이었고, 아들 한흥일도 정승이며, 아우 한준겸도 임금의 장인이자 대문장가로 큰 이름을 날렸으나, 역사는 그들 모두를 역력히 기억해주지 않는다. 오직 높은 학자적 태도로 훌륭한 저술인 ‘동국지리지’와 ‘기전도’·‘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남긴 한백겸만을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주고 있다. 학자와 학문, 그것만이 고관대작의 지위도 능가할 수 있고, 이름도 영원하게 역사에 남길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下)
-비판·개혁적 학문 정신… 실학을 열다-
한백겸의 묘소에서 보이는 섬강. 섬강 뒷산 너머가 한백겸의 고향마을이다. <사진작가 황헌만>

구암 한백겸은 색론에 관여하여 당파싸움에 뛰어든 적은 없었다. 다만 아우 한준겸은 고관대작이면서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남인계로 활동했기에 구암도 남인계로 분류되고 또 그 후손들은 대부분 남인으로 활동했다. 기호지방은 세력판도로 볼 때 대체로 서인계열에서 노론이나 소론으로 갈려 노론이나 소론으로 행세하는 집안은 많았으나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지역에서 남인이 크게 번성한 집안은 많지 않았다. 유독 구암과 유천(柳川) 한준겸의 후손들이 남인으로는 명망을 유지하면서 가문을 크게 현양시킨 집안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칭하기를 원주의 노림리(魯林里·노숲) 한씨를 기호의 남인 명가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구암의 후손에는 정승과 판서가 즐비하게 배출돼 고관대작의 가문이 되었고 구암의 높은 학자적 명성으로 학문을 잇는 후손들도 많았다.

# 한백겸 후손들의 번창

구암의 후손 중에는 명가의 호칭을 들을 수 있는 높은 벼슬의 관리, 학자들도 많았다. 구암의 7대손 한치응(韓致應)은 다산 정약용의 막역한 친구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와 한성판윤에 이르렀고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떴다. 신유옥사로 다산의 동료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귀양살이를 했고, 아니면 참형을 당했지만, 한치응만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벼슬이 승승장구 올라 고관대작에 이르렀다. 그의 양자 진정(鎭庭)이 또 병조판서에 오르고, 그의 아들 돈원(敦源)이 병조판서에 올라 3대 병조판서의 전통을 세우기도 했다. 돈원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이름은 크게 얻었던 분들이다.

# 한백겸의 유적지

한치응의 7대 종손인 한민구 교수와 그의 종제인 한홍구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찾은 원주와 여주의 한백겸 유적지는 역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백겸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나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어디쯤의 물이촌(오늘의 수색이나 상암동 어디쯤)에서 운명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은거하며 살았던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찾은 노림리는 어마어마했다던 한백겸 종가의 옛자취를 잃고, 옛터에 반한옥 반양옥의 종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을이 오래됨을 증명하듯 몇 그루의 당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나는 한백겸을 아노라고 뽐냈지만 말을 못하니 무엇을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한치응은 둘째 아들이어서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부론면 흥호리(興湖里) 월봉(月峯)마을에 자신의 종가가 있었다. 종가라야 터만 남았고, 양옥 한 채가 종가 터와 주변의 산소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사는 집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3대 병조판서가 살았던 집이건만 집의 빈터에는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월봉 한기악(韓基岳)의 기념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바로 집 앞에는 한치응의 손자로 병조판서이던 한돈원의 묘소가 있었다. 한돈원은 한기악의 증조부가 되고 한민구·한홍구 교수는 바로 한기악의 손자들이다.

강원 원주와 경기도 여주를 경계해주는 섬강은 참으로 아름답다. 섬강 주변에 몇 집안의 남인 고가들이 있다. 흥호리에서 멀지 않는 우담(愚潭)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방계 선조인 우담 정시한(丁時翰)의 고향이다. 숙종 때 재야의 대학자 정시한은 다산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담의 현손(玄孫)이 바로 홍문제학에 형조판서를 지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다. 번암 채제공의 친구로 다산의 집안과는 가까운 일가이자 다산의 선학으로 정조의 치세에 큰 역할을 했던 학자 관인이었다. 바로 흥호리와 우담 마을이 남인의 명성을 높이 올린 마을이었다. 섬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령(地靈)으로 인물을 배출한 곳이었으리라.

한백겸이 살았던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이고, 섬강에 가마솥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섬강이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섬과 같이 보여 부도(釜島)라 칭하거나 우리말인 가마섬(佳麻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람한 신도비를 둘러본다. 풍수설에 의하여 거북의 머리를 틀어올렸고, 그 거북이 위에 거대한 비석이 바로 구암의 신도비다. 당대의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글에, 명필가이자 판서를 지낸 죽남(竹南)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고, 충신이자 전서(篆書)의 대가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당질인 참찬(參贊) 김광욱(金光煜)의 전서로 새긴 비였다. 빗돌도 질이 좋아 400년의 세월에도 글씨를 대부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국보급의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손들과 함께 돌아보는 한씨들의 선산, 한백겸의 묘소도 초라하지 않았다. 거대한 문인석에 선비의 묘소로는 부족함이 없게 잘 관리됐다.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이 우의정이었고, 아우 한준겸이 인조대왕의 국구였기에 그곳 일대는 대부분 한씨 소유의 사패지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토지제도의 변천으로 얼마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광활한 산야가 대부분 한씨들의 종중 소유라니 역시 대단했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도 변했다. 당시만 해도 노림리나 흥호리에서 가마섬 마을을 찾으려면 섬강의 나루를 건너면 됐다. 지금은 나루터나 나룻배는 없어졌어도 샛길까지 아무리 좁은 길도 모두 포장되어 차로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의 이기가 아니던가.

# 칠봉서원의 옛터는 흔적도 없었다

한백겸의 종가. 옛 종가의 주춧돌 위에 양옥이 세워졌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자 한백겸은 뒷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자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세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배향된다. 운곡 원천석은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살면서 조선 초기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절의를 끝까지 지킨 지조 높은 선비였다. 태종이 3번이나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원주에 세운 서원이 바로 칠봉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립에는 한백겸의 공이 컸다. 뒷세상의 후학들이 구암의 학덕과 서원 세운 공을 기리려고 그 서원에 배향했으나 대원군 시절에 훼철된 이후 지금은 종적도 없어져 후손들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 실학의 선구자

유적지를 돌아본 뒤 우리 일행은 구암의 학술사적 업적을 정리해야 했다. 구암은 ‘구암유고(久菴遺稿)’와 ‘동국지리지’라는 저서를 남겼다. 문집의 서문과 발문에 기록된 대로 병란을 거치며 대부분의 유고가 분실되고 없어져 겨우 남은 것을 수습하여 간행한 책이어서 분량도 적고 내용도 많지 않다.

문집과 지리서를 읽고 검토한 학자들의 평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구암을 실학자로 명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학문 내용은 분명히 실학사상의 발단을 마련한 점은 충분하다. 기자정전제에 대한 그림과 유제설을 통해 토지개혁사상의 기틀은 열었으나, 자신이 토지개혁사상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지리서를 통해 역사지리학의 단서를 열었고, 국가 경영에 국토와 나라의 강토, 국경과 지역의 경계 및 관방 시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밝혔지만 역사지리서로의 흠결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역사지리서를 소재로 해서 반계나 성호, 다산의 역사지리학이 본궤도에 오르도록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전도에 비판을 가한 다산의 뜻으로도 구암을 실학자로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구암은 당시의 학문 경향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자의 성리학이나 정전제의 논쟁에 비판을 가하면서 실증적 방법을 통한 새로운 학문 경향을 모색했으니 대단한 창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암이 세속의 학자들 태도에 문제를 삼고 비판의식과 개혁적인 학문 경향을 나타낸 점은 구암 사후 학자들이 올바르게 평가해 준 기록이 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면서 대제학에 판서를 지낸 택당 이식(李植)은 구암의 후배였다. 그가 ‘구암유고’의 서문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다만 상수(象數)의 변화나 제도의 마땅함 여부에는 연구가 매우 깊어 옛 사람들의 학설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정자나 주자를 믿는 전통적 제자들과는 서로간에 동이(同異)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여 정자나 주자의 학설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뛰어난 재주와 가정의 온축된 학문과 예절에 능숙한 학자여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택당 이식이 참으로 올바르게 구암의 학문을 인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더욱 구암의 학문과 사상은 위대하다. 소론의 박세당, 남인의 윤휴 등이 뒷날 주자학의 문제점에 비판을 가하고, 먼 훗날 남인의 다산 정약용이 사서오경의 성리학적 해석에 문제점을 지적하여 새로운 경학체계를 세웠으니 구암의 학문태도와 비판정신은 조선 후기 학술사에서 역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옳다. 그래서 반계나 성호의 학문 경향에도 자극을 주었던 구암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적 지위에 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