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뜻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醉月
2010. 8. 30. 08:46
죽림칠현(竹林七賢)_혜강
온통 세상이 경제의 불황을 우려하고, 젊은이의 일자리를 염려하지만 해결책도 없이 걱정만하는 그런 소리들은 이젠 지겨워 점점 화가 날 지경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때 그 누가 미신을 찾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할 것이며, 거리의 노숙자를 의지와 노력이 없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며, 술로써 세상을 사는 사람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릴 것이며, 아예 세상을 등져버린 사람을 소극적이라고 비방할 것인가?
세계금융대란의 직격탄을 맞거나 사회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의 현재 상황만을 보고서 자기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실수를 우려한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의미있고 재미있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서 그동안 그들이 겪었을 시간과 고통들을 생각해본다면 누가 감히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심하게 말하면 목숨을 부지한다는 자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실망하여 의지를 잃는 것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포기야말로 끝장이다! 다시 일어서자! 빛이 보인다면 썩은 털끝이라도 잡고서 일어서자!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죽림칠현을 소개할까 한다.
위진(魏晉)의 어지러운 시기에, 백성을 위해 사회를 안정시킬 수도 없고, 나라를 위해 정치에 대한 조언을 하기에는 목숨이 위태로워, 사회의 지식인으로써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차라리 세상을 피해 죽림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며 예법에 구속받지 않으며 노닐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약한 사람인가? 비급한 사람인가? 정말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소극적이기만 한 사람인가?
죽림칠현은 삼국시대 曹(조)씨의 魏(위)나라와 司馬(사마)씨의 晉나라가 교체하는 시기에, 세상을 피해 죽림을 찾아다니며, 술마시고 청담하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읊던 무리였는데, 지금엔 고상한 선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세상의 禮法(예법)을 무시한 방종한 행동을 보이고,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술을 마시는 등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七賢’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은 그속에 우리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죽림칠현보다 조금 앞선 漢나라 말 헌제(獻帝. 연호가 建安(196∼219)임) 때 魏의 曹씨가 천하를 농단하였다. 이때 문학사상 조씨 삼부자(조조&8231조비&8231조식)와 더불어 ‘建安七子(건안칠자)’가 있었는데, 이들의 풍격은 ‘건안풍골(建安風骨)’로써, 곧 비방하고 강개하고 애절한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 죽림칠현을 중심으로 한 正始學風(정시학풍: 정시는 魏 廢帝 曹芳의 연호(240∼248)임)은 이와는 달리 노장학을 제창하고, 윤리도덕의 속박을 벗어나고, 산수자연을 닮으려는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지나치게 술에 빠져 살고, 부모의 상을 당해서도 술과 고기를 먹고, 술에 취해 자신의 방에 나체로 누워있는 등 과연 엽기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을 하였다.
건안시기와는 불과 약 20∼30여년의 차이에 불과한데, 왜 이 시기에 와서, 건안시기와는 전혀 다른 풍기가 생겼는가? 사회의 어지러움과 玄學(현학)사상의 흥성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사회적 사상적 배경은 건안시기에도 있었으리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림칠현의 특성인 지나친 음주와 방종한 행위는 왜 생겼으며, 왜 이들에게 ‘七賢’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까? 필자는 그 중심에 &23879康(혜강)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림칠현이 모여 노닌 죽림은 혜강이 은거하던 河內(하내) 山陽縣(산양현)(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일대, 즉 수무현 雲台山(운태산) 百家巖(백가암))인데, 이는 아마 혜강의 명성을 듣고 나머지 여섯 사람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죽림칠현 중 혜강만이 결국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그의 일생이 바로 ‘죽림칠현’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혜강(223년∼262년)은 자가 叔夜(숙야), &35673郡(초군) &37517縣(질현)(지금의 안휘성 宿縣(숙현)임)사람으로, 노장의 玄學(현학), 음악, 시문, 그림과 글씨 등에 조예가 있었고,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났다.
혜강은 ‘칠현’으로 불릴만한 충분한 인품을 지녔던 것 같다. 즉 그는 曹林(조림)의 딸(조조의 증손녀이며, 長樂亭公主임)을 처로 삼았기에, 曹魏(조위)정권의 사위로서 일찌기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냈다. 그렇기에 사마씨 정권의 부름에 끝까지 응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절개를 지녔다.
또한 <世說新語(세설신어)&8231容止(용지)>와 <文選(문선)&8231五君&21647(오군영)>을 참고로 하면, 그는 키가 7척6촌(약181.74미터∼191.1미터)으로, 용모와 풍채가 빼어나고,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또한 그가 사마소에게 무고하게 죄를 얻었을 때, 태학생 3천명이 그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혜강의 이력을 통해 어지러운 사회에서 ‘죽림칠현’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조위(曹魏)정권이 부하였던 대장군 사마씨에게로 넘어가던 상황을 보자. 239년 조비의 아들 曹叡(魏 明帝)가 죽자 겨우 8살의 曹芳(魏 廢帝)이 계승하고, 司馬懿(사마의)와 曹爽(조상)이 보좌하였다. 그런데 249년 춘절이 지난 뒤 얼마되지 않아, 조방이 高平陵으로 부친 曹叡를 성묘하러 갔을 때, 사마의가 ‘高平陵事變’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정권을 이은 장자 司馬師(사마사)가 254년 조방을 폐위시키고 14살의 曹&39654를 군주로 내세웠다. 사마사의 뒤를 이어 255년 동생 司馬昭(사마소)가 대장군을 계승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7년만에 曹&39654를 폐위시키고, 다시 마지막 황제인 曹奐(조환: 260년∼265년)을 내세웠고, 결국 사마소의 아들 司馬炎(사마염)이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晉이라고 하였다.
죽림칠현은 바로 이러한 조위정권과 사마씨의 정권쟁탈 싸움의 와중에 있었다. 그런데 정권이 사마씨에게로 넘어간 뒤, 통치권자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명망있는 인물을 찾게 되는데, 우선 눈에 띠는 인물이 혜강과 완적 등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혜강은 조위정권의 사위였기에 사마씨 정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사마씨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마침내 사마씨의 심복 鍾會(종회)와의 악연으로 인해 결국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혜강도 사마씨 정권 하에서는 자신이 요주의 인물임을 일찍이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처를 하내 산양현으로 옮겨서, 자연을 벗삼아 거문고를 연주하며, 현실정치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오직 淸淡을 논하며 생활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鍾會가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당시 종회는 조정의 司隸校尉를 맡고 있었는데, 종회가 <四本論>을 편찬하여 혜강에게 한번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혜강을 방문하였다.
혜강은 마침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쇠를 단련하였는데, 向秀는 풀무질로 돕고 혜강은 쇠꼬챙이를 두드리며 쉬지를 않는데, 마치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가 떠날 때까지 말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종회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혜강이 “무엇을 듣고 와서, 무엇을 보고 가십니까?(何所聞而來, 何所見而去?)”라고 하니, 종회가 “들은 대로 듣고 와서 본대로 보고 갑니다.(聞所聞而來, 見所見而去.)”라고 말했다.(<世說新語&8231簡傲> 혹은 <晉書&8231&23879康傳> 참조)
종회의 방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정말로 <四本論>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인지, 아니면 이것을 핑계로 혜강을 살피러 온 것인지 모른다. 당시 종회의 관직으로 볼 때 아마도 필자의 생각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 사건은 둘 간의 관계가 서로 조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혜강의 성격은 ‘너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여, 직언을 함부로 내뱉어 예기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는(剛腸疾惡, 輕肆直言, 遇事便成)’ 일면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마소 정권에 나가 이부상서가 된 山濤(산도)가 散騎常侍로 승진하면서 자신이 있던 자리의 후임에 혜강을 추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山濤에게 보낸 <與山巨源絶交書>라는 편지다. 이 편지에서 자신이 관직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곱 가지와 官界에 들어갈 수 없는 두 가지를 들어,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질책하였다.
그런데 산도가 혜강의 처지와 추구하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사마씨 정권 하의 자리를 추천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 산도가 그동안 죽림에서의 생활을 통해 혜강의 인품과 능력을 존경하여 그를 추천했을 것이다.
그러나 山濤가 그를 추천한 때가 대략 261년이고, 혜강이 죽은 해가 262년임을 감안하면, 그는 사마소가 혜강을 더 이상 배려하지 않을 조짐과 계획을 미리 간파하여, 최대한 그를 보호하려고 그 자리를 추천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혜강의 입장에서 보면, 山濤가 아예 사마소의 심복이 되어버렸다고 오해했을 수가 있다. 그래서 친구에 대한 서운한 감정에 절교를 선언하면서 사마소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버린 것이다. 이점은 바로 자신의 안위에 심각한 위험을 무릅쓴 것인데, 사마소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자신과 선을 긋고 등을 돌린 선언서와 같다고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얼마 뒤 친구인 呂安(여안)&8231呂巽(여손) 형제간의 불화로 인해, 강직한 혜강은 참지 못하고 또 한통의 절교서를 쓰게 된다. 사건은 여안의 배다른 형 여손이 술에 취해 여안의 처를 겁탈한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사마소의 相國&25534(상국연)인 여손은 오히려 늙은 모친을 학대했다는 죄명으로 고소했다. 이에 격분한 혜강은 여손에게 사람을 무고하게 모함하면서 엉큼한 마음을 감추고 있고, 자신은 여안에게만 참으로 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며, 여손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여안이 죄를 얻어 변경으로 귀향하는 판결을 받았다. 여안이 억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혜강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중원의 모습을 돌아보면 분한 마음이 구름처럼 솟아나고(顧影中原&8231憤氣雲踊)’, ‘펼치기도 어렵고 없애버리기도 어렵지만 천하를 다 쓸어버리고 싶네(披難掃難, 平滌九區)’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는 곧 ‘사마씨 정권을 숙청해버리고 싶다’고 인식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종회는 이 두 가지 사건을 가지고 사마소에게 참언하여 여안과 혜강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결국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것으로,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러한 위험한 정치상황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255년 사마소가 정권을 잡고 두루 名士를 등용할 때, 완적은 어쩔 수 없이 사마소에게 나아가 화를 피했지만, 혜강은 죽림을 떠나 河東(하동) 등으로 몸을 숨기고 은사들을 찾아다니며, 양생법을 연구하였다. 258년에 은사 孫登(손등)을 만나 여러 차례 가르침을 물었지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혜강이 떠날 때 권고하여 “당신은 재능이 있으나 멀리보는 식견이 부족하니, 지금 세상에 처하여 화를 면하기 어렵다. 이후에는 반드시 근신하여 처신하고, 의론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죽기 전 불과 4년 전의 충고지만 역시 사람의 성품은 쉽게 고치기가 어려운 듯 모양이다.
그가 죄를 얻었을 때, 3000명의 태학생이 그의 사면을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죽음을 받아들여, 거문고를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廣陵散(광릉산)>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마치고 나서, “일찌기 袁孝尼(원효니)가 나에게 이 곡을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지 않더니, 결국 <廣陵散>이 오늘에야 끊어지고 마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혜강이 죽었을 때, “세상의 선비가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혜강은 ‘죽림칠현’ 중 술과 그렇게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죽림칠현을 ‘칠현’으로 불리도록 인품과 성격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혜강은 일찍이 조위의 인척관계로 인해 사마씨 정권의 화를 부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움직이는 자는 허물이 많고, 조용히 있는 자는 근심이 적다”는 처세의 방법을 실행하여, “산속의 은자를 그리워하고, 물가에서 낚시대 잡기를 즐겼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의 고상한 인품과 명성으로 인해 6명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고, 결국 그는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죽음이 그를 더욱 ‘칠현’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의 모든 행실이 유가가 말하는 어진 사람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찍이 阮籍이 모친 상을 당했을 때, 조문하러 가는 사람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가서 완적의 마음을 위로하고 흡족하게 만든 사실은 유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신조차도 그를 존경하여, 그의 작품들을 교정하고 서발문을 지었을 정도였기에, 필자도 죽림칠현을 언급하면서 그를 맨 처음 거론하는 이유다. 나아가 누가 감히 그를 어리석다고, 적극적으로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자.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혜강이 견지해온 철학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가 죽기 전 19세 아들 &23879紹(혜소)에게 남긴 <家誡(가계)>를 통하여, 혜강이 전하는 처세의 방법 몇 가지를 마음속에 새기기 바란다.
사람이 포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人无志,非人也)
무릇 일을 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데, 옳지 않으면 안된다.(凡行事先自審其可,不差於宜.)
일찍 죽는 것은 몸을 놀리는 것에서 생겨나고, 운명을 이루는 것은 추구하는 것을 잘 얻는 것이다.(壽夭之&26469,生於用身;性命之遂,得於善求.)
대저 말이라는 것은 군자가 지니는 총명함이다. 기지가 움직이면 만물이 응하는데, 시비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夫言語,君子之機,機動物應,則是非之形著矣. 故不可不&24910.)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할 때는, 자신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권하는 것처럼 하라.(&24375勸人酒. 不&39154自已,若人來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때 그 누가 미신을 찾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할 것이며, 거리의 노숙자를 의지와 노력이 없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며, 술로써 세상을 사는 사람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릴 것이며, 아예 세상을 등져버린 사람을 소극적이라고 비방할 것인가?
세계금융대란의 직격탄을 맞거나 사회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의 현재 상황만을 보고서 자기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실수를 우려한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의미있고 재미있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서 그동안 그들이 겪었을 시간과 고통들을 생각해본다면 누가 감히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심하게 말하면 목숨을 부지한다는 자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실망하여 의지를 잃는 것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포기야말로 끝장이다! 다시 일어서자! 빛이 보인다면 썩은 털끝이라도 잡고서 일어서자!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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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림칠현을 소개할까 한다.
위진(魏晉)의 어지러운 시기에, 백성을 위해 사회를 안정시킬 수도 없고, 나라를 위해 정치에 대한 조언을 하기에는 목숨이 위태로워, 사회의 지식인으로써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차라리 세상을 피해 죽림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며 예법에 구속받지 않으며 노닐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약한 사람인가? 비급한 사람인가? 정말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소극적이기만 한 사람인가?
죽림칠현은 삼국시대 曹(조)씨의 魏(위)나라와 司馬(사마)씨의 晉나라가 교체하는 시기에, 세상을 피해 죽림을 찾아다니며, 술마시고 청담하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읊던 무리였는데, 지금엔 고상한 선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세상의 禮法(예법)을 무시한 방종한 행동을 보이고,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술을 마시는 등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七賢’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은 그속에 우리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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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죽림칠현을 중심으로 한 正始學風(정시학풍: 정시는 魏 廢帝 曹芳의 연호(240∼248)임)은 이와는 달리 노장학을 제창하고, 윤리도덕의 속박을 벗어나고, 산수자연을 닮으려는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지나치게 술에 빠져 살고, 부모의 상을 당해서도 술과 고기를 먹고, 술에 취해 자신의 방에 나체로 누워있는 등 과연 엽기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을 하였다.
건안시기와는 불과 약 20∼30여년의 차이에 불과한데, 왜 이 시기에 와서, 건안시기와는 전혀 다른 풍기가 생겼는가? 사회의 어지러움과 玄學(현학)사상의 흥성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사회적 사상적 배경은 건안시기에도 있었으리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림칠현의 특성인 지나친 음주와 방종한 행위는 왜 생겼으며, 왜 이들에게 ‘七賢’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까? 필자는 그 중심에 &23879康(혜강)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림칠현이 모여 노닌 죽림은 혜강이 은거하던 河內(하내) 山陽縣(산양현)(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일대, 즉 수무현 雲台山(운태산) 百家巖(백가암))인데, 이는 아마 혜강의 명성을 듣고 나머지 여섯 사람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죽림칠현 중 혜강만이 결국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그의 일생이 바로 ‘죽림칠현’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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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은 ‘칠현’으로 불릴만한 충분한 인품을 지녔던 것 같다. 즉 그는 曹林(조림)의 딸(조조의 증손녀이며, 長樂亭公主임)을 처로 삼았기에, 曹魏(조위)정권의 사위로서 일찌기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냈다. 그렇기에 사마씨 정권의 부름에 끝까지 응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절개를 지녔다.
또한 <世說新語(세설신어)&8231容止(용지)>와 <文選(문선)&8231五君&21647(오군영)>을 참고로 하면, 그는 키가 7척6촌(약181.74미터∼191.1미터)으로, 용모와 풍채가 빼어나고,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또한 그가 사마소에게 무고하게 죄를 얻었을 때, 태학생 3천명이 그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혜강의 이력을 통해 어지러운 사회에서 ‘죽림칠현’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조위(曹魏)정권이 부하였던 대장군 사마씨에게로 넘어가던 상황을 보자. 239년 조비의 아들 曹叡(魏 明帝)가 죽자 겨우 8살의 曹芳(魏 廢帝)이 계승하고, 司馬懿(사마의)와 曹爽(조상)이 보좌하였다. 그런데 249년 춘절이 지난 뒤 얼마되지 않아, 조방이 高平陵으로 부친 曹叡를 성묘하러 갔을 때, 사마의가 ‘高平陵事變’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정권을 이은 장자 司馬師(사마사)가 254년 조방을 폐위시키고 14살의 曹&39654를 군주로 내세웠다. 사마사의 뒤를 이어 255년 동생 司馬昭(사마소)가 대장군을 계승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7년만에 曹&39654를 폐위시키고, 다시 마지막 황제인 曹奐(조환: 260년∼265년)을 내세웠고, 결국 사마소의 아들 司馬炎(사마염)이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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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은 바로 이러한 조위정권과 사마씨의 정권쟁탈 싸움의 와중에 있었다. 그런데 정권이 사마씨에게로 넘어간 뒤, 통치권자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명망있는 인물을 찾게 되는데, 우선 눈에 띠는 인물이 혜강과 완적 등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혜강은 조위정권의 사위였기에 사마씨 정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사마씨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마침내 사마씨의 심복 鍾會(종회)와의 악연으로 인해 결국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혜강도 사마씨 정권 하에서는 자신이 요주의 인물임을 일찍이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처를 하내 산양현으로 옮겨서, 자연을 벗삼아 거문고를 연주하며, 현실정치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오직 淸淡을 논하며 생활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鍾會가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당시 종회는 조정의 司隸校尉를 맡고 있었는데, 종회가 <四本論>을 편찬하여 혜강에게 한번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혜강을 방문하였다.
혜강은 마침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쇠를 단련하였는데, 向秀는 풀무질로 돕고 혜강은 쇠꼬챙이를 두드리며 쉬지를 않는데, 마치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가 떠날 때까지 말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종회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혜강이 “무엇을 듣고 와서, 무엇을 보고 가십니까?(何所聞而來, 何所見而去?)”라고 하니, 종회가 “들은 대로 듣고 와서 본대로 보고 갑니다.(聞所聞而來, 見所見而去.)”라고 말했다.(<世說新語&8231簡傲> 혹은 <晉書&8231&23879康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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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혜강의 성격은 ‘너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여, 직언을 함부로 내뱉어 예기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는(剛腸疾惡, 輕肆直言, 遇事便成)’ 일면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마소 정권에 나가 이부상서가 된 山濤(산도)가 散騎常侍로 승진하면서 자신이 있던 자리의 후임에 혜강을 추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山濤에게 보낸 <與山巨源絶交書>라는 편지다. 이 편지에서 자신이 관직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곱 가지와 官界에 들어갈 수 없는 두 가지를 들어,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질책하였다.
그런데 산도가 혜강의 처지와 추구하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사마씨 정권 하의 자리를 추천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 산도가 그동안 죽림에서의 생활을 통해 혜강의 인품과 능력을 존경하여 그를 추천했을 것이다.
그러나 山濤가 그를 추천한 때가 대략 261년이고, 혜강이 죽은 해가 262년임을 감안하면, 그는 사마소가 혜강을 더 이상 배려하지 않을 조짐과 계획을 미리 간파하여, 최대한 그를 보호하려고 그 자리를 추천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혜강의 입장에서 보면, 山濤가 아예 사마소의 심복이 되어버렸다고 오해했을 수가 있다. 그래서 친구에 대한 서운한 감정에 절교를 선언하면서 사마소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버린 것이다. 이점은 바로 자신의 안위에 심각한 위험을 무릅쓴 것인데, 사마소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자신과 선을 긋고 등을 돌린 선언서와 같다고 인식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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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사마소의 相國&25534(상국연)인 여손은 오히려 늙은 모친을 학대했다는 죄명으로 고소했다. 이에 격분한 혜강은 여손에게 사람을 무고하게 모함하면서 엉큼한 마음을 감추고 있고, 자신은 여안에게만 참으로 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며, 여손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여안이 죄를 얻어 변경으로 귀향하는 판결을 받았다. 여안이 억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혜강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중원의 모습을 돌아보면 분한 마음이 구름처럼 솟아나고(顧影中原&8231憤氣雲踊)’, ‘펼치기도 어렵고 없애버리기도 어렵지만 천하를 다 쓸어버리고 싶네(披難掃難, 平滌九區)’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는 곧 ‘사마씨 정권을 숙청해버리고 싶다’고 인식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종회는 이 두 가지 사건을 가지고 사마소에게 참언하여 여안과 혜강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결국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것으로,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러한 위험한 정치상황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255년 사마소가 정권을 잡고 두루 名士를 등용할 때, 완적은 어쩔 수 없이 사마소에게 나아가 화를 피했지만, 혜강은 죽림을 떠나 河東(하동) 등으로 몸을 숨기고 은사들을 찾아다니며, 양생법을 연구하였다. 258년에 은사 孫登(손등)을 만나 여러 차례 가르침을 물었지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혜강이 떠날 때 권고하여 “당신은 재능이 있으나 멀리보는 식견이 부족하니, 지금 세상에 처하여 화를 면하기 어렵다. 이후에는 반드시 근신하여 처신하고, 의론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죽기 전 불과 4년 전의 충고지만 역시 사람의 성품은 쉽게 고치기가 어려운 듯 모양이다.
그가 죄를 얻었을 때, 3000명의 태학생이 그의 사면을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죽음을 받아들여, 거문고를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廣陵散(광릉산)>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마치고 나서, “일찌기 袁孝尼(원효니)가 나에게 이 곡을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지 않더니, 결국 <廣陵散>이 오늘에야 끊어지고 마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혜강이 죽었을 때, “세상의 선비가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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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은 ‘죽림칠현’ 중 술과 그렇게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죽림칠현을 ‘칠현’으로 불리도록 인품과 성격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혜강은 일찍이 조위의 인척관계로 인해 사마씨 정권의 화를 부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움직이는 자는 허물이 많고, 조용히 있는 자는 근심이 적다”는 처세의 방법을 실행하여, “산속의 은자를 그리워하고, 물가에서 낚시대 잡기를 즐겼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의 고상한 인품과 명성으로 인해 6명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고, 결국 그는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죽음이 그를 더욱 ‘칠현’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의 모든 행실이 유가가 말하는 어진 사람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찍이 阮籍이 모친 상을 당했을 때, 조문하러 가는 사람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가서 완적의 마음을 위로하고 흡족하게 만든 사실은 유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신조차도 그를 존경하여, 그의 작품들을 교정하고 서발문을 지었을 정도였기에, 필자도 죽림칠현을 언급하면서 그를 맨 처음 거론하는 이유다. 나아가 누가 감히 그를 어리석다고, 적극적으로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자.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혜강이 견지해온 철학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가 죽기 전 19세 아들 &23879紹(혜소)에게 남긴 <家誡(가계)>를 통하여, 혜강이 전하는 처세의 방법 몇 가지를 마음속에 새기기 바란다.
사람이 포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人无志,非人也)
무릇 일을 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데, 옳지 않으면 안된다.(凡行事先自審其可,不差於宜.)
일찍 죽는 것은 몸을 놀리는 것에서 생겨나고, 운명을 이루는 것은 추구하는 것을 잘 얻는 것이다.(壽夭之&26469,生於用身;性命之遂,得於善求.)
대저 말이라는 것은 군자가 지니는 총명함이다. 기지가 움직이면 만물이 응하는데, 시비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夫言語,君子之機,機動物應,則是非之形著矣. 故不可不&24910.)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할 때는, 자신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권하는 것처럼 하라.(&24375勸人酒. 不&39154自已,若人來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