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산, 남산
반독재를 삼킨 거대한 우물
6국, 민주화운동 대학생의 두려움 그 자체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 대한적십자사 건물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본다. 너른 주차장 앞에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면적 2449㎡)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균형발전본부 건물에는 청계천복원추진본부도 함께 있다. 조화와 균형, 환경과 녹색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명칭에서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 그곳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곳의 명칭은 ‘6국’.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 2~3층에서 통상적인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하 1층과 2층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했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씨 등 8명이 이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자행된 고문 끝에 조작된 혐의로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한다.
대한적십자사도 한때 안기부의 공간이었다. 행정 업무 공간으로 주로 쓰였지만, 건너편 ㅅ호텔에 투숙한 사찰 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길을 건너 TBS교통방송(면적 1962.2㎡)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를 지난다. 이 두 건물 역시 안기부 청사였다. 수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맡았단다. 소방방재본부 건물에는 유치장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예장동 안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온다. 서울유스호스텔 방문을 환영한다는 수소 뿔 모양의 입간판을 지나는 길에 ‘준공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1996년 10월부터 두 달간 계속된 ‘남산 청사 이적지’ 공원 조성 공사의 준공을 알리는 기념비다. 왜 굳이 이전한 기관의 이름을 빼야 했을까. 아니 ‘남산’이라고 하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독재의 시간을 모르는 후손은 그냥 잊으라는 뜻이었을까.
서울유스호스텔을 향하는 길이 몸을 틀기 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은행나무 뒤로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 보인다. 2007년까지 그곳은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농구장이었다. 99년 전 통감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몰래 숨어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곳이라는 것을 기억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기관의 이름을 뺀 준공 기념비와 표지석조차 없는 잔디밭은 ‘망각’을 유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동산 허리를 돌아서면 눈앞에 서울유스호스텔이 들어온다. 길게 치솟은 통신용 철탑과 권위적으로 사각진 형태가 예사 건물이 아니란 느낌을 주지만, 누구도 그 과거를 알려주지 않는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마음 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되자’는 액자가 뒤통수를 친다. 독재의 시절, 취조와 고문의 목적은 대상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새 마음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건물의 옛 용도를 아는 이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 남산 안기부 터로 올라가는 고갯길에 놓인 준공 표지판. ‘남산 청사 이적지’라고만 돼 있을 뿐, 어떤 청사가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
유스호스텔 지하의 굳게 잠긴 문
서울시 중구 예장동 4-5번지. 이 건물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지난 1972년의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남산 본관. 여기는 1층부터 6층까지 대부분 행정 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탐지와 분류, 분석이 업무의 주요한 부분인 정보의 특성상 행정 사무실은 곳곳에 필요했다고 한다. 6층에는 정보부장실(안기부장실)이 있었다.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지난 1973년 본관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최종길 교수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옥상으로 가는 외부 계단에서 최 교수를 내던졌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본관 내부는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형태를 다 잃어버렸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공간은 있는 법. 유스호스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그대로 보존됐다. 두 단계의 계단을 내려가면 굳게 잠긴 문이 나온다. 이 문 뒤에는 지하 통로가 있다. 지하 통로는 유스호스텔 앞의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이어진다. 길쭉한 원통형 철탑을 모자처럼 쓴 방재센터 건물은 1층짜리 구조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지하 3층까지 이어진다. 그 옛날 안기부로 끌려온 이들은 본관 지하 통로를 통해 방재센터 건물 지하로 끌려갔다. 건물의 당시 명칭은 ‘제6별관’.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이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다. 당시 ‘제6별관’에는 아예 지상 구조물이 없었다.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지하 통로를 따라 지하 1층으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지하 2층으로 옮겨졌다. 지하 2층에는 복도 양쪽으로 화장실이 딸린 4~5평 크기의 취조실들이 10여 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취조실이 있었고, 취조실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특수한 창문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지하 3층 한쪽에는 유치장도 있었다.
제6별관보다 악명 높은 곳이 ‘제5별관’이었다. 방재센터 옆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터널이 나타난다. 100m 남짓한 터널의 끝으로 4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서울시 남산 별관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이 제5별관은 정보부 직원들도 수사용이었다고 인정하는 곳이다. 깜깜한 밤, 정보부 직원들에게 연행된 이들은 눈을 가린 채로 끌려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처음 눈을 뜨는 곳은 남산 3호 터널 앞 대형 철제문. 육중한 철제문이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열리면 차는 곧바로 깜깜한 터널을 향한다. 깊은 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제5별관 앞 터널의 용도였다.
쿠데타 이틀 만에 중앙정보부 설치 착수
남산 안기부가 가장 세력을 넓혔을 때에는 2만4800여 평의 부지에 총 41개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KCIA라고 불렸던 중앙정보부를 만든 인물은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쿠데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육사 동기생(8기)인 육본전략정보과의 이영근·서정근 중령을 불렀다. “우리에게도 정보부가 필요하다, 이를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어달라.” 이 중령과 서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일본의 내각조사실 같은 기관을 연구하며 한국형 정보부의 뼈대를 만들었다. 법은 6월20일 공표된다.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초기 요원 수는 500명 정도였다. 독재를 연장하려면 감시와 처벌이 필요했다. 항거가 불가능할 만큼 겁줄 수 있는. 정보부는 날로 커져갔다. 요원이 가장 급격히 늘었던 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직후였다. 공안수사의 법적 완결성을 좀더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보부는 법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늘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늘어난 조직은 더 많은 건물과 사무실을 삼켰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3천여 명 정도로 불어났다. 안기부 요원은 전두환 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이르면서 갑절로 규모가 늘어난다. 안기부는 남산의 공개성과 협소함 때문에 1995년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긴다. 안기부 건물들의 소유권은 이때 모두 서울시로 넘어갔다.
서울시는 안기부 이전 당시 남아 있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제1별관 폭파 해체였다. 본관 바로 옆에 붙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했던 제1별관은 지금 시멘트 바닥만 텅 빈 공터로 남아 있다. 1961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2011년 50주년을 맞는다.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놨다.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를 허무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서울시 남산 별관과 교통방송 건물 등을 모두 허문다는 계획이다.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본관 건물도 임대 기간이 지나면 철거해 녹지로 바꾸기로 했다.
2003년에도 인권기념공원 거부돼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등 18개 인권단체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이 아닌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 이명박 당시 시장은 이를 거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제 아예 그 공간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정치공작과 인권침해를 오랜 세월 연구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사라진 건물이 국치의 기억을 지운다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사라져…
1910년 8월29일, 무너진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 남산 자락의 통감관저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거만스런 표정으로 시를 읊었다. 이날 아침, 이른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합병조약)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꿈에 그리던 조선 합방이 이뤄진 날이었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이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자신이 이뤄냈다는 자만감에 취해 있었다.
통감관저→총독관저→시정기념관
일주일 전인 8월22일의 일이다. 남산 기슭 ‘왜성대’ 중턱에 있던 통감관저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나타났다. 데라우치가 한일합방 전권위원으로 임명한 이완용이었다. 순종의 국새를 찍은 위임장을 받아 달려오는 길이었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한국사 이야기>에서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8월22일 (이완용은) 위임장은 뜻대로 받아냈다. 순종이 (위임장에) 옥새를 찍지 않으려 하자,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황후 윤씨의 외숙부) 윤덕영이 달려가서 빼앗아 찍었다고 전한다.”
8월4일부터 이때까지 데라우치와 이완용 사이를 오가며 공작을 꾸민 자는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이다. <혈의 누> <귀의 성> <은세계> 등의 신소설을 발표한 작가, 바로 그 이인직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날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이 장소에 대해 <매일신보> 1940년 11월22일치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한일합방 이후 한국통감은 조선총독으로 격상된다(1910년 8월29일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이었고 ‘한국’은 이를 줄인 말이었다. 일본 내각은 1910년 7월 내부 칙령을 통해 대한제국을 대신할 말로 ‘조선’을 택했다). 총독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권력자였다. 관저도 총독관저. 왜성대 총독관저는 1939년까지 쓰이다가,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지금의 청와대 터로 관저를 옮기면서 ‘시정기념관’으로 탈바꿈한다. <매일신보>는 이에 대해 “메이지 18년 이곳에 새로이 터를 닦고 일본공사관으로서 등장한 이래 작년 9월 미나미 총독이 경무대 신관저로 이사하기까지 실로 50여 년의 묵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이 집을 시정 30주년의 빛나는 해와 함께 영원히 기념하고자 여기에 그 이름을 ‘시정기념관’으로 하고 역대 통감, 총독의 보배로운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1960년, 건물의 마지막 운명
통감부는 위치부터가 조선 정복을 목적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906년 2월에 설치된 통감부의 위치는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정남에서 마주 보는 자리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본궁이던 경운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 아랫자락이었다. 통감부가 여기에 위치를 잡으니, 일본인들도 여기로 모였다.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던 조선의 오랜 관례를 묵살하고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에 집과 청사의 터를 잡고 대한제국의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에 의해 한성에 신축되거나 증축된 청사만 139개동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선호했던 건축양식은 자신들의 건축 방식에 르네상스 양식을 합친 ‘왜양절충형’이었다. 통감부 역시 이런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제국주의 일본이 세세만년 기념하고 싶었던 ‘합병조인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까맣게 잊고 있다. 경술국치의 터는 지금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47)씨는 3년간의 추적과 고증 끝에 경술국치 현장을 찾아냈다. 그가 확인한 경술국치의 터 주소는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 인근의 잔디밭’. 이씨의 설명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는 시정기념관을 민속박물관(1946년)으로 바꾼다. 6·25 전쟁 때 피난 갔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석조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1년6개월 남짓 임시 국립박물관(1953년)으로 쓰이던 때도 있었다. 이후는 연합참모본부 건물(1954년)로 쓰였다.”
<동아일보> 1960년 9월20일치에 이 건물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통감관저는 이 직후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이곳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면서 이 일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사라진 건물은 기억까지 지웠다. 그래도 복구해내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 이 잔디밭에서 통감관저 안에 서 있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 동상 받침대 판석 3점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야시는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다. 1936년에는 그의 업적과 희수(77살)를 기념해 관저 건물 앞뜰에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잔디밭 옆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도 이곳이 관저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터의 은행나무는 서울시 보호수로
1926년 간행된 <경성의 광화>라는 책에 있는 이 은행나무에 대한 설명이다. “녹천정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인 ‘대공손수’(大公孫樹·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고, 높이는 (통감) 관저의 옥상에 닿아 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다.” 녹천정은 통감관저 바로 옆에 있던 조선시대 정자다. 녹천정 옆에 있다던 그 은행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 서2-7, 중구 예장동 2-1)로 남아 있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이곳이 경술국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였지만, 서울시와 중구청의 비협조로 중단되고 말았다”며 “지금이라도 서울시와 정부가 가진 문헌과 학계의 고증을 거쳐 경술국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통감 관저는 이렇게 흔적조차 희미한 반면, 통감부 터에는 표지석이라도 남아있다. 한일합방 이후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고, 남산 총독부는 16년간 조선을 지배했다. 1926년 광화문의 경복궁 앞 옛 중앙청 터로 옮겨가기 전까지. 남산 총독부 터에는 지금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남산 숭의여전 옆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 보면 통감부와 총독부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926년 총독부가 옮겨간 뒤 총독부 건물은 ‘은사과학박물관’이 된다.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과학박물관이었다. 해방 뒤 국립과학박물관으로, 1948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거듭났으나 한국전쟁 도중 불타고 말았다. 정부는 1957년 이 자리에 한국방송공사(KBS) 건물을 지었다. 한국방송이 여의도로 옮긴 뒤에는 국토통일원 청사로 쓰이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은 드물다. 통감관저는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년 2010년이 경술국치 100주년임에도.
“진보·보수 넘어 복원에 나서야”
이런 상황을 타개하자는 이들이 있다. 작가 서해성씨의 말이다. “경술국치의 통한이 어린 통감관저는 한일합병이 이뤄지던 지난 1910년 시기에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한일 전문가들의 고증과 각계의 의지만 모이면 충분히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 100년을 기억할 공간을 만드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불과 100년, 역사가 통째로 사라진다
1972년, 왜성대의 한쪽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 중구 예장동 4-5번지. 6층으로 들어선 그 건물의 이름은 중앙정보부 남산 본부였다. 지금 그곳은 서울유스호스텔로, 수많은 내외국 젊은이들을 맞고 있다. 서울시의 정책으로 독재의 공간은 젊음과 문화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스호스텔 옆길을 따라오면 만날 수 있는 ‘남산창작센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실내체육관이었다. 남산창작센터에서는 매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남산창작센터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문학의 집, 서울’이 있다. 널따란 정원이 딸린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원래 중앙정보부장 관저였다. 그 앞에 있던 정보부장 경호원들의 숙소도 2005년 ‘산림문학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과거 이곳이 어디였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다.
1년 뒤인 2010년 8월, 대한민국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다. 우리는 어떻게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순간을 기억해야 할까. 그 2년 뒤인 2011년 6월에는 중앙정보부 설치 50년을 맞는다. 이 역사는 또 어떻게 남겨야 할까.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밝혔다. 2015년까지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 등을 모두 허물고 녹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그게 옳은 길일까. 역사는 그대로인데, 역사를 증언할 건축물들은 계속 사라진다.
다시 남산을 본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북쪽의 북악산을 현무로 삼고,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 동쪽의 낙산을 좌청룡으로 삼았다. 남쪽의 목멱산, 지금의 남산은 주작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의 모습으로 주작을 그렸다.
왜성대와 안기부를 머리와 어깨에 얹고 있는 주작은 힘겹다. 남산의 주작이 다시 날기 위해서는 건물을 없앨 것이 아니라 바로잡아야 한다. 통감관저와 옛 안기부 청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독재에 묶인 남산의 사슬을 제대로 푸는 길이다. 그래서 남산은 평화를 상징하는 공원이 돼야 한다.
제국주의·군사독재 흔적 오롯한 ‘역사 창고’
역사 보존한다며 한일 강제병합·중앙정보부 공포정치 현장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
높이 262m. 아주 낮은 산이지만 남산은 참 특별한 산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있는 곳이 바로 남산이다. 지금 팔각정이 있는 자리 부근에는 국사당이 있었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두 번 이곳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이 자신들의 복과 바람을 비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 국사당은 지금 남산에 없다. 일제가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자기네 신을 굽어보는 높은 곳에 국사당을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은 산, 남산이 입을 열면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나온다. 옛날 서울의 사대부집에는 ‘수여남산’(壽如南山)이라 쓴 현판을 사랑이나 대청에 많이 걸었다고 한다. 이런 현판에 담은 마음이 어찌 개인의 장수만을 빈 것이겠는가.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워지던 한말에 우리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하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산을 빼앗겼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남산인들 온전했을까? 아니,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강제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남산은 곧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 그날 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세상에 있다면 이 밤의 저 달을 어떤 눈으로 볼까나”라고 읊었다.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하에서 깨워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여주라는 시로 화답했다. 남산부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민족의 명산이 일본의 침략 교두보로
일본은 조선을 남산부터 먹어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일본식 성을 쌓았다고 해서 ‘왜성대’라 이름 붙인 곳에 일본공사관을 짓고, 이곳(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을 다시 통감부로 삼고, 1925년 경복궁 앞에 새 건물을 짓고 옮겨갈 때까지 남산의 북쪽 예장동 자락은 일제 통치의 중심부였다. 남산의 서남쪽에는 일본군사령부가 들어섰고, 필동 쪽으로는 헌병대가 자리를 잡았다. 후암동부터 남산 자락을 빙 돌아 필동·장충동까지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다. 일제는 장충단 위쪽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라는 절을 세웠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이었다. 장충단이 어떤 곳인가? 을미사변 당시 온몸으로 일본 낭인들을 막다 희생된 홍계훈 등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던 곳이다. 일제는 그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곳에 이토의 보리사를 세웠고, 얼마 뒤에는 상해사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섰던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워버렸다. 조선신궁, 경성신사, 러일전쟁 당시의 사령관으로 군신으로 떠받들어진 노기의 신사, 그리고 지금의 해방촌에 있는 호국신사 등 우리 마음의 고향 남산에는 일본 귀신들이 우글거리게 되었다.
해방 뒤 남산은 잠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듯했으나, 권력자들은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승만은 남산에 자기 동상을 세웠지만, 겨우 5년 만에 4월 혁명이 일어나 동상은 땅에 나뒹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훼손할까 두려워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세울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통감관저 터에 러일전쟁 무렵 장장 8년간 조선공사를 지내며 강제 병합의 길을 닦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1936년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세웠다. 그 동상도 해방이 되면서 허물어졌으니 남산은 살아 있는 자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반란 세력은 김종필을 책임자로 해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김종필은 자신은 최고위원이 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공언할 만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애착을 가졌다. “혁명 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다시금 민중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아니, 남산은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운동권이 아닌 일반 시민 중에도 지금까지 국정원이 ‘나를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한국형 정신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을 보면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우리 현대사에 드리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군대 퀸셋 막사 몇 개에서 처음 시작한 자리는 바로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관저 바로 뒤의 언덕이었다. 1972년 중앙정보부 남산본부(현재 서울유스호스텔 건물)가 들어선 곳은 그 옆이다. 땅에도 운명이 있는 것인가? 20세기 전반기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경술국치의 현장이 20세기 후반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고문과 공작과 사찰의 본산인 중앙정보부 자리와 맞닿아 있다. 통감부의 고문정치(顧問政治)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고문정치(拷問政治)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해방 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군사독재를 낳았다고 말하지만, 제국주의 침략이 군사독재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슬 푸른 중앙정보부·안기부가 버티고 있었기에 우리는 남산에 다가갈 수 없었고, 경술국치의 현장은 그렇게 내버려져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의 죄업 위에 군사독재의 죄업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남산을 빼앗겼고, 민주주의를 빼앗겼고, 기억을 빼앗겼다. 우리의 찬란한 금속활자 문화를 꽃피웠던 주자소(鑄字所)가 있던 흔적은 중앙정보부 면회소로 전락한 주자파출소의 이름에만 처량하게 남아 있었다.
경술국치 현장 뒤 언덕서 중앙정보부 창설
1995년 안기부가 서울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우리는 다시 남산에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남산은 공포의 남산이 아니다. 돌아온 남산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놓고 여러 가지 좋은 안이 나왔지만, 서울시는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만들어버렸다. 그곳에 몸을 누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모를까, 과연 저기서 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는 2009년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남산의 생태 및 산자락 복원, 역사 복원, 경관 개선 등을 통해 시민에게 남산을 일상 속 공간으로 되돌려준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취지야 나무랄 바 없이 좋다. 그런데 예장동 자락에 대한 내용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계획의 목표에 들어가 있건만, 현재 남산에 남은 역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기부 건물들을 모두 헐어버린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들어 있는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당장 오는 9월부터 철거한다고 한다.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하 ‘ㄱ’)은 이런 시급한 상황 때문에 발기됐다(‘ㄱ’은 처음·으뜸이란 뜻이기도 하고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지선 스님, 문정현 신부, 법안 스님, 정진우 목사, 정상덕 교무 등 종교인들이 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죄의 흔적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의 보존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해동 목사나 강만길 교수처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도 있고,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처럼 안기부에 근무했던 분도 있고, 박원순·김형태 변호사처럼 인권변호사로 변론을 위해 안기부를 드나들었던 분도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차이를 떠나 한번 훼손되면 돌이킬 길 없는 역사 유적을 지키자는 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급하게 모인 것이다.
‘ㄱ’은 우선 서울시와 협의해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이 역사 복원이라는 취지에 맞게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남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안기부 건물을 헐어버리고서 역사를 복원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서울시도 열린 자세를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은 여러 채가 남아 있는데 ‘ㄱ’은 그중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지하취조실(현 서울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과 터널(현 서울시청 별관) △6국(현 서울시균형발전본부) 등 4개소는 반드시 보존해야 하며, 이 건물들의 영구 보존을 위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관계 당국에 요청할 것이다.
또한 ‘ㄱ’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29일을 목표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통감관저를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ㄱ’은 이 공간이 개발·용도 변경 등으로 훼손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기금을 모아 매입(보존·복원)한 뒤 역사적으로 공공화해 후대로 전승하는 역사신탁 사업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과거를 사서 미래를 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철거하고 표석만 세운다면?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의 졸속 철거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지은 일제의 뜻을 알기에 건물을 헐 수도 있다. 그러나 헐 때 헐더라도 좀더 의미 있게 헐 수는 없었을까? 각 분야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그 성과를 집약하면서 헐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서울에서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의 최고 이벤트로서 남과 북의 정상이 같이 일제 잔재의 상징인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첫 망치질을 같이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비용이 들더라도 총독부 건물을 이전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박물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유물 이전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덮어놓고 헐어버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역사 교육에서 현장성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힘을 지닌다. 만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버리고 표석이나 하나 세워두고 나무를 심었다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철거하고 기념관을 새로 멋있게 짓는다고 한들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이 전하는 진한 감동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대지의 기억은 한번 훼손돼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대지의 공공성에는 생동하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2004년부터 만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역사를 살필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기본 사명은 중앙정보부·안기부가 행한 인권침해와 권력남용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 기관들이 현대사에서 수행한 또 다른 역할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개발독재 시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정부 안의 정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사의 큰 특징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은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곳 남산은 민주화의 주체 세력과 산업화의 주도 세력이 불꽃 튀게 만난 곳이다. 게다가 경술국치가 맺어진 곳이 바로 남산이다. 이곳 남산처럼 20세기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곳은 다시 찾기 어렵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우리가 살아온 내력을 차근차근 들려주기에 가장 좋은 곳이 남산이다. 현대사의 고난과 성취가 이렇게 한곳에 어우러진 곳은 여기 말고는 찾기 어렵다.
‘ㄱ’은 통감관저를 복원해 가슴 아픈 역사를 교육하는 현장으로 삼으면서, 그 옆의 안기부 건물들을 아시아 인권평화센터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겪었고, 개발독재로 심한 몸살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한국은 큰 희생을 치렀고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빨리 빈곤에서 탈출했다. 독재의 본산으로 고문 등 인권침해가 자행되던 공간이 내일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 등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향한 중대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룬 ‘한류’의 상징으로
한류가 왜 드라마나 대중가요에서만 나와야 하는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우리의 경험은 이 두 과제를 위해 분투하는 다른 나라에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현대사의 상처를 보듬고 우뚝 선 남산은 인권과 민주화와 산업화에서의 한류를 창출하는 생산 현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처받은 남산의 회복을 통해 미래를 후대에게 신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