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도연명에게 술은 어떤 의미일까?

醉月 2010. 8. 24. 09:03

갈건으로 술을 거르고 다시 머리에 쓰다

도연명(陶淵明)은 중국의 대표적 전원시인(田園詩人)으로서, 술과 국화,거문고를 좋아하였으며, <귀원전거(歸園田居)>,<귀거래사(歸去來辭)>,<음주(飮酒)> 등의 시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도화원기(桃花源記)> 등의 문장이 있다.

혹시 우리는 이보다도 관직을 다섯 번이나 나갔다가 물러난 그의 행적이나 “내가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시골 어린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느냐?(我豈能爲五斗米折腰鄕里小兒)”는 ‘위오두미절요(爲五斗米折腰)’라는 문구에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도연명의 이름을 거론하면 자연(自然),질박(質朴),순천(順天: 자연의 이치를 따름),고궁절(固窮節: 곤궁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견디는 군자의 절개)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 도연명의 귀거래사
도연명이 살던 시기는 남조시대 중 동진(東晉)에서 宋으로 넘어가던 교체기로 혼란한 때였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 젊은 시절 도연명도 “내 젊었을 때를 돌이켜보면, 세상의 즐거움이 없더라도 스스로 즐거워하고, 세찬 뜻은 四海를 내달리고, 날개를 펴고 멀리까지 날고자 했다.(憶我少壯時, 無樂自欣豫. 猛志逸四海, 騫翮思遠翥)”(<잡시(雜詩)>제5수)라고 했듯이 입신양명이란 큰 포부를 지녔던 것 같다.

그리하여 29세의 젊은 나이에 강주(江州: 치소가 도연명의 고향인 潯陽에 있었음) 제주(祭酒: 교육의 장)를 시작으로 관계에 발을 내딛었지만, 그는 다섯 번의 진퇴를 반복하다가 결국 팽택령(彭澤令)을 마지막으로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다섯 번이나 진퇴를 반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체적인 요인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관계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도연명의 본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나 평론서에서는 당시 혼탁한 사회와 관계의 암투 등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만일 이것이 주된 요인이라면, 첫 번째 관직에 나가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아야 옳다.

사실 당시는 東晉의 왕실인 사마씨(司馬氏)를 제쳐두고, 당시 권문세가인 환현(桓玄)과 유로지(劉牢之)․유유(劉裕: 宋 고조)가 서로 권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도연명은 유로지 밑에서 유유와 함께 참군을 지낸 적이 있고, 환현의 막하가 되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그가 그들을 보좌할 때는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유로지 밑에서 함께 참군을 지냈던 유유가 환현에게 중용되었고, 나중에 제위에 올라 楚라고 한 환현을 제거하고 송의 고조가 된 사실을 보면, 아마도 도연명의 성격은 관직, 그것도 참군(參軍)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마도 사람을 다스리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이 “젊어서부터 속세의 분위기는 자신에게 맞지 않았고, 본성이 산을 좋아했다(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歸園田居>其一)라고 고백했듯이, 이러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관계, 특히 혼란한 시기의 관직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는 오랜 굶주림에 시달렸기에, 쟁기를 버리고 벼슬에 나섰으나, 그래도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고, 추위와 굶주림은 여전했다.(疇昔苦長飢, 投耒去學仕. 將養不得節, 凍餒固纏己.)”(<飮酒>其19)고 하였는데, 혼란한 세상에 관직에 나가는 사람의 이러한 정신자세로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정치가 혼란하여 상대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는 혼란한 세상에서 겨우 굶주림에 시달려 배를 채우려고 관직에 나간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도연명 자신의 말이 아닌 ≪송서(宋書),은일전(隱逸傳)≫을 보면, “부모님이 늙고 집이 가난하여, 나가서 제주가 되었으나, 관리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며칠 후에 스스로 물러나서 돌아왔다. 주(州)에서 주부(主簿)의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親老家贫, 起爲州祭酒, 不堪吏職, 少日自解歸. 州召主簿, 不就.)”고 한 것을 보면, 역시 도연명의 본성이 관리의 일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팽택령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쓴 <歸去來辭>의 幷敍에서 “나의 본성은 자연을 닮아서 이러한 성격을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 없었고, 굶주림과 추위가 절박하더라도 자신의 본성을 어기고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 고통이었다(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饑凍雖折, 違己交病.)”고 했던 것이다.

도연명은 본성이 자연을 닮고자 하였고, 또한 술을 아주 좋아하였다. 마지막 관직인 팽택령에 나가게 된 이유를 보면, “당시는 아직도 세상이 평온하지 못하였으므로 멀리가서 벼슬을 하기에는 마음으로 꺼렸다. 그러나 팽택은 집에서 백 리쯤 되고, 공전(公田)의 수확으로 족히 술을 빚어 마실 수가 있었으므로, 팽택령을 얻었다.(於時風波未靜, 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爲酒, 故便求之.)”(<歸去來辭>幷敍)고 할 정도였다.

도연명의 시는 전체가 약145수 정도가 되는데, 술과 관련된 시는 약56수 정도가 된다. 소통(蕭統)이 <도연명집서(陶淵明集序)>에서 “도연명의 시는 각 수마다 술이 있는 듯 하다)(有疑陶淵明之詩, 篇篇有酒.)”라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음주(飮酒)>20수는 <음주>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최초의 시라고 할 만 하다. 그의 <飮酒>幷序에서 “내가 한가하게 생활하다보니 즐거움이 적고, 아울러 요사이는 밤이 이미 길어졌다. 우연히 좋은 술이 생기면 저녁마다 마시지 않을 때가 없다. 내 그림자를 마주하고서 홀로 마시다보면 갑자기 거듭 취하게 된다. 이미 취한 뒤에는 문득 몇 구절을 적어서 스스로 즐기다보니, 시를 적은 종이가 많아졌지만 글귀에 순서가 없다. 그래서 친구에게 이것을 적어라고 하고서 함께 웃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余閒居寡歡, 兼比夜已長. 偶有名酒, 無夕不飮. 顧影獨盡, 忽焉復醉. 旣醉之後, 輒題數句自娛. 紙墨雖多, 辭無詮次. 聯命故人書之, 以爲歡笑爾.)”고 하였는데, 오로지 술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도연명이 과거의 생활을 회상하여, 출사하여 귀전(歸田)한 생활 중에 느낀 각종 체험을 그렸고, 또한 추악하고 어지러운 사회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표출하였다. 그래서 소통은 “내가 볼 때, 그것의 의미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술에 기탁하여 종적으로 삼은 것이다(吾觀其意不在酒, 亦寄酒爲迹者也.”(<도연명집서(陶淵明集序)>)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천고의 명시인 그의 <음주>제5수를 감상해보자.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성의 경계지역에 집을 짓고 살아도,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을 멀리 두면 사는 땅이 저절로 외지게 된다네.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의 기운은 저녁 무렵에 더욱 좋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나는 새 서로 짝하여 돌아온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속에 참뜻이 있으니,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말로 더 설명하려다가 이미 말을 잊는다.

읽고 읽어서 자연히 입에서 줄줄 나오도록 해보시라. 이 시가 바로 도연명의 면모를 전부 보여주는 시라고 할 만 하다. 이 시는 한편의 산수화요, 한편의 법문이자 인생의 진리다. 참으로 인생의 진리를 이처럼 산듯하게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도연명의 고향은 강서성(江西省) 심양(潯陽) 채상(柴桑)으로, 장강의 중류에 있으며 북으로는 명산인 여산(廬山)이 있다. 이 여산은 귀종사(歸宗寺),수봉사(秀峰寺),서현사(棲賢寺),원통사(圓通寺),동림사(東林寺),서림사(西林寺) 등 유명한 사찰이 많았고, 동림사는 진대(晉代)의 명승인 혜원(慧遠)이 주지로서 불법을 강설하던 곳이다. 도연명은 아마도 당시에 유행한 도가와 이러한 불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시를 설명하려니,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하게 되노니, 이속에 참뜻이 느껴질 때까지 스스로 읽고 읽어서 암송해보시길...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연명이 거주하던 속리(粟里)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도연명이 술에 취하면 그 바위 위에 드러누웠기에 ‘취석(醉石)’이라 하였다고 하고, 또한 당시의 지음(知音)인 안연지(顔延之)가 시안군(始安郡)의 태수가 되어 도연명의 채상을 지날 때 2만전을 남겨 주었는데, 도연명이 이 돈을 모두 술집에 보내놓고 술을 조금씩 가져다 마셨다하고, 또한 군수가 일찍이 그를 찾았는데, 그때 마침 술이 익어서 도연명은 자신이 쓰고 있던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다시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는 고사 등이 있다.

이러한 고사를 통해 보면, 도연면은 자연에 순응하며 소박한 촌로같은 인상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본성대로 행하며 예법에 구속되지 않는 모습이 강하게 풍겨진다.
이러한 설을 믿지 못한다면, ≪宋書,隱逸傳≫에서 언급한 고사를 살펴보자.

일찌기 구월구일 중양절에 술이 없어서 집 주변의 국화 꽃 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마침 (王)弘이 보내준 술이 도착하면, 즉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돌아온다. 도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박한 거문고 하나가 있었는데, 줄이 없었다. 늘 술을 적당하게 마시면 문득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뜻을 기탁하였다.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그를 찾으면 술을 문득 차렸다. 도잠은 먼저 취하여 객에게 말했다. ‘내가 취하여 자고 싶으니, 자네들은 알아서 가시오’라고 하였는데, 진솔한 것이 이와 같았다.

嘗九月九日無酒, 出宅邊菊叢中坐久, 値(王)弘送酒至, 卽便就酌, 醉而後歸. 潛不解音聲, 而畜素琴一張, 無弦, 每有酒適, 輒撫弄寄其意. 貴賤造之者, 有酒輒設. 潛若先醉, 便語客: ‘我醉欲眠, 卿可去’, 其眞率如此.

여기에 등장하는 왕홍(王弘)과는 어떤 관계인가? 왕홍은 동진의 개국공신 승상 왕도(王導)의 증손이자, 유유(劉裕)의 심복으로써 당시 418년에 강주(江州)자사로 부임해왔다. 도연명과 왕홍은 이전(404년)에 유유의 막후에 함께 있었던 사이였지만, 도연명은 나이가 50이 가까웠고, 왕홍은 20대의 젊은이였다.

1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도연명은 유유의 야욕을 깨뚫고 있었기에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강주자사로 부임한 왕홍은 그지역에서 도연명의 인품을 칭찬하기에, 이전에 안면이 있는 터라 그를 초청했지만 도연명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홍은 관청에 있던 도연명의 동향인 방준(龐樽)을 시켜서 술과 편지를 보냈지만, 도연명은 그에게 가지 않았다.

◇ 도연명
뒤에 도연명이 여산으로 친구 劉遺民의 묘지에 성묘하러 갔을 때를 틈타서 방준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뒤에 왕홍이 나타나서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렸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자리가 어색했던지, 도연명은 술을 끊었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止酒>를 지어 보였지만, 어찌 술마시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가능키나 한 일이겠는가? 서로 한바탕 웃고서 다시 술을 마신 것을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런데 도연명은 왜 술을 좋아했을까? 그의 자서전이라고 하는 산문 <五柳先生傳>에서 “본성이 술을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항상 술을 얻을 수 없었다. 친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혹 술을 마련해놓고 초대를 하면, 찾아가 술을 마시는데 금방 다 마시고, 반드시 취하기를 바란다.……집안은 적막하듯 가구가 없고 바람과 해조차 가릴 수 없다. 짧은 베옷에 누더기를 걸치고, 대그릇이나 표주박도 늘 비어 있지만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 항상 문장을 지어 스스로 즐기며 자기의 뜻을 보여주었다.……한창 술이 오르면 시를 짓고서, 자신의 뜻을 즐겼다.

……(性嗜酒, 家貧不能常得. 親舊知其如此, 或置酒而招之. 造飮輒盡, 期在必醉.……環堵蕭然, 不蔽風日. 短褐穿結, 簞瓢屢空, 晏如也. 常著文章以自娛, 頗示己志.……酣觴賦詩, 以樂其志.…….)”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본성이 술을 좋아한 것, 둘째, 안빈낙도하는 마음, 셋째, 술을 빌어 글을 지어 스스로 즐기며, 자신의 뜻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다. 첫째 본성이 술을 좋아한 점은 위에서도 이미 언급이 되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둘째, 안빈낙도하는 모습이다. 현재의 삶을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심으로 인해 현재의 삶을 즐겼는지 모르지만, 도연명은 자족의 일환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즉 “차조를 절구에 찧어 술을 담그고, 술이 익자 스스로 잔을 든다.(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和郭主簿>其一),“대야에 손발을 씻고 처마 아래에서 쉬며, 한 국자 술을 마시니 가슴과 얼굴이 펴진다.(盥濯息簷下, 斗酒散襟顔.)”(<庚戌歲九月中於西田獲早稻>),“말을 하고자 하나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어, 술잔 들어 외로운 그림자에게 권한다.(欲言無予和, 揮杯勸孤影.)”(<雜詩·其二>),“즐거워하며 대화를 나누고 봄술 걸러 마시고, 나의 뜰 속 채소를 뽑아 안주로 삼는다.(歡言酌春酒, 摘我園中蔬.)”(<讀≪山海经≫>其一) 등등 술을 마시는 것은 곧 도연명 생활의 일부다.

원래 안빈낙도(安貧樂道: 빈궁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즐김)란 군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도를 근심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憂道, 不憂貧.)”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도연명은 고궁절(固窮節: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견디어 내는 군자의 절개)을 유난히 강조한다.

예를들면, “구십의 나이에 노끈을 매고서라도 행동하는데, 굶주림과 추위가 하물며 나이를 감당하겠는가? 고궁절에 의하지 않고서, 백세 이후에 어떠한 사람의 전기가 남으리오.(九十行帶索, 飢寒況當年. 不賴固窮節, 百世當誰傳.)”(<飮酒>其2),“살아오면서 불혹의 나이인 40을 바라보지만, 미적거리며 마침내 이룬 일도 없다. 마침내 고궁절만 끌어안고, 굶주림과 추위는 실컷 경험했다.(行行向不惑, 淹留遂無成. 竟抱固窮節, 飢寒飽所更.)” 등등.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고궁절을 강조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왜 가난을 그렇게 강조한 것일까? 이점이 도연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랑할 것도 아닌데, 도연명의 시문을 보면 정도가 지나치다. 시문 곳곳에 빈한을 언급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영빈사(詠貧士)>,<걸식(乞食)>을 시제(詩題)로 삼은 것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여겨진다.
 
술은 술로써 끝나서는 안된다!
 
≪논어(論語),태백(泰伯)≫에서 “세상에 도가 있으면 몸을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빈천하면 부끄러운 일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눈여겨보면, 도연명이 고궁절을 강조하고 빈한을 많이 언급한 이유를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 자신이 고궁절을 지키고 빈한하게 사는 것은 사회가 혼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전원으로 돌아와서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이로써 다섯 번이나 관직에 나간 자신의 결점(더구나 자신이 모신 환현이 제위에 오른 것은 자신도 자못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음)을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갔지만 본성을 지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상하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 도연명 ⓒ데일리안
그래서 도연명은 <귀원전거>1수에서 “잘못하여 속세의 그물에 빠졌는데, 13년이나 훌쩍 지나가 버렸구나(誤落塵網中, 一去十三年.)”라고 했고, <귀거래사>에서 “돌아가자꾸나! 전원이 지금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스스로 마음을 몸의 노예로 만들어 괴롭혔는데, 어찌 한탄하며 홀로 슬퍼하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은 언급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오는 것을 쫒아야 하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길을 잃고 헤맨 길이 아직까지 심하지 않기에, 지금이 옳고 지난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고 하였던 것이다.

어떤 평자는 도연명의 시문에 자기모순이 너무 많고 인격의 통일성이 없다고 혹평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렇게 혹평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점으로 인해 도연명의 인격이나 시문을 훼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도연명은 자신의 청렴을 강조하기 위해 산중을 택하지 않고 전원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한 도의 근본을 제대로 꿰뚫고 몸소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의 <癸卯歲始春懷古田舍二首>其二에서 “이전의 훌륭하신 스승인 공자께서 남기신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 도를 걱정하되 가난을 걱정하지 말라고. 높이 우러러 봐도 아득하여 이르기 어렵지만, 마음을 먹고 더욱 힘쓰리라. 쟁기를 잡고 농사짓는 일을 즐기고, 환히 웃으며 농부를 격려하노라.(先師有遺訓, 憂道不憂貧. 瞻望邈難逮, 轉欲志長勤. 秉耒歡時務, 解顔勤農人.)”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도연명은 후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등 같은 유교국가에서 두고두고 존경을 받은 점이리라.

셋째, 술을 빌어 글을 지어 스스로 즐기며, 자신의 뜻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술을 빌어 글을 지을 때는 대부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이다. 즉 자신의 근심이나 즐거움,인간의 유한한 생명,사회나 국가에 대한 불만,인간세상의 살아가는 진리 등등을 풀어놓고 싶을 때다. 도연명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음주시>20수도 이러한 것들을 풀어놓았다.


술을 즐기는 모습으로,

故人賞我趣(고인상아취), 옛 친구들이 나의 사는 멋을 칭찬하여,
挈壺相與至(설호상여지). 술병을 들고 와 서로 함께 모였다.
班荊坐松下(반형좌송하), 소나무 아래 아무렇게나 앉고서,
數斟已復醉(수짐이부취). 술 몇 잔을 마시니 이미 다시 취하고,
父老雜亂言(부로잡난언), 마을 어르신들 두서없이 떠들고,
觴酌失行次(상작실행차). 술잔도 순서없이 돌아간다.
不覺知有我(불각지유아), 나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니,
安知物爲貴(안지물위귀). 사물이 귀한 줄 어찌 알겠는가?
悠悠迷所留(유유미소류), 유유자적하며 술을 마시며 멈출 줄을 모른다.
酒中有深味(주중유심미). 술 속에 깊은 맛이 있으니.(<음주14)>)

라고 하였다. 도연명의 진솔하여 꾸밈없는 모습은 술자리에서도 드러나는데, <음주20>에서 “……다시 통쾌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헛되이 머리 위의 망건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수가 많아 원망스럽더라도, 그대여 마땅히 이 술 취한 사람을 용서하구려.(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 但恨多謬誤, 君當恕醉人.)”라고 하였다. 그러나 술을 마실 때, 그는 술에 취한 추태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제법 운치가 있는 경우도 있다.

秋菊有佳色(추국유가색), 가을 국화가 한창 아름다워,
裛露掇其英(읍로철기영). 이슬을 젖은 꽃잎을 따서,
汎此忘憂物(범차망우물), 이 근심을 잊는 물건인 술 위에 띄우니,
遠我遺世情(원아유세정), 나에게 세상에 대한 마음을 더욱 멀게 하네.
一觴雖獨進(일상수독진), 술잔 하나로 홀로 마시네,
杯盡壺自傾(배진호자경). 술잔이 비자 술단지가 저절로 쓰러지네.
日入群動息(일입군동식), 날이 저물자 만물이 쉬고,
歸鳥趨林鳴(귀조추림명). 돌아오는 새 숲을 향해 운다.
嘯傲東軒下(소오동헌하), 동쪽 창문 아래에서 휘파람 부는데,
聊復得此生(료부득차생). 가만히 다시 이러한 삶을 얻노라.(<음주7>)

이 시에서 도연명의 감수성이 얼마나 풍부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 이슬젖은 국화꽃잎을 감상하고 나서, 그 꽃잎을 술잔에 띄우고, 홀로 그 술단지를 다 비운다. 생각해보라. 홀로 술단지를 다 비울 때까지 시인은 홀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겠는가? 자신에 대해, 집안에 대해, 동네에 대해, 사회에 대해, 우주에 대해…… 끝없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생각들이 거의 道人의 경지까지 올랐을 것이라 감히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해보시라. 네팔의 불도교들이 온몸을 길바닥에 엎디어 서너달씩 걸려 성지에 가는 장면을 생각해보시라. 그네들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얼마나 온각 생각들을 하겠는가? 생각을 제대로 했다면 그들은 바로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杯盡壺自傾’의 표현은 정말로 함축의 별미다. 술잔을 다 비웠으니, 그 술이 어디로 갔겠는가? 바로 시인의 뱃속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술을 다 비우고 자신이 바닥에 쓰러지는 표현을 술단지가 저절로 쓰러진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인생의 짧음을 걱정하여 술을 마시는데, “한평생이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홀연히 지나가는 것이 번쩍하고 지나가는 번개 같은 것. 세월이 흐르는 것이 백년도 못되는데, 이것에 집착하여 무엇을 이루려는가?(一生復能幾, 倏如游電驚. 鼎鼎百年內, 持此欲何成.)”(<음주3>)라고 하였고, 또한 “우주는 얼마나 영원한가? 하지만 인생은 백년도 못된다. 세월이 서로 재촉하니, 귀밑머리가 일찍이 하얗게 되었네.(宇宙一何悠, 人生少至百. 歲月相催逼, 鬢邊早已白.)”(<음주15>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은 인생의 짧음을 항상 걱정하였는데, 이백은 시간이 아까우니 저녁시간도 아깝다고 하여, ‘불을 밝혀 놀자(秉燭夜遊)’라고 하였다. 도연명 또한 인생은 짧음을 아쉬워하여, 그의 <잡시>에서 중 1수,5수,6수,7수 등에서도 시간의 짧음을 아쉬워하였다.

그런데 예전에 사람들은 항상 ‘인생백년’ 혹은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아마 漢代에 들어와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말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전론(典論),논문(論文)>에서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 글을 지어서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개 문장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사업이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성대한 일이다(蓋文章,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라고 하였다.

그런데 漢代初 오언시의 초기 형식인 <古詩十九首> 중 제15수에서 이미 “인생살이 백년도 차지 않는데, 항상 천년의 근심을 품고 있네. 낮은 짧고 밤은 아주 기니, 어찌 촛불을 잡고 놀지 않을까? 즐기는 것도 마땅히 때를 맞춰야지, 무엇 때문에 내일을 기다리는가? 어리석은 자는 비용을 아끼다가, 단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네. 신선 왕자교는, 때를 같이 하기가 어렵네.(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 爲樂當及時, 何能待來玆? 愚者愛惜費, 但爲後世嗤. 仙人王子喬, 難可與等期.)”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 시가 지어진 것이 거의 예수님의 탄생시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니, 지금 사람들도 이 글을 읽고서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음주시>첫수에서 이렇게 읊었다.

衰榮無定在(쇠영무정재), 영고성쇠는 정해지 있지 않으니,
彼此更共之(피차갱공지). 서로 바뀌어 가며 그것을 공유한다.
邵生瓜田中(소생과전중), 소생이 오이밭에 있으면,
寧似東陵時(녕사동릉시). 어찌 동릉후일 때와 같을 수 있겠는가?
寒暑有代謝(한서유대사), 겨울과 여름이 서로 바뀌는 것처럼,
人道每如玆(인도매여자). 인간세상의 원리도 이와 같다.
達人解其會(달인해기회), 달인은 그 원리를 깨달은 사람이니,
逝將不復疑(서장불부의). 죽는 것에 대해서 장차 다시 의심을 품지 않으리라.
忽與一樽酒(홀여일준주), 갑자기 한동이 술이 생기니,
日夕歡相持(일석환상지). 날 저물자 술마시며 즐기리라.

또한 그는 <음주8>에서 “술병을 겨울 소나무 가지에 걸어두고, 멀리 바라보고 때때로 다시 바라본다. 나의 삶은 꿈속에 있는 것 같으니, 무슨 일로 속세에 얽매여야 하나?(提壺掛寒柯, 遠望時復爲. 吾生夢幻間, 何事紲塵羈.)”라고 하였고, <음주11>에서 “죽고나면 무엇을 알겠는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을. 손님같은 몸을 천금을 들여 가꾸어도, 죽고 나면 그 보물도 없어지는 것을. 알몸으로 묻힌다해도 무엇이 그리 잘못된 것이겠는가? 사람들아 당연히 이 참뜻을 깨달아라!(死去何所知, 稱心固爲好. 客養千金軀, 臨化消其寶. 裸葬何必惡, 人當解意表.)”라고 하였던 것이다.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온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도연명 이전의 위진(魏晉)시기에 죽림에 모여 청담을 논하던 ‘죽림칠현’이란 명사가 있었고, 당시 현학(玄學)의 노장사상이 퍼져있는 상황에서, 전원으로 돌아와 몸소 밭을 갈며 고궁절을 지키며,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한 점에서 이후 유가의 영향을 받은 후학들에겐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을 받는다.

이후 당대(唐代) 백거이(白居易)는 도연명의 시를 모방하여 <效陶潛體詩16首>를 지었고, 송대에 소식(蘇軾)은 <和陶詩>를 지었으며, 남송 성리학의 대가인 주희(朱熹)도 도연명이 술에 취해 누웠던 ‘醉石’을 찾았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조들이 <和陶詩>를 지었다고 한다.

나아가 ≪宋書,隱逸傳≫에도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로 노장쪽의 후학들도 그를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송대에 그린 <虎溪三笑圖>에 나오는 세명의 사람이 바로 동림사 혜원스님과 陸修静의 도사와 바로 도연명이라 한다.

도연명이 관직에 나갔다가 다섯 번이나 반복하며 결국 적응하지 못고, 전원으로 물러나 촌로처럼 몸소 밭을 갈았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며,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살았지만, 천고에 이름을 남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함께 생각해보자.

술은 술로써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술만이겠는가? 모든 일을 할 때는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등등 자신에게 자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질문에 질문을 던져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려는 태도와 용기가 필요하다. 도연명에게 술이 혹 이러한 작용을 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