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낚시하는 모습만은 좋아라...유장경
醉月
2010. 10. 28. 08:48
유장경(劉長卿)은 5언시에 뛰어나 ‘오언장성(五言長城)’이란 칭호가 있고, 뛰어난 작품은 대부분 산수전원을 묘사한 작품이고, 그의 이력을 통해본다면 조어시가 상당히 많을 듯 하지만 그러질 못하다. 그의 이력을 대충 살펴보자.
그는 젊어서 숭산(嵩山)에서 독서하였지만 누차 낙방하였고, 국자감 제생이 되어 천보 후기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 낙양에서 강동으로 피난하였고, 지덕(至德)2년(756년)에 장주위(長洲尉)가 되었다가 3년만에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다.
사건으로 하옥되어, 상원(上元)원년(760년)에 남파위(南巴尉)로 폄적되었다. 2년 뒤에 돌아와 강남으로 유람을 떠났다. 대략 광덕(廣德)원년(762년)에서 대력(大曆)초까지 조정에 들어가 殿中侍御史(일설에는 감찰어사라 함)을 지냈다. 대력 4년(769년)에 검교사랑원외랑(檢校祠部員外郞)으로 전운사판관(轉運使判官),淮西의 知府,卾岳轉運이 되었다.
10년 뒤에 악주관찰사 오중유(吳仲孺)이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여 목주사마(睦州司馬)로 폄적되었다. 14년 뒤에 수주자사(隋州刺史)가 되었다. 건중(建中)3년(782년)에 회서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날을 일으켜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揚州)강양현(江陽縣) 수유촌(茱萸村)에 기거하였다. 대략 정원6년(790년)에 세상을 떴다.
그는 일생동안 두 번의 난을 겪었고, 두 번의 폄적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강남을 유람하기도 하고, 강남땅으로 폄적을 당했기에, 낚시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어시가 많지 않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정치적인 시련을 겪고서도 담담한 산수전원시를 그려내었는데, 낚시와 어부는 산수전원시의 일부로써 그가 동경하던 모습인 것 같다. 그의 낚시관련 시문은 방관자입장에서 산수화의 일부로써 낚시인과 어부를 담담하고 깨끗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물과 낚시에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同姜濬題裵式微餘干東齋(공강준제배식미여간동재)> 첫수
世事終成夢(세사종성몽), 세상 일은 결국 일장춘몽,
生涯欲半過(생애욕반과). 생애는 반이나 지나가려 하네.
白雲心已矣(백운심이의), 백운은 이미 흩어지려 하는데,
滄海意如何(창해의여하). 창해는 어떻게 되려는 것인가?
藜杖全吾道(려장전오도), 명아주 지팡이는 나의 길을 온전히 하고,
榴花養太和(류화양태화). 석류꽃은 太和의 기운을 양성하네.
春風騎馬醉(춘풍기마취), 봄바람에 취하여 말에 오르고,
江月釣魚歌(강월조어가). 강에 뜬 달빛에 釣魚歌를 부르네.
인생사 일장춘몽임을 작자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허무함을 어부나 낚시를 통해 달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창해와 조어가는 시속에 나오는 백운․명아주지팡이․석류꽃․봄바람과 다름이 아니다. 그는 바로 자연속에 묻혀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고픈 사람인 것이다. 조어시로써 평가받는 그의 <江中晩釣寄荊南一二識(강중만조기형남일이식)> 중 둘째 시를 보자.
一身已無累(일신이무루), 이 한몸 이미 얽매임이 없으니,
萬事更無慾(만사경무욕). 만사에 더욱 욕심이 없네.
漁父自夷猶(어부자이유), 어부는 저절로 마음이 평온하고,
白鷗不羈束(백구불기속). 하얀 갈매기는 얽매임이 없구나!
卽憐滄浪水(즉련창랑수), 창랑수를 가련타 여기며,
更愛滄浪曲(경애창랑곡). 창랑의 물굽이를 좋아하네.
垂釣看世人(수조간세인), 낚시를 드리우고 세상사람을 보면,
那知此生足(나지차생족). 어찌 이러한 인생의 족함을 알까?
이속에서는 어부의 마음과 낚시의 목적과 경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작자는 바로 이러한 경지를 추구한 것이지, 직접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잡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조어시는 고기를 잡는 구체적인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속세와는 구별된 한적하고 조용한 모습만을 읊고 있다.
정말 낚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낚시꾼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가 아니라 도를 넘는 비아냥도 서슴치 않는다. 저 땡볕에 무얼 얻으려고 저러고들 있나? 혹은 저녁낚시를 가려하면, 낚시가 뭐길래 잠안자고 저러나? 그러다가 귀신이나 만날라!
솔직히 말하면 이말들은 저의 자모께서 아들을 염려해서 극히 조심스럽게 하신 말씀이지만, 저의 모친도 신혼시절 엄친께서 낚시를 좋아하셨기에 그 어둡고 무서운 강길을 밥을 이고서 찾아가셨던 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낚시를 이해하지 못하시니 어쩌겠는가?
인생의 족함을 알고 욕심이 없는 그의 낚시는 그의 <贈湘南漁父(증상남어부)>에 드러난 어부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問君何所適(문군하소적),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할까?
暮暮逢煙水(모모봉연수). 저녁마다 안개낀 물을 만난다네.
獨與不繫舟(독여불계주), 홀로 배를 매지 않은데,
往來楚雲裏(왕래초운리). 초땅의 구름 속을 왔다갔다하네.
釣魚非一歲(조어비일세), 낚시한지 1년세월도 아니고,
終日只如此(종일지여차). 종일토록 다만 이와 같을뿐.
日落江淸桂楫遲(일락강청계즙지), 해가 지면 강이 맑은데, 계수나무 노를 천천히 젓고,
纖鱗百尺尋可窺(섬린백척심가규). 가늘고 은빛의 백척의 깊은 물길도 밑바닥이 보이네.
沈釣垂餌不在得(침조수이불재득), 드리워진 낚시바늘.미끼는 고기낚는 것에 있지 않고,
白首滄浪空自知(백수창랑공자지). 하얀 머리칼이 되도록 창랑에서 생활하면 저절로 알게 되네.
인생을 어떻게 살까? 바로 어부처럼 살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 또한 이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때돈을 벌려고 물고기의 씨를 말리면 그 다음부터 어부의 일에 손을 떼야 하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 잡고, 다음해를 기약하는 것이다.
우린 어릴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에서 그 이치를 이미 배웠지만 살다보면 깨달은 이치를 다시 잊고서 한없은 물욕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낚시터이야기가 떠오른다. 예전에 어느 낚시터에서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아 봄,가을낚시는 물론이거니와, 겨울에도 간혹 물낚시를 했던 적이 있고, 주변의 경치나 물도 깨끗하여 낚시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였다.
그런데 어느 핸가 얼음낚시를 하러 가니, 낚시를 안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는 그전 겨울에 얼음낚시로 수백대의 낚시차량이 몰렸고, 그 큰 낚시터엔 고기씨가 말라서 잠시 낚시를 안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부른 또 다른 하나의 재앙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욕심없는 어부처럼 살게되면 유장경의 <사회차양류과원팔소거(使回次楊柳過元八所居)> 마지막 구절에서 ‘한가한 대문 밖에서는 할 일이 없어, 어옹은 저녁마다 노래하네(無奈閑門外, 漁翁夜夜歌.)’는 것처럼 인생을 만족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유장경의 경우를 보면, 인생의 시련을 많이 겪었기에 초로의 나이에 벌써 인생이 一場春夢이란 사실을 깨달았는데, 자신의 시련을 술로써 달래며, 비관하여 일체 손을 놓았더라면 그는 더 이상 五言長城이란 명성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위안했는지, 백거이나 왕유처럼 불교도여서 낚시에 빠지지 않았는지, 아니면 객관적인 사실로써 산수전원의 모습을 관찰하려고 했는지, 알길이 없지만, 그는 낚시의 경지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젊어서 숭산(嵩山)에서 독서하였지만 누차 낙방하였고, 국자감 제생이 되어 천보 후기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 낙양에서 강동으로 피난하였고, 지덕(至德)2년(756년)에 장주위(長洲尉)가 되었다가 3년만에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다.
사건으로 하옥되어, 상원(上元)원년(760년)에 남파위(南巴尉)로 폄적되었다. 2년 뒤에 돌아와 강남으로 유람을 떠났다. 대략 광덕(廣德)원년(762년)에서 대력(大曆)초까지 조정에 들어가 殿中侍御史(일설에는 감찰어사라 함)을 지냈다. 대력 4년(769년)에 검교사랑원외랑(檢校祠部員外郞)으로 전운사판관(轉運使判官),淮西의 知府,卾岳轉運이 되었다.
10년 뒤에 악주관찰사 오중유(吳仲孺)이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여 목주사마(睦州司馬)로 폄적되었다. 14년 뒤에 수주자사(隋州刺史)가 되었다. 건중(建中)3년(782년)에 회서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날을 일으켜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揚州)강양현(江陽縣) 수유촌(茱萸村)에 기거하였다. 대략 정원6년(790년)에 세상을 떴다.
그는 일생동안 두 번의 난을 겪었고, 두 번의 폄적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강남을 유람하기도 하고, 강남땅으로 폄적을 당했기에, 낚시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어시가 많지 않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정치적인 시련을 겪고서도 담담한 산수전원시를 그려내었는데, 낚시와 어부는 산수전원시의 일부로써 그가 동경하던 모습인 것 같다. 그의 낚시관련 시문은 방관자입장에서 산수화의 일부로써 낚시인과 어부를 담담하고 깨끗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물과 낚시에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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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事終成夢(세사종성몽), 세상 일은 결국 일장춘몽,
生涯欲半過(생애욕반과). 생애는 반이나 지나가려 하네.
白雲心已矣(백운심이의), 백운은 이미 흩어지려 하는데,
滄海意如何(창해의여하). 창해는 어떻게 되려는 것인가?
藜杖全吾道(려장전오도), 명아주 지팡이는 나의 길을 온전히 하고,
榴花養太和(류화양태화). 석류꽃은 太和의 기운을 양성하네.
春風騎馬醉(춘풍기마취), 봄바람에 취하여 말에 오르고,
江月釣魚歌(강월조어가). 강에 뜬 달빛에 釣魚歌를 부르네.
인생사 일장춘몽임을 작자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허무함을 어부나 낚시를 통해 달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창해와 조어가는 시속에 나오는 백운․명아주지팡이․석류꽃․봄바람과 다름이 아니다. 그는 바로 자연속에 묻혀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고픈 사람인 것이다. 조어시로써 평가받는 그의 <江中晩釣寄荊南一二識(강중만조기형남일이식)> 중 둘째 시를 보자.
一身已無累(일신이무루), 이 한몸 이미 얽매임이 없으니,
萬事更無慾(만사경무욕). 만사에 더욱 욕심이 없네.
漁父自夷猶(어부자이유), 어부는 저절로 마음이 평온하고,
白鷗不羈束(백구불기속). 하얀 갈매기는 얽매임이 없구나!
卽憐滄浪水(즉련창랑수), 창랑수를 가련타 여기며,
更愛滄浪曲(경애창랑곡). 창랑의 물굽이를 좋아하네.
垂釣看世人(수조간세인), 낚시를 드리우고 세상사람을 보면,
那知此生足(나지차생족). 어찌 이러한 인생의 족함을 알까?
이속에서는 어부의 마음과 낚시의 목적과 경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작자는 바로 이러한 경지를 추구한 것이지, 직접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잡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조어시는 고기를 잡는 구체적인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속세와는 구별된 한적하고 조용한 모습만을 읊고 있다.
정말 낚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낚시꾼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가 아니라 도를 넘는 비아냥도 서슴치 않는다. 저 땡볕에 무얼 얻으려고 저러고들 있나? 혹은 저녁낚시를 가려하면, 낚시가 뭐길래 잠안자고 저러나? 그러다가 귀신이나 만날라!
솔직히 말하면 이말들은 저의 자모께서 아들을 염려해서 극히 조심스럽게 하신 말씀이지만, 저의 모친도 신혼시절 엄친께서 낚시를 좋아하셨기에 그 어둡고 무서운 강길을 밥을 이고서 찾아가셨던 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낚시를 이해하지 못하시니 어쩌겠는가?
인생의 족함을 알고 욕심이 없는 그의 낚시는 그의 <贈湘南漁父(증상남어부)>에 드러난 어부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問君何所適(문군하소적),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할까?
暮暮逢煙水(모모봉연수). 저녁마다 안개낀 물을 만난다네.
獨與不繫舟(독여불계주), 홀로 배를 매지 않은데,
往來楚雲裏(왕래초운리). 초땅의 구름 속을 왔다갔다하네.
釣魚非一歲(조어비일세), 낚시한지 1년세월도 아니고,
終日只如此(종일지여차). 종일토록 다만 이와 같을뿐.
日落江淸桂楫遲(일락강청계즙지), 해가 지면 강이 맑은데, 계수나무 노를 천천히 젓고,
纖鱗百尺尋可窺(섬린백척심가규). 가늘고 은빛의 백척의 깊은 물길도 밑바닥이 보이네.
沈釣垂餌不在得(침조수이불재득), 드리워진 낚시바늘.미끼는 고기낚는 것에 있지 않고,
白首滄浪空自知(백수창랑공자지). 하얀 머리칼이 되도록 창랑에서 생활하면 저절로 알게 되네.
인생을 어떻게 살까? 바로 어부처럼 살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 또한 이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때돈을 벌려고 물고기의 씨를 말리면 그 다음부터 어부의 일에 손을 떼야 하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 잡고, 다음해를 기약하는 것이다.
우린 어릴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에서 그 이치를 이미 배웠지만 살다보면 깨달은 이치를 다시 잊고서 한없은 물욕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낚시터이야기가 떠오른다. 예전에 어느 낚시터에서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아 봄,가을낚시는 물론이거니와, 겨울에도 간혹 물낚시를 했던 적이 있고, 주변의 경치나 물도 깨끗하여 낚시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였다.
그런데 어느 핸가 얼음낚시를 하러 가니, 낚시를 안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는 그전 겨울에 얼음낚시로 수백대의 낚시차량이 몰렸고, 그 큰 낚시터엔 고기씨가 말라서 잠시 낚시를 안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부른 또 다른 하나의 재앙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욕심없는 어부처럼 살게되면 유장경의 <사회차양류과원팔소거(使回次楊柳過元八所居)> 마지막 구절에서 ‘한가한 대문 밖에서는 할 일이 없어, 어옹은 저녁마다 노래하네(無奈閑門外, 漁翁夜夜歌.)’는 것처럼 인생을 만족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유장경의 경우를 보면, 인생의 시련을 많이 겪었기에 초로의 나이에 벌써 인생이 一場春夢이란 사실을 깨달았는데, 자신의 시련을 술로써 달래며, 비관하여 일체 손을 놓았더라면 그는 더 이상 五言長城이란 명성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위안했는지, 백거이나 왕유처럼 불교도여서 낚시에 빠지지 않았는지, 아니면 객관적인 사실로써 산수전원의 모습을 관찰하려고 했는지, 알길이 없지만, 그는 낚시의 경지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