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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는 장비스럽게 여자 문제를 해결했다. 단순 무식하게 민간인 부녀자를 약취하거나 전쟁포로 중에서 골라 그때그때 욕구를 해소했다.
장비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와 부부관계를 맺었다. 서로 숙적 관계였던 유비와 조조의 진영에 속해있던 장비와 하후연이 어찌 인척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정상적 결혼이 아니라 약탈혼이었다.
건안5년(200년)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장비는 종종 별동대를 이끌고 패국 일원으로 약탈을 나가곤 했다. 패국 초현은 원래 조조와 하후연의 고향이었다. 조씨와 하후씨의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하후연의 조카딸 하나가 패국에 살았는데 당시 나이가 불과 13~14세였다. 동네 친구들과 들로 나물을 캐러 나갔다가 약탈을 나온 장비에게 붙잡혔다. 장비는 그녀가 양가집의 규수인 것을 알고 처로 삼았다.
이런 연유로 장비는 본의 아니게 하후연의 조카사위가 됐다. 하후연은 실제로는 조조와 친척지간이면서도 성씨가 달랐으므로 서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하후연의 처는 조조의 누이동생이었고, 하후연의 장자 하후형은 조조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비의 엉뚱한 짓 덕분에 유비는 조조와 먼 인척관계를 맺은 셈이었다. 유비는 장비와 형제지간의 의를 맺었으니 말이다.
후일 장비의 딸이 후주 유선의 정실부인이 됨으로써 유비와 하후연은 정식으로 인척관계가 됐다. 비록 하후연이 정군산에서 유비군에게 패사한 이후의 일이였지만 말이다. 장비의 딸들은 하후씨를 닮아 매우 빼어난 미인이었던 듯하다. 장비의 두 딸이 모두 유선의 황후가 됐다.
하후연의 둘째 아들 하후패는 일찍이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자진해서 *정촉호군이 되어 관중에 주둔했다. 후일 쿠데타로 집권한 사마씨 부자에게 조상의 일파로 몰리게 되자 하후패는 촉에 망명했다. 유선이 하후패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의 부친은 전장에서 해를 당했을 뿐이지 나의 선친이 손수 참수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이 아이들은 하후씨의 외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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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영웅] 장비, 윗사람에게 간·쓸개 빼주고 아랫사람을 매질하다
장비(A.D ?~221)는 본시 탁군의 건달 출신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가 개백정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근거는 없다. 아마도 이미지가 비슷했던 유방의 용장 *번쾌의 직업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리라. 당연히 정사에는 도원결의에 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장비는 탁현 시절부터 관우와 더불어 유비를 섬겼으며, 관우가 몇 살이 위였으므로 관우도 형으로 모셨다는 정도이다.
장비는 체격이 웅장하고 용맹했다. 그의 이름이 '날 비(飛)'자였던 것으로 보아 매우 날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무용은 관우에는 조금 못 미쳤다고 한다. 일찍이 위나라의 책사 정욱이 장비를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장수'라 칭찬했다. 그러나 정욱이 개인적으로 장비를 알고서 이와 같이 말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관우의 허풍을 믿고서 이런 말을 했었을 것이다. 관우가 백마싸움에서 일만 명의 군중을 뚫고 들어가 원소의 상장 안량의 목을 단칼에 베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의 무용을 칭송했다. 그때 관우가 큰소리를 쳤다.
“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오. 나의 동생 장비는 적장의 목을 베기를 마치 소매 속에 든 물건 꺼내듯이 한다오.”
이 말을 믿은 조조는 수하의 장수들에게 장비의 이름을 옷깃에 적어두도록 했다고 한다. 혹시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면 무조건 피하라고.
장비가 당양·장판의 싸움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다 이와 같은 잘못된 정보의 덕을 본 바가 컸다. 조조가 형주의 경내로 진격하자 유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남을 향해 도주했다. 조조는 밤낮으로 하루 만에 300리를 달려 당양·장판에서 유비의 도주 행렬을 뒤따라 잡았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도주하면서 장비를 시켜 2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후방을 차단하게 했다. 장비는 장판교를 끊고 물가에서 적을 막았다.
이때 기습에 나선 조조의 선봉부대는 조인의 동생 조순이 이끄는 호표기였다. 호표기는 조조의 최정예 기병부대로서 위명이 높았다. 호표기를 위시한 조조의 장수들이 몰려들자 장비가 겁도 없이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장익덕이다. 누구든지 건너와라. 나와 목숨을 걸고 한번 싸워보자!”
호표기와 조조의 장수들은 장비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장비의 기세에 눌린 조조의 장병들은 아무도 감히 도하를 시도하지 못했다. 이로써 유비는 위기를 모면했고 장비는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장비는 유비를 따라 종군하면서 수많은 전장을 누볐지만, 본질적으로 용맹한 무사였지 훌륭한 군사지휘관은 아니었다. 그의 무모함은 유비를 심각한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유비가 서주를 놓고 원술과 대결을 벌이게 되었을 때, 자신의 본거지인 하비성의 수비를 장비에게 맡겼다. 나이 불과 28세에 팔팔한 성격의 장비는 하비상 조표와 마찰을 일으켜 그를 죽여버렸다. 이 사건은 유비가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미숙함으로 인해 당시의 사대부들은 장비를 일개 무사로 보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당대의 명사 중 하나인 유파와의 일화를 살펴보자. 장비는 관우와 달리 사대부들을 존경하고 우대했다.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은 직후, 장비는 성도에 거주하던 유파의 숙소로 찾아왔다. 평소에 유파의 명성을 흠모한 장비가 그와 교유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유파는 찾아온 손님을 앞에 두고 말을 나누려고 하지도 않았다. 장비가 이 일로 몹시 분해 유파를 원망했다. 제갈량이 유파에게 권유했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귀하를 경모하고 있소. 우리 주공께서는 방금 문무의 인재를 두루 모아 천하의 큰 일을 이루고자 하는데 귀하는 비록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다고는 하나 마땅히 뜻을 조금 낮추어야 할 것이오.”
유파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대장부가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 마땅히 사해의 영웅들과 교유해야 하거늘, 어찌 일개 병졸과 함께 말을 터야 한다는 말이오?”
이처럼 일개 병졸로 취급받던 장비도 경험이 쌓여가면서 장수로서의 역할도 제법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나 보다. 그가 촉을 정복할 때 엄안을 사로잡은 일이나, 장합과 싸워 파서군을 지킨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장비는 사대부를 존경했던 반면에 자기와 출신성분이 같았던 수하 장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를 걱정해 장비를 타이르곤 했다.
“경은 형벌과 처형이 지나치오. 또 매일 측근에 있는 건아들을 채찍질하니 이는 화를 부르는 길이오.” 과연 장비는 막하의 장수들인 범강과 장달에게 피살됐다.
[거짓말 벗겨보기] 독우를 매질한 건 장비가 아니라, 유비
유비가 안희현위가 됐을 때 군에서 독우(감독관)가 내려와 유비를 거만하게 대했다. 술에 취한 장비가 독우를 붙잡아 매질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나 사실과 전혀 다르다. 독우를 붙잡아 매질한 사람은 유비였다. 이처럼 무모한 짓은 유비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야기를 조작한 것이다. 장비로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다.
장각, 신흥종교지도자에서 역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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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각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장각의 꿈은 단순했다. 보다 더 나은 세상, 고통과 굶주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장각은 거록군 출신의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가 어떻게 태평교단에 가입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당시 우길의 태평도가 크게 흥성해 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만큼 장각이 이 가르침에 쉽게 접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장각은 입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포교에 나섰다. 가시밭길과도 같은 고생길이었다. 따르는 신자가 없어 탁발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각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정성껏 돌보았다. 세상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흉년이 겹쳐 먹고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랑민이 됐다. 도적이 판을 치자 선량한 사람들은 더욱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역병이 창궐했다. 인심도 각박해졌다.
장각은 남을 도왔다. 굶주리면서도 탁발한 음식을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았다. 약초를 캐어 환약과 약물도 만들어주고 정성껏 치료했다. 주변에 친척이 없어 상을 치를 능력이 없는 고아들이나 과부들을 위해 상례를 치러주었다.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도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 속에 있었기에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눈길이 따스했다.
점차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장각은 남는 물질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병든 환자들을 무료로 돌보아 주었다. 장각이 배운 태평도에는 심신을 다스리는 법과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지식이 담겨 있었다. 어느덧 장각의 도가 용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중한 질병에 걸려도 장각의 교당에 가서 기도하고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많은 환자들이 장각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장각이 신통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교세가 확장됐다.
태평교단은 무섭게 성장했다. 날마다 수천 명씩 교도가 늘어났다. 전국에 신도가 수십만에 달해 하나의 조직으로는 관리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군 단위로 대방과 소방을 두어 교단을 관리하게 했다. 대방은 신도가 일만, 소방은 수천에 달했다. 각 방의 우두머리들은 '방주' 또는 '거수'라 했다. 전국에 방이 36개로 신도가 수십만에 달했다. 장각이 득도를 한 후, 태평도라는 독자 교단으로 포교를 한 지 불과 십수 년만이었다.
장각의 교세가 너무 커지니 본의 아니게 조정과 지방의 관원들에게 의심을 받게 됐다. 사도 양사가 소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각의 태평도를 해산할 것을 주청했다. 사도부의 관리 유도도 장각의 무리를 처벌할 것을 상주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자 교단 내에서는 봉기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교단을 확장하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그 와중에 권력과 재물 욕심에 눈이 어두운 기회주의자들이 너무 많이 조직에 들어와 있었다. 이들 중에 간이 큰 자들은 교단의 증대된 세력에 편승해 세상의 권력을 훔치는 일까지도 손을 대고자 했다. 민중의 고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확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일은 장각으로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장각은 세상을 구제하려 했다. 장각의 초심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세상을 구제하려던 그가 결국은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게 됐다. 장각이 허영심과 욕망에 져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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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은 태평교도들이 중심이 돼 일어났다. 태평교도들은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것으로 표식을 삼았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황건교도'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태평도가 장각(A.D ?~184)이 창안한 신흥종교인 줄 안다. 그러나 태평도는 장각 이전부터 존재했다. 태평도는 우길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원래 우길은 후한 순제(A.D 125∼144) 시절의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도를 터득해 ‘태평청령서’ 수백 권을 저술해 가르쳤다. 세상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 책 이름을 따서 '태평도'라 했다.
우길의 가르침은 산동지방에 뿌리가 깊은 선도와 방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원래 선도의 뿌리는 원시 수렵채취 부족의 지식과 기억의 총합에서 비롯됐다. '선(仙)'이라는 글자는 '산(山)' 자와 '사람 인(人)' 자가 결합된 것으로 산사람을 의미했다. 선도란 산악을 무대로 생활하던 원시 수렵채취 부족이 생존을 위해 습득한 지식의 총합을 말하는 것으로 생물의 생육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모두 아울렀다. 이것이 나름대로 체계화, 추상화 된 것이 선도로서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방술 또한 '방(方)' 자의 뜻이 사건과 사상에 딱 들어맞는 해결 방법을 의미하고, '술(術)' 자가 이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기술을 의미하듯이 자연현상에서 어떤 규칙성을 찾아내어 일상에 적용하려는 일종의 자연과학적 지식이었다. '경방술(經方術: 의술)' '방중술(房中術: 성생활 증진법)' '신선술(神仙術: 불로장생의 방법)' 등이 다 방술의 한 유파이다.
우길은 신선술과 방술을 기반으로 태평도를 만들었다. 우길의 태평도에서 영향을 받아 장각의 태평교와 장릉의 *오두미교가 갈라져 나왔다. 교단체계가 확립되기 이전에 장각과 장릉은 태평도에 입도했고, 나름대로 이를 변형 발전시켜 새로운 교파를 창립했다. 장각의 태평교는 황건적의 난으로 절멸되었으나, 장릉의 오두미교는 그의 손자 장노로 이어져 천사교가 되었다. 천사교는 후일 사상적 체계화를 위해 *황로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도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신선술과 방술의 원류가 되는 선도는 원래 동이의 사상체계였다. 선도와 방술이 산동성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고, 태평도의 창시자인 우길도 산동성과 강회지방을 주무대로 포교활동을 펼쳤다. 이 지방들을 포괄하는 발해만이 동이문화권이었고, 바로 선도의 발생지였다. 따라서 신라의 화랑도에서 말하는 '국선도'와 도교의 원류가 되는 '선도'는 뿌리가 같다. 물론 도교는 그 후 여러 가지 다른 교리와 사상을 흡수해 다른 형태로 변용되었지만.
중국 상해 황푸공원에서 시민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다. 장각의 태평교는 태극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짓말 벗겨보기] 장각이 남화노선에게 받았다는 그 책은?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산에서 약초를 캐던 장각이 우연히 남화노선이라는 도사를 만나 '태평요술'이라는 책을 얻어 득도했다고 한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다. 재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역사적 기록에는 '남화노선'이란 사람이나 '태평요술'이란 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각은 우길의 태평도의 무리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그가 읽은 책도 우길의 '태평청령서'였을 것이다.
*오두미교=후한 말기 태평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를 이룬 종교. 기도로 병을 고쳐주고 그 사례로 쌀 다섯 말을 받았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됐다.
*황로사상=중국 고대의 여러 사상과 신앙전통을 황제와 노자의 이름 아래 융합한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