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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과 緣起_서대원
醉月
2012. 1. 15. 15:36
[한글 요약]
독백(獨白)은 혼잣말이고 대화(對話)는 둘 이상이 이야기함을 말한다. 독백은 특별한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속내를 계산 없이 드러내는 언어인 반면에 대화는 여러 조건을 구비해야 성립되며 대화의 결과 대화 이전의 '내[我]'가 아닌 새로운 '내[我]'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본 논문은 위진시기 혹은 그 사상의 영향권에 있는 시기에 이루어진 '자연(自然)'과 '연기(緣起)'의 대화 및 그 대화의 결과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학의 '자연'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의 '연기'간의 대화가 고찰대상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불교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緣起說은 불교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핵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바로 불교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 변화라 할 수 있다. 둘째, 中國이 나름대로 佛敎를 수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본 논문은 위진시기 혹은 그 사상의 영향권에 있는 시기에 이루어진 '자연(自然)'과 '연기(緣起)'의 대화 및 그 대화의 결과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학의 '자연'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의 '연기'간의 대화가 고찰대상이다.
현학에서 말하는 '자연'은 '궁극적 무인(無因)'을 말하며 반야사상의 연기는 '본질적 유인(有因 : 의존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사상이 같은 시기에 유행하였으니 대화와 갈등 그리고 변화가 없을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이런 대화와 갈등 그리고 변화를 주세경(朱世卿) · 석진관(釋眞觀) · 심약(沈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즉 '자연'과 '연기'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자연(自然)'이 '연(緣 : 조건)'에 따라 발생[起]한다는 유형의 사유방식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사유방식은 사실상 이들보다 조금 앞선 축도생(竺道生)에서 이미 보여진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불교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緣起說은 불교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핵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바로 불교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 변화라 할 수 있다. 둘째, 中國이 나름대로 佛敎를 수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주제분야 : 중국철학, 위진철학, 도불교섭
주 제 어 : 자연(自然), 연기(緣起), 위진시기, 축도생(竺道生), 불성(佛性), 법신(法身), 감응(感應)
주 제 어 : 자연(自然), 연기(緣起), 위진시기, 축도생(竺道生), 불성(佛性), 법신(法身), 감응(感應)
1. 들어가는 말
독백(獨白)은 혼잣말이고 대화(對話)는 둘 이상이 이야기함을 말한다. 독백은 특별한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속내를 계산 없이 드러내는 언어인 반면에 대화는 여러 조건을 구비해야 성립된다. 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남이 필요하고, 둘째 동일하거나 유사한 관심분야가 있어야 하고, 셋째 서로가 인접한 시공간 안에 있어 서로를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화의 결과 대화 이전의 '내[我]'가 아닌 새로운 '내[我]'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과 '연기'는 이 대화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첫째, 상이한 사유체계이다. 즉 서로 남남의 관계이다. 둘째, 모두 존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모두 실상(實相 :dharmat , bh ta-tathata ; the reality of things)에 대한 논의이다. 셋째, 유사한 시공간에서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後漢 明帝 永平 10년(67년)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졌다고 하나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시기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의 중국 사상계를 살펴보면, 중국의 내부에서 발생한 학술 중에서는 玄學이 유행하고 있었고 외래 사상 중에서는 鳩摩羅什(kum rajiva :344-413)의 宣揚에 힘입어 반야사상이 불교사상의 正統地位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서로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논문은 위진시기 혹은 그 사상의 영향권에 있는 시기에 이루어진 '자연(自然)'과 '연기(緣起)'의 대화 및 그 대화의 결과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학의 '자연'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의 '연기'간의 대화가 고찰대상이다.
'자연'과 '연기'는 이 대화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첫째, 상이한 사유체계이다. 즉 서로 남남의 관계이다. 둘째, 모두 존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모두 실상(實相 :dharmat , bh ta-tathata ; the reality of things)에 대한 논의이다. 셋째, 유사한 시공간에서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後漢 明帝 永平 10년(67년)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졌다고 하나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시기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의 중국 사상계를 살펴보면, 중국의 내부에서 발생한 학술 중에서는 玄學이 유행하고 있었고 외래 사상 중에서는 鳩摩羅什(kum rajiva :344-413)의 宣揚에 힘입어 반야사상이 불교사상의 正統地位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서로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논문의 고찰대상은 이들 간의 대화와 그 결과이지만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화이전의 각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하고 오랜 기간의 대화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작은 편폭의 논문에서 허용되어질 수 없으므로 본 논문에서 필자는 단지 몇 개의 독백과 약간의 대화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 과정과 결과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2. 自然
王弼(226-249)과 郭象(252-312)의 자연관은 현학의 자연관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왕필에 대해 살펴보자.
왕필에 의해 이해되는 '자연'은 왕필의 유무관(有無觀) 및 형명학(刑名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有)'는 존재와 존재자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왕필에 의하면 이와 같은 '유'는 '유'의 진정한 근거 혹은 원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는 어떤 존재자 혹은 존재로서 이것은 이것일 뿐 저것이 될 수 없고 저것은 저것일 뿐 이것이 될 수 없어 자기 이외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필에 의해 이해되는 '자연'은 왕필의 유무관(有無觀) 및 형명학(刑名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有)'는 존재와 존재자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왕필에 의하면 이와 같은 '유'는 '유'의 진정한 근거 혹은 원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는 어떤 존재자 혹은 존재로서 이것은 이것일 뿐 저것이 될 수 없고 저것은 저것일 뿐 이것이 될 수 없어 자기 이외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大象은 天象의 어미이다. 춥지 않고 따뜻하지 않고 서늘하지 않다. 그러므로 만물을 아우르면서도[包統 : 포함하고 통괄함] 범하여 다치게 하지 않는다.
진리란 만물을 모두 포함하고 통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왕필은 오직 '무'만이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
왕필이 말하는 '무'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유의 세계에 있는 만물은 모두 자기의 개별성 즉 특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아우를 수 없고 그래서 타자의 진정한 이유나 근거, 더 나가 모든 존재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무는 이 비규정성 때문에 此物과 彼物의 원인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만물 즉 유의 원인근거가 된다. 비규정적인 無야말로 진리이다. 왕필은 자기의 이 유무관을 형명학에 의거하여 표현한다. 왕필 형명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名號, 稱謂, 無稱이다. 우선 이 중 명호의 원칙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호는 형상에서 생겨난다. (名號生乎形狀.)
명호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다. (名也者, 定彼者也.)
명호는 대상에서 생겨난다. (名生乎彼.)
명호는 근거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名號不虛生.)
무릇 명호가 형상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형상이 명호에서 생겨나는 것은 없다. (凡名生於形, 未有形生於名者也.)
명호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다. (名也者, 定彼者也.)
명호는 대상에서 생겨난다. (名生乎彼.)
명호는 근거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名號不虛生.)
무릇 명호가 형상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형상이 명호에서 생겨나는 것은 없다. (凡名生於形, 未有形生於名者也.)
이 원칙을 다시 요약하면 "명호는 형상을 지정하는 것이다[名以定形]"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형상이란 유의 세계에 있는 만물만사를 말하는 것으로 결국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오는 존재 혹은 존재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존재자는 개별성·특수성으로서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호란 바로 유의 세계를 말하는 언어이다.
그럼 다음으로 칭위의 원칙과 몇 개의 예문을 살펴보자.
칭위란 위를 따르는 것이다. (稱也者, 從謂者也.)
칭위는 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이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를 섭구하면 '道'라고 칭위하고, "모든 신묘함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를 섭구하면 '玄'이라 칭위한다. (稱出乎我, 故涉之乎無物而不由, 則稱之曰道, 求之乎無妙而不出, 則謂之曰玄.)
칭위는 섭구에서 나온다. (稱謂出乎涉求.)
칭위는 근거 없이 생기지 않는다. (稱謂不虛生.)
'道'란 것은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다"를 취한 것이다. (道也者, 取乎萬物之所由也.)
'玄'이란 것은 "알 수 없는 작용이 나오는 곳이다"를 취한 것이다. (玄也者, 取乎幽冥之所出也.)
칭위는 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이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를 섭구하면 '道'라고 칭위하고, "모든 신묘함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를 섭구하면 '玄'이라 칭위한다. (稱出乎我, 故涉之乎無物而不由, 則稱之曰道, 求之乎無妙而不出, 則謂之曰玄.)
칭위는 섭구에서 나온다. (稱謂出乎涉求.)
칭위는 근거 없이 생기지 않는다. (稱謂不虛生.)
'道'란 것은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다"를 취한 것이다. (道也者, 取乎萬物之所由也.)
'玄'이란 것은 "알 수 없는 작용이 나오는 곳이다"를 취한 것이다. (玄也者, 取乎幽冥之所出也.)
칭위란 명호와 달리 무형 즉 무의 세계에 대한 언어이다. 명호는 존재자의 특성 즉 형상에 의거하여 나타내는 언어인데, 무형은 이런 존재자의 특성(즉 형상)이 없기 때문에 명호의 방법으로 표현되지 않고 칭위의 방법을 사용하여 표현되어질 수밖에 없다. 즉 무형을 아는 사람[我]이 이 진리의 어떤 특성[謂]을 가져다가[涉求, 取] 만들어내는 것이 칭위이다.
그럼 이제 '自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연이란 것은 무칭의 언어이고 궁극의 단어이다. (自然者, 無稱之言, 窮極之辭也.)
무릇 사물에 칭위가 있거나 명호가 있는 것은 궁극이 아니다. (만약) '道'라고 말한다면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란 의미가 있고,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란 의미가 있어야만 '道'라고 칭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道'는 칭위 중의 큰 것이니 무칭의 큰 것만 같지 않다.
무릇 사물에 칭위가 있거나 명호가 있는 것은 궁극이 아니다. (만약) '道'라고 말한다면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란 의미가 있고,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란 의미가 있어야만 '道'라고 칭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道'는 칭위 중의 큰 것이니 무칭의 큰 것만 같지 않다.
왕필이 보기에 '자연'은 바로 무칭이다. 유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자기를 넘어서는 존재자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유를 표현하는 언어인 명호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언어가 된다. 칭위는 비록 무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기에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진리의 어떤 국부적인 특성을 나타낼 뿐 그 자체를 통체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또한 '窮極'이 될 수 없다.
곽상의 자연관도 또한 그의 유무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곽상이 생각하는 유무는 왕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여기에서 자연이 탄생한다. 왕필이 보기에 '자연'이란 謂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를 통체로 표현하는 궁극적인 言辭이다. 즉 진리 그 자체이다. 왕필의 논리에서 보면 無도 또한 無形無名을 위로 취하여 이루어진 칭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무'는 자연의 한 특성이다. 이 모든 칭위를 가능하게 하는 진리의 당체(當體)가 바로 자연이다.
곽상의 자연관도 또한 그의 유무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곽상이 생각하는 유무는 왕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無는 이미 없음이니 有를 낳을 수 없다. 有가 아직 생겨나기 이전은 또한 생겨남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생겨남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塊然이 절로 생길 뿐이다. 무란 본래 '없음'이란 의미이니 '있음'을 만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유가 아직 생겨나지 않음'도 결국 '없음'을 의미하니 마찬가지로 '생겨남'이 될 수 없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곽상이 말하는 무는 왕필과 같은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存在無 즉 존재의 결핍으로서의 무를 지칭한다.
이 논의는 일차적으로 존재가 존재로 있게 함, 생겨남을 생겨나게 함은 '무'에 의한 것일 수 없고 그것은 유에서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적 맥락에서 곽상은 '自生'을 주장한다. 자생이란 '절로 생겨남'을 말한다. 그리고 무가 유를 생할 수 없음은 동시에 유도 또한 무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저 유라는 것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그 중) 한 번도 무가 될 수 없다. 한 번도 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자고이래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때는 없이 항시 존재한다.
유가 이처럼 상존한다면 '자생'을 말할 수 있을까? '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곽상의 사유에 따른다면 '유'와 '유의 변화'만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이유로 곽상의 자생설은 필연적으로 변화의 설명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獨化說이라 한다.
'독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고찰하기 위해 곽상의 '유' 즉 '물'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독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고찰하기 위해 곽상의 '유' 즉 '물'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無는 이미 없음이니 有를 낳을 수 없다. 有가 아직 생겨나기 이전은 또한 생겨남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생겨남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塊然이 절로 생길 뿐이다. 자생일 뿐이니 내가 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남[物]을 생할 수 없고, 남[物]도 또한 나를 생할 수 없다.
이 인용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곽상이 생각하는 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는 즉 물이며 곽상이 말하고 있는 자생과 독화는 모두 이 물의 자생과 독화이다.
모든 존재의 양태가 각기 달라 조물주[眞宰]같은 것이 이렇게 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실제로 조물주의 자취를 추적해보면 또한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물이 모두 자연이어서 물을 이렇게 저렇게 시키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대저 {莊子}와 {老子}에서 자주 '無'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物을 생하게 하는 것은 無物이어서 物이 自生함을 밝힌 것이다.
대저 {莊子}와 {老子}에서 자주 '無'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物을 생하게 하는 것은 無物이어서 物이 自生함을 밝힌 것이다.
즉 '物自生'이 "나는 이미 남[物]을 생할 수 없고, 남[物]도 또한 나를 생할 수 없다."는 각도에서 보면 바로 '독화'이다. 곽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각자의 물은 '나[我]'라고 말한다. 바로 앞의 "나[我]는 이미 남[物]을 생할 수 없고, 남[物]도 또한 나[我]를 생할 수 없다."가 바로 이 예인데, 역으로 '남[物]'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남이 내가 되고 내가 남이 되니 결국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나[我]'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함을 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塊然하게 자생할 뿐이다. 절로 생길 따름이니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 그렇다면 나는 자연이다. 자기가 그러한 것이니 이것을 천연이라 한다. 천연이니 이유가 없다. 그래서 '天'으로 말을 한 것이다. '天'으로 말을 한 것은 그 자연을 밝힌 것이다.
곽상이 '自生'이라 할 때 최소한 두 가지를 배제한다. 첫째 無가 有를 生함이고, 둘째 彼物이 此物을 生함이다. 만약 위 인용문 중 "나는 자연이다. 자기가 그러한 것이니 이것을 천연이라 한다."만을 근거로 말한다면 '自生'의 의미는 物이 物됨과 我가 我됨의 원인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상황이 배제된 다음 자기내부에 있음을 지칭하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곽상의 논리는 我(혹은 物)의 존재근거가 我에 있는 "我生我"의 구조가 되어야 하지만, 위 예문에서 보듯이 곽상은 '自生'을 설명함에 또한 '我生'을 부정한다. 즉 "非我生"이다.
만약 그렇다면 곽상의 논리는 我(혹은 物)의 존재근거가 我에 있는 "我生我"의 구조가 되어야 하지만, 위 예문에서 보듯이 곽상은 '自生'을 설명함에 또한 '我生'을 부정한다. 즉 "非我生"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을 얻어 존재하는 것은 밖으로는 道에 의뢰하지 않고 안으로는 자기에 말미암지 않아서 掘然히 존재하여 독화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안으로 자기에 말미암지 않음"의 의미이다. 곽상은 物의 物됨 혹은 我의 我됨의 원인이 物이나 我의 내부(즉 각자의 내부)에 있음도 분명히 부정하고 있다. 나 자신 혹은 나의 내부의 어떤 것도 나 자신의 원인이 아니며 나의 지각이나 욕망·바램도 물론 物이 物됨 혹은 我가 我됨과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自生'이나 '독화'는 無에서 物이 나옴, 彼物에서 此物이 나옴, 此物에서 此物이 나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모두 부정하는 이론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自生'이나 '독화'는 無에서 物이 나옴, 彼物에서 此物이 나옴, 此物에서 此物이 나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모두 부정하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物' 즉 '我'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곽상에 여기에서 自然을 이야기한다.
死生과 出入이 모두 홀연히 절로 그러하여 원인이 없다. 그러므로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여기에서 '死生과 出入'이란 '物'의 천변만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홀연히 절로 그러하여 원인이 없음( 然自爾, 無所由)"은 매우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自爾'는 '自然'과 동의어이며 그 구체적 의미는 '無所由'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은 바로 '이유 혹 근거가 없음'이다. 곽상이 보기에 만물은 모두 이유 없이 돌연히 어떠한 物로 되는데 여기에서의 '어떠함'이 바로 '자연' 혹은 '천연'이다.
왕필과 곽상의 자연에 대한 독백을 분석해 보았다. 이 둘의 자연관을 다시 '실상'이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왕필이 말하는 '자연'은 그의 유무관 및 형명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유무관은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고 형명학은 그 실상을 드러내는 언어와 관련이 있다. 이 중 실상만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자연은 모든 '有'의 원인 및 근거가 되는 무형무명한 어떤 것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왕필과 곽상의 자연에 대한 독백을 분석해 보았다. 이 둘의 자연관을 다시 '실상'이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왕필이 말하는 '자연'은 그의 유무관 및 형명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유무관은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고 형명학은 그 실상을 드러내는 언어와 관련이 있다. 이 중 실상만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자연은 모든 '有'의 원인 및 근거가 되는 무형무명한 어떤 것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연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지만 그 자신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날카로운 것은 무디게 해 주면서도 (스스로는) 손상되지 않고, 紛亂한 것은 풀어주면서도 (스스로는) 수고롭지가 않고, 빛을 누그러뜨리되 그 體를 더럽히지 않고 티끌과 같이하되 그 참됨을 변치 않는다.
가는 곳에 따르지 않아 그 체가 홀로 서 있다.
가는 곳에 따르지 않아 그 체가 홀로 서 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설명으로 '그[其]'는 '자연'을 지칭한다. 이 표현을 "모든 유는 無에서 생겨난다(凡有生於無)"와 비교해보면 자연이란 시공 안의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그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란 이것에 대한 형명학적 표현에 불과하다.
곽상에 의하면 만물 각각의 我는 無 我, 彼我 此我, 我 我 가 아니다. 즉 '독화'이다. 이 독화 중 '아무 이유 없이' 발생하여 갖추어져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無所由'이다.
이와 같이 보면 이 두 가지는 모두 '窮極的 無因'을 설정하는 주장이다.
자연은 바로 '無因'이다.
곽상에 의하면 만물 각각의 我는 無 我, 彼我 此我, 我 我 가 아니다. 즉 '독화'이다. 이 독화 중 '아무 이유 없이' 발생하여 갖추어져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無所由'이다.
이와 같이 보면 이 두 가지는 모두 '窮極的 無因'을 설정하는 주장이다.
자연은 바로 '無因'이다.
3. 緣起
구마라습의 사상은 용수의 중관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용수의 緣起觀을 살펴보겠다. {중론·관사제품}의 일부[空假中偈]를 보자.
구마라습 한역본 : ①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②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月稱 산스크리트어본 : ①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②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月稱 산스크리트어본 : ①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②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위 인용문 중 '衆因緣生法'은 바로 '緣起'를 말한다. 이 인용문을 볼 때 '연기'는 '無(즉 空)', '假名', '中道'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보자.
吳汝鈞 선생의 분석에 의하면, ②의 주어인 's '는 여성단수를 지칭하는 대명사이고 ①의 ' nyat [空]'가 여성단수이다. 그러므로 ②구의 주어는 '衆因緣生法'인 '연기'가 아니고 '空'이다. 그리고 ②구의'up d ya'는 '…이기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이에 의거해 위 구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吳汝鈞 선생의 분석에 의하면, ②의 주어인 's '는 여성단수를 지칭하는 대명사이고 ①의 ' nyat [空]'가 여성단수이다. 그러므로 ②구의 주어는 '衆因緣生法'인 '연기'가 아니고 '空'이다. 그리고 ②구의'up d ya'는 '…이기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이에 의거해 위 구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러 가지의 인과 연에 의해 생기하는 것, 나[佛]는 그것을 無[空]라 한다.
② 그것은 (즉 공은) 또한 假名이니 (가명이기 때문에) 중도의 이치이다.
② 그것은 (즉 공은) 또한 假名이니 (가명이기 때문에) 중도의 이치이다.
연기가 바로 공인데 공이 가명이고 중도임을 말하고 있다. 이 순서에 의거해 살펴보자.
여지껏 그 어떤 것도 인연에 의해 생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연과 공은 어떤 관계인가? {大智度論}에서는 수차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因緣의 화합에 따라 생기한다면 이(렇게 생기한)것은 自性이 없다. 만약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空이다." '空'은 바로 '無自性'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自性[svabh va]은 상주불변하는 실체를 말하는데 상주불변하는 실체란 저절로 존재하는 존재[自在之物]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자성'이란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혹은 '저절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음'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무자성에서 무슨 인연화합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인연화합이란 무엇인가들의 인연화합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위에서 사용하는 '無[空]'는 '空無自性'의 의미이니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무자성에서 무슨 인연화합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인연화합이란 무엇인가들의 인연화합이 아니겠는가?
여러 인연 가운데 그 자성이 있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자성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자성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 이름해야 한다. 자성이 만약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찌 svabh va[自在]의 의미가 있겠는가!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이름한 것이니 다른 것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중론}에 의하면 '무엇인가들의 인연화합'은 '연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엇'들도 사실상 인연에 의해 이루어져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무엇'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 이 '無'나 '空'은 '有'나 '色[r pa]'에 반대되는 의미의 실질적 이름이 아니다. 즉 가명으로서의 空 혹은 無[假名空]이다. 가명공은 무슨 의미인가? 靑目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 이 '無'나 '空'은 '有'나 '色[r pa]'에 반대되는 의미의 실질적 이름이 아니다. 즉 가명으로서의 空 혹은 無[假名空]이다. 가명공은 무슨 의미인가? 靑目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도 또한 공하다. 단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假名으로 (空이라고) 말한 것이다. '有'와 '無' 양변(兩邊)을 떠났기 때문에 中道라 이름한다.
'공도 또한 공하다[空亦復空]'는 '공'이란 것도 또한 실체 혹은 자성이 없는 '언어'일 뿐임을 말한다. 공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施設한 이름[名 : n ma]이다.
왜 가명으로 공을 이야기해야만 有無二邊을 떠나 중도가 될 수 있는가? 우선 '중도'에 대해 알아보자.
세상 사람들은 전도하여서 二邊에 집착하니 有와 無이다. … 가전연! 진실 그대로 세간의 集(고집멸도의 집)을 보는 사람에게는 세간 사람이 가지는 無見이 발생하지 않는다. 진실 그대로 세간의 滅(고집멸도의 멸)을 보는 사람에게는 세간 사람이 가지는 有見이 발생하지 않는다. 가전연! 여래는 二邊을 떠나 중도를 설법한다. 즉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
중도란 有無二邊에 집착하지 않고 더나가 이 유무를 여실정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론}에서 이 고래의 정관정법을 지칭하는 중도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가명공이어야 유무이변을 떠날 수 있는가 함이다. 청목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도란 有無二邊에 집착하지 않고 더나가 이 유무를 여실정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론}에서 이 고래의 정관정법을 지칭하는 중도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가명공이어야 유무이변을 떠날 수 있는가 함이다. 청목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것, 나는 이것을 공이라 한다. 왜 그런가? 여러 인연이 모여 화합하여 무엇인가가 생기한다. 이 무엇인가는 여러 인연에 소속이 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空하다. …이 어떤 것(인연에 의해 생기한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有'라고 말할 수 없다. 동시에 (자성을 가진) 공도 없기 때문에 '無'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만법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지기에 자성이 없고 그래서 空이다. 단 공은 공의 자성을 가진 어떤 것이 아닌 또한 공(무자성)한 것이다. 공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有'와 모순되지 않는다. 공은 자성이 없기에 실유가 아니다. 즉 有邊을 떠난 것이다. 동시에 언어로 시설되어진 가명공이기 때문에 實無가 아니다. 이런 이유로 無邊도 떠나 있다.
이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二邊을 떠나 있을 뿐 아니라 二邊을 원융무애하게 포섭하고 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일체법은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공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되지 않는다.
假名空은 소극적으로는 '離有離無, 不墮二邊'을 말하고 적극적으로는 '亦有亦無, 空不離有'를 말한다.
이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緣起는 바로 空이며, 이 공은 가명이기에 有無를 떠나고 有無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假名)空은 중도이다. 사실상 가명공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측면이 바로 연기이다.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는 바로 이 '緣起與空相卽'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물론 세세한 부분 혹은 다양한 각도의 분석에서 보면 해석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다만 최소한 '연기'의 세 측면에 대한 대의는 차이가 없다. 즉 '無自性', '離有離無', '亦有亦無'라는 입장에는 다름이 없다. 空假中偈에 대한 吉藏疏 중 일부를 보자.
이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緣起는 바로 空이며, 이 공은 가명이기에 有無를 떠나고 有無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假名)空은 중도이다. 사실상 가명공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측면이 바로 연기이다.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는 바로 이 '緣起與空相卽'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위의 분석은 산스크리트 원문에 의거해 이루어졌는데 일반적으로 중국불교에서는 空假中偈를 위와 다르게 읽기 때문에 중국 반야 사상에서 이해하는 緣起觀이 위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세세한 부분 혹은 다양한 각도의 분석에서 보면 해석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다만 최소한 '연기'의 세 측면에 대한 대의는 차이가 없다. 즉 '無自性', '離有離無', '亦有亦無'라는 입장에는 다름이 없다. 空假中偈에 대한 吉藏疏 중 일부를 보자.
인연에 의거하여 생기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래서 '非有'이다. 이미 '非有'이고 또한 '非空'이다. '非有非空'이기 때문에 '中道'라고 이름한다. … 이미 여지껏 그 어떤 것도 인연에 의해 생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空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한 여지껏 그 어떤 것도 空.이 아닌 것이 없고 假가 아닌 것이 없고 中이 아닌 것이 없다.(因緣生法, 無有自性故空, 所以非有. 旣其非有, 亦復非空. 非有非空故名中道. …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亦未曾有一法, 不是空, 不是假, 不是中.)
이 중 "因緣生法, 無有自性故空, 所以非有"는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를 설명하고, "旣其非有, 亦復非空"은 "亦爲是假名"을 부연하고 "非有非空故名中道"는 "亦是中道義"를 해설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假名'은 '假名有'를 의미하며 ①卽是無 ②亦爲是假名 ③亦是中道義, 이 세 가지의 의미상 주어는 "衆因緣生法"이니 바로 '연기'이다. 그러므로 空·假·中은 직접적으로 연기의 세 가지 측면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즉 이 세 가지(空·假·中)는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다.
단 여기에서도 '연기' 자체가 '연기유'와 '연기무'의 측면이 있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원융무애하면서도 유무를 떠나 二邊에 빠지지 않음은 동일하다. 여기에서 다시 검토해야할 것이 있다. 즉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에서 '一切法'의 범위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일체가 모두 공하다면 생도 없고 멸도 없다. 그렇다면 사성제의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보도 없다. 이처럼 공을 설하면 삼보도 파괴하게 된다.
나는 말하노니, 佛道는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나는 말하노니 열반도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만일 열반보다도 훌륭한 어떤 것이 있다면 나는 말하노니 그것도 또한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보도 없다. 이처럼 공을 설하면 삼보도 파괴하게 된다.
나는 말하노니, 佛道는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나는 말하노니 열반도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만일 열반보다도 훌륭한 어떤 것이 있다면 나는 말하노니 그것도 또한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위 예문에서 보여지듯이 일체법은 '四聖諦', '法', '僧' 심지어 '佛寶'와 '涅槃'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포함하는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일체전부를 그 범위로 한다. 즉 緣起性空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는 연기에 대한 용수와 그후 계승자들의 독백을 들어보고 분석을 해 보았다. {중론}의 산스크리트어 원의를 따르든 아니면 중국의 일반론을 따르든 연기의 핵심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의존하기에 그 어떤 사물도 실체[性]일 수 없다. 의존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의 원인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空과 假名과 中道는 그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석편차가 존재하지만 직접적이든 아니면 간접적이든 '연기'를 설명함에도 변화가 없다.
즉 연기는 우리의 언어와 인식 속에 '어떤 것'이라 여겨지는 그 어떤 것도 그 실상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존한여 존재한다는 본질적 '有因性'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緣起는 '본질적 有因'을 주장한다.
우리는 연기에 대한 용수와 그후 계승자들의 독백을 들어보고 분석을 해 보았다. {중론}의 산스크리트어 원의를 따르든 아니면 중국의 일반론을 따르든 연기의 핵심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의존하기에 그 어떤 사물도 실체[性]일 수 없다. 의존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의 원인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空과 假名과 中道는 그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석편차가 존재하지만 직접적이든 아니면 간접적이든 '연기'를 설명함에도 변화가 없다.
즉 연기는 우리의 언어와 인식 속에 '어떤 것'이라 여겨지는 그 어떤 것도 그 실상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존한여 존재한다는 본질적 '有因性'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緣起는 '본질적 有因'을 주장한다.
4. 自然과 緣起
玄學과 般若學이 병립흥성하는 시기에 서로 간에 갈등과 조화가 없을 수 없다.
4.1. 自然·緣起Ⅰ : 朱世卿·釋眞觀·沈約
먼저 朱世卿과 釋眞觀의 논의를 보자. 주세경은 [性法自然論]이란 글을 지어 그의 자연관을 피력하고 있다. 글 중에 寓玆先生을 등장시켜 자기를 대변하고 假氏大夫와 或人을 등장시켜 寓玆선생과 辯論하게 한다.
寓玆先生: 대저 모든 법과 모든 성은 모두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바뀔 수가 없다.
이 주장은 玄學의 자연관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략 왕필의 "無라는 것은 水火도 해롭게 할 수 없고 金石도 망칠 수가 없다"나 郭象의 "성은 각기 몫이 있으니 … 어찌 중도에 그 性을 바꾸는 자가 있겠는가!"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 주장에는 인간의 善惡智愚가 모두 '自然'임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假氏大夫는 이 주장이 '대도를 어기고 성인의 말씀에 들어맞지 않는다[違大道而謬聖人之言]'라고 하는데, 그 주된 근거 중 하나가 善惡報應으로써 {周易}의 "선행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악행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는 문구로 우자선생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에 寓玆先生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에 寓玆先生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개 건곤이 드러나면 육자(六子 : 팔괘 중 건곤 이외의 괘)가 베풀어지며 백성이 길러지면 온갖 재화가 쓰여진다. 이 구절을 사용하면 萬法을 규정하여 다할 수 있다. 사람은 가장 영명한 생명체로서 자연의 빼어난 기에 應付하고 아름답고 추하고 살찌고 마른 바탕을 타고 나며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窮達하고 장수하고 단명하는 命을 가지고 있으며 어리석고 똑똑하며 선량하고 모진 성격으로 결정된다. 희노애락은 情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외물에 감하여 움직인다. 궁달하고 장수하고 단명함은 命 안에 있다가 사태에 이르러서 분명해진다. 아름답고 추하고 살찌고 마른 것은 형태에 있어 태어나면 보여진다. 어리석고 똑똑하고 선량하고 모진 것은 성격에 결정되어 있다가 用을 만나 완전히 드러난다. 이 여덟 구절은 모든 인간사를 총괄한 것이니 모두 자연의 수가 있어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姸蚩盈減', '哀樂喜怒', '窮達脩短', '愚智善惡'이 모두 알고 보면 '自然'에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假氏大夫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명예에 힘쓰는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고 청렴하면 가난해진다. 빈천함은 수양하는 선비들이 노력하여 얻는 것이고 부귀는 탐욕스럽고 경쟁하는 사람이 추구하여 얻는다. 어찌 자연의 수라고 이름하는가?
명예를 중시하면 청렴해지고 청렴하면 가난해진다. 즉 '명예를 중시함'은 '가난'의 원인이다. 假氏大夫가 보기에 富貴貧賤은 因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自然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때 或人이 끼어들며 寓玆先生의 주장이 "경전에 상고해 보건데 미진함이 있다(詳之先典, 有所未達)"라고 하며 보충을 요구하자 우자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寓玆先生은 "부귀에 절로 탐욕과 경쟁이 있는 것이니 부귀는 탐욕과 경쟁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빈천에 절로 청렴과 겸양이 있는 것이니 빈천은 청렴과 겸양이 바란 바가 아니다(夫富貴自有貪競, 富貴非貪競所能得, 貧賤自有廉讓, 貧賤非廉讓所欲)" 등을 들어 假氏大夫에게 대답하자 가씨대부는 수긍하며 "이 말을 실천하고 허리띠에 새겨 두겠노라(請事斯語以銘諸紳)"고 말한다.
이 때 或人이 끼어들며 寓玆先生의 주장이 "경전에 상고해 보건데 미진함이 있다(詳之先典, 有所未達)"라고 하며 보충을 요구하자 우자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자네는 (몸을) 구부리고 펴고 숙이고 위로 쳐다보는 것은 마음에서 하는 일이고 조각하고 새기고 자르고 쪼는 것은 손이 하는 것이고 예악은 성인이 만든 것이라 여기겠지. 성인은 천지가 난 것이네. 자네를 위해 비근하게 몸으로 비유를 들면 멀리 사물에까지 통달하게 될 걸세. 자네가 생각하기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발로 밟고 손으로 쥐고 마음으로 마음먹는 것은 누가 시키는 것이겠나? … 희노애락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인식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인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며 지혜로운 사람이 스스로 (자기) 지혜의 장소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 여기에서 가까운 것을 미루어 먼 것에까지 이르고 종류별로 추리하여 나간다면 … 動靜合散은 절로 생겨 절로 멸하는 것이니 動靜에 그 주관하는 사람을 알 수 없고 나고 멸함에 그 뿌리를 알 수 없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가 드러난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자연이 아니란 것은 바로 大自然이고 有爲는 바로 大無爲이다.
寓玆先生이 보기에 만사만법은 모두 그 원인을 추구해 가면 결국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自然'이다. 그리고 因果로 보이는 현상[非自然]도 알고 보면 바로 自然의 현상[大自然]에 불과하다.
寓玆先生은 당시 유행하던 因果사상도 사실상은 '自然'의 현상에 대한 잘못된 분석임을 말하고 있다. 因果로 여겨지는 것도 알고 보면 自然이다.
釋眞觀은 이 主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因緣無性論]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請疑公子와 通敏先生을 등장시켜 논의를 진행한다.
寓玆先生은 당시 유행하던 因果사상도 사실상은 '自然'의 현상에 대한 잘못된 분석임을 말하고 있다. 因果로 여겨지는 것도 알고 보면 自然이다.
釋眞觀은 이 主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因緣無性論]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請疑公子와 通敏先生을 등장시켜 논의를 진행한다.
請疑公子 : 우자선생은 자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가씨는 인과응보에 대해 진술하여 비록 자연의 예봉이 앞에서 승리하고 인과응보의 방패와 창이 뒤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어리석은 마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생각하면 더욱 의혹됩니다. 이 두 주장이 논변을 하면 어느 이론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請疑公子는 [성법자연론]의 결론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통민선생 : 자연은 노장을 본뜬 것이고 보응은 주공과 공자를 계승한 것인데 정말 초나라는 잃고 제나라는 점령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자연의 근본은 무슨 의미인가? 인과가 있는가? 인과가 없는가? 만약 자연도 인과를 따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주장은 모순이어서 두 명제가 서로 상충하니 어리석은 사람은 비웃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 만약 영원히 응보가 없고 완전히 인과가 끊어진다면 군신부자의 도는 행해지지 않고 인의효자 이 말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시 악행을 하여 경사를 부르고 선행을 하여 화가 닥치게 될 것이다. … 예를 들면 요임금 같은 성인으로 단주를 나 기르고 순임금 같은 지극한 덕을 가진 분이 고수의 아들로 태어난 것 같은 것을 자연히 그런 것이라 한다면 내 그댈 위해 동의하지 않겠네. … 요순은 전생에 덕을 닦았기에 이 같이 영특한 지혜를 품수 받았고 고수는 전생에 악행을 하였기에 이 나쁜 성격을 타고 난 것이며 다시 한번 부자의 인연으로 태어나 다시 서로 비교하여 드러나게 된 것이다. … 그러므로 인과의 의리는 분명하지 않아 정확히 알기 어렵고 업보의 이치는 어긋버긋 일정하지 않으니 이른바 生報와 現報 와 後報 때문이다.
通敏先生은 사람들이 因果說을 믿지 않고 自然說을 따르는 것은 前生과 後生을 모르는 상태에서 今生의 것을 분석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通敏先生의 주장에 따르면 緣起說이 옳고 自然說이 오류이다. 그런데도 緣起說을 주장했던 假氏大夫의 論議를 至論으로 여기지 않았다. 請疑公子가 이에 대해 질문을 하자 通敏先生은 그의 至論을 말해준다.
通敏先生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① 寓玆先生과 假氏大夫의 주장은 모두 至論이 아니다. ② 自然과 因果(緣起)는 서로 모순되는 주장으로 양립할 수 없다. ③ 因果를 부정하면 도덕 등을 설명할 수 없다. ④ 현상만으로 因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因果는 前生, 今生, 後生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通敏先生은 사람들이 因果說을 믿지 않고 自然說을 따르는 것은 前生과 後生을 모르는 상태에서 今生의 것을 분석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通敏先生의 주장에 따르면 緣起說이 옳고 自然說이 오류이다. 그런데도 緣起說을 주장했던 假氏大夫의 論議를 至論으로 여기지 않았다. 請疑公子가 이에 대해 질문을 하자 通敏先生은 그의 至論을 말해준다.
고찰해 보면 法은 본래 없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함도 없다. 理는 절로 없을 수 없으니 없지 않다면 멸함도 없다.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법은 어디에 있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만물은 어디에 기탁해 있는가? 어찌 보응의 이치를 구할 수 있겠으며 선악의 상을 얻을 수 있겠는가? … 단지 범인 중생들이 이 이치를 모르기에 함부로 논쟁을 일삼고 억지로 분별을 일으킨다. … 다만 진리에 근접한 곳[近情]으로 인도하고 무거운 疑惑을 덜어 주기 위해 살짝 인과를 보여주고 조금 업보를 드러내 주신 것이다. 만약 올바른 이치에 통달하고 이 참다운 법을 깨우친다면 또한 다시 어디엔들 있으며 어디엔들 없겠는가?
萬法實相은 無生無滅이고 이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나 단지 중생의 해탈을 돕기 위해 假名安立하여 '因緣', '善惡' 등으로 離言實相을 보여준 것이니 '因緣','善惡'도 畢竟不可得[空]하다는 주장이다. 전형적인 반야사상이다. 通敏先生은 '自然說'이 緣起의 奧義를 모르기에 생겨난 이론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매우 주목해 보아야 할 주장이 있다. 즉 自然과 緣起를 연결시키는 論議이다. 沈約(441-513)의 [因緣義]가 그것이다.
이 朱世卿과 釋眞觀의 論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당시에 自然과 緣起에 대한 論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두 이론 간의 모순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셋째, 각자의 이론으로 상대의 이론을 해소하거나 극복하려 하였다.
그런데 매우 주목해 보아야 할 주장이 있다. 즉 自然과 緣起를 연결시키는 論議이다. 沈約(441-513)의 [因緣義]가 그것이다.
생물의 본성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삶을 구하는 방법은 서로 달라 한결 같지 않으니 일순간에도 흘러들어가는 길이 각기 다르다. 한 생각[念]의 사이에 뭇 인연이 서로 일어난다. 하나의 因과 하나의 果안에도 차이가 있지만 삶을 좋아하는 性은 모든 생물이 동일하다. 자연에 품수받은 것이니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다. 삶을 좋아 하는 것은 인연이 아니고 인연은 삶을 좋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록 (이 두 가지가) 함께 한 몸에 깃들어 있지만 각기 다른 사물이다. 한 생각이 이미 여러 인연을 불러 모으고 많은 인연은 각기 생각에 따라 일어난다. 선과 악은 정말 다르지만 모두 外助를 필요로 하니 이루어지는 방법은 동일하다. 비유하자면 물도 없고 토양도 없다면 곡식의 싹은 생겨나지 않는다. 인연과 성식은 그 근본이 이미 다르다. 인과가 분명하여 비록 필연적이지만 선과 악이 홀로 일어나도 또한 (외부 사물과) 관계를 가지게 된다. 비록 홀로 일어났다[獨起]라고 말하지만 일어남[起]이 바로 因이 된다. 內因과 外緣이 참으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沈約의 因緣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含靈]에게는 두 가지가 함께 있다. 즉 因緣과 非因緣,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緣起와 自然이다. 自然은 비연기적이고 緣起는 비자연적이다.
그렇다면 '緣起'와 '自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선 그의 비유를 살펴보자. '非水非土, 穀牙不生'에서 '穀'은 自然에 해당되고 '水·土'는 外緣이며 '牙'는 이 둘의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俱資外助, 事由一揆'이다.
다시 주의해야할 부분은 '雖云獨起, 起便成因, 內因外緣, 寔由乎此也'이다. 일념의 '起', 만약 그것이 獨起라 하더라도 그것은 因果 밖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沈約의 緣起觀을 알 수 있다. 즉 '念'이 바로 '因'인 것이다. 이 '念'이 일어나 '緣'의 영향 속에서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性識, 念, 樂生은 無因의 자연으로서 因이 되어 緣[外助]에 따라, 즉 緣起의 법칙에 따라 果(현상)를 드러낸다.
이 緣起觀은 사실 자연과 연기의 종합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窮極的 無因'과 '本質的 有因'을 결합한 형태의 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자연과 연기라는 관점으로 다시 돌이켜서 말한다면 自然緣起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몇 명의 대화와 심약의 독백을 듣고 분석을 해 보았다. 주세경과 석진관을 통해 '自然'과 '緣起'의 갈등 및 대립을 볼 수 있고 심약의 독백을 통해 이 둘의 종합을 볼 수 있다.
다시 살펴보면, 含靈의 요소 중 '樂生', '一念', '性識'은 '自然'에 해당하고 '求生之路', '流遷塗徑'은 '緣起的'인 것이다.
그렇다면 '緣起'와 '自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선 그의 비유를 살펴보자. '非水非土, 穀牙不生'에서 '穀'은 自然에 해당되고 '水·土'는 外緣이며 '牙'는 이 둘의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俱資外助, 事由一揆'이다.
다시 주의해야할 부분은 '雖云獨起, 起便成因, 內因外緣, 寔由乎此也'이다. 일념의 '起', 만약 그것이 獨起라 하더라도 그것은 因果 밖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沈約의 緣起觀을 알 수 있다. 즉 '念'이 바로 '因'인 것이다. 이 '念'이 일어나 '緣'의 영향 속에서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연기는 비록 현상적으로 배척하는 관계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상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연이 바로 그 因이다. 이 인이 연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것이다.
性識, 念, 樂生은 無因의 자연으로서 因이 되어 緣[外助]에 따라, 즉 緣起의 법칙에 따라 果(현상)를 드러낸다.
이 緣起觀은 사실 자연과 연기의 종합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窮極的 無因'과 '本質的 有因'을 결합한 형태의 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자연과 연기라는 관점으로 다시 돌이켜서 말한다면 自然緣起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몇 명의 대화와 심약의 독백을 듣고 분석을 해 보았다. 주세경과 석진관을 통해 '自然'과 '緣起'의 갈등 및 대립을 볼 수 있고 심약의 독백을 통해 이 둘의 종합을 볼 수 있다.
4.2. 自然·緣起Ⅱ: 竺道生
자연과 연기의 종합은 사실상 沈約에서 처음 이루어지지 않는다. 沈約의 論議는 그 논리구조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먼저 서술한 것이다. 심약보다 조금 앞서 竺道生(대략 374-434)은 이미 심약보다 더욱 교묘하고 성공적으로 이 작업을 이룩해 놓았다.
먼저 그의 空觀에 대해 살펴보자. 축도생은 空慧空과 理空을 나누어 설명한다. {注維摩詰所說經·文殊師利問疾品}의 일부 주를 보자.
먼저 그의 空觀에 대해 살펴보자. 축도생은 空慧空과 理空을 나누어 설명한다. {注維摩詰所說經·文殊師利問疾品}의 일부 주를 보자.
원문 : 또 질문하였다. 空한데 어찌 空을 사용하는가요?
만약 이치가 정말 공이면 어찌 空慧(공하다고 여기는 지혜)를 사용한 뒤에 공하겠는가? (공을) 얻는 지혜가 있는 것이라면 이 空은 바로 慧가 만든 것이니 理가 그런 것(공한 것)이 아니다.
원문 : 답하여 말하였다 : 무분별의 공혜이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 공혜라고 말한 것은 분별하여 공이라고 여기는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이치에 맡겨 깨달은 자일뿐이다. 만약 이치에 맡겨 깨달음을 얻어 이 공을 터득한 뒤에 공이라 한다면 理가 그렇지 않겠는가!
道生에 의하면 空은 慧의 결과[所作]가 아니라 理의 본모습이다. 그러므로 無分別의 慧로서 이 空에 이를 수는 있지만 이 空[理] 자체는 慧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道生에 의하면 이 理가 바로 無相이다. 이 '理'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a: 空이라고 말할 때 空相도 또한 공하다. 만약 공상이 공하지 않다면 空이 有가 된다. 공이 이미 유라면 유가 어찌 무가 되겠는가!
b: 모든 생각을 버리고 무상을 만든다면 인위적으로 만드는 듯하다.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理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미 空에 따르고 무상을 따른다면 이 (이치에) 합치하게 될 것이다.
b: 모든 생각을 버리고 무상을 만든다면 인위적으로 만드는 듯하다.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理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미 空에 따르고 무상을 따른다면 이 (이치에) 합치하게 될 것이다.
a와 b를 비교해 보면 空과 無相과 理의 관계를 쉽게 알 수 있다. 空과 無相은 모두 '非意[慧]之所作'이며, '理'를 지칭하고 있다. 그럼 '理'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理에 다른 지향이 없어 함께 一極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理'는 '一'이다. '一'이란 無差別·無變化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 '無相之理'가 바로 '佛'이라고 주장한다.
六度無相으로 佛을 삼으니 어찌 언어상(言語相)으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佛'은 역사적인 의미의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法身'으로서의 '佛'을 말한다.
원문 : 불신이란 바로 법신이다.
대저 佛身이란 丈六體이다. 장육체는 법신에서 근원하였다. 그 근원처로 이름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법신이다"라고 한다. '법'이란 法義 아닌 것이 없고 法義 아닌 것이 없음은 바로 無相의 내용[實]이다. '身'이란 이 法義의 體이다. 法身은 진실이고 일장육척은 임시적[假]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저 법을 깨우친 사람에게 封惑은 영원히 없어지고 彷佛도 또한 제거된다. 묘하게 三界의 表를 끊고 理는 무형의 경계와 명합한다. 형상이 이미 없기에 모든 형상일 수 있고 삼계가 이미 끊어졌기에 모든 界일 수 있다. 모든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은 感이 오기만 하면 應하는 것이니 佛은 無爲이다. 형상의 크고 작음 수명의 장단은 모두 중생을 응접한 그림자이고 흔적이니 부처님의 실질이 아니다.
대저 佛身이란 丈六體이다. 장육체는 법신에서 근원하였다. 그 근원처로 이름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법신이다"라고 한다. '법'이란 法義 아닌 것이 없고 法義 아닌 것이 없음은 바로 無相의 내용[實]이다. '身'이란 이 法義의 體이다. 法身은 진실이고 일장육척은 임시적[假]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저 법을 깨우친 사람에게 封惑은 영원히 없어지고 彷佛도 또한 제거된다. 묘하게 三界의 表를 끊고 理는 무형의 경계와 명합한다. 형상이 이미 없기에 모든 형상일 수 있고 삼계가 이미 끊어졌기에 모든 界일 수 있다. 모든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은 感이 오기만 하면 應하는 것이니 佛은 無爲이다. 형상의 크고 작음 수명의 장단은 모두 중생을 응접한 그림자이고 흔적이니 부처님의 실질이 아니다.
만약 중생의 感함이 없다면 (부처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중생을) 응접하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중생이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끊은 것이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나타나주는 일은 없다. … 그렇다면 일장육척과 팔척은 모두 중생의 마음이다. 불은 항상 無形이니 어찌 두 가지가 있겠는가! … 그렇다면 불도의 자취가 여기 저기 존재하여 비록 모양의 다름이 있지만 無常임에는 다름이 있을 수 없다.
竺道生은 無形의 法身을 주장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法身이 바로 '佛性' 혹은 '佛性我'라고 주장한다.
理는 원래 나를 말미암아 空한 것이 아니니 어찌 내가 그것(理空)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無我'이다. '無我'는 본래 살고 죽음 중의 '내[我]'가 없음이지 '佛性我'가 없음이 아니다.
이 佛性에 대해 道生은 이것이 自然임과 本有임을 주장한다.
이 佛性에 대해 道生은 이것이 自然임과 本有임을 주장한다.
진리는 자연이다.
법을 체인한 사람은 자연과 명합하니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法이 佛이 된다.
일어남[作]이 있기 때문에 없어짐[滅]이 발생한다. 근본을 얻어 자연스러우면 일어남과 없어짐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법의 실상은 허망함을 초월하여 湛然하게 항상 참이다. 그러므로 '自然'이라 한다. 自然이란 허망함이 없어 항상 진실됨이다. 그러므로 또한 '法'이라 한다. '法'이란 法이 아님이 없음을 말한다.
법을 체인한 사람은 자연과 명합하니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法이 佛이 된다.
일어남[作]이 있기 때문에 없어짐[滅]이 발생한다. 근본을 얻어 자연스러우면 일어남과 없어짐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법의 실상은 허망함을 초월하여 湛然하게 항상 참이다. 그러므로 '自然'이라 한다. 自然이란 허망함이 없어 항상 진실됨이다. 그러므로 또한 '法'이라 한다. '法'이란 法이 아님이 없음을 말한다.
眞理는 바로 無相의 法身, 즉 佛性을 말한다. 이 佛性이 바로 自然이다. 그러기에 體法者가 自然과 冥合할 수 있다.
세 번째 인용문은 주의를 요한다. '自然'은 起滅이 없는데 그 이유는 '作有'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自然'이 因果를 초월한 존재임을 말한다. 즉 自因 혹은 無因이다. 無因이기에 常住不變하고 常眞如如할 수 있다.
竺道生의 佛性義를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慧觀의 글을 보자.
세 번째 인용문은 주의를 요한다. '自然'은 起滅이 없는데 그 이유는 '作有'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自然'이 因果를 초월한 존재임을 말한다. 즉 自因 혹은 無因이다. 無因이기에 常住不變하고 常眞如如할 수 있다.
竺道生의 佛性義를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慧觀의 글을 보자.
또 '神我'가 없음에 대해 질문하였다. : 경전에 말하기를 外道가 망령되게 나라는 상[我]을 보는 것을 '잘못된 견해[邪倒]'라 하였는데 지금 '불성'이 나라는 것이 올바른 견해[正見]라 설명하셨습니다. 외도는 그것 때문에 잘못됨이 되는데 불성은 어떻게 올바름이 됩니까?
답변 : 외도는 망령되게 神我를 보아 無常을 常이라 하니 잘못됨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법은 第一義空으로 佛性을 삼는다. 佛(즉 불성)로 眞我를 삼으니 常住不變한다. 정견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변 : 불성이 我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는 眞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영원히 존재하는 불성은 자기의 보물이기 때문에 '我'라 한다.
답변 : 외도는 망령되게 神我를 보아 無常을 常이라 하니 잘못됨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법은 第一義空으로 佛性을 삼는다. 佛(즉 불성)로 眞我를 삼으니 常住不變한다. 정견이 아니고 무엇인가!
질문 : 무엇 때문에 佛性이 我라 하십니까?
답변 : 불성이 我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는 眞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영원히 존재하는 불성은 자기의 보물이기 때문에 '我'라 한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竺道生은 空慧空과 理空을 엄격하게 나누고 있다. 理空이 法身이고, 佛性我일 경우, 이것은 慧에 의해 알려질 수는 있지만 慧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慧[卽神明]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竺道生이 말하는 佛性은 神我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없이 無相과 無形을 강조하는데 神我는 無相일 수 없고 無形일 수 없다.
이 佛性은 아무 이유 없이[無因] 이루어져 영원히 존재(常住不變)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에는 이것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자들의 어떤 변화와도 상관없이 常住한다. 바로 이 점이 竺道生이 頓悟를 주장하고, 一切皆有佛性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다.
竺道生이 말하는 佛性은 神我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없이 無相과 無形을 강조하는데 神我는 無相일 수 없고 無形일 수 없다.
이 佛性은 아무 이유 없이[無因] 이루어져 영원히 존재(常住不變)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에는 이것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자들의 어떤 변화와도 상관없이 常住한다. 바로 이 점이 竺道生이 頓悟를 주장하고, 一切皆有佛性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였으니 중생으로 하여금 佛知見을 열게 하고자 함이다. … 참으로 중생에게 본래 佛知見分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垢障에 의해 드러나지 못할 뿐이다. 부처님이 제거해 준다면 (불지견분을) 성취할 수 있다.
모든 衆生은 佛知見分[佛性]을 가지고 있으나 垢障 때문에 이 佛性이 드러나지 못한다.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야 드러날 수 있다. 단 본인의 修養과 努力이 필요하다.
감응에는 緣이 있다. … 그러므로 마음을 두어 응한다.
대저 (돈오의) '頓'이라 부르는 것은 이치는 나눌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悟'는 남김없이 비추어 봄을 말한다. 不二의 悟로 不分의 理에 冥符하여 理와 智가 釋함을 돈오라 한다. 見解를 '悟'라 이름하고 聞解를 '信'이라 한다. 信解는 참된 것이 아니니 '悟'가 이루어지면 '信'은 사라진다. (이것은) 理數의 자연이니 마치 과일이 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悟'는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信漸'을 의뢰한다. '信'으로 '의혹'을 굴복시키고 '悟'로 번뇌를 끊는다. … 수행자로 하여금 쉬지 않고 노력하게 한다.
竺道生이 말하는 頓悟는 그냥 문뜩 깨닫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도 당시 餘他의 불교학자들과 같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信漸'의 과정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因果'的이다. 그리고 이 '因果的임'은 感應論을 기초로 하고 있다.
비록 佛性을 가지고 있으나 이 佛性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촉발이 필요하다. 즉 '緣'이 필요하다. 이 '緣'에 따라 '果'가 성숙해지면 어느 한순간 잘 익은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한 순간(頓) 眞理自然을 알 수 있게 된다. 단 眞理自然은 '一'이기 때문에 '알고 모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일부분만을 알 수는 없다. 알면 모두를 아는 것이다.
비록 佛性을 가지고 있으나 이 佛性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촉발이 필요하다. 즉 '緣'이 필요하다. 이 '緣'에 따라 '果'가 성숙해지면 어느 한순간 잘 익은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한 순간(頓) 眞理自然을 알 수 있게 된다. 단 眞理自然은 '一'이기 때문에 '알고 모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일부분만을 알 수는 없다. 알면 모두를 아는 것이다.
이미 그 '一'을 깨우쳤다면 모든 일을 모두 터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一'은 모든 일의 근거[所由]가 된다.
이 설명과 앞의 法身에 대한 설명, 즉 '一'을 보면 竺道生의 緣起義를 또한 알 수 있다. 즉 佛性 혹은 法身이 외부조건[緣]에 感하여 應[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竺道生도 眞理自然을 '因'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 논리 구조는 沈約과 同一하다.
無因自然이 因이 되고, 이 因이 緣을 만나 천변만화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無因自然이 因이 되고, 이 因이 緣을 만나 천변만화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형상이 이미 없기에 모든 형상일 수 있고 삼계가 이미 끊어졌기에 모든 界일 수 있다. 모든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은 感이 오기만 하면 應하는 것이니 佛은 無爲이다. 형상의 크고 작음 수명의 장단은 모두 중생을 응접한 그림자이고 흔적이니 부처님의 실질이 아니다. 만약 중생의 感함이 없다면 (부처님은) 나타나지 않는다.(形旣已無, 故能無不形. 三界旣絶, 故能無不界. 無不形者, 唯感是應. 佛無爲也, 至於形之巨細, 壽之脩短, 皆是接衆生之影迹, 非佛實也. 衆生若無感, 則不現矣).
竺道生이 보기에 無形이기에 無不形일 수 있다. 단 無形과 無不形은 본질적 차이가 있으니 '無不形'은 '無形'의 現顯이기는 하지만 無形의 實相은 아니다.
王弼의 글을 보자.
王弼의 글을 보자.
모든 有는 모두 無에서 始成된다.
'一'은 數의 처음이며 物의 극이다. … 만물은 모두 각기 이 '一'을 얻어 이루어진다.
형상이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것은 따뜻하지 않으면 뜨겁고 뜨겁지 않으면 춥다. 그러므로 모양이 있어 형상할 수 있는 것은 大象(즉 진리)이 아니다.
大象은 天象(즉 만상)의 어미이다. 춥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만물을 포통한다.
'一'은 數의 처음이며 物의 극이다. … 만물은 모두 각기 이 '一'을 얻어 이루어진다.
형상이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것은 따뜻하지 않으면 뜨겁고 뜨겁지 않으면 춥다. 그러므로 모양이 있어 형상할 수 있는 것은 大象(즉 진리)이 아니다.
大象은 天象(즉 만상)의 어미이다. 춥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만물을 포통한다.
王弼이 보기에 모든 존재자는 '無'를 말미암아 발생한다. 無形이기에 萬形의 원인이 되지만 萬形은 無形(大象)이 아니다. 竺道生의 佛性과 緣起도 이와 완전히 일치한다. 모든 緣起는 佛性의 現顯이지만 佛性은 佛性이지 緣起는 아니다. 그리고 佛性이 無形이기에 모든 緣起가 가능하다. 王弼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은 생겨난 뒤에 길러지고 길러진 뒤에 형성되고 형성된 뒤에 이루어진다.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道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길러지는가? 德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형성되어지는가? 物 때문이다. 모든 사물이 생기는 이유와 공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두 근거[所由]가 있으니 근거[所由]가 있는 것은 모두 道를 말미암은[由]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미루어 간다면 또한 道에 다다른다.
王弼이 보기에 道가 드러남에도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즉 '物'이 되려면 '形'이란 조건이 필요하다. 이 과정 중에서도 그 궁극적 원인은 '道'이지만 부대원인인 '物'도 반드시 필요하다. 竺道生의 '緣'도 이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竺道生의 緣起說은 佛性緣起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自然과 緣起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自然緣起說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 無因의 기초 위에 有因이 있는 이론이다.
축도생의 독백을 듣고 분석을 해보았다. 비록 독백의 형식이지만 이 독백에서 朱世卿·釋眞觀·沈約의 갈등과 종합이 蘊蓄돼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종합의 방식이 심약과 차이를 보일 뿐이다.
竺道生의 自然義는 王弼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沈約과 다른 점이다. 竺道生이 보기에 性識, 念, 樂生 등은 自然이 되기에 부족하다. 아직 有形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有形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에 의해 발생하는 緣起도 또한 제약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진정한 無形만이 無不形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竺道生의 緣起說은 佛性緣起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自然과 緣起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自然緣起說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 無因의 기초 위에 有因이 있는 이론이다.
축도생의 독백을 듣고 분석을 해보았다. 비록 독백의 형식이지만 이 독백에서 朱世卿·釋眞觀·沈約의 갈등과 종합이 蘊蓄돼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종합의 방식이 심약과 차이를 보일 뿐이다.
5. 맺음말
유사한 주제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대화는 종종 第三의 견해를 만들어 낸다. 앞에서 살펴본 '自然緣起說'도 또한 그러하다. '無因'의 사유와 '有因'의 논리가 서로 對話를 통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내[佛]가 지금 因緣法을 설명하겠다.…… 무엇이 인연법인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음'을 말한다. …… (이 인연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거나 이 (인연)법은 영구불멸이며 법주(法住)이며 법계(法界)이다. 그것은 如來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등정각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풀어 설명하고 열어 보여주고 드러내 주었다. …….
만약 緣起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法을 보는 것이고, 만약 法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緣起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이는 불교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 즉 새로운 불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부처님은 十二因緣을 順觀, 逆觀을 거듭하다가 大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즉 緣起說은 불교의 핵심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佛]가 지금 因緣法을 설명하겠다.…… 무엇이 인연법인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음'을 말한다. …… (이 인연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거나 이 (인연)법은 영구불멸이며 법주(法住)이며 법계(法界)이다. 그것은 如來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등정각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풀어 설명하고 열어 보여주고 드러내 주었다. …….
만약 緣起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法을 보는 것이고, 만약 法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緣起를 보는 것이다.
'緣起'는 영원한 진리이며, 佛法이란 이 진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바로 불교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 변화라 할 수 있다.
無因의 기초 위에 有因을 구축하는 自然緣起說은 매우 주의 깊게 눈여겨서 보아야 할 중국불교의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분명 對話의 産物이다.
둘째, 中國이 나름대로 佛敎를 수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緣起說'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自然觀'이다. 즉 自然의 기초 위에서 緣起를 건축한 緣起說은 중국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불교를 소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無因의 기초 위에 有因을 구축하는 自然緣起說은 매우 주의 깊게 눈여겨서 보아야 할 중국불교의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분명 對話의 産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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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弘明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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