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에서 문장대를 향해 다시 10리길. 세속의 마음을 벗으라는 듯 세심정(洗心亭)이란 휴게소가 기다리고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먹는 열무국수 한 그릇이 별미다. 금오와 그 제자들은 국수를 좋아했다. 태백산 동암에서 정진할 때 금오와 그 제자들은 산 300평을 개간해 밀을 심어 직접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 때 금오를 시봉했던 월남 스님은 국수도인이었다. 월남은 60년대 금오가 말년에 문을 연 법주사 총지선원의 초대 선원장을 했는데, 스승의 불같은 성정을 닮았다. 월남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어 상대는 초주검이 될 지경이었는데, 그때 월남을 제지할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누군가가 월남에게 달려가 “스님, 지금 국수를 삶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으면, 월남은 바로 몇 초 전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선 “국수! 국수는 내가 삶아야지”라면서 국수를 삶으려 부엌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세심정을 지나 ‘이뭣고 다리’를 건너니 복천암이다. 30년 간 이곳에서 정진해 수좌(선승)계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월성 스님이 맞는다.
세속인들과 거의 만나지 않은 산사람이기에, 산골 처녀와 같은 수줍음이 흐른다. 그러나 그 수줍음이 어찌 금오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칼 같은 기개를 감출 수 있을까. 월성 스님은 50년 전인 1955년 출가해 지리산 화엄사와 거창 연수사 등에서 스승을 시봉했다.
스승 금오는 견성 뒤에도 탁마를 쉬지 않았다. 서울에서 걸인들 틈에서 사는 만행을 하는가하면 전주에선 밭가에 움막을 지어놓은 채 탁발을 하며 살았다. 또 경허의 맏제자인 수월선사를 만주까지 찾아가 1년 간 모시며 정진했다.
금오는 달마대사를 닮았다. 힘이 장사인데다 목소리가 우렁차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불렸다.
금오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7~8명의 대중이 모이자 ‘정진하다 죽어도 좋다’는 서약을 각자가 쓰게 한 뒤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용맹정진이란 일체 자지 않은 채 하는 수행이다. 금오는 조는 납자들을 물푸레나무로 후려쳤다. 납자들 모두 구렁이가 몸을 감은 듯 온몸에 멍이 들었다. 금오가 있는 곳은 늘 그처럼 처절한 수행이 뒤따랐다. 결제(겨울과 여름에 90일씩 하는 집중 수행)기간이든 아니든 어디나 선방이 되었다. 지금 주요 선방에서 7일 또는 21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는 풍토도 금오가 불을 지른 것이었다.
동진(여성과 관계하기 전) 출가해 세속의 정이나 계산속을 모르던 금오의 언행은 순진무구하기 그지 없었다. 오직 화두만을 일심으로 참구하라던 스승 앞에서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분별망상을 내세우면 번갯불처럼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원망스러워 밤봇짐을 싸 다른 절에서 결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며칠이 못 가 그 스승이 너무도 그리워져 결제가 끝나기 무섭게 스승에게 돌아가곤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월성 스님은 “이 공부는 자존심과 인사치레를 내세워선 십만팔천리 멀어진다”며 “이번 생은 안 낳은 셈 치고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는 보은이다. 제자들은 무엇으로 스승에 보은하는가. 속리(俗離·세속의 잡념을 벗어나고)산에서 ‘이뭣고 다리’를 다시 건너니, 법주(法住·깨달음의 진리에 거함)사가 있다.
천진한 도인…“모기도 잡지 마라”
전남 나주 금성산에 이르니 하늘 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과 땅과 계곡이 비로 인하여 함께 춤춘다. 우화(雨華)도인(1903~1976)의 환영식인가.
우화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수박을 들고 경내에 들어섰다. “아따 무겁게 뭔 이런 것을 사오시요. 글씨.”
적막한 경내에서 주지 일륜 스님(63)이 맞는다. 우화도인을 평생 시봉했고, 스승의 열반 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하다 다시 스승의 자취를 쫓아 돌아온 그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여성 같은 표정이나 꾸밀 줄 모르는 진솔함은 스승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의 스승 우화는 한국의 선객들이 선사나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도인이라고 칭하기를 즐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다보사 선방에서 한철을 보낸 선객들은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같은 우화의 ‘천진’을 평생 잊지 못해 했고, 선원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선 그의 일화가 늘 화제의 일미였다.
우화는 전남 담양의 성도(成道)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늘 우화를 못난이라며 미워했다. 그래서 소학교를 글씨도 깨우치기도 전인 3학년에 그만두어야 했다.
우화는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4살에 집을 나왔다. 발길 닿은 곳이 경남 함양 영각사였다. 그는 밥을 얻어먹으며 행자 노릇을 시작했다. 우화는 고달픈 행자생활 중에도 틈만 나면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못나고, 부모 복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어느 날 꿈에 한 노승으로부터 “참선을 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그는 참선 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배짱마저 없는 그의 삶은 수행처에서도 고달프기만 했다. 토굴에서 수행하다 병이 든 채 누더기를 입고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걸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 변변한 은사도, 내놓을 문중도 없는 그는 선방에서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를 찾아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도 3번이나 방부(안거에 살겠다고 신청)를 거절당했다. 많은 식량을 탁발해 가서야 정혜사 선방에 들어간 우화는 한 번 온 공부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만공은 석 달간 한 철 안거를 마친 뒤 선방 납자들이 쓴 게송(깨달음의 시) 가운데 우화와 성철 선사의 것, 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화가 부산 내원사에 이르자 경허-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 선사가 그의 견처(깨달음)를 단박에 알아보고 법제자로 삼았다. 법(깨달음 또는 진리)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꿈 속의 일이던가. 일륜 스님이 내보인 운봉의 친필 인가장엔 ’전법게’(법을 전함)가 아닌 ‘전몽게’(꿈을 전함)라고 쓰여 있었다.
|
 |
|
| |
소학교 3년 중퇴 뒤 14살 때 출가
평생 짚신신고 짚방석에서 좌선
새벽 2시 일어난 뒤 눕는 일 없어
고양이에게도 “화두 잘 챙기거라”
그 뒤 우화는 불교세가 미약해 ‘앉아서 굶어죽기 딱 좋은’ 나주에서 다보사를 30여년이나 지켰다. 아예 돈을 쓸 줄도 몰랐던 우화는 꼬깃꼬깃한 돈을 한장씩 두장씩 모았지만, 승려들이 “여비 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꾸어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빌려간 것은 후생에서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우화는 절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죽비를 치고 참선을 시작했고, 공양시간이 되면 발우를 폈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았다. 우화는 잘 때도 반드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웠고, 요를 방석 크기의 4분의 1로 개어 위쪽만을 덮었다. 황소바람이 노승의 몸에 몰아치는 것이 안타까워 제자 일륜이 방에 들어가 요를 펴서 온몸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와 문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얼른 요를 다시 4분의1로 접어 위쪽만 덮었다. 안락함을 멀리함으로서 경책을 삼은 것이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면 온종일 다시 눕는 일이 없었다. 또 평생 천방석을 두고 짚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짚신만을 신었다. 여름이면 모기약을 뿌리지도, 모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름철 그의 모시옷은 우화의 피를 포식해 배가 터져 죽은 모기들의 피로 시뻘겠다.
이처럼 미물에게도 그는 평등하게 대했다. 이곳에서 키우던 고양이에게도 늘 “화두를 잘 챙기라”고 일렀는데, 고양이는 이를 알아듣는 듯 좌선 중인 우화의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이 고양이도 발정기가 되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한번은 비구니 스님이 절에 오자 그에게 “고양이를 붙잡고 있으라”고 한 뒤, 초를 아기 고추처럼 만들어 암고양이의 ‘그것’에 넣어 문질렀다. 비구니 스님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우화는 오히려 “왜 그렇게 놀란다요?”하고 의아해 했다.
발정이 나 발광하기 직전인 고양이에겐 그런 자비를 베풀면서도 우화는 정작 ‘여성’을 몰랐다. 짓궂은 도반들이 “정말 여자 맛을 한 번도 못 봤소?”하면 “여자를 어떻게 맛본다요?”하고 물었다. 또 짓궂은 비구니 스님들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그의 손을 잡으면 “어찌 비구니가 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며 마치 성폭행당하기 직전의 여성처럼 놀라서 고함을 치곤 했다.
“때도 한참 넘었는디, 공양도 대접을 못하고 어쩔거나.”
공양주 보살 한 명 없이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안빈한 수행자 일륜 스님은 안타까워하지만 우화의 ‘천진’이 허기를 때워준다. 우화는 세속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아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일주문을 부여잡고 “아이고, 배 고파 나 죽겄다”고 했다. 우화의 천진 법어인가. 일주문을 돌아 나서니 드디어 배가 꿈 깬 소식을 들려준다. “꼬르륵, 꼬르륵”
망월사 인곡선사
|
시원한 도봉산 바위 능선을 병풍삼은 망월사 누각 옆에 오래된 새집이 있다. |
늘 수행자의 자세 되세기던 ‘돌탑 수좌’
30살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대우받거나 내세우는 법 없어
제자들한테 “머리 만져보라”…주변에 약속한 날 속세 떠나
서울은 찜통 속이다. 화탕 지옥에 한 줄기 솔바람인가. 도봉산 쪽이다. 이보다 시원할 순 없다. 바위능선들을 병풍 삼은 망월사의 한 누각 옆에 오래 된 새집이 있다. 천중선원을 지켜보는 자리다. 새는 선원을 돌며, 명예도, 살심도 한바탕 벗어버린 납자(선승이 스스로 ‘납루한 자’로 낮춰 부르는 말)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1923년. 청년 납자가 망월사로 용성 선사를 찾아왔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젊은 납자는 대답 대신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
도인은 미물이 먼저 알아보고, 선지식은 상대가 입술을 떼기 전에 이미 눈빛과 걸음걸이만으로도 견처(깨달음)를 알아본다고 했다. 용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인곡(1895~1961)이 스승으로부터 견성을 인가받는 순간이었다.
전남 영광군 법성에서 태어난 인곡은 14살에 백양사로 출가했다. 그는 불연이 깊었다.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이 백양사의 중흥조인 만암선사였다. 그는 선과 교에 모두 출중했던 만암의 회상에서 강원을 마친 뒤 참선 길에 나섰다. 팔공산 동화사에서, 예산 보덕사의 보월 선사 회상에서 정진한 데 이어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월, 혜월, 한암 선사와 법거량을 벌였다. 인곡은 한 번 자리에 앉으면 돌탑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정진했기에, ‘돌탑 수좌’로 불렸다.
용성의 깨달음을 잇는 법제자가 된 인곡은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연 용성을 따라 갔다. 그곳에서 ‘젊은 도인’의 탄생 소문을 들은 대중들이 인곡의 법문을 듣기 위해 그를 법상에 모셨다. 대중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젊은 도인의 입에서 어떤 법문이 터져 나올 지 주시할 뿐이었다. 1분, 2분, 3분….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인곡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주장자를 짚은 채 돌탑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곡의 부동심으로 법당은 고요 속에 잠겼다.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인곡은 마침내 그대로 일어나 법상에서 내려왔다.
|
대중들 법문 청하자 “…” 침묵의 설법 |
이 자리에 있던 용성은 “이것이 참설법이며,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진리이며, 이것이 역대조사의 안목이니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 그리고 법계의 모든 영들이 안신입명하는 곳이다”고 찬탄했다.
인곡은 불과 30살에 호남제일선원인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이 됐다. 앳된 젊은 승려가 산중 최고 어른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인곡은 대우받으려 한다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절 살림이 가난해 양식이 부족한데도 운문선원엔 그를 찾아 20여명의 선객이 몰려들었다. 그는 선객들이 참선하는 틈을 타 백양사에서 몸소 양식을 져 나르고, 나무를 하곤 했다.
조그만 몸집에 말 수가 없고, 늘 겸손했던 인곡은 계율이 청정하기 이를데 없었던 만암의 영향인지 ‘어른’으로 존중받으면서도, 늘 수행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국 불교에 찬불가를 보급시킨 주역인 북한산 운문사의 운문스님(77)은 솔향 가득한 해인사 뒷방에서 “늘 머리를 만져보라”던 스승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삭발한 머리를 만지면서 늘 수행자임을 잊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곡은 솔잎을 먹으면 피가 맑아져 혼침이 오지 않아 정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평생 솔잎 생식을 했기에 그의 방은 늘 솔향이 가득했다고 한다. 인곡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선사는 그런 스승의 영정을 방에 걸어두고 ‘스승을 넘어서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도인을 날짐승은 알아보았을까. 스님들이 공양 중 음식을 조금씩 모아 산짐승들에게 나눠주는 헌식 시간이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늘 인곡을 에워싸고 그의 어깨에 내려 앉곤 했다. 옛 <고승전> 책 속에서나 전해내려오던 현장을 본 승려들과 신자들은 놀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정릉 보림사 조실 묵산 스님(83)은 인곡이 열반하기 전 3년 간 해인사에서 시봉하며 ‘용무생사’(·생사없는 도리를 씀)의 장면을 보았다. 열반 전 12일 동안 단식을 한 인곡이 음력 7월 14일 “이제 속세를 떠나겠다”고 하자, 상좌 포공 스님이 “내일이면 선원 하안거가 해제하고, 우란분절(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재를 지내는 불교명절)로 좋은 날이니 내일 가시면 안 되느냐”고 했다. 인곡은 “좋고 나쁜 날이 따로 있느냐”고 했지만, 포공은 “큰스님의 경계는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들이야 그렇지 않다”며 다시 간청했다. 혀를 차던 인곡은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이 말이 온 가야산에 전해지자 주지 스님은 “노장이 아파서 정신 없이 하는 소린데, 이런 얘기를 소문내서 만일 내일 돌아가시지 않으면 무슨 망신이냐”며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인곡은 다음날 오전 8시 “이제 가노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란분절(8월19일)이 멀지않았다. 무엇이 화탕지옥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천도인가. 망월사 선방 위로 한 마리 새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노닌다
가야산 지월선사
자신을 낮추며 가야산 산지기 ‘산감’ 자처
|
해인사 행자반장 현산 행자가 “지월 선사가 쓴 이 글씨가 행자들의 행동 규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밤새 성난 폭풍우가 훑고 지나간 때문일까. 산색이 맑다. 특히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가야산 나무들의 기상이 높다.
해인사의 한가한 뒷방에서 극락전 한주 도견 스님(80)이 맞는다. 가야산 나무들을 키우고 지켜냈던 ‘산감’ 지월 선사(1911~73)의 맏상좌(첫제자)다. 일찌기 명예욕을 벗은 그의 스승은 방장이나 조실이 아니라 사찰에서 산을 지키고 가꾸는 직책인 산감을 자처했다. 산승이었다.
도견 스님은 19살 때, 오대산 동관음암으로 출가했다. 스승은 그에게 무엇 하나 시키는 법이 없었다. 밥도 반찬도 스승이 몸소 만들어 제자에게 바쳤고, 제자가 목욕하러 들어가면 벗어놓은 옷까지 빨아 놓았다. 7개월 뒤 동관음암을 찾았던 스승의 도반이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꾸중할 때까지 도견은 중들이 사는 게 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극락전 건너편엔 해인사 행자실이 있다. 갓출가한 이들이 매웁디 매운 절 시집살이를 감내하며 중물을 들이는 첫 관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려를 배출하는 해인사 행자실의 ‘군기’는 방장이나 주지도 어쩌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다. 특수부대의 3년 훈련은 견뎌도 해인사 행자생활 반년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치외법권 지역에 유일한 ‘법’이 있다. 하심()이라고 지월이 쓴 글씨다. 불상도 아닌 족자 앞에 향불이 피워져 있다. 행자실에선 ‘하심’이 가‘부처’다. 행자들은 불상 대신 이 족자 앞에서 계를 받는다.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때문이다. 훈련병처럼 눈빛이 살아있는 행자실 반장 현산 행자는 “처음 이 절에 들어오는 행자들은 누구나 지월 큰스님의 하심을 먼저 배운다”고 말했다.
지월은 말년에 해인사에서 20여 년을 보냈다. 수좌(선승)인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 스님은 승가에 한없이 실망하다가도 지월을 떠올리면 “출가하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단다. 지월은 상대가 늙거나 어리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합장한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고 한다. 상대가 고개를 들고 다시 숙이고 3~4번을 반복할 동안에도 지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괴팍한 행실 유명하다 겸허와 자비 대명사
해인사 행자실 ‘법’…뺨때린 사람 손잡고 “얼마나 아프냐” 위로
|
뺨 때리자 “손 얼마나 아프냐’ 위로 |
지월은 해인사를 찾는 객스님의 바랑을 들어주며 출가 본사와 은사 스님을 물었다. 그리고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도량에서 오셨습니다.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스승을 두셨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공부뿐입니다”라고 했다. 귀찮은 마음에 거드름을 피우며 법명을 묻던 객스님은 그가 가야산에서 성철 선사가 유일하게 ‘존대’해 마지 않던 지월인 것을 알고는 자지러지게 놀라곤 했다. 누구에게나 ‘보살’이라고 불렀던 그의 겸허와 자비는 범인의 경계가 아니었다. 한 손님이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지월의 뺨을 때리자 지월은 얼른 그의 손을 쥐고 “얼마나 아프냐”고 했고, 말과 표정과 행동이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진실하기만 했던 천진한 그 모습을 본 그 손님이 눈물을 흘리며 대참회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승려들도 초심이 흔들리고, 독신 출가자의 고독한 삶에 크게 방황하기도 한다.
“고래등 같은 지붕 아래서, 거울 같은 장판 위에서, 백옥 같은 쌀밥을 먹으며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우리가 공부 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지월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승려들은 느리지만 온 가슴의 정성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선 가슴이 뭉클해져 현실에 대한 불만을 놓고 다시 수행 정진할 마음을 내었다.
지월이 처음부터 그런 ‘보살’은 아니었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5살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지암 이종욱 스님에게 출가한 그는 이름난 괴각(괴팍한 승려)이었다. 키가 작았지만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성정이 불같았던 그는 얼마나 싸움질을 했던지 삭발한 머리통이 상처투성이였다.
금강산 마하연과 덕숭산 정혜사 만공 선사 회상에서 공부할 때도 그는 대중들에게 쌍욕을 해댔다. 지월은 계율에 철저했던 오대산의 한암 가풍과 달리 자유로웠던 만공을 치받기 일쑤였다. 어느 날 지월은 사람들이 생불로 떠받들던 만공의 행실을 공개적으로 힐난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3일 뒤 한 승려가 산 위에서 서쪽을 향해 합장을 한 망부석을 발견했다. 지월이었다. 산문을 박차고 나간 뒤 그 자리에서 그대로 3일 동안 삼매에 들어 전혀 다른 경계를 체험한 것이다. ‘휴휴경휴휴 만해상파정( ·한 생각을 놓고 또 놓아버리니 온 바다의 파도가 고요하도다)’ 지월은 만공에 대한 분별과 시비마저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보살의 세계를 열었다. 전북 완주 수봉산 요덕사 선승 대선 스님(65)은 수덕사 방장 벽초 선사가 “진승(진짜중)? 지월 스님이 진승이지”라고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만공의 제자인 벽초는 누구라도 큰스님입네, 도인입네 하는 꼴을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벽초 앞에선 큰스님 행세를 할 수 없었다. 그런 벽초가 자신이 유일하게 부처님처럼 존경하는 만공을 힐난한 지월을 ‘진승’으로 꼽았으니, 어찌 범인의 경계로 헤아릴 수 있을까.
‘달(깨달음)’을 말하는 설법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작 달로 안내하는 나침반과 손가락은 없다고 한탄한다. 이제 어디에서 ‘달을 가리키는’(지월·) 나침반을 찾을 것인가. 해인사 뒷방 한주의 얼굴은 맑고, 행자들의 숙인 고개는 깊고, 가야산의 나무는 높고 푸르다.
보림사 백봉거사
|
매주 토요일 밤 철야로 정진하고, 1년에 두차례씩 1주일간 일체 눕지않는 용맹정진을 하며 백봉의 선풍을 잇고 있는 서울 정릉 보림선원의 재가 선객들. |
삭발 출가 않고도 “일체가 허공” 깨달아
서울 정릉 청수장의 미로를 오르며 보림사를 찾는다. ‘나를 깨닫자’. 가파른 언덕 위에 쓰인 한마디가 미망을 그치게 하는 보루다. 아담하지만 청정하다. 보림선방에 들어서니 적막하되 깨어 있다. 20여명의 재가 선객들이 토요 철야정진중이다. 허공을 떠받친 허리가 곧다. 그들의 앞과 뒤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한 노인이 서 있다. 백봉 김기추 거사(1908~85)의 사진이다.
백봉은 출가 승려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 20년을 하루 같이 정진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
백봉은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일제가 만든 일본인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고, 그보다 먼저 생긴 부산상고를 제2상업학교라고 지칭하는 데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했다. 20살 때엔 부산청년동맹 초대 총무와 3대 위원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다 1년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다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본 관헌에 체포돼 사형수 감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약소국 민족으로서 속박된 삶의 연속이었다.
1950년부터 고향에서 부산남중·고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하던 백봉에게 ‘자유의 날’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백봉이 한 지인과 함께 청주 심우사를 찾았다. 백봉은 주지 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백봉은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자 일념으로 집중했다.
항일운동·교육사업 하다 청주 심우사서 득도 경지
“말법 시대의 등불” 칭송…“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다”
드센 거사 선풍의 발원지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백봉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은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 순간 백봉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백봉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이었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백봉은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은 금강경 한 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
보림사 백종거사 |
<유마경>에선 붓다가 제자들에게 유마거사를 병문안토록 하자 사리불과 목건련, 가섭 등 10대 제자와 미륵보살까지도 유마거사의 법력을 감당해 낼 수 없다며 유마거사를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백봉을 가리켜 욕설법문으로 유명한 춘성선사는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거사”라고 불렀고, 탄허선사는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을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84)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노구를 불사르고 있다.
70년대 초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 선사는 백봉에게 “삭발출가해서 조계종 본산 조실을 맡아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봉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절대성 자리를 깨치는 종교가 특히 기복과 상대성 시비 놀음에 빠져 있음을 간파했다. 중국에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운 양무제의 공덕에 대해 “없다”고 잘라 말해버린 달마대사처럼 백봉은 상대 세계에 현혹된 알음알이를 부수는 벼락이었다.
백봉은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누구냐,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놈이 누구냐”며 “빛깔도 소리도 없는 바로 그 자리, 허공이 본바탕이고, 법신”이라며 천기누설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조 마지막 한의학자인 무위당 이원세를 비롯한 서운·춘당 선생과 연화당·일심행 보살 등이 각곳에서 백봉의 뜻을 이었고, 국민대 김문환 총장, 전창렬 변호사, 인천지검 김진태 차장검사, 한국과학기술원 감직상 연구원 등도 백봉 문하생이었다. 또 백봉을 직접 모셨던 보림회 총무 전청봉씨와 ‘우리는 선우’ 이사장인 성태용 건국대 교수와 외국인노동자쉼터인 ‘사명당의집’ 대표 김광하씨, 불교집필가 장순용씨 등이 거사선풍을 드날리고 있다.
허공을 걷어잡는 보림선방을 나서니 다시 허공이다. 산문 밖 역시 허공이다. 일체가 허공이라는데 거리의 온갖 풍경은 대체 무엇인가. 한 선객이 준 테이프에서 들리는 너털웃음 섞인 백봉의 목소리가 그림자에 현혹되는 버릇을 다시 통쾌하게 날린다. “우주가 한바탕 웃음 아닌가. 하하하”
남장사 혜봉선사
|
남장사 관음보전 옆에 핀 무궁화. 남장사엔 혜봉선사가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궁화가 경내 곳곳에 피어 있다. |
법당에 태극기 그려두고 민족해방 발원
관운 좋던 대한제국 관리 망국 현실 맞아 출가 구도
“일본 망한다” 희망 전파…해방뒤 왕정복고에 반대
경북 상주 노음산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니 남장사다. 아담하고 정결한 절 입구에서부터 길손을 맞이하는 꽃이 눈에 띈다. 무궁화다. 일주문 안 곳곳에도 무궁화가 웃고 있다.
을사보호조약(1905년) 직후 남장사에 온 조선의 관리가 있었다. 고종을 보필하던 정4품인 궁내부 주서 이종국이었다. 18살에 진사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간 준재로 우의정의 딸을 규수로 맞아들였으니, 평탄한 나라였다면 그만한 복록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망국의 다리를 건넌 기막힌 현실에 동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그는 나라와 자신의 길이 다한 곳에서 불도를 열었다. 그가 혜봉 선사(1874~1956)다.
혜봉은 이런 속세의 신분을 감춘 채 치열한 구도에 나섰다. 이미 사서삼경과 같은 유학에 통달했던 혜봉은 불경의 요지를 꿰뚫었다. 이어 본격적인 참선에 들어갔다. 직시사에선 곡기를 끊고 솔잎 가루로 연명하는 ‘벽곡’을 감행했다. 이 때 궐내에서 그의 인품을 우러르던 상궁과 나인들이 직지사로 시봉하러 찾아오자 그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혜봉은 멀리 함경도 안변 석왕사를 거쳐 경허 선사의 맏상좌인 수월 선사를 찾아 법거량을 벌였다. 이 때 글을 모르는 수월은 선객들에게 <선문촬요>를 강의하도록 혜봉에게 청했다고 한다. 혜봉이 통도사에 머물 때는 한 유생이 찾아왔다. 전 세계에 선불교를 알린 숭산 선사의 스승 고봉 선사였다. 양반으로서 안하무인이었던 고봉은 통도사에 들어서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여보게, 거 누가 내 머리카락 좀 깎아주게나!”라고 반말지거리를 늘어놓았다. 그 때 승려들이 고봉을 데리고 간 곳이 혜봉의 처소였다. 혜봉 앞에서 고봉은 순한 양이 되어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문에 들었다.
|
법당에 태극기 그려두고 민족해방 발원-남장사 혜봉 선사
|
혜봉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거쳐 남장사 관음전 조실로서 선·교를 넘나들며 납자들의 뮐을 깨웠다. 동국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국 불교학의 태두 뇌허 김동화 박사(1902~80)도 그가 길러낸 제자다.
그러나 조선의 지사로서 늑대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동포와 민족의 모습을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남장사 보광전의 철불상인 비로자나불(보물 990호)은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들면 스스로 땀을 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은 이 철불 위 천장에 태극기를 그려두고 민족의 해방을 발원하고 또 발원했다. 그의 애국 정신을 본뜬 제자들은 한결 같이 3·1만세 등 독립운동에 나서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당했다. 그런 제자들의 전력 때문에 일본 순사들은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혜봉이 “제발 가문의 대만 이어 달라”는 간청을 거절치 못하고 떨어뜨린 일점 혈육이 1955년부터 최근까지 조계종 비구니회 회장으로서 비구니들의 어머니 역할을 해온 광우 스님(79)이다. 14살 때 남장사로 출가했던 광우는 혜봉이 늘 끼고 있던 서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이 손수 글을 써서 만든 서첩으로 한쪽엔 불경이, 반대쪽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광우는 순사들이 들이닥치면 큰스님이 고초를 겪을 것이 우려돼 난중일기 부분을 뜯어내 버렸다가 나중에 혜봉에게 들켜 큰 꾸중을 들었다.
또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총독 미나미가 개최한 31본산주지회의에서 호통을 치고 나온 만공선사에 대해 ‘할의 소감’이란 글로 칭송했고, 그의 방엔 ‘견리사의 견위수명’( ·눈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쳐라)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을 걸어두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힘이 영구할 것 같아 많은 이가 매국으로 일신의 안녕을 도모할 때도 혜봉은 남장사를 찾아온 지사와 일본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끝이 다 와 간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은 뒤엔 옛 궁의 동료들이 조선왕조 복고에 앞장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석양이 노음산을 넘는다. 아침에 피었던 무궁화도 다시 지기 시작한다. 무상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조국의 현실을 절망할 때 희망을 노래하고, 다시 옛 왕조의 전설에 집착할 때 단호히 허망함을 직시한 혜봉이 심은 무궁화가 말 없는 법문을 하지 않는가. 태양은 아침잰 다시 떠오르고, 무궁화도 다시 피어난다고.
불국사 정영 선사
|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뒤로 푸른 노송들이 서 있다. |
흙·물·불·바람으로
흩어진 ‘무소유은자’
“스님, 출가자는 절대로 술 마시면 안 됩니까?”
“…”
“스님, 출가자는 절대 연애도 해서는 안 됩니까?”
18살에 출가한 효림 스님(실천불교승가회 의장)이 정영 선사(1925~95)에게 물었다. 이제 막 세상사에 눈을 떴지만, 자신의 몸엔 이미 승복이 걸쳐져 있었다. 마침내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을 은사나 다름 없는 사형(같은 은사에게 출가한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영이 말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세속 친구들처럼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던 효림이 그토록 원하는 답이었지만, 청정하기 그지 없이 살아온 사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깡패가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선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중이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
“어떻게 마시는 것이 중답게 마시는 것입니까?”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중이 술을 마시고, 중이 연애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칭찬 받을 행동만 해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서 박수받기 위해 한 것이라면 수행에 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라도 수행을 돕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회주로 있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효림은 “정영 스님의 답은 조사 어록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늘 이렇게 살아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영은 세상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선사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35년 가운데 20여년을 경북 문경 김용사 금선대와 상주 남장사 중궁암 등 깊은 산에서 홀로 정진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조용하기 그지 없는 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월남한 뒤 대학을 다니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북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남쪽에 혼자 남게 됐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다녔다. 전공은 수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상공부 특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재직했으나 자유당 정권 시절 공무원들의 부패상에 절망해 사표를 내고 중·고교의 교사가 됐다. 그러다 용성 선사의 제자로 서울 대각사에서 ‘각(깨달음) 운동’을 펼치던 소천 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에겐 오직 수행 뿐이었다. 신자도 두지 않았다. 금선대에서 지낼 때 산에서 길을 잃어 죽을 뻔하다가 목숨을 건진 한 보살이 유일한 신자였다고 한다. 말 없이 조용한 그의 미소를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평화를 느꼈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그는 어떤 직위도 갖지 않았다. 한 때 태백산 각화사 주지를 맡았으나 수행 잘하는 제자를 그르칠까 우려한 은사가 당장 그만두라고 하자 그날로 주지직을 던지고 숨어버렸다.
세상에 ‘절대 안돼’ 란 없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수행정신 잃지말라 강조
입적 전날 링거뽑고 돌아와 옷·물건 나눠주고 ‘공수거’
|
지금까지 보아온 스님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스님으로 정영 선사를 꼽으면 회고하는 효림 스님. |
아집에서 해탈하는 것이 불교지만 승려는 승복에 갇히고, 선승은 ‘화두선’에 갇히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정영은 토굴에서 “혼자 살다보니 내가 중인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에겐 벽이 없었다.
참선을 하던 효림이 사회활동에 나선 것을 마뜩해하지 않았지만, “진실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뜨는 법”이라며 눈 뜬 시민사회운동을 하도록 경책했다.
젊은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행만 해 그의 폐엔 동전만한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고, 몸은 대꼬챙이처럼 바짝 말랐었다. 경주 불국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정영은 병원에 입원했으나 아무도 몰래 주사바늘을 뽑아버리고 절에 돌아왔다. 스님들이 “왜 벌써 오셨느냐”고 묻자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정영은 입적했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그의 방엔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몇 개의 옷과 물건까지도 미리 다른 수행자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였다. 책상엔 절에서 준 차비 등을 모아 5백만 원이 든 통장을 “화장비로 쓰라”는 메모와 함께 남겨두었다. 빈 몽뚱이로 인해 사중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다운 처사였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온데다 전국의 도로가 체증을 빚는 설날 전날에 떠나 장례식에 누구도 오기 어려웠다. 그의 제사도 절 집안이 가장 바쁜 설 전날이기에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효림이 방에서 혼자 지낼 뿐이다. 그의 몸은 인근 화장터에서 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그의 돈은 학승들이 보는 책을 사는데 보시됐다. 그는 상좌(제자) 한 명 두지 않았다. 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의 뜻에 따라 그를 기리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효림이 소중히 간직했던 사진조차 1998년 수해 때 보광사 안 설래당과 함께 쓸려가 사라져 버렸다.
최근 스님들이 골프연습장을 짓고, 고급차를 굴리는 등 사치스런 생활로 빈축을 사고 있는 불국사는 일체 무소유의 은자가 빈몽뚱이마저 벗어버린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 경내엔 노송이 많다. 산소와 그늘과 솔방울과 솔향까지 아낌 없이 주고 빈몸으로 서서도 늘 푸른 것은 어인 일일까.
‘떠돌이’ 혜수선사
마지막 여행길도 구름 가듯 떠났다
|
산문을 폐쇄하고 선승들이 정진하는 경북 문경 희왕산 봉암사 경내로 한 선승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땅 위 봉암용곡엔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희왕산을 넘어온 구름들이 흐른다. 사시사철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봉암사 납승의 발걸음 또한 날래다. 머무르지 않은 떠돌이 괴각승 혜수의 그림자가 아닌가.
이 인근 문경 농암에서 1940년(추정)에 태어난 혜수는 16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이곳 봉암사 희랑대 토굴 등에서 잠시 정진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80년대 초 불과 40여 살로 입적했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는 늘 선방에서 안거(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하는 집중 참선 수행)가 끝나면 바랑 하나 메고 곧장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틀도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양말이 흘러내릴 정도로 황새처럼 가는 다리로 날 듯이 산을 탔다. 1년이면 그렇게 전국의 산과 절을 세바퀴씩 돌 정도였다.
그와 몇 차례 결제를 함께 했고, 이곳 희랑대 토굴에서 정진하던 그를 지켜본 실천불교승가회 의장 효림 스님(53)은 혜수를 ‘이 시대 마지막 괴각승’으로 기억한다. ‘괴각’이란 ‘엉덩이에 뿔난 소 처럼 괴팍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상원사에선 주지가 절 돈을 착복한 채 대중에게 소홀히 하자 똥을 담아 불전에 올려놓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외곬수였다. 장부가 문을 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였기에 하루는 함께 만행하던 도반들이 동화사에 앞질러가서 천왕문을 잠가버렸다. 그러나 천왕문 옆은 툭 터져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혜수가 들어오지 않자 도반들은 화가 나서 돌아갔는다가보다며 그냥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서 천왕문에 나와 보니 혜수는 그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도반들이 사죄했지만 그는 “밤새 서서 참선을 했다”며 태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혜수는 평소 하던 대로였다. 매일 장좌불와(눕지 않음)한 그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실 있게 절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동해 삼화사 주지 원명 스님과 경북 상주 남장사 관도 스님이 입을 맞춘 듯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도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엉덩이 뿔난 소’ 괴각승
온나라 산·절 떠돌며 눕지도 않고 매일밤 참선
“앉은채 떠날수 있나” 말에 그자리서 찻잔 든채 입적
원명은 혜수와 한겨울에 상원사에서 북대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오대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원명은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눈에 빠져 눈밭을 걸을 수 없는 털신을 신고 있던 혜수는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원명은 농구화를 신고도 발이 시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혜수는 맨발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곤 북대에 도착해선 얼음물에 발을 담가 얼음을 빼냈다. 원명은 “육체의 고통정도는 아예 초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초인적인 수행력의 결과였다. 혜수가 해인사 강원에 다닐 때였다. 동안거 중 음력 12월 8일 성도절(붓다가 깨달은 날)이 되면 대중들 가운데 희망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용맹정진(전혀 눕지 않는 좌선)을 했다. 선원에선 괴팍한 혜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용맹정진 시작 날부터 혜수는 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들이 처소로 돌아와 보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스님들이 코를 틀어막고 탁자 밑을 보자 혜수가 그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굳어진 채로 펴지지도 않아 병원에 가서야 펼 수 있었다. 일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똥오줌도 그대로 누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육체를 조복 받았다.
혜수는 시력이 나빠 글씨를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역대 조사들이 안경 쓴 일이 없다”며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혜수는 대웅전에 있는 화엄 탱화 속 신중의 눈에 바늘을 꽂으며 “진정 이 신중에게 영험이 있다면 이렇게 해를 끼쳤으니 내 눈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영험을 실험했다고 한다. 두려움 많은 세인에겐 기도 안 찰 실험이다. 선승인 관도 스님은 “틀에 박힌 격식을 거부하고, 몽둥이로도 과감히 실험을 하는 그런 선승을 남의 눈치나 살피는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혜수는 80년대 초 선방 결제 뒤 남장사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날 사자평을 넘으며 젊은 선승들에게 혜수는 “선사라면 선사답게 좌탈입망(앉은 채로 입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양 표충사에 도착해 객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선승이 “그럼 스님은 좌탈입망할 수 있습니까”하며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혜수는 찻잔을 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이 가듯, 옷을 벗듯 혜수는 그렇게 허물을 벗어버렸다. 사망을 확인하는 경찰도 ‘앉아 있는 주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의 독침을 맞으면 즉사한다는 소문도 있는 때여서 병원으로 옮겨 해부까지 했으나 독침을 맞거나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그가 방장이나 조실이었다면 달마나 육조 같은 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전해진 좌탈입망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세상이 요란할 일이었지만, 떠돌이의 법구는 조용히 불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탑도 세워주는 이 없었고, 상좌(제자) 하나 없으니 그를 기리는 제사도 없다.
희왕산의 나무가 소리 없이 물들고 있다. 옷을 벗으려나 보다. 혜수가 간 것도 가을이었다.
도봉산 무문관 제선 선사
|
제선 선사가 6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좌선 정진했던 도봉산 무문관. |
사방 막힌 방안에서 천하를 깨닫다
천축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를 말한다. 도봉산역에서 1시간 가량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가파른 길을 따라 도봉산에 오른다. ‘천축’으로 가는 길이다. 인수봉 못지않은 미륵봉 기암 아래 천축사가 숨어있다. 천축사 안쪽 외진 곳엔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이 있다. 무문관이다. 무문관이란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엔 출입문까지 봉쇄한 방이다.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수행자가 견성(깨달음)해 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천지를 활보할 대자유를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들어간 감옥인 셈이다.
2001년과 2002년 겨울 기자는 이곳에서 이 무문관의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무문관에선 1차로 1966~71년에, 2차로 72~77년에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뜬 정진이 있었다. 2차 때 유일하게 6년 정진을 마친 원공은 그 뒤에도 이곳 무문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십여 년을 차 한 번 타지 않고 걸어만 다녔던 원공은 남들이 준 여비를 꼬박 모은 돈 1천여만 원씩을 두 차례나 통일을 위한 기금으로 써달며 기자를 통해 <한겨레>에 전했다. 그러나 원공 자신은 끼니 때가 되자 라면을 스프 없이 끓여 소금만으로 간을 해 아무런 반찬 없이 들고 있었다. 3년 전 홀연히 이곳을 떠난 원공의 소식조차 모른다는 이 절 소임자의 전언에 더욱 허허로워진 가슴팍을 무문관의 전설이 스치고 지난다.
1,2차에 걸쳐 무문관엔 내노라 하는 스님 100여명이 거쳐 갔다. 그러나 1차 때 6년 결사는 단 2명만이 마쳤다. 한 명은 지난해 2월 95살로 입적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6년 결사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려 당시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가슴에 전설로만 남았다.
그가 무문관 선승들 사이에서 ‘가장 철두철미하게 수행했던 수행자’로 알려졌던 제선 선사다. 제선의 화신인가. 무문관 앞에 큰 바위가 산처럼 앉아있다.
|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의 한 방에 수행자가 벽에 한 낙서. 바른 인연을 심어 자신의 근본 성품을 깨달아 생사를 기필코 타파하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느껴진다.
|
어린 아들 갑자기 죽은 뒤 홀대한 개 ‘인과응보’ 깨우침
밥구멍 빼고 꽉 막힌 무문관 6년 정진 뒤 자취 감춰
제선의 전설을 찾아 다시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향했다. 천축사 무문관을 지었던 정영 스님(83)이 다시 무문관을 세운 곳이다. 정영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 선사에게 제선과 같은 해 한 날에 출가했다. 제선이란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고 해서 주어졌다고 한다. 만공 선사로 부터 법(깨달음)인가를 받은 포산은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 삼아 몰려들었다. 정영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선이 “특출했다”고 회고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당차기 그지 없던 제선은 한 번 좌정하고 앉으면 움직이지 않은 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또한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해냈다. 훗날 성철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백련암의 축대는 제선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의 친척집에 묵으며 유학생활을 했던 제선은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똑똑해 그는 식민조국을 독립시킬 제목으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뒤 갑자기 쓰러지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제선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다. 폐인이 될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제선은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을 만났다. 제선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까닭을 모르고선 살 수가 없다”고 말하자 스님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제선은 그 날부터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 뜨고 염불하는가하면 어느 샌가 밭두렁에 가꾸로 처박혀 코를 골고 있었다. 스님은 그 때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42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잠이 사라져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화가난 제선이 불상의 목을 떼버리겠다며 가던 중 소매가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찰라 아들이 다가왔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하면 아들은 도망갔다. 그는 겨우 쫒아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아이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충견이 떠올랐다. 일본 친척집에 머물 때 개가 갑자기 병이 들자 친척아저씨는 그에게 개를 교외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를 애타게 좋아했던 개는 자전거에 매달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개를 떼어내고 도망치다시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는 일주일 만에 집을 찾아 왔다. 그리곤 전과 다르게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선은 인과응보를 깊이 깨달았다.
무문관 6년 정진을 마친 제선은 마중 온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간 뒤 혼자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끝이었다. 누군가는 평상복을 입고 서울의 한 판자촌에 숨어 수행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해의 외딴 섬에 산다고도 했다. 정영은 “소문을 쫒아 남해의 섬에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고 했다.
문 없는 문을, 자취 없는 자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3년 정진을 앞두고 공사 중인 대자암 무문관 방에 들어가 보니 가을 창공이 하나 가득 아닌가.
계룡산 도인 석봉선사
무서운 얼굴 불같은 성격 일거에 버리고 40년 묵언
|
석봉 선사가 머물렀던 계룡산 산중 암자 신흥암 뒤로 천진보탑 바위가 보인다. 석봉이 계룡산을 떠나는 날 산짐승들이 밤새 울부짖어 계룡산이 발칵 뒤짚혔다고 한다. |
충남 아산 영인산 자락으로 한 노승을 찾아 나섰다. 세상에 드러내기를 전혀 원치 않는 그를 어렵사리 만나는 감회에 젖어 산길을 오르니 막다른 곳이다. 토굴 같은 집이 외로이 서 있다. 노승이 산에서 주워 까놓은 것을 보이는 쥐밤들이 널린 방에 한 노승이 앉아있다. 혜철 스님(81)이다. 80대 노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허리가 꼿꼿하다. 이것이 수행자의 힘인가. 강하되, 위협적이지 않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을 덮는다. 그러나 그는 불을 켤 생각조차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한 발을 옮길 수 없는 칠흑 같은 밤 중에도 계룡산 숲 속을 뛰어다녔다는 그다. 어둠 속에서 호랑이 불빛 처럼 빛나는 혜철의 안광이 이 세상에 단 한차례도 드러난 적이 없던 그의 스승 석봉 선사(1890~1971)의 삶을 토해낸다.
석봉은 무섭게 생긴 인물이었다. 머리는 까지고 입술은 튀어나오고 눈빛은 상대의 심장을 찌르듯해 마치 사천왕 같았다. 전남 곡성 겸면에서 태어난 석봉은 7살 때 몸이 아파 7살에 곡성 관음사에 맡겨져 기도를 시작했고, 그것이 출가길이 되었다. 불경을 익히기 위해 지리산 화엄사로 옮겨간 석봉은 구례중학교를 다니면서 사천왕 같은 얼굴 값을 하기 시작했다. 유도 3단이던 그는 우리 밖을 나온 산짐승처럼 구례시내를 주먹으로 휩쓸고 다녔다. 보다 못한 구례군수가 화엄사 주지에게 그를 산문 밖에 내보지 말도록 편지를 쓰자 석봉은 “네가 군수면 군수지, 왜 남의 발까지 묶으려고 하느냐”며 군청을 뒤짚어놓았다.
강렬한 눈빛 ‘사천왕’ 인상…유도 3단 길거리 주먹질도
‘화’ 놓기로 결심하고 정진 “참는 장사 당할 자 없다”
그가 38살에 참선을 하겠다며 만행에 나섰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1년 간 참선 정진한 그는 금강산에서 마가목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선방으로 도반과 함께 갔다. 그런데 하루 밤 자고나니 지팡이가 없었다. 화가 난 석봉은 “오늘 밤 안으로 지팡이를 가져다놓지 않으면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 하룻밤을 자고 나자 지팡이는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상원사 선방에선 그의 도반의 방부(살기를 요청)는 받아주면서 그의 방부는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참선길이 막히게 된 그는 ‘왜 방부를 받아주지않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함께 온 도반이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느냐”며 “스님이 화를 내면 꼭 사천왕 같아서 다른 스님들이 무서워 함께 살기를 꺼린다”고 말해주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남에게 ‘위협’이라는 얘기였다.
석봉은 그 순간 금강산에서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한 스님이 마하연 돈도암에서 있는데, 마당에 있던 뱀이 부엌으로 들어가 타고 남은 재를 묻혀 자기 몸으로 마당에 글을 썼다. 자신은 원래 홍도 스님이었는데, 아파서 누워 있다가 바람에 문이 ‘확’ 닫히는 바람에 발이 끼었다고 단 한 번 화를 낸 과보로 이렇게 뱀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
무서운 얼굴 불같은 성격 일거에 버리고 40년 묵언-계룡산 도인 석봉선사
|
그 길로 석봉은 상원사 조실 한암 선사 앞에 가 3배를 올렸다.
“진심(화)을 놓겠습니다. 방부를 받아주십시오.” “진정 진심을 놓을 수 있겠는가?” “저는 한다면 합니다.”
그 순간 사천왕 처럼 무섭던 석봉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변한 그의 모습이 믿기지 않던 선객들이 처음엔 시험 삼아 욕을 해도 빙그레 웃을 뿐이었고, 나중엔 발로 차도 웃을 뿐이었다. 그 뒤 열반할 때까지 40여년 간 그는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말 외엔 입을 여는 법도 없었다. 사실상 40여년의 묵언이었다.
혜철이 9년 간 모시고 산 계룡산 신흥암에서도 석봉의 말 없는 정진은 한결같았다. 신흥암은 천연바위 속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있어 가끔씩 방광한다는 천진보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흥암에서 방광하는 것은 천진보탑만이 아니었다. 전기불도 없던 시절 신흥암에서 기도하던 불자들은 칠흑 같은 밤 석봉의 방에서 방광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말 없던 석봉이 남긴 유일한 문답이 있다. 그는 “누가 가장 센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왕이나 천하장사나 호랑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참는 장사를 당할 자가 없다”며 “인욕(참음)이 제일 강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석봉의 ‘5가지 제일’ 법문이다. 그는 이어 “무엇이 가장 이로운 것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지위를 답했다. 그러나 그는 “무병이 이롭다”고 했다. 또 그는 이어 “제일 부자는 지족(자족함을 앎)한 사람”이며, “제일 친한 사람은 부모, 형제나 자신의 잘못을 부추기는 이가 아니라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주는 친구”이고, “제일 즐거움은 도를 깨쳐 알고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봉은 3일 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앉은 채 열반했다. 충남 보령 선림사에서 보관중인 그의 좌탈열반 사진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석봉의 도반인 도봉산 욕쟁이 선사 춘성은 석봉의 앉은 법구 앞에서 좌선을 하고 나서는 “일체 집착을 벗어나 나로서도 대답할 수 없는 법을 설하고 있다”며 3배를 올렸다. 석봉의 법구를 다비하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려 사리가 한말도 넘게 쏟아진 것이다. 사리는 그의 뜻에 따라 산에 뿌려졌고, 어떤 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혜철의 방에서도 긴 침묵이 흐른다. 어떻게 화가 그런 과보를 받는지, 왜 많은 중생을 두고 홀로 산에 사는 지 질문도 사라져 버렸다. 계룡산 아래서 사 간 감을 함께 나누는 사이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가을 바람이 답할 뿐이다. 가을 바람에 감은 이렇게 익었고, 온 산하가 붉게 물들고 있지 않은가.
금강산 철우선사
|
철우 선사가 호미로 밭매고 손수 빨래하며 조용히 지내던 구미 금강사 |
주름진 선승도 머리 조아린 ‘소년 조실’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 선승들이 찾아왔다. 경남 통영 용화사 도솔암 선방의 선객들이었다. 경허 선사의 법제자로 천진도인인 혜월 선사를 조실로 모시러 온 것이다. 그런데 혜월은 그 조실청장(조실 요청서)를 한 젊은 수좌 앞에 놓고는 3배를 올리라고 했다. 도솔암 선승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새파란 젊은 중이 아닌가. 그가 불과 27살에 선을 상징하는 조실로 추대돼 ‘소년 조실’로 불렸던 철우 선사(1895~1979)였다.
경북 구미역에서 금오산 쪽으로 내려가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금강사다. 역에서 10분 거리다. 철우가 말년 20여년을 지내다 열반한 곳이다. 그를 시봉한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59)이 맞는다. 스승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무신경인 그가 수차례 간청 끝에 입을 뗐다.
|
주름진 선승도 머리 조아린 ‘소년 기질’ 금강산 철우 선사
|
철우는 경남 밀양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마음 둘 곳이 없던 어린 철우는 그 해 밀양 표충사로 출가했다. ‘도를 통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철우는 불과 15살에 참선 길에 나섰다. 해인사 선방에서 한 철을 보내고 팔공산 현풍 유가사 도성암에 있을 때 함경도에서 참선하러 온 한 수좌의 입방이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한 입이라도 덜겠다며 솔잎가루 생식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10년간 생식과 함께 묵언(말을 하지 않음)을 하니, 그는 묵언수좌 또는 생식수좌로 불렸다.
13살 고아된 뒤 출가… 15살 참선 길 나서
10년간 솔잎생식·묵언… 일제 고문 수행으로 견뎌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자리를 옮긴 철우는 삐죽삐죽한 철사를 얽은 모자를 만들어 쓰고, 이를 줄로 시렁과 연결했다. 잠을 쫓기 위해 졸면 이마가 철사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는 이런 고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다 홀연히 안목이 트이니 불과 18살이었다. 선방을 다니는 도중 그는 동굴에서 연명하며 정진하기도 했다. 어느 해 한겨울 금오산을 지나던 철우는 마애석불 옆 용샘굴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다. 밖에 눈이 하얗게 쌓인 날 그가 추위를 잊은 채 선정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등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그의 등에 기대 앉은 호랑이의 꼬리가 무릎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인기척을 하니 호랑이는 살짝 일어서 자리를 떴다고 한다.
호랑이도 알아본 도인을 일제는 알아보지 못했다. 철우가 경남 양산 미타암에 머물 때 부산·경남의 독립투사들이 3·1만세운동 이후 독립궐기문을 지어와 학식이 뛰어난 철우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이로 인해 독립지사들이 굴비처럼 엮여 일본경찰에 잡혀갔고, 마침내 궐기문 최후 작성자가 ‘미타암 벙어리 스님’이라는 게 드러나고 말았다. 철우는 그 일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꾸로 묶여져 코와 입에 고추가룻물이 부어졌고, 손톱과 발톱엔 못이 박혔다. 그러나 철우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묵언 중이었기 때문이다. 철우의 엄지발톱과 엄지손톱을 그 뒤 못 박힌 상처 때문에 늘 두개로 갈라져 자랐다고 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다시 수행 길에 오른 철우는 묘향산 금선대에서 홀로 솔잎으로 연명하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겁의 꿈에서 깨어났다. 당시 국내 최대사찰인 묘향산 보현사엔 경허의 맏제자로 평생 머슴처럼 숨어 일하며 헌신하다 간 수월이 조실로 있었다. 철우의 견성을 한눈에 알아본 수월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납자를 제접하라”고 명했다. 철우가 일주문을 나설 때도 수월은 일주문 옆 감자밭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었다. 드디어 묵언을 끝내고 포효를 시작한 철우가 “남쪽에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할까요?” 하고 물으니, 수월은 “호미를 들고 두 팔을 벌린 채 휙 돌고 춤을 추며 ‘여시여시’(如是如是·이렇게 이렇게)하라”고 했다. 그러니 철우가 밭으로 들어가 수월의 호미를 건네 받아 춤을 추며 ‘여시여시’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러자 수월은 “(깨달음을)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철우를 보냈다.
철우가 남하해 경허의 두 번째 제자인 혜월을 찾아가자 혜월은 단박에 그의 견성을 인가하고, 법제자로 삼았다. 철우는 이 때부터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대구 동화사 금당, 파계사 성전암, 금강산 마하연,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등에서 ‘소년조실’로 사자후를 토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수월과 혜월처럼 직접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손수 자신의 빨래를 하며 살았다. 말년엔 더욱 조용한 삶이었다. 그러니 뉘라서 그의 금강체를 바로 볼 수 있었을까.
철우가 열반에 들어 다비를 위해 그의 법구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서자 마른 하늘에 오색 광명이 떴고, 영결식 때와 다비식장에서 법구에 불을 붙일 때 다시 이처럼 희유한 현상이 반복됐다.
한 때는 소년조실이었고, 한 때는 노승이었던 철우는 이제 어디로 갔는가. 그의 오색광명을 기려 금강사에 제자들이 세운 ‘적조(寂照)탑’을 뒤로 하고 돌아서니, 철우가 열반 전 한 불자의 죽음에 즈음해 읊은 만사가 다시 노소와 생사의 꿈을 깨운다. “색신을 바꾸어서 법신으로 돌아가니/한 줄기 신묘한 광명이 오래오래 빛나는구나.”
남장사 혼해선사
|
경북 상주 노음산 남장사. 혼해가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젊은 선승들에게 불성에 대한 의심의 불길을 지핀 곳이다. |
세속서도 어김없는 ‘참’ 승려
6·25 전쟁 중이었다. 대찰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경남 함양읍의 조그만 사찰엔 일흔이 넘은 노승이 피난 와 있었다. 이 절엔 전라도에서 피난온 20대 여인이 공양주(부엌살림을 맡은 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갑부의 딸로 해방 전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미모의 여인이었다. 좌익엘리트로 동경제대를 나와 소학교 교감을 하던 그의 남편이 전쟁 중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시어머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숨어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노승은 법회 때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임을 이실직고했다.
그 노승이 바로 금강산 장안사의 대강백(강사)이자 해방 전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훗날 우리나라 선의 본가가 된 해인총림의 초석을 놓은 혼해 선사였다. 청정 독신승이 드물던 시대에 청정하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고승이 남편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했으니 “망령 난 중”으로 손가락질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흔 넘긴 청정 독신승 한 여인과 마음 맞아…
마을 내려와 2남1녀 두고도 예불·좌선 당당한 정진
|
여인 품속서도 어김없었던 진흙 속 연꽃-남장사 혼해 선사
|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혼해는 16살에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 금강산에서 경을 본 뒤 경북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내원암 등의 선방에서 정진한 선객이었다. 혼해는 젊은 시절부터 김천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시장통의 번잡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 때 혼해는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화두심을 놓지 않아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물을 한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오고가도 춥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노승은 세속에 살면서도 해인사 조실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규율이 엄한 대찰에 머물다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속가에 나오면 곡차(술)를 들고, 곰방대에 담배를 무는 게 예삿일이었지만, 혼해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2남1녀의 자식을 두고도 그는 새벽부터 예불을 하고, 경을 읽고, 좌선을 했다. 함양에서 그를 시봉한 김명호 거사(86)와 해인사 한주 송월 스님(80) 등이 그를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혼해는 이념다툼과 전쟁의 와중에 기구한 운명이 된 여인이 사형 당하거나 평생 옥살이로 삶을 마감할 옛남편의 고난에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쌀 30가마를 들여 그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혼해의 노력으로 여인의 남편이 마침내 석방되자 혼해는 그 여인을 옛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나 사상범 일제 재검거령이 내려져 남편은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갔고, 여인은 다시 함양에 왔다.
혼해의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를 아는 대찰에선 그를 다시 스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상주 남장사에 머물 때 윗반에선 태백산 각화사 서암의 전 선원장 고우 스님이, 아랫반에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장 대원 스님과 구미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 등이 배웠다.
당대의 대강백이던 고봉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고우는 어느 날 혼해를 보고 짧다란 키에도 뭔지 모르게 당당하던 모습에 이끌려 야반도주해 남장사로 갔다. 고우가 방청소와 빨래까지 수발을 들며 가까이 지켜본 혼해는 오랜 세속 생활을 한 뒤였지만 절집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승려들보다 더 어김 없는 승려였다. 특히 그의 강설은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다른 강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금강경>을 배울 때 고우가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에서 걸식을 하시고,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면, “이 행동만으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마쳤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혼해는 끊임 없는 물음으로 학인의 의문을 내면으로 돌렸다. 강사보다는 선사적 면모였다. 대원 스님도 그 시절 좌선을 하던 중 급작스런 혼해의 물음에 “하늘땅이 무너지는” 체험을 했음을 밝혔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속가에 처자식까지 둬 손가락질 받는 처지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노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우는 “그런데도 그가 처자식을 뒀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해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같았으면 그런 분별심은 놓고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흙 속의 연꽃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혼해의 강설이 맴돌던 상주 남장사 일주문 밖 노음산을 지나 속세인 상주 시내로 접어드나 노음산의 그 하늘 그대로 아닌가.
일우 선사
|
일우 선사의 유일한 상좌 정원 스님이 25년째 은거 중인 천안 태화산 평심사에서 스승을 회고하고 있다. |
세상 모르게 설파한 불법… 무게가 삼천근
<깨달음의 자리> 마지막 편 점을 찍으러 충남 천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승가에서 ‘엉덩이에 뿔난 소’처럼 괴팍스런 스님을 불러 괴각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괴각 정원 스님(53)을 만나러, 그것도 불청객으로 가는 때문이다.
정원은 충남 천안 광덕면 매당리 태화산에 25년째 홀로 은거하며, 선종의 결정판인 <벽암록>과 불법의 ‘현묘한 도리’를 밝힌 글을 모은 <현구집>, <태화당 수세록>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그가 쓴 책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입소문만이 선객들 사이에 나도는 은둔의 수행자다.
그 정원은 일우 선사(1918~1989)에게 출가한 유일한 상좌다. 일우는 선승들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방장이나 조실은 커녕 주지 살이 한 번 한 적이 없고, 절 한 칸, 책 한 권, 법문 한 자 남긴 게 없다. 오직 그를 만났던 이들에게 소리 없이 불법의 인을 심어놓았을 뿐이다. 고교 시절 일우를 만나 발심하게 된 씨앗들이 바로 일년 내내 산문을 철폐하고 정진하는 조계종 특별종립선원 봉암사 선원장 정광 스님(63), 20여 년째 지리산 고지 상무주암에서 홀로 정진 중인 현기 스님(63), 그리고 정원 스님 등이다.
절 한칸·책 한권 안남긴 채… 조용히 입으로만 불법 설파
석달간 한숨 안자고 책 독파… 열반 땐 “할말 없다” 입 ‘꾹’
상무주암의 현기 스님은 일우에 대해 묻자 “그 분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평생 남 모르게 살다 가신 분이니, 그렇게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학식이었다고 할만함에도 열반 때 열반송을 묻는 이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입을 다문 일우였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정원도 그와 인연이 있는 선승을 통해 연락을 취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소식만을 전해주었다. 그렇지만 뜻이 있으니 길을 갈 밖에. 태화산의 한 골짜기로 접어들어 끝까지 오르니, 세속과는 다른 별천지다. 두레박처럼 둘러싼 산 가운데 아담한 대웅전과 서재와 잔디언덕과 연못이 한 폭의 그림이다. 평심사다.
“난 우리 스님(일우)하곤 달라. 말 귀도 못 알아듣는 놈들한테 말은 해서 뭐해” 그의 첫마디였다. 그를 종종 찾던 한 여신자가 “남편 사업이 부도나게 생겼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물음에 “망할 것은 빨리 망해야지!”라고 했다는 정원에게 어찌 세간의 대접을 원할 것인가.
그의 불 같은 성정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정원이 일우를 만난 것은 18살 때였다. 불법을 알게 된 그가 도를 찾으러 노심초사하자 먼 친척이 일우를 찾아가 볼 것을 권했다. 일우는 부산 구포에서 다 쓰러져가는 초가의 방 한 칸에 머물고 있었다.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일우는 속리산 법주사 지산 스님에게 출가해 옛 고승들의 선어록을 파고 들었다. 일우는 않아만 있는 것(좌선)을 병신 짓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석 달 간 아예 한 숨도 자지 않고 책을 볼만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진력과 집중력을 지녔다.
일찍이 공부에 힘을 얻은 일우는 그 뒤부터는 산승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속인도 아니었다. 그는 젊은 비구니와 살림을 차려 그처럼 세간의 초가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돈을 줘도 쓸 줄 모를 만큼 불법 외엔 세속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비구니에서 환속한 보살이 그 집에서 하숙을 쳐서 살림을 도맡았다. 일우는 세속에 나오기 전 절에 살면서도 출가 승려가 시줏밥을 얻어먹기 위해선 해야 할 기본적인 염불조차 못해 탁발 나가 밥도 얻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머리도, 수염도, 손톱도 깍지않아, 답답한 보살과 제자들이 깎곤 했다. 그는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씻지 않으면 때가 끼어 답답해서 어찌 사느냐”고 물으면 일우는 “먼지는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있던 제자도 도망갈 법한 그런 일우에 대해 정원은 한 번도 (스승으로서) 의심해 본적이 없고, 그를 보고서야 이 세상에도 ‘현묘한 도가 실재함’을 직감했다고 하니, 숙연이 아닐 수 없다.
일우의 목소리는 호랑이가 포효하듯 우렁차 100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부 선승들만이 그를 알아보고, 통도사, 송광사 등 대찰로 그를 초청해 법을 들었고, 그의 초가를 찾아 법을 물었다. 당시 그와 당대에 알려진 고승들의 법문을 번갈아 들은 선승들은 양쪽을 유치원생과 대학원생 차이 정도로 비교하곤 했다.
그는 누군가 불법을 들으러 오면 하루고 이틀이고, 아예 잠도 자지 않고 법을 설했다. 그러면서도 불법을 벗어난 사담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원이 사는 이 곳에 일우가 열반 전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비둘기호를 타고 10시간 동안 온 일우는 밤 새 한 잠도 안 자고 정원에게 법을 설한 뒤 아침에 공양(식사)을 들고 다시 역을 향해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한 번 말문이 터지니 오줌 쌀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가 쥐어준 무려 4천여 쪽에 이르는 저서 석 질을 짊어지고, 다음에 또 만날 기약까지 하고 산문을 나서니 산문을 오를 때 ‘무거웠던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인가. 천근 같던 마음들도 일우의 몸에 붙은 한갓 먼지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