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修行과 人間의 意識활동
禪修行과 人間의 意識활동*
박 선 자**
본고는 우리 人間존재의 삶의 본질을 밝히고,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바의 궁극의 목적인 행복과 평화 그리고 참다운 자유란 무엇인가
를 해명하고, 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내용으로써 개체의식에 중요성을 두고 있는 논고이다.
현대의 세계적인 전쟁위기와 불안의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人間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져야만 사회의식이 변하고 세계의 의식수
준이 변화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를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보며 人間사회의 삶
의 참다운 변화를 위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 각자의 사고하는방법과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고 정치적 모랄(mor le)의식이 바뀌
어야만 한다고 본다.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것이냐는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우리 人間의 조건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
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 개인의 의식수준을 고양시키는 것이 우선적일 것이다. 개인의 안목과 사유 등이 고양되었을 때
에 그것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의식이란 어떻게 보면 덧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식들이 모여 전체의식을 이
루는 것이므로 그것은 전체성의 의식수준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어질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에
세계의 구원은 개인 각자가 자기의 구원을 실현하도록 실천에 옮길때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참자아를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만이 참답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
의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개체의식이 열려 ego(個我)의 틀을 벗어나 전체성인 우주의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때에 비로소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능력이 가능하게 되며 삶 속에서의 모든 일에 올바른 판단 능력이 가
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자아의 세계인 초월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참다운 인간의 조건의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본고는 여기서
각성된 종교의 가르침, 즉 그 중에서도 불교에서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며 참자아를 찾는 공부 중에 가장 탁월한 수행법인 참선수행을 통
해서 우리는 어떻게 개체의식인 ego의 틀을 벗어나 고양되고 순화된 우주의식으로 열리게 되는가? 그래서 어떻게 우리의 참된 삶이
가능하게 되고, 나아가 인류 모두의 바람직한,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는 탐구이다.
※ 주요어 : 행복, 영원성, 자유, 참자아, ego(個我), 인간의 의식, 존재의 실상, 각성, 초월성, 명상, 선수행, 자성, 계율, 인과, 業, 인식,
실존, 직관력, 마음, 번뇌
1. 들어가는 말
우리 人間존재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삶은 무엇이며 그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한 확고한 인생관을 세우
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 속에 던져진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파도에 밀려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또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분명한 것은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참되고 영원한
행복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마
다 각기 스스로의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우리들 각자의 여러 형태의, 여러 방법의 삶의 모습이 아닐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행복한 오늘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 인간 존재들은 기계문명을 발달
시켰고, 그래서 어느 정도 물질적 혜택은 받고 있으나, 우리 인간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적에 우리는 그로 인해 과연 얼마나 인간
다운 삶의 질을 높여가고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는 대단히 회의적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문명 내지 과학문명이 발달될수록 우리의 인간성은 기계화되고 물질화되어 우리 인간성의 본래적인 순수성을 상실해 가고 배타적
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되어져 오늘날 우리는 세계전쟁의 위기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계속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뀌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우리가 현재만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이대로의 의식구조
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원자탄 전쟁은 시작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아마도 종말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인간은 과
연 바뀔 수 있는가? 그리고 새로운 삶이 가능할 것인가? 등의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人間은 독특한 심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역사의 양상을 변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의 변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변화를 위하여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우리들 각자 자신의 사고하는 방법과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고 정치적 모랄(morale)이 바뀌어야만 한다고 본다.
원자의 시대에 어떠한 정치도 만약에 그것이 국민의 참신한 morale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그것은 별 소용이 없
게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것이냐는,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은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 인간의 조건을 의식적으로 선택 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 개인의 의식 수준을 고양시키는 것이 우선적일 것이다. 즉 개
인의 안목과 사유 등이 고양되었을 때 그것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올바른 안목과 사유 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 학문적인 지식을 많이 획득하고 사회적 일반
상식을 넓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물론 그러한 일들도 삶 속에서는 필요한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는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참자아를 깨닫는 일이라 본다.
그래서 참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일만이 참답게 상황을 변화시킬수 있는 일의 기초가 될 것이다.
참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개체 의식이 열려 ego의 틀을 벗어나 전체성인 우주의식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때 우리의 의
식은 비로소,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능력이 가능하게 되기때문이며, 따라서 삶 속에서의 모든 일에 올바른 판단능력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인간 이 개체의식을 넓혀 ego의 틀을 벗어나게 하여 참자아 의식인 전체성에 대한 의식을 열
리게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人間존재는 의식으로써 세상을 매개로 하여 초월적 세계로 지향하는 잠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Jaspers에 의하면 참으로 철학함이란 초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참다운 '나'(我)에로의 초월을 뜻한다. 그래서 우주와의 일치, 전체성과의 일치가 이루어 질 때에 우주만유에 대한 근본이치가 열리
게 되고 따라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 보고 있다. 고로
우리 인간의 참다운 구원은 근본적인 자유가 현존하는 초월성과의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고 보고 있다.
철학하면서 나는 단순히 경험적 존재로써, 잠재적 존재로써의 나 자신을 초월하여 참다운 존재와의 교류에 들어가기 위하여 다른 존재
로 되어짐을 찾는다. 참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참자아로 되어짐을 뜻한다.
따라서 철학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참다운 존재를 명료하게 밝히는 작업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외부대상에 대한 앎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되게 하는 운동에 의하여 본질적인 존재를 각
성하는 방향으로 완성시켜 가는 작업을 뜻한다.
그래서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 분열의 세계로부터 단일한 존재의 세계로 그리고 경험적 현실로부터 참 존재의 세계에로 지향
하는 길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덧없는 시간적 현실 속에서 현현되는 나 자신은 초월성인 참자아와의 관계에서만 확실성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나 자신의 존재는 허무의 늪 속에 빠지게 된다. 내가 경험적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을 볼 적에 참다운 나 자신을 결코 볼 수
없다. 그러나 초월적 행위만이 한정된 현상 속에서 단순한 경험적 실체로써가 아닌 무게를 부여한다. 내가 초월성을 경험할 때에 비록
그것이 말은 하지 않아도 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갖게된다. 만약에 내가 초월성을 더 이상 못 보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의 존재성이
어두워짐을 느낀다. 고 밝히듯이, 참자아로 되어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人間의 존재는 완전성을 지향하는, 즉 참자아를 찾는 노력으로 일관되는 삶을 살 적에 삶의 참다운 의미가 거기 존재할 것
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人間이란 한편 의지적 존재인 까닭에 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여 참 존재에로 지향하여 완성의 길을 가거나 혹
은 허무를 지향하여 참자아와는 더욱 멀어져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돈에 빠진 삶을 살게되며, 그들이 한나라의 혹은 세계의 중요 정책
을 맡게 될 적에 세계는 무질서와 전쟁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세상사 속에서 개인의 존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덧없는 순간적인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전체도 덧없는 나라는 존재로부터 의존된 것이라 볼 수있겠다.
왜냐하면 나라는 개별적인 실체성을 바탕으로 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전체성도 그것 없이는 하나의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과 전체성의 정신도 개인의 진리 속에 뿌리내린 것이고, 결단의 절대적 성격도 일상적인 삶을 실현하고 있는 수많은 개인에 의
한 역사의 맥 속에서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표리상에는 덧없어 보이는 개인의 morale의 힘은 유일한 실체이며 전체성의 의식수준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어질 수 있는 실
질적인 힘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에 세계의 구원은 개인각자가 자기의 구원을 실현하도록 실천에 옮길 때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참자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Jaspers도 말하기를 우리 인간의 참다운 구원은 근본적인 자유가 현존하는 초월성(참자아의 세계)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초월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참다운 人間의 조건의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각성된 종교와 철학에서 찾을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고는 각성된 종교의 가르침, 즉 그중 에서도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며 참자아를 찾는 공부 중에 가장 탁월한 수행법인 참선수행
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개체의식인 ego의 틀에서 벗어나 고양되고, 순화된 우주의식으로 열리게 되는가?
그래서 어떻게 우리의 참된 삶이 가능하게 되고, 나아가 인류모두의 바람직한 평화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는 탐구(연
구)가 될 것이다.
2. 명상, 참선(參禪)에 대한 개요
'명상이란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묻게 될적에, 그 범주와 방법이 매우 광대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가 일
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내면으로 우리의 의식을 집중시키며 일체의 사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
이다.
그러한 명상활동의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는 참선(參禪)을 들 수가있겠다.그렇다면 참선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으로는 어떠한 것을 들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다시 말하여 참선 생활은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며 우리인간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禪이란 일반적으로 다른 명상처럼 무조건 내면(內面)으로 그냥 집중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禪은 사유수(思惟修), 즉 바른 생각으로 닦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생각(正思惟)이란 제법공(空)도리인 반야의 도리, 즉 다만 공(空)이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인 정사유를 하면서 닦는 공
부를 禪이라 한다.
이러한 정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상대 유한적인 선, 악의 판단의식과 너와 나를 구분하고 주체와 대상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등의 분별망상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쉬어야만 한다. 벽암록에 있는 말로 "휴거헐거(休去歇去)하면 철수개화(鐵樹開花)"
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쉬고 또 쉬면 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우리가 상대적이고, 개념적이고 유한적인 지식을 쉬고 또 쉴
적에 우리의 內面으로부터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발현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우리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라 했다. 우리 마음의 오염인 망상과 집착 등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참선의 선결조건은 모든 망상을 다 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서 오로지 우리의 의식을 중도실상의 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망상을 버리기 위해서는 모든 인연을 다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분별이 없어지고 집착을 여의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
어나지 않게 되어 자성광명(自性光明)이 온통 환히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며 진실로 참구
(參究)하면 마음을 밝혀 우리의 본래성품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참선공부란 우리의 모든 이해 타산적인 망상을 버리고 오로지 우주의 참다운 진리만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것이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주는 하나의 생명(生命)이고 하나의 동일체(同一體)라는 것.
천지 우주는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 모든 존재는 하나라는 도리에 따르는 공부가 참선이다.
이러한 참선공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상술한 바와 같이 참선공부는 모든 망상을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일념(一念)으로 모아서 중도실상의 자리에 고요히 집중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요한 장소와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우리는 항상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만이 참선의 목적인 우리의 본래성품자성(自性)을 밝히는데 조도가 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첫째가는 조건으로는 계율을 지키는 일로 꼽고 있다.
계율은 무상보리(無上菩堤)의 근본이며 계율로 인하여 비로써 정(定)이 생기고 定으로 인하여 비로소 혜(慧)가 나타난다.
하였듯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일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설혹 우리가 선 수행을 통해서 마음이 정화되고 생리가 좀 맑아졌다 해도 생활 속에서의 행동을 함부로 하게 될 때에는 그 정화된 정서
는 즉시 탁해지고 혼탁함 속에 빠지게 되어 우리의 인격고양에 전혀 진전을 가져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능엄경에서도 네 가지 청정한 생활 속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하고,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과
도둑질을 해서는 안되며, 대망어, 곧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하며 대중을 능멸하는 행위 등을 금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
이다.
만약에 우리가
계를 지키지 않으면 삼매(三昧)를 닦는다 하더라도 속세를 벗어 날수 없으며, 비록 많은 지혜와 선정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역시
사마와 외도에 떨어질 것이다. 계를 지키는 사람은 천룡(天龍)[천인과용]이 옹호하고 사마와 외도들이 공경하며 두려워 하지만, 계를
깨뜨린 사람은 귀신들이 큰 도적이라고 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쓸어버린다. 하였듯이 계행의 중요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 대목이라 하
겠다.
다음으로는 인과(因果)의 중요성을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던지 수행해서 道를 깨치려는 사람은 먼저 인과(因果)를 깊이 믿어야 한다.
하였고, 능엄경에서도 이르기를 원인이 참되지 못하면 결과도 비뚤어진 다고 하였다. 좋은 원인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맺고 악한 원인
을 심으면 악한 결과를 맺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각성하면서 생활에 임한다면 개인 각자의 인격고양은 물론이며 나아가 사회는 선진적
의식수준을 갖춘 사람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禪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선결조건으로 신심(信心)을 들고 있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믿는 일이다.
우리가 생, 사(生, 死)에서 해탈하려면 견고한 마음을 더욱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대가 노력하지 않으면 성불(成佛)할 수 없으며 법(진
리)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하지 않으면 역시 성불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법에 어긋나지 않게 수행하되 물러서거나 후회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깊이
믿어야 하며, 또한 법에 어긋나지 않게 수행하면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고 하였다.
우리의 본래성품인 참된 자성은 부처인 동시에 우주자체이며, 만 공덕을 구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굳게 믿고 공부하
는 것과 그렇지 않고 우리의 망아의 측면인 중생심의 속성만을 보고 내가 감히 어떻게 부처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품고 공부를 하는 것과는 공부의 효과면에서 볼 때에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노력하고 싶은 마음도 식어져 성불은 멀어질 것이고 우리의 의식은 중생심으로 하락하여 혼돈 속에서 고통
스런 삶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본래 부처이니 진리에 입각해서 노력만 한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공부해야함의 중요성을 역설한 내
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禪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자세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즉 나를 포함한 천지우주가
모두 부처뿐이라는 생각(一相三昧)을 여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거기에 집중시키는 일과 이러한 생각을 항상 지속해 나가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一行三昧)만약 너희들이 종지를 성취하고자 하거든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하라.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성불하기 위한 공부과정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공부자세임을 육조단경에서도 강조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禪수행은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닦는 시간이 필요한가 하면 그에 못지 않게 생활 속에서 닦는 수행이 병행되어 질 때에 온전
한 禪수행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 등을 검토해보고 반성하여 고치는 참회하는 습관도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과거행동을 생각해보고 잘못된 것, 즉 어리석음과 혼탁함과 교만하고 허망됨과 질투심의 죄를 모두 뉘우쳐서 앞으로는 다시 그
러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태도로 생활해야 만이 禪을 닦을 때도 망상 없이 일념으로 쉽게 삼매에 들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고 순화시키는데도 큰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禪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심리나 생리가 정화되어 악을 범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지혜와 덕성 및 정서를 조화롭게 갖추게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업(業)이 얼마만큼 소멸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심리와 생리가 어느 정도 순화되느냐에 비례해서
욕계, 색계, 무색계 까지도 초월하게 된다. 3계중에 제일 하단계인 욕계는 잠욕, 식욕, 성욕이 그 대표적인 욕구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격완성을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의 모든 번뇌를 없애고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禪수행을 해야함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의미로 묘법 연화경에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일수유(一須臾)한 찰나의 시간만 정좌(靜坐)해도 항하사같은 칠보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 하였다.
정좌하는 이한법으로 인하여 우리는 진로를 벗어날 수 있고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으며, 자기의 성품을 원명(圓明)하게 하고, 생사를
아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청정한 마음으로 반조회광(返照回光)하기를 수유 동안만 해도 비록 도(道)를 깨치지는 못한다 해도 불성의 바른인(正因)은 씨앗이 뿌려진 것이며, 언젠가
성취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였듯이, 禪수행이 우리인간의 인격완성에 얼마만큼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말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러한 명상활동을 통해서 얻게되는 무한한 공덕은 어떤 외부로부터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본래 우리 내면에 이미 갖추고 있는 능력(잠재력)을 길러내는, 이끌어 내는 역할인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여타의 사념을 모두 버리고 內面으로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집중시키는 공부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신선하게 피어나게 하고, 본래적인 나 자신의 순수한 의식세계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현상적
인 시간과 공간의식을 초월하여 영원성의 의식세계가 열리게 하고, 나라는 ego의 틀로부터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전체성과 일치되게 한다.
이러한 명상활동은 내면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인식기능인 직관력을 개발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대상의 실상을
명료하게 직관할 수 있는 인식능력을 발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과학이 관여하는 인식의 한계성을 뛰어넘은 차원에서의 인간의식활동의 자유롭고 지성적인 창조성의 개발
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우리는 이미 개체성이 아닌 것이다, 즉 개별성인 ego는 명상에서 녹아 없어져 우리의 의식은 전체성과 하나가 된 상태이며 이때 우리는 의지를 초월한, 고통과 시간을 초월한 순수의식의 수준인 것이라고 Schopenhauer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순수의식 상태가 되었을 때는, 우리의 의식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되고 우주의 모든 사물과 합일하게되어 하나로 머물게 된다.
이 때에 우리는 언어화 할 수 없는 평화로움과 행복감을 느끼게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개체성, 즉 개성으로 머무는 상태에서는 의지로부터 나와진 개성 속에서 고통을 받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대상은, 다른 존재는 항상 그와 분리되어있고 별개의 것으로 착상하게 되어 항상 경쟁의식 속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투쟁과 반목질시. 적대의식 등으로 평화는 존재할 수 없고 소유의식으로 군림하는 인간사회가 펼쳐지는 것이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활동에 의하여 개체의 의식에서 벗어나 전체성, 즉 우주와 하나로 될 때에 잠재의식에 숨어있던 어떤 기능이 깨어나 사물과 삶과 실존의 참본성을 포착할 수 있게된다. 고 Schopenhauer도 언급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본질과 삶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는 기능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이며 추리적인 인식방법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직관은 모든 인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직관만이 참으로 조건 없이 참되고 순수하고 인식이라는 이름을 부여할만한 가치가 있다
고 Schopenhauer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직관력이 탁월한 사람은 세계의 본질과 삶에 본질을 잘 알수 있으며, 나날이 그는 존재의 참 성품을 잘 알게된다.
이와 마찬가지 의미로 Jean wahl도 말하기를 진리에 대한인식은 우리인간정신의 창조적 활동성을 불러일으키는 형이상학적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직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숨긴 것을 발굴하도록 허락한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한 인식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임을 우리는 역대의 여러 철인들의 기록 속에서도 충분히 확증하게 된다. 예컨대 Bergson 사상에서도 : 참된자아와 전체성에 대한 인식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Platon사상에서도 본질세계인 idea에 대한 인식이 직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직관력을 기르게 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제시해 보이고 있으나, 그 중 가장 탁월한 방법이 명상, 관조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명상활동에 의해서 주체와 대상을 초월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으며 그래서 전체성인 우주와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빛을발산하게된다.
그리고 그때에 그에게는 절대적 존재가 열리고 그때에 더욱 의미 깊은 의식으로 남게 된다.
3. 禪修行을 통한 意識의 변화과정
禪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개아(個我)인 ego 차원을 초월하여 우주자체인 眞我의 차원까지 이르게 되는 변화의 과정은 어떠한 것인가?
아니면 여타의 과정도 없이 개아(個我)의 차원에서 어느 날 문득 진아를 깨닫게 되는 것인가? 역대 불교사(佛敎史)적 지론은 분분하다.
그러나 본고에서 우리는 우리의 개체의식인 ego가 어떻게 열려 가는 과정과 그때에 일어나는 우리 내면 의식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일에 중요성을 둘 것이다. 모든 일은 시작과 과정이 있을 때에 그 결과가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과정 없는 결과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문득 道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道를 깨닫는 순간은 물론 어느 날 문득 순간에 깨닫는 것이겠지만, 그 날까지 자신에게 알게모르게 소요된 시간과 노력이 필히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되며 자신이 주의 깊게, 섬세하게 단지 감지하지 못했을 뿐, 그 동안의 시간속에서의 노력과정에서 변화는 필히 존재했을 것임을 의심치 않기떄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선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아직 우리의 자성, 진아를 깨닫기 이전에, 즉 견성오도 하기 전단계에서의 우리의 생리와 심리가 변해 가는 과정에서 체험되어지는 현상을 단계별로 설명한 내용으로서 사선근(四善槿)을 들 수 있다.
이 사선근에 대한 내용은 능엄경과 구사론, 유식론 등에서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법문 내용이기도 하다.
사선근 가운데 제일 첫단계를 난법(煖法)이라하며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밝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우리의 심리와 생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는 단계로서 평상시에 무거웠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거뜬해지는 것을 이 단계에서 체험하게 된다.
참선수행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자면 처음에 는 힘들고 괴로울 수가 있게 되나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인내하면 서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하늘에 낀 먹구름이 걷히듯이, 마음이 시원해지고 몸도 거뜬해지며 마음이 밝아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개인 각자의 근기에 따라서 좀 빨리 갖게 되는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해지기도 하고 온몸이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리와 심리가 그만큼 정화 되어가고 있음을 뜻하며 따라서 우리의 마음도 선량해져서 나쁜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는 단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는 정법(頂法)이다. 일명 명증정(明增定)이라 하며 밝은 기운이 더 증가하여 들어온다는 뜻이다. 전 단계에서는 밝은 기운이 희미했다가 이 단계에서는 밝은 기운이 온몸을 엄습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몸의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머리와 눈도 시원해지며 아프던 다리와 허리도 풀려 장시간 정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우리는 언어화 할 수 없는 맑은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
그 다음 제3단계는 인법(忍法)이며 인순정(印順定)이라고도 한다.
이 단계에서는 밝은 기운이 후퇴하지 않게 된다. 그만큼 우리의 심리와 생리가 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쁜 짓을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욕심도 거의 없어지고 남을 미워하는 생각도 사라지게 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우리가 꾸준히 공부를 지속해 나가면 세제일법(世第一法)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제일법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견성(見性)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수준은 아니지만 세간적인 범부에서는 제일 높은 단계라 할 것이다.
이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많이 맑아져서 훤한 광명을 보게 된다. 즉 마음달인 심월(心月)이 비춰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견성의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행동면에서 조심하고 계행을 잘 지키지 않으면 공부가 후회할 수 있고, 또한 자만심에 빠지기 쉽게 된다. 왜냐하면 이 단계정도 되면 사물에 대한 인식도 정확하게 잘 되어지고 판단도 잘되며 알음알이가 잘 생기기 때문에 자칫 견성이 된 것으로 착각하여 경망한 사람들은 지속적인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계 위에도 더욱 높은 차원의 수도의 위차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의 공부가 다 된 줄로 착각하게 되므로 각별히 경계해야 할 단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근차근 단계별로 올라가면서 변화를 가져오지만 특수한 기질과 선근을 가진 사람들은 몇 단계씩 껑충 뛰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禪수행을 통해서 개체의식에서 벗어나 우주의식으로 열리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짐과 동시에 인격이 고양되어져, 제4단계인 세제일법의 수준에서는 우리의 의식은 욕계 의식을 거의 다 초월하게 되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되며 우주만유가 하나임을 깨닫게 되는 동시에 자비심이 우러나게 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서 타인을 해칠 수 없게 되어지고 내 나라의 물질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되는 의식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고양은 오로지 禪수행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것은 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행동과 처신을 올바르게 생활화 할 때만이 즉 계행을 지키며 사는 삶 속에서 상호적인 진전을 가져올 수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의 높은 단계로는 사선정(四禪定)과 멸진정(滅盡定)을 들고있다.
본고에서는 물론 禪의 이론적 측면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고 禪 수행을 통해서 우리 인간 의식의 개화과정, 즉 ego의 틀을 벗어나 眞我인 우주의식으로 진전해 가는 과정에서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의미를 두는 것이므로 다음 소개할 禪 수행의 높은 의식 단계인 사선정과 멸진정에 관해서는 편의상 각 단계의 특징만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함을 밝힌다.
4선정은 초선, 2선, 3선, 4선정으로 나뉘며 각 단계별로의 대략적인 특징으로 초선정에서는 욕계를 초월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오염된몸과 마음이 청정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의 선정(禪定)공덕으로 10가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의 변화는 우리 몸이 가벼워져서 자기 몸의 부담을 전혀 못 느끼며 明, 마음이 밝아져서 경전에 대한 문제나 모든 의단이 훤히 풀리게 되고 定, 마음이 고요하여 선정에 들어가며 智 모든 존재의 본질과 현상인 체(體), 용(用), 성(性), 상(相)에 대하여 걸림 없는 지혜가 발동하여 잘 알 수 있게 되며, 善心, 마음이 그지없이 선량해지고 자비심이 심부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 넘쳐 다른 여타의 존재에 대하여 연민과 사랑으로 대하게 되고 心身이 유순해져 모든 인연에 잘 따르게 되는 동시에 의식의 열림에서 오는 기쁨이 매우 크며 만사에 걸림이 없는 해탈을 느끼며 모든 경계에 막힘이 없이 수긍하게 되는 등의 공덕이 초선정 수준에서 체험되어지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그지없는 행복감에 충만하게 되는 동시에 세속적인 오욕락을 떠나서 진정한 법락(法樂)을 느끼는 단계인 것이다.
그 다음 2선정(禪定)에서는 욕계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초선정에서보다도 마음이 더욱 청정해진다. 그리고 초선정에 서는 정신적인 맑은 기쁨인 법락이 더했다 덜했다 하는 변동이 생기는 반면에 2선정에서는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하여 희락이 잠잠하게 안정된 상태가 된다. 본래 법성(法性)에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희락도 없는 상태이므로 선정이 더 깊어지면 마음은 더욱 총명해지고 더 맑아지면서 희락을 떠나게 된다. 이 상태가 3선정경계인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한다. 즉 여타의 기쁨과 즐거움을 초월하여 묘락을 체험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4선정에서는 희락을 모두 초월하여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즉 모든 분별심을 초월한 상태여서 청정한 마음만 지속되는 경계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 멸진정(滅盡定)은 4선정을 다 통과해서 번뇌의 종자를 완전히 없애는 삼매인 것이다. 그리고 4선정까지는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다같이 이 단계를 닦을 수 있지만 멸진정 만큼은 정도를 가는 수행자에 한해서만 그 단계를 닦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된다고한다.
멸진정에서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고 '나'라는 ego의식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아(眞我) 자체로써 머물게 되는 것이며 이 때 우리의 의식은 우주 그 자체로써 우주와 내가 완전히 합일(合一)한 상태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인식작용은 본질 직관에 의하여 모든 존재와 우주의 실체를 꿰뚫어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상적 수준에서의 모든 것을 초월한 단계이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성 자체로 머물게 되며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단계라 한다.
이와 같이 禪수행을 통한 우리의 의식의 변화과정을 살펴본 결과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의식)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개체의식 차원의 마음과 참자아 의식차원의 마음은 지옥과 천당의 차이, 그만큼의 차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개체의식인 ego의 틀(업식)을 얼마만큼 벗어나느냐에 비례해서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맑아지고 넓어짐과 동시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의식이 ego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의 의식은 완벽하게 투명해져서 존재의 실상을, 삶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인식능력을 갖게되는 동시에 그때에 우리는 언어화 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게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내적으로 본래 갖추고 있는 기능이 발현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초월적 기능은 가시적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무한한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존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왜, 무엇 때문에 항상 불안의식 속에서 살아야 하며 자, 타를 구분하여 타인을 배격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의 삶도불행해지고 그로 인해 고통스런 삶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자유의지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지여하에 따라 존재적 삶을 선택하거나 비존재적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에는 참자아를 실현해 가는, 즉 참된 실존적 삶을 살아가게 되어 주변과 사회를 이롭게 하고 동시에 본인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기중심적인 의식권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또 행동하기 때문에 이 때에는 모든 존재와 삶의 실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없게 되어 자기식으로,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Jaspears의 실존철학 사상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맥락을 찾아볼수 있다. 즉 우리가 참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ego 차원의 '나'를 초월하여 참자아를 지향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철학한다는 것은 초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철학은 초월성을 사유하는 내적 행위인 명상(관조)에 의하여 완전성에 대한 특수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명상활동은 우리를 경험적 현상계인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절대적 의식의 세계에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명상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실존을 실현하도록, 그래서 올바른 삶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만약에 거울에 먼지가 끼였다면 사물의 실상이 올바로 보이지 않듯이, 우리의 의식에도 먼지가 끼면 올바른 인식활동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때란 평상시에 우리가 잘못 배운 지식(올바르지 않은지식)이라던가, 고정관념 내지 편견, 잘못된 습관 및 나만을 고집하는 아만심 등이 '나(ego)'라는 주관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의식활동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여타의 존재를 인식한다거나 판단하는 과정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ego 차원의 주관이 잣대가 되어 사물을 인식하고 사리를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인식하여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질없는 욕심에 눈이 어둡게 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본인은 물론 사회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은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웃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해 그의 40년의 생을 바친 것이다.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이 유명한 말의 뜻은 참자아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너'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아야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며 그래서 참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간의 의식이 무명심(無明心, 진리에 어두운 마음)에 가리워져 있는 한은 어리석음을 면할 수 없게 되며 그릇된 인식으로 삶을 잘못 살아가게 되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무명심인 ego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 그래서 우리를 본래적 의식인 참자아 의식의 세계로 다가가게 하는 일, 즉 우리를 본래적인 우리 자신에로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명상활동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禪수행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에 있어서 여타의 명상 방법 중에 수승한 방법으로 매우 체계적이어서 효과면에서 볼 때에 역사가 증명하는 많은 道人(성자)들이 배출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것이다.
4. 맺는말 : 禪修行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禪수행을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어지고 어떻게 고양되어지는가를, 그래서 참자아를 실현하는, 즉 참다운 실존의 차원까지 다다르게 되는가를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禪수행을 통해서 얻게되는 공덕은 무한의 것이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략적으로 크게 10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10가지 범주의 공덕은 禪수행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변해 가는, 즉 정화되어 가는 우리의 의식활동에 의해서 초래되는 인격의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10가지 범주의 공덕 외에, 참자아 실현이 되어진 후에 생기는 공덕인 열반 4덕 등은 말 그대로 열반 후, 즉 해탈이 된 후에 생기는 공덕으로 매우 전문적이고 고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일반적으로 세상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고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는 정도의, 우리 의식수준의 고양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禪외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여러 학설과 해탈후의 체험되는 고차원적 공덕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禪의 10종 공덕 중에 그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공덕은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하겠다. 이때에는 우리의 의식이 어느 정도 고양되어 거친 행동을 않게 되고 의젓하고 점잖게 행동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남에게도 거칠고 험한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되며 마음이 매우 안정된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손해 되는 등의 행동을 않게 되며, 남을 배려하는 태도로 삶을 살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행자경계(行玆境界)이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ego가 많이 소멸되어 자비심이 저절로 생기게 되므로 나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여의게되고 모든 존재는 본래 하나의 생명자리에서 나왔다
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나를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못하게되고 모든 존재에 대하여 존엄성을 갖게된다.
다음은 무번뇌(無煩惱)로 번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번뇌의 근본원인으로 탐, 진, 치(貪, 瞋, 痴)를 들고 있는데 이 탐내는 마음, 즉 모든 것에 대하여 욕심 내는 마음, 그래서 그것이 얻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운 마음과 瞋, 이것은, 어떠한 일에 대하여나,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 자기를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것으로 사람사이에서 서로간에 화합을 잘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痴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의식이 정화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 탐, 진, 치 3독심으로 고통을 받게되나 禪수행을 통해서 심리와 생리가 정화될 때에는 우리는 이러한 3독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 4에는 수호제근(守護諸根)으로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기관이 보호되어짐을 의미한다. 禪수행을 하여 몸이 많이 맑아지면 시각, 청각 등의 감각기관들이 나빴던 사람들도 다시 좋아지는 것을 볼 수있다.
다음 다섯 번째로는 무식희락(無食喜樂)이다. 禪수행이 깊어지면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마음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심신이 정화되면 몸과 마음이 항시 개운하며 몰랐던 것도 알게되어지고 컨디션이 좋기 때문에 음식으로부터의 집착을 떠나게 되며 맑은 기운으로 충만하여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여섯 번째는 원리애욕(遠離愛慾), 이것은 문자그대로 이성간의 욕심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참선수행을 통하여 공부가 많이 깊어지면 이성간에 대한 애욕이 차츰 희미해지다가 초선정이 깊어지면 이성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된다. 이성욕, 식욕, 잠욕 이 3가지 욕구는 욕계(欲界)에서 존재하는 대표적인 욕구이다. 공부가 깊어지면 이러한 욕구로부터 멀어져 자유로워지며 진리의 기쁨인 법락(法樂) 속에서 살게되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 일곱 번째는 수선불공(修禪佛空) 禪수행이 더욱 깊어지면 진공묘유를 체험하며 불성(佛性)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 번째는 해탈마견(解脫魔 ) 이것은 마구니의 그물을 다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이런저런 번뇌의 얽힘인 마견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이다.
그 다음은 안주불경(安住佛境)으로 부처님의 경계, 즉 천지우주가 하나라는 영생불멸하는 공덕 가운데서 항상 편안하게 머물게 된다는 뜻이다.
열번째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다. 우리가 차츰 부처가 되어가므로 모든 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참다운 자유란 바로 이 진리의 단계에서 체험되어지는 것이므로 성자의 자유를 뜻한다. 따라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은 참자아의 실현인 참다운 실존의 단계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이러한 공부란 수행자만을 위한 전문적인 것이며 사회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해탈의 단계까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회의를 품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어서 몸을 위해서 사람들은많은 시간을 아깝지 않게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는 과연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들의 마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에 우리 마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혹자는 이런 반문도 갖게 될 것이다. 나 한사람 마음 바르게 산다 하여 세상이 바뀔 것인가, 나 한사람쯤 한눈판다하여 세상일이 잘못된단 말인가 그렇게 나 하나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 속에서 이 사회는 병들어가고, 세계는 전쟁의 불바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나'라는 개인 하나 하나가 모여 사회를 이루고 '나'하나 하나의 개인의식들이 모여 세계인류의식을 이루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 각자 모두는 자기의 삶이 행복 되기를, 자유롭기를 지극히 열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모든 문제가 빚어지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근본이 되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의식을 올바르고 맑게 성숙시키는 일만이 자신의 삶에 참된 자유와 행복을,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계 질서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토인비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만약에 생활 속에서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원자탄에 의해 집단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의식을 맑히는 일에 외면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ego 차원에서 욕구가 시키는 대로, 모든 존재에 대하여 존엄성을 깨닫지 못하고,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감행하게 될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진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또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참자아를 찾는 삶 속에서, 즉 참된 실존을 지향하는 삶 속에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상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식)을 맑히는일, 즉 본래적인 세계에로 지향하는 실존적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의지를 일컬어,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유의지라고 Jaspers는 말하였다.
禪수행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이 어느 정도만 맑아진다 해도, 우리가 해탈까지는 이루지 못한다 해도, 해탈을 지향하는, 참자아를(우리의 참다운 본성) 지향하는 실존적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인격은 이미 많은 변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뀔 것이며, 그래서 나만을 위해 남을 해칠 수 없게 되고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생기고 존엄성을 깨닫게 되므로 다른 존재를 함부로 해치고 죽이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명상생활을 통하여 항상 편안한 마을을 갖게되기 때문에 불안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맑아지므로 직관력이 생기게 되고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능력과 정확한 판단능력이 생기어 그 때 우리는 참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것이 아닐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공부가 웬만큼만 되어져도 모든 존재는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므로 타인을 배격하고 질타하며 해치는 행위는 곧 나 자신에게 하는 행위임을 깨닫게 되고, 그때 우리 인간사회는 무질서와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며 총부리를 서로에게 겨루는 잔인한 사태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닐까?
사실상 개별적인 인간 존재란 어떻게 보면 보장받지 못한 덧없는 시간 속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 그래서 참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태도, 즉 참된 실존을 지향하는 실존적 삶,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불안전한 삶의 조건에 가치를 부여해주고,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평화를, 그리고 우리들의 실존에 완전성의 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길이 아닐는지?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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