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國名山洞天註解記
許筠의 《東國名山洞天註解記》와 도교문화사적 의미
Ⅰ. 머리말
《동국명산동천주해기》란 책 이름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臥遊錄》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는 호를 眞實居士라 한 祥原郡 아전 趙玄이 正德 을해년(1515, 중종 10)에 쓴 〈東國名山洞天註解記序〉와, 승려 智光이 嘉靖 을축년(1565, 명종 20)에 쓴 〈題名山洞天誌解後〉란 글이 나란히 실려있다.
조현과 승려 지광의 이름은 다른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고, 이 책의 존재 또한 지금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 각 지역에 산재한,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 들의 거주처인 洞天福地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각 동천복지 의 속명과 위치, 각처를 관장하는 眞人仙官들의 이름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현재 이 책의 실물은 전하지 않으나, 《와유록》 에 실린 두 편의 글만으로도 이 책의 대체적 내용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이 자료는 조선 전기 이래로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해온 조선 도교의 자주화 노력이 구체화되는 한 뚜렷한 증거 가 된다.
이 자료에 흥미를 갖고 있던 중 논자는 우연히 조선 후기 南克 寬(1689-1714)의 《夢예集》에서 이 책과 관련된 또 한편의 짧은 글과 만나게 되었다. 〈題東國名山洞天志〉란 글인데, 여기서는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저자를 허균으로 명확히 지목하면서, 이 책은 허균의 杜撰이며 앞서 말한 조현과 승려 지광 또한 그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남극관의 이 말을 신뢰할때, 우리는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들과 만나게 된다. 허균은 왜 이 책을 지었을까? 지은 후에는 어째서 정작 자신을 감추고 가공 인물을 동원해 그럴듯한 신비적 색채를 덧씌워 일반에 유포시켰을까? 선조를 전후해서 성행하는 신선 전설, 나아가 도교 문화의 확산과 연관지어 이 책 은 어떤 시사를 주는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의 역모 사건과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는 《山水秘記》와 이 책은 혹 무슨 연관이 없는걸까? 남극관은 또 어떤 근거로 이 책의 저자를 허균으로 단정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이 잇달아 제기되는 데, 본고는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해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Ⅱ. 《東國名山洞天註解記》의 내용과 체제
《동국명산동천주해기》는 현재 실물이 전하지 않으므로, 이 책에 대한 내용은 전적으로 《와유록》에 수록된 두 편의 글과 남극관의 〈제동국명산동천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먼저 자료 제시를 겸하여, 다소 장황한 대로 진실거사 조현이 지었다는 서문을 읽어보기로 한다. 우리 조선은 치우친 땅이라 예로부터 변방으로 보아왔던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 또한 스스로 그 비루함을 고수하여 오랑캐라 낮추보며 그 지경 안에 神山靈境으로 眞人과 仙官이 다스리는 바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圖牒이 전하지 않으니 탄식함을 이길수 있으랴! 내가 젊은 시절에 산에 노님을 좋아 하였으나, 가난하여 멀리 갈 수 없었다. 단지 本道의 큰 산과 깊은 뫼를 두루 다녀, 사람의 발길이 능히 이르지 못할 곳도 거 의 다 다녀보았으니, 鳥道나 끊긴 길은 다리를 놓고 구덩이를 파서라도 가보고야 말았다.
병진년(1496, 연산군 2) 여름, 봉천대에 올랐는데 반야봉이란 산이 있어 가장 높았다. 덩쿨을 더위잡고 절벽에 기대어 천신 만고 끝에 가까스로 그 꼭대기에 올랐더니, 문득 큰 절이 있는데 아름다운 빛깔이 휘황하게 비치었다. 문을 들어서자 승려의 무리가 모여들며 사람이 온 것을 괴이하게 여기었다.
붉은 옷을 입은 天人이 전각 위에 앉아 있다가 불러 말하였다.
"네가 인연이 있어 이곳에 이르렀으니 의아해 하지 말라. 너는 전신이 琳庭을 주관하던 자로서 죄를 지어 귀양 내려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東國總理名山洞天眞官이니, 이곳은 해 동에 으뜸가는 복지니라. 지난번 상제께서 東王公의 시자 羅弘 祐 진인에게 명하사, 와서 삼한의 땅을 살피게 하여, 三大洲·五 大神嶽·九輔洞天·四十三府·二十七島·三十五洞·一百四十一山· 九十九川으로 구분하고, 각각 仙官을 나누어 그 임무를 맡기니, 나는 곧 可韓丈人으로 東垣第六輔官이니라. 상제의 명을 받들어 동국의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있나니, 宣德 신해 (1431, 세종 13)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노라. 婆竭王菩薩이 이 산을 맡아 절을 크게 열고 내게 맡기어 다스려 주기를 청하므 로, 禪堂 한 곳을 빌려 진인이 조회하는 곳으로 삼고 있다. 동 인이 신선진인의 자취를 알지 못하므로 내가 위하여 책으로 기록하여 엮어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 이제 智 玄鑑老師가 묘 향산 廣濟寺에 있는데, 능히 나의 글자를 읽을 줄 아니 네가 이를 전할 수 있으리라."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주는데, 글자의 획이 梵字도 아니요 篆書도 아니었다. 또 말하였다.
"네가 능히 찾아가 지의대사에게서 이 책을 받을 수 있게 되면, 팔도를 두루 다녀 주해를 하도록 하라. 이 또한 하늘에서 내리 는 뜻이니 어길진대 견책함이 있으리라."
내가 삼가 받들어 땅에 엎디어 예를 올리고 머리를 들어보니, 그 절은 간데 없고, 단지 황량하고 자욱한 잡초 우거진 땅일 뿐 이었다.
구슬피 내려와 묘향산에 이르러 광제사를 찾아가니 승려가 십 여 명인데 이른바 지의대사란 사람은 없었다. 인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그를 찾기 위해 백일이 지나도록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엌 가운데 늙은 스님이 있어 남루하여 불을 끼고 땅바닥에 앉아 덜덜 떨면서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따뜻한 국물을 주니, 스님이 다 마시더니 말하였다.
"가한장인의 地誌는 어디에 있느냐?"
내가 급히 내려가 절을 올리고 책을 가져다가 바쳤다. 스님이 이를 가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내년 바로 오늘에 姑射山 觀音寺로 나를 찾아 올 수 있 겠는가?"
말을 마치고는 나는 듯이 떠나가는데, 쫓았으나 능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약속대로 가보니 그 스님은 없었고,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문득 전각의 동쪽 벽위를 올려다 보니 누런 보자기 하나가 걸려 있으므로 가져다 살펴보매 바로 그 지지를 번역한 것을 글로 쓴 것이었다. 급히 소매 속에 넣고서 밤중에 절로 가서 그 山嶽洞府의 이름 붙인 것을 두루 읽어 보았으나, 모두 속명과는 같지 않은데다, 주관하는 자의 벼슬과 이름도 또한 전에 들어본 것이 아닌지라 마음으로 몹시 기이하게 여기었다.
마침내 평안도로부터 강원도 아래 충청·경상·전라 세 도를 거 쳐 다시 황해도에 이르고, 압록강에서 마치었다. 지지에 의거 하여 그 땅이 있는지 없는지를 찾아 보느라 험한 곳을 건너고 물결을 무릅써 아무리 깊은 곳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무릇 18년이 지나고서야 그 경계를 다 섭렵할 수가 있었다.
한가한 날에 광제사 동쪽 방에 나아가 주머니를 열고서 자세히 살펴보니, 지지 아래에 속명을 주달아 놓은 것이 이미 가득하였다. 그래서 바로 책으로 엮어, 나누어 네 권으로 만들고 이름 하여 《東國名山洞天註解記》라 하고는, 藥師如來 臺座 밑에 간직해 두었으니, 안목 있는 인사가 이를 취하여 만대의 뒤에 믿게 함을 기다려 靈嶽神山으로 하여금 기이한 자취를 드러내 게 하려 함이었다. 혹 임금이 높여 존숭하여 제사지내고 封禪 함이 있다면 동국 백성이 복을 받는 때일 것이다. 正德 乙亥 (1515, 중종 10) 10월 초 1일.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神山靈 境이 있어 眞人과 仙官이 다스리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오랑캐의 비루함을 고수하여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를 설명해 놓은 도첩이 전해지지 않으니 일반이 이를 모르는 것은 안타깝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글쓴이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부터의 탐승벽 때문이었다. 1496년 여름, 묘향산 봉천대 뒤편 인적이 미칠 수 없는 반야봉 정상을 천신만고 끝에 올라보니, 놀랍게도 거기에는 휘황찬란한 큰 절과 수 많은 중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는 그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東國總理名山洞天眞官 東垣第六輔 官이라고 밝힌 可韓丈人이란 天人과 만나게 된다. 그 천인은 그에게 이곳이 해동에 으뜸가는 복지라고 알려주며, 옥황상제 가 東王公의 시자 羅弘祐 진인에게 명하여 삼한의 땅을 살펴, 三大洲·五大神嶽·九輔洞天·四十三府·二十七島·三十五洞·一百 四十一山·九十九川으로 나누고 각처에 仙官을 파견하여 관장 케 하였는데, 자신은 이들을 모두 총괄하여 다스리는 직분을 맡고 있음을 밝혔다. 본래 이곳은 파갈왕보살이 맡아있던 곳으 로 절을 크게 열어 자신에게 맡기므로, 禪堂 한 구석을 빌어 眞人들을 조회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가한장인은 동국 사람이 신선과 진인의 자취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 동국의 명산동천과 그곳을 관장하는 신선진인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여 세상에 전하려 하 는데, 묘향산 광제사에 있는 智玄鑑老師만이 자신의 문자를 읽을줄 아니 그를 찾아가 책을 풀이하고, 그 후에는 직접 팔도 를 답사하여 각처를 속명에 따라 주해하여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문득 돌아보니 절은 간데 없고, 이에 그는 책을 들고 광제사로 가 지의대사를 애타게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시종 애를 태우다가, 부엌에서 불을 쬐며 덜덜 떨고 있던 늙은 중을 불쌍히 여겨 따뜻한 국물을 주니 그가 바로 지의대사였다. 지의대사는 1년 뒤 고야산 관음사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 후 사라지고, 1 년 뒤 그는 관음사 동쪽 벽 위에 걸린 보자기에서 지의대사가 번역한 地誌를 찾아 읽어보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 적힌 山嶽 洞府의 이름은 속명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주관하는 자의 벼슬과 이름도 모두 처음 듣는 것인지라, 몹시 기이하게 여기 었다. 그 후 그는 18년간 평안도에서 충청·경상·전라도를 거쳐 황해도와 함경도를 지나 압록강까지 전국을 샅샅이 답사하여 지지에 따라 실제의 위치를 비정하여 마침내 가한장인이 준 《동국명산동천기》를 속명에 의거하여 상세히 주해하는 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에 이를 네 책으로 엮어 《동국명산동천 주해기》라 이름짓고 약사여래 대좌 아래 간직해 두어, 훗날 안목 있는 자가 이를 읽고 靈嶽神山으로 하여금 그 기이한 자취를 드러내게 하고, 임금이 높여 존숭하고 제사지내게하여 동 국 백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하고자 한다고 했다.
요컨대 《동국명산동천주해기》란 상제의 명을 받아 나홍우 진인이 삼한의 땅을 살펴 그 경계에 따라 구분한 三大洲·五大 神嶽·九輔洞天·四十三府·二十七島·三十五洞·一百四十一山·九 十九川의 실제 지리상의 위치와, 각 처소를 관장하는 眞人仙官 의 명칭을 기록한 것을 속명에 따라 주해한 책이다. 그런데 삼 대주와 오대신악 등 각각의 처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지칭 하는지는 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으므로 전혀 알 수가 없다. 즉 동국의 명산동천을 大洲·神嶽·洞天·府·島·洞·山·川 등 여덟가 지 범주로 구분한 뒤, 이를 다시 362개소로 세분한 것인데, 비중에 따라 순서를 배열한 듯하나 각 숫자가 지시하는 의미와, 각 범주 상의 차별은 서문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나홍우 진인이 동국 명산동천을 분류했고, 다시 이곳을 총괄하는 가한장인이 천상의 문자로 지은 《동국명산동천기》를 지의대사가 인간의 문자로 옮겨 놓았는 데, 이를 진실거사란 이가 직접 18년간 팔도를 누비며 답사하여 주해를 달아놓은 책이 바로 이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인 셈이다. 말하자면 천상의 秘記가 여러 경로를 거쳐 인간에 모 습을 드러내게 된 것인데, 도교적으로 윤색된 농후한 설화적 색채를 일견하여 느낄 수 있다.
다음에 읽을 글은 嘉靖 을축년(1565)에 智光이란 승려가 성불사 방장에서 지었다는 〈題名山洞天誌解後〉란 글이다. 여기 서는 책이름을 《동국명산동천주해기》를 줄여《名山洞天誌 解》라 약칭하고 있다. 이 책을 지은 것은 智 大師로부터라고 하나, 지의의 이름은 禪林에 전하지 않으니 나 또한 능히 믿을 수가 없다. 眞實居士 라는 사람은 祥原의 郡吏인 趙玄인데 三丁一子, 즉 아들 셋에 하나는 면제해주는 법에 따라 官役을 면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그 형이 우애롭지 못한지라, 마침내 거사가 되어 보살계를 몹시 열심히 지키면서 价川 姑射山 觀音寺에 숨어 살 았다. 평생 문자를 알지 못하였는데, 좌선한지 18년만에 활연 히 깨달아 붓을 잡아 글을 지으니 매우 훌륭하였다. 장난으로 博川 鄕試에 나아가 三場을 잇달아 급제하고는 바로 떠나가 다 시 숨었다.
嘉靖 무신년(1548, 명종 3)에 내가 普賢寺에 주지로 있을 때 조 현이 찾아와 여러 날을 함께 묵었다. 시를 지어 내게 주었는데, 이러하였다.
법문 중에 크나큰 자비가 있어 法門中有大慈悲
천리라 묘향산서 스님 만났네. 千里香山幸遇師
여래의 그 소식을 묻고자 하니 欲問如來消息未
반산의 밝은 달이 깊은 못에 들었네. 半山明月入深池
내가 그를 위해 붓을 던지고서 화답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미 不二門에 든 사람이었다. 떠나며 편지를 남겼는데, 이렇게 말 하였다.
"이것은 내가 仙師의 명을 받들어 번역한 것입니다. 세상에 전 하고자 하니 대사께서 이를 베풀어 뒷날을 기약하소서."
그 후 15년이 지나 임술년(1562, 명종 17)에 사미 法蓮이 德川 에서 만났는데 얼굴 모습이 평소와 같았다 하니 과연 이인이라 하겠다.
그 뒤로도 간절히 만나고자 하였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어찌 神聖의 자취로서 세상에서 오래도록 뒤섞이기를 즐기겠는가? 한가한 날에 이 책을 상자 속에서 꺼내 읽어보니 더더욱 기이한지라, 책 말미에 되는대로 題하였다. 嘉靖 을축년 (1565) 가을 8월 24일에 智光老釋은 成佛寺 방장에서 쓰노라. 이 글에서 지광은 가한장인의 地誌를 옮긴 지의대사의 이름을 禪林에서 들어본적이 없다하여 그의 존재에 신비성을 부여한 후, 이를 주해한 진실거사는 평안도 상원군의 아전인 趙玄이라 하였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과 우애가 좋지 않아 집을 나와 거사가 되어 개천 고야산 관음사에 숨어 살며 보살계를 열심히 지켰다. 좌선한지 18년 만에 활연히 문자를 깨쳐, 장난삼아 박천군의 향시에 나아가 삼장을 잇달아 급제하고는 다시 숨었다고 했다. 앞에서 그의 신분을 郡吏라고 한 것은 급제 후 그가 잠시 박천에서 아전 노릇을 했던 것을 암시하는듯 하다.
그후 지광이 묘향산 보현사 주지로 있을때, 조현이 찾아와 시를 주는데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든듯 하였다. 그가 문득 소매 에서 자신이 가한장인의 명을 받들어 주해한 《동국명산동천 주해기》를 꺼내어 세상에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후 15년 후에 그를 덕천에서 만났으나 얼굴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더란 이야기, 그후로는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었다는 이야 기를 덧붙였다. 그래서 조현이 자신에게 그 책을 전해준지 17 년 후인 1565년 가을에 책 말미에 이 題辭를 달아 세상에 전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러니까 진실거사 조현이 가한장인으로부터 이 책을 받은 것은 1496년이었고, 주해를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19년 뒤인 1515년이며, 이 책이 지광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다시 50 년 후인 1565년이 된다. 지광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 조실 부모했다 하였고, 가출하여 18년간 관음사에서 거사 생활을 했 으며, 그후 박천 향시에 급제하여 한동안 아전 노릇을 했다고 하였으니, 그가 실제 가한장인을 만났을 때는 빨라도 30세를 넘긴 나이였을 터이다. 그렇다면 지광의 사미 법련이 1562년에 그를 덕천에서 만났을 때는 이미 근 백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는 계산이 나오는데, 지광은 그의 모습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 없었다고 했다. 더욱이 그가 지었다는 한편의 시까지 적어놓고, 만난 해와 글을 쓴 날짜까지 정확히 밝혀 기록한 내용에 신뢰를 부여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 내용의 신뢰 여부와 무관하게, 이상 살펴본 두 편의 글을 통해 우리는 《동국명산동천주해기》란 책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배경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의 체제는 먼저 조선 팔도에 산재한 명산동천을 각 처소에 따라 대별하고, 각 처소를 주관하는 眞人仙官의 명칭이 명기된 비교적 간단한 본문과, 그 본문 아래 본문의 명칭을 세속의 실 제 지명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상세히 부연한 조현의 주해가 병기된 형태로 된 구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부 4책이라 하였으니, 전체 분량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 자세한 형식에 대해서는 다시 후술키로 한다.
Ⅲ. 허균과 《동국명산동천주해기》
그런데 다음에 읽을 남극관의 《몽예집》에 실린 짤막한 한편의 글은 이 책과 관련된 문제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돌려놓고 만다. 〈題東國名山洞天志〉란 글이 그것이다. 허균이 《道藏》의 諸書를 취하여 흉내내고 꾸며 엮어 이 글을 이루었으니 高位杰이나 乙支黃은 은근히 東明王 高朱蒙과 乙支文德을 가리키며, 黃 杰이란 또 梁四公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로 서발이 모두 거짓이니, 지광이며 조현의 무리는 있지도 않다. 라 하였다. 짧은 글 속에 이 책과 관계된 많은 내용이 거론되고 있다. 요컨대 《동국명산동천주해기》(그는 책 이름을 《동국 명산동천지》라 적었다.)란 책은 허균이 가짜로 지어낸 책으 로, 《도장》의 여러 책에서 이리저리 베껴 그럴듯하게 꾸민 것이다. 서발도 모두 허균이 지은 것이며, 지광이니 조현 같은 무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 글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정보를 한가지 더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처를 주관하는 眞人仙官의 이름으로 高位 杰이나 乙支黃 같은 구체적인 명칭이 나오는데, 남극관은 이들 또한 은근히 高朱蒙과 乙支文德 같은 인물들을 암시하고 있음을 밝혔다. 말하자면 앞서 조현이 서문에서 "주관하는 자의 벼슬과 이름도 또한 전에 들어본 것이 아닌지라 마음으로 몹시 기이하게 여기었다"는 대목의 구체적 실례를 들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관하는 자의 벼슬 이름과 사람 이름이 우리나 라 역대로 우뚝한 자취를 남긴 선인들의 이름을 언뜻 보아서는 알 수 없도록 암호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글로 인해 《동국명산동천주해기》와 관련된 문제는 다시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이제는 조현이나 지광의 문제가 아니라, 난데 없이 허균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것이 다. 또 남극관은 허균이 杜撰한 이 책의 체제가 《道藏》 諸書 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남극관은 어떻게 《동국명산동천주해기》가 허균의 두찬이란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을까?
근거로 삼을만한 명확 한 증거 없이 그가 이토록 단호한 어조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극관은 숙종조 소론의 거두 藥泉 南九萬의 손자로 어 려서부터 각기병을 앓아 두문불출 집에서 책만 읽다가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적인 문인이었다. 그는 책 주름을 아 홉번이나 갈아치웠다는 傳聞이 있을만큼 독서광이었다. 그럴 진대 그가 《동국명산동천주해기》를 구해 읽고, 그 두찬자를 허균으로 지목했을 때는 단서가 될만한 증거들이 분명히 있었 을 터이나, 위에서 그가 쓴 짧은 글이나 그밖에 그의 문집을 통해서는 전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논자의 입장에서, 덮어 놓고 그의 이 말만 믿고 이 책 의 실제 저자를 허균으로 단정하여 이 책이 지닌바 의미를 천착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하는 수 없이 허균의 《성 소부부고》를 통해 직접 두찬의 증거를 찾아나설밖에 도리가 없다.
사실 두찬의 색안경을 끼고서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우선 조현의 별호를 '眞實居士'라고 한 것부터가 미심쩍다. 굳이 '진실'을 앞세운 것은 곧 진실하지 않은데서 오는 자의식의 발로 일 뿐일 터이고, 평안도 상원군의 일개 아전이, 그것도 18년간 보살계만 열심히 닦은 居士에 불과했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문리를 깨쳐 향시에 연이어 급제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더욱이 그가 직접 견문했다는 많은 일들은 전형적인 도교 仙境說話 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발문을 쓴 지광은 묘향산 보현사의 주지를 지냈고, 조현이 굳이 그를 찾아갈만큼 신분과 道力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에서 그의 존재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문체면에서도 두 편 글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니, 대개 이런 정황만으로도 이 책이 진실에 바탕하여 지어진 것이 아님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책을 지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허균이라는 점에 놓여 있다. 실제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동국명산동천기》 의 관점에서 꼼꼼히 읽어보면 우리는 의외로 이와 연관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이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론하여, 앞서 남극관의 주장이 지닌 신뢰성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먼저 진실거사 조현과 관계된 문제이다. 《성소부부고》 권 6 에는 〈祥原郡王塚記〉란 글 한편이 실려 있다. 상원군이란 주 지하는대로 진실거사 조현이 아전 노릇을 했다는 바로 그곳이 다. 이 글의 내용은 평안도 상원군 북쪽 십오리 쯤의 王山村이 란 곳에 王塚이 하나 있었는데, 1607년 7월에 큰 비에 무덤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마을 사람 趙壁은 어려서 중이 되어 글을 조금 이해하는 자로 그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壙中에서 여러 유물들을 목도하였다. 무덤 안에 있던 돌종 위에 '神明大 王墓'란 다섯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조벽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흙으로 이를 다시 덮자, 그날밤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금띠 를 두른 神人이 나타나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후 세 해 동안 풍년으로 이를 보답하였더라는 이야기이다. 허균은 이 말을 조벽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글에 나오는 조벽은 상원군 사람이고, 어려서 중이 되었으며 글을 조금 이해한다는 점에서 앞서 본 조현을 금세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조벽은 실존의 인물이고 〈상원군왕총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니, 우리는 여기에서 허균이 조벽을 떠올려 조현이란 허구적 인물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쉽게 추단할 수 있다. 특히 앞서 高朱蒙을 高位杰이라하여 '고 씨 가운데 지위가 우뚝한 인물'로 암호화 하는 예에서도 보듯, 진실거사란 별호와 더불어 玄虛·玄妙 등의 말에서 보듯 '趙 玄'의 '玄' 또한 그가 가공의 인물임을 진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智光의 이름이 〈상원군왕총기〉 바로 앞에 실려 있는 〈原州法泉寺記〉에 고려 승려 지광의 塔碑 이야기를 하면서 보이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다시 말해 지광은 고려 문종 때의 국사인데, 허균은 이를 슬쩍 빌려와 《동국명산동천주해기》 의 발문을 쓴 조선 중기 묘향산 보현사 주지를 지낸 승려 지광 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또 《성소부부고》 권 7에 실려 있는 〈沙溪精舍記〉란 글은 허균과 《동국명산동천주해기》와의 관련을 반증하는 보다 구체적인 심증을 준다. 그 글의 일부를 추려 읽어보기로 하자.
남원은 옛 帶方國으로 옛날에 이르던 方丈 三韓이었다.
진나라 시절부터 방사들은 삼신산이 동해 중에 있으며 거기에 신선과 불사약이 있다 했는데,
군주치고 이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五嶽眞形圖》 및 《洞冥記》·《十 洲記》를 얻어 고찰해보니,
삼신산이 동해에 있다고 했으나, 우리나라를 빼고는 이곳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이른바 방장에 있다는 것은 이미 대방에 있으니,
瀛洲·蓬萊도 역시 금강산과 묘향산의 밖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은 신령스럽고 아득한 구역이어서 사람은 능히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니,
반드시 위에 진짜 上眞·天仙이 있어 福地를 장악 하고 洞天을 맡아서 그 일을 다스리는데도 세상에 이를 아는 자가 없다.
이 어찌 眞仙의 무리들이 혼탁한 것을 싫어하여 손 을 가로 저으며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사 람이 스스로 인연이 엷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모를 일일 따름이다.
허균은 이 글에서 《오악진형도》와 《동명기》·《십주기》 등의 중국 古記를 얻어 읽어 보았다고 했다. 이 가운데 《십주 기》·《동명기》 등은 《道藏》 가운데 실려있다. 그는 중국 古記에서 말한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단정하고, 方丈은 지리산을, 瀛洲는 묘향산을, 蓬萊는 금강산을 나타낸다고 보았 다. 또 그 꼭대기에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에는 신령스럽고 아 득한 구역이 있어서 上眞·天仙이 福地洞天을 맡아 다스리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앞서 본 조현이 쓴 〈東國名山洞天註解記序〉의 내용 과 그 지취가 자못 방불하다. 말하자면 《동국명산동천주해 기》는 허균이 〈사계정사기〉의 윗 대목을 쓰면서 품었던 안 타까움을 구체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동국명산동천주해기》를 허균과 연관짓게 하는 결 정적인 자료가 하나 더 있다. 도교 수련소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사의 내단 수련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남궁선생전〉이 바로 그것이다.
간통한 첩과 간부를 죽이고 살인범이 되어 호송되다가 도망친 남궁두가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의령에 있는 野庵에 묵어 자는 데, 관상만 보고 자신의 모든 일을 알아맞히는 異僧을 만나 가 르침을 청하자, 그는 茂州 雉裳山에 있는 자신의 스승을 찾아 가 볼 것을 권한다. 이에 남궁두는 방향을 돌려 치상산에 도착 하여 1년이 넘도록 온 산을 뒤지며 수십 곳의 절을 온통 찾아다 녔으나 異僧을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 대목은 흡사 조현이 가한장인의 지지를 들고서 지의대사를 찾아 헤매는 광경을 연상 시킨다.
어렵게 仙師 長老를 만난 남궁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 단 수련에 들어가 큰 성취를 이루었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慾念이 끓어 올라 泥丸이 타오르는 바람에 마침내 神胎를 이루지는 못하고 地仙의 경지에 머물고 만다. 남궁두가 뒤에 장로에게 그 출처를 묻자, 仙師는 자신이 태사 權幸의 증손자로 熙寧 2년(1069)에 태어났으며, 열 네 살에 나병에 걸려 버려졌다가, 범굴 속에서 草羅란 풀을 먹고는 나병이 절로 낫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후 그는 태백산 꼭대기의 禪房을 찾아가 늙고 병든 중으로부터 그 스승의 비결서를 전해 받게 된다.
그 책은 신라 의상대사가 중국의 正陽眞人으로부터 받았다는 비결로, 《黃帝陰符經》·《金碧龍虎經》·《參同契》·《黃庭 內外經》·《崔公入藥經》·《太息心印》·《通古定觀》·《大通 淸淨》 등의 경전이었다. 그후 11년의 수련 끝에 마침내 神胎 를 이루어 上仙이 되어 천상에 올라가려 하였으나, 상제가 동 국 三道諸神을 거느리라는 명령을 내리므로 이곳에 5백여년을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이 대목은 또한 조현이 반야봉을 천신 만고 끝에 올라, 가한장인으로부터 비결서인 《동국명산동천지》를 받으면서, 가한장인의 출처를 듣는 대목과 거의 방불하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로가 삼도제신의 조회를 받는 장면이다. 산골 가득 수천 수만의 꽃등불이 대낮처럼 걸리더니, 기이하고 괴상한 모습의 온갖 짐승 수백 수천 마리가 나타나고, 지휘 깃발을 든 金童玉女 수백명과 기치창검을 든 군대 1천여명이 삥 둘러선 가운데, 제신들이 차례로 화려한 복장을 하고 도착을 한다. 제신들의 조회 차례와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三大神君 : 東方 極好林·廣霞·紅暎山
五洲眞官 : 蓬壺·方丈·圖嶠·祖洲·瀛海
十島女官 : 東南西海 長離·廣野·沃焦·玄 ·地肺·摠眞·女 ·東 華·仙源· 琳宵
七道司命神將 : 天印·紫盖·金馬·丹陵·天梁·南壘·穆洲
五大神將 : 丹山·玄林·蒼兵·素泉· 野
五神所統山林藪澤嶺瀆城隍諸鬼伯鬼母 : 5백여명 말하자면 이들은 동국 三道諸神 들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신 선들의 사회는 철저한 관료제에 의한 위계가 엄격한 집단이다. 三大神君·五洲眞官·十島女官·七道司命神將·五大神將과 오대 신장 관할 하에 있는 山林藪澤嶺瀆城隍諸鬼伯鬼母들 사이에는 엄연한 차등이 존재한다. 삼대신군의 경우 장로가 일어서서 손 을 모아쥐자 삼대신이 두 번 읍하고 물러나며, 오주진관의 경 우 장로는 일어서기만 하고 신들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그 러나 십도여관은 앉아서 절을 받고, 칠도사명신장은 읍만 하고 절하지 않고 물러가며, 나머지 오대신장과 귀백귀모들은 줄을 지어 서서 네 번 절하고 물러난다. 명칭으로 볼 때 神君이 가장 높고, 眞君과 女官이 그 다음이며, 그밖에 神將과 鬼伯鬼母들 은 가장 하층의 품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남궁선생전〉에 보이는 三道諸神들의 품계와 명칭이 앞서 《동국명산동천주해기》에 보이는 三大洲·五大神嶽·九輔 洞天·四十三府·二十七島·三十五洞·一百四十一山·九十九川의 체계와 아주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남궁선생전〉에 비추어 볼 때, 삼대주의 경우 마땅히 三洲眞 官이 있을 터이고, 오대신악에는 응당 五大神君이 있어야 할 터이다. 또 구보동천과 사십삼부에는 다시 각각의 神將이 있겠 고, 이십칠도에는 女官이, 그밖에 洞과 山과 川에는 으레 山林 藪澤嶺瀆城隍諸鬼伯鬼母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관할하고 있는 내용이 《동국명산동천주해기》에 상세히 적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실제 저자를 허균으 로 단정한 남극관의 주장이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님이 더욱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남극관은 이러한 것 외에 이 책의 두찬자를 허균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동국명산동천주해기》 는 허균이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지은 것이 거의 확실해진 셈 이다.
이제 남는 문제는 허균은 왜 굳이 힘들여 책을 저술해 놓고서,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그럴 듯 하게 포장하여 세상에 유포시키 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창 작 목적을 헤아리는 일과 관계된다. 이를 촌탁하려면 먼저 허 균이 이 책을 생애의 어느 시기에 지었던가에 대해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앞서 조현의 모델이 되었을 법한 인물인 조벽이 〈상원군왕총 기〉에 나오고, 그밖에 〈사계정사기〉와 〈남궁선생전〉이 모두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내용과 관련된다고 볼 때, 《동국명산동천주해기》가 이들 작품보다 뒤에 지어졌을 것으 로 판단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상원군에서 어려서부터 중노 릇 하던 조벽을 직접 만나 〈상원군왕총기〉를 짓기 전에, 우 연히 똑같이 상원군 사람으로 어려서 절에 들어가 거사가 되어 18년만에 문자를 깨친 조현이란 인물을 상정할 수는 없을 것이 기 때문이다. 상원군에서 왕총이 무너진 것은 1607(선조 40)년 7월이었고, 그 후 3년을 연달아 풍년이 들었다고 했으며, 조벽 이 허균을 찾은 것은 그 후이니까 적어도 〈상원군왕총기〉는 1609(광해 1)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또 〈사계정사기〉는 허균이 과거 시험에 조카를 부정 합격시킨 혐의로 함열 땅에 귀양가 있던 시기에 지은 작품인데, 그가 함열로 귀양간 것이 1610년 12월이었으니, 이 글 또한 그 이후 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고, 〈남궁선생전〉은 공주에서 파직당 한 후 부안에 살고 있을 때인 1608년 남궁두를 만나 들은 이야 기를 나중에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허균이 《동국명산 동천주해기》를 지은 시기는 아무리 낮춰 잡아도 1610년 이후 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은 창 작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완성은 적어도 1610년에서 한 두 해가 더 지난 뒤에야 가 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핀다면, 허균은 1910년 12월 함열에 유배간 이후 1611년 11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에 잠깐 들렀다가는 곧바로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후 1613년 12월까지 부안에 머물거나 호남 지방을 여행하며 지냈다. 이후 허균은 1614년 2월 호조참의에 제수되고, 직후 천추사로 중국에 다녀 온 이후 1615년 8월에도 陳奏副使로 중국에 가는 등 바쁜 벼슬 길에 치어 더 이상 한가로이 이런 종류의 집필에 몰두할 형편 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동국명산동천주해기》는 1610년 12 월에서 1613년 12월 사이, 주로 그의 함열 유배와 부안 체류 시 절에 이루어진 것임이 자명해진다. 아울러 창작 심리의 과정을 유추해보면 〈사계정사기〉를 쓰면서 느꼈던 문제의식과 〈남 궁선생전〉을 창작하면서 관심을 갖게된 眞人仙官의 세계에 대한 흥미가 함께 작용하면서, 〈상원군왕총기〉를 쓰게 된 계 기를 마련해 준 조벽 등의 인물을 허구화하여 한편의 체계를 갖춘 전작의 비결서를 창작하려는 욕구로까지 발전하게 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잘 알려진대로 1618(광해 10)년에 역모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당했다. 《동국명산동천주해기》가 적어도 1611년에서 한 두 해가 지난 뒤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는 추론 이 가능하다면, 이 책은 그의 생애 후반부에 쓰여진 것이다. 그 는 왜 이 책을 지었을까? 애써 지은 후 왜 익명으로 유포했을 까? 그가 이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조 현의 서문에서 가한장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듯이, 동국 백 성이 스스로 오랑캐라 여기며 그 지경 안 神山靈境에 眞人과 仙官이 다스리는 바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였을까? 아니면 〈남궁선생전〉에서 펼쳐보였던 신선들의 세계를 좀더 확장하여 체계화하고픈 창작 욕망 때문이었을까? 앞의 이유 때문이었다면 없는 사실을 날조까지 해가면서 창작 에 몰두할만한 적극적인 이유가 되지 못하고, 뒤의 이유 때문 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굳이 감춘 것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진다.
그런데 앞서 조현의 서문 끝에 서 "靈嶽神山으로 하여금 기이 한 자취를 드러내게 하여, 혹 임금이 높여 존숭하여 제사지내 고 封禪함이 있다면 동국 백성이 복을 받는 때일 것"이라고 한 주장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논자는 이 대목에서 그의 역모와 죽음을 둘러싼 자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山水秘記》의 존재 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4년(1612) 9월 14일자의 기록을 보면 지리학교수인 引儀 李懿信이 國都의 기운이 쇠하였으므로 交 河로 천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일이 실려 있는데, 그는 같 은 해 11월 15일에 다시 상소하여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 으므로 교하현에 도성을 세워야 함을 여러 참위서와 방술의 기 록에 빙자하여 강력히 주장하였다. 일개 術官에 지나지 않던 이의신이 이러한 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광해 5년 1월 1일 과 2월 23일의 실록 기사를 보면 광해군의 은밀한 지시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이 드러난다. 이후 이의신을 죄주어야 한다는 상 소와 건의가 수백 차례에 이르도록 빗발쳤어도 광해군은 끝내 이의신을 두둔하며 그에게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고, 도리어 實職을 내리고, 중요한 일의 결정에 참여케 할 만큼 그에 대한 신망이 깊었다. 광해 8년(1616) 3월 24일 기사에도 미친 중 性 智가 지리에 대한 方書를 잘 이해한다면서 인왕산 아래로 왕궁 터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실려 있다.
실록을 통해 볼 때, 광해군은 창덕궁이 단종과 연산군이 폐치 되는 변고가 있었던 곳이라 궁궐을 옮기려는 생각이 진작부터 있었고, 역모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왕실을 둘러싼 잡음이 그 치지 않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자 천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 고 있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山水秘記나 圖讖書들이 횡행하게 되었는데, 이의신의 상소와 그를 둘러싼 논란들은 저간의 사정 을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문제는 허균 또한 역모와 관련된 모종의 거사에서 이 천도설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록 광해 9년 (1617) 12월 24일자의 기사에는 허균을 탄핵하는 기준격의 상 소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허균은 김제남과 공모하면서 서 울을 옮기자는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讖書의 본문에 없는 말 을 더 써 넣어 '첫째는 漢, 둘째는 河, 셋째는 江, 넷째는 海이 다.'고 하였는데 河라고 한 것은 교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 다"란 대목이 보인다. 또 광해 10년 2월 9일에는 유학 문의남이 기준격과 기자헌을 복주하기를 청하면서, "기자헌이 방서를 많 이 모으고 날마다 술사를 맞고 있는데, 道詵의 煉記가 나덕수 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잡아오도록 계청하여 그 煉書를 얻은 뒤에야 그만두었으며" 운운하는 내용과, 같은 해 8월 18일 허균의 공초에서 기자헌이 경주의 蛇山이 천년의 왕기를 지닌 땅인데 자헌이 첩을 盜葬하여 뒷날 제왕의 복을 누리려 도모하 였다고 한 내용이 있는 사실 등으로 보아, 당시에 이러한 산수 비기류의 도참서들이 왕실 뿐 아니라 지식인 집단 내부에서도 크게 성행하고 있었던 사정을 알 수 있다.
허균은 8월 18일의 공초에서 앞서 기준격의 고변에 대해 "세상 에 전해지는 《산수비기》는 세상에 떠돌아다닌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讖書를 집에 보관하는 것은 율문에 죄가 중하므로 신은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뿐입니다. 遷都의 설은 임자년에 한창 나왔는데 수십년 전에 신이 어떻게 미리 알아서 첨가하였 겠습니까?"하고 발뺌하였다. 그러나 8월 22일, 홍문관 관원들 의 차자에서는 "하늘이 낸 괴물인 허균이 2백년의 종사에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 전후의 흉악하고 비밀스런 상황에 대해서, 사람마다 모두 마음 속으로 통탄해 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말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허균이 평생 동안 한 짓은 온갖 악행을 다 갖추고 있는데 상도를 어지럽히는 패려궂은 행실은 다시 사 람의 도리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상중에 창기를 데 리고 있어서 인류에 버림을 받았고, 요망한 짓을 하고 참언을 조작하는 것은 곧 그의 장기이며, 화란을 탐하고 즐겨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는 듯하였습니다"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 고, 결국은 秘記에 의탁해서 참언을 지어내 몰래 천도의 설을 퍼뜨리고, 흉격과 흉서를 내붙여 역모를 꾀한 역적의 우두머리 로 지목되어 8월 24일에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만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역모 사건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내용이 착종되어 있고, 당시 정치 현실의 복잡미묘한 정황과 개인 적인 은원관계까지 얽히고 설켜 일어난 일이었기에 이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지만, 허균의 죄목 안에 적어도 《산수비기》에 의탁하여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고, 비기의 내 용을 일부 가필까지 했다는 사실이 수차례 언급되고 있는 점은 우리의 흥미를 끈다.
그렇다면 그가 가필까지 했다는 《산수비기》는 과연 《동국 명산동천주해기》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걸까? 《성소부부 고》 부록 2에 실려 있는,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반박 상소에서 허균이 "이 참설은 20여년 전 선조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 려온 지가 이미 오래"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산수비기》가 곧 《동국명산동천주해기》를 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해 4년(1612)부터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온 나라를 떠 들썩하게 했던 천도설의 와중에서 《동국명산동천주해기》가 허균의 손에 의해 지어진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 두 책 사이에 는 암암리에 보이지 않는 맥락이 닿아 있다고 보아 무리가 없 을 듯 하다.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실물이 없는 현재 상황 에서 단정할 수 없지만, 이 책 안에 실려 있는 洞天福地의 설명 속에 이러한 천도설을 부추키고, 특정 장소를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어쨌든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두찬과 관련하여 허균은 모 종의 의도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창작 시기는 전후 사정을 살 피건데, 천도설이 뜨거운 쟁점이 되었던 광해 5년(1613)을 전 후한 시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허균이 《동국명산동천 주해기》를 지은 것이 순수하게 우리나라 도교의 자주적 역량 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역모와 관련된 불순 한 목적에서 나온 것인지를 명확하게 갈라 판단하는 일은 이 책의 실물이 전하지 않는 현재로서는 논자의 역량 밖에 있다.
Ⅳ.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도교문화사적 의미
허균의 두찬으로 판명된 《동국명산동천주해기》는 그렇다면 한낱 위서에 지나지 않는 무가치한 자료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허균의 두찬임이 밝혀짐으로 해서 오히려 이 자료는 한국 도교 문화사에서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선초 이래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오던 조선 도교는 선조조에 이르면 문화 전면에 돌출하여 자못 다양하고 활발한 양상을 보 이게 된다. 鄭 은 《北窓秘訣》을 남겨 매월당의 〈龍虎訣〉 을 이어 내단학의 정심한 이론을 정리하였고, 허균은 앞서 보 았듯 〈남궁선생전〉을 지어, 당시 성행한 내단학의 수련 과정 을 실존 인물 남궁두의 생애에 얹어 설명하였다. 그밖에 柳亨 進이니 宋天翁이니 하는 실제 수련에 힘쓴 도사들의 존재가 당 시 문인들의 문집에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고, 權克中은 〈金丹 吟〉과 같은 연작시를 통해 내단학의 수련과정을 시로 설명하 는 한편, 《周易參同契演說》과 같은 주해서를 남기고 있다.
택당 이식 같은 근엄한 유자의 손을 거쳐 〈海東傳道錄〉 또는 〈海東傳道秘記〉니 하는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문학 방면에서는 허난설헌이 〈유선사〉 87 수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통해 역대 신선들의 고사를 환상적 필치로 그려내었고, 이춘영은 〈독신선전 53수〉를 남겼다. 이 를 이어 장경세도 〈유선사〉 87수를 남기고 있다. 이 시대 문 인들의 문집에서 몇 수 쯤의 유선시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새 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들 유선문학은 모두 역대 신선고사를 충분히 숙지한 바탕 위에서 개인의 서정을 가탁하고 있으니, 당시 문화 전반에 걸쳐 도교 전설의 유포 상황과 도교에 대한 일반의 애호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그밖에 《청학집》과 《오계집》처럼 道流들의 실제 수련과정 과 관련된 秘記들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속속 출현하여 일견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도교 전설을 광포시켰다. 이는 일반의 전 폭적인 호응과 기대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허균의 《동국명산동천주해기》는 도교의 동천복지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국과 대등한 입 장에서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동천복지가 각처에 있어 眞人 仙官이 통치하고 있는 복된 터전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한 의 도로 읽을 때, 이 책은 한국 도교의 문화역량이 극대화된 시점 에서 나타나는 주체 도가의 자주화 토착화 노력의 일환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앞서 남극관이 "허균이 《道藏》의 諸書를 취하여 흉내내고 꾸며 엮어 이 글을 이루었다"고 한 언급과 관련하여 도교 전래의 동천복지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허균이 이 책을 저술하면서 참고했을 법한 《도장》 제서의 체제를 통해 역으로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구체적 형식을 추론해 보고 자 한다.
동천복지란 명산승지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신선들이 거주한다는 별세계를 말한다. 당나라 때 上淸派의 天師였던 司馬 承禎(647-735)은 그의 《天地宮府圖》에서 각처에 산재해 있 는 10大洞天과 36小洞天, 72福地를 소개하면서, 그 서문에서 "도는 본래 텅비어 인할 바가 없는데, 황홀히 物氣가 가득참이 있어, 비로소 기운의 조화를 타고서 형상이 나뉘어진다. 精象 이 현묘히 드러나매 淸景에 궁궐이 늘어서고, 幽質이 그윽히 엉기어 명산에 洞府가 열린다"고 하면서, 정성스런 뜻으로 부 지런히 도를 닦으면 신선도 감응하여 영접할 수 있고, 수련을 이루게 되면 용과 학을 타고 올라가 天洞에까지 이를 수 있다 고 하였다. 이어 10대동천은 "대지 명산의 사이에 있는데, 이곳 은 上天에서 群仙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곳"이라 하였고, 36소 동천은 "여러 명산 가운데 있는데, 또한 上仙이 통치하는 곳"이 라 하였으며, 72복지는 그다음 가는 곳으로, "대지 명산의 사이 에 있어 상제께서 眞人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는데, 그 사이에는 득도하는 곳이 많다"고 하였다.
이후 36동천, 72복지의 설이 구체적 지명과 함께 여러 문헌에 서 논의되었는데, 唐末五代의 도사 杜光庭(850-933)이 지은 《洞天福地嶽瀆名山記》는 그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 그 는 이 책에서 사마승정의 《천지궁부도》를 더 확대하여 天上 玉淸 위 大羅天 아래의 玄都 玉京山을 비롯한 여러 산과, 三境 之山, 그리고 十洲三島五嶽, 中國五嶽, 十大洞天, 五鎭海瀆, 三 十六靖廬, 三十六洞天, 七十二福地, 靈化二十四 등으로 더 상 세히 부연하여, 그 범위를 지상 뿐 아니라 천상과 해상으로까 지 확장시켰다.
허균이 《동국명산동천주해기》를 지으면서 주로 참고한 것은 바로 사마승정의 《천지궁부도》와 두광정의 《동천복지악독 명산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도장》에 실려 있는 동 방삭의 《十洲記》와 《洞冥記》, 두광정의 《錄異記》, 그리 고 북송의 도사 李思聰의 《洞淵集》에 실려 있는 복지동천과 관련된 기록 등도 주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남궁선생전〉에 보이는 三大神君의 관할 하에 있는 廣霞山 과 紅映山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고 두광정의 《동천복지악 독명산기》에 천상의 玉淸 위 大羅天 아래에 자리 잡은 여러 산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이 책은 〈남궁선생전〉의 창작에도 활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밖에 《동천복지악독명산기》에서 十洲三島五嶽 가운데 여러 산으 로 소개되고 있는 方壺·沃焦·蓬萊·員嶠·穆洲·地肺·祖洲·長 · 廣野·金華·紫空·玄洲 등의 명칭은 〈남궁선생전〉에서 蓬壺· 方丈·沃焦·圖嶠·穆洲·地肺·祖洲·長離·廣野·東華·紫盖·玄 등 과 같이 그대로 혹은 한 글자만 바꾸어서 나오고 있다. 물론 여 기에는 중국 쪽 문헌에 보이지 않는 지명도 적지 않다. 앞서 《도장》 제서를 취해 꾸며 엮었다는 남극관의 지적을 환기할 때,《동국명산동천주해기》에 나오는 여러 지명의 명명방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논자는 확신한다.
여기서 이들 책에서 각처의 지명을 소개하는 방식을 참고해보기로 하자. [1] 瀛洲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땅이 사방 사천리이다. 대저 會 稽와 마주하고 있다. 西岸에서 70만리를 가면 위에 神芝와 仙 草가 자라고, 또 옥돌이 있는데 높이가 천길이나 된다. 샘이 솟는데 술처럼 맛이 달아 이름하여 玉醴泉이라 하니, 이를 몇 되 만 마시면 문득 취하여 사람을 장생하게 한다. 洲의 위에는 仙 家가 많다. 풍속은 오나라 사람과 비슷하고, 산천은 중국과 같 다. [2] 동악 태산은 嶽神이 天齊王이니 선관과 옥녀 9만인을 거느 린다.
산은 둘레가 2천리인데, 袞州 奉符縣에 있다. 羅浮山과 括蒼山을 佐命으로 삼고, 蒙山과 東山을 佐理로 삼는다. [3] 第一 地肺山. 康寧府와 句容縣의 경계에 있다. 옛날 陶隱居 가 숨어 살던 곳이니, 眞人 謝允이 이를 다스린다. [1]은 《십주기》의 인용인데, 여기에는 주관하는 선관진인의 이름은 없이 그냥 위치와 규모, 특산과 경치에 대해 묘사하였 다. [2]와 [3]은 《동천복지악독명산기》와 《천지궁부도》에 서 각각 하나씩 임의대로 골라본 것이다. 역시 위치를 비정하 였고, 여기서는 주관하는 嶽神과 仙官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앞서 남극관의 언급을 통해 볼 때,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서술체제는 [2]와 [3]의 방식을 취하되, 분량이 4권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본문 설명이 좀더 자세하고, 본문과는 별도로 주 해의 형식을 빌어 실제 지명을 비정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 주해의 내용은 《동 국여지승람》 등 제서를 참고한 위에 약간의 신비적 색채를 더 한 것이었을 터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동천복지를 찾아가는 仙境求尋 설화가 문헌으로 처음 확인되는 것은 고려 중엽 이인로의 《파한집》에 보이는 청학동 이야기에서부터이다. 그후 이러한 동천복지와 관련된 설화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조선 중기 선조조를 전 후한 시기에 와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일과적인데 그치지 않고,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형상화되었다. 《동국명산 동천주해기》의 서문과 발문이 실려 있는 《와유록》에만 해 도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꽤 여럿 보이고, 이후 여러 문헌 설화 에도 이러한 동천복지 설화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동 천복지 설화에 나타난 유토피아 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논고를 달리하여 검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이 시기에 명산승지에 眞人仙官이 통치하는 별세계가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는 신앙이 민간에 널리 광파 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국명산동천주해 기》는 바로 이러한 의식이 집대성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설 사 순수하지 않은 목적을 지니고 창작된 위서라 할지라도, 문 화사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책은 당대 민간에 뿌리내린 도교 신앙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증명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될 뿐이다. 실제로 《도장》에 실려있는 복지동천에 관한 저술 들도 황당하고 허무맹랑하기로는 《동국명산동천주해기》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와유록》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遊金剛山序〉는 1525 (중종 20)년에 지어진 산수유기인데, 여기에는 이종묵 교수가 해제에서 설명하고 있는대로, 《十洲記》·《神仙傳》·《神異 經》·《述異記》·《道書福地記》·《洞冥記》·《河圖括地》· 《集仙傳》·《太淸記》·《神仙訣錄》 등 거의 100종이 넘는 도교와 불교 관계 전적들이 총망라되어 인용되고 있어 읽는 이의 이목을 압도한다.
대개 이러한 기록의 존재는 《동국명산동 천주해기》 이전부터 복지동천을 추구하는 의식이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당시 지식인들의 道書 독서의 범위가 오늘날 우리의 일반적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광범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자료에 나타난 복지동천에 대한 인식은 고를 달리하여 깊이 있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기에 후고에 미 루거니와, 여기서는 그 가운데 한 단락만을 소개해 보이기로 한다.
장차 81福地를 찾고 36洞天을 구하여 無生의 경계에 들고 불사 의 뜨락에 올라 廖陽館에 살며 蘂珠宮에 누워, 봄에는 朝霞를 먹고 여름엔 沆瀣를 먹으며, 솔잎과 잣을 먹고 靈芝와 朮草를 먹으며, 胡麻로 밥지어 먹고 인삼을 삶아 먹으며, 雲牙를 양치 질하고 玉池를 삼켜 丹 를 닦아 황금을 단련하며, 靑囊銘을 열어 《黃庭經》을 외우고, 紫庭의 眞誥를 읽어보고 碧篆의 글 을 살피려 함은, 곧 《中皇經》에서 "元和를 먹고 五穀을 끊으 면 반드시 廖天에 참획하여 眞訣을 얻는다"고 한 것이다. 흰 사슴과 푸른 소에 올라타 羽人과 金衣鶴을 불러다가 太上玉宸君 을 뵈옴은, 곧 《神仙訣錄》에서 "天仙과 地仙이 있는데, 地仙 이 功行을 많이 쌓으면 마침내 天仙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한 것이다. 전체 49면에 달하는 방대한 산수유기 전편이 온통 이와 같은 방식의 도가 문자로 가득채워져 있어 언뜻 보기에는 한편의 산 수유기라기보다는 도가의 비결서를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이 보일 정도다. 여기에도 이미 81福地와 36洞天의 이야기가 나타 나고 있다.
여기서 당시 도교 문화의 주체화 노력과 관련하여 소개하지 않 으면 안될 또 다른 자료가 하나 더 있다. 南師古의 《東國分野 記》란 책이 그것이다. 남사고는 선조조의 術士로 그는 일찍이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十勝地 를 지목하여 '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를 설명한 《南師古秘 訣》을 지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남사고는 최근까지도 1960년 대 이후에 만들어진 《격암유록》이란 僞書의 저자로 지목되 어 예언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동국분야기》 또한 아직 학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자료인데, 이것은 分野說에 입 각하여 우리나라 각 지역을 별 자리의 위치로 환산하여 비정한 책이다.
이 책은 徐有本(1762-1799)의 《左蘇山人集》에 실려 있는 〈與金生泳書〉에 그 이름이 처음 보인다. 해당부분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東國分野記》는 약속대로 베껴서 보내오. 세상에서 전하기 를, 이것은 南師古가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저 分野의 주장 은 《周禮》에 실려 있는데, 《星經》이 이미 없어지고 보니, 지금에 와서 근거로 할 바의 것은 班固의 《漢志》와 鄭康成의 《禮註》 및 魏太史令 陳卓이 지은 바 《郡國所直宿度》에 그 칠 뿐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선비가 믿는 자와 의심하는 자가 반반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땅이 중국의 지경 과 서로 맞닿아 있는 까닭에 아울러 箕尾의 分野에 속합니다. 이제 또 우리나라 콩알만한 땅을 가지고 나누고 갈라 28宿로 나누어 분류하여, 아무 고을은 아무 별자리에 해당하고, 아무 고장은 아무 별자리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우물안 개구리가 하늘을 엿보는 것이라 하겠으니, 그 주장은 마치 허 공을 천착하고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가 의심 되어 실용에 두어 쓸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지구라는 하나의 점은 천체의 큰 둘레 가운데 있어, 단 지 큰 못에 있는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중국에서 별자리로 분야를 나누는 것은 제각기 각 사람의 눈이 보는 바 방향과 향하는 바의 대개를 나누어 소속시킨 것일 뿐입니다. 예컨대 揚州는 星紀에 속하고, 雍州는 首에 속하게 되니, 어 찌 星紀의 차례가 揚州에 임하여 그치고, 首의 차례가 다만 雍州에만 해당하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다면 온 하늘 360도 로 중국의 12州를 다 하게 되니, 바다 밖 만국은 아울러 크나큰 우주에 참여함이 없게 될터인데, 이 어찌 이치에 합당타 하겠 습니까?
그런 까닭에 중국으로 볼 때는 중국의 분야가 있는 것이고, 동 국으로 볼 때는 또한 동국의 분야가 있게 되는 것이니, 제각금 그 방위의 경계에 따라서 각기 그 災祥休咎를 점치는 것은 또 한 그 이치가 속일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사고의 災祥 占은 백에 한 번도 맞추지 못함이 없으니, 세상에서는 우리나 라의 邵康節이라고들 일컫지요. 그 술법을 오로지 별자리의 모 양으로 추측한다면 지은바 별자리의 분야를 기록한 《동국분 야기》란 것은 반드시 자연의 法象이 갖추어져 있을터이니, 결 단코 제멋대로 황당무계한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닐겝니다.
그러나 《동국분야기》에는 각 고을에 해당하는 별자리의 도수가 나뉘어져 있지 않으니 반드시 글이 빠진 것인가 합니다. 그대 가 한가한 날에 輿圖를 시험삼아 점검하여 1도를 200리로 기준 삼아, 예를 들어 호남 열 두 고을을 모두 角宿에 소속 시킨다면 전주 등 고을은 몇 도가 되고 담양 등 고을은 몇 도가 됨을 얻 을 것이니, 하나하나 나누어 각 고을의 아래에 써서 앞 사람이 마치지 못한 작업을 궁구한다면 이 또한 한가지 일일 것입니 다. 유념해서 이를 도모해준다면 다행이겠소.
이 편지를 받은 金泳은 정조대의 천재적인 천문학자로, 기하학에 조예가 깊었고, 《中星記》를 비롯하여 《易象啓蒙》·《道 敎全議》등 수많은 천문학과 역학 및 도교관계 저술을 남겼던 인물이다. 위 편지에 보이는 分野說이란 고대 점성술에서 나온 개념이다. 고대인들은 天象의 변화가 地上에 어떤 사건을 일으 키거나, 반대로 지상의 어떤 사건이 천상의 별자리에 반영된다 고 믿었는데, 천상의 별자리의 위치에 따라 지상의 지역을 나 누어, 그 별자리의 변화가 곧 그 지역에서 발생하는 어떤 변고 의 豫徵이 된다고 믿은 고대 신앙의 한 가지이다.
서유본의 편지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중국의 분야만을 따른 다면 우리나라는 동북방에 처해 있어 箕尾의 분야에 속하게 되 는데, 별자리의 방향이란 어디를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분야 가 달라지게 되므로, 중국에는 중국의 분야가 있고, 우리나라 에는 우리나라의 분야가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남사고 가 펴냈다고 전해지는 《동국분야기》는 그런 점에서 볼 때 매 우 뜻깊은 책인데, 이 책에는 각 고을에 해당하는 별자리의 도 수가 정확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으니, 그대의 해박한 천문학의 지식을 동원, 輿圖를 점검하여 1도를 200리로 기준 삼아 각 고 을 별로 그 분야를 정확히 표시하는 작업을 맡아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동국분야기》는 성격만 다를 뿐 그 의식면에서는 《동국명산동천주해기》와 거의 같은 궤선 상에 놓이는 저작이다. 그 저술 시기도 둘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이 모두 주체적 문화역량의 제고에 따른 자기화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 《동국분야기》는 일반적으로 참위서 나 예언서의 기능에 비중이 놓여 있던 것으로 위 편지는 암시 하고 있어, 도교의 星宿信仰的 요소를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북송의 도사 李思聰이 《道藏》에 수록된 그의 《洞淵集》에 서 36동천을 설명하면서 동천의 위치 설명에 분야설을 삽입하 고 있는 것은 그러한 연관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 다.
이상 살펴본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동국명산동천주해 기》는 원래 허균의 찬술 의도와는 관계 없이 우리 도교문화사 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저작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바 탕에는 어느 천재적 문인의 재기 넘치는 상상력만이 아닌, 전 대로부터 누적된 도교의 문화 체험에서 오는 저력이 깔려 있음 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선조 광해 연간은 임진왜란의 전쟁 체험으로 땅에 떨어진 민족 의식의 주체적 각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또한 전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오던 수련 도교가 문화 전면에 돌출하면 서, 도교 문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고양되고, 이에 따라 다양 한 저작들이 활발히 제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본고에서 지금 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동국명산동천주해기》나 《동 국분야기》 같은 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내용과 체제, 그리 고 도교문화사적 의미를 천착해 본 것은, 이 시기 활성화된 도교의 주체적 문화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
《동국명산동천주해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동천복지에 대한 의식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鄭鑑錄》의 〈三韓山林秘記〉나 十勝之地說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예언서적 성격으로 변화되면서 동학이나 최근의 신흥종교에서까지도 후천개벽 신앙과 관련된 전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포함하여 전후 시기에 여러 문헌에 전해지는 洞天福地와 관련된 仙境求尋, 또는 仙境 遊歷 설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洞天福地說의 東傳 양상과 거기에 나타난 심리기저를 헤아려 보는 일은 계속되는 작업으로 남는다. 이러한 논의의 반복과 심화를 통해 한국 도교문화사의 거시적 전망이 수립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