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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 說 ( 만 설)
天其運乎, 地其處乎, 日月其爭於所乎. 孰主張是, 孰維綱是. 孰居天地之內, 恒推以行是. 意者, 其有機氣之不得已耶. 其運轉而不能自止耶. 觀! 夫大界列宿, 초초燦爛明朗, 其光自何, 其大幾何. 觀乎千인之岡而行人如豆, 望乎百里之海(而)歸帆似葉, 仰乎九萬里之遙而星辰如燭, 其大幾何, 其光何幾. 황! 地天之隔, 非但九萬者里耶! 人行于市而肩尻摩, 車轉于通衢則其곡搏. 星辰麗于穹蒼, 則昭昭耿耿, 齊齊整整, 井然有序, 罔或有侵. 孰引是, 孰主張是. 日遠於星, 月近於星耶. 抑! 亦星居乎最遠耶. 日月之大, 較於列宿, 何如. 洪爐之火, 隔丈而燎之, 則不過微溫; 滿車之氷, 距尋而當之, 則只感微凉. 日月之氣, 來自九萬里而凉熱逼人, 其熱幾何, 其寒凡幾.
漫說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땅이 멎어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가 이를 주재하여 펼치고, 누가 이를 붙잡아 다스리며, 어느 누가 하늘과 땅에 머물며 항상 이를 밀어서 움직이게 하는가. 생각건대 그 곳에는 바탕이 되는 기운이 있어 마지못해 그리되는 것인가, 그 움직이고 구르는 것은 스스로 멈추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 넓은 세계에 늘어서 있는 별자리를 바라보노라면 멀디멀고도 찬란하게 밝으니, 그 빛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 크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천 길 높은 산마루에서 살펴보노라면 지나다니는 사람은 마치 콩알만하고, 백리의 바닷길을 바라보노라면 돌아오는 돛단배가 마치 잎사귀 같은데, 9만리의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늘어선 별들은 마치 촛불과도 같으니, 그 크기는 얼마만한 것이며, 그 밝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항차 땅과 하늘과의 간격이 단지 9만리 만 될 것인가.
사람들이 저자거리를 지나다니자면 어깨와 꽁무니가 맞닿이게 되고, 수레가 번화한 네거리를 지나가노라면 곧 그 바퀴가 부딪치게 되는데, 늘어선 별들은 높고 푸른 하늘에서 빛을 발하면서 밝디밝게 반짝거리고 가지런히 질서가 있어 행여나 침범하는 일도 없으니, 누가 이를 이끄는 것이며 누가 이를 주재하여 펼치는 것인가. 해는 별보다 멀고 달은 별보다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별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의 크기는 별들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큰 화로의 불도 열 자 떨어져 불길을 쬐면 단지 따뜻할 뿐이요, 수레에 가득 실은 얼음도 얼마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으면 단지 서늘할 뿐인데, 해와 달의 기운은 9만리의 먼 곳으로부터 오면서도 춥고 더움이 사람을 다그치니, 그 열기는 얼마만한 것이며, 그 냉기는 또한 얼마만한 것인가.
且夫! 山岳之莊雄, 河海之汪洋, 萬象森列, 兆物備載, 岳頂一(卷)[拳]之石, 谷底一莖之草, 自得其所, 互誇厥美; 糞堆蠢연之蟲, 長渚飄泊之藻, 各安其所, 互弄厥質. 孰撑是而不崩, 孰護是而不決. 孰守是, 孰掩庇是. 意者,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眞神之主宰歟. 東人則曰桓因主神, 漢土之人則曰上帝, 西域之人則曰佛타, 大秦之人則曰天主, 皆以主宇宙.統萬象爲言. 其造物者之爲性也, 隨民而各異耶. 同체而異用耶. 抑! 同一而異觀耶. 同一之元首而, 我曰(王)[壬]儉, 漢曰帝王, 倭曰命或尊. 諸民之名造翁也, 亦若是而已耶. 飛螢有光, 오木放氣, 시梨之木, 能接枝而致盛, 鳧鷄之屬, 能抱卵而자育. 是, 체質之外, 別有精力耶. 物物之精力, 能相交而致生耶.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精靈, 貫流周包, 推運其體質耶. 漢人之說, 盤古.三皇之開闢創始者, 實耶. 東人之言, 三神之肇判開創者, 眞耶. 余不敢校其善否,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一大精靈, 維綱是, 主張是, 能推運而經營之, 則信矣.
또한 산악의 웅장함과 강과 바다의 광대함 속에는 만 가지의 모습들이 늘어서 있고 억 가지의 사물들이 갖추어 실려 있으며, 산마루의 한줌 돌과 골짜기의 한 뿌리 풀도 스스로 자리하는 곳을 얻어 그 아름다움을 서로 뽐내고, 거름더미에서 꿈틀거리는 벌레와 늘 물가를 떠다니는 풀들도 제각기 자기 자리에 깃들여 그 모양을 서로 희롱하고 있으니, 누가 이를 떠받쳐서 무너지지 않게 하고 있으며, 누가 이를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있는가. 누가 이를 지키고 있으며, 누가 이를 감싸안아 돌보고 있는 것인가.
생각건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참된 신이 있어 이를 주재하고 있는 것인가. 동방의 사람들은 곧 '환인주신(桓因主神)'이라 하고, 한나라 땅의 사람들은 '상제(上帝)'라 하며, 서역 사람들은 '불타(佛陀)'라 하고, 대진 사람들은 '천주(天主)'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바로 우주를 주재하고 만물을 통치함을 말로서 드러낸 것이다. 그 조물주의 성품은 백성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것인가, 바탕은 같으면서 드러남만이 다른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온전히 같으나 달리 볼뿐인가. 같은 우두머리를 두고 우리는 '임금'이라 하고, 한나라는 '제왕'이라 하고, 왜는 '명' 혹은 '존'이라 하니, 모든 민족이 조물주를 이름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을 따름인가.
날아다니는 반딧불에도 빛이 있고, 썩은 나무에서도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감나무 배나무는 가지에 접을 붙이면 능히 과실이 무성해 지고, 오리나 닭 등은 알을 품어 능히 새끼를 낳아 기른다. 이것은 몸의 바탕 외에 따로 응결된 힘이 있어서 그러한가. 그러한 사물과 사물들의 응결된 힘이 서로 교접하여 능히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인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정령(精靈)이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고 두루 감싸안으며 그 몸의 바탕을 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겠는가. 한나라 사람의 말에는 반고(盤古)와 삼황(三皇)1)이 세상을 처음으로 연 창시자라 하는데, 이것이 진실인가. 동방 사람의 말에는 삼신(三神)이 세상을 처음으로 가른 창조자라 하는 데, 이것이 진실인가. 내가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서, 이 세상을 잡아 유지하고 이 세상을 주재하여 펼치며 능히 밀어 움직여서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리다.
人生則체溫而動, 靈能慧明; 人[事](死)則(驅)[軀]殼厥(今)[冷], 骨肉梗固, 腐爛而散滅, 不數年而膚肉不留, 不百年而骨骸莫存. 天地之氣, 聚而爲物.爲質, 散則復爲空.爲氣歟. 靈性發於氣質, [氣質]散亡則靈性亦隨而滅歟. 抑! 天地靈秀之性, 鍾而爲靈, 貞明之氣, 聚而爲體, 체沒而靈自不滅耶. 靈旣不(沒)[滅]則返朝于天耶, 悠悠然, 縱遊乎六合耶, 抑! 如佛氏之說, 時墮輪回之苦, 重疊而爲人耶. 觀! 夫蟲蠶卵者, 能知其爲母蛾所産耶. 卵化爲충, 연연然索餌而走動, 能知其[從爲](爲從)卵而出者耶. 충旣成長, 造繭脫毛而爲용, 暗眠於其中, 使人觀之, 거거然樂矣. 雖然, 渠能知其方夢而覺夏충之爲용耶. 용旣수滿, 則脫殼爲蛾, 穿繭而出, 翩翩然飛(飛)舞於林월, 渠能知其自용而變化者耶. 使人高脫乎其外, 歷觀變化之迹, 則其序瞭然, 曾無毫末之疑. 使蛾自量, 則是個未知從來底一生涯也, 寧知其四變之序耶. 使造翁超脫乎塵外, 達觀乎人生變化之迹, 則是亦若是而已耶.
사람이 살아 있으면 곧 몸은 따뜻하며 움직이게 되고 영혼은 능히 총명하고 밝지만, 사람이 죽으면 곧 몸덩이는 싸늘해져 뼈는 굳어지고 육체는 썩어 문드러져 흩어 없어지게 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피부나 육체는 남아 있지 않고, 백년이 못 되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이면 사물의 바탕이 되고, 흩어지면 다시금 공허로운 기운이 되는 것인가. 영혼의 본질은 기운이 모습을 갖춘 다음에 그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그 기운의 모습이 흩어져 없어지면 영혼의 본질 또한 그에 따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하늘과 땅의 신령스럽고도 빼어난 본질이 모여 영혼이 되고, 곧고도 밝은 기운이 뭉쳐 몸이 되는 것이니, 몸은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곧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유유히 천지 사방을 떠돈다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부처의 말처럼 운명에 따라 윤회의 괴로움에 떨어져 거듭되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인가.
살펴보건대, 무릇 한낱 벌레인 누에의 알이 어미인 나비가 낳음으로 해서 자신이 생겨난 것임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알이 부화하여 벌레가 되어 꿈틀거리며 먹이를 찾으러 쫓아다니면서 그 자신이 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벌레가 자라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그 속에서 깊이 잠드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도 즐거워하는데, 그 자신이 곧 잠을 잘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것이며, 여름날의 벌레가 그 자신이 곧 고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고치가 잠에서 깨어나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어 고치를 뚫고 나와 숲속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그 자신이 고치에서 변화하였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은 멀찌감치 벗어나 그 밖에 있으면서 변화하는 자취를 낱낱이 보게 되니 그 순서가 분명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다. 나비는 스스로를 헤아린다 하더라도 한 생애를 다하도록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도 알지를 못하니, 네번이나 변하는 그 순서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물주는 세상의 바깥에 벗어나 있으면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자취를 멀리서 두루 바라보면 그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 아니겠는가.
范縝有言曰: 「形者神之質, 神者形之用也. 神之於形, 猶利之於刀. 未聞, 刀沒而利尙存. 豈容形亡而神在哉!」 是說眞耶. 儒曰「魂升而魄降」, 佛曰「靈魂不滅」, 而涅槃.地獄.輪回.解脫之說, 最繁. 乃檀儉則曰: 「功完而朝天, [歸神鄕.」 又曰: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乃朝天.」]2) 佛說可耶, 儒說不소耶, [桓](檀)儉之訓眞耶. 抑! 范縝神滅之論, 乃發前人所未發者耶. [人何由生], 人何由死. 人生自何, 人死歸何. 生是寄也[而]死乃歸耶. 生乃起也[而]死則落耶. 生也有涯而死則無涯耶. 抑! 亦死而後始有, 無限眞善之境耶. 摩利之塹城壇, 則經四千載而健存, 漠南之長城, 歷二千餘歲而猶崇墉屹屹, 慶州之瞻星臺, 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 然(特立然)則, 人之所肩擔手磨, 規矩繩墨之者, 能閱累千載而不滅, 獨, 肩擔手磨, 規矩而繩墨(之)[之]之人生, 則與腐血오肉, 盡消永滅於黃沙腐土之中, 不曾精靈之有留耶.
범신(范縝)이 한 말에 이르기를 「모습은 정신의 바탕이요 정신은 모습의 활용이다. 모습에 있어서 정신은 마치 칼에 있어서 날과도 같은 것이니, 칼이 없어지고 나서도 날이 남아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어찌 모습이 없어지고 나서도 정신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말이 참된 것인가. 유가에서는 「혼(魂)은 오르고 백(魄)은 내린다」 하였고, 불가에서는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열반·지옥·윤회·해탈 등의 말이 가장 많으며, 단군 임금은 이르기를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으며, 또한 「모든 착한 것을 북돋우고 모든 악한 것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오르게 된다」 하였다. 불가의 말이 맞는가, 유가의 말이 충실한 것인가, 단군 임금의 교훈이 진실된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범진의 '정신 소멸론'이 앞선 사람들이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새로운 것을 드러낸 것이란 말인가.
사람은 어찌하여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은 어찌하여 죽는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란 잠시 의지하는 것이요, 죽음이 곧 본질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 바로 본질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고, 죽음은 곧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삶이란 것에는 끝이 있지만, 죽음에는 곧 끝이 없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역시 죽고 나서야 비로소 무한한 참된 선의 경계가 있게 되는 것인가.
마리의 참성단은 4천년이 지났지만 굳건히 남아 있고, 사막 남쪽의 만리장성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쭈삣하게 서 있으며, 경주의 첨성대는 1천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높다랗게 우뚝 솟아 있다. 그러한 즉, 사람이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긴 것은 능히 수천 년이 지나고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유독 그것을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겼던 사람의 생은 부패한 피와 썩은 살과 함께 모두 사라져서 누른 모래와 썩은 흙 사이로 영원히 없어져 버렸으니, 일찍이 정령(精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宇宙之內.蒼茫之外, 旣有一大精靈, 미滿而推運之. 則人之生也, 非但血肉骨骸之, 從氣質中受者也, 更有精神魂魄之, 自精靈而稟者也. 余於儒.佛及檀儉之說, 雖不遑其辨證, 而人生自有不滅之靈, 扶善滅惡, 通性完功, 則身固有死, 而英靈不泯, 能朝天而入神鄕, 則可信矣.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이미 하나의 큰 정령이 있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밀어 움직이는데, 곧 사람의 삶이란 것은 비단 피와 살과 뼈를 그 기운의 바탕에 따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정신과 혼백을 정령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유가나 불가 및 단군 임금의 말에 대해 비록 증명할 만한 겨를이 없으나, 사람의 삶에는 없어지지 않는 영(靈)이 있어서 착함을 북돋우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온전히 하면, 곧 신체는 굳어져 죽는다 하더라도 영령(英靈)은 없어지지 않고 능히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昔者永郞, 恨人生之無幾, 慕先聖之化神, 乃棄其率, 入向彌山中, 修道行, 年九十有영兒之色, 鷺羽之冠, 鐵竹之杖, 逍遙于湖山. 神女寶德, 歎부유之殘命, 惜朝露之易消, 乃求師學道, 抱琴以歌, 音若靈소之玉簫, 貌若秋水之芙蓉. 是固, 仙之達者也. 若夫, 齊.景公, 泣牛山之落日; 秦皇, 嘆東南之雲氣; 漢武, 有悔於汾水之秋風; 阮籍, 乃哭於窮道, 落日蒼蒼者, 是人生之悲處耶. 秦皇而無死, 則東南之雲氣, 竟得無驗耶. 漢武而遇仙, 則建章柏(粱)[樑], 終免黃塵耶. 阮籍而寄生於虞舜之世, 則擊石부石, 率百獸以舞耶. 人之說生者, 是惑耶. 惡死者, 是弱(衰)[喪]而不知歸者耶. 方其夢而不知夢者耶. 余與人, 皆夢耶. (人之死者)[人之死者]人之說死者, 信可悔, 其始之기生耶. 此世則苦海也[而], 人之生也是墜落於苦海者耶. 兒出胎門則便哭, 眞有愁於人世而然耶.
예전에 영랑(永郞)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앞선 성인들이 신이 되었음을 사모하다가 그 식솔을 버리고 향미산(向彌山)에 들어가 도를 닦더니, 나이 아흔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색을 하고서 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에 철죽(鐵竹) 지팡이를 짚고 호수와 산을 거닐었다.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하루살이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한탄하며 아침 이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 하더니, 이에 스승을 찾아가 도를 배우고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는 마치 영묘한 하늘의 옥퉁소 같았고 그 모습은 마치 가을 연못의 연꽃과도 같았다. 이러한 것이 진실로 신선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우산(牛山)에 떨어지는 해를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진나라의 시황제는 동남의 구름 기운을 보고 한탄하였으며, 한나라의 무제는 분수(汾水)의 가을 바람결에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완적(阮籍)은 갈 길은 어려워지는데 해는 기울어 어둑어둑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니, 이것이 인생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진시황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도 동남에서 피어난 구름의 기운에 결국에는 그 영험스러움이 없었을 것인가. 한무제가 신선을 만났더라도 새로운 문장(文章)을 만들어 내었던 백량대(柏梁臺)3)가 결국에 가서는 누런 먼지로 변함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완적이 순임금의 태평세대에 더불어 살았더라면 옥쟁반을 두드리며 온갖 짐승을 거느리고 춤을 추었겠는가.
사람으로서 삶을 좋아하는 것은 삶에 미혹되어서이며,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돌아 갈 곳을 몰라서인가. 한참 꿈을 꾸면서도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사람의 죽음이란 살아 있음을 참으로 한스러워 하다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참된 삶이 된다는 말인가.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며 사람의 삶이란 것이 바로 고통의 바다에 추락한 것이라는 말인가. 어린아이가 뱃속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진실로 세상에 대해 근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觀! 夫市朝, 宏樓層疊, 士女繁鬧, 肥馬大道, 長嘶花朝. 觀! 夫北邙, 古墳衰敗, 촉루荒落, 寒鴉古木, 悲鳴秋風. 前何是熱, 後何是冷耶. 人之生也, 竟若是而已耶. 雲捲而山空, 潮落而海虛, 日月落, 星辰蔽而天地居然(瞑)[冥]閉, 人之死也, 竟若是而已耶. 觀乎! 窮부飢男뇌女, 屋漏而창裂, 료浸조, 雪打戶, 破衣襤褸, 頭蓬面垢, 何樂之樂, 何生之生! 人生而難得公侯豪傑之勢, 高人烈士之趣, 寒규衣, 飢呼食, 견견役役而終一生, 寧投海而死者可耶. 觀乎蜂蟻! 將者.卒者.守者.戰者.役者.産者, 雄雄(窺窺)[雍雍], 來來去去, 運花搬(密)[蜜], 探腐捨死, 勞勞役役, 勤勤孜孜. 意者, 微物亦有, 久遠之大計耶. 抑! 旣有生則, 必求其存而不能自止者耶. 人之於生也, 亦若是而已耶. 世如苦海, 夭者爲福而壽者爲禍, 夭而無寃易, 壽而作善難, 人可赴海而死, 以(端)[短]其壽者善耶. 抑! 亦忍痛耐苦, 長其生而積其善, 以入于涅(盤)[槃]者, 爲最善耶.
저자거리를 살펴보노라면 거대한 누각은 층층이 겹쳐져 있고, 선비와 계집들은 북적북적 시끄러우며, 살찐 말은 큰길가에서 꽃이 피는 아침에 길게 울음을 운다. 그러다 북망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옛 무덤들은 허물어 쓰러지고 해골은 버려져 흩날려 있으며, 을씨년스러운 까마귀는 고목 위에서 가을 바람에 슬피 울고 있다. 이곳은 어찌 이리도 활기차며 저곳은 어찌 저리도 을씨년스러운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구름이 걷히면 산은 텅 비게 되고, 조수가 밀려가면 바다는 허전해지며, 해와 달이 떨어지고 늘어선 별들이 가려지면 천지는 꼼짝없이 어둠으로 닫혀지게 되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가릴 것도 변변찮은 굶주린 남녀를 보노라면, 새는 집에 창은 찢어지고, 장마에는 부엌이 물로 잠기고 눈발은 집안으로 휘몰아치며, 남루하게 떨어진 옷에다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즐거움이 무슨 즐거움일 것이며 삶이 무슨 삶이겠는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다 공후(公侯)나 호걸(豪傑)의 권세와 고인(高人)과 열사(烈士)의 풍취를 어렵게 얻게 되는데, 추우면 옷을 입고 주리면 밥을 먹으며 전전긍긍 한 평생을 마치게 되느니,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는 것이 낳지 않겠는가.
벌과 개미를 보라! 앞선 놈과 따르는 놈, 지키는 놈과 싸우는 놈, 일하는 놈과 새끼 낳는 놈들이 사이좋게 윙윙거리며 왔다 갔다 하면서 꽃의 꿀을 따 옮기고 죽어 버려진 것을 찾아 모으며 한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 생각건대 미물에게도 먼 앞날을 생각하는 큰 계획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주어진 삶이니 오로지 그 생존만을 갈구하여 스스로 그치지를 못할 뿐인가.
사람이 삶에 대한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인가. 세상이 마치 고통의 바다와 같다면 요절하는 자는 복이 되고 장수하는 자는 재앙이 되며, 요절하면 억울한 것이 없기 쉽고 장수하면 착함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되니, 사람마다 모두 바다로 달려나가 죽음으로서 생명을 단축하는 게 옳은 일이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역시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그 삶을 늘이고 선을 쌓아 이로 열반에 드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가.
余于人之生死, 不敢妄斷而, 宇宙之內.蒼茫之外, 儼存者主宰, 欲扶眞養善, 滅惡消凶, 以率萬物而生人也, 則信矣. 人之於生也, 樂道安分, 忍辛耐苦, 勤孜而毋敢怨, 則善矣; 存性養志, 行善而不怠, 使得俯仰而無愧, 則雖死而無(感)[餘], 亦足矣. 余, 於是乎, 歎聖訓之無소, 而知震域之壽祿, 能致其久遠也.
내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감히 망령되게 단언하지는 못하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이 세상을 주재하며, 진실을 북돋우고 선을 기르며 흉악함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서 만물을 통솔하고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일 것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리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며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힘써 일하면서 함부로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곧 착하다 할 것이며, 품성을 보존하고 뜻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아서 하늘을 우르러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비록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다면 역시 족할 것이다. 내가 그러한 까닭에 우리 성인들의 가르침이 없어지고 드물어진 것은 한탄스럽지만, 우리 진역(震域)의 장수와 복록은 능히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莊子》曰: 「天道運而無所積, 故萬物成. 帝道運而無所積, 故天下歸. 聖道運而無所積, 故海內服.」 此三者, 皆藉物之性而無所牽滯也. 夫帝王之德, 以天地爲宗, 以道德爲主, 以率萬民.順萬事爲用. 昔者, 神市氏旣開創萬始, 垂範萬類, 體天道而導物性. 及夫檀儉之世, 而(後)[復]建都立國, 分邦設牧, 純誠抱一, 以則天範, 秉天心以及于人心, 扶萬善, 滅萬惡. 於是, 萬民以化, 天下以靖, 及其功完, 則竟朝天而入神鄕. 昭格陟降, 子懷我民, 聖澤神律, 洽被萬世, 의歟盛哉! 夫婁承統, 益修德政, 廣采賢能, 啓學而廣敎, 聲聞大彰. 嘉勒續位, 能繼父祖之道, 西린失德, 仗善征惡, 威被天下, 兆民慕化. 於是, 振振神孫, 繩繩繼位, 歷千二百載而, 國無弑逆簒奪之變, 民無魚肉塡充之禍. 定南夷, 平알견兪, 討夏征殷, 建侯于禹域; 逐앙肅, 平阿叱, 縱有앙骨之肆毒, 乃竟服乎帝德, 細民有犯, 卒化於神韻, 震域萬年之鴻基, 旣原於此也.
《장자》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만물이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고, 제왕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천하가 돌아와 의지하게 되는 것이며, 성인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나라 안이 모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물의 본 모습에 의지하는 까닭에 막히는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릇 제왕의 덕은 천지를 근본으로 삼고 도덕을 으뜸으로 삼으며, 만민을 통솔하고 만사를 바르게 하는 것을 그 쓰임으로 삼는다.
예전에 신시씨가 세계를 열고 만물을 비롯하게 하여 모든 무리에게 본보기를 드리우고, 하늘의 도를 체득하여 사물의 본 모습을 계도하였다. 단군 임금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지방을 나누어 제후를 두니, 순수한 정성은 하나로 뭉쳐 곧 하늘 모범이 되었으며, 천심을 잡아 지켜 이로써 민심에 미치게 하고, 모든 선을 북돋우고 모든 악을 없앴다. 모든 백성이 이로써 교화되고 천하가 이로써 편안히 다스려 지니, 그 맡은 바를 다함에 이르러 마침내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밝디밝게 하늘을 오르내리며 우리의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품으니 성인의 은택과 신인의 법도는 만세에 미치게 되는지라, 오호라 그 융성함이여!
부루가 그 전통을 이어서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널리 가려뽑아 학문을 계도하고 널리 가르치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가륵이 임금의 자리를 이어 능히 부왕과 조부의 도를 계승하였는데, 서방의 하나라가 덕을 잃음에 좋은 것은 권장하고 나쁜 것은 정벌하여 없애니, 그 위세가 천하에 미치고 만백성이 모두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쟁쟁한 신인의 후손들이 1천2백년을 면면히 그 보위를 이어가니, 나라에는 임금을 시해하고 보위를 찬탈하는 변고가 없었으며, 백성에게는 무참히 짓밟히는 재난이 없었다. 남이를 다스리고 설유를 평정하였으며, 하나라를 토벌하고 은나라를 정벌한 뒤에 제후를 중원 땅에 두었다. 또한 앙숙을 쫓아내고 아질을 평정하였으며, 비록 앙골의 방자한 해독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제왕의 덕에 복종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신인의 운치에 교화되고 말았으니, 진역(震域)의 1만년에 이르는 커다란 기초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方外之人, 名之以君子國, 言其俗則曰「衣冠帶劒, 好讓不爭.」 郭璞贊之則曰: 「有東方氣仁國, 有君子.薰華, 雅好禮讓, 禮委論理.」 胥餘避周, 則慕化歸依, 安(捿)[棲]一枝, 綿延千年, 遺裔尙繁.《王制》則記曰: 「仁而好生, 萬物저地而出.」 仲尼歎其道之不行, 則欲乘부浮海而居九夷, 以君子所居爲說. 許愼作《說文》則曰: 「唯東夷人人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以孔子之乘부欲去, 謂有以. 東方朔著《神異(徑)[經]》, 則以「恭坐而不相犯, 相譽而不相毁, 見人有患, 投死救之.」 名曰「善人」. 此則言, 能仁而復能勇, 能恭而復能烈, 敬美而不妄言. 具眞人之美德, 兼剛柔之良能也. 余, 於是乎, 誇爲東夷之人也.
바깥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군자의 나라'라 이름하고, 그 풍속을 일컬어 「의복에 관을 쓰고 검을 차고 다녔으며, 양보를 좋아하고 서로 싸우지 않는다」 하였다. 곽박은 찬탄하여 이르기를 「동방에 기운이 어진 나라에는 군자가 있고 훈화(薰華)가 있으니, 우아하면서도 예절과 사양함을 좋아하고 예의로서 이치를 논한다」 하였다. 서여(胥餘)는 주나라를 피해 물러나와 임금의 교화를 사모하여 귀의하고 나라의 한쪽 편에 편안히 머무르니, 면면히 1천년 동안을 그 후예들이 항상 번창하였다.
《왕제(王制)》에 기록되어 이르기를 「어질고도 기르기를 좋아하니 만물이 그 땅에 뿌리를 두고서 나온다」 하였으며, 중니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의 땅에 머물고 싶다 하였으니, 이는 군자가 거처하는 곳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신이《설문(說文)》에서 말하기를 「오직 동이만이 큰 것을 좇으니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며 어진 자는 장수를 누리니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로서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고 싶어하다'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동방삭이《신이경(神異經)》을 지으며 「공손히 앉아 서로를 거스러지 않고 서로 칭찬할 뿐 서로를 헐뜯지 않으며,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보면 목숨을 바쳐 이를 구해 준다」는 것을 일컬어 '선인(善人)'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곧 어질고도 또한 용감하며, 공손하고도 또한 굳세며, 아름다움을 공경하면서도 망령된 말은 하지 않으며, 참된 사람으로서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강인함과 유순함의 좋은 점을 두루 겸비하였음을 말한다. 내가 이러한 까닭에 동이인이 됨을 자랑하는 것이다.
《尙書·堯典》曰: 「分命羲仲, 宅우夷, 曰暘谷.」 <禹貢>曰: 「海(垈)[岱]惟靑州, 우夷旣략.」 則是, 東人之占(居)[據]於海(垈)[岱]之間也. 冀州有皮服之島夷, 則是, 東人自渤海西北諸島, 遷居冀州近海之地也. 揚州有卉服之島夷, 則是, 東人自揚州以東諸島, 徙居乎江淮之間也. 更有, 作牧之萊夷, 商빈珠.纖縞之淮夷, 則是, 又東人之相地審勢, 應便營生之一端也. 上古, 人心素樸, 雖異族隣處, 非非常之際, 則必各守其業, 不甚相侵而互觀其勢, 若强弱懸殊而治亂相反, 則必生征戰之端. 此, [屹]達遣兵빈.岐, 勿理建侯殷地也. 余, 於是乎, 歎上古我先民之武勇也.
《상서》의 <요전(堯典)>에 이르기를 「따로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우夷)의 땅에 머물며 다스리게 하니, 그 곳이 바로 양곡(暘谷)이다」라 하였으며, <우공(禹貢)>에 이르기를 「해대(海岱)는 바로 청주(靑州)인데, 우이(우夷)가 이미 그 곳을 다스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동방의 사람들이 해대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기주(冀州)에는 가죽 옷을 입은 도이(島夷)4)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발해 서북의 뭇 섬으로부터 기주 바닷가의 땅으로 옮겨가서 거처한 것을 말한다. 양주(揚州)에는 풀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양주 동쪽의 뭇 섬으로부터 강회 사이의 땅으로 옮겨가 거처한 것을 말한다. 또한 목축을 하는 래이(萊夷)와 진주나 비단 명주 등을 거래하는 회이(淮夷)가 있었는데, 이는 또한 동방의 사람들이 양편 지역의 형세를 살펴 가며 편한 곳을 따라 삶을 꾸려 가던 한 모습이다.
상고 시대에는 인심이 소박하여 비록 다른 종족이 이웃하여 있어도 비상시가 아니면 반드시 자기들의 생업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않고 서로 그 형세를 보고 있다가, 만약 힘의 균형이 두드러지게 차이나거나 정치가 어지러워 반목하게 되면 곧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 흘달 임금이 군사를 빈·기로 보내고, 물리 임금이 은나라 땅에 제후를 세운 것 등이다. 내가 이러한 까닭에 상고 시대 우리 선민들의 용맹스러운 무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幸無偏, 技不專, 故天下之物, 無獨享其安而專擅其威者也. 何以知其然耶. 夫! 瓜.牙者, 虎.豹之幸也, 而牛.鹿之不幸也, 頭角者, 牛.鹿之幸也, 而虎.豹之禍也. 묘.유之捷, 一(枝)[技]也, 而鼠.雀之迅, 亦一(枝)[技]也. 鷹.준之擊, 固所難避, 而密林深竇, 可藏鳥.鼠. 鴻(雁)[안].鳧鴨, 旣無銳瓜利嘴, 則或高飛遠翔以避수敵, 或迅飛淵潛, 圖脫刑禍. 관.鶴之嘴, (特)[恃]長誇銳, 則蛇藏穴, 추沒泥, 蟹入孔, 蛤掩甲. 此, 乃鷹.준.관.鶴之屬, 各有一(枝)[技]一幸(也), 而鳥.鼠.안.鴨.蛇.추.蟹.蛤之類, 亦各有一(枝)[技]一幸[也]. 且夫, 蛇鈍於回轉, 則蛙.鼠之幸也, 豺.狼無攀木之能, 則猿후之幸也. 斷而能生, 則구蛭之幸也, 全身毒毛, 則夏(충)[蟲]之幸也. 及若蜂헐之有석, 蟾서之吐液, 龜鼈之縮首, (설)[설]석척之脆尾, 皆於探餌防敵, 禦侮逃命, 莫不爲一(枝)[技]一幸也. 於是焉, 以虎豹之强而, 不免轉逐之勞.飢渴之苦, 牛鹿之柔而, 亦得保殖之幸.眠흘之樂. 其他, (猫)[묘].유.鷹.준.관.鶴之屬之爲强, 鼠.雀.鴻.(雁)[안].鳧.鴨之屬之爲弱, 罔或不然. 天下豈有, 不勞之功.無難之安耶.
행운은 치우침이 없고 재주는 독점되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만물 가운데 홀로 편안함을 누리고 그 위세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는 것은 없다. 어찌 그러함을 아는가. 무릇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은 범이나 표범에게는 다행한 것이 되지만 소와 사슴에게는 불행한 것이며, 머리의 뿔은 소나 사슴에게는 다행이지만 범이나 표범에게는 화근이 된다. 고양이나 족제비의 날랜 사냥 솜씨가 하나의 재주라면, 쥐나 참새의 민첩함 또한 하나의 재주이다. 매와 송골매의 공격은 물론 피하기가 어렵지만, 우거진 수풀이나 깊은 구멍은 새와 쥐를 숨겨 주곤 한다.
기러기와 오리는 본디 날카로운 발톱이나 예리한 부리는 없으나, 혹은 높이 날갯짓하며 멀리 날아올라 적을 피하고, 혹은 재빨리 날거나 연못 속에 잠기어 화를 벗어나곤 한다. 황새와 학의 부리가 길고도 날카로움을 자랑한다면, 뱀은 굴에 숨고, 지렁이는 진흙 속에 잠기며, 게는 구멍으로 들어가고, 조개는 갑옷으로 가린다. 이는 곧 매·송골매·황새·학 등의 무리에게 각기 한 가지의 재주가 있음이 행운이듯이, 새·쥐·기러기·오리·뱀·지렁이·게·조개 등의 종류에게도 역시 각기 한 가지의 재주가 있어 행운인 것이다.
또한 뱀이 몸을 갑자기 돌리는 것에 둔한 것은 곧 개구리나 쥐에게는 행운이요, 승냥이나 이리에게 나무를 타는 능력이 없음은 원숭이에게 행운이 된다. 끊어지고도 능히 살 수 있는 것은 지렁이와 거머리의 행운이요, 온몸에 독이 있는 털을 지닌 것은 여름 벌레의 행운이다. 벌과 전갈이 침을 쏘고 두꺼비가 액을 토하는 것과, 거북이와 자라의 움츠린 머리와 도마뱀의 무른 꼬리 등은 모두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적의 해꾸지를 막고 도망하여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 한 가지의 재주가 곧 한 가지의 행운이 되지 않음이 없다. 그러하기에 범과 표범이 강하기는 하지만 구르고 쫓는 수고와 주리고 목마른 고통을 면치 못하며, 소와 사슴은 연약하지만 생명을 보존하여 번식하는 행운과 잠자고 먹는 즐거움을 얻은 것이다. 그 밖에 고양이·족제비·매·송골매·황새·학 등의 강한 무리와 쥐·참새·기러기·오리 등의 약한 무리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늘 아래 어찌 수고하지 않고 얻는 공로와 어려움이 없는 안락이 있을 수 있겠는가!
嘗聞, 天竺有獅子者, 爲四足獸中獨步, 一切生類, 聞其吼則震驚, 魚沒深淵, 獸藏窟穴, 飛禽墜落, 莫不逃竄, 盖百獸之王也. 若[使][師](獅)子, 添翼付기, 大小如意, 則必飛食鳥.走食獸.水呑魚.穴呑鼠雀, 跨水陸.通上下而不遺蠢物, 天下復有, 保生之類耶. 雖然, 造翁之意, 自無偏벽, 寧有盡驅一世之生類, 獨充貪獅, 堅欲之惡理耶. 是以, 海容寸銖之魚, 山有指小之雀, 樹息飮露之蟬, 泥藏無目之구, 연연微충, 亦同[浴]皇天之洪恩. 然則, 世間豈有, 각權專富之家, 獨覇專强之國耶. 故諺曰「未有不亡之國, 曾無不敗之家.」 余, 於是乎, 知民物之不可無危難, 而覺家國之興亡不得免번覆無常也. 然則, 安可以眠前榮枯, 二三其心也哉!
듣건대 천축에는 '사자'라는 놈이 있어 네발 달린 짐승 중에 독보적이라 하는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그 울부짖는 소리만 듣고도 두려워 놀라서, 고기는 깊은 연못 속으로 잠기고, 들짐승은 굴 속으로 숨어 버리며, 날짐승은 놀라 떨어지는 등 도망하여 숨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릇 뭇 짐승의 왕이라 하였다. 만약 사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비늘을 붙여 주며 몸을 줄였다 늘였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한다면, 날아다니며 새를 잡아먹고, 뛰어다니면서 짐승을 잡아먹으며, 물에서는 고기를 삼키고, 구멍에 들어가 쥐와 참새를 삼키는 등 물과 뭍을 깔고 앉아 상하를 통하며 반드시 움직이는 물건이라고는 남기지 않을 것이니, 하늘 아래 목숨을 보존하는 생물이 또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조물주의 뜻에는 본디 편벽됨이 없는데, 어찌 한 세상의 생물을 모두 몰아 사자의 탐욕스런 욕심만 채워 주는 나쁜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다는 한치의 작은 물고기도 받아들이고, 산에는 손가락 만한 작은 참새도 있으며, 나무에는 이슬을 먹고사는 매미가 서식하고, 진흙 속에는 눈이 없는 지렁이가 숨어 있으니, 꿈틀거리는 하잘것없는 벌레 또한 하늘의 큰 은혜를 같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에 어찌 권세를 도거리하고 부귀를 독점하는 집안과, 패권을 차지하여 외곬으로 강하기만 한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속담에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고, 패하지 않는 집안은 없다' 하였으니, 내가 그리하여 백성과 사물에게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가정과 나라의 흥망이 되풀이되어 무상함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어찌 눈앞의 영고성쇠에 마음이 흔들리겠는가!
天人之際, 覆育之化, 大矣, 未遑長說. 地人之際, 載安之德, 厚矣, 其陶冶感薰之功, 甚巨. 是以國相都.民擇里, 未嘗敢忽. 夫相都.擇里者, 欲其選地理風氣之適善也. 盖定都占居, 固不可忽也. 至如闔國全族之於地理風氣, 其休戚之係甚重, 此不敢少忽也.
하늘은 사람에게 있어 감싸 기르는 조화가 위대함에 장황하게 말하지는 못할 바이다. 땅은 사람에게 있어 실어 편안케하는 공덕이 두터우니, 인재를 기르고 교화에 물들게 하는 공적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 도읍을 선택하고 백성들이 동리를 고르는 것을 감히 소흘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릇 도읍을 택하고 동리를 고른다는 것은 땅의 이치와 바람의 기운이 적합하고 좋은 곳을 고르고자 하는 것이니, 대저 도읍을 정하고 살 곳을 결정하는 것은 진실로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온 나라와 온 가족과 같은 경우에는 땅의 이치와 바람의 기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의 연루됨이 매우 심하니, 이를 감히 가벼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夫, 天之於物, 不能無厚薄, 卽其地而觀之, 則兆物莫不同浴仁天之恩. 分其地而言(則之)[之, 則]兆物之得地之, 肥瘠寒煖, 高下활陋, 莫不有(若)[差]. 是以物異南北, 人殊東西, 其盛衰榮枯, 茂殘繁沒之勢, 不可以人力而左右之也. 何以知其然耶. 夫, 耽羅之橘, 北渡則爲枳; 于山之桃, 越海則實矮; 湖南之竹.嶺南之시, 植之[北關](關北), 于而不成; 咸興之梨.咸從之栗, 移之于漢山而味변. 且夫, 城上之蕨, 葉掩屋첨; 架上之鼠, 체高於牛背; 蓬生麻中而不扶自直, 葛出松田而直聳千尋. 至如渡淮之橘, 周原之菫(茶)[도], 莫不如是. 此皆, 物之因於得地之肥瘠.寒煖.高下.활협之適與不適.幸與不幸, 而其稟得也各殊也.
무릇 하늘이 사물에 대해서는 두텁고 엷음이 없을 수 없으나, 땅을 살펴보면 곧 억조 만물 가운데 어진 하늘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땅을 나누어 말하자면 곧 만물이 얻어 가지는 땅에는 비옥하고 메마르고, 춥고 따뜻하며, 높고 낮고, 광활하고 좁음의 차이가 있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물은 남북으로 다르고, 사람은 동서로 틀리니, 그 영고성쇠(榮古盛衰)와 무잔번몰(茂殘繁沒)의 형세는 인력으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대저 탐라 땅의 귤이 북으로 건너가면 탱자가 되고, 우산(于山)의 복숭아가 바다를 건너오면 열매가 작아지며, 호남의 대나무와 영남의 감나무는 관북 지방에 심으면 휘어지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함흥의 배와 함종의 밤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심으면 맛이 변한다. 또한 성벽 위의 고사리는 그 잎이 집의 처마를 덮고, 시렁 위의 쥐는 그 몸이 소 등 보다 높게 있으며, 쑥이 삼밭 속에서 자라면 북돋우지 않아도 스스로 곧게 올라가고, 칡이 소나무 밭에서 나면 천길을 솟아오른다. 도회(渡淮)의 귤과 주원(周原)의 바곳이나 씀바귀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사물이 얻어 가지는 땅의 비옥하고 메마르며, 춥고 따뜻하며, 높고 낮으며, 광활하고 좁은 것 등이 그 사물에 적합한지 아니한지 혹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등에 연유하는 것이기에 그 얻어지는 바탕이 각기 틀리게 되는 것이다.
昔者, 루진之地, 勁寒而不宜五穀, 民皆帶劒佩弓, 幷事遊獵, 其民之生也, 艱險儉嗇, 추健勁悍, 長於武風而不(閑)[閒]文事. 藍侯之地, 廣(活)[활]平蕪, 幷施耕牧, 兼習戎事, 其民, 兼剛柔, 幷文武, 恒爲東國進攻之前驅. 靑丘之地, 風氣溫美, 五穀豊登, 民皆, 衣輕暖而食肥美, (頗)有冠帶衣履, 天下之槪, 而卒溺於華靡之弊. 且夫, 雍州之地, 土厚水深, 山岳추莊, 襟抱固密, 風氣勁려. 則秦人居之, 其俗悍然, 有招八州而朝同列之氣. 迫近戎狄, 修習戰備, 競事射獵, 高(尙)[上]氣力, 於是猛將悍卒, 輩出[乎]其間. 乃延敵列國, 追亡逐北, 因利乘(使)[便], 宰割天下. 終至始皇之世, 振長策而馭宇內, 呑二周而亡諸侯, 制六合而鞭笞天下. 南郡百越, 北逐匈奴, 胡人(敢不)[不敢]南下而牧, 馬士不敢彎弓而報怨.
옛날 속진(루진)의 땅은 매우 추워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칼을 차고 활을 메고 어울려 일하며 사냥을 하니, 그 백성의 생활은 힘들고 어려운 속에서도 검소하며, 거칠고도 매우 굳세어 무사의 기풍이 빼어났으나 학문을 닦는 일은 소흘히 하였다. 남후(藍侯)의 땅은 광활하고 너른 벌판으로 경작과 목축을 아울러 베풀고 무술도 함께 익히니, 그 백성들은 굳셈과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문무를 아울러 갖추게 되어, 우리나라가 공격하여 나아갈 때는 항상 선구가 되었다. 청구(靑丘)의 땅은 바람의 기운이 온화하여 오곡이 풍성하니, 그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갓을 쓰고 띠를 두르고, 옷을 갖춰 입고 신을 갖춰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치가 있었으나, 마침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의 폐단에 빠졌다.
또한 옹주(雍州)5)의 땅은 흙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산악은 거칠고 장엄함에 속속들이 울창하고 바람 기운 또한 매우 사납다. 그러기에 진나라 사람들이 그 곳에 거처하면서 풍속이 굳세어졌으며, 여덟 주(州)의 제후들을 불러들여 같은 반열에서 조문을 받는 기상을 지니게 되었다. 융적(戎狄)과 근접해 있으면서 전쟁에 대비하여 닦고 익히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기력을 높이니, 용맹한 장군과 굳센 군졸이 그 곳에서 배출되게 되었다. 이에 오랜 적들과 여러 나라가 연이어 망하고 북쪽으로 쫓겨가자 그 유리한 틈을 타고 천하를 나누어 다스렸다. 결국에는 진시황의 치세에 이르러 오랜 책략을 떨치며, 천하로 말을 몰아 종주(宗周)와 성주(成周)를 삼키고 제후들을 멸망시키고는 육종(六縱)의 연합을 제압하여 천하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남으로 백월(百越)6)의 땅에 군(郡)을 설치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쫓아내니, 오랑캐들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목축하려 하지 않았고, 병사는 감히 활을 당겨 보복하려 하지 못하였다.
班固歎常爲天下之劇, 晦庵推富强之業, 易興以江南之地, 原野底平, 江.漢分瀉, 風氣散漫, 天産豊饒. 於是, 民資川澤山林之饒, 食魚稻果라라蛤之味, 食物常足, 不憂凍餓, 民生無艱, 優(遊)[游]自足. 則民皆, 자유유生而亡積聚, 信巫鬼而重淫祠, 是以人[皆], 輕현放散, 勇而不勁. 歷觀漢籍, 曾無一人, [民](起)於南方而制天下者, 是皆地理風氣之, 所以[能]陶冶感薰, 而人之所不能如何者也. 夫, 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之燥寒), 太白.崑崙之廣무, 江.河湖澤之渟流, 誰安得以, 변易而遷徙之哉! 余於天人之際, 固不敢長說; 余於地人之際, (限)[恨]其執定而不能左右之. 夫, 天下不幸之, 莫大於失地利也.
반고(班固)는 천하가 항상 매몰차짐을 한탄하더니, 회암(晦庵)7)이 부강의 기초가 되는 위업을 추진하여 장강 이남의 땅을 변화시키고 부흥시킴에, 낮고도 너른 들판에 장강과 한수가 나누어 넘쳐흐르고, 바람의 기운도 매섭지 않아 천연 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백성들은 강택과 산림의 풍요를 바탕으로 물고기와 벼며 나무와 풀의 열매와 함께 고둥과 조개 등의 맛깔스러운 것을 먹었으니, 음식과 물자가 항상 풍족하여 춥고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삶은 어려움 없이 한가로이 만족해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나태하게 인생을 즐김에, 쌓아 두고 모아 둔 것은 모두 없어지고 무당과 도깨비만 믿으며 부정한 사당만을 중하게 여겼다. 이로서 사람들은 모두 약빠르고 방자하며, 용감하나 굳세지는 못하였다. 한나라 사적에, 남방에서 일어나 천하를 제패한 자가 일찍이 한 명도 없음을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땅의 이치와 바람 기운으로 인해 능히 인재가 길러지고 교화에 물드는 까닭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남방의 습기와 무더위, 북방의 건조와 추위, 태백과 곤륜의 거대함, 장강과 황하 및 호수와 못 등 물줄기의 머무르고 흐름을 그 누가 어찌 바꾸거나 옮길 수 있겠는가! 내가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할 바이며, 내가 땅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단정지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음은 한스러우나, 무릇 천하의 불행 가운데 지리적인 이득을 잃어버리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天下之物, 莫不具表裏.本末之異, 天下之事, 莫不兼利害.得失之雜. 故觀物者, 不可絞於表末而棄其(裡)[裏]本, 創事者, 不可拘於利得而忘其害失也. 是以, 聖人明於天之道, 而察於民之. 故隨時觀변, 從便行宜, 而天下之事, 始全利得而絶害失. 愚者膠守古法, 而不知변通以致其牽滯, 而家國以喪. 拙者弊[弊]然捨長取短, 自以爲察而反致其殃, 此, 天下萬世之弊也. 夫, 應時順변, 明天道而藉物性者, 惟聖者能之, 天下豈有각聖賢..萬世而無索者耶.
천하의 사물 가운데 표리(表裏)나 본말(本末)의 두 모습을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천하의 일 가운데 이해나 득실의 번거러움을 두루 겸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한 까닭에 사물을 관찰하는 자는 겉과 끝에 얽매여 그 속과 밑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일을 시작하는 자는 이득에 얽매여 그 해악과 손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함에 성인은 하늘의 도리에 밝음으로 해서 백성의 일을 살피게 된다. 그러기에 시기에 따라 변화를 관찰하고 편안함을 쫓아 마땅함을 행하니, 비로소 천하의 일은 그 이득이 온전히 되고 해악과 손실은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옛 법에 집착하여 지킬 뿐이니, 그 변화와 융통을 모르기에 구애되고 막히게 됨에 이르므로, 집안과 나라는 이로서 쇠망하게 된다. 옹졸한 자는 몸과 마음을 기울여 힘쓰지만 장점은 버리고 단점만 취하므로, 스스로 살핀다고 하면서 도리어 그 재앙에 이르게 되니, 이는 천하의 만대에 걸친 폐단이다. 무릇 때의 변화에 순응하며 하늘의 도리에 밝고 사물의 본바탕에 의지하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천하에 어찌 성인의 어짐을 도거리하고서 그렇게 만세에 걸쳐 무궁무진한 자가 있겠.
昔者, 太公始封, 周公問: 「何以治齊.」 太公曰: 「擧賢而尙功.」 周公曰: 「後世必有簒殺之臣.」 其後二十九世, 齊爲(强)[疆]臣8)田和所滅. 周公始封, 太公問: 「何以治魯.」 周公曰: 「尊尊[親親而](而親親).」 太公曰: 「後世寢弱矣.」 後魯, 自文公以後, 祿去公室, 政在大夫, 陵夷微弱, 遂爲楚所滅. 夫太公.周公者, 世之所稱聖者也, 立業垂憲, 未嘗有差, [末流而](而末流)之弊猶然如此. 황, 地殊其方, 人各厥族, 而互相對峙, ..萬古, 爭雌雄而不知其極者, 株守陳古之法, 拘而不知변者, 安能向世間而求其勝也哉! 是故, 保其長而兼人之長者, 覇; 棄其長而用人之長者, 弱; 棄其長而用人之弊者, 亡. 何以知其然耶. 昔者, 秦.穆公問由余曰: 「中國以《詩》·《書》·法度爲政, 然尙時亂, 今戎夷無此, 何以爲治.」 由余笑曰: 「此, 中國之所以亂也, 戎夷則不然. 上含淳德以遇其下, 下懷忠信以事其上, 一國之政猶一身之治, 不知所以治, 此眞聖人之治也.」 夫, 上淳德而崇簡樸者, 戎夷之所以爲强也. 用是而乘中國之繁縟, 則勝; 用是而復學中國之繁縟, 則勞; 若舍是而專學中國之繁縟, 則亡. 此固然之勢也.
옛날에 태공이 처음 피봉될 때 주공이 「제나라를 어찌 다스릴 것인가」하고 물으니 태공이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공덕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하자, 주공이 이르기를 「후세에 반드시 임금을 죽이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29세(世) 후에 제나라는 그 땅의 신하인 전화(田和)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주공이 처음 피봉될 때 태공이 「노나라를 어찌 다스릴 것인가」하고 물으니 주공이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고 가까이할 사람은 가까이하겠다」고 말하자, 태공이 이르기를 「후세에는 침체되어 약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노나라는 문공(文公) 이후로 녹봉은 공후(公侯)의 집에서 떠나고 정치는 대부(大夫)의 손에 들어가니, 점차 미약해져서 마침내 초나라에 멸망하게 되었다.
무릇 태공과 주공은 세간에서 성자(聖者)라 말하는데, 위업을 세우고 법률을 드리움에 한치의 오차도 없었으나 끝에 이르러 그 폐단은 오히려 그와 같았다. 하물며 땅은 그 자리해 있는 곳이 틀리고, 사람은 각기 그 족속이 다르며, 서로 대치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자웅을 다툼에 그 끝을 모르는데, 펼쳐 놓은 옛 법을 어리석게 움켜쥐고 그것에 얽매여 변화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세상에 나아가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자기의 장점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워 겸비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고, 자기의 장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만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약해 지며, 자기의 장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폐단만을 사용하는 사람은 망하게 된다.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옛날에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유여(由余)에게 묻기를 「중국은《시(詩)》.《서(書)》와 법도(法度)로서 나라를 다스리지만 오히려 때때로 어지러운데, 지금의 융이(戎夷)는 이러한 것도 없이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 지는가.」 하니, 유여가 웃으며 이르기를 「이는 중국에 있어서 어지러운 이유가 융이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까닭입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된 믿음을 품고 윗사람을 섬기니,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한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까닭이므로, 다스리는 이유를 모르는 이것이 진실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 하였다. 무릇 순박하고 후덕함을 높이고, 간단하고 소박함을 숭상하는 것은 융이가 강자가 되는 이유이다. 이를 이용하고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을 극복한다면 곧 승리할 것이요, 이를 이용하면서 다시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을 배운다면 곧 수고스러울 것이며, 만약 이를 버리고 오로지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만 배운다면 곧 망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그러한 형세일 것이다.
何以知其然耶. 昔者匈奴, 人衆不能當漢之一郡, 而能不失其强者, 用其所長以撓其短也. 夫, 匈奴之地, 鉅野平沙, 風氣凄冷, 五穀不熟, 草菜平蕪. 民皆家氈帳, 跨鞍馬구, 畜牧逐水草而遷徙之. 乘中國之有흔, 則一時蜂聚蟻合, 彎弓橫삭, 背寒向溫, 剽(掠)[략]邊塞. 如勢頭不好, 則撤帳拔鍋, 携妻率子, 縱馬任適, 曾不顧戀. 此, 其..百世而爲中國之大두也. 及單于慕華양而妻漢妃, 변胡俗而嗜漢物, 舍전구之堅善而得漢繒絮以馳草棘中, 舍重酪之便美而得漢食物, 棄其簡樸而襲漢之繁縟. 夫! 學于人者, 難得出藍之譽, 汲于流者, 只酌其餘波. 天下之舍己學人者, 不爲邯鄲學步者鮮矣, 匈奴其無敗亡乎. 雖然, 豈但匈奴而已哉! 昔者拓拔氏, 以胡갈之種, 入據幽燕, 承부秦之後而稱覇於中原. 太武帝, 始制叛逆.殺人.姦盜之法, 號令明白, 政事(簡淸)[淸簡]. 於是南擊宋, 北逐柔然, 西定口厭달.月氏.波斯諸國, 威名(振)[震]乎當世. 晋氏.五胡之亂, 立國于中原者十六, 南北朝列國之興替不少, 而曾無若後魏之富强矣. 及于孝文帝之出而, 乃發平城, 都洛陽, 改姓易服, 禁北俗之語, 立明堂, 設벽雍, 定樂章而희華靡, 立堯.舜.禹.周公.孔子之祠, 而其國卒至敗滅. 夫, 此數事者, 豈本亡國之事, 而終不可學者耶! 余未嘗以爲然, 此特已舍其長而無存, 求學于人而未就, 只得其末流之病弊(故耳)[矣]. 於是, 舊俗已泯而害毒方新, 夫奚[暇]救其敗沒渙散哉!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옛날에 흉노가 사람의 숫자로는 한(漢)나라 한 개의 군(郡)에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능히 그 강함을 잃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장점을 이용하고 그 단점을 꺾은 때문이다. 무릇 흉노의 땅은 거대한 들판과 평탄한 사막으로서, 바람의 기운은 싸늘하여 오곡은 익지 않고 풀과 잡초만이 너른 들에 무성하다. 백성들은 모두 털 담요로 장막을 쳐서 집을 삼고, 말안장에 걸터앉아 말을 몰아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중국 땅에 틈이 생기면, 곧 일시에 벌떼와 개미떼 같이 모여서 활과 창을 비껴 들고는 추운 곳을 등지고 따뜻한 곳을 향하여 변방의 요새들을 사납게 공략하였으며, 만약 형세가 여의치 않으면 곧 장막과 솥을 걷어 뽑고 처자를 거느리고 말을 몰아 마음대로 돌아가 버린 뒤 다시 돌아보는 미련은 두지 않았으니,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커다란 해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우두머리(單于)가 중국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고 한나라의 비(妃)를 아내로 맞기에 이르자 고유한 풍속은 변질되고 한나라의 물건만을 즐기게 되었으니, 털옷의 견고하고 좋은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비단솜을 얻어 입고는 초원의 가시나무 사이로 질주하였으며, 진한 젓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음식물을 얻어먹었으며, 그들의 간략하고 소박한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복잡하고 번거러움만을 물려받게 되었다. 무릇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자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명예를 얻기 어렵고, 흐르는 물을 긷는 자는 그 자투리 물결만을 퍼내게 되는 것이다. 천하에서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배우는 자로서 한단(邯鄲)의 걸음걸이9)가 되지 않는 자는 드물기 마련이니, 어찌 흉노의 패망이 없을 것인가.
비록 그렇지만 어찌 비단 흉노뿐이겠는가! 옛날 탁발씨(拓拔氏)는 호갈(胡갈)의 종족으로 유연(幽燕)에 들어와 자리하며 부건(符健)이 세웠던 전진(前秦)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일컬어졌다. 태무제 때에 비로소 반역·살인·간음·도적에 관한 법을 제정하니, 호령이 명백하고 정사가 맑고 간략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송(宋)을 치고 북쪽으로 유연(柔然)을 쫓아내었으며, 서쪽으로 압돌과 월씨 및 파사 등 뭇 나라들을 정벌하여 위세와 명성을 당대에 떨쳤다. 진(晋)나라 오호(五胡)의 난리 때 중원에 나라를 세운 자가 열 여섯이었으며, 남북조 때 열국(列國)의 흥망성쇠도 적지 않았으나, 후위(後魏)와 같은 부강함은 없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즉위함에 이르러 이내 평성(平城)을 떠나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성씨를 고치고 복식을 바꾸며, 북쪽 풍속의 언어를 금지시키면서 명당(明堂)을 세우고 벽옹(벽雍)을 건설하였으며, 악장(樂章)을 정하여 화려하게 꾸미고는 요·순·우·주공·공자의 사당을 세우니, 그 나라는 졸지에 패망하게 되었다.
무릇 이런 몇 가지 일들이 어찌 나라를 패망시키는 근본이 되겠는가 마는, 아무래도 배울 만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그렇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특별히 자신들의 장점은 이미 버렸기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단지 그 말단의 병폐만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옛 풍속은 이미 다 없어지고 그 해독만이 바야흐로 새로워지니, 무릇 어느 겨를에 패몰하여 흩어진 것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女眞者, 肅愼之後也. 其古風泯滅, 雖不知書, 然猶有祭天地.敬親戚.尊耆老.接賓客.信朋友, 禮意款曲, 皆出於古聖帝之垂訓, 賢侯之立敎也. 方其奮興於黑水之地也, 以一枝之師, 席卷遼.滿, 越長城而屠변京, 禽徽.欽而北去, 叱孤主而南竄, 跨幽燕而鞭笞中原之士. 於是, 趙家君臣, 莫不輸誠納款, 稱臣呼侄, 苟乞殘喘. 秦檜.韓胤之徒, 咸匍匐而獻媚. 此誠, 千古之快事而東方諸族之誇也. 雖然, 其弊在於急一時之利, 踵久壞之法. 及其中葉, 鄙遼儉樸, 襲宋繁縟之文, 懲宋寬柔, 加遼操切之政. 是棄二國之所長, 而倂用其所短也. 於是, 繁縟勝而財用竭, 操切勝而民人害. 夫, 國用궤, 民心離, 而金安得不亡乎!
여진(女眞)은 숙신(肅愼)의 후예이다. 그 옛 기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고 벗을 믿는 등 예의바른 마음에 다정하고 성의가 있음은, 모두 옛 성제(聖帝)께서 펼친 교훈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 바야흐로 흑수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한 갈래의 군사만으로 요동과 만주를 석권하였으며, 장성을 넘어 변경(변京)10)을 도륙한 뒤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고주(孤主)를 꾸짖어 남쪽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유연(幽燕)을 넘어 중원의 선비들을 매질하였다. 그러자 조가(趙家)의 군신들 가운데 정성과 성의를 보내며 신하를 자칭하고 조카라고 스스로를 일컬어 남아 있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회(秦檜)와 한윤(韓胤)의 무리는 모두 엉금엉금 기면서 아첨을 떨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제후의 자랑이다.
비록 그렇지만 그 폐단은 한 때의 이익에 급급하여 오랜 폐악을 답습한데 있었으니, 그 중엽에 이르러 요(遼)의 검소하고 소박함을 깔보고 송(宋)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글을 따랐으며, 송(宋)의 너그럽고 부드러움은 제재하고 요(遼)의 엄격한 정치만을 더하게 되었다. 이는 두 나라의 장점을 버리고 그 단점들을 아울러 쓴 격이다. 그러한 까닭에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기승을 부리니 재정은 바닥이 나고, 엄격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백성들은 피해를 입었다. 무릇 나라의 살림이 고갈되고 백성의 마음이 떠났는데 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噫! 天異(侯)[候], 地殊勢, 國異俗, (民)[人]各(枝)[技], 安有舍其能而不危者, [安有]學乎人而易其性者耶. 余, 於是乎, 歎造翁之於物也, 不能無厚薄, 而君師之於政也, 不可不三思之也. 今, 夫愛親氏者, 赫圖阿羅之人也. 其先, 遠出於루진之後, 其民多承, 句麗.渤海之衆, 是爲舊檀氏之遺裔, 庶可斷焉. 而今, 夫! 人효효然以小華自耀, 肯認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 其於滿洲, 寧怪其罵斥耶! 且彼等之與朝鮮, 角立者已尙矣, 而與諸胡相混者久矣, 其勢安能復合而悔其久分耶. 此不必長說也.
오호라! 하늘은 모습이 다르고 땅은 형세가 틀리며,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마다 기술이 제각각 인데, 자기의 능함을 버리고 어찌 위태롭지 않은 자가 있겠으며,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고 그 본 바탕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러한 까닭에 조물주가 사물에 대해 두텁고 얇음이 없을 수 없고, 임금이 정치를 행함에 세 번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됨을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에 무릇 애친씨(愛親氏)11)는 혁도아라(赫圖阿羅) 사람이다. 그 선조는 멀리 속진의 후예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무리 중에서 많이 이어받았으니, 이들이 남아 있는 단군의 후예가 됨을 거의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만주가 우리와 친척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이 여진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으니, 우리가 만주를 대하며 욕하고 배척하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고만 하겠는가! 또한 저들이 조선과 더불어 대립한 지가 이미 오래이며,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지가 오래이니, 그 형세가 어찌 능히 다시 합치고서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음을 후회할 수 있겠는가! 이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至如太祖.努爾哈赤, 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 創金汗國而虎視東西, 乘明朝之衰而奪遼東, 因流賊之亂而奄據幽燕. 於是, 下변髮之令, 立國史之관, 禽永明而掃淸海內, 服諸汗而倂呑漠北. 其政令之所出, 八旗之所向, 更無堅城.强壁矣, 處處蜂起, 復明之志士, 曾不幾何而최敗. 盖, 自有史以來, 塞外諸族, 入帝漢土者, 未有若此之强且盛者. 我國之士, 雖(曰)[日]夜以南漢之치切齒, 以區區東援壬辰之誼, 欲向明而圖報. 然, 百年之內, 余保, 其必無是事矣. 夫, 區區鴨水以南, 數千里之地, 衆寡之數, 已自懸絶, 而又自却女眞以爲胡, 斥滿洲以爲虜, 東控于倭, 西戀于明, 民復奚暇能養其力哉! 然則, 淸之勢威, 可謂猛矣, 然而其後孫, 若至於慕漢俗而棄其本, 操漢語而賦其詞, 后吳姬而嬪越女, 구八旗之[之]兵而事田獵, 紹堯舜之道而演其說, 어膏粱而飽華靡, 則앵앵漢土好說之士, 皆괄괄然以師傅自傲, 夷狄鄙之, 군起而戮滿胡, 復孰能禦之哉! 不出數百年, 淸必亡於善괄之士也.
태조 누루하치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建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八旗兵)12)을 거느리고 만주를 석권하였고, 금한국(金汗國)을 세우고는 동서를 호시탐탐 살피다가 명 왕조가 쇠퇴해진 틈을 타고 요동을 탈취하였으며, 도처의 도적들로 어지러운 틈을 타고 유연(幽燕)을 점거하여 버렸다. 이에 변발령13)을 내리고 국사관(國史관)을 세웠으며, 영명(永明)을 사로잡아 나라안을 깨끗이 한 뒤에 뭇 우두머리들을 굴복시켜 막북(漠北)을 아울렀다. 그 명령이 나아가고 팔기병이 향하는 곳에는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기에, 곳곳에서 벌때 같이 명(明)의 부활에 뜻이 있는 선비가 일어났으나 다시 어찌할 수 없이 꺾이고 패하였다. 아마도 유사이래 변방 밖의 뭇 종족 가운데 황제가 다스리는 한나라 땅에 들어온 것 중에서 이처럼 강하고도 번성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비록 밤낮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에 대해 이빨을 갈면서, 임진년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명나라에 대해 보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1백년 안에는, 내가 보장하건데,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무릇 변변치 못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에서 적은 숫자의 무리로 이미 스스로가 절박함에 매달려 있으며, 또한 스스로 여진을 오랑캐로 여겨 물리치고 만주를 호로(胡虜)로 여겨 배척하며, 동쪽으로는 왜놈들에게 손발이 묶인 채 서쪽으로 명나라를 그리워하고자 하니, 백성들이 다시 어느 겨를에 능히 힘을 기를 것인가!
청(淸)의 위세는 가히 맹렬하다 할 것이지만, 만약 그 후손들이 한나라 풍속을 사모하여 자신들의 근본을 버리고, 한나라 말로서 글을 짓고 오나라 계집과 월나라 계집을 황후와 비빈으로 앉히며, 팔기병을 몰아 밭에서 사냥하고 요순의 도를 이어 그 말을 치장하며, 고량진미를 배불리 먹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에 만족한다면, 곧 앵앵거리던 한나라 땅의 말하기 좋아하는 선비들이 모두 시끌벅적하게 스스로를 거만히 스승이라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여기며 무리 지어 일어나 만주의 오랑캐들을 도륙할 것이니, 누가 다시 그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청나라는 반드시 떠들기 잘하는 선비에게 망할 것이다.
若天假余以再生, 使置數百年之後, 則余可服東服而操淸語, 跨駟馬而說淸帝, 談同祖, 陳利害, 與朝鮮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 然後, 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不然者, 今朝鮮之勢, 滔滔日下, 只管虛弱而不思奮勵, 不出數百年, 朝鮮必復敗於强린矣, 頹然孰能支之乎!
만약 하늘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수백 년 뒤로 놓아두기만 한다면, 곧 나는 우리나라 옷을 입고 청나라 언어를 구사하며,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라앉아 청나라 황제를 설복하여 우리가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얘기하고 그 이해 득실을 나열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만(遼滿)과 유영(幽營)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단지 허약함만을 돌보아서는 떨치고 나와서 힘을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볼 것이며,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누가 능히 지탱하겠는가!
余嘗論之, 强國之要, 有三; 一曰「地廣而物博」, 二曰「人衆而合」, 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 此所謂地利.人和及[保性也. 而朝鮮, 則得地利而不全, 失人和]14)而亡其性, 此萬世之患也. 何謂得地利而不全. 夫, 朝鮮(之)地, 北連大荒, 則凍天氷地, 斷我後退之路; 西接蒙古, 而萬里流沙, 斷我左展之臂;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且漢人者, 盤據萬里金湯之地, 容百族以爲衆, 蓄布粟以爲富, 鍊百萬之師而以爲强, 則恒涉野跨海, 以侵西鄙. 時有굴强桀오者, 蹶起於北方, 則爲後顧之慮, 必來겁攻. 倭, 海洋萬里, 各據島嶼, 有事則以易自保, 無事則順風駕帆, 任志來寇, 譬如床下맹之恒致其苦. 若我常强而無衰, 則可抑漢士而郡其地, 斥倭寇而鎖其海, 可號令天下, 囊括宇內也. 若我勢一弱, 則敵騎長驅, 蹂린闔國, 虜掠吏民, 焚燒閭里. 此, 所謂得地利而不全者也.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였으니, 그 첫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 이익과 사람의 화합 및 본바탕의 보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 바탕을 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에 걸친 근심이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한나라 사람들은 만리에 뻗친 철옹성 같은 땅에 자리잡고 살면서 수많은 종족을 포용하여 이들로 그 무리를 삼고, 베와 곡식을 축적하고 1백만의 군대를 훈련시켜 이로서 부강함을 삼으며, 항상 들을 건너고 바다를 뛰어 넘어서 서쪽의 먼 변방까지 침략하여 들어갔다. 때때로 뛰어나게 강인하고도 굳세어 굴하지 않는 자가 나타나 북방에서 떨치고 일어나면, 곧 뒷날의 우환을 염려하여 반드시 와서 으르고 공격하였다. 왜(倭)는 바다 1만리의 크고 작은 섬에 제각기 살면서, 유사시에는 쉽사리 스스로를 보호하다가 무사하면 곧 순풍에 배를 몰아 마음대로 와서 노략질을 하니, 마치 마루 아래의 등에가 항상 골치인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항상 강하여 쇠퇴함이 없으면 곧 한나라 선비들을 눌러 그 땅에 군림하고 왜구를 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할 것이니,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곧 바로 적의 병사가 멀리로부터 말을 몰고 와서 온 나라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고을을 불사를 것이니, 이것이 소위 지리적인 이익은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昔者, 蚩尤氏卽帝位於탁鹿, 屹達陳兵於빈.岐, 藍侯建四侯於殷地, 奄薄姑王誘三監而唆武庚, 幾撓周室, 徐偃王抑宗周而王潢池之東朝三十六國. 後世, 遼.金.淸者, 皆起於舊朝鮮[地]而有中原. 高句麗之方盛也, 强兵百萬, 南擊吳.越, 北挑幽燕.齊.魯, 恒虎威於漢方. 百濟則跨渤海而略遼西.晉平, 越草海而占越州. 新羅[則]鯨濤萬里, 陳雄兵於明石, 刑白馬而盟赤關. 此皆, 我强而易於攻彼, 是得地利也.
옛날에 치우씨는 탁록에서 제위에 올랐고, 흘달 임금은 빈·기15)에 병사를 주둔시켰으며, 남후는 은나라 땅에 네 제후를 세웠고, 엄박고왕(奄薄姑王)은 삼감(三監)을 꾀고 무경(武庚)을 부추켜 주나라 왕실을 거의 휘어잡았으며, 서언왕(徐偃王)16)은 종주(宗周)17)를 누르고 황지(潢池)의 동쪽을 다스려 서른 여섯 나라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그 뒤에 요(遼)와 금(金) 및 청(淸) 등이 모두 옛 조선의 땅에서 일어나 중원 땅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막 번성하였을 때는 강병이 1백만으로서, 남방의 오와 월을 치고 북방의 유연(幽燕) 및 제(齊)·노(魯)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등 항상 한나라 땅에 위엄을 세웠다. 백제는 발해를 뛰어넘어 요서와 진평을 공략하였고, 초해를 건너 월주를 점령하였다.18)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강하면 저들을 공략하기 쉬운 것이니 이것이 지리적인 이익이다.
若夫, 檀氏之世, 有알견兪之寇; 列國之時, 箕氏蒙東胡之侵, 丸都焚蕩, 后妃被虜; 平壤敗沒, 而公侯世族及士民之被掠者二十八萬. 黃山將殞, 泗[차](비)城陷, 白馬江頭, 胡馬爭嘶, 落花岩畔, 芳魂亂飄. 忽汗之滅, 而渤海之民放散四處, 雖謀復圖興, 數百餘年而終致其殘滅. 夫勝朝以後累百年間事, 誰肯난顔而過問哉! 降至壬辰之役而八域魚肉, 丙子之禍而州里蕭然. 황! 今世之人, 溺於虛文, 閒於衰弱, 棄其道而咀宋儒之餘唾, 貶其君而比外邦之臣僕. 盖, 歷觀近世之往事, 傍察今代之趨勢, 舍大猷而謀小(欲)[慾], 擲公戰而圖私益, 두公(宣而)[室以]循其家, 漁細民以肥其腹, 而以區區零쇄之事, 멸멸然醉中談夢.蝸角爭勝. 滔滔之勢, 日下而不振, 已無我力而謀賴於人, 此勢已孤弱而倂亡其本性也. 後世若有强린者, 代淸而興則, 必脅其主而誘其臣, 郡其地而隸其民矣. 今日之所以, 溺於安逸而茫然無爲者, 豈非後日, 呼飢규寒之因耶. 余之所謂, 不出數百年而必爲强린所敗者, 豈矯激之語耶. 噫!
무릇 단군의 치세 때는 설유의 노략질이 있었고, 열국시대에는 기씨(箕氏)가 동호의 침략을 입어 환도성이 깡그리 불타고 후비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평양이 패망하여 몰락하니 공후(公候)와 세족(世族) 및 선비와 백성 등을 노략질해 간 숫자가 28만이었다. 황산벌에서 장군이 운명하고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마강 머리에서 오랑캐 말들이 다투어 울고 낙화암의 물가에는 꽃다운 넋들이 어지러이 떨어졌다. 홀한(忽汗)의 멸망으로 발해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비록 부흥을 도모하기를 수백여 년이었으나,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무릇 고려조 이후 수백년 간의 일을 그 누가 기꺼이 나서서 얼굴을 붉히며 물어 오겠는가. 아래로 임진왜란의 어려움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진창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의 재앙을 만나서는 고을들이 쓸쓸하였다. 더욱이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헛된 글에 빠져 하릴없이 쇠약해지고, 자신의 도는 버리고 송나라 유생이 뱉은 침을 곱씹으며, 자신들의 임금을 깎아 말하여 외국 신하의 몸종에 비기고 있다.
대저 근세의 지난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지금 세대의 추세를 그 곁에서 관찰해 보면, 큰 계책은 버리고 작은 욕심만을 꾀하며, 공동을 위한 싸움은 내팽개치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며, 조정을 좀먹어 이로써 가문을 다독거리며, 가난한 백성들을 약탈하여 이로써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져다 희믈그레한 눈매로 취중에 꿈 얘기하듯 하면서 쓸데없는 승부나 다투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흘러가는 형세가 마치 저무는 해와 같아서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고, 이미 스스로의 힘은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하고 있으니, 그 형세는 이미 나어린 고아가 아울러 그 본 바탕 마저 잃은 꼴이라 할 것이다.
후세에 만약 강한 이웃이 있어 청나라를 이어서 일어난다면, 곧 반드시 우리의 임금을 협박하고 그 신하를 꼬여 이 땅에 군림하며 이 백성들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 오늘날 안일함에 빠져서 우두커니 아무일 없이 있는 것이 어찌 뒷날에 주리고 춥다고 울부짖는 원인이 되지 않겠는가.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패하고 말 것이라고 내가 일컬은 것이 어찌 지나치게 과격한 말이라고만 하겠는가. 오호라 슬프도다!
昔者, 檀儉之肇基立業也, 以無爲爲道, 以寧靜爲行, 扶善滅惡, 入孝出忠, 此誠(萬歲之聖)[萬世聖之]萬世之聖訓也. 雖然, 後屬疎遠而益相分, 風土互殊而別其業. 且, 膠守陳法而不知應變, 遠事進攻以求攘拓, 而其功不得永固, 歷檀氏千數百年之隆運而已. 作列國分治之勢, 於是人和已失而地利亦去. 雖三國與渤海者, 得振古威以光我國, 而其後無足可聞者. 황! 金庾信與太宗王, 恨麗.濟之交攻, 憤國威之不揚, 乃誘唐兵而滅其同族, 奉封策而辱其祖宗, 實爲萬世之開醜. 夫, 羽翼折, 則鵬失扶搖之勢, 唇已亡, 則齒不免凍寒矣. 新羅旣引敵國而장同族, 棄祖宗之土而不能復. 夫, 內수其親, 外親수敵, 而能無孤弱, 則天下之人, 亦可倒行.逆施而無所애也, 割股充장而無所뇌也. 造翁豈有, 如斯非理耶!
옛날에 단군 임금이 나라의 기초를 열어 위업을 세움에, 무위의 도로서 고요히 행하며, 선을 북돋우고 악을 멸하며, 들어서면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나서면 나라에 충성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만세에 걸친 성인의 교훈이다. 비록 그렇지만,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면서 더욱이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풍토가 서로 달라지자 그 생업을 달리하게 되었다. 게다가 진부한 법에 얽매여 변화에 순응할 줄 모르니, 멀리 원정을 나아가 공략하여 오랑캐를 내쫓고 땅을 넓히고도 그 공덕을 영원히 굳히지 못하고, 단조(檀朝) 1천 수백 년의 융성함에 지날 뿐이었다. 열국 분할통치의 형세를 이루고 나자 인화(人和)는 이미 잃어버렸으며, 지리적 이득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비록 삼국이 발해와 더불어 옛 위세를 얻어 떨치고 우리나라를 빛내었으나, 그 후에는 그다지 귀 기울일 만한 것이 없었다.
항차 김유신과 태종왕이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공해 옴을 한탄하고 나라의 위세가 드날리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다가, 이에 당나라 병사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키고 당의 봉책을 받들어 조종(祖宗)을 욕되게 하였으니, 실로 만세에 걸친 추악함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무릇 날개 깃이 꺾이면 곧 붕새는 힘차게 나는 기세를 잃어버리게 되고, 입술이 없으면 곧 이빨이 시려움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이미 적국을 끌어들여 동족을 죽였으며, 조종(祖宗)의 땅을 버리고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대저 안으로 친척을 원수로 여기고, 밖으로 원수나 적들과 친하게 지내고도 능히 외롭고 약해지지 않는다면, 곧 천하의 사람들 역시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하여도 어리석지 않다 할 것이며, 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고도 굶주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조물주에게 어찌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19)
宇宙之內.蒼茫之外, 果有一大精靈, 貫流周包而推運之者耶. 造翁之生人也, 欲其養善滅惡, 以率萬物者耶. 체質之外, 果有精靈, 能扶善滅惡, 通性完功, 則身固有死, 而靈可以朝天, 入神鄕耶. 人之於生也, 只可安分樂道, 忍辛耐苦, 而無怨則足耶. 存性養志, 行善而不怠, 使得俯仰無愧, 則雖死而無餘亦足耶. 우희噫! (此數者者)[此數者者]此數事者, 豈可(易以)[以易]爲言哉! 余誇爲東夷之人, 可對天下而無愧乎! 余歎上古之武勇, 而今世之人, 皆可不勞戈戟, 東斥西攘, 使國復置於富强之域耶. 우희噫! 此數事者, 今雖弊其舌而說之, 乃算死兒之齡而已也, 亦復何大益之有. 夫! 幸不偏, 技無專, 民物不可無危難, 而家國之興亡, 飜覆無常, 今朝鮮之不幸, 是亦將幸之端歟. 余觀, 夫! 人心之分裂, 民氣之銷沈, 而不能不投筆長歎也. 嗟桓因乎! 嗟桓因乎! 今片區震域, 一脈遺民, 其將奚爲! 其將奚爲!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과연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 일체를 꿰뚫어 흐르고 두루 감싸안으며 이 세상을 밀어 운행하게 하고 있는가. 조물주가 사람을 낳게 한 것은 선을 기르고 악을 멸하여 이로서 만물을 통솔하게 하고자 했던 것인가. 신체의 바탕 외에 과연 정령이 있어 능히 선을 북돋우고 악을 멸하며, 본바탕에 통하여 맡은 일을 온전히 함으로서 곧 신체는 물론 죽음이 있더라도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서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단지 본분을 지키고 도리를 즐기며,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원망함이 없으면 곧 족한 것인가. 본바탕을 지니고 뜻을 기르며 선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죽어서 남는 것이 없다 할 지라도 역시 만족한 것인가. 오호라! 이 몇 가지 일들 또한 어찌 쉽게 말처럼 되겠는가!
내가 동이의 사람됨을 자랑으로 여기기에 천하를 대함에도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내가 상고 시대의 용맹스러운 무예에 탄복하고 있지만,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어이하여 모두가 군사의 일에 힘을 써서 동쪽과 서쪽으로 적들을 몰아내고 이 나라를 다시 부강의 강역으로 올려놓으려 하지 않는가. 오호라! 이 몇 가지 일들 또한 지금 비록 혀가 닳도록 말하지만 그저 죽은 아이 나이 헤아리기일 따름이니 다시 무슨 큰 이득이 있겠는가! 무릇 행운은 편중되지 않고 재주는 독점됨이 없기에 백성과 사물에게는 위난이 없을 수 없지만, 가문과 국가의 흥망은 반복됨이 무상하다 하였으니, 지금 조선의 불행 또한 장래 행운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내가 살펴보건대 인심은 분열되고 백성의 사기는 소침하니, 이에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오호라 환인(桓因)이여! 오호라 환인(桓因)이여! 지금의 한 조각 진역(震域)과 한 줄기 유민(遺民)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
1.【三皇】: 중국 전설상의 세 임금.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2. 손필본에 '歸神∼朝天'의 18자가 빠져 있다.
3.【柏梁臺】: 중국 한나라 무제가 원정(元鼎) 2년에 향백(香柏)을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써서 세운 대(臺)가 백량대(柏梁臺)이다. 한무제가 이 백량대 위에서 군신을 모아 놓고 짓게 한 칠언련구(七言聯句)의 한시(漢詩)가 하나의 체(體)로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것을 백량체(柏梁體)라고 한다.
4.《三國志·韓傳》에서 지금의 제주도를 가리키는 기록 가운데 가죽 옷의 도이를 설명한 내용이 있다.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곤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저.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또한 주호라고 하여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작고 왜소한데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모두 머리를 깎고 있어 마치 선비와 같으나 부드러운 가죽 옷을 입으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는 것이 얼추 벌거숭이 형세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를 하며 한나라에서 물건을 팔고 산다). ..《삼국지·위지동이전·한전》
5.【雍州】: 옹현(雍縣)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과 서쪽 풍상(風翔) 일대를 가리킨다.
6.【百越】: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백복(百복)과 양월(揚越)을 말한다.
7.【晦庵】: 주자(朱子)의 호.
8. 앞서 주공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신하의 능력을 과다하게 일으켜 주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신하에게 찬역 당함을 경계하는 말이기에, '田和'는 '강한 신하'이기 이전에 '그 땅의 신하'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9.【邯鄲學步】: 남의 것은 어설프게 배우다가 그 결에 자기 것은 아예 잊어버림. 연(燕)나라의 소년이 조(趙)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서울 사람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아직 익숙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서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울러 그 전의 걸음걸이도 잊었다는 고사.
10.【변京】: 중국의 옛 도읍지로서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을 가리킨다.
11.【愛親氏】: 곧 愛新覺羅를 말하며, 만주족의 성(姓)으로서 청 황실의 성씨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지않다.
* 愛新覺羅譯言爲金趙. 愛新譯金, 覺羅譯趙. 言居金之趙氏. 說者謂北宋靖康之難, 太祖之裔, 擧族北遷, 分置遼左各城, 故金爲地名, 趙爲舊姓. 愛新覺羅實爲趙·宋之後裔居金京者('애신각라'는 그 말을 번역하면 금조(金趙)가 된다. '애신'이 금(金)으로 번역되고 '각라'가 조(趙)로 번역되니 '금 나라에 거처하고 있는 조씨'를 말한다. 전하는 말로는 북송 정강 연간의 난리 때 태조의 후예가 집안을 모두 북쪽으로 옮겨 요수 좌측의 각 성에 나누어 자리하게 되었는데, 그 까닭에 '금'은 땅이름이요 '조'는 옛 성씨가 된다고 하였다. 애신각라는 실제로 조·송의 후예로서 금 나라의 경성에 거주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청패유초(淸稗類초)》
12.【八旗兵】: 청 나라의 군대조직. 청 태조 누루하치(努爾哈赤)는 명 나라 만력(萬曆) 42년(1614년)에 팔기(八旗)의 제도를 설치하였다. 300명마다 좌령(佐領 : 牛祿章京) 하나를 두고, 다섯 좌령에 참령(參領:甲喇章京) 하나를 두어 1,500명을 통솔하게 하였다. 또 다섯 참령에 도통(都統:固山章京) 하나를 두어 7,500명을 지휘하게 하고, 매륵장경(梅勒章京)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여덟도통(八都統)이 곧 팔기(八旗)이다. 천총(天聰) 9년(1635년)에 몽고팔기(蒙古八旗)를 설치하였고, 숭덕(崇德) 7년(1642년)에 한군팔기(漢軍八旗)를 설치하였다.
13.【변발】: 머리를 정수리 중앙부분만 남겨서 땋아 뒤로 늘어뜨리고 그 나머지 주위의 두발은 모두 삭발하는 것으로, 고대 중국의 북방 민족인 흉노·선비·거란·여진·몽고 등 뭇 종족들의 풍속이었다. 청의 태조와 태종은 투항한 한인(漢人)에게만 변발을 강제하여 왔으나, 세조가 북경에 입성하자 순치(順治) 2년(1645년)에 한(漢) 민족에게 엄령을 내려 변발을 강요하였다. 이 때문에 한 민족들은 불평이 극에 달하여 반항을 기도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단연코 변발령을 강행하여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머리를 남기고 싶은 자는 두발을 남길 수 없으며, 두발을 남기고 싶은 자는 머리를 남길 수 없다)"라는 방을 강남 지방에 세우고 용서 없이 처벌하였기에 마침내 굴복하였다. 예로부터 변방의 민족이 무력으로 한(漢) 민족을 지배하여도 문화는 마침내 동화되었는데, 청 왕조만은 "男從不從女, 生從不從死"라는 원칙을 고수하여 철저하게 만주화시킨 점이 이채롭다.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14. 손필본에 '保性∼人和'의 16자가 빠져 있다.
15.【빈岐】: 중국 섬서성 위수(渭水)의 분지(盆地)에 있는 빈현(빈縣)과 기산현(岐山縣)을 말한다. 역대의 도읍지인 장안(長安)과 가까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여기며 관중(關中)이라고도 한다.
16.《후한서》와《박물지》및《설원(說苑)》의 서언왕에 관한 기록.
*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록之乘,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 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후에 서이(徐夷)가 신분에 넘치는 칭호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구이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정벌하고자 서쪽으로 나와 하수(河水)의 위에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고 서언왕(徐偃王)에게 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언왕은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으니 땅은 사방 5백리에 행위가 어질고 의로워, 땅위에 있으면서 배알하러 오는 것이 서른여섯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기록(驥록)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얻어서 조보(造父)로 하여금 이를 몰아 초(楚)에 가서 고하여 서국의 정벌을 명하게 함에 하루만에 초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 문왕(文王)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국을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고도 권도(權道)의 술수가 없었으며 그 사람됨이 차마 전투를 감당해 내지 못한 까닭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으로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자 백성된 자로 그를 따르는 자가 1만여 명이었으니, 그러한 연유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 이름하였다). ..《후한서》
* 博物志曰: 「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詳,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徐君)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 곡창(鵠倉)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로 돌아오니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 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나면서부터 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록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이르기를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박물지》
* 王孫려謂楚文王曰: 「徐偃王好行仁義之道, 漢東諸侯三十二國屬服矣. 王若不伐, 楚必事徐.」 王曰: 「若信有道, 不可伐也.」 對曰: 「大之伐小, 强之伐弱, 猶大魚之呑小魚也, 若虎之食豚也. 惡有其不得理.」 文王遂興師伐徐, 殘之. 徐偃王將死, 曰: 「吾賴于文德, 而不明武備; 好行仁義之道, 而不知詐人之心. 以至于此.」 夫古之王者, 其有備乎! (왕손려가 초 문왕에게 이르기를 「서언왕은 인의의 도를 행하기 좋아하여 한 동쪽의 제후 32개 나라가 붙좇아 있습니다. 왕께서 만약 정벌하지 않으시면 초 나라도 필시 서언왕을 섬겨야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약 도의가 있다고 믿는다면 정벌할 수가 없다」 하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정벌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치는 것은 마치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삼키고 호랑이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것에 불합리한 이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문왕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서국을 멸망시켰다. 서언왕이 죽음에 이르러 「내가 문치의 덕에 의지할 뿐 무예의 준비에 밝지 않았으며, 인의의 도리를 행하기 좋아할 뿐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것을 알지 못하였더니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다. 무릇 예전에 왕이 된 자는 무예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설원》권 15, 指武.
17.【宗周】: 주대(周代) 왕의 도읍지를 말한다. 주(周)를 천하의 근본으로 여기는 까닭에 그 왕의 도읍지가 있는 곳, 즉 풍(풍)·호(鎬)·낙읍(洛邑) 등을 모두 '종주(宗周)'라 부른다.
18.《삼국사기》와《송서》의 관련 문장
*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두(고구려와 백제가 번성하였을 때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었으며, 남쪽으로 오와 월을 침범하였고 북쪽으로는 유연과 제 및 노를 괴롭혀 중국의 커다란 근심이 되게 하였다). ..《삼국사기》권 46, 열전 6 최치원條.
*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권 97, 열전 57 백제條.
19.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에 의한 통일이라는 시각은, 진덕여왕의 <태평송> 및 김춘추의 외교정책과 함께 항시 거론되는 부정론의 요지이다. 그러나 단지 당 만을 외세로 여기고 백제 및 고구려와의 전쟁을 내전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당시의 정황을 무시한 지금의 시각일 뿐이다. 대야성을 함락 당한 신라는 백제의 의한 현실적인 위협과 더불어 옛 가야 지역에 대한 통제권 상실은 물론 그 지역의 제철산업 또한 잃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삼국사기》에는 단지 김춘추가 사위 부부의 죽음을 분개한 것으로 표현된 그러한 상황은 신라에 있어서 국가 존폐의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독자적인 능력으로 위기를 넘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 고구려에 원조를 청하지만, 문경과 죽령 이북 땅의 제공을 조건으로 내세우자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럼으로써 남은 것은 당과 왜 뿐이었는데, 왜는 친백제계였으므로, 신라가 백제와 대적하기 위해서 맺을 수 있는 상대는 당 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모든 나라가 단지 각각 하나의 나라일 뿐이었다. 당 만을 외세로 간주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와 더불어 강한 혈족 의식을 느끼며 당시의 삼국 정립을 단지 내부 세력의 분할로 여기는 것은, 어쩌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1천3백여 년 동안 진행되어 온 민족 동화의 결과로서 지금에야 가질 수 있는 시각일 뿐, 당시에 이러한 시각을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
檀君 관련 記史.
1.《帝王年代歷》〈崔致遠 編著〉
檀君紀
檀君
甲子十月三日誕降, 戊辰十月三日卽位, 庚子三月十五日昇遐. 在位九十三年, 壽二百七十年.
갑자년 10월 3일 탄강하셨으며, 무진년 10월 3일 제위에 오르시고, 경자년 3월 15일 승하하셨다. 제위에 있으신지 93년이요 향년이 270년이다.
檀君 關聯 記史
戊辰,[1] 國人推戴神人爲君, 定國號曰檀,[2] 頒敎令,[3] 設壇祭天.[4]
무진년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정하고 교령을 반포하였으며,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를 올렸다.
[1] 唐堯二十五年.
[2] 上古有桓因時代, 桓雄時代,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 設神敎化, 民歸者如市. 戊辰十月, 團衆推戴爲壬儉, 國號曰檀. 是爲檀君始敎, 以男女·父子·君臣之道, 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命彭吳治國內山川, 開通險夷, 以奠民居. 娶河伯之女爲后, 生四子: 曰扶婁, 曰扶虞, 曰扶蘇, 曰扶餘. 民有疾病, 命扶虞以醫藥治之; 山多猛獸, 命扶蘇以火獵攘之; 契兪作亂, 命扶餘討平之; 命神誌掌書契, 命高矢治田事, 以余守己爲濊君長, 以緋天生爲南海長, 分掌諸郡.
[3] 渤海.天統, 注贊《三一神誥》, 卽此也.
[4] 江華.摩尼山.
[1] 당요 즉위 25년에 해당한다.
[2] 상고적에 환인시대와 환웅시대가 있었으니〈환인시대에는 그 우두머리를〉신시씨라 일컬었다. 상원 갑자에 신인이 있어 하늘의 부절인 세가지 인장을 지니고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와 신인으로서 교화를 펴니, 백성들 가운데 붙좇는 자가 많음에 마치 저자거리와도 같았다. 무진년 10월에 무리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다. 이로서 단국 임금(檀君)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펼치게 되었으니, 남녀와 부자와 군신의 도리 및 의복과 음식 궁실 및 머리결을 땋고 머리를 덮는 제도 등을 가르쳤으며, 팽오에게 명하여 나라 안의 산과 하천을 다스리게하여 막힌 곳을 뚫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거처를 온전히 바루게하였다. 하백의 여식을 취하여 후비로 삼으니 네 아드님을 낳음에 '부루'라 하고, '부우'라 하고, '부소'라 하고, '부여'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질병이 있음에 부우에게 명하여 의약으로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산에 맹수들이 많음에 부소에게 명하여 불로서 그들을 잡거나 내어쫓게하였으며, 계유가 난을 일으키자 부여에게 명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신지씨에게 명하여 글 쓰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 명하여 밭일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여수기를 '예'의 군장으로 삼고, 비천생을 남해상장으로 삼아 뭇 군을 나누어 맡아보게 하였다.
[3] 발해 천통 때《삼일신고》를 풀이하여 반포하였는데, 곧 이것을 말한다.
[4] 강화도 마니산이다.
庚寅, 移都平壤, 改國號曰朝鮮.[1]
경인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고쳐 '조선'이라 하였다.
[1]《東史寶鑑》曰: 「地在東表, 日光鮮明, 故曰朝鮮.」
[1]《동사보감》에 「땅이 동쪽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햇빛이 선명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컫는다」라 하였다.
甲戌, 遣子扶婁, 會于塗山.[1]
갑술년에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중국의 뭇 나라들과〉모이게 하였다.
[1] 時, 夏禹治水, 告功會塗山, 而執玉帛者萬區.
[1] 이 때는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린 뒤 그 공을 알리기 위해 도산에 뭇 제후들을 모았는데, 여러나라에서 옥이며 비단 등의 패물을 지니고 모였다.
甲辰, 移都于唐莊京.[1] 命肅愼氏, 任征伐.[2] 鳳凰止于庭.[3]
갑진년에 도음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봉황이 뜰에 머물렀다.
[1]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침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2] 其地在不咸山, 今白頭山也. 東出石노, 有皮骨甲·檀弓·고矢. 檀弓三尺五寸, 고矢有咫. 指東人曰夷者, 夷是大弓, 以肅愼出大弓而名也. 昔仲尼在陳, 有준集于陳侯之庭, 而死고矢石노貫之, 其長尺有咫. 陳侯使人問仲尼, 曰준之來遠矣, 此肅愼氏之矢也.
[3] 象如鶴, 五色而文, 其名曰鳳凰. 見則天下寧世, 稱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 正謂是也.
[1] 지금의 문화현 장장평을 말한다. 이 때 홍수가 범람하여 평양이 침몰되었기에, 왕자를 시켜 아사달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한 것이다.
[2] 그들의 땅이 불함산에 있으니 불함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한다. 그 동쪽의 땅에는 돌화살촉이 나며,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단궁 그리고 호목화살이 있다. 단궁은 3척5촌이며, 호목화살은 그 길이가 8촌이다. 동방의 사람을 가리킬 때 '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큰 활'을 말하는 것이니, 숙신의 땅에서 큰 활이 생산되는 까닭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예전에 중니가 진나라에 있을 때 송골매가 진후의 뜰에 모였는데, 그 가운데 얼마지않아 죽은 송골매가 있음에 살펴보니 돌화살촉의 호목화살에 관통되어 있었는데 그 길이가 8촌 정도였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중니에게 물어보게하니, 송골매는 멀리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은 숙신씨의 화살이라고 말하였다.
[3] 모습은 학과 같으며 다섯 빛깔에 무늬가 있으니 이름하여 봉황이라 한다. 봉황이 모습을 드러내면 천하가 태평스러워진다 하였는데 '봉황은 동방의 군자국에서 나온다'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庚子三月十五日, 君昇遐.[1]
경자년 3월 15일에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1] 入阿斯達山, 化神御天. 時, 大國九, 小國十二, 皆檀氏也. 太白·平壤, 俱在遼.滿之間, 阿斯達山卽文化縣.九月山, 一名白岳. 國人立廟饗之, 稱以三聖祠. 桓因·桓雄·桓儉, 是謂三神, 而桓儉卽檀君也.
[1]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화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에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가 열둘이었으니 모두 단국의 임금에 속한 나라들이다. '태백'과 '평양'은 모두 요양과 만주의 사이에 있으며, 아사달산은 바로 문화현의 구월산으로 '백악'이라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그곳에다 묘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며 '삼성사'라 일컬었다. 환인과 환웅 그리고 환검을 일컬어 '삼신'이라 하니, 환검이라 함은 곧 단국의 임금(단군)을 말한다.
歷年一千四十八年.[1]
역년은 1048년이다.
[1] 系爲四十七世.
[1] 자리를 이은 임금이 모두 마흔 네 분이다.
2.《三國遺事》〈一然 編著〉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1] 開國號朝鮮, 與堯同時.」《古記》云: 「昔有桓因,[2] 庶子桓雄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3]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4] 都平壤城,[5]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고기》에 이르기를 「예전에 환인의 지차 아들인 환웅이 있었으니, 자주 하늘 아래 세계에 뜻을 두고 인간의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의 땅을 굽어보니 인간에게 널리 이익을 줄만하기에, 하늘의 부절인 인장 세개를 주어서 내려보내어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 분이 곧 환웅천왕이다. 풍백과 우사 그리고 운사에게 곡식과 생명 그리고 질병과 형벌 및 선악을 맡게하고 무릇 인간 세계의 360여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머물며 올바른 이치로서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이 때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있어 같은 굴속에 거처하며 항상 신인인 환웅에게 기도하며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였다. 이 때 신인께서 영험한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개를 주며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 동안 모든 일에 조심하였다.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능히 모든 일에 조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기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어린애 가지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이에 잠시 변화하여 그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니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 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의 땅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1]《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2] 謂帝釋也.
[3] 卽太伯, 今妙香山.
[4] 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5] 今西京.
[1]《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2] 제석을 말한다.
[3] 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4] 당요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며 그 50년은 정사년으로 경인년이 아니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5] 지금의 서경이다.
3.《東國通鑑·外紀》〈徐居正·崔溥 等 共撰〉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 임금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臣等按]《古紀》云: 「檀君與堯병立於戊辰, 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今按, 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堯병立者非也. 自唐虞至于夏.商, 世漸요리, 人君享國久長者, 不過五六十年, 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 以享一國乎. 知其說之誣也. 前輩以謂, 其曰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 此說有理. 近世權近, 入覲天庭, 太祖.高皇帝, 命近賦詩, 以檀君爲題, 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帝覽而可之, 時論亦以近之言爲是, 姑存之以備後考.
[신 등이 생각키로]《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년이다」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의심이 된다. 지금 생각건대, 요임금이 재위에 오른 것은 상원갑자 갑진년 때이며 단군이 재위에 오른 것은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니 '요임금과 더불어 재위에 올랐다'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당우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점차 각박해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재위에 오래도록 있다하더라도 오륙십년을 넘기지 못하였는데, 어찌 유독 단군만이 1천48년의 수를 누리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겠는가. 앞선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1천48년이라 말하는 것은 단씨가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일 뿐이지 단군의 향년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이치에 맞다. 근래 권근이 황궁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였는데, 태조 고황제가 권근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함에 '단군'을 시의 제목으로 하게 하였더니 권근이 시에서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도다」라 하니 천자가 그것을 살펴보고는 그럴 것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의 논평 또한 권근의 말을 옳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서 후에 고찰하여 볼 수 있도록 한다.
4.《世宗實錄地理志》〈鄭麟趾 編撰〉
平安道 平壤條
(前略)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 婚而生男, 名檀君, 立國, 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濊與貊, 皆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謂東扶餘王. 檀君與唐堯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 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後略)
단군에 관한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이름이 '웅'인 서자가 있었는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을 교화할 뜻을 가지고 있다가, 하늘로부터 세가지 부절을 받은 뒤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였으니, 이 분이 곧 환웅천왕이다. 손녀에게 명하여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하고, 신단수의 신과 결혼하여 남자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으며, 이에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조선, 시라, 고례, 남옥저와 북옥저, 동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예와 맥 등이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들이다. 단군은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맞아들이고 아들을 낳아 부루라 불렀으니, 이 분은 곧 동부여의 왕이다. 단군은 당요와 더불어 같은 날에 나라를 일으켰으며, 우임금이 도산에 천하의 제후를 모을 때 태자 부루를 보내어 알현하게 하였다. 나라를 거느린지 1천38년,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그 곳은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5.《應制詩註》〈權擥 註〉
命題十首 중에서.
始古開闢東夷主
[原註] 自註, 昔, 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王,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增註] 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曰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率徒三千, 降於太白山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桓或云檀, 山卽, 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雄, 願化爲人. 雄遺靈艾一炷·蒜二十枚, 曰: 「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熊忌三七日, 得女身. 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爲人, 孕生子曰檀君. 與唐堯同日而立國, 號朝鮮, 初都平壤, 後都白岳. 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扶餘王. 至禹會諸侯塗山, 檀君遣子夫婁, 朝焉. 檀君歷虞.夏,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至今存焉. 享年一千四十八年. 厥後一百六十四年己卯, 箕子來封.
[원주] 예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기에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 때는 당요 원년인 무진년이었다.
[증주] 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어 '웅'이라 불렀는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인간을 교화 하고자는 뜻이 있었기에, 하늘의 세가지 부절을 받은 뒤에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였으니, 이는 단웅천왕을 말하는 것이다. '환'을 혹은 '단'이라고도 하며, 산은 곧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의 묘향산을 말한다. 풍백과 우사 및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및 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였으니, 무릇 사람 사이의 3백6십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이 세상에서 이치로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으니, 함께 굴에 기거하며 항시 단웅에게 기원하기를, 사람으로 변신하기를 원하였다. 단웅께서 신령스러운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남겨 놓으며 이르기를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능히 지키지 못하였으나, 곰은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켜 여자의 몸을 얻었다. 그러나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소원하며 임신하기를 빌었다. 단웅께서 이에 잠시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며, 아들을 낳자 '부루'라 이름하였으니, 이가 곧 동부여왕이 되었다. 우임금이 도산에 천하의 제후를 모이게 하자 단군께서 아들 부루를 보내어 알현하게 하였다. 단군께서는 우순씨(虞舜氏)와 하우씨(夏禹氏)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화하였으니,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그 묘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향년 1천48년이다. 그로부터 164년 후인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책봉을 받았다.
6.《東國輿地勝覽》〈盧思愼 金宗直 共編〉
平壤府
【建置沿革】本, 三朝鮮·高句麗之故都. 唐堯戊辰歲, 有神人降太伯山檀木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 封箕子于此, 是爲後朝鮮. 傳至四十一代, 孫準, 燕人衛滿, 奪其地, 都王險城險一作儉, 卽平壤, 是爲衛滿朝鮮. (下略)
【설치연혁】본래 세 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에 신인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고 평양에 도읍하며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곧 전조선이 된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물리치고 기자를 이곳에 책봉하였으니, 이것이 곧 후조선이다. 후조선에서 41대를 전하여 후손 준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험'은 '검'으로 되어 있기도 하며, 곧 평양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곧 위만조선이다.
7.《東國史略》〈朴祥 編撰〉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1] 有神人降于太白山[2]檀木下, 國人立爲君,[3] 國號朝鮮,[4] 都平壤徙白岳, 後入阿斯達山,[5] 爲神, 是爲檀君.[6]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며,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그가 단군이다.
[1] 只有九種夷.
[2] 在今寧邊府, 卽妙香山.
[3] 唐堯二十五年戊辰.
[4] 在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 索隱曰, 以有山水, 故名.
[5] 今九月山.
[6] 名王儉.《古紀》云 「檀君與堯병立, 至商.武丁八年, 爲神, 壽千四十八.」 然, 權近.應製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盖傳世歷年數, 非檀君壽也.
[1] 단지 아홉 부류의 '이'족이 있었다.
[2] 지금의 영변부에 있으니 즉 묘향산이다.
[3] 당요 25년 무진년이다.
[4] 동쪽의 언저리 해가 돋는 땅에 있는 까닭에 '조선'이라 하였다. 색은이 말하기를,〈그 땅에〉산수(汕水)가 있는 까닭에〈'조선'이라〉이름한 것이라 하였다.
[5] 지금의 구월산이다.
[6] 이름이 왕검이다.《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같은 시기에 즉위하여 상나라 무정 8년에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세이다」 하였다. 그러나 권근의 응제시에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지 단군의 향년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8.《東國史略》〈柳希齡 編註〉
前朝鮮
檀君: 姓桓氏, 名王儉. 東方初無君長. 有神人桓因之子桓雄, 率徒三千, 降于太伯山,[1] 神檀樹下, 謂之神市, 在世理化. 生子號曰檀君, 唐堯戊辰[2]卽位, 始稱朝鮮, 都平壤,[3] 移都白嶽.[4] 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扶婁. 丁巳,[5] 禹南巡狩, 會諸候于塗山, 遣扶婁朝焉. 築塹城壇于海島中以祭天, 又命三子築城.[6] 薨, 葬于松壤.[7] 後嗣避箕子來封, 移都於藏唐京,[8] 傳世凡一千五百年.
단군, 성은 환씨이며 이름은 왕검이다.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다. 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어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일컬어 '신시'라 하며, 환웅은 세상에 있으면서 올바른 이치로서 세상을 교화하였다. 아들을 낳아 단군이라 이름하였는데, 중국의 당요 무진년에 즉위하여 처음으로 '조선'이라 일컫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후에는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 정사년에 우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을 나가서 제후들을 도산에 모으자 부루를 보내어 찾아뵙게 하였다. 참성단을 바다 가운데의 섬에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또 세째 아들에게 명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승하하자 송양에 장사를 지냈다. 뒤를 이은 후손이 기자가 피봉받아 들어오자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으며 세대를 전한 것이 무릇 1천5백년이었다.
[1] 在平安道.寧邊府, 今妙香山. [2] 帝堯二十五載.
[3] 今平壤府. [4] 在文化縣.
[5] 夏禹元年. [6] 今俱在江華府.
[7] 在江東縣. [8] 在文化縣.
[1] 평안도 영변부에 있으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요 임금 25년이다.
[3] 지금의 평양부이다. [4] 문화현이 있다.
[5] 하우 원년이다. [6] 모두 강화부에 있다.
[7] 강동현에 있다. [8] 문화현에 있다.
9.《東史纂要》〈吳澐 編撰〉
檀君朝鮮
自唐堯甲辰, 至明.太祖戊申, 三千七百二十五年.
自檀君戊辰, 至我太祖壬申, 三千七百二十五年.
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 國人立爲君, 國號朝鮮. 時, 唐堯二十五年, 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白岳, 是爲檀君.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爲神.[1]
동방에는 아홉 부류의 '이'가 있었는데, 애초에는 군장이 없었다. 한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 때는 당요 25년으로서 무진년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옮겼으니, 이 분이 단군이다. 상나라 무정 8년인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1] 古紀,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前輩謂, 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壽, 此說有理. 太白山卽妙香山. 阿斯達山, 文化縣.九月山, 白岳卽此山也.
[1] 예전의 기록에 1천48년의 세수를 누렸다 하였는데, 이 얘기는 자못 의심스럽다. 선배의 말에 1천48년이라는 것은 단씨가 그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이지 단군의 세수는 아니라 하였는데, 이 얘기가 이치에 합당하다. 태백산은 곧 묘향산이다. 아사달산은 문화현의 구월산이니, 백악은 곧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10.《東國文獻備考》〈洪鳳漢 編撰〉
帝系考二 歷代紀年
檀君諱王儉. 古記云: 「東方, 初無君長, 只有九種夷. 有神人降于太白山[1]神檀樹下.[2] 唐堯二十五年戊辰, 立爲王, 國號朝鮮, 都平壤, 後徙白岳.[3] 商.武丁乙未, 入阿斯達山,[4] 爲神. 在位一千四十八年.[5]」
단군의 휘는 왕검이다. 고기에서 말하였다. 「동방에는 애초에 군장이 없었으며, 단지 아홉 부류의 '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당요 25년 무진년에 자리에 올라 임금이 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여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후에 백악으로 옮겨갔다. 상나라 무정 을미년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재위 1천48년이다.
[1] 卽妙香山.
[2] 詳見<氏族>.
[3] 世號唐藏京, 在文化.
[4] 卽九月山, 在文化
[5] 或云, 商.武丁甲子, 徙于濊地, 子孫相傳, 凡千有七十年. 或云, 享國一千二百一年, 壽一千九百八歲. 洪武丙子, 吉昌君.權近, 奉使朝明, 明.高皇帝命題檀君詩, 近應製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世.」 以爲實記云.
[1] 즉, 묘향산이다.
[2] (이 내용이) <씨족>에 상세히 보인다.
[3] 세간에서는 당장경이라 하니, 문화현에 있다.
[4] 즉, 구월산으로서 문화현에 있다.
[5] 혹은, 상나라 무정의 갑자년에 예의 땅으로 옮겨가서 자손이 대대로 전하기를 무릇 1천70년 동안 하였다고 한다. 혹은, 나라를 거느린지 1천21년이며, 세수를 누린 것이 1천98년이라 한다. 홍무 병자년에 길창군 권근이 사신의 신분을 받들고 명나라의 조정에 들어가니, 명나라 고황제가 '단군'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기에, 권근이 그 제목에 응하여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1천년은 족히 넘었도다」 하였는데, 현실적인 기록이라 여길만 하다고 한다.
11.《海東繹史》〈韓致奫 編撰〉
檀君朝鮮[1]
[1] 按《史記》索隱曰: 「朝音潮, 鮮音汕. 朝鮮有汕水, 故名.」《伏生書·大傳》云: 「箕子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封之.」 然則, 箕子之前, 知有朝鮮之稱, 而檀君時, 朝鮮稱否, 未可的也. 然而《麗史》以檀君爲前朝鮮, 箕子爲後朝鮮, 故今從焉.
[1]《사기》에서 색은이 말하기를 「朝의 음은 '조'이며 鮮의 음은 '선'이다. 조선에 선수가 있기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복생상서》의 <대전>에 이르기를 「기자가 조선 땅으로 달아나자 무왕이 이를 듣고는 그 땅을 기자에게 봉하였다」 하였으니, 기자 이전에 '조선'이라는 명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단군의 시기에 '조선'이라고 불렀는지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고려사》에 단군 시기를 '전조선'이라 하고 기자 시기를 '후조선'이라 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따른다.
唐堯氏, 帝天下二十有五年戊辰, 檀君氏立焉. 始治都邑, 邑于平壤, 國號朝鮮, 是爲檀君朝鮮. 桓雄者, 天神桓因之子也. 降于太白之山, 檀木之下, 因假化合而生子, 以生檀木下, 是爲檀君. 檀君名儉, 生而神明, 九夷君之. 흘有殷氏.武丁八年乙未, 檀君入九月山, 爲神云. 壽千四十有八歲.[1]
당요씨가 천하를 제왕으로서 다스린지 25년 째인 무진년에 단군씨가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여 다스리니 도읍은 평양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기에 '단군조선'이 되는 것이다. 환웅은 하늘신인 환인의 아들이다.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와 잠시 변화하여 인간과 화합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단목 아래에서 낳은 까닭에 '단군'이라 하였다. 단군의 이름은 '검'이며, 나면서부터 신명한 기운이 있어 아홉 '이'족의 임금이 되어 그들을 다스렸다. 은씨의 무정 8년인 을미년에 이르러 단군이 구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한다. 향년 1천48년이다.
[1] 按東史所言, 檀君事, 皆荒誕不經. 檀君首出, 必其人有神聖之德, 古者神聖之生, 固有異於衆人者, 豈有若是之無理乎! 其所稱桓因.帝釋等語, 出於《法華經》. 羅.麗之代, 尊尙異敎, 其弊至此. 東方屢經兵선, 國史秘藏, 蕩然無存, 緇流所記, 得保巖穴之間, 以傳後世. 作事者悶其無事可記, 時或編入正史, 世愈久而言愈實, 以至流傳中國, 遂使一隅仁賢之邦, 歸於語怪之科, 可勝歎哉! 又按《會紀》, 商.武丁八年非乙未乃甲子, 自唐堯戊辰至武丁甲子, 爲一千十七年, 東史皆言, 檀君壽一千四十八年, 其說誕만無稽. 權陽村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蓋以一千十七年爲傳世歷年之數, 此說是也.
[1] 해동의 역사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단군의 일은 모두 황당무계하여 좇을 만한 것이 아니다. 단군은 동방의 땅에서 처음 태어난 임금이기에 필시 그 사람됨에 신성한 품덕이 있었을 것이며, 예전에 신성한 사람의 탄생은 반드시 일반 무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지만 어찌 이렇게도 이치에 맞지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환인 또는 제석이라 일컫는 것은 모두《법화경》에서 나온 말이다.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 이역의 종교를 존숭한 나머지 그 폐단이 여기에 이르렀다. 동방의 땅은 누차 병란을 겪어 나라의 역사로서 비장된 것들이 거의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으나, 승려들이 기록한 것은 암굴 속에 보존되었기에 그로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역사의 일을 쓰는 이들이 채록할 만한 기록들이 없음을 번민하다가 때때로 승려들이 기록한 것을 정사에 편입시켰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그 말들이 사실로 되어버렸으며, 게다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서는 마침내 한 쪽 모퉁이의 어질고 현명한 이 나라를 괴이한 말들이나 하는 부류로 여기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하는 것으로 족할 것인가! 또《회기》에 의하면 상나라 무정 8년은 을미년이 아닌 갑자년이므로 당요 무진년으로부터 무정 갑자년은 1천17년이 되니, 해동의 역사에서 모두들 단군의 수를 1천48년이라 말한 것은 그 예기가 황당무계하다. 권근의 시에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1천년은 족히 넘었도다」 하였으니, 아마도 1천17년은 세대를 전한 역년임에, 그 예기가 맞다.
12.《東史輯略》〈金澤榮編, 魚允迪校〉
檀君朝鮮紀
檀君, 檀姓, 名王儉. 上世, 東方之民, 草衣木食, 夏巢冬穴, 군聚以居, 未有統攝. 有人, 生于太伯山[1]檀樹下, 靈秀明智, 衆以爲神. 戊辰歲,[2] 推立爲主, 以其生於檀, 號爲檀君. 檀君旣立, 都於平壤, 名其國曰朝鮮.[3] 敎民編髮·盖首·飮食·居處之制. 聞夏禹氏會諸侯于塗山, 遣子扶婁往會之. 季年移居白岳[4]以沒, 子孫相傳, 凡千有十七年.[5] 徙于濊地, [6]後一百九十六年而箕子東來云.
단군은 '단' 성씨에 이름은 '왕검'이다. 상고 시절 동방의 백성들은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여름에는 나무 위의 집에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 살며, 무리를 지어 거처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도맡아 다스리는 일이 없었다. 한 사람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신령스럽고도 명철한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무리들이 신으로 여겼다. 무진년에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으며, 그가 단목 아래에서 태어났다하여 '단군'이라 불렀다. 단군은 즉위한 후에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나라를 이름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머리결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과 음식 및 거처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하우씨가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한다는 것을 듣고 아들 부루를 보내어 가서 참여하게 하였다. 말년에 백악으로 옮겨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자손은 대대로 이어져 무릇 1천17년이나 되었다. 예의 땅으로 옮긴 후 1백96년이 지나서 기자가 동쪽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1] 今妙香山.
[2] 卽中國唐堯二十五年.
[3] 古語, 東方之地, 先受朝日光鮮, 故謂之朝鮮.
[4] 今九月山, 一名阿斯達山.
[5] 商.武丁八年, 甲子.
[6] 或曰北夫餘.
[1]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즉, 중국 당요 25년이다.
[3] 옛 말에 동방의 땅은 제일 먼저 해를 바라보며 그 빛이 선명하다 하였으니, 그러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컬은 것이다.
[4] 지금의 구월산으로, 일명 아사달산이다.
[5] 상나라 무정 8년 갑자년이다.
[6] 혹은 북부여라 하였다.
13.《神檀實記》〈金敎獻 著〉
檀君世紀
桓因·桓雄·桓儉,[1] 是爲三神. 上元甲子十月三日, 桓儉, 以神化人, 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2]檀木下, 乃設神敎而敎民. 時, 人民被化, 歸者如市, 有神市氏之稱, 乃치三千團部. 開天一百二十五年戊辰十月三日, 國人推戴神人爲壬儉, 是檀君.[3] 國號檀.[4] 娶匪西岬.河伯女爲后, 生太子扶婁. 當洪水, 命彭虞, 治山川, 奠民居; 神誌, 掌書契; 高矢, 治田事. 一百四十七年庚寅, 自太白移都平壤, 改國號朝鮮. 一百九十一年甲戌, 遣太子扶婁, 往夏禹氏.塗山會.[5] 封支子于扶餘, 以余守己爲濊君長, 使其子九人, 分掌諸郡, 以비天生爲南海上長. 設祭天壇,[6] 築三郞城.[7] 後, 徙都唐莊京.[8] 二百十七年庚子三月十五日, 入阿斯達山,[9] 化神御天, 開天, 二百十七年, 在君位, 九十三年. 傳不知幾世, 歷一千二百十二年. 太白·阿斯達, 皆有祠.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삼신'이라 한다. 상원 갑자년 10월 3일에 환검이 신의 몸에서 사람으로 변화하여,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 인장을 가지고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이에 신의 가르침을 베풀어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이 때 인민들이 교화를 입게 되자 귀순하는 자가 마치 저자거리와 같았기에 '신시씨'라는 일컬음이 있게 되었으며, 이에 3천의 단부가 채워지게 되었다. 개천 125년 무진 10월 3일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추대하여 임검으로 삼으니, 이가 곧 단군이다. 나라 이름을 '단'이라 하였다.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취하여 후로 삼고, 태자 부루를 나았다. 홍수를 만나자 팽우에게 명하여 산천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거처를 자리잡게 하였으며, 신지에게 명하여 서찰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고시에게 명하여 농사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7년 경인에 태백산으로부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고쳤다. 191년 갑술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하우씨의 도산 모임에 가게 하였다. 둘째 아들을 부여에 봉했으며, 여수기로 예의 군장을 삼고, 그의 아들 아홉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군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으며, 비천생을 남해상장으로 삼았다. 제천단을 설치하고 삼랑성을 건축하였다. 후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217년 경자 3월 15일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하여 하늘에 오르니, 개천한 지 217년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몇 세대를 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은 1천2백12년이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사당이 있다.
[1] 一云, 檀因·檀雄·檀君.
[2] 今白頭山.
[3] 降于檀木下, 故曰檀君.
[4] 稱號倍達.
[5] 交際之始.
[6] 壇在江華.摩尼山.
[7] 城在江華.傳燈山. 遣三子築城, 故曰三郞.
[8] 京在文化. 今莊莊坪是.
[9] 今文化.九月山.
[1] 또는 단인과 단웅 및 단군이라고도 한다.
[2] 지금의 백두산이다.
[3] 단목 아래로 내려온 까닭에 '단군'이라 한다.
[4] 배달이라 일컫는다.
[5] 교제의 시초이다.
[6] 제천단은 강화 마니산에 있다.
[7] 삼랑성은 강화 전등산에 있다. 셋째 아들을 보내 성을 쌓게 한 까닭에 '삼랑'이라 한다.
[8] 당장경은 문화현에 있다. 지금의 장장평이 그것이다.
[9]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14.《朝鮮歷史》〈李昌煥 著〉
第二章 古朝鮮
第一節 檀 君 의 化 降
神市로 얼마만를傳하야 오다가 上元甲子十月三日에 桓因桓雄桓儉의 三神中에서 桓儉이 天符印三箇를가지시고 太白山神檀樹아래에서 人間으로 化降하시니 이가神人이신 大皇祖檀君이시다 後人이 이날를開天節이라하야 우리가 가장깁어 紀念하는 名日이되얏다
第二節 國 家 組 織 의 始 初
桓族은 家族的觀念으로 造物主卽共同先祖를崇拜하는 宗敎政治인 神市의制度만으로는 生存競爭이 漸次로일어나는時局에 立脚함에 缺陷이많음을깨닷고 一層鞏固한 共同團結이必要함으로 統治者를 渴求하다가 開天一百二十五年戊辰十月三日에國人이 神人을主上으로모시고 太白山아래에 國都를定하고國號를檀(배달)이라 神人를壬儉이라불넛다 곧배달나라임검이라는말이니 그뜻을쫓아서 漢字로檀君이라 譯述한것이다 그卽位하신戊辰歲는 우리나라가 처음생긴紀元元年이다
第三節 檀 君 의 治 績
天下가 洪水의災害로因하야 九年동안이나 困難를바다옴으로 彭虞를命하사 山川를整理하시고 余守己로 州界를分定케하사 人民의居處를安定케하시고 高矢로農業을 神誌로書契를 特提로政令을 渥且로衛生을 扶蘇로刑法을 朱因으로考試를 蚩尤氏로軍兵을 차지하게하시고 太子扶婁로 八加의大官를 領率케하시며 后妃로紡績을 監督케하시니 처음으로 君臣男女의禮節과 衣服飮食宮室의制度가잇섯다
第四節 國 號 의 完 定
太古쩍붙어 우리朝鮮를 震이라혹은東國이라불엇다 震은東方이라는 古語ㅣ니 이것은 中華의漢族이 우리朝鮮의 位置를따라서 붙은것이 卽今까지傳하야온것이오 朝鮮이라고 國號가完定되기는 檀君괴서 登極하신 二十三年庚寅에 朝日이鮮明하다는意味로 命名하신것이다
第五節 國 界 의 勘 定
桓族中에 舜이 唐堯의禪位를바다서 國政를攝行할새 우리의 西鄙인遼西에 幽州를 遼東에 營州를둠으로 朝廷에서 反抗하야오다가 六十七年甲戌에 唐堯가 開催한塗山會에 太子扶婁를派遣하사 國界를勘定하니 東은大海를이엿고 南은耽羅(濟州道)에일으고 西..金阿林(興安嶺)를넘어서 沙漠에닿고 다시南으로 黃河水곁에및고 北은黑水(黑龍江)를걸치니 太白山北松花江沿岸이 그中央이되엿다
第六節 祭 天 壇 과 三 郞 城
檀君괴서는 神敎의主義로서 國民의 精神를統一함에 注力하사 江華摩泥山에 祭天壇를싸으시며 後世에 不意의患難를念慮하사 皇子三人를 傳燈山에 派遣하사 築城하시고 三郞城이라하시니 卽今의鼎足山城이이것이다
第七節 封 建 의 始 初
檀君괴서는 神功과聖德으로 蒼生을導率하실새 政敎를一致함에 注意하사 政治를 平和上에 執行하려하심에 廣漠한疆土에 王權이直接으로 全體에普及하기 不能함으로 神誌를東北地인 肅愼忽에封하야 肅愼혹은루진國이라하고 高矢를 東南地인樂浪忽에 封하야 靑邱라하고 蚩尤의後를 南西地인奄慮忽에封하야 藍國이라稱하고 皇子三人를 國西地인扶餘·眞番·句麗에 朱因를蓋馬國에 餘守己를 穢國에封하야 각각그所轄區域의 人民를指導하게하시니 封建의制度가 이로붙어비릇하얏다
第八節 國 都 의 移 轉
封建制度가 成立된同時에 檀君의直領인疆土와人民이 따로잇음으로 그 人民의 繁植과經濟上關係로因하야 住地가變動됨을따라서 國都를移轉하게되엿다 그처음에는 太白山아래에 定하엿다가 二十三年庚寅에 王儉城(平壤)으로 六十八年乙亥에 白岳의 唐藏京(文化莊莊坪)으로 移轉하얏다
第九節 帝 位 의 世 襲
檀君괴서 在位九十三年庚子三月十五日에 阿斯達山(文化九月山)에 隱幸하사 다시神으로化하사 天에返御하시니 國民이 太子扶婁를推戴하야 帝位를世襲하게하고 또한 檀君이라 仍稱하얏다
第十節 古 朝 鮮 의 內 治
檀君괴서 人間의萬般制度를 創設하시고 內治에 專力하시더니 嗣王이 그弘業을繼承하사 農業를奬勵하시며 道路를開通하시고 音樂를精通하사 於阿樂과 朝天舞를 創作하얏으며 第八世檀君(于西翰)은 細民의賦稅를輕減하사 九十의一를徵收하시고 商業을奬勵하얏으며 第三十四世檀君(奧婁門)에일으러 元年己亥에 國都를 樂浪忽에옴기고 眞蕃候로 舊都를監視케하시고 天性이仁厚하사 犯罪者가잇으면 自責하시고 仁政을大行하사 檀朝가中興하얏다
第十一節 韓 族 과 의 關 係
國初에 虞舜이 營州를藍國接近에 設置하고 자조邊境을侵伐함으로 第二世檀君(扶婁)괴서 親征하시고 嗣王이繼續하야 藍國과眞蕃의軍兵으로 擊逐하시고 第十五世檀君(伐音)때에 夏主傑이 國內의 叛賊으로因하야 請援함애 末良으로 應援하다가 그가無道함으로 國交를끈으시고 商王湯과和好하얏으며 第二十一世檀君(蘇台)에일으러 殷領인陳候를 親征하시고 第二十三世檀君(阿忽)괴서 殷의不和를聲討하얏더니 嗣王의卽位二年庚寅에 南界를入寇함으로 藍候를命하사 擊逐하시더니 第三十世檀君(奈休)에 일으러 다시和好하얏다
第十二節 藍 候 의 强 大
藍候는 第三十九世檀君(豆忽)때에 일으러 孤竹君를擊逐하고 首部를奄慮忽에옴기니 殷國과接近하야 邊患이念慮됨으로 黎巴達를衝動하야 黎忽에 小國를創建하고 西戎과團結하야 殷國을侵伐케하야 漢族의侵略을防備하고 第四十世檀君(達音)때에 일으러 獗견兪에 避居함애 貊이라稱하던扶餘의人民이 奄慮의西境에 移居하야 藍候의屬民이되니 藍候는 이러한機會를 利用하야 王朝를背叛하고 隱然히 獨立國을形成하얏다
第十三節 藍 候 의 蕃 臣
第四十三世檀君(勿理元年乙丑)에 藍候儉達이 靑丘·句麗·루진의 軍兵을領率하고 殷를侵伐하야 淮垈의땅을빼앗고 靑州에蒲姑氏를세워서 奄國이라 徐州에 盈古氏를세워서 徐國이라 稱하고 第四十五世檀君(餘婁)때에 일으러 淮南에鮮卑國을세우고 이받게도 漢族의疆土에 蒲姑·弁·萊芥·거·綠·涯의 自治部落를組織하야 殷과對抗하고 百餘年를存續하얏다
第十四節 王 室 의 衰 亡
最初에 檀君괴서 建國하시고 國家行爲에對한代表上의 便利的單位로 封建하신여러地方은 漸次로 分離하야 王室과勢力을 抗爭하게되더니 第三十七世檀君(麻勿)八年 乙未에 일으러 扶餘에서 東明王扶婁가 稱王한뒤로 王室이微弱하야 잇어야없음과갇더니 藍候가强大함애 王命이恒山以北에 폐우지못하다가 第四十七世檀君(古列加)에 일으러 自存할수가없음으로 上이阿斯達에 避하시니 四十七世一千一百九十五年를지내고 統治權이 드듸여 扶餘로도라갇다
第十五節 古 朝 鮮 의 文 化
宗敎는 밝안이라는 神敎를信仰하야 높은山에 祭天壇를設하고 十月에會合하야 拜天의禮式을 擧行하고 거기에서 歌舞로멫을식즐기고 國中의 大小事를 議論하엿다
官制는 歷代의 檀君이 至尊의位에臨御하야 全國을統御하고 그아래에 虎加·馬加·牛加·熊加·鷹加·鷺加·鶴加·狗加의八加가잇으니 虎加는諸加를總轄하는것이니 後에龍加로改稱하고 馬加는政令을 牛加는農業을 熊加는軍兵을 鷹加는刑罰를 鷺加는疾病을 鶴加는善惡을 狗加는州界를 分掌하고 地方行政은 小君長을두엇서 直接으로 人民를指導하게하얏다
文學은 神誌가 文字를創作하야 秘史를지은후에 王明知가 農曆을 王金石이 天文學을지어서 國文學이振興하얏다
藝術은 浿水沿岸의住民이 夙達하야 全國이 石器를使用하는時代에 王海月이 船舶을 創造하얏다
15.《後漢書》〈宋·范曄 撰〉
東夷列傳
《王制》云:「東方曰夷.」 夷者, 저也, 言仁而好生, 萬物저地而出.[1]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2] 夷有九種,[3] 曰견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4] 故孔子欲居九夷也.
《왕제》에 이르기를 「동방을 '夷'라 한다」 하였다. '夷'라 함은 '근본이 되는 뿌리'이니 어질고도 자애심이 많아 살생을 꺼림에 마치 만물이 뿌리되는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 과도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법도로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 또는 '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夷'에는 아홉 종류이 있으니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1] 事見《風俗通》.
[2]《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병在東方也.
[3]《竹書紀年》曰「后芬發卽位三年, 九夷來御」也.
[4]《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 命견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1]《풍속통》에 이 일이 보인다.
[2]《산해경》에 이르기를 「군자국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 먹고 두 마리의 무늬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 하였다.《외국도》에 이르기를 「낭야와는 삼만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산해경》에 또 이르기를 「죽지않는 사람(不死人)은 교경국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리고 죽지않는다」 하였으니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분발의 즉위 삼년에 구이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라 하였다.
[4]《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 즉위 2년에 황이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으며 뒤에 소강이 즉위하자 방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라 하였다.
昔堯命羲仲宅우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1]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2] 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3]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4]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폐, 東夷침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5]
옛날 요 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의 땅에 자리잡고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바로 양곡이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아마도 해가 솟아나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이인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 소강 이후로 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이 난폭하고 잔악해지자 뭇 이 들이 침범하여 들어왔으며 은의 탕왕이 혁명을 하여 그들을 정벌하고 안정시켰다. 중정 때에 이르러 람이가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부터 삼백여 년 동안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였다. 무을 때에 쇠퇴하여 피폐해지고 동이는 점차 번성하여지더니 마침내 회와 대의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게 되었다.
[1] 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우夷. 暘谷, 日之所出也」.
[2] 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예所逐也.
[3] 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竹書紀年》曰:「后發卽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4] 仲丁, 殷.大戊之子也.《竹書紀年》曰「仲丁卽位, 征于藍夷」也.
[5] 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1] 공안국이《상서》의 주석에서 말하길 「동방의 땅을 우이라 한다. 양곡은 해가 솟아 오르는 곳이다」라 하였다.
[2] 태강은 계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에 의해 쫓겨났다.
[3] 소강은 천자 중강의 손자이며 천자 상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발 즉위 원년에 뭇 이 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또한 뭇 이 들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4] 중정은 은 나라 대무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중정이 즉위하여 람이를 정벌하였다」라 하였다.
[5] 무을은 천자 경정의 아들인데 무도하여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높은 곳에 걸어두고 활로 쏘며 일러 「하늘을 쏜다」고 하였다.
及武王滅紂, 肅愼來獻石노·고矢. 管·蔡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1] 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2]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3]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록之乘,[4]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5] 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6] 려王無道, 淮夷入寇, 王命괵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7] 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修覇, 攘而각焉. 及楚靈會申, 亦來豫盟.[8] 後越遷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무왕이 주를 멸함에 이르러 숙신이 들어와 돌화살촉과 호목화살을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를 배반하고 이적을 꾀여들이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하였다. 강왕 때 숙신이 다시 들어왔다. 후에 서이가 신분에 넘치는 칭호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구이를 거느리고 종주를 정벌하고자 서쪽으로 나와 하수의 위에 이르렀다. 목왕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고 서언왕에게 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언왕은 황지의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으니 땅은 사방 오백리에 행위가 어질고 의로워 땅위에 있으면서 배알하러 오는 것이 서른 여섯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기록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얻어서 조보로 하여금 이를 몰아 초 나라에 가서 고하여 서국의 정벌을 명하게 함에 하루만에 초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 문왕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국을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고도 권도의 술수가 없었으며 그 사람됨이 차마 전투를 감당해내지 못한 까닭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으로 팽성의 무원현 동산 아래로 달아나자 백성된 자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만여 명 이었으니 그러한 연유로 그 산을 서산이라 이름하였다. 려왕이 무도하자 회이가 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왕이 괵중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정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유왕에 이르러 음란하고도 어지러워 사방의 만이가 번갈아 침략하여 왔으나 제의 환공이 패권을 거머쥐게 되자 물리쳐 쫓아버렸다. 초 영왕에 이르러 신(申)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자 역시 와서 참여하여 맹서를 하였다. 후에 월 나라가 낭야로 옮겨가 더불어 정벌의 전쟁을 벌이니 마침내 뭇 하 를 능멸하여 포악한 짓을 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1]《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2]《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詳,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3]《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4]《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盜驪·화류·록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5] 造父, 解見蔡邕傳.
[6] 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비縣北. 徐山在其東.《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楚所敗, 北走此山」也.
[7]《毛詩序》曰:「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 其詩曰:「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벽四方, 徹我土疆.」
[8]《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1]《상서》에, 무왕이 죽자 세 재상과 회이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는 대고를 지었다. 또 말하길, 성왕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는 회이를 멸망시켰다.
[2]《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 곡창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로 돌아옴에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나면서부터 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록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기를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라 하였다.
[3]《수경주》에 이르기를 「황수는 일명 왕수라고도 하며 포수와 합해진 후 패수에 이르러 사수로 흘러들어간다. 산양의 동쪽으로 부터 해릉 북쪽의 땅에 흐른다 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라 하였다.
[4]《사기》에 이르기를 「조보는 말을 잘 부리는 것으로 주 무왕으로부터 총애를 입었는데 <무왕은> 적기·도려·화류·녹이 등 네필의 말이 끄는 사마의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수렵을 즐기며 돌아갈 일을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5] 조보에 관해서는 채옹전에 상세히 보인다.
[6] 무원은 현인데 그 옛 성이 지금의 사주 하비현의 북쪽에 있다. 서산은 그 동쪽에 있다.《박물지》에 이르기를 「서왕의 괴이함은 범상하지가 않다. 무원현 동쪽 십여 리에 있는 서산의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이 진과 채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하고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로 자신이 하늘의 상서러움을 얻었다고 여기고 스스로 '偃王'이라 일컬었다. 목왕이 이를 듣고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사마의 수레를 내어주어 하루만에 초에 이르게하여 초로 하여금 그를 정벌하게끔 하였다. 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초에게 패하여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7]《모시서》에 이르기를 「《시경》의 '江漢'이라는 시는 주의 공경대부인 윤길포가 선왕을 칭송한 것이다. 선왕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켜 혼란을 다스리고 소공에게 명하여 회이를 평정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모시에 이르기를 「강수와 한수가 넘실거리니 병사들의 발걸음 씩씩하네. 즐기는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 회이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에게 명하시어 온 세상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 하였다.
[8]《좌전》에 초 영왕·채후·진후·정백·허남·회이 등이 신(申)에서 회동했다고 하였다.
校 勘 記(교감기)1
1.《규원사화》현존 판본
1) 원본 1종
북애노인의 親筆本으로 알려진《규원사화》는 국립중앙도서관 측이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서울 시내의 한 서점에서 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현금 100원에 구입한 것이다. 그 후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이 참가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乙卯, 서기 1675년)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되었다.(고평석, <한배달> 6호, 1989년.)
校勘記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貴629, 古2105-1)은 1990년에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그 원전이 처음으로 영인 출판되었고, 그 책자를 기준하여 책 제목을 제1쪽, 그리고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3쪽 26,828자(제 45쪽 闕二字 포함, 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한영본」이라 부른다.
① 소장장소: 국립중앙도서관
② 도서열람번호: 貴629(古2105-1) 1책
③ 크기: 가로(16.6㎝) x 세로(24.7㎝)
④ 국립중앙도서관 등록일자: 1946년 5월 25일
2) 필사본 계열 6종
현재 전하는《규원사화》필사본은 서기 1940년(단기 4273년, 昭和 15년) 9월에 梁柱東이 비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孫晋泰가 3본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하여 소장하고 있던 중, 고려대학교본은 서기 1976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발간한 사실이 있고, 서울대학교본은 그 후 없어졌다가 方鍾鉉이 소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다시 등사하여 동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그밖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하여 동국대학교에,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각각 소장하고 있고, 또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이크로 필름본 1개를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등 도합 6종이 현존하고 있다. 이 6종의 필사본을 비교 대조하여 보면 동국대학교본에서는 '啓發'을 '啓達'로, 고려대학교본에는 '壬儉'을 '王儉' 등으로 잘못 필사한 흔적이 간혹 발견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이상시,《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p.248, 고려원 1990년.)
필사본 가운데 양주동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소장된 판본 가운데 하나가 서희건 著 고려원 발간의《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제2권의 부록으로 영인 수록되어 있으며, 책 제목을 제1쪽,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8쪽 26,357자(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손필본」이라 부른다.
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1) - 도서열람번호 2121.3 1책
②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2) - 도서열람번호 2105.1 1책
③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3) - 마이크로 필름본
④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한 것
⑤ 서울대학교 도사관 소장본 - 方鍾鉉 소장본을 등사한 것
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본 -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한 것
2.《규원사화》번역 주해서 출판 현황
1) 申學均 번역 주해본
① 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규원사화》
② 번역주해: 신학균
③ 출판: 단기 4301년(서기 1968년) 3월, 大東文化社
④ 역자소개: 본적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 1967년 4월부터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번역주해본 열람번호: 2105-81-0.2
2) 高東永 번역 주해본
① 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규원사화》외
② 번역주해: 고동영
③ 출판: 1986년 도서출판 자유문고에 의해 초판 발행, 이후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96년 현재 3판까지 발행.
④ 역자소개:《송천가》.《부싯돌》.《단군조선 47대사》.《한국상고무예사》등의 저서와《단기고사》.《신단민사》등의 번역서가 있다.
3. 한영본의 북애노인 친필 여부에 관한 고찰
한영본의 원문은 총 26,828자이며 손필본은 총 26,357자로서, 두 판본간에 471자의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손필본에는 있으나 한영본에는 없는 글자가 衍字를 포함하여 모두 27자인데, 일부 글자는 원본에 없던 것이 필사본으로 옮겨지며 필사자에 의해 내용이 보충되면서 첨가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보인다.
먼저 태시기의 말미의 해당 문장을 판본별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본]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 □□□□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손필본]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즉, 손필본의 '遷徙往來 號令天下' 8자가 한영본에는 빠져있다. 필사본에 있는 문구가 정작 원본에 없을 수는 없으며, 더욱이 손필본은 한영본과 비교해 보아도 무려 500여 자를 빼먹는 등 필사할 때 다소 소홀한 흔적이 역력한데, 한 두 글자의 助詞도 아닌 본문 8자를 보충하여 첨가하였을 리가 없다. 문맥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宅於淮岱'에서 문장이 일단락됨에 무리가 없는데, 그 부분이 조심성 없는 필사자의 눈에 띄어서 없던 내용이 8자나 보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영본을 친필 원본으로 가정한 뒤, 그 후에 내용이 보충된 원본의 재판본이 나왔으며, 손필본은 그 재판본을 저본으로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한영본 자체가 필사된 판본일 것이라는 여러 흔적으로 인해 더욱 희박해진다.
한영본과 손필본을 상호 교감하여 볼 때, 비록 손필본의 것을 버리고 한영본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려 30곳 정도가 된다. 물론 교감의 내용에 따라 그 숫자에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영본의 것을 버리고 손필본의 것을 취할 경우가 대부분 문맥의 내용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글자의 순서가 바뀌는, 즉 필사자들이 필사하며 흔히 행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한영본] 古有淸平山人 李茗高者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X)
[손필본]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O)
[한영본]《史記》.《漢書》通及典, 皆有王險城字, (X)
[손필본]《史記》.《漢書》及《通典》, 皆有王險城字, (O)
[한영본]《北史·勿吉傳》曰亦: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X)
[손필본]《北史·勿吉傳》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O)
[한영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白頭於山, (X)
[손필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於白頭山, (O)
[한영본]《孟子》舜曰生諸馮, 東夷之人也.」 (X)
[손필본]《孟子》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 (O)
[한영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之名, 必表以佛家名字, (X)
[손필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O)
[한영본] 夫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 (X)
[손필본] 夫南方之濕熱, 北方之燥寒, (O)
[한영본] 立業垂憲未嘗有差, 末流而之弊猶然如此. (X)
[손필본] 立業垂憲未嘗有差, 而末流之弊猶然如此. (O)
[한영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敎始成, (X)
[손필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而政敎始成, (O)
주로 助詞의 순서가 바뀐 이러한 실수는 전체적인 내용을 머리에 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행해진 실수로 보기는 힘들다. 그 가운데 한영본에서 「史記漢書通及典」의 '書'와 '通' 사이 및 「孟子舜曰生諸馮」의 '子'와 '舜' 사이 등, 글자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지는 문장마다 붓으로 그린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옮겨 적다가 글자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듯 하니, 즉 '及'자는 '書'와 '通' 사이에 와야하며, '曰'자는 '子'와 '舜' 사이에 와야함을 표시한 듯하다.
또한 한영본의 원문은 줄이 쳐진 빈책(空冊)에 붓으로 직접 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전체에서 16자 정도가 이미 쓰여진 글자 사이에 덧붙여 적어넣은 작은 글자이다. 그 가운데 몇몇 助詞는 글을 적다가 흘렸기에 다시 적었다고 볼 수 있지만, '閉'·'里'·'惑'·'侯' 등의 글자는 문맥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글자들로서 내용을 재검토하며 보충하여 넣은 조사와는 성격이 틀리는 글자들이다.
[閉]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축
[里] 上有九萬里者
[惑]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侯]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그리고 군데군데 틀렸다고 생각되어(실제로 몇 군데는 교감상 틀린 곳으로 밝혀졌다) 일정한 표시를 한 부분 가운데 「人事則軀殼」의 '事'(교감상 '死'의 오자이다)는 글자 전체를 붓으로 둥글게 덧칠하여 글자가 틀렸음을, 즉 잘못 옮겨 적었음을 나타낸 듯하다. 글자를 옮겨 적는 필사자의 입장이 아닌, 내용을 옮겨적는 저자의 입장이라면 문맥의 내용상 '人死'가 분명한 곳에서 '人事'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이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 원본이 아님과 더불어, 손필본 계열 필사본의 저본이 된 양주동 소장본은 한영본이 아닌 제3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되거나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영본에 없는 글자를 손필본에서 모두 27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한영본에서 순서를 바꿔 쓴 것이 손필본에는 바르게 되어 있으며, 또한 몇몇 글자는 문맥의 내용에 있어 오히려 손필본이 한영본의 내용상 결점을 보완해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한영본: 敎]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特盛, 自能聞風驚奇. (X)
[손필본: 交]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交特盛, 自能聞風驚奇. (O)
[한영본: 事] 人事則軀殼厥冷, 骨肉梗固 (X)
[손필본: 死] 人死則軀殼厥冷, 骨肉梗固 (O)
[한영본: 民] 曾無一人, 民於南方而制天下者 (X)
[손필본: 起] 曾無一人, 起於南方而制天下者 (O)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살펴볼 때, 비록 한영본이 그 紙質 등으로 보아서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 원본이거나 또는 양주동 소장본의 필사 저본이 된 판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한뿌리사의 한영본 영인 발문에서 밝혔듯이, 서지학자이자 국립도서관에서 고서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장지연씨가 종이의 질과 글씨 및 제호를 표지에 바로 쓴 것 등으로 미루어 한영본은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임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지학 측면에서 한영본의 작성 연대를 추증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서지학상의 검토에 의해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결과만을 가지고 이 판본이 바로 저자인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본일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단지 추측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하나의 책이 眞書냐 혹은 僞書냐를 판단하거나 원본 여부 등을 가늠함에 있어서 어느 한 측면, 즉 문헌학이나 문자학 또는 서지학 등의 여러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결과를 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와 더불어 어느 한 측면의 연구성과 만을 가지고 전체의 결과를 논하거나 관련성이 없는 여타 분야의 결과까지 추론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한영본의 친필본 여부를 검토함에 있어서는 한영본과 손필본의 두 판본만을 문자 교감의 방법을 통해 異字와 有無字 및 脫誤字를 비교하여 먼저 교감표를 작성하고, 그 교감표를 바탕으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는 단순한 방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과는《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논거 가운데에서도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인지 여부의 판단에 대한 참고 자료라는 아주 제한된 분야에 참고될 수 있는 자료가 될 뿐이다.
본문에서는 몇몇 내용을 지적하며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니라 친필 원본이나 또는 그 후의 원본을 필사한 또 다른 필사본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이 아닐 것이라든가, 혹은《규원사화》자체가 조선 말기에 위작된 위서일 것이라는 논거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서지학상으로 한영본이 紙質 등의 상태를 보아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임이 분명하다는 가정 아래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님을 확인하는 본 교감의 결과가 결합된다면《규원사화》의 원 저작 연대가 적어도 한영본의 紙質로서 확인되는 연대보다는 오래되었음이 확인될 수 있으며, 아울러 한영본은 원본의 저작 이후에 손필본 계열과는 다른 시기에 쓰여진 또 다른 필사본임이 인정되어 다양한 필사 판본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규원사화》자체가 僞書가 아닌 眞書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영본의 발견으로《규원사화》가 조선 말기에 단순히 위작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는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더 나아가 정확한 저작 연도에 대해서는 문헌 및 문자 측면의 고증을 통하여 보다 엄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한 종합적인 고증에 의해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규원사화》를 僞書나 改撰書 혹은 眞書일 것이라는 어느 하나의 단정은 금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