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19
[將軍들의 전쟁] #19. “저놈들 다 끌어내라” 국정원 요원들 개처럼 끌려나가 | ||||||||||||||||||
합참, 연평도 해전 복수 위해 거짓 보고…노무현 대통령, 진상조사 지시 | ||||||||||||||||||
| ||||||||||||||||||
2004년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이 과연 도발하고 전쟁을 지속시킬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자문을 구했다. 이에 NSC 서주석 실장은 국방연구원(KIDA) 황동준 원장(예비역 육군 대령)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이 연구는 ‘과연 우리가 북한의 위협을 얼마나 객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국방연구원은 미국에서 도입한 워게임 모델(M&S: Modeling&Simulation)을 활용해 남북한 군사력을 측정했는데, 육군은 북한 대비 열세, 해군과 공군은 대등하거나 우세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 자기 군의 예산이 삭감될 것을 우려한 각 군이 NSC와 국방연구원에 각기 사람을 보내 “우리가 열세인 것으로 해달라”는 로비를 집요하게 해온 결과였다.
“국방부 요구대로 데이터 바꿔라” 이 연구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된 때는 2004년 5월이었다. 아무래도 청와대의 ‘주문 생산’에 의한 연구이다 보니 국방부와 합참은 이 연구를 못마땅해했다.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 연구에 국방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황 원장은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참석한 토론회를 열었다. 합참의 영관급 장교들이 나서서 국방연구원 연구원들에게 “우리가 제시한 데이터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서주석 실장은 토론의 방향이 국방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공격하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대해 경악했다. 황동준 원장은 갑자기 자신이 공격받는 것에 놀라서 다소 반항적인 어조로 조 장관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연구원이 잘못된 연구를 했단 말입니까?” 조 장관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연구를 해서 공연히 시끄럽게 만드나? 국방연구원이 그런 곳인가?”
7월에 열린 NSC 상임위원회와 그 후에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안보 위협에 대한 객관성 있는 평가와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무엇인지를 참석자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문제가 왜 중요한가’라는 참석자들의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너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더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유사한 또 하나의 심각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2002년의 제2 연평해전 이후 2함대에 서해는 가히 전쟁터였다. 국방부와 해군으로선 NSC 사무처가 NLL에서 남북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적어도 2함대는 2002년 패전을 갚아주고자 하는 복수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은 2004년 7월14일에 일어났다. 이날 오후 4시47분, 연평도 서방 15마일 해상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단속하던 북한 경비정이 NLL 남방 0.7마일까지 침범했다가 우리 해군 함정의 함포 경고사격을 받고 7분 만에 퇴각했다. 한 달여 전인 6월3일 개최된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남북 함대 간 핫라인 개통을 합의하고 뒤이어 12일에 장성급 회담 1차 실무 접촉에서 서해에서의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국제상선공통망(공동주파수) 운영에 합의했으며, 14일에는 남북 해군 함정이 서해 NLL 부근에서 첫 무선 교신에 성공함으로써 15일부터 핫라인이 공식 개설되었다. 또한 6월29일에도 2차 실무 접촉이 이뤄져 군사분계선(MDL) 선전물을 단계적으로 철거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등 남북 간에 군사 협력이 발 빠르게 진행되던 와중에 우리 함정이 북한에 포를 발사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남북 함정 간 교신이 없었느냐에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합참은 “6월에 개통된 핫라인을 통해 네 차례 경고 방송을 했는데도 북측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며 “그 때문에 경고용 함포 두 발을 발사해 내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합참과 2함대의 조직적인 반발 이에 주요 언론은 북한이 NLL 수호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해를 침범했을 가능성까지 추측하는 보도를 내보내며, 곧이어 개최될 3차 실무 접촉에서 우리 측이 북에 강력히 항의할 것이라는 합참의 입장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튿날인 7월15일 북측이 “중국 어선이 넘어갔다는 내용으로 남측을 호출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의 항의성 전화통지문을 보내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NSC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은 국가정보원을 통해 북측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군이 고의로 교신 사실을 은폐하고 허위 발표를 한 것을 확인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허위보고를 한 경위에 대해 진상조사를 할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도 합참이 잘못 발표한 사실을 시인하며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수모를 겪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함정의 발포를 승인한 합참까지 조사 선상에 올랐다. 당연히 합참과 2함대는 조사에 조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합참은 해군의 경고사격이 있기 이전인 4시50분쯤 청와대 NSC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청와대 승인을 받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합참의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지켜본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경악했다. 분명 보고를 받은 시각은 이미 사격이 끝나고 북한 함정이 퇴각하던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나 이를 규명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차례 통화 가운데 어느 것이 합참의 상황보고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논란이 지속되던 7월17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합참에서 상황을 보고받는 위기관리센터의 한 중령은 3교대로 돌아가는 상황실 근무의 휴무여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사할 것이 있다”는 기무사 요원의 연락을 받고 불려갔다. 기무사에 가보니 합참 지휘통제실 요원 장교 9명이 “4시50분에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적힌 서류가 놓여 있었다. 기무사는 이 진술서를 근거로 위기관리센터의 중령을 “4시50분에 보고받고도 5시 이후에 보고받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심지어 그 중령을 ‘시간도 기억 못하는 멍청한 놈’ 또는 정신병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위기관리센터장 류희인 공군 준장은 기무사의 전날 사건을 보고받고 격분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기무사가 자신의 부하를 데려가 고강도로 조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명 군부의 심상치 않은 조짐은 청와대에 대한 조직적인 항명처럼 보였다. 합참의 거짓말을 밝혀낼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류 센터장은 우연히 청와대 경호실의 통신 담당 요원과 같이 청와대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교신 내용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류 센터장에게 경호실 요원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위기관리센터의 교신일지와 합참 청사의 전화 단자판을 뜯어서 그 기록을 비교하는 방법 등이었다. 즉시 NSC에서는 이 문제를 국정원과 협의해 작전을 짰다.
국정원 요원 2명을 업체 기술요원으로 위장시켜 비밀 조사단을 편성한 후 합참에 투입했다. 합참과 위기관리센터를 연결하는 핫라인의 단자판을 열어 실제 교신 시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 단자판을 여는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헌병들이 국정원 요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헌병을 지휘하는 한 간부가 “저놈들 다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측과 이를 덮으려는 측 간에 막말과 고성이 오가며 승강이가 벌어졌다. 국정원 요원들이 헌병에 의해 개처럼 끌려나갔다. 보고가 15분 전이냐, 후냐를 두고 청와대와 합참 간에 필사적인 진실게임이 물리적 충돌로 번지는 사태가 초래된 것이다. 이 소동 이후 합참의 보고는 5시 넘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소동을 겪고 조사가 완료되어서야 2함대는 “제대로 보고하면 청와대가 쏘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허위보고를 했다”고 실토했다. 이에 군에 대한 문책이 논의될 시점에 이번에는 국방부 정보본부장인 박승춘 중장(현 국가보훈처장)이 한 언론사의 국방부 출입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북한 함정 간 교신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며 군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것도 청와대로서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공식 브리핑이 아니라 특정 언론을 선택해 중요한 정보가 보도되도록 한 것은 노골적인 불만의 표출이었다.
당시 국방부 정보본부는 박 중장 부임 이전에 임기를 제대로 마친 본부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혼란과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본부장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일어난 박 본부장의 ‘거사’에는 즉각 청와대의 응징이 이어졌다. 길게 갈 것도 없이 7월에 박 본부장은 불명예 전역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시기에는 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군의 정책과 정보라는 핵심 분야에서 사사건건 청와대와 충돌했다. 군이 보기에 청와대는 현행 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등 부당한 간섭을 자행하는 권력이었고, 청와대가 보기에는 군이 입만 열면 서슴지 않고 국민과 대통령을 기망하는 거짓말쟁이였다.
결국 한반도에서 남북 관계의 발전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군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러나 군은 국가안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내세워 정치권력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이런 정치와 군사에서의 갈등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독특한 현상도 아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터키에 주둔하는 미군 사령관이 공격을 받을 경우 대통령의 승인 없이도 소련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긴급방위계획(EDP: Emergency Defense Plan)’이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위기가 지나가고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전략공군사령부(SAC)의 토마스 파워 장군으로부터 소련과의 핵전쟁 계획에 대해 보고받았다. 어떠한 중간 단계도 없이 첫 번째 핵 공격으로 중국과 소련의 대도시 인구 1억명 이상이 살상되는 엄청난 규모의 핵 준비 태세였다. 이에 대통령이 계획의 무모함을 지적하자 파워 장군은 이렇게 대꾸했다. “대통령 각하,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서 소련에서 1명 살아남고 미국에서 2명이 살아남는다면 미국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에 케네디는 좌절했다. 20만의 병력과 수천 개의 핵미사일을 보유한 전략공군사령부는 케네디가 보기에는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괴물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인류의 종말도 불사할 것 같은 냉전의 전사들이었다. 이듬해인 1963년 케네디는 유엔총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인류가 전쟁을 끝장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장낼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연설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핵무기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그해 10월에 케네디는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에 착수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 직후 암살당했다. 미국 군부에 케네디는 동지라기보다 적에 가까웠다.
분명히 군이라는 조직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안보의 ‘대리인(agent)’이라기보다 정치 지도자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가공할 ‘권력(power)’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위계질서, 문화를 완강하게 고수하며 쉽게 말이 통하지 않는 곤란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진보 성향의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기 때문에 청와대와 군 간에 이런 불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도 그 못지않은 갈등은 무수히 반복된다. 오히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겪은 이명박 정부에서 군에 대한 불신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이건 미국이건 정치와 군의 관계는 정치권력이 보수냐, 진보냐를 뛰어넘는 숙명적인 그 무엇으로 얽히고 충돌하는 관계였다. 당시 노무현은 서서히 케네디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예 미국에 가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책을 명확히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한·미 간에도 매우 어려운 시기가 닥치고 있었다. |
[將軍들의 전쟁] #19. “최고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궁색한 편지나 써서야…” | ||||||||||||||||||
노 대통령-이상희 합참의장, 국군의 날 행사장서 정면충돌… 이 의장 사과 편지에 윤광웅 장관 역정 | ||||||||||||||||||
| ||||||||||||||||||
국군 기무사령부나 국가정보원이 청와대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동향’ ‘관찰’ ‘수집’과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바로 정보기관의 속성이 담겨 있다. 무슨 동향을 관찰하고 수집한다는 말일까. 정보기관 사람들 하면 검은색 선글라스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 선글라스는 눈동자의 방향, 즉 시선을 감춰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왠지 주눅이 든다. 그 시선으로 뭘 보고 있다면 대체로 군 장교단이 관찰의 대상이 될 터인데, 여기서 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군심(軍心)’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은 군 장교단의 여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이 말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국군통수권자가 바로 대통령 자신인데, 대통령의 국방정책에 대한 ‘군 장교단의 여론은 어떠하다’는 식의 보고서는 대통령에 대한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할 말이 있으면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직접 하면 그만이지, 정보기관이 끼어들어 군심이라는 용어로 뭘 전달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런 보고서가 2005년부터 무수히 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당시는 본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권 전환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2006년이 되자 청와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과 예비역 장성들은 한국 안보의 기축이 붕괴되는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며 반대 의지를 확산시켜나갔다. 노 대통령은 그해 8월9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일부 보수 언론에 대해 “안보 장사 시대에 성공한 일부 신문들이 국민의 눈과 귀를 오도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한·미 간에) 자연스러운 협상 과정을 갈등이라고 계속 부풀리고 정치적 공격 자료로, 심지어 (내가 부시 대통령과) 전화한 지 몇 달 됐느냐고 한다. 유치하게 하지 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에 비위가 상한 예비역들은 군 서열 1위인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전작권 전환이 불가한 이유를 대통령에게 제대로 직언했느냐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의장은 “전작권 전환에 협조하면 국방비가 많이 확보된다”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했다.
8월15일 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신념을 재차 밝혔다. 이날 전작권에 대한 대통령의 16번째 공식 발언이 나왔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국군통수권에 관한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또한 달라진 우리 군의 위상에 걸맞은 일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준비하고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체계적으로 추진해온 일입니다. 확고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고, 미국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군의 역량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이었다. 미국은 2009년까지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우리의 준비 정도를 고려할 때 너무 촉박했다. 이상희 합참의장은 “2009년 전작권 환수는 한국군 준비 상황으로 볼 때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담은 편지를 작성해 미국 국방부에 발송했다.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나오던 때와 거의 동시에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답장을 피네건 한국과장이 갖고 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자꾸 자체 준비 부족을 이유로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작권이 전환되더라도 전쟁이 나면 한국 홀로 북한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의 취약한 전력을 보완하게 되면 얼마든지 대비가 가능하다. 그런데 마치 한국은 혼자 싸우는 것처럼 인식하고 단독 방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정대로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완료하고자 한다.”
미국은 전작권이 한국으로 전환되더라도 이미 예정된 주한미군 감축 외에 추가 감축은 없으며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은 준수되기 때문에 조기 이양하겠다고 압박해왔다. 9월1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는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군사적 문제로 접근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정치적 논란을 피해 조속히 전작권을 이양하겠다는 미국의 의도에 노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이 무렵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전작권 전환에 반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가장 큰 맹점은 “한국이 자주국방을 주장하지만 않으면 미국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언제까지나 미국은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작권이 거론되기 이전에 이미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했고, 자체 필요에 따라 변화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혈맹이라는 미국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보수층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모양새를 보이자 미국 국방부는 짜증을 냈다. 전작권 문제가 정치쟁점화하면서 이상희 합참의장은 더욱더 궁색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는 계룡대. 대통령 내외, 윤광웅 국방부장관과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 참모총장, 남해일 해군 참모총장, 이한호 공군 참모총장이 기념식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과를 먹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다시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질문했다. “군은 2012년까지 전작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습니까?” 한 달 전쯤 청와대 회의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세 번 받고도 대답을 안 했던 이 의장이었다. 마지막엔 노 대통령이 역정까지 냈으나 끝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이 의장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열심히 하고는 있으나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대답에 이어 이상희 합참의장이 계속 “어렵다”고 주장하는데, 그 태도가 무엇이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무엇이 부족하고 등을 죽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 의장은 이미 8월부터 전군 순회강연을 하면서 ‘2012년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전파했고, 합참에는 이를 전담하는 TF(태스크포스) 팀까지 구성한 상황이었다. 합참이 2009년이 어렵다고 해서 2012년에는 가능한 것으로 노 대통령이 양보한 것인데, 또 어렵다고 하는 합참의장의 말을 듣는 순간 노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지며 실망과 분노 같은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통령과 군 수뇌부 사이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날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들어온 윤 장관의 표정도 밝지 못했다. 안색을 살피던 정태용 정책보좌관이 장관에게 다가가 “장관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윤 장관이 한숨을 쉬면서 “합참의장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탄식을 했다. 아마도 윤 장관은 이 의장이 군 수뇌부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전작권 전환을 반대하는 걸 과시하는 정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라크 문제에 쏠린 럼스펠드의 파격적 양보 10월20일의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를 엿새 앞둔 2006년 10월14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는 안보 관계 장관 간담회가 열렸다. SCM을 앞두고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의 2012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의 요구대로 2009년에 전작권을 가져오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대책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이상희 의장이 노 대통령에게 “이것을 좀 읽어주십시오”라며 문제의 편지를 건넸다. 분명히 직접 말로 하라고 했는데 무슨 편지를 건네는 걸 보고 윤 장관은 크게 놀랐다.
2006년 10월19일, 백악관 바로 옆 건물 옥상에서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윤광웅 국방부장관 일행을 환영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 주최의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럼스펠드는 약속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타났다. 럼스펠드는 프랑스 국방장관 미셀 알리오 마리와 얘기가 길어졌다고 해명했다. 기분이 좋아진 럼스펠드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미니스터리 윤, 전작권 전환? 그것 한 5, 6년이면 되는 것 아니오?” 윤 장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연하죠. 그래서 2012년에 전환하자는 것 아닙니까?”
한·미 실무진 간에 환수 시기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럼스펠드는 거의 이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라크 상황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서 있던 롤리스 부차관보의 표정이 못마땅한 듯이 일그러졌다. 이날 낮에 롤리스는 한국 측에 “전작권 전환은 2011년 10월15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롤리스 입장에서는 럼스펠드 장관이 협상의 마지막 카드를 다 내보인 것 같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롤리스가 알아서 하겠지.’ 럼스펠드는 금방 이라크 문제로 마음을 돌려버렸다. 원래 술을 한 잔도 못하는 럼스펠드는 서둘러 행사를 마무리했다. 윤 장관은 이제껏 강경하던 미국의 태도가 한국에 협력적인 분위기로 누그러진 데 대해 적잖이 놀랐다. 리셉션을 끝내고 숙소인 리츠칼튼호텔로 돌아온 윤 장관은 그의 방에서 이상희 합참의장, 정태용 정책보좌관, 권안도 국방부 정책실장, 김규현 국제협력관,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인 송영무 해군 제독, 합참 작전부장인 안기석 해군 제독 등 핵심 참모들과 함께 다음 날 SCM 본회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장소에서는 한·미 전략 실무자들이 다음 날로 예정된 SCM 본회의에서 전작권 전환 시기를 합의하기 위한 조인트 커뮤니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김규현 국제협력관이 무언가 전갈을 받더니 숨 넘어가는 소리로 윤 장관에게 보고했다. “롤리스 차관보가 2011년 12월31일로 하자고 합니다.”
미국과 협상 결렬 예상하고 특별선언 준비 마침내 10월20일 제38차 SCM 본회의 당일이 되었다. 한국 일행은 펜타곤 앞에서 의장 환영 행사를 했다. 이어 30분간의 양국 장관 단독 회담. 그리고 곧바로 SCM 본회의가 열렸다. 럼스펠드 장관은 재차 전작권이 한국에 조기 이전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취약한 전력은 미국이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이를 ‘연계전력(bridging capability)’이라고 표현했다. 연계전력은 전시작전권이 전환된 이후에도 한국이 당분간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전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윤 장관은 우리의 자주국방 계획과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 추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작권 이양은 최소한 2012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서 두 장관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는 벌써 일곱 시간째. 럼스펠드 옆에 롤리스 부차관보가 앉아 있고 바로 그 맞은편에 권안도 정책실장이 앉아 있었다. 며칠 전부터 사전 실무 협의를 통해 미국을 계속 압박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의외로 강경하던 미국 측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두 장관이 회의를 하는 동안 롤리스와 권안도 실장의 설전이 계속되었다.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계속되는 동안 계속 롤리스가 쪽지에 무엇인가 적어 권 실장에게 건네주었다. “2012년 1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또 이를 반박했다. “설날에 무슨? 안 돼.” 또 쪽지가 날아왔다. “2012년 3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3·1절이야. 안 돼.” 롤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1절이 뭐야? 왜 안 돼?” 그러자 권 실장, “한국이 자주독립한 날 아니야? 휴일이라 안 돼.” 쪽지는 거기서 멈추고 롤리스가 호통을 치듯이 말했다. “자주독립을 한 날이니까 전작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 아니야?”
회담 중이던 두 장관도 흠칫 놀라 각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실무자들끼리 얘기하도록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두 장관은 일어나 펜타곤을 떠났다. 결국 이날 ‘2012년 3월15일’로 전작권 전환 일자가 합의되었다. 이날 밤 9시에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한편 청와대는 SCM에서 합의가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노 대통령과 송민순 안보실장 등 관련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가 한국 시간으로는 10월21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작권 전환 시기는 한국의 입장대로 2012년 3월15일로 합의를 이루었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재가했다. 훗날 윤 장관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윤 장관의 이러한 보고가 없었다면 노 대통령은 “2009년에 전작권을 환수하겠다”고 자신이 직접 발표할 작정이었다. 청와대의 대책회의는 바로 이 특별선언을 하기 위한 회의였던 셈이다.
이로써 1991년 10월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에서 전시와 평시 작전통제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이래 16년간의 긴 여정이 일단락되었다. 이 합의 이후 보수 정권은 대미 외교에서 어떻게든 이 합의를 수정해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자 한때 전작권 전환의 주역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의 김장수 국방부장관, 이상희·김관진 합참의장 등은 일제히 전작권 전환 반대론자로 말을 바꿔 탔다. 그 천연덕스러운 입장 변화는 한때 그들의 협상 상대였던 미국 국방부마저 놀라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