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修眞求要

醉月 2011. 8. 18. 00:11
修眞求要(수진구요)해석
棲雲山 素樸散人 悟元子 劉一明 著 門人 張陽全 後學

 

勘破世事 第一要
오호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꿈 같고
幻想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나니
百年 歲月이 瞬息間일 뿐이니
無常하기 짝이 없다.
비록 金光과 銀山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팔아서
性命을 살수는 없을 것이며
孝子 賢孫이 있다 하나
疾病과 걱정을 덜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서둘러 修鍊하여 닦지 않는다면
臨終할 때에
손은 바쁘고 발은 어지러워
허둥댐을 면할 수 없다.
閻王과 老者는
情에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한없는 세월을
다시 태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道에 뜻을 둔 자
모름지기 입을 굳게 다물고
급히 修鍊하여야
바야흐로 큰길로 通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즉
티끌 같은 世上의 因緣을 끊지 못하고
妄靈 되게 道를 이루는
幻想을 갖게 되니
비록 몸은 이미 出家하였으되
마음은 아직도 出家하지 못한 것이 한 되어
一擧手一投足이
世上에 있을 때의 工夫와 다름이 없고
한번 행하고 그침이
모두 人情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道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道를 듣지도 못하게 되니
어찌 出家를 貴하다 할 것인가?
例로부터 無數한 學人들이
모두 이와 같이 踏襲하니
道를 배우는 자는
소의 털과 같이 많으나
道를 이루는 자는 기린의 뿔과 같이 적다.
悟眞편에 이르기를
金을 쌓기를 山같이 하였더라도
때맞춰 장사꾼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였고
了道歌에 이르기를
먼저 세상일을 가지고 가지런히 하고
초탈한 후에
道理를 잡고
세밀히 精을 硏磨하였으니
이 말은 세상일은 모두 거짓이고
性命이 最高로 眞實하다는 뜻이다.

그 참됨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거짓됨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번
그 거짓된 것을 認識하게 되면
마음이 거짓 現象을 따르게 되어
모든 것이 거짓 되게 일어나게 되니
道와는 날로 거리가 멀어진다.
이에 스스로
性命을 아끼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
虛妄한 것에 매달려 實답지 못하니
虛送歲月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무슨 利益이 있겠는가?
옛날에 呂祖께서는
한번 꿈으로 인하여
모든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며
馬祖는 죽음을 깨달음으로써
도를 이룸이 가장 빠르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먼저 世上의 일을 看破한 후에
道를 닦음이
일반인들의 修眞보다 더욱 쉽고
빠르다 할 수 있겠다.
하물며 出家修行은
世上일을 看破한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루는 것인데
만약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고
抑止로 出家한다면
有名無實하여
하늘에 오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땅에 떨어진 셈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敗亡케 되니
어찌 그릇 되게
心氣만 虛費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學人에게 바라는 것은
在家나 出家를 논하지 말고
眞實로 우리에게
懇切한 大事가 무엇인가를 分別하려면
먼저 世上일을 겪고
깊이 探究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일 저일 을 探究하다 보면
結局 모든 것이 虛妄함을 알게 되어
世上일에 貪着 을 끓게 된다.
性命의 일은 眞實로 큰 것이니
이를 따라 몸을 다스리고
바깥의 虛妄한 일을 지워 버려야 할 것이며
實智를 몸소 밟고 스승을 찾고
道友를 訪問하여
勇猛 前進하여 道를 爲하여 몸을 잊는다면
自然 한결 같은 精誠이
하늘에 通하게 되리니
祖師가 暗中에서 이끌고
眞人의 引渡함이 있게 될 것이다.

積德修行 第二要
悟眞편에 이르기를
만약 修行에 陰德을 쌓음이 없다면
動함에 여러 마구니들의 毁謗이 있게 되니
可히 修行함에
德을 쌓음이
修道者의 重要한 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만일 德을 떠나서
따로 道를 말한다면
이는 異端의 私設이나
房門 外道가 되는 것이니
實際와는 差異가 많다.
그러므로 옛 聖人들은
반드시 먼저 道를 밝히었고
옛 賢人들은 반드시 먼저 德을 쌓았다.
道를 밝히지 아니하고도
능히 聖人을 이룬 사람은
있지 아니하며
德을 쌓지 아니하고도
능히 賢人이 된 자도 없었다.
그러므로 聖人이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賢人이 되어야 하고
道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德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道와 德을 함께 하고
內外가 고르게 되어야
聖賢의 學業을 얻게 되리라.
道는 나를 위한 일이며
德은 남을 위하는 일이다.
비록 道를 닦음은
끝이 있을지라도
德을 쌓음에는 끝이 없다
.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仙, 佛, 神, 聖께서
道를 이루신 후에도
오히려 반드시
和光同塵하고
積功累行하여
三千功이 가득 차고
八百行이 完全해지기를 기다려
바야흐로 하늘의 詔勅(조칙)을 받는 것이다.
하물며
金丹의 大道는
鬼神이 꺼리는 것이어서
大忠 大孝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알 수가 없고
大賢大德한 사람이 아니면
勘히 함부로 전하여서도 아니 된다.
抑止로 전하여 露出시키는 것은
鬼神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暗中에 災殃을 내리고
그 壽命을 短縮시키니
한결같이 利益 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害가 된다.

내가 鑑谷 老人의 仙法을 얻고
大公으로 書의 뜻을 품고
每樣 뜻 있는 사람을 보면
聞得 이끌어 주고 싶어
或 물어보거나
簡略히 한 자락을 보여 주었다.

後에 그들을 살펴보니
自慢 自足하여
能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게을러져
뜻과 氣를 다 잃고
貪내고 煩惱함이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 심하였다.

앞뒤의 몇 사람이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아, 슬프다!

이러한 무리는
반드시 先祖의 德이 없고
스스로의 行마저 쌓음이 없어
처음에는 부지런하나
나중에는 게을러
眞宗을 滿悔하지 못함이니라.
내가 조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失言하여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였으니
또한 여러 차례 魔障을 만났으나
크게 얽히지 않아서
寶胚로움을 잃지 않은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그 후부터는
입을 굳게 닫고
함부로 法을 露出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資質과 德을 갖춘 자를 기다려
法을 傳하기 爲함이었다.
세상의 學人들은
門戶에 들기만 하면
곧 神仙이 쉽게 되는 줄로 생각하여
동네방네 다 속이고 다니면서
삼갈 줄을 알지 못한다.
또한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이
모두 온 세상 사람들의
피와 땀이며
한번 마시고
한번 먹는 것이
모두 衆生의
手苦로움이란 것을 생각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口頭禪으로
사람들의 人氣를 모으고
혹은 거짓 道法으로
사람들의 財物을 모으며
혹은 黃白術로써
속임수를 쓰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計巧를 꾸미니
冊으로 다 列擧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후일 이러한 거짓이 쌓여
가득 차면 어떻게 勘當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두 뿔이 或은 있다 하고
或은 없다 하며
그 끝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달라진다 하니
이러한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모름지기
이 道에 뜻을 둔 자는
반드시 德行을 重히 여기고
스스로 節操를 세워서
진흙탕 같은 곳에서
조그만 利益을 얻고자
다투는 것으로 앞길을
망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德이라 하는가?
노인과 家難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救濟하고
孤兒와 寡婦를 可엾게 여겨
藥과 茶를 待接하며
다리와 길을 保守하고
危殆롭고 困境에 處한 이를
도우며 義理를 重히 여기고
財物을 가볍게 여기어
널리 方便을 行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行이라 하는가?
자신이 힘들더라도
남을 利益되게 하며
世上의 手苦로움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德을 베풀되
갚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怨望이 있으되
怨讐를 맺지 아니하며
功이 있으되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옳음을 보면 반드시 하는 것이다.
能히 德을 쌓고 行實을 세워
오래도록 힘을 다하면
마침내 鬼神이
德에 服從하며
稟性이 世俗을 超脫하여
當當하게 될 것이니
高人이 한번 보면
곧바로 點찍어
弟子로 삼을 것이니
大道를 가히 바라볼 만하다.
그렇지 아니한즉
한가지 德과 行實도
쌓지 아니하고
妄寧되이
道를 이룰 것을 想像하다가
우연히 高人을 만나게 되면
그 착하지 못함을 숨기고
착한 체 하며
스스로 古人을 속였다 자랑하니
이는 남이 自身을 보기를
肝과 肺를 환히
꿰뚫듯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 다른 本分에
힘쓰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온갖 淺薄한 일을 다 行하니
아침에는 술집이요,
저녁에는 妓生집이라.
입으로는 道德을 말하나
속마음은 盜賊이다.
남에게 損害를 입히더라도
自身을 利롭게 하는 데에
천가지 奇異함과
백가지 怪異한 일을
다 꾸미고도
스스로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한다.
이에 끝내는
自身을 怨望하게 되어
福과 祿이 다 없어진다.
丹經을 毁損하고
다 미친 말이라 誹謗하니
참으로 地獄의 種子다.
이러한 사람들은
異端의 무리에 입문하여
사람이 되기를 求하나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勘히 神仙을
바랄 수 있겠는가?
오호라,
德은 자기가 세상을 사는 일이요,
道는 스승이 傳하여
神仙을 이루는 일이니
德을 쌓지 못하고서
道를 닦고자 한다면
사람의 일도
능히 이루지 못함인데
仙道를 어찌 이룰 것인가?
再三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盡心窮理 第三要

說卦傳에 말하기를
窮理盡性 以至於命
(이치를 窮究하여
性을 다함으로써
命에 이르른다)라 하였으니
가히 盡性至命의 學이
모두 理致를 窮究하여
옳고 그름을 定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理致를 窮究함이 透徹한즉
性을 能히 溫全히 할 수 있으며(性能全)
命을 能히 保全하게 되어(命能保)
곧바로
위 없는 참되고
完全한 곳에 들게 된다.
이치를 窮究함이 어지러운즉
命을 닦기 어렵고
性 또한 마치기 어렵게 되어
마침내는
늙음에 이르러
空亡에 떨어지는 後悔를 하게 된다.
오늘날 學人들이
한때의 氣分에 따라 出家하고
混濁하게 道를 工夫하여
修行 또한 葛皮를 잡지 못한다.
살아있을 때
이처럼 不分明하니
죽을 때에 어찌 밝고 맑음을
期待할 수 있겠는가?
性命이 얼마만한 일이건대
이처럼 妄靈되이 行하는가?
金丹의 道는
天地를 감싸는 道이며
天地의 造化를 움켜지는 道이다.
至極히 높고 貴하며
至極히 神秘롭고도 妙한 것이니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學人들이
自己의 性命이
어떤 物件인지도
생각지 아니하고
祖師의 法言이
어떤 뜻인지도
分別치 못하고
종일토록 먹고 마시며
마음을 쓰지 않다가
妄靈되이 한마디,
半 句節의 妙함이 떠오르면
곧 깨치고 道를 이루었다 한다.
낮에는 虛浪放蕩하고
밤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들며
단경(丹經)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고
子書는 虛風이 甚하다고
罵倒한다.
그러면서
自身에게 道가 있다고
詐稱하고
자신의 어긋남으로써
남도 어긋나게 이끌고
妄靈되이
自身이 眞法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장님이 장님을 이끌게 되니
或 한둘,
信心 있는 修師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말을 달리며
흘깃 꽃을 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깊이 마음을 쓰고
實다운 理致를
窮究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른 말이 있느니
"만약 地面 위에서
참된 뜻을 찾는다면
이는 모두 대라신선의 말이라"
하였으니
이는
특히 스승을 求하지 못하고
賁發하는 者들을 爲한 말이며
丹經과 字書가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다.
後人들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句節을 句悉로
經書를 돌보지 않으니
크게 어긋난 일이다.
무릇 仙眞의 法言은
한 글자 한 뜻이라도
勘히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한 句節마다
모두 妙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多少의 老婆心으로
後人을 위하여
階段을 만들고 敎門을 세워
놓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헐뜯고 誹謗하니
그 罪를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으랴?
뒤의 高人과 賢人들이
行하는 바를 보면
모두 古人들이 말한
凡註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옛사람들이
後世의 사람들을 잘못되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뜻있는 선비에게 勸하노니
古人의 法言을 取하여
細密히 窮究하라.
만일 그 가운데에서
스승의 한 妙訣을 얻어
앞뒤를 다 通達하여
一點의 疑惑이 없이 한다면
能히 그것을 얻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自身의 聰明함만을 믿고서
마치 自身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지 말 것이며
못된 소리를 듣고서
함부로 남에게 가서
自身을 그르치지 말라.
文字에 통하지 못한
學人이라 하더라도
日常 生活 속에
常用되는 말들을
깊이 辨別한다면
그 속에
大道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살펴보면
체면을 잊는다,
사람의 刑賞이 없어진다,
道를 窮究한다,
自在함을 좋아한다,
세 번 구르고 네 번 엎어진다,
方正함을 따라 圓滿함으로 나아간다,
기틀을 따라 變化에 應한다,
모래 속에서 金을 일어낸다,
無 가운데에서 有를 生한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산다,
나만 있고 남은 없다,
죽고 사는 것을 알지 못한다,
性命을 보지(觀) 못한다,
三家를 두루 달리는 것이
一家를 지킴만 못하다,
남에게 謙遜하면 반드시 얻음이 있다,
다만 그 하나만을 알고 둘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말들은
天氣가 크게
露出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한 두개의 일을 쓰는 곳이 없다고
버릴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아서
아침저녁으로 생각한다면
큰 理致에는 밝지 못할지라도
知識이 점점 열려
道와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니
歲月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理致를 窮究하여
배워 나가는 것은
어리석음과 賢明함을 論하지 않고
사람마다 지어 가는 것이니
能히 工夫를 거르지 않고
오래도록 한다면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된다.
다만
그 깨달음이란 것이
그 個人의 私見이므로
함부로 下手하여서는 안 된다.
眞實로 밝은 스승을 만나
반드시 시작과 마침을 澈底히 하고
그 가닥 가닥을 明白히 追咎하여
眞實로 確然히 보는 것처럼
알아서 마음으로 얻고
適切히 下手하여야
바야흐로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앞만 알고 뒤는 모르거나
뒤만 알고 앞을 모르며,
陰만 알고 陽을 알지 못하거나
陽만 알고 陰을 모르며
體만 알고 用을 모르거나
用만 알고 體를 모르며,
혹 有爲만 알고 無爲를 모르거나
無爲만 알고 有爲를 모르며,
혹 元關은 보되
藥이 生기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藥이 生김은 알되
늙고 어린 것을 分別하지 못하며,
혹 丹을 맺는 것은 보되
丹의 復息을 모르거나,
혹 胎를 맺음은 알되
脫胎를 알지 못하며
혹 文息으로 삶고 찌는 것은 알되
無息으로 鍛鍊함은 모르며,
혹 無息으로 鍛鍊함은 알되
文息으로 삶는 것은 알지 못하며,
혹 陽火는 알되 陰符는 모르며,
혹 眞火는 알되 止足을 모르며,
혹 온양은 알되 抽添은 모른다면
털끝 만한 誤差로 因하여
千里나 잃게 될 것이다.

참됨을 이루지 못함이
이것뿐만이 아니다.
陰과 陽에는 內外가 있고
五行에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다.
性命의 工夫는 兩段이니
先後二天이 各其 다르다.
참됨이 있고
거짓됨이 있으니
참된 가운데 거짓도 있고
거짓된 가운데 참됨도 있다.
또한 참된 가운데 참됨이 있고
거짓된 가운데 거짓도 있다.
이러한 等等을 꿰뚫지 못하면
닦아 행하여도 到達하지 못한다.
또한 밝게 分別치 못하면
지어도 이루지 못한다
(修之不成 作不成之).
이로써 呂祖께서도
세 차례에 걸쳐 還丹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後에
崔公의 入約經을 얻어서
비로소 功을 이루었다.
자청 또한
野밤에 風瀨의 근심이 있다가
거듭 닦아서 드디어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神仙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에 該當하지만
이렇게 밝지 못함이 있으면
오히려 뜻밖의 災難을 當함이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學人들은 마땅히 深思熟考하여야 한다.

 

訪求眞師 第四要

古仙이 이르기를
만약 스승이 사람을 가르쳐
알맞게 일러줌이 없다면
天上의 神仙이라 할지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 하였고
또 悟眞편에 이르기를
그대의 聰明과 知慧가 두터워
顔子와 민자건을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참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頭角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오직 精誠이로다.

性命의 마음이여!
반드시 스승의 傳受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妄靈되이 私事로운 見解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설도광은
頓悟圓通이 스스로 노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후에 향림을 만나
진전을 얻고서야
비로소 大道를
이룰 수 있었다.
상양자도
이미 綠督의 秘訣을 얻었으나
만족치 아니하고
精誠을 본 후에야
火逅를 갖추었다.
장삼봉도
숭산에서 10년을 苦鍊했으나
한가지도 얻음이 없다가 후에
정, 여 두 仙人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大事를 알게 되었다.
비록 世間의 작고 얄팍한 技藝라도
오히려 스승의 傳受함에
힘입거늘 하물며
性命의 大事를
어찌 스승의 가르침 없이
깨닫겠는가?
대개 性命의 道는
陰陽을 훔치고
天地의 造化를 빼앗았으며
生死를 運轉하고
기틀을 調整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는 道이다.
이 道는
鬼神도 能히 헤아릴 수 없으며
蓍草나 거북이로도
能히 占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얻는 자
聖人의 班列(반열)에 서는 것이요,
곧바로 彼岸에 오르는 것이니
이는 天下第一의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天下第一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眞實로 聖師께서
귀에 대고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유독 外道方文이
三天 六白 가지나 되며
丹法 또한 七十二品이나 되니
오히려
邪惡한 것이 바름을 해치고
가짜가 眞實을 어지럽히니
누가 눈먼 스승이고
누가 밝은 스승인지
甚히 分別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仔細히 살피면
이를 判別하는 것
또한 어렵지 만은 않으니
무릇 高人이 세상에 나옴에
스스로 命이 凡常치 아니하며
홀로 絃을 타며
여러 사람과 두루 사귀지 아니하며
세상에 阿諂하지 아니하고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며
名譽를 貪하거나
바르지 못한 財物을 貪하지 아니하며
利益을 꾀하여
사람을 속이거나
怪異한 짓을 하지 아니한다.
한마디 말이라도
世上의 道理에 利益되게 하며
한 번 行하고
한 번 그치는 것이
모두 聖人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게 하니
貪, 瞋, 恥, 愛가 모두 없고
뜻이 나를 굳세게 하여
모든 것을 淨化시키고
人品과 節操가 맑고 높아서
사람들이 能히 미치지 못하고
가슴이 열려 거리낄 것 없음을
남들이 흉내낼 수 없다.
또한 간혹 뜻 있는 사람을
이끌 때에는
그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천 번 갈고 백 번 꺾이게 하여
白玉에 하나의 티끌도 없이
한 然後에야
즐거이 그 처음과 끝을 가르쳐 주며
法을 傳할만한 사람이 아니면
絶對로 天氣를 輕率히 漏泄하지 아니한다.
이상 列擧한 것이
밝은 스승의 모습들이다.
눈 먼 스승의 경우는
實題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갖고 있는 듯이 하며
속이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듯이 한다.

自身이 어긋난 것에 대하여
깊이 生覺하지 아니하며
다시 어긋난 길로 사람을 가르친다.
혹 男女로써 陰陽을 삼고
經絡의 氣 덩어리로 서
迷眩酒를 삼으며
혹 화톳불로써
外丹을 삼고
心腎을 단련함으로써
內丹이라 하고
혹 어떤 象을 잡고서
應神이라 하고
子午를 행함으로써
抽籤(추첨)을 한다 하며
碌盧(록노)를 굴리면서
周天한다 하며
完空을 깨닫고서
無爲라 하고
運氣를 有爲라 한다.
혹 模樣을 잊음으로써
고요를 닦는다 하며
몸을 움직여 (머리) 氣를 내림으로써
退陰符를 행한다 하고
혹 硫黃을 服用함으로써
進陽火를 한다 하며
五穀을 避함으로써
長壽한다고들 한다.
이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功德을 말할 수 없고
節槪와 至調도 없다.
몸에 납의(검은 승복)를 걸치고도
허리 속에는 돈주머니를 차며
머리에는 의젓하게 簪冠(잠관)을 썼으되
마음 속은 蛇蝎(사갈)과 같다.
富貴한 것을 보면
마음을 머물되
어렵고 困難한 때를 당하면
道를 팽개친다.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으면서도
周圍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며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만 돈 있는 곳을 向하여
공부를 쓰고
擧動하는 곳
또한 衣食을 헤아려
마음을 쓴다.
인사하는 사람마다
모두 거두어 무리를 삼고
한번 茶를 마시고
飮食을 待接받음에도
道를 傳한다.
이는 모두
聖賢의 門戶를 빌려
스스로와 세상을 속임이며
仙佛의 法言을 훔쳐서
妖邪하고 怪異함을 짓는 것이니
이는 다만
스스로의 등 따시고
배부른 것만 生覺함일 것이며
어찌 다른 사람들의 死活에
觀心이 있다 할 것인가?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그 사람의 말만을 듣고
그의 行實을 살피지 않는다면
비록 道에 目的이 있다고는 하나
그늘의 그물에 들어
性命을 傷害받지 않는 者가 없다.
한번 그들의 말에 眩惑되면
가짜를 참된 것으로 알게 되어
固着되어 바꾸기가 어려우니
비록 高眞聖師가
이끌고자 하나
뾰족한 方法이 없게 된다.
天下의 道人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한번이면 足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치황(緇黃 : 중은 검은 옷을 입고
道士는 黃冠을 쓰는데서 由來)의 무리들이
東西를 달리며
根源도 없는 수많은 空眼과
火逅로써 사람을 眩惑시키니
이들은 다만
口頭三昧로써 사람을 취하여
사람마다 이에 부처요,
神仙이다.
試驗삼아 道를 묻는 자
千萬이나 되나
道를 이루는 자
그 몇이나 있던가?
대저 聖賢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仙佛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稀有함으로 因하여
高人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高人은
일반적인 浮流(부류)에서 벗어난 것인데
어찌 口頭三昧로써
高人이 되겠는가?
當年에 나의 스승께서
몰래 試金石을 주어
사람의 높고 낮은 性稟을
가늠한 적이 있었으니
만약 어려
修師들이 酒色財氣의 試驗을 만나
능히 흔들리지 않는 자라면
凡常한 稟性이 아닐 것이다.
더 論하면
悟眞편이나 參同契에서 말하는 口訣에
相應하는 者는
곧 明師이니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煉己築基 第五要

심원춘이 이르기를
七返還丹은 사람이 하는 것이나
먼저 반드시 煉己를 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고
悟眞扁에 이르기를
만약 口傳還丹을 닦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煉氣하여
마음의 體를 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대개 修眞의 道는
還丹이 가장 쉽고
煉氣가 至極히 어렵다.
만일 煉氣하지 아니하고
還丹부터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絶代 成功할 수 없는 것이다.


還丹이란 집의 기둥과 같고
煉氣란 집의 터를 다지는 것과 같다.
집의 터를 다지지 아니하고
대들보와 기둥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일찍이 煉氣를 아니하고도
還丹을 맺은 자는 없었다.
배우는 자 스승의 口訣을
얻거든 急히 煉氣하라.
煉氣가 純粹(순수)해져 火爐가 마련되면
左右의 根源이 서로 만나
마음을 얻어 應手하게 되는 것이니
鉛(연)과 烘(홍)이 서로 엉기고
情과 性이 서로 合하게 되면
이때부터는 얻고 나서
다시 잃어버리는 걱정이 없게 된다.

특히 사람이 出生한 後로
陽이 다하여 陰이 생기고
先天이 다하여 追天으로 用事하게 된다.

현재 내가 쓰는 오래된 物件들이
모두 본래 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백가지 근심을 그 마음에 더하고
만가지 일로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精이 새고 神이 어두워지며
氣를 敗退시키니
이 幻身을 깨진 항아리나
이지러진 솥과 같이 하니
깨진 항아리로
어찌 물을 담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身體가 衰敗하면
丹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니
모두 같은 理致이다.

그러므로 비록 後天의 거짓된 物質이라고는 하나
還丹의 藥材가 아니겠는가?

還丹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이것의 도움을 받아
功을 이루는 것이니
또한 이 몸을 損傷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先天의 眞種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後天이 넉넉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라고 했으니
대개 後天이 넉넉하면
先天을 回復할 수 있고
先天을 回復한즉
後天을 氣化시킬 수 있으니
煉氣와 畜氣의 功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무엇을 煉氣라 하는가?

貪愛를 줄이고
陰精을 굳게 가두고
잠을 쫓고 나를 手苦롭게 하여
남에게 利로움을 주며
世上의 煩據(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謙遜의 美德을 쌓고
世上일에 물들지 아니하고
勇猛 精進하여
道와 같이 머물고
옛 先人들의 修道하던 곳을 찾아
그 뜻을 새기고
富貴하여도 淫亂(음란)하지 아니하며
家難하여도 뜻을 옮기지 아니하고
武力에도 屈伏(굴복)하지 아니하며
거친 베옷 속에 옥을 품은 듯이
큰 智慧는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큰 才周는 拙劣(졸렬)한 것 같음이
또한 煉氣이다.

煉氣의 功이 수없이 많으나
모두 無己에로 歸着(귀착)되는 것이다.
老子가 이르기를
나에게 큰 근심이 있으니
이는 나에게 有身이 있는 것이다.
내가 無身이라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煉氣하여 無己에 도달하였다면
그 몸을 바깥 하여도
몸이 保存되고
後天이 穩當(온당)하여 바탕이 堅固하여지니
後天의 眞陽이 來復하고
混沌(혼돈)한 것 같으나 一如하다.

先天氣와 後天氣를 얻은 者,
마치 醉한 것 같으나
一時盡 內에 丹을 이루게 된다.

만약 煉氣하지 않은채
功을 運行한다면
後天이 堅固하지 못하여
비록 先天이 咫尺(지척)에 이르러도
맞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대개 鉛이 이르렀으나
수은이 맞지 못함이며
坎이 왔으나 離가 받아주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
저(修道)가 왔음에도
내가 待接치 못하는 것이니
슬프다,

畜氣할 때에는
반드시 탁약(呼吸)을 사용해야 하며
煉氣 시에는 眞鉛을 필요로 하니
煉氣와 畜氣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和合陰陽第六要
修眞의 道는 金丹의 道이다.
金丹의 道는 造化의 道이다.
造化의 道는 陰陽의 道이다.

易에 말하기를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는 것을
道라 이른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天地가
絪縕(萬物을 生成하는 氣運이 旺盛한 모양)하여
萬物이 和順하고(自然의 生育)
男女가 精을 이끌어 萬物을 化生하니
짝 없는 陰으로서는 生할 수 없고
홀로된 陽은 기르지 못한다.

陰과 陽이 서로 合하여야 만이
능히 낳고 기를 수 있다.
金丹의 道는
오직 先天의 眞一한 氣運을 採取하는 것이다.
先天의 氣는 無形 無象이어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지극히 虛無한 가운데 저절로 오는 것이다.

성인은 實다운 것이나 모양은 虛하고
참으로 있는 것이나 모양은 無인 것을 쓴다.

이 實다운 것과 참으로 있는 것은
바로 眞陰과 眞陽이다.
虛와 無라는 것은 二八初弦의 氣이다
(眞陰眞陽의 처음 싹트는 氣運,
즉 처음 피어 나오는 先天眞一至氣,
즉 坎中의 天生一과
離中의 天生七의 合이 人이요,
坎中의 地生六,
離中의 地生二의 合이 또한 八이다).
이 氣運은
陰陽의 交感이 아니면
능히 象을 나타낼 수 없다.
만약 金丹의 大道를 닦고자 한다면
이 陰과 陽을 터전 삼지 않고는
달리 어떤 術策이 없다.
다만 陰陽이 한가지가 아니어서
眞實로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알아야 하니
잘못하면 몸과 마음을 手苦롭게 할 뿐
利益은 없고 損害만 있게 되니
밝게 分別치 않을 수 없다.
男女의 陰陽은 濁한 世上의 陰陽이며
腎臟과 心臟의 陰陽은 幻身의 陰陽이다.
해와 달은 天地의 陰陽이며
冬至와 夏至는 一年의 陰陽이다.
초하루와 보름은 한달의 陰陽이고
子時와 午時는 하루의 陰陽이며
二候와 四候는(陽生一候 藥生一候 合而二候
마음이 죽으면 神이 되살아나고
몸이 虛하면 기가 일어난다.
달마는 二候에 모니를 캐고
四候에 別神功한다고 했음) 한때의 陰陽이다.
무릇 이 모두는 金丹의 陰陽이 아닌 것이니
金丹의 陰陽은 我家로써
陰을 삼고 他家로써 陽을 삼으며
나는 離가 되고 他는 坎이 되어
離 가운데 一陰이 眞陰이 되고
坎中의 一陽이 眞陽이 된다.
이것은 坎으로써 離를 채우는 것이니
이는 眞陰이 眞陽을 求하는 것이며
眞陽으로 眞陰을 건지는 것이다.
이 陰陽은 또한 內外의 다름이 있다.
內의 陰陽은 順行의 陰陽으로써
生身 以後의 일이며 後天이요,
人道이다.
外의 음양은 逆運의 陰陽이며
生身 以前의 일로써 先天이며
仙道이다.
內外의 陰陽은 모두 男女의 相이 없으며
非色非空이요, 卽色卽空이다.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면서
卽有卽無이다.
만약 色이나 空, 有와 無의 形狀에
執着한다면
이는 眞陰, 眞陽의 실다운 姿就가 아니다.
이미 陰陽을 알았다면
다음은 造化가 重要하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고
어느 한쪽에 偏重되지도 않아야 하며
너무 빠르거나 늦지도 말아야 하며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너무 密着하거나 떠나 있지도 않으며
너무 서두르거나 게으르지도 않아야 한다.
혹 陽이 움직이면 陰이 따르고
음이 느껴지면 양이 응한다.
혹 陰 中의 陽을 쓰며
陽 中의 陰을 쓴다.
혹 陰을 빌려 陽을 穩全(온전)히 하고
陽을 써서 陰을 制御하기도 한다.
혹 속의 陰陽으로써 바깥을 돕고
혹 바깥의 陰陽으로써 안을 건진다.
따라서 모두 內外가 合道해야 한다.
金丹은 虛無한 가운데 맺어지는 것으로
採取한 후에 腹息하여 長生 不死 한다.
參同契에 이르기를 같은 種類는
巧妙함을 베풀기가 쉬우나
다른 종류끼리는 巧妙하기가 어렵다 하였고
悟眞扁에 이르기를
內藥을 돌이키면 外藥과 같은 것이니
內가 통하면 外도 또한 반드시 통한다.
丹頭가 서로 和合하면
類가 서로 같아지니
穩陽은 두 가지 作用이 있다.
삼봉조사 말하기를
世間의 陰陽은
男女가 서로 짝을 이루어
子孫을 낳아 代代로 專하여지는 것이니
順하여 凡人이 되고
逆하여 仙이 되는 것은
다만 中間에서 傳導함에 달려 있으니
陰陽을 造化하는 道가 모두 여기에 있다.

 

審明大候 第七要
옛 經書에 이르기를
"聖人께서 藥은 傳하였으나
火는 傳하지 않아서
火逅를 아는 사람이 적다" 한즉
이는 藥은 쉬우나
火逅는 가장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개 藥物이 비록 찾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 至點하여
환히 밝게 보이게 하여
참으로 알게 해준다면
現在 있는 것을 取하고
다른 곳에서 求함을 바라지 않게 되니
이것이 곧 쉽게 알 수 있는 까닭이다.
火逅에 이르러서는
문팽(文烹)이 있고
무련(武煉) 下手가 있고
休歇이 있으며 내외가 있고
時刻이 있고 爻銖(효수)가 있으며
빠르고 늦음이 있고 止足이 있으며
一步에는 一步의 火逅가 있고
步步에는 步步의 火逅가 있어
變化가 多難하므로
隋時로 適切히 行하여야 하니
바야흐로 그때 그때의 法度가 있다.
만약 털끝만치의 差異가 벌어진다면
문득 千里나 잃게 될 것이니
무릇 五行을 모아 세우고
四象을 和合한다는 것은
天地의 生機를 훔치고
陰陽의 祖氣를 훔치는 것이다.
斗柄을 돌리고 天岡을 굴리며
(眞意와 眞氣를 말하나
天岡을 잡고 斗柄을 돌리다 함은
小周天의 火로 藥을 달이는 것을
表示한 것으로
眞正한 小周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暗示하고 있다)
坤門을 열고 艮戶를 막으니
그 妙함이 積陰의 아래에서
一陽이 來復하는 때에 있다.
이 때라는 것은
天地와 더불어 그 德을 合하고
日月과 더불어 그 밝음을 合하고
四時와 더불어 그 次序를 合하고
鬼神과 더불어 그 吉凶을 合하는 것이니
이른바 一年에 다만 一月이 있고
一月에 다만 하루가 있고
하루에 다만 한 時가 있으니
이 一時는
참으로 놓치기는 쉽고
찾기는 어려우며 어긋나기는 쉽고
만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를 얻은즉 生道에 들 수 있고
잃은즉 死道에 들게 된다.
聖人은 이 一時에
陰符와 陽火를 움직여
天根을 뽑고
(萬物의 根本이며
우리의 육신을 생하는 원천이다.
坤이 乾의 中爻 陽精을 얻으니
곧 坎이 된다.
이로 因하여
眞陽이 발생하니 天根이라 한다.)
月窟을 뚫으며(活午時를 말한다.
眞陽火가 頂門에 올라
一陰이 생하기를 기다리니
그 상이 乾이 巽을 기다림이며
月窟이라 한다.)
混沌을 파하고
(神室이 서로 교합할 때에
天地人我가 모두 아득하여
그 어떠한 것도 분명함이 없는 상태)
瑞朱(서주)를 딴다.
七十 離候를 돌리고
二十四節氣의 正氣를 빼앗으니
水火(緣紅의 體, 火가 水 속에 들어가면
眞意로써 成丹한다.)
相濟함이 여기에 있고
金木交倂(八萬 四千 毛孔이
활짝 열리는 것은
金이 發하는 것이요,
모든 것이
부드러워져 없는 것 같음은
木의 性이 發하는 것이다.
이때에 精이 性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있다.
鉛汞相投(鉛은 본래 火體이며
金情이고 汞은 본래 水體이며 本性이다.
이 두 가지는 先天의 神室이다.
이 두 가지를 솥 안에 넣고
달이면 功을 이룬다.)가
여기에 있고
安身立命이 여기에 있으며
出死入生이 여기에 있다.
만약 이때를 잃으면
陰陽은 分離되고
참된 것은 숨게 되고
가짜가 일을 主觀하게 되니
이미 後天에 떨어져
抑止로 쓸 수가 없다.
曲江의 언덕에 이르러
달이 밝다 함은
藥을 生하는 화후이며
紹識이 오는 때에
根本을 구한다 함은
藥을 캐는 花候이다.
水가 二를 生함이 바르고 참되니
만약 三을 기다린다면
더 나아갈 수 없다,
하는 藥이 어리고
늙음의 花候이고
鉛이 癸를 만날 때에
급히 캐고 金이 가득하면
도리어 勘當할 수 없다 함은
빠르고 늦음의 花候이다.
홀연히 나타난 용이
丹田에 있음을 보면
급히 猛烈히 鍛鍊하여
찌고 삶아야 한다.
다만 호랑이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굴에 들어가는 것을 들으면
마땅히 顚倒하여서
거꾸로 베풀어야 하는 것이니
武式의 火逅를 써야 한다.
火爐에 불을 지펴
藥을 달이고 있을 때에는
神을 便安히 하고
숨을 고르게 하여
天然스럽게 하여야 하니
이는 文의 화후를 쓴다.

아직 還丹하지 못하여
急히 鍛鍊하며
또 鍛鍊을 마치고
止足(滿足과 그침)을 아는 것은
穩陽의 화후이며
다만 火力을 造化롭게 한 後에
珍種子를 얻어 黃芽
(神室을 단련하여 이루는 眞胎息, 黃이란
中黃의 媚이며
芽는 生機의 싹으로 大藥이
처음 나타나는 모습을
연유한 이름이다.)를
점차 자라게 하는 것은
단을 이루는 화후이다.
마음을 자연함에 맡기고
삼가 조심하여 지키며
화로의 화후를 지켜보는 것은
단을 보전하는 화후이다.
大丹의 화후는
별도의 묘용이 있으니
吉함을 받아들이고
이룬 후의 위험을 방지하는 것은
태를 맺는 화후이며
혼돈 七日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며
도반을 의지하고
水火를 고르게 함은
固濟의 화후이다.
흙가마에 돌아가
굳게 가두어 봉고하고
구슬의 힘을 보급받는 것은
태를 기르는 화후이며
납을 쓰되
보통의 납은 쓰지 아니하고
眞鉛을 쓰며 쓴 후에는 버린다 함은
추첨의 화후이다.
丹 (단조)와 河車는
지나치지 않게 편안하게 할 것이며
鶴胎龜息을 면면히 함은
목욕의 화후이다.
하루 12시진 내에
뜻이 이르는 대로 하는 것은
위험을 방지하는 화후이다.
영아(옥액환단 시에 그 단이
처음으로 뚜렷한 모양을 이룬다.
無中生有이므로 영아라 한다.
* 선학사전에는
위와 같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대약의 씨앗을 진종자라 하고
그 진종자가 피어나오는 것을 黃芽라 하고
황아가 뚜렷이 모습을 이룬 것을 영아라 하며
이 영아가 도태를
이루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가
한결같이 진기를 머금고
태를 이루어
성인의 기초를 이루는 화후이며
소주천 공부를 마쳤을 때에 처음 나타난다.
물음을 모두 물리치고
단을 성숙시켜
범상한 틀에서 벗어나
만년을 사는 것은 脫胎의 화후이다.
이러한 大丹終始의 화후에도
문득 內外兩用의 화후가 있으니
凡俗에서 天上의 일을 구하며
12 때에 따라 세간의 재물을 쓴다 함은
약을 캐는 화후 中의 화후이다.
"언월로 가운데에서 옥꽃술이 생겨나고
주사의 솥 가운데에 수은이 고르다." 함은
단을 맺는 화후 中의 화후이다.
입정 七日에 진양이 다시 머리를 쳐들고
별도의 묘용으로 百神을 혼합한다 함은
胎를 맺는 화후 中의 화후이다.
有無가 모두 平立하고
物我가 모두 歸空함은
태를 벗어나는 화후 中의 화후이다.
이에 內外二丹의
화후의 비밀을 모두 밝혔으니
그 가운데 또 더욱 미묘하고 오묘한 것은
神으로써 밝혀야 하는 것이니
사람마다 그때그때 알맞게
변통해야 할 것이며
문자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外藥了命 第八要
오진편에 이르기를
"기교와 거짓을 안 하는 것이 功力이요,
他家를 알아서 取하는 것이
죽지 않는 방법이다" 라고 하였고
녹록자는 말하기를
先天의 기는 허무한 가운데 온다고 하고
他家라 하고 虛無라 말하니
一身에서 생겨나는 물건이
아닌 줄로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놀래고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써
만물을 化生하고
氣로써 形을 이루니
사람이 하늘이 부여한 正氣를 받아서
만물의 영양이 되고
이 기를 갖춘즉
이 이치를 갖추게 된다.
氣는 命이며 理는 性이다.
이 성명은 天地가 주는 것이니
하늘이 시작에는 주고
끝에는 빼앗는 것이니
이러한 형세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만약 후천 幻身의 물질로써
하늘과 더불어
주권을 다투고자 한다면
이 모두가 조화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는데
어찌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금액환단이 없이 망령되이
성명을 보전할 것을 바라지만
그럴 이치는 만에 하나도 없다.
금액환단은 선천의 도이다.
선천의 도는 天地를 감싸고
음양을 운동시키며
天地 밖의 비밀스러운
기틀을 이음이다.
그러므로 능히 生死를 마치고
윤회를 피하며 범속한
세상에서 벗어나
성인의 기반에 드니
이렇게 유일한 秘機가
멀게는 千里나 떨어져 있고
가까이는 지척에 있는데
애석하도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것을 깨닫기를
즐겨 하지 않는구나.
날로 멀어지고
날로 성기어져서
끊어지게 하고
돌이킬 줄을 모르니
스스로 성명을 버리고 만다.
만약 뜻있는 수사가
실다운 이치를 궁구하여
홀연히 의심을 깨고
적중함이 있다면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곧바로 피안에 오른다면
빛나고 빛나는 금단을
三年九年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하루에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을 이루기는
최고로 쉬우나
修煉하기는 심히 어려우니
허와 실이 상응하고
음양이 변화하는 延命의 道가 아니면
金丹은 맺어지지 아니한다.
延命의 道는
천지 조화의 권세를 빼앗으며
음양 소식의 기틀을 훔치어
生殺을 굴리며
북두칠성을 돌리니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못하는 도이다.
음부경에 이르기를 :
그 기밀을 훔침이여,
천지가 능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하였고
오진에 이르기를
"처음에 有作일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다가
無爲에 이르러서는
대중이 비로소 알고
다만 無爲가 묘한 것만을 보니
어찌 有作이 근본 기반임을
알 수 있겠는가?
대개 사람들이
선천을 잃어버린 후로는
진양이 이즈러지게 되어
형체는 비록 남자이나
그 속은 다 陰이다.
한결같이
자신의 몸을 잡고 수련하나
그 내용은
눈물이나 침, 진액이나
精, 氣, 혈액을 단련할 뿐이며
안, 이, 비, 설, 신, 의를
벗어나지 못하며
七情, 六慾, 오온, 팔식,
三彭, 百穴에 지나지 못한다.

이는 음으로써
음을 구제하는 것과 같으니
命이 어디로 말미암아 이을 수 있을 것이며
단을 무엇으로 연유하여 맺을 수 있겠는가?
고로 참동계에 이르기를
암탉이 혼자 낳은 알로는
새끼를 온전히 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 증거가 된다.

무릇 丹經의 이른바 外藥이란 것은
我家의 眞藥이 바깥으로 흩어져
내게 붙지 않고
他家에 붙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他字나 外字를 잘못 해석하여
어녀규단이나 오금팔석,
천지일월, 운하초목 등으로 의심하여
갖가지 형체있는 물체로
오판하게 되었다.
이는
眞正大藥이 非色非空이며
非有非無이며 홍몽미판의 始氣이며
天地未分의 元仁이며
順한 즉 生人, 生物하고
逆한즉 成仙作佛임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성인께서 법으로써
1개 시진 안에 추섭하여
한 알의 서주를 맺으시니
이를 陽丹, 환단, 금단, 진연이라 한다.
이 진연으로써
자신의 陰汞을 점화시키니
이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 같이
찰나에 乾汞이 맺어져 聖胎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外藥이란
이름이 연유된 까닭이다.
좀더 세밀히 살펴보자면
약이 서남에서 나오니 이는 坤位이다.
곤위에서 찾고자 한다면
어찌 사람을 떠나서 찾을 것인가 하니
이것이 외약이다.
초사흘에 辰이 庚方에서 나오며
곡강 언덕 위에 달이 밝다 하니
외약이며
금 솥에 주사, 수은을 머물고자 하며
옥연못에 물 속 수은을 버리고자 하니
외약이며
坎位의 心中實을 취하여
離宮의 속 陰을 점화시키는 것이
외약이요,
언월로 속에 옥꽃들이 생기고
주사 솥 안에 수은이 고르다 함이
외약이요,
坎離의 기운이 화합하면
黃芽가 저절로 생긴다 함이
외약이다.
다만 약이 본래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안에서 생김을
얻을 수 있겠으며
약이 他에 속한 것이라면
어떻게 나아가 있음을 얻을 것인가?
경에 이르기를
五行이 順生하면 法界가 불구덩이요,
오행이 전도되면 天地가 칠보이다
라고 하였으니
木은 본래 火를 生하나
이제 火가 도리어 木을 生하며
金은 본래 水를 生하는 것이나
이제 水가 도리어 金을 生하니
金木水火 가운데에
戌己 二土가 감추어져서
四象을 화합하고
오행을 배합하니
一氣를 운용하여
다시 一太極을 이룬다.

火의 功이 지극해져
한알의 양한 丹을 이루니
이를 복용하여 장생불사를 이룬다.
천지와 더불어 春을 함께 하고
달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니
이른바 한 알의 금단을
삼킴으로써
비로소 "명이 나에게 있음이요,
하늘에 달려 있지 않도다"
함을 알게 된다.
오호라!
만냥의 황금을 사는데는
한치의 양보도 없으면서
十字 거리에서
지극한 사람(至人)은
어찌 그냥 보내는가?
금단의 대도는
만겁에 한번 전하는 것이거늘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한 것이어서
이를 얻는 자는
마침내 성인의 반열에 서고
다음 생이나
후세를 기다리지 않고
눈앞에서
부처의 신통을 얻을 수 있거늘
사람들은 어찌 즐기기만 하고
덕을 쌓고 도를 닦지 않는가?

內藥了性 第九要
도덕경에 이르기를
유욕으로써 그 규를 관하고(有欲以觀其竅)
무욕으로써 그 묘를 관한다(無欲以觀其妙)라
하였으니
이 두마디는
금단 대도의 처음과 끝이 되며
古今 학인들의 요결이다.
외약을 얻지 못한즉 능히 음양을 벗어나지 못하며
내약을 취하지 못한즉
形과 神이 다같이 묘함을 이룰 수 없다.
덕이 높은 사람은 내약을 닦은즉
외양이 온전해지고
下德인 사람은 외약을 닦아서
내약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외약은 점법이며 내약은 돈법이다.
외약은 凡人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내약은 성인에 드는 것이다.
유욕으로 규를 관한다는 것은 외약이며
조화의 공을 훔치는 것이니
幻身 上의 일이다.
무욕으로 묘를 관한다는 것은 내약이며
明心見性의 學이며
法身 上의 일이다.
진실로 외약을 이미 얻고도
내약을 닦지 않는다면
여조의 이른바
"수명이 天地와 같으나
한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못한다"에
해당한다.
대단히 얻기 어려운 것은
외약에 있으니
만일 외약을 얻었다면
이는 곧 내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뒤이어 聖胎의 象이 있게 된다.
陰符의 功이 여기에 있다.
참동계에 이르기를
耳, 目, 口, 세가지 보배를 굳게 닫아
통하게 하지 말라,
진인은 깊은 연못에 잠긴 듯이 하고
부유할 때에는 中道를 지킨다 하니
소위 무욕으로 묘함을 관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무욕으로 묘함을 관한다는 것은
무위의 도이다.
무위라고 하여 고목이나 차가운 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朝屯暮蒙
(조둔은 起火, 모몽은 退火로써
음으로 양을 구한다),
추연첨홍하고 위험을 방지하고,
성태를 튼튼히 하는 공을 쌓으니
곧 오행을 융합하고 음양을 화합하여
도와 법을 모두 잊고
유와 무가 하나가 되며
十月出胎에 身外有身을 이루어
최극점에 도달하여
마침내 眞如大覺之地에 돌아간다.
이는 바로 부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최상일승의 도이다.
만약 命을 마치지 못하고
이 功을 닦는다면
근본이 굳지 못하고
虛하여 실답지 못하다.
때문에 화로 속에서
약을 단련함에서부터
큰 조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眞如之性을 了得하려 할 때에는
만약 조그마한 오차라도 발생한다면
이것이 곧 몸에
큰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옛 사람들이 性理로써
많은 언어를 세웠으니
과연 열반의 마음을 아는 자 그 몇이며
眞如之性을 보는 자 그 몇이겠는가?
열반심과 진여성은
원광이 크고 넓고 뚜렷하여
天地를 꿰뚫는 것이니
후천 人心의 血性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인들도 또한 性은 마쳤으나
命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만겁에 걸쳐 음령으로 떠돌며
성인의 지위에 들지 못한다.
또한 이미 명은 마쳤으나
성을 마치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사물에 응하여 집착이 있게 되니
이러한 경우에는
비록 幻身을 벗었다고는 하나
법신마저 벗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또한 長生을 하되 無生은 못하며
生身의 初는 능히 마치되
未生之前은 온전히 하지 못한다.
內藥了性의 功이 최대의 사업이니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큰 공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성을 닦기에 앞서
먼저 命을 닦은 사람은
命을 마친 후에는
급히 性을 닦았으니
음양을 함께 쓰고
性命을 雙修함이다.
有爲로부터 무위에 들었으되
有無가 다 없고
드디어 허공을 타파하고
불생불멸의 지경에 드니
마침내 修眞의 일을 능히 마치게 된다.

 

淸眞閑實信書言行判

風寒暑濕燥火 虛心無我
育天士地道人 育士好道救靈
災忍誠敬信 天地人靈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