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修心訣의 수행방법을 통한 참마음 찾기
醉月
2012. 2. 7. 13:30
Ⅰ. 머리말
심리상담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는 내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아서 자신의 마음 상태가 너무 들떠서 과장되어 있지 않는가, 너무 위축되어 왜곡되어 있지 않는가를 거울에서 자신을 보듯이 마음을 객관화 시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상담자는 내담자의 근원적인 마음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아닐지라도, 정상적인 마음을 찾아 나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내담자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있어 상담의 주요한 과정이 된다. 이처럼 내담자가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 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음 찾아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특히 지눌이 제시한 마음수행은 크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논에서는 지눌의 {修心訣}에 나타난 수행 방법을 통해 참 마음 내지 정상적인 마음 찾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論에서는 {수심결}을 중심으로 지눌이 마음을 찾고자 하였던 독특한 修行 法을 살펴보고, 이러한 수행 법의 비결을 통해 마음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아픔 을 치유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禪修行 僧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知訥(1158∼1210)은 많은 저서들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글들의 핵심 과제는 주로 마음을 다루고 있으며 마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특히 지눌은 마음을 찾아감에 있어 어려운 과제를 설정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화두를 통해서 제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勸修定慧結社文}이나 {修心訣}의 서두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고뇌의 문제를 명확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의 문제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도록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자아 실현을 도와주는 인간 중심적 심리상담의 도입과정에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신뢰적 촉진관계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시 다루고 있는 점과 상통한다.
이러한 實例의 글로서, {권수정혜결사문}의 첫머리에 "恭이 들으니 사람이 땅에서 넘어 진자는 땅을 집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떠나 일어남을 구함은 옳지 않다. 이처럼 한마음이 迷하여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는 자는 중생이요. 한 마음을 깨달아 끝없는 妙用을 일으키는 자는 모두 佛이니 迷하고 깨달음은 비록 다르나 오로지 한 마음에 있으니 마음을 떠나 佛을 구하는 자는 옳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의 속뜻은 지눌이 {華嚴論節要}에서 보이고 있듯이, 자기 마음의 땅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자기 마음의 땅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비유에서 보듯이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땅바닥에 거꾸러져서 아픔을 경험 해본 일이 있다. 그러므로 지눌은 더 이상 땅에서 넘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화두를 제시하여 독자의 눈 높이에 맞추어 누구나 동감 할 수 있도록 접근하고 있다.
또 {수심결}의 첫머리에도 "三界를 윤회하는 사람의 고통은 불난 집에 사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고통을 어찌 참아서 그대로 오래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佛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 만약 佛을 구하고자 한다면 佛은 곧 마음이다."고 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에 살아가면서 八苦의 무거운 고통을 끝없이 받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지눌은 윤회의 고통이 마치 불난 집에 사는 고통과 같다는 것을 일깨워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처럼 땅에서 일어나야 하고 火宅에서 벗어나야 하는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눌은 "자기 마음이 곧 참된 부처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곧 참된 진리"인지를 깨우치기 위해 自性의 體를 통해 自心의 用을 일으키는 返照의 수행 체계를 가르치고 있다.
이 論에서는 {수심결}을 중심으로 지눌이 마음을 찾고자 하였던 독특한 修行 法을 살펴보고, 이러한 수행 법의 비결을 통해 마음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아픔 을 치유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Ⅱ. {수심결}의 구조분석
1. {修心訣}의 전개 과정
{수심결}에서 강조하고 있는 마음 수행 비결의 글은 비록 짧은 글이지만 序分·本分·流通分으로 나누어져 이해를 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序分에서는 "佛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佛은 곧 내 마음이다.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고 하였다. 참 마음의 정체는 몸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착해야 할 목적지인 참 마음의 실체가 몸 가운데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本分에서는 9개의 질의와 대답의 형식을 빌려서 스스로 참 마음의 실체가 있는 곳을 찾아가도록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수행에 들어가는 차례를 본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수심결}의 수행 내용부분의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다.
序分에서는 "佛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佛은 곧 내 마음이다.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고 하였다. 참 마음의 정체는 몸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착해야 할 목적지인 참 마음의 실체가 몸 가운데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本分에서는 9개의 질의와 대답의 형식을 빌려서 스스로 참 마음의 실체가 있는 곳을 찾아가도록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몸 가운데 불성이 있다면 왜 범부는 볼 수 없는가?" 라고 했다. 신체의 화합인 四大는 인연이 모인 것이라, 사대로서는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없다고 했다. 이것에 대해 臨濟는 "너의 눈앞에 역역히 밝은 형상 없는 한 물건"이 있다고 한 것을 인용해서 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佛은 몸의 요소에 있지 않고 見聞覺知하는 그것에 佛性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見性이 참 見性이라면 바로 성인일 텐데 왜 神通變化를 보여주지 않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하여 점차로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성에 의하여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頓悟와 漸修의 양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곧 제자들로 하여금 비록 "頓悟頓修가 최상의 근기에서 들어가는 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 동안 깨달음에 의하여 점차로 닦아 익혀 오다가 今生에 와서 듣자 곧 깨달음을 발하여 일시에 몰록 마치는 것이니 다시 말해 이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세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성인의 길이라 하셨는데 깨달음이 돈오라면 어떤 이유로 차츰 수행할 필요가 있으며, 수행이 만약 점수라면 왜 돈오를 말씀하는가? 돈오와 점수의 뜻을 다시 말씀하시어 의심을 끊게 하소서"라고 당부한다.
이 {수심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중에 또 하나인 돈오와 점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頓悟란 범부가 迷할 때 四大를 몸이라 하고 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法身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의 靈知가 眞佛인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을 따라 여기 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성품을 보면 이 性地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 있어서 모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라고 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佛과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래 동안 익힌 습기로 몰록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히어 공이 이루어져 오래 동안 소질을 길러서 성인이 되기 때문에 漸修라고 한다"고 하여 돈오와 점수를 정의하고 있다.
네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무슨 방 편을 지어야 일념에 기를 돌이켜서 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고 하니, "너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법이 필요한가?"고 대답한다.
다섯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上上의 사람은 들어서 곧 쉽게 알지만 그렇지 못한 中下의 사람은 의혹이 있겠으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닫도록 하소서"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든 법은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으며,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은 본래 空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空한 그곳에 신령스럽게 알아 어둡지 않다."고 하였다.
여섯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空寂靈知의 마음입니까?"라고 하여 마음의 본체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육신은 알지 못한다.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 마음이지 육신이 아니다."고 하였으며, "모든 법이 비고 고요한 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는 어둡지 않아 생명이 없는 것과는 다르고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라고 하여 마음의 상을 空寂靈知心을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수심결}에서 마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강조한 지눌의 사상체계로써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일곱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이미 이러한 이치를 깨쳐서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찌해서 깨친 뒤에 수행하여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까?"라고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頓悟漸修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에서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佛과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치더라도 오래 동안 익혀온 옛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 어렵다."고 하여 지혜를 가지고 공을 드리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여덟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지는 뜻을 밝게 알지 못했으니 다시 설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 문에 이끌어 들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선정과 지혜에 대해 설하고 있다. "선정은 본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가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이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았다. 선정이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선정이므로 알면서 고요하다"고 하고 있다.
아홉 번째 질의와 대답에서 自性 定慧와 隨相 定慧의 두가지 차원에서 頓과 漸의 대치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만일 한사람이 하는 수행이라면 먼저 자기성품의 정과 혜를 쌍으로 닦은 후에 다시 수상문과 대치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상문을 의지하여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성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만약 그 두 문에 관하여 각기 수행 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이 정혜라는 것을 닦으면 이것이 頓門으로 노력 없는 노력으로 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하여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문에서 선정을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에 점차 닦는 문의 열등한 근기에 대치한 노력으로 마음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 사람이다. …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가지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수행에 들어가는 차례를 본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流通分에서는 "만약 장부의 뜻을 갖추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수심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뜻을 바로 알아 일일이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하면 곧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히 드러나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깨친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굳게 믿음을 내어서 무간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처럼 {수심결}의 수행 내용부분의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다.
2. 인용 경전과 나타난 인물
{수심결}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용 경전과 인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지눌이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을 좀더 쉽게 살펴볼 수 있다.
가. 인용된 경전의 글귀
① 이 세상은 마치 불난 집과 같다는 비유의 경은 {법화경}(大正藏 9, p23 中)
② 마음의 상을 이야기한 경으로써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의 지혜 德相을 갖추고 있다." {화엄경}(대정장 10, p.272下)
③ 중생의 생각에 대해 "중생의 생각 생각이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일어나다" {원각경}(대정장 17, p.914)
④ "한 마음에 미혹하여 육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가는 것이요, 흔들리는 것이며 법계를 깨달아 한 마음을 돌아오는 사람은 오는 것이며 조용한 것이다"{華嚴經隨疏演義 }(대정장 36, p.1 )
⑤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기신론}(대정장 32, p.575)
⑥ "믿음의 인연가운데서 모든 부처님의 果德에 계합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어야 비로서 믿음을 이룬다."{신화엄경론}(대정징 36, p.809)
⑦ "마음의 바탕에 산란 없음이 自性의 禪定이요 마음의 바탕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지혜라"{육조단경}(대정장 48, p.358下)
⑧ "스스로 깨쳐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한 사람이다."{육조단경}(대정장 48, p.351上)
⑨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佛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金剛經}(대정장 8, p.749上∼中)
⑩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이와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금강경}(대정장 8, p.755上)
① 이 세상은 마치 불난 집과 같다는 비유의 경은 {법화경}(大正藏 9, p23 中)
② 마음의 상을 이야기한 경으로써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의 지혜 德相을 갖추고 있다." {화엄경}(대정장 10, p.272下)
③ 중생의 생각에 대해 "중생의 생각 생각이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일어나다" {원각경}(대정장 17, p.914)
④ "한 마음에 미혹하여 육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가는 것이요, 흔들리는 것이며 법계를 깨달아 한 마음을 돌아오는 사람은 오는 것이며 조용한 것이다"{華嚴經隨疏演義 }(대정장 36, p.1 )
⑤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기신론}(대정장 32, p.575)
⑥ "믿음의 인연가운데서 모든 부처님의 果德에 계합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어야 비로서 믿음을 이룬다."{신화엄경론}(대정징 36, p.809)
⑦ "마음의 바탕에 산란 없음이 自性의 禪定이요 마음의 바탕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지혜라"{육조단경}(대정장 48, p.358下)
⑧ "스스로 깨쳐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한 사람이다."{육조단경}(대정장 48, p.351上)
⑨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佛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金剛經}(대정장 8, p.749上∼中)
⑩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이와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금강경}(대정장 8, p.755上)
나. 인용된 선사들의 글귀
① "사대는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또한 법을 설하지 못하는데 오직 그대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 없는 한 물건만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 임제선사의 {임제어록}(대정장 47, p497)
②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다."는 이견왕과 바라제존자의 대화 {경덕전등록}(대정장 51, 2076,218)
③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귀종화상의 {선문염송}
④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아 차례에 따라 없어진다"{대혜어록}(대정장 47, p920 )
⑤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밝힘에 "얼음 언 연못이 온전히 물인 것을 알았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규봉스님의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287)
⑥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단박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깨치기 전처럼 유랑하며 윤회를 면치 못한다."{대혜어록}(대정장 47, p920)
⑦ "온갖 행을 다 닦지만 오직 無念으로 기본을 삼는다."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대정장 48, p403)
⑧ "이 성품은 본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가 본래부터 스스로 다 갖추어 있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몰록 깨치고 그 깨침에 의하여 닦으면 그것을 최상선, 혹은 여래 청정선이라고 부른다."규봉스님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399).
⑨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450)
⑩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하지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 두려워하라"{종경록}(대정장 48, p638)
⑪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것을 즉시 깨달아라. 깨달으면 그 본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대정장 48, p403)
⑫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 될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영명연수의 {유심결}(대정장 48, p996)
① "사대는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또한 법을 설하지 못하는데 오직 그대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 없는 한 물건만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 임제선사의 {임제어록}(대정장 47, p497)
②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다."는 이견왕과 바라제존자의 대화 {경덕전등록}(대정장 51, 2076,218)
③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귀종화상의 {선문염송}
④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아 차례에 따라 없어진다"{대혜어록}(대정장 47, p920 )
⑤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밝힘에 "얼음 언 연못이 온전히 물인 것을 알았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규봉스님의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287)
⑥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단박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깨치기 전처럼 유랑하며 윤회를 면치 못한다."{대혜어록}(대정장 47, p920)
⑦ "온갖 행을 다 닦지만 오직 無念으로 기본을 삼는다."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대정장 48, p403)
⑧ "이 성품은 본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가 본래부터 스스로 다 갖추어 있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몰록 깨치고 그 깨침에 의하여 닦으면 그것을 최상선, 혹은 여래 청정선이라고 부른다."규봉스님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399).
⑨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경덕전등록}(대정장 51, p450)
⑩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하지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 두려워하라"{종경록}(대정장 48, p638)
⑪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것을 즉시 깨달아라. 깨달으면 그 본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대정장 48, p403)
⑫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 될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영명연수의 {유심결}(대정장 48, p996)
위의 인용된 경전과 선사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지눌의 가르침의 내용을 침작 할 수 있다. 특히 지눌은 경전의 인용에서는 諸法實相을 밝히고 있는 {법화·열반경}보다는 緣起實相을 밝히고 있는 {화엄경}과 {원각경}을 인용하여 "여래의 德相과 圓覺妙心"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유통분 말미에서 인용된 {금강경}은 {육조단경}에서 중요시 다룬 반야공사상의 경전을 인용하고 있다. 또 선사들의 인용 글귀들은 육조 혜능을 중심으로 한 남종선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선사에 대해서도 인용하고 있지만 화엄의 대가로서 禪敎의 일치를 부르짖는 규봉종밀 선사에 대한 인용이 뚜렷이 보인다. 이것은 위에서 보듯이 화엄사상적 입장에서 "마음의 닦음은 번뇌·망상을 끊고 버리는 일이 아니라 본래 비어 실체가 없는 번뇌·망상의 성품을 아는 일이며, 그것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바탕을 보는 일"을 가지고 {수심결}이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수심결}의 수행 체계
1. 自性과 自心 바로 보기
{修心訣}에 있어서 줄곧 다루고 있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보았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몸 가운데를 떠나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 몸은 생사가 있지만,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결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 마음은 自性을 가르치는 마음이다. 지눌은 마음에 대해 "自心이 眞佛이며, 自性이 眞法인지 알지 못한다."고 구별하여 설하고 있다. 여기서 自性은 마음의 體이며 相을 말하고, 자심은 用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눌은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보아서(返照) 본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般若心經}의 서두에도 "照見五蘊皆空" 즉 "五蘊의 일체가 다 空하다는 것을 비추어보니,"즉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라고 하는 것처럼,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서, 또한 妄念에 의해서 가려 있던 것을 비추어보아 알아차리고 나니 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지눌은 본래성품이 있는 곳을 알아서 깨닫는 차원에서 "見性"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견성 후에 곧 바로 神通變化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둘째 질의 형식에서 가르치고 있다.
또한 그는 {華嚴經}을 인용하여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마음의 체와 상을 밝히고 있으며, 또 {圓覺經}에서 "일체중생의 가지가지 허망된 생각이 모두 如來의 원각묘심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마음의 用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지눌은 마음의 체인 佛性과 마음의 작용인 佛心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 형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佛性이 마음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지금 왜 보지 못하는가?"에서 임제스님의 말을 빌러 "사대는 법을 설하기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또한 법을 설하거나 듣지도 못하지만, 오직 그대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 없는 한 물건 만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고 하여 體인 佛性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마음의 용인 자심이 움직일 때만이 그 바탕인 불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六祖壇經}에도 "識心見性"즉 마음을 알면 견성 한다고 하여 마음을 아는 것이 곧 見性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알 것인가?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을 곧 본다는 것이다. 體 자체인 佛性은 본래 구비되어 있지만 자심을 통해야만 본래 心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눌은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보아서(返照) 본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般若心經}의 서두에도 "照見五蘊皆空" 즉 "五蘊의 일체가 다 空하다는 것을 비추어보니,"즉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라고 하는 것처럼,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서, 또한 妄念에 의해서 가려 있던 것을 비추어보아 알아차리고 나니 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지눌은 본래성품이 있는 곳을 알아서 깨닫는 차원에서 "見性"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견성 후에 곧 바로 神通變化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둘째 질의 형식에서 가르치고 있다.
지눌은 체의 본성인 불성은 모두가 갖고 있지만, 나타남을 알고자 한다면 바로 作用에 의한 마음의 쓰임 곧 알아차림으로써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예로서{景德傳燈錄}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께서 답하시기를, 성품을 본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께서 성품을 보았습니까? 나는 佛性을 보았습니다. 그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8곳의 작용에 의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처럼 본래 그 성품은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수행에 의해 그 본성을 보아 알아차릴 때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見性은 바로 참 마음의 본질을 밖에서가 아니라 身中에서 벗어나지 않는 참 性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눌이 見性 하는 것이 곧 頓悟로 표현했으며 돈오 후 견성을 강조한 대목이 된다. 이처럼 {修心訣}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自性"과 "自心"을 분리하여 설명하고, 자성에 의한 妙用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수행의 방법에 있어 頓悟 후 漸修를 강조
{수심결}에서 나타난 수행은 조사선의 수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천태지관의 지관 수행법과는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천태의 지관수행은 천태지의의 {修習止觀坐禪法要}에서 "하나는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요, 둘은 마음이 가라앉거나 뜨는 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고 하여 마음의 산란함을 쉬고 나서 마음을 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경계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고요히 쉬게 하여 涅槃寂靜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그 목적 있다고 하겠다.
천태의 지관수행은 천태지의의 {修習止觀坐禪法要}에서 "하나는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요, 둘은 마음이 가라앉거나 뜨는 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고 하여 마음의 산란함을 쉬고 나서 마음을 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경계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고요히 쉬게 하여 涅槃寂靜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그 목적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눌의 수행은 앞에서 보았듯이 외부의 경계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과는 관계없이 내부의 마음속에 공적영지한 마음을 밝혀 내는데 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만남 경계를 없애고 내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頓悟을 정의하되 "돈오는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頓悟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돈오의 수행은 바로 자성을 보아 自心으로 돌아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自心은 어떠한 것인가? "모든 법이 꿈과 같고 幻과 化와 같기 때문에 망념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 경계가 본래 空하니, 모든 법이 다 空한 곳에 신령스런 지혜가 매이지 않기 때문에 공적하고 영지한 마음이 너의 본래 면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空寂靈知의 마음은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 바탕인 깨친 성품이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지눌은 돈오를 강조하되 돈오하는 그것 자체는 본래성품을 알아보는데 있기 때문에 돈오 그것을 확장하는 수행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지눌은 돈오한 후 점수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勸修定慧結社文}에 보면 "범부가 지금에 있어 廻光返照하여 방편을 잘 알아서 혼침과 산란을 균등이 하면 惺惺하고 寂寂한 마음의 인을 싸고 과를 사무쳐서 변치않고 끊어지지 않으나 다만 생과 熟과 明과 昧가 공을 따라 다르게 들일 뿐이다."고 하였다. 위의 결사문에 보면 공적한 것보다 성성한 밝고 활달한 자심을 강조하면서 견성에 원천인 自性보다는 妙心으로 성성하고 적적한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돈오를 통해 점수로 돌아가야 한다는 근거가 된다.
頓悟漸修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래 동안 익혀온 습기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히어 공이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소질을 길러서 성인이 되기 때문에 점수라 한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어른의 성품을 가져 장차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처럼 점수에서 "자기 성품이 본래 空寂하여 佛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 깨친 후 점수이기 때문에 점수가 단순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아니다. 그리하여 지눌은 "깨치기 전의 닦음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 선지식들도 깨친 후 牧牛行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눌은 공적영지한 마음, 나아가 성성적적한 마음의 체를 몰록 깨달아 아는 것이 일차로 중요하며, 그 후에 점수를 통해 오래 습기에 의한 훈습을 털어 벌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지눌의 수행방법은 깨친 후 定慧의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自性의 위에 體와 用이 서로 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體는 空寂하여 定하고, 用은 靈知하여 慧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진리에 들어가는 천가지 문이 모두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면 단지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의 두가지 뜻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공적과 영지가 그것이다."고 하였다. 또 "선정은 본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가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작용이 본체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여 마음의 체와 용이 서로 즉한 것을 알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혜의 수행에 있어 "육근의 경계에 대하여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음이 선정이며, 마음과 대상이 함께 공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이 지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체 즉 용이 되고 정 즉 慧가 되는 것으로, 이 논리는 {수심결}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보조사상에 일관된 <마음> 즉 공적영지심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내용을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요하고 적적한 체의 본성에 머물지 않고 惺惺한 지혜를 활용 할 수 있는 수행자를 강조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Ⅳ. 수심결에 의한 상담자의 마음보기
1. 返照의 修行方法에 의한 참마음 보기
지눌의 修心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의 본체를 깨달아서 생사의 苦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다면, 심리상담은 현상의 어려운 마음의 과제를 해결해 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나아가 자기 실현과 성장을 위한 고차원적인 수행도 포함한다. 일상상담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상담자가 내담자의 왜곡된 생각과 顚倒된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지원하며, 경청을 통해서 상담자는 내담자 스스로 가슴에 담고 있는 응어리를 풀어주는데 있다. 그러나 선수행을 통한 상담은 비언어적 접근 방법으로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통찰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중점을 둔다. 특히 지눌이 {수심결}에서 강조한 마음 수행 비결은 깨달음 즉 見性으로서 자신의 성품을 바로 알아차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듯이, 심리상담도 내담자의 정상적인 마음, 평상의 마음 내지 본래 면목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데서 상담이 시작된다.
지눌은 본래의 마음을 바로 찾아 나아가는 그 방법으로서 채택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마음을 고요히 하여 모든 경계를 그치게 하는 止觀門의 수행이 아니라, 看話禪의 返照 논리를 통해서 경계가 일어나고 있는 곳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으로 되돌려 비추어 봄으로서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근원을 알아차리도록 하는데 두었다"고 할 수 있다. 止觀的 修行方法의 하나인 {安般守意經}같은 곳에서는 호흡을 통하여 산란한 마음을 제어하고 집중하는 수행으로서, "安은 定이 되고 般은 동요하지 않으며, 守意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고 하여 마음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서 본래마음으로 환원하는 수행을 한다.
그러나 지눌의 수행방법은 返照를 통해 근원적 성품을 바로 봄으로서 즉 見性을 통해 마음의 실상을 알아차리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지눌은 수행의 결과를 돌이켜보니, 근원적인 마음의 본체는 {華嚴經}에서 말했듯이 "일체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든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한바와 같으며, {圓覺經}을 살펴보니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허망된 생각들이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妙心에서 일어난다"고 한 이야기와 동일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곧 중생 모두가 지혜덕상을 원래 갖추고 있고, 원만히 깨달은 妙心이 있기 때문에 본성을 바로 본다는 것은 "자기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며, 자기 성품이 곧 진리의 성품"이라는 것을 깨닫는 수행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수행은 "見性 즉 悟道"가 되어 본래성품을 바로 보아(正見) 알아차린다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지눌의 返照 수행방법은 자심을 통해서 마음을 卽하여 바로 들어가고 있는바, "불성이 몸 가운데 있지만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은 <중략>, 色身은 地·水·火·風 四大로 인연이 되어 모인 바이기 때문에 그 성질은 미련하여 情識이 없으니 어찌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은 반드시 너의 佛性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성을 통해서만 너의 자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심을 돌이켜 본다면 이 또한 불성을 볼 수 있기 때문에 "異見王과 婆羅提 尊者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성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作用하는데 있습니다."고 하여 일어나고 있는 바를 돌이켜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눌은 이러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로서 규봉의 말을 인용하였다.“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調伏 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 한다. 이것은 아주 잘 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聲聞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어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고 하여 억지로 눌러 조복한다고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미혹을 끊으려고 하지말고 그 미혹이 일어나는 당처를 비추어 본다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아라. 깨달아 보면 곧 없다."고 하였으며, "미혹이 근본이 없는 것을 비추어 보면 허공의 꽃처럼 실체가 없는 삼계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이 없어질 것이며, 꼭두각시와 같은 객관세계도 마치 끊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며 비추어 돌아봄을 잊지 않고(不忘照顧), 선정과 지혜를 평등이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가벼워지고…"라고 하였다. 이처럼 잘못된 생각 妄想顚倒된 생각을 돌이켜 지혜로운 생각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지행동적 상담에서 있어서 Ellis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들이 정서적 문제를 겪는 이유는 구체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건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들에 비추어 비합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정서적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비합리적이며 왜곡되고 잘 못된 생각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상담은 현실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거나 사실 또는 그 의미를 왜곡하여 받아들이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으로서, {수심결}의 수행 방법인 반조를 통해 무명에 가린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보는 돈오적 수행방법은 인지행동적 심리상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위에서 보듯이 지눌은 반조의 논리로서 중생심에서 불심으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섰다. 그러한 예로서 반조의 개념은 {수심결}에서는 "是汝 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너의 공적영지한 마음이니, 어찌 돌이켜 비추지 아니하고 오히려 밖으로 찾으려고 하는가?", "悟後 長順照察:깨달은 후 길이 조찰", "但照惑無本", "不妄照顧", "遮照無二", "照鑑無惑" 등이 나타나며, {권수정혜결사문}에도 "廻光返照", "返照自心", "觀照自心", "觀照定慧之力"을 나타나고 있다.
2. 空寂靈知한 본래마음 찾기
지눌은 앞에서 보았듯이 반조에 의해 본래의 자기자성을 알아차림으로서 頓悟라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頓悟란 범부가 迷할 때에 사대를 몸을 삼고 망상으로서 마음을 삼아서 자성이 참 法身인줄 알지 못하고 自己靈知가 참 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 佛을 찾아서 분주히 유량 하다가 몰록 한 선지식의 들어가는 길을 지시함을 입어서 일념에 빛을 돌이켜서 자기본성을 보며"이라고 돈오를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바로 지각하여 본 공적영지한 마음은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마음이기 때문에 지눌은 그것을 과감히 지적해주고 있다..
인지행동적 상담에 있어서 인지치료는 내담자가 자신의 임의적 추측과 왜곡으로 인하여 사실을 잘못 지각하여 우울과 공포 불안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을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하여 현실과 현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철저히 분리해서 사물을 볼 수 있는 心眼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내담자는 보다 현실에 부합하고 사실에 근접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될 때 심리적 건강이 회복 될 수 있다.
自心返照하여 頓悟한 그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그 마음에 대해 종밀이 즐겨 쓰던 "空寂靈知之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눌은 이것에 대해 설명하기를 "모든 법이 꿈과 같고 또한 환과 化와 같은 고로 망념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 경계가 본래 공하니 모든 법이다 공한 곳에 영지가 昧하지 않으니, 공적하고 영지한 마음이 본래 너의 마음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눌은 마음의 본성을 "이통현 장자의{新華嚴合論}을 보고 性起에 바탕한 수행문인 범부 신입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권수정혜결사문}에도 마음을 惺惺寂寂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다. "만일 (자기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또렷또렸(惺惺)하지 않으면 그것은 혼미하게 머물게 되고, 또한 또렷또렷하기는 하지만 고요하고 고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외부로 향하는 끝없는 관심(緣慮)에 빠지고 만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의 마음은 적적하고 또렷또렷함을 표현하였으나, {수심결}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적하고 영지한 마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며 佛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중생이 깨달아야 할 근본 성품으로 보았다. 이러한 마음을 봄으로서 참 성품을 알아차린 견성이며, 그것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과거에 훈습된 미망을 서서히 닦아내어야 하기 때문에 돈오후 점수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공적영지지심은 우리의 본래마음이며 지눌이 추구했던 진심이며 수심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바로 지각하여 본 공적영지한 마음은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마음이기 때문에 지눌은 그것을 과감히 지적해주고 있다..
인지행동적 상담에 있어서 인지치료는 내담자가 자신의 임의적 추측과 왜곡으로 인하여 사실을 잘못 지각하여 우울과 공포 불안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을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하여 현실과 현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철저히 분리해서 사물을 볼 수 있는 心眼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내담자는 보다 현실에 부합하고 사실에 근접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될 때 심리적 건강이 회복 될 수 있다.
Ⅴ. 결 어
지눌은 일반적으로 세 번의 깨침을 통해 그의 수행모습이 나타난다. 첫 번째의 문은 성적등지문으로 {권수정혜결사문}과 {수심론}을 통해 정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둘째의 문은 원돈신해문은 {원돈성불론}이나 {화엄절요}에서 선과 화엄이 둘이 아닌 性起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간화경절문은 {간화결의론}에서 간화선의 진면목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눌은 다양한 수행체계를 통해 그의 세계를 논하고 있지만 첫 번째의 깨달음인 혜능의 {법보단경}을 읽다가 마음의 중요성을 깨우쳤다는 것은 그 만큼 마음을 바로 닦는 定慧의 수행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지눌의 독특한 禪修行 체계는 頓悟漸修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전도된 마음을 반조하여 참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심리상담에 있어서도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일상 생활 과제에서 잘못 받아들여지고 왜곡된 문제들을 지각하여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를 갖도록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울러 사건과 사물이 인지적 오류에 의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지각했다 할지라도 꾸준히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을 바꾸어 나감으로서 보다 정상적이고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자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수심결}의 주요 내용은 '佛을 구하고자 한다면 佛이 곧 마음이다. 마음 밖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며 '자기성품이 곧 진리의 성품'임을 알 때, 본래면목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본래 면목이 마음에 있음을 비취어 보아서(返照) 알아차릴 때 곧 見性이 이루어지며, 見性은 곧 頓悟로서 참 성품을 보지만, 그 성품은 자심을 통해서 수행이 이루어 질 때, 마치 어린이가 어른이 되듯이 과거 생의 훈습을 타파하여야 된다는 점에서 점수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곧 體인 성품을 卽해서 用인 自心을 키워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禪門에 있어서 중요시하는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하지 않고, {수심결} 말미에서 成佛의 正因을 잃지 않도록 수행을 계속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체계는 마음의 본바탕이 공적영지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원만한 여래의 공덕상을 갖출 것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지눌의 마음 수행비결은 전도된 망상이 일어날 때 즉시 그것을 회광반조하여 그 근원이 없음을 깨달아 알아차림으로서 몰록 마음의 본성을 바로 알아 공적영지한 마음으로 回機하여 근원적인 고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전도된 마음을 반조하여 참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심리상담에 있어서도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일상 생활 과제에서 잘못 받아들여지고 왜곡된 문제들을 지각하여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를 갖도록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울러 사건과 사물이 인지적 오류에 의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지각했다 할지라도 꾸준히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을 바꾸어 나감으로서 보다 정상적이고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자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