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修心正經

醉月 2011. 4. 20. 05:04

修心正經 序

수심정경(修心正經)은
영보국정정편(靈寶局定靜篇, 수심정경 1~5장)
동현영보정관경(洞玄靈寶定觀經, 6장)
태상노군설상청정묘경(太上老君說常淸淨妙經, 7장)
태상적문통고경(太上赤文洞古經, 7장)
영보천존설대통경(靈寶天尊說大通經, 7장) 그리고 총론인 제 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보국정정편은 구한말 이옥포(李玉圃)라는 분이 지었다고 하는데 선생의 독창적인 저술이 아니라 송말원초(宋末元初)의 정소남 선생(鄭所南:1241~1318)의 태극제련내법의략(太極祭鍊內法議略)을 발췌, 수정보완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정소남 선생은 도교 영보파(靈寶派)의 도사인데 본래 남송(南宋)의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다가 나라가 몽골에게 망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도교(道敎)와 선(禪)에 심취했다고 전해집니다.

 

영보파는 타좌내련(打坐內鍊)의 공부와 선천뢰법(先天雷法), 살진군신소청부오뢰비법(薩眞君神霄靑符五雷秘法),천심오뢰정법(天心五雷正法) 등의 뇌법(雷法)으로 법술(法術)을 행했습니다.


뇌법(雷法)은 삿된 귀신을 물리치거나 망혼(亡魂)과 음귀(陰鬼)를 천도하고 제도하거나 천둥과 번개를 부르거나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는 등의 법술인 것이며 마음을 닦는 공부는 아닙니다.


태극제련내법의략의 법술에 관한 내용은 빼고 중용(中庸)의 솔성실행(率性實行)하는 정신을 더하여 이옥포 선생이 새로 지은 것이 영보국정정편입니다.
 
이 책이 증산천사(甑山天師: 1871~1909)께 전해졌는데 본인이 직접 전한 것인지 선생의 제자들이 증산천사의 문하에 들면서 전한 것인지 이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후 증산천사께서 간직하고 있다가 1909년에 입적하였는데 입적하기 전 어느날 서재같이 쓰는 방 천정에 영보국정정편을 넣고 봉하면서 외동딸 순임에게 "뒷날 여기를 열고 찾아갈 사람이 있을 터이니 이 주인이 오도록 까지는 입 밖에 말을 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 고 했다고 합니다.


원불교(圓佛敎) 2대 종법사이신 정산종사(鼎山宗師)께서 1917년 열여덟의 나이로 한창 스승을 찾아 구도행각을 할때에 순임을 만나고 순임의 인도로 천정을 뜯고 영보국정정편을 얻게 되었습니다. 

후에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를 뵙고 스승께 이 책을 바치게 되고 대종사께서 영보국정정편과 도교의 정통도장(正統道藏)에 실려 있는 정관경, 상청정경, 통고경, 대통경의 4종 도서(道書)를 합편하여 원불교 초기교단에서 교재로 활용 했습니다. 

이렇게 5종 도서(道書)를 합편한 것을 정산종사께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7장으로 정리하고 8장은 총론격으로 정산종사께서 직접 지어 수심정경(修心正經)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주산 박용덕 교무님(主山 朴龍德)의 원불교 초기교단사를 다룬 '천하농판'에서 발췌, 인용했습니다.

 

수심정경의 도교적 연원 - 안동준 -

원불교 단전주 선법의 연원을 고찰하는 데 도교보다 불교적 측면이 우선 고려되어야 하고, {정심요결}을 보완 편정한 {修心正經}은 참고교서 정도로 보아야 한다는 기존의 설에 약간의 수정을 가할 필요를 느낀다.

 

물론 현행 단전주 선법이 불교의 색채를 지닌 점은 충분히 수긍되지만, 그렇다고 원불교 교단내에서 '極切한 수양법'으로 알려진 [정정요론] 또는 {수심정경}의 영향력은 과소평가되지 않는다.

 

대산종법사는 "나는 사람을 보고 발심난 것보다도 정명도선생 詩하고 [정정요론]에서 발심이 났다."고 언명한 바가 있고, [三家修行圖]에서 {수심정경}의 내용을 圖解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대산종법사는 {수심정경}의 수련법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李仁義華의 見性을 정산종사가 은밀히 인허하는 편지글을 보면, "잃었던 집을 찾는 것은 우리 불법 공부하는 자의 일대 사명인 바 인의화 씨의 설명하신 집 도면이 대체로 이치에 합당하고 법에 어긋남이 없사오니, 보는 자의 마음에 자연중 정신적 위안을 많이 얻었나이다. 그 집의 이름은 靈寶道局이요 그 형체는 一圓相인 바 그 집을 아는 것은 見性이요, 그 집을 수호하는 것은 養性이요, 그 집을 사용하는 것은 率性이라"하였듯이 {수심정경}의 靈寶道局은 원불교 교단내에서는 見性의 消息으로 풀이한다. "도가에서 공부하는 데에 있어 혹은 큰 집을 짓고 혹은 작은 집을 짓는다 하는데 어떠한 것이 큰 집이고 어떠한 것이 작은 집입니까?"하고 질문하니 정산종사가 못 들으신 듯 답을 하지 않는 소식이고, 대산종법사는 친절하게 그 소식이 聖胎長養이라고 일렀다.


지금부터 9년 전인 1990년 늦여름에 필자는 우연히 소태산 일원상이 도교 수련 중에 나타나는 圓光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소태산 일원상의 도교적 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원고를 탈고하여 학계에 알린 이후 증산교 계열의 삼덕교 경전인 {生化正經}을 뒤적이다가 [靈寶局定靜篇]을 발견하고, 원불교의 도교 수용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게 되어 다시 1991년에 [정정요론의 성립과정과 그 성격]이란 논문을 엮어서 소태산대종사 탄생 백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논문집에 발표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논문이 발표된 2년 뒤에 박용덕의 [정심요결 유행에 관한 연구]가 나와 세간에 전설로 남은 [정심요결]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영보국 정정편]에서 {정심요결}을 거쳐 {수심정경}으로 이어지는 원불교 수련법문에 대한 시비거리가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미진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조선조 단학파 수련법문은 유불선 삼교사상을 융해한 것으로서 조선 말기에 일어난 신종교운동의 유불선 합일 사상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로 알려져 있다. {수심정경}의 수행법도 중국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의 도불 융회적인 시각과 조선조 단학파의 수련법을 계승한 것이다라는 설에 반론의 여지 없이 필자도 수긍한 바가 있다. 그 무렵에는 [용호비결]과 함께 내단수련의 법문으로 비전되는 [玄關秘訣打坐式]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비결타좌식]은 [용호비결]의 下手處를 상세히 밝히고 있을 뿐더러 계속되는 口訣에서 '空正定靜'과 '意關神心'은 先性後命의 단전주 선법과 유관한 측면이 있고, 그 과정에서 水昇火降의 현상을 보여주어서 [수심정경] 또는 [영보국정정편]의 하수처가 [현관비결타좌식]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관비결타좌식]은 北窓의 저술로 알려진 [용호비결]과는 달리, 羅浮山 도사 古空蟾의 內丹訣이었다. 일명 古先生打坐式으로 알려진 이 비결은, 玄牝道人 全秉薰이 1910년 봄에 광동성 나부산  虛觀에서 고공섬을 만나 그 문하에서 수련하면서 얻은 것으로서, 그후 1920년 북경에서 {精神哲學通編}을 간행하면서 그 속에 수록하여 세상에 공개되었다.


전병훈에 의하면 이 내단수련 비결은 여섯 차례 진화하여 가장 최근에 혁신된 것이라고 하였다. 1910년경 수십 판을 찍을 만큼 대륙에서 널리 유행한 일본인 저술의 {岡田式靜坐法}과, 이에 대한 중국적 자존심의 발로로 저술된 蔣維喬의 {因是子靜坐法}(1914)이 양생법문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정통 선가수련의 하수처를 제시한 것이다. [현관비결타좌식]은 간단 명료하면서도 빠르고 깊은 성취를 도모하고 있어서 근세 내단사상의 중요한 저작으로 간주된다. 아쉬운 점은 저작자 고공섬과 전병훈의 내력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부산 총허관 도사 고공섬의 姓인 古氏는 本貫을 廣州 增城縣에 두고 있는 토착 姓氏이다. 본명이 誠明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師承關係는 현재로서는 살펴볼 길이 없다.


전병훈은 관향은 旌善이고, 평안북도 출신임이 밝혀져 있으나, 역시 자세한 고향과 그의 생물년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금장태 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1860년 이전에 출생하여 1926년 이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가계를 보면, 려말선초에 절의를 지킨 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인 全五倫이 그의 傍祖이고, 그의 조부는 全翼厦이며, 아버지는 全璟이다. 전병훈은 華西 李恒老의 門人인 雲菴 朴文一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고 하며,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에서 監理署 監理와 中樞院 議官 및 都事 등의 관리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1907년경 대한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동성 나부산으로 은신하였다. 입산의 동기는 周易參同契를 연구하다가 스스로 깨우칠 길이 없었는데, 마침 나부산 도사 고공섬이 백발을 흑발로 바꾸는 還老返童의 異蹟을 보이자 곧바로 도교의 가르침을 구하여 10년 동안 2,000여 권의 道藏을 섭렵하고 정진하였다. 그 무렵 [현관비결타좌식]을 익혀서 7∼8개월만에 玄關을 타통시키기도 하였다고 이른다.


이러한 [현관비결타좌식]은 구한말 내단수련 구결로서, [용호비결]과 함께 천도교 등 신종교 교단내에서 현재까지 유전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린 {정신철학통편}이 1920년 북경에서 간행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정산종사가 수심정경을 편찬하는 데에 있어서는 1915년에 강증산의 제자인 김형국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하는 {생화정경}의 [영보국정정편],

또는 1917년에 입수된 {정심요결}보다 나중에 참고되었을 여지가 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1855년 을묘년 봄에 울산 裕谷의 삼간 초옥에 기거할 무렵 금강산 도승으로부터 天書를 받았다고 전한다. {道源記書}에서는 이듬해 양산 千聖山의 도통수련은 이 책에 근거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 책은 이후 종적을 감추고 그 수련법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그 책의 내용은 현재로서는 상고하기 어렵다. 다만 유교, 불교, 도교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것이라는 언급에서 곧 유불선 삼교를 융해한 서적이 아닌가 여겨진다.

  
19세기말 신종교의 秘書 授受 양상은 동학 이후 증산교에서도 보인다. 증산 강일순도 1895년 을미년 봄 古埠 斗升山 詩會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소책자를 얻는다. 그후 6년 뒤에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하여 5개월만에 도통하였다. 이 역시 그 책자의 내용이 무엇인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고, 강증산의 도통 수련이 그 책자에 의한 것인지도 左袒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소의 추측이 허락된다면, "항상 종도들을 돌려앉치시고 몸을 요동하지 못하게 하시고 잡념을 떼고 正心하라"라는 내용과 "매양 종도들을 胎坐法으로 늘여앉치시고 조금도 움직이지말라"는 내용에 비추어 현전하는 太乙呪 수련과 다른 정좌수련법문이 한켠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정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종교의 修鍊秘書 授受 과정에서 내밀한 수련법문의 정체가 드러나는 획기적인 계기가 원불교 2대 종사인 鼎山 宋奎에서 마련된다. 정산종사가 소태산의 문하에 들기 전 1917년 늦가을에 정읍 객망리 강증산 생가에서 증산교 비전의 수련법문을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즉시 강증산이 수도하였던 모악산 대원사를 찾아 석 달간 수련하게 된다. 정산종사를 시봉하던 凡山의 기억으로 정산종사가 수련한 그 책자의 이름이 [正心要訣]로 밝혀졌다. 물론 [정심요결]이 최수운이 받은 천서나 강증산이 입수한 소책자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현재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하지만, [정심요결]의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과거 원불교의 極切한 수련법문인 {수심정경}과의 관계가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증산교 수련법문을 원불교에서 차용하였다는 시비거리는 [정심요결]이 扶安의 隱士인 李玉圃의 [영보국 정정편]에 연원한다는 필자의 추단으로 해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강증산의 제자인 김형국의 손에서 [영보국정정편]이 출현하였지만 그 작자가 강증산이 아닌 이옥포임이 밝혀짐으로써 자연히 [정심요결]의 수련법은 증산교 계열에서 독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이옥포의 추종자인 김형국의 지도로 三德敎의 교주 許昱이 [영보국정정편]의 수련법을 익혀서 도통하였다는 사실은, 강증산의 모악산 수련법문도 이옥포의 [영보국정정편]이 아닌가 하는 중요한 암시를 던져준다. 앞서 언급한, "항상 종도들을 돌려앉치시고 몸을 요동하지 못하게 하시고 잡념을 떼고 正心하라"는 내용과 "매양 종도들을 胎坐法으로 늘여앉치시고 조금도 움직이지말라"는 수련법은, 무엇보다도 [영보국정정편]에서 제시한 定靜修煉 법문과 맥락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옥포의 제자인 김형국이 강증산 계열로 흘러들어간 사실에 비추어 [영보국정정편]이 강증산 계열의 수련법문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수련법문이 다시 [정심요결]로 제목이 바뀌어 정산종사에 의해 입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산종사가 강증산 생가에서 입수한 [정심요결]은, 다름 아닌 [영보국정정편]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박용덕에 의해 공개된 [정심요결]의 내용이 [영보국정정편]의 완역본임이 이를 뒷받침한다. 설사 이러한 사실이 추측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심정경}의 연원 문제는 이제 원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증산교까지 포괄하는 구한말 신종교의 사상적 기저를 해명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보국정정편에서 수심정경으로 이어지는 수련법은 도교적 성격의 수련법임에는 여실하나, 그러한 수련법의 성격을 구명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필자는 {수심정경}의 도교적 연원 문제를 새로이 고찰하고자 묵혀두었던 [현관비결타좌식]을 다시금 꺼내어 살펴 본 결과 새로운 수확이 용이하게 거두어 질 것 같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닥친 난관은 [용호비결]이나 [현관비결타좌식] 모두 閉息을 강조한 수련법이라는 데 있다. 물론 소태산이 구도 행각할 때에 단전호흡으로 몸안에 생긴 적을 없앴다는 말에서 치병 효과가 탁월한 폐기수련의 증거를 찾을 수 있고, "禪의 강령은 息妄顯眞 水昇火降이며, 자세는 緊紮穀道 腰骨竪立이다"라는 대산종법사의 말을 [현관비결타좌식]의 '閉氣腰挺' 구결과 연관지어 해석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나, [수심정경]과 현행 원불교 단전주 선법의 수행법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 것은 부정하기에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전진교 계열의 내단수련법을 중심으로 살펴 본 데 방법론상의 오류에 기인한다. 널리 알려진 전진교 내단수련법은 영적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될지도 모르지만, {수심정경}에서 언급된 靈寶修鍊은 결코 전진교의 수련법으로 설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야를 넓혀 祭儀道敎인 正一敎 수련법을 눈여겨 본 까닭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남송의 靈寶派 수련법이 구한말에 유입되어 암암리에 유행하다가 {수심정경}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은 송말원초의 인물인 鄭思肖(1241-1318)가 남긴 {太極祭鍊內法}에서 드러난다. {太極祭鍊內法}은 至元 7년 1270년에 편찬된 것으로, 至正 7년 1347년에 王道圭가 重刻하고 明 永樂 4년 1406년에 다시 袁靜和가 중각하였다. 지금은 {道藏}의 洞玄部 方法類에 수록되어 전한다. 여기서 祭鍊內法이라고 함은 곧 도교의 靈寶齋法 가운데 하나를 이르는데, 죽은 자를 위하여 음식과 符呪로써 그 영혼을 제도하는 의식의 일종이다. {太極祭鍊內法}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은 [太極祭鍊內法]으로서 귀신을 祭鍊하는 儀式과 符呪가 실려 있고, 중권과 하권은 [太極祭鍊內法議略]이라 하여 祭鍊法事에 대한 편찬자의 견해를 기술하였다.

 
{태극제련내법}이 {수심정경}의 연원 문제를 해명하는데 시사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영보국정정편]의 母本이라는 데 있다. 살펴보면 [영보국정정편]의 주된 내용은 {태극제련내법}을 발췌하여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극제련내법}의 순서대로 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大抵鍊度是鍊自己造化以度


㈏ 心火下降則腎水上升 口中眞水滿口 甘潤香美者 卽腎中眞水也…(중략)…坎離交  水火旣濟之後 造化皆上朝泥丸…(중략)…運我一點靈光 化爲火鈴 上透泥丸…(중략)…苟力行之則 頂門微動…(중략)…頂門當豁然 初如萬蟻集而甚痒 後如巨石裂而大開…(중략)…此法與默朝上帝法 實同一理


㈐ 默朝上帝法 當先注意下丹田 良久 水火交  玉池水生 至滿口嚥下…(중략)…泥丸頂門 若不運玉池水嚥下…(중략)…則炎上…(중략)…以雙眼當我胸前 低垂乎臍下…(중략)…後高升乎頂上 自然水火循環而轉 久行則 精神皆朝於泥丸…(중략)…日日半夜淸晨 常行內鍊法之後 仍想火鈴上透泥丸


㈑ 則耳目俱淸 身心俱忘 神 俱爽 內外俱空 泯於深定 湛然至一 是先全我太一之天而後…(중략)…老子曰歸根曰靜…(중략)…神 冷冷然而淸 神光炯炯然而明…(중략)…無地不燭…(중략)…喧動則神   然而昏 神光默默然而晦
㈒ 綿綿密密 念而無念 一心不動 百 歸源 自然火降水升  定神淸 泰宇發光 虛室生白 上透天界 下破地獄 空空洞洞 光明無邊 勤而無間 久而不  鬼神境界 洞視徹見


㈓ 夫初學靜坐 必苦於心不定 繁雜之念 一時頓作 切不得急欲定之 若急欲定 反不得定 惟寬寬慢慢 任之自然靜定 譬如濁水待其淸則自淸 急欲澄則難澄 是故定觀經以束心太急爲戒 或心不定 或惡境 或別境出現 當回心泯意 多多密念 太一救苦天尊聖號 自然靜定


㈔ 萬象森然 不可怠忽…(중략)…幽冥境界 只在我一念轉移間 竟以一點眞心 反歸玄妙精誠之極 鐵石俱開


여기서 ㈎에서 ㈐까지는 [태극제련내법의략] 중권에서, ㈑ 이후는 [태극제련내법의략] 하권에서 취한 것이다. 이를 보면 [영보국정정편]의 대부분이 정사초의 {태극제련내법}을 발췌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영보국정정편]과 [태극제련내법의략]을 대조하여 보면, 이옥포가 단순히 영보파 수련법을 답습하지 않고 유교의 率性修道 차원으로 변용하여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극제련내법의략}은 본디 祭鍊魂魄을 지향하는 鍊度修鍊書이다. 그런데 이옥포는 鍊度에 관련된 장황한 부분을 대폭 축약하고 {중용}의 至誠을 서두에 내세워 率性明德하는 새로운 수련법문으로 개편하여 [靈寶局定靜篇]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는 원불교의 정산종사가 다시 {수심정경}으로 개편하여 불교적 색채를 띤 修眞養性의 하수처로 변용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다만 南昌上宮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를 文理에 따라 이해하여 靈寶派의 견해와 다른 점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번역본 [정심요결]에서는 南昌上宮을 상단전 니환궁으로 이해하였는데, 실은 중단전 絳宮이다. 원불교 초기교단사에서 "남창상궁은 눈섭새라"({정심요결번역})고 하여 南昌上宮을 상단전으로 본 실수는 아마도 번역과정에서 소태산의 見性 체험이 밑그림으로 轉寫되어 불구슬(火鈴)을 慧光으로 간주한 것 같다. 원문은 "運我一點靈光 化爲火鈴 上透泥丸"이라 되어 있는 바, 이옥포가 곡진하게 불구슬이 남창상궁에 일어남을 강조하여 "運我一點靈光則化爲火鈴於南昌上宮하야 上透泥丸玄宮이니([靈寶局定靜篇])"라고 하여 부연하였지만, 불교의 鍊性 과정에서 나타나는 性光을 중시한 탓에 이를 간과하고 남창상궁과 니환궁을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정정요론} 및 {수심정경}에서 이처럼 중단전을 간과한 것은 하단전의 命光과 상단전의 性光을 이 남창상궁에서 합일하는 도교 영보파의 내단수련법과 그 궤를 달리한 불교적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영보파에서는 靈을 性이라 하고 寶를 命이라 하고 性命合一의 상태를 靈寶라 이른다.


이러한 靈寶에 대한 해석이 국내 수용단계에서 本性으로 이해됨은 영보파의 영향이 師資傳承이 아닌 문헌전승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다.
三山符錄派의 하나로 알려진 영보파는 靈寶經의 전승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도교의 교파이다. 上淸靈寶天尊을 받들고 濟世度人을 宗旨로 내세우는데 일명 閤 山派라고도 불리운다. 후한 이후 葛玄에서 鄭隱, 정은에서 다시 葛洪으로 이어지는 중국도교의 대표적인 부록파이다. 葛巢甫 대에 이르러 교단을 형성하고 송대에 강서성 합조산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남송 이후 南宗 內丹法을 채용하여 독특한 雷法을 만들었으며, 이를 통하여 혼백을 제도하는 祭鍊法이 대표적인 도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보파는 본래 齋醮와 祭鍊에 능하지만 대다수 영보파 도사들이 민간 활동에 주력하여 조정의 부름을 받아 封號를 받은 인물은 거의 드물었다. 자연히 그 영향력이 천사도나 모산파에 미치지 못하고 원대 이후 세력이 대폭 약화되어 13세기에 龍虎山 천사도에 흡수된다.


그러나 송말원초에 鄭思肖(1241-1318)이 나타나 실전된 영보파의 비법을 계승하게 된다. 정사초는 남송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福建省 連江 출신이다. 널리 알려진 이름이 思肖이고 字는 憶翁이며, 自號는 所南, 三外老父 또는 三外野人이다. 정사초의 師承關係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諱가 起이고 字가 叔起라고 하는 菊山先生의 道脈을 계승하여 馬行之, 沈之我 등 제자를 두고 있다고 전한다. 그는 본래 남송의 太學生으로 있었는데 元軍이 남침할 때 조정에 저지대책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송이 망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강남지역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도교와 禪에 심취하였으며, 南宋의 신하로서 元에 출사하는 무리를 기롱하기도 하였는데 본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종에 앞서 자신의 碑文에 "大宋不忠不孝鄭思肖"라고 써 달라고 당부할 만큼 도사로서는 드물게 사회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송이 망한 후에 이름을 바꾸어 思肖라고 하였는데 肖는 趙에서 취한 것으로서, 송을 끝까지 사모한다는 思宋朝의 뜻이 담겨 있다. 趙는 宋朝의 姓이기 때문이다. 字인 憶翁도 고국을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號 所南을 통하여 원과 거리가 먼 강남에 살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그가 머무는 거처에 "本穴世界"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시종일관 宋朝에 대한 열망을 표명하였다. 本字의 열 十자를 穴字 안에 옮겨 놓으면 곧 "大宋"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 앉거나 누울 적에도 반드시 북쪽을 등졌고, 逸品으로 알려진 그의 墨蘭에 결코 뿌리를 그리는 법이 없어서 세간에 알려진 이른바 정사초의 蘭에 뿌리가 없다는 말은 곧 망국의 한과 슬픔을 상징한 것이 되었다.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寒菊]의 시 구절에도 고국을 향한 변함 없는 충절을 그려내기도 하였는데, "차라리 가지끝에 향기를 머금은 채 죽을지언정 어찌 북풍에 휘말려 꽃잎을 떨구겠는가(寧可枝頭抱香死 何曾吹落北風中)"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사초의 두드려진 업적은 {태극제련내법의략} 3권을 지어 쇠락한 영보파의 度亡祭鍊 술법을 부흥시킨 데 있지만, 그의 새로운 祭鍊術法은 유교의 경전인 {맹자}나 {중용}까지 인용하여 삼교합일적인 성격을 드러내면서 그 근저에서 元에 항거한 亡魂을 제도하는 鍊度法을 펼쳐 멸망한 고국에 대한 충정의 뜻을 기탁한 점이 무엇보다도 주목된다.


영보파의 齋醮祭鍊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上淸靈寶大法}이나 {靈寶玉鑑} 등에 있는데, 上淸派나 靈寶派 전통의 存想法에 송대 유행한 內丹法과 雷法을 채용하여 내단수련을 기본으로 하여 符 法을 시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亡魂과 陰鬼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술 시행자의 철저한 內鍊을 먼저 요구한다. 정사초은 {태극제련내법의략} 中卷 서두에 "若欲行祭鍊者當熟看此說 不自打坐內鍊者非吾道侶"라고 하여 먼저 내련법을 익히지 않으면 자신의 道侶가 아니라고까지 극언한 바가 있다.


정사초가 제시한 영보파의 수련법은 내단수련을 통하여 개인의 得仙을 목표로 하는 내단파의 수련과 사상적 기저가 다르다. 그의 내단수련은 인간을 소우주라 하였듯이 수승화강을 통하여 음계의 망혼을 제도하여 이들을 해원시키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그는 人身이 정화되는 것이 곧 천지가 정화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齋醮符錄을 시행하기에 앞서 내련수양을 강조한 것도 齋醮가 곧 內鍊임을 내다본 것이다.

 


도교 영보파의 수련법문이 어느 시기에 국내에 수용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간단히 해결될 과제로 생각되지 않는다. {經國大典} 권3 [取才條]를 보면 조선 초기에 昭格暑에서 여러 祭儀道敎의 경전과 함께 {靈寶經}이 읽혔다고 하고, 蛟山의 [南宮先生傳]에 {度人經}의 이름이 엿보이나 직접적인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이능화가 백백교에 대해 언급한 최남선의 말에 기대어, 고종 光武년간(1897-1907)에 池運英(1852-1935)과 崔時鳴이 중국 江西省 龍虎山에서 張天師像을 모시고 와서 揚平 龍門山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는 {朝鮮道敎史}의 기록에 있다.

 

이에 고종이 지운영과 최시명 등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강서성 龍虎山에 가서 張天師像을 얻어서 돌아와서 양근군(현 양평군) 龍門山에 도관을 짓고 봉안하였다. 이는 중국의 도관이 용호산에 있는 것을 본받아 또한 용문산을 택한 것이다. 이는 光武 년간에 있던 일인데 도관은 지금 폐지되었다.

 

지운영이 다녀간 용호산은 대표적인 도교 符錄占驗派인 正一敎의 鎭山이다. 정일교는 원래 五斗米敎에서 출발한 天師道를 가리킨다. 천사도의 본거지는 사천성 成都 부근의 鶴鳴山이었는데, 13세기에 張盛이 강서성 용호산으로 옮겨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넓혀서 茅山의 上淸派와 閤 山의 靈寶派를 통합하여 三山符錄派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 무렵 대륙의 북방에는 全眞敎가 크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탓에 정일교는 부득이 하게 남방 도교의 중심이 되어 長江을 사이에 두고 전진교와 남북으로 대치하게 된다. 위의 인용처럼 지운영과 최시명이 왕래한 중국 강서성 용호산은 남방도교의 聖地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사초의 {태극제련내법의략}에 천사도 제43대 天師인 張宇初(1359-1410)의 서문이 있는 점으로 보아서, 이 영보파 경전은 명대 이후 천사도에서 전승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지운영이 천사도의 祖庭인 龍虎山 天師府에서 張天師像과 함께 용이하게 입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추측을 허락하면, 지운영이 천사도 교단에 보관된 [태극제련내법의략]을 입수하여 국내에 들어오고, 그것이 부안의 이옥포에게로 전달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910년대 서울에 있었던 以文會의 정신적 지도자인 雪峯 선생이 바로 용호산을 다녀온 지운영인데, 권태훈옹의 말에 의하면 최남선을 비롯한 회원들에게 九曲詩라는 觀法을 가르쳤다고 하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곡시는 곧 朱子의 武夷九曲詩를 가리키는데, 일명 武夷櫂歌라 하여 조선조 선비들 사이에는 儒家의 道法을 전하는 시로 전해진다. 그리고 강서성 용호산은 북건성 武夷山의 북쪽 사면에 인접하여 무이구곡시의 도법이 유전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바, 유가적 소양을 갖춘 지운영이 여기서 무이구곡시의 새로운 해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권태훈옹이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능화의 기록은 설봉 지운영의 도교적 위상은 재검토할 만큼 의미 깊다. 왜냐하면 지운영이 전수한 武夷九曲詩 道法은 정산종사의 觀法이자, 다음과 같이 삼덕교 허욱(1887-1939)의 구곡도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24年 3月에 三棟을 朱子의 武夷九曲詩의 九曲을 따라 九曲道房으로 三棟道房을 再編成하였다. 이 組織은(九曲道房)은 布敎地域을 一曲에서 九曲까지 확정하여 每曲에 敎人數를 八十名 以上으로 한 組織體이다.

 

포교를 위하여 조직체를 두는 전형적인 사례는 천사도에 있다. 천사도는 중국 각처에 24治를 두어 교단조직을 관리해 왔다. 증산교 계열의 삼덕교는 1921년에 포교를 위하여 도방 조직을 결성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 많은 신도를 확보하였다. 도방 조직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上棟道房, 中棟道房, 下棟道房으로 하여 이를 삼동도방이라 불렀는데 다시 1924년에 武夷九曲을 본받아 九曲道房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보파 계열의 경전인 [태극제련내법]이 이옥포의 [영보국정정편]으로 나타나고, [영보국정정편]이 삼덕교와 원불교에 수용된 사실을 주목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무이구곡시의 경우에서도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삼덕교에서 무이구곡시를 구곡도방으로 변용한 것처럼, 원불교에서도 무이구곡시는 소태산의 邊山九曲路詩와 이춘풍의 [邊山歌]로 개작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소태산이 변산 월명암과 봉래정사에 있으면서 무이구곡시를 즐겨 읊고 이를 영광의 제자들에게 적어보내 읊게 하였다는 말로 미루어, 武夷九曲詩의 道法이 소태산에서 정산을 거쳐 대산으로 은밀히 전해 옴은, 영보파의 도법과 구한말 선도 수련파와의 道統 계승 문제와 관련된 주목을 요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일교로 수렴된 영보파의 수련법문이 구한말에 국내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그저 추측해 보는 것에 그치고 단정을 내리기에는 이른 느낌이 있다. 몇 해전 경복궁 연못을 준설하는 과정에서 구리로 만든 거대한 龍을 발견하여 들어내었다는 언론보도는 祭儀道敎의 유입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그 銅龍의 존재로 말미암아 國泰民安을 도모하는 전통적 도교의식 중 하나인 投龍儀式이 경복궁과 관련하여 시행되었음을 입증한다 하더라도, 대원군 시절 또는 그 전후에 제의도교가 유입되었다고 상고하기에는 주어진 문헌자료가 전무하다.

 

呼風喚雨하는 강증산의 도술이 正一雷法과 유사하기는 하여도 반드시 영보파 수련법에 근거하였다는 자료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다만 이옥포의 [영보국정정편]이 강증산의 주변인 의해 전승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그의 從徒에게 太乙呪 수련에 앞서 정좌수련을 강조한 사실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관련된 맥락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까지 論究한 사실을 중심으로 수심정경의 연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곧 영보파 계열의 [태극제련내법]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부안 출신 이옥포 道人에게 흘러들어 재편집되어 {生化正經}의 [영보국정정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영보국정정편]이 1923년에 [定靜要論]이란 이름으로 회원의 훈련교재로 사용되다가, 1924년 5월 13일에 봉래산인 이춘풍에 의해 [정심요결]로 번역되었으며,

 

그 번역의 저본은 [定靜要論]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번역된 [정심요결]이 {수양연구요론}에 삽입된 [정정요론 상]의 저본이 되었다. 그러나 수심정경을 {수양연구요론}에 삽입된 [정정요론 상]과 비교하면 첨삭부분이 대폭 나타나서, 소태산의 [정정요론]이 [수심정경]의 저본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수심정경의 저본은, 이공전의 진술 그대로 한문본 [正心要訣]이거나, [영보국정정편]일 가능성이 있는데, 수심정경의 그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정정요론]과 다른 漢文套 문장이기 때문이다.

 

'光明이 無邊하고 動而無間하야', '我旣有此明德하니 豈不修煉而 明之乎아', '大抵定靜煉度之法은 乃煉自己 造化道하야 苟力行之하면 心火下降하고 腎水上昇하나니', '此乃默朝上帝法으로 實同一理也라' 등의 한문투는 [영보국정정편]에 그대로 드러난다.

 

[정심요결]이 [영보국정정편]을 가감삭제 없이 이춘풍에 의하여 번역된 것이었고, 번역을 마친 후에 그 제목을 [정심요결번역]이라고 명기한 점으로 미루어, 정산종사가 1917년에 입수하여 1918년에 입교할 당시 소지한 [정심요결]은, [영보국정정편]을 그대로 필사한 한문본일 가능성이 있다. 이 한문본 [正心要訣]이 1923년 훈련교재로 채택되면서 [定靜要論]으로 알려진 바, 1924년에 이춘풍에 의해 번역된 [정심요결]은, 사실상 [영보국정정편]을 번역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정심요결]은 1924년에 나타난 [定靜要論]이었고, 1927년 {수양연구요론}이 발간되면서 삽입되어 주요 어휘가 한자로 바뀐 [定靜要論 上]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한편에 있어서는 한문본 [正心要訣]이 다시 편집되어 1951년에 {수심정경}으로 나타나 훈련교재로 사용된다. 이춘풍에 의해 번역된 [정심요결]이 수심정경의 편찬에 참고된 것이 아니라, 한문본 [正心要訣]이 참고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은밀히 전해지던 한문본 [正心要訣]은 바로 [靈寶局定靜篇]의 同名異書라고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현전하는 [정심요결번역]의 뒷부분에 [영보국정정편]에 없는 내용이 앞과 다른 글씨체로 번역되어 실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정정요론 하] 대목과 {수심정경}의 제6장과 제7장의 일부 내용으로 연결된다. 문제는 인용된 경전의 구절이, [영보국정정편]과 [태극제련내법]에도 없는 도교경전이라는 점이다. 이들 경전은 [定觀經]·[洞古經]·[淸靜經]·[大通經]으로 [해동이적] 계열의 조선조 단학파의 주요경전이었다. 번역된 [정정요론]과는 달리, {수심정경}에서는 한문 원문을 그대로 싣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수심정경}이 한문본 [正心要訣]을 직접 底本으로 하였다는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한문본 [正心要訣]을 정산종사가 강증산의 생가에서 입수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당시의 한문본 [정심요결]은, 이옥포의 [영보국정정편]에 강증산 계열에서 다시 조선조에 유전되는 단학파의 주요 경전을 덧붙여 편찬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런데 이옥포의 [영보국정정편]과 [정심요결]의 편찬의식이 도교적 색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삼덕교로 이어지는 데 비하여, "평소에 단전주를 하되 심단(心丹)을 할지언정 기단(氣丹)은 말라"는 가르침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산종사는 수도의 방편으로서 [정심요결]을 수용하여, 이를 修證한 후에 도교적 색채를 지우고 오늘날 {수심정경}으로 改撰한 점이 주목된다. [수심정경]과 [정정요론]은 모두 [영보국정정편]을 모본으로 하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정정요론]이 초기에 [영보국정정편]과 조선조 단학파 경전의 내용을 번역하여, '太乙救苦天尊' , 또는 '天尊]', '老君' 등의 도교적 神格의 名號만 삭제 또는 수정한 것 이외는 대체로 그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반하여, 수심정경은 이를 번역하여 싣지 않고, 원불교 교리가 체계화되어 감에 따라 鼎山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편집하여 수용한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수심정경] 제8장 總明綱要 대목이다. {대종경}의 '外定靜 內定靜' 법문 등은 {수양연구요론}보다는 {수심정경}의 교리체계와 관련되지만, 정산종사가 수증하여 개찬한 {수심정경}의 이와 같은 내용은 현행 원불교의 교리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이옥포가 [태극제련내법]을 刪定하였지만,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영보파의 도교적인 의식을 계승하여, 이를 [영보국정정편]으로 改撰한 의식과는 크게 구분된다.

 

도교적 수련법문인 [정정요론]을 실은 {수양연구요론}은 1927년에 발간되어 초기 원불교인들의 필독서가 되었지만, 1932년에 {육대요령}을 발간한 이후 초심자들에게 이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고 상당한 공부길로 들어선 이에게만 소태산이 친히 한 권씩 내려주었고, 그후 {불교정전}을 편찬할 때 [정정요론]의 수련법은 좌선법과 단전주법으로 대체하면서부터 [수양연구요론}은 절판되어 다시 중간하지 않았다. 1951년에 유인판으로 나온 {수심정경}이 이 {수양연구요론}의 수요를 대체하였다고 하니, 이른바 [정심요결]의 수련법이 '극절한 수양법'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불교 교단내에서 극절한 수양법으로 비전된 {수심정경}이 멀리 영보파의 祭鍊鍊度 수련법에 연원한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태극제련내법의략}에서 [영보국정정편]으로, [영보국정정편]에서 [정심요결]과 {수심정경}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공히 유불선 삼교합일 사상을 기저로 하였지만, 다시 각각 도교와 유교와 불교를 主調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편찬 의식은 어떤 면에서는 신도교, 신유교, 신불교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영향 관계의 系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구시대 종교의 사명이 다하고 신시대 종교의 지향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각각의 종교가 색채를 달리하지만 궁극에 있어서는 개인의 안위보다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 사회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방법론상으로는 개인의 수양과 사회의 정화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라는 일련의 의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수심정경}과 정산종사의 <三同倫理>의 관계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明定靜大旨 정정의 큰뜻

夫修養者는 修基忘念하고 養基眞性이니 養性之工은 以定靜으로 僞本이니라
대범 수양이라 함은 그 망령된 생각을 닦아 없애고 참된 성품을 양성함이라 양성하는 공부는 정하고 고요함으로 근본을 삼을 것이니라.

 

定靜之法은 懷至廣至大之願하고 發至誠至信之心하여 念念不忘 則定靜을 可得이니라
정하고 고요히 하는 법은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큰 발원을 품고 또한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신심을 발해서 생각 생각이 그 발원한 바를 잊지 아니하여야 정하고 고요함을 가히 얻을 것이니라.

 

定者는 一定於此而諸他道理가 無加於吾之所做요
정이라 함은 한번 이에 결정한 바에는 다른 도리가 나의 공부하는 바에 더함이 없을것이요,

 

許多法術이 不出於渠之惑世而已며
허다한 법과 술수가 모두 다 세상을 미혹케 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며,

 

靜者는 歸於一定而不復動於他하여 富貴營華가 不能誘心라고 金玉寶貝도 無可奪志니
고요하다 함은 한번 결정함에 돌아가서는 다시는 다른 데에 움직이지 아니해서 부귀영화도 능히 내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며 금옥보패도 가히 뜻을 앗아가지 못할 것이니

 

一志立定에 五心不動이면 則孟子之不動心과 老子之歸根靜이 皆是也니라
한번 뜻을 세워 정함에 다섯 가지 마음으로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맹자의 부동심과 노자의 근본에 돌아가고요 하다 함이 다 이를 두고 이름이니라

 

上無色界하고 下無慾海하여 一念萬年에 耳目이 俱淸하고 身心이 俱忘하여
위로 색의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아래로 욕심의 바다에 물들지 아니하여서 오직 한 생각으로 만년을 지낸다면 이목이 한가지로 청정하고 심신을 다같이 잊어버려서

 

神氣俱爽하고 內外俱空하여 泯於深定寂靜하여 湛然至一이라 先全我太一之天而後에
정신과기운이 한가지로 상쾌하고 안과 밖이 다같이 공해서 깊이 정해 적정한 데에 빠져 들어가서 담담하게 지극히 한결 됨이라 먼저 내 자신이 가장 하나인 천성을 온전히 한 뒤에

 

神氣冷冷然而淸하고 神光炯炯然而明하여 無地不燭하고 無理不通이나 然이나
정신과 기운이 서늘하게 맑고 싱그러운 광명이 초롱초롱하게 밝혀서 빛이지 아니한 땅이 없고 통하지 아니한 이치가 없을 것이나,

 

若有喧動이면 則神氣惛惛然而昏하고 神光黯黯然而晦하리니 何益於思想之所存哉아
그러나 만일에 복잡하게 동함이 있으면 정신과 기운이 몽롱하게 어두워지고 싱그러운 광명이 멍하게 어두워지리니
어찌 생각하고 생각하는 바를 존속함이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唯綿綿密密하여 念而不忘則 自然一心不動하고 百脉이 歸源하여 火降水昇에
오직 간단이 없이 지속하여서 일념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여야 자연히 한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일백 맥이 근원에 돌아가 불은 내리고 물은 올라서

 

氣定神淸하여 上通天界하고 下達地府하여 空空洞洞에 光明이 無邊하고
기운은 하나에 정하고 정신은 맑아서 위로는 천상계를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사무쳐서 비고비어 맑고 맑아서 그 광명이 갓이 없고

 

動而無間하여 一切玄妙之境을 洞撤開悟하리라
동하되 사이기 없어서 일체 현묘한 경지를 맑고 밝게 깨우쳐서 열릴 것이니라.

 

心 丹連 工夫

明禁忌

 

做工之際에 有五忌一曰不信(不信正法)이요
공부를 할 때에 다섯 가지로 금기 힘이 있으니, 하나는 믿지 아니함이요

 

二曰 泄瀆(不謹嚴)이요
둘은 거만하게세여 나아감이니 근엄치 아니함이요

 

三曰 執着自意(不知是非 固執自意)이요
셋은 자기 자의에 집착함이니 고집 불통함이요

 

四曰 輕發喜惡이요
넷은경망스럽게 선악간 경계에 동요됨이요


五曰 生欲速之心이니
다섯은 성질이 급해서 무엇이든지 속히 하고자 함이니

 

皆爲定靜之病이라 必落邪道矣리니 敬之愼之하라.
모두가 다 정정 공부를 하는 데에는 병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사도에 떨어지게 되나니 공경하고 조심할 것이니라.


若初學靜坐에 必苦於自心不定이면
만일에 초학자로서 고요히 좌정 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기의 마음이 정하지 못함의 괴로움에 얽매이면,


煩雜之念이 反生하여
번잡한 마음이 도로 생기나니

 

禁忌則心惱益亂하느니 惟在寬寬漫漫하여
금기하기로 하면 오직 마음을 너그럽고 넉넉하게 하는 데에 힘을 모아

 

任之自然이면 定靜을 自得이리니
자연 한데 맡기고 보면 정정을 스스로 얻게 되나니,

 

譬濁水待淸에 急欲澄淸하여
비하 건데 탁한 물이 맑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아서 급히 맑히고저 하여

 

頻考數察하면 則泥濁尤起也라
조급히 자주 살피고 보면 진흙에서 일어나는 탁한물이 일어남과 다름이 없느니라,

 

故로 定觀經에 以東心太急으로 先爲上戒하여
그러므로 정관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음 묶기를 급히 함을 제일 먼저 경계를 하여서

 

若或未定에 惡境이 出現이면
만일에 마음이 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어서 좋지 못한 경계가 나타나면

 

則回心泯泯하여 求意閒閒하며
마음 돌리기를 민첩하게 하고 뜻 구하기를 한가롭게 하며

 

亦密念師門聖訓하여
또한 스승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늘 생각하여

 

自心本願을 轉轉返思하면 自然定而靜矣니라.
자심에 근본 발원함을 끊임없이 생각코 생각하면 정하고 고요하여 지나리라” 하였느니라.

 

凡行事之際에 萬像森列하느니
대범 모든 일을 행할 때에 일만 형상이 나타나느니

 

不可怠急이라
가히 급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요,

 

粉紜華頭가 悉從心頭所出하리니
분운하고 번화한 생각머리가 다 마음머리로 쫓아 생겨나는 것이니

 

一切奇異殊勝善怨應變之事가 隨汝心設하며
일체기이하고 수승한 착하고 원망함이 경계를 따라 응해서 변화됨이 너의 마음을 따라 만들어지며

 

隨汝心生이며 隨汝心求며 隨汝心現하느니
너의 마음을 따라 생겨나며 너의 마음을 따라 구하게 되며 너의 마음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若使道心으로 爲人心所牽이면
만일 도심으로 하여금 인심에 끌리는 바가 되고 보면

 

便墮他圈中하여 正退邪進하리니
문득 다른 권내로 떨어지게 되어서 바른길은 멀어지고 삿된 길로 나아가게 되나니

 

豈不愼哉아
어찌 삼가지 아니하겠는가.

 

且幽冥境界는 一念轉移之間에
또한 깊숙하고 현묘한 경계는 한 생각 옳게 돌리는 데에

 

便現無量塵劫하리니
문득 헤아릴 수 없는 생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니,

 

愼勿役心于華頭所施하라.
조심하고 삼가 해서 변화머리 베푸는 데에 미음을 부리지 말지니라.

 

若或示之에 視若不見이니
만일 혹 보임에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할 것이니

 

捎不掛心於心意하면
잠깐 이라도 미음의 뜻에 마음을 걸어두지 아니하면

 

必以一點眞心이 反歸玄妙하여 精誠極一하면
반듯이 한 점 참마음이 현묘한 경계에 돌아와서 정성이 지극히 한결 되면

 

鐵石이 俱開하고 骨肉分形하여
쇠와 돌이라도 함께 열리며 뼈와 살이 얼굴로 나누워져

 

心爲萬靈主요 身爲陰陽造化之宅이라
마음은 일만 신령의 주인이 되고 몸은 음양 조화의 집이 되느니라.

 

陰符經云 五賊이 息하면
음부경에 말씀하기를 “다섯 도적이 쉬게 되면

 

宇宙在乎手하고 萬化生於身者此也라.
우주가 손바닥 가운데 있고 일만 변화가 몸으로부터 생긴다”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니라.

 

近世鍛煉之士가 往往以外俱華飾으로 宣念科呪하고
근세에 마음을 단련하는 선비가 간혹 밖으로 형식만을 꾸밈으로써 주문이나 베풀어 암송하고

 

懷慾稱修하여 空度歲月하느니
수도를 한다고 생각해서 공연히 세월만 보내나니

 

豈入於眞境哉아
어찌 진경에 들겠느냐,

 

蓋夫至道는 深窈나 不在其他라
대개 지극한 대도는 심요하나 그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人能弘道하면 道不遠人이니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면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하나니

 

朱子曰 道也者는 不可須臾去身이라 하시고
주자 말씀하기를 “도란 가히 모름지기 몸을 떠나지 아니한다” 하시고,

 

子思曰 率性之謂道라 하시고
자사 말씀하시기를 “성품을 거느리는 것이 도라” 하시고,

 

孔子曰 知止而後에 有定하고 定而後能靜하고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칠 줄을 안 뒤에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靜而後에 能安하고 安而後에 能慮하고 慮而後에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밝은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난 뒤에 능히 얻는다:

 

能得이라 하시니 此皆自明其明德之事也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다 그 자성자리를 밝히는 일이라.

 

我旣有此明德하니 豈不修煉而明之乎아
나에게 이미 이 자성자리가 있으니 어찌 수련을 하지 아니하고 밝힐 것이리요

 

旣知明德之稟我하고 知修煉之在我하면
이미 성품자리가 나에게 있는 줄을 알고 또한 수련함도 나에게 있는 줄을 알면

 

則修而得之가 惟在我一心이니
곧 닦아서 얻어감이 오직 나의 일심 가운데 있는 것이니

 

豈區區於外物하고 孜孜於外飾하여
어찌 감히 외물에 간절히 바라며 외물 하는데 자자해서 써 정하고 고요하고자 하여


以慾定靜而得眞道哉아.
참 도를 얻으리요.

 

 明鍊氣方法

 

夫以修鍊之士가 不知水火玄妙之理와 五行生化之道하면
대범 수련하는 선비가 수화의 현묘한 이치와 오행의 변화로 생기는 도를 알지 못하면

 

則徒是粧點兒戲耳니라
즉 한갓 이 단장한 아해들의 희롱함이라.

 

大抵定靜煉磨之法은 乃煉自己造化道하여
대저 정정을 연마하는 법은 이에 자기의 조화하는 도를 단련하여

 

苟力行之하면
착실히 힘을 다해 행하면,

 

心火下降하고 腎水上昇하느니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은 아래로 내려가고 신수는 위로 오르게 되는 것이니

 

水昇火降者가 乃定靜之捷徑이요
수승화강 함이 이에 정하고 고요함을 얻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요,

 

亦延年之一道也니라.
또한 연수를 연장케 하는 도가 되는 것이니라.

 

夫人이 思慮多煩하여 心氣悖戾하면
대범 사람이 생각 생각이 많아 번잡하여 심기가 거슬리게 되면

 

則口味苦而操하고 頭腦熱而亂하리니
구미가 씁쓸하며 조급하고 머리가 더워서 어지러워 질 것이니

 

此火昇之故也요 思慮安靜하여 心氣平順하면
이는 화가 위로 오르는 연고라, 생각 생각이 안정되어서 심기가 평순 하면

 

則口味甘而潤하고 頭腦夾而淨하느니 此水昇之故也라
구미가 달며 윤활하고 머리가 시원 상쾌하고 조촐해지나니, 이는 물이 위로 오르는 연고라

 

水昇則火降하고 火昇則水不潤液하여
물이 오르면 불은 내리고 불이 오르면 물이 윤액하지 아니하여

 

而但日夜作淡燃하여 燋其靜氣而已니
다만 일야로 불꽂을 짓게 되어 그 정기만을 태우게 할뿐이니

 

是故로 修煉之始에 當謹避外境하고 深戒多思하여
이런고로 수련할 처음에는 마땅히 외경을 피하고 깊이 생각 많음을 경계해서

 

亦切莫嗔恚어다.
또 일체 성냄을 내지 말지어다.

 

使吾心身으로 安閒自適하여 寬柔自治하고
나의 심신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한가해서 스스로 적중하여 관유하게 스스로 다스려

 

而無陜心熱腦之病이니 此外煉之法也이라.
협심열뇌의 병이 없을 것이니 이는 밖으로 단련하는 법이니라.


日用動作에 隨所專心하여 東不念西하고
일용 동작하는 데에 바를 따라 전심 전력해서 동에서는 서를 생각치 아니하고

 

西不念東하여 每日夜半淸晨이면
서에서는 동을 생각치 아니해서 매일 야반청신이 되면

 

則必坐禪으로 特加精進이니
반듯이 좌선함으로써 정진할 것이니

 

坐禪之法은 先正坐體하여
좌선하는 법은 먼저 좌체를 단정히 하여 기울어짐이 없어

 

無傾委不便之感然後에
바르게 앉아 불편한 감이 없이 앉은 뒤에

 

調息下氣而注 意於下丹田하여
쉬는 숨을 고르게 하고 기운을 아래로 내리며 마음을 하 단전에 주 하게 하여서

 

守心以定하고 寂照不昧니
마음을 지키어 정하고 고요한 가운데 조감함이 매하지 아니할 것이니

 

此內鍊之法也라.
이는 안으로 수련하는 공부법이 되는 것이다.

 

行此日久하여 久久成熟하면 自然五氣相生하고
이렇게 행하기를 오래 오래해서 오래 정숙하게 되면 자연히 다섯 기운이 서로 생기가 나서

 

水火循環하여 眞一之水가 滿口하여
수화가 서로 순환하여 참되고 한결 된 물이 입에 가득해서

 

以生甘潤香味하여 異於平時하리니
써 달고 윤활한 향기로운 맛이 생기어 평상시와 기분이 다를 것이니,

 

此卽腎中眞水上昇之實證也니
이것은 신장의 물이 위로 올라오는 실증이니

 

切莫唾液하고 滿口呑下하면
간절히 액체를 뱉지 말고 입에 가득히 모았다가 삼켜 내리면

 

則身潤神通하고 精氣益暢하리니
온몸이 윤활해서 정신이 통하고 정기가 더욱 창성할 것이니

 

古聖所謂飮甘露而得長養者亦指此謂也니라.
옛 성인들이 감로수를 마시어서 장수함을 기른다는 것은 이를 이름이니라.

 

坎离交媾하여 水火旣濟之後에
음과 양이 서로 합해서 수화를 이미 보낸 뒤에

 

一身萬靈이
한 몸에 신령스러움이

 

能上朝於泥丸(泥丸頭腦也)하여 待其時宜(時宜淸晨禪定之時)하여 乃運我一點靈光이면
능히 두뇌에 올라 모아서 그 적당한 때를 기다려 이에 한 점 신령스럽게 빛남이나를 운전하면

 

則化爲火鈴於南昌上宮하여 上通於泥丸玄頂上이면 宮하리니
곧 불망울이 남창상궁에 화현해서 위로 이환현궁을 통하게 되리니,

 

其始也에 如萬蟻會集之狀하여 甚痒癢之하리니 愼勿括摩하고
처음에는 일만 개미가 모이는 것 같아서 심히 가려울 것이나 삼가 긁지 말고

 

聚精會神于 이면 則忽然淸雷一聲에
정밀히 이마 머리에 정신 기운을 모으고 보면, 곧 홀연히 맑은 우레 소리에

 

頂門이 如巨石裂開하여 一身萬靈이 出入此門하리니
이마 문이 큰돌로 두들겨 열리어서 한 몸에 담긴 일만 신령함이 이 문에 출입해서

 

形貌光明이 如望夕之月하고
얼굴에 나타나는 광명이 보름달과 같고

 

三界天眞이 雲集泥丸하여 歡喜和悅함이 眞若同氣之親하리니
삼계의 천진이 이환에 운집해서 즐겁게 화열함이 참으로 동기의 친함과 같을지니,

 

此乃黙朝上帝法으로
이는 묵묵히 옥황상제에게 조회하는 법으로

 

實同一理也이니라
실상에 있어서는 한 이치와 같은 것이니라

 

(此法은 自注意丹田하여 修煉成熟하여 任運靈氣 時工夫요 初學者强行工夫니 若欲强行此法이면 則反有上氣之病하리니 學者當愼之니라)

先行定靜之法이 蓋由此事라,
먼저 정하고 고요하게 하는 법이 모두 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는 것이라.

 

非定靜이면 水火不濟하고
정하고 고요함이 아니면 수화가 고르지 못하고

 

水火不濟하면 則靈氣不會하며 靈氣不會하면 則慧門不能以開하리라.
수화가 고르지 아니하면 지혜의 문이 능히 열리지 못하는 것이니라.

 

是法은 乃傳道之秘요 修道之要며
이 법은 이에 도를 전하는 비결이요 도를 닦는 요긴함이며

 

覺道之眞訣也니 得此法하여 依此而行者는 可克日而成功也니라.
도를 깨닫는 비결이니 이 법을 얻어 이에 의해서 행하면 가히 날을 기약하고 성공하리라.


道門에 드는 요긴한 法(1)

明入門要法(1)

 

禪要에 云 大要有三하니
선요에 이르기를 대요에 세 가지가 있으니,

 

一曰 大信根이요 二曰 大忿志요 三曰 大疑情이라.
하나는 대신의 뿌리요 둘은 뜻을 크게 분 냄이요 셋은 크게 의심을 가짐이라.

 

疑者는 以信爲體하느니 信有十分이면 疑有十分하여 悟得十分이라하니
의심은 신으로서 체를 삼나니 신이 십분 있으면 의심이 십분 있어서 깨달음이 십분 있다 하니

 

此說은 卽定靜之要法也라.
이 말은 곧 정정을 얻는데 요긴한 법이라.

 

何者오 無大願이면 至誠不生하고
어찌 그러한가 하면 큰 원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하고

 

無大疑면 死忿不生하고 無大信이면 眞疑不生하리라
큰 신심이 아니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하니라.

 

問何以立願하여서 且信忿疑誠之所出處乎아.
묻기를, 어떠한 원을 세워야 또한 신과 분과 의와 성의 출처가 되나이까.

 

曰一天之下에 至妙至寶至聖至尊之法이
말하기를 한 울 밑에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보배롭고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높은 법이

 

唯一靈寶眞局也라. 靈寶局은
오직 하나인 영보진국이라 영보국은

 

人人各有稟賦於身內하여 而天素命之하시니 卽我之本性이라.
사람마다 각각 몸 안에 타고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대단한 그대로 명함이니 곧 나의 본래 성품이라.

 

率性修道하여 明德發揮하여 可以治國而平天下하며
솔성 수도해서 자성 자리를 발휘해 가히 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며

 

可以爲億兆之君師하고 可以爲無量之壽仙하나니
가히 써 억조 창생의 군사가 되며 가히 써 한량없이 수하는 신선이 되나니

 

何者오 天明之德을 稟賦爲人之初에
어찌해서 그런가 하면 하늘이 명한 덕을 사람에게 품부할 처음에

 

頭化天上의 三淸眞宮之氣하고
머리는 천상에 삼청진궁의 기운으로 화하고

 

腹受地下山林川澤之形하고
배는 지하에 삼림천택의 형상을 받고

 

胸懷日月星辰風雲雨雷陰陽造化之府하였느니
가슴에는 일월성신과 풍운우뢰와 음양조화의 부서를 품었느니,

 

所以 吾身에 有天眞帝君과 九靈三精과 五神眞君과 內外將軍과
바에 써 내 몸에 천진제군과 구영삼정과 오신진군과 내외장군과

 

左右官屬과 諸部工曺及八萬四千 元君이 各依部分하니
좌우관속과 제부공조 및 팔만사천 원군이 각 부분에 의해 있으니

 

是乃靈寶道局也라.
이것이 영보도국 이니라.

 

修而明之者는 爲仙爲聖이요
닦아서 밝힌 자는 신선이 되고 성인이 되며

 

失而放之者는 爲愚爲蠢이니라
잃어버리고 놓아버리는 자는 어리석고 우둔함이 되느니라.

 

欲修而明之者는 非大願而何오
닦아서 밝히고자 하는 자는 큰 원이 아니고 그 무엇이 있으리요.

 

且人人이 各有此局하니
또한 사람마다 각각 영보도국이 있으니

 

何人得之며 何人不得고?
어떠한 사람은 얻으며 어떠한 사람은 얻지 못 하리요.

 

大忿出焉이면 萬理가 具於我하고 萬法이 備於此하니
그래서 큰 분심을 내면 일만 이치가 나에게 갇추어 있고 일만 법이 이에 갖추어 있으니

 

惟一而已어늘 道何衆門이면
오직 하나 이거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惟一而已어늘法何多岐며 惟一而已어늘 人何多求며
오직 하나 이거늘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 이거늘 사람들이 어찌 많이 구하는가 하면

 

惟一而已어늘 我何復疑하리요
오직 하나 이거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하리요

 

思則疑無하고 望則疑有하리니
하여 생각한 즉 의심이 없고 바란 즉 의심이 있나니

 

疑去疑來에 疑無所疑를 空然何疑리노
의심이 가고 의심이 옴에 의심하고 의심할 바가 없거늘 공연히 어찌 의심하리요

 

忽然燃心하면 是乃眞疑라.
홀연히 의심을 태워 버리면 이것이 참 의심이라.

 

是疑之下에 萬疑寂靜하면 不分晝夜함이 如夢若眞하여
이 참 의심아래 일만 의심이 적정하면 주야를 분별치 못함이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空寂天地에 惟一疑而已거늘
공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 뿐 이니,

 

此非大疑而何오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盖疑字之工은 最難得知니
대개 의심 의자의 공부는 가장 얻어 알기가 어려울 것이니

 

若無大信이면 是疑不生이라
만일 큰 신심이 아니면 이 의심이 나지 아니할 것이라.

 

故로 禪要에 云 信有十分이면 疑有十分하고
그럼으로 선요에 말하길 신이 십분 있으면 의심이 십분 있고

 

疑有十分하면 悟有十分이라하니 指此謂也니라
의심이 십분 있으면 깨달음이 십분 있다 하니 이를 가르켜 이름이니라.

 

信可信矣요 誠可誠矣니
신을 가히 신할 것이며 정성을 가히 정성할 것이니

 

以信定靜하고 以信忿疑하느니
신으로써 정정하면 써 신과 분과 의를 얻을 것이니

 

非大信이면 信何長久리요
큰 신심이 아니면 그 신심이 어찌 장구하리요.

 

一定不變하여 始終如一을 是謂誠也라하느니
한가지 정해서 변치 아니하여 시종이 여일 함을 이에 성이라 이르느니라.

 

五經에 云 以誠而入하며 以黙而守하며
오경에 말하기를 성으로써 도에 들며 묵묵함으로써 도를 지키며

 

以柔而用이면 則物我俱忘하고 慧光乃生하여
부드러움으로써 도를 사용하면 곧 물과 내가 한가지로 잊어서 지혜의 광명이 이에 생기어

 

聖智自全하리니 此乃入之眞締也라.
성스러운 지혜가 스스로 온전하나니 이것이 도의 문에 드는 참다운 요체라.

 

道門에 드는 요긴한 法(2)

明入門要法(2)

 

昔에 西峰道士가 爲其學徒曰 天下에 有一無主空舍하니
옛 적에 서봉도사가 그 학도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한 주인 없는 빈집이 있으니

 

是卽靈寶局也라.
이것이 곧 영보국이라,

 

其中에
그 가운데

 

儲天下無窮之妙하고 積天下無窮之寶하며
천하의 무궁한 묘함을 모아놓고 천하의 무궁한 보배를 쌓아놓고

 

藏天下無窮之財하여 通開八萬四千門路하여 圍繞垣墻하여
천하의 무궁한 재물을 갊아 두고 팔만 사천 문로를 통해 열어 두루 담장을 둘러놓고

 

使慾者 懶者 愚者 不信者로
욕심 있는 자와 게으른 자와 어리석은 자 믿지 아니하는 자로 하여금

 

各守諸門路하라 하고
각각 모든 문로를 지키게 하라 하고

 

命之曰 貪慾懶愚不信者來到면
명령하여 말하기를 탐욕자 라우자와 불신자가 와서 이르면

 

則爾等各守防禦하고 唯某誠信專一者來到면
곧 너희들은 각각 지키어 막고 어떠한 사람이든지 정성스럽고 믿음이 전일한 자가 외서 이르면

 

則開門納之하여 以爲空舍之主하여 用無窮之財寶云하니
곧 문을 열어 들여서 써 빈집의 주인을 삼아 무궁한 제보를 사용토록 하라고 이르니

 

世人聞此設하고 皆仰笑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다 하늘을 우러러 비소하며

 

空棄不取曰 如許財寶를 我何敢取리오.
부질없이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재물을 내가 어찌 감히 취하리요.

 

此有福有緣者之所當取之라 하고
이는 복이 있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 마땅히 취할 바라 하고

 

敢不往求로새
감히 가서 구하지 아니 할세,

 

釋迦는 傳設하고 老子는 指路하고 孔子는 勸送하되
석가는 말을 전하고 노자는 길을 가르키고 공자는 권해 보냈으되

 

不知就取하고 往知者나 不信者는 防而不受하고
나아가서 취할 줄을 알지 못하고 가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막아서 받지 아니하고

 

貪慾者拒而不納하니
탐욕자는 또한 거절해서 들이지 아니하니

 

其間能入取者는 惟千萬人中一二人也라.
그 사이에 능히 들어 와서 취하는 자는 오직 천만인 가운데 한 두 사람이라.


其餘外道之輩는 曠安宅而不居하고
그 나머지의 외도의 무리들은 넓고 편안한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捨正路而不由하고 卽盜野人之財産하며
바른 길을 버리고 말미암지 아니하고 곧 야인들의 재산을 도적질하며


或乞富人之餘財하며 或奪行人之路費하고
혹 부자의 남은 재물을 구걸하며 혹 행인들의 노비를 탈취하고

 

或穿壁欺取하며 或飢寒 或爭鬪하니 五賊並起 하고
혹 벽을 뚫고 속여 취하며 혹은 기한에 떨며 혹은 투쟁해서 오적이 아울러 일어나고

 

三盜가 不息하여 天下大亂하며
삼도가 쉬지 아니해서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지며

 

法官이 形名하고 親友誹謗하니 可謂寒心處也라.
법관들이 형극의 이름을 타고 친우들이 비방하니 가히 한심할 지도다

 

不取所當取하고
마땅히 취할 바를 취하지 아니하고

 

取其不當取하여 曰
마땅히 취하지 아니할 바를 취하지 말하기를

 

我行捷法하여 易取易得이라 하며
내가 빠른 법을 행하였다 해서 쉽게 취하고 쉽게 얻었다하며

 

或死或敗에 修苦不悔하고 反見支離하니
혹 죽고 혹 패하며 고를 받아도 후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리 함을 보게 되나니

 

愚耶아 懶耶아 孔子所謂糞土之墻이요.
어리석음인가 게으름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분토의 장이요

 

孟子所謂下愚 不移者 是其徒乎저.
맹자가 말하기를 하우에 옮기지 아니함이라 함은 이런 무리들을 말함이로다

 

禪書에 曰 能開衆門中에 一門入하여
선서에 말하기를 능히 여러 문을 열고 한 문에 들어가서

 

取無盡藏寶하면 用之不竭하고 取之無禁하리니
다함이 없이 갊아 있는 보물을 취하면 써도 다함이 없고 취해도 금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此寶非外來之物이라. 是室內生生無窮之物이니
이 보물은 밖에서 오는 물건이 아니라 이 빈집에서 나오고 나오는 무궁한 보물이니

 

能昇當者는 誠也요 能開門者는 疑也요 能主物者는 信也라.
능히 집에 오르는 자는 성이요 능히 문을 여는 자는 의요 능히 물건을 주장하는 자는 신이라

 

義에 不取他人財寶하고
의리에 다른 사람의 재보를 취하지 아니하고

 

卽取此當取物者는 忿也이니
곧 마땅히 취할 물건을 취하는 자는 분심이니

 

若無信忿衣三字며 則盤桓墻外하고
만일에 신과 분과 의의 삼자가 없으면 곧 담 밖에서 반환하고

 

逗遛簷端하여 漫然歲月타가
처마 끝에서 두류하며 공연히 세월만 보내다가

 

空費氣力하여
부질없이 기력만 허비해서

 

太息退歸에 乃爲行乞之人이라
종말에는 크게 한숨만 쉬고 물러가 돌아가매 이에 행걸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故로 比之曰
그러므로 비유하기를

 

石中藏玉은 非鐵釘이면 難琢이요
돌 가운데 갊아 있는 옥은 철정이 아니면 쪼아 내지를 못하고

 

無鑢石이면 不磨라하고
숫돌이 아니면 갈지를 못한다 하고

 

又曰 不入虎穴이면 焉得虎子리요 하니
또 말하기를 호랑이 굴에 들지 아니하면 어찌 호랑이 새끼를 얻을 것이리요 하니,

 

釘은 信也요 入虎穴은 忿也니
끌은 신을 말함이요 호랑이 굴은 분이니

 

欲琢磨得虎子者는 發大忿勇이니
쪼아내고 갈고 호랑이 새끼를 얻는 것은 크게 분내는 용기이니

 

金剛利刀로 割世緣一縷하고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세상에 얽힌 인연의 한 오라기도 다 베어버리고

 

引大疑하여 卽殺心猿意馬之奔馳하고
크게 의심을 당겨 이르켜서 곧 마음 원숭이와 뜻 망아지에 끌리고 달리는 마음을 몰아내고

 

懷大信하여 能入此門然後에 鐵柱中心이요 石壁外面이라
큰 믿음을 품어서 능히 이 문에 들어간 후에 철주와 같은 중심이 되고 외면 막기를 석벽이 됨이라.

 

川萬師設이 更不妙於此設하며
천만 스승의 말이라도 다시는 이 말씀 외에는 더 묘함이 없으며


妙道玄理가 且無加於此道라
묘한 도리와 현묘한 이치가 또한 이 도에 더함이 없음이라.

 

目無所好見하고 耳無所喜聞하며
눈으로 보되 좋게 보는 바가 없으며 귀로 듣되 즐겁게 들리는 바가 없으며

 

妙無他妙하고 寶無他寶면
묘함이 이에 더 묘함이 없고 보물이 이에 더 보물이 없으면

 

則一心靜에
곧 하나로 마음이 정함에

 

蕩蕩焉豁豁焉 無絲亳纖鹿之礙滯면
넓고 또 넓으며 걸림이 없고 또한 걸림이 없어서 털끝만큼이라도 걸리고 막힘이 없으면,

 

則若人初生無異하여 飮茶에 不知茶하고
곧 사람이 처음으로 남에 사람에는 다름이 없으나 차를 마셔도 차인 줄을 모르고

 

喫飯에 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밥을 먹어도 밥인 줄을 모르며 행하되 행하는 줄을 모르고

 

坐不知坐하여 情識頓淨하고
앉았으되 앉은 줄을 몰라서 모든 정과 식이 돈연히 조촐하고

 

計較都忘하여 恰似有氣底死人이요
모든 사량과 계교가 모두 다 없어서 기운은 있으되 죽은 사람과 흡사하고

 

且泥塑人相似라
또한 흙으로 만든 우상과 같음이라.

 

是名立定이니 其若氣發神動이면
이 지경에 이르르면 대정을 세웠다 이름할 것이니 이에 기운을 발하고 신령스럽게 움직이면

 

則初如圉圉而不得編序나
곧 처음에는 어른어른 해서 차서를 잡지 못하나

 

然至於心華頓發이면
그러나 분별심이 갑자기 발하면

 

則洞然十方하여 如杲日麗天하며 明鏡當臺라
즉 세계가 한 집같이 밝아져서 태양이 중천에 빛남과 같을 것이며 밝은 거울을 대함과 같음이라

 

不越一念에 頓成正覺하리니 是名得慧라
한 생각 넘지 아니하여 홀연히 정각을 이룰 것이니 이를 일러 혜를 얻었다 이름할 것이니라.

 

如此者는 乃禪家之佛이요 靈寶之聖이며 仙家之丹이니라.
이와 같은 이는 이에 선가에서 말하는 불이요 영보의 성인이며 선가에서 말하는 단이라 할 것이다.

 

道門에 드는 요긴한 法(3)

明入門要法(3)

 

然若信忿疑之誠이 未極에
그러나 만일에 신과 분과 의와 성이 지극하지 못함에

 

八萬四千魔兵이 覘在六根門頭하여
팔만 사천 마군이 육근문 머리에 엿보고 있어서

 

隨機誘心하여 百方作亂하매
기틀을 따라 마음을 유혹해서 백방으로 작 난을 하여

 

四面華頭勞碌心神하리니
사면에서 변화머리가 심신을 어지럽게 흔들어 낼 것이니,

 

卽念聖訓하여 要取無心하고 更加精力하면
곧 성인의 교훈을 생각해서 요긴히 무심함을 취하여 다시 정력을 더하면

 

剋日就工而使吾一身에
반드시 날을 정해 놓고 공부를 성취해서 나란 몸으로 하여금

 

如墮千尺井厎相似하여 從朝至暮와
천 척이나 되는 우물 속에 떨어짐과 같아서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從暮至朝에 千思想萬思量으로
또는 저녁으로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천가지 생각과 만가지 생각으로

 

單只是救出之心이요 決無二心이니
다만 이에 구출할 마음 뿐이요 결단코 다른 마음이 없을 것이니

 

誠能如是하면 施工을 剋日可矣리라.
정성이 이와 같으면 공부해 나아감이 반드시 날을 가히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라.

 

此段은 卽有相火虛火하니
이 단계에 있어서 곧 실상의 불과 허령의 불이 있나니

 

康健之人이라야 所取也요
강하고 건전한 사람이라야 취할 바이요

 

又若柔溫氣弱之人이면
또한 만일에 유온하고 기가 약한 사람은

 

則譬如自身得當死之罪하여
곧 자신이 죽을죄를 당함과 같아서

 

深囚獄中하여 剋日斬殺次로
깊은 옥중에 수감이 되어 날을 정해 놓고 참살할 차례로

 

四面守直타가 忽遇獄卒醉倒하여 時夜寂廖하매
사면을 수직 하다가 문득 옥졸들이 잠에 취해 엎드러짐을 보고, 때에 밖이 적적하매

 

乃扣枷打鎖越獄脫身에 不分東西하고
이에 자물쇠를 두들겨 부수고 옥문을 넘어 몸이 빠져 나오매 동서를 분간할 겨를이 없이

 

卽逃出境之際에 毒龍猛獸가 一無懼心이요
곧 옥 경계를 도망해 나올 때에 독룡과 맹수가 있다 하여도 두려울 마음이 없고

 

卽面當前矢石도戟이라도 亦無怖畏하며
곧 면전에 시석과 도극이 날아온다 할지라도 또한 두려움이 없으며

 

蒙被奔迅하여 崎嶇險路를
옥중에 몽피된 몸만이 분주히 풀려나감이 빠를 것이니 기구한 험로라도

 

如踏平地하고 芴棘蒺藜를 視若草芥하시니
평지와 같이 밟아가며 가시 숲 얽히고 얽힘이 있다 할지라도 초개와 같이 보일지니

 

此何故也오.
이 무슨 연고인고.

 

寧死他死언정 不死此死니
차라리 다른 곳에서 죽을지언정 이 곳에서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마음뿐이니

 

是乃極切之心이라
이것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이라,

 

用工之際에 有此切心하면
공부를 할 때에 이러한 절실한 마음이 있으면

 

剋日之工을 管取百中이라
날을 한정하고 공부함은 과녁을 취하니 다 맞을 것이니라.

 

然이나 如此極切之心은 修煉成熟하여
그러나 이와 같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은 닦고 연마함이 성숙해서

 

得其眞趣者에 最後實行之法이요
그의 진취를 얻은 사람의 최후에 실행하는 법이요

 

非初學凡想에 易取易行者也라
초 학자의 범상한 근기에 있어서는 쉽게 취하고 쉽게 행하지 못할 것이니라


故로 初行之工은 務在安其危니
고로 처음으로 행하는 공부 는 힘쓰는 것이 위태로움에 있어서 먼저 편안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니

 

心安이면 則定力이 益增하며
마음이 편안하면 곧 정력이 더욱 더 하는 것이며

 

定力益增하면 則極切之心을 亦不勞而自得이니라.
정력이 더욱 더 하면 곧 지극히 간절한 마음을 또한 힘들이지 아니하고도 스스로 얻을 것이니라.

 

明風土移化之功 자성으로 돌아가는 공부

 

人之心體는 本自虛明이라
사람의 마음 본체는 본래 텅 비어서 밝음이라.

 

元無染汚나 然이나 及其應物遂境에
원래 더럽힘이 없으나 그러나 그의 물체를 응하고 경계를 따라서

 

情私感疑하여 遂成風土之習故로
인정이 사사로이 느끼어 얼켜서 마침내 풍토의 익힌 바 습성이 되는 고로,

 

做工之始에
그러므로 공부를 할 처음에는

 

當明察自心上習氣所染하여
마땅히 자심에 습기의 물든 바를 맑게 살펴

 

修煉精治然後에 定靜始得이라
닦아 단련해서 정밀히 다스린 후에 정하고 고요함을 비로소 얻을 것이라.

 

定靜之後에 微暢之光明이 乃發이며
정하고 고요함을 얻은 후에 미미하고 화창한 광명이 이에 발할 것이니,

 

則亦留心於定慧等持하여
곧 또한 정과 혜를 고루 가짐을 마음 가운데 머물러 두어

 

一絲不亂而各得其正하리니 是明精一執中이라.
일사불란해서 각각 그 바름을 얻을 것이니, 이를 이름해서 정일 집중이라 하니라

 

執中必庸은 中庸이요 學大는 大學이요
중도를 잡아서 반드시 떳떳함을 이름이 중용이요 대 자리를 배움은 대학이요,

 

論道語는 論語라.
도리에 대한 말을 논함은 논어라.

 

元亨利貞과 仁義禮智를 隨性感現하여 或聖或賢이니
원형이정과 인의예지를 개성에 따라 느끼어 발현됨이 혹 성인도 되고 혹 현인도 되나니,

 

雖風土稟受之有異나
비록 풍토에 따라 개성을 받음이 다름이 있으나

 

氣質則齊也라.
기운 바탕은 품수함이라.


故로 此我靈寶眞訣로 能善化而歸一者也니라.(言性之齊也)
그러므로 이 나의 영보의 참 비결로 능히 잘 융화해서 하나에 돌아감이라.

 

多誦定靜編하고 勤行坐禪之法하여
많이 정정편을 달통하고 붙들어서 좌선하는 법을 행하여

 

嚥津煉氣하고 運水火風土를 可移로되
단 침을 삼키고 기운을 단련해 물과 불을 운전해서 풍토를 옮기게 되나

 

氣質卽齊也라 朝眞禮聖하여
기질인 즉 다름이 없음이라. 아침 일찍이 진심으로 체성에게 예를 올리어

 

參三才出萬化하며
천지인 삼재에 혹됨이 없이 참례해서 일만 변화를 나타내면

 

聖與我가 相似焉이라
聖과 더불어 내가 서로 相이 없을 것이니라.

 

修煉正法은 元無二學이니
수련하는 바른 법은 원래 두 가지로 배움이 없으니

 

學皆然修요 前聖後聖이 其修相同이라.
배워서 다 수련함은 전성 후성이 그 수련함이 서로 같음이라.

 

故로 做工之人은 依此而行이라.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이에 의해서 행함이라.

 

別無遲速이요 且無先後而皆得定靜이니라
별로 지속이 없음이요, 또한 선후가 없이 다 정과 고요함을 얻을 것이니라.

 

定靜之期는 大限은 十年專一하면 無不貫通이요
정정의 기한은 크면 십년이 될 것이니 십년 동안 계속하면 관통치 아니함이 없을 것이요,

 

小限은 九旬이니(亦有五旬之限 皆言禪期也) 九旬專一이면 外定可得이요
적게 잡으면 구순(3개월)이니 구순 동안 전일 하면 외정을 가히 얻을 것이요,

 

剋日之期는 大限은 七日로(亦有五日或三日之限 皆言入定之期也) 七日精進이면 可入眞忘이요
날을 한정한 기한은 대한 칠일이니 칠일을 정진하면 가히 진 마저 잊어버리는 데로 이를 것이요,

 

小限은 半時니(亦日刹那) 半時 燃燒心이면 能成正覺하리라.
소한은 반시이니 반시 동안 모든 분별심을 놓아 버리면 능히 정각을 이룰 것이니라.

 

定靜之有遲速이 不在於人이요 在乎誠與不誠이니
정정의 지속이 있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정성이 있고 없는 데에 있는 것이니

 

不誠而以難行으로 見之하면
성심이 없이 행하기가 어려우므로 볼 진데

 

則如千年盲龜脫身萬里之樹城이요
천년이나 눈 먼 거북이 만리나 되는 나무 성으로 몸을 벗어나려 함과 같을 것이요,

 

三日曲針으로 投穿半片之纖芥요
삼일이나 굽은 바늘로 반쪽이나 되는 겨자씨를 던져 뚫기와 같을 것이요,

 

誠之而以能行으로 見之하면
성심으로 능히 행함으로 볼 진데

 

則如千尺井底之人이 出乎平地하며
곧 천 척이나 되는 우물 밑에 빠진 사람이 평지에 나옴과 같으며,

 

深寓牢獄之人이니 出乎獄外하여 身晏心閒하여
깊은 뇌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옥외로 나감과 같아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서

 

更無他勞니 因何而更說遲速及爲不爲乎아.
다시는 괴롭고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무엇을 인해서 다시 지속되고 안 된다는 말을 하리요.

 

戒乎我願學天人하고
경계하기를, 나 자신이 천인 배움을 발원할 뿐이요

 

莫妄意於異道하여 一就我靈寶局中하여
다른 도에 뜻을 두지 말아서 한결같이 나의 영보도국 가운데 나아가서

 

自修自明이면 可仙可佛이며 爲聖爲眞乎고저
스스로 닦고 스스로 밝히면 신선이 되고 가히 부처가 되며 성인도 되고 진인도 될 것이니라.

 

學徒者는 能信行此法하여 念念勤修하면
도를 배우는 무리들은 능히 이 법을 믿고 배워서 생각 생각이 부지런히 수행하면

 

則氣和神化하여 可得定靜하리니
기운이 화하고 정신이 화현해서 가히 정과 고요함을 얻을 것이니

 

修之明之하여 乃復其性이 可也니라
수련하고 밝히어서 이에 그 자성 자리를 회복케 함이 가할 것이니라.

 

定靜에 이르는 方法

明定靜次第

 

夫欲修煉인데 當先捨外事之紛撓하라
대범 수련코자 할진데 마땅히 먼저 밖의 일의 분요함을 놓아버려라

 

外事平定하여 無有忤心然後에 安坐而內觀이
밖의 일이 평정해져서 마음을 더렵혀지지 않은 연후에 편안히 앉아서 안의 마음을 관할 것이니

 

心起에 若觀一念便起면
마음이 일어나매 만일 한 생각이 일어남을 관할 때에

 

卽須除滅하여 務令安靜이니라
곧 모름지기 제거해 없애고 하여금 안정하기를 힘쓸 것이니라

 

其次는 雖非的有貪着이나
그 다음은 비록 탐 착 심으로 일어남은 아니나

 

浮遊亂想이라도 亦盡滅除하고
근거 없는 부유란상 이라도 또한 다 멸해서 제거하고

 

晝夜勤行하여 須臾不潛이니라
주야로 부지런히 수행해서 잠깐 사이라도 머물러 두지 말 것이니라

 

唯滅動心이요 不滅照心이니
오직 움직이는 마음을 멸할 것이요 자성으로 비치는 마음은 멸하지 아니할 것이며

 

但凝空心이요 不凝住心이라
다만 공심에 얼켜 둘 것이요 주심에 얼켜 두지 아니할 것이니라.

 

不依一其爲心之常이니라
한갓 그 마음이 떳떳함에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若住則凡心이 躁競하여
만일 마음을 머물러두면 모든 마음이 조급히 다투워 일어나서

 

煩惱續起라
번뇌망상이 계속해서 일어남이라.

 

故로 定靜之門에 以無住로 爲上하니라
그러므로 정정의 문에는 주 함이 없음으로써 우위를 삼았느라.

 

且初學之人은 息心甚難하니
또한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마음 쉬어버리기가 심히 어려우니

 

或息不得暫停還失이니
혹 마음 쉬어 버림을 얻지 못하고 잠깐 머물렀다가 또한 잃어버리게 되나니

 

然이나 去留交戰에 百體流하여
그러나 버렸다 머물렀다 서로 싸워감에 전신이 흘러 행해서

 

久久精思하면 方乃調熟하나니
오래오래 정밀히 생각하면 바야흐로 조숙케 되나니,

 

勿以暫收不得爲憂하고 遂廢千生之業源하라.
써 잠깐이라도 근심됨을 얻지 못함을 거두워 잡지 말고 뒤에 천생의 업원을 폐함이라.

 

其次는 小得淨己면 則於行住坐臥之時와
그 다음은 조금이라도 몸이 정화되어 가면 곧 행주좌와 하는 때와

 

涉事之慮와 喧鬧之所에 皆作意安하며
모든 일을 간섭하는 곧 다 번화한 거리에 모두 다 뜻 편안함을 지어서

 

有事無事에 常若無心하며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 항사무심함과 같이해서

 

處喧處鬧에 其之唯一이니라.
시끄러운 처소에서도 그 뜻만 오직 하나로 만들 것이니라.

 

若束心太急하면 又卽成病하여 氣發狂顚하리니
만일 마음 묶기를 조급히 하면 또한 병이 되어서 기운에 광전이 발할 것이니

 

戒之愼之하라.
경계하고 삼갈지니라.


心若不動하면 又須放任하라.
마음이 만일 동하지 아니하면 또한 모름지기 방임해 보아라.

 

如此則寬急이 得所하여 自恒調適하며
이와 같이 하면 너그럽고 급함이 바를 얻어 스스로 항상 고루 적중하여

 

制而不着하며 放而不動하며 處喧無惡하며
제재해서 착하지 아니하고 방심하되 동치 아니하며 복잡한데 있으나 싫어함이 없으며

 

涉事無惱者此是眞定이니라.
일에 나아가서 마음 어지러움이 없어야 이것이참으로 정함이로다.

 

不以涉事無惱라.
써 일을 간섭함에 있어 마음이 수고스럽지 아니함이라.

 

故로 求多事하며 不以慮喧無惡이라.
그러므로 일을 많이 구하지 아니하며 써 번화함을 싫어하지 아니함이라.

 

故로 來就喧이니라.
그러므로 번화한데 나아가되 시끄러움이 오지 아니하니라.

 

以無事로 爲眞性하고 以有事로 爲應跡이니라(應跡應物通明也)
일없는 것으로 써 진성을 삼고 일이 있음으로 써 적응해서 막힘이 없음이라.

 

若水鏡之爲鑑이면 則隨物而現形하느니라.
만일 물과 거울로 귀감을 삼으면 곧 물체를 따라 형상을 나타낼 것이니라.

 

善巧方便이 惟能入定이요
가장 좋은 방편은 오직 능히 정에 들어감이니

 

慧發遲速이면 則不由於人이니(不分强求)
지혜 발함이 지속이었음은 사람에 말미암음이 아니니,

 

仂令定中急急球慧하라.
하여금 정 가운데에서 급히 지혜를 구하지 말아라.

 

急則傷性이요
급하게 서두르면 자성자리를 상하게 될 것이요

 

傷性則無慧하느니라.
자성자리를 상하고 보면 지혜가 발하지 아니하느니라.

 

若定不求慧而慧自生하나니
만일 정하는 데에서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느니

 

此名眞慧라.
지혜가 자연히 생 하게 되느니 이를 일러 참 지혜라 하느니라.

 

慧而不用하면 實智若愚하며
지혜를 사용치 아니하면 실상 된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으며

 

益實定慧면 雙美無極하리라.
실상 된 정과 혜가 더하면 쌍으로 아름다움이 다함이 없을 것이니라.


若定中에 念想多感하면
만일 정 가운데 생각 생각이 많이 감응되면

 

衆邪妖精하며 百魅隨心하고
뭇 사사첩념의 요정이 더하며 일백의 매 망령이 마음을 따를 것이요

 

奇蹟異相하여 應現所見하나니
기적과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에 응해서 보일 것이니

 

却須堅立正念하여 反求心常하면 自然妖魔盡滅하느니라.
모름지기 굳게 바른 생각을 세워서 마음에 떳떳함을 구하면 자연히 요마가 다 멸할 것이니라.


定靜之心이 惟虛明淡寂하여 上而豁然無覆하고
정하고 고요한 마음이 오직 비고 밝아서 담하게 고요해서 위로 활연해서 덮임이 없으며,

 

下而曠然無基하면 則舊業日銷하고
아래로 광연해서 기틀(자리)이 없으면 곧 구업이 날로 녹여지고

 

新業不造하며 無所絓礙하여 逈脫塵籠하나니
신 업을 다시 짓지 아니해서 걸리고 막힘이 없이 모든 진롱을 벗어날 것이니


行而久之하여 自然得道하느니라.
행해서 오래가면 자연히 도를 얻을 것이니라.

 

夫得道之人有七候하니(候通也)
대범 도를 얻은 사람이 일곱 가지 징후가 있으니

 

一者는 心得定見하여 覺諸塵漏이요
하나는 마음에 정한 소견을 얻어서 모든 진루를 깨달음이요

 

二者는 宿疾(宿疾宿習之病)普銷하여 心身輕爽이요
둘은 오래된 병이 널리 녹아버려서 몸과 마음이 경상 함이요

 

三者는 塡補夭損하여 還平復命이요
셋은 요손 함을 도와서 평상심에 돌아와 천명에 회복함이요

 

四者는 延壽無量하니 明曰仙人이요
넷은 수명을 무량함에 연장하니 신선이라 이름하고

 

五者는 鍊形爲氣하니 名曰眞人이요
다섯은 얼굴을 단련해서 기운을 만들었으니 진인이라 이름하고

 

六者는 鍊氣成神이니 名曰神人이요
여섯은 기운을 단련해서 귀신을 만들었으니 신인이라 이름하고

 

七者는 鍊神合道니 名曰至人이니라.
일곱은 귀신을 단련하여 도에 합하였으니 지인 이라 이름 하였나니라.


其於鑑力하여 隨候益進하면 得名慧乃圓備하라
그의 힘을 거울해서 징후를 따라 더욱 나아가면 지혜를 이에 원만히 갖추었다 이름할 것이니라.

 

若久學定靜하여 心無一候라사
만일 오래오래 정정하는 공부를 해서 마음 가운데 한 징후라도 없어야

 

是乃圓通修鍊之士라.
이에 원만히 통달한 수련하는 선비라.

 

但依此法하여 操縱得宜하면 則無日不工이며
다만 이 법에 의해서 표준의 종을 잡아 편안함을 얻으면 날로 공부를 아니함이 없으며

 

無處非禪이니
선 아닌 곳이 없으니,

 

若促齡離俗하면 索隱行怪然後에
만일에 나이를 재촉하여 속세를 떠나서 자취를 숨기고 괴이함을 행한 뒤에

 

始可得通云이니 則此未達定靜之法者也라.
비로소 가히 도를 얻는다고 하니 곧 이는 정하고 고요한 법을 달통하지 못함이라.

 

定靜之法在易하고 不在乎難이며
정정의 법은 쉬운 곳에 있고 어려운 곳에 있지 아니하며

 

在內不在乎外니라.
마음 안에 있고 마음밖에 있지 아니함이라.


明眞常之道 참되고 떳떳한 道

 

大道는 無形이나 生育天地하고
대도는 형상이 없으나 천지를 생육해 내고

 

大道는 無情이나 運行日月하고
대도는 정이 없으나 일월을 운행하고

 

大道는 武名이나 長養萬物하나니 吾不知其名이라.
대도는 이름이 없으나 만물을 장양케 하나니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함이라.

 

强名曰道니라. 夫道之行也에 有淸有濁 하고
강연히 이름하기를 도라 하였느니라. 대범 도를 행함에 맑음이 있고 탁함이 있으며

 

有動有靜하니 天淸地濁하고
동함이 있고 정함이 있나니, 하늘은 맑고 땅은 탁하며


天動地靜하며 男淸女濁하고 男動女靜하나니
하늘은 동하고 땅은 정하며 남자는 청하고 여자는 탁하며 남자는 동하고 여자는 정하나니

 

降本流末而生萬物하나니라.
근본으로부터 내려와 끝으로 흘러서 만물을 생 하게 하느니라.

 

淸者濁之源이요 靜者는 動之基라.
맑은 자는 탁함의 근원이 되고 고요한 자는 동자의 기본이라.

 

故로 人能常淸靜하면 天地悉皆歸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항상 청정하면 천지가 다 한가지로 돌아가느니라.

 

夫人神은 好淸而心撓之하고
대범 사람의 정신은 맑음을 좋아하되 마음이 흔들리고

 

人心은 好靜而慾牽之하나니
사람의 마음은 정하기를 좋아하되 욕심에 끌리게 되느니

 

常能遣基慾而心自靜하고 證其心而神自淸하면
항상 능히 그 욕심을 보내 버리면 마음이 스스로 정하고 마음이 맑으면

 

自然六慾이 不生하고 三毒消滅 하리니
정신이 스스로 밝아져서 자연히 육욕이 생기지 아니하고 삼독이 소멸하리니

 

所以不能者는 爲心未證이라.
바에 써 능치 못한 자는 마음이 맑지 못함이라.

 

慾未遣也니 能遣之者는 內觀其心에
욕심을 보내지 못 함이니 능히 보내는 자는 안으로 그 마음 일어남을 관 하되

 

心無其心하며 外觀其形에 形無其形하며
마음이 그 마음이 없으며 밖으로 그의 형상을 관 하되 형상이 그 형상이 없으며

 

遠觀其物에 物無其物하느니 三者旣悟하면
멀리 그 만물을 관 하되 물건이 그 물건이 없나니 삼자를 이미 깨닫고 보면

 

惟見於空이니 觀空亦空여 空無所空하며
오직 공 함만이 나타날 것이니 공을 관 하되 또한 공해서 공 함이 공 한바가 없으며

 

所空旣無하면 無無亦無하며
공 한바가 이미 없으면 없는 것이 없다 함이 또한 없으며

 

無無旣無하여 湛然常寂하며
없는 것이 없다 함이 이미 없어서 담연히 항상 고요하며

 

寂無所寂하면 慾豈能生이리요
고요함도 또한 고요한 바가 없으면 욕심이 어찌 능히 생기리요.

 

慾旣不生하면 卽是眞定眞常이라
하고자 함이 이미 생기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참 정이요 참으로 떳떳함이니라.

 

眞常應物하며
참으로 떳떳함으로 물건을 응하면

 

眞常得性하여 常應常淸靜矣니라.
참으로 떳떳한 성품을 얻어서 항상 응용되는 데에 항상 청정하리로다

 

如此淸靜하면 漸入眞道라.
이와 같이 청정하면 점차 참 도에 들어가게 됨이라.

 

旣入眞道를 名爲得道니
이미 참 도에 들어감을 이름하기를 도를 얻었다 하리니

 

雖名得道나 實無所得이요
비록 이름이 도를 얻었다 하나 실상에 있어서는 얻은 바가 없고

 

爲化衆生을 名爲得道니
중생을 화도 함을 이룸으로서 도를 얻었다 하나니

 

能悟之者는 可傳聖道하리라.
능히 깨달은 자는 가히 성인의 도를 전하리로다.


且上士는 無自他라. 故로 不爭하고 下士는 執自他라.
또한 상사는 자타가 없음이라. 그러므로 다툼이 없고, 하사는 자타에 집착함이라.

 

故로 有爭하며 上德은 處無相이라.
그러므로 다툼이 있으며, 상 덕은 무상에 처함이라.

 

故로 不德하고 下德은 執有相이라.
그러므로 덕이라 하지 아니하고, 하 덕은 유상에 집착함이라.

 

故로 執德하느니 執着之者는 不名道德이라.
그러므로 덕에 집착하느니 덕에 집착하는 자는 도덕이라 이름하지 아니함이라.

 

衆生所以不得眞道者는 爲有妄心이라.
중생이 바에 써 참 도를 얻지 못하는 자는 망령된 마음이 있음이라.

 

旣有忘心하면 卽驚其神이요
이미 망령된 마음이 있으면 곧 정신이 놀랄 것이요

 

旣驚其神하면 卽着萬物이요
그 정신이 놀라면 곧 만물에, 착심이 생길 것이요

 

旣着萬物하면 卽生貪求요
이미 만물에 착심이 생기면 곧 탐심이라서 구하려는 욕심이 생길 것이요

 

旣生貪求면 卽是煩惱라.
이미 탐내서 구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곧 이것이 번뇌가 되느니라.

 

煩惱妄想이 憂苦身心하여 便遭濁辱하면
번뇌망상이 몸과 마음을 근심케 하고 괴롭게 해서 문득 탁하고 욕됨을 만나게 되면


流浪生死에 常沈苦海하고 永失眞道라.
생사에 유랑해서 항상 고해에 잠기게 되고 기리 참 도를 잃게 됨이라.

 

眞常之道는 悟者自得하느니 得悟者常淸靜矣니라.
참으로 항상 떳떳한 도는 깨달은 사람이 스스로 얻게되느니 깨달음을 얻은 자는 항상 청정하리라.


有動之動은 出於不動하고
동함에 있어서 동함은 동하지 아니함으로부터 나게 되고

 

有爲之爲는 出於無爲하느니
함에 있어서 함은 함이 없는 곳으로부터 나오니

 

無爲則神(體性)歸하고 神歸則萬物云寂이라.
함이 없으면 본심에 돌아가고 본심에 돌아간 즉 만물이 적적하다 이르느니라.

 

不動則氣泯하고 氣泯則萬物無生하느니
동하지 아니하면 기운이 민민하고 기운이 민민하면 만물이 생함이 없느니

 

神神相守하고 物物相資하여 厥本其根이라.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움이 서로 지키고 만물과 만물이 서로 바탕해서 궐 하느니라.

 

黙而悟之하면 我自識之하고
그 근본을 묵묵한 가운데 깨달으면 내 스스로가 알고,

 

入乎無間하면 不死不生하여
사이가 없는 곳에 들어가고 보면 죽지도 아니하고 낳지도 아니해서

 

與天地爲一이니라. 忘於目則光溢無極하고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느니라. 눈을 잃어버리면 빛이 넘침이 다함이 없고,

 

泯於耳則心識常淵하느니
귀가 민민하면 마음 알음알이가 항상 연연하느니

 

兩機俱忘하면 絶衆妙之門이라.
두 기틀을 잊어버리면 중묘의 문이 끊기게 되느니라.

 

純純全全合乎大萬하고 溟溟행행하여 合乎無綸하느니
순순하고 전전해서 대만에 합하고 명명하고 행행해서 무륜에 합하느니,

 

天地之大我之所維요
천지의 큼이 나의 벼루 줄이요

 

萬物之衆이 我之所持니
만물의 중생이 나의 가진 바이니

 

竭有窮終以語其蔽哉아.
어찌 다 끝이 있어서 써 그 가리움을 말할 수 있으리요.

 

養其無相하니 相故로 常存이요 守其無體하니
그 상이 없음을 기를 것이니 상이 짐짓 보존함이요 그 체가 없음을 지키나니

 

體故로 全眞이라 全眞相濟면 可以長久하니
체가 짐짓 온전한 참이라. 온전한 참됨을 서로 구제하고 보면 가히 써 장구할 것이니

 

天得其眞故長이요 地得其眞故久요 人得其眞故壽하느니
하늘이 그 참을 얻음으로 길고 땅이 그 참을 얻음으로 오래고 사람이 그 참을 얻음으로 수 하느니

 

世人所以不能長久者는 爲喪其無相하고 散其無體하여
세상 사람이 바에 써 능히 장구치 못함은 그 상이 없는 자리를 상실하고 그 체가 없음을 해산해서

 

不能使百骸九竅與眞體並存 故로 死矣니라.
능히 백해구규로 하여금 참 체성으로 더불어 아울러 존속케 함이라. 그러므로 사 하느니라.

 

先天而生하되 生而無形하고 後天而存하되
하늘 먼저 낳으되 생 함이 그 형상이 없고 하늘 후에까지 존속해 있으되

 

存而無體라 然而無體나
존속함이 그 체성이 없음이니라. 그러나 체가 없어서

 

未嘗存也 故不可思議로다
일찍이 존속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가히 사의할 수가 없도다.

 

靜爲之性이나 心在其中이요
정하면 성이라 하나 마음이 그 가운데에 있고

 

動爲之心이나 性在其中矣니로다
동하면 마음이라고 하나 성품이 그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心生性滅하고 心滅性現하느니
마음이 생기면 성품이 멸하고 마음이 멸하면 성품이 나타나느니

 

性現則如空無相하여 湛然圓滿이라
성품이 나타나면 공해서 상이 없어 담연히 원만 하도다.

 

大道는 無相故로 內其攝於有하고 眞性은 無爲故로
대도는 상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안으로 모든 있음을 끼워 안고 있으며 참 성품은 함이 없음이라.

 

外不生其心하느니 如如自然하여 廣無邊際로다
그러므로 밖으로 그 마음이 나타나지 아니하느니 여여히 자연 그대로 넓어서 끝과 끝이 없도다.

 

對境忘境하니 不沈於六賊之魔하고 居塵出塵하니
경계를 대하되 경계를 잊게 되느니 육적의 마에 잠기지 아니하고 진세에 거하되 진세를 떠나니

 

不落於萬緣之化로다
일만 인연 관계로 변화됨이 떨어지지 아니 하도다.

 

致靜不하고 致和不遷하면
정에 이르러서 동하지 아니하고 화한데 이르러서 옮기지 아니하면

 

慧明十方하여 虛變無爲하리라..
지혜광명이 시방세계에 비치어서 허하게 변화하되 함이 없느니라.

 

總明綱要 修養으로 定力을 얻는 공부


不修養入定之工은 其法不一이라. .
대범 닦아 길러서 정력을 얻는 공부는 그 법이 한가지가 아니니라.

 

有外修養法하고 有內修養法하며 有外定靜法하고
외 수양 법이 있고 내 수양 법이 있으며 외정정법이 있고

 

有內定靜法하느니 學者能洞觀諸法하여
내정정법이 있으니 배우는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을 밝게 살피고

 

合用方便然後에 始可無缺而得大成하리라.
합해서 모든 방편을 사용한 뒤에 비로소 가히 결함 없이 대성함을 얻을 것이니라.

 

且有外道之定과 自性之定과 小乘之定과 大乘之定하여
또한 외도의 정과 자성의 정과 소승의 정과 대승의 정이 있어서

 

於此에 亦明瓣而善察然後에 始可無謬而得正定하리라.
이에 또한 밝게 판단하고 잘 살핀 연후에 비로소 가히 그르침 없이 바르게 행함을 얻으리라.

 

是以로 修養之道는 理一而法多하고 言殊而義同하리니
이러므로 써 수양하는 도는 ,이치는 하나로되 그 법은 많으며 말은 다르나 뜻은 같을 것이니

 

若不善解綱要면 則恐有執着偏修之病 이라
만일 잘 강령과 요긴함을 해결치 못하면 곧 편벽 되이 수련하는 병에 집착될까 두려워함이라.

 

故로 更擧全篇之總義하여 別爲簡辦如左하노라.
그러므로 다시 전 편의 총 의를 들어서 분별해 간단히 좌와 같이 분별되었으니

 

外修養者는 修養之意는 在於對治外境이니
외 수양이라 함은 수양의 뜻이 주로 외경을 대해서 공부하는 데에 그 뜻이 있으니


對治外境者는 一 避境工夫니
의경을 대해서 다스리는 자는, 하나는 경계를 피하는 공부이니

 

初學之時에 當遠避外誘境界是也요.
처음으로 배울 때에 마땅히 멀리 모든 경계를 피하라 함이 될 것이요,

 

二 捨事工夫니 不緊之事와
둘은 일을 놓는 공부이니 긴급하지 아니한 일과

 

煩雜之段을 當捨而不作이 是也요.
번잡한 단계를 마땅히 놓아버림이니 다만 만들지 아니함일 것이요,

 

三 依法工夫니
셋은 법에 의거해서 하는 공부이니

 

信受上乘解脫之法하여 求安心於眞理가 是也요.
상승 해탈의 법문을 신봉해 가져서 안심 법을 진리에서 구함일 것이요,

 

四 多聞工夫니
넷은 많이 듣는 공부이니

 

多聞偉人寬大實話하여 常存心於大局이 是也니라.
많이 위인들의 관대한 실화를 들어서 항상 마음을 대국적인 면에 존속함일 것이니라.

 

做工之際에 行此四事하면 則自然外境平定하여
공부를 할 즈음에 이 네 가지의 일을 행하면, 곧 자연히 외경이 평정해저서

 

無有忤心之段하리니
내 마음을 거스릴 단계가 없을 것이니,

 

古語에 云 樹欲靜而風不止라하니
고어에 말하기를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한다 하니

 

風者는 外境也라.
바람이 일어난다 함은 외경을 말함이요

 

風之則樹靜하고 境治則心安이니라.
그러므로 바람이 그치면 나무가 고요함과 같이 경계를 다스리면 마음이 편안 하느니라.

 

內修養者는 修養之意가 在於內修自心이니
내 수양자는 수양하는 뜻이 안으로 자심을 수련하는 데에 있나니

 

內修自心者는 一 執心工夫니
안으로 자심을 수련하는 자는, 하나는 집심 공부이니(마음 대중을 잡는 공부)

 

念佛坐禪과 及一切時中에 常念執心不動하여
염불 좌선과 및 일체 시중에 항상 생각하기를 마음 대중을 잡음이 동치 아니해서

 

使吾心神으로 不得流放外境이니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외경에 흘러 놓치지 아니함이나,

 

如馴牛人執轡不捨 是也요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소 고삐를 놓지 아니함일 것이요,

 

二 觀心工夫니 執心稍可면
둘은 관심공부이니 마음 대중을 잡아감이 자못 숙달되어 가면

 

則又放任自適 而但觀心所之하여
곧 놓아서 스스로 적중하는데 맡겨 두고 다만 가는 곳만을 관해서

 

制其妄念而已니
그 망념이 일어남을 제재할 뿐이니,

 

如馴牛人의
비유컨데 소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놓아버리고

 

捨轡觀牛하여 但制其錯行이 是也요
소만 관해서 다만 그릇 되이 행함을 제재함일 것이요

 

三 無心工夫니 觀心己熟이면
셋은 무심 공부이니 마음 관함이 이미 숙달이 되면

 

則又捨觀相 明寂自在 觀而無所觀이니
또한 상을 관함 마저 놓아버리고 밝고 적적함이 자유자재해서 관하되 관하는 바가 없음이니

 

如馴牛人이
비유컨데 소 길들이는 사람이

 

始入人牛不二之境하여 動 靜一眞 是也니라.
비로소 사람과 소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서 동과 정이 한결같이 참됨일 것이니라

 

經云 心淨則一切淨하느니
경에 말하기를, 마음이 조촐하면 일체가 다 조촐하다 하니

 

心者는 包虛空萬相者也라.
마음이라 함은 허공만상을 다 싸고 있음이라.

 

心一淨이면 則百千外境이 一切淸淨하여
마음이 하나로 조촐하면 백천외경의 일체가 다 청정해서

 

境我無間하여 同成淨土니라.
경계와 내가 사이가 없어 한가지로 정토세계를 이루었음이라.

 

外定靜者는 定靜之義가 在於立志不動이니
외정정 이라 함은 정정한 뜻이 입지부동하는 데에 있는 것이니

 

立志不動者는 一 發大願心이니 願心이 己極하면
입지부동하는 것은, 하나는 대원에 마음을 발함이니 원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則千萬世緣이 雖當面橫在라도
곧 천만세상의 얼킨 바 인연이 모름지기 마땅히 면전에 비껴 있을지라도

 

視若不見하여 小不掛心이니
보아도 보이지 아니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지 아니할 것이니

 

如釋迦世尊이 發心大道하여 王宮之樂과 雪山之苦를
석가세존이 대도에 발심해서 왕궁의 즐거움과 설산의 모든 고통을 마음 가운데

 

無留心內底思想이 是也요
머물러 두지 아니하는 사상일 것이요,

 

二 發大信心이니 信心己極이면
둘은 대 신심을 발함이니 신심이 이미 지극하면


則千萬世法이 雖紛紜並處라도
천만세상의 법이 비록 분운한 곳에 아울러 있을지 라도

 

更無思量取捨之心에 如慧可之於達磨也니
다시는 사량으로 취사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혜가 달마에게 나아감과 같음이니

 

一信決志에 忘軀求法底思想이 是也요
한번 믿음으로 뜻을 결정함에 몸을 잊고 법을 구하는 사상일 것이요,

 

三 發大忿心이니 忿心己極이면 則千萬障礙가
셋은 대분심을 발함이니 이미 분심이 지극하면 천만 장애가

 

包圍重疊이라도 無有恐怖退縮之心어니
중첩으로 포위했을지라도 공포의 마음과 퇴축하는 마음이 없음이니

 

如耶蘇之十二司徒가 冒險守道하여 死而不己底思想 是也니라.
야소의 십이사도와 같이 모험 가운데 도를 지켜서 죽어도 굽히지 아니함일 것이니라.

 

做工之際에 有此三思想則自然立志가 如山하여
공부할 때에 이 세가지 사상이 있으면 자연히 뜻 세움이 산과 같아서

 

無有動搖하리라
모든 경계에 동요됨이 없을 것임이라


(特擧世尊慧可十二司徒는
특히 세존과 혜가와 십이사도를 들어 보인 것은

 

但指一例而言 諸聖之能入道門者는 皆有若是底心思이니
다만 한 예를 말한 것이요, 모든 성인들의 도문에 들어감은 다 이와 같은 심사이오니,

 

且曰 非云實行之果有同一而但思想之同一也니라)
또한 말하기를 실행 결과가 동일함이 있음이 아니라 다만 사상의 동일함을 말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