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_06

醉月 2010. 3. 13. 17:26

바이칼 원주민 문화는 어디로 갔나?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 전통은 간 데 없고 러시아 주류문화 일색으로 변모

탈치 야외 목조민속박물관.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동호 기자>
알혼 섬에는 대도시에서 보기 힘든 통나무집 바냐가 있다.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 이용법은 필자의 전공이나 마찬가지다. 2년 전 이르쿠츠크외국어대 박근우 교수가 찾아낸 바이칼 호숫가의 바냐에서 정재승 소장과 함께 바이칼식 사우나를 하며 꼬박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그날 밤, 바이칼에는 평소보다 열 배나 커 보이는 보름달이 떴다. 물위에 비친 달빛은 한 줄기 은빛 카펫처럼 반짝이며 호수를 가로질러 사우나까지 연결되었다. 어디엔가 몸만 숨기면 누구나 나무꾼이 되고, 금방이라도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올 듯한 분위기였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답사단이 알혼 섬에서 하룻밤 묵은 후지르 마을의 통나무집. 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통나무집 바냐를 즐길 수 있다. <신동호 기자> 바이칼의 호리도리 나무꾼과 하늘 신 쿠르부스탄의 셋째 딸인 백조 공주의 연애담이 언제라도 재현될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었고, 이방인들은 바이칼의 보름달, 달빛 길, 바냐에 매혹되었다. 무릉도원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정 소장은 바이칼의 무릉도원을 ‘반야만월’이라고 불렀고, 박 교수는 바냐의 보름달을 반야만월로 해석한 그의 재치에 감탄했다.

바냐를 100% 즐기는 법이 있다. 우선 주먹만한 자갈이 가득 담긴 페치카를 자작나무·통나무 장작으로 두세 시간 달군다. 그 다음 사우나 도크에 들어가 자갈 페치카 위에 계속 물을 부으며 온도를 거의 100도 가까이 올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바냐에서 뜨겁게 몸을 달구고, 뜨거워진 나무 판에 누운 다음 싸리비처럼 생긴 회초리 베닉으로 온 몸을 마구 두드리면 러시아식 사우나는 절정에 이른다. 용감한 사람들은 데워진 몸이 식기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이칼 물에 뛰어든다.

뜨거운 증기가 가득한 사우나에서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 고깔모자를 쓰면 더 좋다. 조금 아쉬움이 남으면 뜨거운 물을 베닉에 적셔서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지긋하게 눌러주면 뜸의 효과를 내는 훌륭한 마무리가 된다. 전신에 베닉 세례를 받는 김문석 기자와 시미즈 교수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알혼 밤하늘에 가득했고, 윤명철 교수는 베닉을 더 세게 내리쳐달라고 주문하며 싸리나무 회초리가 몸에 떨어질 때마다 기합을 외쳤다. 그 덕분에 필자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알혼 여행을 마치고 밤늦게 이르쿠츠크로 돌아올 때는 야성에서 문명 세계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들판에 연필로 줄을 그어놓은 듯한 어둑한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불빛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극작가 체호프가 사할린 여행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르쿠츠크를 보고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실감났다. 거친 타이가와 황량한 스텝이 끝없이 이어지고, 길을 따라 도열한 자작나무가 바람에 따라 물결치듯 몸을 뒤척이는 시베리아 황야 한가운데서 러시아정교회와 유럽문명을 보았으니 체호프의 감격이 어떠하였을지 짐작된다.

시내 곳곳에는 문필가의 동상과 연극극장과 오페라, 영화관, 대학들이 들어서 있다. 인구 60만 남짓한 소도시에 대학이 무려 20개나 된다. 드라마센터와 레퍼토리 극단까지 있다. 레닌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밤필로프와 현대 산문의 대가 라스푸틴을 비롯한 다수의 소비에트 예술가들이 수도를 마다하고 이르쿠츠크에 살기를 고집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

푸슈킨과 동시대인들이었던 문인재사들이 유형수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와서 건설한 이상향이 이르쿠츠크가 아니던가. 제카브리스트 박물관에는 정치범이 되어 유랑했던 남정네들을 따라 시베리아에 온 여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든 12월 당원인 제카브리스트 혁명가들이 차르정부 전복에 실패한 뒤 검거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언도받았다. 광산지대인 치타를 비롯한 노역장에서 형기를 마친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이 하나둘 약속이나 한 듯이 모여서 독특한 문화를 일군 곳이 바로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에는 12월당 혁명가들의 반항하는 지성과 자유로운 영혼이 서려 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바이칼호수

정재승 소장이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갔다. 한여름인데도 물 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물이 차갑다. <신동호 기자>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이기환 선임기자 일행을 박근우 교수와 함께 레나 강 상류의 고대 암각화 단지인 카축 취재를 위해 떠나보내고 필자는 신동호 단장 팀에 묻어 바이칼 인근의 어촌인 리스트비양카로 출발했다. 취재할 곳이 많아 답사팀을 두 개로 나눠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몇 해 전의 답사에서 카축 암각화 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강강술래, 우주인의 이미지, 고대 용의 모습, 마소가 끄는 고대 전차, 다양한 동식물, 샤먼의식으로 추정되는 광경 등이 선명한 암각화단지가 무려 1.2㎞에 걸쳐 펼쳐져 있는 장관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러시아작가연맹 소속 시인 예브게니 할아버지가 카축 암각화단지의 공식 명칭인 ‘시슈킨스크 문화재’의 관리인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카축에는 AD 700년에서 BC 6000년 사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어울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편년은 고고학자들의 몫이다.

리스트비앙카 방문팀은 바이칼에 유람 온 관광객들이 한 번쯤 찾는 바이칼호수박물관에 들러 십 년쯤 공부해야 알 만한 내용을 단 한시간 만에 상세하게 학습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서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길목의 샤먼바위를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예약한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빡빡하던 일정에 예기치 않은 공백이 생겼다.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두어 시간 남짓한 호사였지만, 얼른 바이칼에 발목을 담근 다음 햇볕으로 따끈해진 호숫가 바위에 올라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일광욕 모드로 들어갔다.

알혼 섬과 바이칼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한 후지르 마을의 민속박물관 내부. <김문석 기자> 문득 고향인 부산 앞바다가 눈앞에 삼삼했다. 아기자기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있는 해운대와 광안리에 가고 싶었다. 다들 바이칼의 풍광을 칭송하지만 필자에게는 해운대가 바이칼보다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바위에 눕기 전 바이칼 명물이라는 훈제 생선 ‘오물(Omul)’을 먹을 때도 자갈치의 싱싱한 회가 간절했고, 투박하면서도 간드러지는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맴돌았다.

해운대와 다른 바이칼의 진면목은 물속에 발을 담그면 비로소 알게 된다. 한여름인데도 물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이칼 호수는 차갑다. 물에서 한기가 인다. 중앙아시아의 내륙오지 천산산맥 자락의 해발 2000m 고지에 있는 이식쿨 호수와 바이칼은 여러모로 닮았다. 이식쿨은 키르기즈 말로 ‘따뜻한 호수’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만년설이 녹아내린 것처럼 차다. 중앙아시아 소설가 칭기스 아이트마토프는 ‘따뜻한 호수’라는 이름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대비는 신화적인 상징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신화 생성 과정을 다룬 소설 ‘하얀 배’를 이식쿨 배경으로 썼다. 바이칼 역시 ‘불이 멈춘 곳’이라는 뜻을 가졌으면서 한여름에 발을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것을 보면 여행객이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는 신화와 설화들이 호수 주변에 가득 서려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바이칼 할아버지와 앙가라 공주 그리고 예니세이 왕자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를 닮은 호리도리 이야기, 게르만인들의 지그프리드 왕자와 닮은꼴인 황금복사뼈 알탄샤가이 전설 등 현지인 이야기꾼이 보따리를 풀면 바이칼의 이야기 세계는 멈출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고유 언어 사라지고 의식주도 변화

바이칼 호수 유람을 마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탈치 야외 목조박물관에 들렀다. 용인 민속촌과 비슷한 곳인데, 전시품들만 가득하고 사람 사는 냄새는 우리의 민속촌과 비교해서 덜하다. 이르쿠츠크 인근에 있던 옛날 가옥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박물관을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에 진출하기 전에는 원주민들이 주인이었는데도, 건물들은 대부분 러시아식 목조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에벵키와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건축물이 탈치의 남쪽과 북쪽 변경에 몇 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탈치 박물관은 시베리아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오늘날의 바이칼 지역 문화를 에벵키나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문화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바이칼 문화가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들의 문화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추정이거나 선입견이라는 게 더 정답에 가깝다. 실제로 현지에 와서 보면 원주민의 문화 전통은 간 데 없고, 주류 문화가 러시아 일색이다. 이 글 앞부분에 시간 순으로 열거된 체험들도 사실 러시아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신들의 고향 알혼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통나무 주택도 러시아식이고 여행자의 피로를 풀게 해준 사우나 바냐 역시 러시아 전통이다. 음식, 의복, 교통수단, 언어 등 그 어디에서도 원주민 문화를 찾기 어렵다.

원주민 문화는 인디언보호구역처럼 일정한 지역에 한정된 문화재와 유물유구, 연극배우처럼 공연을 하는 샤먼과의 인터뷰에서 찾아보는 것이 고작이다. 고대 유물인 암각화의 관리자도 러시아 시인이었고, 이르쿠츠크 공대의 고고학자들도 대부분 러시아인들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소수 종족 현지인들도 대부분 종족 고유의 말을 잊은 채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대도시뿐 아니라 농촌지역에도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

말없이 흐르는 앙가라 강은 과거를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소비에트가 폐업하던 시절의 인구조사를 인용한 포사이드의 저서 ‘시베리아의 제종족’에는 시베리아 주민의 수가 2100만 정도이고, 그 가운데 95%가 러시아를 포함한 슬라브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원주민들의 수가 정말 미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시베리아를 두고 소수 종족 문화가 꽃피고 전통이 숨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낭만적인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시베리아 문화를 러시아 문화와 시베리아 고유문화가 만난 하이브리드 형태로 보는 연구자들은 직접 시베리아를 견문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시베리아 문화를 복합적이라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은 전체 인구의 5% 남짓한 시베리아 원주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원주민의 문화만 떼어놓고 보면 잡종문화다. 원주민들은 고유 언어를 버리고 러시아어를 택했다. 주거와 의복을 러시아식으로 바꾸었고, 음식과 연애 방식마저 러시아풍을 따라간다. 샤먼들의 의식에조차 러시아식 사고와 원주민 사고가 복합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는 러시아인 커뮤니티의 주류 문화는 원주민 문화를 배제한 러시아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시베리아를 개척한 초기 러시아 이민자들을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옛 사람(Starye Sibiryaki)’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텅 빈 시베리아에 들어와 문명을 일군 주인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의 과거와 원주민의 문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단일종족 신화 논리는 역사를 축소… ‘단군-게세르 계열’로 안목을 넓혀야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우사, 풍백, 운사, 세오가 환웅을 보필하는 사신(四神)으로 설정되고, 태초의 혼돈 속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이 현무, 백호, 청룡, 주작의 전투 장면으로 묘사된다.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우사와 풍백이 실제로는 전쟁의 신이었고, 현무, 백호로 변신하여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연출인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보는 시각의 일부다. 물론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족조신화로 축소하며, 단일 종족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한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조선에서 분화한 다양한 종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농경이라는 상식화된 추론이 실제로는 막연한 추정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북방신화인 ‘게세르’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단군신화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연출자 개인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어렵다.

단군조선 사회체제 접근 신중해야

프롤로그와 제1, 2부를 비교해보자. 게세르 신화에서는 신화 텍스트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 세계의 회의, 하늘신 게세르의 지상 파견, 지상의 조화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지상세계의 문제와 백성들의 도탄을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은 뒤 우사, 풍백, 운사를 비롯한 전쟁신 혹은 최첨단 신무기를 갖추고 하늘용사 3000명과 함께 지상강림한다. 이후 신시로 불리는 하늘 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들을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가 닮은꼴이 아닌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신화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서사시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주곡’이라는 표현을 농경사회의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으나 단군신화가 유목에 가까운 북방 종족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단군조선의 사회경제 체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농경을 상징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쩌면,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정주민 이데올로기가 첨가된 편견일 수 있다. 유목세계에 존재하는 닮은꼴 신화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바람’이나 ‘비’, ‘주곡’의 요소를 농경사회의 모티프로 추론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단군조선의 경제 기반을 농경에 연결하는 시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한반도의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범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정주민, 백의민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정착 과정으로 설명하는 통설과 함께 여인으로 변한 웅녀를 두고서 곰족을 부각시키며 단군조선을 곰족의 국가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절반쯤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서울대 강정원 교수는 ‘북아시아 곰 관련 의례와 관념 체계’(비교민속학회 발표문, 2007)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상식의 우상을 부분적으로 허문다. 곰 관련 샤머니즘 제의를 시베리아에서 찾기 어렵고, 곰 제의와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이 의문스러워서 단군신화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은 역으로 샤머니즘과 곰 토템 사이에 역사적인 관련성이 크지 않음을 인정하면 단군신화를 샤머니즘 신화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곰 의례 관련 대표적인 연구자라 할 수 있는 한스-요하힘 파프로트의 저서 ‘퉁구스족의 곰 의례‘(태학사, 2007)에는 샤머니즘과 곰을 직접 연결시키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웅녀는 자신의 의지로 삼칠일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했던 곰족의 행태와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곰족의 종족 이데올로기에서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이념으로 하는 하늘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존재로 전이한 것으로 말이다. 웅녀는 하늘 세계 이념을 공유하고 개별 종족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이 된 웅녀에게 곰족이나 호족은 자랑스러운 혈통이 아니라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교화 대상이다. 단군신화가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라는 좁은 범주가 아니라 고대의 제국 형성과 소멸 과정을 담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종족 복합사회 성격 간과 말아야

신화 텍스트를 살펴보면,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웅녀의 자식이거나 혹은 단군의 직접적인 후손인 것도 아니다. 단군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곰족, 호족을 비롯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무리들을 인간으로 교화시켜 보편과 인간을 지향하는 다종족 이념사회인 고대 조선제국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와 북방 거주자들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순혈 이데올로기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음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단군신화를 한민족 혹은 단일민족의 족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로 보는 시각은 단군신화가 다종족 복합사회의 성격을 가진 제국의 신화인 점을 간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을 해체하며 조선의 영역과 범위를 축소하는 왜소한 접근이다. 단군을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나 건국신화로 주장하는 논리는 자신의 역사를 축소하는 논리를 생산해온 것이다. 신화 텍스트 속의 조선은 다종족, 다문화를 인정하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을 공동가치로 지향하는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원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신화 연구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이칼 샤먼 발렌친은 게세르 신화와 닮은꼴인 단군신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 단군과 게세르의 닮은꼴 이야기가 탄생된 경위를 따져봐야 한다. 바이칼 샤먼인 발렌친뿐 아니라 다수의 몽골계 연구자들이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몽골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 2〉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의 예다. 담딩수렝은 동북아시아의 특이한 영웅 서사시인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모티프가 ‘티베트→몽골→바이칼 지역 부리야트’의 방향으로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전파론을 주장했고, 발렌친을 비롯한 일단의 연구자들은 몽골인들의 게세르 이야기가 주변 지역 거주자들의 장가르 서사시, 마아다이카라, 단군신화와 같은 유사한 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영향설을 펴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세계에서 기원설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비교 연구를 통해 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기원을 밝히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조차 객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신화 채록이 500여 년 앞서

‘게세르 판본 연구’(비교민속학, 2007)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파설의 말단에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가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신화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 고본이고, 육당이 몽골이나 티베트가 아닌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했던 사실을 보면 전파의 경로 추적은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발생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야기 채록 시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문헌에 의한 고증은 이야기의 존재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기 때문이다.

북방민족들에게서 전해오는 게세르 신화들 가운데 가장 이른 채록본으로는 ‘1716년 베이징 판본’을 손꼽을 수 있다. 만주족의 족조신화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몽골의 게세르 서사시가 베이징에서 1716년 목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베이징 판본’ 채록 이전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미 1600년대 초에 게세르 계열의 서사시가 존재했고, 채록되었다는 보고가 있지만, 실제로 티베트 고본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판본을 찾을 길이 없다. 1830년대에 몽골어로 기록된 ‘링 게세르(Geser of Ling) 판본’을 티베트 고본의 몽골어 번역본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어 티베트 고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화적인 시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판본들 역시 그 각본들의 수가 100여 개가 넘지만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채록된 것이다. 알타이의 ‘마아다이카라’와 칼묵인들의 ‘장가르’ 역시 18세기 이후 채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3세기에 일연선사가 기록한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이야기 계열에서 가장 오래된 채록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단군신화를 채록한 이후 무려 5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와 서사시들이 몽골 등지에서 채록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단군을 게세르 계열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게세르 이야기들을 단군신화 계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고고학적인 사실뿐 아니라 신화적인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해서 전파론과 영향설의 잣대로 해석하는 방법론이 과연 옳은가?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를 ‘단군-게세르 계열’로 부르는 것이 마땅해보인다.

13세기는 몽골제국이 성립하는 단계이며 한반도가 몽골에 무릎을 꿇고,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의 일본열도 공략 시도가 있던 격변의 시기였고, 이를 감안하여 단군신화를 일연선사에 의한 위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난에 직면해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화 활용 전략이 구사된다는 설명인데, 국난을 초래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계 신화를 모방해서 한반도의 신화를 창작했다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일연선사는 단군신화가 본인의 창작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의 채록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오늘날 단군신화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신화적인 서사들이 동북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발견되는 것을 보면, 유사한 이야기들이 일연 이전에도 지역과 종족에 따라 독특한 판본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파 방향이야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존재를 13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