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KLO 부대 소속 유격백마부대

醉月 2013. 7. 23. 01:30

서해안을 사수했던 KLO 부대 소속 유격백마부대

그들은 6·25 때 압록강 부근까지 지배했다

글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 정전협정 앞두고 NLL 그어지며 고향을 눈앞에 둔 채 눈물 머금고 南下
⊙ 주로 평북 정주 출신들로 구성. 서해 북위 40도 선상 12개 도서 점령
⊙ 국방부도 인정한 북괴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600여 명 생포 戰果
유격백마부대원들이 활동했던 북위 40도선 부근 지역. 대화도에 백마부대 본부가 있었다.
지난 7월 1일 오전. 서울 송파구 특수전 사령부 연병장에서는 백발(白髮)의 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병식이 거행됐다. 6·25 전쟁 당시 군번도 없이 서해바다를 지켰던 한 유격대원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훈장증서에 새겨진 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이의 직함과 이름은 ‘전 8240부대 유격부대 선박대장 고 최원모’였다. 그의 공로는 미(美) 극동군 사령부 소속 KLO 부대에 소속돼 40t급 ‘북진호’의 함장으로 군수물자 보급과 중공군·인민군 포로 수송, 부대원과 민간인 대피 등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1910년생인 최원모씨는 평북 정주 출신이다. 1967년 6월 선주(船主)로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다른 선원 7명과 함께 납북됐다. 다른 선원 5명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최원모씨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6·25 전쟁 와중에서도 적진을 넘나들며 전투에 뛰어들었어도 살아남은 그였지만 그 경력이 문제가 돼 북한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최원모씨를 대신해 훈장을 받은 사람은 그의 아들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였다. KLO 유격백마부대전우회 회장도 맡고 있는 최 대표는 “이 훈장은 6·25 전쟁 당시 2600명이었던 유격백마부대원 전체에게 국가가 수여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고령인 생존 부대원들에 대한 예우법이 국회에 계류 중인데 하루빨리 통과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600여 명의 유격백마부대원들. 이들은 최원모씨처럼 군번도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주로 오산학교 출신들로 부대원 대부분의 고향이 평북 정주였다. KLO 부대 20개 유격부대 중 평북 출신들로 구성된 유일한 부대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황해도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였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을 공인해 주는 문서가 하나 있다. 1971년 9월 16일 자로 작성된 <국방부 장관의 전 유격백마부대에 관한 사실 증명>이라는 문서가 그것이다. 문서번호는 ‘전편 184-228’로 다음은 그 원문이다.

<가. 1950. 11. 17 평안북도에 진격하였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침략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정주군의 각 면 치안대가 단합하여 12. 22 유격대로서 백마부대라고 명명하고 발족하였음. 그 후 서해의 여러 섬을 전전하면서 대공 유격전으로 북괴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포로 600여 명, 애국 청년 구출 2800명, 동포 구출 1만5000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그외 적의 보급로 파괴(철도·터널·교량)와 중요 시설 기습 등 실로 빛나는 전공을 거두었음.

나. 유격백마부대는 병력이 2600여 명으로서, 20개 유격부대 중 그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 각 유격부대는 처음에 미8군에서 관장하다가 1952. 11 미 극동사령부 정보처로 이관되었음. 휴전 후 1953. 10 국방부 산하 8250부대로 흡수되어 유격대로 존속하여 오다가 1954. 2 국군으로 정식 편입되었음.

다. 유격백마부대는 유격작전 기간 중 552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이들 전사자는 육군본부 민사감실에 통보되어 그 명단이 기록으로 보관되어 있으나 군적(軍籍)에 오르지 못하고 금일에 이르고 있음.>


서해안 따라 중공군 22만여 명 발 묶어
대화도 점령시 찍은 백마부대원들의 사진. ‘대화도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생존 유격백마부대원들은 1968년에 자신들의 전투기록을 담은 《북위 40도선(北緯四十度線)》을 펴냈다. 이들이 자신들의 전사(戰史) 제목을 ‘북위40도선’으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6·25 당시 자신들이 점령하고 활동하던 대화도 등 서해 12개 섬의 위치가 북위 40도 선상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북위 40도선에는 압록강 입구와 신의주 부근인 평북 용암포 등이 위치해 있다. 이들의 고향인 평북 정주도 이 북위 40도선 부근에 있다.

그들의 존재는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북방 서해 수역의 지배자가 우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일용(金一龍·79) 전 유격백마부대전우회 부회장, 김창수 사무총장 등을 만나 6·25전쟁 당시 이들이 서해에서 펼친 활동 등의 증언을 들어 보았다.

유격백마부대의 전신은 정주군 일대 13개 면에 조직돼 있던 치안대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에 맞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선 청년들이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1950년 11월 22일 해안가인 정주군 갈산면 번좌리에 집결해 김응수(金應洙)씨를 부대장으로 추대하고 유격백마부대를 창설했다. 육군본부 G2 요원이었던 김응수 대장은 2003년 작고했다.

유격백마부대는 부대 결성 후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세를 피해 일단 번좌리에서 2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애도 섬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그후 평북 지역의 해안가에 있는 대화도, 소화도, 가차도 등 12개 섬을 점거하고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를 벌였다. 대화도에는 유격백마부대의 사령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북한 영토 후방 북위 40도선 근방이라는 특수한 이들의 활동 반경은 이들에게 1년 365일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게 했다. 이들의 활동 반경은 선박을 이용해 만주 지역의 안동, 여순, 대련 등지까지 미쳤다. 중공군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한 임무였다. 압록강 하구를 통해 수송하는 적 해군의 병참 수송로를 봉쇄하기 위해 중공군의 군수물자 수송선단을 격침하거나 나포하는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륙까지 침투해 기습작전으로 적들의 전략 요충지를 공격해 중공군과 인민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서해상에서 활동하는 적들의 해군 전력이 보잘것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고향땅을 되찾고 말겠다는 유격백마부대원들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과들이었다.

유격백마부대를 비롯한 서해상에서 활동하는 우리 유격부대 때문에 압록강 입구에서 한강 입구까지 중공군 22만3300명이 전쟁 내내 서해안을 지켜야만 했다. 불과 수천 명의 유격부대원들이 전선에 투입돼야 할 22만여 명의 중공군을 묶어 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주한극동군사령부연락파견대 본부에서 작성해 하달했던 작전명령 사본에도 기록돼 있다.


점령지에서 실시한 교육
사진에 ‘새해를 맞으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새해에는 전쟁이 끝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1951년 2월 백령도에 표기지사령부를 설치하고 당시 서해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 유격대를 통합했다. 유격백마부대도 같은해 3월 간부 67명을 백령도 미군사령부에 보내 특수전 교육을 받고 식량과 무기를 지급 받았다. 이때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평안북도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지정 받았다. 만주로부터 대동강 입구에 이르는 적의 해상 수송로 차단 작전도 이때 부여 받았다.

특수전 훈련을 받고 사령부로부터 무기 등 군수품을 수령한 유격백마부대는 1951년 5월 2일 대화도를 점령했다. 대화도 점령 후 그 인근에 있는 소화도, 가도, 탄도 등 주요 도서 등을 차례로 점령해 가며 활동 반경을 넓혀 가는 한편 점령한 도서 방어에도 힘을 기울였다. 모두 북위 40도선 부근의 섬들이었다.

이들 평북 지역의 주요 섬들을 유격백마부대가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점령 후 실시한 학교교육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유격백마부대 점령하에 있는 주요 섬들에 거주하고 있던 피란민은 약 1만5000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는 취학 대상 아동들도 많았다. 이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 1951년 7월 1일부터 유격백마부대의 사령부를 설치한 대화도를 비롯해 소화도, 탄도에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시작했다. 학비는 면제였다. 학용품도 물론 무상으로 지급했고 식량이 없어 고통 받는 주민들에게는 식량을 보급해 주었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식량 보급이 원활치 않아 식량 자급자족에 나서기도 했다. 1951년 가을 점령지였던 가도에서 추수작업을 통해 곡물 약 200여 석을 거두었고, 부식 조달을 위해서 어영도 어장에 어선 6척을 보내 어로작업을 벌였다. 그때 200t가량의 갈치를 잡아 탄도에 있는 생선저장탱크에 저장함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역시 평북 지역의 서해안을 우리 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대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병력의 보충은 이웃 매추리섬과 철산 모나즈 광산에서 구출되는 반공청년들을 주축으로 했다. 평북 철산반도 일대의 모나즈 광산은 일제 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8·15 광복 전에는 정주 출신인 최태섭(崔泰涉) 전 한국유리 회장의 소유였다. 북한은 1950년 국군과 연합군이 이 지역까지 진격했을 때 우익 진영에 가담했거나 치안대에 가담했던 반공청년들을 체포해 모나즈 광산으로 보내 강제노역을 시켰다. 유격백마부대가 습격을 통해 모나즈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반공청년을 구한 수는 2800여 명에 이른다.


압록강 입구 봉쇄작전
‘병원을 나서며’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걸로 봐서 유격백마부대원 누군가의 퇴원을 기념해 찍은 사진인 것 같다.

유격백마부대원들은 중공군 보급로 차단과 관련해 서해상 압록강 입구에서 4차례에 걸쳐 작전을 벌인다.

1951년 7월 30일 백금룡이 이끄는 특공대원 28명은 북진호(선장 최원모)에 승선해 압록강 입구로 출동했다. 그곳에서 잠복 중 군수물자를 실은 적의 수송선을 발견하고 기습공격을 벌여 적 수송선 3척 중 2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나포해 귀대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거둔 노획물은 밀가루 1만2000포대, 수수 3600포대였고 중공 소속 선원 63명을 생포했다.

두 번째 작전은 같은 해 8월 25일 벌어졌다. 2연대장 최광조가 이끄는 특공조가 북진호를 타고 잠복 중 압록강 입구에 있는 신도 앞바다에서 적의 해군 경비정 350t급을 격침시킨 것이다. 이 특공대는 이후에도 계속 잠복하다가 중공군의 보급선단인 정크선 3척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 2척은 격침하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세 번째 작전은 이듬해인 1952년 8월 30일 한봉덕이 이끄는 특공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시 북진호를 타고 만주 앞바다에서 잠복 중 중공군수송선단 3척을 발견해 3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마지막 4번째 작전은 정전협정을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26일 벌어진다. 박순배가 이끄는 특공대가 만주 해안선을 따라 압록강 입구 부근에서 잠복 중 적의 수송선단 12척을 발견하고 이 가운데 5척을 격침시킨 것이다. 이때 적의 경비정도 1척 격침시켰는데 유격백마부대도 특공대장 박순배 등 5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다.

유격백마부대원들의 기억 속에는 승리의 기쁨만 남아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당시의 아픔을 현재진행형으로 앓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가장 아프게 기억하는 전투는 중공군 2개 사단과 접전을 벌인 1951년 11월의 대화도 전투다. 중공군도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당했지만 유격백마부대도 부대 창설 후 최대의 피해를 당한다. 이 전투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문이었다.

정전회담이 시작된 후인 그해 10월 유엔군 측은 공산군에 이런 제의를 했다.

“지금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되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38선 이북 도서와 공산 측이 점령하고 있는 개성지구와 교환하자.”

공산군 측은 이런 유엔군 측의 제의를 거절했다. 대신 38선 이북의 섬들을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당시 38선 이북의 섬들 가운데 우리 측은 황해도 해안의 초도와 석도를 유격수월부대와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나머지 대화도를 비롯한 최북단 12개 섬들은 유격백마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공산군들은 유격백마부대의 사령부가 있는 대화도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공산군은 중공군 제4야전군 148사단 본부를 철산에 설치하고 유격백마부대의 점령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철산반도를 중심으로 해안선에 병력을 배치해 유격백마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각종 포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공군을 동원해 대화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13일 오후. 대화도 북쪽 상공에 대형 폭격기 8대와 미그 15기 12대가 출현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삽시간에 불바다가 된 대화도에서는 이날 317명의 부대원과 민간인 39명이 사망했다. 이후 중공군은 미그기 편대를 동원해 공습해 왔다. 유격백마부대의 전초기지인 탄도에도 공격을 해 왔다.

같은 해 11월 30일 밤. 중공군 2개 사단이 대화도를 공격해 왔다. 이날 전투에서 유격백마부대는 253명의 전사자를 냈고, 613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대화도를 내줬다. 대화도 점령을 위해 중공군은 500~600t급 해군함정 6척의 손실을 입었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우리가 지켰던 곳은 NLL 훨씬 북쪽”

유격백마부대 본대가 떠나면서 일시적으로 대화도를 내줬지만 대화도에 잔류한 50여 명의 유격백마부대원들이 중공군을 상대로 벌이는 게릴라전은 게속됐다. 게릴라전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정광남 제3연대장과 최광조 제2연대장은 부대원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이렇게 게릴라전을 벌이던 잔류 50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1952년 4월 대화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 이후 유격백마부대는 대화도 재탈환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박우영이 이끄는 수색대가 1952년 6월 8일 대화도에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해 빈집에 숨어 있던 미 공군 대령 일버트 쉰즈를 실종 37일 만에 구출하기도 했다. 일버트 쉰즈는 당시 수원비행기지 단장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격백마부대는 중공군의 느슨해진 경계를 틈타 그해 7월 20일 대화도를 다시 점령하고 진주할 수 있었다.

대화도를 되찾은 후 유격백마부대원들은 다시 서해안을 지배하며 적들에 대한 기습공격과 해상수송로 봉쇄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정전협정 조인 1주일여를 앞둔 1953년 7월 22일 유엔의 지시로 그들은 서해 북위 40도선 부근 12개 섬들을 적들에게 넘겨주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용유도로 남하해야 했다. 그리고 유격백마부대는 1954년 2월 26일 해산됐다.

김일용씨는 철수 당시의 심정을 “우리가 고향땅을 찾으려고 그 수많은 동지들의 피를 흘리며 싸운 건데 고향을 눈앞에 두고 떠나올 때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라면서 “지금 NLL(북방한계선)을 양보하느니 마느니 논란들이 있는 것 같은데 서해 푸른 바다 밑에 있을 우리 동지들의 넋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통곡하고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와 우리 동지들이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영토는 그 NLL보다도 훨씬 이북 지역에 있던 곳입니다. 차라리 전투를 통해서 빼앗긴 지역이라면 덜 억울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軍史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총기의 세계  (0) 2013.08.24
‘아베의 군대’가 꿈틀대고 있다   (0) 2013.08.10
北 핵미사일 막는 3대 방패 과연 믿을 수 있나?  (0) 2013.06.25
中 핵 선제 사용  (0) 2013.06.12
세계해전사의 감탄  (0) 2013.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