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영환 시인의 "시가 있는 산"_05

醉月 2011. 3. 22. 08:51
<21> 바래봉에서 신발을 아끼다
산과의 짜릿한 스킨십 원한다면 맨발로 도전하라
타인의 시선 의식하지 말고 내 두 발에 자유를 주자

    지리산 바래봉에서 하산하는 길.

 

하산길인 데다 걷기 힘든 돌바닥 길이어서 맨발이 아니라 신발을 신고 걷고 있는 중이다.
맨발 산행을 했던 기억이 열아홉 번 된다. 그 중에서 계룡산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돌산이어서 발바닥에 오는 자극이 보통이 아니었다. 길에 널려져 있는 잔잔한 돌들도 날카로웠고 능선에 있는 바위도 뾰족하여 발바닥이 마비되고 화끈거렸다. 지나는 분의 시선도 따가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신기한 눈으로 보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져왔다. 그럴 때마다 "신발 아끼려고 그럼니다"라고 답을 하면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지나갔다. 특히 서양인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놀란 모습으로 한동안 서있기도 했다.

그들이 염려하는 건 위험 때문이다. 맨발로 산을 걷는 것은 생각해보면 위험하다. 날카로운 돌부리에 찍혀 상처가 날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긁혀 피가 흐를 수도 있고 뱀에게 물려 치명상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은 스스로 그 위험을 용케 피해서 잘 다치지 않는다.

맨발 산행이 위험을 안고 있음에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대지의 살과 자신의 살을 직접 부비기 때문이다. 대지가 간직한 부드러움 혹은 딱딱함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걸을 수가 있다. 발바닥 지압으로 인해 가져오는 건강은 부차적인 수확이다. 맨발로 걸어보고도 그 느낌을 설명하기 어려운 길은 진흙길이었다. 늪지대를 통과할 때 발가락 사이로 전해오는 진흙의 부드러움은 전신에 쾌감을 준다. 이런 맛에 맨발 산행을 한다.


맨발로 산길을 걸으니 산이 좋아 한다
살과 살을 맞대니 흙이 좋아 한다
온몸이 열려 길이 스스로 밝아진다
황홀한 오감의 축제가 펼쳐진다
잠 든 풀과 나무들이 깨지 않게
소리 내지 않고 맨발로 산길을 가니
작고 못난 돌맹이까지 발가락 간질이며
함께 사랑하자 한다

맨발 산행은 오르막이나 능선길에서 한두 시간 정도 하는 것이 좋다. 너무 오래하면 체력에 무리가 오고 긴장감이 지속되어 오히려 정신이 날카로워 질 수도 있다. 초보자는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이나 하산길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산길은 지쳐있게 마련이고 다리가 풀려 자칫하면 골절이나 뾰족한 돌부리에 발가락을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맨발 산행은 사철 언제든지 가능하다. 눈밭을 걸으면 시원함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걸을수록 발바닥에서부터 뜨거움이 전달되어 온다. 눈이 가진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는 묘미가 있다.

맨발 산행은 익숙한 이들에게는 어떤 산이라도 가능하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감촉이 좋은 곳으로는 금정산 능선, 성지곡에서 금정산 남문까지, 신불산에서 영취산 가는 길, 재약산 사자봉에서 능동산에 이르는 길, 천성산, 그리고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래봉가는 능선길 등 많다.

문제는 첫발을 내딛는 용기다. 맨발 산행에 대한 방법론도 많이 탐구되었고 안내하는 곳도 많다. 맨발 산행을 알리고 개척한 분 중에 신남석 씨가 있다. 그에 대한 이론과 더불어 널리 퍼뜨려 동호인을 많이 일구어냈다. 그는 양복을 입고 맨발에 구두를 신고 시내를 다닐 정도로 맨발 예찬론자다.

맨발은 고행을 상징한다.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 성인들도 맨발로 걸었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 맨발이었다. 산에서 맨발은 여유인 동시에 도전이다.

구도자가 아니더라도 산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산과 가져보는 스킨십이 산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황홀경에 빠져드는 차원 높은 산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맨발 산행을 가로막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남들의 시선에 뒤따르는 쑥스러움이다. 시선 의식하지 않고 과감하게 신발을 벗고 발에게도 자유를 주어 행복한 도전을 해본다.

 

 

<22> 속리산에서 속세를 보다
별장 없어도 휴양림 있어 대리만족 … 그것 또한 '俗離(속리)'
세상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속리일 수도

    속리산 신선대 휴게소에서 신선주라는 이름의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필자.

 

속리산은 세상 가운데 솟아 있다. 사하촌은 말할 것도 없고 국립공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대 코앞에 그리고 신선대에 자리 잡은 휴게소가 사람들로 넘쳐난다. 한 잔의 술로 목을 축이고 그래서 속리(俗離)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속리는 그저 꿈꾸는 세계에 불과한 것일까. 세속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왜 세상을 벗어나려고 할까. 지리산 자락이나 아니면 깊은 산골에 촌집을 구하고 거기에 황토방을 넣어 주말농장을 가꾸며 생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은퇴 후에는 전원생활 또는 은둔생활을 하는 것을 꿈으로 가진 이들이 많다. 그렇게 작정하고 귀농학교에서 농사짓는 법도 배우고 하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는 용기있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생활도 1, 2년은 호기심이나 의지로 버텨낼 수 있으나 완전히 정착하지 않는 이상 발걸음이 뜸해지게 마련이고 자주 가지 않으면 전원도 쉽게 식상해 버릴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내게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산에 빠지면 진정으로 산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그리울 때마다 한 번씩 산에 들면 더 산을 깊이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런 집을 가진 분을 친구로 사귀어 놓고 필요할 때 놀러 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친구를 둔다면 모든 곳이 다 내 집 같지 않겠는가. 외롭고 쓸쓸한 그들에게 위문하러 간다면 또한 좋아하지 않겠는가.


순한 먹빛이 좋아지는 걸 보니
전원에 들 때가 되었나보다
색 짙은 빨래가 탈수기에 돌려져
온몸이 탈색되고 난 뒤였을까
눈은 어느덧 무채색이 되어
오랜만에 뜬 무지개를 보아도
징 했던 어린 날만 생각나는 것이

도시 근교 경관이 좋은 등산로 초입에는 어김없이 별장들이 난립하여 산림훼손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유지에다 허가 받아 짓는 것에 어찌 사족을 달까마는 안타까운 것은 그것들이 굳게 빗장을 걸어놓은 빈집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한다든가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아니고 가끔 한 번씩 이용하는 집일 때 변변한 살 집조차 없는 이들을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명승지나 풍치가 좋은 곳에는 산림청에서 지은 휴양림이란 것이 있다. 주말이 아닌 때에는 그런 시설에 공간이 남아돈다고 하니 은퇴 후에는 동가식서가숙처럼 이산 저산 휴양림을 찾아다니는 것도 산 취미를 가진 내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산을 많이도 훼손시킨 점에서는 밉기도 하지만 별장이 없는 내게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승지에다 아늑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나이 들어 한번쯤 이용해 보는 것도 그동안 내가 낸 세금에 대한 보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깊은 골짜기에 숨어들어 갔어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은연중에 물거품 같은 것을 물에 흘려보낸다하지 않던가. 동물도 무리를 이뤄 생활하는데 하물며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스스로 의지에 의해 숨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산길에는 돌부리도 있고, 가시밭길도 있고, 물웅덩이도 있다. 가다보면 벼랑도 만나고 향기 좋은 편안한 숲길도 있게 마련이다. 불평과 불만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독약과 같은 걸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자연에 순응하고 세상사에 거스르지 않는 생활태도야 말로 속세에 머물러도 속리를 행하는 도리다. 몸이 세상을 벗어나기 힘들 때 차라리 세상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문장대에서 흘끔 속세를 보았다.

 

 

<23> 학심이골에서 몸빨래를 하다
산행 후 시원한 계곡물에 '풍덩' 최고의 피서
은밀한 몸빨래 짜릿한 해방감 선사

    가지산 학심이골에서 물놀이에 여념이 없는 필자(위에서 두 번째).

 

여름 산행의 묘미를 만끽하면서 완전히 동심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여름 산행의 묘미는 계곡 산행이다. 강한 햇빛을 피하고 땀을 적게 흘리며 길옆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여유 있는 산행을 할 수 있다.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濯足), 귀를 씻고(洗耳), 드디어는 마음까지 씻는(洗心)다는 선조들의 계곡예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름철 물가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특히 산행이 끝난 뒤 갖는 몸빨래 시간은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주기에 쉽게 가져볼 수 없는 해방감을 준다. 물장구도 치고 물쌈도 하며 마음을 부려 놓을 수가 있다. 초여름에는 탁족하는 것만으로도 산행의 피로를 싹 가시게 만들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몸을 푹 담그지 않고는 쉽게 기분을 풀 수가 없다.

일 저지르면서 살았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간혹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이 있다. 성공한 이야기보다는 실패한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고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여름 산행에서의 에피소드는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어서 행복한 과거로 간직하고 있다. 젊었을 때 일이지만 몸빨래에 대한 추억 중에서 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사건이 있다.

원동 매봉 아래 도득골에서 있었던 일이다. 매봉 산행 후 하산길에 얼마 남지 않은 계곡수풀 우거진 은밀한 곳에서 몸빨래를 했다. 양심 불량인 분은 누드로 입수하는 분도 있었지만 대개가 도덕군자여서 그런지 한 가지 옷은 걸치고 물에 들어갔다. 나도 그렇게 물에 들었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다른 분들이 웃고 난리였다. 물 속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내가 걸친 여름용 삼각팬티가 물을 머금고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맨살보다 더 섹시해 보인다는 것이다. 뒷부분이 망사로 된 것이어서 물 머금은 그것이 가관을 연출한 것이다. 뒤를 볼 수 없는 나는 그런가 하고 말았는데 이후 여름 계곡산행 때마다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그 후 내게는 별명 하나가 덧붙여졌다.


물가에 앉아서 몸을 비웠다
물 안에서 제 살을 깎아 보내는 바위는
어느 틈에 사는 도를 구했는지
채근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발목 시린 물에 잘도 견뎠다
흐르는 물이 실어간 내 마음은
어느 곳에 닿아서 제 몸을 찾을까

몸빨래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몇 가지 주의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갑자기 물에 뛰어 들었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고 폭포가 있는 소(沼)는 물이 회전하여 휩쓸려 들어가면 헤쳐 나오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깊이가 있기에 수면의 온도와 수중의 온도가 큰 차이가 나고 수면 아래에는 낚시줄 같은 것이 엉켜 있어서 잘못하면 다리나 목에 감겨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한다. 아름다운 물에는 천천히 적응하면서 들고 술을 마셨다면 물 곁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많은 부산은 바다를 이용하여 피서를 즐기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듣기로는 부산 사람들은 계곡으로 많이 간다고 한다. 지리산이나 덕유산 같은 깊은 계곡 말고도 가까운 억산의 석골계곡, 인골계곡, 영취산의 우청수골과 좌청수골, 구만산 가인계곡, 굴암산 아홉내 계곡, 가지산의 심심이골, 학심이골, 상운산 골짜기, 문복산 개살피, 천성산 여러 계곡들, 운문산 천문지골과 숫처녀골, 구천산 정승골, 재약산 주암계곡, 층층폭포 계곡에서 숱한 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젊었을 때는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며 계곡물에 들어가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더럭 겁이 나서 여름에도 물을 슬슬 피하는 분위기지만 그래도 산에서는 물만 보면 기분이 좋고 남 먼저 들어가기 일쑤다. 물가에 수박 한 통 깨어놓고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 들고 앉아 물소리까지 잊는 독서삼매에 빠진다면 어찌 더위가 몸을 침탈할 수 있으리오.

 

 

<24> 수도산에서 기다림을 만나다
기다림의 과정에 따라 행복의 높이가 달라진다

    

 

강영환 시인(오른쪽)이 수도산을 등산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동네 뒷산도 아닌데 골프채를 들고 와서 스윙 연습을 하는 남자를 보았다. 골프가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높은 산에까지 와서 스윙 연습을 할까, 하는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할 것 같으면 골프장으로 직행할 것이지 왜 산에 와서 그럴까. 근교산이긴 해도 산길에 만난 중년의 남자는 이제 갓 골프를 배운 것 같아 이해는 갔다. 무엇이나 처음 배우는 일에는 푹 빠지게 마련 아닌가. 바둑을 처음 배울 때는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천장이 온통 바둑판으로 보일 때가 있지 않던가. 한 가지 일에만 신경 쓰면 온통 빠져들어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등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등산화를 사두고 정말 좋아 소풍을 앞 둔 어린애처럼 신을 신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소음으로 아래층 사람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분이 있었다. 핀잔을 들어도 기분이 좋다. 그 신발을 신고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것이 핀잔을 들었다는 것보다 더한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장비 하나를 마련할 때마다 느끼는 기쁨과 그걸 사용하기 전에 찾아오는 설렘 같은 것이 행복이다. 한꺼번에 장비를 몽땅 장만해 두고 산에 쉽게 식상해 버리는 경우보다는 필요에 의해 하나씩 장만해 가는 행복을 느껴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좋은 부모 만나 집과 살림살이를 몽땅 장만해 놓고 시작하는 신접살림보다는 살림살이를 하나씩 장만해 가면서 성취감으로 행복을 맛보는 젊은 부부가 훨씬 아름답다. 우리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살아가는 것인가에 따라 행복의 높이가 다른 것이다. 앞으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사람과 해야 할 일을 남겨 둔 사람 중 어느 쪽이 삶에 희망을 안고 있는 것인가는 답을 구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이다. 유년시절,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추석을 기다릴 때처럼 행복은 기다림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비 온 뒤 바위 위에 길이 났다
희미하게 난
사람들의 발이 깎아낸 흔적을 따라
내가 다시 흔적을 더한다
왔던 길과 가는 길을 연결해 주기 위해
외진 곳에서 풍상을 이겨내고 바위는
엎드려서 내게 등짝을 내어 주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많다. 기다림은 긴장과 희망을 갖게 한다.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 산행도 마찬가지다. 정상이라는 곳이 있고 거기에 닿을 것을 기다리며 묵묵히 오른다. 정상에 서면 특별한 일이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상에서 누려야 할 단 5분 정도의 시간만 주어질 뿐인데도 말이다. 인생길처럼 우리는 정상에 설 것이라는 기다림을 즐기는 것, 그것이 힘들어도 참고 오를 수 있는 희망이 아니던가.

비싼 장비를 한꺼번에 구입해 놓고 산에 갈 설렘으로 들 뜬 등산 초보자인 친구에게 산에는 왜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아직 산이 좋은 것인지 모르고 있었고 산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답을 하지 못했다. '현자는 요산이요 지자는 요수다'는 옛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며 사는 사람을 선비의 미덕으로 꼽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꼽지 않더라도 그리고 답을 할 수 없더라도 가야할 산이 내게 있다는 것, 그리고 올라야 할 정상이 있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해 진다는 걸 알게 될 때 진정한 산꾼이 될 것이다.

장만해야 할 장비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별 희망이 없는 것처럼 가야할 산이 없다는 것도 산꾼에겐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한꺼번에 산을 다 가지 말고 가야할 맛있는 산을 남겨두고 그 산에 갈 때를 기다리는 것, 계획을 조곤조곤 수립해 보는 것도 더운 여름을 잊는 한 방법일 것이다.

 

<25> 금정산에서 홀로 산행을 하다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묵언수행

    홀로 산행에 나서 금정산 평원에 홀로 선 필자.

 

산행의 묘미는 홀로 산행에 있다. 여럿이 함께 하면서 세상사를 논하며 걷는 것도 행복할 수 있겠지만 세상사를 훌훌 벗고 혼자 생각하며 묵언으로 산길을 걷는 것도 아름답다.

함께 가는 산행은 상대를 배려해야 하고 행동을 함께해야 하는 즐거움이 있지만 마음에 부담을 주게 되어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러나 홀로 산행은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는 산행 속에서 가끔 홀로 산행을 해 보는 것도 삶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다.

혼자 가는 산에는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눈도 넓어지고 귀도 확장되고 마음도 커진다. 인생은 홀로 태어나 홀로 간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삶의 방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지만 내면에서 만나는 자신은 언제나 홀로일 뿐이다. '고독한 산보자' 루소는 배를 타고 나가서 홀로를 만끽하며 산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해 버렸다.

'거기 조각배 안에 길게 누워서 눈을 하늘로 향한 채 나는 물결 가는 대로 몇 시간 동안이나 서서히 떠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마음이 텅 빈 듯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유쾌한 몽상에 잠긴 채 그것은 일정한 하나의 대상을 꼭 꼬집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소위 인생의 쾌락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겁다고 생각한 모든 것보다도 몇 곱절 좋은 것이었다.'

동료들과 산행을 계획하다보면 이런 저런 사정들 때문에 일정 잡기가 어렵고, 산을 선택하는데도 말이 많아진다. 이럴 때는 그냥 털고 일어나 홀로 산행을 결행해 본다. 처음에는 무섭고 두려운 생각도 들겠지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산행이 바로 홀로 산행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 깊이 떨어지기 위해 오르는 산
차가운 그늘만 골라 밟는다
발자국 소리에 힐끗 돌아보니
검은 바위에 얼굴이 숨어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울음도 있고
화상에 찌그러진 웃음도 있다
언제 바위 속에다 얼굴을 숨겼을까

1990년대 중반에 혼자서 지리산을 다녔다. 텐트를 짊어지고 올라 산등성이에서 밤을 지새우며 홀로 기울이는 술잔에 달을 띄워 마셨다. 출렁이는 능파가 있고 수많은 나무들이 잠들어 있고 숱한 별들이 내려다 보아주는 벽소령, 내가 가야할 미래의 산길을 작정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았던 시간들, 생각해 보아도 대견스럽고 가슴 벅찬 풍경이었다.

지금도 홀로 종주를 하는 젊은이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붐벼 홀로산행의 고적함 속에서 자신을 찾는 그런 행로가 될지 의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돋보이는 것은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며 멀고 험한 길을 홀로 간다는 사실이다.

오죽 독하게 굴었으면 친구 하나 없이 혼자서 산을 다닐까 하는 생각보다 차라리 얼마나 산을 오래 탔으면 홀로 산행의 묘미를 터득하고서 혼자 다닐까하는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돌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앞으로 향한다.

홀로 산행을 두려워 말 일이다. 언젠가는 홀로 가게 될 것이다. 홀로 산행에는 위험도 있다. 스스로 피하는 것이 좋다. 지병이 있는 경우 한적하고 외진 길은 가지 말 일이다.

근교 휴일 산은 언제나 장터를 이룬다. 익히 알려진 등산로는 혼자라도 굳이 혼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을 정도다. 산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산에서 들리는 새들 노래나 계곡 물소리도 들을 수 없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도 가져 볼 수 없다. 그럴 때 나만이 아는 산길을 호젓이 가며 홀로산행의 묘미를 잘근잘근 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