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영환 시인의 "시가 있는 산"_01

醉月 2011. 3. 7. 08:47

<1> 신불산에서 묘비명을 써보다

   

신불산에서 영축산을 향해 가는 길. 나는 산에서 나의 묘비명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산이다. 너도나도 산으로 들면서 우연히 그러나 자주 묻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함께 산을 오르던 K 시인이 엉뚱한 답을 한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영국의 버나드 쇼는 스스로 묘비명에다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썼단다. 네 묘비명을 한번 써 봐! 그게 답이야."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 왔을까. 남들에게 욕 얻어먹지 않고 잘 살아 왔는가. 삶을 되돌아보며 내 묘비명에 써넣을 글귀를 생각하며 걷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입춘이 지나자 봄이 왔다고 다들 몸과 마음이 가볍다. 그러나 산꾼들에겐 오는 봄도 반갑지만 가는 겨울이 안타깝다. 눈산 한 번 타 보지도 못하고 겨울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특히 겨울에 눈을 만나기가 힘든 부산, 울산의 산꾼들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먹고 지리산을 가거나 덕유산 가야산에 올라 눈을 만끽하곤 한다. 하지만 멀다. 가까운 산에서 눈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이 영남알프스 산군 가운데 접근하기 용이하고 쉽게 눈을 볼 수 있는 산이 있다. 꺾이지 않는 억새도 장관이지만 억새 사이로 소복이 쌓인 눈을 밟거나 특히 운이 좋다면 눈꽃이나 상고대도 만날 수 있는 신불산이 그곳이다.

신불산에 대한 기억은 능선을 따라 가득 채워진 억새군락,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펑퍼짐한 엉덩판은 불이라도 질러 주고 싶을 만큼 유혹의 몸짓 그것이다. 그랬다. 겨울 신불은 다비장 장작더미 위에 스승을 눕혀 놓은 뒤 불을 켜들고 눈물짓는 사미승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불이라고 불리는가? 그 산을 오르며 묘비명을 생각한다.


뼈 속까지 깊이 눈물마저 태워
흔한 눈물을 달려가라 사미여
억년 불쏘시개가 손을 흔든다
간월에서 취서까지
검은 한 밤 태울 정염으로
달빛은 푸른 몸을 드러낸다

이건 묘비명이 아니다. 차가운 눈산을 걸으며 생각해도 도무지 나의 삶에는 특징 지울만한 일이 없다. 슬프다.

소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고 했다. 내 묘비명에는 뭐라고 써야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류시화는 '너의 묘비명'이란 시에 이렇게 썼다.

산마저 나를 버린다
산이 나를 오라 해서
모든 것 버리고 산으로 갔더니
산 마저 나를 돌아가라 한다
저 산은 자꾸만 내게서 돌아눕고
나는 자꾸만 산 쪽으로 돌아눕고
문득 산안개 가려 길 보이지 않네

산에 대한 짝사랑, 언듯 나의 묘비명 같기도 하다.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써야겠다하니 일행이 배꼽을 쥔다. 나는 눈물이 나는데.

겨울 산은 눈물을 간직한다. 그 눈물을 불태우는 일이야 말로 산행의 참맛이 아닌가. 묘비명 대신 눈산에 나를 안긴다. 산꾼에게는 오는 봄도 반갑거니와 가는 겨울도 아쉽다.

 

그런데 정말 겨울이 다시 오는 것인가? 숭례문이 비명에 갔다. 가슴이 아프다. 내 묘비명보다는 숭례문의 묘비명 하나를 마련해 보아야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를 견딜 자신이 없다. '그대가 있던 하늘/ 빈자리가/ 그렇게 커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시작하자

 

 <2> 대운산에서 행복과 놀다
봄 돋아날 채비 바쁜 논둑길에 행복한 걸음을 뗀다
소 등 타고 어슬렁거렸던 옛 문인의 들놀이 그 행복이 지금과 다를까

    부산소설가협회가 마련한 대운산 산행에 동행했다.

 

산으로 가다 들길을 만났다. 이 들길로 곧 봄이 올 것이다.
부산소설가협회 산행팀이 아직 오지도 않은 봄을 맞으러 서창에서 남창에 이르는 들녘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창 대운산 기슭을 어슬렁거려 보자는 심산이었다. 땀 내며 산을 뭣 때문에 오르느냐. 혹시나 잔설 속에 숨어있을 설중매나 찾아보자. 봄은 역시 보고 만지며 느끼는 자의 몫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몇몇 시인이 노는 일에 함께 했다. 노포동 지하철역에 모여 버스로 용당 사거리까지 갔다. 그곳에서부터 걸었다. 몇 병의 막걸리를 준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이 노는 일의 전부였기에.

휴일만 되면 배낭을 싸들고 대문을 나서는 나를 보고 이웃은 무엇이라 생각할까. 이런 모습에 자기 합리화를 위해 생각해 낸 것이 행복론이고, 그를 뒷받침하는 실천으로서 '노는 일이 남는 것이다'는 논리를 엮어낸다. 이 말은 곧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때 그것이 인생의 가치를 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물론 자신을 위한 일이겠지만 자아실현을 위한 시간과는 거리가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시점에서 기억나는 것은 즐겁게 일했을 때보다 열심히 놀았을 때의 일들이다. 그런 기억이 더 쉽게 떠오르는 것도 바로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일행은 삼광리라 불리는 내광·중광·외광리를 지나 신기· 귀지마을 남창역에 이르는 들녘을 걸었다. 농담과 우스갯소리로 여유로웠다. 노는 일에도 번뜩이는 창의성이 숨어 있다. 우리에게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저 산을 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인가. 그것이 삶의 화두이며 행복론의 귀결점이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담뱃값이 인상되면 언론에서 제일 먼저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주었다던 공초 오상순 시인의 시 '꽃자리' 전문이다. 평생 혼자 살면서 술과 담배와 시를 벗하며 '행복 지수는 경제지수가 높다고 높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다 간 분이다.

인구에 회자되는, 대낮에도 촛불을 켜들고 사람을 찾아다녔던 시인이나 들놀이 갔다가 주흥에 겨워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소를 타고 어슬렁거리며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작가들을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해대겠지만 그들은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행복한 웃음을 선사해 주고 있다. 문인들의 이런 치기어린 기행은 현실 부정이 아니라 현실 극복의 수단이며 물신화되어가는 사회에 보충되는 신선한 산소이다.

함께 걸었던 작가 김서련은 "요즘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행복과 창조의 지름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도전적인 과제를 찾아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는 거라면… 나는 행복을 창조하며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스팔트와 논둑길, 산길, 강둑길, 대나무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좋아하는 일인, 소설거리에 몰두하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얼음, 햇살에 반짝이는 물 흙 산 나무 하늘 공기 집을 살피기도 하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니까 말이다"고 했다.

옛 문인들은 들놀이 후 비를 맞으며 알몸으로 소를 타고 어슬렁거리며 귀가했지만 오늘의 문인들은 만나지 못한 홍매화를 얼굴에 가득 피우고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보일 듯 말 듯한 봄빛이 가슴에 들어 '노는 일이 남는 것이다'며 다시 행복과 놀 궁리를 한다.

 

 

<3> 반야봉에서 빌고 또 빌다
시산제는 산행의 불안 떨쳐버리고 행복을 비는 의식
봄을 한 짐 지고 내려 오는 길은
마음으로 걷는 길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는 산길을

    지난달 지리산 반야봉에서 벌어진 시산제에서 축문을 읽고 있는 필자.

 

해가 바뀌면서 산행 단체들이 시산제를 지내기에 바쁘다. 시산제는 천지신명과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그동안의 무사고 산행에 감사하고 앞으로 산행에도 그것을 기원하며 회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한다. 제사이기보다는 마음 가운데 남은 불안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축문이 읽혀지고 그 염원으로 산행의 축복을 받게 된다. 내가 속한 단체도 지리산 반야봉에 엎드려 빌고 또 빌었다.


'우리나라 4341년, 서기 2008년 무자년 정월 초엿세. '지산' 일동은 어머니 산 지리산에 올라 천지신명과 산신께 삼가 엎드렸나이다.

자연을 아끼고 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지리산 자락을 걸어 온 지 어언 일곱 해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산길을 걸어 왔음은 천지신명과 산신께서 굽어 살펴 주심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나이다. 어리석은 저희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깊은 정을 나누며, 입산의 기쁨을 함께하는 것도 오직 지리산, 나아가 자연을 사랑하는 저희들의 지순한 마음을 어여삐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들면 들수록 잘 알지 못하는 산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이 어찌 하늘이나 땅의 뜻을 알 수 있으리요만, 작은 벌레나 풀잎 하나까지 당신의 마음이 담겨져 있음이며, 어린 마음으로 무심히 짓밟고 지나가 버린 풀포기나 꺾어버린 나뭇가지 하나에도 당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도 잘 알고 있나이다.

저희가 산에 들어 당신과 함께하는 뜻은 저희들로 하여금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의 안타까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싹 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저희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뜻만큼이나마 가질 수 있도록 저희를 채찍질하시고 한편으로는 다독여 주시길 바라나이다.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는 마음이 변치 않게 해 주시고 경제를 되살려 나라에 그늘진 곳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금년에도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서 힘차게 도약하게 해 주시고 우리 국민들이 희망과 활력이 넘치는 생활로 행복한 나라가 되게 하여 통일을 앞당기게 하여 주소서.

저희 산악회 가족은 물론 산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고, 이들의 가정에 화목과 평안이 깃들어 하는 일에 다복함과 만사형통이 깃들게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당신의 품을 자주 찾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늘, 정갈한 음식과 맑은 술을 올리며 간절한 염원으로 엎드렸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산신이시여! 저희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 주소서. 들어 주소서'

반야봉에 엎드려 생각해 보았다. 왜 산을 오르는 것일까? 물론 내려오기 위해 오른다는 농담들을 하지만 산은 행복을 찾기 위해 오르는 것 같다. 이향지 시인은 '왕시루봉 오르면서'(부분)란 시에서 산을 오르는 법을 일러준다.


나 살던 곳, 돌아갈 길, 아득히 잊고
오솔길 한 가닥 끌고 오릅니다.
오르는 길은 힘들고 숨이 차지만
나는 내일 이 길로 갈색 나비를 날리며
내려올 겁니다, 겨울을 부려놓고
봄 한 짐 지고, 갈색 나비를 날리며,

봄을 한 짐 지고 내려오는 길은 마음으로 걷는 길이다. 몸으로 걷는 길은 쉬이 지치게 마련이다. 서산대사는 눈 쌓인 길을 걸을 때는 발자국 하나라도 마음을 실어 찍어야 한다고 했다. 뒤에 올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을 위해서 말이다.

 

 

<4> 치밭목에서 아름다운 실패를 보다
산은 욕심만으로 오를 수 없는 곳 … 실패 알아야 성공도 배워
지리산 종주 200차 앞둔 선배와 눈길에 막혀 하산
진정한 산행이란 산을 이기는 것 아닌 자신을 이기는 것

    얼마 전 200회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는 이광전 선배가 묵묵히 치밭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3월부터 산불 방지기간이 시작되어 지리산 출입이 통제되었다. 산문이 닫히기 전에 산에 들었다. 지리산 주능 종주 200차를 앞둔 이광전 선배와 199차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195차 때 함께 가다가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나는 눈물을 머금고 벽소령에서 홀로 하산한 기억이 있기에 이번엔 기필코 완주해 볼 요량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종주 경험은 예닐곱 번 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지리산 주능 종주 200차라는 엄청난 일에 함께 한다는 사실이 가슴 설레게 했다.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산청 덕산에 내려 택시를 타고 유평계곡 새재마을에 들었다. 치밭목에 오르자 대피소를 지키는 민병태 소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눈에 덮인 대피소가 아름다웠지만 작은 창문을 흔드는 초속 40여 미터의 광풍은 발목을 싸고도는 냉기와 함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장엄한 일출이 펼쳐졌다. 달뜨기 능선 위로 붉게 솟구치는 태양에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런 풍광이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리운 치밭목'에다 그렇게 토했다. 치밭목을 한없이 짝사랑하나 보다.

2박 3일이 아니라도
다시 떠나기 위해 돌아왔다
산을 먹고 돌아온 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
아버지가 그리운 사생아
집이 그리운 산으로 컸다
불쑥불쑥, 눈치 없는 치밭목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헤치고 써레봉에 올라 중봉과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맑은 날씨 덕에 천왕봉은 눈썹에 닿을 듯했다. 그러나 더 많은 눈이 발을 가로막았다. 몰려온 눈은 허리까지 차올라 러셀(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산이 어디 가나. 몸만 지키고 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지 않나. 내려가자."

실패도 아름다운 것이라며 선배는 과감하게 돌아섰지만 나는 흔적도 없이 파묻힌 길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발길을 돌렸다. 선배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있다. 산길이 막히면 5월에나 종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산은 욕심으로는 갈 수 없다. 실패할 줄도 알아야 성공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백리 종줏길이라 하여 겁부터 주던 선배도 있었고 시원찮은 장비에 등산로도 지금처럼 잘 정비되지 못한 때였다. 욕심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마음을 비우라 하지 않던가. 선배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1998년 여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빗속을 오르던 코재라 했다. '그때도 포기했어야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종주에 어려웠던 일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산을 너무 빨리 달린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야간산행이 가능하던 때는 당일 종주를 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올까? 중간중간 마련된 대피소에서 음식 조달과 편한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어 훨씬 수월해졌다. 산을 느끼고 자신을 느끼고 그렇게 2박3일의 고된 길을 완주하고 났을 때의 희열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산을 운동장처럼 여긴다. 텐트와 온갖 취사도구 그리고 부식까지 짊어져야 할 때 종주는 인내심의 한계에까지 도달하는 일이 많았다. 산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멋진 한판 승부였다. 산을 이기려하지 말고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산행이 아닐까.

200차를 목표로 정하고 걸어온 것이 아니라 산이 있어 묵묵히 걷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도달해 있었다는 선배는 전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나도 뒷날의 200차에 함께 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어제의 도전은 행복했고 오늘의 실패는 아름다웠다. 이런 멋진 승부를 200차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역사가 아닐 수 없고 200차를 훌쩍 넘어 더 먼 길을 갈 선배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5> 천성산에서 까마귀와 놀다
겨울철 산짐승에 먹이 주는 일은 공존을 위한 길
"섣부른 인위적 행위 야생섭리 파괴할수도"
반대론자 있지만 생태계 파괴 책임
인간 최소한의 양심 큰틀 흔들지 않을 것

    짚북봉에서 바라본 청성산의 한 봉우리. 봄빛이 물오르고 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 낙엽을 뚫고 새순이 쏘옥하고 돋을 것만 같은 착각을 가슴에 안고 천성산을 올랐다. 코끝을 스쳐가는 촉촉한 바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까마귀가 하늘을 빙빙 선회한다. '웬 까마귀람 재수없게', 누군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까악까악 보채는 소리가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 까마귀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다. 저들이 사람 주변을 선회하는 것은 먹이를 찾기 위해서다. 새들 중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알려진 까마귀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음식을 지고 와서 먹다 남으면 버리고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까마귀는 짖어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다. 일행 중 한 분이 화답을 보낸다.

"알았다 임마, 남겨 줄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러면 알아들었다는 듯이 까마귀는 조용해진다. 재미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처럼 학을 데리고 놀 수 있을 정도는 못 되더라도 까마귀라도 날리며 놀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나는 겨울철이 되면 새의 먹이를 구석진 바위 위에 놓아 주곤 했다. 지난번 치밭목 산장에 올랐을 때도 그랬더니 이를 본 대피소 민병태 소장은 새나 짐승들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먹이를 주는 일이라 했다. 지리산 반달곰 방사가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가 등산객들이 남긴 음식 찌꺼기나 무심코 준 음식물이었다고 한다. 야성을 지닌 짐승들이 먹이를 쉽게 구하다보면 타성에 젖어 사냥하기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러나 눈 쌓인 산에 라면을 부수어 주거나 고기를 잘게 썰어 뿌려주는 문수암 도봉 스님은 겨울에 짐승들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래서 등산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짐승들에게 주는 일을 마다 안 했다. 그리고는 인간들이 생태계를 파괴한 책임을 져야하며 최소한의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도 양식이 떨어진 겨울철에는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를 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두 분의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인간은 먹이 사슬의 최고 정점에 있다. 그런 인간의 논리로 새나 짐승의 생존에 접근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들에게 직접 주지 않는 한 그들이 찾아낸 먹이라는 것이다. 숲속 바위틈에서 찾아낸 도토리 열매나 어느 날 바위 위에 고스란히 놓여진 쌀이나 콩도 그들에게는 다를 바 없는 먹이일 뿐이다.

연전에 삼도봉에서 만난 박새들도 인간을 경계하되 멀리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떼어 던져주는 소시지 때문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인간의 손이 닿는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아골 대피소 함태식 선생은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손에 먹이를 들고 있으면 어느 틈에 쪼르르 나타난 다람쥐가 손위에까지 올라 와 음식을 맛나게 먹고는 다시 쪼르르 제 갈 길로 간다는 것이다. 인간과 다람쥐의 구분이 없어진 탈속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생활을 하다가 필요한 때에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공간 속에서 만나게 된다. 어쩌다 한 번씩 불특정 다수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지속적인 사육하고는 다른 것이다.

천성산 까마귀는 인간이 먹이를 남겨 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살아온 법칙대로 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남겨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짐승이 먹고 남긴 먹을거리를 그들 스스로 찾아낸 것이라 생각하고 먹으며 생존을 이어갈 것이다. 간섭하지 않고 먹이를 주는 일이 그들과 공존하는 길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까마귀는 하늘에서 놀고 나는 지상에서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