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세계화? 무엇을 넣고 비빌 텐가
MBC ‘무한도전’ 팀이 11월 중순께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한식 광고를 하기로 했단다. 무한도전 팀은 이미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에 비빔밥 광고를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 반응이 좋았다며 또 광고를 하는 모양이다. 뉴욕 한복판의 한식 광고가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이 기회에 그전에 했던 비빔밥 광고에 대해 몇 마디 토를 달고자 한다.
한국인은 스스로 비빔밥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폼 나는 전주비빔밥에 깊은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다. 무한도전 팀이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비빔밥 광고도 그 때깔 좋은 전주비빔밥이었다. 먼저 자랑스러운 전주비빔밥 레시피부터 살펴보자. 되도록 비빔밥 조리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꼼꼼히 읽어주기 바란다(이 레시피는 전주의 비빔밥박물관에서 얻은 것인데 어법에 맞게 조금 수정했다).
① 사골 곤 물로 밥을 짓고 밥이 끓어오르면 불을 줄여 콩나물(100g)을 얹어 뜸을 들인다.
② 콩나물이 익으면 밥과 고루 섞는다.
③ 쇠고기는 채 썰어 배즙, 청주를 넣고 무쳐서 1시간 정도 놓아둔 뒤 마늘, 청장, 참기름, 깨소금, 잣가루를 넣고 무쳐두었다가
육회로 사용한다.
④ 미나리는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데친 후 소금, 참기름, 마늘, 깨소금을 넣어 무친다.
⑤ 콩나물(100g)은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삶은 후 찬물에 헹군다.
⑥ 도라지는 소금을 넣고 주무른 후 씻어 쓴맛을 제거한 다음 마늘, 소금을 넣고 볶다가 깨소금, 참기름을 넣는다.
⑦ 고사리는 끓는 물에 삶은 다음 마늘, 청장을 넣고 무쳐서 볶다가 깨소금, 참기름을 넣는다.
⑧ 표고버섯은 채 썰어 깨소금, 참기름, 청장, 마늘을 넣고 무친 다음 살짝 볶는다.
⑨ 애호박은 채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찬물에 살짝 헹구고 물기를 짠 후 마늘을 넣고 볶다가 참기름, 깨소금을 넣는다.
⑩ 무는 채 썰어 고춧가루, 마늘, 쑥갓, 소금을 넣고 무친다.
⑪ 오이와 당근은 4~5cm로 곱게 채 썰고 황포묵은 길이 4~5cm, 나비 1cm, 두께 3mm 정도로 썰어 놓는다.
⑫ 그릇에 밥을 담고 나물을 색스럽게 올려 담아 가운데에 육회를 넣고
그 위에 달걀노른자를 얹은 다음 기름에 튀긴 다시마를 잘게 부숴 넣는다.
⑬ 고추장을 따로 담아내서 개인 식성에 맞춰 넣게 하고 콩나물국과 물김치를 곁들여 낸다.
이 레시피만으로 자랑스러운 비빔밥 맛이 느껴지는가. 그러면 이 레시피대로 비빔밥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가. 대충 챙겨야 하는 음식 재료만 보자. 사골 국물, 콩나물, 밥. 쇠고기, 배, 청주, 마늘, 청장, 참기름, 깨소금, 잣가루, 미나리,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 애호박, 무, 고춧가루, 쑥갓, 오이, 당근, 달걀, 다시마, 고추장, 물김치 등. 재료를 다듬고 헹구고 썰고 무치고 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비빔밥 한 그릇에 들이는 공력은 엄청나다. 비빔밥 먹고 싶다고 아내에게 이 레시피대로 조리해달라고 했다가는 쫓겨나기 딱 좋을 것이다.
앞서 거론한 레시피의 비빔밥은 전주 등 몇몇 음식점에서 내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이렇게 요리하지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다. 가정에서 먹는 비빔밥은 대부분 제사 지내고 남은 나물로 비벼 먹거나, 주부들이 냉장고 잔반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잡탕 비빔밥’일 뿐이다. 쉽게 말해 위의 레시피 비빔밥은, 즉 무한도전 팀이 뉴욕타임스에 광고한 그 비빔밥은 일상의 음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위 레시피 비빔밥은 조선이나 고려 때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을 지닌 궁중음식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쉽게 그것도 아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그냥 몇몇 비빔밥 전문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가끔 한식 세계화 이데올로기에서 한국인이 지닌 전근대적인 양반 근성과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졸부 근성이 잡탕으로 비벼져 있음을 본다. 한국 음식을 세계인이 즐겨 먹든 말든, 먼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허위의식부터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한도전과 김태호 피디의 열혈 팬으로서 그들이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겠다는 열정은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지난 비빔밥 광고에선 그 비빔밥에 무엇이 비벼져 있는지 잘 살피지 않은 듯해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 한식 광고는 달랐으면 한다. 무한도전답게 일상의 삶이 담긴 광고라면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비빔밥
입맛은 여전하다, 음식이 변했을 뿐 도토리묵
유명한 산의 등산길 초입에는 반드시(?) 막걸리집이 있다. 또 막걸리 안주로 반드시 도토리묵이 있다. 그 집에서 직접 쑨 묵임을 확인해주기 위해 사발에 굳힌 도토리묵이 가게 앞에 진열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등산객들은 이런 곳에 앉아 막걸리와 도토리묵을 먹으며 꼭 한두 마디 토를 단다. “이건 뚝뚝 끊어지는 것이 밀가루가 섞였다.” “옛날에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어릴 적 도토리를 따다 드리면 할머니가 묵을 해주셨는데, 분명히 이 맛이 아니다.” 그러면 주인은 자기 가게에서 쑨 것이 확실하다며 주방에서 도토리 가루를 들고 나온다. 가루가 든 봉지에는 분명 ‘도토리 분말 100%’라고 적혀 있다. 등산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맛이 바뀌었나” 할 뿐이다.
하지만 입맛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릴 적 추억과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은 평생 기억된다. 특히 7세 이전에 먹었던 음식은 거의 각인되다시피 한다. 어릴 적 추억의 음식이라면 그 맛에 대한 기준은 당신의 기억을 믿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등산길 초입 가게의 도토리묵이 어릴 적 먹었던 그 도토리묵과 다르기 때문에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럼 그때의 도토리묵과 지금의 도토리묵은 무엇이 다를까.
먼저 고향 뒷산 도토리는 어떤 품종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도토리는 다 같은 것 아니냐고? 아니다. 도토리는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열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열매들이 모두 도토리묵 재료가 된다. 그런데 도토리는 나무마다 맛이 다르다. 예컨대 상수리나무의 도토리로 묵을 쑤면 쓰고 떫은맛이 강하고 구수한 맛은 아주 적다. 달고 구수한 맛이 가장 강한 것은 졸참나무 도토리다. 이 도토리는 속껍질을 까고 그냥 먹어도 맛있다. 자신이 어릴 적 어떤 도토리로 쑨 묵을 먹었는지에 따라 도토리묵에 대한 기호가 달라질 수 있다.
어릴 적 먹었던 그 도토리의 묵이라 해도 쑤는 방법에 따라 또 맛이 달라진다. 즉석에서 도토리묵을 쑤는 가게들은 ‘도토리 100%’라는 간판을 달고 있고, 마트에서 파는 도토리묵도 거의가 ‘도토리 100%’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도토리 100%’가 아니라 ‘도토리 가루 100%’가 맞다. 그러니까 도토리에서 전분을 뽑아내는 식품회사에서 도토리 가루를 구입해 만드는 묵이다. 예전에 집에서 하던 방식은 이와 달랐다. 알도토리를 물에 불렸다 갈고 끓여서 비지를 뺀 뒤, 다시 끓여 굳혔다. 알도토리로 쑤느냐, 도토리 전분으로 쑤느냐에 따라 맛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또 하나, 도토리 전분이라 해도 끓이는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도토리묵 공장에서는 대부분 스팀을 이용한다. 도토리 전분을 푼 물에 고온의 증기를 쏘아 끓이는 것이다. 끓이는 시간과 솥 벽에 눌어붙는 것을 줄이기 위한 방식이다. 옛날 방식은 직화로 솥을 가열해 은근하게 장시간 쑨다. 어느 게 맛있을지는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그게 맛있고 맛없음이 요리사의 솜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식재료에 따라 이미 맛이 결정돼 있다. 도토리묵 양념을 아무리 잘해도 도토리묵이 맛없으면 절대 좋은 맛이 날 수 없다. 이런 눈으로 식당 주방을 살펴보자. 간장, 된장, 액젓, 두부, 국수, 참기름, 식용유, 밀가루, 어묵 등. 대충 식재료만 봐도 요리사가 솜씨를 발휘하기 전 그 맛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은 좋은 식재료가 80%를 좌우하고, 요리사의 몫은 나머지 20% 정도다. 좋은 식재료로는 한두 번 음식을 망칠 수 있어도 나쁜 식재료로는 단 한 번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못한다.
참게는 알을 뱄을 때가 가장 맛있다. 살보다는 알 맛이 좋은 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게 제철에 대해 헷갈리는 것이 있다. 언론에선 봄에도 ‘참게가 제철이다’ 하고, 가을에도 ‘참게가 제철이다’ 한다. 참게는 두 계절 다 맛있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두 계절 다 알을 배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봄과 가을의 참게는 다르다.
한반도에서 자라는 참게는 참게와 동남참게가 있다. 이 둘은 구분이 어려울 만큼 거의 똑같이 생겼다. 육안 구별법은 딱 하나, 등딱지 앞쪽의 가장자리에 다소 뾰족뾰족한 굴곡이 있으면 참게고 둥글둥글한 것은 동남참게다. 둘은 사는 지역과 생태도 다르다. 참게는 북쪽에 살고 동남참게는 남쪽에 산다. 그 경계지역이 전라북도 정도라고 보면 된다. 참게가 흔히 잡히는 임진강과 섬진강을 두고 보자면, 임진강 것은 참게이고 섬진강 것은 동남참게다. 참게는 가을에 알을 배고 동남참게는 봄에 밴다. 그러니까 임진강에서는 가을이 제철이고 섬진강에서는 봄이 제철인 것이다. 한편 충청지역에는 금강참게라고 부르는 참게가 있는데, ‘금강의 참게’라는 뜻이지 참게와 다른 종은 아닌 듯하다. 임진강 일대에서는 충청지역의 말을 받아 동남참게와 구별하기 위해 임진강 참게를 금강참게라고도 하며, 옥돌참게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이런 구별법이 필요한 이유는 수입 참게 때문이다. 가을에 접어들면 참게가 반짝 특수를 맞는다. 이때를 맞춰 수입 참게도 풀린다. 이들 참게가 가을에 먹는 참게고 그게 수입인 줄 알면서 먹으면 별 문제가 없으나, 동남참게이면 제철이 아닌 참게를 먹게 되는 것이다. 섬진강 유역에서는 참게가 동남참게로 ‘세탁’돼 팔리는 일이 드문 데 비해, 임진강 유역은 동남참게가 참게로 ‘세탁’되는 일이 흔하다. 임진강 유역은 수도권에 가까워 수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참게는 논게 또는 민물게라고도 불린다. 옛날에는 논에서도 흔했던 게다. 참게는 민물에서만 평생을 보내지 않는다. 바다를 오간다. 늦가을부터 겨울에 바다와 기수부(바다와 민물이 섞이는 지역)에서 산란을 한다. 알에서 부화한 참게의 유생은 봄에 하천을 따라 자신들의 부모가 살았던 곳으로 올라온다. 이 어린 참게는 가을까지 민물에서 성장해 부모들이 그랬듯이 산란을 하러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가지 못한 참게는 민물에서 굴을 파고 월동한다. 바다에서 산란을 한 참게는 죽는다. 참게가 산란하러 바다로 향할 때 가장 맛있고, 어부는 이때를 맞춰 잡는다. 동남참게는 봄에 산란하러 바다로 가는 것이 다르다.
참게는 임진강 수계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경기도 연천과 파주지역이다. 어로허가권이 있는 어부들이 그물이나 통발을 놓아 잡는다. 참게는 야행성이므로 낮에 통발을 놓고, 적어도 하룻밤 지난 뒤 거둔다. 잡히는 양은 복불복이다. 참게는 떼를 지어 이동하는데 마침 통발이 참게 무리 앞에 놓여 있으면 한 번에 수십kg을 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면 몇 kg으로 만족해야 한다. 임진강 참게를 놓고 연천과 파주 어부들끼리 묘한 경쟁심리가 있어 어디 것이 더 맛있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 행정적 경계가 임진강 전체를 놓고 보면 모호하다. 연천에 있던 참게가 다음 날 파주에서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참게는 잡자마자 요리를 하면 흙내가 난다. 자연 상태에서 먹이 활동을 해서 몸에 흙이나 잡물이 들어 있어서다. 그래서 참게 요리 잘하는 집에서는 축양을 한다. 축양은 물고기 등을 맑은 물에 일시적으로 두는 것인데 이때 흙이나 잡물을 없앤다. 보통 일주일 정도 축양을 하는데, 이때 참게의 살이 빠질 수 있으므로 먹이를 주기도 한다. 별스럽게는 참게에 쇠고기를 먹여 내장에 쇠고기가 가득 찼을 때 게장을 담그기도 한다.
‘떡보’라는 말이 있다. 떡을 맛있어해 즐겨 먹는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쓴다. 식성이 좋아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을 ‘먹보’라 하고,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을 ‘밥보’, 잘 우는 사람을 ‘울보’라 하는데, 그 ‘-보’자 계열의 단어다.
내가 떡보다. 떡집 앞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다. ‘뭐 맛난 떡 없나’ 꼼꼼히 살피고 맛있겠다 싶은 떡이 있으면 꼭 산다. 특히 고운 색의 백설기 앞에서는 넋을 놓게 된다. 첫입에 달콤한 떡 냄새가 훅 끼치고 침과 함께 이내 스르르 풀리는 그 맛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 고소한 콩고물에 굴린 인절미는 또 어떤가. 쫀득한 듯싶지만 몇 번의 저작으로 부드럽게 풀리는 그 촉감이란!
그러나 그렇게 기대를 잔뜩 안고 산 떡을 다 먹은 적이 별로 없다. 한두 입 먹고는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던져놓았다가 곰팡이가 피어버리기 일쑤다. 내 입이 짧아서가 아니다. 대체 떡이 이렇게 맛없을 수가 있는가. 백설기는 심하게 짜고 달며, 찌든 기름내가 풀풀 나는 게 예사다. 부드러움이라곤 아예 없어 마분지 씹는 느낌이다. 인절미는 쭉쭉 늘어지는 쫄깃함 없이 오래된 가래떡처럼 뚝뚝 끊어지며 한참을 씹어도 단맛이 없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떡보들은 슬프고, 슬프다.
떡은 쌀 또는 찹쌀로 빚는다. 찹쌀에 비교해, 쌀을 멥쌀이라고도 한다. 찹쌀은 시루에 쪄서 떡판에 올린 후 떡메로 쳐서 떡을 만든다. 쫄깃한 식감이 있어 찰떡이라 한다. 인절미가 대표적인 찰떡이다. 쌀, 즉 멥쌀은 물에 불려서 가루를 낸 후 찌는 것이 일반적이다. 쌀가루에서 쪄낸 상태의 것을 시루떡이라 하고, 이를 다시 치대어 길쭉하게 뽑은 것을 가래떡이라 한다. 시루떡의 대표가 백설기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떡을 먹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 유물 중 유독 많은 것이 시루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곡물을 가루 내거나 그 알곡을 쪄서 먹은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삼국유사’에도 밥보다 떡에 관한 일화가 먼저 나온다. 서기 17년 남해왕이 죽자 노례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놓고 양보를 하는데, 탈해가 성지인(聖智人)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조상들이 쌀로 밥을 지어 일상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밥보다 떡이 더 오래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음식인 것이다. 따라서 밥보보다 떡보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셈이다.
이 유구한 한반도의 떡보들이 근래 들어 ‘슬픔의 떡’을 줄곧 먹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쌀가루 때문이다. 쌀가루로 떡을 만든다고? 그렇다! 시중의 많은 떡이 공장에서 가공한 쌀가루로 빚어진다. 수입쌀과 장기간 저장한 국산 쌀이 쌀 분쇄 공장으로 넘어가고, 이 쌀은 떡 가공용으로 곱게 가루로 만들어져 떡집이나 떡공장으로 팔린다. 쌀을 물에 불리고 분쇄하고 하는 과정을 줄여주니 떡집이나 떡공장 처지에서는 인건비, 연료비, 물값, 기자재 구입비 등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쌀을 분쇄, 운송, 보관하면서 버려지는 게 있는데, 바로 떡 맛이다. 분쇄 공장에서는 쌀의 전분이 변성되지 않게 습식으로 분쇄한다고 하지만 고운 입도의 쌀가루를 짧은 시간에 다량으로 생산하다 보니 분쇄기 안의 온도가 올라가고, 따라서 전분에 손상이 오게 마련일 것이다. 또 보관과 이동 중에도 전분이 손상될 것이다. 이렇게 전분이 변성된 쌀가루로 떡을 하면 백설기와 시루떡은 퍽퍽해 마분지 씹는 느낌이 들게 된다. 가래떡과 절편은 또각또각 잘게 조각나 입안에서 겉돌게 된다. 또 찹쌀떡은 부드러운 찰기 없이 뻐득뻐득해진다.
또한 떡이 심하게 짜고 단 것은 쌀가루가 여러 이유로 해서 자연스러운 떡의 단맛을 낼 수 없자 소금과 감미료를 잔뜩 넣어 그런 것이다. 여기에 찌든 기름내까지 나는 떡을 만나게 되면 떡보들은 절망 수준에 이른다. “한반도 수천 년 역사 중 이처럼 떡 맛이 형편없었던 시대는 없었을 거야!”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쌀은 남아돈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말이다.
양미리와 도루묵이 제철이다. 동해안의 일부 항구에서는 이 생선들로 축제를 열기도 한다. 속초항에서는 겨울 동안 파시가 열리는데, 어선에서 막 내린 그물에서 양미리와 도루묵을 떼어내고, 그 곁에 세워진 10여 동의 간이 포장마차에서 이를 생으로 팔거나 현장에서 구워먹을 수 있게 한다.
강원도 동해안에서 양미리라 부르는 생선의 올바른 이름은 까나리다. 서해안에서 젓갈로 담그는 그 까나리다. 서해안에서는 봄에 어린 까나리를 잡아 젓갈을 담그고, 동해안에서는 산란기에 있는 다 큰 까나리를 잡아 굽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졸여서 먹는다.
양미리라는 생선이 따로 존재하는데, 까나리와 비슷한 모양새다. 본래 이름의 양미리는 까나리보다 크기가 작으며 산란기는 초여름이다. 양미리가 잘못된 이름이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니 어쩔 수가 없다.
양미리의 산란기는 겨울에서 초봄 사이다. 냉수성 어종으로 해수 온도가 떨어지면 연안에 바싹 붙어 알을 낳는데 이때를 맞추어 그물로 잡아들이는 것이다. 한창 잡을 때에는 서너 명이 탄 어선이 하루에 서너 차례 출어를 한다. 양미리를 그물코에 박혀 있는 채로 뭍에 올리면 사람들이 붙어 그물에서 떼어내는 작업을 한다. 배를 타고 양미리 잡는 일은 남자가, 그물에서 양미리 떼는 작업은 여자가 주로 한다.
도루묵에는 재미난 옛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선조가 임진왜란 중 피란길에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 맛있어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가 난이 끝난 후 궁궐에서 다시 먹어보았는데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원래 이름으로 다시 부르라고, “도로 묵이라 부르라” 했고 이것이 ‘도루-묵’이 된 연유라는 말이 전한다.
도루묵도 냉수성 어종이다. 여름에는 동해 깊은 바다에 서식하다 겨울철 산란기에 연안으로 몰려드는데 이때 그물로 잡는다. 알이 들어차 있고 연안에서 잡히는 시기가 양미리와 거의 겹친다. 잡는 방법도 비슷하다. 도루묵이 걸린 그물을 뭍에 올려 고기 떼어내는 작업을 한다. 겨우내 동해의 항구에 들어오는 조그만 어선은 양미리 아니면 도루묵이 가득 실렸다 보면 거의 맞다.
산란기 양미리의 암컷은 몸에 알을 가득 채워 ‘살 절반, 알 절반’이다. 내장은 머리 부분에 아주 적은 양으로 붙어 있을 뿐이다. 도루묵도 마찬가지다. 알을 배에 가득 채워 터질 지경이다. 이 두 생선의 제철이 겨울이라고 하는 이유는 많이 잡히는 것 빼고는 이 알의 맛에 있다.
다 같은 생선의 알인데 양미리 알과 도루묵 알의 맛 포인트는 전혀 다르다. 양미리 알은 부드럽고 크리미한 맛이 난다. 구우면 입안에서 스스르 풀어지고, 말린 것을 찌개에 넣거나 졸이면 약간 쫀득한 식감이 있다. 도루묵의 알은 굽든 끓이든 겉면에 점액이 묻어나고 치아 사이에서 토도독 알이 터치는 촉감을 즐길 수가 있다. 그러나 산란기에 거의 다다른 도루묵 알은 껍질이 질겨 거북스럽다. 알이 가득 찬 생선이라고 알의 맛에만 치중해서는 양미리와 도루묵의 진가를 놓칠 수가 있다. 생으로 굽거나 끓이면 아주 부드러운 살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특히 도루묵은 살의 결이 굵고 알의 겉면에서 느껴지는 미끌함이 살에도 약간 묻어 있어 입안에 후루룩 감기듯 넘어가는 촉감이 그지없이 좋다. 양미리는 생으로 굽지 않으면 꾸둑하게 말려 찌개로 하는 것이 가장 맛있다.
옛날에는 도루묵을 소금에 절여 장독에 저장했다. 이를 가지고 찌개를 끓이면 숙성의 맛이 있었다. 요즘은 생것으로 찌개를 하니 맛이 심심해졌다. 옛날 방식으로 끓이는 도루묵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많이 아쉽다.
냉면과 막국수는 한국 사람들이 즐기는 대표적인 국수류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메밀 맛을 잘 알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들 함량미달의 메밀면을 먹으면서 그게 맛있는 메밀면이라고 여긴다. 처음엔, 함량미달 메밀면을 내는 집들이 점차 사라지겠지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집들이 더 번창하고 있다. 메밀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광범위하게 번져 손을 볼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메밀 음식 중 가장 흔히 먹는 것이 막국수와 평양냉면, 그리고 일본식 소바다. 그 면의 색깔은 대부분 거무스레하고, 소비자들은 이를 당연한 듯이 여긴다. 메밀에서 우리가 먹는 부위는 씨앗의 씨젖이다. 겉껍데기를 벗기면 씨젖이 나오는데, 이 색깔은 하얗다. 속껍질까지 분쇄를 하면 흐린 회색이 돌기는 하지만 메밀가루는 전반적으로 흰색이다. 따라서 메밀로 뽑는 국수는 흰 것이 맞다.
예전 분쇄기계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 메밀의 겉껍데기가 메밀가루에 섞여 거무스레했는데 지금은 기계가 좋아 겉껍데기 혼입은 없다. 그럼에도 지금의 막국수와 평양냉면, 소바 등의 면이 거무스레한 것은 겉껍데기까지 갈아 넣어서 그렇다. 메밀 함량이 매우 낮은, 즉 밀가루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부 메밀국수의 경우 그 색깔을 더하기 위해 색소며 곡물 태운 가루를 넣기도 한다.
메밀 100%의 면을 내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찾아보기 드물어 이를 맛볼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또 메밀 100% 면이 반드시 맛있는 것도 아니다. 메밀은 글루텐이 극히 적어 찰기가 없기 때문에 글루텐이 많은 밀가루를 적당히 섞는 것이 식감에 오히려 좋다. 밀가루를 20~30% 섞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정도면 메밀의 향이 다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상적인 메밀면의 기준은 메밀 함량 70~80%로 보는 것이 좋다. 메밀의 겉껍데기까지 갈아 넣지 않으면 밀가루도 흰색이니 이 면도 흰색이다.
시중에서 파는 메밀면 중 최악은 반짝반짝 검은빛에 윤기가 나고 쫄깃한 면이다. 이는 고구마나 감자의 전분이 듬뿍 들어간 것이다. 검은빛을 내는 것은 곡물가루를 태운 것이나 색소를 넣었을 확률이 높다. 심한 것은 당면 수준의 질감을 보여주는데, 이 정도면 메밀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메밀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면의 쫄깃한 식감을 유독 즐겨 이것도 맛있게 먹어서 이 엉터리가 시중에 흔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옥수수차나 보리차의 볶은 곡물 냄새가 물씬 나기도 한다. 일부 사람은 이 뜬금없는 향을 ‘아, 구수하다’고 느낀다.
메밀의 본디 맛은 하얀 씨젖의 맛에서 나온다. 메밀로 뽑은 국수는 거무스레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진으로 그 차이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제주도에서 나는 노란색의 오렌지 같은 과일을 두고 우리는 감귤, 귤, 밀감 등으로 부른다. 이 용어들을 한번 정리해보자. 이런 용어 정리도 음식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일이다.
감귤(柑橘)은 운향과 감귤나무아과 감귤속, 금감속, 탱자나무속 과일을 총칭하는 단어다. 그러니까 유자, 레몬, 자몽, 오렌지, 탱자 등도 다 감귤이다. 귤(橘)은 감귤과 비슷한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제주 감귤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옛 문헌을 보면 이 여러 가지 감귤류를 두루 귤이라 했던 것 같다. 밀감(蜜柑)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흔히 썼던 말인 듯하다. 일본에서는 미깡(蜜柑)이라 발음하는데,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른들은 이 말을 주로 썼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분이 간혹 있다.
감귤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과일이 이처럼 넓은데도 제주에서 나는 감귤만을 굳이 감귤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까 한라봉과 청견도 감귤이라 할 수 있으니 제주 감귤만을 뜻하는 어떤 단어가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제주 감귤 원산지는 중국 원저우(溫州)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이 감귤을 원저우미간(溫州蜜柑)이라 한다. 이 감귤은 일본으로 건너가 원예종으로 다양하게 개량됐다. 일본에서는 이를 원저우미깡(溫州蜜柑)이라 한다.
감귤류는 우리 땅에 오래전부터 있었다. 특히 제주 감귤은 육지 권력자의 수탈물로 관리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에서는 왕가 식솔과 중앙관리들만 감귤을 맛볼 수 있었는데, 감귤이 제주에서 올라오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모아 시험을 보게 하고 상으로 나누어주는 행사도 벌였다. 조선의 왕가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감귤로 신이 났겠지만 제주의 농민들은 감귤 수탈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관리들은 초여름에 피는 감귤 꽃의 수를 세어두었다가 겨울에 그만큼의 감귤을 거두려 했고, 감귤이 많이 열린 해를 기준으로 해마다 똑같은 양의 감귤을 내놓으라 했다. 제주 농민들은 수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감귤나무 뿌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고사시키기도 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공물제도가 없어지자 제주의 감귤나무는 버려졌다. 식량작물이 아니니 제주 농민들은 그 지긋지긋한 나무를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제주에서 재배했던 감귤은 동정귤, 금귤, 청귤, 병귤, 당유자, 진귤 등이었다. 이 재래 감귤은 상업적 가치가 없어 현재는 재배하지 않는다.
지금의 제주 감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이식된 것이고, 그게 원저우미깡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제주에서는 원저우미깡 농사가 흔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많이 재배해 반도에서는 수입해 먹었다. 6·25전쟁 이후 제주에 남아 있던 원저우미깡 나무는 큰돈이 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수입하지 못하니 감귤은 조선시대 때만큼 귀한 과일이 됐다. 돈이 되니, 감귤나무가 순식간에 번졌다. 묘목은 물론 일본에서 건너왔다. 처음엔 제주에서 제일 따뜻한 서귀포 일대에서만 재배됐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곧 제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제주의 감귤은, 그러니까 원래는 중국에 있었던 것이며 이게 일본에서 개량돼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는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품종인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그 지명을 따 원저우미간, 원저우미깡이라 하니 우리도 온주밀감이라 부르면 간단한 일일 것 같으나, 우리의 옛 문헌을 보면 밀감보다 귤이라는 말을 더 흔히 썼으니 이 단어를 살려 ‘온주귤’이라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온주귤에도 여러 품종이 있는데, 10~11월에 나오는 극조생종은 향이 연해 싱겁다. 12월부터 나오는 것은 조생종인데 이게 향이 좋다. 극조생종은 큰 것이 낫고 조생종은 작은 것이 맛있다. 감귤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향이 짙고 당도가 올라간다. 스트레스는 병과 벌레에 의해 생기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겉이 거칠고 벌레 먹은 자국이 있는 게 더 맛있다. 못생긴 것을 고르는 것이 맛있는 감귤을 고르는 방법이다.
외국에서 새로운 개념의 단어가 들어오면 의미를 정확히 해석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단어가 지닌 정치적, 경제적 또는 상업적 활용성에 치중해 자기 식대로 오용한다. 이런 일은 대체로 지식인인 척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 마침내 그 단어가 이르는 개념조차 흐릿해져 의사소통에 장애요소로 작용하다, 결국 공공의 사회적 목표를 정하는 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슬로푸드라는 단어가 한국에 소개된 지 25년 정도 됐다. 이제 사람들은 이 말에 퍽 익숙하다. 그러나 모두 제각각의 처지에서 익숙할 뿐이다. 패스트푸드 전문점의 것이 아니면 다 슬로푸드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큰 오용은 모든 한국음식이 슬로푸드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오용이 하도 심각해 슬로푸드라는 단어를 용도 폐기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슬로푸드란 단어를 꾸준히 사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만 버릴 수도 없다.
슬로푸드는 사회경제적 혹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용어다.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을 지향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반대의 대상은 세계화이고, 지향점은 지역적 삶이다.
인류의 삶은 산업화 전과 후가 크게 다르다. 산업화 전에는 시간이 우리 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 또는 모레 해도 됐다. 그러나 산업화는 우리를 게을리 살게 두지 않았다. 집단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정하고, 중간에 밥 먹고 쉬는 시간까지 관리한다. 산업자본은 어떡하든지 인간의 시간을 빼앗으려 하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음식이 패스트푸드다.
패스트푸드는 빠른 시간에 만들어지고 빠른 시간에 배를 채우며, 먹을 만하면 되는 획일적인 맛을 지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음식은 패스트푸드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공장 제조 음식재료 역시 패스트푸드에 속한다. 음식을 준비하고 조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공장 제조 음식재료는 식당과 가정을 가리지 않고 팔린다. 또 시장에 가는 시간을 줄여주고자 장기간 보관해도 상하지 않는 가공식품이 생산된다. 이처럼 인간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가공 처리한 모든 음식을 패스트푸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한국음식을 보자. 한국음식의 주요 식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 떡볶이떡, 두부 등은 공장 생산품이 대부분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를 가지고 요리한 한국음식 역시 패스트푸드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슬로푸드는 특정 음식을 말한다기보다 일종의 운동성을 지닌 음식이라 정의하는 것이 맞다. 운동성이란 ‘산업화 이후 인간 세상에 대한 거부’ 같은 것인데, 여기에 무게중심을 두고 슬로푸드를 다시 설명하면 ‘인간을 시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듣고 ‘슬로푸드 먹자는 사람들 좌파 아냐? 빨갱이구먼!’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슬로푸드 운동의 시발 자체가 좌파적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됐다. 당시 맥도날드가 로마에 진출하자 몇몇 뜻있는 사람이 슬로푸드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패스트푸드 추방 운동을 벌인 것이 시초다. 그들의 행동지침은 이렇다. 첫째, 소멸 위기에 처한 전통 음식, 음식재료, 포도주 등을 지킨다. 둘째, 품질 좋은 재료의 제공을 통해 소생산자를 보호한다. 셋째, 어린아이 및 소비자에게 미각을 교육한다.
우리나라 슬로푸드 운동의 행동지침을 만들자면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포도주를 민속주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계속됐더라면 로마의 맥도날드보다 강력한 파급력을 발휘했을 롯데마트의 ‘통큰치킨’ 판매에 많은 소비자가 아직 아쉬움을 나타내는, 이 한국적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슬로푸드를 찾고 지킨다는 것은 한국 C급 좌파들의 허망한 놀이일 수도 있다. 그러니 특정한 한국음식에 슬로푸드라 이름 붙이는 것은 의미도, 가치도 없으며 더더욱 운동적이지도 않다. 슬로푸드를 오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간혹 음식 이름에서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욕구가 발견될 때가 있다. 재료와 조리법에 따르면, 원래는 달리 불러야 하는 음식이 그렇다. 일례가 찐빵. 변칙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빵과 떡은 곡물 가루를 반죽해 굽는가, 아니면 찌는가에 따라 나뉜다. 쉽게 말해 구우면 빵이고 찌면 떡이다.
화덕을 주로 쓰는 서양은 빵을, 시루가 흔했던 한국과 일부 아시아 국가는 떡을 주로 먹었다. 그런데 찐빵이라는 이름은 아주 묘하다.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고 찌는 것이니 빵이 아니다. 떡이다. 이와 비슷한 우리 음식으로 쌀가루를 막걸리로 발효해 찌는 것이 있는데, 이를 기정떡, 술떡, 증편 등으로 부른다. 왜 찐빵은 떡이 아니라 찐빵이라 하게 됐을까.
국내에서는 찐빵과 만두를 전혀 다른 음식인 듯 여기지만, 중국과 일본에선 찐빵을 만두의 일종으로 보며 이름도 만두 계열이다. 중국에선 만두를 바오쯔(包子)라 하는데 팥소가 들어간 바오쯔는 더우바오쯔(豆包子) 등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일본 발음으로 안만(饅)이라 한다. ‘안’은 팥과 콩 등으로 만든 소, 즉 ‘앙꼬’이며 ‘饅’은 만두다. 그러니까 팥소만두로 해석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찐빵을 팥소만두라 하지 않았을까.
밀가루는 조선시대까지 귀한 식재료였다. 밀가루 음식은 일제 강점기에 잠시 맛을 보았고 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로 인해 대중화됐다. 그러나 싼 밀가루가 있다고 모든 밀가루 음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밀가루 음식은 수제비와 칼국수 정도가 전부였다. 국물에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칼로 썰거나 손으로 뜯어서 넣었다. 당시 우리 부엌의 빈약한 조리 기구로 이 이상의 음식을 어찌 만들어 먹을 수 있었겠는가.
밀가루 음식의 정점에 있는 것이 빵이다. 그 시절, 이스트와 버터 등이 밀가루에 어우러져 화덕에서 구워질 때 그 고소함은 정말로 황홀했다. 빵집 한 곳에서 나는 냄새가 온 동네의 공기를 ‘오염’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이 빵집은 귀하고 귀했다. 조리 기술도 없었고 조리 도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빵은 비쌌다. 빵은 ‘있는 집 자제’나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서민은 팥소만두 정도에 만족해야 했는데, 이게 빵과 비슷한 모양이니 누군가가 이를 찐빵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찐빵이라는 이름에는 빵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찐빵 속 팥소처럼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겨울이면 찐빵은 여전히 우리 서민들을 위해 길거리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운다. 그런데 고소한 고급 빵의 대체품이었던 서민들의 저렴한 찐빵이, 우리의 겨울 벗이었던 찐빵이 우리의 기대를 슬쩍슬쩍 배반한다. 찐빵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기계에서 대량으로 만든 찐빵이 손으로 일일이 빚은 것처럼 팔린다. 마냥 단 팥소와 마분지 씹는 듯한 식감의 ‘빵’이 예사다. 찐빵이 서민의 것이었다 해도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본디의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음은 내가 생각하는 맛있는 찐빵의 조건이다. 우선 찐빵의 겉을 잡아당기면 껍질이 ‘쭈~욱’ 일어나야 한다. 찐빵은 밀가루 반죽을 하고 나서 1차 숙성을 거치고, 다시 팥소를 넣고 2차 숙성을 해야 한다. 2차 숙성 때는 온도가 높아야 하지만 습도까지 높으면 좋지 않다. 반죽의 겉면이 말라야 하기 때문이다. 선풍기를 돌려 겉을 말리는 것이 요령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쪄내면 껍질이 잘 일어난다. 잘 숙성된 것은 껍질이 말끔하게 홀라당 벗겨진다. 찐빵 맛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 껍질부터 먹는다.
단팥은 대부분 중국산으로, 사람들이 많이 속는다. 대두(메주콩)에 팥을 조금 넣고 색소와 향을 더한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호두과자 팥소를 기억하는가. 질척하고 달기만 한 그것. 그게 가짜 팥소다. 게다가 아주 단 것은 팥의 향이 없으니 단맛으로만 맛있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팥소를 직접 만든다 해도 공장 팥가루를 쓰면 고운 입자 때문에 식감이 좋지 않다. 팥의 알갱이가 일부 살아 있는 듯하면서도 껍질이 주는 이물감이 없는, 약간 퍽퍽하다 싶은 것이 진짜다.
겨울, 굴 철이다. 식당마다 굴을 낸다. 그런데 옛날의 그 진한 맛의 굴이 아니다. 큼직함에도 맛이 많이 비었다. 굴 산지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봤다. 답답한 일이 많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굴은 참굴, 강굴, 벗굴, 털굴, 바윗굴, 세굴, 토사굴, 중국굴 등 8종에 이른다. 우리가 흔히 먹는 것은 참굴이다.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자생한다. 양식을 하는 굴도 참굴이다.
굴은 자라는 환경에 따라 크기와 맛에 큰 차이가 난다. 물론 자연산 굴이 가장 맛있다. 굴은 조간대에서 자란다. 조간대란 간조 때는 바깥에 노출되고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기는 개땅 구역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굴은 조수 간만의 차로 하루에 두 번 바깥에 노출된다. 자연산 굴은 햇볕에 말려지고 바닷바람에 씻기면서 그 맛이 깊어진다. 또 크기는 잘고 육질은 단단하다.
양식 굴은 키우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맛 차이가 있다. 먼저 수하식 양식 굴이 있다. 바다에 부표를 띄우고 굴이 붙은 발을 바다에 내려 키운다. 이 양식 방법은 굴이 자라는 동안 바깥 공기와 햇볕에 노출되지 않는다. 지주식 양식도 있다. 조간대에 기다란 나무를 박아 굴을 붙여 키우는 방법이다. 지주식은 자연산처럼 하루 두 번 간조 때 바깥에 노출된다. 이 지주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가장 고전적인 양식법이다.
수하식으로 굴발을 걸기는 하지만 조간대에 이를 설치하는 간이수하식도 있다. 모양은 수하식이지만 지주식과 비슷한 환경에서 양식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투석식이다. 개땅에 돌멩이를 던져 넣어 이 돌에 굴을 붙이는 방법이다. 이름만 양식이지 투석식은 자연산과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수평망식 양식법을 일부 시도하고 있다. 조간대에 평상을 펴서 그 위에 굴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 방식의 굴은 아직 흔하지 않다.
양식 굴을 자연산과 얼마나 가깝게 자라는지에 따라 순서를 정하면 첫째는 투석식, 두 번째는 지주식과 간이수하식, 그리고 마지막이 수하식이라 할 수 있다. 맛의 순서는 물론 자연산과 얼마나 가까운 환경에서 자라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따라서 수하식이 가장 맛없는 것이 된다. 대신 이 양식의 장점(?)은 굴이 빨리 자란다는 것이다. 지주식 등에서 2년 정도 키워야 할 크기의 굴이 수하식에서는 1년이면 다 자란다.
투석식, 지주식, 간이수하식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개땅이 넓게 펼쳐지는 지역에서 양식을 한다. 그러니까 서해안에 이런 양식장이 많다. 반면에 남해안은 수하식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굴맛 좀 안다는 사람들은 서해안 굴을 찾는다.
요즘 맛있는 굴을 찾기 어렵다. 서해안의 투석식, 지주식, 간이수하식 굴이 시장에 안 보인다. 그 첫째 까닭은 2007년 태안 유조선 침몰 사고의 여파다. 태안반도 일대는 지주식과 간이수하식 굴 양식장이 크게 형성돼 있었다. 당시 기름 유출 사고로 이 굴 양식장이 폐허가 됐다. 혹시나 하고 사정을 알아보니 아직 복구되지 못했다. 간월도를 비롯한 서산 일대에서는 투석식 양식을 많이 한다. 여기는 지난여름 태풍으로 굴 양식장이 피해를 입었다. 큰 파도에 어린 굴이 많이 휩쓸린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식당이며 시장에 보이는 것은 거의가 남해안의 수하식 굴이다. 그렇다고 남해안 수하식 굴이 아예 맛없다는 것은 아니다. 서해안의 투석식, 지주식, 간이수하식의 굴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음식은 자연에서 얻는다.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음식의 맛은 못하며, 자연이 파괴되면 그 음식조차 먹을 수 없게 된다. 밥상을 보면 자연을 알게 된다. 또 자연을 걱정하게 된다. 태안의 맛있는 굴을 언제나 먹을 수 있을지….
1990년대에 사찰음식을 취재하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불자도 아니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어떤 신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사찰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음식의 원형이 그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음식은 일본 식민지배와 6·25전쟁, 급격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조선의 것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민간(속세)과 다소 떨어져 있는 사찰에는 조선의 흔적이 그래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취재를 접어야 했다. 몇몇 사찰을 빼고는 대부분 사찰음식의 전통을 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방은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공양을 맡아 하는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보살’이기 일쑤였다. 민가 음식에서 육류와 오신채가 빠진다는 것 빼고는 특별해 보이는 뭔가를 찾기 어려웠다.
당시에도 사찰음식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들이 있었는데, 뒤집어보면 사찰음식의 전통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취재를 하면 되겠다는 미련이 없진 않았으나 몇 분의 스님을 더 만나고 나서 깨달았다. ‘민간인’의 눈으로 수행자의 밥그릇을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스님은 원래 탁발로 먹고살았다. 바리를 들고 민가에 내려가 음식을 얻어서 먹는 것이 탁발이다. 스님은 도를 닦아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져 있으니, 음식을 구하는 노동은 중생이 맡아서 하고 그 결실물을 스님에게도 나누자는 전통이다. 이 탁발이 현물을 넘어 돈 공양으로 바뀌면서 가짜 승려가 나돌았고, 그래서 현재 불교의 종단들은 탁발을 금지하고 있다. 어느 사찰의 공양간에서 한 스님이 내게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중들은 말이야, 바리에 든 것은 다 먹어야 하잖아. 그 음식들은 중생이 힘들여 마련한 것이니 밥알 한 톨 버리면 안 되겠지. 어느 때에 한 중(오래돼 이름을 잊었다)이 문둥이 환자 집으로 탁발을 간 거야. 문둥이가 나와 스님이 내미는 바리에 밥을 담는데 그만 손가락이 뚝 떨어져 그 속에 담기고 말았어. 그 중이 바리에 담긴 문둥이의 손가락을 빤히 보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자네가 중이면 어쩌겠어? 그 중은 그 손가락을 먹었어.”
불교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그 법맥을 잇는다. 그러니 누구한테 배웠느냐는 것이 중요한데, 이름난 큰스님에게는 제자가 많다. 그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는 자신의 법맥을 제대로 이었다고 인정하는 제자를 불러 바리와 가사를 건네준다. 그렇게 해 간혹 큰스님들이 긴 역사를 지닌 바리를 가지고 있다. ‘바리를 깬다’ ‘바리를 버린다’는 말이 곧 환속을 뜻할 만큼 스님들에게 바리는 특별난 의미가 있다. 불교계에서 신망이 꽤 높은 분을 뵌 적이 있는데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 바리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바리를 받았지. 그 바리는 내 스승이 그 위 스승한테 받은 것이어서 역사가 길지. 그런데 지금은 그 바리가 없어. 불교학교를 해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선반에 올려놓은 내 바리를 누가 가져간 거야. 한 3년 됐나? 지금은 뭐 쓰냐고? 플라스틱 바리야. 밥만 담기면 되지 뭐. 그래도 아깝지 않느냐고? 누군가 잘 쓰고 있을 것이니, 그러면 됐지 뭐.”
최근에 사찰음식을 두고 웰빙 음식이라며 파는 식당이 늘고 있다. 고기와 몇 가지 향신료가 빠졌다고 웰빙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이런 풍토가 답답했는지, 정산 스님(동산불교대 사찰요리문화학과장)은 어느 신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승려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진리 탐구와 중생 구제의 길을 찾아 입산을 결심한다. 산에서 내 몸에 좋은 음식을 탐하고, 내 몸에 이로운 음식을 먹는다면 이율배반이다. 사찰음식은 수행식이자 고행의 음식이며, 따라서 쓰고 거칠며 간이 덜 된 음식이다.”
어느 날 방송에서 사찰음식이라며 콩고기를 보여줬다. 서양의 채식주의자들이 고기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콩 단백질을 변형해 만든 게 이른바 콩고기다. 그런데 이 근대의 산물이 수천 년 전통을 지닌 한국불교의 음식이라고 버젓이 소개되고 있다. 사찰음식점의 바리에 담긴 게 세속의 욕망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겨울, 대구가 철을 만났다. 최근 개통한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 바로 아래 바다에서 겨울 대구가 나온다. 이 바다를 진해만이라 한다. 진해 용원항과 거제 외포항에 대구잡이 배가 많다.
대구는 북반구 한류 바다에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해를 중심으로 여름에는 그 위의 찬 바다로 올라갔다가 겨울이 되면 한류를 따라 남해까지 회유한다. 겨울에 남해 연안에서 산란하며, 그 주요 산란지가 진해만이다. 서해에서 회유하는 대구도 있는데, 동해와 남해를 회유하는 대구에 비해 많지 않고 몸도 작다. 동해 깊은 곳에는 찬물이 넓게 퍼져 있어 사철 대구가 나오지만 제철이 아니면 특별히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구는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산란기인데 이때 잡히는 것이 가장 맛있다. 그래서 진해만의 대구가 유명한 것이다.
진해만에서 부화한 새끼 대구는 연안에서 살다가 5월이 되면 깊은 바다로 들어가 북상하는 찬 해류를 쫓아간다. 다 자라 성어 취급을 받는 대구는 부화 후 만 4년을 넘긴 것으로 길이가 60∼70cm에 이른다. 6년을 넘기면 1m 가까이까지 자란다. 진해만에서 잡히는 대구는 이처럼 성어에 이른 큰 대구다. 물론 작은 놈이 잡히기도 하는데, 어민들이 자원 보호를 위해 어린것은 방류한다.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민들 스스로 하는 일이다. 한때 남획으로 대구의 씨가 말랐던 적이 있어 자원을 아낄 줄 알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대구는 아주 흔한 생선이었다. 1950년대 들어 어획량이 줄기 시작해 귀한 몸이 됐다. 어족 자원 회복을 위해 1986년부터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 사업을 벌였으나 한번 잃은 자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진해만의 어항에서 대구 한 마리가 20만~30만 원을 호가할 때도 있었다. 2006년 겨울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해 대구가 제법 잡히고 있다. 그렇다고 어획량이 안정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매년 불안하니 어민들이 조심하고 있다. 진해만에서 잡힌 대구는 거제 외포항과 진해 용원항으로 주로 들어온다.
상인들은 처음엔 생대구로 판다. 시간이 지나면서 싱싱함을 잃어가면 이리(생선의 정액인데 흔히 ‘고니’ ‘곤’이라 한다), 내장, 아가미 등을 제거하고 말린다. 알과 내장, 아가미는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근다. 특히 아가미젓은 무김치에 더하면 독특한 발효향이 있다. 어민들은 생대구 회보다 살짝 말린 대구 회를 더 맛있는 것으로 친다. 말린 대구 회는 찰기가 있고 맛이 농축돼 감칠맛도 더 있다. 탕도 이렇게 말린 것으로 끓이는 게 낫다. 바짝 말린 대구는 물에 불려 탕이나 찜을 해서 먹는다. 대구(大口)는 입이 커 붙은 이름이다. 따라서 머리도 크다. 먹을 것이 별로 없지만 탕을 할 때 머리를 푹 끓여 쓰면 뽀얗고 구수한 맛의 국물을 얻을 수 있다.
수산 기관들이 대구 알을 받아 인공수정을 해서 수정란과 치어를 방류하고 있다. 최근 들어 대구가 다소 많이 잡히는 것은 이 수정란과 치어 방류 사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방류한 수정란과 치어는 동해안을 회유하다 산란기에 다시 진해만으로 들어온다. 적어도 3~4년은 기다려야 씨알 좋은 놈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진해만 어민들은 어린 대구의 남획을 걱정한다. 호망을 쓰는 진해만과 달리 동해에서는 자망으로 대구를 잡는다. 자망은 그물코에 생선이 걸리게 되는데 그물을 올리고 생선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대구는 죽게 된다. 그러니 대구가 작아도 바다에 던져 살릴 수가 없다. 동해의 어항에서는 명태만 한 대구를 흔히 볼 수 있다. 진해만의 어민들에게는 정말 아까운 대구인 셈이다.
용원항과 외포항에서는 새벽에 대구 경매를 한다. 싱싱한 대구는 아침에 가면 살 수 있다. 장거리 여행객은 말린 대구를 사는 것이 낫다. 또 탕은 말린 대구가 더 맛있다.
대게잡이는 초겨울에 시작하나 대게가 제맛을 내는 시기는 늦겨울과 이른 봄이다. 지금부터가 제철인 것이다. 대게는 북태평양의 수심 200~800m에서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해안 전역에서 자란다. 대게 앞에는 보통 ‘영덕’이 붙는다. 예전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동해안에서 잡힌 대게가 영덕에 모였다가 내륙으로 이송돼 그렇게 이름 붙은 것이다. 영덕 아래 포항, 그 위 울진, 삼척, 동해, 강릉, 양양, 속초, 고성 등지에서도 대게는 잡힌다.
이 대게를 두고 영덕, 울진, 삼척 등에서 제 지역의 이름을 앞에 붙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게가 잡히는 바다를 영덕바다, 울진바다, 삼척바다 식으로 딱 자를 수 없고 맛 구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비자 처지에서는 명칭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각 지역에서 이름에 집착하는 것은 관광 유도 효과를 보기 위해서인데, 그러려면 오히려 바가지 없이 친절한 가게가 더 많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지역이라고 특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심한 호객 행위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해서는 미래는 없다.
대게는 수컷과 암컷 크기가 눈에 띄게 차이 난다. 수컷은 등딱지(체장) 길이가 13cm 정도 될 때까지 자라지만, 암컷은 7cm 조금 넘길 뿐이다. 암컷은 몸이 찐빵만 하다 해서 빵게라 부른다. 또 암컷은 자원 보존을 위해 잡을 수가 없다. 우리가 먹는 대게는 수컷이다. 수컷은 15년 넘게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컷도 등딱지 길이가 9cm 이상 돼야 잡을 수 있는데, 이 정도의 것이면 8년 정도 자란 것이라 한다. 대게는 같은 그물에 올라온 것이라 해도 때깔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보통 황금색, 은백색, 분홍색, 홍색 4종류로 구분한다. 색깔이 짙을수록 살이 단단하고 맛있는데, 황금색이 도는 것을 특별히 ‘참대게’ ‘박달대게’라 부르며 최상급으로 취급한다.
대게잡이배는 새벽에 어항에 들어온다. 경매를 위해 대게를 분류하는 작업을 지켜보면, 뒤로 던져버리는 대게들이 있다. 속에 물이 찬 대게다. 이런 대게는 물게라 하며 경매에도 오르지 못한다. 같은 크기라면 물게와 살이 제대로 찬 대게의 가격 차이는 4~5배가 난다. 물게를 쪄놓으면 다리에 물이 차 있고 살이 힘없이 쑥 빠진다. 경매에 오르지 못한 이 물게들은 수레에 실려 여기저기 흩어지는데, 재수(?)가 없으면 이 물게를 비싸게 먹을 수 있다.
어부들은 눈으로 물게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배 부분의 때깔로 안다. 그러나 일반인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구별하지 못한다. 일반인들도 물게 고르는 방법이 있는데, 배를 손으로 꾹 눌러보는 것이다. 대게를 뒤집었을 때 V자 모양의 부위, 바로 그 자리를 누르는 것이다. 물게는 이 부위를 누르면 물이 나오게 된다. 일부 상인은 소비자가 이 부위를 누르는 것을 꺼린다. 대게에 손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자신의 물건에 하자가 없다고 자신하는 상인은 오히려 눌러보라고 한다.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온 대게 시식 후기들을 보면, 어렵게 산지까지 가서 이 물게를 먹고 오는 일이 허다하다. 대게의 배를 못 누르게 하면 다른 가게 가면 된다. 어디든 양심적인 가게가 있게 마련이다.
대게 산지에 대한 불만이 또 하나 있다. 대게 산지이면서 대게 요리라고 내는 것이 찜과 탕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의가 찜으로 먹는데살을 발라 먹고 나면 ‘후식’으로 몸통의 장에 밥을 비비는 것이 전부다. 이 단순한 요리로도 대게는 충분히 맛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맛있는 음식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내면 소비자의 반응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영덕대게니 울진대게니 하는 ‘산지의 증명’에 관한 다툼에 소비자들은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맛있는 대게 요리가 있는 산지이면 소비자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송어를 콩가루에 비비지 말지어다
송어회와 양념
생활정보 월간지의 데스크 노릇을 할 때였다. 요리 원고를 대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갖은 양념이다. 기자들이 요리 선생에게서 받아온 한국음식 조리법을 보면 꼭 ‘갖은 양념을 한다’는 구절이 있다. 정확한 정보를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담당기자에게 매번 쓴소리를 날려야 했다.
“이 갖은 양념이 대체 무엇이냐. 시장에서 ‘갖은 양념’이란 걸 파느냐. 간장과 마늘만 넣어도 갖은 양념이냐. 참기름, 파, 깨소금까지 들어가야 하느냐. 고춧가루는 얼마나 들어가야 하느냐. 풋고추 다져 넣으면 고추다짐이 되는 것이냐. 생강에 청주, 사이다가 들어가면 또 뭐라 해야 하느냐.”
이러면 기자가 요리 선생에게 물어온 답이란 것이 “입맛에 따라 간장,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파 따위를 적당히 섞은 것이고, 그리 써놓으면 독자들은 자기 입맛에 따라 음식을 만들게 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적당히 입맛에 맞춰 양념해 먹으라 하면 요리 선생이 왜 필요한가. 그 음식에 ‘꼭 맞다’고 생각하는 요리법 하나를 제시하고 난 다음 “이것저것 넣고 빼도 됩니다” 하는 응용편이 나와야 할 게 아닌가.
한국음식 요리법을 보면 이 갖은 양념이 곳곳에 나온다. 나는 갖은 양념의 두루뭉술함에 진력났다. 간장,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파, 생강, 깨 등은 다 각각의 맛이 강렬하다. 이 중에 하나 또는 둘, 셋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에 따른 맛 차이를 무시하라니…. 음식을 대충 만들어 먹으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한국음식 요리법을 두고 ‘아날로그적’이다, ‘먹는 자의 입에 맞춘 맞춤요리법’이라는 등의 말을 할 것이 뻔하다. 갖은 양념이라는 요리법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갖은 양념의 한국 요리는 아무것이나 얼버무려 먹는 하급의 입맛에 봉사할 뿐이다.”
송어회 이야기에 갖은 양념을 길게 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이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는 요리법으로 인한 폐해가 송어회에도 옮겨와 있으며, 송어회 먹는 법을 보면 한국인들의 갖은 양념 습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맛있는 송어회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도 알 수 있다.
강원도 여행길에 송어회 먹는 일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볶은 콩가루에 초고추장, 채소를 더해 송어회를 비벼 먹는 방법이 크게 번졌다. 송어회는 으레 이렇게 먹는 것이라 여기며 송어회 단독으로 먹을 수 있게 내는 양념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볶은 콩가루에 초고추장, 채소에 비벼 먹는 송어회가 맛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송어회가 맛있는 게 아니라 양념이 맛있는 것이다. 볶은 콩가루의 고소함과 초고추장의 달고 새콤한 맛, 채소의 아삭함이 어우러지는데 그 안에 무엇을 넣은들 맛없다 할 것인가. 밥만 넣고 비벼도 맛있다고 먹을 것이다. 맛있으니, 이 양념법이 최상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면 송어회는 왜 먹는 것일까. 그 안에 송어가 들었든, 숭어가 들었든, 참치 뱃살이 들었든, 망둥어가 들었든 양념으로 거의 같은 맛을 내는데 왜 송어회를 먹는다고 앉아 있는 것일까.
송어는 양식장의 환경과 연령에 따른 맛 차이가 크다. 계절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송어는 냉수성 어종으로 사철 찬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이 아니면 살이 무르다. 또 음식으로 내기 전 사료 냄새를 없애기 위해 먹이를 주지 않고 맑은 물에 며칠간 내버려둬야 한다. 횟집 어항에 송어가 갇혀 있다면 맛있는 송어회는 기대할 수 없다. 송어가 가장 맛있는 철은 겨울에서 봄까지다. 이때 살이 단단하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또 만 1년 된 송어가 가장 맛있다. 이를 ‘햇송어’라 한다. 봄을 넘기고 2년째로 접어들면서 암수 성징이 나타난 송어는 ‘묵은 송어’라고 한다. ‘묵은 송어’는 맛이 덜해 낚시터 등에 ‘레저용’으로 내보낸다. 맑은 물에 키운 제철 햇송어 맛을 보면 송어 횟집에서 ‘볶은 콩가루 양념법’을 왜 퍼뜨렸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간장만으로도 환상의 맛을 낸다.
음식은 재료에 이미 그 맛이 있으며, 요리란 그 음식재료가 질이 떨어질 때 부리는 술수일 때가 많다. 양념이 적을수록, 갖은 양념을 안 쓸수록 맛은 살아난다.
설렁탕은 흔히 선농단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말한다. 이 설이 거의 정설이 돼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이렇게 써 있다.
“조선 태조 때부터 동대문 밖 전농동(典農洞, 현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에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祭)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했다. (중략) 행사 때 모여든 많은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 쇠뼈를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라고 한다. 선농탕이 설렁탕으로 음(音)이 변한 것이다.”
최근 한 식품회사에서 설렁탕 제품을 내면서 돌린 자료도 이런 내용을 담았고, 많은 언론이 그대로 옮기고 있다.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은 한때는 그냥 ‘설’일 뿐이었다. 그 ‘설’이 잘못됐다는 근거 있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음식문화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고(故) 이성우 교수는 1982년 ‘한국식품문화사’라는 책에서 이 ‘선농단 설’을 콕 찍어서 “억지”라고 평했다.
“영조(1724~1776)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골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空湯(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는다. 맹물에 소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무리다. 따라서 곰탕은 ‘空湯’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하는 속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세의 억지 설인 듯하다.”
서울스토리텔링연구소 이종수 소장은 ‘우리나라와 몽골의 음식문화’라는 소논문에서 몽골의 탕 문화를 좀 더 소상히 적고 있다.
“몽골의 설렁탕은 대형 가마솥에 소 2마리, 양이나 염소 12마리를 통째로 끓여 쇠고기를 잘게 썰어 소금을 넣고 끓인 공탕(s〃ulen)이다. 공탕은 전쟁터에서 군사(특히 기마병)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유래했다고 하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한반도의 음식문화 중 가장 흥미로운 관계가 형성됐던 ‘고려-몽골’의 음식문화 교류사를 왜곡할 수도 있다. 고려시대 우리 민족은 불교를 믿었고 육식을 금했다. 고려인들은 몽골인에게서 소를 잡는 법을 배웠고, 이 소로 음식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고 한다.
몽골의 슈루는 한국의 설렁탕과 다를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자기 민족의 입맛에 맞게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설렁탕은 근래에 급격히 변하고 있다. 20년 전 설렁탕은 쇠고기의 온갖 부위를 다 넣고 끓였다. 그러니 누린내가 심했다. 누린내는 내장, 쇠머리에서 특히 많이 난다. 1990년대에 들면서 이 부위를 뺀 설렁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사태에다 잡고기를 적당히 섞어 끓이는 방법도 등장했다. 쇠뼈도 사골만 쓰는 집이 생겼다. 설렁탕 맛이 점점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공장형 설렁탕 또는 곰탕이 크게 번지면서 옛 맛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기도 한다. 쇠뼈를 넣고 국물을 제대로 우려내려면 가마솥에서 12시간 이상을 끓여야 하는데, 공장에서는 고압솥을 이용해 두어 시간 만에 국물을 뽑아낸다. 이렇게 해서는 제맛이 날 수 없다. 또 기름을 일일이 걷어내야 하는데 이 작업이 귀찮고 힘드니 균질기를 이용하며 기름을 잘게 쪼개 국물 속에 흩어버린다. 이 기름 때문에 고소한 맛이 더 날 수는 있지만 건강에 좋지 않다.
음식은 장사와 사업의 ‘거리’이기도 하지만 문화다. 그 음식에 담긴 역사며 맛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면서 장사도 하고 사업도 했으면 한다.
얼얼했던 겨울 맛, 몸으로 말한다 |
황태 |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거듭한 황태에도 봄기운이 슬며시 들면서 그 살이 부풀어 오를 때가 됐다.
황태는 명태로 만들어진다. 즉 ‘노란 명태’라는 뜻이다. 명태의 별칭은 참 많다. 말리면 북어, 얼리면 동태(凍太), 겨울에 잡은 것도 한자는 다르지만 동태(冬太), 가을에 잡은 것은 추태, 날것은 생태, 낚시로 잡은 것은 낚시태 또는 조태, 그물로 건져 올리면 망태, 원양어선에서 잡은 것은 원양태, 근해에서 잡으면 지방태다. 또 새끼는 노가리, 꾸들꾸들 말린 것은 코다리, 겨울 찬바람에 노르스름하게 말리면 황태 또는 노랑태, 건조기에서 하얗게 말린 것은 에프태, 덕장에 걸 때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고랑대에서 떨어지면 낙태, 하얗게 마른 것은 백태, 검게 마른 것은 먹태, 딱딱하게 마른 것은 깡태, 대가리를 떼고 말린 것은 무두태, 손상된 것은 파태, 잘 잡히지 않아 값이 비싸면 금태 등등.
이렇게 이름이 많은 것은 우리 민족이 명태를 아주 흔하고 다양하게 먹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겨울 동해에는 명태가 지천이었고 그 명태는 수많은 이름의 ‘-태’로 만들어져 우리 식탁에 올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명태가 요즘은 동해에서 잡히지 않는다. 남획의 결과인지, 해수 온도 변화에 따른 명태 회유 경로의 변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명태가 안 잡히지만 겨울이면 여전히 강원도 진부령 일대 덕장에는 황태가 걸린다. 동해 한참 북쪽 러시아 바다에서 잡은 원양태가 바로 그것이다. 러시아산 원양태는 동태(凍太)로 수입돼 동해의 항구에 부려진다. 항구에선 할머니들이 동태 배따기 작업을 한다. 알과 아가미 등은 젓갈용으로, 이리와 내장 등은 탕용으로 나눈다. 속을 비운 명태는 깨끗이 씻어 겉을 말린 후 냉동한다. 이 상태의 명태가 코다리다. 코다리는 태백산맥 바로 너머의 덕장에 걸린다. 그렇게 한 겨울을 나면 황태가 된다.
황태는 함경도 원산이 ‘고향’이다. 원산 바닷가에서 겨우내 3개월 정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말린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노랑태’라고 불렀다. 6·25전쟁 이후 남쪽에서는 더 이상 황태를 볼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원산 이외 지역에서는 명태를 노랑노랑 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원산 출신의 김상용이라는 분이 원산과 비슷한 겨울 날씨를 보이는 지역을 찾아 나섰다. 그때가 1960년 겨울이었다. 황태를 말리기 위해서는 밤 평균기온이 영하 10℃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두 달 이상 계속돼야 한다. 그는 원산의 겨울 날씨와 가장 비슷한 진부령 서쪽 경사면을 발견하고, 그곳에 덕장을 설치해 명태를 걸었다. 그러나 그곳은 안개가 잦았다. 햇볕이 적으면 먹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이유로 차츰차츰 덕장이 고개 아래로 내려와 백담계곡이 있는 용대리에 이르렀다. 이후 대관령 서쪽 경사면 횡계리에도 덕장이 생기는 등 황태가 강원도 일대에 번져나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덕장이 조금씩 고개 위로 움직이고 있다.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해 더 추운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백담계곡 양옆으로 황태 덕장이 있었지만 최근 이 지역 덕장이 철거됐다. 황태 말리기에 날씨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덕장 사람들은 황태 말리는 일을 하늘과 사람이 ‘7대 3제’로 하는 동업이라 말한다.
태백산맥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는 3월이면 황태를 거둬들인다. 이를 다시 3~4개월 창고에서 숙성시키면 제 색깔을 내며 구수한 맛을 더하게 된다. 물론 숙성 전에도 맛있기는 매한가지다.
지난겨울 지독히 추웠다. 자꾸 겨울 날씨가 따뜻해 황태 맛이 덜하다 했는데, 올해 황태는 추운 겨울 덕을 보았는지 궁금하다. 봄이 오고 있으니 황태 맛 보러 갈 때가 됐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거듭한 황태에도 봄기운이 슬며시 들면서 그 살이 부풀어 오를 때가 됐다.
황태는 명태로 만들어진다. 즉 ‘노란 명태’라는 뜻이다. 명태의 별칭은 참 많다. 말리면 북어, 얼리면 동태(凍太), 겨울에 잡은 것도 한자는 다르지만 동태(冬太), 가을에 잡은 것은 추태, 날것은 생태, 낚시로 잡은 것은 낚시태 또는 조태, 그물로 건져 올리면 망태, 원양어선에서 잡은 것은 원양태, 근해에서 잡으면 지방태다. 또 새끼는 노가리, 꾸들꾸들 말린 것은 코다리, 겨울 찬바람에 노르스름하게 말리면 황태 또는 노랑태, 건조기에서 하얗게 말린 것은 에프태, 덕장에 걸 때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고랑대에서 떨어지면 낙태, 하얗게 마른 것은 백태, 검게 마른 것은 먹태, 딱딱하게 마른 것은 깡태, 대가리를 떼고 말린 것은 무두태, 손상된 것은 파태, 잘 잡히지 않아 값이 비싸면 금태 등등.
이렇게 이름이 많은 것은 우리 민족이 명태를 아주 흔하고 다양하게 먹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무조건 매우면 대박 진짜 웃기는 짬뽕이네 | ||
매운맛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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