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중국이 삼국시대(위·촉·오)→진→5호16국으로 이어지던 시기, 고구려는 그들과 때로는 통교하고 때로는 전쟁했다. 선공에 나서기도 하고,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는데…
고구려 무용총 벽화.
조조, 유비, 손권과 고구려
이런 상황에서 황건군이 봉기하자 동한 왕족을 비롯한 한족의 지배 체제는 약화됐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건국자는 공히 황건군 토벌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위나라 창건자 조조(155~220)는 황건군 토벌을 통해 지위와 명성이 높아졌으며, 촉을 세운 유비(161~223)는 한미(寒微)한 가정 출신인 터라 황건군 토벌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군벌로서의 입지조차 구축할 수 없었다. 오나라 건국자 손권(182~252)의 아버지 손견은 황건군 토벌을 통해 아전(衙前) 신분에서 일약 군벌로 성장했다.조조는 원소, 여포, 마초, 장로 등 군벌과 오환(烏桓)족, 저(氐)족을 제압하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 같은 조조의 동정서벌(東征西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파촉의 유비와 강남의 손권을 멸망시키지 못했다.
화북과 파촉은 친링(秦嶺)산맥, 화북과 강남은 화이허(淮河)와 창장 등 대하천으로 분리돼 지역 간 왕래가 무척 어려웠으며 사회·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다. 화북인이 밀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파촉인(巴蜀人)과 강남인(江南人)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당시 창장 유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화북의 거의 전부를 장악한 위나라가 절대 강자일 수밖에 없었다. 위, 촉, 오는 국력 측면에서 대강 10:2:3의 비율로 차이가 났다.
위는 촉과 오는 물론이고 선비족, 공손씨(公孫氏)의 연(燕), 그 동쪽의 고구려와도 맞서야 했다. 삼국이 정립하던 3세기 초 몽골고원은 선비족의 땅이었다. 단석괴 사망 이후 분열된 중부선비를 장악한 가비능(軻比能) 선우는 동부선비마저 손아귀에 넣으며,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기도 했다.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산시의 남흉노를 통해 북쪽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234년에는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했다. 구심점을 잃은 선비세력은 사분오열되고 만다.
吳,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
손권,조조,유비(왼쪽부터)
오와 연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위는 234년 연의 배후에 위치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통교(通交)했다. 공손연은 위가 고구려를 끌어들여 배후를 노릴까 염려해 위에 아부코자 오에서 보낸 사신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 오의 사신 일부가 탈출해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이들을 잘 대접해 오로 돌려보냈다. 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했다.
동천왕은 이후 공손씨가 지배하는 랴오허 유역을 빼앗으려고 했다. 고구려는 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손씨와 대립각을 세웠으며,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에 보냈다. 동천왕은 부친인 산상왕 초기 발기(發岐)가 일으킨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한 공손씨의 연(燕)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삼국지연의’에서 남만(南蠻)으로 소개된 남중(윈난) 정벌을 통해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229년 저·강족이 거주하던 룽시(隴西) 일부를 평정했다. 제갈량은 간쑤-쓰촨-윈난, 즉 롱(隴)-촉(蜀)-전(滇)으로 이어지는 저·강 벨트를 장악해 국력을 증강하고 저·강 군단을 활용해 장안과 낙양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는 위 정벌의 전제조건인 장안을 차지하고자 여러 차례 위에 도전했으나, 사마의와 조진 등 위나라 장수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후 234년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이 위에 가해온 군사 압력이 크게 줄었다. 위는 237년 베이징 일대를 관할하는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공손씨를 치게 했다. 관구검은 다링허 유역 요수까지 진격했으나, 장마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238년 위나라 군권을 총괄하던 사마의가 직접 공손씨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후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연나라 수도 양평을 점령했다. 공손씨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위나라가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 고구려-위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다.
魏 공격 나선 고구려
고구려는 242년 요충지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함락하는 데 실패했다. 고구려의 선공에 자극받은 관구검은 244년과 245년 오환·선비족이 포함된 2만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서전(緖戰)에서 잇달아 승리한 후 위나라군을 얕잡아본 동천왕은 5000기(騎)를 직접 지휘해 방진(方陣)을 친 위나라군을 공격했으나 기병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위나라군 본대는 동천왕 부대를 구원하러 온 재상 명림어수의 부대까지 섬멸했다. 위나라군은 기세를 타고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으며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동해안 쪽으로 도망한 동천왕을 추격했다. 246년 동천왕은 밀우·유유의 기책(奇策)으로 왕기를 물리치는 데 겨우 성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 따르면 위나라 군대는 ‘낙랑을 통해 퇴각했다(遂自樂浪而退)’고 한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관구검은 일부러 먼 남쪽 길을 돌아서 퇴각했다는 뜻이 된다. 또한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을 가진 위(魏)가 고구려 남쪽에 있었다는 낙랑군을 군사 발진(發進) 기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따라서 당시의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구검은 고구려의 재흥을 막고자 고구려인 포로 3만여 명을 낙양 부근 형양(滎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공손씨가 패망하고 고구려가 위축되자 내몽골 시라무렌강 일대에 거주하던 모용선비 세력이 롼허-다링허 유역 중심지로 밀고 내려왔다.
촉은 오와 연합해 위에 대항하는 것이 중국을 통일할 유일한 길이었는데도 유비가 오나라를 치다가 육손에게 대패함으로써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오나라 지도부 또한 촉과 화친할 때만이 나라를 보존하고, 천하 제패의 작은 기회나마 엿볼 수 있음을 망각했다. 손권이 유비의 의제(義弟) 관우를 처형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였다.
오의 권부는 이후 군벌연합 체제로 변했다. 육(陸), 주(朱), 장(張), 제갈(諸葛) 등 주요 가문의 힘이 손씨 황실을 압박한 것이다. 오는 방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적었다.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영토 내 이민족인 산월과 무릉만을 평지로 강제 이주시키는가 하면 타이완과 오키나와 등으로 병사를 보내 원주민을 잡아오게 할 정도였다.
백치황제, 사마충
사마씨가 권력을 장악한 위는 263년 등애와 종회가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해 촉을 멸망시켰다. 환관 조등의 양손자인 조조는 출신 가문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다. 조조의 호족(豪族) 경시 태도는 최염, 공융, 모개 등 호족 출신 인사들과의 관계를 벌려 놓았다. 이는 위나라가 호족 출신 사마씨 가문에 찬탈당하는 원인의 하나가 됐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265년 위나라를 빼앗아 진(晉)나라를 세웠다. 위나라는 강남에 오, 파촉에 촉이라는 도전 세력이 있는 상황에서 조씨(曹氏) 세력마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했는데도 방계(傍系)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바람에 사마씨에게 나라를 내줬다.
280년 사마씨의 진(晉)은 촉의 멸망으로 옆구리가 텅 비게 된 데다 손권 말년 이후 거듭된 실정으로 쇠약해진 오나라를 쉽게 정벌했다. 183년 황건군 봉기 이후 지속된 약 100년간의 분열 시대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불행히도 사마염을 포함한 진나라 지도부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어 나갈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새외민족이었다. 등애, 서진 곽흠, 강통 등이 남흉노, 선비족, 고구려인 등이 내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들을 원거주지로 돌려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지도부 인사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진나라의 오나라 정벌 이전 하서회랑에서는 독발선비족(禿發鮮卑族)이 거병해 촉을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호열과 견홍을 죽이는 등 맹위를 떨쳤다.
사마염은 위나라 조씨가 방계를 지나치게 약화시켰다가 나라를 빼앗긴 전례를 거울로 삼아 자식 등 황족에게 병력을 줘 수도 낙양을 지키는 요충지 평양(平陽), 진양, 업(鄴) 등에 주둔시켰다. 그런데 백치황제 사마충 등극 후 진이 혼란에 빠지자 군사력을 가진 방계 황족은 자기 군대는 물론, 남흉노와 오환·선비 등 새외민족 병사를 동원해 축록전(逐鹿戰)에 나섰다.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등 내지로 이주해 있던 60만 남흉노는 반(反)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의 황족과 장군들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동해왕 사마월 등이 일으킨 8왕의 난은 남흉노에 독립국을 세울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에 앞서 제만년(齊萬年)이 지휘하는 저족 군단이 296년 산시(陝西)에서 봉기해 맹위를 떨쳤다.
호족·한족 통합 수장
성도왕 사마영의 주둔지는 허베이 남부 업이었다. 사마영은 남흉노의 힘을 빌리고자 인망이 높은 흉노 왕족 출신 유연(252~310)에게 흉노 장병을 징발하는 일을 맡겼다. 유연은 진나라 조정이 오나라 정벌전의 장수로 기용하려 했을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유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원에 흉노의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유연은 봉기하면서 “진이 무도해 우리를 노예처럼 부렸다(晉爲無道 奴隸御我)”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당시 한족-새외민족 간 갈등이 매우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유연은 304년 11월 황하의 북쪽 지류인 분수(汾水) 유역 이석의 좌국성(左國城)에서 유선의 추대를 받아 대선우 한왕(大單于 漢王)에 등극했다. 5만 대군을 모아 흉노 건국의 대업을 시작했다. 유연은 진서(晉書)가 표현한 대로 남흉노 모두가 의지한 영걸이었다. 유연은 세력이 확대되자 308년 10월 포자에서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 ‘황제’의 통치 대상은 한족이며, ‘선우’의 통치 대상은 새외민족(胡族). 유연은 사상 최초로 호족과 한족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국가 수장을 지향했다.
한나라는 309년 1월 평양으로 천도하고, 진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했다. 유연의 아들 유총, 손자 유찬, 조카 유요로 이어진 흉노의 한나라(前趙)는 유총 시대에 낙양과 장안을 함락해 진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거의 통일했다. 유찬과 유요 등 일족과 흉노의 별종인 갈족 석륵, 한족 왕미 등이 이끄는 한군(漢軍)이 311년 낙양을 함락했다. 이른바 ‘영가의 난’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구려의 랴오허 공격
흉노족의 모습.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은 진(晉)이 남흉노에 유린당하는 등 중원이 혼란에 처하자 311년 진으로부터 랴오둥의 요충지 서안평을 빼앗았다. 313년에는 낙랑군, 314년에는 대방군도 점령했다.
모용외를 수장으로 하는 모용선비족은 다링허 유역 극성(棘城) 일대에 자리 잡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미천왕은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 세력을 멸하지 못하면 랴오허 이서(以西) 진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외교 책략을 통해 모용선비를 제압하려 했다.
미천왕은 319년 12월 한족 출신 평주자사 최비로 하여금 모용선비를 적대하던 우문선비와 단(段)선비를 설득해 모용선비를 협격하게 했다. 고구려와 우문선비, 단선비 3개국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3면에서 포위했다. 모용외는 반간계를 썼다. 즉, 우문선비 군대에는 음식과 술을 보내는 한편, 모용외와 밀약을 맺기 위해 최비의 사자가 한밤중 극성에 도착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고구려와 단선비로 하여금 우문선비와 최비를 의심하게 했다. 고구려군은 단독으로 철군했으며, 고립된 최비는 고구려로 망명했다.
3국 연합군을 계략으로 물리친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을 시켜 우문선비를 격파하고, 또 다른 아들 모용인에게는 고구려에 반격을 가하게 했다. 미천왕은 이후에도 랴오허 유역을 계속 공략했으나, 랴오허를 넘지는 못했다. 미천왕은 모용선비를 압박하고자 330년 후조(後趙, 흉노가 세운 한나라) 천왕 석륵에게 우문옥고(宇文屋孤)를 사신으로 보내 건국을 축하하면서 싸리나무 화살 호시(楛矢)를 선물했다.
유요는 312년, 316년 두 차례에 걸쳐 장안을 점령하고,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일대를 평정했다. 유요는 산시 일대를 정벌하다가 진군을 지원한 탁발선비 부족장 탁발의로와의 전투에서 패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한나라군의 포로가 된 서진 회제와 민제는 평양(平陽)으로 압송돼 처형됐다.
강남으로 도피해 있었던 낭야왕 사마예가 317년 명문거족 낭야 왕씨와 강남 토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업(난징)에서 진나라(東晉)를 재건했다.
4분된 중국
한편 한나라는 318년 유총이 사망한 다음 내분으로 인해 급속히 와해됐다. 유총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각기 군단을 거느리던 유요, 석륵, 왕미 등이 자립할 태세를 취했다. 평양의 조정에서는 한족 출신 외척 근씨(靳氏) 세력이 증대돼 황실을 압박했다. 유총 사망 후 유찬이 즉위했는데, 권력을 장악한 근씨들은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유찬을 기습해 살해했다.
평양의 정변 소식을 접한 유요와 석륵 등 일선 장군들은 각기 평양으로 진군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근씨들은 반대파에 의해 축출당하고 난은 진압됐다. 유요는 국명을 조(趙)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석륵은 한족 출신 전략가 장빈의 갈피대책(葛陂大策)을 받아들여 세력권이 겹치던 왕미를 살해하는 한편, 허베이와 산둥, 산시 일부를 점거하고, 319년 허베이의 양국(襄國)에 도읍해 조(趙)나라를 세웠다. 산시(陝西)에 위치한 유요의 조나라(前趙), 허베이에 자리한 석륵의 조나라(後趙), 강남의 동진(東晉), 파촉의 성나라로 중국이 4분된 것이다.
스러진 천하통일의 꿈
유요는 323년 전량왕 장무의 항복을 받았다. 유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흉노 출신 유요와 흉노 별부(別部) 갈족 출신 석륵 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유요는 328년 낙양 전투에서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329년 태자 유희도 석호에게 생포당해 죽었다. 이로써 전조(前趙)는 멸망했다. 유요는 고구려에 망명한 적도 있으며, 독서인이자 빼어난 용장으로 유연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라는 말을 들은 준걸이었으나, 장안이 융성하게 된 이후 타락했다.
석륵의 아들 석홍을 죽이고 자립한 석호는 전량의 수도 고장(姑藏),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하고 탁발선비가 산시 북부에 세운 대(代)를 내몽골로 축출하는 등 한때 화북을 통일하는 기세를 보였다. 338년 5월 후조는 고구려와 단선비의 지원을 받아 10만 대군을 인솔해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롼허-다링허 유역 성읍들이 후조의 석호에게 항복했다.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황은 모여근과 아들 모용각 등의 도움을 받아 화공을 써서 후조군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이후 모용황은 석호에게 항복한 장수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는데 송황과 유홍 등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석호는 다시 한 번 모용선비를 치기 위해 도료장군(渡遼將軍) 조복으로 하여금 산둥반도에서 랴오둥반도 사이에 위치한 묘도열도를 경유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양곡 30만석을 실어다주게 했다. 그러나 석호와 석수의 부자간 내분과 모용선비의 저항으로 인해 후조(後趙)의 천하통일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349년 석호가 죽자 석호의 자식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석호 사후 10세에 불과한 태자 석세가 등극했지만 즉위 33일 만에 석호의 양자로 군권을 장악한 한족 염민(冉閔)의 사주를 받은 석준에게 살해당했다. 석준을 죽인 석감은 염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염민은 나라 이름을 위(魏)로 바꾸었다. 염위(冉魏)는 흉노·갈족을 대거 학살하는 등 극단적 정치로 세력을 모두 잃고 수도 업 주변 극히 일부분만 확보할 수 있었다.
한나라와 전조를 세운 남흉노의 인적 구성은 피정복 부족을 포함해 매우 복잡했다. 흉노의 언어는 알타이어의 일종으로 볼가강 유역 사마라와 카잔 사이에 거주하는 추바쉬인의 말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연이 세운 한(漢)나라 장군 기홍은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지녔다.
‘빨간 머리, 파란 눈’ 인종
중국 사서들은 각기 한과 전조를 세운 유연과 유요 모두 장신이며, 털이 많고 머리카락이 붉은 것으로 기술한다. 이로 미루어 남흉노 왕족인 도각부는 인도-유럽계 인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족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에 거주하던 조로아스터교도인 소그드인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외민족이 세운 나라들은 부락 제도를 유지하면서 점령지 한족을 통치해야 했다. 흉노의 한(漢)은 황제가 한족을 직접 다스리고, 황태자에게 대선우(大單于) 직책을 줘 새외민족을 통치하게 했다. 새외민족은 한족만큼 정교한 행정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지방에 대한 지배는 불철저했으며,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룬 것은 군대였다.
이들 군대는 부락 전통에 따라 종실에 분배됐다. 이를 종실적 군사봉건제라고 한다. 군대는 부락제의 전통을 충실히 유지했으며 자급자족했다. 이러한 군사적 봉건체제는 건국 당시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지배권이 확립된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새외민족 왕조는 대부분 단명했다. 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선비가 유주(베이징 일대)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석호가 강제로 이주시킨 저족과 강족은 폐허가 된 허베이 지역을 탈출해 고향인 관중으로 돌아가는 장거리 행군에 나섰다.
남부 시베리아 지역을 원거주지로 하는 투르크계 정령족도 행동을 개시했다. 383년 비수전투 이후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이 붕괴되자 우두머리 적빈(翟斌)은 허베이 일부를 근거로 세력을 형성했다. 그의 뒤를 이은 적요(翟遼)는 386년 여양(黎陽) 태수 등념지를 죽이고 여양을 점거했다. 적요는 후연(後燕) 모용수에게 항복했다가 산둥의 노(魯)를 근거로 자립해 388년 2월 위(魏)를 세우는데, 이것이 적위(翟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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