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뒤 토지개혁이 실패했다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50년 3월27일 농지개혁안 발표 전쟁과 미국 압력이 성공 원동력… 실패땐 지주 기득권층과 급진주의 대립하며 민주주의·산업화 물 건너갔을 것 | ||||||||||||||||||||||||||||||
한국은 토지개혁에 성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토지개혁을 그토록 신속하게 실행한 사례는 흔치 않다. 한국과 대만 정도다. 양국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토지개혁 과정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냉전시대 동아시아에서 안정적인 반공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의 지지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양국이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토지개혁의 성과가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토지 귀족의 이해는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았을 것이며, 토지 문제에 발목이 잡혀 사회·경제적 불안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경우
전통사회에서 토지는 단순히 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분을 의미하고, 권력을 의미한다. 토지로 얽힌 오래된 질서를 바꾸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한국은 어떻게 토지개혁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토지개혁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토지개혁은 해방 정국의 시대적 과제였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지만, 뿌리 깊은 지주-소작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신속하게 추진됐다. 소련 군정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식민지 시기 급진적 농민운동의 경험, 그리고 농민들의 오랜 열망이 결합된 결과였다. 북한의 지주들은 동유럽처럼 저항을 선택하기보다는 남쪽으로의 탈출을 선택했다. 이른바 ‘월남’ 현상이다. 북한의 신속한 토지개혁은 남쪽에 압력으로 작용했다. 토지개혁을 남한에서는 농지개혁이라고 부른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3월27일 ‘농지개혁안 실시에 관한 건’에서 밝힌 취지는 “농민들에게는 농지를 제공해 자작농으로 육성하고, 지주들은 보상과 적산불하 등을 통해 산업자본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경로에서 보면 농지개혁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근거였고, 중·장기적으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입구였다. 농지개혁으로 전근대적 지주계급이 해체되었고, 산업자본이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경제 근대화의 기초가 마련됐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는 주장을 실증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쟁 이전에 완료됐다는 주장은 농민에게 토지분배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사실을 중시한다. 이 통지서를 받는 순간 ‘이제 토지는 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심리적 소유 의식이 농지개혁의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게 했다는 것이다.
지주층 의식한 이승만, 농지개혁 보류하기도
정병준 교수 등은 이러한 기존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지주들은 대한지주경제협회를 조직해 노골적으로 농지개혁을 반대했다. 그리고 당시 정부의 행정 역량은 높지 않았다. 공무원은 부족했고, 행정기관의 사무 지연은 일상적이었다. 중앙 차원의 법적 결정이 소작농의 기쁨으로 현실화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분배 예정 통지서가 교부되지 않은 지방이 많았으며, 농지분배는 말할 것도 없고 예비조사도 완료하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농지개혁의 완료를 증명하는 사례보다 그렇지 않은 지방의 사례가 더 많다. 이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농지개혁이 전쟁 이전에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지주층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도 부족했다. 밭 가는 사람이 토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 원칙은 조선 후기 이래 모든 개혁의 중심 과제였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봉건적 질서 해체는 만만치 않았다. 농지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이었다. 전쟁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농지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했을 수 있다. 전쟁 과정에서도 농지개혁의 실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북한 점령정책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미국이 갈등하는 사이, 농지개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서울 수복 이후 이승만은 농지개혁이 1년간 연기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1950년 10월19일치 미 중앙정보국(CIA) 비망록은 이 결정을 “지주계급의 압력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결정을 뒤집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남한 점령 기간에 실시한 토지개혁의 영향을 주목했다. 농지개혁이 연기된다면 농민들의 지지가 약화되고, 그렇게 되면 총력전으로 치러지는 전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농지개혁의 시행 연기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이승만은 중단되었던 농지개혁을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반공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토지개혁의 실시와 귀속 재산의 매각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물론 이승만의 입장에서도 강력한 야당 세력인 지주계급의 몰락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환경을 의미했다. 지주의 몰락은 전쟁의 부산물이었다. 전쟁 과정에서 지주는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없었다. 제대로 보상받지도 못했다. 보상받은 농지보상비나 지가증권은 전쟁 기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똥값’이 됐다. 그나마 전쟁 기간 피난 생활을 하는 처지에서 그중 대부분은 할인 판매해야 했다. 중소 지주들은 실질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 오죽하면 1950년대 언론이 이들을 “빗 조흔 개살구 격인 지가증권 지주”라고 불렀겠는가.
교육받거나 산업역군이 된 농민의 자녀들
농지분배 사업은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이 흐른 1957년 말에 가서야 겨우 완료됐다. 지주계급에게는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전통적 지주계급을 해체했고, 촌락의 봉건적 질서는 무너졌다. 농민 역시 승리자는 아니었다. 직접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소작농은 가난한 자작농이 되었다. 신분적 질서는 사라졌지만, 소작의 뿌리 깊은 관행은 변형된 형태로 잔존했다. 1960년 농업센서스에 따르면, 여전히 소작농이 61만 호 존재하고 그것은 총농가의 26.4%에 달했다. 농민은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세농으로 남았다. 긍정적 측면도 있다.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가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현대적 공업국가로 전환하는 길을 열었다. 신분질서에서 해방된 농민의 아들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누렸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양질의 노동력, 즉 산업역군이 되었다. 지주들의 조직화된 이해관계가 부재한 것은 민주화의 길에서 분명 축복이었다. 그러면 농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지주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상상력의 실체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 제공하고 있다. 토지가 아니면 죽음을. 20세기 초 멕시코의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외침이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사파타의 후예들(사파티스타)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토지 문제는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로 가는 발목을 잡고 있다. 브라질은 또 어떤가? 2005년 기준으로 여전히 대농장 소유주 1.6%가 전체 농지 면적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무토지 농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브라질 정치가 넘어야 할 벽이다. 그들은 현대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토지개혁에 실패했다. 그동안 땅을 가진 대농장주는 권력을 갖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로 살거나 도시로 쏟아져나와 거대한 빈곤 지대를 형성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의 열망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권의 집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농민 출신인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권은 대농장 소유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있고, 브라질의 룰라 정권 역시 무토지 농민 문제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토지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토지개혁 실패한 남미·필리핀의 사례
토지 문제에 얽혀 있는 국가가 어디 라틴아메리카뿐이겠는가? 필리핀의 사례 역시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부유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1986년 시민혁명으로 코라손 아키노 정권이 들어섰지만, 저성장과 경제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필리핀의 정체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중에서 토지 문제가 핵심이다. 필리핀의 토지 소유 구조는 지주-소작 관계가 특징적이며, 대토지 소유가 압도적으로 많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 이후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400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남겨준 유산이기도 하다. 20세기 독립 이후 몇 번의 토지개혁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 지주계급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필리핀 현대사의 사회·경제적 불안정의 배후에는 극단적 토지 소유의 불균등이 배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어두운 현대사의 터널을 걸었을 것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사례를 곧바로 한국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역사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랜 식민지 경험이 있고, 현대사에 초대받지 못한 원주민이 존재했으며, 플랜테이션 농업이 이루어지는 지형적 차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역시 오래된 신분제도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비록 플랜테이션이 아닌 소농 중심의 농업 구조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사회적으로 미칠 부정적 유산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농촌 사회의 신분적 질서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전후 한국 사회의 특징인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작농의 자녀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작농이나 도시 빈민의 운명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분 세습과 아울러 교육과 복지 분야의 양극화는 지금 우리가 겪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을 것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토지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주의 정당은 필리핀 사례처럼 민주화가 이뤄졌더라도 토지제도 개혁에 적극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경제적으로도 토지 귀족은 지대 추구를 우선한다. 산업자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었다면 수출지향형 산업화 대신 라틴아메리카의 수입대체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세계적 명품을 소비하는 소수의 특권층과 구매력이 없는 다수의 빈곤층이라는 양극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내수산업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극단적 양극화와 계급 갈등 불렀을 것
사회적으로 일제강점기 급진적 농민운동의 전통을 고려해볼 때, 계급 갈등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냉전 반공주의의 강압 체제에서 사파타의 후예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 없는 농민들의 분노는 ‘끊임없이 좌절하는 급진주의’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지주계급의 해체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농업과 농민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개혁이 곧바로 농민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의 농업은 불균형 발전과 개방의 물결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농민이 웃는 날은 언제쯤 올까?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의 시원, 만주_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0) | 2010.03.11 |
---|---|
간도오딧세이_04 (0) | 2010.03.11 |
염화실의 향기_05_관음사 회주 이두스님 (0) | 2010.03.08 |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_05 (0) | 2010.03.08 |
‘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_05 (0) | 2010.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