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 글자로 본 중국 | 허난성

醉月 2016. 4. 18. 01:30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豫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중국의 모든 것은 허난성에서 시작됐다. 허난의 화하족은 한족의 뿌리다. 중원사상, 음양오행론도 이 땅에서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 허난성은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여야 할 정도로 같은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허난성의 확장판이 중국이란 것을, 그들은 모르는 걸까.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송·금의 황궁터이던 곳에 세워진 룽팅공원. 수영하지 말라는 팻말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하는 중국인들이 있다.

대륙의 교차로, 정저우 기차역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아가씨가 다가왔다. 손에 든 전단을 흘끗 보니 미용실 광고 전단이었다. 중국에 ‘삐끼’가 많기는 해도, 필요 없다고 하면 대개 더는 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반 블록이나 계속 따라오며 헤어컷을 하라며 졸라댔다. “한번 와서 상담 받아보세요.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면 기분이 달라지고, 기분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져요.”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일(利國利民)’이라는 대의명분까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연신 사양하자 아가씨는 말했다. “멋진 오빠, 저기부터 여기까지 날 데려와 놓고 필요 없다고만 하기예요?”

아니, 누가 따라오라 했나? 그래도 아가씨가 귀엽게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있게 말하자 일순 마음이 약해져 ‘까짓것 헤어컷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이 빠듯해 끝내 아가씨를 돌려보냈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허난(河南)성 사람들의 분위기를 느꼈다.

‘화려한 여름(華夏)’의 민족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허난성의 약칭은 ‘편안할 예(豫)’ 자다. 사람(子)이 코끼리(象)를 끌고 가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황허의 남쪽인 허난성은 코끼리가 살 만큼 풍요로웠으니 사람 살기에도 편했으리라. 고대에 기후가 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의 기후는 오늘날 동남아와 유사한 열대·아열대성이었다. 드넓은 평야지대엔 온갖 기화요초가 자라고 코끼리, 거북 등 다양한 동물이 살았다. 그 위에 거대한 젖줄, 황허가 흐른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 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마다 기름진 토양이 실려와 풍년을 맞은 것처럼, 진흙을 날라오는 황허 덕분에 허난성은 써도 써도 지력이 고갈되지 않는 화수분 같은 땅이었다.

코끼리가 뛰놀던 시절의 허난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 ‘산해경(山海經)’ 속의 전설 같은 땅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맛 좋은 콩, 벼, 기장, 피 등이 있고, 온갖 곡식이 절로 자라며 겨울과 여름에도 씨를 뿌린다. 난(鸞)새가 절로 노래 부르고, 봉(鳳)이 절로 춤춘다. 약초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며, 온갖 초목이 모여 자란다. 여기는 온갖 짐승이 서로 무리 지어 살고, 풀들이 겨울과 여름에도 죽지 않는다.”

이 땅에서 중국의 모든 것이 시작됐다. 대제국 중국의 근원인 중원(中原)이 바로 허난성이다. “중국의 1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 5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에 가야 한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보려면 허난에 가야 한다.”

황허는 “낙양에 천 가지 꽃을 피웠고, 개봉(옛 양원)의 만경 땅을 기름지게 했다(滋洛陽千種花,潤梁園萬頃田).” 그러나 이 거대한 ‘용’은 평소에는 중원을 풍요롭게 하다가도 한번 화가 나면 무지막지한 시련을 내렸다. 치수(治水)는 황허 유역 사람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전설 속 성군이며 하나라 시조인 우 임금이다. 우(禹)는 몸이 산처럼 우람해 한 걸음에 2리 반(1km)을 가고, 큰 손으로 천 석(180t)의 돌을 들었다. 그런 능력자에게도 치수는 버거운 숙제였다.

우는 결혼한 지 나흘 만에 집을 떠나 천하 방방곡곡으로 ‘출장’을 다녔고, 13년간 집 앞을 세 번 지나치면서 단 한 번도 들를 수 없었다. 이 신화는 치수 사업이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 광범위한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 대역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련을 이겨내려는 분투 속에 역사는 발전한다. 중국은 초기 단계부터 치수 사업 때문에 대규모 인력동원 체제가 필요했는데, 이는 국가제도의 정비로 이어졌다. 큰 것을 숭상하던 이들은 만물이 번성하는 여름을 아름답게 여겼기에, 스스로를 ‘화려한 여름의 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이라 불렀고, 나라 이름 역시 하(夏)라고 지었다. 훗날 통일제국 한(漢) 이후 화하족을 중심으로 90여 개 민족이 점차 통합해 한족(漢族)이 탄생했다. 즉, 오늘날 중국인의 뿌리가 바로 허난성의 화하족이다.

‘中州’이자 ‘神州’

화하족은 황하의 풍족함, 많은 인구, 수준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 일찍이 정비된 국가제도 등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주변에 자신과 견줄 만한 세력이 없어지자 이들은 자연스럽게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하면서 이를 매우 그럴듯하게 철학적, 과학적으로 포장했다. ‘주례(周禮)’는 말한다.

“하지에 그림자가 1척 5촌인 곳이 천하의 중심이다. 천지가 화합하는 곳, 사시가 교차하는 곳, 풍우가 만나는 곳, 음양이 조화하는 곳이다. 그러하므로 만물이 풍성하고 편안하여 여기에 왕국을 세운다.”

따라서 화하족의 땅은 천하의 중심이며 근원이 되는 ‘중원(中原)’이고, 여기 세워진 국가는 ‘중국(中國)’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원은 천지만물의 조화가 아름답게 이뤄진 땅이고, 변방은 음양의 조화가 깨져 있어 상서롭지 못한 땅이다. 중앙일수록 고귀하므로 사방의 만이융적(蠻夷戎狄)은 천하디천한 오랑캐다. 순자도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했다. “사방에서 두루 가깝게 하고자 한다면 중앙만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왕자는 반드시 천하의 한가운데 거처하니, 이것이 예다.” 중원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지키는 것이고, 변방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어기는 것이다.

매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네 땅에 대한 애착이 큰 탓이리라. 화하족은 황허의 물을 마시고, 황토 진흙으로 집을 지으며,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곡물을 먹고살았다. 모든 것을 길러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흙에 대한 사랑은 중국인의 과학적 인식론인 음양오행론에 반영됐다. 나무·불·흙·쇠·물(木火土金水) 등 5개 요소가 상생상극하며 천지의 조화가 빚어진다는 오행론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흙이다. 흙은 물이나 불만큼 개성적이지 않고 다소 밋밋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이들을 다 받아들인다. 이처럼 흙은 다른 이들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자기 본연의 성질은 잃지 않는 군자의 덕(和而不同)을 지닌다. 중국인은 토덕(土德)을 구현한 황제(黃帝)를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 부른다.

우 임금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중에서 예주(豫州)를 중심으로 삼았다. 예주는 곧 중주(中州)로도, 신주(神州)로도 불렸다. 중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후로 허난은 중원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삼국지의 무대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중악(中岳)으로 숭상받는 쑹산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향산사(香山寺)에서 바라본 뤄양.

중국 8대 고도(古都) 중 4개가 허난에 있다. 베이징, 시안, 항저우, 난징 등 쟁쟁한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허난의 4대 고도는 9개 왕조의 수도 뤄양(洛陽),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 5개 왕조의 수도였으며 허난의 성도인 정저우(鄭州), 7개 왕조의 수도 안양(安陽)이다. 천하의 중심인 중원은 고도의 상징성을 가졌다. 중국의 오악(五岳) 중 허난의 쑹산(嵩山)은 동악 타이산(泰山)의 수려함도, 서악 화산의 웅장함도 없다. 그러나 중원인들은 쑹산을 중악으로 우러러봤다. 중원의 높은 산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하늘에 쉽게 닿을 것 아닌가. 그래서 쑹산에 큰 절을 지었다. 천하 무술의 근원으로 더욱 유명한 천년고찰 소림사(少林寺)다.

대륙 한복판에 탁 트인 대평원, 동서남북 어디로든 사통팔달 열린 땅. 풍부한 자원과 많은 인구, 게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성까지. 중원을 얻는 자가 곧 천하를 얻었다. 유방이 항우에게 승기를 잡은 성고전투,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1만 농민군으로 신(新)나라 43만 정규군을 격파한 곤양대전 등 굵직굵직한 대전들이 중원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삼국지’ 독자에게 허난성은 매우 친숙한 장소다. 원소·조조를 중심으로 한 18로(路) 제후 연합군은 후한 말 ‘최강최흉’의 군벌 동탁을 타도하러 허난으로 진격했고, 뤄양의 관문인 호뢰관에서 천하무적 여포가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와 겨뤘다. 중원의 샛별 조조와 허베이의 패자 원소가 맞붙은 관도대전은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다.

 

애초에 조조가 허난의 쉬창(許昌)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도 중원을 기반으로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군웅할거 시대에 중원은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조조는 그 누구보다 많은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북쪽의 원소와 오환·선비족, 동쪽의 유비와 여포, 남쪽의 원술과 유표, 서쪽의 장로와 마초 등 주변의 강적을 모두 평정하자 조조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됐다.

하·상·주부터 송까지 중원은 명실상부한 천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북방 유목민족이 득세하고 강남이 개발되며 중국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원(元) 이후 동북부 베이징은 정치의 중심, 동남부 강남은 경제의 중심이 됐다.

중원의 영광이 사라지고 오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명판관 포청천이 활약하던 북송의 화려한 수도 카이펑은 2700년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118번 진흙탕을 뒤집어썼고, 궁성까지 진흙 속에 파묻힌 것이 일곱 차례나 된다. 전쟁, 수재, 가뭄, 정부의 수탈, 기근…이 모든 일이 ‘종합선물세트’로 터진 사건이 있다. 바로 1942년의 대기근이다.

“人肉 먹은 자도 굶어 죽었다”

중일전쟁에서 밀리던 장제스는 1938년 허난 화위안커우(花園口)의 제방을 비밀리에 폭파했다. 물로 병사를 대신한다는 작전이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도 못했고 허난 주민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89만 명이 사망했고, 80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1250만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허난의 비옥한 농토 8000㎢가 황폐화하며 더욱 큰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수재에 가뭄, 노동력 부족이 겹쳤다. 방치된 땅에서 엄청난 메뚜기떼가 날아들어 간신히 키운 작물을 먹어치웠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대참극은 피했을 것이다. 국민당의 부정부패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국민당은 허난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수탈했다. 허난성은 징병수 전국 1위(260만 명), 곡물 징수 전국 2위였다.

곡물 징수 1위인 쓰촨은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후방인 데다 날씨도 좋아 농사에 문제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허난이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부사령관 탕언보의 착취가 가장 심해서 허난인들은 ‘수해, 가뭄, 메뚜기, 탕언보’를 4대 해악으로 꼽았다. “적군에게 불타 죽는다 해도 탕언보 부대가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허난이 현지 사정을 탄원하자 파견 된 국민당 관료는 현지조사를 하고도 중앙의 뜻을 전했다. “허난성에 재난이 닥친 것은 사실이지만, 군용 식량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어떤 관료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민이 죽더라도 땅은 여전히 중국 땅이지만 군대가 굶어 죽으면 일본군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대기근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전 밀과 좁쌀은 한 근에 0.6위안이었지만, 1943년 봄에는 300위안으로 뛰었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내다 팔고도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은 배추를 팔 듯 자식을 팔았다.” 너도나도 사람을 팔자 사람값이 옷이나 가구 값만도 못했다. 나중에는 팔려 해도 팔리지 않자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떻게든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그냥 버리고 갔다. 허난에서 희망을 잃은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기러기 똥을 먹고, 흙을 먹고, 가죽을 끓여 먹고, 사람 고기를 먹은 자들도 결국 모두 굶어 죽었다.” 허난 대기근은 일본군이 점령한 40여 군데 현을 제외한 국민당 통치지역 통계로만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대참사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허난성 정부는 우수한 ‘곡물 및 현물 징수’ 실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이때 헐값에 땅과 사람을 사들여 더 부자가 됐다.

‘허난상보’ 관궈펑 기자는 1974년 태어난 허난 토박이인데도 대기근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다가, 2009년 말 홍콩 인터넷에 올라온 당시의 기록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42 대기근’을 썼다. 국민당의 큰 오점이라 선전에 활용하기 좋았을 텐데, 왜 공산당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자연재해로 시작했지만 정부의 실책으로 확대된 인재(人災)성 대기근이라는 점에서 공산당 최대 실책인 대약진운동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인간이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헤겔의 독설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지구인 60명 중 1명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룽먼산 룽먼석굴.

나는 숱하게 중국을 찾아가 길게도, 짧게도 머물며 이 나라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국이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더럽고 시끄럽고 황당한 중국’은 한 달만 지내도 매우 피곤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는 수준 낮은 중국인들은 중국에 정이 뚝 떨어지게 만든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고막이 찢어질 듯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사람을 마구 밀쳐대며 버스를 탄다.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버스의 2인용 좌석에 앉아 있는데 한 중국인이 옆에 앉았다. 그가 버스 안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게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바지에 음료수를 엎질렀다. 그러나 그는 내게 사과하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자리만 닦았다. 그때는 정말 ‘화났다’거나 ‘짜증났다’는 점잖은 말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빡쳤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웅장한 만리장성을 건설하고 정교한 보물을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다가 기차여행을 했다. 옆자리에 꾀죄죄한 초로의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자면서 코를 엄청 골아댔다. 한밤중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코 고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저리치던 중국인과 수준 높은 중국 문화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냄새가 나는 것은 씻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코를 시끄럽게 고는 것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도외시하고 자기만 챙기는 것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겹기 때문이다. 저 많은 인민이 여유를 박탈당하고 헐값에 온갖 고난을 감수하기에 비로소 중국의 놀라운 경제발전,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발전이 놀라운가. 그 화려함을 떠받치는 수많은 중국 민초를, 그들의 험난한 삶을 보면 세상만사엔 공짜가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중국의 성장을 일궈낸 농민공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닭보다 먼저 일어나고, 고양이보다 늦게 잔다. 당나귀보다 힘들게 일하고, 돼지보다 나쁜 음식을 먹는다.”

가장 많은 농민공을 배출한 곳이 바로 허난성이다. 허난은 중원답게 인구가 많은 인구대성(人口大省)이다. 2013년 기준 허난 인구는 9410만 명으로 중국 내 3위다. 1위 광둥성(1억430만 명)과 2위 산둥성(1억 명)은 모두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로 인구가 유입된 연안경제권이고, 허난은 그다지 수혜를 보지 못해 인구가 유출된 내륙 지역임에도 근소한 차이로 3위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허난이 단연 1위였다. 중국인 13명 중 1명, 지구인 60명 중 1명은 허난인이다.

이처럼 인구가 많으니 국내총생산(GDP)도 만만치 않다. 2014년 기준 허난의 명목 GDP는 5687억 달러로 중국 내 5위이며 스웨덴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스웨덴 인구는 1000만 명이 채 안 돼 1인당 GDP가 5만 달러인 반면, 허난은 5000달러에 불과하다. 중국 내 31개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중 27위이고, 중동의 요르단 수준이다.

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많은 허난인은 외지에 나가 일자리를 찾았다. 가난이 죄라고, 허난인들은 중국 안의 이주노동자 신세였다. 더욱이 일을 시켜놓고 임금은 주지 않고 도망가는 ‘먹튀’ 사업가들이 생겨나자 허난 농민공들은 뼈 빠지게 일해놓고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들이 생계형 범죄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자 사방에서 성토가 쏟아졌다. “베이징과 톈진 거지는 대부분 허난 사람이다” “불과 도둑과 허난 사람은 막아라”….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옛 뤄양의 모습을 잘 보전한 뤄양노성(老珹)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베이징부터 후베이 우한까지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복판에 허난이 있음을 보여주는 정저우 2·7광장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북송 시대 수도 카이펑의 운하. 이 운하를 통해 강남의 곡식을 실어왔다.

 

좀도둑, 범죄자, 요괴

허난인은 어느새 좀도둑, 범죄자, 요괴 취급을 받게 됐다. ‘허난인은 이력서를 제출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버젓이 쓴 구인광고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처럼 이미지가 나빠지자 허난은 외자 유치와 경제개발에 곤란을 겪었다. 2001년 허난성 정부는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라며 반요괴화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런 노력을 비웃듯 2005년 3월 광둥성 선전시의 한 공안국은 “허난 출신 사기꾼들을 때려잡자(堅決打擊河南籍敲詐勒索團)!”는 현수막을 걸었다. 참다못한 허난 변호사 2명은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특정 지역 출신을 범죄자로 취급한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신중국 건설 후 최초의 지역차별 소송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원의 중재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선전시 공안국이 원고에게 사과하는 대신, 원고가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 그런데 허난인 전체에 대한 공개 사과가 아니라 원고 2명에 한정된 사적 사과였고, 선전 공안국의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원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했지만, 우리는 밝힐 수 없는 여러 곳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법원은 공안국의 불법적 지역차별 행위에 대한 재판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또 일어날 수도 있는 다른 지역차별 행위가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나쁜 선례만 남겼다.”

인민의 인권보다 국가기관의 체면을 중요시한 결과다. 그리고 허난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실연 33일(失戀33天)’에서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진상 고객으로 허난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매우 까다롭고 골은 비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 희한한 것, 신기한 것, 명품만 찾는 꼴불견이다. 새벽 5시에 주인공을 불러내 어이없는 요구를 늘어놓는다.

많은 중국인은 허난인이 음흉하고 가짜를 잘 만든다고 매도한다. 실제로 그러한가.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리페이푸(李佩甫)의 ‘양의 문(羊的門)’은 허난의 모습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한 촌장은 마을 전체가 가짜 담배를 만들도록 지휘했는데, 단속 나온 현 서기에게 당당히 궤변을 늘어놓는다. “담배는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담배는 진짜 해가 되는 물건이고, 가짜 담배는 가짜 해가 되는 물건이 아닐까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다른 성은 가짜를 안 만드는가. 다른 지역은 얼마나 깨끗한가. 소설 말미에 나오듯,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사정은 시 서기의 항변처럼 전국이 피장파장이었다. “시장경제는 누구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라고! 지금 상황은 전국이 다 똑같네. 문제없는 곳은 없어. 조사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나올 거네. 가만히 접어두면 아무 문제가 안 되지만, 들춰내기 시작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네.”

동족 혐오, 희생양 만들기

결국 허난성이 가짜의 대명사, 허난인이 추한 중국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희생양 만들기와 동족 혐오에 가깝다. 피차일반이면서 자기는 깨끗하고 저놈만 더럽다고 욕하는 것이다. 허난인은 추악한 중국인의 대표라기보다, 오히려 전체 중국인의 대표다. 교육학자 양둥핑은 말했다. “‘중국인’이라는 개념 또한 무척 광범위해 결코 베이징인이나 상하이인과 같은 범주에 담아낼 수 없다. 중국인의 총체적인 형상, 문화적 근간이 어디에 있냐에 대해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북방의 농민이 될 것이다. 상하이인 혹은 베이징인이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북방의 농민, 그중에서도 허난성이야말로 중국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허난성은 중국의 축소판이며, 중국은 허난성의 확장판이다. 중국은 인구대국이고, 허난성은 인구대성이다. 전체 GDP는 많지만, 1인당 GDP가 적은 점도 같다. 2014년 중국의 명목 GDP는 10조 달러로 세계 2위지만, 1인당 GDP는 7589달러로 79위였다. 또한 중국이 급속히 산업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 비중이 높은 점도 허난성과 판박이다. 그래서 허난인은 지적한다. “중국인이 허난인을 대하는 시각은, 외국인이 중국인을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면이나 나쁜 면이나 허난은 중국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난과 낙후, 외성인(外省人)들의 따가운 눈총까지. 허난의 수난은 눈물겹다. 그러나 이곳은 누가 뭐래도 중원이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들의 자존심은 굳건하다. 타 지역 은행의 이름은 보통 해당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허난성의 은행은 당당하게도 ‘중원은행(中原銀行)’이다. 타 지역이 오랜 역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조용히 은허 갑골문과 정주상성(鄭州商城)을 보여준다. 산시성이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얻어온 불경을 보관한 대안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를 보여준다.

산둥성이 인류의 스승 공자를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주공이 예악(禮樂)을 정하다. 공자가 주나라에 와서 예를 묻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복원해 천하가 평화를 되찾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을 정한 이는 공자가 평생 흠모한 주공이었다. ‘노나라 촌놈’인 공자는 주나라 유학으로 예악을 배웠고, 당시 왕립 도서관장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노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유하자면, 주공이 구약성서를 미리 써놓았기에 공자는 이를 기반으로 신약성서를 쓸 수 있었다. 결국 허난이 없었다면 공자도 없었다는 말이다.

상하이와 광둥성 등 연안 지역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초나라 왕이 구정(九鼎)에 대해 묻다.” 춘추전국시대의 패자 초장왕은 주나라의 왕손 만이 찾아왔을 때 말했다. “구정은 얼마나 큽니까. 그 정도는 우리 초나라 군대의 부러진 창날만 모아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구정은 당시 귀금속인 청동을 크고 정교하게 만든 기물로, 주나라 왕실의 상징이며 주의 경제력, 문화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흥강국 초나라에는 주 왕실의 권위도, 구정도 별것 아니게 보였다. 왕손 만은 말한다. “천자의 권위란 덕에 있는 것이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자가 덕을 밝히면 정이 작더라도 그 무게는 무거우며, 난잡하고 어두우면 정이 비록 크다 해도 가벼운 것입니다.” 급속히 부국강병을 이룬 초나라는 졸부와 같다. 비록 껍데기는 따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 담아야 할 정신은 채우지 못한다. 경제력, 군사력만으로는 넘지 못하는 것이 문화다.

중원의 자부심

연안 지역이 오늘날 경제를 뽐내지만, 옛 초나라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달은 차면 기운다. 흥하면 쇠한다. 핵심은 흥망성쇠의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꿋꿋이 전통을 지켜온 중원의 자부심이 읽힌다.

허난 정저우는 중원답게 교통의 중심지다. 남북으로 베이징과 광저우를 잇는 징광선(京廣線), 동서로 장쑤 렌윈강과 신장 우루무치를 잇는 룽하이선(隴海線)이 교차한다. 허난성 셰푸잔(謝伏瞻) 성장은 2015년 양회에서 ‘미(米)’자형 고속철 건설 구상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정저우에 방사형 고속철 네트워크를 건설해 중국 각지를 사통팔달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허난은 대륙의 허브로 재도약을 꿈꾼다. 늘 중국의 영광과 오욕을 함께해온 중원 허난이 어떤 내일을 맞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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