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天然痘)를 발견한 갈홍
진(晉)나라 학자이자 의학가인 갈홍(葛洪, 283~343?)은 사실 도가(道家) 사상에 정통한 인물로 더욱 유명하다. 호는 포박자(抱朴子)로 282년 단양군(丹陽郡)에서 태어났다.
갈홍의 가문은 명문가였다. 선조인 갈포려(葛浦廬)는 광무제를 도와 동한(東漢)을 건립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작위와 봉록을 받은 갈포려는 남쪽으로 옮겨 갈홍이 태어난 구용현에 정착해 평화롭게 살았다. 갈홍의 조부인 갈계(葛系)는 오(吳)나라 이부상서를 지냈고, 부친인 갈제(葛悌)는 오나라 중서랑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진나라에서는 갈제를 등용했다. 명망과 부를 지닌 가문에서 태어난 갈홍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며 부잣집 도련님으로 고이 자랐다. 하지만 당파 싸움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면서 13세 되던 해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밭일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
갈홍은 가장으로서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농한기가 되면 책을 구해 읽고 또 읽었다. 소장한 책이 그다지 없었던 터라 책을 빌리기 위해 수 십리를 걷는 일은 허다했다. 땔나무를 팔고 농사를 지어 번 돈으로 책을 사서 보는 정성으로, 16세에 이르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머지 않아 이미 만권의 책을 읽어 일대에 갈홍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당시에는 도가의 위세가 대단했으며, 도가 사상을 연구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았다. 갈홍의 선조인 갈현은 유명한 도가학자이자 수련자로서 신선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알려진 연단술의 1인자였다. 그는 자신의 비기를 제자 정은(鄭隱)에게 전수했다. 훗날 갈홍은 정은을 만나 선조가 남긴 비밀을 전해 받게 된다. 정은의 제자는 수십 명이었지만 갈홍의 재능은 낭중지추였기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학(家學)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갈홍의 학풍과 인품은 도가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깨끗하게 닦는 것을 요구하는 도가의 학풍답게 갈홍 또한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지 않았다. 선조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갈홍은 말년에 이르러 갈현을 뛰어넘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자신의 호를 딴 저서 포박자(抱朴子)에는 그의 연구 결과가 담겨 있다.
갈홍은 12가지 적어야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 12가지는 소사(少思), 소념(少念), 소욕(少欲), 소사(少事), 소어(少語), 소소(少笑), 소수(少愁), 소락(少樂), 소희(少喜), 소노(少怒), 소호(少好), 소악(少惡)이다. 즉 기쁘고 슬픈 일곱가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웃음은 만병의 통치약이라고 불리지만, 예전에는 웃음과 기쁨도 치우친 감정의 하나에 불과했다.
갈홍은 천지를 돌아다니며 수련했고,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구했다. 욕심을 버렸던 그였기에 진료에 있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고, 환자에게 구하기 쉽고 저렴한 약재로 구성한 처방을 주었다. 여기에는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 환자도 포함돼 있었다.
갈홍은 팔꿈치 뒤의 옷깃에 담아두고 급할 때 참고하라는 뜻의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을 저술했는데, 주후비급방에는 천연두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결핵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이는 질환에 대한 연구도 담겨 있다. 그의 눈은 신선과 근본적인 사상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어찌 보면 고통받는 세인들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갈홍의 전과 후에 그처럼 당시의 전염병과 특이 질환을 소상하게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에는 화타와 편작 등 명의의 이름을 빌린 서적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갈홍은 주후비급방에서 비록 고대 명의의 이름을 빌리지 않았지만, 참고해야 할 정수를 담았다고 밝혔다. 즉 고대의 지혜에만 천착해서는 안 되며, 이를 발전시켜 현재의 질환과 환경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병자를 진료해야 함을 설파한 것이다.
갈홍의 호인 포박자는 당시 그의 고향에서 흔히 쓰던 말이었다.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 소박한 선비를 일컬어 포박지사(抱朴之士)라 불렀는데, 고향 사람들은 갈홍을 포박자라 불렸다. 갈홍에게 이는 최고의 찬사였다. 물론 그가 이런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지만, 신선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평가는 어떤 칭송보다 높았다. 노자의 도덕경에 견소포박(見素抱朴), 소사과욕(少私寡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본래의 순박함은 잘 지키고, 사사로움과 욕심은 버리라는 뜻이다. 이런 그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뒀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갈홍의 부인 포고(鮑姑)는 유명한 의사였는데, 특히 침과 뜸에 정통해 뜸으로 많은 질환을 치료해 명망을 얻었다. 포고가 환자를 널리 구한 것에 감사한 세인들은 그의 초상을 사원에 모시고 제를 올리기도 했다.
두보의 죽음과 당뇨병
매주 고대 명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서, 틈틈이 번외편으로 명인들의 삶과 죽음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두보(杜甫, 712~770)는 평생 마음을 졸이고 몸은 고생스러웠다. 그의 시에 묻어난 슬픔의 무게는 무겁고 애잔하기 그지 없다. 술을 좋아하기로 이름난 이백과 마찬가지로 두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주당이었다. 역사 기록을 찾아보면 두보의 죽음도 술과 깊은 관련이 있고, 한의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그는 이로 인한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두보의 사망 원인에 대해 역사가들은 “불에 탄 쇠고기와 술을 많이 먹고 마셔서 죽었다”라고 말한다. 곽말약(郭沫若)은 ‘이백과 두보’라는 책에서 두보의 사망 원인에 대해 “날씨가 더워 부패한 고기를 먹고 중독으로 사망했다”라고 말한다. 사실 두보의 사망은 그의 지병인 당뇨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에 대해 두보의 시구에서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
당뇨병은 중국 의학에서 ‘소갈병’의 범주에 해당한다. 이 병은 보통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많이 먹게 되고, 소변을 많이 보면서 수척하게 마르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두보는 적어도 그의 2편의 시에서 직접 자신이 소갈병을 앓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 중 하나인 ‘객당(客堂)’에는 “운안현에 체류할 때는 중소로 몹시 고통을 받았다(棲泊雲安縣,中消內相毒)”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중소(中消)는 소갈증을 가리킨다. 소갈은 고대의학에 ‘3소(消)’로 나눈다. ‘의학심오(醫學心悟)’에는 ‘많이 마시는 것은 상소이고, 소화가 빨리되고 많이 먹게 되는 것은 중소이고, 소변이 기름처럼 되는 것은 하소이다’라고 기재돼 있다. 중소는 주로 많이 먹고 배가 빨리 고파지는데 몸은 수척하게 되고, 대변이 건조해지고 혀는 붉고 설태는 누렇게 되는 등의 증상이 있으며 ‘위열(胃熱)이 항성한 것’에 속한다.
두 번째는 ‘원사군과 봄 능에 가다(同元使君春陵行)’에는 “나는 장경병(長卿病)이 많아, 시간이 지나도 조정을 생각한다. 폐는 마르고 목이 심하게 말라, 공손성을 떠돌아 다닌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언급한 ‘장경병’은 무슨 병일까? 사실은 소갈병이다. 중국 전한의 문인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사마상여의 자는 장경이었는데 그는 술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즐겼으며 음식을 무절제하게 섭취했으며 소갈병을 앓았다. 때문에 고대 시 중에 ‘장경병’을 사용하여 소갈병을 대체했다.
당뇨병의 원인은 복잡하지만 지나친 걱정과 일, 음식의 적절치 않음과 음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역시 두보의 생활 습관과 관련이 있다. 두보는 평생 동안 형편이 어려워 유랑했으며 생계가 어려웠다. 두보의 마음은 조국에 보답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집에서는 그를 걱정하고 국가는 그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그는 극도로 초조해 했으며 밤에 잠도 못 자게 됐으며 이는 그의 병세를 더욱 심하게 했다. 당뇨병 환자는 영양을 효율적으로 흡수하지 못해 몸이 마르게 되는데, 그는 장작개비같이 변해가는 그의 몸에 대해 자조하며 ‘마음은 생선의 생식기만해지고 몸은 말라 승냥이와 이리를 겁내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술을 즐겨 당뇨병은 더 심해졌는데 두보는 이 방면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를 만찬에 초대하면 늘 흔쾌히 받아들였고 주머니가 비었어도 술을 계속 마셔 술빚을 많이 졌다. 그는 술의 폐해를 몰랐고 그 결과 폭음으로 몸이 망가져 술잔을 들 힘도 없게 됐다. 이때는 병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는 사람은 몸이 마르고 다리에 힘이 없으며 두 눈은 침침해지고 등이 가려운 증상이 있는데 이런 증상은 두보의 시에서도 보인다. 그는 다리에 힘이 없어 몇 걸음 못 가서 쉬어야 했을 정도로 기력이 쇠약했고, 혈당이 높아져 눈이 침침해졌다. 그는 백내장을 앓았는데 침 치료로도 효과가 없었고, 등이 몹시 가려워 고생했다.
두보는 오랜 병으로 몸이 약해졌지만 부패한 쇠고기를 먹었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는 당뇨병 합병증을 유발하기 매우 쉬운 조건이다. 그가 장사에서 악양으로 가는 길에 거동이 이미 어려워졌으며 혼수상태가 나타났다. 이는 당뇨병 합병증은 케톤산성증을 수반하는 당뇨병성 혼수 또는 심장뇌혈관병의 급성 발작 증세와 같은 것이다.
추대계(僦貸季)와 기백(岐伯)
한의학에는 두 가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하나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계승해 발전하는 문명 이후의 의학의 모습이다. 이는 서양 의학의 현재 모습이 사실상 의성이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것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서양 의학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일직선으로 성장해 왔다. 과거의 발견이나 상식 중 상당수는 지금에 와서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한의학의 기원이 도가 수련에 있고, 수련의 참 의미를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사실상 한의학의 원래 모습과 지금의 한의학의 모습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발전하지만, 때로는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근본적인 지혜가 있기 마련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은 한의학의 원전으로 불리는 서적이다. 황제는 이름이 헌원(軒轅)이며 중국 문명의 시조로 불리고 또한 도교의 시조로도 불린다. 대략 BC 2704년경에 태어나 BC 2697년 왕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고대 왕국의 존재 여부 자체가 베일 속에 있다. 같은 이유로 황제내경의 실제 저자가 과연 누구인지, 황제내경의 내용은 언제 완성된 것인지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타와 편작의 의술의 정수가 현재 남아 있지 않듯이, 황제내경에서 다룬 심신의 높은 경지는 현대인에게 멀기만 하다.
황제내경은 황제가 기백, 뇌공 등 신화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황제내경을 기황가언(岐黃家言)이라고 부르며, 나아가서 의술을 ‘기황(岐黃)의술’로 부르기도 하며 ‘기황’은 중의학의 별칭이다.
기백은 황제의 신하이자 태의로 전해진다. 일찍이 신농(神農) 시대의 명의 추대계를 따라 의학을 익혔으며, 청대 건륭(乾隆) 연간 ‘경양현지 인물(慶陽縣志·人物)’편에서는 ‘기백은 북쪽 사람으로 의술과 맥학에 정통했으며 황제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서의 조상격인 ‘내경’을 편찬해 세상에 내었다’고 서술했다.
황제내경에서 기백을 ‘천사(天師)’로 존칭했다. 장지총의 ‘황제내경소문집주’에는 ‘천사는 기백의 존칭이다. 천이라는 것은 그 천진함을 수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사는 선지자이자 선각자라는 말이다. 도를 말하는 사람은 상제(上帝)의 귀한 것으로 사(師)는 도를 전하고 설교하는 것을 말함이니 기백을 천사라고 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의미는 기백은 천진함을 수양할 줄 알았던 선지자이자 선각자라는 말이다. 기백은 일찍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불사의 약을 신선에게 구하러 흰사슴 12마리가 끄는 강운거를 타고 동해를 유람한 바 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기백은 황제의 신하로서 황제는 기백에게 각종 본초의 맛을 보고 의서를 편찬하라고 명을 했다’고 기재돼 있으며 이에 후세에 전해지는 ‘본초’ ‘소문’ 등의 책이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추대계는 망진, 맥진에 대해 깊이 연구한 인물이다. 노사(路史)에는 ‘신농이 추대계에 명해 색과 맥을 정리하고 관찰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정리해 천하에 이롭게 하고 사람이 그 생을 잘 돌볼 수 있게 하라’고 했다고 기재돼 있다.
‘황제내경 소문, 이정변기론(移精變氣論)’에는 추대계가 망진과 맥진의 서술에 정통했다는 말이 나온다.
황제 왈 “저는 환자를 볼 때 병세의 정도와 예후가 어떠한지를 알고 싶고, 질병의 애매한 것을 판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일목요연한 요령을 알고 싶은데 그런 진단 방법을 제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기백이 대답하기를 “청적황백흑(青赤黃白黑) 5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맥상을 짚는 진단 방법은 고대 제왕이 중시하던 것으로 저의 스승이 제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고대에는 추대계라고 하는 고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제왕이 그에게 색을 보는 법과 맥을 짚는 법을 연구하라고 맡겼습니다. 그래서 추대계는 5색, 맥상과 금목수화토 등의 오행과 사시(四時), 팔풍(八風), 육합(六合)을 서로 조화시켜 그 일정한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변화가 서로 이동해가며 그 미묘한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그 요령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5색은 태양에도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있는 것처럼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다름을 뜻합니다. 맥상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이 허실(虛實)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계속 색과 맥의 차이를 탐구하여 그 요령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고대 제왕은 5색과 사시의 맥이 서로 호응하는 것을 중시했기에 그 미묘한 차이를 관찰했습니다. 정신이 있으면 죽음에서 먼 것이고 생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고대 성왕이 양생의 도를 수양하는 방식입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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