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CIA 출신 마이클 리의 한국 現代史 증언
“94년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했어야”
⊙ 美 502군사정보단, CIA 등 미 정부에서 40년간 근무. 시민권 없던 최초의 CIA 직원
⊙ 1974년 이전까지 對共 수사와 대공 정보활동은 양해각서에 따라 美軍이 주도
⊙ 5·16 후 CIA가 한국 사태에 개입하지 말 것을 미국 정부에 보고
⊙ 황장엽 망명 준비 상황 CIA도 알고 있었다
⊙ 실미도 사건, 황태성 사건, 신상옥-최은희 부부, 김현희, 황장엽 등 직접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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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81세인 마이클 리는 오는 11월에 만 82세가 된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1974년에 한국을 떠나 79년에 미국인이 됐다. 한국인으로서 병역 의무도 마쳤다. 통역 사병 1기 출신인 그는 군에서 제대한 58년에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美) 502군사정보단에서 문관(군무원)으로 근무했다. 미 연방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502군사정보단에서 그가 한 일은 대공(對共) 업무였다. 당시 미군은 <한미양해각서 미8군 G2 정보 훈령 I-65>에 따라 대공 수사, 대공 정보활동을 주도적으로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활동에 따른 비용도 미국 정부가 지출했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주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74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권한을 이양할 때까지 이어졌다.
502군사정보단에 근무하면서 그는 송추 무장공비 사건,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 무장간첩 김동기 사건, 실미도 사건 등을 직접 조사했다. 74년 502군사정보단의 부대 업무가 대한민국 정보사령부로 이관되면서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 정보사령부와 중앙정보부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주저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가고 싶었던 곳은 전(全) 세계의 정보를 주무르는 미 중앙정보국(CIA)이었던 것이다.
미국 이민 후 2년 동안 백화점 점원을 하던 그는 당시 CIA 국장이었고 훗날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에게 편지를 보냈다. 502군사정보단에서 일을 하면서 정보요원이 될 훌륭한 자질을 갖추게 됐는데 자신을 백화점에 두는 것은 인적 자원 낭비이고 미국 정부가 보석 세공을 채석장에 맡기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조지 부시 CIA 국장은 직접 마이클 리를 CIA 직원으로 채용했다. 미국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CIA 직원으로 채용한 최초의 사례였다. 마이클 리는 그 후에도 자신의 채용과 같은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례라는 것이다. 1976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게 시민권이 나온 것은 79년이었다.
CIA에 들어간 후에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502군사정보단 근무 당시와 마찬가지로 북한 관련 정보 수집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 등 전 세계 24개국에서 파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도 86년부터 95년까지 근무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KAL 858 폭파범 김현희씨, 황장엽 선생 등을 직접 만나 조사했다. 그는 이명산(李明山)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북한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CIA의 검열
CIA 근무 26년째가 되던 2002년 2월 그는 정년퇴직했다. 그리고 12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인 2014년 8월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과 사건들을 엮어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책 출간 협의차 한국을 찾은 마이클 리를 만났다. 그는 먼저 자신이 정한 목차를 보여줬는데 기자의 눈길을 먼저 끈 건 목차 바로 앞에 있는 ‘검열(檢閱)’이라고 씌어 있는 부분이었다. 영문(英文)과 국문(國文)으로 돼 있는데 국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 이 책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과 견해와 또는 분석이 저자의 판단이며 미국 CIA나 어느 정부 부처의 공식 입장이나 의견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이 책의 내용 어느 것도 미국정부나 CIA가 진위를 인증하거나 시인한 것이라고 추론하면 아니된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기밀정보의 누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미국 CIA가 검열하였다. 그리고 이 책이 출판되면 CIA의 자료연구 도서에 포함이 된다.>
—아직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은가 봅니다.
마이클 리는 대답을 “허 허” 웃음으로 대신했다.
황태성은 5·16혁명 직후인 1961년 8월 박 전 대통령과 그의 형 박상희의 사위인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나기 위해 남파됐다가 체포돼 63년 12월 사형 당했다.
—황태성은 직접 조사했습니까.
“제가 직접 했죠. 황태성을 체포하게 된 것은 박상희 미망인(조기분)의 신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시는 미군에 대공 용의자들을 조사하는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에 황태성을 502군사정보단으로 데려와서 조사해야 맞는 거였습니다. 우리가 조사를 하려고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을 포섭하러 내려온 간첩 사건이라 정치적으로 민감했어요. 한국 정부가 우리 부대로 인계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제가 부대 바깥에서 황태성을 만나 조사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과 황태성의 관계를 조사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습니까.
“황태성이가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죠.”
—5·16 직후 미국 정부는 박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했습니까.
“5·16 당시 박 대통령의 혁명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있었고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박 대통령의 군사정부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취한 입장은 결정적으로 노터치였어요. ‘한국의 정치적인 현안이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노터치하게 한 것이 CIA예요.”
—박정희 대통령의 사상 문제 이런 데에는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게 CIA의 입장이었다?
“CIA의 입장이 그랬죠.”
—502군사정보단과 CIA는 당시 어떤 관계였습니까.
“조직은 별도지만 미국의 모든 군사정보기관은 CIA의 간섭을 받게 돼 있어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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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23일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 부대원들이 부대를 탈출할 때 이용했던 버스. 마이클 리는 미국 502군사정보단 소속 문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조사했다. |
—1971년 8월 발생한 실미도 사건도 직접 조사한 겁니까.
“실미도 사건도 우리가 주도를 하게 돼 있는데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제가 심문관으로서 개입했어요. 당시 생존자가 딱 1명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최종 심문한 사람이 저예요. 당시 영등포 구청 옆에 적십자 병원이 있었는데 거기로 후송돼 있던 김모씨였죠. 그 사람이 운전수였습니다. 그 사람하고 10분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저와 대화를 나눈 후 30분 정도 있다가 사망했어요. 부상이 심했죠. 그래서 제가 당시 정래혁 국방장관에게 브리핑을 해 줬어요. 나중에 한미(韓美) 양국 간 조율을 통해서 언론에 보도됐죠.”
—영화 <실미도>와 실제는 어떻게 다릅니까.
“영화 실미도를 저도 봤어요. 백동호씨가 쓴 소설에 근거해서 제작했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요.”
—어떤 점이 다르다는 겁니까.
“한국 정부가 실미도 부대원들을 용도 폐기하겠다고 한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다고 하는데 그게 틀린 얘기예요. 그런 얘기를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어요.”
—사형수를 모집했다는 것은요.
“다 사형수예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도 생존자한테 그렇다는 사실을 들었고요.”
—또 틀린 점은요.
“영화에서는 군부대가 동원돼서 유한양행 앞에서 저지했다고 돼 있는데 거짓말이에요. 군부대는 실미도 부대원들이 자폭한 이후에 왔어요.”
—부대에서 사병들까지 죽이고 탈출해서 청와대로 가지 않고 자폭은 왜 했답니까.
“그 부대원들이 탄 차가 펑크가 나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대방동 파출소를 지날 때 파출소 순경들이 잠복했다가 교전을 벌였는데 그 총에 맞아서 우측 앞 타이어가 펑크 나서 더 달릴 수 없었던 거예요. 펑크가 나면서 가로수를 들이받게 되자 ‘이제 우리는 끝났다. 어차피 죽을 운명 아니냐. 끝내자’ 그래서 자폭한 거죠.”
—68년 당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시도, 울진·삼척 지구 공비 침투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을 때를 제2차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당시 미국도 제2차 한국전쟁이라고 봤습니까.
“아니에요. 그렇게는 안 봤습니다. 북한이 제2차 한국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징후가 없었어요, 다만 미국은 한국 안보를 뒤흔드는 중요한 사건으로 봤기 때문에 김신조 사건 이후 한국의 안보를 돕기 위해서 엄청난 경제원조를 더 했고 주한 미군도 더 보강했죠.”
—그때 핵무기도 가져온 겁니까.
“아뇨. 그때는 없었어요.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7명이 체포됐는데 그때 중앙합동심문반이 구성됐어요. 그 당시도 미군이 대공 문제를 관할했기 때문에 합동신문반 반장을 제가 했습니다.”
—77년에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사건이 발생하는데 북한이 두 사람을 납치하려고 한다는 걸 CIA가 알고 있었습니까.
“그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북한이 그분들을 납치하지 못한 데에는 미국 정부의 도움이 있었다는 정도만 밝히겠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CIA가 윤정희-백건우 부부를 북한이 납치하려고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네요.
“….”
—CIA 출신으로서 그런 것들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입니까.
“네.”
‘한국에 간첩이 많다’고 생각해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탈출 후 미국행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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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15일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북한 탈출 63일 만에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신상옥-최은희씨 부부. 마이클 리는 신상옥 감독 부부가 북한 탈출 후 한국이 아닌 미국행을 택한 것은 “김정일이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
—신상옥-최은희 부부도 1986년 3월 북한을 탈출한 후 조사한 것으로 아는데요. 왜 그분들은 북한 탈출 후 미국행을 택했던 겁니까.
“그분들 수기를 보면 조국인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미국으로 간 후 한국으로 한동안 안 나온 이유는 남한에 북한 간첩이 너무 많다고 본 겁니다. 한국으로 가면 김정일이가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거기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죠.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한국에 무척 가고 싶어했습니다.”
—신상옥-최은희 두 부부에 대한 조사는 마이클 리 선생님께서 주도적으로 했겠네요.
“제가 총괄했습니다.”
—김정일이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믿고 해외로도 내보내게 된 동기는 뭐였답니까.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1985년 열린 런던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남궁원 김지미씨를 만나면서 쇼를 했거든요. 그 쇼를 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환심을 사가지고 운신이 자유스러워졌다고 하더군요.”
—어떤 쇼?
“북한은 절대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동반하는 외유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최 여사가 부다페스트에서 담석 수술을 받을 때에도 혼자 다녀와야 했을 정도니까요. 신 감독은 부다페스트와 비엔나, 프라하에 자주 갔지만 늘 경호감시원이 따르는 단독 여행이었어요. 그런데 1985년 런던 국제영화제에 신 감독과 최 여사가 처음으로 부부 동반하여 참석하게 됐는데 그때 남궁원씨와 김지미씨가 신 감독 부부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신 감독 부부가 어찌나 쌀쌀맞게 그들을 대했는지 김지미씨는 섭섭한 마음에 펑펑 울었답니다.”
—그래서요.
“김지미씨가 ‘북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신 감독과 최 여사의 대답이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 활동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북조선 공화국밖에 없다’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남궁원씨와 김지미씨에게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북한을 탈출하기 위한 쇼였던 거죠.”
—미국에 있을 때 신상옥 감독 부부하고는 아주 가깝게 지냈나 봅니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최은희씨하고 저는 의남매를 맺었어요.”
—KAL 858기를 폭파한 김현희씨를 조사할 때 북한 공작원이라는 확신이 든 이유가 뭡니까.
“확신이 들었던 것은 4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김현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억양, 사투리가 100% 모두 북한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CIA 근무할 때 북한용어 사전을 쓴 사람이라 북한 용어를 잘 알아요. 그리고 북한의 요인 사진 수십 장을 제시했는데 김현희가 거기서 자기하고 관련 있는 인사를 식별했다는 거예요. 남한 정부도 모르고 당시에는 저도 모르는데 김현희는 식별을 하는 거예요. 그 결과를 보내줬는데 CIA가 맞다는 거였어요. 그 다음에 북한의 암호 해독을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에서도 제대로 못합니다. 한국에서 풀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그 당시만 해도 나 외에 한두 사람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죠. 그런데 김현희는 북한 암호 푸는 방법을 달달 외우더라고요. 그리고 김현희가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활동을 우리가 파악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 김현희 말이 일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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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20일 망명 후 67일 만에 서울공항에 안착한 황장엽(왼쪽)-김덕홍씨. 미 CIA는 황장엽의 망명 계획을 망명 결행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
—97년 황장엽 선생 망명 사건 때는 미국에 계실 때인데 어떤 신분으로 한국에 조사를 온 겁니까.
“미국 정부 대표단으로 왔죠. CIA라는 말은 빼고요.”
—황장엽이 망명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미 CIA도 미리 알았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미국 정부가 황장엽 선생에게 가졌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요. 이해 바랍니다.”
—한국 정보기관도 대북 정보 수집에 휴민트를 활용하고 있는데 CIA도 휴민트를 많이 활용합니까.
“한국의 군부나 정부가 휴민트의 많은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만 말할게요.”
—대북 정보 수집에서도 미국의 휴민트가 한국보다 더 강력하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그 얼마나 방대한 조직에다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데요.”
영변 핵시설 공습 2시간 전 작전 취소
—94년 클린턴 정부 때 북한 영변 핵시설 폭파 움직임이 있을 때 긴박했죠?
“굉장히 긴박했습니다. 그때는 주한 미국인들 소개 계획도 다 돼 있었고 저도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소개 계획에 동원됐죠. 그런데 다 철수를 해도 부(副)대사하고 저하고 CIA지부장 3명은 남게 돼 있었어요. 대피 훈련도 했고요.”
—왜 핵시설 공습을 안 한 거죠.
“카터 전 대통령하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공습하지 말라고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클린턴 대통령이 공습 폭격 2시간 전에 취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인 마이클 리 입장에서는 그때 폭격이 있었어야 했다고 봅니까.
“했어야죠.”
—한국인으로서는요.
“역시 공습을 했어야죠.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북한이 반격을 하더라도 우리가 입을 피해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은 너무 커졌어요. 지금 만약 우리가 북한을 친다면 그때보다 피해가 더 클 겁니다. 그때 했더라면 호미로 막을 일을 지금은 가래로 막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돼 버렸어요. 그때 반드시 그걸 했어야 해요. 정치적인 계산착오였다고 봅니다.”
마이클 리는 책의 목차 외에 자세한 원고 내용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마이클 리가 쓴 글은 남북 관계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저자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모든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읽어야 할 만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강조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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