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의 걷고싶은 길_섬진강길

醉月 2011. 3. 8. 08:56

 

물을 건너는 방법은 나룻배 하나. 섬진강 양쪽 강기슭을 잇는 줄이 물 위에 선을 그었다. 그 줄을 당겨야 배가 움직인다. 이른바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줄 사공도 없이 여행자의 힘으로 줄을 당겨 한 치 한 치 강물을 접으며 건넌다. 푸른 강은 나룻배를 띄우고 곰살맞게 출렁인다. 아이를 안고 온 젊은 부부는 왔던 물길을 되짚어 간다. 우리는 돌아가는 그들에게 '잘 가시라'는 말과 함께 허공에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길 인사를 전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끼리 나눈 나룻배의 시간에 대한 서로의 배려였다. 여행지에서의 인사란 마음을 여는 마음이다.

 

 

 

길은 강을 따라 흐르고 여행자는 길을 따라 걷는다

 

호곡나루에 내려 산기슭에 달라붙은 흙길을 따라 걷는다. 작은 발걸음에도 흙먼지가 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에서 풀 먹인 호청이불이 사각거리는 하얀 속삭임이 들린다. 댓잎에 물든 푸른 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준다. 물결에 산란하는 햇살이 섬진강 은어떼가 일제히 물위로 뛰어올라 반짝이는 것 같다. 배 없는 나루, 고리실나루터를 지나 뺑덕어멈고개를 오른다. 고개 이름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고갯길은 뺑덕어멈처럼 '뺑덕'거리지 않았다. 그저 산굽이가 그렇게 돌아가니 길도 따라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강이 그렇게 휘감아 도니 길 또한 그 따라 그렇게 감겨 도는 게 아니었겠는가. 옛길은 지금처럼 산을 깎거나 굴을 뚫어 내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희미한 오솔길 하나 생겼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그런 길이었다. 길은 물처럼 흐른다. 호곡나루부터 1시간 조금 더 걸었을까. 두계마을 입구 다리가 나왔다. 날은 저물고 우리는 두계마을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키에 낡은 운동화 배낭엔 물 한 병과 책 한 권.
길을 가다 강가로 내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다. 강가의 독서는 참 낭만적이다.

  

 

봄처녀 새색시 꽃웃음 두계 아줌마

 

두계마을 민박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아줌마는 돌부리해서 잡은 소로 국을 끓여 밥상에 올렸다. 반찬은 갓김치에 꼬들빼기김치, 조기에 감자를 넣고 끓여낸 조기탕이 전부다. 아저씨 아줌마도 그렇게 잡수신다.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을 다 비우고 마을길로 내려서니 골짜기에 고인 동네 가득 햇살이 내려앉았다. 엊저녁에 시집 올 때 이야기를 꺼내 놓은 아줌마는 아예 길 안내를 자처했다. 아줌마 시집올 때 살던 집이 근처에 있다고 하신다. 길은 이끼 낀 돌계단이었다. 그것도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에 돌을 쌓은 것이다. 경사가 얼마나 심했으면 꽃가마가 뒤로 기울어져 하마터면 새색시가 비탈 돌계단에 나뒹굴 뻔했단다. 간신히 가마 문틀을 잡고 바짝 엎드려 봉변은 모면했다. 옛 기억이 봄풀처럼 돋아났을까? 아줌마 눈가에 실주름이 잡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마음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아줌마는 잠깐이나마 스무 살 ‘꽃색시’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줌마는 옛집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여기는 뒷밭이고, 여기는 헛간이고, 이것은 실 뽑던 물레고 저건 곡식 갈던 맷돌이라며 눈길 손길 가는 것마다 옛 이야기를 섞는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먹지도 입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뭉툭한 손끝 이마 주름살 깊은 골마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다 아는 자식들이 엄마 아버지 모시겠다고 하지만 아줌마 아저씨는 마다했단다. 꽃다운 시절 꽃 같은 마음 꼭꼭 숨겨둔 옛집이며 논두렁 개울가, 산수유나무 돌이끼 계단 산모롱이 봄 같이 피어난 돌담 풀 한 포기 어느 것 하나도 남 같지 않은 것이다. 세월의 더께 앉은 옛집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발아래 민들레가 피었다. 밟아도 살아 피어나는 생(生), 땅에 엎드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꽃 위로 ‘봄처녀’ 새색시 ‘꽃웃음’이 번진다. 

 

 

두계마을 집 대부분은 돌담이다. 돌담길 골목도 정겹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이전 세대부터 내려오고 있는 마을 그대로다.

 

  

강가의 아이들은 푸르다

 

대숲이 마을을 비호하고 햇살이 옛집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돌담 골목을 돌아드니 옛 어른들이 쌓아 놓은 돌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대숲이 울타리였고 벚꽃나무가 문패였다. 산수유는 그 옛날 붉은 열매 팔아 아이들 공부시켰던 효자나무였다. 마을을 빠져나온 우리는 다시 섬진강가에 섰다. 투명한 햇볕이 하늘을 닮아 파란빛이다. 물비린내 풋풋한 강가 길에서 푸른 잎 같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섬진강가에 난 자전거 길이다. ‘깔깔’ ‘히히덕’거리는 얼굴 한 가득 봄 닮은 웃음이다. 강물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는데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우리를 스쳐가거나 되돌아오면서 지나친다. 그 짧은 시간에 얼굴을 익혔는지 몇몇 아이들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빨간 다리 건너 가정역에서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까지 가는 증기기관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섬진강 모래바닥에서 건져 올린 재첩 뽀얀 국물에 풋풋한 봄이 가득하다.

 

 

 

가는 길
용산역에서 곡성역 가는 기차를 탄다. 오전 6시50분, 오전 8시5분, 오전 9시5분, 오전 10시15분, 오전 10시58분, 오후 12시50분, 오후 3시5분, 오후 4시25분, 오후 5시25분, 오후 6시15분에 출발한다. 걷기여행 출발지점인 호곡나루터까지는 시내버스(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인 곡성읍내에서 압록 행 시내버스를 탄다. 줄배를 탈 수 있는 호곡나루터 앞에서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면 된다. 시내버스는 1시간에 1대 꼴로 운행돼 시간이 안 맞으면 기다려야 한다. 곡성역에서 호곡나루까지 약 5km 정도 된다. 택시를 타면 1만원 안쪽으로 나온다. 나루터에서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너 길로 올라 우회전, 강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고리실, 뺑덕어멈고개를 지나 두계리 마을 입구 다리가 나온다. 거기서 잠깐 쉬고 약 1km 거리에 있는 두계마을까지 간다. 옛 마을 모습을 간직한 두계마을을 돌아보고 다시 나와 걷기여행의 종착점인 가정역에 도착한다. 가정역 주변에 즐길 것이 몇 개 있다. 섬진강 재첩국을 파는 식당이 있고,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변을 달릴 수도 있다. 하룻밤 묵고 갈 사람이면 바로 전에 들렀던 두계마을(가정역 앞 빨간 다리에서 약 2km 거리)에서 민박을 구하면 된다. 가정역에서 다시 곡성으로 돌아가려면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까지 운행하는 증기기관차를 이용하는 게 좋다. 오전 9시30분. 오전 11시30분. 오후 1시30분. 오후 3시30분. 오후 5시30분에 출발한다.(25분 소요. 어른 4천원). 당일 현장에서 표를 끊을 수 있지만 좌석과 입석까지 마감될 경우도 있으니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게 좋겠다. www.gstrain.co.kr   

 

 

 


여행하기 좋은 시기 : 4~5월

주소 : 전라남도 곡성군 침곡리 호곡나루(출발점) (지도보기
총 소요시간 : 3시간

총 거리 : 7.7km

 

곡성군 호곡리부터 두계리 옛 마을을 돌아보고 가정역까지 걷는 약 7.7km 섬진강 강가 길이다. 호곡나루에서 줄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넌 뒤 걷기 시작한다. 두계마을까지 약 5.3km 거리이고 옛 마을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 나와 빨간 다리가 있는 곳까지 걷는다. 다리 건너 가정역이 걷기여행의 종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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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장태동
여행기자를 거쳐 2003년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살고 있다. 전국을 걸어 다니며 글 쓰고 사진 찍는다. [서울문학기행],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살아 있는 서울․경기], [맛 골목 기행], [서울 사람들], [대한민국 산책길] 등의 책을 썼다. 이름 없는 들길에서 한 번쯤 만났을 것 같은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