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식 습합 명칭 ‘대자재천왕’이 산신 위패
산악신앙의 다른 말은 산신숭배다. 산신숭배는 상고시대부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던 제례의식이다. 한반도에서도 예외 아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첫 작업이 산신숭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기록이 <삼국사기> 제사조에 고스란히 나온다.
신라는 삼산(三山) 오악(五嶽) 이하 전국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를 대사·중사·소사로 나눴다. 대사 삼산은 경주 주변에 있는 나력, 골화, 혈례산으로 수도 서라벌을 방어하기 위한 호국신의 성격이 강했다. 중사는 오악 이하 사진(四鎭)·사해(四海)·사독(四瀆), 그리고 ‘기타’로 구분하며, 전 국토의 방위별 국방 거점 역할을 했다.
소사는 전국의 24명산을 통일신라 이전의 전국 지방세력이 지닌 각각의 신앙을 신라의 사전(祀典)체계 속에 거의 그대로 편입시켰다. 소사의 산신은 지역민의 안정과 단합 외에 국가 통합기능까지 맡았다. 소사의 신으로서 지방 호족세력이 대거 좌정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대흥의 봉수산신이 소정방, 적성의 감악산신이 설인귀, 순천의 해룡산신이 박영규, 순천의 인제산신이 박봉란, 의성의 남산산신이 염흥방 등이 좌정해 있다.
소사의 산신은 장군이면서 민간의 영웅신이라는 특징을 띤다. 특히 소정방과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서 상당 기간 신라에 체류하면서 산신으로 좌정할 정도로 지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의 대사·중사·소사 제전(祭典)은 당나라 <예악지(禮樂志)>에 ‘악진해독(岳鎭海瀆)은 중사이고, 산림천택(山林川澤)은 소사’로 나눈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수도 서라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중사·소사 두 제사지에 포함된 곳이 눈에 띈다. 매우 이례적이다. 바로 속리산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중사 ‘기타’에 속리악(俗離岳, 삼년산군)이 올라 있고, 소사 24명산 중에 가아악(嘉阿岳, 삼년산군)이 올라 국가 주도의 산신제를 매년 지낸 것이다. 속리산이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대체 산신제의 대상인 속리산 산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속리산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침범하지도 않은 산간오지였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속리산 법주사에 국보나 보물이 파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전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곳에 중사·소사의 국행 행사에 모두 포함됐다면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 국행 행사의 대상이 된 산신은 제법 영향력도 컸을 법하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이 지역의 역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후 신라는 한강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당나라와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지정학적 위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백제와 신라, 고구려 삼국이 군사적으로 대치한 접경지역이었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로서는 북으로 진출하는 관문이었고, 특히 신라는 한강진출의 교두보였다. 축성한 뒤에도 소지왕이 두 차례나 직접 순행하고, 삼국통일 직전에는 태종 무열왕이 삼년산성에 머물며, 직접 당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당시로서는 그만큼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실제 이곳은 지대가 그리 높지 않은데도 산성에 올라서면 주변 사방 지세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신라 제사지에 중사·소사 올라 이례적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국행 두 행사에 포함시켜 산신제를 지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특히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뿐만 아니라 신라의 여러 왕들이 다녀간 의미 있는 장소였다. 신라가 명산대천의 제사제도를 정비할 때 속리산을 중사 ‘기타’로 지정한 사실만 봐도 고민한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사실 중사는 전국의 방위별 지역 거점이 되는 오악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오악도 아니고, 더더욱 사진·사해·사독에도 포함 안 됐다. 하지만 뺄 수도 없었다. 고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는 분명했다. 그래서 중사 기타에 포함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중사·소사 지정 이후의 사건이긴 하지만 헌덕왕 시절 신라의 9주 중 4주를 장악하며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신라군이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반란군을 격퇴했고, 또한 후삼국 견훤이 삼년산성을 먼저 점령하며 왕건을 물리친 일 등은 삼년산성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문화재청은 보은 삼년산성과 온달산성 등 주변 7개 산성을 한데 묶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록했다.
그런데 속리산 산신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큰 국행을 매년 두 차례나 지냈으면 당연히 기록이 남아 있을 법한데…. 그 중요한 단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보은현에 자세히 나온다. 일단 보은현 산천조부터 살펴보자.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이라 일컫고 중사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뤄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 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눠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남한강 지류)이 되어 김천으로 들어간다.(후략)’
속리산이란 지명이 신라시대부터 일찌감치 명명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흔히 말하는 속리산 삼파수에 대한 유래도 언급하고 있다. 이어 같은 책 사묘조에 산신에 대한 내용이 소개된다.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寺)는 속리산 마루에 있다. 그 신(神)이 매년 10월 인일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내는데, 신은 45일간 머물다가 돌아간다.’
대자재천왕이 속리산 산신이며, 이를 모시는 사당이 대자재천왕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자재천왕은 도대체 누구이며, 뭘 말하는 걸까?
속리산 산신과 불교의 습합과정이 연상된다. 산신의 위패에 불교식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자재천왕을 살펴본 뒤 법주사와의 관련성도 따져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교에서 대자재(천왕)는 대천세계를 주재하는 신을 말한다. 불교 유마경(維摩經)에 따르면, 한 세계는 중앙의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4대주이고, 그 바깥 주위를 대철위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이것을 일세계 또는 일사천하(一四天下)라 한다. 1,000개의 사천하를 합해 일소천세계라 하고, 1,000개의 소천세계를 합해 일중천세계라 하고, 1,000개의 중천세계를 합해 일대천세계라 한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세계다. 그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속리산 산신의 위패에 적힌 ‘대자재천왕’이다. 산신의 이름 속에 이미 불교가 습합된 모양새다.
<일체경음의>마애수라조에는, ‘마혜수라는 정확하게 마혜습벌라(摩醯濕伐羅)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마혜는 대(大)이고, 습벌라는 자재(自在)이며, 이를 천왕이라 하는 것은 대천세계 중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마혜수라는 또 범왕(梵王), 나라연(那羅延), 마혜수라(摩醯首羅), 셋으로 나뉘고, 이를 ‘법·보·응’ 삼신이라 한다. 마혜수라는 법신이고, 나라연은 보신이고, 범왕은 응신이라 한다. 마혜수라는 신체를, 나라연은 화신을, 범왕은 현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신을 대체로 현세에 광명을 내리는 비로자나불로 해석한다. 보신은 수행의 경과로 얻은 몸을 말하며, 아미타불을 상징한다. 응신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는 몸을 말한다. 법신은 삼신 중 보신과 응신을 나타날 수 있게 하는 모체가 된다.
산신제 대자재천왕제는 매우 음란
인도 시바교에서는 대자재천을 ‘만물의 근본’이라 하고, 세계를 창조한 신으로 삼아 주신으로 신봉한다. 그 만물의 근본이 대자재천의 ‘남성 성기’다. 생명의 탄생을 결정하는 남성의 성기를 주신으로 신봉한 것이다. 북인도 발로사성 위쪽엔 대자재천의 부인인 비마라천녀의 상이 있다. 영험이 있어 많은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찾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신에게 ‘~천녀’란 위패가 많이 사용된다. 비마라(Vimala)는 범어로 ‘묘하게 큰 여성의 성기’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인도 부족국에서는 사람의 성기를 신앙으로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인도 시바교의 성기신앙, 즉 주신인 대자재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될 때 따라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 잔재가 속리산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근대 들어 한국의 산신 연구의 선구자격인 이능화는 그의 저서 <조선무속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법주사 승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대자재천왕제는 매우 음란했다고 한다. 제석날 여러 시중이 모여 제사를 하는데 나무로 남근을 만들어 거기에 붉은 칠을 하여 그것을 들고 춤을 추며 신을 위안했다.’
조선시대 산신제는 매우 음란한 장면이 많이 연출됐다고 여러 기록에 전한다. 산에서 남녀가 산신제를 지내며 뒤엉키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풍기문란한 사건이 많이 발생해 관가에서 이를 단속하고 금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쨌든 속리산 산신제를 지낼 때 남근을 들고 춤을 추던 놀이는 ‘송이놀이’로 전승되어 지금까지 산신제의 주요 행사로 벌어진다. 송이는 남근과 비슷하게 생겨 스님들이 남근을 지칭하는 은어로도 사용했다.
하지만 남근놀이의 유래에 대해서 다른 주장도 있다. 인도 시바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성기숭배신앙도 같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성기숭배는 원래 원시신앙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다는 주장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남녀의 성기 유물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신앙은 한반도에서도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존재했고, 일부 지역에서 남근과 여근이 유물로 출토되고 있다.
단지 속리산에서 남성 성기를 갖고 춤을 추며 놀았던 행사는 속리산 산신이 여신이기 때문에 그 여신을 위로하기 위해 바쳐진 공물의 성격이 크다고 주장한다.
보은문화원 이사이면서 보은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박진수씨는 “속리산 정이품송 앞에서 속리산을 바라보면 속리산 여신 앞에 남성의 상징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정이품송이 남성의 상징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이품송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영락없는 남성의 상징과 같다. 그는 “송이놀이도 사실은 송이가 남근같이 생겼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남근을 갖고 놀다가 너무 노골적이라는 지적에 남근과 비슷하게 생긴 송이로 대체한 행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여성 산신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남근을 공물로 바쳤다는 주장과 맥락이 같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속리산 산신이 여신이기 때문에 남성의 상징을 공물로 바쳤고, 법주사에서 그 행사를 주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원래 산신 행사에 불교가 터전을 잡으면서 습합과정을 무난히 거쳤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신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러 관련 서적 어디에도 속리산 산신이 여신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혹시 원시 모계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성행했던 모계 중심의 성격과 이름이 아직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계사회의 흔적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실체가 없는 산신에 여신이 좌정했다는 구체적 사례는 매우 많다.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뒤 산신이 됐다는 건국신화 이후 모계 중심인 원시사회에서는 여 산신이 일제히 좌정한다. 그 여 산신이 누구인지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뒤이어 남성 중심인 고대국가에 들어와서는 여 산신이 남성 산신으로 바뀌어 좌정하기 시작한다. 산신도 씨족·부족사회에서 국가로 발전하고, 종족 번식의 모계에서 호국·방위로 전환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 패러다임을 따라 그대로 반영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배 모양 절터, 가라앉지 않게 위해 목탑 조성
그런데 법주사 포교국장 무경스님의 설명에 희미하게나마 여 산신의 근거를 엿볼 수 있었다.
“속리산 지형은 악산입니다. 법주사 뒤로는 아홉 봉우리가 솟아 법주사를 감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법주사가 터전을 내린 모양새를 유심히 보면, 전형적인 배 모양입니다. 법주사 옆으로 개울이 흐릅니다. 그 사이로 법주사가 터전을 잡았습니다. 배가 가라앉을까봐 석탑 대신 목탑을 조성했습니다. 지금 한국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을 법주사 중앙에 세워 가라앉지 않게 중심을 잡게 했던 겁니다. 법주사는 속리산 아홉 봉우리가 뒤에서 감싸고 배가 앞으로 전진하는 그런 형세의 터입니다.”
법주사 터가 전형적인 배의 형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배는 여성성이다. 배의 여성성을 설명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배의 생명은 곡선에 있다. 곡선이 얼마나 잘 나오느냐에 따라 배의 성능이 좌우된다고 한다. 곡선은 여성의 상징이다. 둘째, 배 표면의 페인팅 작업은 여성의 화장에 비유된다. 페인팅을 잘 해야 녹 방지와 저항을 줄일 수 있고, 파도와 바람, 햇빛으로부터 배를 보호할 수 있다.
셋째, 항로, 즉 인생을 바로 이끌 남자가 필요하며, 좀처럼 하반신 노출을 하지 않는다. 하반신 노출은 큰 사건과 연결된다. 넷째, 배는 일정시간마다 노폐물을 배출한다. 다섯째, 배는 남성만이 탄다. 배에 여성을 태우면 탈이 난다는 속설이 그래서 생겨났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배 진수식 때, 선박과 진수식장 간에 연결된 밧줄을 반드시 여자가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자궁에서 나오는 아기의 탯줄을 끊는 행위와 똑같이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주사 무경스님의 설명에 속리산 산신은 전형적인 여 산신이었던 김제 모악산 금산사와 양산 영축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와 유사점이 발견됐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륵신앙인 점이다. 미륵신앙은 현세보다 미래를 중요시한다.
법주사 터가 배 형세라는 것은 반야용선을 상징한다. 반야용선은 불교에서 차용한 샤머니즘 용어이며,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를 가리킨다. 이는 혼란한 현세를 극복하고 미래를 밝혀줄 미륵불을 상징한다. 미륵불은 혼란스런 상황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강력한 왕권중심사회에서는 그 힘을 잃는다. 금산사같이 백제 유민이 미래를 기약하는 이념이 필요한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지만, 속리산 법주사는 신라 땅으로서 삼국을 통일한 마당에 더 이상 미륵의 존재는 필요 없게 됐다. 따라서 법주사의 미륵신앙도 자연 시들해진다. 이에 맞는 현세와 진리 추구 자체를 중시하는 비로자나불이나 사상적 통일을 꾀하는 화엄종이 슬그머니 미륵불을 대체한다.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앙의 대상도 바뀌는 것이다. 산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법주사 추래암 마애불 옆 창건설화 관련 마애석각
법주사 무경스님은 “절이 기존 사상과 이념을 유지하느냐, 대중들에게 맞춰 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 지역과 주민들의 요구에 맞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인기 있는 부분만 살아남는 건 진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속세를 떠나 법이 머무는 자리라며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의 뜻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8세기 중엽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건한다. 이때부터 미륵신앙으로 변한다. 지금 미륵대불도 그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 절이나 산 이름에 미륵·용화·도솔 등이 있는 것은 100% 미륵신앙과 관련 있다.
그런데 8세기 중엽이면 신라가 이미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안정을 꾀하고 있을 때인데 다시 미래를 지향하는 미륵신앙이 싹 튼다는 건 조금 논리적·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이에 대해 무경스님은 “우리 민족의 산신신앙은 내세관과 밀접한 관련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내세관은 항상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좋은 복을 받아 태어나서, 죽어서도 좋은 세상에 가기를 바라는 기복신앙을 매우 신봉했다. 사후세계와 출생 전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원시신앙인 산신신앙은 기복신앙으로 발전했다. 이 산신신앙이 기복신앙의 성격을 띤 채 불교와 습합하고, 이에 따라서 한국에서 지장보살과 비로자나불이 지배적인 불상이 됐다는 것이다. 산신과 불교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는 일종의 산신의 성격 규정이기도 하다. 또한 그 성격에 맞춰 각 절마다 불상을 모시고 있다는 설명이다. 속리산 산신 대자재천왕의 정체성과 그 여성성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되는 듯했다.
산신기도 관련 이성계의 일화도 속리산에서 구전된다. 법주사 상환암 도암스님은 “이성계가 조선 왕으로 즉위하기 전 속리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산신의 계시를 받고 조선을 개국했다”고 말한다.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산신에게 기도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도암스님은 또 “속리산 상환암에 민간에서는 특히 영검한 산신이 머무는 것으로 알려져 얼마 전까지 고시생들이 제법 기거했다”고 덧붙였다. 세조는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와 속리산 산신을 만나 병을 고쳤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은 ‘속리산 천왕봉에 천왕사라는 사당을 두어 산신제를 거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산신숭배는 왕조에서나 민간에서 각각의 성격에 따라 실체는 뚜렷하지 않지만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왕조에서는 국가수호나 왕조보존과 같은 이념과 가치로, 민간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기복신앙과 같은 형태로 ‘다른 가치·같은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려왕조의 풍수지리설은 산악숭배의 또 다른 형태라고 설명한다. 산신의 좋은 기운을 받은 땅이 명당이고, 그 명당은 바로 왕조의 텃밭이라는 거다. 명당의 개념은 민간에도 그대로 적용돼,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신신앙이든, 풍수지리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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