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국의 山神_13 양산 영축산

醉月 2017. 4. 2. 01:00

 ‘변재천녀’ 산신의 불교 습합과정 자세히 나와

<삼국유사> 여러 군데서 설명… 해석은 서로 달라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 vs 연꽃에 앉아 비파 타는 불교 최고 여신

<삼국유사> 피은 제8 낭지승운 보현수(朗智乘雲 普賢樹)조에 영축산이란 지명과 영축산 산신이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다. 역사서에 기록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영축산(靈鷲山)에 이상한 승려가 있었다. 지통이라는 상좌승이 있었는데, 까마귀가 와서 울며 말했다. “영축산으로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 지통은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 골의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보현대사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한다.” 이에 계를 주고 나자 그는 사라졌다. 그러자 지통은 마음이 확 트이고 지증이 두루 통했다.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승려를 만나 낭지법사가 사는 곳을 물어보니, 그가 말했다.

“내가 낭지다. 지금 법당 앞에서 까마귀가 와서 성스러운 아이가 법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곧 당도할 것이니 나가 맞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알려 주었으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가라 일러 주고 나에게 너를 맞이하라고 일러 주니, 이 무슨 상서로움인가? 아마 산신의 은밀한 도움인가보다.”

전하는 말에는 산신을 변재천녀(辯才天女: 불교 최고의 여신이며 흰 연꽃에 앉아 비파를 타는 모습을 하고 있다)라 한다. 영축산 동쪽에 태화강(太和江)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중국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용의 복을 심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용연(龍淵)이라 한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인데, 두 성인이 옷을 걷고 스승으로 섬겼으니 낭지법사의 도가 고매함을 알 수 있다.’

낭지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던 법흥왕 14년(527), 영축산에 들어간 뒤 135년이 지난 문무왕 때까지 활동한 전설적인 승려로 알려져 있다. 원효(617~686년)가 항상 낭지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 것으로 전하는 원효의 스승이다.

같은 책 연회도피 문수첩(緣會逃名 文殊帖)조에도 나온다.

‘고승 연회가 일찍이 영축산에 숨어살며 늘 <법화경>을 읽고 보현관행을 닦았다. 원성왕(재위 785~798년)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그를 불러서 국사로 삼고자 했는데, 법사는 그 말을 듣고 암자를 버리고 달아났다. 길에서 만난 한 노인이 “법사의 이름은 여기서도 팔 수 있는데 왜 힘들게 멀리 가서 팔려고 하십니까? 법사야말로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

무시하고 길을 가는데 또 다른 노인이 말했다. “앞선 그분은 문수보살인데, 어찌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까?”

연회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랍고 송구스러워하며 급히 노인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며 말했다.

“보살님의 말씀을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돌아왔습니다만 시냇가의 그 노파는 누구신지요?”

노인은 “변재천녀이시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왕의 사자가 조서를 가지고 부르러 왔다. 연회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을 알고는 조서에 응하여 대궐로 나가니 왕이 국사로 봉했다.’

영물인 용은 불교에서도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데리고 서방 극락정토에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영물인 용은 불교에서도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데리고 서방 극락정토에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산신과 불교의 신 보살은 서로 도와

우리 전통 샤머니즘인 산신과 외래 종교인 불교의 전형적인 습합과정을 자세히 보여 준다. 영축산 산신인 변재천녀가 불교의 한 신으로 좌정한 장면이 몇 군데서 소개되고 있다. 전혀 거부감 없이 서로의 지위를 오가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삼국사기>권 제32 잡지 제1 제사조 ‘3산·5악 이하 (전국)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한다’에 영축산 인근 우화(于火)산이 소사에 등장한다. 대사·중사·소사는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한다. 우화는 지금 양산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불산의 옛 지명이다. 야트막한 우불산 (산)신사는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소사로 지정된 시기는 대략 신문왕 5년(685) 전후로 추정한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영축산은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그 시기나 이미 그 전에 지명이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 영축산과 통도사의 창건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축산 동쪽의 우불산 산신사는 불교 세력이 워낙 강한 통도사의 산령각과 별도로 국가 주도적인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그 주변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축산의 지명유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영축산은 원래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현 라지기르)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을 번역한 이름이다. ‘기사’는 독수리를 가리키고, ‘굴’은 머리를 의미한다. 산꼭대기가 독수리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독수리가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이 산이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영축산으로 명명된 것이다. 부처님이 이 산 밑에서 <법화경> 설법을 상당 기간 했다. 영축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통도사 창건도 필히 파악해야 한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창건했다.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제5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 나오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진골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장은 태몽부터 남달랐다.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고, 석가세존과 생일이 같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재상에 임명하기 위해 부르는 왕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바쳐 계율을 지키려고 하자, 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자장은 꿈에 문수보살을 알현하고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아 귀국했다. 왕은 칙서를 내려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승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해 주관하게 했다. 자장은 불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자장의 명성에 힘입어 나라 안의 사람들이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됐다. 또한 머리 깎고 승려 되기를 청하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자장은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자장의 도구(道具)와 옷감, 태화지의 용이 바친 오리 모양의 목침, 석존의 가사 등과 함께 모두 통도사에 있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져와 모셨다는 금강계단은 스님이 되기 위해 계를 받는 곳이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져와 모셨다는 금강계단은 스님이 되기 위해 계를 받는 곳이다.
부처 설법한 인도 영축산 그대로 따와

자장(590~658년)이 통도사를 창건한 터가 바로 영축산 자락이다. 한자로는 신령스런 독수리가 산다는 곳이다. ‘취(鷲)’가 ‘축’으로 된 건 불교식 발음 때문이다.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불리던 명칭도 2001년 지명위원회를 열어 영축산으로 최종 확정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설법한 산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사는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하늘의 제왕이 있다면 땅과 물의 제왕도 있다. 땅은 사자와 호랑이, 물은 용이 제왕이다. 영축산은 독수리와 용을 모두 품고 있다.

통도사 서운암 성파 큰스님은 “산과 물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산이 높을수록 물이 많다. 서로 비례관계다. 산 못지않게 물도 중요하다. 독수리는 맹금 중의 맹금이고, 육지의 사자는 맹수 중의 맹수다. 사자가 한 번 짖으면 100가지 짐승의 뇌파가 파열된다고 한다. 그만큼 강렬한 소리다. 그 사자가 내는 소리인 사자후는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된다. 최고의 법도량인 것이다. 용은 신비스럽고 영적인 동물이다.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을 상징한다. 반야용선이 그 예다. 이와 같이 영축산은 하늘과 땅, 물의 제왕을 모두 품고 있는 최고의 터”라고 했다.

성파 큰스님은 “산지명당 오대산 월정사, 야지명당 영축산 통도사”라고 터에 대해서 강조했다. 첩첩 쌓인 산 중에 최고의 사찰은 월정사와 상원사이고, 평평한 터 중에서는 영축산 통도사가 단연 으뜸이라는 말이다. 땅은 한자로 ‘地’라고 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土(흙)’는 ‘乙(새)’에 달렸다는 의미가 함축된 말이 ‘地(땅)’이라는 것이다. 새에 힘 ‘力’을 보탠 글자가 ‘也(야)’라고 설명한다. 다르게 표현해서 ‘토력(土力)은 전어을(全於乙)’이라는 설명이다. 땅은 오로지 새에 달렸다는 의미다. 그 새는 하늘의 제왕 독수리인 것이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땅을 내려보며 가장 좋은 터와 편안하게 먹잇감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골라 안착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신령스런 새로 여겨졌다. 따라서 통도사는 시공을 초월한 터라고 짐작된다.

이같은 설명은 통도사(通度寺)란 명칭과 무관치 않다. 통도사는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 중의적 개념이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과 불교의 최고 도량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 수양을 해서 득도한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통도사 교무국장 진응 스님도 “고대는 풍수사상이 종교보다 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종교보다 상위의 개념이었을 것 같다. 땅에 대한 신비적 영험성을 불어넣어 종교에 힘을 보탰을 가능성이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통도사 터의 구룡지 전설만 해도 그렇다. 아홉 마리의 용이 이 땅에 살았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차치하고 일단 신비성으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다. 영물인 용은 다양하게 설명된다. 물의 신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한다. 들보와 법당에 용의 화신이 새겨져 위엄과 신비를 더한다. 더욱이 용이 끌고 가는 배인 반야용선은 서방 극락정토 성불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용으로 화하기도 한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불어넣는 주체가 바로 용인 것이다”고 설명했다.

통도사 창건설화를 간직한 구룡지 옆에 통도사 삼성각과 산령각이 있다.
통도사 창건설화를 간직한 구룡지 옆에 통도사 삼성각과 산령각이 있다.
구룡지의 9마리 용의 의미도 예사롭지 않아

여기서 잠시 통도사 구룡지 전설을 살펴보자.

‘자장이 통도사를 지으려고 할 때 그 터는 큰 연못과 늪지였다.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자장이 주문과 경을 읽으며 용들에게 연못을 떠나라고 했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자장이 종이에 火자를 써서 하늘로 날리며 법장으로 물을 저으니 물이 끓어올랐다. 용 세 마리가 죽었다. 그것을 집어던지니 부딪친 바위에 피가 묻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용혈암(용피바위)이라 했다. 용 다섯 마리는 통도사 남서쪽 골짜기로 달아났다. 그곳을 오룡곡이라 한다. 마지막 한 마리는 눈이 멀어 절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면서 살 만한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지금 대웅전 바로 옆의 연못이 바로 그곳이다.’

사찰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용들은 대개 선룡(善龍)인데 반해 통도사는 악용(惡龍), 독룡이다. 우리 전통신앙에서 용은 신비스럽고 상상 속의 영물로 대표된다. 또한 물의 제왕으로 받들어 신으로 모신다. 그래서 용왕굿, 용왕제, 용신제, 토룡제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통도사의 용은 악신으로 출현한다. 영물인 용이 어떻게 악과 독으로 화할 수 있을까. 이는 전통신앙인 용신과 외래 종교인 불교가 한바탕 갈등과 충돌을 벌이는 형국 외 다른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 상류는 원래 신라시대 용신제를 지내는 가야진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전통 용신 신앙이 매우 강했던 곳이다. 따라서 구룡지의 전설은 초기 불교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전통 신앙과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용 한 마리가 남아 통도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좌정한 것은 결국 전통신앙과 선진 외래 종교인 불교의 습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그런데 왜 하필 용이 아홉 마리일까. 분명 의미가 있을 법하다. 주역에서 1, 3, 5, 7, 9는 양수다. 짝수는 음수다. 우리가 수학적으로 배우는 개념과 조금 다르다. 먼저 아홉 마리 중 세 마리를 뜻하는 3이란 숫자는 주역에서 가장 완벽함을 상징한다. 동양의 삼재사상인 천지인을 표상하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포함한 전체의 의미로 쓰인다. 또한 3은 1(양수)과 2(음수)를 더한 것으로, 양과 음을 모두 포함한 완전한 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세 마리의 용이 죽었다는 의미는 전통신앙이 불교에 자리를 내주고 타협을 이뤘다는 얘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어 5는 소우주로 인간을 나타낸다. 5는 1에서 10에 이르는 중간수이며, 주역의 오행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네 방향과 중심을 합하여 보편성을 상징한다. 다섯 마리의 용이 영축산 골짜기로 갔다는 얘기는 영축산이 불법 도량을 펼치는 우주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통도사 수호신으로 남은 한 마리는 전통신앙이 불교와 완벽한 습합을 이뤘다는 해석이다. 사실 구룡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9는 완벽한 숫자인 3의 제곱으로 불후의 숫자다. 양이 완성된 수로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지상낙원을 나타내는 가장 높거나 가장 많은 의미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9는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의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9란 의미는 단순하지 않으며, 구룡지의 전설도 예사로 생긴 게 아니다.

성파 큰스님은 여기에 “상칠하이(上七下二)”로 덧붙여 설명했다. 소우주인 인간은 가장 완벽한 양수인 아홉 개의 구멍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상체엔 일곱 개의 구멍이 있으며, 하체엔 두 개가 있다. 상체의 일곱은 대우주를 나타내며, 그 자체로 북두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불교에서 7은 상승의 수이면서 지고천(至高天)의 중심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축산과 통도사 창건설화 중의 하나인 구룡지의 의미가 사뭇 그렇게 깊고 깊은 맥락이 있는 것이다.

전통신앙의 불교 습합과정은 용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산신으로 언급됐던 ‘변재천녀’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면 과연 변재천녀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대 신라사를 전공한 경북대 사학과 문경현 명예교수는 “변재천녀는 하늘에 있는 천신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산신으로 보면 된다. 보통 ‘天’자가 붙으면 최고 산신으로 평가한다. 산신에 천자가 붙은 산신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쉽게 말해서 족보 있는 산신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말했다. 산신에 천왕 호칭이 붙은 산은 지리산 ‘천왕할미’ ‘성모천왕’, 속리산 ‘대자재천왕’, 팔공산 ‘공산천왕’ 혹은 ‘공산대왕’, 태백산 ‘태백산천왕’, 가야산 ‘정견모주’ 혹은 ‘정견천왕’, 비슬산 ‘정성천왕’ 등이다.

그런데 그 산신이 불교의 신(불교에서는 신의 개념보다는 보살이라 한다) 중에서 한 위로 좌정해 있다. 같은 이름 다른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신들은 모두 불교의 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통도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가람각(伽藍閣)이 있다. 통도사 터를 지키는 땅의 신이다. 우리 전통의 신이 불교의 신의 한 위로 좌정해 있는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 뒤 제일 위쪽엔 삼성각(三聖閣)과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보통 삼성각이나 산신각 하나만 있는데 말이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칠성신, 독성신 세 위의 신이 봉안돼 있다. 불교 자체에도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성파 큰스님이 유일신 사상과 다신사상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1 원효와 산신의 전설을 간직한 천성산 내원사 산령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과 절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2 통도사 산령각에 있는 산신도. 3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 영정이 개산조당 해장보각에 모셔져 있다.
1 원효와 산신의 전설을 간직한 천성산 내원사 산령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과 절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2 통도사 산령각에 있는 산신도. 3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 영정이 개산조당 해장보각에 모셔져 있다.
유일신은 통일, 다신은 다양성 인정

“지금 지구상에는 인류의 양대사상이 여러 개 있다. 다신사상과 유일신 사상도 그중의 하나다. 유일신 사상은 오래 가고 조금 크다. 유일신 사상은 극단 논리와도 통한다. 지배하면 자유 평화가 있고, 지배당하면 자유와 평화를 잃는다. 그래서 ‘잃을래, 누릴래’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십자군전쟁 등 전쟁발발의 원인의 되기도 하지만 통일천하를 이루는 사상이 되기도 한다. 유일신 사상은 이동하는 유목민족에게서 나왔다.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는 유목민들은 원주민들을 물리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다신론은 농경민족에게서 나타난다.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거주하며 땅에 의존해서 산다. 오래도록 자식 낳고 세세생생 생활해야 한다. 자연발생적 지방자치가 돼야 유지된다. 구성원들은 거기에 동화해야 산다. 지방의 어른이 규범을 알아서 처리한다. 다분히 타협적이다. 타협해서 손실을 최소화한다. 외래 종교인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타협하며 손실을 최소화했다. 산신과 목신, 용왕신, 물신 등을 전부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지금 그 토속신들은 전부 불교신들이 됐다. 이들도 깨치면 부처가 된다. 산신에 또 다른 인신(人神)이 들어간 것은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갖다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도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 수도, 악용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칼을 예로 들면, 일반적으로는 살인검이지만 잘 사용하면 활인검도 된다. 인간이나 위정자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신을 써 먹는다고 할 수 있다. 잘 쓰면 괜찮다. 인신은 있다고 인정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 산신이 있나 없나 따질 게 아니다. 힘센 논리가 이기는 논리라는 말과 같다.

다양한 신은 자성(自性)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한다. 다신이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고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잘 알 수도, 잘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양한 신을 통해 항상 자신을 돌아보라고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신이나 산신이나 실체를 밝힐 이유도 없지만 부정할 이유도 없다. 산신이나 땅(토지)신을 통해 자신을 보고 부처가 되고, 성불하면 된다.”

산신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산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체적이다. 특히 영축산이 있는 영남알프스엔 천성산, 재약산, 가지산 등 알려진 산신만 해도 제법 된다. 재약산은 천황의 거주처라고 해서 천황봉이라는 신화도 전한다. 원체 좋은 터이고, 가야시대부터 산신제와 용왕제를 올리던 곳이다.

영축산은 자장으로, 통도사로 통하지만 인근 내원사가 있는 천성산은 원효로 통한다. 원효 관련 전설은 신라 오악인 대구 팔공산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원효가 팔공산으로 가기 전에 오랫동안 수도했던 곳이 천성산이라고 한다. 천성산 내원사 산신은 원효와 관련해서 특별한 유래를 지닌다. 천성산 산신의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73년(신라 문무왕 13) 원효대사가 참선에 들어가 중국을 바라봤다. 태화사라는 절에 폭우가 내려 1,000 대중이 흙더미에 묻힐 순간에 있었다. 이에 원효가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이라고 쓴 큰 판자를 그곳으로 날려 보냈다. 그곳 대중들은 공중에 떠 있는 판자를 보고 신기하게 여겨 모두 법당에서 뛰쳐나왔다. 그 순간 뒷산이 무너져 큰 절은 매몰됐다. 이 인연으로 1,000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찾아와서 원효의 제자가 됐다.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을 나와 현재의 산신각 자리에 자취를 감췄다. 이에 원효는 이 일대에 내원사를 비롯 89개의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정상 부근에 큰 북을 달아 제자들을 모아 설법을 했다. 이때 <화엄경>을 가르친 자리를 화엄벌이라 하고, 북을 친 곳을 집북봉이라 했다. 또 산을 오르던 제자들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자, 원효는 산신을 불러 칡넝쿨을 전부 없애게 했다. 그래서 오늘날 천성산에는 칡넝쿨이 없다고 한다. 이후 원효 밑에서 수도한 1,000명의 제자들은 모두 성인이 됐다고 해서 천성산(千聖山)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천성산 산신각은 전국 유일하게 산·절 입구에 자리

천성산 전설은 이어 팔공산에까지 연결된다. 이 중 성인이 된 8명의 제자가 팔공산으로 갔다고 해서 팔공산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천성산 산신각에는 전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다른 곳의 산신각은 전부 대웅전 약간 뒤에 자리 잡은 반면 천성산 내원사 산령각은 산과 절 입구에서 원효를 맞았다는 바로 그 자리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천성산과 원효 관련 전설의 진실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산과 절 입구에 있는 산령각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예로부터 ‘내호조왕(內護竈王) 외호산신(外護山神)’이란 말이 전한다. 조왕신은 집안을 지키고, 산신은 그 지역 일대를 보호한다는 말이다. 무속에서는 지구촌 ‘산왕대신(山王大神)’의 총수는 인도 영축산의 산왕대신이며, 이 산왕대신을 다스리며 지구촌 중생들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부처님이 바로 수미산정 산왕부처님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도 불교의 다신론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수많은 산신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영축산은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의 신성한 산 이름을 그대로 따온 불보종찰 통도사가 있는 곳이다.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도 부처가 깨달았던 인도 보드가야에서 그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라지기르의 영축산과 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인도 영축산의 신성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양산 영축산은 원효의 스승 낭지와 자장·원효 등 고대 신라 최고의 승려들이 수행한 장소다. 그곳에서 산신이 이들을 맞으며 수행과 득도를 도운 것으로 전한다.

영축산 산신 변재천녀와 통도사 보살 변재천녀, 같은 이름의 다른 두 신이다. 독수리와 용, 다른 이름의 같은 역할을 했던 토속신앙이다. 이들이 지금 수천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산신으로, 통도사 창건신화로, 전설로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비록 역사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신화와 전설에는 아직 면면히 살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