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는 태초의 신이자 무속 최고 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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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할미·성모천왕 등은 여신, 반야·법우화상은 남신… 시대 따라 명칭도 변화
한국의 산에는 신(神)이 있다. 어떤 신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종교전문가와 무속인들은 “한국의 모든 봉우리마다 산신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언제부터 신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역시 없다. 역사적으로 대충 추정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신은 고대사회에서 자연신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던 고대사회는 천둥·번개·폭풍우 같은 자연현상, 그리고 해와 달·별 같은 자연의 신비스런 순환 하나하나에 전부 위압감을 느끼고, 이들에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인들은 이들에 각각 제사를 지냄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지금 이러한 형태를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으로 부른다. 이를 구체적으로 동물신·식물신·자연신·지신(地神) 등의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천신은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다. 바람·비·구름 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전부 통제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까지 관장한다고 봤다. 천신을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 여겼다. 그 천자가 사는 곳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산의 봉우리였다.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단군도 하늘의 아들이었고, 그 단군이 죽은 뒤 아사달의 산신이 되어 태백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됐다고 전한다.
종교학자들은 신화와 샤머니즘·토테미즘을 종교의 직전단계로 여긴다. 종교의 직전단계는 기존에 미신으로 치부됐던 민속신앙과 무속신앙, 산신신앙을 전부 포함한다. 이러한 신앙에서 조금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한 신앙이 종교다. 역으로 보면 민속신앙과 무속·산신에 그 민족의 정신과 혼령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신으로 터부시하는 건 우리 민족과 수천 년 동고동락해 온 정신의 자취를 없애는 일이라고 종교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의 산신은 원래 천신(天神)이었고 천자였던 단군에서 시작한다. 천신숭배에서 산신숭배, 그리고 자연신에서 인격신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순간이다. 산신은 천신의 분신 내지는 화신이었다. 산신을 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천신이 강림한 곳이 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건국신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단신신화가 그렇고, 신라의 박혁거세도 천상에서 산악으로 하강했다고 전한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토착신들을 모셔 왔다. 현재까지 이들을 총망라해서 파악한 바로는 불교·무속·문헌신에 나온 신은 126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신들이 등장한다. 중국이나 인도의 신화에서 유래한 신과 고조선 이래 왕조에서 숭상했던 신들까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산을 다니다보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신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특히 산신은 이 126신에 포함되지 않은 신이 절대 다수다. 이들은 인간으로 살다 신격화된 인물도 상당수다. 앞으로 ‘한국의 산신’ 연재를 통해 우리가 흔히 산에 가서 볼 수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독성각, 삼성각 등에 나오는 신들은 누구이며, 왜 신이 됐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지리산부터 시작해서 수천 봉우리의 모든 산신을 두루 섭렵할 수 없지만 우리가 들을 수 알 수 있는 정도까지 최대한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 <편집자註>
신라통일 후 오악으로 산악숭배 정착
지리산은 누가 뭐래도 한국 최고의 명산 반열에 속한다. 일부 풍수지리전문가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안산(앞산의 개념)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의 안산이 지리산이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만큼 지리산은 명산이다.
지리산도 고대로부터 산신으로 숭배됐겠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고, 삼국시대부터 조금씩 등장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요한 산악숭배대상으로 정착한다. 산악숭배는 중국의 오악과 거의 동일하다. 중국의 오악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나라 때 오행사상과 더불어 중원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경 근처에 있는 산을 중심으로 오악을 정했다. 일종의 황제의 영토를 선포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그 오악에는 오행사상과 유불선 3교를 융합한 민간신앙을 숭배하는 장소로 활용하면서 민심을 얻는 통치 도구로 삼았다.
중국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중국의 오악을 그대로 옮겨와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즉 정치적 요구에 따라 산악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오악은 왕조에 따라 영토의 경계에 따라 다소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리산은 언제나 남악(南嶽)이었다.
신라의 오악은 새로 편입된 지역의 호족 세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동악인 토함산은 석탈해가 산신으로 모셔진 석씨 세력의 상징적 산이었다. 중악은 압독국이 있었던 팔공산 지역으로 신라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는 산이었다. 남악인 가야산은 가야세력을 상징하며, 서악인 계룡산은 백제세력을, 북악인 태백산은 고구려 세력을 염두에 두고 오악으로 정했다. 오악의 제사를 매개로 각 지역 세력을 신라에 편입하고 의례의 주관자인 국왕의 권위를 내세웠다.
국가 제사의 대상이었던 지리산 산신은 마고, 성모, 천왕, 성모천왕으로 불리는 인격적 여성신이었다. 나라에서는 제사를 통해 신라의 사회적 안정을 다지려는 통치행위였다.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눠서 大祀·中祀·小祀로 삼았다. (중략) 중사 오악 東은 토함산이며, 南은 지리산(당시엔 地理山)이다. 西는 계룡산이고, 北은 태백산이며, 中은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이다.’
위 내용은 <삼국사기> 권32 제사지에 나온다.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신라의 9주가 창설된 신문왕 5년(685) 직후로 추정한다. 중사(中祀)로서 지리산에 제사 지내는 산신은 성모, 천왕, 성모천왕, 마고 등이었다.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편에도 나온다.
‘진평왕조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다. 현행(顯行)이 많은 여자로 안흥사에 거주했다. 새로이 불전을 수리하려다 힘이 미치지 못했다. 꿈에 한 여선(女仙)이 자태가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주옥으로 수식하고 와서 위로하면서 가로되, “나는 선도산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뻐하여 금 십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마땅히 내 자리 밑에서 금을 취하여 주존삼삼을 분식하고 벽상에는 오십삼불과 육류성중과 제천신과 널리 오악신군을, 그리고 매년 춘추이계의 십일에 선남선녀를 모아 일체의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풀어 항규를 삼아라” 했다. 지혜가 놀라 깨어 무리를 데리고 신사좌하에 가서 황금 일백육십 양을 파서 얻어 일을 추진 성취하니 모두 신모의 지도한 바에 의한 것이다. 그 사적은 있으되 법사는 폐지됐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서 이름은 파소(婆蘇)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부왕이 편지를 소리개발에 매어 부쳐 가로되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했다. 파소가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으니 이 산에 날아와 멈추므로 드디어 집으로 와선 지선이 됐다.’
신도산 신모는 원래 경주 선도산의 산신이다. 중국 제실의 딸로서 파소(婆蘇)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일찍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가 중국의 삼산오악제도를 차용하면서 중국계 산신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토함산 선도산 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가져와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마고산신(할미)으로 변형된다. 마고는 사실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의 지리산 산신의 전형인 셈이다. 보통 마고할미 전승은 해남·강진·옹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 내려오는 지역전설로서 거인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제주도의 선망대(설문대) 할망이나 안가닥 할미 전승도 이에 속한다. 내용이나 성격상 여성거인전승(女性巨人傳乘)으로 통칭한다. 거인전승은 단순한 지역전설로서 별다른 서사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고할미의 키나 덩치가 커서 깊은 바다가 무릎이나 속곳에 닿았고, 흙을 모아 산과 섬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서해안과 남해안에 폭넓게 분포하던 마고할미 전승이 지리산에 나타난다.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의 성모천왕이라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모천왕은 마고할미, 노고로도 불리며, 이후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로 변신한다.
성모천왕은 몇 군데 기록이 전한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과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지리산의 옛 엄천사에 법우화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산간에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홀연히 이상스럽게도 물이 불어 그 근원을 알고자 천왕봉 꼭대기에 올랐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말하고, 인간세상에 귀양 내려와 군과 인연을 맺고자 물의 술법을 적용했다 하면서 스스로를 중매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사는데, 딸 여덟을 낳았으며 자손이 번식했다. 모두 무술을 가르쳤는데 금방울과 부채를 쥐고 춤을 추고 아미타불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무업(巫業)을 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지리산에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해서 접신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이 어울려 같이 웃고 같이 즐기며 같이 우는 모습과 유사한 장면이 연상된다. 바로 신의 인간화된 모습이다. 신도 인간처럼 부부인연을 맺고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산다는 신의 인간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모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집 여인으로 비춰진다. 여기서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지리산 산신에 도교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도교의 최고 산신인 벽하원군은 두 보조자와 6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여신이다. 8명의 딸을 낳은 성모천왕과 벽하원군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중국 오악에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산에도 도교와 불교가 그대로 나타난다. 도교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중국에서 도교는 거의 서민종교이면서 민중신앙이다. 도교는 노자와 황제를 교주로 삼으면서 노자의 도가와는 조금 다르다. 후한 말기 장도릉이 창시한 오두미교라 불린 도교는 7세기 당나라 때 번성기를 맞는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는 그 이후에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는 신라에 4세기 후반에 들어왔다.
신인화된 여산신은 중국 도교와도 비슷
따라서 애초 마고에서 시작된 지리산 산신은 <삼국유사>에 성모로 변한다. 그 성모는 신라시조인 혁거세와 왕비인 알영을 낳은 신모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모신앙은 통일신라기에 지리산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고려시대에 지리산 성모천왕이라는 신격을 얻게 된다. 그 영향력은 불교국가인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설과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설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간주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바로 ‘마고지나(麻姑之那)’라는 것이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신빙성은 둘째 치고라도 어쨌든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한국의 126신 중에서 마고는 무속신 중에서 최고의 신으로 분류된다. 마고는 태초의 음(陰)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상징된다. 하늘과 태양이 양(陽)의 세계라면, 음은 마고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여성신으로 간주된다. 여성신이 있으면 반드시 남성신이 있기 마련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과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나오는 법우화상은 대표적인 지리산 남신이다. 남신은 자연스럽게 천신에서 인격신으로 변화한 것이다. 숭배대상의 중요한 변화이자 신격의 인간화가 이뤄졌다. 이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신인불이(神人不二)라는 점에서 서양의 고대문명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 ‘신인(神人)복합’과 ‘영·신(靈身)복합’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인의 신관(神觀)뿐만 아니라 신화를 보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회 지배이데올로기가 산신까지 바꿔
인간화된 지리산 남성신은 법우화상 외에 또 있다. 역시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지리산에 키가 36척(약 1,080cm)에 다리가 15척이나 되는 마고 혹은 마야고라는 여신이 있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 노고라 불리는 천신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불도를 닦던 반야라는 남신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했다.
그들은 천왕봉에 살면서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다 반야는 곧 돌아온다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마야고는 긴 손톱으로 나무 밑동을 끓어 버렸다. 지리산의 나무들은 모두 껍질이 벗겨지고 말았다. 마야고는 이제나 저제나 반야를 기다리며 나물에서 실을 뽑아 반야에게 줄 옷을 지었다. 그러던 중 반야는 구름으로 화하여 지리산으로 돌아왔지만 마야고의 앞에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화가 난 마야고는 반야에게 주려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 그 후 마야고는 천왕봉에 좌정하여 성모신이 됐다.’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여성신인 마고할미, 성모천왕과 혼인을 한 남성신 반야, 법우화상 등을 거치면서 신라 이후부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설과 마야부인설 등 더욱 다양해진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숭배하는 산신까지 바꿔버렸다.
신라에 불교가 유입될 4세기 후반 신라는 산신과 천신, 칠성신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에 유입된 불교는 최대한 토착신과 융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 절대적이었던 산신각과 칠성각을 사찰의 중심 공간인 대웅전 뒤에 배치함으로써 사람들이 대웅전 앞을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적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포석도 감안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불교는 고려시대 들어서 더욱 번성기를 맞는다. 산신의 구체적인 모습까지도 변화시켜 버렸다. <지리산下에 계속>
지리산 산신제 지내는 구례 남악사
지리산 산증인 우두성 구례문화원장
구례는 지리산남악제를 가장 일찍 시작해서 해마다 4월 20일 곡우 전후해서 열린다. 광복 후 유지와 군민들이 지리산신제를 봉행했다는 역사성을 내세워 2015년 71회째를 지냈다. 매년 주제는 ‘천년의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 신라 때부터 이어온 행사를 구례가 앞장서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 즉 역사성을 앞세우고 있다. 특히 국가적 제사를 지냈던 지리산신사가 천왕봉이 아니라 노고단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라 시절 천왕봉에 있었던 제장을 고려시대에는 노고단 또는 노고단 근처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시한다.
‘노고단이라는 곳은 우리 태조가 일찍이 여기에서 기도하여 지리산신의 감몽을 받았으므로 남악사를 남원 소의방(지금 구례 산동면 당동) 당촌으로 옮겨 세웠다. 길상봉(노고단)은 또한 문수봉이라고도 하는데, 지리산 세 개의 봉 가운데 조봉인 까닭에 남악사를 이곳에 세운 것이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사실의 진위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구례군은 지리산산신제에 있어서는 제일 앞서는 건 사실이다.
산신제의 위패는 ‘智異山之神(지리산지신)’ 또는 ‘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 이를 줄여 ‘智異山大大天王(지리산대대천왕)’이라고 쓴다.
남악제례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산신과 유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제사방식과 복식 등 엄격한 고증을 거쳐 확인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산신제가 불교식 또는 무교식 산신제를 지내는 것과는 구별된다. 2005년 남악제에는 전국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기도 했다. 유교식 산신제를 계승하는 전통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유교식 산신제는 조선시대 국가제사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가 주조형 산신제는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 그것을 구례군이 재현해서 지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펴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충분치 않아도 산신제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강조하며 남악제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다.
매년 4월 곡우 때만 되면 구례에서는 “삼가 주찬을 갖추어 민관이 함께 모여 정성을 드리오니 지리산신이시여! 영원토록 흠향하옵소서”하는 고축문이 지리산 자락에 울려 퍼진다.
중산리 천왕사에 봉합된 여 성모석상 보존… 남 산신상은 알 수 없어
지리산 산신은 어떤 모습일까?
우두성 구례문화원장은 “지리산 산신은 남신과 여신상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선친인 지리산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지리산 최초의 등산모임 ‘연하반’ 초대회장인 우종수씨와 지리산 호랑이로 통하는 함태식씨가 산신각 앞에서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여 준다. 이미 고인이 된 두 사람은 등을 보이며 산신각을 바라보고 있다. 산신각은 1,000여 년 됐다는 여성 산신상과 음각으로 만든 남성 산신상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55년 5월 5일 ‘연하반’이 창립됐으니 그 사진은 1960년쯤 된 듯하다.
일제시대에도 성모석상은 수난을 당한다. 일제는 한민족의 숭배 대상이었던 성모석상을 벼랑 아래로 굴러 내버렸다. 산청에 살던 한 처녀가 굴러떨어진 성모상을 자기 집에 모셔놓았다. 그런데 그녀는 신통력을 갑자기 얻었는지 곧 무당이 됐다고 전한다.
다시 천왕봉에 모셔진 성모석상은 1970년대까지 숱한 기도객이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어느 종교단체의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에 의해 다시 벼랑 아래로 내던져지는 수난을 당한다.
천왕사는 조계종 산하 사찰은 아니지만 성모석상을 대웅전에 모신 뒤로 날로 번창하고 있다고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사찰 경내 부지도 날로 확대되고 있다고 전한다. 처음에 슬레이트 지붕의 초라한 집 한 채에서 시작한 천왕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신도가 급격하게 늘어나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섰다.
혜범스님도 마을주민과 공단에서 돌려달라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누가 천왕할매를 훼손하거나 훔쳐 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천왕할매를 찾았으니, 내가 안전하게 모시고 있어야지요.”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사진·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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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지시로 천왕봉 아래 성모사 건립… 조선시대엔 도교·유교·성리학까지 반영
<삼국사기>(1145년쯤 김부식이 발간한 현존 최고의 역사서)와 <삼국유사>(1281년쯤 승려 일연에 의해 발간)에 이어 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1287년 발간)에서도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용왕이 다시 나와 사례하며 깊은 궁궐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와서 맏딸을 아내로 삼거늘, 금털 난 돼지와 칠보를 겸하여 주기를 비니, 이에 서강 물가로 실어 보냈다. 돌아와 송악에서 살았는데, 여기에서 성지를 낳았다. 성모(聖母)가 도선 선사에게 명하여, 이를 가리켜 명당이라 말하게 했다’-이승휴 <제왕운기> ‘本朝君王世系年代’편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과 도읍지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어머니가 왕건을 출생하는 상황과 한국 풍수의 창시자 도선에게 천하의 명당을 찾아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지리산의 천왕이 성모임을 밝히고, 성모가 도선에게 이곳이 명당임을 밝히게 하여 태조 왕건의 왕업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신도 마고에서 위숙왕후·마야부인으로
또 ‘신라 말기에 송도의 한 부인이 지리산에 들어와 산신에게 빌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삼국을 통일하니 그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는 내용도 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됐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질 뿐만 아니라 지리산 산신도 마고·노고·선도성모(박혁거세와 왕후 알영의 어머니)에서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인다.
왕건의 지시로 천왕봉 아래 건립한 성모사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고, 성모사에 만든 왕후의 석상은 위숙왕후의 모습이었다. 성모석상은 그로부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으로 존재하며 1,000여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조정은 왕건의 지시로 세운 성모사 내부에 제사를 전담하는 관리인 신관을 두었다고 전한다. 말을 탄 신관이 군위를 거느리고 왕방울을 울리며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 진주 등을 순찰하며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했다는 기록이 <지리산인문사적자료>에서 전한다.
성모사를 지리산 정상 천왕봉 아래 두면서 고려 때부터 지리산 산신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천왕봉의 주신인 ‘성모(聖母)’와 노고단의 주신인 ‘노고(老姑)’로 대표되는 산신으로 바뀐다. 이는 시대적·상황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성모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성모’는 애초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가리켰지만 고려시대부터는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의 상징으로 슬며시 변모한다. 왕조에 따라 산신의 형태를 변신 중첩시키는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고려는 또한 불교국가로서 통치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가르침을 정책 전반에 반영한다.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당연히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도 이 시기부터 산신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애초 <삼국사기> 권5 선도성모수회불사편에 ‘선도산 신모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沙蘇, 婆蘇라고도 함)다. 그가 진한에 와서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고 여자는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이 산에서 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 해동의 시조는 다름 아닌 박혁거세를 말한다.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경주의 선도산 신모의 원조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라기도 하고, 천신의 딸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오악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중국계 산신 사소를 한국형 산신의 원조로 변신시킨 격이었다. 어쨌든 초기의 성모는 이들이다. 이 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고, 사후 또한 산신 ‘성모’로 변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성모는 경주 선도산에서 지리산으로 옮겨와 한반도의 핵심 산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고려가 건국되면서 위숙왕후와 마야부인으로까지 산신의 주체가 확대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의 신관(神觀)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의 아들인 천신(天神)이 하강하여 인군(人君)이 되면서 지상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이다. 고대국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정치주술적 복합형태를 띠고 있었다. 즉 신화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정도가 아닌 똑 같은 형태를 보인다.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고대국가의 왕 이름이 전부 헤라클래스나 제우스 등의 이름을 띤 것은 이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통치자들은 천신인(天神人)으로 대표된다. 천신인이 바로 신인복합(神人複合)의 전형이었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정치주술 복합과 함께 ‘신인복합’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박혁거세와 왕건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신과 동등한 객체로 신성시하면서 왕으로서 숭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고단의 마고할미 전승은 이어져
천왕봉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리산 산신의 중심이었던 노고단의 ‘노고’는 마고할미 산신으로 계속 전승된다. 하지만 고려시대는 지리산의 중심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가고, 산신제도 노고단보다 국가에서 주례하는 천왕봉으로 더욱 중심이 쏠린다. 하지만 태초의 산신은 마고, 즉 노고라는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전문가도 이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1>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1만2,000년 전에 세운 최초 국가의 건국주로 간주한다. 그 태초 마고도 <삼국유사>에서는 성모로 변신하기도 한다. 당시까지는 노고단이 지리산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고와 마고, 성모는 혼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노고와 성모는 조금씩 구분되면서 서서히 천왕봉 계열의 산신과 노고단 계열의 산신의 두 계파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의 지시로 건립한 성모사(聖母祠)는 천왕봉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모사에 가기 위한 가장 빠른 코스는 바로 백무동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백무동 거의 끝 지점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백무동(百巫洞)은 지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많은 무당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신라의 박혁거세와 고려 왕건의 어머니가 산신으로 변신한 성모사였으니 역술인이나 무속인들에게도 가장 영험한 장소로 당연히 각광받았을 것이다. 자연 무속인들은 성모사에 가기 위해 백무동으로 몰렸고, 그 주변에 터전을 내렸다. 성모사에서 제사를 올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백무동으로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때의 지리산 산신에 대한 기록이 몇 가지 전한다.
<高麗史(고려사)>(1449~1551년 김종서·정인지 등이 완성한 역사서) 지리지편에 ‘지리산이 있다. 두류산 또는 방장산이라고도 부른다. 신라에서는 남악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올랐으며,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東國理想國集(동국이상국전집)>〔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에는 지리산 대왕(산신)에게 올렸던 기원문도 전한다. 고려 신종 2년(1199)에 쾌유를 비는 내용이다.
‘아무개 등은 모두 비재로서 원사의 요좌(寮佐)에 보임되어 장차 동도(경주)를 문죄하려 합니다. 대개 일군의 생사와 성패는 모두 통군에게 달렸습니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통군은 머리이며, 요좌는 손이고 군졸은 발입니다. 어찌 머리에 병이 있는데 손과 발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군사가 선주에 머무르고 있는데, 통군 상서 김공 아무개가 갑자기 미질(微疾)에 걸려서 기거가 불편합니다. 생각하건대 산과 들에서 노숙하면서 바람과 안개를 맞아서 일어난 병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무슨 까닭이라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일군이 걱정과 두려움에 싸여서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감히 중성(衆誠)을 내어 경건히 우리 대왕의 靈(영)에 기도합니다. 만일 신통한 힘을 빌어서 보지하고 구호하며, 김공에게 병을 낫는 기쁨이 있게 하여 즉시 건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면, 삼군의 복(福)일 뿐만 아니라 대왕의 위령도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먼저 옷 한 벌을 올려 작은 성의를 펴고, 병이 쾌유되면 다시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려서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겠습니다.’
<高麗史(고려사)>충렬왕편에 또 다른 기록도 나온다.
‘왕이 병이 들자 二罪(이죄) 이하를 석방했고, 섬에 귀양 보낸 자는 가까운 곳으로 옮기거나 면하여 개성으로 오게 했다. 홍자번에게 지리산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다.’
지리산 산신에 제사를 지내 왕의 쾌유를 비는 내용이다. 나아가 고려 말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도 지리산 산신에 기도했다. 외적의 침입은 나라의 불행이며, 신의 수치로 여긴 것 같다. 지리산의 신통력을 빌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모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경이 다른 것과 달리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경은 비슷한 측면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조선 <태종실록> 권28편에 산천의 등제를 나누도록 한 내용이 나온다.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제도를 올렸다. 본조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점제에 의하며 제등을 나누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옥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자산,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였다.’
<세종실록>에는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경상도지리신>에서는 ‘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대대천왕(大大天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천왕은 결국 천왕봉의 신령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태을산신이 새롭게 등장
조선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의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된 새로운 산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박혁거세와 왕건 같이 조선의 건국주 이성계도 비슷한 신비주의나 신성시하는 작업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상의 신격화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통한다.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 작업이 사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동안 또는 탄생 시에 이미 신비로운 징표를 지녔거나 그 같은 변신이 가능한 인물이라야 가능했다. 이성계는 사실 최영에게 발탁된 장군이었으며, 최영 장군의 그늘에 가려 있다가 어느 순간 최영 장군을 처형하고 왕이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를 신격화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영 장군은 한국 최고의 산신으로 모셔진다는 점에서도 이성계와 비교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리산에 새로운 산신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역사서나 문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산신은 태을산신이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1481년 조선 성종의 명을 받아 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기록한 관찬 지리지)에 ‘태을이 (지리산) 위에 거하니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명찰명찰편에도 ‘지리산은 태을이 사는 곳으로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리산 산신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 도교, 그리고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산신이 새롭게 태어난다. 도교는 이미 샤머니즘적 요소를 상당히 융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민생활에 스며드는 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샤머니즘 칠성신은 태을성신과 합해지는 과정을 보인다. 산신과 도교의 융합이다. 뿐만 아니라 천제라는 개념은 유교와 성리학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이다.
유교에서 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고대 문헌에서 나타난 신으로, 흔히 상제(上帝) 혹은 천(天)으로 표현된 인격신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신이다. 특히 주자는 이(理)를 매우 중요시했던 만큼 성리(性理)와 귀신·정신·혼백을 뚜렷이 구별해 전자를 오로지 ‘이’라 한다면 후자를 ‘기’라고 했다. 귀신·정신·혼백은 기이므로 유(類)를 따라 감응할 수 있으나 이는 감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의 뿌리가 되고, 이는 쉬지 않고 순환하는 천지조화의 회로와 같은 것이어서 날마다 무한히 생기는 기의 원천이 되므로 기가 단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주자는 신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그 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초월적 원리로 내세우고 있다.
조선시대는 불교국가인 고려와 달리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성리학의 이념이 산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 유람록에는 다양한 산신 등장
지리산 산신은 정사(正史)에만 등장할 뿐 아니라 유람록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조 유학자 점필재 김종직의 천왕봉 산행기
<유두류록>에 ‘성모사당은 삼간판옥인데, 지붕의 너와에는 큰 쇠못을 박아 매우 견고하며 두 사람의 화공 스님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눈과 눈썹머리 쪽진 데와 얼굴에 색감을 진하게 칠하여 눈길을 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서도 ‘거처하는 백성들에게 물으니 이 (지리산 산)신을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속이는 말입니다. 점필재 김공(김종직)은 우리 동양의 박학다식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징험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비(妃)인 위숙왕후라고 했으니 믿을 만합니다. 위숙왕후는 열조(烈祖)를 이끌어 세워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영원히 흠향하는 것은 순리입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인 유람록이긴 하지만 산신에 대해선 어김없이 언급한다. 그리고 산신의 대상에 대해선 당시에도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사실 약간의 논리적 근거를 갖고 누가 무슨 주장을 하더라도 완전 얼토당토않은 주장 외에는 어느 정도 먹혀들기 마련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산 산신에 대한 큰 틀은 시대에 따라 다소 바뀌기는 했지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태을성신을 포함한 여러 신선 거주설 등이 주된 지리산 산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왕건의 지시로 만들어진 성모사에 모셔진 지리산 산신의 성모석상은 일부 전문가들은 복장양식이나 스타일이 40대의 신라 여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1,000여 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때로는 선도성모로, 때로는 위숙왕후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바로 한민족의식을 계승한 우리 조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두 자 높이의 이 석상은 마치 모진 풍파 속에서 시달려 온 한민족의 역정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소박하면서 아담한 모습 그 자체다.
“천왕봉 아래 성모사 복원해 성모석상 갖다놓아야”
산청 두류산악회, 매년 독자적으로 성모제·천왕제 지내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은 남악으로 불리며, 매년 봄가을에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구례군에서 일제 때 중단된 국가적 행사인 남악제를 되살려 노고단 아래 남악사에서 매년 4월 20일 곡우를 전후해서 지리산남악제를 지낸다고 지난 호에서 소개했다.
고려시대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바뀐다. 이후부터 노고단에서 남악제를 계속 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쉽지 않으나 천왕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구례에서는 광복 이후 남악제를 부활시켜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반면 천왕봉에서는 행사를 개최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천왕봉의 행정구역은 함양과 산청이다. 특히 함양은 백무동이 있는 곳이다. 산청은 천왕봉에 갈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1970년까지 천왕봉 아래 성모사에 성모석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산청의 여러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그리고 역시 산청에서 그곳에서 지리산 산신제를 지냈다고 했다. 지난 호에서 밝혔다시피 이후 수난을 당한 성모석상은 버려져 있었다.
1972년 창립한 산청 두류산악회에서 이듬해인 1973년부터 매년 추석 이후 10월 초 좋은 날을 택해 천왕봉 아래 성모사가 있었던 자리에서 천왕제를 올리고 있다. 헌관은 당연 두류산악회 회장이 맡는다. 아헌관은 시천면장이, 종헌관은 두류산악회 감사가, 축관은 두류산악회 고문이 각각 맡아 진행한다. 조선시대 큰 제사를 지낼 때는 임금이 직접 초헌관을 맡기도 했다. 민간단체의 산악회지만 제문은 조선이나 고려시대 때 지냈던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단군기원 4349년(2016년 기준) 팔월 스무하룻날 덕산두류산악회는 마흔세 번째 천왕제향을 받들어 올립니다. 천제(天帝)여! 온 나라의 모든 일들이 풍성하고 편안하게 하여 주시고 민족통합의 기운이 성숙되게 신조(神助)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가 평화로운 질서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지에 가득한 가을 기운을 받아 만기(萬機)가 형통정연하게 음우하여 주시옵소서. 간수한 제수를 차리고 향연을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그런데 산청에는 성모석상이 두 군데나 있다. 두류산악회에서 매년 봄 성모제를 지내는 석상과 천왕사에 있는 석상이다. 천왕사에 있는 성모상이 원래 석상이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진주 과수원에 버려져 있던 석상을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두류산악회, 천왕사 세 단체 대표가 과수원 주인을 설득해 다시 천왕봉 인근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김임규 지리산국립공원관리소장은 “당시 돌려받은 성모석상은 공단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1983년 천왕사 혜범스님이 가져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천왕사 주지는 성모석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천왕사에 아예 콘크리트로 접합해서 고정시켜버렸다.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공단과 두류산악회의 주장을 아예 무시하고 독점해 버린 것이다. 소송을 하기도 했으나 돌려받지 못하자 두류산악회에서 회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산청 주민 500여 명의 지원을 받아 천왕사 맞은편에 모양은 비슷하게 크기는 훨씬 더 크게 해서 성모석상을 독립적으로 세웠다.
두류산악회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천왕제와 성모제로 나뉘어 있다. 천왕제는 천왕봉 바로 아래 성모사가 있었던 자리에서 지내고, 성모제는 매년 봄 새로 세운 성모석상 앞에서 지낸다.
조출환 두류산악회 회장은 “성모제와 천왕제를 산청주민들과 같이 지내기 때문에 군민단합에 큰 힘이 되고 있다”며 “군청에서 예산을 제대로 확보해 1970년대까지 있었던 천왕봉 아래 성모사에 성모석상을 세운다면 산청군민들의 단합뿐만 아니라 지리산 정기를 새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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