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신 없는 본향산신 그대로… 후천개벽 맞물려 앞으로 더욱 주목 받을 듯
모악산을 흔히 ‘어머니의 산’, ‘영적인 산’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모악산을 한국 ‘미륵신앙의 메카’라고도 부른다. 미륵의 산, 어머니의 산, 영적인 산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후천개벽의 주체라는 점이다. 그러면 후천개벽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악산 산신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미륵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산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불 제자 중의 한 명이 미륵에게 장차 성불해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근거로 부처님 사후 미륵의 세상이 온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를 토대로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이 미륵신앙의 바탕이다. 삼부경은 각각 상생과 하생, 성불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룬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과 미래의 인간세계에 태어나 교화할 미륵불로 갈망하는 하생신앙이 있다. 또 미륵불 법회에 참석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성불에 대한 내용이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으로 묘사된다.
미륵불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어, 구원론적인 구세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미래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한 축을 이루며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미래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은 정치적 혼란기에 지도자의 혹세무민 사상으로 곧잘 이용되기도 한다. 애초 발생지인 백제지역 중심부터 그랬다. 미륵신앙의 메카로 불리는 모악산 금산사는 애초 창건은 백제 말기인 599년이지만 진표율사가 나라 잃은 백제 유민들을 위로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이념으로 통합하기 위해 750년대 크게 중창한 것으로 전한다. 즉 ‘나라 잃은 슬픔을 미륵신앙을 통해 감내하면서 미래를 기약한다’는 논리를 폈다는 것이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미륵불의 현신으로까지 자칭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며 동시에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견훤도 금산사의 미륵불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의 용화세계라고 주장했다.
미륵신앙은 사회 혼란기에 주로 득세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하고 불안했던 고려 후기에도 민간에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했다. 고려 우왕 때는 제2의 궁예와 견훤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이금(伊金)이다. 이금은 나무에서 곡식이 열리게 할 것이라는 말까지 내뱉아도 민중들은 신봉하고 따랐을 정도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금 역시 고통 받는 민중을 구제할 미륵불은 아니었고, 국민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했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하층민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이 전국적으로 퍼져간다. 정여립이 자처했던 ‘정도령’은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알려져 민초들에게 은둔사상을 부추기도 하고, 말기에는 반 왕조적 세력을 규합해서 더욱 사회혼란을 부채질했다. 또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이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미륵신앙을 퍼뜨렸다. 이들에 호응했던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과 노비층이었다. 말 그대로 혹세무민의 전형이었다.
혼란스런 근대에 들어서도 한국의 신흥종교 대부분은 모악산을 근거로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이와 같이 미륵신앙은 근대 들어서 후천개벽사상과 융합해서 증산교와 같은 신흥종교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증산교는 지금도 모악산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성지로 삼고 있다.
지금 미륵신앙의 흔적은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절 이름에 그대로 나타난다. 미륵·용화·도솔 등은 100% 미륵신앙과 관련 있다고 보면 확실하다.
미륵신앙에서 나오는 후천개벽이 바로 어머니와 여성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천의 시대는 양(陽)의 시대고, 남성이 지배하고, 불의 시대고, 힘의 시대인 반면, 후천의 시대는 음(陰)의 시대고, 여성이 지배하고, 물의 시대고, 부드러운 시대라고 주장한다.
근대를 기점으로 양의 시대가 끝나고 음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들은 말한다. 따라서 지금은 음의 시대, 여성의 시대의 태동기라고 강조한다.
산의 기운도, 신앙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모악산은 그동안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미륵불이 득세하는 후천개벽시대에 와서야 음의 시대와 더불어 마침내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여(女)산신의 어머니 힘으로 세상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열어간다고 한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모악산이 어머니 산이 된 연유는 기축옥사, 동학, 일제강점기, 6·25사변을 거치면서 권력과 이념에 지친 사람들을 무조건 안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악산의 미륵사상은 곧 생명사상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상생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악산은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자 영적인 산이며 명산이라고 하면서도 역사서에는 기록도 없고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의 명산대천을 3산5악 이하 대사·중사·소사로 나눈 50여 곳의 지명 어디에도 모악산은 없다. 지금 거론되는 전국의 웬만한 명산은 통일신라가 지정한 대사·중사·소사의 50여 곳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소사(小祀)는 통일신라 이전 전국 지방 세력이 지내고 있던 신앙과 제사를 그대로 신라의 사전(祀典)체계로 편입된 지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악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주의 금성산, 충주의 월악산, 연천의 감악산, 한양의 부아악(북한산), 영주의 죽령 등이 소사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모악산이란 지명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단지 후백제의 저항운동의 한 장소로서 모악산이 아닌 ‘금산(金山)’이라는 기록이 잠시 나올 뿐이다. 이에 대해 한국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양종승 박사는 “모악산은 유별나게 숨겨진 산이며, 은거했던 선인들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산일 수 있다”며 지금 주목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시사철, 밤낮과 같이 자연이 순환하듯이 산의 기운도 돌고 돈다고 본다. 이전 기록에 없다고 해서 전혀 가치 없다고 보면 안 된다. 기운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자의 파장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피가 도는 듯 순환한다. 한반도 기운도 돈다. 계룡산은 암컷 용과 수컷 용이 승천하면서 기운이 뚫려 나갔다고 본다. 지금은 모악산의 기운이 퍼지고 있다. 완전히 확산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한반도의 중심이 모악산으로 운집하고 있으며, 모악산이 앞으로 큰 역할을 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추상적이지만 나름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어쨌든 현재 부각되고 있는 모악산의 원래 이름은 금산이다. 금산이 나오는 기록을 잠시 한 번 살펴보자.
<삼국유사>권이 후백제 견훤조에 금산사가 나오면서 ‘금산(金山)’이라는 기록이 처음 나온다. <삼국사기>에도 후백제 관련해서 ‘금산(金山)’이 한 차례 언급될 뿐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제1권에는 ‘을미년(왕건 18년) 봄 3월에 아들 신검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의 불사에 가두고, 그 아우 금강을 죽였다. 견훤은 아들 10명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중략) 6월에 견훤이 막내아들 느예와 나인이 애복과 사랑하는 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중략)’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까지 금산이라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산의 신성성이나 영험성보다는 단순한 하나의 지명으로 등장할 뿐이다.
조선시대 들어 모악산, 이전까지 금산으로 불려
<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주부편에 ‘모악산은 전주부 서남쪽 20리에 있으며, 금구현에서도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또 태인현편에도 ‘모악산은 태인현에서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또 금구현편에서도 ‘모악산은 금구현에서 동쪽으로 25리에 있고, 역시 태인에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6권에는 ‘마이산의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노령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이 되었다’고 나온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까지 금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모악산으로 변한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김제 금산사의 <금산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악이라 하는 것이든 금산이라 하는 것이든 간에 옛날에는 모두 이 사찰이 의지한 산명이었던 것이다. 이 산의 외산명(外山名)을 조선 고어로 ‘엄뫼’라고도 불렀고 큰뫼라고도 칭했다. 엄뫼나 큰뫼라는 이름은 다 제일 수위에 참열한 태산이란 의미로서 조선 고대의 산악숭배로부터 시작된 이름이다. 이것을 한자 전래 이후에 이르러 한자로 전사할 때에 엄뫼는 모악이라 의역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하여 금으로 하고 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했다.’
모악산을 가리키는 다양한 지명이 등장한다. 모악산, 금산 외에 엄뫼산, 큰뫼 등으로도 불렸다. 또 다른 문헌에는 대모산(大母山)이라거나 모산, 모후산(母后山), 부산(婦山) 등도 나온다. 어떻게 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금산에서 모악산 등의 지명이 바뀌었을까?
산은 지세에 따라 모양이 형성되고 형체에 따라 또 다른 기운이 발생한다. 산의 지명은 대체로 지세와 형세, 사건에 따라 정해진다. 금산사 사람들은 모악산을 금산이라 불렀다. 금산사의 명칭을 산에 그대로 따서 불렀다고 한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금산사가 먼저인지 금산이란 지명이 먼저인지 분명하지 않다. 김제 지방에서는 당시 금(金)이 많이 생산돼 금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건 사실이다.
지금의 김제 부근에 남아 있는 금구, 금평, 금화 등의 지명은 옛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같은 지명은 금으로 인해 유래했다. 또한 산의 형상이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해서 반용선이라고 했다. 어선의 준말인 어산(魚山), 어이산 등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또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됐을 때 어가(御駕)가 머물러 있었다고 해서 어산(御山)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큰뫼나 모악산은 전혀 다른 어원을 가진다. 이는 짐작컨대 산의 형세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모악산 정상에서 여러 갈래의 봉우리가 물결처럼 뻗어 있는데, 그중 금산사를 둘러싼 두 갈래 능선이 영락없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또한 모악산 쉰길바위의 형상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엄뫼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엄뫼를 한자로 전사(轉寫)하면서 모악으로 의역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해 금으로 하고 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했다. 따라서 모악산이 나오고 금산이 나왔다. 어쨌든 모악산과 금산은 다른 유래를 가지면서, 동시에 같은 어원을 가진 지명이다.
모악산에서 금산사와 대원사·수왕사는 미륵의 근본도량으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특히 수왕사는 전부 아우를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지금까지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은 물을 필요로 한다. 대원(大願)은 큰 원을 품고 있다는 의미며, 이 또한 물이 필요하다. 기도는 반드시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금과 물은 오행에서 상생수다. 순환의 논리로 상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반드시 필요로 하는 존재다.
잠시 오행의 원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오행은 우주 조화를 이루고, 서로 상생과 상극의 관계를 이루는 조건이 각각 다르다. 목(木)은 육성의 덕을 맡고, 동쪽에 위치하며 계절은 봄이다. 화(火)는 변화의 덕으로 남쪽을 가리키며 여름을 상징한다. 토(土)는 생성의 덕으로 중앙에 위치하며 4계절의 구심점이다. 금(金)은 형금(刑禁)의 덕으로 서쪽으로 가을을 가리킨다. 수는 임양(任養)의 덕으로 북쪽이고 겨울을 나타낸다. 오행의 관계에는 상생과 상극이 있다. 상생은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으로, 순서는 목화토금수로 이어진다. 반면 상극은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 목극토, 토극수이며, 수화금목토로 연결된다.
오행의 이러한 논리로 모악산을 풀면, 상생의 금생수가 된다. 대원사의 바로 뒤에 있는 암자가 수왕사(水王寺)다. 이곳이 물의 정기가 넘치며, 왕수를 품고 서해의 기운을 담은 미륵도량이라고 주장한다. 수왕사 주지 벽암 조영귀 스님은 “미륵신앙은 용화사상이다. 모악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메카다. 결국 용과 금의 관계다. 용은 영험한 상상 속의 동물이면서 미륵을 상징한다. 미륵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 용이다. 용이 있는 곳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둘 다 음과 여성을 상징한다. 결국 미륵은 미래불이고, 여성의 시대, 음의 시대의 도래를 나타낸다. 이같은 상황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산이 모악산인 것이다. 모악산의 정점에 수왕사가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미륵도량이나 여성의 시대, 음의 시대는 다 같은 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벽암 스님은 “새 세상을 여는 최상의 기운이 금산사 삼존 미륵불에 있다면, 수왕사는 미륵이 지상에 이르는 원초적인 기운을 모아놓은 곳”이라고 강조한다. 예로부터 미륵의 후천개벽, 해원사상이 열리는 곳의 내경은 금산사 미륵 삼존불이고, 외경은 익산 미륵산까지 뻗어간다고 한다.
그러면 여성의 시대에 부각되는 위대한 어머니 산으로 불리는 모악산의 산신은 과연 누구일까? 현재까지 누구라고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계룡산 산신과 마찬가지로 본향산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모악산 산신은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산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받아들이는 듯하다. 모악산이 전형적인 음의 산이기 때문이다. 지리산 못지않은 편안한 육산(陸山 또는 肉山)이다.
벽암 스님은 수왕사 바로 옆이 옛날 산신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위 무제봉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다 모악산 정상 국사봉 바로 아래 있다.
여기서 잠시 산신을 어떻게,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문명의 태동과 더불어 고대 산악숭배신앙으로부터 출발한 산신을 독립적인 하나의 신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샤머니즘의 한 부분으로 산신을 볼 것인가의 문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산신을 하나의 신으로 본다면 다양한 형태의 무형의 신들이 내재화해서 신격화되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를 가졌을 당시 모든 자연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본 초기의 신의 형태가 이에 해당한다. 자연신과 같은 토속적 산신령의 형태일 수도 있고, 본향산신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단군을 제외하고는 산신의 구체적인 형태파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스신화에서 볼 수 있는 신의 계보도 같은 것도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과 관련한 무한한 이야기, 즉 신화는 무궁무진하게 나올 수 있다. 그 산신의 전형이 나타난 산신도가 바로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그려졌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산에 사는 맹수 중에 최고의 위협적인 존재이면서 신성시되는 동물로 상징화됐다.
둘째, 산신을 샤머니즘의 한 부분으로 보자면 산신의 범주는 엄청나게 확대된다. 단군의 천신계, 장군신과 영웅신과 같은 인신계, 가택신계, 잡신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등장한다. 천신계부터 잡신계까지 계보도를 만들 수 있지만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제각각의 성격과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샤머니즘의 산신에서는 뚜렷한 두 가지 특성을 드러낸다. 하나는 중층성이고, 다른 하나는 조상의 성격이다.
중층성은 신령들이 다차원적으로 겹겹이 얽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천궁대감은 천궁에 있는 천신계의 신령인데, 그 대감이 산신계에서는 도당대감, 장군신계에서는 조상대감, 업대감이 되고, 잡귀신계에서는 터주(대감)로 나타난다. 중층성은 불교의 화엄세계를 연상시킨다. 광대하게 장식된 탑 안에 수백수천의 탑들이 또 들어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탑들이 나름 제각각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샤머니즘 산신의 또 하나의 특성은 조상성이다. 전통무들은 산신을 넓은 의미에서 모두 조상으로 여긴다. 그것이 잡귀신이든 중국에서 유래된 신령이든 모두 우리 민족과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를 본다. 유교의 조상개념보다 훨씬 넓고 깊은 특성을 지닌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한국의 산신은 샤머니즘적인 성격보다는 하나의 신으로서의 산신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설령 파악한다 하더라도 원형성은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토속적 산신령의 본향으로서만 설명이 가능할 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서 계룡산 산신에서 약간 언급했다.
이번 모악산 산신에서도 계룡산 산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수십 년째 모악산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벽암스님조차 산신의 실체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벽암스님이 고대 천제단을 지냈던 자리라고 가리킨 수왕사 바로 옆 바위제단은 그럴 듯했다. 완만한 육산의 모악산에 암벽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옆 암벽 사이로 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벽암스님은 “아무리 가물어도 옛날부터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평평한 바위는 무녀 한 명과 제물을 놓으면 더 이상 여유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매년 두 차례 모악산 여산신제를 지낸다.
산은 성스러운 곳이자 하늘과 땅 잇는 고리
산은 인류 초기부터 성스러운 곳이다. 우리 단군신화가 산에서 시작했고, 그리스신화도 올림푸스산에서 시작했다. 산은 하늘과 땅을 잇는 연결고리이자 우주의 축으로 여겼다. 우주의 질서와 안녕을 관장하는 중심이라는 관념이 인류 초기부터 인식돼 왔다. 산신제가 바로 하늘과 땅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모악산 산신은 여산신으로 알려져 있다. 인(격)신은 아직 좌정하지 않은 상태다. 산신제를 통해 여산신과 접신하고 하늘의 뜻을 파악한다. 신령스럽고 영험한 기운을 내려 받는다. 그게 바로 미륵신앙일까?
초기 민속학자 손진태는 “산신뿐 아니라 고대민족 신앙상의 신은 대부분 여성이다. 원시사회에 있어 모권이 강했던 원시종교상의 주제자(主祭者)가 바로 여성무였던 것에 기인한다”고 밝힌 바 있다.
모악산에서 새롭게 느낀 사항은 미륵신앙과 여산신이 혹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지역 향토사학자와 민속학자들은 앞으로 모악산이 크게 번창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장담한다. 이 말이 맞는다면 그 여산신은 미륵신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