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은 한국 최고의 장군신으로 통한다. 민간에서는 수호신·마을신으로, 샤머니즘에서는 장군신으로 모시는 동시에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대상으로 좌정돼 있다. 현재 장군신으로는 임경업, 남이, 관우 등과 같은 뛰어난 장군이 있지만 최영 장군은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영험하다는 소문이 전한다. 샤먼들 사이에서는 억울한 죽음이 부른 ‘원한(怨恨)의 강도’가 신통력을 결정한다고 한다. 특히 그의 훌륭한 업적에 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경우엔 서민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시대를 넘어 전승된다. 원한에 대한 반대급부로 서민과 영웅신으로서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신으로 좌정하기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인물인 셈이다.
고려의 인물을 역성(易姓)혁명으로 건국한 조선왕조의 사관들이 기록한 <고려사>권113 열전26 최영 조에서 ‘(최영은)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모두 철시했으며, 멀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으며, 도당(都堂)에서는 쌀·콩·베·종이를 부의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개성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샤머니즘의 신은 원혼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 좌정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사회나 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위대한 인물이라야 한다. 위대한 인물이 억울하게 죽임 당한 뒤 그의 원혼을 서민들이 대신 풀어 주는 형식을 띠고, 사회적 공감과정을 거친 뒤 완전한 신으로 좌정하는 것이다.
한국의 샤먼들은 절대 다수가 최영 장군의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 무당들은 “최영 장군의 신내림이 없으면 무당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무당들은 수많은 신을 동시에 내림받는다. 가장 먼저 받는 신이 바로 산신이다. 장군신 중에서는 최영 장군이 대표신 격이다. 이를 주장신(主張神)이라 부른다.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은 전국에 분포해 있다. 산신으로, 마을 수호신으로, 장군신으로 각 마을이나 산에 좌정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개성 덕물산이다. 최영 장군은 덕물산 산신으로 좌정해 있고, 그 산 중턱에 사당이 있다. 그 외에 마을수호신으로 좌정한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서울 대흥동 불당, 부산 남구·수영구 무민사, 동구 최영장군사당, 영도구 봉래산 산제당, 경남 통영 사량면 최영장군사당, 통영 산량읍 장군당, 남해 미조면 무민사, 충남 홍성 기봉사, 충북 청주 기봉영당, 전북 익산 두천사, 제주 추자도 최영대장신사, 경북 김천 진충사, 영덕 독묘, 강원 강릉 덕봉사 등 전남을 제외하고 전국에 고루 모셔져 있다. 경기도 고양 대자산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말 한 시대를 풍미한 최영 장군은 그의 뛰어난 업적과 억울한 죽음으로 산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마을신으로까지 고루 숭배되고 있다.
올해는 최영 장군의 탄생 700주년이다. 새삼 그의 탄생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그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Don't be blinded by money)’는 격언이 지금 시대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그의 충절은 김종서 장군에, 그의 신출귀몰한 전투능력은 김유신 장군에 견줄 만하다”고 말한다. 영웅신으로서 완벽한 조건이다.
최영 장근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어디에 그의 자취를 남겼으며, 어떻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사후에 언제 산신으로 좌정했는지를 두루 살펴보자.
그는 원나라와 왜구, 홍건적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 1316년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홍성과 철원 등으로 나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영은 철원인으로 무릇 본관이 철원으로 되어 있지만 적동(지금 충남 홍천)과 관련 있다. 고을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제(祭)를 올리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47권 강원도 철원도호부 인물조에는 ‘최영(崔瑩)은 최옹의 손자이다. 풍모가 걸출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예속되어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았으므로 무용(武勇)으로써 알려졌다. 홍건적의 난리 때는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경도(京都:지금의 개성)를 수복하여 공훈이 일등에 책록됐다. 김용을 죽이고, 덕흥군을 내쳤으며, 하치(哈赤)를 토벌하고 왜적을 격파했으며, 임견미·염흥방을 죽인 것이 모두 최영의 힘이었다. 최영은 천성이 깨끗하여 상으로 내리는 전지와 노비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大體:일이나 내용의 큰 줄거리)에는 어두워 여러 사람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고 계책을 결단하여 요(遼)를 치다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으니, 문하부 낭사 허응 등이 소를 올려 논죄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참형했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논하기를, “최영의 공은 온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니, 세상에서는 명언이라고 했다. 본조에 이르러서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고 나온다.
어쨌든 최영의 출생지는 철원과 홍성 어느 곳인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그의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부 규정 등을 역임했으며, 그 전에 홍주 판관으로 있을 때 최영 장군을 낳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최영은 34세(1350년)로 늦은 나이에 우달치라는 무관으로 발탁돼 본격 무인의 길로 들어선다. 우달치는 밤낮으로 임금을 호위하던 직책. 왜구를 많이 물리쳐 혁혁한 공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최영 장군이 더욱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백전무패의 전투력뿐만 아니라 우달치라는 최하위 무관 말직에서 당시 최고의 자리인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까지 오르면서 초지일관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를 평생 좌우명 삼아
왜구와의 전투에서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이성계의 남원 운봉 황산전투(1380), 최무선이 화포를 처음 사용한 금강 진포구 전투(1380), 최영의 부여 홍산대첩(1376)이다. 최영 장군 사당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유는, 당시 왜구의 침략을 최영 장군이 신출귀몰, 동분서주하며 막아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곳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 것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이성계와의 인연도 시작된다. <고려사>에 그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우왕 4년(1378), 왜구의 배들이 착량(窄梁)에 대규모로 집결해 승천부(昇天府)로 침입하고는 장차 개경을 침구하겠노라고 떠들어댔다. 온 나라가 놀라 소동이 일자 경계를 강화했다. (중략) 최영은 모든 군사들을 총지휘하여 해풍군(海豊郡: 지금의 개성 개풍군)에 진을 치고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梁伯淵)을 부관으로 삼았다. 적들이 상황을 탐지한 후, 최영의 군대만 격파하면 경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기고 아군이 진 친 곳을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곧장 중군이 있는 해풍군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다”고 다짐하고는 양백연과 함께 나아가서 적들을 공격했다. 우리 태조(太祖:이성계 지칭)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양백연과 협공해 적을 대파했다. 적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최영이 부하들을 지휘해 측면에서 공격하니, 적들은 거의 다 죽고 잔당들만이 밤에 도망했다. 밤새 도성에는 최영이 패주했다는 소문이 퍼져 인심이 더욱 흉흉해졌고 사람들은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우왕이 피란을 떠나려 하자, 백관(百官)들은 행장을 꾸린 채 궁문에 겹겹이 모여 왕을 기다렸다. 원수(元帥)들이 보낸 전령들이 전승을 보고하자 비로소 개경에는 삼엄한 경계가 풀렸으며, 백관들이 모두 하례했다. 조정에서는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성계가 최영을 전투에서 도운 것으로 나온다. 이 외에도 그의 전투는 너무 많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라 연도별로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이 됨. 1354년 대호군으로, 원나라에서 원병을 청하자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 등을 좇아 전투. 1355년 추안리, 팔안장 등에서 적을 무찔러 용맹을 떨침. 1356년 고려의 배원정책으로 서북면병마부사로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3참을 쳐부숨. 1357년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장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철화·서경·함종 등지에서 적을 무찌름. 1361년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 그 공으로 훈1등에 도형벽상공신이 됐고 전리판서에 오름.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충선왕의 제3자)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현 선전)에 응거하자, 서북면도순위사로 이성계 등과 함께 수주(현 정주)의 달천에서 싸워 물리침. 1365년 왜구가 교동강화에 침입하자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동강에 나가 진수하다, 신돈의 참수로 계림윤으로 좌천되어 귀양감.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곧 소환. 1374년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에 오름. 명나라가 요구하는 제주도의 말 2,000필에 대하여 제주도의 호목이 300필만 보내오자 양광전라경사도도통사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5,600명으로 제주도를 쳐서 평정. 1375년 판삼사사가 됨. 1377년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
1378년 왜구가 승천부(현 풍덕)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이 됨. 1388년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명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와 그 일당을 숙청. 그 해 딸이 (우왕) 왕비가 됨.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8,800여 명으로 요동 정벌을 꾀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실패로 끝남.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으로 유배. 다시 합포, 충주로 옮겼다가 공요죄(攻遼罪: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으로 압송되어 순군옥에 갇힌 뒤 그 해 12월 참수됐다.’
파란만장하고 꺾이지 않은 불굴의 의지를 잘 보여 주는 그의 삶이다. 그는 죽으면서도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이했다.
실제로 그가 죽은 개풍군 덕물산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린다. 그 산 위에 장군당이 있으며 산신으로 좌정돼 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5년 만(1396년)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의 넋을 위로했다.
대부분의 인격신은 사후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신으로 좌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최영의 경우는 매우 빠른 시간에 사당이 건립되고 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 당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최영의 인품과 덕망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한양 천도는 개성 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최영을 그대로 두고는 지지기반을 확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서 최영 처형과 한양 천도라는 극단적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성계가 최영을 죽일 때 한 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성계는 최영에게 “이와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사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마주 보고 울었다고 나온다. -<고려사> 권113 열전26
최영의 사후 ‘사당’에 대한 기록은 몇 군데 등장한다. 먼저, 1486년에 노사신·강희맹·서거정 등에 의해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다. 1530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19권 충청도 홍주목 산천조에 ‘삼봉산(三峯山)은 주 동쪽 23리에 있는데, 그 가운데 봉우리에 최영의 사당(祠堂)이 있다’고 나온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사람들이 (최영) 사우를 세워 끊임없이 제를 올리고 있다’고 기록한 점으로 미뤄, 이미 오래 전부터 최영 장군이 신으로 좌정한 것으로 보인다. 1388년 사망했으니 채 100년도 안 돼 신격화 작업이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의 인격신은 사후 신격화 작업이 이뤄지고, 서민들의 가슴에 상당 기간 남아 검증과정, 사회적 공감기간을 거친다. 다시 말해서 한 특정 영웅이 산신으로서 마을 수호신이나 무속신으로 좌정하기 위해선 사후 신격화 작업이 이뤄진 뒤 여러 세대를 거쳐 사회적 공감과정을 지나면서 더욱 더 숭배대상으로 전승된다는 것이다. 그 기간이 보통 200년 내외 걸린다. 이에 비하면 최영 장군은 엄청나게 빠른 시간에 신으로서 좌정했다.
<세종실록>에 최영 암시 두박신 기록 나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권72 18년(1436) 5월 기록에도 최영 장군으로 짐작되는 신이 소개된다.
‘어떤 사람이 지난 옛날에 참형 당한 장수와 재상들의 성명을 종이에 써서 장대에 걸어놓고 두박신이라고 호칭하므로, 동리마다 전해 가면서 서로 모방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며 의혹해서 제사를 지내는 데에 이르렀는데, 종이와 베를 다투어 가면서 내어놓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최영 사후 50년도 안 돼 이미 신격화 작업이 이뤄져 전승되는 과정이 역사기록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상기숙 한서대 교수의 논문 ‘최영 장군 무속신앙 소고’에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다.
‘<택리지>는 조선시대 1751년(영조 27) 청담 이중환의 지리서로 덕물산의 옛 이름인 덕적산과 최영 장군 사당을 언급했다. 즉 덕적산 위에 최영 사당이 있고, 내부에 소상이 있어 지역민들이 이곳에서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또한 사당 옆으로 침실을 만들어 민간에서 처녀를 뽑아 사당을 시봉토록 했는데 처녀가 늙거나 병들면 새롭게 젊고 예쁜 처녀와 바꾸기를 300년 동안이나 했다. 이 책이 쓰인 1751년 당시 사당 시봉자를 둔 전통을 300년 동안이나 해왔다면 사당 존립은 적어도 1451년경부터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때는 조선 제4대왕 세종에서 5대왕 문종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최영 장군신에 대한 내용은 박지원(1737~1805)의 <연암집>에도 나온다.
‘지금 중앙의 모든 관청과 지방의 주현에는 이청(吏聽)의 옆에 귀신에게 푸닥거리하는 사당이 없는 곳이 없으니, 이를 모두 부군당(府君當)이라 하여 매년 10월에 서리와 아전들이 재물을 거두어 사당 아래에서 취하고 배불리 먹으며, 무당들이 가무와 풍악으로 귀신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또한 이른바 부군이라는 것이 무슨 귀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려놓은 신상(神像)을 보면 주립(朱笠)에 구슬갓끈을 달고 호수(虎鬚)를 꽂아 위엄과 사나움이 마치 장수와 같은데, 혹 고려 시중 최영의 귀신이라고도 말한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청렴하여 뇌물과 청탁이 행해지질 못했고, 당세에 위엄과 명망을 드날렸으므로 서리와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신을 맞아 부군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 조선 초부터 서민들은 최영 장군신을 모시며 전승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官)에서는 막고 없애려는 작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나 <연암집>이 발간된 조선 후기까지 더욱 확대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이미 전국적인 신으로 확실히 좌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과 형식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현실 이상의 세계, 즉 영적인 존재의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종교 이전의 샤머니즘 성향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역사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고려 말이라는 난세는 최영 장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 같더니, 어느새 새로운 영웅 이성계가 역사의 승자로 떠올랐고, 최영 장군은 신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결과를 낳았다. 난세는 역사의 영웅을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화도 창조하는 측면을 봤다. 역사와 신화의 세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더욱이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靈的)인 산신의 세계는 더더욱 그렇다.
“덕물산 떠올리면 최영 장군 형상 다가와”
황해도 굿 무형문화재 제5호, 최영 장군 당굿보존회 회장 서경욱 만신
“사람은 산에서 나왔다가 산으로 돌아간다. 죽으면 빛과 같이 사라진다. 중천계는 지옥과 극락 또는 천국이 있을지 모르지만 더 높은 세계는 지옥도 극락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는 말을 쓰는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원래 왔던 자리로 간다는 말이다. 그게 산이다. 죽은 사람의 제사를 흔히 천도제라 하는데, 그 말도 마찬가지다. 천도는 하늘길이다. 사람이 원래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이 산이고 본향 자리다. 개성 덕물산 산신 최영 장군은 샤머니즘 세계에서 대표적인 만신의 주장신(主張神)이다. 만신들의 몸주신으로 강림한다. 최영 장군이 없으면 샤먼이 될 수 없다. 그가 왜 신이 됐는지 알 수 없다. 신의 세계는 복잡 미묘하다. 우리 같은 만신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제자의 세계는 단순하다. 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최영 장군 당굿보존회 회장 서경욱 만신. 그녀는 9세 때 신이 내려 50년 이상 최영 장군 당굿을 하고 있다. 최영 장군 당굿의 형식은 황해도굿이다. 서경욱 만신은 황해도굿의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예능보호자. 이른바 인간문화재인 것이다.
그녀는 최영 장군신을 찾지만 오히려 단군 산신은 찾지 않는다고 한다.
“단군은 우리의 뿌리이고 우주와 같기 때문에 찾지 않는다. 단군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
많은 신들 중에 어떻게 최영 장군신을 모시게 됐는지 궁금했다.
“내가 선택했는지 그분이 나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분의 뜻대로 움직일 뿐이다. 나는 신이 주는 대로 살라면 살고 시키는 지시대로 따른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주신 대로 하면 된다.
학자들은 분석과 전망을 하지만 나는 신에게 물어본다. 기도하고 물어보면 바로 답을 준다. 인터넷보다 훨씬 빠르다.”
그녀는 “한국은 신이 강림하기 가장 좋은 나라”라고 강조한다. 바로 “산이 많기 때문”이라고.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그 사람의 고향 산천마을을 찾는다. 이른바 주인을 찾는 작업이다. 그 조상이 본향이다. 원래 자리는 내 마음자리라고 강조한다. 마음자리를 찾는 법칙을 깨닫게 해주고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종교가 불교라고 말한다. 불교가 샤먼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선 못마땅한 표정이다.
“샤먼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우주목 역할을 한다. 우리 인생 자체가 굿이며, 만신의 굿판은 신과 인간이 신명나게 어울려 한 판 노는 행위다. ‘난리굿도 아니다’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때 굿판은 우리의 삶을 말한다. 모든 인간이 굿을 벌인다는 의미다.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황해도 굿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그녀가 개성 덕물산을 떠올리면 최영 장군의 형상이 그려지면서 그의 기운을 그대로 느끼고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개성을 그리면 최영 장군 사당과 장군신이 움직이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덕물산을 떠올리면 산만 한 크기로 형체가 보이다가 점점 실제 형상으로 줄어든다. 그러다 딱 멈추면서 ‘내가 덕물산의 최영 장군이다’라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고양과 철원에서도 일부 느껴진다. 그런데 홍성에서는 안 보인다. 홍성은 그 기운이 다 했는지 원래 없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느낀 대로 본 대로 말할 뿐이다.”
그녀의 말대로 신의 복잡미묘한 세계를 전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접하지 않고는 또한 모른다. 과연 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또한 산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녀의 말대로 우리 마음, 그 자리에 신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