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만 1만8,000여 神이 얽히고설켜… 자연재해 잦은 섬문화 특성 반영한 듯
1653년(조선 효종 4) 제주 목사 이원진이 <동국여지승람>과 <제주풍토록>을 참고해서 편찬한 <탐라지>에 한라산을 소개한 글이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 중앙에 흘립(屹立: 우뚝 솟은)한 해발 1,950m의 고산이라. 한라라 운(云)함은 운한(雲漢)을 가(可)히 라인(拏引: 붙잡아 끌어당김)할 수 있다는 숭고한 그 웅자(雄姿)를 표현하는 형용사이요. 일(一)은 두무악(頭無岳)이라 칭하니, 봉봉(峰峰)이 다 요함(凹陷:오목하게 들어감)한다는 것이요. 일(一)은 원산(圓山)이라 칭하니, 산형이 궁(穹)하고 원(圓)하다는 것이요. 일(一)은 부악(釜岳)이라 칭하니, 산상(山上)에 지(池)가 유하여 저수기(貯水器: 물을 담는 그릇) 같다는 것이라. 절정(絶頂)에서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부관(俯觀: 얼핏 보다)할 수 있으며, 5월에 적설(積雪)이 유재(猶在)하고 8월이면 한기(寒氣)가 습(襲)한다. 제주도의 원야(原野)는 이 거산의 광막(廣漠)한 거야( 野)로 대목장 우(又)는 삼림조영지와 대농장 등이 다 산의 대사면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서는 한라산을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소개한다.
‘한라산은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銀河의 의미)을 라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한라산은 옛날에는 두무악, 원산, 부악 등으로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두 산의 형체를 본떠 명명한 것이다. 실제로 한라(漢拏)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만치 높은’이란 의미를 가진 한라란 지명은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제주로 들어와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승려 혜일의 시에 ‘한라’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제주 조공천 위에 있는 서천암에 현재까지 그의 시가 전한다.
‘(전략) 한라고기인(漢拏高幾: 한라의 높이는 몇 길이던가)/ 절정저신연(絶頂猪神淵: 절정 위에는 신비한 못물이 고였다)/ 파출북유거(派出北流去: 물결이 넘쳐 북으로 흘러가서)/ 하위조공천(下爲朝貢川: 저 아래 조공천을 이루었네) 후략’
여기서 유래한 ‘한라’란 명칭은 <고려사> 공민왕 18년에 같은 기록이 보이며, 또 같은 내용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한다. 따라서 한라산이란 공식 지명은 고려 공민왕 시절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한라산 명칭 1300년쯤 등장한 듯
한라산은 고려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편입되지 않았던 탐라국이란 독립 국가로 존재했다. 신라가 부속국으로 점령했지만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신라의 조공국으로 내버려 두었다. 제주란 지명도 고려 후기 처음 나타난다. <고려사>에 제주란 지명의 첫 기록은 ‘고종 어느 해(1214~1224), 이때 탐라(耽羅)를 고쳐 제주(濟州)라 하고 부사 및 판관을 두었다. 이 지방 풍속이 옛날에 밭 경계가 없어 강폭한 무리들이 날로 잠식하여 백성들이 괴로워했다’고 나온다.
당시 조정에서는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육지 밖에 있는 하나의 큰 섬일 뿐이었다. 풍속에 대한 기록도 좋게 적어 놓지 않았다. 하지만 ‘삼별초의 난’을 겪으면서 인식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 과거와 같이 그냥 내버려두면 항쟁지로서 골치 아픈 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삼별초의 난 이후 한반도에서 볼 수 없었던 지역특산물인 귤과 생산지로서, 또는 유배지로서 관심을 받는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에 속한 목으로 제주도를 소속시켰다. 관리들이 부임해 오면서 중앙과 본격 교류를 하게 된다. 또한 유배객들도 상당수 내려오면서 제주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바뀌어 갔다.
제주로 부임해 오는 관리나 유배객들은 기어코 험한 한라산 정상을 오르려고 하는 특이한 현상을 보였다. 이는 <탐라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남극노인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남극노인성은 유일하게 한라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전설의 남극 별이다. 북반구에서 남극의 별을 본다는 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과학으로서 천문과 음양오행은 전혀 별개로서, ‘이 별을 한 번 보면 무병장수 한다’는 음양오행의 속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남쪽 하늘에서 낮게 떴다가 금방 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소문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코 정상까지 오르곤 했다. 진위여부를 차치하고 이를 대부분 믿었던 듯하다.
남극노인성을 찾아 한라산 정상까지 오르는 행위는 산신(山神)과 산신제(山神祭)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별은 하늘에 떠있는 것이고, 하늘은 신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던 시대다. 신이 이들을 모두 관리한다고 믿었다. 신을 숭배하고, 신의 뜻에 잘 따라야만 별도 보고 무병장수 할 수 있다는 개인의 강한 신념으로 연결된다. 한라산 정상에서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다는 유래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유래와 산신제와의 연결고리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흔적과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백록담 북벽에 제단의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서 산신에 대한 제사를 이곳에서 지냈지 않았나 추정하게 한다.
한라산 산신을 숭배하는 산신제도 한반도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고대부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초의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고려사> 계축(1253), 고종 40년(宋 보우 원년) ‘겨울 10월, 왕이 한라산신에 제민(濟民)의 호를 더하고 봄가을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역사에 나오는 한라산 산신에 대한 첫 기록이다. 이후 산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잇달아 등장한다.
<태종실록>에는 ‘태종 18년(1418) 4월 11일 한라산신제는 나주 금성산의 예(禮)에 의하여 여러 사전(祀典)에 싣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고 기록돼 있다.
<연려실기술> 권6 성종조 고사본말 ‘1470년 성종 원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한라산신묘를 세웠다. 이전에는 매번 한라산 정상에서 제를 올렸는데, 얼어 죽는 자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을 남쪽의 작은 산 아래에 묘단을 만들었다. 곧 산천단이다. (후략)’ -(<탐라기년>에서 인용)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는 한라산신에 대한 직접 언급이 나온다.
‘광양당(廣壤堂), 주 남쪽 한라 호국신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한라산신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됐다. 고려 때 송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제어하고 바다에 떠서 돌아가는데, 신이 화하여 매가 되어서 돛대 머리에 날아올랐다.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서 그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을 봉하고 해마다 향과 폐백을 내려 제사했고, 본조에서는 본읍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했다.’
덧붙이기를 ‘호종단이 와서 고려에 벼슬이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이르고 죽었으니, 와서 땅을 제어하다가 배가 침몰되었다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제주목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려 목종 5년(1002) 6월에 탐라산(耽羅山)에 구멍 네 개가 뚫려서 시뻘건 물이 치솟아 올랐고, 10년에는 바다 가운데 산 하나가 솟아나왔다. (중략) 무릇 7주야(晝夜)가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다. (중략) 속설에 전하기를 “한라산 주신의 막내 동생이 살아서 거룩한 덕이 있었으므로 죽어서 명신이 되었는데, 마침 호종단이 이 땅을 진무(鎭撫)하고 제사를 지낼 때를 당하여 신이 배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신이 매로 화하여 날아서 돛대 꼭대기에 올라 앉았는데,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가 난파됐다. 나라에서 그 신령함(靈異)을 포장해 식읍을 하사하고,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했는데, 해마다 나라에서 향과 폐백을 내려서 제사를 지낸다.’
1000년쯤에 한라산에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화산폭발을 산신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김상헌의 <남항일지(南航日誌)>에 선조 34년(1601) 9월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치제를 올리면서 ‘병이 없고 곡식이 잘 자라며 축산이 번창하고 읍이 편안한 것은 곧 한라산신의 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숙종 29년(1703) 제주 목사 이형상이 치계하기를, “명산대천은 모두 소사(小祀)에 기록되어 있으나, 유독 한라산만은 사전(祀典)에 누락되어 있습니다. <오례의>는 성화 연간에 편찬되었는데, 그때에 본주에는 약간의 반역이 있어서 혹 그것 때문에 누락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일찍이 이 일로 장계를 올렸으나, 해조(該曹)에 기각 당했습니다. 다시 품처하도록 하소서” 라고 했다.
판부사 서문중은 헌의하기를 “탐라에 군(郡)을 둔 것은 고려 말기에 비롯됐고, 국조에서도 그대로 답습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세 읍으로 나누었으니, <오례의>를 편찬할 때에 빠진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세대는 아득히 멀고 증거 삼을 문헌도 없는데, 몇 백 년 뒤에 억지로 의례를 만들어 먼 바다 밖에 향화를 내리는 것이 과연 합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영부사 윤지완은 헌의하기를 “국전에 없는 것을 이제 와서 처음 시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명산에 제사가 없다는 것은 이미 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주의 사체(事體)가 다른 도의 주나 군과는 다른 바가 있으니, 본주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되, 제후가 봉강 안의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과 같이 함이 무방할 듯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임금이 판하하기를 “한라산은 바다 밖의 명산인데, 홀로 산전에 들지 못했음은 흠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상의 의견대로 시행하라” 하고, 예조에서 치악산과 계룡산의 제례와 축문식에 따라 정월·2월·7월에 설행할 것을 청하자, 윤허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17년(1793) 제주 어사 심낙수에게 한라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고 기록돼 있다.
<제주읍지>에는 ‘산천단은 한라산신제를 지내는 곳인데, 담당관은 4명이고, 남문 밖 15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대정정의읍지>(1793년)에는 ‘효림단은 주성 남쪽 15리에 있으며, 한라산신제를 지내는 장소 옆에 포신단이 옆에 있다’고 돼 있다.
이와 같이 한라산 산신과 산신제를 지낸 기록은 문헌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신라시대까지의 산신은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제천의식과 호국정신, 이념적 통일성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고려시대부터는 그 성격이 조금씩 변한다. 즉 신라시대까지는 석탈해와 같이 왕이 직접 산신이 되거나 왕의 부모(박혁거세 어머니로 알려진 선도산 성모나 김수로왕의 어머니인 가야산 정견모주), 그리고 자연에 운명을 맡기는 토테미즘사상을 일부 반영해서 산신으로 숭배됐다.
하지만 고려시대 들어서 산신은 사원의 수호자로 등장하거나 승려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경우로 자주 나온다. 불교가 원래의 샤머니즘과 도교에 깊숙이 들어간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고려시대의 국교인 불교의 위상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산천신앙과 불교의 융합은 <동국이상국집>에서 산신을 국사(國師)로 상정하기까지 한다. 제주대 사학과 김동전 교수는 “산신신앙이 불교, 도교와 혼재해 나타나는 이유는 이 종교들이 고려사회에 널리 신봉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한라산 산신으로 화했을까? 주체가 인격신일까, 아니면 자연신일까, 신화 속의 인물일까? 한라산 산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설문대할망이다.
제주도에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섬 문화가 있다.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잦은 관계로 자연과 함께하려는 샤머니즘의 영향도 매우 강하다. 김동전 교수는 “제주에만 1만8,000여 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많은 신들 중에 가장 으뜸 신이 바로 설문대할망이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생성시키고 한라산을 만든 창세신화의 주인공이다.
설문대할망 신화가 언제부터, 어디서 유래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녀는 제주 최고의 신이라는 사실만 오늘날까지 전할 뿐이다.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체 오랫동안 구전돼 내려온 신화라, 제주도 각 지역마다 전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엄청난 거인이고, 제주도와 한라산을 만들었다는 점은 공통으로 나타난다. 제주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한 진성기씨가 쓴 <그리스신화보다 그윽한 신화와 전설-제주도 전설집>에 나오는 설문대할망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화와 전설, 산신과 산신의 아들을 모두 아우르는 얽히고설킨 내용이다.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 말잣딸(셋째 공주)이었다. 워낙 호기심도 많고 활달한 성격이라 천상계에서의 생활이 무료하고 갑갑했다. 게다가 거대한 몸집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옥황상제는 진노했다. 게다가 땅의 세계는 옥황상제의 권역 밖이었다. 옥황상제는 말잣딸을 당장 땅의 세계로 쫓아냈다. 설문대할망은 속옷조차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바깥세계를 갈라 놓을 때 퍼놓았던 흙만을 치마폭에 담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
인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치마폭에 있는 흙을 내려놓을 곳을 찾아 헤맸다. 남극노인성이 비치는 아늑한 곳을 찾았다. 인간들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할망이 곱게 치마를 내리자 흙은 타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곳이 바로 제주다. 할망은 흙이 굴곡 없이 평평한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손으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 정상에선 저 멀리 남극노인성이 보였다. 노인성은 크기가 샛별 같고 남극의 축에 있어 땅 위에 나오지 않는 신령스러운 별이다. 어쩌다 출몰한 노인성을 보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믿었고, 왕도에서 보면 형운(亨運)이라 하여 많은 사람이 선망했다. 오직 한라산과 중국의 남악에서만 이 별을 볼 수 있었다.
신화와 전설, 역사와 절묘하게 어울려
한라산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꾼이 한라산에 사슴을 잡으러 정상까지 갔다. 한라산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다. 마침 정상에서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은 급히 활을 쏘았다. 그 활 끝은 끝없이 날아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드렸다. 그때까지도 말잣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있던 옥황상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한라산 봉우리를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 서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 봉우리가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에 떨어져 산방산이 되고, 봉우리를 뽑힌 자국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됐다(백록담 전설은 다시 흰 사슴 관련 전설로 파생된다).
할망은 한쪽 발은 성산읍 오조리의 석산봉에 디디고, 다른 발은 일출봉에 디뎌 소변을 보았다. 그 소변 줄기가 얼마나 세찼던지 땅이 패이며 강이 되어 흘러갔다. 그러다가 오줌 강이 깊어져 그만 섬 한 귀퉁이가 잘려 버렸다. 그렇게 동강난 땅이 소섬(牛島)이 됐다. 성산과 소섬 사이는 깊은 바다가 되었고, 조류도 세어서 지나던 배가 파선하는 일이 허다했다.
할망은 천상에서 만져 볼 수 없었던 흙을 가지고 오래도록 주무르며 몰두했다.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흙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들이 360여 개의 오름이다. 오름을 만들다 쉬고 싶으면 서귀포에 만들어 놓은 고근산 굼부리에 궁둥이를 얹은 다음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고근산 굼부리는 설문대 할망의 엉덩이선이 그대로 찍혔다.
설문대할망도 여성이었다. 누군가 그리웠다. 어느 날 바닷가로 내려가 해물을 잡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고개를 드니 어떤 거인이 서 있었다. 그 거인은 설문대하르방이라는 어부였다. 설문대하르방의 키는 한라산만 했고, 남근은 갈대 세 대만큼이나 길었다.
둘은 사이좋게 지냈다. 부부의 연까지 맺었다. 일 년이 지나 설문대할망은 아들을 낳기 시작하더니 오백 형제를 낳았다. 오백 형제를 낳고 할망은 무척 허했다. 바다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할망과 하르방은 바닷가로 내려갔다. 바다에 이르러서 꾀를 냈다. 하르방은 소섬 바다 쪽에서 긴 남근으로 이 구멍 저 구멍 바위굴마다 고기를 몰아오고 할망은 표선 바다 쪽에서 하문을 열고 앉아 있기로 했다. 할망은 고기들이 제법 많이 들어오자 하문을 잠그고 뭍으로 나왔다. 할망과 하르방은 그 고기들을 한 끼니로 모두 끓여 먹었다.
오백장군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오백장군이 집으로 돌아와 죽을 먹었다. 모두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보니 할망이 죽을 끓이다 빠져 죽은 뼈가 나왔다. 아들은 통곡했고, 막내아들은 차귀섬으로 가서 장군바위가 됐고, 나머지 499명의 아들은 영실기암이 됐다.
제주도는 섬이었지만 장수가 많이 태어날 혈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두려워한 중국의 진시황(송나라 t시절인 고려 예종 때라는 설도 있다)이 지관인 호종단을 보내어 제주의 혈맥을 끊도록 했다. 호종단이 한라산에 올라 쇠판을 붙여 놓고 동쪽으로부터 혈맥을 끊었다. 서쪽으로 돌아와 지장새미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지장새미 옆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그만 할머니가 나타나서 “빨리 날 좀 숨겨 주시오. 저 호종단이란 놈이 물혈을 뜨러 왔는데 숨을 곳이 없어요”라고 했다.
물귀신 할머니 물할망은 망설임도 없이 농부가 가르쳐준 헹기물에 들어가 숨었다. 호종단이 농부에게 샘을 찾으려고 하자 그런 곳이 없다고 했다. 호종단은 지리문서를 찢어 버리고 더 이상 물혈을 뜰 수 없다고 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그만 차귀섬 앞에서 갑자기 돌풍을 만나 호종단은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장군바위가 그를 벌한 것이다.
장군바위는 500장군 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서 차귀도까지 가서 장군바위가 됐고, 나머지 499명도 모두 바위로 굳어졌다. 이렇게 해서 생긴 바위가 영실기암이다. 오백장군이라 부르지만 한라산 서쪽 비탈에는 499장군이 서 있으며, 차귀섬에 혼자 외롭게 떨어져 있는 장군바위가 막내다.’
제주도에 전하는 신화와 전설에서 설문대할망은 창세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학계에서는 지리산 산신인 노고할미와 마찬가지로 죽어서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하늘로 가지 못하고 한라산 산신으로 화했다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라산 산신도 시대가 흘러갈수록 초기의 여신에서 남성신으로 변화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문대할망이 여신으로 좌정했다면, 호종단 사건 이후는 남성신으로 변화한다. 이는 기원 전후 고대사회가 모계 중심의 여성이 중시되던 시대였다면 점차 남성의 강력한 힘이 중시되는 시대로 변하면서 남성신의 모습이 등장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주에서도 남성 산신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호종단을 물리친 광양왕이다. 광양왕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바로 그 광양왕인 것이다. 한라산신의 아들이라는 설과 아우라는 설, 그리고 한라산신과 광양당신이 동일시되는 경향도 띤다. 광양당은 또 제주도의 세 성씨의 시조인 고·양·부 삼성혈 신화와도 맞물린다. 이와 같이 제주 신화와 한라산 신화는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에다 1만8,000여 신과도 연결되는 특징을 가진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한라산 산신에게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도교적 무속적 신의 대표격이었던 광양단의 폐사는 상징하는 바가 컸다. 이를 두고 제주 향토사학자이자 제주학연구센터장 박찬식 박사는 “산신의 도교적 무속적 성향에서 유교적 성격으로 변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도교적 무속적 성향과 유교적 성격의 결정적 차이는 귀신을 불러들이는 굿과 같은 행위와 단지 형식에 치우쳐 죽은 자에 대해 예를 다하는 행위로 구분된다.
설문대할망과 광양왕, 이들은 한라산의 산신이기도 하지만 제주도에 살아 있는 신화이자 전설이다. 제주도를 하나로 만드는 상징적 원동력이다. 산신제는 고대로부터 있어 왔던 하늘과 땅의 기운을 소통해 인간사회의 안녕과 기복을 구하는 제사의식이다. 이 제사의식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단합을 꾀하고 일체감과 정체성을 심어 줬다. 제주도는 이 한라산 산신들이 있기에 더욱 ‘살아 있는 신화의 섬’으로 거듭나는 것 같다.
한라산을 언제부터 ‘삼신산’ 영주산으로 불렀을까?
조선 후기 17세기 들어 문헌과 고지도에 한라산에 영주산 표기 보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고적편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중략) 한라산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후략)’
한라산을 가리켜 영주산이라 명기한 최초의 기록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서는 오히려 변산을 영주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후기 들어 한라산이 유산록에 등장하면서 명산반열로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탐라지> ‘김치의 유한라산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영주산이 곧 한라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 잇달아 등장한다.
조선 전기 지도에서는 제주도나 한라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중기부터 한라산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조선 후기 들어 <여지도>, <팔도총도>, <지도서> 등에 한라산 옆에 ‘영주’라고 조그맣게 병기돼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한라산이 삼신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불린 것은 불과 30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리산은 한라산보다 훨씬 이른 조선 초기부터 방장산으로 불리고 고지도에도 병기돼 나온다.
반면 우리나라보다 오래된 중국 역사서에는 한라산을 지칭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삼신산 지명이 몇 차례 언급된다.
사마천 <사기(史記)>(B.C 100년 전후)에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라 한다’고 돼 있다. 역시 기원 전 역사서이자 신화집인 중국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편에 ‘봉래산은 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전설 속의 산인지 실재하는 산을 확인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영주산이 한라산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중국의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지리산은 한라산보다 더 오래 전부터 방장산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문헌상으로 파악된다. 영주산이란 명칭을 풀어 쓰면 ‘바다 가운데 있는 섬 산’이 된다. 조선 후기에 바다 가운데 있는 섬 산이라고 해서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갖다 붙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측면이다. 또한 우리나라 삼신산은 조선 선비들의 유산이 본격화되는 조선 후기 들어 일반화된 사실을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라산이 영주산으로 불리게 된 시기는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대략 1700년대 들어서부터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