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1 부채춤
전황은 최승희로부터 ‘안무가 좋다’는 칭찬을 받곤 했다.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섯 종류의 ‘부채춤’을 안무했는데,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시 28명의 무용수들이 전황안무의 부채춤을 선보였다. 공연 후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과 한국무용가 조택원이 반도호텔로 전황을 불러냈다. 국위선양을 했다며 전황에게 금일봉이 전해졌다.
전황의 ‘부채춤’ 대형은 57년 전황안무의 ‘꽃춤’에서 유래됐다. 여성국극단의 ‘꽃피는 여왕궁’ 공연 후 관객들이 무용수들에게 건넨 꽃목걸이로 양손에 들고 추는 꽃춤을 만들었다. 파도처럼 일렁이게 연결되는 춤, 원모양으로 동그랗게 추는 춤, 동서남북으로 꽃맞대기 춤 등 우리가 아는 부채춤 대형을 시도했다.
# 비밀2 농악
전황은 마당에서 펼쳐지는 농악을 공연장 무대에 올린 선구자이다. 농악을 세분화, 사물놀이 장구춤 소고춤 젓대 열두발 등 악기 들고 추는 춤의 집합체로 무대화했다. 좌도 농악과 우도 농악의 장점만 뽑아 15분 동안 50~60명이 추도록 구성했다. 가락도 다양하게 구성했다. 러시아 코자크춤에서 힌트를 얻어 앉아서 발 돌리며 뛰어오르는 테크닉까지 고안했다. 자진모리로 내치다 잠깐 멈춘 후 다시 숨도 못 쉴 만큼 빠른 박자로 악기를 연주하는 등 각 공연의 마지막을 농악으로 장식하는 공연 양식도 전황에게서 비롯됐다. 처음 선보인 건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68년 멕시코올림픽때 남사당 출신인 김덕수 등을 캐스팅, 김덕수는 장구치며 자반돌리기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81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 축하 공연에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국수호 김덕수 최종실 등 400명이 올라가 농악 ‘풍요로운 내 고장’을 선보였다.
‘초립동’ 문학소녀, 숨죽여 날다
‘남편 조택원(1907~76)은 영원한 나의 연인. 우리 결혼, 정말 무용계의 사건이었다.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였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오사와 준코와 동거하던 조택원. 21년 연상의 그 사람이 나와 결혼할 때, 모두 놀랐다. 화장실도 갈 것 같지 않게 고귀한 신사. 작고하는 순간까지 나를 걱정했다. 위암선고를 받을 때, 물론 마음의 준비는 했었다. 낙엽비가 내리는 깊은 가을, 일흔번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립다.’
#예쁘게 태어난 게 죄, 남난(男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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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가 김문숙(80)은 무용계의 스타플레이어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조용히 자기 세계를 이룬 것이다. 한국 신무용의 거두 조택원과의 결혼후 ‘남편 덕에 잘 나간다’는 말이 듣기 싫어 더욱 조용히 활동해왔다. 기자가 안타까워 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김문숙은 왜 침묵하는가. ‘조택원의 안사람이어서 잘 나갔다기보다 잘 나갔기 때문에 조택원의 안사람이 됐음’을. 남들과 비슷한 춤을 추기 싫어 김문숙 특유의 문학성 짙은 한국 창작춤을 추며 살아왔음을.
김문숙은 1928년 12월27일 서울 효자동 본가에서 김경용과 박옥희의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9남매의 장남. 장남의 장녀인 문숙은 어릴 때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어른들이 서로 문숙을 안고 다녔기 때문이다. 부여 양반집 딸인 어머니는 편물박사였다. 직접 뜨개질한 옷을 딸에게 입혔고 문숙은 예쁜 옷 입는 애로 소문났다.
6세에 신개발지역인 창신동의 새 기와집으로 이사가 창신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분가할 때마다 집을 지어주었다. “당시 학교를 걸어다니느라 지금도 다리가 건강한가 봅니다.” 동대문에서 전차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배화고등여학교를 다니다 가회동 집으로 이사했다. 여학교에선 성악·연극·피아노연주를 했다. 직접 쓴 연극대본으로 연극공연도 했다. 피아노도 체르니 시리즈를 모두 마쳤지만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했다. 춤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어머니는 문숙이 춤춘다고 하자 “딸을 기생질시킨다는 소리 듣기 싫다. 창피하다”며 반대했고 문숙은 7~8년 동안 어머니 앞에서 춤추지 못했다. 당시 한국춤 추는 이들은 무업을 하는 집안이거나 교방에서 춤을 배운 예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당시 조택원과 최승희가 춤을 예술로 승화시키지 않았다면 지금도 계속 천시받고 있을 것입니다. 제 끼는 어릴 때부터 싹텄습니다. 무용은 유치원때 시작했고 19세에 정식으로 함귀봉 무용학원을 다녔죠. 엄마가 안고 있으면 그 손안에 서서 춤출 만큼 예능의 끼가 강했습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까불이’였겠어요.”
까불이는 배화고등여학교 학예회에서 ‘초립동’을 안무해 춤추고 연극도 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초립동’을 추었다. 이화여대에 진학하려다 임영신 중앙여대 설립자가 장학금 줄 테니 중앙여대로 입학하라고 했다. “중앙여대 문과로 입학해 시를 창작하려 했는데, 2학년 되던 해 남녀공학인 중앙대학이 되더군요. 신입생 환영식에 뽑혀 나가 강당무대에서 ‘초립동’을 추었죠.”
#약혼자와 떠난 일본유학
‘초립동’이 문제였다. 그 춤을 춘 김문숙의 모습에 반한 연상의 신입생이 그를 따라다녔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한국에 왔다는 그 사람, 홍씨는 김문숙을 못살게 했다. 스토커였다. 4학년을 앞둔 겨울 방학 때 홍씨는 약혼을 하자고 졸랐다. 약혼식을 치르고나자 더욱 심하게 김문숙에게 매달렸다.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사실 저는 같은 학교 음악학도인 곽씨를 좋아했는데 마음만 있을 뿐 내색은 하지 못했죠. 홍씨가 약혼하자고 덤벼드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했어요.” 홍씨는 약혼후 일본으로 유학가자고 김문숙을 부추겼다.
“차마 부모님께는 일본간다고 못했죠. 여학교 친구들 만나러 지방간다며 홍씨와 부산행 기차를 탔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교수에게 들킨 겁니다. 아찔했죠. 그건 나중에 큰 일이 되고 마는데…, 어쨌든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죠. 얼마후 일본을 다녀오니 제가 퇴학처리돼 있더군요. 대자보에 남학생과 부산가는 기차를 타고 도망갔다는 내용이 실린 거예요. 결국 홍씨와 저는 퇴학당했는데, 서울 대학가의 유명한 사건이었어요. 결국 저는 남자도, 학력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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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용에 빠진 젊은 김문숙 |
일본에서 일어난 일부터. 도쿄로 무용가 이시이 바쿠를 찾아가는 도중 오사카에서 다카라스카를 관람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정식 입국신고를 하지 않아 검사 앞에 설 줄이야. 이시이 바쿠를 찾아왔다고 하니 검사는 김문숙을 사문서 위조로 처리해 일본에 남도록 선처했다.
당시 대학생 사회에선 일본유학 바람이 불었는데, 김문숙이 탄 7t짜리 배에도 남학생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고 운동화차림의 예쁜 여학생이 이시이 바쿠에게 무용을 배우러 왔다니 어떤 검사가 그를 한국으로 추방하겠는가.
“제 보증을 선 조선인 사업가 집에서 지내는데, 그 가족들이 저녁만 되면 어디로 가는 겁니다. 따라가보니 그들이 빨간 국기 아래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조총련이었어요. 당시 인텔리들은 빨갱이여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무서워서 하지 않았죠. 그 사업가에게 대놓고 싫다고는 못하고 거주지를 옮기겠다고 하니 저를 음악학원으로 보냈어요. 그곳에서 이시이 바쿠를 찾아가니 순회공연 가고 없는 거예요. 다시 현대무용가 하토리 지에코를 찾아갔는데, 그 역시 파리 공연을 가고 없더군요.” 운명을 바꾼 타이밍. 그때 그들을 만났으면 김문숙은 현대무용가가 됐을 터였다.
타향살이의 서러움. 김문숙은 영양부족으로 병이 났다. 극빈자를 위한 요양시설에 머무는데, 마침 그의 슬픈 사연이 아이레스 카메라사 사장인 한국인 가네코의 귀에 들어갔다.
“저를 위로하고 갔는데, 그가 치료를 위해 스트렙토마이신 주사값을 냈다는 걸 몰랐죠. 온 몸에 염증이 퍼지고 얼굴이 부었는데 주사를 맞으니 붓기가 빠지더군요.” 고마워서 울었다. 공부하러 와서 무슨 일인가. 결국 남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국으로 다시 와야 했던 김문숙은 오무라수용소를 택했다. 그 곳을 가야 한국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다 6·25전쟁이 터졌다. 그 과정에서 가케코가 훗날 남편이 되는 조택원 친구 가네코 소세키(상석)의 동생임을 알았다.
도대체 일본에 가자고 유혹하던 약혼자는 어떻게 됐단 말인가. 약혼자는 도망갔다. 물론 김문숙의 병원에 찾아오긴 했지만…. 김문숙이 한국에 올 때 같이 들어왔다. “홍씨가 왜 일본으로 가자고 독촉을 했는지 아세요? 저를 따라 다닐 때 이미 평양에서 결혼한 사람이었어요. 5대 독자라 일찍 결혼하고 일본까지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제 춤을 본 거죠.”
그 후 김문숙은 남자 기피증에 걸렸다. 남자라면 우선 진저리부터 쳤다. 홍씨는 귀국한 김문숙을 용산 자신의 누나집에 있도록 했다. 문숙의 부모가 홍씨의 기혼 사실을 알까봐 노심초사했다. 나중에는 김문숙을 용인에 있는 절에 가두었다. 김문숙의 마음이 변하면 보트에 태워 한강에 떨어뜨려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다. (홍씨는 40대에 작고했다)
다시 중앙대를 졸업못한 이유를 들어보자. “임영신 설립자가 저를 교수 만든다며 미국 유학가려면 교육과로 전과하라더군요. 그런데 건강진단 결과 엑스레이에 폐를 앓은 자국이 있어서 미국 유학을 떠나지 못했답니다. 교육과로 전과했지만 연극은 했죠. 춤은 별로 취미가 없고 연극이 좋았어요. 그러나 부산행 기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교수에게 들켰잖아요. 그래서 퇴학당한 거죠.” 학교운이 없다. 다시 1·4후퇴때 복학하려 부산으로 피란 내려간 중앙대로 가니 이미 학교는 서울로 올라간 후였다.
#영양실조 걸려도 춤이 좋았다
춤은 46년 서울 명동에서 일본유학파인 함귀봉의 교육무용연구소를 다니며 시작했다. 48년 일본유학 가기 전까지 다녔다. 조동화·정병호·차범석·김경옥·김문숙·정혜옥·함귀봉 처제 등이 1기생. 한동인·진수방·장추화 등이 강사로 발레, 남방무 등을 가르쳤다. 김문숙은 장추화에게 남방춤, 진수방에게 한국춤을 배웠다.
일본 유학후 1·4후퇴. 부산 피란시 김문숙은 다시 영양결핍으로 얼굴이 부었고 홍씨가 부산에 피란간 자신의 누나 집에 데려다 놓고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맞게 해주었다.
“밤낮으로 훙씨 누님댁에 예술가와 후원자들이 모여드는데, 그 중 예술가를 후원하는 이가 저에게 누님댁에 묶여있지 말고 도망가라며 부산진구에 방을 얻어주더군요. 영양결핍으로 머리가 빠져 머플러로 머리를 가리고 도망쳤죠.”
홍씨는 김문숙이 부산에 있는 줄 모르고 김문숙을 찾으러 서울로 갔다. 김문숙은 동네 아이들에게 ‘초립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때 길에서 조동화 선생(현 월간 ‘춤’ 발행인)을 만났는데 안부를 묻던 중 저에게 부산으로 피란간 서울여상 교사 자리를 주선해주었어요. 조선생의 친구가 그 학교 교사라 가능한 일이었죠.”
2년후 돌아온 서울에서 박성옥·이숙향·한순옥 등을 만나 한국무용을 배웠다. “최승희춤 반주자인 박성옥이 저에게 한국무용을 하라고 권하더군요. 인텔리가 한국무용을 춰야 한다며 춤가락을 먼저 배우라는 겁니다.” 서울여상 수업을 마치면 박성옥에게 북가락을 배웠다. 장구가 없어 무릎장단을 치며 배웠다. 그후 승무·검무·화관무도 배웠다. 하루는 박성옥과 절친한 한국무용가 최희선이 원주에서 공연하라고 전해왔다. 김문숙·조용자·김미화·김인희·배숙자(배정혜 국립무용단장의 본명)가 무용단을 조직해 지방을 순회공연했다. 박성옥의 반주로 춤추었다. 조용자는 화관무, 7살 무용천재 배숙자는 탈춤을 추었다. 당시 북한군이 쳐들어오지 않은 강원도 지역에서만 공연하고 환도할 때 서울로 왔다.
#문학소녀의 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54년 서울 충무로5가에 빚을 얻어 무용연구소를 냈다. 다른 식구들은 공주로 피란간 후 그 곳에 정착했고 어머니와 연구소를 지켰다. 학생이 많았다. 제자들을 위해 ‘별주부전’ 등 옛 동화를 무용극으로 만들기도 했다.
첫 무용 공연을 준비하며 일화도 많다. 전쟁후 어수선한 와중에 무대 의상이나 소품을 만드는 곳이 있을 리 만무. 김문숙은 한복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울긋불긋 원색이 싫어 파스텔 족두리를 만들기 위해 딱딱한 책받침을 잘라 모형을 만들고 구멍을 뚫어 구슬을 매달았다.
58년 첫 개인발표회에서 김천흥에게 배운 화관무를 소재로 한 ‘대궐’을 안무해 춤추었다. 명무 ‘대궐’은 일본소설을 읽으며 사춘기를 보낸 김문숙의 문학성이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으로 궁녀의 비애를 그린 춤이다. 또 현대적인 창작춤 ‘연체’, 승무를 원근법을 이용해 시각적으로 구성한 ‘귀의’ 등을 발표했다. 또 유진오 박사 집에서 읽은 중국야화 ‘모란등기’를 소재로 대본을 쓴 무용극도 안무했다.
한영숙에게 ‘승무’ ‘살풀이’도 배웠다. 한영숙을 비롯, 당대의 스타 무용가들과 한 무대에 설 때마다 한영숙은 ‘네가 나보다 키가 크고 자태도 고우니 살풀이춤을 추라’며 양보하곤 했다. 훗날 조택원이 “한영숙의 춤을 추지 말고 김문숙의 뜻이 담긴 춤을 추라”고 한 후 동작을 바꾸기 전까지 그랬다. ‘살풀이춤’ 중 허공에 수건을 던지는 대목이 있는데, 수건을 애인으로 해석해 춤추며 애인(수건)을 바라보며 사선으로 걸어가다 다시 집어들어 바라보는 장면으로 구성했다.
첫 발표회는 결혼전 58년 명동 시공관에서 했다. 원래 하루 공연 예정이었으나 인기가 좋아 하루 더 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공보관이 스폰서를 자청해 하루 더했다. 몇년 동안 저금해 모은 돈으로 공연했는데 그 돈이 다시 들어왔다. 몸무게 43㎏의 개미허리에 청순가련형의 미모를 자랑하는 무용계 스타. 김문숙이 뿜어내는 춤의 열정은 6·25전쟁후 여위어가는 대중의 마음과 삶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문숙 약력
46년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48년 함귀봉 교육무용연구소 졸업 50년 중대 교육학과 4년 중퇴, 함귀봉 무용발표회로 무용공연데뷔 54년 김문숙 무용학원 개설 56년 김천흥 무용연구소 입소 58년 제1회 김문숙 무용발표회 59년 NBC TV 초청 미국공연 60년 유럽·중동·동남아 순회공연 61년 조택원과 결혼 62년 프랑스 국제민속예술제 및 유럽순회공연 67년 세계민속무용연구차 두 달 동안 세계일주 68년 멕시코올림픽 예술제 참가공연 70년 한국민속예술단 동남아예술제 공연 71·73년 한국문화사절단 유럽순회공연 72년 중대 개발대학원 사회교육과 수료 74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중대 무용과 강사 90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92년 춤의 해 명무전에서 ‘가사호접’ 공연, 한국무용협회 지정 명무 ‘사가호접’ 보유자로 지정 93년 서울춤아카데미 설립, 회장 취임 95년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 96년 국립무용단 명예종신단원, 국립극장에 남편 조택원춤비 세워짐 97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98년 김문숙 무용인생 50년 기념 대공연 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2002년 무용원 초빙교수, 2004년~현재 무용원 겸임교수 2007년 4월 한국무용협회 지정 명작무 ‘대궐’ 보유자로 지정 수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73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예술공로상(91년), 예총 문화대상(2000년), 한국무용협회 무용대상(200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2003년), 스승의 날 기념 올해의 스승상(2004년), 벽사춤아카데미 벽사본상(2005년) |
김문숙 “현대무용이 미친듯 좋았어요”
남편 조택원의 춤 ‘가사호접’을 이어온 김문숙. 조택원은 작고하기 2~3년 전부터 김문숙 송범 최현 임성남 등에게 자신이 안무한 작품들을 물려주었는데, 김문숙은 ‘가사호접’을 받았다.
문학성 짙은 한국창작춤을 추어온 김문숙은 1992년 한국무용협회가 지정하는 명무 ‘가사호접’ 보유자에 이어 지난 4월 자신이 58년 첫 개인발표회에서 공연한 창작춤 ‘궁궐’로 명무 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97년 예술원 회원 임명에 이은 또 하나의 경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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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변뇌를 주제로 한 김문숙 안무의 ‘귀의’ (1962년 촬영) |
#첫 개인발표회에서 ‘대궐’을 추다
춤은 46년 서울 명동에서 일본유학파인 함귀봉의 교육무용연구소를 다니며 시작했다. 48년 일본 유학가기 전까지 다녔다. 조동화 정병호 차범석 김경옥 김문숙 정혜옥 함귀봉 처제 등이 1기생.
일본 유학후 1·4후퇴. 부산 피란시 김문숙은 동네 아이들에게 ‘초립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때 길에서 조동화 선생(현 월간 ‘춤’ 발행인)을 만났는데 안부를 묻던 중 저에게 부산 피란간 서울여상 교사자리를 주선해주었어요.”
서울 환도후 서울여상 수업을 마치면 최승희의 전속반주자였던 가야금연주자 박성옥에게 북가락을 배웠다. 장구가 없어 무릎장단을 치며 배웠다. 김문숙 조용자 김미화 김인희 배숙자(배정혜 국립무용단장의 본명)와 무용단을 조직해 지방을 순회공연했다. 조용자는 화관무, 7살 배숙자는 탈춤을 추었다. 당시 북한군이 쳐들어오지 않은 강원도 지역에서만 공연하다 서울로 왔다.
환도후 56년 서울 충무로 5가에 빚을 얻어 무용연구소를 냈다. 무용발표회를 준비하며 무대 의상이나 소품을 만드는 곳이 없어 김문숙은 한복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울긋불긋 원색이 싫어 파스텔 의상을 제작했다. 족두리를 만들기 위해 딱딱한 책받침을 잘라 모형을 만들고 구멍뚫어 색색 구슬을 매달았다.
58년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제1회 김문숙무용발표회. ‘대궐’을 안무해 추었다. 원래 하루 공연 예정이나 인기가 좋아 하루 더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관이 스폰서를 자청해 하루 더했다.
#조택원의 세번째 부인이 되다
59년 미국 NBC 방송국에서 ‘다이애나 쇼’라는 프로그램에 나갈 한국무용가들을 초청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는데, 김문숙 김백초 최경애 등 3명이 선발됐다. 이들은 LA,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을 여러달 동안 순회공연했다. 귀국길에는 일본공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정식 해외공연이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 한국동란을 주제로 하는 영화 촬영을 한다며 저를 배우로 캐스팅하겠대요. 그러나 파리 공연이 예정돼 있어 거절하고 귀국길에 일본에 들렀죠.” 일본 공연장 근처에서 조택원을 우연히 만나 그를 공연에 초청했다. 두번째 만남이었다.
첫 만남은 19살 대학생때 함귀봉 학원에서의 조우. 세번째는 김문숙이 원각사에서 ‘춘향전’을 연습할 때였다. “제 연구소를 드나들면서도 춤은 봐주지 않고, 저를 보고싶어 왔다며 한국에 정착하고 싶다는 거예요.” 홍씨 때문에 피폐해진 마음이 눈처럼 녹았다. 34세. 조택원의 세번째 부인이 됐다.
“정말 남자라면 지겨웠습니다. 결혼사기를 당한 후 절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데, 조택원 선생이 이미 결혼 소문을 내버렸더군요. 보는 이마다 ‘조택원과 언제 결혼하느냐’고 축하해왔습니다.”
21세 연상의 남편은 매너 ‘짱’이었다. 신혼여행으로 넉달 동안 세계를 돌았다. 통장에는 돈 한푼 없지만 정부와 사업가 친구들이 후원했다.
“생활비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조택원 선생은 남편이 아니고 마지막까지 애인이었어요. 부부가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싸울 일이 없었죠. 제가 벌어서 생활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대신 부부가 일본을 방문하면 도쿄시내 최고급 호텔인 제국호텔에서 묵고 옷도 명품으로 휘감았다. 구두와 핸드백도 당연히 명품. 페미니스트인 조택원으로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였다. “아프레부, 마담(Apre's vous, madame·당신 먼저)”이 입에 붙어 있었다.
“외국생활이 몸에 젖은 분과 결혼하니 생활 자체가 예술인겁니다. ‘예술 하려면 김문숙 자신이 아름다워야 한다’며 ‘세계적인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은 살림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창피하지만,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밥을 할 줄 모른답니다. 하하하….”
조택원은 늘 김문숙에게 사랑했던 여성들을 이야기 했다. ‘제일 예쁜 여자는 둘째 부인 김소영이고, 희생한 이는 오사와 준코, 제일 지성인은 김문숙이다. 내가 죽을 때 나에게 물이라도 한모금 먹일 여자도 김문숙’이라고. 다른 여성들과는 10년을 살지 못했는데 김문숙과는 15년을 살았다. 뿐인가. 김문숙은 남편의 춤 ‘가사호접’을 공연하며 이 땅에서 조택원의 춤혼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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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물터진 해외공연
해외공연이 힘들던 당시, 김문숙은 외국에서 한국을 알리던 홍보대사였다. 60년 파리 사라 베르나극장에서 ‘춘향전’(임성남 연출)을 공연한 후 스위스, 터키 등 두달동안 유럽을 순회공연했다. 춘향은 권려성, 이도령 조용자, 방자 김문숙, 향단 강선영, 월매 김순성의 캐스팅.
62년에는 정부 지원으로 김백봉, 김소희, 박귀희 등 국악인들과 함께 유럽공연을 떠났다. 특히 그때 춘 9고무 ‘귀의’는 프랑스 교육교재로 사용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1000달러를 받고 교재촬영까지 했다.
일번본 오사카에서 열린 ‘엑스포 70’에선 24개의 북을 치는 ‘24고무’로 한국을 알렸다. 서울 퇴계로 주만영무용학원에서 배운 북가락을 토대로 108번뇌의 승무를 창작했다. 당시 ‘차차차’ 등 빠른 음악이 유행인데 9개의 북에 그 리듬을 응용해 팔 크게 휘두르며 빠른 가락을 쳤죠. 게다가 몸을 뒤로 제끼고 뛰어다니며 북을 치니 관객들이 브라보를 연발하더군요.”
김문숙의 창작력은 아무도 못따랐다. ‘살풀이춤’의 하얀 한복의상도 김문숙에서 비롯됐다. 해외공연 참가를 위한 시연회에서 부풀린 속치마에 자주 고름의 흰색 한복을 입고 일본에서 만든 가발을 쓰고 출연한 김문숙에게 언론인 고 홍성유가 “왜 하얀 한복을 입느냐. 원래대로 옥색을 입고 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김문숙은 “원 뜻을 살리기보다 무대예술인 만큼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보이려면 흰색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답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그후 외국인에게 인기있는 한국인형들의 한복은 하나같이 김문숙의 ‘퍼지는 하얀 한복’이 트랜드였다.
#별명은 ‘했다고 하고’
해외공연만 한 게 아니다. 김문숙은 74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면서 ‘별의 전설’ ‘심청전’ ‘왕자호동’ 등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한영숙의 ‘살풀이춤’, 전황의 ‘사랑가’ 등을 추었다. 그런데 그때 웃기는 별명이 김문숙에게 붙었다. ‘했다고 하고’. 국립무용단의 ‘심청전’연습때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준비한 대형작품이어서 음악에 맞추느라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연습했는데, 매번 김문숙은 자신이 출연해야 할 장면에서 ‘나는 했다고 하고 진행하세요’라고 주문했다. 김문숙의 항변. “일본에서 음악학원을 다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추는 건 자신 있었죠. 다른 이들보다 춤순서 외우는 것도 빨랐고….”
일정하게 움직이는 한국춤보다 현대춤을 좋아한 이유도 창의적인 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현대무용이 너무 추고 싶었어요. 현대무용하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었어요. 명창 김소희·박귀희와 어울리며 우리 춤을 추어도 한국춤에 몰입이 되지 않았죠. 안으로 삭이는 한국무용 호흡 자체가 싫었어요. 피란가서도 진수방 선생에게 발레를 계속 배웠다니까요. 현대무용이 체질에 맞았어요.” 젊은 혈기. 현대무용이 미친 듯 좋았다. 요즘 무용하는 이들은 그런 열정을 모른다. 일본유학시 이시이 바쿠만 만났어도, 한국무용가는 되지 않았을텐데. 그러면 남편 조택원도 만나지 않았을 테고,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때늦은 상상도 해본다. 남편을 사랑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문숙은 ‘아이, 참! 남편이 나를 사랑했죠’ 하며 아직도 쑥스러워한다.
몸무게 43㎏의 개미허리일 때 만난 남편. 그와 함께 숨쉬며 걸어온 날들은 춤예술가 김문숙의 길이 됐다. 입속에서 부를수록 멀리 있는 남편. 가슴에 품을수록 사라지는 남편. 그리움을 쓸어낼 때마다 초겨울의 멀미가 나지만, 지나온 시간을 밟으며 푸른 그리움을 담는다. 다시 남편을 만날 때까지 씩씩하게 살 것이다. 하루 3000보 걷기도 계속하고 부지런히 무대에도 설 것이다. 김문숙, 정말 의욕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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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조택원 약력1907년
1907년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
23년 한국최초의 신극단체 토월회 공연출연
27년 일본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 문하생으로 입문
32년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 수료, 경성에 무용연구소 개설
33년 조택원무용연구소 제 1회 무용발표회
36년 현존하는 한국최초의 영화 ‘미몽(迷夢)’ 출연
37년 일본에서 고별공연후 프랑스 파리 유학
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 창립, 위원장에 선임
49년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신노심불노’ 초연
58년 도쿄 세카가야에 무용연구소 설립
60년 귀국
62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선임
69년 한국민속무용단 창단
7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제 1호 서훈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 1500여회 공연, 미국 NBC TV(51년)·일본 NHK TV(55년) 출연
조택원, 최승희와 함께 신무용 양대산맥
조택원(1907~76)은 최승희(1911~67)와 함께 한국 신무용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조택원은 빼어난 무용 실력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도 파란만장했다. 함경도 함흥 명문가 삼대 독자로 태어나 휘문고보졸업후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법과를 중퇴한 엘리트. 수려한 외모에 운동신경이 뛰어나 상업은행 정구 선수로도 활동했다. 16세에는 러시아에서 온 박세민에게 코팍댄스를 배워 토월회의 ‘사랑과 죽음’에 출연했다. 입장료를 받고 공연된 최초의 무대무용이었다.
그런데 보성전문학생인 그는 1926년 일본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공연을 보고 일본 도쿄로 무용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서양 현대무용을 익힌 후 32년 이시이 바쿠 무용학교를 졸업하고 37년 프랑스에서 서양문화를 체험한다. 해방 직후인 47년 미국에서 현대 무용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으로 미국 순회공연도 한다. 해외 공연이 쉽지 않던 당시, 프랑스 문교부 초청으로 6개월간 프랑스 순회공연을 갖는 등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1500여 회의 공연을 했다는 자체가 그의 예술성을 말해준다. 무용시 ‘학’ ‘만종’ ‘부여회상곡’, 무용극 ‘춘향전조곡’ ‘가사호접’ ‘신노심불로’ 등 창작춤을 안무하며 한국춤의 선구자로 우뚝 섰다.
풍운아 조택원의 곁을 지킨 여성도 많았다. 첫 번째 아내는 대한민국 초대 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최진의 차녀 최옥진. 배우 복혜숙의 소개로 만났는데, 두 딸을 낳고 이혼한다. 두번째 부인 영화배우 김소영과는 50년대 미국 순회공연 도중 이혼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일본 모델이자 무용수인 오자와 준코와 10년간 동거한 후 60년 한국으로 돌아와 세번째 아내로 김문숙을 맞이한다.
외국유학와 해외공연도 많았지만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3년동안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등 70년 삶의 절반을 외국에서 떠돌며 살았다. 그러나 60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한국무용계의 위상을 확립한 주인공. 73년 자서전 ‘가사호접’을 집필했고 이듬해 제 1호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말년에는 위암으로 고생하면서도 후배들에게 자신의 춤을 사사하는 등 예인의 도를 잊지 않았다.
조택원과 관련된 내용들은 지난해 조택원타계 30주기를 맞아 출간된 화보집 ‘춤의 선구자 조택원’(댄스포럼)을 보면 자세히 접할 수 있다. 700여 장의 칼러·흑백 사진과 함께 신문기사, 본인의 글 등이 수록돼 있다.
지난 20일에는 서울 동숭동 춤자료관 ‘연낙재’에서 조택원탄생100주년기념 특별기획전 ‘기억과 상상’전이 개막됐다. 국내에서 무용가의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기는 처음. 개막식에 참석한 원로무용가들은 ‘잘생기고 똑똑한 부자짓 아들 조택원에게 한국춤의 흥과 멋이 그토록 넘칠 줄 몰랐다. 가는 곳마다 여성들과의 스캔들이 많았다는 자체도 그의 매력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시는 내년 6월30일까지 ‘연낙재’ 가사호접실에서 계속되는데, 연낙재(관장 성기숙)와 조택원100년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조택원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려주는 공연팜플릿, 포스터, 전단, 공연사진, 의상, 춤소도구, 악보, 육필원고, 병원진료표, 제 1호로 수상한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 등 유품과 공연관련 자료가 조택원의 박제된 시간들을 되살려준다.
월간 ‘춤’발행인 조동화씨가 평생 모아 연낙재에 기증한 조택원 자료, 부인 김문숙이 보관했던 자료가 전시된다. 그의 춤파트너이며 10년동안 연인으로 살았던 일본 무용가 오사오 준코, 첫부인과 낳은 딸 조병현씨(73)가 각각 기증한 자료가 시각화된 역사물로 나와있다. 특히 조택원의 춤 ‘가사호접’(김준영 작곡) 악보는 한국무용사상 최초의 무용음악 악보다. 이외에 ‘소고춤’(김성태 작곡), 1949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된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의 가면, 30년대 ‘가사호접’의상, 50년대 유럽순회공연시 입었던 농악무·소고춤 의상 등도 볼 수 있다.
12월6일에는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100년기념 리셉션이 열리고 9일에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조택원 춤을 복원하는 기념공연, 12일 서울 영상자료원에서 영화 ‘미몽’감상회, 21일 ‘서울역에서 만나는 조택원 춤’등이 펼쳐진다.
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일생 동안 풀무질해온 춤길. 길고도 험했다. 행복한 외로움과 고단한 화려함 속에서 걸어온 춤길이었다. 정무연(80·본명 정항섭). 스페인춤 스승이던 가와카미 선생이 지어준 이름 ‘무연(舞燕)’, 즉 ‘춤추는 제비’라는 예명으로 춤을 지켜왔다. 그리고 이제 춤 하나만 남았다.
#트로트에 맞춰 추는 정무연의 스페인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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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연의 인도춤 ‘남국의 정서’. 화려한 의상·춤사위·눈짓 등 3박자가 감상포인트다. |
정무연 무용학원은 부산 진구 부암동 고가 옆 건물 2층에 있다. 학원으로 오르는 층계에서 1953년의 유행 가요가 흘러나온다. 우아한 한국무용과 어울리지 않게 금사향이 부른 ‘홍콩아가씨’다. ‘무용학원에서 웬 가요?’ 기자, 문열고 고개를 살짝 학원 안으로 밀었다. 중년 부인들과 할머니들이 노래에 맞춰 캐스터네츠를 양손에 들고 스페인춤을 추고 있다. 가요에 맞춘 스페인춤? 낯설고도 재미있다.
노래가 끝났다. 춤도 끝났다. 춤 제목은 ‘즐거운 스페인 무(舞)’.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트로트 스페인춤이 됐단다. 정무연은 거울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할머니 단원들에게 다음 작품을 주문하고 기자를 맞는다.
전화 속 그는 무뚝뚝한 소리로 ‘(부산에)오지 말라’고 몇번이고 사양했다. 기자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단다. 옛 이야기는 모두 잊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만난 그는 역시 아무 말도 해 줄 게 없단다. 기자, 힘이 빠지기는커녕 ‘춤추는 제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욕심이 샘솟았다.
85년 문을 연 40여평 학원은 한 면이 거울, 다른 한 면은 공연 소도구 보관소, 또 다른 한 면은 미니 분수와 오디오·전자오르간 등이 차지하고 있다. 각 벽 위에는 ‘문화재급’ 포스터가 걸려 있다. 정무연을 비롯해 강선영, 임성남, 한순옥, 최희선, 최현, 조용자, 김진걸 등 당대의 무용 스타들이 공연한 ‘해방 10주년 기념 무용발표회’ 포스터를 비롯, 정무연의 화려한 시절을 말해주는 50년대 무용 포스터가 빛바랜 위엄을 발한다.
“과거, 추억, 꿈…. 그런 말은 잊은 지 오래. 화롯가에 앉아 오순도순 가족들과 정담을 나누던 기억, 모두 지웠어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무연은 말끝마다 항상 “어휴~ 다 지난 일이 무슨 소용이에요” 했다. 과거를 잊고 싶다는 말? 절대 아닐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의 발로일 뿐.
“10년 후 춤을 그만둘 겁니다. 정무연 무용단의 할머니 단원 중에 늙어서 기력이 안되는 단원은 방출하고 야들야들한 단원으로 보충하며 10년을 버틸 겁니다. 부산! 서울에선 상상도 못하는 도시죠. 부산에서 1년만 살아보면 압니다. 부산 사람들은 극성스럽고 정열적이죠. 서울 사람들은 그 정열의 반도 못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무용학원이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자 학생이 아닌 일반 수강생을 가르치던 학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정무연 무용학원을 비롯, 부산시내 500여개의 무용학원 대부분 같은 실정. “학원 운영으로 돈벌 생각은 없어요. 학원마다 어머니반이 많은데, 우리 학원에서도 12명의 수강생들이 무용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어요. 각종 복지시설을 찾아가 무용, 노래, 음악 등을 공연합니다. 연습도 매일 해요. 20년 됐으니, 50세에 시작한 단원이 지금 70세 최고령이 됐지요. 하하하….”
#서울에서 유명한 의사집안의 돌연변이
정항섭은 1927년 용인에서 태어나 두살 때 서울 인사동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정성근씨와 어머니 배석태씨의 아들. 7남매인지 8남매인지 확실치 않지만 끝에서 둘째였다. 남동생은 체신부 우정국장을 지냈고,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지금은 정무연만 남고 모두 작고했다. 부친은 정항섭이 7세에 금강산 구경을 다녀온 후 담 걸린 후유증으로 작고했다. 모친은 정항섭이 일본유학 중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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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인사동에서 한의원을 경영했고 큰형 정귀섭은 인사동 골목에서 이비인후과를 열었다. 당시 서울에서 윤치호, 이승만, 윤보선 등이 모두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둘째형 정흥섭은 소아과 의사. 셋째형 운정 정완섭은 한국화가, 넷째형은 서양화가였다. 서울에서 정항섭의 집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 무용가 강선영이 정귀섭과 친구였다. 큰누나는 일본 도쿄 양재학원과 오사카 양재학원을 졸업했다. 남자 형제들은 배재학당, 누나들은 이화학당 출신이었다.
“무용하느라 이렇게 죽어지내니까 저를 알지 못하지만, 옛날 같으면 저 만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얼른 “앞으로 10년만 살다 죽을 테니 옛일을 알려주기 싫다”고 덧붙였다. 다시 기자와 춤추는 제비는 ‘과거찾기 게임’ 한판 승부에 들어갔다.
“어휴! 말도 마세요. 어머니는 무당집에서 춤추는 저를 보고 땅을 치며 우셨고, 저는 형님께 온몸을 두들겨 맞고….” 그런데 왜 춤을 추었을까.
“본격적으로 인사동 태화유치원과 수송초등학교 동창인 무용가 정인방의 집에 드나들면서 배웠죠. 정인방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국악위문단 중국 만주 공연을 위해 동숭동 자신의 집에서 국악인들을 집합시켜 연습시켰거든요. 정인방과 단짝인 저는 초등학교 때 그 집에 놀러갔다, 결국 장구 치며 춤까지 추었습니다.”
그러다 동숭동 장추화 무용학원을 다녔다. 최승희 전속악사인 박성옥이 그 학원에서 무용을 반주했다. “장추화의 실력은 기찼습니다. 최승희 무용단에서 남방춤을 가르쳤을 정도이니 그 실력이 대단했죠. 저는 장추화 무용학원에서 조교를 하며 한국무용을 가르쳤습니다.”
배재학당을 졸업했지만 집에서 춤춘다고 쫓겨난 신세. 춤추기 전에는 2년 동안 은행원으로 돈도 벌었다. 수송초등학교 2학년 3반 담임선생도 한 학기 동안 했다. 그런데 정인방이 문제였다. 그의 꼬임에 빠져 성남극장 무대에 올라 춤추었는데 소문이 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안국동 조흥은행 지점장인 박용삼씨가 은인이죠. 우리 형님 정귀섭의 친구였는데 멋쟁이였어요. 저보고 유학 후원을 해줄 테니 조흥은행 본점 강당에서 공연하래요. 물론 집에 돈이 있었지만 은행지점장이 돈을 만들어 주었죠.”
47년 부산 자갈치시장과 다대포에서 3일을 기다렸다 똑딱선타고 다시 5t 고기잡이 배에 옮겨 탔다. 40여명이 탄 배는 지옥이었다. 배에서 내리니 우에노 하마라는 항구. “제가 무용을 시작해 일본 유학 가서 돌아올 때까지가 영화 같아요. 당시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아 모두 밀선을 탔죠. 우에노 하마에서 한 달, 오사카에서 6개월 머물고 도쿄 정착 후 무용을 가르쳤어요. 조택원과 10년 동안 동거한 오사와 준코가 저의 제자죠. 오사와 준코 무용학원을 주 3일 빌려 ‘정무연 무용연구회’ 이름으로 한국무용을 가르쳤어요.” 일본에서 한국에 온 이유. 누군가 잘나가는 정무연을 밀입국자로 신고하자 자진 귀국했다.
#미8군에서 한국 최고의 춤을 만들다
54년 귀국하자마자 부산에 정착, 2년 동안 어머니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그리곤 서울로 직행, 원효로에 있는 화양연예주식회사 소속 무용팀장으로 안무를 담당했다. 미8군 쇼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한명숙, 최희준, 위키 리, 모니카 유 등 유명 가수들에게 한국무용뿐 아니라 일본에서 배운 라틴음악과 라틴무용을 가르쳤다.
“그때 돈 많이 벌었어요.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아유! 지저분해서 말하기도 싫다! 결혼요? 예술에 미치서 다니느라 못했습니다. 결혼했으면 일찌감치 돈 많이 벌고 잘 살았을 텐데, 춤만 추고 싶으니! 춤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제가 주역도 보며 철학공부를 해서 제 사주를 알아요. 후회는 없습니다.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 보듬고 있는 것.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니죠. 그 마음을 못 다스리면 문제가 생겨요.”
잘나가던 서울 생활. 이인범·김민자와 서울발레연구소도 공동운영했다. 김두한이 연구소 옆집에 살았다. 57년 제1회 무용발표회.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리가 났다. 춤추는 제비의 춤을 보겠다고 밀려드는 관객들. 명동시립극장 사흘 공연이 완전 매진이었다. 스페인춤, 라틴춤, 전통춤 등을 추었다.
서울대감놀이도 당시의 작품이다. 요즘은 재창작해서 공연하지만 정무연은 원전 무당춤 그대로 춘다. 황해도 신장굿이면 신장굿, 대감놀이면 대감놀이 등 따로따로 구성하기도 한다. 대중이 지루하지 않도록 그때그때 연출한다.
“정인방을 만나기 전부터 무당집에 놀러가 춤을 배웠습니다. 누나 화장품 몰래 바르고 무당집에서 신나게 춤추며 대감놀이를 배웠어요. 원래 대감놀이는 하루종일 추어도 되지만 무대에선 관객을 위해 10분 이상 추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지루할까봐 그렇죠. 서울대감놀이에 어울리는 음악은 김영임의 창부타령소리가 제일 좋아요.”
그는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도 했다. 어학에 취미가 있다. 서울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벌었다. 60~70년대에 신촌 연세대 입구에서 무용학원 할 때 학생이 60명이나 됐다. 조교가 춤 교육을 도왔는데, 조교 오빠가 사업한다며 400만원을 꿔갔다. 모래내 집이 130만원 할 때였다. 조교 오빠는 돈을 갚지 않았다. 결국 정무연이 학원과 아파트를 팔고 빚잔치를 끝낸 후 수중에 남은 돈은 단돈 3만원. 77년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3층 건물을 학부형과 동업으로 야무지게 지었는데 빚잔치하느라 팔고 창천동 아파트도 팔았더니 3만원이 남더군요. 일본으로 다시 가려고 제자 양정화가 있는 부산 수정동 무용학원에 짐을 부리고 3일 후 다다미 3조짜리 방 2개를 얻어 6개월 동안 출장교습했죠. 그리고 수영에 학원을 냈어요. 객지에 와서 고생한 거 다 쓰면 삼국지 돼요. 죽지 않은 게 용하죠. 우리는 몸이 연주 악기잖아요. 아프면 끝이에요. 건강관리요? 춤밖에 몰라요.” 춤이 애인이다. 자식도 없고 오직 춤만 춘다. 자다가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춤출 것이다.
‘춤추는 제비’는 학원에서 거주한다. 연습실 한쪽에 냉장고와 식탁이 있다. 신혼부부가 사용함직한 미니 전기밥솥에 이틀치 밥이 담겨있다. 그나마 단원들이 없으면 외로운 공간. 그 외로움을 지우는 지우개처럼 60년 전 공연 포스터가 묵묵히 빛난다. “이제 그만 물어봐요. 10년 후 하늘가는 날만 기다리는데…. 정말 그렇게 될 겁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개봉박두!”
‘10년만 춤추겠다’는 말. 옛일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다는 고백일 터. 춤추는 제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서울길은 은퇴한 옛 담임선생님을 몇십년 만에 처음 만나고 돌아서는 길처럼 송구하고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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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연 약력
1927년 경기 용인에서 출생
45년 서울 배재고교 졸업, 서울 장추화무용연구소 졸업, 서울 조선 정악원 고전무용연구소 수료
47년 일본으로 감
49년 일본 도쿄 가와가미고로 무용연구소 입소
49~54년 일본 도쿄 사사스가 정무연 오자와 준코 합동연구소 운영
51~52년 일본 도쿄 아사구사 국제극장 안무 겸 전속출연
53년 일본 도쿄 요미우리 신문회관에서 정무연 무용발표회
54년 귀국
55년 서울발레연구소 이인범·김민자와 공동 운영
57년 제1회 무용발표회(서울 명동시립극장)
61년 미8군 화양연예주식회사 전속안무 담당·출연
55~75년 서울에서 정무연 무용연구소 운영
75년 이후 현재 부산에서 정무연 무용학원·정무연 무용단 운영,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
12명의 ‘할머니 무용단’ 매달 요양원 등 위문공연
1985년부터 활동했다. 지하철 공연, 자갈치축제 주2회, 양로원·요양원 등 한 달에 5번 공연한다. 출연료는 받지 않는다. 대신 출연료를 주는 축제행사에 초청될 때 활동비를 마련한다.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스페인 무용을 한국 트로트 음악에 맞춰 퓨전화했다. 전통춤만 추면 위문받는 이들이 지루하다고 할까봐 퓨전춤과 전통춤을 골고루 보여준다. 정무연은 “서울에선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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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연은 ‘서울 대감놀이’ ‘에스파냐카니’ ‘시에릿도린도’ 등을 추고 스페인 노래 14곡과 라틴 노래, 우리 노래인 ‘나그네 설움’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도 부른다. 단원들이 의상을 갈아입을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단원들은 ‘부채춤’ ‘궁중무’ 외에 창작춤인 ‘팔도강산’ ‘마을 수호신’ ‘가을밤’ 등을 춘다. 노인들이 좋아할 만한 레퍼토리여서 예술성보다 대중성에 비중을 둔 것도 사실이다.
김옥수(65), 박순심(60), 김영순(66), 신애경(47·예명 동나겸), 강서순(60), 안차남(58)씨 등 단원 12명. 이들은 연습 중에도 허리에 정무연무용예술단 단원증을 부착하고 있다. 작으나 크나 조직이고, 돈 가지고 되는 조직이 아니기에 더욱 단원증이 중요하다고 했다.
11년째 활동 중인 김옥수 단장의 말. “선생님께선 항상 철저한 것을 추구합니더. 그래도 제자들이 일본이고, 예고(여기) 많십니더. 우린 해마다 일본, 사이판 등에 위문공연을 갑니더. 저번에 오사카 안갔습니꺼! 한평생 장가도 안가고 저리 사십니더. 억수로 불쌍한 사람임더. 아들딸이 있나 장가를 갔나, 우리가 와가 이래 연습하는 게 낙이시죠. 양로원, 요양원, 정신병원 등 다달이 가고 있습니더!”
김호창 정무연 무용단 총무는 7년 전 김단장 소개로 이곳에 왔다. 정무연 선생을 보조하며 춤을 가르친다. 가수로도 활동한다. 구치소와 양로원 공연 때는 단원들이 돈을 모아 생필품이나 먹을거리 등 물품을 구입해 가져간다. 한두 번도 아니고, 결국 출연료로 충당하든가 회비를 1만원씩 내기도 한다. 기금은 없다.
“선생님께서 전립선이 아프세요.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 단원들이 병원에 모시고 가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요. 힘있는 남자 제자들이 많으면 선생님 모시고 다니기도 수월할 텐데, 우리도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 선생님께선 남자 제자를 키우지 않으세요. 옛날에 불쌍한 남자 제자들을 거두시곤 했는데 그들이 선생님 학원에 기숙하며 필요한 물건이나 돈 등을 훔쳐가곤 해서 다시는 남자 제자를 거두지 않으신대요.”
“역시 대가는 틀리다” 송범 장검무 보고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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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의 ‘왕자호동’ 공연. 중국인이 와서 검무를 가르치는데 송범이 “검무 잘 추는 사람이 여주인공을 맡는다”고 했다. 최승희에게 검무를 배운 그로선 누워서 떡먹기였다 결국 주인공 낙랑공주는 한순옥의 차지. 그와 문일지가 더블캐스팅이었는데 말이 많았다.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왜 문일지를 객원으로 캐스팅했냐”며 시위했다. 한순옥의 활약. “여러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무용을 못해서 참으라는 게 아니다. 다 때가 있다. 참고 하라”고 했다. 최혜숙 단원에게 ‘별의 전설’에서 주인공했으니 양보하라고 했다. 한 명씩 연습복을 갈아입었다.
“제가 연습할 때는 문일지가 보고 문일지가 연습할 때는 제가 봤죠. 공주가 북을 찢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인데, 무대까지 긴 계단이 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북을 찢기 힘든 겁니다. 제가 안무가 송범에게 ‘밤새껏 생각했는데 북을 찢기 전 계단 앞에서 괴로워하다 뛰어올라가 북을 찢겠다’고 하니 말이 없어요. 송범은 기분 나빠도 양보했죠. 한번 해보라기에, 장단수가 여섯 박자밖에 없는데 치마를 마구 휘저으며 계단 올라가 북을 치니 큰 북이 넘어지려고 해요. 북을 찢긴 찢는데 뒤로 넘어갈까봐 힘껏 찢지는 못했지만. 문일지도 저를 따라하더군요.”
송범은 좋다 나쁘다 말을 못했다. 그러나 장검무 연습할 때 그에게 “역시 대가는 다르다”고 고백했다. 장검무는 그를 따를 이가 없었다.
‘견우와 직녀’ 연습에선 사슴 역을 맡은 국수호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장면이 있는데 제대 후 무대에 처음 선 국수호는 실감나는 춤을 보여주려다 오케스트라 피트로 떨어지기도 했다. 모두 열심히 춤추던 옛날이었다.
한순옥 “큰 무대만 섭니다, 자존심이죠”
국립무용단의 스타 무용수 한순옥(75). 그는 서울 구의동 언덕의 조용한 빌라에서 아들 정재승(48), 애견 샌디(7)와 살고 있다. 겨울 오후, 산사(山寺)처럼 고즈넉한 빌라로 들어서니 부엌 창문으로 동네 뒷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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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바닷가에서 춤추는 29세 한순옥. |
올드 효리의 빌라 거실은 스타 무용가의 미니기념관 같다. ‘1973년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라고 적어놓은 액자 안에 스페인 풍물을 담은 엽서와 사진이 가득하다. 이탈리아 기념엽서도 보기 좋다. 해외 순회공연 틈틈이 모은 추억의 편린들이다. ‘보살춤’의 요염한 모습도 뭉클하다. 백악관 관리들과 국립무용단원들이 찍은 사진에서도 효리는 서양 남성들을 ‘좌청룡 우백호로 두고’ 가운데에서 웃고 있다.
“(사진을) 보세요. 백악관 남자들이 모두 내 곁에 둘러섰죠! 나, (주역 무용수로 잘나갔다) 허튼 소리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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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국공연후 백악관에서 기념촬영중인 국립무용단. 남자들 가운데가 한순옥 단원이다. |
국립무용단 입단 전으로 돌아가자. 한순옥은 최승희의 수제자였다. 6·25 전쟁 후 남한의 한순옥은 북한에서 활동하는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견디기 힘든 시기를 넘겨야 했다. 스승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 체포되던 시절이었다. 한순옥은 기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부터 흘렸다. 스승 최승희 때문에 웃었고 최승희 때문에 울었던 지난날. 억울하고 한 많은 춤살이였다.
#춤을 너무 잘추다
32년 평양에서 한석권과 배정수의 1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족은 언니 한 사람만 빼고 6·25 전쟁 후 남하했다. 부친은 한순옥이 33세에, 모친은 37세에 작고했다. 오빠(81)를 비롯, 두 여동생도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17세에 부모 몰래 최승희 무용학원 오디션을 봤습니다. 정희여고 학생일 때죠. 이모 도움으로 의상을 마련해 오디션 봤죠. 필기시험도 있었어요.” 합격이었다. 해방 직후 최승희 공연을 두 번씩 보고 춤에 빠진 그는 의사에서 무용가로 꿈을 바꾸었다. 춤추는 최승희의 눈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늘 그 모습만 생각났다.
1년 후. 3학년 이상만 검무를 배우는데 한순옥은 집에 가지 않고 몰래 검무를 보고 그 순서를 다 외웠다. 기회는 왔다. 1기생들의 검무 공연을 앞두고 한 명이 빠지게 된 것. 순옥의 검무 추는 모습을 봤던 선배 현정숙이 최승희에게 한순옥을 추천했다. 3기생인 그는 연습한 대로 척척 추었다. 그때부터 점처녀(오른팔에 점이 있어 붙은 별명)는 월사금을 내지 않고 오히려 국비생으로 돈을 받았다.
“제가 ‘해방의 노래’에 픽업돼 선배들의 질투가 심할 때죠. 등(燈)춤을 추려고 무대 양쪽에서 무용수들이 등을 들고 등장하는데 제 두번째 앞의 선배 등이 처지기에 ‘등이 내려갔다’고 알려줬어요. 그런데 스승이 그 모습을 보고 ‘무대 나가면서 말한다’고 화를 내며 연습을 중단시켰어요. 연구생들 앞에서 야단맞는데, 저는 너무 부끄럽고 속상해서 등을 던지고 뛰쳐나가 옷보따리를 쌌습니다. 작별 인사차 최승희 방을 노크했죠. 맞을 각오하고 들어가니 ‘다른 애 같으면 당장 퇴학인데, 너는 내 뒤를 이을 재능을 가졌다. 용서할 테니 열심히 해’라며 제 등을 두들겨 주시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제 가슴을 후벼파는….” 한순옥은 다시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한다.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낌과 침묵만 오가는 한겨울의 거실.
스승의 사랑은 무용극 ‘춘향전’에서도 피어났다. 이도령 최승희, 춘향 안성희, 사또 김백봉. 한순옥은 기생역이었다. 파격대우였다.
“스승이 ‘너는 애기기생 해라. 사또 잔칫날 어사가 잔칫상에 앉으면 눈을 흘기며 이도령에게 술 따르는 기생 역할이다’ 그러세요. 그 장면에 이도령과 기생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가기 때문에 어린 제자 중에선 기생역이 최고였죠.”
그후 최승희 무용단은 러시아로 공연을 떠났다. 연구소 3기생인 한순옥까지는 차지가 오지 않았다. 그게 최승희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2년 동안의 연구소 생활이 한순옥의 60년 삶을 짓누를 줄이야.
#최승희 제자로 숨어지내다
한순옥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중국과의 무역 등 사업을 크게 펼쳐 해방 후 인민군이 활보하는 북쪽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1·4 후퇴 때는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한순옥도 부친을 따라 밀양에 정착해 1년간 머물렀다. 그때 무봉사라는 절에서 열린 사월초파일 행사에서 19살 한순옥은 대구의 현대무용가 김상규에게 자신이 최승희 제자임을 밝힌다. 당시 좌익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워 그의 제자임을 숨길 때였다. 김상규는 현대무용 ‘악마와 소녀’의 춤 파트너가 아파서 오지 못했다며 함께 추자고 했다. 최승희로부터 춤닦달을 받았기에 식은 죽 먹기였다.
“최승희 연구소에서 한국무용, 발레, 인도무용, 현대무용, 모던발레, 소셜댄싱, 리듬 등 7개 과목을 배웠으니 어떤 무용이든 소화했죠.”
‘악마와 소녀’에 출연하며 한순옥은 남한에서의 춤 인생을 시작한다. 최승희 제자로 가슴 아프게 살았기 때문일까. 스승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울었다.
“김상규 공연에서 송범을 만났죠. 저는 검무를 추었는데, 분장실로 찾아와 ‘누구 제자슈?’ 하고 물어요. 최승희를 입 밖에 내면 안되잖아요. ‘평양에서 배우다 왔다’고 하니 ‘최승희 제자슈? 어쩐지!’ 하고 칭찬하더군요.”
송범은 서울에서 공연될 무용극 ‘인도 연가’ 출연을 청했다. 아라비아 공주로 분한 그는 배꼽을 드러내고 남자를 유혹하는 춤을 추었다. ‘한순옥이 저런 춤도 출 줄 아냐’며 주위에서 놀랐다. 그때부터 송범 작품에 단골로 출연했다.
마산의 한국무용가 김해랑도 함께했다.
“김해랑이 일제강점기에 최승희 제자여서 가까워졌죠. 피란 때 마산으로 이사가 1년 정도 김해랑 연구소를 같이 운영했고 공연도 하고. 그러다 22세에 부산에서 최진이 왔어요. 대만에 ‘춘향전’ 공연 가는데 박성옥이 ‘춘향이로 한순옥을 데려오라’고 했대요. 조용자가 이도령인데 김해랑은 조용자의 사생활을 거론하며 가지 말래요. 제가 가겠다고 하자 김해랑이 제 따귀를 때리는 거예요. 부모에게도 맞은 적이 없는데, 기가 막혔죠.”
춘향모 김문숙, 이도령 조용자, 방자 옥구현(캐나다 거주), 향단 신영자(미국 거주), 춘향 한순옥. 그러나 화폐 개혁의 어수선한 시기여서 공연은 무산됐고 결국 부산극장에 올랐다. 그 후 무용공연마다 한순옥이 주역이었다.
“제가 어리고 북에서 왔기 때문인지, 남자·돈·배역 등과 관련돼 별 모략을 다 받았답니다. 하다못해 사진관에서 사진 찍을 때도 사진관 주인이 김문숙과 저에게 (얼굴이 예쁘니) 사진을 더 찍자고 하는 것조차 구설수에 올랐답니다. 질투하던 그들 대부분이 아직 살아있어요. 그저 최승희 제자라는 자부심 하나로 꾹 참았습니다.”
부산의 춤 행사는 거의 한순옥이 도맡아 했다. 광복동에 박성옥과 동업인 무용연구소를 냈다. 그런데 박성옥의 애인이 박성옥과 한순옥의 사이를 의심했다. 결국 광복동에 따로 연구소를 냈다.
그때 문화공보부 국장인 서예가 고 배일기가 미국 가는 행사에 예술가들을 초청했는데, 첼리스트 전봉초를 비롯해 이빈화, 최미연 등 스타들이 총출동됐다. 무용가로는 한순옥이 유일했다. 그런데 외국공연은 불발이었다. 그땐 그랬다.
#남편보다 춤이 좋았다
남편도 그때 알게 됐다. “부산에서 무용연구소를 했는데 안기부 소장이 찾아와 경찰서로 연행하더군요. ‘평양에서 언제 내려왔냐’며 ‘최승희 제자죠?’ 해요.” 당시 4년 연상인 남편 정준모가 민주신문사 정치부 기자여서 고생은 면했다.
박성옥과 무용연구소를 하던 25세. 서예가 배일기가 제자 정준모를 소개했다. 그는 1년반 동안 연구소를 출근하다시피 찾았다. “춤만 추었지, 남자에게 관심없었어요. 당시 부산 승마장에서 아침에 승마를 배우고 영도다리를 건너 광복동 연구소로 돌아오곤 했죠. 그런데 남편이 승용차를 몰고 승마장까지 찾아와 광복동까지 데려다 주는 거예요.”
남편은 집요했다. 부모는 서울에 있고 부산에서 외롭게 살던 처녀는 27세에 약혼한다. 그런데 무용가인 아내를 이해한다던 남편이 얼마 후 춤을 못 추게 했다. 춤이 전부인 한순옥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28세에 아들 재승을 낳은 후 6개월 만에 파리 공연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서 참가한 최초의 민속예술제였다.
“미신을 믿진 않지만 제 나이 32세에 삼재가 들고 남편도 용띠 삼재가 들어 서로 부딪친대요. 별거 4년 후 예그린예술단에서 활동할 때 남편이 이혼해달라더군요. 여자를 만난 거죠.”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남편은 일본 특파원이었다. 문제는 한순옥이 해외공연하는 사이 남편이 14세 아들을 비롯, 재혼한 여성과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버린 것.
“친정 어머니께선 ‘아이를 뺏겼다’고 난리셨죠. 걱정 마시라고 위로할 수밖에요. 아들이 일본에서 거주한 4년 동안 지옥이었지만 제가 국립무용단원으로 일본 공연 가서 만났어요. 데이코쿠호텔에서 아들을 만났는데 ‘엄마! 작은엄마 옷 한 벌 사주고 가’ 해요. 옷은 크기를 몰라 사지 못하고 대신 이브닝백을 사보냈죠. 제 심정 이해하시겠어요?”
#빌딩 5채는 아무 것도 아니다
30세. 서울 삼선교에 70평의 연구소를 열었다. 이화여대 무용과에 입학하려는 고3 입시생들에게 한국무용뿐 아니라 현대무용 발레를 지도했다. 창작춤도 안무해주었다. 국립무용단 창단 멤버인 그는 73년부터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송범, 김문숙, 한순옥, 최희선 등이 국립무용단원이었다.
“저는 큰 무대 아니면 서지 않았습니다. 30여년 전 문화공보부에서 외국사절단이 오면 저에게 공연을 청했어요. 저는 개런티로 200만원을 제안했죠. 50만원이 정가(?)였지만 저는 자존심에 죽고 살았습니다. 예술가들, 자존심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큰 무대 아니면 춤추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무데서나 추대요. 옛날에 요즘처럼 추었으면 떼돈 벌었겠죠.”
스타의 품위를 지켰고, 어지간하면 주요 배역을 후배에게 양보했다. 손해를 많이 본 것도 그 때문이다.
“제가 로비 잘하면 이러고 안 살죠. 그저 최승희에게 배운 대로 순수하게 그 춤을 이으며 살 뿐입니다.”
대학 총장이 교수를 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일본에서 돈벌이 춤도 추지 않았다. 그러나 후학 지도는 양보하지 않았다. 72년부터 13년 동안 선화예고 전임강사로 활동했다.
“요즘 무용인들은 인간문화재 종목의 춤에만 몰리고, 순수한 춤을 무시해요. 배워야 할 사람이 가르치고…. 저는 손해보더라도 최승희의 춤 정신을 이어갈 겁니다. 오래 전 유명한 점쟁이에게 사주를 보니 ‘빌딩 5개 해먹었구먼’ 하대요. 그래도 저는 손해보며 살 겁니다.”
◇한순옥 약력 1932년 평양에서 5남매 중 셋째로 출생 47년 최승희 무용연구소 입소 51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강사 52년 제1회 한순옥 무용발표회 53년 한국무용예술협회 회원 55년 부산 한순옥 무용연구소 개설 56년 부산 화교중학교 무용강사 57년 부산 혜화여중 강사 59년 프랑스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62년 서울 한순옥 무용연구소 개설 62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64년 국제민속예술제 52개국 순회공연 66년 예그린악단 한국무용 주임교수 70년 국제펜클럽대회 한국무용인 최초 출연 73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76년 선화예술학교 무용전임강사 88년 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 2006년 한국무용협회 고문 국립무용단 ‘심청전’(74·81년) ‘원효대사’(76년) ‘시집가는 날’(79년) ‘우리춤 우리의 맥’(93년), 한국무용협회 지역 순회공연(85~87년), 봄맞이 춤제전(92년), 추석맞이 임진각공연(92년) 등. 국민훈장 목련장(73년), 춤의해 감사패(92년), 예총 예술문화상 공로상(93년), 한국무용협회 무용대상(93년), 예총 예술문화 대상(95년)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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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순국 400년 기념 무용극 ‘성웅 이순신’(1998년). |
‘열사 유관순’은 독립기념관 개관식 기념 초청작이다. 70여명의 무용수가 출연해 민족의 본질성을 치열하게 그렸다. 틈만 나면 들이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독도·동해에 대한 억지 주장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기도 하다.
백제 놀이 ‘산유화가’는(전 7장) 76년 이미라가 제9대 예총 충남도 지회장일 때 발굴, 그해 10월 경남 진주에서 열린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받은 작품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1300여년 전 ‘산유화가’를 노동요로 바꾸고 전통춤을 곁들인 민속놀이로 재현했다. 고 박계홍 충남대 교수가 고증한 이 작품은 백제 시조 온조왕부터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백제 역사를 담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기둥인 복신 장군과 도침 대사의 충절, 비운에 스러진 삼천궁녀의 아픔이 춤과 노래 속에 담겨 있다. 충남 은산면 은산리에서 전해지는 은산별신굿도 민속학자 임동권 중앙대 명예교수의 대본으로 재현돼 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됐다. 토속신앙적인 제전에 군대 의식이 가미된 장군제적 성격의 의식으로, 억울하게 죽은 장군과 병사를 위로하며 무병장수를 비는 제례다.
이외에 이미라는 61~78년 민속놀이를 발굴·지도했다. 대보름과 추석에 행해지던 소먹이놀이, 횃불 쌈놀이, 등마루 놀이, 거북놀이 등 충남 민속놀이 발굴을 계속했다. 아산줄다리기는 71년 제12회 전국민속예술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70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거북놀이로 이미라에게 공로상이 돌아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억척스럽게 춤 교육과 춤 발굴에 청춘을 바친 이미라에게 전통춤과 놀이를 발굴해달라고 청했다. 발굴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 터여서 이미라가 도맡아 발굴에 앞장섰다.
이미라 “무용 교육은 평생의 사명”
대전 무용 지킴이 이미라(77). 해방 직후 다른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박수받을 때 이미라는 무대예술 차원의 무용을 넘어 교육방법론적인 무용에 눈떴다. 무용 인구 확산을 통한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선 무용예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60년 동안 학교를 기반으로 무용 교육에 전념해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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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전 중구 문화원 3층 유네스코 사무실과 홀로 사는 25평대 아파트를 매일 출퇴근하며 가는 세월을 잊고 산다. 기자는 대전 시내 유네스코 사무실과 계룡의 아파트를 방문, 이미라의 하루를 그대로 추적하고 그의 적극적인 삶을 상상해본다. 2003년 이사한 아파트 거실에는 이불만큼 커다란 벽 거울이 집주인의 출신 성분(?)을 가늠케 한다. 거실과 방마다 걸려있는 가족사진도 따뜻하다. 이미라의 큰딸은 한국무용가 김운미(50·한양대 교수), 작은딸도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현미(40)다. 거실 장롱 문을 여니 이미라가 펼쳤던 각종 공연 프로그램과 100여개의 공연녹화 테이프가 그의 성격대로 가지런히 쌓여있다.
#교사로 활동하며 최승희의 제자가 되다
이미라는 1930년 함흥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20년 만에 낳은 아기 미라를 애지중지했다. 완고한 부모였지만 쉰살 넘어 얻은 딸이기에 딸이 춤추는 걸 만류하지 않았다.
춤은 43년 함흥 집 옆에 사는 장홍심에게 배웠다. 진주검무와 살풀이가 주력 상품.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는 47년 여름방학 때부터 3년 동안 방학만 되면 평양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원래 연구생들을 대상으로 2명의 무용 유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지만 부모의 반대로 국비 장학금을 포기해야 했다. 최승희 무용단의 러시아 공연도 부모가 ‘네가 교사지, 기생이냐’고 반대해, 포기했다. 결국 학교를 출근하며 방학 때만 최승희 춤을 배웠다. 평양발레연구소에서 2년 동안 발레도 배웠다.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함흥 함남체육대학 1기생으로 교육무용 석사학위를 땄습니다. 그후 바로 6·25전쟁이 났고 저는 국군위문공연 후 그해 12월 함남부두에서 남하하는 마지막 배를 타고 피란했습니다. ‘길어도 1주일만 넘기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싶었는데 그게 가족들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가방 하나만 들고 남하했는데, 38선이 제 희망과 미래를 빼앗아갔습니다. 남북이 가로막힌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부산으로 내려가 3~4년 동안 중·고등학교 강사와 교원강습시키는 강사로 지냈다. 이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교직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북에서 온 사람들 대부분이 따돌림당했지만 그는 교사라서 그렇지 않았다.
#대전에서 교육 무용의 둥지를 틀다
그런데 왜 대전에 자리를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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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에게 배운 신무용과 인도춤, 장홍심에게 사사한 전통무용, 학교에서 배운 현대무용 등 다양한 무용을 바탕으로 대전에서 교육 무용극을 시작했다. 교사 이미라가 무용가 이미라로 알려지게 된 해였다.
첫 무용극은 58년 초연된 ‘금수강산’. 민족성과 애국심을 강조한 춤이었다. 60년에는 노산 이은상의 작품 ‘이순신 장군’을 무용극으로 창작했다. 그후 무용극 ‘성웅 이순신’ ‘효녀 심청’ ‘모정’ ‘대지의 불’ ‘통일의 염원’ ‘천추 의열 윤봉길’ ‘대한의 딸-열사 유관순’ ‘굴욕의 36년, 광복 50년’ 등 교훈적인 무용극을 안무해왔다. 76년에는 1300년 전의 민속놀이인 ‘산유화가’ 발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춤 교육에 치중했습니다. 58년 지역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첫 무용발표회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경찰 악대가 음악을 반주했죠. 당시 대전에선 무용학원을 설립한다는 자체가 모험이었요. 춤은 기생이나 추는 게 전부라고 여기는 대중을 대상으로 춤 학원을 열었다고 생각해보세요.”
61년 이미라 무용학원을 설립해 2003년까지 운영했다. 74년에는 교장들과 함께 유네스코 한국 대표로 일본과 중국을 방문해 그들에게 한국춤을 비롯해 일본춤, 중국춤 등 무용 작품에 등장하는 각 나라 춤을 안무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안무한 ‘밤길’은 무용가 이미라를 이해하는 키워드. 국립극장에 공연하러온 중국 무용인을 숙소까지 동행한 후 밤새 중국 무용가에게 춤을 배우는 극성을 떨었다. 86년 독립기념관 개관기념 공연인 ‘열사 유관순’도 열정으로 만들었다.
“무용극 ‘열사 유관순’을 연습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 개관 이틀 전에야 독립기념관으로 연습가려했습니다. 그런데 개관 닷새 전에 전기시험을 하다 불이 난 거예요.”
86년 차 사고도 독립기념관 화재 때문에 일어났다. 독립기념관 화재 현장을 둘러본 후 공주로 차(택시)를 돌리는데 택시 운전사가 뒤에서 오던 짐차를 들이받은 것. 이미라가 탄 택시 뒷부분이 트럭의 중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미라의 입에선 피가 흐르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이미라는 육식, 즉 ‘뻘건’ 핏물이 나오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생선 종류와 달걀도 계룡의 아파트로 이사오면서부터 먹지 않는다.
“계룡의 신성함을 존중합니다. 저는 공연을 시작하거나 작품 구상을 할 때 애국열사를 수없이 배출한 계룡산 암용추를 찾아 새벽 기도를 올립니다. 일생 학교 무용 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충효사상을 강조해 왔으니 춤 행사를 앞두고 애국열사들을 찾는 게 도리죠.” 언제나 계룡산 기도를 위해 3일 전부터는 고기를 먹지 않고 심신을 정갈히 한다.
#호랑이 선생님, 현재를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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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1남2녀를 낳았다. 사업가 남편은 회사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자 3년 동안 화병을 앓다 막내딸이 7살이던 73년 세상을 떴다. 40대 초반의 한창 나이인 그는 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가장의 고단함을 한 몸에 껴안고 살았다. 다행히 3남매는 성실하고 튼튼하게 자라주었다. 거실에 걸린 가족 사진을 보니 아이들이 커가는 데도 함께 찍은 사진 속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얼굴은 계속 한 사람이다. 큰딸 김운미 출산 때부터 집안일을 돌봐주던 아주머니와는 지금도 연락하는 사이란다. 수월하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무용 교육에 힘을 다할 수 있었다. 교단에 서며 무용 교육의 거인으로 부상했다.
서울을 오가며 한국무용협회 결성 멤버로 활약도 했다. 동시에 충남무용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직도 맡았다. 62년부터 17년 동안 한국무용협회 충남지부장, 72년부터 3년 동안 예총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했고, 95년부터는 유네스코 대전·충남 협회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76년에는 ‘산유화가’를 발굴했고 75~76년 제21~22회 백제 문화제를 대전·공주·부여 등 세 도시가 단합해 치르도록 유도했다.
그는 65년 7월 유네스코 대전·충남협회 설립 후 70년 현 건물로 이주했는데, 50여명의 협회원이 뭉쳐 지역 문화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 협회장은 4년 임기인데 그는 4번째 회장직을 맡았다. 2010년까지 해야 한다. 이번에 큰 행사를 치른 후 다시 연임됐다. 그만두겠다고 기를 써도 회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그는 극성스럽게 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다. 95년부터 교육무용극 경연대회, 96년부터 청소년 외국어 발표대회를 매년 마련하고 있다. 2001년부터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 맥찾기 춤강습회’를 개최, 춤 ‘아리랑’ ‘무궁화’를 가르치고 기체조 등 수련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나 지난 봄까지 21회가 진행된 이 행사는 요즘 지원이 끊겨 계속되지 못하는 실정. 10대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던 유네스코 강당엔 한기만 맴돈다.
“학생들이 유네스코 강당으로 오지 못하는 대신 제가 그들을 찾아갑니다. 정년퇴직했지만, 실제 정년퇴직은 없습니다. 춤 교육밖에 모르니까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것이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하면 안됩니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배어나오는 강직성.
수만명의 제자들을 지도했기에 제자들을 일일이 기억할 순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그를 기억한다. 10대부터 70대 제자까지 대부분 그를 ‘호랑이 선생님’으로 꼽으면서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저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확인하며 반갑게 따른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인데 꼬박꼬박 인사하고 자신을 확인시킨다.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무섭게 가르치던 스승의 춤 교육과 투철한 역사성이 점점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꼿꼿한 삶을 강조해 온 노스승. 그에게 ‘후회’라는 단어가 존재할까. “후회요? 이북에 들어가지 못한 거죠! 배낭 하나 메고 남한에 왔는데 그게 끝이었으니! 다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내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북한 갈 기회가 있었지만, 제가 남하할 때 환갑 지난 분들이었는데 50년이 흐른 지금 살아계시겠어요? 이젠 형제들도 없을 테고….”
수많은 무용극을 안무하고, 그 뜻을 기린 감사장과 공로패를 수없이 받았지만 고향에 두고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모든 게 헛되다. 혼잡한 시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꿈꿔야 할 시간을 잃어버렸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잠깐 다니러 온 남한에서 그의 시간은 멈춰있지만 춤을 향한 청춘의 시간은 지금도 푸르다.
◇이미라 경력
1930년 함흥 출생
58년 이미라 무용연구소 설립, 이미라 무용단 창단, 첫 무용극 ‘금수강산’ 안무
59년 무용극 ‘풍년 우리 농촌’ 안무
60년 무용극 ‘이순신 장군’ 안무
61년 이미라 무용학원 설립
62년 무용극 ‘성웅 이순신’ 안무
62~78년 한국무용협회 충남지부장
75~77년 제9대 예총 충남지부장
75~76년 제21·22회 백제문화제 집행위원장, ‘산유화가’ 발굴·총지도
91년 미국 공연, 동남아 동양화·서예전 초대작가
95년 ‘굴욕의 36년, 광복의 50년’ 공연, 제1회 교육무용극 경연대회 개최
◇시상
충청남도 문화상·충남 교육감상·충남도지사상(65년), 충남도지사상(71·72년), 대전시장상·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76년), 충남도지사 공로상(91년), 엑스포조직위 오명위원장 공로상(93년), 대전광역시장 공로상(95년), 한·중·일 서예전 감사장(96년), 해군본부 감사패(98년), 유네스코 공로상(2000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 공로상(2002년), 보훈문화상(2004년)
제자 장순향씨 “스승의 춤은 詩”
이필이의 제자 장순향 교수(한양대)는 스승의 환갑을 맞아 1995년 ‘이필이의 명작무 무보’를 단행본으로 펴냈다. 이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산조춤 ‘일란(一蘭)’의 무보 사진 180장과 이필이의 일생이 담겨있다. 일란은 이필이의 호. 이필이류 산조춤 ‘일란’은 난(蘭)의 자태를 춤으로 푼 동양화다. 난초처럼 쪽 뻗은 그리움의 시각화가 고요하게 흐르고, 난향처럼 시들지 않고 은은하게 퍼지는 마음꽃이 춤사위에 녹아있다. 호흡에 의한 긴장과 이완을 조화시켜 맺다 풀고 당기다 살짝 놓는 몸짓, 빠른 발놀음과 엇박에 실리는 기교와 절제미가 한국춤의 감칠맛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금련류 산조장단에 맞춰 추는데, 도입부분과 끝은 무장단이다. 연주자가 나름의 즉흥성을 살려 연주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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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향 교수의 헌사. “춤을 통해 삶의 의미를 갖게 해주신 이필이 선생님. 선생님의 춤이 살을 파고 가슴을 후려치다 내 몸을 붕 뜨게 하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후드득 온 얼굴을 적시게 한다. 스승의 춤은 시(詩)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운율을 갖춘 시다.”
1935년 마산 출생
56년 단국대 정외과 중퇴
57년 이필이 무용학원 개설
58년 제1회 이필이 무용발표회
60년 성지여중·고 강사
70~86년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장
80~82년 전국무용인 합동공연 경남대표로 참가
91년 국립극장 전국무용제전 참가
92~95년 한국예총 마산 지부장
93년 미국 잭슨빌시, 멕시코 사포판시 초청공연, 창원대 경영행정대학원 수료
94년 이매방 춤인생 60년 초청공연
2000·2004년 김해랑 추모공연
2001년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 무용분야 공연
2003년 마산청소년 무용단 창단
2004년 경남 낙동 7인 명무전 출연
▶수상
작품지도상(65·69년), 무용교육지도상(71·75년), 전국여학생 무용경연대회 단체상(71년), 마산시 제1회 문화상(78년), 한국예총회장 표창장, 제1회 개천예술제 특장부문 대통령상(82년), 계명대 무용콩쿠르 총장상(91년), 한국예술인문화상 대상·창원대 무용콩쿠르 안무상·개천한국무용제 특장부문 대상(이상 95년), 대한민국 사회교육문화대상(97년), 경상남도 문화상(99년), 지도자상(2005년) 등 다수
이필이-蘭의 쪽 뻗은 그리움, 향기…
마산에는 한국무용가 이필이(72)가 있다. 그는 3주에 한번씩 서울에 온다. 서울대병원에서 유방암 치료를 받는다. 지난 6월 유방암 4기 선고를 받았다. 4~5년 전 오른쪽 가슴에 멍울이 잡혔지만 ‘춤 가르치느라 너무 무리했나 싶어 며칠 쉬면 낫겠지’ 했다. 그런데 멍울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루도 무용학원을 비울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해 부산의 큰 병원을 찾았다. 암이냐고 물으니 양성종양이니 제거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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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체내 혈액부족으로 항암주사를 제 날짜에 맞지 못하자 암세포가 폐까지 퍼진 것. 신약 덕분에 살아났단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기자와 식사를 하면서 ‘절대 육류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는 육류섭취와 무관하다고 하지만 이필이는 암세포가 활성화될까 두려워 했다. 이필이의 손가락 중 3개의 손톱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니 기자 가슴에 찬 비가 내린다. “항암치료하면서 손끝이 따갑고, 딱딱하게 굳으면서 갈라진다”고 했다.
▲6·25전쟁보다 무서운 춤
이필이는 1935년 4월19일 마산 자산동에서 태어났다. 이찬종과 구막이의 3남4녀 중 셋째. 위로 오빠 한 명과 언니 한 명이었는데, 이필이가 태어나자 부모는 ‘이 아이가 딸로선 필히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의지로 ‘필이’라 지었다. 이름 덕일까. 이필이 밑으로 아들이 태어났다.
집에선 ‘덕순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의 항구도시 마산에서 그의 집은 잘살았다. 어릴 때 기억은 참으로 암담하다.
“대동아전쟁을 겪으며 자랐으니까요. 잠자다가도 사이렌 소리가 나면 머리맡에 준비된 배낭을 메고 우리 집 논과 밭을 가로질러 산속에 파놓은 굴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전쟁 중이어선지 이필이는 9세에 취학통지서를 받았다.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완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담임인 여교사 우에하라는 ‘오마루가창’ 음악에 맞춰 율동을 가르쳤는데, 구니모도 히츠이(이필이의 일본이름)가 군계일학이었다. “어미말과 아기말이 정답게 뛰노는 모습을 율동으로 하는데 우에하라 선생님이 ‘넌 무용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다. 무용가가 되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무용’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어요.”
우에하라는 율동시간이나 학교행사 때마다 필이를 불러 세웠다. 해방 후 4학년에 무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필이 집앞의 학교였지만 일본인 자녀만 다녔던 곳이다.
“학예발표회 때마다 제가 안무한 율동을 반 친구들에게 가르쳤어요. 한글도 그때부터 배웠죠. 명절만 되면 동네에서 마당과 대청마루가 넓은 집에서 연주하고 무용공연도 하면서 놀곤 했습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홑이불로 무대 막을 만들고 엄마 치마저고리를 입고 연극도 했죠. 그때 제가 춤을 안무하고 공연을 진행하는 등 연출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땐 한국춤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춤추었다. 정식 춤은 성지여학교 1학년 때 시작했다. 6·25전쟁이 터져 마산으로 피란 온 이미라 선생(경향신문 12월21일자 ‘춤과 그들’ 주인공)이 성지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 최승희의 제자인 이미라는 한눈에 이필이의 재능을 알아봤다. 학생회장으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이필이는 남달리 감정표현이 풍부했다.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김남조(시인)는 필이를 문학도로 키우려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이미라가 이필이 집의 방 하나를 얻어 살면서 운명은 정해졌다. 유교사상에 투철한 필이의 부모는 딸이 춤추는 걸 못마땅해 하던 터. 필이 가족과 친해진 이미라는 필이 부친에게 ‘무용가로 키우고 싶다. 아들보다 낫게 키우겠다’고 설득했다. 반승낙. 문학을 버리고 무용을 택했다. 이필이는 성지여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가는 이미라를 따랐다. 한국 무용가들이 피란 내려가 활동하는 부산이 전쟁 중에도 춤의 메카였다.
“부산에서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피란민들이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저도 춤 배우며 기숙하던 무용학원을 비워야 했어요. 이미라 선생은 서울로 가면서 저에게 자신의 자주색 코트를 벗어주고 ‘마산 가서 기다리면 서울에서 자리잡고 연락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스승의 연락은 없었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스승 때문에 무용을 시작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매일 우는 것도 지쳤다. “스승이 서울에서 미장원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상경했죠. 미장원이란 간판만 보이면 죄다 뒤졌어요. 발이 부르트게 다녔지만 찾을 수가 있겠어요?”
마산으로 내려간 이필이는 56년 추산동사무소 2층에 피란 내려 가있던 단국대 분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개월 후 마산분교가 단국대 부산분교와 합해지자 이필이는 무용학원 운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스승은 계속 연락이 없었다. 5급 공무원시험에 합격, 시립도서관에 취직해 생활하면서도 스승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 (훗날 이미라는 “시대가 어수선했다. 내 삶의 정착에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어린 필이를 늘 머릿속에 생각하면서 책임감과 상실감에 가슴 아팠다. 남한에서의 내 첫 제자가 서울에서 나를 찾아 고생한 사실을 알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춤을 품다
19세. 스승을 찾아 다시 서울로 갔다. 스승은 없었다. 그때 낙원동에 있는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춤 공부를 시작했다.
“회현동 쌀집 2층에 방을 얻었습니다. 방세를 내지 않는 대신 주인집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식비는 자수를 놓아 해결했죠. 쌀가게 앞의 생국수집에서 국수 한 그릇 먹는 게 하루 식사의 전부였어요. 돈 없을 때는 회현동에서 낙원동 무용학원까지 걸어다니고!” 수예 솜씨가 좋은 그는 밤새 스카프에 수를 놓아 생계를 이었다. 춤뿐 아니었다. 수예, 노래, 그림까지 다재다능했다.
김천흥 무용연구소에선 전통무용 ‘포구락’을 비롯 창작무용의 기본과 북가락을 배웠다. 북 배울 때의 일. 통나무를 토막내어 조각낸 국방색 군인 담요로 몇 겹씩 싼후 다듬질 하듯 두들기며 북 가락을 연습했다. 그런데 통나무가 이필이의 엄지발가락에 떨어져 발톱이 빠지고 다리가 부어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닌적도 있다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갔죠. 집에서 춤추는 걸 반대하는데 돈달라고, 그것도 북 배우다 다쳤다고 어떻게 말해요!” 김천흥 무용연구소측에 ‘학생들 가르치고 청소도 할 테니 연구소 강습비를 면제해달라’ 했지만 ‘이필이가 아니어도 청소할 제자는 많다’는 답이었다. 자존심을 꺾고 어렵사리 꺼낸 부탁. 낙원동에서 회현동까지 흐느껴 울며 걸었다. 이필이는 기자에게 당시의 가슴 무너지던 이야기를 하며 50여년이 지났는데도 눈물을 비쳤다.
“무용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죠. 하루종일 춤을 추고 싶어 대학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거리를 지나가도 ‘무용’ 단어만 나오면 걸음을 멈추었고, 꿈에도 춤만 나오는데, 대학을 가고 싶겠어요?” 그는 결국 대학중퇴 후 37년 만인 93년 창원대 경영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마산 김해랑의 춤을 잇다
결혼은 24살에 마산에서 했다. 무용학원 제자의 엄마가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했다. 3살 위인 남편은 잘생겼고 자상했다. 한동안 그랬다.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는 몇달 연애로 행복했다. 성격차이로 29세에 이혼할 줄 정말 몰랐다. 남편은 신문기자였는데, 마산에서 제일 큰 무용학원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용돈으로 거액을 요구하곤 했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필이는 이혼소송 승소로 굴레를 벗어났다. 아들 류희철(49·요식업)은 25세에 낳았다.
“승소하던 날, 남편과 살던 집에서 맨몸으로 나왔습니다. 입었던 옷이 전부였어요. 짐 챙길 시간조차 그 집에 머무는 게 싫었거든요. 그러느라고 어릴 때 사진과 제1회부터 제4회까지의 개인발표회 사진이 없어요.”
남편은 재혼해 아들 하나 낳고 경상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는 불행했지만 마산에서 이필이는 스타였다. 57년 무용학원을 개설했고 68년에는 마산에서 한국무용을 전파한 고 김해랑이 병석에 눕자 김해랑 무용연구소를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김해랑 선생께 7달 배웠는데, ‘하루를 배워도 사제지간이다. 너는 내 제자다’ 하시며 저를 아끼셨어요. 김선생도 이미라 선생처럼 최승희 제자여서, 제가 배운 춤과 비슷한 춤풍이셨죠. 그래서 즐겁게 배울 수 있었어요.”
이필이는 김해랑 작고 6개월 전에 그 학원을 인계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한 고 최현과 이매방(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 권려성(재미무용가)의 춤도 사사했다.
“70년대 초반에는 우리 학원 제자들이 수많은 무용 콩쿠르를 휩쓸었어요. 당시 이대무용 콩쿠르에 군무 부문이 있었는데, 10여명씩 저에게 지도받고 제가 창작한 작품으로 상을 타곤 했어요. 특히 ‘파도’는 1~3등이 없는 특상작이었죠. 의상실도 없을 때여서 제가 디자인하고 의상 염색도 직접 해 입혔다니까요!”
무용학원을 개설하고 69년부터 17년 동안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장으로 무용인 단합에도 앞장섰다.
첫 발표회는 마산 시민극장에서 했다. 이필이가 처음 창작한 ‘뱀의 춤’, 이미라가 안무했던 1인2역의 춤 ‘선과 악’ 등이 인기였다. 그는 창작춤 ‘회상’(71년), ‘설화’(72년), ‘번뇌’(78년), ‘사랑’(81년), ‘굴레’(86년), ‘맥’ ‘일란’(이상 87년), ‘난대별곡’ ‘사군자’(이상 2001년) 등을 안무했다. 무용극도 많다. ‘도’(2000년), ‘이성지합’(2002년), ‘성신대제’(2003년), ‘효’(2005년), ‘운림지’(2006년), ‘목련존자’(2007년) 등. 이미라를 비롯해 고 최현, 고 김해랑, 이매방, 권려성 등 당대 최고 무용가들의 춤을 사사했기에 다양한 창작춤이 가능했다. 춤욕심. 나이를 초월해 춤을 배우러 다녔다.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이매방에게 승무 살풀이춤을 전수받았다.
지난 11월에는 수제자 장순향씨가 마련한 공연 ‘명무, 일란 이필이 스승께 헌무-청정무’에서 산조를 추었다. 부채를 들고 춘 ‘부채버전’과 흰 명주 ‘수건버전’ 등 두 종류를 선보였다. 무대에 선 그는 도저히 암투병 중인 무용가가 아니다. 너무 정정한 모습.
“계속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무대에서 춤을 추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건강한가 봅니다. 암세포를 이기고 있으니까요. 제 별명이 ‘토마토’ 거든요. 이필이! 토마토! 거꾸로 해도 똑같잖아요. 아무리 흔들고 거꾸로 해도 저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고통받는 환자가 아니다. 암이 별 건가! 춤 덕분에 무서울 게 없다.
中 경극스타 매란방에 반해 ‘이매방’으로 개명
중국에서 경극 스타 매란방을 만난 후 이규태는 자신의 이름을 ‘매방’이라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 형의 사업체가 있던 만주 다롄에서 일본 학교인 정포소학교를 다니던 이규태가 방학 때 베이징의 누이 집에 놀러갔을 때다.
“누나가 ‘너 잘왔다. 경극배우 매란방이 춤 잘추고 노래 잘하니 매부하고 보러가자’ 합니다. 경극은 남자들이 여장하고 출연하고, 일본 가부키도 남자들이 여장하잖아요. 저도 여장 차림의 매란방에 푹 빠졌죠.”
결국 소학교 3~4학년 때 매란방 조교에게 춤을 배웠다.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 사진은 이매방의 포이동 빌라 2층 연습실에 걸려 있다.
“22살 때, 한국 작명가에게 중국에서 매선생에게 공부했는데 ‘란’자 빼고 ‘이매방’으로 이름지으면 어떨까’물으니 ‘무용가로는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배우나 가수로는 좋지 않은 이름’이라더군요. 그후 23세부터 57년 동안 그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름을 바꾼 후 곤란한 적도 많았다. 해외에서 제자나 친척이 ‘이매방’에게 우편물을 보낼 때 국제우체국에 찾으러 가면 ‘이매방’이라는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호적상 ‘이규태’라며 소포를 내어주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 사진과 신문기사를 보여주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20년 전 재판으로 호적 이름을 이매방으로 고쳤다.
우리 춤의 중요 요소는 12가지. 제1은 춤에 들어가는 ‘정중동’(靜中動)이다. 靜은 여자, 動은 남자. 靜은 밤이고 動은 낮. 靜은 음력, 動은 양력. 靜이 있는 춤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 다른 춤은 動만 있다. 2.비정비팔(比丁比八)로 발디딤하기. 3.연풍대(제비처럼 날렵하게 뒤집기·사물놀이의 자반 뒤집기와 같은 뜻) 4.잉애거리(지그재그로 왔다갔다하기) 5.완자거리 (4박자춤에서, 한 박자와 두 박자는 앞으로 나가고 세 박과 네 박에는 옆으로 발 딛기·이런 식으로 계속 기억자를 만들며 동선을 연결한다) 6.비드듬(두 박자 스텝 밟기) 7.대삼소삼(세 박자는 크게 풀고 다음 삼박자는 작게 푸는 춤) 8. 양우선(양손으로 번갈아가며 곡선 만들기) 9.좌우거리(오른팔을 들고 왼쪽으로 돌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기) 10.안가랑(한 손으로 치마 잡고 다른 한 손은 따라가며 치마 펴기) 11.삼사위(평사위·상사위·하사위 등 3종류의 사위) 12.까치디딤(세 박자 스텝 밟기).
“한국 춤은 요염하게 춰야 합니다. 우리 춤 요소가 12가지인데 이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내가 ‘따발총’이라는 소리 들어가면서도 입바른 소리하는 거예요. 일제 강점기 때 춤 스승들은 12종류의 춤 요소를 한문으로 쓰고 설명하며 가르쳤는데 신무용이 떠오른 후 전통춤이 사라졌어요. 사실 ‘춤’이지 ‘무용’이 아닙니다. 정서의 충실한 표현이 ‘춤’입니다. ‘무용’이라는 말은 일제의 인위적인 산물이죠.”
‘한국춤은 □다’. □속 단어는? 누가 뭐래도 ‘이매방’이다. 한국 춤의 지존 우봉(宇峰) 이매방(81)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승무’와 ‘살풀이춤’ 등 두 종목 인간문화재이다. ‘구한말 이래 변질하지 않은 춤 원형’으로 꼽히며 전통춤을 오롯이 지켜오고 있다. 무대 위에서 팔 하나만 슬쩍 올려도 관객들의 간장이 오그라들고, 흩뿌리는 장삼 자락에는 승천하는 혼의 노래가 담겨 있다. 온 몸으로 추는 만가는 이매방의 전생이 ‘우봉’이라는 아호처럼 우주를 품은 초월신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이매방은 “대한민국 무용인의 70%가 내 제자”라고 하지만, 이매방의 제자에게 간접으로 배우는 무용 전공생들까지 치면 대부분의 한국 무용 전공자들이 그의 제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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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만 추면 안된다. 바느질도 인간문화재급
우봉은 서울 양재동 100평형 복층 빌라에서 조교 백경우씨(40)와 살고 있다. 용인대 교수로 출강하느라 20년 살던 아현동 집을 떠나 10년 전 이곳으로 왔다. 아래층은 살림집, 위층은 매일 오전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연습실이다. 부인 김정수씨(예명 김명자·65)는 부산 무용학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매주 토·일요일에는 서울에 올라와 제자들을 가르친다.
기자가 찾아간 오후에 이매방은 마루에서 제자에게 입힐 연습복을 재단하고 있었다. 베란다를 터서 넓힌 마루 한쪽에 일제 미싱을 비롯, 3대의 재봉틀이 놓여 있다.
“이거, 130년 된 재봉틀이여. 양복점에서 좋은 미싱 사줄 텡게 이 싱거미싱을 달라고 욕심내도 악착같이 지켰어요. 생전 가야 고장이 없응게. 그 옆에 있는 건 약 80년 된 미싱이고… 쩌그 놓인 오바로쿠 미싱꺼정 모다 다섯대구먼. 내 옷은 다 지어 입고 제자들 의상도 다 내가 지어중께. 나(내)가 시방꺼정 만든 의상들을 어찌 이루 다 시겄(세겠)소! 바느질로 인간문화재하라면 쓰겄는디!”
이매방의 바느질 솜씨는 소문대로 얌전하고 정교하다. 앞이 트인 옷을 입은 기자에게 “아그! 안 추워야? 이거이 젤로 좋은 명준디, 후딱 박어줄텡게 목에 감어!” 큰 가위로 우윳빛 명주를 쫙 가른 후 재봉틀에 앉아 순식간에 박음질을 마친다. 이매방표 스카프가 솜사탕처럼 보드랍고 달콤하게 목을 감는다.
‘이런 장면은 예상에 없었는데….’ 시대의 명인이 만든 스카프를 목에 감은 기자,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멋쩍게 묻는다.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술·담배를 끊었다. 줄담배에 앉은 자리에서 대형 정종 세 병을 마시던 실력. 공연 직전 분장실에서 한 잔 마시고 흥에 취해 무대에 오르던 그였다. 너무 잘난 재주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해 춤추던, 진한 사투리의 육두문자를 내뱉던, 흠이 되질 않았다. 모든 게 용서됐다.
“제자×이 인간문화재인 나를 이용해 사기를 쳤당게! 하도 분해 펄펄 뛰었는디, 그때 피를 두 번 토하고 병원 가니 위암 초기려! 신문에 그× 이름 꼭 써야 혀!” 기자에게 당시 억울했던 일을 전하면서 제자에 대한 욕설이 이어진다. 바르지 않은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온갖 욕을 한다. 남들이 갖지 못한 예능을 소유한 만큼 고단함도 더했을까. 자기 의지대로 거침없이 살아왔다.
#하늘이 내린 불덩어리
이매방의 본명은 이규태. 1926년 음력 3월7일 전남 목포에서 이경율과 모친 조병임의 3녀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명의 자녀 중 5남매만 생존했다. 누나가 3명인데, 규태와 20살 차이 나는 큰 누나는 중국 베이징에서 살았다. 형제들은 모두 작고했다. 18세 위인 큰 형 이학길은 중국 만주 다롄에서 운수업을 했는데, 4대의 자가용으로 영업하며 잘 살았다. 막내 규태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잘 살았다.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꿈인데요. 호미로 밭을 갈고 있는데 저 앞에서 동그란 불덩어리가 굴러와 엄마 치마로 쏙 들어가기에 그 불덩어리를 꽉 안았대요.”
45세에 꿈꾼 아들 태몽. 불덩어리는 이매방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쌀 잡곡 장작나무 등을 파는 상인이었다. 농사도 지었다.
“아버지가 봉건적이셔서 판·검사나 교수하래요. 남자가 무당새끼처럼 왜 춤 추냐고 못마땅해 하셨는데 어머니가 제 편이셨어요. 해방 전 조선에서 춤춘 남자는 나뿐이었어요. 신무용계에선 김진걸·최현·조택원·이인범 등이 추었지만 권번의 순수한 전통춤을 춘 이는 나 하나예요.”
원래 춤의 뿌리는 호남이었다. 그러나 이매방이 1953년 광주에서 첫 개인발표회를 가진 후 영남과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호남의 춤맥은 흐려졌다. 그나마 목포시에서 내년에 이매방 전수관을 건립해 춤맥을 잇는다. 지금도 이매방은 목포 예총 옆 이매방 전수관에 매달 한두 번 내려가 지도하고 나머지 날에는 조교 김정기(36)가 가르친다. 이매방이 거주하는 서울 연습실은 백경우씨가 맡고 있다.
“암수술 후 채식 위주로 먹습니다. 아침 9시에 일어나 내가 담근 오이김치·오이지·채김치·옥파김치 등을 반찬 삼아 밥을 먹지요. 맵거나 짜게 먹지 말라 해서 조금 달게 만들어 먹어요.”
암 초기여서 항암치료도 받지 않았다. 폐와 간은 까딱없단다. 위암수술 1년 후 무대에 설 만큼 강건한 체력. 지난 몇 년 사이 송범·이인범·최현·임성남 등 많은 원로무용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이매방은 세월의 허약함을 느끼면서도 숨이 붙은 동안 춤만 생각한다. 위암수술 후 59~60㎏인 몸무게가 46㎏으로 여위고 허리도 구부정해져 167㎝(이매방의 주장)의 키가 160㎝로 줄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춤만 생각한다. 공연을 위해 의상 만드는 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술고래, 담배골초, 따발총, 욕쟁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교육을 받아 ‘한번 한다면 한다’거든요. 하루 세 갑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술을 딱 끊은 거죠.”
#75년 동안 춤만 추다
이매방은 7세부터 춤을 추었다. 할아버지뻘인 이대조가 권번 교사였다. 양동 집 옆에는 조도 출신 기생 함국향이 살고 있어 자연스레 춤을 배웠다. 그 기생의 소개로 목포권번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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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방의 춤스승은 5명. “그중 스승 진소홍은 조선시대 마지막 미인으로 꼽히는데, 살풀이춤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흥분한 나머지 그를 보듬고 손까지 만진거라! 그 여성은 임금이 만진 손을 명주수건으로 감았대요. 그런데 그 이를 짝사랑한 이가 신무용의 거두인 조택원이에요.”
또 이매방은 무안 출신 이대조에게 승무 검무 장구춤을, 전남 옥과 출신 신방초에게는 육자배기·화초사거리·가곡·가사·승무·검무·보렴승무 등을 사사했다. 오수암에게는 소리를 배웠다. 일곱 살부터 열여덟까지 10년 동안 권번기생들 틈에서 춤을 배웠다. 13~14살에 전남 광주 권번의 박영구선생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전남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 등을 사사했다. 소학교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은 큰 형이 사업하던 만주 다롄과 베이징 누나집을 오가며 중국의 경극스타 매란방을 만나기도 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목포에서 춤과 악기를 배웠다.
매란방의 장검무를 배워 처음 무대에 오른 게 열네살. 목포역전 가설무대에서 열린 임방울의 명인명창대회 공연에서 승무를 추었다. “목포 사는 여자 선배 박봉선(명창 박초선의 언니)의 춤으로 막을 올려야 하는데 그가 광주에서 못와 제가 대타로 추었죠. 그런데 관객들이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네!’ 하고 놀라더군요. 제 춤이 예쁘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그래겠죠.”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결혼은 42세에 부산에서 했다. 목포 사람이 웬 부산? 68년 10월 일본 공연 후 일본에서 술 먹고 2층 화장실에 가다 계단에서 구른 그는 움직일 수가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후에 배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일본 순회 공연에는 고복수·김정구 등 인기가수들이 일본순회공연에 함께 했는데 그들과 술을 마시다 부상 당한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려는데 바로 위 누나가 중매하겠다며 ‘나 죽는 꼴 볼래, 결혼할래’ 협박하대요. 누님 때문에 억지 결혼했습니다.”
부인 김정수는 이매방 춤을 지키고 계승하는 최우선에 서있다. 한성여대를 졸업한 무남독녀 이현주(35)가 부친의 춤을 잇는다. 현재 전수조교는 김묘선·임이조·김정녀 등 세 사람. “문화재는 원형을 보존해야 혀. 집사람만이 내 춤을 변형시키지 않아요. 다른 제자들은 맘대로 창작가락 넣고 별×× 다하는데. 요즘 엉터리 문화재가 너무 많아. 우리나라처럼 인간문화재 많은 나라가 없어요. 모두 문화재병에 걸렸다니까요. 음악이 민속악이면 민속악, 궁중악이면 궁중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하는데 처음에 궁중악을 연주하다 나중에 민속악으로 가고 다시 나중에 사물놀이 타악이 나오니 뭔 춤이 그러냐고! 문화재는 우리 역사인디! 무형문화재는 엉터리가 많탕께!”
그는 또 춤을 추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춤은 고운 심성에서 우러난 수묵화라는 것.
“맴(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운겨. 맴이 고와야 노래가 곱고 얼굴도 곱당게. 춤 배우면서도 머리 굴리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원! 승무나 살풀이춤도 이수 시험 받을 때까지는 열심히 허고 이수증 받으면 그 길로 끝인거라!”
그의 춤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춤을 보며 ‘오매! 요염한 거!’ 하는 탄성이 나오면 최고 명무란다.
옷 만들 때든 춤출 때든 한 가지에만 몰두한다. 그 때 다른 건 모두 잊는다. 죽을 때까지 춤출 것이다. 내년에 평양공연이 예정돼 있다.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 선양 공연도 있다. 매년 4~5회 대형 무대를 갖는다.
“10년 전 프랑스에서 훈장 받은 게 기억 납니다. 순금덩어리를 주더라고요. 수상기념 공연에 김종필씨가 왔는데 ‘한국 정부가 주어야 할 상을 프랑스가 먼저 주었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한국보다 외국에서 제 춤이 더 인정 받는다는 건 씁쓸하죠.”
60년대 3고(鼓)부터 11고까지 북춤을 창작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은 이매방.
“북의 변죽(둘레)과 구례(가운데)를 잘 구별해 쳐야 합니다. 북에도 대음·소음 등 음양이 있어요. 장구도 마찬가지고. 요즘은 장구를 제대로 치는 이가 없으니. 다른 이들이 내가 친 장구와 북소리를 녹음해 춤출 때 사용하는 이유가 뭐게요. 나는 시절 잘 만나서 좋은 스승을 사사했죠. 우리 제자들에게도 나 살아있을 때 장구 배우라고 잔소리하지만….”
기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겠냐고. 따발총 명인이 얼른 답한다.
“춤추는 사람! 지금처럼 남자 무용가!” 우문명답이다.
▲이매방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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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목포 북교 입학
35~39년 만주 다롄 거주. 이대조에게 승무 북춤, 박영구에게 승무 법고, 이창조에게 검무 사사
43년 목포 공립공업학교 졸업
48년 명창 임방울 명인명창대회에서 ‘승무’로 첫 무대
53년 제1회 개인발표회(광주)
56년 제3회 개인발표회(부산)
59년 제5회 개인발표회(서울 원각사)
84년 무용 인생 50년 특별공연 ‘북소리’
87년 승무 예능보유자 지정
90년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지정
93년 인간문화재진흥회 부회장
96년 용인대 무용학과 대우교수
99년 우봉 이매방 춤 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
2004년 외길 인생 우봉 이매방 춤 인생 70년 기념공연
수상 부산시 눌원문화상(76년), 옥관문화훈장(84년), 성옥문화상(9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98년), 임방울 국악상(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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