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 명당순례_03

醉月 2014. 4. 24. 22:23

모악산 大院寺] 左청룡 右백호 지맥이 겹겹이 에워싸

진묵대사·강증산이 공부… 당시 靈氣 시공 초월 머무르는 듯

 

산 이름에 ‘악’(岳)자 들어가는 산은 기운이 강하다. 영발(靈發)이 있는 산이라는 말이다. 영발이 있어야 영험이 있는 것이다. 영험이 있어야 인생살이 풍파에서 난파당한 중생들의 고통을 보듬어 줄 수 있다. 세상의 근심을 털어낼 수 있는 자기력(磁氣力)이 있는 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악’ 자 들어가는 우리나라 산들은 다 ‘약산’(藥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6대 악산(岳山)이 있다. 설악산, 서울의 관악산(冠岳山), 원주의 치악산, 이북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충북에 월악산(月岳山), 그리고 전북에 모악산(母岳山)이 있다.

모악산은 6대 악산에도 속하지만 계룡산과 함께 한국의 양대 신종교 메카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정감록과 미륵신앙, 그리고 후천개벽을 신봉했던 마니아들은 계룡산과 모악산으로 모여 들었다. 모악과 계룡은 공통점이 있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산이라는 점이다.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들판으로부터 접근성이 좋다. 민초들이 접근하기에 용이한 산이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식량조달도 비교적 수월했다.산속에 살면 먹을 식량이 문제인데, 모악과 계룡은 주변의 평야지대에서 식량을 쉽게 공수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 치하에서 도저히 못살겠다고 생각한 상당수의 반체제 인사들이 계룡산과 모악산으로 모였고, 이 사람들이 동학, 증산교, 원불교 같은 민족종교의 패러다임을 형성했다고 보인다.

모악산은 내가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일주일에 2박3일은 머물렀던 산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이쪽 바위 저쪽의 샘물을 올라가보고 마셔보았다고나 할까. 저녁노을에 취해 넋을 놓고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을 때도 있었고, 운무에 쌓인 숲속 길에서 산기운에 취해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모악산의 좌청룡 우백호 지맥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대원사 전경.
▲ 모악산의 좌청룡 우백호 지맥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대원사 전경.

모악산은 6대 악산… 악산은 靈發 있어

나는 모악산에서 정신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세계도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출신 성분이 ‘모악산파’(母岳山派)다. 모악산은 나에게 정신세계의 젖을 빨게 해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이런 글을 쓰는 자양분도 모악산에서 얻었던 셈이다. 지나고 보니 모악산에서 젖을 먹고 성장해 계룡산, 지리산에서 가서 힘을 길렀던 것 같다.

모악산 여산신(女山神)의 젖을 먹으며 아장 아장 발걸음을 떼던 시절에 꼭 들르던 절이 바로 대원사(大院寺)다. 모악산은 진표율사가 공부했던 금산사(金山寺) 쪽이 있고, 그 반대편에 대원사가 있다. 김제 쪽에서는 금산사가 가깝지만 전주 쪽에서는 대원사가 가깝다. 물론 절의 규모나 깊이에서 보자면 금산사는 엄청나게 큰 절이고 대원사는 거의 암자 수준이라고 할 만큼 작은 절이다. 크다고 자기에게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고를 떠나 자기에게 도움을 준 절이 인연 터이고, 명당 아니겠는가!

모악산 정상에서 대원사를 내려다보면 이 터가 겹겹이 쌓인 모란꽃의 꽃심에 있는 형상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지맥이 겹겹이 대원사를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겹겹이 둘러싸면 장풍(藏風)이 잘 되는 터이다. 바람을 막아 주는 터라는 말이다. 바람의 위력을 언제 느끼는가? 태풍 불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 느낀다. 장풍이 잘 된 터는 이때 있어 보면 확실히 바람이 적고 안온한 느낌이 든다. 폭우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려 보아야 명당의 효능이 증명된다. 풍파를 겪어보면서 사람 내공이 다져지듯이 명당도 비바람을 맞아 보아야 안다. 평상시에는 잘 모른다.

대원사 아래로는 계곡 물이 풍부하다. 큰 계곡이 아니고 작은 계곡이지만 수량이 비교적 풍부하다. 모악산은 육산(肉山)이기 때문에 항상 일정량의 수량이 유지된다. 바위만 있는 골산(骨山)은 비가 오면 순식간에 계곡 물이 불어난다. 물이 땅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바위를 타고 흘러 계곡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산은 땅으로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수량이 오래 지속된다. 육산은 물이 마르지 않는 장점이 있다.

대원사 아래 계곡으로는 물이 항상 흐르므로 옛날에는 물레방아를 설치하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절 밑으로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 일대에 대원사 소유의 논이 많았고, 수확한 벼를 이 물레방아에 찧었다는 이야기이다. 계곡 중간 중간에 약간의 평평한 입지가 있는 걸로 보아서 물레방아 설치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지금은 물레방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쉽다. 옛날처럼 12개나 남아 있으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을까?

대원사에서 공부했던 두 명의 인물 중 한 사람은 조선 중기의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이고, 또 한 사람은 구한말의 강증산(姜甑山·1871~1909)이다.


	진묵스님과 강증산이 공부했던 터로 추정되는 대원사 산신각 자리가 적묵당으로 변해 있다.
▲ 진묵스님과 강증산이 공부했던 터로 추정되는 대원사 산신각 자리가 적묵당으로 변해 있다.

진묵대사는 부처가 환생한 고승으로 남아

호남지역에서 진묵대사는 부처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진묵에 대한 뿌리 깊은 신앙이 있다. 그에 대한 신통이적(神通異蹟)이 이곳저곳에 많이 남아 있다. 도인은 신통력을 보여 주기 마련이다. 대중은 말보다 그 사람이 보여 준 초월적인 신통력에 감화되기 마련이다. 신통력에 관한 한 호남 지역에서 진묵만큼 위력을 보여 준 승려도 드물다. 호남 민초들의 가슴속에는 진묵이야말로 부처가 환생한 고승으로 남아 있다.

한 번은 진묵대사가 길을 가다가 어느 요염한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그 여인이 진묵의 훤출한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 여인이 진묵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진묵은 그 손짓을 따라서 여인과 같이 나무 아래에 앉았다. 여인이 진묵에게 안겨 오자 그도 스스럼없이 그 여인을 품었다. 품에 안고 있던 도중에 보니까 바로 옆 감나무에서 잘 익은 붉은 홍시감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진묵은 여인을 품고 있던 팔을 풀고 아무 생각도 없는 듯 그 홍시감을 주우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한참 열이 올랐다고 생각한 그 요염한 여인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남자가 홍시감 주우러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니 말이다. 진묵은 그 감을 맛있게 먹느라고 여인을 잊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진묵의 무심한 심법과 색(色)에 걸리지 않았던 그의 도력을 유머러스하게 전해 주는 일화이다.

역사에서 보면 진묵대사는 서산대사와 동시대의 인물인데, 서산대사에 대해서 ‘명리승(名利僧)’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명리승’은 냉혹한 평가이다. 서산대사가 명리(명성)를 밝혔다는 게 아닌가! 임진왜란에서 승병들을 조직해 왜군과 싸운 호국불교의 모델이 서산인데, 서산을 명리승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난리가 났을 때 칼을 들고 나가 적군과 싸운 승병들에 대해서도 썩 긍정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가의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긴 것이 큰 문제인가, 아니면 계율을 어기더라도 나라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가. 아마도 진묵은 ‘구국(救國)’이나 ‘나라와 민족’이라는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살생하지 않고 세속의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는 출가 승려 본연의 처신에 더 비중을 두었던 듯하다. 진묵의 관점에 의하면 서산대사는 ‘조국을 위해 진리를 팔아 버린 중’이었다. 그래서 명리승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진리냐? 조국이냐?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그 다음에는 강증산이다. 증산은 39세에 죽었으니 오래 산 것이 아니다. 일찍 죽은 감이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39년은 파란만장이고 대하드라마 아니었을까. 1871년생인 증산은 1894년에 동학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우리나이로 24세였다. 혈기 있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투철할 나이 아닌가. 이때 동학이 일어났다. 그는 동학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 크게 동조한 상태였던 것 같다.

동학도들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들에게 기관총으로 대량 학살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살아남은 동학도들도 일본군 추적대들에게 붙잡혀 처절하게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머리 좋고, 정의감 있는 청년이 이 기막힌 조국의 현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힘에서 밀렸다! 힘을 기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대원사 적묵당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봉문스님이 조용헌 박사와 자리를 같이했다.
▲ 대원사 적묵당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봉문스님이 조용헌 박사와 자리를 같이했다.

기관총 대신에 청년 강증산이 생각한 힘은 모악산에 들어가 기도하는 방법이었다. 강증산의 일대기를 후학들이 기록해 놓은 <대순전경(大巡典經)>에 보면 증산은 ‘권능(權能)을 얻기 위하여 모악산에 입산했다’고 되어 있다. 권능이란 무엇인가? 파워 아닌가!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말도 있다. 증산은 세간의 번뇌를 털기 위하여 모악산에 입산한 게 아니고, 세속을 바로잡기 위한 초월적인 힘을 얻기 위해 산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산이 아닌 모악산이었다. 모악산 중에서도 바로 대원사였다.

대원사의 산신각 자리에서 증산은 49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때 대원사의 승려로서 젊은 강증산을 지도해 준 인물은 금곡(金谷)대사였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증산은 대원사에서 동학의 정신적 후유증과 울분을 삭이느라고 2~3년은 머물렀지 않았을까. 절에 있는 동안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되고, 기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49일 기도에 전력을 쏟은 것 같다.

기도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처절한 원력(願力)이 그것이다. 원력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는 기도이다. 뼈에 사무쳐야 한다. 뼈에 사무친 상태에서 명산에 들어가 기도하면 거의 100% 영험이 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증산이 대원사 산신각에서 기도를 하고 나와 엄청난 권능을 얻었다. <대순전경>에 보면 그가 발휘한 신통력들이 쭉 열거되어 있다. 불구자의 병을 낫게 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돌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하는 파워를 보여 주었다. 후천개벽의 권능을 보여 준 사람은 강증산이다. 이 증산이 그 가공할 힘을 얻게 된 성지가 바로 대원사이고, 대원사의 산신각인 것이다.

한국은 단군 이전부터 주류종교가 산신령이었다. 가장 오래된 전통을 지닌 종교가 바로 산신교(山神敎)이다. 강증산이 동학혁명 이후 처절하게 바닥에 떨어진 호남의 민심을 추스르면서 다시 희망을 줄 수 있었던 힘도 이 대원사 산신각에서 나왔다.

증산, 산신각에서 기도하고 엄청난 권능 얻어

산신각 자리는 현재 적묵당(寂默堂)이라는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침묵을 지키는 방’이라는 뜻이다. 나는 대원사에 올 때마다 이 방에 들러보곤 했다. 아마도 진묵대사도 이 터에서 공부하지 않았을까. 고단자들이 공부했던 터에는 그 당시의 영기(靈氣)가 시공을 초월해서 머물러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수백 년 후 자질 있는 사람이 같은 터에서 공부하다가 정신세계가 열리면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고단자가 남겨 놓은 에너지와 교감하는 수가 있다.

이번에 가보니 적묵당에는 봉문(蓬門)스님이 머무르고 있다. 봉(蓬)은 쑥 봉자이다. 가난뱅이가 사는 집 대문은 옛날부터 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문 만들 재료가 오죽 없으면 가장 구하기 쉬운 쑥으로 했겠는가? 봉문스님은 ‘걸레’ 중광(重光)스님의 제자이다. 중광 말년에 3년을 같이 살면서 시봉한 제자이다.

“중광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분별(分別)을 없애는 것이었죠.”

봉문스님은 하루 종일 이 적묵당에서 참선하다가 커피도 한 잔하고, 계곡의 물소리도 듣다가, 심심하면 마당에 나와 달을 보기도 하고, 저 모악산 아래의 구이(九耳)저수지에서 올라오는 안개를 감상하기도 한다. 보따리 하나가 살림살이 전부인 가난한 스님이 진묵대사, 강증산이 생사를 걸고 기도를 했던 그 방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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