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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원효대사는 왜 동굴에서 도를 닦았을까

醉月 2022. 1. 23. 12:29

[조용헌의 영지 순례]원효대사는 왜 동굴에서 도를 닦았을까

▲ 울진 성류굴 입구  photo 조용헌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제도화된 종교가 있기 전에는 동굴이 신전(神殿) 역할을 하였다. 원시종교의 신전은 대부분 동굴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굴을 볼 때 예사로 보면 안 된다. 원시인들이 도를 닦았던 수도처로 보는 게 합당하다. 예를 들면 3만~4만년 전 원시인들의 벽화가 남겨진 유럽의 동굴이 이런 장소들이다. 알타미라동굴, 라스코동굴, 쇼베동굴에는 당시 사람들이 남겼던 동물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야생 소의 그림이다. 인도네시아 슬라웨시동굴에도 4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벽화가 발견되었다.
   
   동굴벽화는 왜 그려졌던 것일까. 이런 동굴들은 죽음을 초월하는 능력을 얻는 훈련 장소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굴 내부는 빛이 없는 암흑의 공간이고, 이런 절대 암흑의 공간에서 인간은 죽음의 공포와 직면한다. 그 공포를 이겨내는 경지에 도달하면 거대한 야생의 맹수들을 포획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야생의 맹수 가운데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소이다. 지금보다 덩치가 4~5배는 더 컸다고 하는 당시의 야생 소와 동물들은 원시 공동체의 식량이었다. 공동체가 먹고살기 위해 이런 소들을 잡아야만 하고, 이런 소들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 용기는 죽음에 대한 초월이었다. 그 초월적 능력을 얻기 위한 훈련소이자 종교적 신전이 바로 동굴이었다.
   
   
   입구 작고 미로 같은 내부
   
   이런 동굴의 특징은 우선 입구가 작아야 한다. 왜 작아야 하는가? 빛이 들어오는 입구가 작아야만 내부가 어둡다.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입구가 너무 크면 안 된다.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여야만 한다. 그다음에 굴의 내부로 들어가면 공간이 아주 넓어야 한다. 적어도 수백 미터는 넘어야 한다. 기다란 어둠의 공간을 통과할 때 죽음의 공포와 마주칠 수 있다. 특히 동굴 내부에 절벽 같은 급경사의 지형이 있으면 더욱 적당하다. 동굴 내부의 절벽을 내려갈 때 지하세계의 심연으로 내려간다는 두려움과 마주한다. 컴컴한 심연으로 내려간다는 느낌이 바로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쇼베동굴이 바로 이런 구조이다. 내부에 절벽이 있다. 랜턴이 없던 3만~4만년 전에 이런 지점을 내려가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을 것이다. 공포에 질리기도 하지만 절벽에서 미끄러지거나 칡넝쿨이 끊어져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 원시 동굴 내부에 인간의 해골과 뼈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전 동굴의 또 다른 조건은 미로처럼 동굴 내부가 복잡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로처럼 복잡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내부 구조가 단순하면 파악이 쉽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되면 두려움이 적어진다. 인간은 뭐가 뭔지 모를 때 두려움이 더 커진다. 두려움을 주는 공간일수록 수도(修道)의 효과는 증대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공간이 복잡해야 한다. 마지막 조건은 동굴 내부에 마실 물이 있어야만 한다. 물이 없으면 죽는다. 식수가 없으면 인간은 버티지 못한다. 식량은 미리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은 원시인들이 미리 비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릇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어딘가에 식수가 나오는 지점이 있어야만 한다.
   
   경북 울진에 있는 성류굴은 이런 요건을 갖춘 동굴이다. 고대의 도인들이 도를 닦던 신성한 공간이 후대로 내려와서 수학여행 가서 구경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성지가 관광지로 변하는 것은 여기뿐만이 아니다. 모든 성지가 겪는 운명이라고 본다. 고대로부터 이 동굴은 도를 닦던 수도처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동굴에서 많은 도인이 배출되었음이 틀림없다. 도를 닦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었다. 이름 자체도 성인이 머문다는 뜻의 ‘聖留窟(성류굴)’이다. 성인이 머문다(留)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성류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회암 지대에 동굴이 많다. 화강암 지대는 동굴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조건이다. 안내판에 보니 성류굴의 주 통로는 330m이다. 이게 메인 통로이다. 여기서 다시 가지치기를 한다. 메인 통로에서 연결된 가지굴의 길이는 540m이다. 길이를 모두 합치면 870m가 된다. 이런 정도의 길이라면 공포 극복 훈련에 충분한 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뻗어간 가지굴이 있어서 미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성류굴 안에 3개의 호수
   
   동굴이 고대인들의 수도처로 기능하려면 내부에 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류굴 내부에는 호수가 3개나 있다. 물이 깊은 호수는 깊이가 30m나 된다고 하니 규모가 큰 편이다. 호수의 성격을 보자. 물이 항상 고여 있는 호수도 있고, 장마 때 성류굴 밖을 흐르는 왕피천으로부터 넘쳐서 동굴로 들어온 물이 고여 있는 호수가 있다. 물이 고여 있는 호수는 유사시에 사람이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류굴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은 ‘왕피천’이라고 하는 강물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자그마한 고대 왕국의 어떤 왕이 전쟁으로 잠시 이 강물 근처에 피신을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왕피천에는 당연히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고대에는 물고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다. 성류굴에서 수도를 하던 도사들이 왕피천의 물고기로 식량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도를 닦을 때 식량 조달이 문제다. 곡식은 구하기 어려웠을지라도 굴 앞에 바로 흐르는 왕피천은 풍부한 물고기들의 생태계였고, 이 왕피천에서 식사거리를 조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류굴에 들어가 보니 또 하나 감지되는 점은 온도이다. 1년 중 온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점이다. 15도에서 17도 사이를 대체적으로 유지한다고 한다. 겨울에는 따뜻한 온도이고, 여름에는 시원한 온도이다. 온도가 일정해야만 스트레스가 적다. 이 정도는 1년 사계절 항상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온도에 해당한다. 도 닦기에 적당한 공간임을 입증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의 아들 보천태자가 이 성류굴에서 수도하였다. 보천태자가 수도한 방법은 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력수행(呪力修行)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보천태자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성류굴 안에서 머무르고 있던 굴의 신이 말했다. “내가 이 굴 안에서 2000년을 살았지만 그대와 같이 열심히 주문을 외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기특하다.” 신라의 원효대사도 이 성류굴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열이 많았던 체질이라 동굴에서 도 닦는 것을 좋아했던 인물이었다. 도인들도 체질에 따라서 선호하는 도량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성질이 급하고 열이 많은 다혈질의 양인 체질들은 성류굴같이 약간은 습하게 느껴지는 이런 동굴을 선호한다. 열을 가라앉혀 주기 때문이다. 성류굴은 고대의 도사들이 도 닦는 전형적인 조건을 갖춘 동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