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곡사 법당. 뒷산이 제비가 날개를 편 형상이다. |
그런데 임진왜란과 같은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자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정규군으로 활약하였다. 핍박받던 천민이 무슨 지킬 나라가 있다고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 목숨을 바치나. 국방의 의무는 그 체제에서 가장 혜택받던 계급이 앞장서는 게 세계사적인 상식이다. 더군다나 불교는 불살생의 계율을 중시하는 종교집단 아닌가. 승병은 이 불살생의 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전쟁터에 나가서 살육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건 엄청난 모순이다. 평소에 승려들을 부려먹고 천대하던 양반들은 전쟁터를 피해 도망만 다녔는데 말이다. 중들은 오기도 없고 배알도 없었나.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양반의 나라를 지킨다고 목숨까지 바치고. 이런 의문을 해소해 주는 단초들이 있다.
조선시대 발생했던 각종 반란 사건의 배후에 승려들의 가담이 발견되는 것이다. 반체제 혁명에 불교 승려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1589년의 정여립 모반사건이 그렇다. 여기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취조를 받았다. 다수의 승려들이 정여립의 무장단체인 대동계 멤버였다고 나온다.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무신정변)도 그렇다. 영조를 떠받치고 있는 노론 정권에 대항해 남인과 소론이 연합하여 체제전복을 시도한 사건이 ‘무신란’이다. 이 사건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의 양반계급 후손들이 대거 가담하였다는 점에서 성격이 독특하다. 명문가 집안들도 반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규모도 전국적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사회에서 소외된 하층계급이 들고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반체제 혁명의 배후
이 무신란 사건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불교 승려들도 여기에 적극 개입하였다는 점이다. 승려 대유(大有)라는 인물이 이 반란군 내지는 혁명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무신란에는 변산반도에 거점을 가지고 있었던 노비도적 집단과 지리산의 연곡사를 중심으로 한 승려세력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변산의 노비도적은 정팔용(鄭八龍)이라는 노비 출신 인물이 이끌고 있었고, 지리산의 승려세력을 대표하던 지도자는 대유라고 공초 기록에 나온다.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조성좌와 같은 양반계급이 전면에 나서고 배후의 무력을 행사하는 행동부대는 하층계급인 정팔용과 대유가 한몫을 담당하는 구조였다는 점이 발견된 것이다.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 같은 사건기록에는 ‘대유’라는 승려가 지리산 연곡사를 거점으로 가담하였다고만 짤막하게 나온다. 더 이상의 상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한두 줄짜리 정보이지만 필자는 이걸 보고 여러 가지 상황과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연곡사(鷰谷寺)라는 절이 어떤 절이고, 지리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 정도인지를 물어야 한다. ‘鷰’ 자는 제비 ‘연’ 자이다. 구례 쪽에서 지리산 남쪽의 화개를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화개 도착하기 전에 피아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 길이는 대략 20리 정도 된다. 이 골짜기에서 5㎞ 정도 들어가다 보면 연곡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계곡 옆으로 난 도로의 오른쪽에 연곡사가 있다. 제비 ‘연’ 자가 암시하듯이 대웅전 법당 뒤로 자리 잡은 봉우리가 제비처럼 생겼다. 둥그런 봉우리이면서도 그 봉우리가 그리 크지 않아야 제비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둥그런 봉우리가 아주 크면 그건 봉황의 머리로 간주한다. 아담하게 둥그러면서도 양쪽 날개 부위에 해당하는 봉우리들이 받쳐 주고 있다. 양쪽에 날개가 있어야 한다. 조류의 형상에 비유되는 봉우리들은 대개 3개의 봉우리들이 횡대로 늘어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운데 봉우리가 둥그러면 새의 머리 부위로 간주한다. 머리 부위에 해당하는 봉우리가 암벽으로 날카롭게 돌출되어 있으면 매나 독수리 머리로 본다. 영취(靈鷲) 또는 응봉(鷹峯)이 그것이다. 봉우리에 바위가 없으면 기러기 또는 제비로 본다.
▲ 소요태능 선사 탑
제비가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형상
연곡사는 흡사 제비가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형태이다. 그 머리 부위 아래로 법당과 대웅전이 들어서 있다. 그다음에 살펴봐야 하는 것이 앞산의 높이와 형태이다. 앞산에서 그 터의 묘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연곡사는 앞산도 너무 높지 않아서 좋다. 앞산이 너무 높으면 터를 눌러서 인물 나오기가 어렵다. 앞산이 너무 낮아서 휑하면 기운이 모아지지 않는다고 본다. 김이 좀 빠지는 셈이다. 법당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다보면 좌측으로 수구(水口)가 있다. 수구가 너무 벌어져 있으면 이 또한 김이 빠진다고 보는데, 연곡사는 좌측의 수구도 잘 막아져 있는 형태이다. 이만하면 절터로서 좋은 조건을 갖춘 격이다.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 선사가 주석했던 명당이다. 이름도 묘하다. 소요는 한가롭게 소요한다는 뜻이다. 태능(太能)은 그러면서도 못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가 남긴 선시들을 보면 확실하게 한 소식한 선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은 ‘종소리를 듣고’이다. ‘耳裏明明聽者誰 無聲無臭卒難知 收來放去任舒卷 在凡在聖長相隨’. ‘귀 안에서 딩딩 하고 듣는 자 이 누구인고. 그 자가 누구인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알기 어렵구나. 소리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옆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아들고. 범인에게도 있다가 성인에게도 있다가 하면서 계속 이어지는구나’. 이는 ‘능엄경’에서 말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경지에 소요태능이 들어가 있었음이 확연히 느껴지는 시구이다. 소리에 집중해서 도 닦는 방법이다. 소리를 듣는 자 누구인가? 화두 중에서 ‘이 뭐꼬?’ 화두의 유래도 따지고 보면 ‘듣는 자 이 누구인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리를 듣는 자는 문성(聞性)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듣는 성품은 영원하다는 의미이다. 그 듣는 성품은 범인에게도 있고 성인에게도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걸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의 차이만 있다는 말이다. 그 경지를 문득 종소리를 듣다가 영감이 떠올라 지은 시로 보인다.
소요태능 같은 고단자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은 무언가 기운이 다르기 마련이다. 어리바리한 터에서 오래 있지 않는다. 한 소식한 도인은 그 터의 기운을 뼛속으로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기운을 뼛속으로까지 느껴야만 산에서 도 닦는 맛이 난다. 이 맛을 알면 밖을 나가지 않는다. 근래에 도가의 기공 수련을 깊이 해서 기감이 뛰어난 필자 주변의 인물들도 연곡사 터가 좋다고 말한다. 무엇이 좋냐? 무엇보다 기운이 좋다. 짜릿한 기운이 샘솟는다는 것이다.
무신란이 벌어졌던 때가 1728년이다. 이때는 소요태능 같은 고단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이다. 절터는 정신계의 고단자가 머무르기도 하지만 시절 인연에 따라 혁명군의 승려세력이 머물기도 한다. 정신세계와 혁명거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 닦다가 갑자기 칼 들고 뛰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연곡사는 무신란 당시에는 지리산 반체제 승려들의 중요 거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연곡사가 반란 사건의 중요 아지트가 되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곡사는 당시 교통과 물류의 요지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물류가 있는 곳에 돈이 돌고, 돈이 돌아야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고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리산 피아골은 섬진강을 거슬러 왔던 선박들이 짐을 풀던 강가의 나루터가 가까웠다. 소금과 건어물이 이 피아골 입구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화개 나루터에도 왔겠지만 도보로 걸어다니던 조선시대 물류 이동 방식으로 볼 때 피아골이 더 유리했다. 피아골의 20리 계곡을 올라가서 용수암(龍首巖) 골을 넘어 고갯길을 넘으면 뱀사골 상류와 남원으로 갈 수 있다. 즉 섬진강 물류가 지리산을 넘어 북쪽의 남원으로 가는 최단 길은 이 피아골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용수암골 근처에는 산꾼들이 말하는 반야오거리가 있고, 이 반야오거리 근처에 속칭 소금장수 무덤도 있다. 소금장수들이 그만큼 이 길을 많이 넘어갔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피아골 계곡의 상류에 현재는 반야산장이 있고, 이 반야산장 밑의 계곡 쪽 바위에는 ‘眞木封界(진목봉계)’ ‘栗木界(율목계)’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참나무와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표(禁標)이다. ‘여기는 입산금지’라는 뜻이다. 참나무나 밤나무를 허가 없이 채취하면 엄벌로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왜 이런 표시를? 그만큼 이 길을 왕래하는 통행인이 많았다는 뜻 아닐까. 지나다니다가 참나무, 밤나무를 무단 벌목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이런 금표를 새겨 놓았을 것이다.
연곡사가 지닌 물류상의 이점은 칠불사, 의신사 그리고 화엄사와 최단거리 산길로 연결되는 지점에 있었다는 점이다. 무신란과 같은 전국적 규모의 거사에 참여할 정도의 승려들이라면 자체 무장조직이 있었다고 간주해야 한다. 빈손으로 거사에 참여하겠는가. 아울러 인원도 최소한 몇백 명은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유사시 관군과 전투가 붙었을 때의 전략적 불리함과 유리함도 충분히 검토되었을 것이다. 전략적 유리함은 연곡사 주변의 산길을 통해 당취 거점 사찰들과 유기적인 협조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서산대사가 조선시대 반체제 승려 집단인 당취의 보이지 않는 총대장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지리산 당취 세력의 본부 사찰이 의신사(義神寺)였다. 의신사 뒤로는 검각(劍閣)이라는 요새 지형도 있고, 벽소령이라는 1300m급의 높은 고개가 외부 공격을 막아준다. 그리고 화엄사는 구례의 넓은 평야지대를 굽어다보는 위치에 있어서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기가 수월한 지점이었다. 그러니까 당취 본부 의신사의 최전방 사찰이 화엄사였고, 연곡사는 그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연곡사에서 외당재를 넘고 농평마을을 지나서 칠불사에 도착하고, 칠불사에서 내당재를 넘으면 의신사에 도착한다. 또한 연곡사에서 늦은목 고개를 넘고 밤재를 넘으면 곧바로 화엄사에 도착한다. 이러한 고갯길과 산길이 당시 도보이동에 있어서는 최단거리였다. 연곡사는 지리산 당취세력의 물류거점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신란의 지리산 당취세력을 대표하는 대유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