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野說천하

醉月 2014. 10. 13. 08:21


조용헌의 ‘野說천하’ - 파주 적군(敵軍) 묘지 보살피는 묵개 서상욱 

“전생에 나는 여진의 장수였는지 몰라!” 

독만권서(讀萬卷書)·행만리로(行萬里路)의 경험으로 탁월한 이야기꾼 입신…여진족의 뿌리는 경순왕과 윤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통일보살행에 담긴 판타지 같은 민족사

파주 금강사에서 법고를 치며 6·25때 죽은 중공군의 영혼을 달래고 있는 묵개 서상욱.


삿갓 김병연의 시에는 周遊天下皆歡迎(주유천하개환영), 즉 ‘ 온 천하를 돌아다녀도 누구에게나 환영받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이 시에서 ‘갔다가는 도로 오고 왔다가는 다시 가니, 살아서는 죽음을 버릴 수 있고 죽을 자리에서도 살아날 수 있구나’라고 읊었다.

‘山窮水盡疑無路(산궁수진의무로) 柳綠花紅又一村(유록화홍우일촌)’. ‘산이 막히고 물이 끊어진 곳에 이르러 길이 없는 줄 알고 절망했는데, 조금 더 가보니 버드나무 우거지고 붉은 꽃이 피어 있는 동네가 또 나타나네’. ‘백수의 제왕’인 묵개(黙价) 서상욱(徐相旭, 1956∼)의 인생을 옆에서 들여다보면 이 말이 딱 맞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서 눈앞이 안 보이다가도 그때마다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만나 죽지 않고 살아난 인생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쯤 서울 인사동의 수도약국 4층에서다. 수도약국 4층에는 출판사 ‘동문선(東文選)’을 운영하던 신성대 사장의 사무실 겸 사랑방이 있었다. 필자(筆者)들과 밥 먹고 술 먹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신 사장은 40평 규모의 이 4층에다가 학계, 문화계의 여러 식자(識者)를 초대하여 ‘이바구’를 즐겼다.

경험의 진수는 밑바닥 인생을 체험해보는 일

‘프로페셔널 구라꾼’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독만권서(讀萬卷書)이다. 우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문(文)·사(史)·철(哲)이 되겠다. 인문학 전반에 걸쳐 범위가 넓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전공만 읽은 사람은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에 벅차다. 문·사·철 전반에 걸쳐 꾸준히 수십 년간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호학(好學)하는 체질이어야만 가능하다. 직업으로서의 호학이 아니라 취미로서의 호학 말이다. 이러한 체질을 옛날 사람들은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이라 표현하지 않았나!

가방끈이 짧아도 둘러보면 수불석권하는 체질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입에서 비단이 나오는 구라꾼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인생 경험이다. 행만리로(行萬里路)이다. 만리를 여행해본다는 것은 널뛰는 인생 경험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은 구라꾼의 자질이 아무래도 부족하다고나 할까.

파란만장을 경험하면 구라꾼으로 서는 신이 점지한 인물인 것이다. 경험의 진수는 밑바닥 인생을 체험해보는 일이다. 밑바닥에 내려가 보아야 절절한 고독을 맛보고, 고독을 맛보았을 때 통찰이 오고, 여기서 나온 통찰로 타인의 고통과 번뇌를 공감할 수 있다.

감방, 부도, 이혼, 병고(病苦)를 겪어보면 구라꾼의 조건을 갖춘다. 팔자가 세야 한다. 일부러 자청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드라마틱한 팔자를 타고난 데다가, 모험적인 기질이 결부되면 수많은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경험에 바탕이 된 이야기가 아무래도 실감나기 마련이다. 실감이 나야만 설득력이 있다. 경험이 결여된 상태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자칫 현학적인 데로 흘러갈 수 있고, 결국 파워가 떨어진다.

구라꾼이 되려면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기백과 배짱이다. 인생의 온갖 누추함과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기백을 잃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 기백이 있어야 차원 높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직업이 없는 백수이면서도 돈에 굴복하지 않은 이야기, 죽음 앞에 담담할 수 있었던 이야기, 시퍼런 권력에 대들었던 이야기는 만고불변의 핵심 소재이기 마련이다.

기백이 있는 구라꾼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자기는 하지 못했지만 대리만족의 효과가 있다. 아울러 기백은 화자(話者)로 하여금 인생을 초연하게 관조할 수 있는 관조력(觀照力)을 제공한다. 여기에다 또 하나의 부가 조건을 덧붙인다면 그 사회 주류계층의 인물들과 교류도 있어야 한다.

너무 밑바닥만 훑고 다니면 비분강개 쪽으로 나아가서 다큐멘터리 흑백영화 컨셉트로 굳어질 수 있다. 때로는 잘나가는 인간 군상들과 교접(交接)을 통해서 다양한 컬러를 입힌다. 흑백보다는 컬러 영화가 화려하다. 당대의 뉴스 인물들과 밥도 먹어보고, 여행도 가보고, 돈도 주고받아보면 훨씬 발효된 이야기가 제조될 수 있다. 윤기가 생긴다고나 할까.

내가 보기에 묵개는 호학·팔자·기백·사람 인연이라는 프로페셔널 구라꾼의 조건을 조화롭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거기에다가 생긴 것도 비범하였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지 않던가! 남자는 우선 생긴 것이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대머리에다가 두상도 둥그러면서 크다. 몸집도 태음인 체질의 비대한 편이다. 관상의 과(科)로 분류하자면 ‘삼국지 과’에 해당한다.


경기 연천군에 임진강변 ‘고량포’에 자리잡은 경순왕릉. 묵개는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이 아니라 만주벌판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 살기도 바쁜데 왜 적군의 영혼 달래줘야 하나”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 같기도 하고, 여진족 추장 같기도 하고, 만주 마적단의 두목 같기도 하다. 나도 강호를 유람하면서 이 땅의 수많은 기인·달사·꾼들과 일합을 주고 받아보았지만, 인사동에서 만난 묵개는 그 어떤 강호의 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다층적인 삶의 체험이 느껴졌다. 그러던 그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경기도 파주의 금강사(金剛寺)에서 적군묘(敵軍墓)의 죽은 혼령들을 달래는 위령제(慰靈祭)를 지낸다는 연락이 왔다. 아니 적군묘라니? 무슨 뜬금 없는 위령제란 말인가?

“어떻게 적군묘의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는가?” “파주의 금강사는 처갓집 장인이 오랫동안 주지를 지냈던 절이라서 지난 몇 년 동안 여기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2011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정범진 선생 77세 희수연을 이 금강사에서 하기로 했다. 정범진 선생은 퇴직하고 인사동 이바구 클럽에 자주 오셨다. 한문고전의 세계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시곤 하였다.

그래서 후학들이 이 양반 모시고 금강사에 모여 재즈음악도 연주하고, 한시도 낭송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하는데 갑자기 느낌이 이상했다. 수많은 영혼이 법당에 가득 들어와 나를 둘러싼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영혼들과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되었다.

‘당신들은 누구인데 여기에 와 있느냐?’, ‘네가 불러서 왔다. 우리가 억울하게 죽은 지 60년이 되었어도 그 누구 하나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강산 속에서 60년을 외롭게 보내다가 처음으로 너희 일행이 흥겹게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읊기에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영혼들이 여기에 모였다.’ 알고 보니 금강사 바로 옆에는 6·25 때 이 근처에서 죽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유해를 1200구 정도 수습하여 조성한 적군묘역(敵軍墓域)이 있었던 것이다.

정범진 총장 희수연 한다고 노래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고 흥겹게 놀았던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이 적군묘역의 영혼들을 부르는 초혼제(招魂祭)가 된 셈이다.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머리가 없는 영혼도 있었고, 팔다리가 없는 영혼도 있었다. 그런 영가(靈駕:영혼)들의 모습이 묵개의 의식 속에서 느껴졌다고 한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나는 당신들에게 뭐를 해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럴 처지도 못 된다.’ ‘아니다. 네가 우리들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원통해서 저승으로 못 가고 있다. 네가(묵개)우리들을 해원(解冤)해주면 그 보답은 하겠다.’”

적군묘역의 영가들로부터 갑작스럽게 이 부탁을 받게 된 구라꾼 묵개는 이때부터 위령제를 지내주는 제사장 비슷한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위령제를 지내야 하는가? 더군다나 아군도 아니고 우리와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적군들아닌가? 나 살기도 바쁜데 내가 왜 적군들을 달래줘야 하는가? 나는 스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이때부터 묵개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서 기도를 하면서 주변의 영가들을 천도(薦度)하는 일을 하게되었다. 천도란 영가들을 설득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2시 반쯤 일어나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임진강 일대의 강둑길과 들판 길을 걸어 다니면서 ‘영가들이여 이제 그만 저승으로 잘 가소서!’하고 염원을 한다. 걸어 다니면서 둥둥 북을 두드리기도하고 혼자 중얼중얼 하면서 영가들을 타이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적군묘역의 영가들만 모여드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임진강 일대에서 죽은 수십만 명의 북중군(北中軍) 귀신이 몰려온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 만난 오대산의 도인

6·25 때 참전한 중공군의 수는 적게 잡아서 50만이요, 많이 잡으면 100만 명이다. 거기에다 북한군까지 합하면 100만 명이 넘는 수가 죽었다. 이 귀신들은 중국 본토에서도 그동안 잊혀진 죽음이었고, 북에서도 남에서도 그 어느 쪽도 관심을 못 받고 있다가, 조그만 물꼬가 터지니까 묵개에게 인해전술로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묵개는 이 일을 하면서 인생관에 변화가 왔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그것이다. 죽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것이다. 아울러 죽음이 오면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현재의 모든 상황은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은 인과의 축적으로 볼 수 있다. 50대 후반에 이런 인생을 살 것인지 전혀 예상 못했는가?” “이 일을 하게 되면서 나의 운명(八字)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제약회사에 다닐 때 전남 광주에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무등산(無等山) 자락의 증심사(證心寺)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절에 들어가는데 입구에 앉아 있던 80대의 늙은 비구니 스님이 손짓을 하면서 나를 불렀다. ‘너는 중 팔자로구나. 팔자는 끌로 파내도 바꿀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나의 미래를 예언했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그 내용은 이렇다. 묵개가 40세 무렵이 되면 손도 묶이고, 발도 묶이고, 머리도 묶인다. 사회생활이 중단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서 10년 정도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고 나면 50대 중반쯤부터 스님같은 생활을 하면서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나이였다.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하고 잊어버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40세무렵이 되니까 사회생활 전반이 궁지에 몰렸다. 자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대산 골짜기로 무작정 차를 몰고 들어갔다. 생전 처음 가는 산골짜기 끝까지 가서 죽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골짜기 끝의 후미진 어느 너럭바위에서 죽으려고 앉아 있는데, 바위 옆의 덤불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묵개가 “당신 누구요?” 하니까,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사람이 “죽으려고 온 놈이 놀래기는 왜 놀래느냐?” 하면서 옆으로 다가왔다. 이 양반은 오대산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산사람’이었다고 한다.

6·25 때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휴전선이 막히면서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산에서 주저앉아 살다가 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 도사가 자살하려고 온 묵개를 데리고 간 거처는 바위굴 밑의 덤불집이었다고 한다. 마침 5월 쯤이라 이불이 없이도 잘 만했다. 산에서 약초나 열매를 먹기도 하고, 정 배가 고프면 오대산 일대의 절에 밤에 들어가서 산신각에 차려놓은 제사음식을 가져다 먹기도 하는 생활이었다.

묵개도 배가 많이 고플 때는 이 도사를 따라가 월정사나 상원사 산신각을 밤에 슬그머니 들어간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이 도사는 산에서만 수십 년간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벽곡(辟穀:곡식을 먹지 않음)도 되고, 정신이 맑아져서 사람의 미래를 내다보는 영통(靈通)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대산 도인과 같이 산에서 생활하면서 기도하는 법도 배우고, 담백하게 사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돈 없이도 사람이 자연상태에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가장 큰 수확이자 공부였다.

이렇게 다섯 달쯤 지내니까 “너는 이제부터는 추워서 산에 못 있는다. 나랑같이 있을 수 없다. 도시로 내려가거라. 너는 절대 죽을 수 없는 팔자다. 칼로 모가지를 찔러도 안 죽는다. 10년만 버텨라. 그리고 나서 의술도 배우게 될 것이고, 여러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사회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네가 쓸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쓸 공부를 하게 된다”는 축원을 해주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이 도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살의 고비를 넘게 해주고,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스승이 떠나 버리자 묵개는 도시로 내려왔다.


파주 금강사 인근에는 6·25 때 죽은 중공군과 북한군 유해 약 1200구를 수습해 조성한 적군묘역이 있다. 묵개 서상욱이 이 묘역에 들러 망자들의 천도를 기원하고 있다.


3년의 걸식만행 중 인간성의 진수 발견해

도시에 내려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지생활이었다. 전국을 3년간 돈 한푼 없이 걸어 다니면서 걸식 만행을 하였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집에서도 자고,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서도 잤다. 묵개는 경북 상주가 고향이고,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두 경북에서 학교를 다닌 경상도 사람이다. 거지 생활을 하려니까 고향과는 거리가 먼 전라도가 마음 편하게 여겨졌다. 정읍·태인·김제·부안·남원·장수·순창·장성 일대를 많이 돌아다녔다.

원래 묵개의 고조(高祖) 대에는 전북 정읍에서 살았는데, 동학의 전봉준 밑에서 일하던 그의 고조가 동학도에 대한 토벌을 피해서 상주로 숨었다. 그 이후로 상주가 고향이 되었지만, 선대의 고향은 전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북 일대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이 태인에 있었던 어느 엿장수 집이었다고 한다. 근방의 엿장수들이 이 집에 와서 고물을 갖다 놓고 엿을 도매로 가져갔기 때문에, 엿장수들이 많이 와서 거처하던 객주(客主) 같은 집이었다. 이 집 할머니가 밑바닥 인생 거지로 돌아다니는 묵개를 끔찍이 생각하였다. ‘얼마나 배가 고픈가? 어서 이 방으로 들어와. 밥 채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머리는 산발에다가 옷은 땟국물이 묻어 있는 묵개를 그 할머니는 방으로 데려다 놓고 밥을 해 먹이고 옷도 주었다. 다른 엿장수들보다 훨씬 상객 대접을 해주는 게 아닌가. 묵개가 다른데 돌아다니면서 배가 고프고 힘이 들 때마다 태인의 이 엿장수 할머니 집에 돌아왔다. 고향처럼 포근하고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정읍에 가면 버스터미널 옆에 콩나물 국밥집이 있었는데, 아침에 묵개가 배가 고파서 이 국밥집을 기웃거리면 그 집 주인이 “어이! 빨리 와서 한 그릇 먹어. 그 대신 손님들 오기 전에 얼른 먹고 가”라고 했던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리고는 손에 몇 천원 여비를 쥐어주곤 하였다. 시장을 지나가다 보면 옷가게 주인이 “어이! 이 옷 하나 입어” 하면서 묵개에게 잠바를 주었던 적도 있다. 춥다고 내복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가을날 밤에는 보름달이 훤하게 뜬 김제평야를 혼자서 걷고 있는데,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달 밝은 김제 평야를 혼자걸으면서 노래를 부르던 기억도 난다. 전북 장수에서 어느 집 대문에서 끼니거리를 동냥하는데, 그 집 며느리가 비닐 봉지에 밥과 김치를 섞어서 주었다고 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이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나무랐다. “어찌 사람에게 개밥처럼 밥을 주느냐? 밥상에다가 차려 주어야지!” 다시 며느리가 밥상에다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묵개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전라도에서 거지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에는 충북 제천에 갔던 적이 있다. 거지 생활을 해보니까 여름은 수월하고 겨울이 힘들었다. 추위에 잠자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해 겨울은 하도 추워서 역이나 버스 대합실에서 자기도 힘들었다. 너무 춥다 보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생겼다.

제천의 어느 조그만 슈퍼에 가서 남자 주인이 보는 앞에서 라면도 훔치고, 과자도 훔쳤다. 그 주인이 멀거니 묵개가 주섬주섬 물건을 집어넣는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묵개 왈, “나 좀 징역 살게 고발해 줘!” “왜 그러시오?” “너무 추워서 교도소에 들어가려고.” “이리 오셔. 저 방에 들어가서 자.”

3년 동안의 거지 만행(萬行) 생활을 통해서 묵개는 알았다. 인간 깊은 마음속에는 따뜻함이 있다고. 그리고 사람은 껍데기만 다르지 본성은 다 같다고. 거지 생활 2년이 지나면서 묵개는 그 어떤 자신감이 들었다. ‘세상이 나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구나’ 하는 자신감이었다. 중국의 무협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파가 화산파(華山派)다. 화산파의 장문인 이야기를 들으니까 과거에 도사를 양성하는 교과과정에는 ‘표주(漂周)’라는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중급과정까지를 마치고 고급과정에 속하는 과목인데, 이는 돈 없이 전국을 유랑하는 과정이었다. 기간은 3년. 돈 없이 주유천하를 해 보아야만 도사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야만 세상 인심도 알고, 굴기하심(屈己下心:자기를 굽혀 마음을 아래로 내려놓는 공부)이 되고, 그 지역의 풍토와 기질, 특산품도 알고, 어디에 인물이 있는가도 안다.

돈 없이 여행을 하려면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의술(醫術)·학술(學術)·역술(易術)이 그것이다. 이름하여 삼술(三術)이다. 어느 동네마다 아픈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어린 학생들에게 한문 경전을 가르쳐주면 밥은 준다. 거기에다가 역술을 알면 사주팔자를 보아달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도사가 삼술을 갖추면 어디에 가서나 굶어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묵개는 삼술도 없이 거지로 다녔으니 그 고생은 짐작할 만하다. 인생의 저 밑바닥, 진흙 뻘밭 끝에까지 내려가본 셈이다. 팔자에 들어있지 않으면 보통사람은 이렇게 못한다.


묵개 서상욱은 젊은 시절 3년간의 걸인 만행을 통해 인간 심성의 따뜻함과 선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고백한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인연법 통해 통찰력 키워

3년간의 거지생활을 거친 다음에 묵개는 서울로 돌아왔다. 43세였다. 그 무렵에 오대산 도사의 예언대로 의술을 배우게 되는 계기를 만났다. 뜸으로 유명한 구당 김남수 옹을 만나게 된 것이다. 김남수 옹 밑에서 참모를 하면서 뜸도 배우고, 뜸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보급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도 많이 했다. 뜸을 배우고 나니까, 뜸을 인연으로 해서 재벌회사 사장들과도 친하게 되었다.

정계·관계·종교계·학계의 내로라는 인물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묵개는 뜸도 뜸이지만 문·사·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국을 돌아다닌 거지생활 3년에서 묻어 나오는 저력이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직업이 없고, 출퇴근도 없으니까 직업에 관계없이 종횡무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러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인연법을 통해서 사회 전반의 통찰력도 길러질 수 있었다. 아울러 한문고전과 주역에 해박한 몇 분의 선생님도 만나 고전에 대한 안목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공부 과정에서 인사동 수도약국 4층의 이바구 클럽에도 출입하였고, 그 와중에서 필자와도 인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재혼을 하게 되어 49세에 파주의 장인이 주지를 맡았던 사찰인 금강사에 머물게 되면서 적군묘역의 영가(귀신)들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하다. 왜 묵개 선생이 파주까지 흘러 들어와서 이 적군들의 영가천도(靈駕薦度)를 하게 되었는가? 어떤 인연법인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단 말인가?”

“나도 수없이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내가 전생에 여진족(女眞族) 추장이나 장군을 했던 것 같다. 이 적군묘에 묻힌 영혼들은 대부분 ‘여진족의 후예들이다’라는 결론을 냈다. 6·25 때 참전한 중공군의 병력은 50만에서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거의 대부분이 지금의 중국 동북3성 출신이 차지한다.

여진족의 거주 지역이었던 만주(滿洲)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 와서 죽은 중공군의 상당수는 청(淸)나라의 후예인 것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로 말한다면 그 여진족의 영혼들이 같은 여진족이었던 나를 여기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전생 동안 여진족의 족장 내지는 장수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여진족 장군을 불러 ‘동족의 죽음을 당신이 위로 해달라’는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근래 몇 년 동안 여진족의 역사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탐독했다. 여진족의 근원, 그리고 내력, 신라·고려·조선과 어떤 인과관계를 형성하는지를 추적해보았다. 그러느라고 현대 중국어로 씌어진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등을 중국 친구들을 통해 구해서 읽어 보고 우리말로 번역도 해보았다. 휴전선에 가득 차 있는 이 여진족 영가들을 천도해야만 우리 민족이 통일도 된다. 이 영가들이 정신세계에서 휴전선을 가로막고 있는 한 우리의 통일은 어렵다. 정신세계에서 영적(靈的)으로 화해해야 한다.

묵개가 여진족과의 인연을 소설적으로 구성한 내용을 간추리면 대강 이렇다. 먼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이 파주 근처의 연천군에 있다. 파평산에서 임진강을 건너면 ‘고량포’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 있다. 경순왕은 개성에 있다가 죽었으므로 고향인 경주로 시신을 옮기던 중에 이 고량포에 관이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경순왕 묏자리를 잡아주었다고 전해진다.

경순왕릉 자리가 아주 명당이다. 개성 송악산에서 흘러온 지맥 중 대강 20km 지점에 썼다. 임진강이 태극으로 감아 돌아 흐르고, 강 건너 좌측에는 감악산이고, 우측에는 파평산이 흐른다. 감악산은 험해서 무인의 기질이 있고, 파평산은 온건해서 문인의 기질이 있다. 문무겸전한 후손이 나오는 묏자리이다.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지만, 묵개가 보기에는 동해안을 따라서 백두산이나 두만강 사이의 지금으로 치면 만주벌판으로 들어갔다. 나라가 망하면 대개 나라 찾으려고 부흥운동을 한다. 백제도 그랬다. 왕자가 머리깎고 승려생활 하다가는 가슴 터져서 죽는다.

마의태자 일행은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들어가서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고 본다. 묵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강릉 김씨들 가전(家傳)에는 ‘금(金)나라는 우리 강릉 김씨들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고 한다. 강릉 김씨들이 마의태자와 함께 망명한 신라의 귀족집단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파주시 월롱산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원경. 병자호란 때의 청국 장수 홍타이지는 도봉의 바위산을 월롱산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화신 문수보살로 인식했다.


홍타이지가 월롱산에서 본 문수보살

아마도 강릉 김씨들의 원 뿌리는 경주 김씨였을 것이다. 신라의 국정경험이 풍부한 마의태자 집단이 가서 세운 씨족이 ‘아이신기오르(愛新覺羅)’이다. 여진어로 ‘김(金)’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경주 김씨’이다. 이 부분은 근래에 몽골·여진·한반도·일본이 모두 같은 혈통인 ‘쥬신족’에 속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저서 <대쥬신을 찾아서>(김운회 작)에도 잘 나와 있다.

고려 때에 윤관(尹瓘) 장군이 있다. 동북지역에 9성을 개척한 장군이다. 윤관은 함흥을 비롯한 함경도와 북간도 일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동화정책을 편 것이다. 달래기도 하고 정 말을 안 들으면 무력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윤관 장군이 나중에 고려 조정의 견제를 받게 되어 직위해제 되었을 때, 윤관의 아들 가운데 두 명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개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버지가 파면당하니까 여진족 땅으로 망명했다고 보여진다. 금(金)나라의 영웅 아골타가 등장하는 시기가 대략 윤관의 아들 대(代)하고 비슷하다. 추측컨대 윤관의 아들들이 마의태자 후손 그룹에 합류하여 금나라를 세우는 주체세력이 되었을 수가 있다. 마의태자와 윤관의 시차는 100년 남짓 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묵개가 기거하는 파주의 금강사(金剛寺)는 원래 고려 윤관장군의 집터였다. 윤관의 조부 이름이 윤금강이다. ‘금강경’을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다. 나중에 이 집을 윤금강이 금강사라는 절로 변모시켰고, 이 절에서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 윤관이다. 묵개가 1천 년의 시차를 두고 윤관이 태어난 집에서 적군묘의 영가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금나라가 망한 뒤에 여기저기 쫓겨다니던 여진족을 규합한 인물이 누르하치이고, 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청(淸)나라를 세웠다. 백두산이 여진족의 성산이고, 경주 김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의 후손임을 만천하에 천명하였다. 여진족은 남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와 같은 혈통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가 병자호란 때 쳐들어와 한양을 눈앞에 둔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성(月籠山城)에서 3일간 대군을 머무르게 하며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왜 빨리 한양을 공격하지 않고 3일간이나 시간을 끌며 제사를 지냈을까? 홍타이지가 월롱산에 올라가 보니까 한양의 북악(도봉산)이 보이는데, 그 바위산의 모습이 흡사 문수보살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다.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이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문수가 저기 계시는구나!’ 하고 감동받은 홍타이지는 제단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월롱산성에서 홍타이지가 ‘문수(文殊)’라는 개념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점이다.

‘문수’를 여진족 발음으로 표현하면 ‘만주(滿洲)’가 된다.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표현이 바로 ‘만주’였고, 청(淸)이라는 국호였다.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지혜는 무엇이겠는가? 분열된 민족을 통합시키는 방책이다. 만주는 문수이고, 문수는 통합이다.

문수보살 사상의 불교적 바탕은 바로 화엄경(華嚴經)이다. 화엄경의 요체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사상이다. 부분과 전체의 통합이다. 의상(義湘)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도 이 화엄의 요체가 잘 드러나 있다. 법성게 첫 대목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다. ‘진리는 원융해서 둘이 아니다’와 같이 통합에 적절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 조용헌씨(오른편)와 만나 담소를 나누는 묵개 서상욱. 두 사람은 논객, 야인들이 모여 교유했던 서울 인사동 수도약국 4층 ‘이바구 클럽’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원한을 풀고 같이 살자”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 들어와 파주 월롱산성에서 북악을 바라보며 통합의 확실한 개념정리를 했다는 이야기다. 홍타이지는 몽골·여진·조선을 하나로 묶어 통합하는 민족 개념으로서 ‘만주’를 구상했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남한산성에 벌어진 홍타이지와 인조의 대결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의리사상(義理思想)의 대결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불교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봄으로써 통합적 성격이 강하고, 유교는 군자와 소인, 양반과 상놈,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나누는(華夷論) 분별적 성격이 강하다. 유교는 차별과 분별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자는 경향이 강하다. ‘문수’라는 통합적 지혜의 사상적 기반에서 설립된 나라를 청나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좀 더 논리를 확대해보면 신라의 확장이 청나라이고, 백제의 확장이 일본이 되는 셈이다.

묵개는 앞으로 수천 명, 수만 명이 만장(輓章)에다가 ‘원한을 풀고 같이 살자’는 내용의 글씨를 써서 휴전선을 돌파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수십만 명의 귀신이 떼거리로 그 일을 뒤에서 후원할 거라고 여긴다. 그 원한에 찬 영가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묵개를 뒤에서 돕는다는 데 누가 막겠는가? 귀신을 올라탄 사람의 앞길을 막으면 귀신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묵개의 앞길에 문수보살의 영광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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