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제주 예술여행...톨까니 해변에 들어선 '훈데르트 파크'

醉月 2022. 3. 12. 08:54
뒤로 우도봉이 보이는 해안가에 자리 잡은 제주 우도의 훈데르트바서 파크 전경. 오른쪽 양파 모양의 돔이 있는 곳이 파크의 중심인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이고, 길게 늘어선 붉은 지붕의 건물이 콘도미니엄인 훈데르트바서 힐즈다. 성산포에서 뜨는 우도행 배가 닿는 천진항에서 가깝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오스트리아의 화가라면 보통 여기까지만 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그렇다. 여기다가 한 명의 이름을 더 보탠다.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자화상·오른쪽 작은 사진). 그 이름까지 더해져야 비로소 ‘20세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 세 명’의 명단이 완성된다.

훈데르트바서는 화가 겸 건축가다. 강렬한 색상과 독특한 미감, 그리고 번득이는 창의로 캔버스와 시멘트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미감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모색했으며 미학의 이론적 정의를 내리려 애썼다. 그는 붓끝만 놀려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예술의 지향점을 삶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예술 밖에서도 그는 자연보호, 산림운동, 반핵운동을 실천한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화실에서 나와 건축에 손댄 것도 따지고 보면 대중들의 미술적인 삶에 개입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온몸으로 밀고 나간’ 예술가였다.

훈데르트바서란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스스로 개명해 갖게 된 이름이다. 훈데르트는 ‘헌드리드(Hundred·백 개의)’, 바서는 ‘워터(Water·물 또는 강)’를 의미한다. 좀 뜬금없지만 ‘백 개의 강(江)’이란 뜻의 그의 이름 위에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미지가 겹쳐졌다. 월인천강. 종교적 의미를 지우고 글자 뜻 그대로만 읽으면 ‘하나의 달이 1000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물에 비친 달은 1000개다. 비추는 달과, 비치는 달은 다르다. 한 개의 달과 1000개의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월인천강은 훈데르트바서의 구도자적인 행적과도, 작품의 메시지를 스스로 해설하지 않고 감상자들에게 맡겼던 그의 태도와도 썩 잘 어울리는 듯하다.

그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그의 이름을 딴 ‘파크’가 들어섰다. 제주 우도에 ‘훈데르트바서 파크’가 개관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여기는 리조트가 아니라 ‘파크’다. 파크는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중심이 되는 공간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이다. 뮤지엄 뒤쪽에 콘도미니엄 ‘훈데르트 힐즈’가 낮은 성채처럼 서 있고, 성산 일출봉이 잘 보이는 바닷가 쪽에는 대형 카페 ‘훈데르트 윈즈’가 있다.


# 지구 반대편의 예술가를 소환한 까닭

오스트리아의 예술가 훈데르트바서가 어떻게 지구 반대편의 작은 섬, 우도에 상륙하게 됐을까. 분명한 건 훈데르트바서가 아니라, 우도가 먼저였다는 사실이다. 훈데르트바서에 감명한 누군가 그의 예술적 성취를 드러낼 공간으로 우도를 택했던 게 아니라, 우도에 땅을 사서 거기 무얼 지을까 고심하다가 찾아낸 게 훈데르트바서였다는 얘기다.

훈데르트바서 파크는 우도봉 자락 광대코지 아래 톨까니 해변을 끼고 있다. 톨까니는 ‘촐까니’라고도 하는데 ‘촐’은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건초’의 제주어. 구유, 그러니까 여물통을 제주에서는 ‘까니’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톨까니, 혹은 촐까니는 ‘소의 여물통’을 말한다. 톨까니는 우도봉 아래 푹 꺼진 지형의 해변이다.

성산포행 배가 오고가는 항구에서 가깝고 톨까니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우도 요지의 땅은, 본래 고급 리조트를 지으려던 곳이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난개발을 우려하는 지적과 복잡한 인허가 문제가 겹치고, 우도 주민들까지 반대하면서 리조트 건설 사업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훈데르트바서는 이런 와중에 찾아낸 예술가였다. 예술적 성취도 훌륭했고 그의 작품도 화려했으며, 화가이자 건축가여서 그의 작품을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도라는 공간과 딱 맞아떨어졌던 건, 그가 평생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갖고 자연의 가치를 지켜왔다는 점이었다.

훈데르트바서의 이름은 난개발에 따른 환경훼손을 우려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명분이 됐다. 고급 리조트 건설계획은 폐기되고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뮤지엄을 중심에 세우고, 숙소와 베이커리 카페는 부대시설로 짓는 훈데르트바서 파크가 설계됐다. 이 과정에서 콘도미니엄 규모를 48실로 대폭 축소했다.

개발 부지 내 나무 1600그루를 베어내지 않고 파크에 옮겨 심고, 마당에서 옥상으로 자연스럽게 동선을 이어 옥상을 정원으로 꾸미는 방식으로 초지를 보전했다. 최고의 오폐수 정화시스템까지 갖추기로 하자 리조트 건설을 반대했던 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여기까지가 아시아 최초의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을 가진 훈데르트바서 파크가 제주 우도에 들어서게 된 사연이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 건축물의 모든 선은 곡선이고, 기둥은 세라믹 타일로 구운 것이며 창문의 크기며 모양이 모두 다 다르다. 재단에서 꼼꼼하게 감수한 훈데르트바서 건축의 특징이다.


# 세입자·인부 자율성으로 지어진 건축

훈데르트바서 파크의 중심은 뮤지엄과 대형 베이커리 카페다. 공간 배치뿐만 아니라 예상 수익 면에서도 그렇다. 뮤지엄과 베이커리, 그리고 콘도미니엄의 예상매출 비율은 40:40:20. 숙소 매출 비율이 뮤지엄이나 카페 수입의 절반에 불과하다. 리조트가 아니라 파크인 이유다. 그러니 숙소보다 뮤지엄이나 카페 이야기를 먼저 하자.

훈데르트바서 파크라고 하지만, 사실 훈데르트바서는 ‘뮤지엄에만’ 있다. 콘도미니엄과 카페는 파크 안에 있을 뿐, 훈데르트바서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은 그의 건축적 특성이 십분 발휘된 건물로 이뤄졌다. 양파 모양의 돔 지붕과 구불구불한 곡선, 세라믹 도자기로 구워 만든 기둥과 저마다 다른 형태와 문양의 창문, 외벽에 칠해진 화려한 원색까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한눈에도 그의 건축물이란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은 분수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세 개의 독립건물로 이뤄져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회화 24점과 판화 23점을 전시하는 상설기념관인 뮤지엄이 있고, 맞은 편에 초대작가 작품을 전시하는 우도 갤러리가 있으며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굿즈숍이 따로 있다. 이들 건물의 특징은 직선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그의 건축은 모두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그에게 직선은 ‘신의 부재(不在)’를 의미했다. 직선의 규칙은 창조의 적이며 심지어 ‘악마의 도구’라고 말했다. 그의 건축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오스트리아 빈의 공공주택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완공한 뒤 세입자 계약서에 ‘창문권’ 권리 조항을 넣었다. “모든 세입자가 자신의 창문을 어떤 색깔로도 칠할 수 있고, 장식물을 달 수 있으며 색색의 타일로 장식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의 공동주택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부분을 권장한 셈이었다. 집은 ‘거기 사는 사람들의 것’이며 기능과 실용으로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 건물은 창문과 기둥의 크기와 모양이 모두 다르다. 같은 모양과 문양의 창문은 하나도 없다. 계단도, 난간도 모두 물결치는 곡선이다. 내부의 작고 사소한 곡선까지 모두 설계도에 담을 수는 없는 일. 훈데르트바서는 집 짓는 인부들에게도 자율성을 주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건축 과정에서 인부들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모양을 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분방하게 만들어지거나 꾸며진 건물이 드러내는 건 밝고 경쾌한 미감이다. 인부들이 건축물의 미감 대신 쉽고 빠르게 끝나는 공정을 택하면서 의도에서 엇나가긴 했지만, 우도에 훈데르트바서 파크를 만들 때도 인부들에게 자율성을 주는 방식을 도입했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의 전시실 내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47점을 전시했다.

# 짝퉁인가, 창조적 정신의 계승인가

이제 좀 민감한 이야기. 훈데르트바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000년에 태평양을 항해하는 배 안에서 일흔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미 20년 전에 죽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이 어떻게 지금 세워질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질문이 나온다. 세상을 떠난 예술가의 작품적 특성을 재현한 공간이 과연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일까. 위대한 예술가의 이름을 이른바 ‘짝퉁’으로 재현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 해답이 독일에 있는 훈데르트바서 재단에 있다. 비영리재단인 훈데르트바서 재단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작업에서 파트너로 일했던 독일 건축가 하인츠 스프링맨이 이끌고 있다. 스프링맨은 훈데르트바서가 스케치한 그림을 건네면 그걸 설계도로 완성했던 건축가다. 훈데르트바서의 머릿속에 있는 건축물을 실제로 구현하는 역할을 담당한 셈이었다.

재단과 스프링맨은 훈데르트바서 사망 후에도 건축 분야에서의 그의 예술적 성취를 이어나갔다.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적 특징을 하나하나 매뉴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그의 정신을 정리했다. 우도의 훈데르트바서 뮤지엄도, 스프링맨의 설계와 재단 측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의 철저한 감수를 거쳐 지어진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정신을 담은 건축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이 한 예술가의 창조적 역량 수준을 넘어서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는 보편타당한 메시지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훈데르트바서는 생전에 건축가로서 ‘다섯 개의 피부’라는 우화적인 이론을 설파했다. 첫 번째는 진짜 피부이고, 두 번째 피부는 옷이며, 세 번째 피부는 집, 네 번째는 소속 집단과 국가 등 사회적 환경이고, 다섯 번째는 지구 생태계다. 이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건, 궁극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뤄 인간성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건축을 위한 건축은 범죄’라고도 했다. 이런 이론에서는 그가 건축물의 친환경을 넘어 사회적 환경의 건강성까지 추구했음이 드러난다.

훈데르트바서는 자기 한계와 욕심을 극복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수익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했고, 스스로 검소한 삶을 누렸다. 죽어서 자기가 심은 나무 아래 묻혀 숲으로 되돌아간 그의 정신을 비영리재단이 잇고 있다. ‘과연 주변 풍경과 어울리는가’에 대한 회의적 물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도에 지어진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은 위대한 화가 겸 건축가의 정신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상업적으로 호명됐다는 점도 약점이 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그건 그만큼 그의 건축과 예술이 지속 가능하다는 얘기가 될 테니까.

잘 알지 못하는 건축가의 예술론이 머리 아프다면, 그건 몰라도 좋다. 높은 통창 너머로 바다 건너 일출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대규모 베이커리 카페 ‘훈데르트 윈즈’의 빼어난 운치와 지중해풍의 콘도미니엄 훈데르트 힐즈의 아늑함만으로도, 우도로 건너가 거기 가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또 하나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의 원색 건물과 유려한 곡선은 독특하고 근사한 사진 찍기에 더 없이 좋다.


우도봉 자락의 광대코지 동굴에서 유람선이 나오는 모습. 뱃머리가 향하는 쪽에 훈데르트바서 파크가 보인다.


# 제주에서 만나는 미술과 건축

훈데르트바서 뮤지엄으로 하나가 더 늘었지만, 제주에는 기왕에도 내로라하는 미술관과 건축물이 즐비하다. 제주까지 가서 자연 말고, 미술과 건축을 권하는 이유는 제주의 훌륭한 자연과 거기 조응하는 건축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미감을 넘어선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회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미술가들의 미술관이 있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지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곳곳에 있다. 미술에는 이중섭, 변시지, 김창렬, 이왈종이 있고, 건축에는 이타미 준(伊丹 潤),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마리오 보타, 리카르도 레고레타, 장 자크 오리, 김중업, 정기용이 있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흥분되는, 거장 중의 거장들이다.

제주로 떠나는 건축 여행이나 미술 여행의 매력은 이제 새삼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는 여행명소가 된 지 오래고, 타운하우스단지 비오토피아 안에 있는 ‘수(水)·풍(風)·석(石)미술관’은 석 달 치 관람 예약이 이미 매진됐다. 섭지코지 안도 다다오의 글라스 하우스나 중산간의 본태박물관도 건축과 미술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7일까지 이건희 컬렉션을 진행해오다가 오는 16일부터 기증전을 열 예정인 이중섭미술관도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다.

훈데르트바서 뮤지엄과 짝지을 만한 곳으로, 작년 4월 개관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포도 뮤지엄’을 권한다. 포도 뮤지엄의 이름은 이타미 준이 설계한 포도호텔에서 따온 것. 본래 교육목적의 ‘다빈치 박물관’이었던 것을, 포도호텔과 비오토피아 등을 인수한 SK 계열의 다른 자회사가 인수하면서 다목적 문화공간인 포도 뮤지엄으로 탈바꿈했다.

포도 뮤지엄에서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과 독일 대표 예술가인 케테 콜비츠의 ‘아가, 봄이 왔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두 전시 모두 개관전으로 지난 7일에 끝날 예정이었는데, 호응이 워낙 좋아 전시 기간을 연장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관한 전시이고, ‘아가, 봄이 왔다’는 전쟁의 비극과 관련된 전시다. 둘 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 무겁고 불편한 이야기의 힘

아름답고 평화로운 휴양지 제주까지 와서 과연 관광객들이 굳이 무겁고 마음 불편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할까. 시각적 감각에만 기댄 화려하고 아름다운 디지털 영상의 이른바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제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포도 뮤지엄의 전시는 미디어아트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로 마음을 흔들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는 난무하는 가짜 뉴스와 혐오의 발언, 그 실상과 폐해에 대한 전시다. 여덟 명의 한국과 일본, 중국 작가가 혐오의 해악과 공존의 의미를 주제로 만든 전시품을 내놓았다.

▲ 사진 위는 제주 포도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의 전시에 걸린 ‘죽음’ 연작 중 여덟 번째 작품 ‘죽음의 부름’. 죽음이 전쟁의 병사를 부르는 모습이다. 사진 아래는 함께 열리고 있는 혐오를 주제로 한 전시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의 작품 ‘우리와 그들, 2019’. 묵주를 들고 저마다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손을 담은 작품이다.


전시는 사람들이 가볍게 옮기는 뒷담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가짜뉴스가 되고 거대한 혐오를 부추기게 되는지, 정당한 분노로 둔갑한 과잉공감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혐오의 역사를 다룬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혐오와 증오의 말을 퍼부으며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양당의 대통령선거 과정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수시로 가슴이 철렁해지는 건, 나도 혹시 그런 혐오에 가담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자각 때문이다. 1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시지만, 본 적이 없다면 꼭 가서 보길 권한다. 이전에 보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본다면 공감의 깊이는 달라질 듯하다.

포도 뮤지엄의 두 번째 전시는 케테 콜비츠의 ‘아가, 봄이 왔다’다.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던 독일 작가 콜비츠는 1,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인 독일의 국민으로 살면서 온몸으로 반전 메시지를 외쳤던 작가다. 전시실에는 그가 남긴 전쟁 연작 등 다양한 작품이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과 함께 전시됐다.


# 슬픔과 자각, 그리고 반복되는 비극

콜비츠의 전시 제목 ‘아가, 봄이 왔다’는 자원입대했다가 1차 대전 중 전사한 둘째 아들의 사망통지서를 받고 나서 남긴 그의 일기에서 따온 것.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1919년 2월 6일 남긴 일기에서 콜비츠는 이렇게 썼다. “너는 ‘돌아올게요’라고 말했었지. 네 침대 위에 있던 시든 잎들을 거두고, 네 유품을 천으로 덮었다. 하얀 천 위에 흰 자작나무들이 놓여있구나. 네 침대 옆에… 아가, 봄이 왔다.’

콜비츠는 전사한 아들을 추모하는 기념물 제작에 나섰다. 콜비츠는 혼돈스러웠다. 전쟁에 나선 아들의 신념을 이해하려 했지만, 아들이 헛된 희생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과연 아들이 나라를 위해 참전한 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일까. 모두 집단최면에 걸리거나 기만당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끝에 콜비츠는 아들의 모습 대신,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어머니와 아버지의 참담한 모습의 기념물 ‘슬퍼하는 부모들’을 완성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군인의 영웅적 면모를 담고 있는 다른 전쟁 기념물과는 전혀 달랐다.

콜비츠의 ‘슬퍼하는 부모들’은 아들이 전사한 벨기에 블라드슬로의 독일군 전사자 묘지에 있다. 이 작품은 두 개가 복제돼 하나는 독일 쾰른의 파괴된 성당 안에 평화를 염원하는 기념물로 세워졌고, 다른 하나는 2차대전 당시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던 러시아의 르제프에 세워졌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 러시아에 말이다. 한 세기가 흘렀어도 젊은이들의 끔찍한 희생과 부모의 참혹한 슬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마음이 무거워지는 콜비츠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 이타미 준 뮤지엄

제주에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있지만, 그중 가장 굵은 획을 그은 건축가라면 단연 재일교포 출신 이타미 준이다. 그가 제주에 남긴 건축물들은 경이롭다. 빛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을 소리로 붙잡아서 들려준다. 그의 건축물이 이름난 명소가 된 이유다. 한경면 저지리에 ‘이타미 준 뮤지엄’이 세워지고 있다고 해서 가봤다. 뮤지엄은 이타미 준의 초기작품인 ‘어머니의 집’과 제주 민가 모습에서 착안해 그의 딸인 유이화 씨가 설계했다. 본래 이달 중순쯤 완공할 예정이었는데, 작업이 늦어져 이제 콘크리트 타설 공사가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