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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_차문화사_11

醉月 2010. 1. 13. 08:41

신헌구(申獻求)의 「차설(茶說)」과 초의차

신헌구(申獻求, 1823-1902)는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다. 그의 필사본 문집 『추당잡고(秋堂襍稿)』는 유일본이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계의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발문을 썼다. 초의의 『동다송』 끝에 적힌 시를 쓴 백파거사(白坡居士)는 그의 별호이기도 하다. 그는 「차설(茶說)」을 지었고, 차시도 여러 수 남겼다. 특히 대둔사 승려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눠, 여러 관련 글을 문집에 싣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헌구의 차 관련 시문을 소개하겠다.


신헌구의 생애와 대둔사 승려와의 교유

신헌구는 자가 수문(秀文), 호는 추당(秋堂)·옥침도인(玉枕道人)·백파거사(白坡居士)를 쓴다. 본관은 고령(高靈). 40세 때인 1862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864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86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승승장구 하던 그의 벼슬길은 대원군의 견제로 급제동이 걸렸다. 1875년 대원군은 비밀스럽게 봉함 편지 한 통을 그에게 내렸다. 반드시 성밖에 나가서 열어보라는 명이 있었다. 성 밖에서 열어본 편지에는 먼 변방으로 내려가서 한동안 세상과 절연한 채 한가롭게 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원치 않게 유배 아닌 유배길에 오르게 된 그는 멀리 해남으로 내려왔다. 그는 1875년 봄에 해남으로 내려와, 5년 뒤인 1880년 봄에야 상경할 수 있었다. 연세대 도서관 소장 『추당잡고(秋堂襍稿)』는 모두 2권 2책이다. 1,2권의 표제 아래 ‘남정록(南征錄)’ 상하라고 적혀 있다. 오롯이 해남 시절의 기록만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문집을 통해 볼 때 그는 어성촌(漁城村) 어귀 부서만(扶胥灣) 동쪽 기슭에 자리한 해창촌사(海倉村舍)에 소요원(逍遙園)을 열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은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의 유배나 다름 없었지만, 공식적인 죄목을 입어 내려간 것은 아니어서, 그곳의 지방관들과도 비교적 자주 왕래했다. 해남 지역의 이름난 문인이었던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 1813-1886)과는 특히나 가깝게 왕래하며 수많은 시문을 수답했다. 현재 송파와 백파 두 사람의 시문을 한데 엮은 필사본 『양파집(兩坡集)』이 따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다.


기약 없는 해남 체류 중에 딱히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그는 대둔사를 자주 드나들며 그곳의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추당잡고』에는 대둔사의 각 암자를 따로 노래한 한시와 그곳 승려들에게 준 여러 작품이 실려 있고, 이밖에 「호의대사시오화상찬(縞衣大師始悟畵像贊)」․ 「하의대사지정화상찬(荷衣大師止定畵像贊)」․ 「성묵대사태원화상찬(性默大師太垣畵像贊)」․ 「일지암시집발(一枝盦詩集跋)」․「철선소초서(鐵船小艸序)」․ 「무위화상안인소조찬(無爲和尙安忍小照贊)」․ 「운파화상익화소조찬(雲坡和尙益華小照贊)」․「호의선탑명병서(縞衣禪塔銘幷序)」․ 「대둔사모연문(大芚寺募緣文)」 등 대둔사 승려들을 위해 써준 많은 산문이 수록되어 있어 자료 가치가 매우 높다.
그는 1880년 봄 상경하여 벼슬길에 복귀했다. 1883년 이조참의에 올랐고, 1884년 12월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87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1892년 1월에 형조판서가 되고, 같은 해 8월에 한성부 판윤(判尹)에 임명되었다. 1894년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을 때 강원도 일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진두지휘한 일도 있었다. 1898년 중추원 일등의관(一等議官)을 거쳐 1902년 4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고령신씨세보』에 따르면 공사간(公私間)의 글을 묶은 기문이 50여권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현재는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남았다.
특히 그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발문을 쓰고, 『동다송』 끝에 제시(題詩)를 남겼다. 신헌구가 해남에 내려갔을 때는 초의가 세상을 뜬 지 이미 9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신헌구는 초의와 생전에 대면한 적은 없었다. 1875년 10월 대둔사를 방문한 신헌구에게 초의의 고족인 월여상인(月如上人)이 요청하여 「일시암시집발」을 지었다. 또 『동다송』 뒤에 붙인 제시는 1877년에 지었다. 이로 보아 현재의 『동다송』은 초의 당시의 편집이 아닌, 초의 사후 제자들에 의해 다시 정리된 것임도 확인된다.

신헌구의 「차설(茶說)」

먼저 읽어볼 글은 『추당잡고』 권 1에 수록된 「차설(茶說)」이다. 원래 제목은 「해차설(海茶說)」인데, 나중에 ‘해(海)’자를 지워 「차설」로 고쳤다. 해남에서 만든 초의차에 대해 적은 대단히 소중한 기록이다.

내가 사물이 나는 것을 살펴보니, 먼데 것은 버려지고, 때와 만나지 못하면 감춰진다. 도리(桃李)의 문에 있지 않으면 사람이 알지 못하고, 종남산 가는 길목에 들지 않으면 재목이 팔리지 않는다. 슬프다. 해양(海陽)의 옥천차(玉川茶)는 기운과 맛이 꽃답고 짙어서, 설화(雪花)와 운유(雲腴)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다. 그러나 먼 시골의 풍속이 어리석어 차 보기를 돌피처럼 본다. 서울의 사대부는 토산을 보기만 하면 낮고 우습게 여겨, 한갓 건양(建陽)의 단산(丹山)과 벽수(碧水)만을 따라 화로 연기와 걸맞지 않다. 저것이 실로 황량하고 궁벽한 곳에서 생장하여, 요행히 나무꾼의 낫을 면한다 해도, 마침내 뒤섞여 썩은 풀이나 마른 그루가 되고 마니, 어찌 능히 백수탕(百壽湯)을 시험하겠는가?


근래 대둔사의 산방에서 처음으로 마셔 보았는데, 일찍이 초의 스님이 만든 제품이었다. 옛날 부대사(傅大士)는 몽정(蒙頂)에 암자를 엮고, 성양화(聖楊花)와 길상예(吉祥蕊)를 나눠 심었다. 각림사(覺林寺) 승려 지숭(志崇)은 삼품(三品)의 향을 구별하여, 경뢰소(驚雷笑)는 자신이 마시고, 훤초대(萱草帶)는 부처님께 바치며, 자용향(紫茸香)은 손님에게 접대해서 마침내 천하에 이름이 났다. 초의는 바로 이러한 부류이다. 신령한 마음과 지혜의 눈으로 풀 나물 가운데서 가려 캐어 오래 가는 훌륭한 맛을 얻었으니, 물건도 만남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몽정과 각림은 당대의 명사들에게 많이 들어가, 제품이 이를 통해 드러났다. 초의의 차는 홀로 절집에서만 이름 났을 뿐, 세상에서는 일컫지 않는다. 이는 사대부들이 대단히 훌륭한 것을 놓쳤기 때문이니, 누가 자료를 수집하고 망라하여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이으려 하겠는가? 아! 내가 이 설을 짓는 것은 다만 초의의 차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만히 남쪽 땅의 인사들이 훌륭한 것을 지녔으면서도 흔히 세상과 만나지 못한 탄식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서이다.
余觀物之生, 遐則遺, 不遇則晦. 不在桃李之門, 人不知, 不入終南之徑, 材不市. 悲夫! 海陽之玉川茶, 氣味芳烈, 雪花雲腴, 未之或勝. 而遐俗怐愗, 視之若稊稗. 洛中士大夫見土産, 則卑夷之, 非從建陽之丹山碧水, 不齒爐篆. 彼固生長荒僻, 倖免樵丁之鎌, 則終混爲腐草槁枿, 安能試百壽湯乎? 近始得啜於大芚山房, 曾是上人草衣所品製也. 昔傅大士結菴蒙頂, 分種聖楊花吉祥蕊, 覺林僧志崇辨三品香, 以驚雷笑自奉, 萱草帶供佛, 紫茸香待客, 遂名於天下. 草衣卽其流. 靈心慧眼, 采擇於草菜中, 得其芳味之雋永, 亦物之有遭歟? 然蒙頂覺林, 多入於當世之名士, 題品以之著. 草衣之茶, 獨擅空門, 而世未之稱. 此由於士大夫遺視太高, 誰肯蒐羅以續陸羽經乎? 嗟夫! 余之爲此說, 不獨爲草衣茶, 竊恨南土人士, 含英蘊華, 多有不遇之歎也.

원래 제목 속의 ‘해차(海茶)’는 초의가 만든 해남차를 줄여서 한 표현이다. 도리(桃李)의 문 운운한 것은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의 고사에서 따왔다. 도리는 뛰어난 인재를 뜻한다. 적인걸이 추천한 수십 인이 모두 명신(名臣)이 되자 어떤 이가 천하의 도리(桃李)가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다고 말한데서 나온 말이다. 종남산 길목을 말한 대목 역시 당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의 고사가 있다. 종남산에 은거했던 그가 그로 인해 명성을 얻어 벼슬길에 올랐다. 종남산에 은거해 살던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났을 때 그가 종남산을 그리워하는 뜻을 말하자, 사마승정은 “종남산은 벼슬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지요”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노장용이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고사다. 두 이야기 모두 여기서는 권세 있는 사람에게 줄을 대지 않고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썼다. 본인의 능력보다 줄을 잘 서야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두를 던져놓고서야 해양(海陽)의 옥천차(玉川茶) 이야기로 넘어갔다. 해양은 해남을 말하고, 옥천차는 초의차의 다른 이름이다. 노동(盧仝)의 「옥천차가(玉川茶歌)」에서 따온 것이지,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쓴 것은 아니다. 신헌구는 세상 사람들이 명성만을 쫓아 건양(建陽)의 단산벽수(丹山碧水)만 찾을 뿐, 해남 옥천차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통탄했다. 마치 도리의 문에 들지 않고, 종남산에 은거하지 않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능력 있는 인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정작 해남 사람들도 무지하여 차 보기를 돌피 보듯 잡초 취급을 하고, 서울의 사대부는 토산(土産)이라 하여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어 신헌구는 자신이 대둔사 월여산방에서 처음으로 마셔본 초의 스님이 만든 차맛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용된 부대사(傅大士)는 제나라 동양군(東陽郡) 사람 부옹(傅翁)을 가리킨다. 그는 몽산(蒙山)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차를 심어 삼년 만에 성양화와 길상예라는 좋은 차 다섯 근을 얻어 황제께 바친 일이 있다. 이 대목은 초의의 『동다송』 제 29구에서 32구까지에 그대로 실려 있다. 또 각림사 승려 지숭(志崇)의 경뢰소(驚雷笑)․훤초대(萱草帶)․자용향(紫茸香)의 삼품향차(三品香茶) 고사를 끌어왔다. 초의가 바로 부대사나 지숭에 해당하는 인물임을 들어 말하기 위함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초의가 뛰어난 안목으로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풀 더미 속에서 귀한 찻잎을 가려 내 훌륭한 차를 얻은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몽정차와 각림차는 지금껏 이름이 전해오나, 초의차는 여전히 절집에만 알려지고 세상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만 것을 안타까워했다. 육우의 『다경』을 이어 속편을 지으려면 마땅히 초의차를 한 항목 두어 정리해야 할 것인데, 세상의 사대부들은 중국제 차만 찾느라 우리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니, 이래서야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나아가 그는 남쪽 인사들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세상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탁하며 글을 맺었다.
이상 신헌구의 「차설」은 초의 사후에 초의가 만든 차를 처음 맛보고 숨은 인재에 견주어 그 차의 가치를 선양한 글이다. 차문화사에서 의미 깊은 글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신헌구의 차시

신헌구의 『추당잡고』 권 1에는 「화훼잡시(花卉雜詩)」 20수 연작이 실려 있다. 남쪽 땅에서 나는 초목화과(草木花果) 중 이름도 우아하고 서울서 보기 드문 것만 가려 한 수 씩 노래했다. 이중 제 19가 「향차(香茶)」다. 이 작품이 바로 초의의 『동다송』 끝에 적힌 백파거사 신승지의 제시(題詩)이다. 『동다송』에는 따로 제목 없이 시만 적어 놓아, 전후 경과를 알기 어려웠는데, 금번 『추당잡고』의 확인을 통해 이 시의 원제목이 「향차」임을 확인하였다. 게다가 시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긴 글이 부연되어 있다. 그 글과 시를 함께 읽어 보겠다.

차나무는 덤불을 이루면 마치 과로(瓜蘆) 같고 잎은 치자 같다. 겨우내 시들지 않는다. 가을에 비로소 꽃을 피우는데 백장미 같다. 속이 노란 것이 마치 황금 같다. 곡우를 전후하여 참새 혀 같은 새 잎을 딴 것이 다품(茶品) 중에 으뜸이고, 효과도 뛰어나다. 승려 초의는 박식한데다 아치(雅致)가 있고, 차를 덖는 방법을 깊이 얻어 「다송(茶頌)」을 지은 것이 자못 자세하다. 각림(覺林)의 경뢰소(驚雷笑)․자용향(紫茸香)이나, 몽정(蒙頂)의 성양화(聖楊花)․길상예(吉祥蕊)에 견주어진다. 소동파와 황산곡의 설화(雪花)나 설유(雪腴), 단산(丹山)과 벽수(碧水)의 운간(雲澗)과 월감(月龕)도 모두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茶木成叢, 如瓜蘆, 葉如梔子. 經冬不凋. 秋始花, 如白薔薇. 心黃如金. 穀雨前後, 采新葉如雀舌, 爲茶品第一, 功效甚多. 僧草衣博識有雅致, 深得炒煎之法, 作茶頌頗詳, 比諸覺林之驚雷笑紫茸香, 蒙頂之聖楊花吉祥蕊, 以爲東坡山谷之雪花雲腴, 丹山碧水之雲澗月龕, 皆不及此.

艸衣曾試綠香煙 초의 스님 일찍이 초록 향연(香煙) 시험하니
禽舌初纖穀雨前 곡우 전에 갓 나온 새 혀 같은 여린 싹일세.
莫數丹山雲澗月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은 아예 꼽지 말지니
一鍾雷笑可延年 한 잔의 뇌소차(雷笑茶)가 수명을 늘여주네.
‘증시(曾試)’는 ‘신시(新試)’라고도 하고, ‘일종(一鍾)은 ’만종(滿鍾)이라고도 한다.(曾試一作新試, 一鍾一作滿鍾.)

차나무의 외양과 성질, 우전차의 우수한 효과에 대해 말한 후, 초의의 제다 솜씨가 출중해 「동다송」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앞서 「차설」에서 말한 각림과 몽정의 이야기와 소동파 황산곡의 차 관련 설화를 끌어와, 초의차가 이들 차에 전혀 손색 없는 우수한 품질을 지녔음을 칭찬했다.
시에서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을 말했다. 이 또한 초의의 『동다송』 35, 36구에서 “건양(建陽)과 단산(丹山)은 푸른 물의 고장이라, 제품으로 특별히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네. 建陽丹山碧水鄕, 品題特尊雲澗月”라고 한 대목에서 끌어왔다. 운간월은 운간월감(雲澗月龕)을 글자 제약 때문에 세 글자로 줄여 말한 것이다. 『둔재한람(遯齋閑覽)』에 나온다.
사실 위 「차설」과 「향차」 두 편만으로도 차문화사에서 신헌구의 위치는 뚜렷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정쟁에 밀려 해남에서 5년을 일 없이 머문 일을 계기로, 초의차의 특별한 맛과 위상을 뚜렷하게 자리매김해 놓은 것이다.
이제 『추당잡고』에 실린 그의 차 관련 한시 몇 수를 더 읽어 보고 글을 맺겠다. 먼저 읽을 글은 자신의 거처인 산재(山齋)의 다섯 가지 물건 중 하나로 차 끓이는 솥을 노래한 글이다. 제목은 「산재오물명(山齋五物銘)」 중 「다당(茶鐺)」이다.

相其䫉烟火籠 그 모습 살펴보면 연화(烟火) 낀 대그릇이요
罩見其心芬郁 그 속을 맡아보면 향기가 자욱하다.
沈深敲之而鏗 속이 깊어 두드리자 쟁그렁 소리 나니
繄爾百鍊之英 아 너는 백번 단련한 꽃다움이로구나.

그는 자신의 거처에 아예 차 달이는 솥을 마련해두고 차를 즐겼던 듯하다. 모습은 연화롱(烟火籠)인데, 향기가 자옥히 짙다. 두드리면 쟁그렁 소리가 나니, 백 번 단련한 무쇠로 만든 것이다.
다음에 볼 시는 「견한(遣閒)」 12수 가운데 제 9이다.

碧篆淸幽繚竹欞 푸른 연기 그윽하다 대 마루에 서리었고
茗泉新汲甔甁靑 새로 길은 차 샘물로 물병이 푸르도다.
瘴嵐消滌惟渠賴 장기(瘴氣) 남기(嵐氣) 씻어냄은 다만 차에 힘입으니
却悔疎看陸羽經 육우(陸羽) 『다경(茶經)』 대충 봄을 이제와 후회하네.

남쪽 바닷가에 살다보니 산람(山嵐)과 해장(海瘴), 즉 산과 바다의 나쁜 기운에 맞아 병치레가 잦다. 이 나쁜 기운을 씻어내 주는 것은 오직 차뿐인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육우의 『다경』을 열심히 읽어 차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해둘 걸 하는 아쉬움을 달랜 내용이다. 차에 점차 맛을 들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월여상인께 드림(贈月如上人)」이란 작품을 읽어 보자.

高僧居處竹爲林 고승의 거처라 대나무로 숲을 삼고
夜宿經齋月滿襟 밤에 자며 재 지내니 달빛 옷에 가득하다.
流水深山留我久 흐르는 물 깊은 산은 나를 오래 붙들고
淡雲疎雨共君尋 엷은 구름 성근 비에 그대 함께 찾는도다.
草衣古鉢傳神偈 초의의 옛 바릿대는 전신(傳神)의 게송이요
蓮閣寒鍾發省心 보련각(寶蓮閣)의 찬 종소리 성심(省心)을 일깨운다.
煮取茗香消碧痞 좋은 차 끓여내어 막힌 체증 해소하니
六根不敎世塵侵 육근(六根)에 세상 티끌 침입하지 않게 하리.
스님은 초의의 고족으로 보련각에서 지낸다. 차를 끓여 손님 접대를 잘 한다.
(師卽草衣高足. 住寶蓮閣, 善煮茗供客.)

초의 스님의 제자인 월여상인의 거처 보련각(寶蓮閣)에서 스님이 끓여 내온 차를 마셔 체증을 가셔내고, 세속에 찌든 속을 말끔히 씻어냄에 감사를 표했다. 보주에서 월여상인의 차 끓이는 솜씨를 특별히 칭찬했다.
다음은 「만일암을 지나다가 유산의 시운을 차운하다(過挽日菴次酉山韻)」란 시다. 대둔사의 암자인 만일암에 들렀다가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지은 시를 보고 차운했다.

春風吹不盡 봄바람 쉼 없이 불어오는데
白日駐禪家 흰 해는 선가(禪家)에 머물고 있네.
地高千年石 땅에는 천년 바위 우뚝 솟았고
山餘二月花 산에는 2월 꽃이 여태 남았다.
遠帆穿樹見 먼 돛단배 나무 사이 얼핏 보이고
危磴入雲斜 가파른 길 구름 잠겨 기울어졌다.
欲上高峰去 꼭대기에 올라 가보려 하여
催僮午點茶 동자에게 한낮 차를 재촉한다네.

만일암은 다산 정약용이 「만일암기」를 비롯하여 「만일암사적」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던 이름난 암자다. 그곳에 적힌 정학연의 시에서 흥취가 일어 한 수 남겼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암자여서 먼 돛이 보인다 했고, 정상으로 가는 길이 구름에 잠겨 있는 모습을 적었다. 다시 정상까지 올라가기 전에 그곳 사미승에게 차를 한 잔 청한다.
또 「낙서암에 올라(登樂棲菴)」에도 차 마시는 풍경이 보인다.

殘村小麓隱禪堂 쇠락한 마을 작은 기슭 선당(禪堂)이 숨었는데
樵牧侵尋少棟樑 규모도 자그마해 초동목부(樵童牧夫) 찾아올 뿐.
活引茗泉催武火 명천(茗泉)을 길어와서 무화(武火)를 재촉하니
澹飡草具甘迷陽 담백한 밥 풀 반찬에 미양(迷陽)의 삶이 달다.
徑莎冪磴迷平側 향초 덮힌 산길은 평지 비탈 어지럽고
野竹成籬任短長 대나무는 울을 이뤄 제멋대로 길고 짧다.
山外鳴籃停處久 산밖의 이름난 절 멈춰 지냄 오래거니
坐看紅樹入曛黃 붉은 나무 석양 비침 앉아서 바라본다.

3구의 ‘활인명천(活引茗泉)’이 그것이다. 활수(活水)를 끌어와서 차 달이는 샘물로 쓴다는 말이다. ‘최무화(催武火)’의 무화(武火)는 문화(文火)를 거쳐 불길이 거센 것이니, 어서 차를 마시고픈 마음을 담았다. 4구의 미양(迷陽)은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거짓으로 미친 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낙서암을 찾았다가 차 대접에 이어 저녁 공양을 받은 뒤, 석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 새로 찾은 『추당잡고』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신헌구의 「차설」과 여러 차시를 읽어 보았다. 신헌구는 중년에 5년간 해남에 쫓겨가 머물면서 대둔사 승려들과 폭넓은 사귐을 맺었고, 이 과정에서 뒤늦게나마 초의차와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차설」은 초의차의 우수성을 선양하는 한편, 알아주는 이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되어 있다. 또 그의 「향차」 시는 그간 제목 없이 시만 「동다송」 끝에 붙어 있던 것인데, 금번에 시에 달린 소서(小序)까지 찾아내서 함께 읽어 보았다. 다른 여러 차시들도 그의 차생활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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