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통을 잇는 사람들

醉月 2010. 2. 5. 08:48

황칠공예 명인 구영국 씨

황금은 화려하지만 은은하지 못하다. 찬란한 광휘에 쉬 질려버린다. 금 위에 다시 황칠(黃漆)을 하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황칠이 황금보다 더 값어치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황칠공예 명인 백사(白士) 구영국씨가 황칠에 몰두하고 있다. 통상 예닐곱 번 덧칠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가 근년 들어 붙들고 있는 한지로 만든 찻잔에는 20년에 걸쳐 600번 칠하는 게 목표다.

두릅나무과의 상록활엽교목인 황칠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백색 액을 분비하는데, 바로 이 수액이 황칠이다. 처음에는 유백색이던 수액이 시간이 지나면 공기 중에서 서서히 황색으로 바뀐다. 진을 없애고 정제해낸 게 황칠이다. 서남해안 도서지역에 분포하는 황칠나무는 15년 이상 자라야 수액 체취가 가능하고, 채취량도 미미해 매우 귀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 왕실에서조차 사용이 금지되고 중국 자금성의 천장이나 용상 등 황제의 명예를 높이는 데만 사용했다니 일반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칠’이었다. 중국의 진상 요구 때문에 고통 받던 백성들이 황칠나무에 구멍을 뚫어 말라 죽게 하거나 몰래 도끼로 베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목민심서’에 나올 정도다.

나무 탈에 황칠을 하는 구영국씨. 황칠은 도료뿐만 아니라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의 기능도 수행했다.

황칠공예명인 구영국(50)씨는 오래전 맥이 끊긴 황칠에 20여년째 매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경기 분당 수내동의 어둑한 자택 거실에서 기자 일행을 맞았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작업을 하다 만 그릇과 도자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입구에는 MBC 드라마 ‘궁’을 찍을 때 소품으로 내놓았던 대형 황칠 도자기가 지키고 있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 이 도자기의 가격을 맞히는 문제가 나왔다는데, 정답은 2억원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는데, 잠시 머리를 식히러 김제 금산사에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 노스님이 신기하게도 제 고민을 간파하고 한지에 싼 조그만 호리병을 갖다 주었습니다. 바로 그게 황칠이었는데, 스님이 ‘이제야 이놈이 제 주인을 만났다’면서 ‘이 황칠을 평생 화두로 삼으라’고 말하더군요.”

옻칠에다 나전칠기 작업과 전통공예 디자인까지 두루 섭렵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허전해 고민하던 그에게 200여년 전 맥이 끊긴 황칠공예라는 새로운 과업이 생긴 계기였다. 1985년의 그날 이후 구영국은 스스로 ‘눈물의 바다’라고 표현할 만큼 지난한 연구 과정을 지나왔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황칠이라는 이름뿐, 구체적인 기법이나 제작 과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황칠은 도료용으로 쓰일 뿐 아니라 항암 효과가 있어 다양한 약용 기능으로도 각광받았고, 불가에서는 벽사(?邪)의 용도로도 쓰였다. 구영국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 황칠을 일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골프채, 지갑, 식기, 지팡이, 만년필 등 생활용품으로까지 확대하는 중이다.

◇왼쪽부터 황칠 수액을 채취할 때 쓰는 도구와 다기, 인형, 찻잔 등 황칠을 한 생활 속 친근한 제품들.

그는 “전통공예의 본질은 예술이기 이전에 생활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된다”며 “당대에 가장 어울리는 일상의 예술이었을 때 후대에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은 황칠을 예찬하는 이런 시를 썼다.

“그대 아니 보았더냐 궁복(장보고의 호)산 가득한 황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받듯 하네/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나니/ 잘 익은 치자나무 어찌 이와 견줄소냐”


 

무형문화재 소목장 심용식 씨

“집이 사람이라면 창호는 얼굴입니다.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얼굴이고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이지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40여년 동안 나무와 씨름해온 소목장 심용식씨가 자신의 호를 딴 맑고 둥근 ‘청원산방’(淸圓山房)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대목이 건축의 구조 부분을 담당한다면 소목은 수장과 장식 부분을 담당한다. 소목 분야는 공포를 만드는 장인, 나간과 닫집, 장엄장식 등을 만드는 분야들로 다양하게 분화돼 있다. 하지만 지금 다른 소목 분야는 그 기능이 거의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가구장과 창호장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목장 심용식(58)씨는 소목 일 중에서도 전통 창호(窓戶) 제작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꽃완자문 너머로 바라보는 청원산방 마당.

창호란 말 그대로 통풍과 채광이 목적인 창(窓)과 방들을 연결하는 호(戶)를 일컫는다. 경주 불국사, 순천 송광사, 청도 운문사 등 전국 큰 법당의 창호들은 모두 심씨의 손을 거쳤다. 런던의 대영박물관 내에 지어진 한옥 ‘사랑방’의 창호도 그의 작품이고, 프랑스 고암미술관 창호도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꽃살문 창호 제작의 귀재’로 통하는 그는 눈곱재기창, 머름창, 팔각창, 불발기문, 소슬모란무늬문, 격자문 등 수백 가지 창호를 다 만들어 봤다.

◇(왼쪽)소목장 심용식씨는 “나무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람”을 꿈꾼다. 
◇(오른쪽)동산 위에 달이 뜬 모양의 청원산방 달아자살문.

추운 겨울 방 안 공기의 손실을 최대한 막으면서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눈곱재기창’이나, 필요에 따라 부위별로 다른 두께의 창호지를 발라 채광을 조절하는 ‘불발기문’처럼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네 다양한 창호들은 과학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각광받고 있다.

“제가 목수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거창한 명분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수덕사에 드나들며 전통문살과 단청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곤 했지요. 40여년 동안 묵묵히 나뭇결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어느 날 사람들이 저를 장인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산가지를 놓은 모양으로 문살을 짜 만든 숫대살문.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해부터 10여년 동안 지역의 큰 목수였던 조찬형(인간문화재 소목장)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톱밥가루 속에 파묻힌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고, 이후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내공을 쌓았다.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고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을 고집해왔습니다. 문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야 하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왼쪽)꽃완자문. 청원산방에는 소박한 세살문 안쪽에 화사한 꽃완자문을 두었다.
◇(오른쪽)눈곱재기창. 문이나 창에 달린 아주 작은 창을 일컫는 흥미로운 명칭으로, 때로는 벽에 따로 달기도 한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해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소목장 40여년 동안 쌓아온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 집약시켜 보여주는 ‘청원산방’을 북촌 한옥마을(종로구 계동)에 열고 일반인들에게 창호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소목장 심용식의 야심작들은 상설전시공간인 청원산방 외에도 남산한옥마을 전통공예관에서 열리는 ‘小木-나뭇결에 깃든 멋’ 전(21일까지)에서도 둘러볼 수 있다.

 

‘향온주’ 무형문화재 박현숙 씨

우리네 전통술은 ‘약’… 한약 다리듯 정성을 담다
“통상 한국인들은 술을 약주(藥酒)로 취급해왔습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술은 본디 상약(上藥) 중에서도 상약이지요. 한두 잔 마시면 효능이 번개처럼 빠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크게 독하고, 크게 열(熱)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하고 간이 붓는다고 경고합니다.”

◇서울무형문화재 9호 박현숙씨가 향온주 재료를 모아놓고 북촌마을에서 술 빚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임금에게나 올리던 귀한 술 ‘향온주’(香?酒)를 빚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9호 기능보유자 박현숙(57)씨는 “우리네 술은 전통적으로 ‘약’(藥)의 개념으로 빚어졌다”고 말한다.

일찍이 친정어머니 어깨 너머로 술 빚는 법을 배웠던 박씨는 향온주 1대 기능보유자 정해중씨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향온주 빚는 법을 배우다가 정씨가 작고한 뒤 서울시무형문화재 9호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향온주는 인현왕후의 기력을 보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고 박씨는 전한다.

“인현왕후가 궁에서 사가로 쫓겨나 냉방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는 바람에 환궁을 해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 가마를 탈 기력이 없었답니다. 상궁들이 고민 끝에 내의원에서 향온주를 가지고 나와 세 수저를 입에 넣어주니 반짝 기력을 차려 그 기운으로 입궁할 수 있었다네요. 향온주는 알코올 도수가 40%라고 하지만 다른 술에 비해 굉장히 부드럽고, 술기운이 반짝 올랐다가 사라져 숙취로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향온주는 녹두를 섞어 만든 누룩으로 빚는다는 점이 다른 술 제조법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박씨는 같은 쌀 한 가마니로 다른 술을 10병 빚는다면, 향온주는 5병밖에 빚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녹두가 알코올 성분을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인데, 이런 저효율을 감수하며 녹두를 쓰는 이유는 옛날 시골에서 농약 중독자에게 제일 먼저 녹두를 갈아 먹이던 것처럼 녹두가 해독작용에 탁월한 데다, 술의 향기까지 좋게 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부터 만날 술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왕들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의 특별한 감독 아래 향온주를 빚었다는 것이다. 향온주는 누룩과 밑술, 덧술, 그리고 발효과정을 거친 후 열을 가해 증류하여 최종 술을 얻는다. 누룩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향온주를 얻기까지 보통 6개월 정도 소요된다.

“지난 8월 영국 한국문화원에 가서 향온주 시음회를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발암물질을 염려해 위스키 같은 유색 술보다도 백색주의 인기가 높은데, 연투명의 향온주를 맛본 영국인들이 서울까지 전화해서 부쳐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주세법 때문에 지하로 스며들었던 술 문화로 인해 기록들이 많이 사라져 안타까워요. 대체로 궁중 술이 모두 향온주로 알려져 있지만 종묘대제 때 사용하는 울창주 같은 다양한 궁중 술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집대성하는 게 큰 숙제지요.”

강릉 출신인 박현숙씨는 정작 본인은 술을 못 마신다. 한두 수저 넘길 수는 있지만 대부분 혀로 맛만 보고 맹물로 헹군 뒤 뱉어내는데 술을 만든 재료나 맛은 혀끝에 대기만 해도 민감하게 파악한다고 자부한다.

이즈음 외국 관광객들에게 막걸리가 뜬다는데, 우리네 궁중 술의 대표격인 향온주 같은 술이야말로 국가에서 전승 발전을 위해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박씨는 안타까워한다. 아직 향온주는 서울 북촌마을 시음회에서나 맛볼 수 있지만 빠르면 내년 설날 전후로 시판도 이루어질 전망이다.


■향온주 담그는 순서
① 향온주 누룩 만들기. 보통 누룩은 밀을 분쇄해서 만들지만 향온누룩은 밀과 녹두, 보리를 넣어 만든다. 녹두는 해독 역할을, 보리는 간 기능 보강 역할을 한다.
② 백설기와 누룩을 물과 함께 버무려 밑술을 만든다.
③ 밥과 누룩을 버무린 후 밑술에 첨가하면 덧술이 된다. 덧술은 열두 번까지 더할 수 있다.
④ 왼쪽은 밑술, 오른쪽은 덧술. 덧술은 100일간 숙성시키면 청주처럼 맑아진다.
⑤ 마지막 증류 과정을 거치고 있는 향온주. 향온주는 다른 술에 비해 부드럽고 반짝 취했다가 금방 깨어나 숙취가 없다.
⑥ 숙성시킨 덧술을 증류하면 맑은 향온주가 된다.

무형문화재 악기장 김복곤씨
오묘한 가얏고 소리 12현에 혼을 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붙잡은 일이었습니다. 열다섯 살 나이에 시골에서 함께 상경한 친구들이 먹고살기 위해 중국집이나 양복점으로 흩어지던 시절이었지요. 좋아서 재미있게 배웠더라면 손에 흉터도 많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마지못해 반신반의하면서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나온 뒤에서야 내가 하는 일이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지키는 얼마나 값진 일인지 깨닫게 된 거지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악기 제작에 뛰어들었다가 40년 외길을 달려왔다는 악기장 김복곤씨. 그는 “500년 전에 쓰였던 악기들이 60여종이나 사라졌다”며 “지금도 도면이 상세히 남아 있는 그 악기들을 모두 복원해 박물관에 보존하고 싶다”고 말했다.
1969년 전북 임실에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무작정 상경한 이래 40년째 가야금 만들기에 매달려온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8호 악기장 김복곤(54)씨. 도대체 가야금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외길을 달려오게 했는지 묻자, 그는 묻는 사람이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변한다.

상경 후 김광주의 문하에 들어가 현악기 제작 기능을 전수받기 시작한 뒤 김광칠 김광주 최태진의 뒤를 이어 2002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국수무늬 기법을 새롭게 복원하여 가야금 울림통의 성능을 개선한 악기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로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줄마다 안족(雁足)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내는 가야금은 정악을 연주하는 정악가야금과 이를 축소한 산조가야금으로 구분된다. 흔히 사용하는 보통 가야금은 요즘 한 달 정도면 만들어내지만 제대로 하자면 오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울림통만 해도 눈과 비를 맞혀가며 10년 정도 말린 오동나무를 쓰면 좋고, 30년 50년 말린 오동나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김씨는 우리도 가까운 일본처럼 능력 있는 사업가가 나무 보관업을 해서 1년짜리부터 5년, 10년, 20년, 50년까지 말린 나무들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진다면 좋겠다고 특별히 소망했다. 서양의 바이올린이나 첼로 명기들은 50년 이상 건조된 나무들을 쓴다고 했다. 그는 오동나무 중에서도 나이테를 일자로 가지런히 하여 만든 악기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는 결론에 이르러 최고의 명기라는 국수무늬 울림통을 재현할 수 있었다.

“500년 전에 나온 ‘악학궤범’을 보면 오동나무도 밑동에서부터 7·8자 윗부분이 더욱 좋다 했는데, 사람도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듯 나무도 자라면서 가지 영향을 받아 허리가 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테가 굽지 않고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낸다는 심증으로 서울대 음향연구소 등에 의뢰해 연구한 결과 나무 무늬가 국수무늬처럼 일자로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내더군요. 뭘 모르는 사람들이 나이테에 옹이가 생겨 만들어지는 용무늬가 좋다는 말을 하는데, 옹이란 나무가 늙어서 물을 빨아들이는 관을 막아 죽게 만드는 흔적일 뿐입니다.”

음악을 잘 아는 이가 우연히 길 가다 초가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따라가보았더니 초동이 아궁이에서 오동나무를 때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동나무 겉 표면을 인두로 지져 시커멓게 태운 뒤 솔질을 하여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옛 이야기를 전하는 김복곤씨.

그는 ‘악학궤범’에 그림과 규격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80여종의 옛 악기들 중 20여종만 남아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악학궤범의 모든 악기를 복원해서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가 충분치 않아 악기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걱정을 하는 데 시간을 더 빼앗기는 처지이고 보면,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염원인 것 같다.


■가야금 만드는 순서
① 울림통 표면을 사포로 닦아내고 있다.
② 12줄 명주실을 고이는 안족(雁足:기러기발)을 탄다.
③ 김복곤 악기장이 옥 장식으로 자신의 표식을 넣고 있다.
④ 가야금줄을 거는 데 활용할 ‘부들’을 ‘봉미’의 구멍에 넣는 작업.
⑤ 부들에 가야금 줄을 맨다.
⑥ 가야금 틀에 줄을 고정시키고 있다.
⑦ 돌궤에 줄을 넣는다.
⑧ 완성된 안족을 줄 밑에 괴고 있다.
⑨ 완성된 가야금의 줄들을 최종 점검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민화장 김만희 씨
잊혀져가는 한민족의 정서와 삶을 화폭에…
“사람마다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림을 좋아합니다. 일반 대중이 보는 그림은 보고 즐거워야지, 어두운 감정이 생기면 안 되지요. 물론 어두운 표현도 반성을 위해선 필요하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게 좋아서 이 길을 줄곧 달려왔나 봅니다.”

◇김만희 민화장이 서울 석관동 작업실에서 ‘작호도(鵲虎圖)’를 그리고 있다. 그는 “기왕에 태어났으면 민화 속의 호랑이나 까치처럼 즐겁게 살다 갈 일”이라고 말했다.
선사시대 이래 대중이 생활 속에서 장식용으로, 혹은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기원의 용도로 그려온 그림이 바로 민화(民畵)다. 아무도 이 장르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 잘나가던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국 각지를 돌며 민화를 채집하는 한편 창작에 40여년째 몰두해온 민화장 김만희(78)씨. 1996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받은 그는 팔순을 목전에 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맑은 눈빛과 온화한 목소리로 민화 속에서 살아온 생이 뿌듯하다고 말한다.

◇김만희의 ‘선유도’. 자료를 바탕으로 옛 사람들의 놀이문화를 세밀하게 재현했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로, 그는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이 명칭을 쓰기 시작했고, 그 뒤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야나기가 민화라는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는 민화에 대한 개념이 면면이 이어져 왔다. 선사시대 암각화의 물고기, 거북, 사슴, 호랑이 등에서 원초적인 화맥을 찾을 수 있고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나 처용설화의 처용화상 등을 거쳐 십장생도와 화조도, 풍속화로 맥을 이어왔다. 민화와 정통 회화는 ‘감상적 회화성’에 방점을 찍느냐, 아니면 ‘실용적 상징성’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왼쪽)꽃과 나비를 그린 화접도(花蝶圖).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오른쪽)호랑이와 까치를 그린 ‘작호도(鵲虎圖)’. 전형적인 민화 중의 하나로 호랑이는 산신령과 동일시되어 나쁜 귀신을 막아주고, 까치는 길조로 여겨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한다.
부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소질도 있었다. 부친이 초등학교 교사여서 아들의 예술적 기질에 대한 배려도 깊었고, 1944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미술 공부를 폭넓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10여년째 하다가 직장에 매여서는 민화의 현장을 찾을 시간이 도저히 확보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히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사찰, 박물관, 도서관, 전시회, 개인 소장가 등 전국 어디나 민화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1960년대 후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사업을 벌이면서 초가집 같은 낡은 것들을 파기하고 잘살아보자고 했을 때 어려서부터 보고 느껴 정이 든 전통적인 것들이 없어진다는 게 허전하고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민화를 시작한 겁니다.”

◇1950년 6·25전쟁 직전의 대전역 풍경을 그린 김만희씨의 풍속화. 김씨는 옛 기억을 되살려 150여점의 풍속화를 그렸다.
그는 처음에는 이런 그림을 해도 될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외로웠다고 했다. 하지만 1972년 국립공보관에서 첫 전시를 열자 반응이 아주 좋아 일생을 두고 매달려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후 민화 인구가 많이 늘어 사단법인 한국전통미술인회까지 꾸려 회장직을 오랫동안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풍속화에 특히 역점을 두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근현대의 풍물들을 세필로 그려내는 작업이 그것이다. 6·25 직전의 대전역 광장 풍경이나 시장 상인들의 모습 같은 흥미로운 그림들도 있지만 주로 농촌의 옛 풍속과 생활사에 집중해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와 가난과 개발독재와 군사정권과 민주화 시기를 힘겹게 지나왔다는 김만희씨. 그는 “한국 사람들이 조금 성급한 편인데 민화의 둥글둥글한 세계처럼 오순도순 웃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며 “우리는 좀 있으면 갑니다만 아무쪼록 후손들이 우리보다는 행복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민속연 명장 리기태씨
모든 시름 날려 보내고 하늘에 꿈을 띄우다
“여섯 살 때부터 연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누가 죽었다는 소문만 떠돌던 6·25전쟁 뒤끝에 놀이라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썰매타기, 연날리기, 자치기…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하늘을 날 수가 없을까,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놀이문화가 땅에서 이루어졌는데 연만 하늘에서 놀았습니다. 그 환상에서부터 연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거지요.”

하나 하나 혼을 담아…민속연 명장 리기태씨가 북촌 한옥 작업실에서 전통연을 만들고 있다.
민속연 명장 리기태(59)씨. 그는 어린 시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연을 날리는 내내 종일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 기분이 한 시절에 그치지 않고 평생 그의 업이 돼버렸다. 국내에서는 1년에 열두 번 이상 연날리기 대회에 참관하고(매해 11월에 열리는 서울시민 연날리기대회 심사위원장이다) 해외 연 관련 행사에 참가하느라 20∼30개국은 돌아다녔다. 꿈과 현실의 업을 일치시킨 아주 행복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연이 그리 좋았을까.

그는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그해라면 스물하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생업에 복무해야 하는 나이인데 그는 엉뚱하게도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는 두 분의 스승 이름(가산 이용안, 학엄 유재혁)은 반드시 기사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생의 이러저러한 ‘사이’를 구차한 말로 메워주진 않았지만 요약해보면 “만들고 그리고 날리는” 삶은 그때부터 업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는 스승님은 늘 “자연의 법칙에 반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지금 사람들은 바람에 저항한단다. 민속 연이 대중 가까이에 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인 것 같다. 어설프게 전문가만 향유하는 연(제작·날리기) 기술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하는 연 날리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호 ‘초양’(抄洋·회초리 초, 바다 양이니, 대나무로 대양을 다스리라는 의미다)을 내세우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를 누비는 중이다.

◇서울 북촌 한옥 앞에서 대형 연과 함께 포즈를 취한 리기태씨. 그는 한국인에게 연이란 “애환이 묻어 있는 우리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초양 연은 6살짜리 아이들이 만들어도 바로 올라갑니다. 일반 기성품들은 뱅글뱅글 돌다가 떨어져요. 전문가들만 날려야 되겠습니까?”

연을 날리는 데도 이리 복잡한 사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그는 모든 이들이 편하게 하늘에 꿈을 날리기를 갈망하는 듯하다.

“땅 위의 좁디좁은 공간에서 숨 막히게 살아도 하늘은 다 내꺼다, 이런 생각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뭐가 도대체 불만이냐, 하늘을 쳐다보면 다 내 것인데…. 마음이 탁 터지고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은 대상이 하늘입니다. 고개를 쳐들고 자기 이상을 하늘에 갈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위안이 되기 때문에 나는 연을 날렸고 날립니다.”

우리는 통상 연을 거론하면 ‘방패연’을 떠올린다. 가운데 구멍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모든 연이 방패연인 것은 아니다. 한국 전통연은 중앙 구멍 위쪽에 그려진 그림이 연의 명칭을 가름한다. 호랑이 연, 원앙 연, 달 연…. 내년은 호랑이 해라서 호랑이 연이 올 연말에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호랑이가 하늘에 드높이 떠서 대한민국 모든 이들의 가슴에 꽉 찬 한과 염원을 다 날려주기를 그는 원한다. ‘리기태’를 시의 소재로 삼아서 황금찬 시인이 썼던 시, 이렇게 흐른다.

“구름의 기인/ 리 기 태/ 그의 연실과 얼레를 보라// 날려 보내라/ 모든 불행을 연에 실어/ 끝이 없어라/ 하늘 위에 피어나는/ 우리들의 내일을/ 저 지중해/ 바다 빛으로 물드는/ 아 꿈이 아니려니// 내일의 병든 구름을/ 실어가라/ 그리고 청정한 우리들의 하늘을/ 연이여 실어오라.”(‘연을 날리며’ 부분)

 
◇전통연을 만드는 데 쓰이는 붓과 칼 등 도구들.
◇전통연에 붙일 댓살을 칼로 다듬고 있다.
◇전통연에 붙인 댓살에 명주실을 연결하고 있다.
◇한지에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무형문화재 소목장 김창식 씨
톱질·끌질·사포질… 전통가구에 예술을 입히다
“처음에는 배우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웠지만 하다 보니 나무로 된 건 뭐든지 만들 수 있게 돼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서는 몇 백년, 몇 천년까지 가는 가구도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신바람이 나데요.”

◇50여년째 소목 일과 연을 맺어온 소목장 김창식씨는 “이젠 나무로 된 건 뭐든 만들 수 있다”면서 “몇 백년, 몇 천년까지 가는 가구를 만드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소목장 김창식씨의 희망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일. 5년간 전수장학생으로 있는 아들 김영환씨에게 김씨가 나무에 끌구멍 파는 작업을 가르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장롱이나 문갑, 사방탁자, 머릿장 같은 일반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장인을 소목장이라 하고, 가옥이나 절간 같은 건축물을 만드는 장인을 대목장이라 한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 김창식(63)씨. 그가 처음 소목 일을 배우게 된 건 순전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그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어버리고 할머니 손잡고 피난을 내려왔다. 오갈 데도 없고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워 밥이나 얻어먹자고 심부름을 하며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나섰다가 소목 일과 벌써 50여년째 인연을 맺고 있으니 나무를 매만지며 사는 건 타고난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동안 각종 전승공예전에서 수상했고 2001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가구를 만들기 전에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좋은 재료를 구하는 일이다. 갈수록 좋은 나무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수령이 몇 백년 된 느티나무라면 최상급 재료인데, 이런 나무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다. 나무를 구해서 무늬가 잘 살아나도록 신중하게 제재한 뒤 다시 7∼8년은 자연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실질적인 첫 공정은 원목을 크기에 맞게 재단하는 과정. 그런 연후 정성스럽게 대패질을 하여 굴곡이 없게 수평으로 만들고 제비촉과 끌구멍을 판다. 우리 전통가구는 못을 박지 않고 제비촉과 끌구멍만으로 연결하는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겨울에는 건조하고 여름 장마철에는 습기가 많아 끌구멍을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뒤틀리거나 빠질 염려가 있다.

“억지로 못이라도 박아서 만들면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대만국립박물관에서 1300년이 넘은 가구를 봤는데 지금 써도 이상이 없을 정도였어요. 잘만 만들면 몇 대를 물릴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을 오래 한 만큼 늘 그런 가구를 만들고 싶지요.”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에 위치한 소목장 김창식씨의 작업실. 대패, 칼, 자 등의 작업도구에서 그의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정교한 과정을 거쳐 조립이 완성되면 사포질을 하고, 황토 가루에 석회와 물을 섞어 고루 바른 다음 마르면 다시 사포로 갈아내어 표면을 고르게 한다. 옻칠을 하여 나뭇결에 은은한 색을 입히면 소목 제작의 마지막 공정이 끝난다. 소목장 김씨가 가장 아끼고 내세우는 작품은 전통가구 이층장이다. 옛날부터 여인들이 안방에 놓고 아껴 쓰던 대표적인 전통가구인데, 그는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이만큼 짜임새 있는 가구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희망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 지금은 아들 김영환(36)씨가 전수장학생으로 아버지 밑에서 소목 일을 5년째 배우고 있다.

◇(사진 왼쪽)나무 무늬가 살아 있는 사층책장. (사진 오른쪽) 소목장 김창식씨가 가장 아끼고 내세우는 이층장. 대표적 전통가구로 짜임새가 뛰어나다.
“갈수록 기술 가진 이들이 사라지고 있어 많이 가르쳐놓아야 할 텐데 이걸로 당장 생활이 안 되니까 배우려고들 하지 않아요. 이 일을 하던 사람도 이직하는 마당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렵게 고생고생해서 배웠는데 이 기술을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뒷바라지만 된다면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쳐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