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정겨운 옛것들이 살아 숨쉬는 충북 청주
51년만에 모습 드러낸 비밀벙커
제역할 다하자 문화공간 탈바꿈
옛 잡지 전시부터 음악공연까지
시민들의 기발한 생각으로 채워
원도심 한옥·일본식 가옥 ‘공존’
예전 모습 간직한 채 추억 소환
시내 한복판 자리잡은 ‘학천탕’
당대 최고 건축가 김수근 설계
건물·공간 그대로 살려 카페로
이색적 분위기 ‘물빠진 목욕탕’
액자모양 창 설치한 청주박물관
해장국·호떡 등 오래된 맛집도

청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전쟁에 대비해온 벙커의 변신
충북 청주 충북도청 옆에 ‘당산(堂山)’이 있다. 당산은 와우산 끝자락의 야트막한 야산. 여기에 주민들이 소원을 빌던 당(堂)이 있었다. 기도가 모이던 당산 아래 1973년, 은밀하게 대형 벙커가 만들어진다. 전쟁이 터지면 방공호로 쓰거나, 도청 공무원이 비상근무하는 전시(戰時)대비 시설이었다.
벙커가 만들어진 무렵은 나라 전체에 안보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해에 미군의 베트남 철수가 있었고, 한해 전에는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10월 유신’ 선포가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진 벙커는, 50년 동안 존재마저 비밀에 부쳐진 채 숨겨져 있었다.
반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벙커를 사용해야 할 일은 없었고 벙커의 역할이 2023년 11월 끝나면서 비밀이 해제됐다. 그리고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24년 10월, 당산 벙커는 열린 문화공간으로 전격 공개됐다. 냉전 시대의 쇳내 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시민들의 문화를 담아내는 시설로 탈바꿈한 셈이었으니 그야말로 극적인 변신이었다.
문화공간이 된 벙커는 ‘당산 생각의 벙커’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과거 벙커가 대피나 지휘 같은 ‘행동’의 공간이었다면, 문화벙커의 역할은 행동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의미겠다.
전쟁 벙커는 본래 ‘숨겨지는 것’을 전제로 지어진 것. 전시(展示)를 알리는 입간판이나 플래카드가 없었다면 벙커 입구를 쉽게 찾지 못했으리라. 예비군복의 위장 무늬처럼 칠해놓은 벙커 입구로 들어가니 에어컨 바람보다 더 서늘한 공기가 밀려 나왔다. 찬 공기가 피부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폭염의 날씨에 이만한 피서가 없다 싶었다.
암반을 깎아 만든 벙커는, 차량 터널과 흡사했다. 폭 4m, 높이 5.2m, 길이 176m에 아치형 터널 구조다. 터널식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14개의 격실을 뒀다. 터널과 격실 공간을 다 합한 면적은 2156㎡(약 652평)로 제법 크다.

# 지휘 대신 예술을 담는 공간으로
당산 생각의 벙커에서는 대중들과 눈높이를 맞춘 실험적 전시나 공연을 주로 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행사 타이틀은 ‘999.9 프로젝트’다. 999.9는 거의 완벽하지만 마지막 0.1을 채우지 못한 숫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미세한 결핍을 통해 ‘순수하다고 여겨온 예술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실험’이란 함의다. 기존의 예술적 영역에 뭔가 0.1의 이질적 불순물을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999.9에는 또 부족한 0.1을 관람객의 직관과 참여로 채운다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어찌 됐든 전시와 공연은 예술과 비예술, 공연과 비공연,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시민 대상으로 공개 모집을 해서 참가작품을 선정했다는데, 하나같이 유쾌하고 기발하다. 분야도 다양하다. 수집가가 모은 오래된 잡지와 영화 포스터 등으로 전시장을 채운 격실도 있고, 치렁치렁한 옷을 설치예술처럼 가득 걸어놓곤 관람객들이 입어보길 권하는 격실도 있다. 패션의 재료 위에다 예술 한 스푼을 얹은 듯한 느낌이다. 청년예술가와 발달장애인의 협업으로 꾸민 전시도 있다. 격실마다 전시가 어찌나 자유분방한지, 다음에 뭐가 나올지 그야말로 예측 불가다.
가장 뜻밖의 장면은 올해로 개관 50년을 맞은 동양복싱체육관이 격실 하나를 얻어서 복싱 링을 설치해놓고는 한쪽 벽면에 경기 영상을 상영하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혹스러운데, 연주자들이 복싱 링 안으로 들어가 링 밖의 관객들에게 진지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는 공연도 있다고 했다.

# 소소한 도시의 볼거리를 따라서 걷다
벙커 안에서는 ‘뭐든지’ 한다. 공연만 해도 오케스트라부터 국악 퓨전 타악, 우쿨렐레, 창작민요, 발라드&트로트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전시나 퍼포먼스도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곳에 가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게다가 벙커 안은 폭염의 날씨를 싹 잊어버릴 정도로 서늘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
당산 생각의 벙커에 들렀다면, 도보로 갈 수 있는 당산공원 주변을 함께 보자. 대단한 명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정겹고 소박해서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곳들이다. 벙커에서 멀지 않은 곳에 1939년 지어진 옛 충북지사 관사를 손봐서 만든 충북문화관이 있고, 1935년 완공된 한옥 성당인 청주 성공회 성당이 있다. 공사 중인 시의회 건물 뒤쪽에는 국가등록 문화유산 ‘일양(日洋)절충식 가옥’이 있다.
절충식 가옥은 1924년 지어진 것이니 100년을 넘겼다. 본래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지부장 사택이었다가 6·25 전쟁 이후부터 30여 년 동안 청주 YMCA 회관이었는데, 1984년에 개인이 사들여 유치원으로 운영했다. 일본풍의 건물에다 서양식의 뾰족지붕을 단 외양만큼이나 신기했던 건, 이곳에서 30년 넘게 아이들에게 아프리카 기원의 타악기 마림바를 가르쳐왔다는 사실이다. 마림바는 나무로 만든 실로폰의 일종인데, 지금은 ‘예능원’이란 간판을 달고 전적으로 마림바만 가르치고 있다.

# 대도시의 활력이 살아있다
이번에는 청주 원도심으로 가보자. 청주는 도시여행 목적지로 손색없는 곳이다. 다들 “예전의 위세에다 대면 어림도 없다”고 입을 모았지만, 청주 원도심의 중심인 ‘성안길’은 활력이 느껴진다.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눈에 띄고, 이들을 상대로 한 감성적인 카페나 술집도 많다. 그다지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젊은 취향의 옷가게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지도를 꺼내지 않고 원도심의 골목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갤러리와 공연장이 몰려 있는 ‘예술의 거리’나 옷가게가 즐비한 ‘로데오 거리’, 혹은 카페와 식당, 술집 등이 늘어선 ‘소나무길’로 올라서게 된다. 구획된 공간을 넘나들면서 분위기가 바뀌는 골목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청주도 ‘원도심의 쇠락’이 고민이라는데, 광역시 급을 제외한다면 그래도 이만한 활력을 보여주는 도시는 흔치 않은 듯하다.
청주는 대도시다. 광역시와 인구 밀집지역인 수도권을 빼고 나면, 청주는 경남 창원에 이은 ‘넘버 투’다. 충주를 비교 대상으로 들이미는 경우도 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 도시의 규모 자체가 다르다. 청주 인구가 충주의 4배를 훨씬 넘는다. 전주에다 원주 인구쯤을 더한 규모다. 게다가 청주는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꾸준히 인구가 늘고 있다.
청주의 원도심은 제법 잘 구획되고 정돈됐다. 원도심이 보여주는 ‘시간의 지층’도 다양하다. 휘황하고 세련된 공간도 있지만, 적산가옥과 한옥이 비벼진 것 같은 오래된 곳들도 많다.
청주에는 유독 오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들이 많다. 다른 대도시의 도심보다 성장이 덜 압축적이었고, 변모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 도심에 오래된 목욕탕과 이발소, 분식점, 빵집, 방앗간, 헌책방 등이 여태 남아있는 이유다. 다른 도시에서는 진작 사라진 공간들이 여기서는 살아남아 오래된 추억을 소환한다.
청주 도심이 여행하기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너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가 적절한 공간 안에 집약돼 있어 여행하기 딱 좋다. 원도심 안쪽만 보겠다면 하루로는 바쁠 듯하고, 이틀이면 좀 여유가 있을 듯하다. 여기다가 원도심 북쪽인 우암산 아래 수암골벽화마을, 그리고 옛 담배제조공장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문화제조창과 국립청주박물관까지 코스를 이어붙인다면 알찬 도심 여행코스가 만들어진다.

# 당대 최고 건축가가 지은 목욕탕
청주 도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물은 목욕탕 ‘학천탕’이었다. 8층 건물 전체가 목욕탕인데 외양부터 범상치 않다. 전후 사방이 비대칭으로 곡선과 직선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1988년 완공된 학천탕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꼽혔던 고 김수근이 설계했다. 1986년 그가 작고한 뒤 제자였던 승효상과 이종호 건축가가 상상력을 덧대 완성했다. 서울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을 비롯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주로 맡았던 김수근은 왜 지방의 작은 목욕탕 건물 설계 의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학천탕을 운영했던 고 박학래는 ‘목욕업계의 대부’로 불렸던 인물이다. 1938년 열다섯의 나이에 청주 최초의 대중목욕탕 ‘아사히후로야(旭湯)’에 화부로 취직한 그는 30년 만에 그 목욕탕을 인수해 사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56년부터 2대와 3대 청주시의회 의원을 내리 역임했으며,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자 5대와 6대 충청북도의회 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박학래는 ‘청주에서 최고의 목욕탕을 짓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고는 “평생 뒷바라지를 해 온 아내의 환갑을 맞아 고마움의 표시로 아내 명의의 목욕탕을 지어주고 싶다”고 말했단다. 그 얘기에 감동한 김수근이 설계를 맡았다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학천탕은 문을 열자마자 청주의 명소가 됐다. 명절을 앞두고서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목욕탕 앞길까지 붐볐단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목욕탕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영난이 시작되던 와중에 2010년 박학래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경영난이 극심해지면서 건물의 매각설과 철거설이 돌았다.

# 자연을 건축의 액자 속에 담다
학천탕은 퇴장을 앞둔 것처럼 보였다. 용케 건물을 헐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용도의 공간이 된다면 목욕탕으로 지어진 학천탕의 건축적 성취는 지워지게 될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자식들이 묘안을 냈다. 목욕탕 시설을 그대로 두고 공간을 카페로 꾸미자는 것이었다.
2019년 남탕으로 쓰던 건물 1, 2층이 ‘카페 목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탈의실과 옷장, 거울, 수전 등은 물론이고 목욕 수건과 번호표, 목욕 집기 등 영업 당시의 공간과 물품을 그대로 둔 채 커피숍을 연 것이었다. 레트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물 빠진 목욕탕’은 이색적인 분위기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학천탕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켜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카페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3, 4층에 문을 열었던 식당 ‘학천불고기’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재정비를 위해 영업을 중단한 상태. 카페 수입만으로, 혹은 의지만으로 이 큰 건물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주에는 김수근이 설계한 건축물이 하나 더 있다. 1987년에 완공한 국립청주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독특하다. 덩치를 키운 단일 건물이 아니라, 기와 느낌을 강조한 저층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공간을 완성했다. 경사 지형에 배치한 여러 동의 건물은, 관람객들이 외부와 내부의 다양한 경관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돋보였던 건 건물 안쪽에 액자 모양의 창을 두거나 중정 형식의 공간을 마련해서 자연과 풍경을 마치 걸어놓은 그림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담쟁이덩굴의 초록과 문인석과 무인석이 유리창을 통해 공간 내부로 들어왔다. 고백하자면 유물이나 전시보다, 박물관 동선을 따라가며 그걸 보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다.

# 오래됐어도 쓸모있는 곳… 식당
도시의 오래된 것들은 쓸모를 잃은 것들이 많다. 오래됐어도 여전히 쓸모가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식당이 아닐까.
청주에서 노포(老鋪)로 첫손에 꼽히는 식당이 남주동의 ‘남주동 해장국’이다. 여기는 광복 이전이던 1943년 개업했다. 놀라운 건 개업 이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3대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정기휴일인 월요일만 빼고 매일 새벽 6시에 문을 열고 해장국을 말아낸다.
남주동 해장국의 대표메뉴는 물론 해장국. 선지를 넣느냐 안 넣느냐에 따라 선지해장국과 소고기해장국으로 나뉜다. 해장국은 추억 속의 ‘장터국밥’, 딱 그 스타일이다. 딱 떨어지는 ‘각진’ 맛이라기보다는 두루뭉술한 쪽에 가깝다. 익숙한 듯 꽉 찬 맛이 매력이다. 대를 잇는 건 주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에 할아버지로, 대를 이어 찾는 단골손님들이 적잖다.
청주에는 1990년까지만 해도 빵과 분식을 같이 파는 제과점이 많았다. 도넛과 단팥빵을, 메밀국수나 우동과 함께 파는 건 청주 베이커리의 특징이었다. 1961년 제과점으로 문을 연 공원당이나, 지금은 서문우동으로 이름을 바꾼 서문제과가 그런 곳이었다.
공원당은 개업 이듬해인 1962년 청주중앙공원 옆으로 이전한 뒤 지금껏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빵 대신 우동과 메밀국수, 돈가스 등을 판다. 서문제과는 서문우동으로 간판을 바꿔 달긴 했지만 우동, 짜장면과 함께 여러 종류의 빵을 같이 판다. 야채고로케와 영양밤빵이 대표메뉴다. 찹쌀떡도 있다.
청주중앙공원 뒤의 ‘쫄쫄호떡’은 공원당이나 서문제과보단 짧지만, 1984년 개업했으니 역사가 40년이 넘는다. 호떡을 기름에 튀기듯이 구워내는데, 생각보다 기름지지 않은 데다 쫄깃쫄깃한 식감도 좋고, 반죽에 스민 단맛이 매력적이다. 설탕 넣는 방식이 다른지 다른 호떡처럼 소가 흘러내리지 않는다.

# 청주에서 만나는 고마운 것들
마지막으로 청주를 들고나는 길에 늘 감탄하며 지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의 얘기를 덧붙인다.
청주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은 경부고속도로 청주IC에서 흥덕구 복대동 죽천교까지 이어지는 4차선 도로의 6.3㎞ 구간이다. 이 길 양쪽으로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초록의 긴 터널을 이룬다. 가로수가 이만한 존재감을 지닌 곳이 또 있을까. IC를 빠져나오자마자 지나는 가로수길은 청주의 첫인상을 ‘청량한 도시’로 기억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누가 언제 이 길에 플라타너스를 심었을까. 이야기는 6·25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따르면 1952년 청원군 강서면 홍재봉 면장이 청주에서 조치원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에 플라타너스 묘목 1600그루를 심었다.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심은 플라타너스 상당수가 훗날 경부고속도로 개통 후 청주IC 진입로 쪽으로 옮겨 심어졌다.
경부고속도로 천안∼대전 구간이 개통된 건 1969년.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청주IC에서 상당공원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가 새로 놓였다. 한 해 뒤인 1970년, 당시 충북도 도로시설 계장이었던 이종익의 주도로 도로변에 플라타너스 가로수 1527그루가 심어졌다. 그는 길 양쪽에 가로수를 심고 도로 중앙의 분리대에도 나무를 심어 3열의 가로수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예산문제에다 식재의 어려움 등으로 안팎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는 데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청주를 드나들 때면 푸른 숲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때 고집을 꺾지 않았던 공직자의 결단 덕분이다.
청주에 가면 고마운 것들이 참 많다. 여전히 짙푸른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고맙고, 문 닫지 않은 학천탕이 고맙고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장국집도, 예전의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우동집과 호떡집도 다 고맙다.

■ 담배공장이 문화공장으로
청주 원도심 안덕벌에는 청주연초제조창이 있었다. 한때 연간 100억 개비의 담배를 생산했던 지역의 중심산업지였다. 2004년 폐쇄된 연초제조창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청주관으로 재탄생했다. 연초제조창 뒤쪽의 동부창고도 시민참여형 문화거점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국립현대미술관청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9월 7일까지 ‘수채화 특별전’을 하고 있다. 이중섭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입장료는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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