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남 강진 '茶 소풍'

醉月 2022. 6. 12. 12:40

월출산 아래서 차를 만들고 있는 이현정 ‘이한영차문화원’ 원장이 월출산 아래 울창한 대숲 야생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이 원장은 이렇게 딴 찻잎으로 다산의 제자가 해마다 스승에게 만들어 보내던 차의 명맥을 대를 이어 잇고 있다.


월출산 남쪽 기슭은 전남 강진 땅. 그중 그윽하기로 이름난 곳이 성전면 월남리입니다. 마을 이름이 ‘월남(月南)’이니 ‘달의 남쪽’입니다. 지금 여기는 차밭의 싱그러운 초록으로 그득합니다. 월출산의 발치 아래로 거대한 다원이 흘러내리듯 펼쳐져 있고, 산자락의 대숲 곳곳에 야생차들이 자랍니다. 이곳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차(茶)’입니다. 자연과 나 사이에 놓은 그윽한 차 한잔은, 사유의 쉼표와 함께 자연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어냅니다.

월출산의 암릉을 뒤로 두르고 선 석탑 아래서, 혹은 동백과 대숲으로 어둑한 별서(별장)의 정자 툇마루에 앉아서 앞산의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차 한잔은, 마음과 풍경을 제어합니다. 도시의 커피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만이 가진 영역입니다. 게다가 여기 월남의 차는 특별합니다. 18년의 유배 끝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 정약용에게, 강진의 제자들은 계(契)를 맺어 해마다 잊지 않고 차를 올려보내기로 합니다. 이게 ‘다신계(茶信契)’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생각하며 이른 봄 찻잎 새순으로 차를 만들어 올려보냈고, 스승은 그 차를 마시며 강진의 자연과 두고 온 제자를 생각했겠지요.

다신계의 약속은 다산이 죽고 난 뒤에도 후손과 후손을 이어가며 100년 넘게 이어집니다. 그렇게 144년 동안 4대를 이어가며 빚어온 차가, 강진의 월남에 있습니다. 다산의 제자들이 정성껏 만들었던, 다산이 강진을 그리며 마셨던 바로 그 차입니다. 스승이 죽고 제자가 죽은 뒤에도 지켜진 다신계의 약속도 감동적이었지만, 제자가 스승에게 보내준 차의 실물이 드러나게 되기까지 우연과 우연이 덧대어진 추리소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그야말로 흥미진진합니다. 다음은 월출산 아래서 대를 이어가며 차를 덖고 있는 후손의 안내로 옛 절터와 전통 정원, 대숲과 차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디뎌 가며 ‘차 소풍’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다산의 차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훌륭한 내러티브와 그 내러티브에 버금가는 향을 지닌 차가 있습니다.

# 월출산 아래에서 즐기는 ‘차 소풍’

월출산의 남쪽, 그러니까 강진 월남리 일대는 온통 차밭이다. 산 아래 능선에는 오설록이 경작하는 10만 평의 거대한 차밭 이랑이 구릉을 넘어간다. 오설록이 1982년 이곳을 차밭으로 조성했던 건, ‘명차(名茶)’가 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월출산 아래는 국내 최대 야생차 군락지다. 큰 일교차와 강한 햇볕을 막아주는 맑은 안개로 명차 재배지의 지리적 특성을 고루 갖췄다. 차밭 조성 전부터 월출산 자락 곳곳에는 천 년 넘게 자생하는 야생차밭이 있었고, 그 찻잎을 따서 만든 훌륭한 차가 있었다.

월남리의 차밭 아래에는 ‘이한영차문화원’이 있다. 월출산의 야생 찻잎으로 잎차와 덩어리차를 만드는 곳이다. 차문화원이 이름으로 내건 ‘이한영’이 누구인지, 그리고 여기서 어떤 차를 만들고, 그 차가 왜 특별한지는 뒤에서 말하기로 하자. 그 이야기를 하자면 한 가문의 5대에 걸친 길고 유장한 이야기가 딸려 올라오니까.

이한영차문화원은 차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차를 마실 수 있는 현대식 카페 ‘백운차실’과 월출산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한옥 공간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차를 빚는 이현정(49) 원장은 올봄에도 야생차를 따서 덖고, 발효차를 만드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때라 그랬을까. 이 원장은 ‘차 소풍’을 권했다.

여행자에게는 월출산의 암릉이 올려다보이는 백운차실에서 마시는 차 한잔만으로도 더없이 근사한 경험이다. 그런데 야외 공간에서 차 소풍을 하면서 느낀 풍류와 즐거움은, 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월출산의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지는 자리에 서 있는 전남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차 소풍’ 길에 들르는 곳이다.


# 찻잔을 놓고 앉으면 달라지는 풍경

차 소풍이란 이 원장이 만든 코스를 따라 월출산 아래 월남리 일대 숨은 명소를 걸으며 근사한 공간에서 차를 마시는 체험이다. 주말과 휴일에 지인들과 산책처럼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동행 요청이 많아 사전 예약을 받아서 소풍을 진행하고 있다.

유년시절을 여기 월남리에서 보낸 이 원장은 찻잎을 따러 월출산 자락을 드나들며 익힌 길 중 가장 좋은 길을 바느질하듯 이어서 차 소풍 코스를 만들었다.

소풍은 근사하다. 차밭 이랑을 끼고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고, 대숲 터널 안쪽에 비밀처럼 숨겨진 소류지를 찾아가고, 다산 정약용이 딱 하루 묵은 뒤에 그 정취에 반해 시첩을 남긴 백운동 정원도 들른다. 월출산의 암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월남사지 삼층석탑 아래서, 또 백운동 정원의 정자에 앉아서 우려낸 차를 맛본다.

소풍 내내 펼쳐지는 주변 풍경은 그냥 봐도 탄성이 나올 만큼 빼어났지만, 찻잔을 앞에 놓고 보는 즐거움은 또 새로웠다. ‘걸으며 서서’ 보는 풍경보다, ‘멈추고 앉아’ 찬찬히 보는 풍경이 스무 배쯤 더 좋았다. 월출산 자락의 뻐꾸기 소리가 자꾸 끼어들고, 은은한 차향까지 겹쳐지니 신선이라도 된 듯했다.

이런 귀하고 소중한 경험을 강진에 간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굳이 차 소풍에 동행하지 않아도, 작은 보온병과 간단한 다구만 챙긴 뒤 차를 사서 그냥 다니면 된다. 이한영차문화원에서는 여러 종류의 차를 만든다. 우선 녹차 종류로는 ‘백운옥판차’와 ‘옥판차’가 있다. ‘월산차’는 홍차와 떡차, 청차와 백차로 나뉜다. 해당화나 금잔화, 연잎과 재스민, 금목서 등을 넣어 만든 떡차나 티백 차도 있다. 차 소풍에는 월산차 중 떡차가 최적이다. 휴대도 편하고 간편하게 차를 우릴 수 있다.


월출산 아래 백운동원림 안에 있는 월출산 옥판봉이 올려다보이는 정자. 백운동은 유배가 끝나고 돌아간 다산 정약용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주며 인연을 이었던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 이시헌 집안의 별서(별장)였다. 차 소풍을 가면 이 정자에서 차를 마신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명차 ‘백운옥판차’

이제 미뤄뒀던 이야기. 이한영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한영차문화원에서 만드는 차가 무엇이 특별한지, 백운차실에서 차를 어떤 마음으로 마셔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걸 설명하자면 두 개의 ‘결정적인 장면’부터 말해야 한다.

첫 장면의 시간 배경은 일제강점기이던 1938년 가을이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농무관으로 일하던 일본인 임업 기사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 그가 광주의 전남여고(당시 아사히 고등여학교) 교실에 들어와 덩어리로 된 발효차인 ‘떡차’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 본 사람?” 여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우리 집에 그거 있는데요.” 강진군 목리에서 정미소를 크게 하던 부잣집 딸, 열여섯 살 유종현이었다. 겨울방학 때 집으로 돌아간 여학생은 개학하자마자 집에서 보관하던 떡차를 가져다 일본인 교사에게 제출했다.

이듬해 2월. 교사로부터 떡차를 받아든 이에이리는 곧바로 강진으로 내려갔다. 강진에서 정미소를 크게 하던 손꼽히는 거부였던 여학생의 아버지 유재의를 만나 보관하고 있던 떡차를 구경했다. 이것저것 물은 뒤 사진까지 찍고 돌아가려 했을 때 유재의가 ‘진기한 차가 있다’며 장롱에서 차 꾸러미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꾸러미 앞면에는 녹색으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라 찍혀 있었다. 이에이리는 깜짝 놀랐다. 상등품의 작설차였다.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사람이 팔러 온 것을 사들인 것’이라고 했다.

이에이리는 그날의 감회를 이렇게 적어 남겼다. “이 차를 팔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이 차를 만드는 사람도 있으리라.…이 차에 관해서는 뭔가 깊은 것이 있을까 생각되어 성전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의 짐작은 맞았다. 백운옥판차에는 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깊은 감동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 ‘금릉월산차’, 그 이름이 튀어나오다

이에이리는 그해 7월에 다시 강진군 성전면을 찾았다. 백운옥판차를 팔러온 이가 이 마을 사람이었으니, 차를 만드는 이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도 수배의 시작은 학교였다. 성전소학교를 찾아간 그는 백운옥판차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이거 본 사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의 숙부가 만드시는 건데요.”

이에이리는 그렇게 백운옥판차를 만들던 이한영을 찾아가 만났다. 당시 나이 일흔한 살. 이한영은 병중이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백운옥판차를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유통하는지, 어떻게 우려 마시는지를 상세히 일러줬다.

백운옥판차의 내력을 설명하던 이한영이 낯선 차 이름을 댔다. 백운옥판차가 과거에는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였다는 얘기였다. 포장지에 금릉월산차 상표를 목판 도장으로 찍었는데, 도장을 영암 사람이 빌려갔다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내친김에 아예 상표를 바꿔 백운옥판차란 목판도장을 다시 만들어 그때부터 백운옥판차로 팔았다는 얘기였다.

이한영은 “금릉월산차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는다”고 덧붙였는데, 통역이 잘못됐는지 이에이리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적었다. ‘일흔한 살 노인이 어떻게 100년 전에 차를 만들 수 있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대를 이어 차를 만들어왔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에이리가 가벼운 에피소드처럼 기록해놓은 ‘금릉월산차’란 차명(茶名)은, 그 차의 내력과 역사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됐다.


# 일제는 왜 조선의 차를 찾아 나섰나

여기까지 이야기가 이에이리가 의사 모로오카 다모쓰(諸岡存)와 함께 쓴 1940년 10월 출간된 책 ‘조선의 차(茶)와 선(禪)’에 나온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의 떡차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차 문화는 우리를 훨씬 앞섰다. 지금의 내로라하는 차밭도 일제강점기 일제가 일군 것이 대부분이다. 보성에 대단위 차밭을 조성한 것도, 무등산에 삼애다원을 만든 것도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잎차와 가루차만 있었고, 덩어리차인 ‘떡차’는 없었다. 본래 떡차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그 무렵은 중국에서도 떡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흔히 떡차라 부르는 ‘단차(團茶)’는 중국 송나라 때 크게 유행했는데, 귀족들의 향락 풍조가 만연하면서 극도의 사치품이 됐다.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손으로 잎이 나기 전에 딴 움으로 덖어서, 시집 안 간 처녀가 가슴에 품었다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비결이 횡행했다. 누가 더 거품이 잘 나게 차를 타는지를 놓고 돈을 거는 노름도 성행했다.

향락과 사치의 폐해가 확산하자 ‘흙수저’ 출신인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단차 폐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덩이차를 먹지 말라는 추상같은 명령에 중국에서 떡차가 사라졌다. 일본에는 떡차가 아예 전해지지 않았으니, 떡차는 우리 땅에만 남아있던 것이었다.



# 전설의 차가 정체를 드러내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떡차에 관심을 가진 건 전쟁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가장 큰 고민은 수인성 전염병이었다. 병사들이 오염된 물을 먹고 병에 걸리거나 물을 갈아먹고 배탈이 나는 일이 허다했다. 해결 방법으로 검토된 게 차였다. 그런데 가루차나 잎차는 휴대도 불편하고, 우려내는 것도 번거로웠다. 대안이 떡차였다. 휴대하기 좋기도 하고, 오래 우려먹을 수도 있었다. 일제가 떡차를 찾아다닌 이유다.

일제강점기 발간된 책 ‘조선의 차와 선’은 떡차는 아니지만, 강진에서 잎차인 백운옥판차와 그 전신인 금릉월산차를 발굴해냈다. 그런데 이한영의 입에서 나온 금릉월산차란 이름은 이보다 앞서 전혀 다른 책에서 나왔었다.

이번에도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지은 책이다. ‘조선의 차와 선’이 출판되기 8년쯤 전인 1932년. 일본인 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잡고(雜攷)’란 책을 펴냈다. 책에 ‘조선의 차에 대하여’란 글이 있다. 글의 내용인즉 이렇다.

차에 관심 많던 저자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조사하기 위해 경기 남양주 다산의 고택 여유당을 방문했다가 다산의 고손자 정규영을 만나 차를 대접받았다.

차를 내온 정규영은 “다산의 후학들이 다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매년 차를 보내온다”면서 ‘금릉월산차’란 상품도장이 찍힌 차를 보여줬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서도, 세상을 뜬 뒤에도, 제자들이 대를 이어 다산의 고손자 대에까지 해마다 차를 덖어 보내준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이로써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스승 다산을 위해 열여덟 제자가 맺었다는 ‘다신계(茶信契)’의 약속이 오래 지켜졌음이 확인됐다. 약속은 제자들이 해마다 스승 다산에게 차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는데, 이날 만남에서 제자가 보낸 차가 ‘금릉월산차’였음이 처음 확인된 것이었다.

이한영이 백운옥판차를 만들기 전에 만들었다는 그 금릉월산차 말이다. 금릉월산차는 백운옥판차가 됐다. 그리고 그 차는 지금까지 월출산 아래 월남마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 다산이 받아든 차의 맛은 어땠을까

이제 다시 차 소풍 얘기로 돌아가자. 이한영차문화원은 금릉월산차를 만들었던 이한영을 기려 만든 공간이다. 짐작하다시피 이한영차문화원의 이 원장은 대를 이어 차를 빚고 있는 이한영의 고손자다.

늘 차를 대하며 자랐으면서도 차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불어 교사로 일하다가 주변의 거듭된 권유로 뒤늦게 차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공부에 박사학위까지 따고서 그는 월출산 아래서 가업을 이어 차를 만들고 있다.

해마다 이 원장이 월출산 야생 찻잎으로 만드는 백운옥판차와 월산차의 뿌리는, 다산의 제자들이 해마다 다산에게 보냈던 금릉월산차다.

스승은 힘든 시절에 만난 제자를 진심으로 가르쳤고,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평생 실천했음을 금릉월산차는 증거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진심을 다해 스승을 위한 차를 빚었고, 그 후손의 후손의 후손이 여태 차를 빚고 있음을 백운옥판차가 증거한다.

제자가 다산에게 보내준 차의 맛은 과연 어땠을까. 그건 할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이어져 온 제다(製茶)법을 이어받은 이 원장이 백운차실에서, 혹은 차 소풍에서 내놓는 차의 맛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덧붙이는 이야기. 자신의 집에 떡차가 있다고 손을 든 여학생 유종현의 집이 강진군 목리에 여태 그대로 남아있다. 그 여학생이 아니었더라면 백운옥판차도, 금릉월산차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우연일까. 공교롭게 그 집이 찻집이 됐다. 전통차 말고 커피를 팔지만 말이다. 여학생 유종현은 영암으로 시집갔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택은 여학생의 오빠가 줄곧 지켜오다가, 화가인 오빠의 증손자 며느리가 고택을 사들여서 커피숍과 갤러리를 냈고, 방 몇 개는 펜션으로도 내주고 있다. 내로라하는 부잣집답게 한옥 건물도 당당하고 정원도 잘 가꿔져 있으며 커피숍도 운치가 있다.

또 한 곳. 강진군 군동면 보은산 자락의 절집 금곡사 뒤편 원시림의 깊은 숲속에 수령 200년은 족히 됐을 듯한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 오래된 차나무를 ‘고차수(古茶樹)’라 부른다. 금곡사의 고차수는 강진의 차 동호인들이 발견한 것. 강진에는 차 동호인들이 야생차를 따서 손수 덖어 차를 만든다. 강진 차의 전통은 이렇게도 이어지고 있다.

■ 차향 못지않은 나무의 향기

강진군 성전면 송학마을에 귀기 넘치는 향나무가 있다. 수령 700년이 넘는 노거수다. 높이 5m에 직경 1.5m 정도로 압도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지만, 죽은 둥치를 감아가며 온몸을 뒤틀고 자란 모습에서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20년 전쯤 한 조경업자가 이 나무 값으로 2억3000만 원을 불렀다. 나무 주인은 처음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하루 자고 나서 마음이 바뀌어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 그 돈 없어도 살지만, 나무 뽑힌 자리를 보면서는 못 살 것 같았다던 나무 주인 김홍순 씨는 9년 전 일흔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