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장흥 제암산 철쭉

醉月 2012. 6. 23. 06:55

붉은 철쭉 주단, 능선 전체에 깔아둔 듯

곰재~곰재산~사자산 미봉에 걸친 6만여 평 철쭉화원

 

아슴하니 먼 산들이 몸을 눕히고 있다. 나른한 봄기운 탓이다. 중천의 햇살은 이미 여름을 예고하고 있다. 해서, 남도 장흥의 산들은 희뿌연 이내 속에 낮게 잦아들고 있다. 이렇듯 주변 산들이 몸을 낮춘 탓에 제암산~사자산릉은 더더욱 형상이 두드러진다. 하긴, 이름이 이미 제왕 제자를 쓴 제암(帝岩)이고 맹수의 왕 사자(獅子) 아니던가. 두 산이 어깨를 겨누고 내뵈는 사뭇 웅장하기까지 한 기운은 주변 산들을 완벽히 제압하고 있다.

 

조물주는 간혹 심히 불공평한 것이, 이렇듯 두드러진 용모를 가진 산릉에 아름다운 장식까지도 얹어주었다. 철쭉, 그것이 산릉 곳곳에 무리 지어 마치 화관(花冠)인양 만발하는 것이다. 봄이면 제암산~사자산릉이 마치 뭇산의 제왕인듯 이름이 회자되는 이유다.


▲ 철쭉이 만발한 산릉을 걷고 있는 사람들. 제암산 철쭉제와 만개시기는 다르므로 사전에 알아보고 출발한다.
제암~사자산릉의 철쭉 풍광이 절정을 이루는 때를 맞추어 남도길에 나섰다. 장흥 토박이 산꾼인 이영돈씨가 진한 남도 억양으로 “딱 그날이 철쭉제날이니 염려 말고 오시요” 했던 날인 5월 5일 어린이날, 오랜만에 만발한 철쭉꽃밭 가운데 서게 된다는 기대에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제암산행 기점을 향했다. 제암산 철쭉제가 올해로 이미 22회째이니, 철쭉 풍광지로는 그만큼 명성이 높다.

 

제암산과 사자산 능선은 곰재라는 고갯마루에서 어깨를 맞댄다. 제암산이 해발 807m, 사자산이 668m이고 그 사이의 곰재는 530m로 움푹 팬 듯하여, 이 곰재로 오르는 것이 제암~사자 능선으로 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 곰재 동쪽의 제암산자연휴양림과 서쪽 해당리 신기마을이 제암~사자산 철쭉 탐승의 주요 두 기점이 된다.

▲ 제암산~사자산 능선에 설치된 목재 조망대.
제암산~사자산 능선에서 철쭉 군락이 가장 넓게 형성된 곳은 곰재 남쪽 곰재산부터 사자산 미봉(尾峰)까지의 능선 일대다. 이영돈씨는 철쭉꽃밭의 분포가 이러한즉 우정 제암산 정상 밟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 신기마을의 주차장에서 왼쪽 장흥공설공원묘지 옆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숲길로 접어든다.

 

저 위, 고개를 꺾어 바라봐야 하고 중간에 암회색 바위절벽도 드러낸 제암산 정상으로 곧장 치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도중의 갈림길목에서 이영돈씨는 오른쪽 가로지름길을 택한다. 호젓하고 사람도 매우 드문 편안한 숲길이다. 담쟁이덩굴들이 그물처럼 뒤덮고 있는 너덜겅도 지나더니 곰재 바로 아래의 널찍한 주등산로로 나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곰재를 향해 발길을 서둘고 있다. 아직 이른 시간이건만 화려한 철쭉 꽃밭 가운데 얼른 서고픈 조바심을 누르기 어려운 것이다. 

 

고갯마루마다 얼음과자 파는 행상들

 

곰재 마루에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얼음과자를 꽉 채운 행상이 이미 올라와 있다. 이영돈씨는 여기는 앉아 쉬기엔 장소가 좁다며 사자산 쪽으로 몇 걸음 오른다. 거기 그늘이 진 평평한 숲속 쉼터가 있다. 제법 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는 안성맞춤이다.

 

오래 머물지도 않았는데 마치 진군하듯 사람들이 몰려올라오기 시작한다. 우리도 간식 보따리를 서둘러 챙기고 같이 그들 속으로 섞여든다. 오늘이 철쭉제 첫날이건만, 아쉽게도 개화는 좀 늦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태반은 만개한 상태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주변 꽃밭에 머물며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사람들은 제암산의 우람한 덩치가 한눈에 조망되는 곰재산(627m) 정상의 널찍한 조망바위에 올라 또한 한동안 시간을 잊는다. 여기서 신기마을 주차장으로 이어진 길이 한 가닥 나 있고, 인파를 피해 이 길로 올라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망경굴도, 요강바위도 중간에 있으니 걷는 재미도 괜찮은 길일 것이다.

▲ 1 제암산~사자산 능선에는 이와 같은 바위들이 서서 조망대 역할을 해준다. / 2 제암산행시 숙소로 최고인 장흥 우드랜드의 삼나무 숲과 황토방집.
진정한 철쭉군락 감상은 이곳 곰재산정부터다. 아래 곰재 방향으로 철쭉꽃밭이 넓고 길쭉한 분홍의 띠처럼 깔렸고, 저 위로도 철쭉꽃밭은 넓은 화원을 이루었다. 산릉이 아니라 넓고 긴 평원 같은 느낌으로 펼쳐진다. 거기에 붉은 철쭉이 가득 차 있다. 이래서 제암산 철쭉이 팔도에 유명한 것이다. 산행로 곳곳에는 크고 작은 암괴들이 조망대로 놓여 있어 간간이 철쭉화원 전체 조망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산의 크기와 산릉의 생김, 철쭉밭의 분포 등에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철쭉 명산이다. 사자산 쪽에 꽃밭이 몰려 있음에도 제암산 철쭉제라 하는 이유는 제암산이 해발 806m로 훨씬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꽃밭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제 빨리 걷지 않는다. 능선 서쪽에 네모나고 턱이 진 큼직한 바윗덩이 위에도 몇 사람이 올라앉아 산록을 채운 꽃이며 싱싱한 신록을 즐기고 있다. 실은 꽃보다 신록이 더 감동스럽다며 중년의 동행인들은 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한다. 과거엔 철쭉밭 속에 잡목이나 덩굴이 많았으나 그간 매년 잡목을 제거해 이제는 철쭉과 잘 생긴 소나무들만 남았다.

 

630m봉 정상에는 제암산~사자산 등산로와 철쭉밭 위치를 표시한 커다란 검은 바위판석 안내판도 설치해 두었다. 길은 넓고 뚜렷하며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안개가 짙게 낀다고 해도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는 산이다.

 

간재 지나 사자산 미봉까지의 능선에도 막 피어나기 시작한 철쭉의 기운으로 불그스레하다. 길을 따라 가다가 도중에 오른쪽으로 빠져 돌출한 암부 위에 올라본다. 저 아래 철쭉밭 사이로 사자산 미봉을 향해 사람들이 열을 길게 짓고 있다. 제암산 철쭉산행은 이렇듯 북쪽 곰재에서 남쪽 미봉으로 방향이 정석화된 것 같다.

▲ 제암산 철쭉 풍치를 탐하고 있는 탐승객들. 주변 산들이 낮아서 제암산은 주변 조망도 광활하다.
사자산 미봉~두봉 간 능선에도 철쭉 군락

 

간재에도 곰재처럼 얼음과자며 캔맥주를 파는 행상이 올라와 있다. 간재에서 사람들은 태반이 다시 원점인 신기마을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고, 일부 사람들만 계속 능선을 따라 발길을 잇는다.

 

가파른 밧줄 구간을 지나 사자산 꼬리봉 정상으로 향한다. 저 앞의 미봉 능선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길게 늘어섰다. 우리도 그들처럼 미봉 정상으로 올라 실루엣으로 선다. 미봉 정상은 널찍하고 여기저기 쉴 만한 데가 있어 사람들이 자리잡고 앉아 도시락을 펼쳤다. 서늘한 미풍이 불어오는 산정 주위에는 철쭉꽃이 무리지어 피었고, 남쪽 저 멀리 남해바다가 아득하니, 편히 앉아 점심을 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봉 정상에서 점심 들기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발길을 되돌린다. 이들도 대부분은 간재로 하여 원점으로 되내려가는 코스를 택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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