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유성문_로드포엠

醉月 2011. 2. 14. 08:50

11월의 끝에서 부르는 바보의 사랑노래

삼봉에 이르는 법

어머니의 어머니는 종이었다. 그 지애비는 파계승이었고. 성(聖)은 깨어지고
성(性)만이 대를 이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딸은 길 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자수성가로 세월을 보내고 뜬구름 같은 포부로 세상을 걸어온 사람.
지치고 버거운 하룻밤의 유숙(留宿)은 또다른 길로 이어졌다. 정가여,
삼봉의 신새벽은 처연하다. 배 저을수록 길 지워지니 이젠
돌아갈 수도 없다. 다만 아침이 오기까지 물 위에 뜬 그림자
그토록 오랜 기다림으로 설레어 흩어진다.
- 도담삼봉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어렵게 벼슬아치가 된 후 한 관상쟁이로부터 10년 뒤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는 금강산에서 10년간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단양 삼봉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 묵게 되었다.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나니 그녀의 아버지는 승려의 몸으로 자신이 거느리던 종의 아내와 간통하여 그녀를 낳았다. 그녀 역시 뜨내기 같은 만남 끝에 한 아이를 얻으니 이름하여 도전(道傳)이었다. 어쩌랴. 정도전이 태어난 단양 매포 도전리(道傳里)는 그가 이성계의 혁명에 가담하여 새 세상을 열었으나 그 아들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한 후 이름마저 도전리(道田里)가 되었다.

On road

중앙고속도로 북단양IC - 5번국도 - 도담삼봉|새벽 물안개 / 석문|마고할미와 선인옥답의 전설 - 단양 - 59번국도 - 향산 - 595번지방도 - 구인사|
천태종 총본산 - 온달산성|온달동굴 - 영풍 - 북벽|남한강변의 석벽 병풍 - 영월 하동 - 민화박물관|조선 민화 전시 - 김삿갓묘|난고 김삿갓 문학관


도담에 잠긴 삼봉

1985년 충주댐이 들어서면서 ‘단양팔경’의 수려함을 자랑하던 단양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옥순봉과 구담봉은 아랫도리가 물에 잠긴 채 겨우 뱃길로 온 손님에게나 얼굴을 내밀어줄 뿐이고, 도담삼봉 역시 옛 정취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도담삼봉과 석문은 이제는 과거를 회상하는 이의 드문드문한 발걸음이나 붙잡는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한가로이 소요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곳에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풍운아 정도전의 자취가 서려 있으며, 여전히 단양의 관문 구실을 하는 것이어서 단양 답사의 일번지가 된다. 지나간 역사의 소회 따위는 잊어버릴지언정 도담에 가서 하릴없이 물그림자놀이에라도 빠져보라. 삼봉은 거꾸로 매달려 있고 물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그대 가슴으로 내려앉을 것이니.

바보 온달, 산에 오르다

충주호가 남한강변 마을의 풍광을 변모시키면서 퇴색해가던 단양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켜준 것은 단연 ‘바보 온달’의 숨은 공로였다. 온달산성으로 불리는 석축산성의 산자락에 위치한 온달국민관광지는 나라 곳곳에 들어선 여느 관광단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데도 유달리 정감이 가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온달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소박한 매력 때문이다. 갸륵하게도 이곳에 설치된 조형물들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어서 소박하지만 유니크하다. 각설하고 이곳을 찾는 이는 꼭 산정까지 올라보길 바란다. 발아래 펼쳐지는 남한강과 소백산의 서늘한 풍광은 쉬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허허로운 산정에서 혹여 천진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사랑노래라도 부르다 보면 어느새 눈시울은 따뜻하게 젖어오고, 마음은 산밑에 있을 평강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해진다.

김삿갓, 그 고단한 삶의 끝을 찾아서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다 간 김삿갓의 묘소에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은 제법 그럴싸한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삿갓은 해학과 풍자로 세상을 떠돌던 방랑시인이었다. 그의 파격과 직설은 점잔떨기에 매달려온 양반문화사에 대한 통렬한 반격이다.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오느냐

모든 이단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철저하게 고독하고 곡절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고단한 삶은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이어서, 화순 적벽 아래 숨을 거둔 후 이곳 노루목의 좁고 깊은 계곡에 눕기까지도 고행은 계속됐다고 한다. 어쨌거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길의 끝에서 방랑의 대선배에게 바치는 헌작(獻酌)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 삶은 고단하지만 길이 있어 외롭진 않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 - 간월도|무학대사의 오도섬, 간월암 / 어리굴젓 - 천수만|철새도래지 - 백사장|대하 - 꽃지|할미·할아비바위 낙조 - 안면도자연휴양림|안면송 - 바람아래 - 패총박물관 - 영목|안면도 유람선

바람 아래 눕다

바람은 저리도 눈부신 걸
바다 아래 누워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세상은 정처 없어 외로움으로만 떠돌고
머물러야 할 어느 순간에도
나는 떠나버린 사랑만을 그리워했다
바람은 자꾸만 발밑을 적셔도
바다는 얼마나 귀 시려운가
겨울은 그렇게 빛으로 뒤척이는데
문득 섬이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 안면도 바람아래해수욕장 -


천수만에는 온갖 것들이 모여 산다. 아직 남쪽으로 떠나지 않는 철새들과, 어린 굴들과, 새조개며 대하, 돌아가신 왕회장님이 남겨놓으신 나락 부스러기들과, 학의 날개깃 밑에 목숨을 부지한 어느 대사에게 깨달음을 던져주었던 달빛까지. 바다인 듯도 하고 바다가 아닌 듯도 하고, 갯들인 듯도 하고 갯들 아닌 듯도 한 이곳에 이처럼 많은 것들이 기대 산다.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 이 세상에서 떼어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세계 최대의 철새도래지라는 천수만은 어느덧 ‘철새기행전’도 끝나고 많은 무리들이 더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버린 탓도 있겠지만, 남은 새들의 날개짓조차 어쩐지 쓸쓸하고 시들하기만 하다. 근자의 조류독감 공포는 힘없이 비끼어나는 새들의 행렬마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한다.

천수만의 새들이 AI 바이러스로 우는 사이, 안면도 소나무들은 재선충으로 떤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뭍이었다가 섬이 되고, 섬이었다가 뭍이 된 태안곶(안면도의 옛이름)의 역사처럼 안면도 소나무들의 내력 또한 기구하다. 조선시대 때 ‘황월장봉산(黃月長封山)’이라 하여 왕실의 관을 짜는 데 쓰였던 안면송(安眠松)들은 일제시대 때 이르러 수탈의 표적이 된다. 보기에도 시원하게 쭉쭉 뻗은 안면도의 소나무들에게 할복으로 송진을 뽑아내고 톱을 대 광산 갱목을 만들도록 한 장본인은 아소 다로(현 일본 외상)인가 하는 망언전문가의 할애비다. 헐값으로 안면도를 사들인 아소광업의 아소 다키치는 ‘이름 그대로 편하게 잠잘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의 아소왕국 건설’을 꿈꾸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그나마 어렵게 살아남은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이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재선충의 공포에 떨고 있다. 어느 길을 가든 항상 그윽한 우리 소나무들은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가. 소나무 없는 강토를 상상하는 것은 죽기보다 끔찍한 일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황사에 구제역에 재선충에 조류독감에 녹조에 적조에 길이란 길들은 온통 몸살을 앓는다. 겨울바다의 햇살은 찬란했지만 길 없이도 길을 가는 새들의 귀소조차 힘겨우니, 무참한 나는 다시 천수만을 되짚어 새조개 한 점에 소주 한잔으로 시름이나 달랠 겸 남당항의 노을 속으로 사라지련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동두천 가는 길

내 비록 길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지만
길에서 죽은 넋을 만나는 것은 가장 서럽다
누이여, 죽음의 아스팔트 가까이
물푸레나무 한 그루 서 있단다
장갑차 훈련장으로 갇혀버린 이 오래된 나무는
그래서 가장 천연기념물다운데
군복색 잎들을 모두 벗어버린 나무 아래서
나는 잠시 갈피를 잃는다
이놈을 회초리 삼아야 할지 도끼자루로 써야 할지
나를 매 때리고 기어 서슬푸른 도끼날로 동두천까지 달려가야 할지
눈물로 푸른 나무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위의 나는
보산동 그 쓸쓸한 기지촌 곁에 힘없이 누워버린다

- 효순·미선 사고지 -



On road

의정부 - 광적 - 필룩스 조명박물관(www.feelux.com)|
그곳에 ‘빛’이 있다 - 효순·미선 사고지 - 동두천 - 소요산|
자유수호평화박물관/자재암 - 한탄강|전곡리 선사유적지



동두천에서 멎고 한탄강으로 흐르다

2004년 5월 24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용남씨는 효순·미선 추모비 앞에서 제초제와 소주 2병을 섞어 마시고 중태에 빠졌다.
“재산세는 농민이 내고 사용은 미군이 하는 초헌법적인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애꿎은 농민의 땅을 거저 챙기고 이에 항의하면 친북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보수세력과 일부 언론이 웃긴다. …나는 두 눈 부릅뜨고 효순·미선이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나는 피지도 못한 채 져버린 어린 넋들 앞에서, 그를 기록했던 한 사진작가의 음독현장에서 제초제는 빼고 소주 2병만 마셨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 번쩍이는 신호등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 김명인 <동두천 I>

그래, 여기는 동두천이다. 23살의 김명인 선생은 이곳에서 ‘하빠리’ 자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이 없던 여학생’들은 그를 막막하게 했지만, 그에게서 국어를 배우지 못한 나는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을 지껄여댈 뿐이다. 그의 제자였을 법한 누이들은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 쯤으로 떠돌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면 그래도 고향이라고 동두천으로 돌아와, 더러는 그토록 소중하면서도 부질없는 자궁 속에 이물질이 박힌 채 죽기도 했다는 것인데…. 나는 여직 보산동 그 숱한 영어 간판들은 그렇다고 치고 드문드문한 모국어조차도 도무지 해독할 길이 없다.

소요산에서 원효는 요석공주와 도피행각을 벌였다. 그가 소요 끝에 자재하기까지 어린 설총은 산 밑 별궁터에서 자라났다. 보산동 누이들과는 달리 그때 파계의 도반은 그래도 VIP라고 별궁까지 지었던 모양이다. 갈지자로 비틀거리는 심사는 잠시 이두문자라도 빌어 풀어내야 했을 것인데, 그조차 한탄강 그 찬 여울 앞에서 막혀버린다. 부하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는 한탄강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외눈박이에게 걸었던 민중의 꿈은 그렇게 눈물이 되어 긴 한탄으로 숨죽여 흐른다.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갈잎의 노래를 들어라

서걱이는 안개에 귀대어 보면
바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흔들리면서도 내가 사랑을 놓지 않는 이유는
뻘의 그 강인한 흡인력 때문이다
상처조차 빨아들이는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안개는 자꾸만 내 발치를 무너뜨리고
나는 마침내 길을 잃었다
- 순천만 대대포 -




On road

호남고속도로 서순천IC - 순천 - 대대포|순천만 갈대밭 - 863번지방도- 화양반도 - 백야도|일몰 - 여수 - 돌산대교 - 돌산|갓김치- 향일암|일출 - 방죽포 - 무슬목|고니 - 오동도|동백림 - 만성리|검은 모래 - 흥국사|홍교와 단청


백야에서 지고 임포에서 뜨다

누가 김승옥을 잊을 수 있을까. 1960년대 홀연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었던 작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의 복판에서 사라져 세상 밖을 떠돌던 작가. ‘서울의 달빛 0장’인가, 척척한 욕망을 들쑤시더니 죽음 문턱에서 구세주를 만나고 이번에는 실어증으로 말문을 잃게 만드는 작가. 그러면서도 여전히 말로써 우리를 사로잡는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 때문에 순천은 무진이 되었다. 무진의 안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 이번에는 갈대가 순천만을 점령한다. 해로도 바람으로도 헤칠 수 없는 갈대는 더욱 무참하다. 기껏 통통배 몇 척으로 사람들은 갈대숲을 헤쳐 보지만 무위의 새들은 고즈넉이 세상 밖으로 날아간다. 그 적막이 힘에 겨운 나는 쫓기듯 화양반도를 내달린다.

여수반도는 제 사타구니를 사이에 두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다. 서쪽의 화양반도와 동쪽의 돌산도가 그것이다. 항시 그렇듯 동쪽의 화려함에 비해 서쪽은 덧없이 쓸쓸하다. 와온이니 벌구니 온통 해거름의 장소투성이고, 그 끝은 이름마저 현기증 나는 백야도다. 길 끝에 서면 백야수도 건너 제도, 제리수도 건너 개도… 또 그렇게 이어지지만 나는 이쯤 백야에서 지기로 한다. 적인지 흑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바다로 해는 내려앉는데 문득, 금시조 한 마리 어둑한 백야의 하늘을 박차고 오른다.

임포에서의 하룻밤은 어수선했지만 다행히 지난 몽정의 밤을 지우기라도 하듯 향일암에 해가 뜨고 있었다. 나는 바다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지 않았다. 어디선가 유숙의 밤을 지새웠을 연인들의 낯빛에서 해를 보았다. 숨기지 않는, 숨을 필요가 없는 사랑은 아름답다. 그들은 이제 방죽포로, 무슬목으로, 오동도로, 만성리로 여수반도의 동쪽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청춘을 구가하리라. 슬며시 옷깃을 여미는데, 어디선가 ‘무진기행’의 하인숙 선생이 불렀던 ‘어떤 개인 날’의 그렇고 그런 음조가 들리는 듯했다.
 
 빛과 소금의 길

소·금·바·다
빛이 그리워 바다는 자꾸만 목이 말라
바람으로도 헤치지 못하는 그리움 때문에 바다는 타들어가고
눈이었을까, 눈이었겠지
오래된 시간은 그렇게 제 몸 밖으로 몸을 드러내 보이고
내리는 눈은, 눈은, 눈은
하염없이 세상 밖으로 흩날려가는데
눈물로 출렁이는 나는 그래도 자꾸만 빛만 바라봐
- 비금도 가는 길 -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종점 - 유달산|목포의 눈물 - 목포여객터미널 - 다이아몬드제도(안좌도|수화 김환기 생가/암태도|소작쟁의사건 - 자은도|신비의 바닷길 - 장산도|장산들노래 - 하의도|후광 김대중 생가 - 비금도/도초도|염전지대) - 우이도|모래언덕


겨울이 깊어가는데 소금밭으로 가려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소란의 한복판에서 그래도 그리운 것은 빛이다. 다도해의 그 많은 섬 가운데 날개를 활짝 편 새를 닮은 비금도(飛禽島)는 소금섬이다. 비금도에서 빛은 소금이 된다. 물을 끌어올리는 수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나마 한여름에는 염부(鹽夫)들이 대파·소파(소금을 걸러내는 밀대)로 바다를 밀고 다닌다. 그 힘에 의해 바다는 평등해지고 마침내 시간은 결정으로 남는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 : 13>



염질이 끝난 겨울의 소금밭은 스산하게도 시간의 기억만 가득하다. 몸을 풀어버린 바다는 물비늘이거나 서걱이는 얼음이거나 눈이거나 아니면 염기를 빨아들인 뻘로라도 빛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하지만 상처에 닿는 염기는 다만 통증일 뿐이다. 그 통증이 비록 상처를 증발시킬지라도.

썰렁한 다리 하나를 건너 도초도를 달려보지만 여기서도 잔인한 시간의 기억들을 밟고 가야 한다. 마지막 남은 까치밥마저 떨구어버린 시목(柴木)해수욕장에 서면 멀리 우이군도의 섬들이 아련하다. 우이도의 모래등은 여전할까. 풀풀거리며 또 누군가의 귀에 대고 제 기억을 속삭이고 있을까. 나는 오래된 시간의 줄기세포 하나를 슬쩍 빛의 바다에 던져버렸다.

* 누군가 목포 앞바다에 떠있는 다도해의 섬들을 일러 ‘다이아몬드제도’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형 안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섬들을 그렇게 부른 것인데, ‘암태도 소작쟁의’ 하며 ‘하의도 농민운동’ 하며 ‘장산들노래’ 하며 그 섬들에 박힌 속내는 깊고 깊지만 섬과 섬 사이를 뛰노는 빛들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서라. 다이아몬드는 영롱하지만 그를 둘러싼 탐욕이 빚어낸 피의 역사를 두고 또 누군가는 ‘다이(die) 아몬드’라 부른다.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낙산 일출

잿더미 위의 일출은 얼마나 황홀한가
죽지 않는 자와 죽을 수 없는 자의 산을 넘어
빛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돌아온다 빛은
차갑게 식어버린 시간마저 무너뜨리며
녹슨 철조망마저 무찌르며
어둠을 타고 슬픔을 타고
오늘 그렇게 내일의 해가 떴다

- 낙산사 의상대 -



시인 고은이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제 ‘동해 낙산사!’는 감탄부가 아니라 탄식부로 ‘동해 낙산사!’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지었다는 이 천년 고찰은 고려 초 산불로 타고, 몽골의 침략으로 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타고, 6·25로 타고, 타고 타고 또 타고 마침내 올해 들어 식목일을 기념하여 탔다. 새까맣게 그을린 관음의 나무들, 종소리조차 녹아버려 이제 관음은 차마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띈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박두진 <해>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직 가시지 않은 연무로 희붐한 바다를 뚫고 해가 솟아오르자 관음의 장작더미들이 일제히 바다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앙상한 숯가지들은 손을 흔들어 ‘동해 낙산사!’라고 작약했다. 그랬다. 사람의 것들은 모두 타버렸지만 관음의 것들은 제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다. 새카만 둥치 밑으로 소생의 싹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버려야 했던 것들을 밀치고 빛쪽으로, 빛쪽으로 말갛고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더 감동스러운 일화도 있다. 강릉에서 40년 넘게 수공예로 악기를 제작하고 있는 임창호씨는 타다 남은 낙산사 대웅전의 대들보로 두 달간의 고된 작업 끝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만들어 절에 바쳤다. 관음의 도량이 그만하니 속세의 인심조차 감화의 길을 간다. 이제 됐다. 관음은 다시 보고 듣게 되었다.

속초의 바다는 죽은 배우 손창호의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행려병자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배우는 죽기 전 그토록 속초 바다를 간절히 그리워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 간절한 바다를 밀려왔다 스러지는 파도처럼 숱한 청춘들이 들고 난다. 생각해보면 소생하는 관음이거나 스러져간 배우거나 모두 순환의 섭리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빛을 기다린다. 세상이 어둡고 고단할수록.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무주여, 눈뿐이로구나

On road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IC - 무주 - 금강식당|어죽 - 적상산|사고(史庫)터 - 무주리조트|스키장 - 곤돌라 - 덕유산 향적봉|설국 - 무주구천동|백련사 - 무풍마을|무풍장 - 나제통문


길을 가되 즐기지 못하는 나는 무주리조트에서 잠시 어색하다. 오스트리아풍 리조트에 은빛 슬로프에 원색의 스키복들은 행려빈자(行旅貧者)의 기를 죽인다. 실크로드니 레이더스니 서역기행이니 프리웨이니 이름조차 설레는 슬로프에 까마득한 젊음들이 마구 깔깔거리고 내달리고 엎어지고 뒹구는데 하릴없는 나는 자꾸만 오금에 힘을 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요령을 피운답시고 향적봉까지 바투 올라가는 곤돌라에 편승하려던 얄팍함마저 길게 늘어선 행렬에 기가 죽어 꼬리를 내렸다.

할 수 없다. 나는 삼공리로 돌아들어 무주구천동 입구에서 아이젠의 끈을 조였다. 그 많던 구천동의 물들은, 물소리들은 이제 눈에 묻혀 고요하다. 더벅머리 시절 가슴을 에이던 물소리들조차 모두 잦아진 지금 나는 또 무슨 이유로 눈길을 가는가.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김수영 <눈>

그래도 그때는 다리힘이라도 살아 있었다. 인월담에서부터 구천폭포를 지나 단숨에 향적봉까지 이르면 이마엔 땀이 맺히고 발밑으론 산야가 아득했다. 쉴 틈도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알코올 버너에 불을 붙여 라면을 끓이면 뒤늦게 도착한 등반객들은 따끈한 라면보다 젊음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제 향적봉은 고사하고 백련사에서 다리 힘을 풀어버린 나는 가슴 가득 고인 가래마저 억지로 삼켜버렸다.

눈 쌓인 계곡처럼 눈 쌓인 산사도 고요하다. 한때 9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살아서 그 공양미를 씻는 쌀뜨물이 계곡을 하얗게 물들였다는 백련사는 그 전설 때문에 지금 더 나그네를 황망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그렇게 눈으로 놓여 있는 산사 역시 그런대로 괜찮다. 문득, 법당 문이 열리고 스님 한 분이 먼 길을 나선다. 스님은 허허로이 내가 애써 걸어온 길을 되짚어 가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안의는 불타고 있는가

서방님 전(前)

서방님, 행복했던 시절은 흩어지고 이승은 이리도 불에 타고 있습니다. 치욕마저 마다하지 않은 당신 사랑으로 나는 늘상 당당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앞에서 버티어주고 계시니 뒤란에서의 나의 삶은 윤기에 넘쳐 났지요. 윤가면 어떻고 허가면 또 어떻습니까. 기둥은 튼실하고 마루는 매끄러우니 시렁 위에 얹힌 애틋함이야 누가 짐작키나 하겠습니까. 짐짓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보는 당신의 허튼 기침은 부뚜막에 앉은 나에게 미소로 내려앉곤 했지요. 서방님, 하지만 이승은 저리도 불에 타고 저승마저도 그리움으로 목이 마르니 옛집 또한 그렇게 추억으로 힘없이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안의 허삼둘가옥

소리나 빛은 모두 외물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에 누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 것인가. - 박지원 ‘물’

On road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IC-거연정/군자정/동호정/농월정|화림동계곡의 정자들-안의|박시원사적비/허삼둘가옥-건계정/거열산성-거창|거창박물관-거창사건추모공원


연암 박지원은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귀와 눈만을 믿는 자’에 대한 경계의 말도 아끼지 않았는데, ‘치명적인 병’을 무릅쓰고라도 길을 가야 했던 나는 그나마 물소리가 가장 요란할 때 물 많은 고장을 가지 않는 금기 정도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함양 안의도 그렇게 물이 많아서 항상 괴괴한 심사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더구나 안의는 연암이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숱한 저술을 남겼던 곳이기도 했다.

수기(水氣) 때문이었을까. 안의의 옛 지명은 안음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영조 때 이웃 산음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조정에서는 음기가 강한 탓이라 여겨 산음을 산청으로 개명하면서 안음도 안의로 바꿔버렸다. 이렇듯 물 많은 안의에 최근 잇따라 화기(火氣)가 덮쳐들었다. 2003년 가을 화림동계곡의 농월정이 불탄 데 이어 2004년에는 허삼둘가옥에 불이 났고, 안의에서 함양 가는 길목의 정여창고택까지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방화로 추정되는 불들이었다.

특히 박지원사적비가 세워진 안의초등학교에 이웃한 허삼둘가옥의 소실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허삼둘가옥이 어떤 집인가. 1918년 윤대흥이란 사람이 진양 갑부인 허씨문중에 장가들면서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특이하게도 안주인의 이름을 따른 보기 드문 페미니즘적 문화유산이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집의 구조와 생활의 슬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부엌의 가구(架構)가 눈길을 끄는 사랑스런 집이기도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안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들먹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집 부엌문에 설치된 시렁과 선반을 보고 안주인의 마음씀씀이를 짐작하면서 애써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곤 했다.

공연히 마음이 헛헛해진 나는 눈 쌓인 수승대를 돌아 덕유산 남쪽자락의 방기실마을 점터찻집에서 오미자차 한잔에 몸을 덥히려던 뜻을 접고 오히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인 신원면 과정리로 달려갔다. 1951년 겨울, 박산골짜기는 그야말로 ‘킬링필드’였다. 359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719명의 양민이 아군의 총질로 스러져갔고 시신마저 불에 태워졌다. 최근 그 죽음의 골짜기 맞은편에 거창한 추모공원이 들어섰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조지훈 ‘다부원에서’)’ 불고 있었다. 도대체 길을 가면서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란 말인가.

 

겨울, 횡성 남은 겨울을 위하여


횡성의 풍수원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된, 한국인 신부에 의해서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초기 박해를 피해 풍수원으로 숨어들어온 ‘천주학쟁이’들은 숯과 토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규하 신부의 지휘 아래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총 건립비 6000원. 이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거금 1500원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찾아와 ‘내 돈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 보다 못한 정신부가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면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하고 꽁무니를 빼고. 그러나 다시 술에 취하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공사장으로 올라왔으니, 그 허튼 실랑이를 지켜보던 신도들은 웃음으로써 공사판의 노고를 씻어버렸다.

On road
양평 - 6번국도 - 용문 - 단월 - 풍수원성당|드라마 ‘러브레터’ 촬영지/ ‘바이블파크’ 조성중 - 횡성 - 병지방계곡|토종왕국 - 횡성온천/횡성호/횡성자연휴양림 - 고래골|참숯공장(숯불가마와 숯불삼겹살) - 정금리|회다지소리- 안흥|찐빵마을 - 태종대


겨울, 횡성

바람 끝에서 나는 몇 번이나 넘어졌던가
일으켜 세울 이 없어 마음은 시리고
빈 길에서 봄은 너무 아득하다
눈을 밟으면 낡은 풍금 소리
따라오던 새들조차 비키어 날아가고
눈물의 끝에서 나는 하늘을 본다
그대여, 빈 하늘을 본다
아직 남은 언덕이 있다면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나는 또 몇 번이나 넘어져야 하는가
시린 겨울의 끝에서 바람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 풍수원성당 -


겨울, 횡성은 맵다. 겨울, 횡성은 쓸쓸하다. 그런데도 왜 횡성으로 가는가. 바람도, 눈발도 비끼어나는 골짜기에 간간이 박힌 온기 때문이다. 에둘러서라도 꼭 들러야 할 풍수원성당이 그러하고, 병지방계곡의 토종적인 삶이 그러하고, 고래골의 참숯가마가 그러하고, 웃을지 모르겠으나 안흥의 찐빵이 그러하다. 그렇게 보면 정금리의 회다지소리조차 자못 푸근하고 편안하다.

 

언제나 푸른 네 빛

소나무여


한오백년쯤 그러저러 살아왔으니
또 한오백년쯤 그리저리 살아갈 일이다
이고 있는 하늘과 밟고 있는 땅은
항시 내 몸의 힘을 돌게 하는 것이어서
머물러 있으되, 지긋이 세상을 품어보는 것이다
고단하지 않은 어떤 삶도 없으니
져버린 시간과 흘러간 빛마저도
내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생기로 일렁이는구나
한오백년쯤 이러저러 살아 왔으니
또 한오백년쯤 이리저리 살아볼 일이다

- 소광리 금강소나무


* 큰빛내(大光川) 작은빛골(小光里)에는 금강소나무들이 모여 산다. 그들은 사는 곳이 울진인데도 대개 ‘춘양목’으로 불린다. 오래전부터 삼척, 울진, 영양 등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금강소나무 목재들이 주로 봉화 춘양역으로 집재, 반출되면서 모두 춘양목으로 통칭되었다는 것인데, 금강소나무 반출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깊다. 일본 국보 1호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바로 이 춘양목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제법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500살짜리 금강소나무를 올려 보고 있노라면, 그 끝에 매달려 있는 빛과 목조반가사유상의 미소가 퍽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On road
중앙고속도로 영주IC - 봉화 - 닭실마을|유과 - 다덕약수 - 춘양 - 통고산자연휴양림 -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 왕피리|왕피천계곡 - 불영사|불영계곡 - 성류굴 - 망양정 - 월송정 - 후포 - 백암온천



겨우내 어설피 대지를 덮고 있던 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서 산야는 본연의 갈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 빛은 곤고하지만 순환의 섭리는 너무도 엄연하여 이내 그 빛 속에도 서서히 물기가 번져들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풀빛으로 일대전환을 이루고야 말 터. 내가 겨울의 끝에서 소광리를 가는 까닭은 그 전야(前夜)를 버티어내고 있는 소나무의 푸른빛을 보기 위함이다.

어떤 이는 어려울수록 소나무를 생각한다지만, 소나무의 언제나 푸른빛은 항상, 이미 우리 삶 속에 들어 있었다.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는 우리네 삶은 아무리 세상이 척박할지라도 굽어서라도, 비틀어서라도 기어이 살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나무숲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피톤치트가 아니라, 그토록 집요한 삶의 역정이다.

소광리를 빠져나와 잠시 왕피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불영계곡을 넘어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완강한 화강암 사이를 흘러다니는 물길을 따라 소나무의 푸른빛이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붙는다. 아니 바다에 이르러서도 망양정으로, 월송정으로 소나무의 잔영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마침내 후포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렇다, 부두에 매여 늘 출렁거리던 빈 배들도 / 옷자락 풀어놓고 어서 떠나라고 / 해 지고 바람 불면 더욱 적막한 눈발로 재촉하던 / 저 헝클어진 고향의 목소리를 헤아리기라도 했을 것인가? / 그것이 썩어서 만들어 준 거름 몇 점으로 / 내 언제나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렸을 뿐임을 / 흐려지는 차창 너머로 비로소 보여주는 후포 / 이제는 눈물겨운 풀꽃 몇 송이로 겹쳐 보이는 - 김명인 <후포>

소나무만이 아니라 바다 역시 겨울이 깊어갈수록, 봄이 다가올수록 그렇게 푸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은 너무도 투명하기까지 하여 우리의 마음을 베어내는 것이었는데, 한 아낙이 바다를 향하여 방생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사연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저 겨우내 내가 지고 왔던 무거운 짐들을 벗어 그 바다에 함께 놓아주었다.

 

그리운, 아직도 그리운 금강산

갇힌 바다

내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가로막는 철조망 때문이 아니다
밀려왔다가도 다가서면 멀찌감치 물러서는
바다 때문이다
내가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드리워진 철조망 때문이 아니다
그리움으로 밀려들어 슬픔으로 빠져나가는
바다 때문이다
바다 때문이다
걸을수록 지나온 자취조차 쓸려버리고
나는 한점 목마름으로 출렁거린다

- 반암해수욕장 -


촌스럽게도 나는 비행기 타고 가본 해외는 제주도가 유일하고, 국적이 다른 외국(?)이라고는 ‘평양공화국’뿐이다. ‘평범직딩’ 조은정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히말라야나, 킬리만자로나, 미시시피 따위에는 어떤 감흥도, 기대도 갖지 않는다. 솔직히 여력이 없음이 첫째 원인이겠지만 그 길들에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애써 강변한다.

나는 오로지 그리움 때문에 길을 간다. 속초에서 7번 해안도로를 따라 고성의 동해바다 근처를 가끔 얼씬거리는 것도, 그 길의 끝에 해묵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주제’라고 할 것도 없이 금강산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였다. 배를 타고 들어가다 못해 이제는 뭍으로도 길이 열렸지만, 아직도 금강산은 ‘그리운 금강산’이다. 아니 그리움은 더 절실해졌다. 그리움은 볼 수 없어서, 갈 수 없어서가 아닌 까닭이다.

*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화가 손장섭이 그린 ‘동해바다’를 일러 우리 시대 동해바다를 가장 극명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화면을 철조망으로 가로막고 동해바다의 흰 포말을 강조하여 이미지의 상충이라는 회화적 효과를 얻어냈다’는 그의 그림은 풍경을 지극히 의식적으로 읽어낸다. 나는 그의 그림을 흉내내되, ‘의식적’으로 철조망을 바다 아래 배치했다. 다행히 빛에 쫓겨가는 갈매기 한 마리가 화면에 걸려들어, 풍경은 단지 빛과 시간의 소산임을 새삼 일러주었다.


나는 금강산 가는 길의 기점을 속초의 ‘아바이마을’로 잡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청초호의 아바이마을은 실향민의 마을이었다. 실향민처럼 그리움으로 절실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거기서 길을 나서기가 무섭게 만나는 청간정은 남쪽에서 보면 관동팔경의 최북단이자 고성의 관문이다. 칠곡처럼 고성에는 ‘고성’이 없다. 원래 고성읍은 현재 북녘땅이고 남쪽의 읍 소재지는 간성이다.

금강산(실제로는 건봉산) 건봉사는 금강산권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한때 우리나라 4대 사찰 중에 하나였고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거찰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의 뜻을 받든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을 훈련시켜 위난의 강토를 지켜낸 본산이며, 만해 한용운이 봉명학교를 지어 민족교육을 도모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주문 격인 ‘불이문’에 새겨진 금강저는 마치 절의 내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금강저는 천둥과 번개의 신인 인드라가 사용했던 무기였다. 하지만 인간의 악업은 금강저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6·25 전쟁의 참화 속에 절은 사그리 불타버리고 불타지 않는 석물들만이 잔재되어 남았다.

눈쌓인 들판을 걸어갈제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뒤따르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나니
- 서산대사 ‘청허담집’


화진포는 또 어떠한가. 북이기도 했다가 남이기도 했던 인간의 누추한 역사는 김일성 별장이니, 이승만 별장이니 하는 헛된 거푸집만 남겨 놓았다. 전쟁의 정치적 당사자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이기붕 별장까지 ‘꼽사리’끼어 들어서 있다. 이제는 고니조차 찾아들지 않는 화진포에서 그리운 금강의 잔영이 아련한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 나의 걸음은 사뭇 조심스럽다. 번거로운 신고절차와 총 든 군인들의 위세 탓이기도 하지만, 그 길이 내게 주는 가르침은 더욱 엄혹하기 때문이다.

 

봄, 물오르다

봄은
봄은 섬진강 기수역에서 크게 몸을 뒤집더니
이윽고 흙의 보드라운 속살까지 번져들었다
그러나 중대마을에서 봄은,
아직 더 많은 근력을 필요로 했다
오래 묵은 나무마다 제 몸의 상처로
뿌연 물들을 토해냈으나 기억은 아물지 않았다
배를 깔고 산을 기어오르는 다랑이들과
뼛속까지 타버린 대숲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핥고 가야 할 봄은,
산 밑에서 잠시 다리품을 쉬고 있는지
봄은 기다림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 역시 그리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지리산 중대마을

* 지리산자락의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중대마을은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산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면서 문수리 일대는 지리산 빨치산들의 주요 출입로가 되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들을 이끌고 문수리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문수리 일대의 삶 역시 온전키 어려웠다. 서로 치고받는 동안 거개의 집들은 파괴되고 그 많던 대숲 또한 깡그리 불타버렸다. 폐허를 밀치고 다시 대순들이 일어서고 드문드문 사람들도 돌아왔지만, 다랑이논에 기대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돌아서면 비탈인 그런 삶이었다.


On road

88고속도로 남원IC - 지리산온천|게르마늄 온천수 - 구례 - 상사마을|당물샘 - 운조루 - 중대마을|다랑이논 - 화개장터/쌍계사 - 의신마을|고로쇠물 - 하동 - 광양 - 중흥사 - 도선마을 - 옥룡사지|동백림 - 백운사|약수제 - 백운산


날은 풀렸지만 여전히 2% 부족한 것은 물이었다. 나는 지리산의 고로쇠물이 그리워졌다. 달달한 첫맛이 실핏줄 끝까지 이어지면서 혈관의 묵은 때들을 말끔히 씻어주었을 때, 몸은 비로소 봄으로 꿈틀댈 일이었다. 그러나 행장을 꾸리는 손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섬진강물이 풀렸다 한들 지리산자락의 다랑이논들은 골짜기의 그늘빛을 채 벗어버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 무거움은 지리산자락의 사연들과 겹쳐서 뼈에 사무치게 서러울 터였다. 그래도 나는 가기로 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 지쳐 나자빠져 있다 /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 흔들어 깨우면 /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봄>

상위마을의 산수유는 아직 이르다. 대신 나는 지리산온천에서 게르마늄물에 겉때를 벗는다. 그것은 마치 약수제의 제례를 준비하는 것과도 같아서 홀가분함보다 정결함이 앞선다. 욕탕의 열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상사마을의 당물샘을 찾는다. 한때 장수마을로 명성을 떨치던 상사마을이었고, 그 원천은 당물샘이었다. 그러나 더는 오래 살아야 할 이도, 까닭도 사라진 듯 마을 쓸쓸하고 물빛은 어두웠다.

고로쇠물의 원조는 아무래도 광양의 백운산이다. 백운산 옥룡사에서 수행을 하던 도선국사는 오랜 좌선 끝에 펴지지 않는 무릎을 고로쇠물로 다스렸다. 그때부터 고로쇠나무는 뼈에 이롭다는 뜻의 ‘골리수(骨利樹)’로 불렸다. 근래에 들어 고로쇠물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백운산뿐만 아니라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이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몸살을 앓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물을 가장 많이 토해낸다는 경칩을 전후해 아예 며칠씩 들어앉아 일삼아 물을 먹는 이들도 있다지만, 그렇게까지 봄을 들이켜야 할 이유가 없는 나는 겨우 갈증만 축인 채 봄이 올라오는 섬진강을 따라 내려간다.

섬진강물은 봄빛으로 그윽했지만 재첩을 잡는 아낙의 모습은 아직도 시리게만 느껴졌다. 다압마을의 매화 꽃망울들도 완연히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것인가. 봄 역시 다가갈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봄은 이미 잔뜩 물이 올라 있었다. 다만 그것을 피워줄 2%의 삼투압과 광합성만이 부족할 뿐.

 

섬, 광장에서


슬픈 뱃노래

어딘들 떠도는 섬 하나 없으랴
그리움에 저미어 배는 바다를 가른다
날아라 새여,
희망도 사랑도 없이 저어온 세월로
나는 무겁다
어딘들 발 디딜 섬 하나 없으랴
바람을 타고넘어 다다를 섬 하나 없으랴
하여도 길은 아득하고 빛은 시리니
섬 밖의 섬, 바다 안의 바다에
나는 호올로 헤매인다
- 거제 여차


* 거제에 건너갔을 때, 나는 여차하면 여차에서 저문다. 섬의 끝, 여차에서 까마귀재를 넘어 무지개포구에 이르는 길은 시리도록 푸르다. 길은 망산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흐르는데, 길 밖으로는 영락없이 바다다. 점점이 떠도는 섬들과 그 사이를 떠다니는 고깃배들을 보노라면 문득 바닷새 아비가 떠오른다. 11월부터 3월 사이에 거제도 연안에서 겨울을 나는 아비는 바다 깊숙이 잠수하여 물고기를 잡는다. 때문에 어부들은 그 몸짓을 보고 물고기의 회유처를 알아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잠수에는 귀신인 아비지만 물 밖에서는 둔하기 짝이 없어 갈수록 그 수효가 줄어들고 있다 한다.

On road

대통고속도로 충무IC - 거제대교 - 거제포로수용소터|광장 - 장승포 - 지심도|동백섬 - 공고지|종려나무숲 - 학동|몽돌밭/동백숲 - 갈곶 - 거제해금강/외도해상농원 - 여차

거제의 동백은 유난히 붉다. 그것은 온전히 눈부신 햇빛 탓이다. 옥포로, 장승포로, 지세포로 돌고 돌아도 햇빛은 아른거린다. 안섬이거나 밖섬, 물결로 일렁거리고, 마침내 학동에서 몽돌로 구른다. 지심도는 어떤가. 본섬에서 떨어져 나온 이 작은 섬은 아예 통째로 동백숲이다. 이 섬에도 어김없이 햇빛이 쏟아져 내리면 섬은 홀연 붉은 동백불을 밝힌 동백선(船)이 된다. 하지만 동백은 붉을수록 비감하다.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그토록 붉게 타올랐다가 어느날 문득 무너져버리는 빛의 종말을. 그 선연한 죽음을.

그러고 보면 거제의 동백이 유난히 붉은 것은 햇빛 때문만은 아니다. 지울 수 없는 섬의 역사는 포로수용소터에서 핏빛으로 붉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그 처연한 역사 속에서 나약하기만 한 한 지식인의 죽음을 허망하게 그려낸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남에서 떠밀리다시피 북으로 넘어간 이명준은 북의 현실에서도 깊은 환멸을 느낀다. 전쟁이 터지고,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그는 포로가 된다.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판문점 포로송환위원회에 선 명준의 선택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 있고 밀실이 없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는 날부터 괴로움은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모른다. 밀실을 허락하는 광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이명준이 나아갔던 바다의 광장에 서서도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광장을 알지 못한다. 그저 길 위에서도 길을 찾고 있을 뿐.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남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흰 바닷새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멋과맛, 두 가지 유혹

장항선 하구

덜컹거리며 밤새 달려온 곳이
강이었을까, 아니면 바다였을까
허덕이며, 뒤채며 끝내 눕지 못하는 빛은
꿈이었을까, 추억이었을까
살아온 만큼 살아갈 수 있다고
되뇌고 되뇌어보지만
바다는 기어이 열리지 않고
죽은 갯벌에 죽음으로 정박한 저 배처럼
돌아갈 수도, 떠나갈 수도 없는 나는
속절없이 고인 갯벌에 발을 묻는다
- 장항 갯벌


* 대전에서의 어린 시절 내게 장항은 먼 끝이었다. 교복을 입은 소년은 천안에서 장항선으로 바꿔 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끝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막상 다다른 도선장 너머의 아련한 군산은 알지 못할 두려움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한 번도 넘지 못했던 금강 하구를 비로소 배를 타고 넘는다. 갑판 위에서 바라본 강은 느릿하건만 멀리 금강하구둑의 긴 물막이가 쏜살같이 배를 앞질러 건너간다. 나는 공연히 서러워졌다.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IC - 춘장대해수욕장 -마량|동백꽃주꾸미축제(3/25~4/7) - 월하성갯벌체험마을 - 서천 - 장항 - 한산모시관|한산모시와 소곡주 - 신성리 갈대밭|영화 JSA 촬영지

서천 마량 동백숲에 춘정이 돋기 시작하면 비인만 갯벌의 주꾸미들은 산란을 준비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갯마을의 궁기나 때워주던 천덕꾸러기 주꾸미가 새삼스레 별미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주꾸미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칙칙한 몰골이나 숏다리 때문이 아니라, 그놈의 몰골을 대할 때마다 언뜻 떠오르던 어떤 통치자 때문이었다. 아무리 먹을거리 역시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덥석 그런 허튼 생각부터 해댄 건 죄 없는 주꾸미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은 소라껍데기를 집인 양 속여 주꾸미를 잡아내는 것이니, 이래저래 그 뼈 없는 족속을 볼 낯이 없기도 했다.

어쨌거나 춘장대에서 마량으로, 또 월하성마을까지 봄바다빛은 참으로 곱다. 짙푸르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을 베어낼 일 없고, 얕고 잔잔한 파도는 마냥 모래빛이다. 마량은 해돋이마을로 알려진 곳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해는 바다가 아니라 산 위로 솟는다. 대신 동백꽃처럼 붉은 저녁놀이 일품이다. 동백꽃 피고 주꾸미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마량사람들은 작은 축제를 준비한다. 이른바 ‘동백꽃주꾸미축제’. 행사 내용도, 행사장 풍경도 전국 여느 축제와 별다를 바 없지만, ‘멋과 맛, 두 가지 유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만큼은 제법 그럴싸하다.

사실 진정한 멋과 맛은 한산에 있다. 한산 세모시와 소곡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산모시의 명성이야 새삼 이를 바도 없고, 한산 소곡주는 ‘앉은뱅이술’로 유명하다. 과거를 보러가던 어떤 선비가 주막에서 목 좀 축이려고 소곡주를 홀짝거리다 마침내 대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니 과거시험조차 놓쳐버렸다. 그래서 앉은뱅이술이다. 누룩을 적게 썼다 하여 ‘소곡주’인데, 정작 술을 마신 사람을 취한 줄도 모르게 주저앉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거를 보러 갈 일도 없는 나는 아예 처음부터 주저앉아 소곡주를 마셔댔다. 어느 정도 술이 취하니 얼핏 문 밖으로 세모시 옥색치마를 입은 아녀자의 속살이 비치는 듯했다. 이러니 봄바람을 핑계댈 것도 없이 나는 애시당초 사람 되기는 그른 인물이었다.

 

구름문 저 너머

무화, 무과의 뜨락에서

무화, 무과의 뜨락에서
꽃 피우지 못하니 너는 좋겠다
열매 맺지 못하니 더더욱 좋겠다
세상의 날들이여
추위 오고 더위 가고 바람 들고 볕 나니
그저 살아 있겠다
발길에 채나니 덧없는 길이었구나
눈물 한줌까지 다 빨아들이고
남은 힘마저 내뱉고 난 다음
너는 오롯하게 떠 있구나
무명은 고요히 뜰을 스치우고
나는 서러워 발길을 돌린다
- 청도 운문사

* 운문사 학승들은 울력으로 산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는 어길 수 없는 계율이다. 학년별로 맡고 있는 소임도 다르다. 1학년은 심부름, 2학년은 먹을거리, 3학년은 미화, 4학년은 관리를 맡는다. 새벽예불이 끝나기 무섭게 학승들은 이것저것 일거리로 부산하다. 그러나 막상 학과가 시작되니 한 학승이 열린 창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조을고 있었다. 하긴 더 배워야 할 그 무엇이 있으랴.

On road

중앙고속도로 경산IC - 대적사 - 청도 소싸움 - 매전 처진소나무 - 금천|스님자장면 - 운문호 - 운문사|새벽예불 - 운문산자연휴양림 - 가지산탄산유황온천 - 언양 불고기

길의 시작은 싸움구경이었다. 사람이 시키니 소들은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무의미하다. 생존을 위한 것도 아니고, 종족보존의 본능과도 멀다. 그렇다고 소주인의 주장처럼 충성도 아니었다. 단지 부림과 쓰임만이 있을 뿐이다. 싸움소는 종자가 따로 없다. 그저 성정이 사납고 끈기와 근성이 있으면 된다. 동작이 민첩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외양으로 치자면 뿔이 좌우로 뻗고, 공격부위를 좁히려면 뿔 사이가 좁아야 한다. 눈, 귀가 작고 목덜미가 튼실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보아도 나는 한구석도 그에 닮은 데라고는 없었다. 밀고, 밀리고 박이 터질 때까지 소들은 싸워대지만 그를 보는 나는 멀뚱하다. 터무니없게도 내가 소싸움장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것은 순전히 다음날의 운문사 새벽예불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해거름이 다 되어서야 나는 금천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옮긴 강남반점에 들러 ‘스님자장면’을 시킨다. 이 불심 깊은 중국집은 운문사의 학승들을 위해 자장면에 고기를 넣지 않는다. 완두콩이나 표고버섯으로 씹히는 맛을 대신한다. 그래도 맛만 좋다. 배를 채운 나는 잠시 허튼 생각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장면은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불러야 제맛이 난다며,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짬봉’은 ‘잠봉’이냐고 했다는. 나는 실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소주 대신 ‘쐬주’ 한잔으로 입안을 가셨다.

운문에 ‘여관’은 없고 ‘모텔’만 있었다. 새벽길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내내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는 꿈만 꾸다가 흥건히 잠에서 깨어났다. 허망하게도 시간은 이미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운문사 가는 길을 넘으며 나는 짜증과 질책으로 덜컹거렸다. 그래도 새벽달은 구름 사이를 유유자적 떠가고 있었다. 짐작대로 운문사는 이미 썰렁했다. 간간이 독송소리만 새어나오는 절간을 서성이다 부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아침공양을 준비하는 학승들은 분주하고,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밥 짓는 냄새가 혈관까지 파고들었다. 불현듯 나는 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길의 끝은 ‘무욕’이 아니라 ‘허기’였다. 언양의 ‘공원불고기집’ 식탁 위에 오른 고기의 주인들은 어제 그토록 싸워대던 소들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예전에 태화강 상류의 강변에서 유유히 풀을 뜯던 소들도 아닐 터였다. 경작과도 거리가 먼, 오로지 육보시를 위해 사육되는 그런 소들일 터였다. 나는 갑자기 식욕을 잃었고, 불판 위의 고기들은 공연히 몸을 비틀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역사

유배지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다면
아무 말 할 필요도 없으리라
바람에 지대면
버티지 않아도 서있는 나의 육신,
고단함 없이도 세상은 살아갈 수 있다지만
살아갈수록 허깨비 같은 나의 삶은
이렇듯 묵은 등걸로 내려앉고야 마는 것이다
사라진 벗들이여
한때 내 손아귀 속을 맴돌던 허튼 바람과
그 오랜 지둘림까지도
이제는 못내 세상 밖을 떠돌고만 있으니
회한의 여릿한 소지 태워 올리며
눅진한 적소에서 나는, 말없이 울었다
- 제주 대정향교


* 대정은 추사 김정희가 9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당대의 엘리트였던 추사는 최고의 유배형인
위리안치의 고역 속에서도 인근의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한다. 아무리 소일거리 삼았다 치더라도
대대로 진짜 유배의 삶을 살아온, 살아갈 토착민들에게 그가 가르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아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어 ‘난(亂)’이나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섬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On road

제주공항 - 항파두리성|항몽유적지 - 추사적거지/대정향교/백한할아버지무덤 - 모슬포|4·3평화공원 - 가파도/마라도 - 성읍민속마을|빙떡과 오메기술 - 성산포 - 우도|해녀 - 제주의 오름들 - 사봉 낙조

아무리 ‘사월은 잔인한 달’이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며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지만 봄, 제주에서 지나간 역사를 들춘다는 것은 잔혹한 짓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많은 오름들과 굼부리, 옴팡과 너분숭이, 코지와 곶자왈을 스치는 하늬바람의 속살에는 어김없이 피의 역사가 스며 있으니.

항파두리의 삼별초나 ‘이재수의 난’은 ‘무자년 난리(1948년 4·3항쟁)’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되찾은 나라에서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다. 한라산자락의 중산간마을들은 쑥대밭이 되었고, ‘무를 뽑아놓은 듯 널려 있던 주검’들은 하늬바람에 풍화되어 설문대할망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틈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더욱 처절했다.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 채어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5·16쿠데타 이후 17년간 계속되어온 강요된 침묵을 깨고 4·3을 다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터진 물꼬는 또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서야 국가 차원의 공식사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은 4·3을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라고 말한다. 4·3특별법 제정은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어찌 그것으로 끝이겠는가.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불의 섬에서 들리는 숨비소리’는 다시 잠든 기억의 뿌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다. 제주사람들은 4·3의 뒤끝에서 학살당한 192명의 이름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을 수습하여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묘비명을 세웠다.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니, 그 깊디깊은 심사는 다만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산에 언덕에

길의 진혼가

죽은 자만이 죽음을 추억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산 자들, 산 자들의 넋으로
또 그렇게 봄은 오는 것이다
풀빛에 취해 산천을 떠돌았어도
살아 있기에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무녀여, 나의 죽음을 부르지 말아다오
남루와 행려의 긴 길 위에 꽃잎 날리면
어차피 그 끝은 죽음으로 이르나니
산 자만이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죽은 자들, 그 넋으로
우리는 꽃그늘 밑에 고이 잠드는 것이다
- 은산별신굿


*‘신라가 끌어들인 외세 당나라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짓밟혔던 백제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300년 세월을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은산별신제’는 그 대장역을 맡았던 인간문화재 차진용 옹이 얼마 전 작고하면서 그만 힘을 잃었다. 은산이 잃어버린 것은 비단 별신제 대장만이 아니다. 황우석 박사가 바로 이곳 은산 계룡당마을 출신이다. 한때 경사로 들썩이던 마을은 이제 한 노파의 말처럼 ‘코가 쑥 빠져버렸다.’ 어쩌면 ‘생가’로 치장될 뻔했던 황 박사의 옛집은 사람의 온기가 식어버린 채 사립문 옆으로 금빛 산수유꽃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롯이 봄의 뜻이었다.

On road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논산IC - 능산리고분군 - 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 - 구드레나루|유람선/조각공원 - 정림사지 오층석탑 - 신동엽생가 및 시비 - 궁남지|서동요 - 백제역사재현단지|전통문화학교 - 은산별신당

누가 뭐래도 부여의 산과 언덕에 봄을 피어나게 하는 것은 순전히 시인 신동엽이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 화사한 그의 꽃 /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 맑은 그 숨결 /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 신동엽 ‘산에 언덕에’


그 봄은 금강의 묵은 때를 거슬러 백마강의 탄식을 안은 채 낙화암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벼랑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진달래들은 삼천궁녀의 넋이 아니라 그냥 봄빛일 뿐이었다. 나라는 깨어져도 산하는 살아남으니 백마강을 흘러 구드레나루에 이르는 뱃길은 무상함 그 자체였다.

소정방의 치적으로 상처 입은 채 영판 퇴락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돌아 ‘서동요’ 아련한 궁남지에 이르러서야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사춘기, 춘색을 못이긴 내가 이곳 궁남지를 찾았을 때 버드나무 못가에는 애절한 민요가락이 흐르고 있었다. 그 느린 진양조의 노랫가락은 마침내 나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그때 하마 나의 그리움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한 친구였을 게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이 땅에 없다.

동남리 큰길을 몇 번이고 왔다갔다 한 끝에야 겨우 부여에 봄을 불러온 쥔장의 생가를 찾아냈다. 푸른색 기와를 힘겹게 이고 있는 그 집 뜨락에는 삽과 고무래와 호미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쇠붙이들은 ‘그 모오든 쇠붙이’들이 가고 난 다음, 남은 ‘향그러운 흙가슴’을 어루만질 것들이었다. 휘휘 집 안팎을 돌아보는데 마루문 위에 걸린 현판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 언제까지나 / 살며 있는 것이다.
- 인병선 ‘생가’


시인의 반려는 시인과 엮은 추억이 서린 집을 꾸미면서 시인보다 더 애틋한 시편을 지어 올렸다. 그 부러운 정을 밀어내듯 대문 밖을 나서니 바야흐로 부여는 봄이었다.

 

다시 새만금에서

계화도(界火島)

어차피 버릴대로 버린 뭍의 몸들은
이곳에 와 뻘로 누워버리는 것이다
하루에도 두 번씩 어김없는 짠물이
나의 헐어빠진 상처를 핥고 지나가면
고름은 이내 종패(種貝)로 붙어버리는 것이다
채 미련을 벗지 못한 것들은
바다에 몸을 섞고, 빛으로 증발해 보지만
그마저 다시금 짠 소금으로 내려앉으리라
어쩔 것인가, 배설의 끝에서 바다는
다시 배설로 뒤척이고
죽은 갯벌 위에서 죽음은
덧없이 산골(散骨)이 되어 쓸려가나니
- 부안 계화포구


*그 풍요로운 칠산어장의 한켠에 떠있던 계화섬은 대규모 간척공사로 뭍이 되어버렸다. 바다를 죽여 만든 땅에는 섬진강댐이 생기면서 땅을 잃어버린 수몰민들이 쫓기어왔고, 바다를 내준 어부들은 그나마 살아남은 갯벌에서 염치불고하고 백합조개나 캐며 연명해왔다. 이제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 계화도는 두 번 죽는다. 그리고 당연히 그 부질없는 뭍과 물의 경계 따위도 사라지게 되리라.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군산IC - 비응도|새만금의 시작 - 옥구염전 - 만경강 - 망해사와 심포 - 동진강 - 계화도 - 바람모퉁이 - 해창|새만금의 끝 - 변산반도

젊은 판사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던 새만금공사는 최근 2심법원의 판결에 의해 보강공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옳고, 어떤 판단이 맞는지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새만금 갯벌 위에 법정을 세우고 그곳에 살고 있는 백합조개, 갯지렁이, 망둥이, 찔룩이, 저어새 같은 갯것들과 부안의 어린이들을 배심원 삼아 판결을 내려보는 것은. 어차피 그 갯벌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 아닌가.
- 졸고 ‘갇힌 갯벌 위로 스러지는 풍어의 꿈’
(뉴스메이커 2004. 2. 12자)


꿈의 법정은 무산되었다. 현실의 법정은 새만금 갯벌에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일거리가 생겼다. 옥구의 염전들과 만경강의 도요새들, 망해사와 심포, 동진강의 머구릿배들, 그 서글픈 계화도와 바람모퉁이를 몇 번이고 돌며 이내 사라질 갯가의 삶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것은 개발과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죽임과 죽음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새만금에 대한 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진 후 간간이 해상시위를 비롯한 항의가 이어지지만, 위도에 방폐장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처럼 격렬한 소요가 다시 일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깊이 생각지 않고 말하기로 한다면 차라리 방폐장을 받아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새만금은 지켜야 했다. 정 안 되면 방폐장은 다시 옮기거나 다른 처리방법을 찾기라도 하겠지만, 한번 죽은 갯벌은 도무지 다시 살려낼 재간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새만금은 비단 새만금 갯벌의 문제만은 아니다. 변산반도를 비롯해 줄줄이 매달린 서해 바닷가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지독한 황사가 한반도를 휩쓸고 간 다음날 계화도를 찾았을 때, 한 할머니가 빛바랜 갯벌을 뒤적이고 있었다. 어젯밤 서울에서 내려온 자식들에게 쥐여 보내줄 고막을 캔다고 했다. 그랬다. 갯벌은 할머니에게 조금만 바지런을 떨면 언제든 찾아 쓸 수 있는 통장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잔고조차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이기는 했지만, 그 통장은 당신이 아니라 순전히 자식들을 위해 쓰일 터이기도 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노인폄훼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현 여당 대표의 버전으로 이야기하자면 ‘미래에 속하는 것까지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질마재 신화


보리밭 서정

저어기 어린 내가 애비의 무동을 타고 간다
푸르름이여, 얼마나 좋으냐
종달새 마냥 나는 풀쩍이고
애비의 머릿내음조차 다사로이 코끝을 스미니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마냥 깔깔거리며 마냥 자지러지며
젊은 애비의 등짝과 어린 가슴에 땀이 배이도록
이랑 사이를 질러, 질러 봄의 끝까지
나는 가련다
그런데 푸르름이여, 왜 자꾸만
아지랑이처럼 멀어만 가느냐
- 고창 학원농장


* 학원농장은 봄의 보리밭과 가을의 메밀꽃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이 너른 동산에서 영락없이 유년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행복했던가. 무지개거나 아지랑이거나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꿈을 좇아 나는 어디까지 갔던가. 하염없이 들판을 내달리면 막 알을 낳은 종달새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내 눈엔 공연한 눈물이 핑 맴돌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린 시절 실팍하게만 느껴졌던 애비의 등판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이고, 하마 나는 단 한 번도 애비의 등에 업히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 - 미당시문학관 - 선운사|육자배기 동백꽃 -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 하전|바지락마을 - 동호 - 구시포|해수월드 - 공음 - 학원농장|청보리밭축제(4/15~5/7) - 고창읍성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더란다. 그것을 신랑은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버렸더란다. 그리고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 뜻밖에 그곳을 지나다가 신부 방 문을 열어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더란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버렸더란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는 ‘팔할’은 바람으로 세상을 떠돌던 미당 서정주 시인의 전 생애가 고스란히 재가 되어 내려앉아 있다. ‘언어의 정부(政府)’라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 최대의 시인은 85년간 영욕의 세월을 접고,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질마재의 솔바람 속에 평생의 반려였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이는 옛 선운초등학교 자리에는 그의 시세계를 기리는 미당시문학관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미당시문학관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은 6층 전망대다. 그곳에 서면 바다에까지 닿은 선운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왼쪽으로는 미당의 생가가, 오른쪽으로는 미당의 묘소가 손에 잡힐 듯하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미당 시세계의 ‘팔할‘ 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미당 시세계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애비는 종이었다.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미당시문학관의 탐방자는 제2전시동에서 잠시 곤혹스럽다. 한쪽 벽면을 메운 친일시편들과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따위들로 해서다. 친일행적이나 정치적 영합은 미당의 시세계를 거론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요소지만, 인간적인 공과와는 별도로 문학적 성취를 너그럽게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인지, 어찌 되었건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시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의 마음은 짐짓 무겁고 어둑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마치 일부러라도 그런 것처럼 약간 삐딱하게 세워진 콘크리트 노출 기념관을 돌아 올라가면서 그가 평소 즐겨 신던 고무신 같은 유품들과, 말년에 치매를 막기 위해 외웠다는 ‘세계 큰 산 이름표’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쓰다듬어 보다가 문득, 되돌아 나오는 수밖에는. 마치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안성기행

어름산이 연가

사랑은, 허튼 사랑을 빼놓고는
모두 외줄 위에 선다
건너가려 할수록 그대는 멀다
마음의 중심이 문제겠으나
사랑은 그마저 흐트러뜨린다
누가 나를 부르는가, 일순
발끝의 긴장은 풀어지고
고된 몸뚱어리 하나
허궁에서 휘청인다
-2002 안성 바우덕이축제


On road

경부고속도로 오산IC - 이동저수지 - 조병화문학관|
꿈과 사랑의 시 축제(5/2~14) - 미리내마을 - 안성장(2·7일 장)|
안성맞춤과 안일옥 - 태평무전수관|태평무공연(매주 토요일 오후 4시)-
남사당전수관|남사당놀이(매주 토요일 오후 6시30분) - 칠장사와 청룡사

*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는 우리나라 대중예술의 원조 스타였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다섯 살 때 청룡사 안성 남사당에 입단하여 열다섯의 나이로 최초이자 마지막이기도 한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공역자들을 위로한 공로로 정삼품 당상관 벼슬을 하사받기도 한 그녀는 스물둘의 꽃다운 나이에 폐병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죽했으면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오고,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고 했을까.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 줄광대(어름산이) 대역을 맡았던 이들이 바로 바우덕이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바우덕이가 최초의 스타였다면, 이준기는 그 피를 잇는 가장 최근의 스타인 셈이다.

자, 그럼/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넌 남으로 천 리/난 동으로 사십 리/산을 넘는/저수지마을/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 안성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나는 조병화의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빠진다. 송전저수지의 물안개를 타고 넘어가면 조각구름 같은 시인의 마을이 나온다. 난실리 편운재. 어린아이마냥 순진무구했던 조병화 시인의 온 생애가 내려앉아 있는 곳. 한때 겉넘게도 시인의 시를 가볍게 보아 넘긴 적도 있었으나, 갈수록 그의 단순한 시들이 좋아진다. 이건 분명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 게다. 어쨌거나 편운재에서 시작하는 안성 나들이는 마치 소풍 길처럼 마음 다사로워 좋다.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있다’는 말을 만들어낼 만큼 번성했던 안성장은 이제 영판 쇠락했다. ‘안성맞춤‘의 유기그릇도 가죽꽃신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안일옥 같은 노포와, 안성유기공방이나 중앙대 안성캠퍼스 내에 있는 안성맞춤박물관 쯤에서 그 명맥을 겨우 더듬어볼 수 있는 정도다. 그렇다고 그 풍성했던 안성의 민중문화적 내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변용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현대화된 대중문화예술의 현장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주말을 장식하는 태평무전수관과 남사당전수관이 그렇고, 죽산의 웃는돌이나 무천이 그렇다. 너리굴이나 마노와 같은 문화예술공간에다 서일농원 같은 생활문화공간들도 한몫 거든다. ‘허생전’의 무대였던 안성장과 함께 홍명희 ‘임꺽정’의 무대 칠장사, 황석영 ‘장길산’의 무대 청룡사 등을 돌아보는 것 또한 그럴싸하다.

안성들판의 마을들과,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민중의 꿈을 고스란히 이어주고 있는 것은 그 많은 돌미륵들이다. 대농리 미륵, 아양동 미륵, 기솔리 쌍미륵과 궁예미륵, 미륵당의 태평미륵 들은 저자의 삶을 살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민중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김훈의 말마따나 ‘안성들판의 미륵들은 부처인 동시에 중생이며, 권위인 동시에 웃음’이고, ‘미륵과 사람이 서로 부축하며 그 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속리마저 여의다

할머니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플라타너스 그늘 밑에
할머니는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새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루한 채소꺼리 몇 닢 팔기 위해
난장으로 가는 길이다
용달차 몇 대, 오토바이, 택시…
풀풀거리며 스쳐 지나가고
잠시 후, ‘집으로’ 가지 않는 버스가
멈추어 섰다/떠났다

- 청주 플라타너스길


쪹할머니는 육거리시장으로 간다고 했다. 거기 정해진 자리가 있을 리 없으니,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서는 길이라 했다. 그러나 좀체 버스는 오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올라탄 버스는 방향이 달라 몇 미터 못가서 내려야 했다. 어떡하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게 된 나는 할머니를 시장까지 태워드리기로 했다. 차 안에서 할머니는 시키지도 않은 자식자랑 끝에, 시장에 나가는 것조차 매번 자식들이 극구 만류하는 통에 이번에도 몰래 빠져나오는 길이라 했다. 그렇게 들고 나선 물건들이 그러하니 먼지 날리는 시장로에 종일 앉아있어 봐야, 점심값을 제하면 교통비도 빠듯할 게 뻔했다. 그래도 놀릴 삭신이 있고, 체면치레일지라도 생각해주는 자손들이 있으니 할머니는 그나마 행복한 것인가.

On road

경부고속도로 청주IC - 플라타너스길 - 육거리시장 - 보은 - 삼년산성 - 말티재 - 정이품송 - 법주사 - 서원리 소나무 - 선병국 고가 - 화남 - 장각폭포 - 화북 - 견훤산성 - 용송

산이 어찌 사람만 하랴. 하지만 또 어찌 사람이 산만 하랴. 아무리 세속을 여의었다 하나 속리의 속내는 생각보다 깊다. 말티재의 구비를 돌아들 때 마음은 숨가쁘다. 올라서면 세속이고 내려서면 산문인가.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읜다 -고운 최치원


그러고 보면 불법의 나라에서 모든 업보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 다만 사람이 괴로워하니 차마 산은 사람을 여의지 못한다. 나 역시 끊임없이 산문을 넘나들면서도 끝내 세속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세속이나 산문이나 가엾기는 매한가지다.
속리산의 일주문 격인 정이품송은 그 오랜 관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풍상으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세월과, 간혹 그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낙뢰 같은 자연재해 탓이라고 말하나 그보다는 사람의 탓이 더 크다. 그냥 홀로 우뚝했으면 될 것을 부질없는 관작의 무게와 번질나게 드나드는 인적과 차궤로 나무는 상처 입고 병들었다. 그의 부인송(婦人松)이지만 여전히 싱싱한 서원리 소나무는 바로 그 반증이다.

화려하되 산만한 법주사보다는 속세간에 보살행이 있었다. 외속리의 선병국 고가는 치부(致富)의 미덕을 보여준다. 탁월한 장사솜씨로 막대한 부를 이룩한 선씨 일가는 속리산 바깥에 99칸 집을 짓고 선덕을 베풀었다. 무료교육시설인 관선정이나, 주민들이 세운 시혜비 등에서 보이는 ‘위선최락(僞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의 오랜 내력은 지금까지도 고시생들에게 내당을 제공하는 등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일한 공개공간으로, 현재 찻집으로 쓰는 사랑채의 이름마저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도솔천’이다.

화서에서 49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은 속리의 뒷길이다. 그래서 산의 동쪽이면서도 외려 외져 보인다. 이쯤되면 속리마저 여의는 셈이다. 장각폭포를 돌아 스산한 견훤산성에 오르면 문장대의 음영이 아련하다. 하지만 산은 여전히 세속 쪽으로 돌아앉아 있다. 그 등판을 보며 나는 묻는다. 부처님은 오시는가. 저문 세상에 메시아(미륵) 부처님은 기어이 오시는가.

 

오월 광주


무등을 오르며

내가 장불재를 넘지 못하는 것은
그 긴 능선 때문이 아니다
마음의 빚 때문이다
살아 왔으되, 살아 있지 못한 행자를 보고
산은 어둑사니 돌아눕는다
그래도 내가 무등을 등지지 못하는 것은
그 깊은 그늘 때문이 아니다
남은 세상의 슬픔 때문이다
빛이라곤 오로지 꽃빛뿐이고
가시에 채인 상처조차 그렇게
안으로만 고여드나니
-무등산 서석대


* 무등산을 오르면서 나는 자꾸만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헐떡이는 숨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도 했다. 겨우 입석대 쯤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문득 한 아낙이 산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산기슭을 거닐다가 산이 너무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산정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그 TK 여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끝내 속으로 삼키고야 말았다. 잠시 땀을 식힌 여인은 다시 산길을 오르고, 멀리 장불재의 등성이로 고단한 그림자 하나가 홀로 산을 넘고 있었다.

사실 오월이면 어김없이 광주를 찾는 것처럼 몰염치한 짓은 없다. 그리고 세월은 이미 사반세기를 넘겨 그날의 기억조차 희미할 뿐이다. 그때 총상을 입은 어미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예비역이 되었다. 삶과 죽음은 순환하는 것이고, 기억마저 껍데기만 남고 모두 사라지는 것이니 무등을 오르는 이의 마음은 그저 어둑할 따름이다.

산정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빛고을이다. 빛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덧없이 떠돌아다니고, 그 빛마저 지고 나면 금남로로 충장로로 또 다른 빛이 흥성거리며 불야성을 이룰 터였다. 도시는 아직 납작하게 엎드려 숨죽여야 했으나, 어쩐 일인지 너무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정말 그날은 끝이 난 것이고, 치욕조차 영광으로 바뀌어버린 것일까.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 낯선 건물들이 수상하게 들어섰고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산을 내려서니 땅은 담양 땅인데, 이곳 역시 ‘지옥 속의 낙원’일 뿐이다. 노회한 송강의 마을에는 고래등 같은 한국가사문학관이 들어섰다. 이곳을 기점으로 소쇄원이니 식영정이니 명옥헌이니, 현실로부터 패퇴한 자들은 아직도 ‘사미인곡’에 ‘속미인곡’까지 불러대며 은둔 속에서 끊임없이 노출을 꿈꾼다. 하여 수북의 서늘한 대숲에 이르기도 전에, 힘을 잃은 나의 다리는 마침내 망월동으로 꺾이어든다.
거기 잊혀진 역사는 이제 신화로만 남아 있다. 번듯한 조형물들 덕에 뒤안의 구묘역은 더욱 어둑해 보인다. 눈물의 소녀들이 남기고 간 종이학은 바랠대로 바래고, 항쟁의 기록들은 비에 젖어 눅진하다. 아직 죽음은 끝나지 않았는가. 패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날은 어둡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옅거나 짙은 그린

강1

바짝 말라, 무심히 바닥을 드러낸 강자락
잡초 무성하고, 열기 그윽하건만
그래도 터엉 비어버린 오월의 강을
소 한 마리, 채우고 있다
시간은 느리고, 세상은 무료하다
그래, 무료하다…
자꾸만, 소는, 되새김질, 하고, 있다
- 보성강


* 보성강은 너무도 유순해서 차라리 따분하다. 그러나 강의 숨겨진 속내마저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기이하게도 강은 남해바다가 가까운 일림산에서 발원하여 북쪽 내륙으로 치받고 흐른다. 강은 보성의 들판을 지나며 한껏 빨아들인 녹색을 곡성의 압록으로 밀어 올린다. 거기서 강은 섬진강의 등에 올라타 지리산을 비끼어 다시 남해바다로 돌아간다. 보성강의 백미는 대황강으로 불리는 석곡에서 압록에 이르는 구간이지만, 그 물길은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가을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주암인터체인지에서 내려 주암호로 다가서면 녹색은 때 이른 열기를 이룬다. 이 거대한 물그릇은 어떻게 기울었는지 녹색으로 비어 있다. 거기가 그러하니 물막이를 넘어 강줄기에 접어들어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그 너른 몽리구역은 그냥 옅거나 짙은 녹색일 뿐이다. 잠깐의 신록이 지나고 그나마 여린 연둣빛이 사라지면 산야는 온통 녹색으로만 일렁인다.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성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상 <권태>

나는 이상의 천재성에 다시금 놀란다. 아둔한 내가 채 깨닫기도 전에 그는 이미 세상의 권태를 들추어버렸다. 그는 일부러 져주는 장기를 두고, 짖지 않는 개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반추하는 소 밑에 드러눕고, 대변으로 유희를 대신하며 권태를 극대화한다. 그는 다시한번 녹색을 저주하고, 권태롭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세상은 어차피 권태롭거나 미치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닌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녹색의 길을 흘러 마침내 녹색의 바다에 닿았다.

거기 보성의 차밭에는 그토록 무감각하거나 더없이 대범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말이 싱그러운 차밭이지 그늘 한 점 없는 차 고랑 사이를 연인들은 잘도 헤쳐 다녔다. 가끔 의미 없는 웃음소리가 그 지루한 녹색 위를 떠돌아다니며 내 신경을 긁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적이 안도했다. 나는 저 연인들의 뒤를 밟아 오늘밤 율포에서 저물리라. 푸른빛을 푸른빛으로 씻는 하룻밤이 지나면 다시 길을 거슬러 일림산이라도 오르리라. 거기 산정에서 시들어가는 철쭉꽃들의 마지막 분홍빛을 다소곳이 애도하리라.

On road

호남고속도로 주암IC - 송광사 - 주암호|고인돌공원 - 대원사|티벳박물관 - 보성강 - 보성 - 대한다원|차밭 - 율포|해수녹차온천탕 - 일림산|대한다원 제2농장/철쭉 - 제암산자연휴양림

 

치욕을 달래다


모란장의 개

마이너리그에서만 유명한 58년 개띠는
잠시 대기석의 동료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미 슬픔 따위는 없다
치욕조차 없으니 그들도 나를 외면한다
나는 그래도 네 발로 기지는 않았다
용변을 볼 때마다 한쪽다리를 쳐들지도 않았다
꼬리를 흔들며 납작 엎드리지도 않았고
아무나 보고 올라타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쨌냐고, 별 이상한 개 다 있다고
놈들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이제 마이너리그에서도 밀려버린 58년 개띠는
더 할 거짓말이 없어 그냥 멋쩍었다
- 성남 모란시장


On road

성남 - 모란장(4·9일) - 남한산성 - 퇴촌 - 분원리|얼굴박물관/분원백자관/붕어찜 - 팔당호와 남한강 - 바탕골예술관 - 천진암 - 나눔의 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 - 지월리 - 허난설헌묘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장구경이라지만, 모란장에서 나는 그놈의 견공들 때문에 자꾸만 쭈뼛거린다. 뙤약볕에 나앉은 그들의 등 위로 떨어지는 철망의 그림자는 음산하다. 불현듯 언젠가 모 방송사와 B.B(브리지도 바르도)가 벌였던 난데없는 ‘개고기논쟁’이 떠오른다. 그 논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남의 나라 식문화(食文化)를 자기 잣대로 왈가왈부한 육체파 B.B는 그렇다고 치고, 그것을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느냐 아니냐’로 몰고 간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무튼 개고기를 먹는 것을 이해는 하되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는 철망 안의 예비 개고기들에게 묻는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느냐고. 개들은 말이 없다.

1637년 인조가 당한 치욕이 어떠하든 보통의 행자는 공원입장료 2000원을 떼이지 않으려고 30분 안에 허겁지겁 남한산성을 넘는다. 그 사이 길 옆에 나앉은 동문 정도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다. 남벽수계곡조차 스치듯 지나치면 비로소 ‘단순통과자’로 분류되고, 돈을 돌려받는다. 돈은 돌려받았으되, 남한산성에 들어앉은 그 깊은 치욕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린다. 그러고도 얼추 퇴촌을 돌아 분원리 쯤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붕어찜 한 접시에 땀을 빼기 십상이다.

그러나 길은 생각 밖으로 심각하다. 앵자봉 아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조선말 젊은 유신(儒臣)들은 천진암에 은거하며 서학에 경도되었다. 강 건너 능내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 형제를 비롯한 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으나 핍박받았고, 분열되었으며, 마침내 일부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는 사이 천진암 승려들은 단지 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참수당하고, 절은 폐사되었다. 그 아이러니 위에 지금 한국 천주교회는 무려 100년에 걸친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원댕이마을 나눔의 집은 하나둘 스러져가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로 해서 이제 바라보기조차 안쓰럽다. 그 잘난 남자들 탓에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잘난 후손들은 그 상처 위에 소금이나 뿌려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싸줄 수 있는 건 그나마 모성일 뿐이다. 지월리의 허난설헌 무덤은 그래서 더욱 구슬프다. 조선에서, 여자로, 그것도 한 남자의 지어미로 태어난 것을 통탄했던 그녀의 무덤은 한쪽 어깻죽지로 두 애기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지난해 잃은 딸과/올해에 여읜 아들/울며 울며 묻은 흙이/두 무덤으로 마주 섰네/태양 숲엔 소슬바람/송추에는 귀화도 밝다/지전으로 네 혼 불러/무덤 앞에 술 붓는다 - 허난설헌 <곡자(哭子)>

허난설헌의 무덤이 그러안고 있는 것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무덤만이 아니다. 유택 앞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너머 원댕이마을처럼, 현실에서 패퇴한 남자들 뒤에서 치욕으로 스러지는 이 땅 여성들의 깊은 한숨까지도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겨우 위안의 실낱을 붙잡으려는 나는, 남자라서 부끄럽다.

 

다시 하나됨을 위하여


월경하는 새

흐르는 건 금이 아니다
새는 단지 조강리에서 조강리로 넘어간다
넘어가는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넘지 못하는 것이 죄일 뿐이다
산하는 손에 닿을 듯 나를 압박하고
새는 바람을 거슬러 길을 만드는데
그리움으로도 길을 내지 못하는 나는
훠워이, 가슴을 박차고 날아간 새가
저문 듯 선회하지나 않을까
조인 가슴을 쓸어내린다
- 김포 애기봉


On road

김포 - 애기봉 - 행주대교 - 행주산성 - 월드컵공원|
하늘초지공원 - 성산대교 - 선유도공원 - 여의도|
한강유람선 - 국립현충원 - 압구정 - 잠실 - 풍납토성 -
암사동선사주거지 - 한강조정경기장|경정 - 미사리|카페촌

* 애기봉에서 바라보는 북녘의 산하는 차라리 처연하다. 시계(視界)가 선명할수록 안압(眼壓)은 높아진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 강은 김포 조강리와 개풍 조강리 사이를 흘러가되, 양안으로 깊숙이 스미어든다. 그 물을 타고 북녘의 벼와 남녘의 벼는 자랄 것이며, 시간이 되면 익은 손을 들어 서로를 문안할 것이다.

그 옛날 적군에게 잡혀간 평양감사를 기다리다 죽은 애기(愛妓)의 전설이 서린 조강 가의 작은 봉우리를 ‘애기봉’이라 명명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애기의 한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1000만 이산가족의 한과도 같다’고 했다. 그럴진대….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은 두물머리 쯤 금강산에서 내려온 물과 몸을 합하고, 서울이라는 거대한 공룡의 배설을 헤쳐 김포 시암리 쯤에서 임진강 물을 더하니, 마침내 조강(祖江)으로 늬엄늬엄 흐른다. 합하고 합하여 흐르고 흐른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한강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서울이다. 한강에서 물과 사람은 끊임없이 전선을 형성하고 공수를 되풀이한다. 사람은 다리를 놓아 도강하고, 물은 중랑천이나 안양천 일대의 저지대쯤을 노리고 들어간다. 제방을 쌓고 섬을 깎아 만하탄(여의도)을 구축하면, 야금야금 모래를 밀어 올려 파괴된 섬에 반격의 교두보(밤섬)를 마련한다. 물에 비하면 사람이 훨씬 그악스러워서 오죽하면 강을 사이에 두고 제 스스로 남북으로 갈리기도 한다.

이런 신화도 있다. 난초와 지초가 어우러지던 아름다운 섬이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더미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밤낮없이 오니와 악취를 강으로 흘려보내더니, 또 어느 날엔가는 그 쓰레기산 위에 다시 풀꽃과 새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옆에 스타디움을 짓고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러니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좋다. 다시 한번 붉은 물결로 하나가 되어 분단졸업 선배국가인 독일로까지 넘실거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왕에 남과 북도 합하고 합하여 통일로 흐르고 흐를 수만 있다면, 그래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인천 차이나

구리 맥아더

2006년의 나는
1950년의 맥아더를 모른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데
사라지지도 않고 남아 있는 어떤 불멸을
나는 모른다
2006년의 나는
1950년의 전쟁을 모른다
죽은 것은 사람이고 싸움은 끝나지 않았는데
전쟁보다 더 오랜 어떤 미움을
나는 모른다
헛된 구호와, 헛된 자유와, 헛된 구릿빛을
그 긴 그림자를 정녕
나는 모른다
-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On road

인천 - 자유공원 - 차이나타운|중화요리 - 월미도|문화의 거리 - 영종도|해수피아/을왕리해수욕장 - 무의도|하나개해수욕장/실미도 - 송도유원지 - 인천상륙작전기념관 - 소래포구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원래 만국공원이었다. 따로 조계를 차지하고 있던 청국과 일국을 제외한 서방사람들이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공원은 철저히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을 위한 휴게공간이었다. 하긴 한반도는 이미 각국의 놀이터였다. 숱한 이방(異邦)들은 오로지 힘이 없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땅따먹기도 하고 전쟁놀이도 했다. 1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동상 하나만을 남겨놓고 얼핏 외세는 물러간 듯 보였지만 이번에는 그 동상을 놓고 자국민들끼리 또 다른 싸움을 벌였다. 잘났든 못났든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남는 법이다. 그리고 부끄러운 건 한낱 동상이 아니라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역사다.

한동안 ‘철거반원’들과 ‘수호천사’들이 맞붙던 작은 산마루를 내려서면 구릿빛 그림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난데없는 석상들과 마주친다. ‘서성 왕희지 상’과 ‘성인 공자 상’. 과장된 용마루의 자색과 금색들, 거리의 한쪽 벽면을 메운 삼국지의 삽화들, 치파오와 홍등, 재스민 향보다 더 진한 자장면 냄새, 이곳은 이른바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옛날 청관이 있던 자리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발아래로 어설픈 중국풍이 부두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잠시의 혼동을 가라앉히면 이 거리의 풍경은 어쩐지 낯이 익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지붕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을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오정희<중국인 거리>


오정희가 소설 속에 그린 풍경은 전후 인천이라는 그녀의 유년시절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은 우리 유년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 이곳의 풍경 역시 그 휘황한 칠만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본색으로 돌아갈 것 같기도 했다. 골목길을 몰려다니는 새카만 아이들과 부두에 버려진 고양이, 서모와 계모, 장궤들과 양갈보, 탄가루와 해인초 냄새, 공설운동장의 정치구호와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상상의 여백인 것조차.

중국인 거리에서 벗어나 월미도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배를 타고 영종도로 무의도로 아니면 더 멀리 덕적군도로 나아갈 것인가, 송도를 돌아 소래포구에서 출처불명의 횟감을 씹으며 협궤열차의 추억에 몸을 실을 것인가. 나는 배를 타기로 했다. 그리움으로 치면 소래가 더 끌렸으나, 이제는 사람으로 치일대로 치여 추억은 고사하고 상상의 여백조차 사라진 소래는 이미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으므로.

 

낙동강은 흐르는가

강 2

물이 적시우고 가는 건 자갈이 아니다
그 그늘에 자리잡은 묵은 신음소리다
물이 스치고 가는 건 풀잎이 아니다
뿌리 없이 세상을 떠도는 망령들이다
물이 휘돌아 가는 건 여울이 아니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무거운 아우성이다
흐르다가 스미어, 스미다가 흐을러
끝끝내 나아가는 곳은 바다가 아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우리들의 잠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그 깊은 잠이다

- 왜관 인도교


* 칠곡에는 칠곡이 없다. 구 칠곡읍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고, 지금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는 왜관이다. 팔공산 서쪽자락의 불교유적들을 제외하면 칠곡에는 뚜렷한 문화유적이나 내세울 만한 명소 또한 없다. 왜관과 다부동을 잇는 낙동강전투가 남긴 전쟁의 흔적이 칠곡의 가장 큰 문화유산이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왜관인도교는 오히려 서정적이다. 그해 여름은 꼭두서니보다 더 붉은 핏빛 서사였건만, 강은 이제 모든 것을 다 망각한 듯 한가롭기만 하다. 그래서 강은 언제나 무심한 존재인 것인가.

On road

구미 - 금오산|채미정/금오산성 - 박정희생가 - 낙동강 - 왜관|구상문학관/왜관인도교/왜관전적기념관 - 석적 - 다부동|다부전적기념관 - 송림사|오층전탑 - 가산산성

1950년 8월 1일,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왜관을 중심으로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했다. ‘Stand or die(사수냐 죽음이냐)’의 분계선이었던 이른바 ‘워커라인’은 서쪽으로 왜관에서 마산을 거쳐 진해로 이어졌고, 동쪽으로 영덕까지 이르렀다. 왜관교를 비롯한 낙동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들이 파괴되었고, 양측은 사선을 사이에 두고 필사적으로 대치했다.

마침내 8월 4일 오전 7시 첫 포성이 울리면서 낙동강전투의 막이 올랐다. 당시 낙동강전투에 투입된 북한군은 총 13개 사단, 이에 맞서는 한미연합군은 겨우 8개 사단이었다. 그나마 연합군이 믿을 수 있는 건 제공권뿐이었다.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 지역에 퍼부은 폭탄은 무려 3234개(960톤). 이 융단폭격으로 낙동강을 건너려던 인민군 4만 명 중 3만 명이 사망했으니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꼴이었다.
다부동 전적 기념비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조지훈 <다부원에서>


낙동강전투의 최대격전지였던 다부동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채 발굴되지 못한 시신들이 묻혀 있다. 그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피아의 병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유학산과 가산의 산비탈에 묻힌 주검들은 이제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으련만, 그 위를 무심한 녹음방초가 뒤덮고 있다. 어쩌다 모습을 드러내는 주검의 흔적을 쓰다듬는 산 자의 진혼은 애달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정선아라리

구절역

기차는 오지 않습니다
그렇드래요
작고 소박한 꼬마기차였습니다
지난 여름, 지독스레 비는 퍼붓고
세상의 모든 길은 끊어졌습니다
녹슨 철로 사이를 버티고 선
저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건
이제는 구절양장, 심심산골을 쏟아져내리는
서글픈 햇살입니다
- 정선 구절역


* 오래 전에 찾았던 구절역을 다시 찾았다. 그때 구절역에 기차는 오지 않았다. 강원도 일대를 휩쓴 호우로 철로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이 끊기고 난 다음, 잠깐 사이에 철로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났고 역 마당에는 녹슨 볼트, 너트들이 나뒹굴었다. 다시 찾은 구절역에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거의 바닥을 기는 수송률 덕분에 역은 폐쇄되었고 선로는 레일바이크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그때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종착역의 막막함은 이제 황당한 이물스러움으로 변해버렸고, 더불어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그리움도 끊겨버렸다.

On road
정선 - 정선장(2·7일장) - 난향노원|음부바위 - 항골|돌탑촌 - 아우라지|옥산장(정선아리랑 듣기) - 구절역|레일바이크 - 오장폭포 - 노추산계곡

이제는 명맥조차 희미한 밀양아리랑이나, 마치 ‘무대에라도 올라간’ 듯한 진도아리랑과는 달리 정선아리랑에서는 산골에서의 퍽퍽한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던 거칠현동(居七賢洞)의 은거선비들의 탄식에서 그 유래를 찾으나, 나는 그에 동의할 수 없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아침저녁 돌아가는 구름은 산끝에서 자는데/예와 이제 흐르는 물은 돌부리에서만 운다
- <정선아리랑> 수심편


뼈에 사무치는 아라리가락은 골 깊은 산과 여울 급한 물들이 빚어내는 소리이며, 사람이라면 단지 백성들이 피고 지는 소리일 뿐이다. 더구나 아라리가락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사발그릇이 깨어지면은 두세쪽이 나는데/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덩어리로 뭉친다/앞남산의 호랑나비는 왕거미줄이 원수요/시방시체 청년들은 삼팔선이 원수다

아우라지 처녀상과 나룻배
나라는 깨어져도 산하는 남으니, 그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 또한 떨칠 수가 없다. 관광열차를 타고 장터를 찾고, 부질없는 나룻배보다 차로 더 빨리 피안에 닿지만, 골짜기의 아라리가락은 여관방 한켠에 자리를 내어주고, 시름을 안고 달리던 선로 위로 레일바이크를 탄 유객(遊客)들이 내닫지만, 산골과 산골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수심 역시 따라서 진화한다.

신발 벗고 못갈 곳은 참밤나무 밑이요/돈 없이 못갈 곳은 행화촌이로다/술 잘 먹고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이러니/술 못 먹고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아, 나는 더 이상 말 못하겠다. 거칠현동 아래 백이산과, 별어곡과 자미원, 함백탄광과 예미역, 사북과 고한, 그 너머 강원랜드의 카지노에 이르기까지 막장과 막장 위에 들어선 허튼 이물들과, 그곳에서 무너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떨거지와 개털들의 삶을, 그 속에서 아우라지는 아라리가락의 깊은 그늘을.

 

바닷가의 추억

만리포 사랑

그날 당신의 숨소리는 거칠었어
온몸을 타고 넘는 파도소리
나를 아득하게만 했고
달라붙는 모래와 사금파리들
타다 남은 잿더미와 휩쓸려가는 싸움소리며
바다는 멀고 낯설기만 했는데
나의 젊음은 검푸른 밤하늘 밑에
무겁게 무겁게만 누워 있었어
여기는 어디일까, 문득 별이 떨어지고
식은 눈물 한방울 만리 밖으로 흘러갔어

- 만리포해수욕장 -

*젊은 날, 해수욕장에서의 기억은 참혹하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속된 욕망과, 마침내 바다에 닿았을 때의 그 황폐함이라니. 발정난 개처럼 쏘다니다가 아무 곳에서나 공연한 싸움판을 벌이고, 기어이 병나발에 취해 떨어졌을 때, 밤바다는 어둡고 축축했다. 그러나 보라. 한밤중 나의 취기를 깨우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그리고 그리움처럼 어디론가 떨어져가는 유성의 아스라한 꼬리를.

On road
서산 - 태안 - 꾸지나무골과 만대 - 학암포 - 신두리|해안사구 - 의항|독살 - 천리포수목원 - 만리포 - 파도리|해옥 - 낭금|자염 - 연포 - 갈음이|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촬영지 - 안흥성터 - 신진도 - 몽산포
아침 백사장 위를 달리는 여인은 행복한가.

올 여름 처음으로 만리포해수욕장이 개장하면서, 이제 본격적인 ‘바닷가의 추억’이 시작되었다. 불순하고 조악했던 우리들 추억의 대부분은 서해의 어느 바닷가와 맞닿아있기 십상이지만, 알고 보면 서해의 바닷가처럼 아늑하고 내밀한 곳도 없다. 특히 톱니바퀴 같은 태안의 해안들은 리아스식으로 바다를 밀고 당기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백사장들을 숨겨놓았다.
이원반도의 끝자락 만대에서 꾸지나무골을 거쳐 학암포며 구례포, 신두리의 해안사구와, 다시금 소원반도로 건너가 구름포에서 십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숨가쁘게 모래를 토해놓는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청춘에 젊은 꿈이 해안선을 달리면 산호빛 노을 속에 천리포도 곱구나 - 1958, 반야월 ‘만리포 사랑’

당신 너무 보고 싶어/만리포 가다가//서해대교 위/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천리포/백리포/십리포//바알갛게 젖 물리고/옷 벗는 것/보았습니다 - 2005, 고두현 ‘만리포 사랑’

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은돌이며 파도리, 통개에 이르는 아랫도리로 잠시 빠졌다가 근흥반도의 연포를 거쳐 갈음이로 저문다.

갈음이의 달빛은 수상하다. 옅은 이내에 싸여 때론 교태롭고, 때론 애잔하다. 달뜬 송림 사이에는 죽은 여배우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은주는 바로 이 숲에서 왈츠를 춘다. 그 왈츠는 관능이라기보다는 청순에 가깝지만, 왠지 모를 청승도 슬쩍 묻어 있었다.

모를 일이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사랑이 이 숲 속에 숨어 있어 밤늦도록 은밀한 숨소리를 토해낼지도. 나는 모르는 척, 그 허튼 망상 위에 텐트를 치고 흥건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모르는 여인과 몽산포의 바닷가를 달리는 꿈을 꾸었다.

 

이 땅으로 오는 사람들,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

아이야

등 돌릴 수 없어서 세상은 고단하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길은 땅 위를 떠돌고
떠돌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여태껏 사주지 못했던 통닭 한 마리 값을 셈하며
빈 주머니 뒤적거릴 때
돌아갈 곳 있어도 세상은 너무나 아득하구나
그러나 어쩌겠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고
허기의 깊이로 퍼올릴수록
삶은 그렇게 비어만 가는 것을
-오이도






* 오이도가 원래부터 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제가 염전을 만들려고 제방을 쌓으면서 섬이 되었다고도 하고 뭍이 되었다고도 하며, 그때부터 까마귀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 까마귀 귀를 닮았다 하며 ‘오이도(烏耳島)’라 불렀다 한다. 까마귀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도 없지만 사실 원래 지명인 ‘오질애(吾叱哀)’는 너무 슬프기도 하다. 안말을 중심으로 살막, 신포동, 고주리, 배다리, 소래벌, 칠호, 뒷살막 등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1988년부터 시작된 시화지구 개발사업으로 모두 폐동되고 섬 서쪽 해안을 매립, 이주단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은 ‘죽었다 살아난’ 시화호의 들머리쯤으로 여겨지는 오이도는 소주 한잔에 취해 졸다가 하차역을 놓쳐버린 지하철 4호선(당고개-오이도) 퇴근객들에게는 여전히 가장 멀고 아득한 섬이기도 하다.

On road
영동고속도로 서안산IC - 국경 없는 마을 - 오이도|굴회덮밥 - 시화방조제 - 대부도 - 선재도|바지락 - 영흥도|십리포 서어나무 - 제부도|바닷길 - 왕모대 - 궁평리|낙조


몇 해 전 추석날 느긋하게 영흥도를 찾은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웬일로 섬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막히는가 싶더니 호젓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해야 마땅할 바닷가에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우리와는 다른 것이 분명한 이방인들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영흥도에서 연륙교를 타고 선재도, 대부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화방조제 건너 안산이고, 그곳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세상 ‘국경 없는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연휴는 얻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은 비록 회색의 바다지만 거리가 가까운 그 섬들에서 시름을 달랬던 것이리라.


안산역 앞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은 그 속내만 제하면 이 땅에서 가장 ‘글로벌’한 곳이다. ‘국경 없는 마을’을 기록한 박채란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꼬마 티안과,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누리끼와 그의 친구 초리, 몽골 태생의 늦깎이 고등학생 따와와, 영화감독을 꿈꾸는 방글라데시인 재키와, 조선족 김복자 아주머니와, 그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재호 아저씨와, 코시안을 가르치며 ‘그래도 너희들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김주연 선생과, 중국, 필리핀, 태국,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 올림픽은 몰라도 아시안게임은 너끈히 치를 만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산다. 그들은 ‘태어난 곳은 있지만 고향이 없는 사람들(김재영 ‘코끼리’)’이고, 고장난 프레스에 한쪽 팔을 잃은 사람들이며, 위장결혼을 했거나 이혼당한 사람들에다,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던 사람들 밑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 ‘아고라파스(이산자)’들을 완강하게 묶어주는 것은 오로지 ‘꿈’이다. 그 꿈 밑에서 고통이나 가난조차도 평등하다.

무참하게도 길의 끝은 궁평리다. 1999년 화성 서신의 청소년수련원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궁평리 바닷가로 놀러왔던 유치원생 19명을 포함, 24명이 떼죽음을 했다. 그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전 국가대표 여자하키선수 김순덕씨는 국가에서 받았던 훈장과 표창을 반납하고 이 땅을 떠났다. 깡통 같은 컨테이너 박스를 2층, 3층으로 쌓고 그 안에 544명의 생명을 때려넣고 재웠던 나라, 근본원인은 제껴놓고 모기향이니 누전이니 화재원인을 둘러대기에 바빴던 나라, 모두들 그 끔찍한 기억마저 지워버렸지만 그때 ‘꿈’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놀랍게도 그나마 씨랜드사건을 노래한 것은 젊은 래퍼들이었다.

피우지도 못한 / 아이들의 불꽃을 / 꺼버리게 / 누가 허락했는가 / 언제까지 돌이킬 수 / 없는 잘못을 / 반복하고 살텐가 - H.O.T ‘아이야’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이 땅으로 몰려오는 사람들과, 도무지 살 수 없다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차라리 항상 길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을 안도했다.

 

칼은 겨울을 끊고 붓은 봄을 그린다



산중문답

아무도, 아무도 오지 않아 산그늘 자꾸만 길게 늘어지고
날 어두워 나는 외롭다
동자야, 스님은 아직도 동안거(冬安居)를 마치지 않았더냐
무위의 뜨락을 쓸던 아이는
에라, 싸리비 팽개치고 냅다 마을로 내빼 버리고
홀로 빈 절간에
어설피, 내포를 적시던 눈발마저 그쳐 버렸다
- 향천사 부도전 -

* 예산읍내의 향천사는 딱 제 지닐 만큼만 지닌 절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괴괴하지도 않다. 사람 사는 마을 뒷문을 넘기가 무섭게 나타나는 절은 또 그 너머로 금오산의 봉긋한 봉우리를 끼고 있어 속세간인지 산중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굳이 구별할 필요도 없이 절은 그냥 사랑스럽다. 이 절은 방영웅의 소설 ‘분례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름도 선(禪)스러운 ‘대휴문(大休門)’ 안쪽의 천불전에 똥례가 신랑점을 치던 불상들이 있으며, 멸운당의 부도 지붕돌에 마치 영정처럼 새겨진 얼굴은 보는 이의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는다.

On road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현충사|칼의 노래 - 온양민속박물관 - 온양온천 - 외암민속마을|연엽주 - 예산 - 향천사|분례기 - 추사고택|세한도 - 솔뫼성지 - 삽교호|함상공원



강원도가 가물면서 나의 겨울 길가기는 훨씬 협량해졌다. 딱히 마음에 드는 풍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풍경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마음의 소산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겨울은 시간을 끌고 봄은 아득하다. 삼남에까지 이를 것도 없이 나는 내포에서 저물었다. 항시 그랬던 것처럼 내포는 터무니없이 완고하다. 중앙권력의 주요한 배경이었던 만큼 땅은 낮게 엎드렸으되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아산의 현충사와 예산의 추사고택. 그곳이 겨울의 복판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이었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 김훈 ‘칼의 노래’ 서문

그해 겨울 김훈은 눈 녹은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큰 칼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았다 한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칼은 말해주었고, 영웅이 아닌 그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한다. 일러 무엇하랴. 김훈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는 나는 그 칼로 울음마저 끊어내야 했다. 새 문화재청장은 현충사를 독재자가 성역화한 기념관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으나, 이내 그 말을 거둬들여야 했다. 바깥의 공허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칼은 보온처리가 잘된 전시관 안에 드러누워 땀을 내고 있었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
- 김정희 ‘세한도’ 발문


현충사도 그러하지만 추사고택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음봉의 이충무공묘지처럼 사람의 온기가 식어버린 집보다는 무덤이 훨씬 참돼 보였다. 죽음 앞에 ‘불멸’은 공치사일 뿐이며 삶은 어쩔 수 없이 본색을 드러낸다. 죽음은 끊임없이 삶을 연민할 것이다. 그 연민 때문에 또 누가 아파하는가. 한줄기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겨울을 나고 있던 목련의 꽃망울이 잠시 붓끝처럼 흔들렸다. 마치 겨울의 복판에서 입춘방이라도 쓰려는 것처럼.

 

갓바위 부처님과 신비의 소나무

별을 그린다

나 아직 별을 빛으로 보지 못하니
오직 그리움으로 별을 그린다
천상의 나라여, 그리움으로도 보지 못하는
길이 있다면 슬픔으로나 가 닿을 일이다
그 맑은 하늘빛 눈물과
눈물처럼 투명한 별빛 하늘로
작은 계단 슬쩍 그려 넣으면
이내 시린 겨울이 오고 있구나
쓸쓸히 유성 하나 지고 있구나

- 보현산천문대 -




On road

경부고속도로 북대구IC - 팔공산|갓바위 부처님 / 동화사/ 파계사 - 79번지방도 - 가산산성 - 군위삼존석굴|제2석굴암 - 한밤마을|진동단 / 대청 / 돌담 - 28번국도 - 908번지방도 - 인각사|‘삼국유사’의 산실 - 신비의 소나무 - 35번국도 - 보현산천

문대|별빛마을(www.starvillage.co.kr)


팔공산의 약사신앙

겨울이 오면 갓바위 부처님은 부산하다. 속리는 멀고도 가깝건만 사람의 기구는 너무도 기구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합격턱이 후하다는 갓바위 부처님 덕에 나는 수험생 부모의 엉덩이만 바라보며 팔공산을 올랐다. 산봉우리에는 자식의 이름을 외는 소리로 끝없이 수런거리지만 부처님은 그저 말없이 지긋하게 눈을 감고 계시다.

팔공산은 우리나라 약사신앙의 1번지다. 흔히 갓바위 부처님이라고 하는 관봉석조여래좌상은 그중 산 1번지다. 그 아래 동봉으로, 비로봉으로, 삼성암터로, 불국사로, 기어이 동화사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을 없애주고 원하는 바를 들어 준다’는 약사여래는 오롯이 만산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팔공산의 약사신앙은 너무도 위풍당당하다. 산 길목에 들어서 있는 공덕비의 시주기에 가득한 진골·성골들의 이름을 보라. 그리고 마침내 TK불교의 위세는 동화사의 거대한 통일대불로 꽃을 피운다.

그 영험성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관봉까지 오를 다리 힘이 없거나 인파에 치이기 십상인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속인의 정보 하나를 귀띔한다. 인각사에서 보현사로 가는 길목인 군위군 고로면 학암리 속칭 성황골에 ‘신비의 소나무’가 서 있다. 수령 500년의 이 영특한 소나무는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녀자 등이 제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신기하게도 그 소원을 성취해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그 덕에 사법고시와 기술고시에 거뜬하게 합격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인간사 꿈결인 줄

성황골 소나무가 그러하듯 그 오랜 내력이나 가치에도 인각사는 덧없이 쓸쓸하다. 팔공산의 동쪽자락을 타고 달리다가 군위 쪽으로 길을 바꾸면 미처 핸들을 꺾을 사이도 없이 인각사 입구가 나타난다. 마치 시골 버스정류소처럼 길가에 나앉은 듯한 인각사는 일견 황망하기까지 하다. 인각사가 어떤 절인가. 보각국사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삼국유사’는 또 어떤 책인가. ‘삼국유사’가 있어 우리의 역사는 비로소 문학이 되었다. 역사적 기록의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상상력이 없는 역사는 얼마나 괴이한가.

일연 스님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왕의 만류도 뿌리치고 내려와 머물렀다는 인각사가 이 꼴이 된 것은 일제의 소행이 그 첫째 원인이었다. 임진왜란 때 보각국존비를 부수고 대웅전에 불을 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일제 때는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절터를 동강내고 말았다. 비록 나라는 되찾았지만 지금 우리가 인각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는 인근에 댐을 세워 이곳을 수장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래켰다.

즐겁던 한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한끼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 인간사 꿈결인줄 내 이제 알았노라


절 입구의 일연 시비를 마주하기 민망해진 나는 해가 지기 전인데도 보현의 별빛을 보러 간다는 핑계로 슬쩍 절을 빠져나와 보현산천문대로 향했다.

 

관촌수필


길과 집

어리석게도 집에서 길을 그리워하더니
길에서는 집을 그리워하다니
가는 만큼 가는 것이라고 다짐키도 하지만
매번 두고 온 불빛으로 눈이 어둡다
길은 하염없이 그리움으로 이어지지만
나는 끝내 그리움에 닿지 못했다
아직 남은 날이 있어
그리움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지만
나는 마침내 어떤 길에도 이르지 못하리라
그저 그리움의 허울만을 이고 다닐 뿐
- 외연도 상록수림


* 이내에 쌓인 외연도 당산숲은 달팽이의 천국이다. 이 신령한 숲의 풍부한 습기는 버섯과 이끼를 키워내고 놈들은 그것을 먹고 산다. 섬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이 숲에서 당제를 지낸다. 산 소가 제물로 바쳐지고, ‘복 받은 소’로 죽어간 소는 지태가 되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힌다. 그 힘으로 사람들은 고깃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남은 달팽이들은 여전히 음습한 숲에서 느릿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On road
서해안고속도로 대천IC - 대천항 - 외연도|상록수림 - 원산도 - 대천해수욕장|보령머드 축제(7월15일~21일) - 죽도 - 무창포해수욕장|바닷길 - 남포|오석 - 성주사지|우는 미륵 - 보령석탄박물관|냉풍욕장

내가 뛰놀며 성장했던 옛 터전들을 두루 살피되, 그 시절의 정경과 오늘에 이른 안부를 알고 싶은 순수한 충동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 계기였다. 비단 엉뚱하고 생소하게 변해버려 옛 정경, 그 태깔은 찾을 길이 없다더라도 나는 반드시 둘러보고, 변했으면 변한 모양새만이라도 다시 한번 눈여겨둠으로써, 몸은 비록 타관을 떠돌며 세월할지라도 마음만은 고향 잃은 설움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 이문구 <관촌수필1, 일락서산(日落西山)>



보령머드축제
그저 해수욕장이나 있는 동네 쯤으로 여겼던 대천을, 그곳 역시 한 향촌이며 부락인 것을 새삼 일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이었다. 그 어지러울 지경의 탁월한 토속어 솜씨가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은 이미 대천의 옛 정경을 진저리나게 되짚어낸다.

하지만 대천은 같은 서해이면서도 남도의 여느 바닷가 마을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겨울바다도 그렇거니와 제철 만난 여름바다는 삶의 진한 내음 대신 행락객들의 무분별한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해마다 열리는 ‘머드축제’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대천에서는 펄흙조차 유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삶의 깊은 그늘이나 진한 체취는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퍼 옮겨진 난장 위에서 마냥 내달리고, 구르고, 미끄러지고, 멱을 감는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아무런 여한이나 유감 없이 바다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보령경찰서의 오래된 망루는 이제 더 이상 ‘관촌’을 조망하지 않는다. 갈등과 전쟁의 시대를 증언하던 총탄자국도 다시 무성해진 담쟁이덩굴에 가려버렸다. 건널목 신호등 소리가 그치고 바리게이트가 올라가면 낡은 철로 위로 낯선 번호판을 단 차량들이 넘나든다. 그들은 대부분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거나 해수욕장에서 오는 길들이다. 그랬다. 관촌은 이문구에게는 고향이었지만 타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냥 타관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무창포 바닷길 대신 성주산의 옛 절터로 길을 잡았다. 석탄빛 개울을 따라 흘러가며 몽글몽글한 소나무들에게 눈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고즈넉한 절터에 이르기까지 그나마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일락(一樂)을 누려보고 싶은 까닭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뗏목 아리랑

슬픔을 엮어 떼를 만든다
여울은 이리도 숨죽여 운다
노를 저을 때,
흩어지는 물그림자는 나의 영정이다
시루바위를 넘어, 비추리를 넘어, 쾌괭이를 넘어
작은 또와리, 큰 또와리
넘고, 여울지고, 흐을러 마침내
목놓아 저문 바다에 닿는다
하늘엔 뗏장구름, 발밑은 칠성판
눈물에 가려 길은 아득하고
세상의 모오든 슬픔들,
합강에서 아우러진다
아우라져 길을 간다
- 인제 합강


*오대산자락의 을수골에서 발원하여 장장 170여 리 길을 달려온 내린천은 인제 합강에서 새로운 물줄기와 만난다. 그 물은 금강산 어디쯤에서거나, 내설악 깊숙이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이다. 이제껏 치받듯 북상하여 흐르던 내린천 물은 합강에서 짐짓 제 힘을 이기지 못해 100여m쯤을 더 나아가고서야 겨우 몸을 틀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거기서부터 물은 물을 더하고 더하여, 소양강을 이루고 북한강을 이루어, 마침내 한강으로 흘러 개포에 이른다. 그 긴 물길을 일엽편주 떠다니며 삶을 이루어야 했던 뗏목꾼들의 애환은 가슴 시리다. 삶이 그러할진대, 그 긴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도 여전히 하릴없는 나는 그저 길 때문에 고달프다.

On road

인제 - 합강유원지|번지점프 - 내린천|하늘 내린 레포츠축제(7월20~23일) - 현리 - 상남 - 미산계곡|천렵 - 개인약수 - 살둔산장 - 광원 - 칡소|열목어 - 을수골|내린천 발원지

나무들은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일평생을 살아간다. 움직이는 것은/그들의 시선뿐이다. 몸은/자기가 태어난 땅을 절대 떠나지 못한다.//떠나고 싶은 사람은/팔과 다리를 잘라 강물 위에/던져지는 수밖에 없다. … 하나의 세계와 결별하지 않으면/새로운 세계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 하재봉 ‘뗏목’

내린천 래프팅.
뗏목나루터였던 합강에서 내린천 물줄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면, 뗏꾼들의 자취는 간데없고 거센 물살 위로 원색의 래프팅 보트들만 쏟아져 내린다. 세상은 변했다.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 대신 시간의 유희만이 물살 위에 남았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결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군복색 현리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면 사가리요, 오른쪽은 삼둔으로 가는 길이다. 어차피 같은 은둔의 땅들이지만, 나는 내처 삼둔으로 나아간다. 오랜 피병처(避病處)였다는 미산계곡을 지나면 개인동(開仁洞). 전전 세기말 함경도 포수 지덕삼은 이 골짜기에서 곰을 쫓다 산중턱에 위치한 약수를 발견했다. 그는 약수를 조정에 바치고 후한 상을 얻었지만, 병을 얻은 이들에게 개인약수는 내내 그림에 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숨겨진 약수는 건강한 이들도 좀체 넘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약수 때문이 아니라 힘들게 산을 오르다보니 자연스레 병이 치유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난세의 피난처’라는 삼둔으로 가는 기점이던 살둔산장은 이제 주인을 잃고 비어 있다. 서울에서 ‘언론밥’을 먹다가 산에 미쳐 이곳까지 스며들었다는 전 주인장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이들과 대작하느라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 번거로움이 그를 쫓아내 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 역시 ‘지독한 은둔자’의 한사람이었을 뿐일까. 미진각(未盡閣)도 침풍루(寢風樓)도 다 버리고 지금은 또 어느 강물 위에 팔과 다리를 잘라 던져지고 있는지. 길을 더 나아가니 칡소폭포의 열목어들이 무슨 연유인지 물을 박차고 마냥 뛰어오른다.

내린천의 시원인 을수골로 접어들면서 나는 흐르는 강물에 대고 물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은 어떤 것이며, 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은 또 어떤 것인가. 그 길 위에서 지금 나는 여전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을 떠메고/뻘뻘 땀 흘리며 가고 있는 것은’(신경림 ‘뗏목’) 아닐지.

 

동해 1번지

귀신고래의 추억

야음을 틈타 길 잃은 고래 한 마리, 해안선에 걸려들었다. 밤길을 가는 택시운전자, 가물거리는 고래의 등줄기를 보았고. 그렇게 동해바다 마지막 고래잡이는 시작되었다. 폭죽이 터지고, 밤하늘을 가르는 작살. 누가 누구의 가슴에 살을 박는가. 누가 쫓고 쫓기는가. 공포, 공포만이 오로지 적이다. 헐떡이며, 어둠이 흩어지고 붙잡히고, 죽고, 죽이고 기어이 꿈도 희망도 없이 고래는 스러졌다. 아니라고, 바다는 아니라고 멀찍이 물러나고. 이윽고, 아침이 죽은 고래의 등줄기에서 번쩍거렸다. 오오, 화엄이여.
- 강릉 안인진 북한잠수함침투지


On road

강릉 - 허이대 - 잠수함침투지|통일공원(잠수함전시관) - 등명 낙가사|등명약수 - 정동진|
모래시계 - 집필마을 - 금진나루 - 옥계해수욕장 - 망상해수욕장 - 동해|오징어불고기(구미식당 033-533-8011) - 무릉계곡|삼화사/용추계곡 - 천은사|’제왕운기’의 산실

*강릉에서 고속도로를 내린 동해 일출기행의 첫머리는 황당하다. 조선 인조 때 허종과 이육이 ‘야인의 난’을 평정한 후 배로 동해를 지나다 지친 군사들을 쉬게 했다는 너럭바위 허이대(許李臺)는 해안도로를 넓히면서 이름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시인 강세환은 이곳을 일러 ‘허허, 허이대(虛以臺)’라 했다. 안인진의 바다는 더욱 기가 막히다. ‘옛적에 동해 왜구들이 얼마나 들끓었던지, 동해 일대 지신(地神)들이 모여 꾀를 내기를 모르는 배가 다가와 여기가 나루냐고 묻거든 아니라고 대답하라…그래서 동해 일대 모든 나루가 아닌 나루라 불렸는데…’(-김진경 ‘안인포구’). 그 바닷가에는 이제 세기말이 남긴 기괴한 유적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언저리 마을 이름이 ‘대포동’이라니!

최근 들어 관동 일대에 내려진 재난은 참혹하다. 불에 타고, 물에 휩쓸리어 반도의 경승들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길이 끊기고, 사람의 삶마저 뿌리 채 뽑혀 나갔음에랴. 그럼에도 길을 부추기는 자의 심사는 곤혹스럽다. 그러나 어쩌랴. 산하는 무너졌어도 사람의 삶은 다시 이어져야 하고, 비록 구호의 팔소매를 걷어붙이지는 못할지언정 시름에 겨운 어깨를 따뜻이 안아줄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삶의 용기는 삶의 활기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거늘.

정동진역에 정차한 기관차.
정동진은 어느날 갑자기 동해 1번지가 되었다. 오랜 내력을 갖고서도 바다에 붙은 간이역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던 곳이 그야말로 눈을 뜨니 하루아침에 신세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밤을 지새운 젊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해가 뜰 때마다 백사장은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그 열광을 등에 업고 시골역은 빠르게 변모해갔지만, ‘모래시계’ 세대에게 정동진역은 그냥 정동진역으로 남아 있었어야 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가끔 두 칸 열차 가득/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그리고 밤이 되면/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 김영남 ‘정동진역’

그 조붓한 풍경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몸살을 앓는 소나무와, 무분별하게 들어선 상가들과,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범선에다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까지, 넘치고 번쩍이는 휘황함에 묻혀 라면 속의 해안선은 사라지고, 파도는 앉을 의자가 없다. 그러나 또 어쩌랴. 어차피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덧없이 허물어지고, 세태 역시 바람처럼 변해만 가는 것을. 그저 추억으로나마 라면을 끓이고, 그리움으로 파도를 불러 해안선의 끝자락이라도 서성이면 될 일인 것을.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농바우 끄시기

엇차, 저 놈의 바위를 끄집어내려야 해
애기장수의 꿈따윈 이미 저물었는 걸
남은 갑옷쯤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흔들어야 해, 깨워야 해
우리 갈라진 가슴으로 하늘을 노하게 해야 해
기어이 멍석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려도
끄셔야 해, 굴려야 해
우리 무너진 가슴으로 강물까지 넘치게 해야 해
자꾸만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려도
멍든 가슴, 흐르는 눈물
무어든 억수가 되어 떠내려가게 해야 해
- 금산 농바우 끄시기


*금산의 전래 민속놀이 ‘농바우 끄시기’는 애기장수의 설화를 담고 있다. 옛날 손이 없는 노부부가 하늘에 정성을 들인 끝에 느지막이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갓 태어난 아기는 이미 이가 나고 겨드랑이에 날개 같은 비늘이 달려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더 해괴한 일들이 벌어졌다. 아이는 빗자루를 가지고 주문을 외어 군사를 만들고, 그 군사들을 호령하면서 병정놀이를 했다. 불안을 떨치지 못한 노부부는 집안이 망할 징조라 여겨 끝내 아이를 질식시켜 죽이고 말았다. 아이가 죽자 멀쩡하던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면서 어디선가 백마 한 마리가 달려와 강가의 농바우 밑에서 슬피 울며 숨을 거두었다. 그 말은 장차 아이가 장성해 탈 말이었고, 농바우 속에는 아이가 장수가 되어 입을 갑옷이 들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애기장수는 죽었지만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가뭄이 들면 농바우를 흔들어 화를 자초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설화 속에 담긴 염원이야 고금(古今)이 다르지 않다.

On road
청주 - 문의문화재단지|청남대 행 셔틀버스 - 청남대 - 대청호 - 옥천|정지용문학관/육영수여사생가 - 장계 - 금강유원지|천렵 - 양산팔경 - 시탕뿌리|인삼어죽 - 적벽강|농바우 끄시기/물페기농요

전북 장수 수분재 부근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 물줄기는 충북과 충남을 휘돌아 다시 전북 군산의 금강하구언으로 흘러내린다. 금강을 크게 세 도막으로 나누어보면, 무주, 금산, 영동, 옥천의 상류부와 공주, 부여의 중류부, 물빛이 탁해지기 시작하는 강경쯤에서 금강하구언에 이르는 하류부로 나눌 수 있다. 강의 유·소년기에 해당하는 상류는 그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온전히 시인 정지용의 몫이고, 서서히 서사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중류는 시인 신동엽의 강이며,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버리면서 강이 다하는’ 하류에서 마침내 채만식이 그 서사의 대단원을 이룬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정지용의 고향마을 옥천을 휘돌아 나온 실개천은 여기저기서 모여든 작은 물줄기들과 함께 금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금강은 대청호에서 잠시 제 몸을 가둔다. 하여 정지용을 따라가는 ‘향수기행’은 대청호의 문의마을쯤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격이다. 문의마을에는 충주호의 청풍문화재단지처럼 수몰지구에서 거둬들인 문화재들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다가 얼마 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남대로 가는 기점이 된다.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옥천에서 장계를 거쳐 금강유원지까지 거슬러 오르는 구간에서 금강은 가장 싱그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강가의 미루나무와 풀빛들은 어김없이 물빛을 닮았고, 방학을 맞아 천렵 나온 벌거숭이들에게 얼룩백이 황소는 한껏 게으른 눈빛을 보낸다. 이쯤 되면 두고온 아들놈이야 방학인데도 학원에 나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게 뻔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그놈의 손을 잡고 ‘텀벙’ 물로 뛰어들고 마는 것이다.

어름치가 노니는 지탄을 거슬러 오르면 땅은 영동 땅이고, 금강 또한 영동의 강이다. 여기서도 금강은 양산팔경을 빚어 강가를 거니는 이의 마음을 자못 느긋하게 한다. 모든 것은 한가롭다. 지루하던 장마도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금빛 햇살을 쏟아낸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하거늘, 오늘 하루만은 나도 영락없이 방학을 맞은 학동일 뿐이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해제반도 가는 길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올 걸 그랬어
흔들리는, 흔들리지 않는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로 열린 무덤들
살아온 날들이야 그렇다 치고, 살아가야 할 날들은 또
얼마만큼의 무게로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지
몸도 조금 비워두고 올 걸 그랬어
휘청이는, 비틀거리는 길 위의 날들이여
돌고 돌아도 눈물 아닌 곳 없고
피고 지는 풀꽃들 그리움으로만 내려앉나니
몸도 마음도 그렇게 놓아주면 될 걸 그랬어

- 영광 백수해안


*최근 건설교통부는 영광 백수해안도로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했다. 관의 일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안목에 주저 없이 동의한다. 이 길은 올라서면 푸른 하늘이요, 내려가면 푸른 바다다. 그 푸르름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담겨 있다. 백수해안도로는 그토록 아름답지만, 마음 가기로는 해제반도의 길들이 그 윗줄에 자리한다.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이 길은 붉은 황토밭과 낮은 구릉들 사이로 점점이 박힌 무덤들을 헤치며 가는 길이다. 그 너머로 바다는 너무도 아련하다. 해제반도의 한쪽 끝자락 도리포는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마을’이다. 이 역시 나는 어떤 이의도 달지 않으련다.

On road

영광 - 법성포|굴비 - 모래미 - 백수해안도로 - 향화도 - 두우리 갯벌과 백바위해수욕장 - 안악해수욕장 - 함평해수약찜 - 돌머리해수욕장 - 현경 - 해제반도|홀통/도리포 - 지도 - 증도|우전해수욕장/게르마늄갯벌 - 임자도|대광해수욕장 - 망운 - 조금나루해수욕장 - 무안 -호담항공우주전시장 - 몽탄 - 일로 - 회산백련지|백련대축제(8월11일~15일)

화산백련지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일찌감치 고창쯤에서 내려 백수해안도로를 거쳐, 해제반도를 돌아 무안으로 가는 것은 회산백련지의 연꽃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다.

‘원천강’이라는 무속신화에 연꽃이야기가 나온다. ‘오늘’이라는 소녀가 부모의 나라인 몇백만 리 밖의 원천강을 찾아가는 길에 연꽃과 큰 뱀 등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어렵게 부모를 만난 오늘은 자기를 도와준 이들의 해원을 진언하니, 부모는 ‘연꽃은 윗가지의 꽃을 따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주면 다른 가지에도 만발할 것이요, 큰 뱀은…’라고 했다.

10만 평에 이르는 회산백련지의 장엄은 1979년에 작고한 정수동 씨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에 동네아이들이 우연히 발견한 연뿌리 12개를 소중히 길러 이룩한 것이다. 말이 10만 평이지 한쪽 끝에 서면 다른 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연못에 푸른 연잎과 흰 연꽃이 무시로 넘실거린다. 가위 ‘군자의 바다’요, 청정무구한 극락정토다.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지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 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한 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이미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 속에 백련향이 그윽하니, 나는 잠시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머무름 또한 영원할 수 없으니, 나는 저물기 전에 다시 길로 나서야 한다. 그 길 위에서 과연 나는 어떤 꽃을 전할 수 있을는지.

 

홍천강 모곡 어디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빈 달이 넘치는 강을 비춥니다. 강물은 꼭 달의 원호(圓弧) 만큼만 넘쳐납니다. 그토록 세상을 떠돌았어도 나는 아무것도 담지 못합니다. 아래로 휘는 것도 단지 그리움 때문입니다. 올려다보면, 그것은 목마름이기도 합니다. 하많은 세월을 흘러 흘러왔지만 여전히 외로운 나는, 그냥 외로움으로 굴러갑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요. 세상은 교교하고, 내 빈 가슴은 달빛으로 출렁입니다.
- 수타사 대적광전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의 원래 이름은 수타사(水墮寺)였다. 그런데 해마다 승려들이 수타계곡의 용담에 빠져죽으니, 목숨 ‘수(壽)’자를 넣어 개명하게 되었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공작포란지지(孔雀抱卵之地)’였지만 인명만은 어찌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수타사도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였는데, 봉황문 사천왕상의 복장에서 한글로 지은 최초의 불경인 ‘월인석보’가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지어올린 ‘석보상절’에 세종이 찬한 ‘월인천강지곡’을 합한 책이다.

부처가 수많은 세상에 몸을 바꾸어 태어나 중생을 교화하심이 마치 달이 천개나 되는 강에 비침과 같으니라.
- ‘월인석보’ 1장 첫머리


On road

청평호반 - 가평 설악 - 홍천강 모곡|명사십리 - 팔봉산계곡 - 홍천 - 수타사|수타계곡 - 공작산자연휴양림 - 서석|옥선주/동학혁명전적지 - 미약골|홍천강 발원지(자연휴식년제로 2009년까지 출입통제)

그토록 시골스럽고 투박한 홍천강을 간다. 팔월 염천의 뙤약볕은 모곡 명사십리의 어디쯤에서 번쩍거리고, 옥수수 이파리 색의 강물에 몸을 담근 태공의 손끝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감겼다 풀렸다를 거듭한다. 견지낚시꾼이 노리는 것은 강바닥의 모래무지나 마자나, 아니면 풀잎 같은 피라미들일 것인가.

홍천강 모곡에서의 견지낚시.
너는 나를 물고, 나와 한 생(生)이 되려 한다//대쪽으로 납작하게 만든 외짝 얼레가 내 몸이다/물의 갈 길을 잠시 젖은 옷깃에 잡아두고,/시간을 풀었다 감았다 하는 동안 설망 속 깻묵들/스스로 향기롭다 - 문정영 ‘견지낚시’

거친 물살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견지낚시꾼의 몸은 휘청인다. 물살의 흐름에 따라 몸은 서 있어도 흘러가고, 그 흐름으로 귀조차 먹먹하다. 줄을 놓을 때 줄을 타고 떠내려가는 것도 세월이요, 줄을 당길 때 툭툭 손끝으로 전해오는 떨림 또한 세월일 뿐이다.

이제 놓을 때도 되었다/저 깻묵의 향도 가을볕에 씻기고 없다//홍천강 모곡 어디쯤, 미끼도 없는 나의 빈 낚시질

아하, 그렇구나. 어느새 입추도 지났으니 옥수수빛 강물도 더욱 깊어갈 것이고, 물길 옆 진짜 옥수수도 마냥 노랗게 익어가겠구나. 아무리 여름이 극성스러웠어도 세상의 모든 익어갈 것들은 어김없이 익어갈 것이고, 우리의 삶 역시 그렇게 깊어가는 것이로구나. 나는 여름의 한자락을 문득 놓아버렸다.

 

여름의끝, 갈론마을


고추

이제 여름은 내 몸 속에서만 그윽하다
신산(辛酸)의 세월이여
나를 이토록 단단하고 여물게 하였구나
온몸에 들끓는 열기조차
이리도 서늘하나니
나를 베어 물라
나는 그대 입속에서 아릿한
통증으로 말하리라
나 여직 살아있다고
불과 물과, 빛의 기억으로 살아있다고
- 괴산 청결고추


*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괴산 청결고추의 캐릭터는 임꺽정이다. 고추에 웬 임꺽정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까닭은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가 바로 괴산 출신이기 때문이다. 최근 홍명희가 살았던 제월리 가옥의 문화재 등록을 둘러싸고 보훈단체 등이 극렬하게 반발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은 홍명희가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며 일제강점기에 문학으로 민중의식을 고취한 사회변혁가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보훈단체 등은 그가 6·25 당시 북한 부수상을 지낸 전범(戰犯)이라며 반대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물리적 행사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래저래 ‘임꺽정고추’는 그 맵다 쓰다를 떠나서 아직도 엄연한 색깔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On road
괴산 - 고산정과 제월대|홍명희 문학비 - 괴강|다슬기 - 갈론마을|갈은구곡 - 각연사|석조비로사나불좌상 - 연풍성지

갈론마을 가는 길.
괴산호의 댐 옆으로 소롯길이 나 있다. 비록 포장은 되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겨우 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비포장 시골길이었다. 지금도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잠시 차를 멈춰 교행할 자리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 이 길을 다니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아 길 끝의 마을에 이르는 동안 차를 만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바람이 키 큰 미루나무를 ‘쏴아쏴아’ 하며 흔들어대는 길을 따라 5㎞ 남짓 들어가면 그 끝에 산으로 막힌 산맥이마을이 나온다. 갈론마을. 원래 이름은 ‘갈은(葛隱)’으로 칡뿌리를 캐어 먹으며 은둔한다는 뜻이다. 우암 송시열부터 홍명희의 조부인 홍승목, 국어학자 이능화의 부친 이원극 같은 이들이 이곳에서 은둔의 한 세월을 보냈다.

물 많은 괴산에 흔한 게 ‘구곡(九谷)’이듯이 이곳에도 갈은구곡이 있다. 갈은동문, 갈천정, 강선대, 옥류벽… 어느 곳이나 별유천지이지만, 마지막 선국암이 갈은구곡의 풍류를 대표한다. 선국암은 바둑판이 새겨진 암반으로, 바위 위에 이곳에서 노닐던 선비들의 시가 남아 있다.

옥녀봉 산마루에 해는 기울어/나 바둑을 끝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네/이튿날 아침 생각나 다시 찾아와보니/바둑알 알알이 돌 위에 꽃이 되어 피었네

은둔의 오지에도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옛 모습인 채로 남아 있는 초가집 지붕 위로 뭉게구름이 양떼들처럼 한가로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매미의 울음소리 대신 잠자리의 날갯짓이 무성해지면 이 골짜기에도 가을은 찾아오리라. 나는 무더위에 지친 몸을 추슬러 각연사의 ‘연못에서 나온 부처님’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늪에 빠지다



열리는 아침은 깊은 수렁으로 고이어들고
내 온몸을 휘젓는 지난밤의 허튼 꿈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였을까
불면의 우렁이 한 마리 흰 거품을 뿜어낸다
남은 꿈이 있다면 풀섶으로 젖어드는 이슬처럼
다만 적요하기를,
허덕이며 살아온 그 많은 날들만큼이나
그리 길지 않은 자취로
이내 사라지기를
- 창녕 우포늪


* 1억4000만 년 전 한반도의 생성과 함께 태어났다는 우포늪의 아침은 항상 새롭다. 그 너른 벌에는 1억4000만 곱하기 365만큼의 아침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아침을, 간밤에 쳐놓은 그물을 보러가는 뭍의 어부가 널빤지배를 타고 긴 장대로 저어다닌다. 그물 안에서 퍼덕이는 물고기들은 다시 찾아온 아침처럼 신선하다. 그물걷이가 끝나면 잠수복을 입은 아낙들이 우렁이를 찾아 나서리라. 세상은 그토록 질서롭건만, 부질없이 사람들만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나는 나의 아침을 그 두터운 늪 위에 조용히 뉘어놓았다.

On road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IC - 우포늪 - 창녕 - 하병수가옥|우포늪의 물억새로 지은 사랑스러운 초가 - 목마산성 - 화왕산 - 관룡사|반야용선 - 영산|만년교와 석빙고 - 부곡온천

잠자리 한 마리, 1억4000만 년의 세월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무제치’라는 작은 늪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을 때, 사람들은 맹목에 가까운 증오로 들끓었다. 그 까닭에 일면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볼 때 이미 어떤 이유조차 필요 없으리만큼 일방적이고 광폭했다. 그것은 소수의 연약한 힘 앞에 다수의 또 다른 연약한 힘들이 떼를 지어 퍼붓는 무차별적인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그까짓 도롱뇽 따위의 생명 가치보다도 자기들이 낸 세금의 가치를 더 내세웠고, 잘난 선의보다는 현실적 이득으로 따져들었다. 그러나 그조차 겉으로 내세우는 핑계였을 뿐, 그 안에는 단지 갈 곳을 잃어버린 증오심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얼핏 드러난 표적을 향해 끝없는 증오심을 이어갔고, 마침내 늪에 빠져버렸다.

애초엔 조금 젖었을 거야 젖은 줄 모르고/젖었을 거야 고이는 줄 모르고 온몸으로/고이게 했을 거야 제가 갇히는 줄 모르고/제가 앓는 줄 모르고 부둥켜 끌어안고 질퍽이는/질척이는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결코 놓지 않아/놓아줄 수 없어 푹푹 빠져들었을 거야/더 깊숙이 곤두박질치는/늪은, -박선희 ‘늪은,’

우포늪이 처한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1997년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고, 이듬해 람사지역(습지보전지역)으로 등록되면서 한껏 그 성가를 높여가는 듯했지만, 그 언저리에는 고단한 사람의 삶이 얽혀 있었다.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넘친다’는 이 지역에서 논농사를 짓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었고, 보전지역이 되면서 어로행위까지 중단 위기를 맞기도 했으니, 그 원성을 탓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탐방조사니 보전목적이니 하여 여기저기 길이 나면서 늪의 오염은 가속되었다. 가뜩이나 예전에 자식들을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게 해주었던 우렁이 등의 소출이 현저히 줄어드는 판에, 밀려드는 탐방객들로 밭농사마저 짓밟히기 일쑤였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꼭 공존의 관계만은 아닌 것처럼,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때론 긴장하고 투쟁하다가도, 때론 화해하고 공존하면서 그렇게 저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우포늪을 떠나면서, 늪이 완벽한 자정능력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사람 역시 그러하기를 꿈꾸었다.

 

메밀꽃 필 무렵

봉평 연가

꽃이 피고, 그 꽃길을 걸었지요
나지막한 꽃들은 정강이를 적시고
우리, 그저 흐드러졌지요
노래로 치면 어찌 꽃만이야 하겠으나
사랑이야 남김없이 우리들 몫이니
그저, 흐드러졌지요
햇빛은 오롯이 옥수수 이파리에서만 반짝이고
꽃대궁은 꿈결인 양 슬려 다녔어요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대고 속삭였지요
…사랑한다고
- 봉평 메밀꽃밭


* 해마다 9월이 오면 강원도 평창 봉평 일대는 온통 새하얀 메밀꽃 천지가 된다. 한때 수익성에 밀려 사라지는 듯했던 메밀밭이 다시 봉평 일대를 뒤덮게 된 것은 순전히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은 작가의 고향 봉평을 무대로 해서 태어났다. 비록 장평에 있던 가산의 묘소는 1998년 유족과 주민들 간의 한바탕 실랑이 끝에 끝내 파주의 통일공원으로 이장되고 말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의 소설과, 소설이 주는 향취를 무던히도 되살려냈다. 그 사연이 어떠하든 메밀꽃은 다시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 소설의 줄거리야 어떠하든 연인들은 메밀밭에서 마냥 즐겁다.

On road
영동고속도로 둔내IC - 양두구미재 - 태기산|고산야생화 - 보광휘닉스파크 - 봉평|효석문화제(9월8일~17일)/이효석생가/이효석문학관/가산공원/재래장터/흥정계곡/허브나라/무이예술관 - 대화장 - 금당계곡

허브나라를 노니는 젊음은 아름답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의 메밀꽃을 보러 가는 길은 봉평이나 대화, 아니면 진부에서라도 장이 서는 날이 좋다. 이 시골장터들이야말로 ‘메밀꽃 필 무렵’의 주무대들이다. 비록 규모도 줄어들고 옛 모습도 거지반 잃어버려 소설 속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강원도 산골장터의 면모를 더듬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하나들이다. 마침 봉평장은 2·7일, 진부장은 3·8일, 대화장은 4·9일장이므로 1과 10으로 끝나는 날만 피한다면 세 곳 중 한 곳은 넉히 둘러볼 수가 있다.

옥수수와 감자 같은 풋것들을 좌판이랍시고 벌린 할멈이나, 도무지 이런 시골바닥에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분재화분들을 늘어놓고 긴 간이의자에 누워 늘어지게 잠만 자는 장사치나, 장터 한 구석에서 메밀전 지지는 냄새로 시장에 겨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심 좋게 생긴 아낙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적어도 내게는 메밀꽃보다 더 토속적이고 더 탐미적이다. 어쩌다가 허름한 주막이라도 기웃거릴라치면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담소 속에서 ‘허생원’이나 ‘동이’의 후일담이다 싶은 이야기들을 엿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몇 점 남지 않은 이 낡은 풍경들은 이미 과거의 몫이고, 이내 사라질 시간들에 속한다. 장터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국적인 팬션들이며 이물스런 건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양두구미재 아래 휘닉스파크나 흥정계곡 깊숙이 들어앉은 허브나라의 풍경은 어떠한가. 한겨울 설원을 뒤덮는 원색의 스키복 물결이나, 사시사철 허브티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아로마향 같은 정담을 나누는 젊은것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주눅이 들고야 만다. 객기를 부려 기를 쓰고 그들 사이를 비집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치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뒤처지기 십상이다. 이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된장남’인 게다.

 

하늘재와 새재

마의태자의 꿈

누이여, 천년의 세월이 어찌 이리도 무상탄 말이냐. 빼앗긴 나라는 어디며, 세워야 할 나라는 또 어디더냐. 이미 이곳이 미륵댕이거늘 미륵하생의 땅은 또 어디더냐. 누이여, 천년의 꿈이 어찌 이리도 무심탄 말이냐. 베옷 한자락 쓸쓸이 바람에 날리고, 흰 머리카락 꿈결처럼 흩어지는구나. 어디로 가란 말이냐.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이냐. 누이여, 꿈 없는 잠이야 하마 또 천년은 기다릴 일이로다.
- 충주 미륵리 절터 석불입상


* 서기 935년(경순왕 9년)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더 이상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며 동생 덕주공주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으로 긴 망명의 길을 떠난다.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어 중원의 미륵댕이에 도달한 마의태자는 그곳에 절을 짓고 미륵불상을 북향하도록 세웠다. 덕주공주는 한걸음 더 나아가 월악산 남쪽자락에 덕주사를 세우고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새겨 미륵리의 석불과 마주보게 하였다. 그 후 마의태자는 개골산에서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마의태자는 끝내 개골산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의 송악이 가까우면서 산세가 험준한 인제 땅에 머물면서 고토회복을 꿈꾸었다는 설로, 인제 상남 김부의 대왕각이 그 잔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확증 없는 상상의 몫으로, 지금은 덧없는 세월 속에 무심한 절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On road
충주 - 충주호|유람선 - 송계계곡 - 덕주사|덕주사지 마애불 - 미륵리 절터|석불입상 - 하늘재|
역사·자연탐방길 - 수안보온천 - 문경새재|옛 과거길 - 문경활공랜드 - 관음요

경북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하늘재가 있다. 이 조붓한 고갯길은 조선초 문경새재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영남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또한 하늘재는 문헌에 기록된 한반도 최초의 도로이며 고개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 3년(서기 156년) ‘계립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길이 열린 이래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군사요충지였고 불교문화가 넘나드는 길이기도 했다.

관음리의 아침놀, 그 고요하면서도 맹렬한 불길.
새 길이 열리면 옛길은 잊혀지는 것인가. 당시로는 고속도로와 같던 영남대로의 관문으로 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서서히 관원의 검속이나 수탈을 피해 힘 없는 평민 또는 불온한 자들이나 넘던 쇠락한 길이 되었다. 가끔 하늘재가 역사에 등장하는 건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같은 전란의 와중일 뿐이었다. 그나마 조선시대 때부터 시작된 관음리 일대의 오래된 가마터들만이 소통과 교역의 옛일을 일러줄 뿐, 지금도 하늘재 정상에서 미륵리까지는 국립공원으로 묶여 무시로 넘나들 수 없는 길이 되었다. 그러나 길의 운명으로 치자면 그것은 말년의 행복이었다. 유주, 무주의 고혼들이 떠돌던 길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새재의 고난 역시 하늘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앙으로의 진출을 꿈꾸던 영남의 서생들은 부푼 꿈을 안고 새재를 넘었으나, 거개는 금의환향하지 못했다. 좌절한 자들에게 새재는 꿈으로는 넘을 수 있으나 현실로는 넘을 수 없는 높다란 고개였던 것이다. 반(班)의 경우가 그러할진대 상(常)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신경림의 장시(長詩) ‘새재’는 억압과 착취 속에서 처참하게 스러져간 민중의 꿈을 기록한다. 민중들에게 있어서 고갯길은 피와 눈물로 넘는 비탈이기도 했으나, 그 고갯마루에 올라서기만 하면 기어이 열리고야 말 것 같은 새 세상에 대한 꿈이기도 했다.

저 고개를 넘으면/새 세상이 있다는데/우리끼리 모여 사는/새 세상이 있다는데, - 신경림 ‘새재’

꿈이야 모든 사람들의 것이고, 길 또한 어디에나 있으니.

 

이어도 이어도 사나

우중우도(雨中牛島)

비 내리는 배를 타고 비 내리는 선착장에 내렸을 때
비 내리는 백사장은 비어있고, 비 내리는 벤치에
뭍에서 온 비바리 두 사람 이미 젖어 있다
젖은 꿈과 젖은 이야기와 젖은 추억과 젖은 풍경이
젖은 소줏잔에 담겨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다는 섬보다 먼저 젖어 있고
어차피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젖은 가로등 밑에 선다
한 번 젖은 몸이 다시 젖을 수도 있을까
어리석은 물음에 섬은, 웅크리며 돌아눕는다
- 제주 우도 서빈백사


* 어쩌면 우도는 비 내릴 때가 더 그럴싸할지 모르겠다. 주간명월(晝間明月)이나 야항어범(夜航魚帆) 따위는 그렇다고 치고, 천진관산(天津觀山;동천진항에서 한라산을 바라봄)은 이미 비구름에 덮여 있고, 지두청사(地頭靑沙;우도봉에서 바라본 우도의 푸르름)는 비를 머금어 더 푸르다. 사실 전포망도(前浦望島;제주 본섬 구좌 종달리에서 우도를 바라봄)부터 섬은 실컷 젖어 있었다. 이러니 후해석벽(後海石壁)과 동안경굴(東岸鯨窟)을 하릴없이 스쳐 다시 서빈백사(西濱白沙)에 설밖에. 젖은 우도팔경은 젖은 그대로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그 소슬함이란! 문득, 가로등의 온기와 소주잔의 열기가 그리워진다.

On road
제주공항 - 성산포 - 우도|우도팔경과 해녀 - 모슬포 - 마라도|이어도의 꿈

유혹의 시작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한 시인으로부터 왔다.

살면서,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하는 건/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온통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늙어가겠네. 창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경(景)’에서. - 김영남 <모슬포에서>

마라도. 최근 중국 정부는 마라도 남쪽에 있는 이어도가 한국영토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배경이 어떠하든, 나는 물이나 바다나 섬이나 그 모두가 그리움이나 마음속에 있지 않은 자의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쩌다 짧은 전갈을 주고받게 된 시인은 여행시집이랄 수 있는 ‘모슬포 사랑’을 보내주면서 각별한 사연이 있다는 모슬포에서 소주 한 잔 나눌 날을 기약했다. 그때부터 나의 성급함은 이미 모슬포의 포장마차에 가 앉아 있었다. 결국 기다림은 기다림대로 두고, 나는 홀로 제주의 ‘깊고 푸른 밤’으로 날아가기로 했다.

그 응답이었는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의 징크스 때문이었는지 제주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보통 2박3일이나 3박4일의 짧은 여정 속에서도 으레 하루 이틀쯤 끼어들던 비는 때론 서글픔으로, 때론 아늑함으로 다가오곤 했었다. 과연 이번 비는 어떨지, 그 답은 마지막 날 ‘모슬포에서’ 뒤로 미뤄두고, 나는 먼저 비 내리는 성산포로 향했다.

성산포에서 배로 20분, 해녀섬 우도에서 비바리들의 삶이나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런가, 마침 우도의 해녀들은 금채기간(자원 보존을 위해 채취를 금지하는 기간)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바당(바다)’ 대신 ‘우영(텃밭)’에서 마늘농사로 바빴다.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물일이나 밭일이나 소득이 있다한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빼앗기기 일쑤다. 그 곤고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하루종일 이어진 비바람 때문이었을까. 나는 숙소로 정한 언덕배기 숙소에서 어차피 내일이면 가야할 모슬포와, 그 앞바다 가파도와 마라도와, 또 그 너머 어디엔가 있다는 해녀들의 파랑섬 이어도로 끝없이 저어가는 꿈을 꾸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이어도 사나/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 윤금초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징게맹갱 외에밋들


벽골제(碧骨堤)에서

일렁이는구나 오로지 그리움으로만 일렁이는구나
만경창파 일엽편주 떠돌던 바다는 어디로 갔느냐
칠만칠천사백육십보를 돌아 구천팔백사십결로
세상의 모든 들판이란 들판은 다 모여들고
세상의 모든 바람 황금물결로 넘실거려도
아직 그리운 고향은 아니로다
가야겠느냐
기어이 물둑마저 넘어
뼛속까지 사무치는 사무쳐 출렁이는
그 바다로 가야겠느냐
그러나 그대
죽음 아니고는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 김제 벽골제


* 동양 최대의 수리시설이라는 벽골제는 숱한 민중의 뼛골로 이루어진 물둑이다. 벽골제 인근의 신털뫼와 되배미는 그 고단한 역사의 흔적이다. 축조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얼마나 많았던지 일을 마친 인부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어내니 산을 이루었고, 일일이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워 500명들이 논을 만들어 되로 되듯 한꺼번에 500명씩 세었다는 것이니. 더욱 애틋한 것은 청해진 유민들에 관한 기록이다. 장보고가 죽은 후 그 잔여세력을 두려워한 신라 조정은 완도의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 유민들을 벽골제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제방보수공사에 동원했다는 것이다. 한때 바다를 주름잡던 그들이 제방에 앉아 또 다른 ‘만경창파’를 바라보는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지….

On road
전주 - 귀신사|석수 - 금산사|미륵도량 - 증산유적|구리골약방 - 김제 - 벽골제/아리랑문학관 - 광활|
지평선 - 심포 - 망해사|낙조

망해사에서 바라본 서해 낙조.
모악에서 어머니의 자궁인 바다에 이르기까지 들판은 오롯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바람마저 거칠 것 없으니 황금물결로 일렁인다. 그러나 그것은 풍요가 아니다. 징게맹갱 외에밋들(김제 만경 너른 들)의 모든 나락들은 시름으로 고개를 떨군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이 넓디 넓은 사랑,/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묻은 그리움,/이 넉넉한 힘…. -이성부 ‘벼’

그러나 이제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팔아 더 황폐해져갈 뿐이다. 벼가 떠나면서 바치는 것은 여전히 사랑이지만, 우리는 애써 그 사랑을 잊는다. 아버지인 농부와 어머니인 대지는 그렇게 잊혀져간다.
고향을 떠나왔을 때 고향인 어머니도 잊힌다. 그러나 세상의 거친 들판에서 홀로 상처입고 헤매일 때 비로소 고향을 떠올린다.

아줌마, 얼마나 더 가야 지평선이 나와요/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잉/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천지사방/지평선 아닌 데가 없구나/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눈 감아도 떠도 다 가물거리겠구나 -정양 ‘지평선’

어찌 지평선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찾아야 할 것들은 결국 우리 곁에 있다. 다만 그리움이 없어 보지 못할 뿐, 보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 스러지고 떠나갈 뿐.

문득 망해사 아래로 아득히 지는 해가 보고 싶다. 그러나 그조차 이제는 끔찍한 일이다. 해는 이제 고군산바다의 수평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붉디붉은 놀을 가르는 것은 수평선보다 더 아득한 새만금의 길고 긴 물막이둑인 것이다.
그나저나 고향은 잘 다녀오셨는지. 마르고 마른 어머니의 가슴팍에서 실컷 눈물바람이라도 해보셨는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 가슴을 파고드는 그 피 묻은 그리움을 만나기는 했는지.

 

연어의 고향

슬픈 귀거래

사랑은 한낱 그리움일 뿐이어서
그 사랑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으리
그 많은 별빛과 그 많은 물살들
일일이 기억할 수조차 없나니
어느 구비에서 어느 사랑 때문에 상처입고
어느 어귀에서 어느 기억으로 헤매었던가
그래도 사랑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어서
숱한 죽음의 골짜기 돌고 돌아
피 묻은 물둑을 넘고 넘어
남은 힘이 있다면
오직 사랑만을 위해 나는 죽으리
- 양양 남대천 연어축제장

On road
한계령 - 양양 - 남대천|연어축제(10월 21~22일) - 내현리|굴피집 - 명지리|송이 - 어성전|탁장사마을 - 부연동|토종꿀 - 전후치 - 오대산

* 남대천 연어의 귀향은 처절하다. 멀리 북태평양의 오호츠크해나 베링해를 떠돌던 네 살배기 쯤의 연어들은 수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저 태어난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연어의 회귀처 중에서 가장 먼 남쪽에 속한다는 한반도에 이르는 동안 숱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지만 낮이면 태양으로, 밤이면 별빛으로 길을 잡아 쉼 없이 해류를 거슬러 오른다. 마침내 지치고 지친 몸으로 산란절식(産卵切食)의 굶주림과 민물의 삼투압을 이겨내며 모천(母川)을 오르는 동안에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상처에는 흰 물곰팡이가 피어난다. 가까스로 산란장에 이르면 이번에는 인간들이 쳐놓은 채포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양양내수면연구소 직원들에게 포획된 연어들은 나무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즉사한다. 이어 암컷의 배를 갈라 알을 받아내고 수컷의 정액을 그 위에 뿌림으로써 인공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남대천 연어는 일생에 한번뿐인 짝짓기조차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연어를 통해 되돌아보는 인간의 삶’이란 연어축제의 캐치프레이즈는 차라리 진실에 가깝다.

고향에 돌아온 것은/오직 죽기 위해서이다/고향에 돌아온 것은/마지막 사랑을 위해서이다/저 아래 오십천은/50개의 계단이 만들어/그 물 거스르기를/50번이나 하면/태어난 물 냄새에 안길 수 있다/이곳 남대천도/내 기억을 살리면/70번도 넘게 치솟아 오르는 급류의 계단을 지나/그 폭포/그 격랑/그 완만한 물살을 지나야 했다 -고은 ‘머나먼 길’

내현리 굴피집
하기는 어차피 내수면연구소의 채포망이 아니더라도 이제 연어가 남대천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곳곳에 보니 둑이니 하는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도(魚道)를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그 계단은 턱없이 높기만 하고 힘을 뭉그릴 웅덩이가 없으니 뛰어오를 수도 없다.

부질없기는 하지만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는 연어들을 위하여 남대천을 거슬러 올라보자. 오대산 두루봉에서 발원한 남대천은 부연동, 법수치, 어성전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간다. 51㎞에 이르는 남대천은 연어의 고향이자 양양의 젖줄이다. 그 맑은 물줄기로 이제껏 물것들을 품어주고, 산으로 스미어 올라서는 온갖 뭍것들을 키워냈다.

남대천 상류로 오르는 길목인 내현리에는 아직도 사람의 온기가 식지 않은 굴피집 한 채가 남아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이용구씨는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자식들을 키워내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이제 다 자란 자식들은 제 살 길을 찾아 도회로 떠났고, 남은 노부부마저 얼마 전 가까이 새 집을 지어 옮겼지만 아직 외양간에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소가 살고 있고, 집안 곳곳에 묻은 손때 역시 너무도 여실하여 그 집에 대한 기억과 애착마저 쉬 지우지는 못한다.

온갖 물고기가 득시글하다는 어성전(漁城田)에서 잠시 하조대 쪽으로 길을 바꾸면, 연어가 돌아오기 이전까지 송이향 그윽하던 명지리가 나온다. 전국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한다는 양양에서도 명지리는 으뜸가는 송이 산지다. 마치 연어가 꼭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송이 또한 나던 곳에서만 난다. 이처럼 남대천 자락의 모든 것은 가을이 깊어갈수록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우리네 삶 역시 그러할진대….

 

한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홀로섬

돌이켜보면 삶은 외로움이었다
어깻죽지에서 오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힘줄이란 힘줄은
온통 외로움을 견디려는 것이었다
하늘은 푸르러 더욱 시리고
파도 밑으로 심연은 어둡다
나는 무엇 때문에 솟아났을까
점점이 가슴 깊이 박힌 그리움들
저어갈수록 멀어져만 간다
소리쳐 불러도 목놓아 외쳐도
아득싸리 멀어져만 간다
그대 서럽디 서러운
눈물



- 독도


* 분명 독도는 우리 땅이지만, 항시 외로운 섬일 뿐이다. 홀로이기에 더욱 서럽기만 한데, 바람결에 묻어오는 건 한숨소리뿐이다. 삶이 무거울수록 섬은 이를 악물고 떠오른다. 떠오르기는 하였으되, 오도 가도 못하고 제자리만 맴돈다. 항시 거기 있기에 섬은 더욱 외롭다. 그리고 모두가 혼자다.

On road
울릉도|어화/울릉국화 섬백리향/ 성인봉 트레킹 - 해상관광|죽도/독도

…지나새나 뭍으로 뭍으로만/향한 그리운 마음에/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밀리어 밀리어오는 듯도 하건만/멀리 조국의 사직의/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동쪽 먼 심해선 밖의/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유치환 ‘울릉도’

울릉도 저동항 여명.
시인의 섬은 멀리 조국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토록 간절함으로 애달파 하건만, 뭍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여전히 심란한 것들뿐이다. 북에서는 무슨 용오름이라고 버섯구름을 피워대고, 남에서는 어쨌든 헐뜯고 싸워대기에 바쁘다. 이러고서야 울릉도야, 독도야 잘 있었느냐 찾아가는 행자의 면목이 설 리가 없다.

혹독했던 개척민시절, 울릉도에서의 비탈진 삶이나마 가능케 했던 것은 삶에 대한 끝없는 의지였다.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웠던 개척민들은 까치와 비슷한 깍새를 잡아 소금에 절여 그것으로 끼니를 이으며 겨울을 났고,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는 이제 막 산야에 돋기 시작한 산마늘을 뜯어먹으며 연명했다. 그때 울릉도 개척민들의 목숨을 잇게 해준 고마운 산나물을 울릉도 사람들은 지금도 ‘명(命)이’라고 부르며 잊지 못한다.

그때 개척민들의 정신은 지금 ‘댓섬’이라 불리는 죽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대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우기지만 진짜 대나무섬은 울릉도 도동항에서 뱃길로 20분 거리에 있다. 이름 그대로 대나무(섬조릿대) 천지인 죽도에 주민이라고는 김길철(58)·유곤(38) 씨 부자가 전부다.

“배가 고파서 들어왔죠. 밭이 있어 옥수수나 감자 따위는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한 30년 전 쯤 아무것도 없는 섬에 들어와 밭을 일구고 더덕을 키우며 살아온 김길철 씨는 5년 전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같이 죽도에 들어와 ‘죽도록’ 고생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아내는 섬 끝에서 산나물을 캐려다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원래 3명이던 죽도 주민은 단둘이 되었다. 그들의 삶의 애환은 바로 울릉도적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목숨 붙이고 산다는 게 이러할진대 울릉도에서 삶의 의지를 되짚을 일이다. 아무리 세상이 신산스러워도 삶의 의지만 있다면, 바람 불고 비 지난 뒤 하늘은 다시 푸르러지고 땅 또한 더욱 굳어질 것이다. 독도야 여전히 외롭겠지만.

 

누군들 따뜻한 남쪽마을이 그립지 않으랴


가을 천관산엘 가보세
-김영남 풍으로

가을 천관산을 아시나요?
등성이가 제법 완만한 게 잘 길들인 말 잔등인 듯 싶다가도 간혹 심술부리는 구비들과
목덜미 너머 갈기로 솟은 바위들, 억새터럭 무성한 그런 산을 아시나요?
이제 막 시작한 애인이거나 끝내야 할 정부라도 있다면 먼 듯 가까이 천관산으로 가세요.
봉우리 사이사이, 골짜기 사이사이 조랑말 몰듯 살살 몰고 다니면 어느덧 아랫도리는
늘어지고 기어이 혀 빼물고 말 거예요.
가고는 싶은데 같이 갈 여자가 없다고요?
그럼 홀로라도 천관산으로 가세요.
가을 깊어지고 만산 억새꽃들 길 떠날 채비 바쁘니, 잊혀진 사랑과 잊어야 할 사랑들
모두 불러 모아 산꼭대기에서 훠어이 훠이 날려 보내세요.
진짜 사랑 하나만 남기고 말이에요.
- 장흥 천관산


*장흥 출신 시인 김영남은 ‘가을에는 천관산으로 조랑말을 몰고 가세’라고 꼬드긴다. 아마 가보지도 못했을 ‘보르도’와, 아마 있지도 않을 ‘은경’이를 들먹이며 ‘천관산 행 고속버스 표’를 사라고 부추긴다. 그는 천관산이 김유신에게 ‘??치’맞은 천관녀가 눈물로 내려와 아픈 심사를 달래던 산이라는 속설을 믿는 모양이다. 그래서 목이 날아간 김유신의 말 대신 조랑말이라도 몰고 가고픈 것일까. 어쨌든 좋다. 산이야 한번 올라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산이니, 모르는 척 그의 ‘이바구’에 슬며시 넘어가 줄 일이다.

‘누군들 따뜻한 남쪽마을이 그립지 않으랴’는 고향 장흥에 눌러앉아 소설을 쓰는 김석중의 ‘정남진 고을, 장흥 읽기’라는 책의 제목이다.

On road

광주 - 화순 - 보림사 - 탐진호 - 장흥 - 장재도|해맞이 - 해산토굴|소설가 한승원 집필실 - 수문포|바지락회 - 소등섬|영화 ‘축제’ 촬영지 - 정남진 - 관산 - 천관사 - 장천재|태고송 - 방촌마을|돌장승 - 천관산문학공원 - 천관산|억새군락 - 회진|영화 ‘천년학’ 촬영지/이청준 소설 ‘눈길’ 현장(이청준 생가)

영화 ‘천년학’ 세트.
사실 나는 남도여행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남도에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보성(정확히 말하자면 벌교)에 가서는 주먹자랑 하지 못하며, 순천에 가서는 인물자랑 하지 못하고, 여수에 가서는 돈자랑 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 세 가지밖에 없는 나로서는 남도길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 한 가지가 더 늘었다. ‘장흥에 가서는 글자랑 하지 말아라’이다.

송기숙, 한승원, 이청준 같은 대가에다 시인 김영남, 소설가 이승우 같은 중견이나 신예들, 김석중 같은 고향지기들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고장 안팎으로 글쟁이는 차고 넘친다. 천관산 등성이의 무슨무슨 바위임을 알려주는 안내판만 해도 도저히 관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끄러우니, 이 땅의 문맥은 타고난 내력인 듯싶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화가 김선두와 같은 유명 무명의 예인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축제’에 이어 ‘서편제’ 후속작 ‘천년학’까지 장흥에서 찍고 있는 임권택 감독까지 거드니, 장흥 어느 구석도 예향(藝香)과 맞닿아 있지 않은 곳은 없다. 보성소리도 원래는 장흥이 그 본산이었다 하지 않는가.

이청준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장흥이 본래 변변한 들판 하나 없이 산지와 바다로만 이루어져 궁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재주라고는 그밖에 없었다고 하나, 장흥의 그 맑은 바다와 유장한 산세를 본 이라면 그 말이 객쩍은 농임을 안다. 정남진의 그 밝고 맑은 기운과, 그 그늘의 개미가 그리하였음을 안다.

어쩌다가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과정의 장흥문학기행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산자락을 맴돌면서도 끝내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던 천관산에 올라 억새 구경이나 한번 실컷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객꾼의 쑥스러움을 눌러주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튿날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기어이 천관산 등반 중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해갈이었다. 어차피 그간의 가물로 억새꽃 여물지 못했으니, 차라리 우중산행이 훨씬 그윽했다. 전날 이청준 선생은 글쓰기를 ‘씻김굿’에 비유했다. 나는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타고 내려오며 해원(解寃)을 느꼈다. 땀조차 식어 몸은 한기를 느꼈으나 마음만은 외려 따뜻했다.

경의(敬意)도 깊어지면 병이 되는 법이다. 종내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장흥과, 장흥 문맥의 강녕을 빌고 빌 뿐이다.

검은 바다, 흰 섬

길 위의 날들


정녕 꿈이었더란 말이냐
흐르다가 머물고, 흩어지고 휘날리어
끝내, 끝끝내 사라지고야마는
그런 꿈이었더란 말이냐
가슴으로, 가슴으로만 고이어드는
그 숱한 그리움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죄다 꿈이었더란 말이냐

그래 빛이었구나
아득히, 아득히 저어갈수록
사무치고 흐늑이며, 솟구치어 무너지는
그런 빛이었구나
아직 남은 날이 있다면
더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오로지 그 길 위에서만 스러질
마지막 빛이었구나
- 백도


*사실 이 땅의 마지막 비경이라는 백도를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거문도에서 1시간여 뱃길에 몸을 맡겨보라. 가급적 트럼펫 음악(‘두둥실 두리둥실’도 좋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도 좋고)이라도 들으며 새벽안개나 햇살을 뚫고 그 먼 바다로 나가보라. 검푸른 바다 위에 홀연 흰 빛 하나가 솟아오르니 그것이 백도이다. 그 끝의 끝을 흐르며 마냥 눈물겹도록 행복해 할 일이다.

그러다가 문득 백도의 신기루가 들려주는 꿈결 같은 노랫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부터 백도에서는 비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아지려 할 때 수많은 사람이 수런거리는 소리나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로 그 위험을 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어부들이 배를 돌려 거문도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풍랑이 치고 해일이 일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화를 면한 어부들의 믿음처럼 당신도 큰 믿음 하나를 안고 돌아올 일이다. 끝의 끝에서 길은 또다시 새롭게 열리는 것이니.

On road
여수항 - 거문도 - 백도
(거문도관광여행사 061-665-4477, www.geomundo.co.kr)


거문도등대는 100년 동안이나 불을 밝혀왔다. 거문도등대는 100년 동안이나 불을 밝혀왔다.
에이아라 술비야/어기여차 술비로세…술비소리를 잘 맞구보면/팔십명 기생이 수청을 드네… 님을 맞구서 경사로세/에이하라 술비야 -거문도 뱃노래

여수항에서 거문도행 뱃길에 몸을 실으면 바다는 술비소리로 출렁인다. 뱃전으로 흰 포말이 일지만 발밑은 죽음보다 더 깊고 어둑하다. 길 위를 떠도는 모든 넋은 그 길 위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못한다. 설령 돌아볼 수 있다 할지라도 이미 길들은 지워지고 없다.

1885년(조선 고종 22년) 4월 15일, 영국함대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구실로 아무런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거문도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22개월 동안 영국군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니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비록 영국함대는 1887년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철수하였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한반도 해역을 지날 때면 으레 한번씩 거문도에 들르곤 했다. 고도(거문도는 고도, 서도, 동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에 남아있는 영국군 수병묘지는 당시의 상황을 묵묵히 증언해주고 있다.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다
- 윌리암 J 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


거문도 뱃길은 검은 빛으로 일렁인다.
영국군 수병묘지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3기의 무덤 앞에 놓인 묘비명은 제법 착잡한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벽안의 이방인들과 희한한 동거를 해야 했던 외딴섬 사람들의 처지도 그렇고, 이역만리 먼 곳에서 숨을 거두고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17세 소년의 넋이 그렇고….

거문도에서 여수로 가는 귀선에 몸을 실으면 섬은 빛의 잔영으로 남는다. 수월산 봉우리의 거문도등대는 세상의 빛이 저물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휘한다. 길 위의 모든 넋들은 스스로 배가 아니므로 그 빛이 나아가야 할 빛인지 돌아가야 할 빛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설령 분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길을 가는 건 그 빛의 신호 때문이 아니므로.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삿갓의 팔도기행_내린천  (0) 2011.02.15
남도의 겨울 이야기  (0) 2011.02.15
이맛에 산다  (0) 2011.02.11
민삿갓의 필도기행_양양&인제  (0) 2011.02.09
유성문_내마음의길  (0) 2011.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