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어디로 갔는가
포천은 철원 못지않게 외눈박이 궁예의 흔적이 깊숙이 남아있는 땅이다. 다만 철원이 궁예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면 포천은 궁예의 회한이 배어있는 곳이다. 궁예는 송악에서 철원으로 재차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칭하며 통일된 미륵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호족세력과 결탁한 왕건의 쿠데타로 일시에 나라를 잃고 패잔의 길을 갔다. 그때 최후의 반격을 시도했던 곳이 후에 ‘궁예성터’로 불리는 보개산성이었으며, 그마저 패하자 한탄과 울음으로 넘던 곳이 한탄강이요 명성산이다.
918년 여름, 보리이삭이 막 패기 시작할 무렵 평강의 한 농가.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 농민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맞아죽은 사람이 있었다. 역사는 그가 바로 궁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역사(‘고려사’)는 승자의 역사일 뿐이다. 때로는 역사보다 전설이 더 진실에 가깝게 보인다. 아니, 가깝기를 바란다. 민중들은 패퇴한 왕이 ‘치사하게’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명에 순응하여 자결한 것으로 전한다.
지장계곡 안에 있는 신흥사터. 무너진 불대좌 위에 후대의 민중들이 그치지 않는 염원으로 돌탑을 쌓았다. |
더구나 국망봉에 이르면 민중의 관용은 그 정도를 더한다. 사서에는 궁예가 왕건과의 내통을 의심해 두 아들과 함께 참혹하게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인 강씨가 실은 궁예의 폭정에 대해 간언하다 강씨봉 아래 마을로 유배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왕건에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부인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 회한에 잠긴 궁예가 인근 산정에 올라 멀리 도성 철원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였다 하여 그 산을 ‘국망봉(國望峰)’이라 부른다.
지장계곡에서 철원의 턱밑까지 치받아 올랐다가 다시 국망봉으로 내려오는 길은 마치 민중의 꿈이 추락하며 그리는 포물선과도 같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민중’들은 그 처연함 속에서도 스스로 용서하며 마침내 실낱 같은 희망 하나를 가슴깊이 묻는다. 그런데, 나는 왜 모든 생기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11월의 끄트머리에 새삼스레 궁예의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인가.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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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개산성은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쌓은 산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매사 사리 분명한 역사학자들은 패퇴하던 궁예가 어찌 이런 성을 쌓을 겨를이 있겠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
●●● 명성산의 억새꽃마저 져버린 11월 말의 포천은 스산하다. 그나마 행자의 시린 가슴을 덥혀주는 건 이동의 갈비와 막걸리, 일동의 온천들이다. 얼핏 그 처지가 전혀 다를 것 같은 갈비와 막걸리지만, 알고 보면 이동갈비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주머니사정 딱하기만 한 군인아저씨’들을 위해 태어난 것이며, 그 궁합 또한 생각보다는 훨씬 잘 맞는다 한다. 귀로에 따끈한 온천물에 삶의 곤고함을 씻어낼 수 있다면 다가올 겨우살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리라.
●●● 가는 길
포천|반월성지/궁예미륵 - 영중 - 중리 - 지장계곡|
궁예성터/신흥사터 - 관인 - 한탄강 - 영북 - 산정호수|명성산 - 이동|
갈비와 막걸리 - 국망봉 - 일동|온천지구 - 강씨봉
양주 회암사지
- 양주 회암사지
생각이 사라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자연의 풍경이었다. 감히 그 정경을 두고 적멸이라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적멸에 다다라본 적은 없지만 내 상상 속에 그곳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적멸은 그저 그것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큰 움직임으로 남았던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그친 적멸은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움직임일 터이니 말이다.
- 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중에서
입담 좋은 유홍준 교수는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어머니의 입을 빌려 폐사지를 ‘망한 절’이라 했다. ‘망한 절을 망했다 하지 않고 거기서 좋은 것을 찾아 말했으니 복 받을 일’이라고도 했다. 불자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떨 때는 ‘망한 절’이 ‘흥한 절’보다 더 절답게 느껴진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고 남은 터’에 쑥대와 방초만이 무성하고, 빈 공간에 염불소리와 목탁소리 대신 산새소리와 낙엽 구르는 소리만 쓸쓸히 흘러 다닌다. 적멸은 아니더라도 적요하기 그지없으니, 이 폐허가 바로 가장 큰 절간인 것이다.
무학대사 부도. |
파국의 전야는 외려 화려했다. 불심이 두터웠던 문정대비(중종의 비, 명종의 어머니)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는 회암사에 머물며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이룩한 보우는 1565년(명종 20) 4월 5일 낙성식을 겸한 성대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틀 후 문정대비가 서거하니, 때를 기다려온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그는 사월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되어 마침내 제주목사 변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도 불길에 휩싸여 폐사되고 말았다.
이이의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보여지듯 조선의 유가(儒家)들에게 보우는 요승이자 적승(賊僧)이었지만, 그는 본디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종종 산천을 돌아보는 만행을 즐거움으로 삼던 ‘숨어사는 현자’였다. 그를 문정대비에게 천거한 것도 저잣거리에서 그와 어울리던 유가들이었다. 거부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면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간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며 지배이데올로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다.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니/무엇 때문에 문밖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겠나/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 아니니/대지에 가득한 산과 강이 무엇인고/적적한 가을 멧부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너울 춤을
- 보우 ‘오도송’ 중에서
화엄사지 부도(왼쪽)와 무학대사 부도 앞 쌍사자 석등. |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 늦가을 회암사지는 1만여 평의 빈 터에 적요만이 가득하다. 봄이면 그토록 흐드러지던 벚꽃나무의 잎마저 시들고, 여기저기 흩어진 주춧돌 사이의 잡초들 또한 서리 맞아 누렇게 변해만 갈 때 회암사지는 비로소 ‘폐사지의 미학’을 완성한다. 옛 부도전이었을 법한 곳에 남은 키 큰 부도 1기와, 절이 불탄 후 새로 지은 회암사 앞 언덕바지에 자리한 지공, 나옹, 무학 3화상(和尙)의 부도와 부도비, 석등 등이 옛 회암사가 남긴 유물들이다. 특히 조선시대 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그 앞에 놓인 앙증맞은 쌍사자 석등이 눈여겨볼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소흘에서 고모리 쪽으로 길을 잡으면 늦가을 호숫가의 낭만적인 정취를 거쳐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 가는 길
의정부 - 양주 - 덕정사거리(우회전) - 회암사지 - 소흘 - 고모리저수지 - 국립수목원(예약관람) - 광릉 - 봉선사
서천 신성리 갈대밭
- 서천 신성리 갈대밭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전문
서천 신성리의 갈대밭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가을이 저무는 소리다. 그것도 서로가 몸 부비며 서럽고 시리게 저무는 소리다. 무릇 모든 것에는 그 끝이 있어, 끝은 처연하고 서글프다. 갈꽃이 시들 때 세월은 무참하고, 갈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추억조차 아스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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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당나귀 귀를 가진 미다스(Midas) 왕의 비밀을 안 이발사는 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비밀을 묻는다. 그러나 흔들리는, 생각하지 않는 갈대는 끊임없이 그 비밀을 전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삼국사기’는 더욱 끔찍한 은유를 들려준다. 보장왕을 폐위하는 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그 표지로 갈대(蘆)를 모자에 꽂는다. 그 연유야 어떠하든 나는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사 42:3)을 믿는다.
서천 신성리의 갈대밭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가을이 남기고 간 소리다. 갈잎의 서걱임 밑에 갈게는 바스락거리고, 겨울을 나려는 물오리의 날갯짓은 조용히 퍼덕인다. 생명이 다하는 곳에서 생명은 이어지고, 순환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순환은 시작된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강을 따라 내려가면 금강하구둑이 나오고, 이곳에는 철새탐조대가 세워져 있어 이제 막 찾아들기 시작한 겨울철새를 조망할 수 있다. 차를 타고 둑을 넘어 직접 군산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장항 도선장에서 배를 타고 추억에 젖어 강을 건너는 맛 또한 각별하다.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천IC - 서천 - 기산 - 한산|한산모시관(소곡주) - 신성리 갈대밭
감나무 그리고 오동나무
-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함민복 ‘감나무’ 전문
●●● 12월의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들어가지만, 굳이 그리 하지 않아도 낙조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고려산 적석사의 낙조봉이 바로 그곳이다. 내가 저수지 너머 들판이 먼저 바다로 떨어지고, 음영이 아련한 뭍섬들 너머로 마침내 해가 진다. 더구나 석모도 보문사 낙조는 눈썹바위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하지만, 적석사까지는 비록 가파른 길이기는 해도 차로 오를 수 있다. 해가 지는 섬에서 하룻밤 묵을 요량이면 밴댕이회에 인삼막걸리 한잔으로 몸을 덥힐 일이다. 한참 제철인 순무김치에 ‘우리옥’(가화시장 내, 032-934-2427)의 따끈한 가마솥밥으로 배를 채운다면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을 것이고.
위_석모도 가는 뱃길. 아래_ 동막갯벌. 근처에 살면서 시를 쓰는 함만복은 이 ‘뻘’ 에서 ‘말랑말랑한 힘’ 을 느낀다고 노래했다. |
김포 - 강화대교|염하물목 - 용흥궁(철종의 즉위 전 사저) - 강화지석묘 - 창후리 선착장 - 교동도|
연산군적거지 - 황청포구|용두레마을 - 외포리 선착장 - 석모도|보문사 낙조 - 동막|시인 함민복 집필실
오랫동안 내 마음을 한껏 사로잡았던 소나무는 이제 서서히 감나무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의연함이야 따를 바가 없겠지만, 어떨 때는 그 고식적인 의연함이 오히려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반면 감나무는 한 해의 인생살이에도 파란만장한 곡절을 엮어낸다. 희고 노란 꽃에서부터 붉디붉은 열매에 이르기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푸른 잎을 떨구어낸 다음 드러나는 오롯이 검은 심재는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으니. 그 짙은 영혼의 음영은 적조한 이의 마음을 울린다.
게다가 요즘은 시골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지라 어지간한 감나무는 입동을 훌쩍 넘기고도 가지가 꺾이도록 단심(丹心)을 매달고 있기 일쑤다. 까치밥 정도가 아니라 잘하면 그 붉은 열매는 성탄트리의 전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빛은 축복이 아니라 어둠을 보여준다. 탄생이 아니라 소멸을 비춰준다.
해마다 세밑이 되면 나는 무슨 의무방어전이라도 치르듯이 강화도로 간다. 염하물목 건너 강화도령 철종이 지게작대기를 지분거리며 놀았다는 용흥궁이며, 적석사의 낙조나 황청포구의 쓸쓸함, 석모도의 빈 소금창고들과 동막의 바랜 갯벌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저무는 시간을 깨우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저무는 시간 속에서 만나는 쓸쓸함이야말로 한 해의 끝에서 누리는 최대의 호사일 뿐이다.
연산군적거지는 교동도 읍내리의 읍성 안에 있다. |
거기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적거지가 있다. ‘왕의 남자’의 그 왕은 훈구대신들의 반정에 밀려 1506년 9월, 조선왕실 전용유배지 교동도에 유폐되었다가 두 달 후인 11월, 전염병으로 죽었다. 족히 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의 적거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빈터와 옛 정자(井字)우물 하나만이 남아 있다. 폐쇄된 우물 속에는 괴이하게도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누군가 그 오동나무 둘레에까지 철조망을 쳐놓았다. 아무리 ‘오동나무가 우뚝한’ 교동도(喬桐島)라지만 폐왕의 폐정까지 파고든 오동나무와, 그마저 가둬버린 철책의 의미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쇠잔하여 검붉은 감나무거나 우물에 발을 빠트린 오동나무거나, 그 모든 것이 보여주는 퇴락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제 해는 지고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들어야 할 시간일 뿐이니.
조개 속에 살고 있는 새
겨울 천수만에서 나를 닮은 새를 보았다/조개 속에 살고 있는 새를 보았다/나도 한때는 한 마리 새였다/내 단단한 날개 속에 갇혀 날지 못하는 새였다/제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비상의 꿈을 보려고/연한 황갈색 조개껍데기의 날개를 열고/살며시 머리 내미는 나를 보았다/바닷물처럼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을 피해/흑갈색 말랑한 부리와 뽀얀 얼굴을 소리 없이 거두는 나를 보았다/언젠가는 삶의 뜨거운 햇빛도 칼바람의 고통도 겁내지 않아야 한다고/단단한 이 조개껍데기도 날개가 될 거라고/꿈꾸는 조개를 보았다/겨울 천수만에 가면 나를 닮은 갈매기 한 마리 살고 있다/바다의 짙은 안개를 뚫고 푸른 바닷물 날개로 뚝뚝 떨구는/갈매기조개 하나 푸드덕대고 있었다
- 김윤하 <갈매기조개> 전문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서 천수만 일대를 떠돌 때, 입은 오랜만에 호사를 누린다. 천혜의 어패류 서식장이자 황금어장이었던 천수만이 둑으로 가로막혀 절반쯤 간척지로 변한 후, 천수만의 새로운 주인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철새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AI(조류 바이러스)의 주범으로 철새들이 지목되면서 그들의 위세는 현저히 기가 꺾였고, 그 대신 그 수효가 급격히 줄어들던 어패류가 해산물을 선호하는 시중의 기호에 따라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간월도의 어리굴젓이야 새삼 이를 것도 없고, 석화와 대하, 새조개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스태미나식에 웰빙식임을 내세워 탐조(探鳥) 대신 탐미(探味)에 나선 사람들의 발길을 다투어 붙잡는다. 다 같은 천수만 연안이니 어느 곳인들 그 맛이 특별한 차이가 있을 리 없지만, 나는 급속히 관광지화한 안면도 쪽보다는 비교적 한갓지고 값이 헐한 남당포구 쪽을 즐겨 찾는다. 그래야 홍성방조제 건너 천북굴단지와 키조개로 유명한 오천항이나 광천의 새우젓토굴까지 이어다니며 맛의 순례를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당포구는 수년 전 내가 처음으로 새조개와 입맞춤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포구에 늘어선 간이횟집 가운데 하나인 ‘영실네’에서 처음 맛본 새조개 샤부샤부의 맛은 그저 황홀했다.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그 맛도 맛이었지만, 키다리 아줌마의 소박한 인심과 앞바다로 지는 노을이 내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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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개는 왜 새조개인가. 물속에 있는 동안 새조개는 가끔씩 조가비를 벌리고 ‘발’이라 불리는 속살을 밖으로 길게 늘여 빼는데, 그 생김새가 새의 목과 부리를 쏙 빼닮았다. 그 까닭에 바다 밑바닥에 사는 조개에 ‘새’자가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새조개의 주산지인 남해 바닷가에서는 갈매기조개 또는 오리조개로도 불린다.
사실 새조개가 발을 늘여 빼고 있는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조가비의 몇 배나 되는 발로 주변을 슬금슬금 더듬는 모습은 때론 징그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이 발 때문에 새조개는 수중에서도 날아다니듯 잽싸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은 바닥을 기면서도 하늘을 날기를 꿈꾸는 시인의 몽상을 끝없이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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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포구는 아직 잠자리가 조금 불편하다는 흠이 있다. 그래서 별미를 눈앞에 두고 기어이 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주당이라면 어쩔 수 없이 안면도 쪽으로 길을 잡는 것이 좋다. 사실 붐비는 것이 그리 싫지만 않다면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은 안면도 쪽이 훨 낫기도 하다. 안면도 남쪽 고남면 장곡리 대야도 입구에는 생전에 천상병 시인이 살던 집이 있다.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의 시처럼 그가 살던 집도, 집 앞의 바다도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 - 천수만|간월도 어리굴젓 - 남당포구|새조개와 대하 - 홍성방조제 - 천북|굴단지 - 광천|토굴새우젓
오지 않는 협궤열차를 기다리며
- 소래포구
저 오래 버려진
갯벌처럼 드러낸 가슴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온기 나누었을 것이다 오지 않는 협궤열차를 기다리며,
바람이 귀신 울음소리를 내며 윙윙대는 밤이면 너무 외롭고 막막해져서 서둘러 한몸이 되어 엉켜버리기도 했을
달빛 커튼 아래
-강해림 ‘소금창고-소래포구에서’ 일부
소래에서, 갯벌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오로지 먹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과, 기어이 먹히기 위해서 오는 갯것들의 한바탕 싸움이 끝난 후 다시 갯벌에 버려지는 유해들과, 그것에 기대어 사는 갈매기들의 배설물까지 다 먹어치운 다음에도 갯벌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래서 소래에서, 갯벌은 사람들의 추억까지도 먹어치운다.
소래포구의 갈매기들은 이제 먹이를 찾아 높이 날지 않는다. 그래도 갈매기들은 비만하다. |
젊은 날, 상처받은 영혼은 곧잘 0.762m의 좁은 궤도 위에 몸을 맡기곤 했다. 어천, 야목, 사리, 일리, 고잔, 원곡, 군자, 달월 그리고 소래 건너 남동, 송도까지 수인선 간이역마다 올라선 풋것과 갯것들이 그 영혼과 적당히 몸을 뒤섞었다. 그 비린내에 섞여 있는 바람과 소금기가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순정했던 젊은 날의 아픈 추억 따위를 새삼 꺼내놓지 않는다. 단지 ‘딸따리’라 불리던 협궤열차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피할 정도로 속도가 느렸다든지, 안산 원곡고개에서는 힘이 달려 손님들이 내려서 기차를 밀어야 했다느니, 심지어 화성 야목의 건널목에서 협궤열차와 버스가 부딪쳤는데 열차가 덜렁 넘어지더란 이야기를 하며 배꼽을 잡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연신 출처불명의 횟감들에 젓가락질 해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래어시장 갈치아줌마. 상인의 얼굴은 제 물건과 닮게 마련이다. |
소래에서 갯벌은, 그냥 밀려왔다 밀려간다. 생산의 원형이기를 포기한 갯벌은 소비의 배출구로서 고여 있으면서도 밀려가고, 밀려오면서도 고여 있다. 옛 소금밭의 염기마저 사라져버린 지금, 썩지 않아도 이미 썩어간다. 소래에서 사람들은, 추억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갯벌의 그늘에 떠밀려 재빨리 삶의 진짜 저잣거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이제 좁고 느린 협궤열차는 오지 않는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인천해양생태공원의 갯벌과 정경이해초. |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월곶IC - 월곶포구|마린월드 - 소래포구 - 인천해양생태공원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장수IC
서울은 지금 몇 시인가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 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정호승 ‘서울의 예수’ 일부
철이 들고부터 나는 세모(歲暮)와, 세모라는 말을 좋아했다. 모든 것은 서서히 저물어 다시 시작을 준비한다. 그 어스름이, 회한과 기대의 교차를 교묘히 감싸 안는다. 참회는 용서를 낳고, 용서는 희망을 낳는다. 그 어스름에, 고통마저 달콤하고 눈물조차 따뜻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세모는 사라졌다. 00:00을 기점으로 어제는 단지 어제이고, 내일은 그냥 내일일 뿐이다. 해거름도, 동터옴도 없이 그저 캄캄한 밤중 아니면 멀쩡한 대낮일 뿐이다. 모든 것을 남루하게 하는 낮과 모든 것을 휘황하게 하는 밤이 잽싸게 교대하고, 그 사이 해는 저물지 않고 곧바로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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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신데렐라의 구두, 가리봉,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희대의 권신 한명회가 난데없이 갈매기를 벗하여 놀았다는 압구정은 이제 강남 1번지가 되었다. 정자가 허물어진 자리에 고급아파트가 들어서고, 한가로이 떠돌던 갈매기 대신 아우디를 탄 오렌지들이 물 좋은 곳을 찾아다닌다. 밤새, 프라다를 입은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루이비통의 강렬한 환형 불빛은 블랙홀처럼 모든 욕망을 빨아들일 듯 번쩍거린다. 아르마니, 구찌, 샤넬, 버버리, 페라가모… 부르기도 벅찬 럭셔리들 사이에 ‘드림성형외과’의 간판은 오히려 소박하다. ‘느리게 걷기’라는 슬로푸드점 간판에 반색을 해보지만 웬걸, 그 밑에 딸린 작은 글씨는 ‘모델라인’이다. 잘빠진 오렌지들이 호텔 라운지나 심야카페라도 찾아 하나 둘 빠져나간 다음, 아직까지 로데오에 남아 있는 것은 갈 데 없는 ‘낑깡’이거나, 오렌지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들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새벽이 온다.
말린 미꾸라지, 삭힌 오리알, 양고기꼬치, 개고기샤부샤부 등 별 희한한 음식이 넘쳐나는 옌볜거리지만 ‘개고기라면’ 은 단연 압권이었다. |
●●● 수입명품들로 넘쳐나는 압구정이지만, 잘 찾아보면 의외로 아기자기하고 톡톡 튀는 소품들을 파는 가게가 많다. ‘골목이 있는 서울, 문화가 있는 서울’(경향신문사 간)을 펴낸 이동미는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 KTF 바로 옆의 ‘twin’과, SK텔레콤 옆 골목의 ‘ZU’를 추천한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와는 달리 가리봉동 구로디지털패션밸리는 국내 브랜드의 상설할인매장이 주를 이룬다. 유명의류업체의 제조공장이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물류센터만 남게 되자 재고품을 처리하는 패션할인타운으로 변모했다. 선호하는 특정 브랜드가 있다면 직접 공장으로 찾아가는 것도 좋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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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담에서 맞는 새해
제주도에서 내가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소식은 환상과 실재, 아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걸치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기쁨과 아픔, 환희와 비탄은 하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
라고 생각합니다.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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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위를 떠도는 구름과 빛. |
나의 연하장 그림은 두 장이다. 그 하나는 한라산 백록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백두산 천지다. 어느 것이 시작이고 어느 것이 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두 장의 그림은 내 마음의 지도, 그 시작이며 끝이기도 하다. 남도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하고 성년이 된 후 줄곧 서울 언저리에서 살아온 나의 소망은, 통일이 된 평양 어디쯤에서 말년을 보내다 죽어 가루가 되어 백두산 천지에 뿌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혼백이 된 연후에나 비로소 우랄알타이를 넘어 힌두를 넘어 세상 구석구석을 떠도는 것이다.
한라산 정상 부근은 구상나무숲 등으로 장관을 이룬다. |
새해를 앞두고 오른 한라산 백록담은 눈도 물도 말라 있었다. 그 오랜 목마름이 정신적 작용인지 감성적 결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타는 목마름’으로 백록담 위를 떠도는 구름을 보았다. 그 구름들은 어느 때 마파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에 실려 언제 적인가 내가 올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백두산 천지 위까지 흘러갈 것이다. 간혹 비 뿌리고 눈 내리니, 그 모든 ‘환상과 실재, 아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이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다.
그래,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낸다.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용기와 지혜는 결합의 방법’이다. 속된 정치적 목적의 통합이 회자하는 세상에, 헛되게도 나는 ‘결탁’이 아닌 ‘결합’을 꿈꾼다.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갔던 구름이 백두산 천지의 수증기들을 불러 모아 다시 된바람에 밀려 한라산 백록담으로 내려오고, 그 구름이 비가 되고 눈이 되어 백록담을 가득 채운다면, 아아 그래,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오하마나호는 여행 도중 라이브공연, 불꽃놀이 등의 이벤트로 뱃길의 지루함을 달래준다. |
문의 청해진해운 032-889-7800,
연안여행사 032-889-6646
눈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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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눈꽃트레킹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지금은 지은이도, 그 전문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젊은 시절 무의식 중에 읊조리던 시 한 구절이 있었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잠만 자다가 겨울이면 내가 버린 들판에 나아가보리라
양떼목장. 양들은 침묵하고, 우편함에 새해 연하장은 날아들지 않았다. |
대관령 옛길을 갈 때, 내 기억은 눈으로만 가득하다. 한여름 대관령목장의 초지를 넘실거릴 때에도 내 기억은 눈으로만 가득했었다. 그 많은 눈들 덕에 내 기억은 대관령으로 향할 때 시리도록 맑게 깨어나곤 했다. 강릉에 단오장이 열릴 무렵, 이곳 대관령 성황당과 산신각에서는 국사성황제가 열려 단오절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곤 한다. 지금은 한겨울이지만, 산신각 아래 기원굿이 끊이지 않으니 숲은 내내 술렁인다. 그 기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가슴 속은 고인 가래로만 가득하다. 그 드글거림을 참지 못해 마침내 가래를 뱉어냈을 때, 숲은 일순 머리에 이고 있던 눈더미들을 털어내며 굉음으로 주저앉는다.
선자령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풍력발전기의 팔랑개비가 나타난다. 그 날개들은 마치 떨어지는 눈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듯이 둔하고 무기력하다. 그 무위의 바람에 밀려 마침내 고갯마루에 섰을 때, 발 아래 사람의 마을이 아득하고, 그곳은 허균과 허난설헌이, 이이와 신사임당이 발붙이고 살았던 강릉 땅이다. 교산의 패배와 율곡의 승리가 교차하는 그 땅 너머로는 여전히 무위하기 그지없는 푸른 바다다. 그래,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울화를 뱉어내고, 순백으로 텅 빈 기운이라도 받아들이자.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여지껏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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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성황당에서는 한겨울에도 기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 평창과 강릉의 경계에 선 선자령은 겨울 눈꽃트레킹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발 1157m의 고지라고는 하지만 해발 800m쯤에 해당하는 대관령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니, 왕복 4시간이면 너끈히 눈꽃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선자령 등산로 왼편에는 대관령 양떼목장이 있다. 비록 초지를 노니는 양떼들의 모습은 겨우내 찾아보기 어렵지만, 완만한 능선을 따라 펼쳐진 설원의 풍경은 제법 목가적이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가족들은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쌍쌍이 즐거운 연인들은 눈싸움으로 ‘러브스토리’를 연출한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횡계IC -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 선자령 - 양떼목장
정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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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후 정월 16일, 정조는 사도세자의 탄일을 닷새 앞두고 정례적인 현륭원 성묘를 단행하였다. 쇠약한 정조의 건강 때문에 신료들을 만류하였지만, 왕세자 책봉의 기쁜 소식을 사도세자 영전에 알리려고 정조는 현륭원 행차를 서둘렀다. 정조는 당일로 현륭원에 나아가 벅찬 심정으로 오열하였고, 음력 정월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소 앞에 엎드려 울면서 일어나질 못하였다.
용주사는 정조의 효행이 낳은 사찰이다. |
- 유봉학 ‘정조대왕의 꿈’ 중에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적인 군주였다는 정조의 비원이 서린 화성을 찾음에 있어, 그의 재위 마지막 해인 정조 24년(1800년) 어름의 정황을 되짚는 것으로 시작함은 참으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자 유봉학이 ‘정조실록’ 등을 근거로 기록한 것처럼, 그 마지막 해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에 가득 찬 것이었다.
정월 초하루, 왕은 장차 왕위를 계승할 원자(元子)가 새해 들어 11세가 되니,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게 된 기쁨으로 새해를 맞았다.
융릉의 석인상. |
그해 정초, 정조는 4년 후인 갑자년(1804)에 원자가 성년인 15세가 되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자신의 원대한 꿈이 담긴 신도시 화성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쇠약해진 몸으로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했던 탓일까. 정조는 현륭원에 성묘한 이후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지더니, 마침내 그해 6월 급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와 함께 정조가 꿈꾸던 나라, 화성 또한 꿈으로만 남게 되었고, 조선 역시 급속히 쇠락하면서 멸운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용연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 |
융·건릉에서 병점을 돌아 다시 북상하면 비로소 정조의 나라 화성이지만, 지금은 이전의 이름 수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한때 전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수원 화성은 이제 대대적인 복원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하였지만, 그리 된 것은 단지 성곽일 뿐이다. 쓸모를 잃어버린 건축물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그 안에 담긴 꿈이 깊을수록 허망의 너비는 배가된다. 차라리 장엄하게 무너져, 그 잔재되고 남은 터에 비감함이라도 되살릴 수 있었더라면 좋으련만.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 서울 쪽에서 수원 화성 나들이에 나선 이라면 수원 화성과 용주사, 융·건릉까지 돌아본 연후에 바닷길로 들어갈 수 있는 제부도에 잠시 들렀다가, 해질 무렵 궁평리까지 나아가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기 바란다.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되, 땅은 영원한 법이다. 지금 비록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는 지더라도,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
●●● 가는 길
수원 - 수원 화성 - 병점 - 용주사|용주범종 - 융·건릉|융건백설 -
남양성지 - 제부도|제부모세 - 궁평리|궁평낙조
방랑하는 넋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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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터에서 무량사로
무량사는 무량사(無量寺)가 아니라 무량사라는 이름일 뿐
바람을 웃어젖히는 희미한 단청들을 보아라
저 무량한 것들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어이 있다 할 것인가
부서지지 않는 끈질긴 부서짐이여
개울물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지껄이고
물소리 같은 염불소리 햇볕에 증발하고 있다
실눈 뜬 아미타불이 숨을 내쉴 때마다
소슬빗꽃살창은 삐거덕거리고
금칠까지 한 아미타불은 외계인처럼 큰 귀로도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다
그 귀에 대고 아미타불 명호 부르며
무량한 생명들 무수히 죽어갔으니
만수산 돌멩이들 모두 그 이름 없는 이름이리라
나무들 풀들 꽃들 모두 그 이름의 자식들이라
그 이름 어이 다 부르리
그 모든 지수화풍 뭉뚱그려 무량사라 부르니
한손으로 겨우 처마를 잡은 풍경(風磬)이 깔깔거리고
풀숲에 숨은 산꿩도 구구 웃을 만한 풍경(風景)이건만
만수리 장승도 산신각 할아버지도 빙긋이 웃건만
산신각 옆 이름 없는 전각을 홀로 차지하고도
우스운 세상을 끝내 웃지 않는 놈
이천 개의 수염 한 올도 움직이지 않는 놈
오백년 전에 좌선한 매월당 김시습
-차창룡 ‘무량사의 김시습 웃음소리’
백제 멸망의 징조는 그 절에서 비롯되었다.
성주사터의 우는 미륵. |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 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 -삼국유사
그 오합사가 바로 지금은 빈 터로 남은 성주사다. 백제가 멸망(660년, 의자왕 20년)하고 꼭 330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방랑자 최치원이 성주사를 찾아 사산비문(四山碑文)의 하나인 낭혜화상부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도(道)는 담담하여 맛이 없으나, 모름지기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니, 다른 이가 마시는 술은 나를 취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먹는 밥은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음이라.
계족산 봉우리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니 장차 동방의 계족산이 바로 이곳이로다.
하지만 그 미륵불은 이제 실컷 얻어맞아 눈이 퉁퉁 부은 몰골로 빈 절터를 지키고 있다.
성주사터에서 검은 물줄기를 따라 만수산 기슭에 이르면, 헤아릴 길 없는 절, 무량사가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방랑의 넋, 김시습을 만난다.
무량사 소슬한 오솔길 한편에 서 있는 김시습의 시비. |
오세신동(五歲神童) 김시습은 도의정치를 꿈꾸었으나, 그의 꿈은 그가 21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세조의 무단적인 왕위찬탈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뒤, 승려의 행색으로 길고 긴 방랑길에 올랐다. 잠시 귀경해보기도 하지만, 그는 영락없이 망오(亡汚)의 현실을 직면할 뿐이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白首臥江湖) -한명회
그는 권신 한명회의 벽시를 보고 선뜻 붓을 들어 ‘부(扶)’를 ‘망(亡)’으로, ‘와(臥)’를 ‘오(汚)’로 고쳐버렸으니, 그 뜻을 풀자면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대한 조롱에 앞서, 스스로 꿈을 이루지 못한 자조에 더욱 시달린다. 긴 유랑의 끝에 다다른 무량사에서 그는 그를 좌절케 한 세상에 대한 적개로만 가득한 자신의 초상을 발견한다.
네 모습이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
그의 부도와 함께, 그가 무량사에서 유거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초상은 무량사의 이름 없는 한 전각 안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어둡고 쓸쓸한 빈 방을 응시하고 있다. 그나마 평생 세상을 떠돈, 떠돌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한 조각 연민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는 후인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 비문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 보령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 잡은 한진공예(041-932-8071)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벼루로 인정받고 있는 ‘남포벼루’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남포벼루는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부도비의 빗돌과 마찬가지로,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을 가공하여 만든 벼루로, ‘한번 숨을 내쉬면 깊은 이슬이 맺힌다’할 만큼 최상의 벼루로 명성이 높다. 보물로 지정된 추사의 벼루 3점 중 2점이 바로 이 남포벼루라 한다. 현재 무형문화재 6호인 김진한씨가 그 명맥을 잇고 있으며,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미리 예약해두지 않으면 입수하기가 어렵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대천IC - 보령 - 성주사터 - 보령석탄박물관 - 외산 - 무량사 - 남양 - 한진공예
필경사와 한보철강
- 필경사와 한보철강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 ‘그날이 오면’ 중에서
●●● 1999년 1월 1일 아침, 신년 서해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든 3만여 명의 기록적인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던 왜목마을은, 이제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하지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이들을 노린 모텔과 식당이 비좁게 들어서면서 예전에 그토록 정겨웠던 포구마을의 정취는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일출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는 쓸쓸하다 못해 스산하게까지 느껴질 때도 있다. 왜목마을의 일출은 해가 장고항의 용무치(해안의 높은 둔덕) 쪽으로 떠오를 때가 가장 장관이라 하며, 일출과 일몰 못지않게 바다 위로 교교히 떠오르는 달빛 또한 일품이라 한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송악IC - 필경사 - 한진나루 - 한보철강 - 성구미 - 석문호 - 장고항 - 왜목마을 - 대호 - 도비도|암반해수탕/난지도유람선
필경사, 녹슨 상록수와 빈 의자. |
하지만 서해대교의 긴 그림자를 채 벗어나기도 전인 부곡리에서 왼쪽으로 꺾이면, 잠시 구불퉁한 길을 따라가다 그 길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러 필경사(筆耕舍)가 나온다. 필경사는 어인 곳인가. 1932년, 심훈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가 살고 있던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온다. 1934년 자신이 정착하여 살 만한 집터를 물색하던 그는 지금의 필경사 자리에서 우연히 얼마 전 잃어버린 자신의 애장품 상아빨부리를 발견한다. 그 빨부리에 담배를 붙여 문 심훈은 잠시 바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곳을 자신의 집터로 삼기로 작정했다. 1935년 심훈은 새로 지은 필경사에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고,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에 부응하는 농촌계몽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그날’이 오기도 전에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해 그의 나이 36세.
필경사 앞마당에서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그 눈길이 채 바다에 닿기도 전에 고대산업단지의 우람한 굴뚝들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인근은 온통 철강단지이고, 그 중심에 한보철강이 있다. 1997년 1월 23일, ‘제2의 철강왕국’을 꿈꾸던 한보철강은 무리한 확장을 계속하던 끝에 끝내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바로 외환위기의 신호탄이었다. 진로, 대농, 기아, 한라 등이 줄지어 무너지더니, 기어이 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적인 ‘제2의 식민지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꼭 10년이 지난 지금, 현대제철로 넘어간 한보철강은 각고의 자구노력 끝에 마침내 완전정상화를 이룩해냈다.
왜목마을 일출. |
기묘하게도 필경사 앞마당에 세워진 상징물은 녹슨 쇠로 만든 상록수이며, 그 뒤편 받침대에는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라’는 심훈의 싯귀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역시 쇠로 만들어진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쯤에서 순열한 계몽주의자가 바라보았을 법한 예의 바다 앞에는 이제 개발시대의 우화가 우여곡절로 펼쳐져 있으니, 아무래도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이른 모양이다. 누군가가 뒤에 심어놓았을 진짜 상록수들은 이상난동의 겨울날씨 속에서 까닭 없이 누리튀튀하게 시들어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정녕 ‘그날’은 오지 않았다.
죽은 자의 길, 산 자의 길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에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 박두진 ‘묘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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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으로 들어서면 들머리부터 무덤으로 가득하다. 서울 서북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을 기점으로, 서삼릉과 고려공양왕릉, 월산대군묘, 공순영릉 같은 크고 작은 음택들과, 용미리 언덕바지에 지천으로 누워 있는 백성들의 묘가 즐비하다. 벽제화장장을 비롯하여 속속 들어서고 있는 공원묘원들 역시 가루로라도 망자의 세상을 거든다. 그 숱한 무덤들 속에 누가 누워 있는가.
장희빈의 무덤. 남성권력에 의지해 신분상승을 꾀했으나 결국 그 권력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받은 한 여인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망주석이 소슬하다. |
모든 권력을 남성들이 틀어쥐고 있던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이루었으나, 다시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만 한 여인의 주검은 애초 광주군의 산야에 버려진 듯 묻혀 있다가 1969년이 되어서야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말이 왕릉으로의 이장이지, 그녀의 무덤은 왕릉의 본역을 구획하는 울타리 밖에 초라하고 옹색한 몰골로(다른 능역에 비하면) 겨우 왕릉에 달라붙어 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그녀가 누운 곳의 반대편 능역인 명릉에는 그녀의 지아비였던 숙종과, 그녀의 라이벌이던 인현왕후가 나란히 있고, 그 한쪽에는 제2계비였던 인원왕후의 묘마저 자리하고 있으니, 멀찍이 그 꼴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폐빈의 심기는 과연 어떠할까. 그렇게 해서라도 연을 잇게 해준 후인들의 처사를 잘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키도 어렵고, 왕비에 계비까지 삼각을 이룬 채 능역 곁다리에 매달린 옛 여인의 처지를 짐짓 모르는 척 돌아누운 왕의 심사 또한 헤아릴 길이 없다.
월산대군신도비의 비명. 달과 산은 풍류의 상형이 아니다. 허망한 세상을 드러내는 비극의 문자이다. |
바로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 대부인 박씨의 무덤이다. 월산대군은 추존왕(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뒤 왕위에 추대된 왕) 덕종의 맏아들로,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재로 자라났으나, 친동생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의 책략으로 왕위를 아우에게 내준 뒤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쳐야 했다. 월산대군이 죽은 후 왕실에서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홀로 살던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범하여 끝내 자결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월산대군의 묘는 특이하게도 북향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궁궐을 마주하기조차 싫었던 까닭일 것이며, 자신의 무덤 뒤로 부인의 무덤을 감춰두고 있는 것도 치욕으로 죽은 지어미의 주검을 안간힘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망자의 원(怨)이 아니라 망자를 바라보는 산 자의 원(願)일 뿐이다.
서오릉 대빈묘 가는 길 핏빛 노을로 물든 소나무들, 잠시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튼다. |
무소유 일체를 꿈꾸다
돈이 필요 없는, 사이좋아 즐거운 마을
‘살인의 추억’이 스며 있는 화성의 낮은 구릉들을 지나 향남면 구문천리에 닿으면, 멀리 남양만이 바라보이는 언덕 아래, 바로 ‘돈이 필요 없는… 마을’이 나온다. 5만여 평의 부지 위에 대형 계사(닭장)와 공동숙소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 출입구에는 잔설보다 더 하얀 조류독감 방제용 분말이 잔뜩 깔려 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마을에도 디스토피아의 현실은 어김없는 공포로 엄습한다. 산안(山岸)마을. 시적으로 풀어내자면 ‘산에 언덕에’라는 제법 그럴싸한 이름이지만, 알고 보면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 1901~1961)란 일본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 뿐이며, 그의 실천적 사상을 실현하는 ‘야마기시즘사회 경향(京鄕, 경기도 향남의 약자이기도 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며 찾아가고자 하는 모두의 고향을 말하기도 한다)실현지’가 바로 이곳 산안마을(031-353-3920)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돕는 야마기시 농법
야마기시 농법을 이해하려면 산안마을 농장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산안마을 양계장에서 닭들은 사람보다 ‘먼저’ 행복하다. 이곳 닭들은 ‘케이지’라 불리는 계단식 닭장의 압살적 구조에서 자라는 닭들과는 달리 널찍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생활한다(농사로 치면 ‘석 섬 거둘 논에서 두 섬 키우는’ 원리). 계사는 가장 양호한 채광과 통풍이 가능하게 설계되었고, 바닥에는 미리 발효시킨 계분을 깔아 새로운 분뇨가 거기 섞이면 같이 발효되어 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다. 잘 발효된 분뇨는 유기농 재배지로 옮겨져 최상의 거름이 되고, 그 작물 중 일부는 다시 닭들의 모이로 돌아온다. 알을 낳는 암탉 사이사이 수탉이 섞여 있어 건강한 유정란 생산을 돕는 한편, 암컷들만 생활할 때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역작용(예를 들면, 일부 암컷의 수컷화에 따른 질서의 교란)을 방지한다. 병아리들의 모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가능하면 모든 모이는 몸집만을 불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장을 튼튼히 하는 것들이다(다시 농사법으로 말하면 ‘뿌리에 비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비료 쪽으로 뿌리가 자라도록 유도하는’ 원리). 이 모든 것이 닭들이 그렇게 ‘원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래서 산안마을 양계장의 모토는 ‘닭들이 행복할 때까지’다. 여기서 사람은 단지 닭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만 대신한다.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
야마기시 농법의 핵심은 자연과 자연,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실현이 바로 유축순환농법이다. ‘야마기시스트’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무소유 공동체(그들은 ‘일체’라 한다)를 추구한다. 산안마을에서는 공동노동을 통한 수입은 있지만 소유는 없다. 공동소유도 아니고 분배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벌기만 할 뿐 쓰지는 않는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소비는 불가피하므로 쓰기는 하되, ‘한 지갑’에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꺼내다 쓴다. 그리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소유는 차라리 쉬울 수 있다. 왜, 단지 소유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나 소비에 이르면 필요의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길 수 있으므로 훨씬 어려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그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람의 자율성에 대한 신뢰를 든다. 그러나 솔직히 나 같은 속인은 그 말을 믿기 어렵다.
다만 이해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소유의 본질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끊임없이 소비지향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고, 역으로 소비지향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할 것이다. 얼핏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힘들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외부세계와 단절한 채 지내지도 않는다. 그들 스스로도 불변의 원칙이란 있을 수 없고, 더 나은 해답을 찾아 부단하게 탐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연찬(硏鑽, 문제의 본질을 찾아가는 토론과 강습)’을 통한 ‘무고정전진(無固定前進)’이다.
고향은 아직도 그리운 공동체인가
현재 산안마을의 가족 수는 8세대(그들은 그냥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32명(성인 18명, 아이 14명). 1965년 일군의 사람들이 이 땅에 야마기시즘을 처음 소개한 이래, 초기 실패기를 거쳐 마침내 1984년 ‘맹물과 누더기’의 정신으로 화성에 정착, 한때 50명이 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진해소’와 교류이동(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 50여 곳에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있고, 그들은 서로 교류하며 때로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이동 정착하기도 한다)으로 현재의 구성원을 유지하고 있다. 전직 회사원, 교사, 사회운동가, 농부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구성원들은 양계부, 채소부, 가공부, 공급부, 생활부, 학육부 등으로 나뉘어 일을 하고, ‘한 솥, 한 지갑’을 쓰는 한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안마을에는 유독 미인이 많다. 소유의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레 아름다워지는 것인가. 소유는 미인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무소유는 미인이 ‘되게’ 한다.
어느 산사의 하루
아침공양이 끝나면 본격적인 산사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사이사이 사시불공과 점심공양, 약석(藥石)과 저녁예불, 그리고 길상수(吉祥睡)에 들기 전까지 수행 같은 울력과, 울력 같은 수행이 이어집니다. 요즘 가장 큰 일과는 장 담그기 준비와 연등 만들기입니다.
겁 많은 호법신장
새벽 3시. 산사의 하루는 도량석(道場釋)으로 열립니다. 지난밤의 질긴 꿈을 떨치고 도량 구석구석을 돌아보지만 사위는 여태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미망이고, 밤새 내가 덮고 자던 무명(無明)이기도 합니다. 어둠과 한기 속에서 외려 또렷한 것은 소리입니다. 발소리와,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소리와, 끊어졌다 이어지는 고요조차 오롯이 소리일 뿐입니다. 뒤이어 나지막이 종성(鐘聲)이 울리고, 무명이 일어섰다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종성이 멈출 즈음, 무명은 끊어지고 지난밤의 꿈이 그냥 꿈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 문을 나서는데, 섬돌 곁에 호법이가 앉아 있습니다. 호법이는 이제 네 살이 되는 덩치 큰 삽살개입니다. 호법신장(護法神將), 그러니까 이 절의 경호대장 격인 호법이는 사실 그 격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습니다. 어떨 때는 자기 발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산짐승이라도 만날라치면 지레 꽁무니를 빼기도 합니다.
그 후로 호법이는 예불시간이면 법당까지 들어와 같이 예불을 드리기도 하고, 먼데서 찾아든 불자들에게는 아랫절에서 윗절로 올라갈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호법이의 눈을 덮고 있는 털을 답답하게 여긴 불자 한 분이 놈의 눈썹터럭을 밀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어색한 듯 멀뚱히 쳐다보는 놈을 보면서, 어쩌면 그 답답함이야 보는 이의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며, 호법이에게 베어져 나간 터럭은 한낱 비어 있는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알프스소녀 하모인
이제 아침공양을 준비할 때입니다. 공양주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비록 조죽(朝粥)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채움과 비움이 발우 안에 있습니다. 탁발의 정성으로 밥을 짓고, 수행의 마음가짐으로 배를 채웁니다. 발우가 비워지고 그곳에 있는 것이 이곳에 왔을 때 하루의 울력을 위한 힘이 비롯됩니다.
아침공양이 끝나면 본격적인 산사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사이사이 사시불공과 점심공양, 약석(藥石)과 저녁예불, 그리고 길상수(吉祥睡)에 들기 전까지 수행 같은 울력과, 울력 같은 수행이 이어집니다. 요즘 가장 큰 일과는 장 담그기 준비와 연등 만들기입니다. 지난해 이 산사에서 거둬들인 콩은 유기농으로 얻은 한 가마입니다. 그래도 시작만은 넉넉히, 여덟 가마를 사들여 모두 아홉 가마 양만큼의 콩을 삶고 메주를 쑤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홉 가마 양만큼의 장조차 다 나누어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기다리면 필요로 하는 이가 있겠지요. 연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절에서 150개, 윗절에서 40개,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조차 다 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장독대를 둘러보는 사이, 절 아래 마을에 사는 모인이가 놀러왔습니다. 하모인. 산 아래 옥동초등학교에 사는 이 아이는 올해로 4학년이 됩니다. 동네에 또래가 없는 모인이는 곧잘 절로 올라와 놀다갑니다. 이 아이에게는 호법이도 나비도, 심지어 나까지도, 집에서 마실 거리 안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모인이는 가끔 영어책을 들고 와 내게 영어를 가르치려 듭니다. 모인이의 영어에 의하면 ‘바나나’는 ‘버너너’입니다. 워낙 산골짜기인지라 바나나 구경하기도 쉽지 않으련만, 이 아이는 그래도 연신 ‘버너너’를 외쳐대고, 나는 모인이가 하는대로 ‘버너너’하고 따라합니다.
모인이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제 흉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야, 너도 다른 아이가 없는 곳에서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지 않니?’하면, ‘아, 맞아’하고 쉽사리 수긍해버리기도 합니다. 모인이는 그 먼 산길로 통학한 탓인지 달리기만큼은 학교에서도 선수급이라고 합니다. 나는 모인이를 ‘알프스소녀 하이디’라고 부릅니다. 망경대산이 알프스는 아니지만 모인이가 하이디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절 아래 마을인 예밀3리는 15가구 남짓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전에 탄광촌이 있던 지역으로, 지금은 변변한 농사마저 지을 여건이 되지 못해 대부분 품을 팔아 살아갑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몇몇 분이 표고버섯을 비롯한 유기농 친환경농업에 힘을 쏟기 시작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마을에는 작은 교회가 두 곳이나 있고, 당연히 목사님도 두 분이 계십니다. 마을 공동사가 있을 때, 항상 앞장서서 나서는 건 두 분 목사님과 우리 절 식구들입니다. 이곳에서 두 종교는 그렇게 서로 돕고 서로 헤쳐 나갑니다.
봄을 기다리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표고버섯 재배사를 둘러보다 때 이른 민들레 한 송이를 발견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민들레는 벌써 봄을 맞고 있었습니다. 산사의 농사래야 여직 아마추어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상태지만, 그래도 버섯농사뿐만 아니라 콩이며 고추 같은 작물들에, 가시오가피, 두릅, 엄나무, 헛개나무, 머루에 복분자까지, 양껏 욕심을 내보기도 했습니다. 자급분을 빼고 가급적 약재 중심으로 재배에 나선 것도 다 아픈 이들을 생각하는 큰스님의 뜻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헛개나무를 전정하다 문득 윗절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포교당에 가신 큰스님이 저녁이면 돌아오겠기 때문입니다.
윗절까지 다 오른 후에야 큰스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법이가 시무룩하게 법당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지고 온 배낭을 마루 위에 올려놓고 싸리비부터 찾았습니다. 마당이고 계단이고 어젯밤 흩뿌린 눈발 때문에 제법 미끄러웠습니다. 몇 해 전 오래 묵은 윗절을 헐어내고 중창불사를 시작했을 때 스님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설픈 인부들의 몸짓이 성에 차지 않으면, 그 인부들을 밀쳐내고 스스로 구들장만한 석재들을 져 나르기 일쑤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큰일을 치를 뻔하기도 했습니다. 석재 하나를 등에 지고 오도 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소리쳤습니다.
“아이고, 큰일났다. 저러다가 공양주 스님이 쓰러지면 우리는 이제 밥구경하기는 다 틀렸다.”
어느덧 아득한 산자락을 타고 해가 넘어갑니다. 법당 앞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덧없는 빛일 뿐, 저 빛이 지고나면 사위는 다시 무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 산과, 저 산이 품고 있는 많은 것들, 멧돼지와 오소리와 너구리와 까치살모사, 더덕과 삽주와 고목나무에 붙은 운지까지, 숨 있는 모든 것들도 제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산길을 오르는 중에 언뜻 보았던 생강나무의 꽃눈이 잠시 머릿속에 노란 빛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염화시중의 미소였을까요. 이 어둠을 뚫고 다시 빛이 솟아오르듯 소생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문득 추위를 뚫고나오는 꽃눈의 열기가 더욱 가까이에 느껴졌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아우라지 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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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돌이 되었다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울어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전옥매의 긴 장단으로 부르는 아라리 중에서
설움으로 나앉은 강가에서, 강물은 설움보다 더 구슬피 흘러갔다. 암캉에서 흘러온 물이거나 수캉에서 흘러온 물들, 아우라져 돌돌돌거리며 끝없이 흘러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든 슬픔들 다 어디서 오며, 기어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옥매는 강가에 앉아 제 설움도 잊어버린 채 흘러가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젖은 눈에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매화나무 가지에 올라앉은 그 새는 서럽게도 원앙새 한 마리였다. 어쩌다 그 원앙은 홀로된 것일까. 짝을 잃은 원앙은 애타게 짝을 찾아 헤매다 끝내 세상을 뜨고 만다는데. 옥매는 무엇에 홀린 듯 그 새에게 다가갔다. 손에 닿을 듯이 가까이 가보았지만, 새는 날아가지 않았다. 그 새는 돌이었다. 하고많은 눈물들 강물이 되고, 그 강물 흘러 마침내 돌무늬로 아로새겨진 서글픈 새였다.
우연히 찾아든 행운
한낱 시골여관에 불과했던 옥산장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1994년에 발간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덕분이었다. 유홍준 교수는 ‘아우라지강의 회상’ 편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량에는 몇 채의 여관이 있다. 그 중에서 나는 두 번 다 옥산장여관에 묵어갔다. 옥산장 주인아주머니는 여느 여관집 주인과 다르다. 깨끗하고 곱상한 얼굴에 맑은 웃음은 장모님 사랑 같은 따뜻한 온정이 흠씬 배어 있는데, 손님을 맞는 말씨에는 고마움의 뜻을 얹어 무엇 하나 귀찮다는 티가 없다. … 그 분의 인생드라마는 그저 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단편 단편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스며 있어서 넋을 잃고 듣고 있는 청중들은 그 모두를 자기 인생에 비추어보면서 가슴 찔리고 부끄러워하고 용기를 갖게 되며 뉘우치게도 되는 문학성과 도덕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지금 그녀는 여관 한켠에 ‘돌과 이야기’라는 수석전시장을 짓고 멀리서 찾아든 나그네들에게 돌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뿐만 아니라 정선아리랑 보유자들을 불러 길손들에게 아라리가락을 들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아라리가락을 익혀 긴 장단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녀의 노래는, 그 진한 사연으로 어떤 명창의 노래보다 절절하다.
물들은 아우라지에서 아우라진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를 싸고도는 강이다. ‘여량(餘糧)’은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해 식량이 남아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예나 제나 그네들의 삶은 그리 풍족하지 못했다. 물은 가슴을 에이고 다녔고, 산은 턱도 없이 적막했다. 오죽하면 정선아리랑의 발원조차 세상에 낙망한 은둔거사들의 노래였다고 할까. ‘물은 산을 넘지 못하니’ 깊고 깊은 산을 휘돌고 에돌아온 물들은 아우라지에서 아우라진다. 평창의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노추산을 두루 휘돌아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리는 송천과, 태백산 연맥인 중봉산에서 시작되어 임계를 거쳐 정선 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골지천이 한데 어우러져 아우라지강을 만들었다. 그것은 또 굽이굽이 노래를 만들어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울어
아침저녁 돌아가는 구름은 산끝에서 자는데
예와 이제 흐르는 물은 돌부리에서만 운다
그 물의 한 굽이에 한 여인의 삶이 있고 옥산장이 있다. 그 여각에서 묵고 간 유숙의 삶들이 있다. 그녀는 최근 그 모든 아우러지는 것들을 모아 ‘아우라지 별곡’(지식더미 간)을 펴냈다. 그녀의 책 속에는 무수한 돌들이 굴러다닌다. 눈멀고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와, 바람에 도박까지 허랑의 한세월을 건너온 남정네와,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이별의 돌들이 굴러다닌다. 그 돌들은 굴러다니며 소리치고, 굴러다니며 울음 울고, 굴러다니다 마침내 잦아든다. 그 한 많은 세월이 우리가 살아온 길이며, 어쩔 수 없이 또 우리가 어디론가 흘러가야 할 길이다.
소리로 꾸는 꿈
“목청도 목청이지만,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의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한다던가요?”
“그래서 그 한을 심어주려고 아비가 자식의 눈을 빼앗았단 말인가?”
“사람들 얘기들이 그랬었다오.”
“아니지… 아닐 걸세.”
사내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고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그보다도 고인한테 좀 미안한 말이지만, 노인은 아마 그 여자의 소리보다 자식년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고 싶은 생각이 앞섰을지도 모르는 일일 거네.” - 이청준 ‘서편제’ 중에서
장애를 붙안고 살아온 세상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보이는 것이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오정해 분)는, 딸이 자신을 떠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한 아비(김명곤 분)에 의해 눈이 먼다. 눈이 멀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정기가 귀와 목청 쪽으로 옮겨가 눈빛 대신 목청소리를 비상하게 한다는’ 구실 아래.
이현아(19) 양을 만나러 안성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영화 <서편제>를 생각했다. 눈먼 소리꾼 소녀. 나의 부박한 상상력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한 소녀를 만나러 가면서도 겨우 그런 지경을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내가 도대체 무엇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보이는 것만으로 한 사람의 삶과 그 아픔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현아는 이번에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음악극과에 입학한 신입생이다. 아무리 대학 가는 일이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중대사가 되어버린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는 그리 새삼스러울 게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현아는 대학 합격통지를 받는 순간 목놓아 울어버렸다. 어머니 김희숙씨(48)는 아예 목이 메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어 세상의 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보지 못한 아이. 겨우 목숨 붙어 세상을 기고 기어 살아온 아이. 그 아이에게 비친 이 실낱같은 빛 한 줄기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높다란 장벽에 뚫린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오는 그런 빛일 뿐인지도 몰랐다. 그 빛을 따라갔다가 또 어떤 어둠에 걸려 넘어질지, 희숙씨는 목 놓아 우는 딸을 보면서 탄식으로 울음마저 삼켜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르쳐 보겠다고, 당시 살고 있던 광명시에서 서울 창동에 있는 맹인복지관까지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것을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다니며 유치원 과정을 마쳤다. 또 초등학교 과정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의 서울맹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학교 근처인 효자동으로 옮기기까지 해야 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사정으로 전세살이를 하면서 받은 설움은 또 어떠했던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다고 전세조차 쉬 주지 않는 세상이었다. 툭하면 놀리고 때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쩌다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라도 생기면 어른이랍시고 화들짝 놀라 막아서는 세상이었다. 그냥 놔두기만 해도 좋으련만, 장애를 무슨 죄인 양 취급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얻어맞고 채이고, 때론 걸인으로 오인돼 동냥을 받기도 하면서 아이는 학교를 다녔다. 그런 세상에서 무엇을 배울 게 있으랴만, 그래도 학교는 그 아이가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세상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단순 시각장애만 있는 현아는 복합장애를 앓고 있는 다른 아이보다는 나은 편이기도 했다. 그 동상(同床)의 아픔들을 보면서 희숙씨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장애인의 어머니임을 깨달았다. 아이의 장애보다, 그 고통보다 더 모질고 모진 것이 장애아를 둔 모성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 그 모성 앞에서 극복되지 못할 장애는 이미 없었다.
소리에 눈을 뜨다
현아가 소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무엇이라도 시키고 싶은 욕심에 처음에는 피아노학원을 보냈더랬다. 아이는 그런대로 피아노를 익혀나갔지만, 선생님은 노래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목소리가 고우면서도 애절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악을 거쳐 국악으로 나아갔다. 이때부터 소리는 아이의 모든 것이 되었다. 특별히 취미삼아 즐길 거리도 마뜩치 않았지만, 학교에 다니는 시간을 빼놓고는 오로지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가 되었다. 아이도 그러는 것이 마냥 좋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아이는 꿈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의 희망이 아니라 잠을 자면서 꾸는 진짜 꿈 말이다. 그렇잖아도 이 아이가 꿈을 꾸기는 하는 것일까, 꾼다면 그 꿈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아이는 오로지 소리로 꿈을 꾼다고 했다. 꿈속에서도 소리를 듣고 소리를 한다고 했다. 희숙씨는 괜스레 아득해졌다. 그것은 이 아이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조차 아이의 세상과는 이렇게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에 비례해 가야 할 길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고,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아득하기만 했다. 하나의 장벽을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장벽이 앞을 가로막았고, 갈수록 장벽의 높이도 높아만 갔다. 넘고 넘어도 끝없이 나타나는 장벽에 지친 아이는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싶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온갖 편견과 차별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아이로서는. 그 좌절이 극에 달했을 때, 이제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아빠가 나섰다. 아빠는 경복궁을 ‘구경’시켜준다는 핑계로 딸애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어떻게 달랬는지 현아는 다시 음악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생각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실의 벽은 여전했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대학 진학 문제부터 그랬다. 어떻게든 대학까지 보내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해온 터였지만, 막상 그 일이 닥쳐오자 그 높은 문턱이 실감되면서 두려움은 마침내 공포로 바뀌었다. 그 질식할 것만 같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다. 어쩌다 KBS 3R의 <우리는 한가족>에 현아가 출연한 뒤 담당PD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앙대학교 박범훈 총장이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박 총장은 잠이 오지 않아 라디오를 듣다가 우연히 현아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방송국에 연락해 현아의 처지를 알고 난 뒤 만남을 부탁했다는 거였다.
박 총장은 현아에게 특혜를 줄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다만 장애 때문에 어떤 차별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은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현아는 장애인 특별전형이 아닌 일반전형에 응시했고, 당당히 실력으로 합격했다. 고마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반대가 있었을 게 번연한데도, 정식 입학에다 장학금 지급, 국악대학 일원과 기숙사에 이르기까지 점블록을 깔고 보행음성안내기를 설치하는 등 단지 한 장애학생을 위한 특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어줍지 않게 하려거든 일찌감치 가서 안마나 배워라’는 김성녀 학장의 야멸찬 소리를 듣고서 희숙씨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 단호함이 아이를 강인하게 키워줄 터였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들이 아이의 지팡이가 되어줄 터였다. 이제 아이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지금이야 엄마가 곁에 있어 아이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보살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아이는 이제 엄마의 손을 놓고 세상의 지팡이를 잡아야 한다. 그 길이 아무리 벼랑길이라 해도, 팔꿈치가 피투성이가 되고 무릎이 헤지도록 가야 한다.
어쩌면 아이는 변변한 남자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그토록 좋아하는(그럼에도 입장료가 너무 비싸 한 번도 데리고 가보지 못한) SG워너비의 콘서트 한 번 가보지도 못한 채 대학생활을 마칠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마저 마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음악을 빼놓고는 유일하게 몰두하는 영어공부도 다 해외공연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어서인데, 그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소망하는 국립국악원의 단원이 되는 꿈조차 끝내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안드레아 보첼리(시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조차 먼 나라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랴. 그 모든 것이야 다 보이는 자들의 몫이고, 아이는 그저 ‘앞도 보지 않은 채’ 나아갈 뿐인 것이다. 그렇게 다달은 곳까지가 그 아이의 길일 것이고, 나머지야 그 아이인들 어쩔 것인가. 생각해보면, 어둠의 세계 속에서야 소리로 꾸는 꿈을 빼놓고, 아니 그것까지 포함해 더 잃을 그 무엇이 있으랴.
내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던 꿈들은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깨져버리고 말았다.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난 몸을 숙여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그리고 이제 끝없는 인내로 그것들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그 조각들에게 그 옛날의 찬란한 빛을 돌려줄 것이다.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나는 법을 배워 서서히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누가 알겠는가. 현실의 장벽을 넘어 저 높은 곳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 안드레아 보첼리 ‘침묵의 음악’ 중에서
봄날, 구례장터를 가다
꽃그늘 하마 서러워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하고/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절어/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스러졌네… 잘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못하고/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스러졌네 -백부전 ‘산동애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지리산에서 스러져간 한 빨치산 소녀의 애틋한 노래는 나의 헛된 감흥을 속절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이런 사연 정도는 하나둘쯤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지리산의 꽃그늘은 무겁고 무겁다. 계단식 논배미거나 돌담 위로 햇살이 떨어질 때, 노래는 꽃보다 먼저 진다. 도대체 꽃구경이 웬 말이람, 나는 상위마을을 눈앞에 두고 끝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차라리 구례구라도 가야 할 터였다. 사람의 마을이 아니라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 꽃잎처럼 떠다닐 일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발부리가 채였다. 구례구로 휘돌기도 전에 구례의 장터에서 나는 발이 묶였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구례장은 매 3·8일로 끝나는 날 선다. 누구는 구례장터를 일러 ‘작은 지리산’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로쇠물로부터 시작하여, 두릅, 더덕, 고사리, 취나물, 가죽나물, 도라지, 죽순 등과 산수유, 작설차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에서 나는 온갖 산것들과, 은어와 참게 같은 섬진강의 물것들, 목기와 유기 같은 지리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것들까지 무시로 들고나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십상인 때문이다. 어찌 그뿐이랴. 대장간에 방앗간에, 그 일하는 손들과, 그 근육에 짠기를 돋워줄 먼 바다에서 온 비린 생선들, 동동구르무에 품 넓은 속곳들, 철모르는 강아지까지, 어찌 보면 지리산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한 것들이 뒤섞여 형형색색을 이룬다.
그런데 구례장터의 모습이 영판 달라져버렸다. 낡았지만 제법 관록이 있어 보이던 옛 장옥들을 헐어내고, 아직 물기도 채 빠지지 않은 듯한 출처불명의 통나무들과, 기계로 찍어낸 기와모양의 슬레이트로 새 장옥을 지어 올렸기 때문이다. 볼품은 둘째치고, 새 장옥을 지은 후 영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모두 난리들이다. 애써 마음을 고쳐 앉아보지만, 금새 입에서는 불평이 튀어나온다. 손님들마저 ‘장 영 안되네요~잉’ 하며 위로를 하는 것인지, 심사를 돋우는 것인지, 연신 혀를 차댄다. 그것이 어찌 새 장옥 탓이랴. 세상이 그렇게 글러먹은 것이다. 모두들 알면서 혀를 차고, 혀를 차면서 모른 체한다.
장 들목의 난장에 나앉은 토지할머니는 본명이 황옥순으로, 운조루가 있는 토지면에서 왔기에 그렇게 부른다. 아들네미가 피아골에서 민박을 치는데, 지리산을 놀삼아 다니는 것들은 모두 그를 안다고 했다. 여느 할머니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식들은 말리지만 집에서 놀고 있으면 뭐하느냐고, 그래서 나선 것이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팔거리라 해봤자 고작 묵 몇 모와 콩나물 한 동이로, 모두 집에서 키운 것들이라고 했다. 다 팔아봤자 2만~3만 원도 채 안될 거였고, 아침이면 마을 앞 신작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장에 오고, 저녁에는 버스 타고 내려 한참 걷거나, 운 좋으면 트럭이라도 얻어타고 집으로 간다. 그리 보면 집에서 말리는 것도 꼭 빈말만은 아닌 듯도 싶다.
구례장터에는 대장간이 두 군데나 있다. 한쪽 집은 다리가 불편한 노장이고, 다른 한쪽은 기술이 부족한 소장이다. 순천덕암철공소를 운영하는 박경종씨는 이제 갓 서른셋이다. 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갑작스레 대장간을 떠맡았는데, 일찍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워 벌써 경력이 10여 년을 넘었지만, 아직 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메질하는 아버지 곁에서 집게잡이만 하여도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절로 신이 났던가. 그래도 이 순하고 바른 청년은 벌이도 시원찮은 대장간을 이어갈 작정이다. 아직 자기를 필요로 하는 손 불편한 사람이나, 혹여 짝배기용 낫이라도 주문할 이가 남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순정함이 벌겋게 달궈진 쇠를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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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
봄은 왔어도, 장날 같지 않은 구례장터에서 가장 대박을 터뜨린 것은 꽃 파는 아낙네다. 장난감 같은 화분용 꽃들을 늘여놓은 좌판 앞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꽃대궐인 지리산 아랫동네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관상용 꽃을 돈 주고 사간다. 지천으로 꽃을 두고도, 아직 꽃을 피울 빈 자리가 남아 있음인가. 외래종 자잘한 꽃들을 감싸고 있는 비닐포장의 꽃무늬 프린트가 제 품안의 꽃들을 닮아 있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닮아 있기도 하다. ‘장사가 잘 되서 좋겠다’고 말을 건네자, 아낙은 애써 말을 돌린다.
“제가 요 읍내에 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지라. 대부분 신학기를 맞은 아이들의 학부모이기도 하고요.”
살짝 아닌 척해 보지만, 검게 그을린 그녀의 얼굴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기가 숨어 있다. 그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웃음이 그립도록 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회니 시골이니를 가리지 않고 모두 세상살기가 곤고하다고 한다. 도회야 스스로 자처한 일이기도 하지만, 시골사람들에게 그 곤고함은 이미 오랜 내력이었다. 그들의 주름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이내 바스라져 흙이 된다. 그 흙을 먹고 온갖 숨붙이들이 살아가고, 그 숨붙이들 사이로 다시 봄이 왔다.
죽음을 어루만지는 손
죽음은 위대하다./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우리가 생명의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그것은 우리의 한복판에서/감히 울고 있다. -R.M.릴케 ‘에필로그’
호스피스에 대한 이해
빅터 플랭클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생이 무한하다면 모든 일은 연기될 수도 있고 선택이나 결정의 필요성도 없으며 책임감도 없다고 보고, 진정한 인간존재의 의미란 삶의 유한성에 기초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삶이란 곧 죽음이 전제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페이펄은 임종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명료하게 해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당신에게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당신이 죽는다고 가정할 때 꼭 하고 싶은 일은?”
“당신은 어떤 병으로 죽을 것 같은가?”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가?”
“죽고 싶은 장소는 어디인가?”
“임종을 맞고 싶은 시간은?”
당신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겠는가. 담담하게 대답할 수는 있겠는가. 아마도 당신은 대답은커녕, 그 질문부터가 당초 자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애써 무시하려고 들 것이다. 이렇듯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을 ‘돕는’ 손길이 있다. 바로 호스피스다.
호스피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부터 찾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호스피스(hospice)의 어원은 라틴어 ‘hospes’에서 온 것으로, 이는 ‘host’나 ‘guest’를 의미하는 것이며, 중세기 초 유럽 중심부에 있었던 수도원에서 피곤한 여행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를 말한다. 이처럼 ‘집과 같은 편안한 돌봄이 있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호스피스는, 최근에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쉬어가도록 도와주는 ‘케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호스피스는 임종환자와 그 가족을 전문의료기관에 맡기어 보살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죽은 자를 위한 생일잔치
그때부터 당시로서는 개념조차 분명치 않았던 호스피스사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 2년 후에는 ‘소망의 집’이란 호스피스 시설을 개원하게 되었고, 2003년에는 사단법인 소망호스피스연합회를 설립하고 후원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도심 한가운데 있던 무거동 소망의 집은 별도의 임종실을 갖추지 못한 채 환자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아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 목사는 후원자들의 도움과 빚을 얻어 2004년 교외의 선바위 근처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있던 건물을 매입, 보수공사를 거쳐 이듬해 입주를 마쳤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중리에 위치한 새 소망의 집(052-248-1600)은 노인전문요양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고 목사가 소망호스피스 가족들과 함께 지금까지 임종을 지켜본 이는 무려 500여 명에 이른다. 어느 경우 하나 각별하지 않을 리 없었지만, 고 목사는 그 중 두 경우를 자신의 호스피스사역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사례로 꼽는다.
그 첫 번째는 말기암으로 사망한 한 40대 가장의 임종이었다. IMF로 실직한 그는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직장암을 얻어 말기상태로 소망의 집에 들어왔다. 임종을 앞둔 어느 날, 면회를 온 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환자가 갑자기 심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고 목사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환자의 구토물을 모두 손으로 받아냈다. 그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지켜본 부인은 고 목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환자가 세상을 뜬 후에도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부터 자식 교육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소를 가리지 않고 조언을 구해왔고, 그 조언을 믿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며칠 후가 고인의 생일인데, 소망의 집에서 생일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거였다. ‘웬 생일잔치인가’하고 묻자, 딸아이가 ‘목사님께 들으니 아빠가 천국에 가셨다는데, 그곳에서라도 생일축하를 받을 수 있도록 천국으로 떠난 소망의 집에서 생일잔치를 열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부인은 진짜 딸아이를 데리고 소망의 집을 찾아왔고, 그들이 마련해온 음식을 놓고 환자를 비롯한 소망의 집 가족 모두가참석해 조촐한 생일잔치를 벌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천국 가신 우리 아빠, 생일 축하합니다.”
그 일은 고목사로 하여금 호스피스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 계기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되었다.
환자가족에 대한 사회적 케어의 중요성
또 한 가지의 사례 역시 말기암으로 사망한 40대 가장의 경우였다. 자동차회사에 다니던 이 40대 가장은 췌장암을 선고받고, 치료를 위해 병원을 전전하던 끝에 집마저 팔고 전세로 가야 했고, 더 이상 치료가능성이 없어지자 마침내 소망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망의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또 보름이 지난 후 미망인이 연락도 없이 고 목사를 찾아왔다. 한참 말이 없던 미망인은 놀랄 만한 상담을 해왔다.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되어야 재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남편 곁에서 본인 스스로 위경련에 시달리며 그래도 성의껏 간병을 하던 미망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이 죽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런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장남인 남편이 암을 선고받고 3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시댁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저 두 손자만을 빼앗다시피 거두어가겠다고 했다. 시댁의 처사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미망인은 사회적 지탄을 면할 정도의 범위 안에서 보란 듯이 재혼을 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느낀 배신감에 대한 일종의 복수인 셈이었다. 고 목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한 가족의 갈등 관계를 떠나서, 미망인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사회적 책임이 더 컸다.
대부분의 암환자를 둔 가정은 마지막까지 치료에 전력투구하다가 모든 것을 소진한 채 넉아웃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보려는 가족들의 간절한 심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궁극적으로 치료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한 가정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은 자칫 그 가정의 파탄과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정확한 판단 위에서 호스피스기관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전 재산을 소모하고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가정의 해체를 맞아야 하는 지경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례는 고 목사로 하여금 사회적 보장장치로서 호스피스제도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 목사는 호스피스제도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한 임종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일 뿐만 아니라, 남은 환자가족이 가정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사회복지정책이기도 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최근 부각되고 있는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대안으로서 호스피스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시급하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호스피스 관련법안의 통과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법안이 통과되면 실질적인 호스피스제도의 정착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장기기증이나 수목장제도와도 연계한 보다 넓은 의미의 호스피스제도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아볼 생각입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미션이며,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까워온다
나에게 진돗개가 털 색깔에 따라 다섯 종자가 있음을 알려준 이는 진도 남쪽 끝자락 서망리에서 식당 겸 민박집을 하는 서망횟집 안주인 박향순씨다. 그녀는 진돗개는 원래 백구(흰색), 황구(노란색), 흑구(검정색), 재구(회색), 호구(얼룩무늬) 다섯 종이 있었는데, 백모와 황모가 마치 진돗개의 표준색처럼 여겨지면서 나머지 색들은 품질과 상관없이 차츰 도태되어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반가운 마음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지만, 무참하게도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밤이 새도록 진돗개에 관한 이야기며, 영등제에 관한 생각 등 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진돗개처럼 영민한 눈빛을 반짝이던 그녀를 기억하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기억력은 흐려져 있었고, 몸마저 부쩍 쇠약해진 듯싶었다. 괜히 무한하고 착잡해진 나는, 그 후로 다른 할머니들을 찾을 엄두마저 애써 외면해버렸다. 나이 들면 하루가 다르다고, 행여 어떤 좋지 않은 소식이나 듣지 않을까 은근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억세고 일 잘하고 눈물 많은
허화자 할머니 |
홍주할머니 허화자씨 댁을 찾았을 때 마침 할머니는 술을 내리고 있었다. 수십 년간 그녀의 작업장이 되어온 정지는 장작불의 매캐한 연기와 지초향의 달착한 술내음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뭐 할라고 이렇게들 찾아온다냐?”
할머니의 마중은 면박으로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더욱 버거워진 몸과 어수선한 심사 때문인지 할머니의 타박에는 곤고함이 묻어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새벽같이 일어나 정갈한 마음으로 부뚜막 앞에 앉아야 했는데, 눈을 떠보니 벌써 9시가 넘어 있었다. 누구에겐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날은 좋아서 고조리(소줏고리)를 타고 내려오는 술방울이 묽어 엉기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래도 할머니가 부엌에 나앉아 있기라도 했는데, 오늘은 부엌문마저 굳게 닫힌 채, 집 안은 텅 빈 듯 괴괴하기까지 했다. 불현듯 요망한 생각이 들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마당을 서성거리는데, 집 한 켠에 붙은 전방 방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할머니가 부스스한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서 오셨는가?”
할머니는 어제 답사차 들른 대학생 ‘애기’들과 초저녁부터 술을 펐다고 했다. 최근 들어 일하는 것도 갈수록 ‘뻗치고(힘에 부치고)’ 신경만 날카로워져서 적당히 농땡이를 치고 있던 차에, 젊은것들이 찾아오자 그만 아무 생각 없이 어울려버린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그 많은 진도의 홍주 술도가들과는 달리 여전히 장작불을 때서 술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자존심 섞인 고집이기도 했고, 나라에서 ‘봉급(무형문화재 지원금 80만 원)’을 받는 데 대한 응당한 도리이기도 했다. 그만큼 일은 고되기만 했고, 그나마 최근 전수생 두엇을 두게 되면서 일손을 덜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 놓고 뒤로 물러앉을 처지도 아니었다. 불 같은 성미는 여전해서 때론 전수생과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회장을 맡고 있는 홍주보존회 일로 가끔 울컥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설움도 세월도 시들어만 가고
소포리 노래방 할머니의 경우는 그래도 조금 나아 보였다. 어머니 노래방은 제법 자리를 잡았고, 작년 남도문화제에서 소포리 베틀노래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소포리 걸군농악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기쁨까지 맛보았다. 이제 어머니노래방에 나가서도 젊은 소리꾼들의 신명에 방해라도 될세라, 뒷자리로 슬쩍 빠져서 추임이나 할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한남례 할머니는 지산면 하보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소리꾼인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했고, 개구리 폴짝거리는 소리에도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의 신명을 타고났지만, 소포리로 시집온 후 매운 시집살이와 일에 치여 자신의 소질 따위는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눈먼 시할머니를 위시해 열두 식구에 이르는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면서, 염전일로 들일로 허리 펼 날이 없었다. 뒤늦게 남편을 군대에 보내기도 하고, 첫아이를 낳은 후 태어난 쌍둥이 시동생 둘을 키우기도 했다. 강보에 싸인 시동생을 업고 들일을 할 때, 그녀는 그리도 서러워서 소리 죽여 울었다.
설움은 소리를 낳고, 소리는 용서를 낳았다. 오십이 넘어서야 그녀는 눈치 보지 않고 제 신명대로 소리를 할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끼는 혼자 노래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마을 아낙네들을 불러 모아 ‘어머니 노래방’을 여는 데까지 이르렀다. 비록 농한기에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소포리 노래방은 이 마을 여인네들의 유일한 도피처고 해방구였다.
할머니는 내가 노래를 청하자, 서슴없이 밭고랑을 타고 서서 구성진 목소리로 육자배기 한 자락을 들려주었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오시는 임을 보내는 꿈아/오시는 임은 보내지를 말고/잠든 나를 깨워나 주지/이후에 유정님 오시거든/임 붙들고 날 깨워줄거나 헤-/내 정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로다/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소냐/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휘휘 감돌아들거나 헤-
할머니의 육자배기 가락은 봄물이 든 밭고랑을 타고 넘어 들노래 중 상사소리로 이어졌다.
상사소리는 어디를 갔다가/때를 찾아서 다시온데/우리 인생 한번 가면/다시 오지를 못하나니…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뒷산은 점점 가까워온다
한남례 할머니 |
다시 벚꽃을 함께 볼 수 있을까
하얀 꽃잎을 올려다보면서 ‘내년에도 이 사람과 함께 벚꽃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단순한 의문문으로, ‘함께 보고 싶다’가 아니라 ‘과연 함께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 입니까’ 중에서
* 과연 함께 볼 수 있을까? 보통 때면 그냥저냥 흘려듣던 말도 어떤 상황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들립니다.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함께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함께 살아 있을 때 벚꽃을 많이 보십시오. 내년까지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사랑을 아끼지 말고. -고도원의 아침편지 3.29자
꽃처럼 함박웃음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선 꽃구경이었습니다. 단지, 그토록 오랫동안 아버지 병 간호에 열정을 쏟은 엄마에게 잠시나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으로 떠난 여행길이었습니다. 딸이랍시고 도대체 7년째 진도에서 무얼 하며 혼자 사는지 모르겠다던 엄마가,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고 오신 남도행 첫나들이길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를 심한 어지럼증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이 나이까지 근심과 걱정만을 안겨주고 있는 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남도의 바람과 공기를 마시며 함께 벚꽃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창경궁 벚꽃길을 이야기합니다. 평생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3남 1녀를 열심히 키우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엄마에게 아버지가 없는 벚꽃 핀 봄날은 어떤 느낌인지, 감히 딸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가신 지 훌쩍 두 달을 넘겨버렸지만 엄마는 아직도 요란한 색깔의 옷은 입지 못하겠답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은 우기다시피 자신의 꽃무늬 옷을 입힙니다. 꽃과 어울리는, 그러나 어딘지 어설픈 엄마의 옷차림에서 72세 노모(老母)의 고단한 세월을 느낍니다.
돌이켜보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맏아들이 난데없이 프랑스 파리로 그림공부를 하러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후 18년이란 오랜 세월을, 엄마는 그저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더랬습니다. 일찍이 대학 다니던 남편을 서울로 보내고 7년 동안 시부모를 모시며 독수공방(獨守空房)하던 인내의 시절을 겪은 뒤라 차라리 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번에는 딸이 혼자서 연고도 없는 진도에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도 엄마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습니다. 외동딸이라는 미명 아래 애지중지 키우면서 자장가로 명심보감(明心寶鑑)과 계녀가(戒女歌)를 들려주시던 엄마는, 이제 딸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1년 연하의 아버지에게 시집온 엄마는,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살아오셨습니다. 마흔네 살쯤인가,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졌 때는 손수 침술까지 익힐 정도로 지극정성이던 엄마였습니다. 그 정성으로 기적처럼 몸을 일으켰던 아버지가 다시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도, 실어증으로 말을 잃고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일 때도, 오랜 의식불명으로 모두 다 포기를 각오해야 했을 때에도 엄마만은 끝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걱정이 오히려 섭섭함으로 돌아올 때면, 엄마는 내 곁에 와 눈물짓곤 했습니다.
“저렇게라도 살아 있는 것이 내게는 기쁨이고 행복이다. 아버지는 내게 삶의 이유니까.”
그런 엄마가 봄날 벚꽃 아래서 활짝 웃으셨습니다. 꽃처럼 향기롭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엄마의 모습에서 딸은 왠지 모를 슬픔에 잠깁니다.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없는 엄마의 서늘한 옆모습이 시리도록 가슴을 파고듭니다. 탐스러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봄바람이 향긋하게 코끝을 스칠수록 더욱 더 깊어지는 슬픔에 목이 메입니다. 남도의 시인 김영랑이 읊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가슴이 섬뜩하도록 뼈저리게 느끼는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자꾸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이 본 ‘아씨’라는 드라마의 주제곡이 떠오릅니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말 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여기던가 저기던가/복사꽃 곱게 피어 있던 길/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어디선가 저만치서/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 김미경씨(서울 출생)는 KBS와 EBS에서 다년간 방송작가 활동을 했고, 고려대학교에서 동양사와 국문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민속연희를 살펴본 ‘동화 이해응의 ‘계산기정’ 연구’로 한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진도군청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초당대학교에서 국어작문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문인협회(시분과)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고려대 민속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진도상례에 대해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 김선희씨(경북 문경 출신)는 남편 김창환씨를 따라 서울에 상경하여 1964년 7월8일에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자택에서 김미경을 낳았다. 영남 규방가사를 직접 필사하고, 창작하고, 부를 수 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워 견문 있는 가문에서 자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지난 1월29일에 남편과 사별했다.
마산판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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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기씨(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을 외람되게 호칭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천진성 탓이다)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의 오랜 꿈 중에 하나였던 영화배우, 그것도 주연으로 출연하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승기씨는 1939년 경남 통영시 명정동에서 태어났다. 통영 충렬초등학교, 마산 창신중학교, 마산상고(현 용마고교)를 졸업했다(1960년). 1970년부터 한국연예협회 경남지부 사무국장 18년, 한국예총 경남지회와 마산지부 사무국장 3년, 마산문화원 부원장을 6년 동안 지냈다.
1986년 대한출판문화협회 모범장서가로 선정되었으며, 1993년 ‘책의 해’ 9월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5년 영화에 관한 글을 묶어 ‘스크린야화’를 펴냈고, 1999년 화갑기념 수필집 ‘명정리’를 발간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거제대학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영상예술의 세계’를 강의했으며, 현재 창원전문대에서 ‘영화와 영화읽기’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마산MBC, 창원KBS 라디오에 다수 출연하였으며, 현재 마산MBC TV ‘얍! 활력천국’, MBC 라디오광장에 출연 중이다. 이제껏 2800여 쌍의 결혼주례를 섰으며, 마산시 기네스북 2회 연속 선정(영화포스터, 비디오 최고 소장)되기도 했다.
현 마산문화원 감사, 한국영화자료연구원 부원장, 한국장서가협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것이 이승기씨가 ‘닥치는 대로’ 살아온 이력의 대충이다. 고교를 졸업한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여 년 간을 비워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절은 이력으로 정리해내지도 못할 만큼 ‘막무가내’였기 때문이었다.
최근 승기씨(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을 외람되게 호칭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천진성 탓이다)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의 오랜 꿈 중에 하나였던 영화배우, 그것도 주연으로 출연하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방송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허위의식을 채워준다.
#시놉시스
-일제시대 때 건설된 남지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 끊긴 적이 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총탄의 흔적은 당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런 남지철교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노인(이승기 분)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찾아온 다큐멘터리 감독은 이 노인의 서글픈 사연에 동화되어 밤이 늦도록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다시 혼자 남은 이 노인….
감독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잠시 후 흑백 톤의 이 노인의 얼굴이 보이는데….
솔직히 승기씨는 아무리 설명을 듣고 대본을 몇 번씩 읽어보아도 도통 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승기씨의 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이미 ‘시네마천국’에서만큼은 달관을 넘어 무위의 경지에 올랐다. 오히려 그토록 난해한 영화를 놓고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이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박재현 감독의 ‘외계인’은 30분짜리 독립영화다. 현재 촬영과 편집을 마친 ‘외계인’은 인디포럼 2007년 공식 상영작으로 결정났으며, 각종 영화제에도 출품할 예정이란다.
승기씨가 이 영화에 캐스팅된 것은 다들 그렇듯, 가난한 독립영화 연출가의 비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4년부터 이 영화를 구상했던 박 감독은 영화의 핵심인물인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에 이르는 노인배우를 물색했다. 하지만 지역에서 그런 배우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그렇다고 출연료 한 푼 줄 수도 없는 처지에 충무로에서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감독은 방송국 야외촬영현장에서 운명적(그의 표현에 따르면)으로 승기씨를 만났다. 너무나 자신이 찾던 이미지와 잘 들어맞았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입조차 뻥긋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승기씨와 연락이 닿았고, 시내 한 커피숍에서 조심스레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승기씨의 반응이 의외였다.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 세 가지로 방송출연, 선생님, 영화감독이 있는데 말이야, 그중 두 가지는 이미 이루었고, 마지막 하나가 영화에의 꿈인데 그렇게라도 이룰 수 있다면 다행이지.”
뿐만 아니라 승기씨는 출연료는 사절이고, 돈이 없으면 자기가 밥까지 사겠다는 게 아닌가.
승기씨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선친의 손을 잡고 고향 통영의 봉래극장에서 일본 사무라이 영화와 대동아전쟁 뉴스를 본 것이라고 한다. 궁핍한 195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유일한 오락도 위안도 영화였으니, 통영 봉래극장에서 시작된 바람은 마산으로 옮겨가면서 태풍으로 바뀌었다.
마산의 거의 모든 극장을 섭렵하면서 영화에 미쳐들어간 승기씨는 1959년 9월 15일 추석날(그날은 진짜 태풍인 ‘사라호’ 불던 날이었다), 마침내 영화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때 시민극장에서는 추석특선프로그램으로 그랜 포드와 어거스트 보그나인 주연의 ‘뇌격명령’을 상영했다. 그 명령은 승기씨의 머리로 떨어졌다. 몰래 극장에 들어와 영화를 즐기던 승기씨는 연속상영으로 잠시 장내의 불이 켜졌을 때 단속 나온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머리통을 쥐어 맞았으나 그는 곧바로 퇴각하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지켰다. 그 덕에 승기씨는 괘씸죄로 걸려 무기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때가 고교 3학년 2학기 때였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벌도 제대로 갗추지 못한 그에게 세상은 모순과 장벽 투성이였다. 승기씨는 좌충우돌하며 살아야 했고, 그런 고단한 삶 속에서 영화는 그가 유일하게 ‘눈을 뜨고 꾸는 꿈’이었다. ‘작은 아씨들’의 쥰 애리슨에게 팬레터를 쓰는 순간, 그녀는 승기씨의 애인이었고, 이스라엘에 가고 싶으면 이스라엘 영화를, 하늘을 날고 싶으면 창공영화를 보면 될 일이었다.
‘외계인’의 출연으로 세 가지 꿈을 얼추 이룬 승기씨는, 욕심 많게도 두 가지 꿈을 더 꾸게 되었다. 그 한 가지는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하고,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를 찍는 일이다. 그 영화의 줄거리를 물으니, 첫사랑 여자에 관한 것이라는데, 이번에는 내가 도무지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 꿈을 위해 승기 씨는 요즘 ‘이천만, 이천만’을 외고 다닌다.
또 다른 꿈 하나는 그가 여태껏 모아온 영화 관련 자료들(1950년대 영화포스터 300여 점, 비디오테이프 2000여 편, DVD 300~400편, 영화관련 서적 300~400권, 영화잡지 수천 권 등)을 전시할 수 있는 ‘이승기영화자료관’을 만드는 것이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마산문화원 한켠을 리모델링하기로 하고, 마산시의 지원을 내락받기도 했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승기씨는 지금 몸이 달아 있다. 그 희귀성이나 가치를 떠나서 한 영화 마니아가 영화만을 벗삼아 살아온 60년 세월을 고스란히 지키는 공간을 만드는 게 그토록 힘든 일인가. 그 세월이야 승기씨가 조금 유별났다 뿐이지, 우리 모두의 꿈이며 추억이 아니던가.
한때 잘 나가다가, 이제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문을 닫고 만 연흥극장 거리를 승기씨와 함께 거닐며, 나는 또 다른 꿈 하나를 곁눈질로 꾸었다. 어차피 문을 닫은 극장이라면, 그 극장을 개조하여 이대엽, 이수련, 김혜정, 강제규 등으로 이어지는 마산영화인맥들을 모은 마산영화기념관을 짓고, 그 한편에 이승기영화자료실이 들어서고, 극장 스크린에서는 흘러간 추억의 명화들을 매일 같이 틀어준다면, 그것도 신나게 틀어준다면…. 아, 그 모두 한 편의 영화일 뿐이런가.
꿀벌과 인삼
아까시의 파업
“형님, 엊저녁에 한숨도 자지 않고 술만 마셨습니다.”
아카시아 하나에 기대어 살면서 양봉을 하는 후배한테 받은 전화입니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눈물을 흘렸을 그 착한 아우의 모습이 며칠간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속이 타기야 어디 자기뿐이겠습니까. 이 땅에 꿀벌을 기르며 사는 수많은 양봉인들이 있는데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고 엄살을 부려도 아카시아꿀이 펑펑 쏟아져서 재미를 보았는데, 올해는 아카시아꿀을 떴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대구에서 철원까지 아카시아가 전혀 꿀을 분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열도와 중국대륙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양봉 수입 중에서 아카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80%가 되는데, 양봉인들이 감당할 금년 한 해 동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농가당 피해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봉농가에게 꿀을 사기 위해서 선도금을 지불하여준 유통업자들은 이미 부도가 났습니다.
양봉인들에게는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나라에 양봉이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카시아의 분노인가 아니면 자연의 재해인가. 학자들도 그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아카시아의 분노가 양봉인들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아카시아가 내년에도 꿀을 분비하지 않는다면, 양봉인들은 꿀벌과 결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꿀벌이 떠나게 되면 농업대란이 몰려올 것입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딸기와 참외 등 하우스 재배를 하는 농가들은 비싼 가격으로 매개곤충인 꿀벌을 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산물 생산량도 현저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꿀벌이 없는 생태계는 이처럼 무섭습니다. -길일기 ‘아카시아의 분노’
일기씨가 이 글을 쓴 것은 2004년 6월 9일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그러면 그동안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분노’든 ‘재앙’이든 아카시아의 파업은 3년 내리 계속되었고, 폐업양봉농가가 속출했고, 대체밀원(代替蜜源)을 개발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고, 잡화꿀이나 밤꿀 정도로 버티던 농가들도 금년마저 마찬가지라면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일기 씨 역시 그래도 내년이 있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되풀이해 온 것이 벌써 3년째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왜 그동안 구제역이나 조류독감과는 달리 그토록 조용하기만 했던 것일까. 양봉은 이미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축산농정 중에서도 소외된 말단에 속한다. 아카시아의 파업이 아니더라도 양봉은 이미 고사 직전이었다. 이 판에 FTA까지 체결되었으니, 양봉이야말로 ‘사장품목’ 중에서도 아마 1순위에 속할 게다.
수년 전 백묵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휩쓸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벌의 유충에 곰팡이가 생겨서 유충이 그대로 죽는 질병인데, 벌의 개체수가 날로 줄어들다가 마지막에는 벌들의 세계 자체가 몰락하게 됩니다.
이처럼 위기를 느끼게 되자 여왕벌은 자신의 형질이 약하기 때문에 벌들이 질병에 걸린다고 생각하여 여왕벌을 교체하는 길만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벌의 개체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묵은 여왕벌은 분봉하여 함께 나갈 일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미 여왕벌은 새로 태어난 여왕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후손을 위하여 자기를 밟고 가도록 하는 처절한 세계가 바로 벌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 길일기 ‘땅콩껍질 속의 연가’
어찌 벌뿐이랴. 아니, 충분히 살 만하게 되었는데도 더 욕심을 채워보겠다고, 이미 뽑힐 대로 뽑힌, 이제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제 어미, 애비의 가슴을 무참히 짓밟고 가는 동물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 좋다. 개방은 불가피한 것이고, FTA가 아니라 하더라도 농업과 농촌은 이미 회생할 수 없다는 말이 맞다 하자.
우리집 앞집은 빈집/우리집 앞집의 옆집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우리집 뒷집은 빈집/우리집 뒷집의 옆집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우리집 오른쪽 옆집은 빈집/우리집 옆집의 옆집은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우리집 왼쪽의 옆집은 빈집/우리집 옆집의 옆집은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 - 길일기 ‘우리집 앞집’
아무리 이제 가엽고 힘없는 것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쟁을 위해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부터 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페달을 밟기를 멈출 수 없다 하지만, 하늘과 땅에 기대 살던 농심과, 그것에 기대 살던 시심과, 모성과 인정과 그리움마저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면, 흙길마저 끊기고, 그 위를 덮은 아스팔트길을 나는 어찌 가야 한단 말인가.
너를 안고 가는 길은 아늑하구나/탱자나무 울타리, 고샅길, 감나무 아래 우물/지금까지 피어 있는 민들레, 대우네 할머니/태근네 증조할머니, 동근네 어머니, 육촌 형님/논밭을 가는 사람들, 강아지, 고양이 새끼/아스팔트를 완만하게 달리는 시내버스/개울 따라 서 있는 버드나무, 개울물/푸른 이끼,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 새끼/개울 건너 푸릇푸릇한 은기네 형님 논 위로/포개질 듯 포개질 듯 날아가는 나비떼/저녁노을 내려앉은 정문산에 마을을 적시는/밤꽃 내음/유미야! 규영아!/하늘과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지/고맙다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며 가야지/엄마 아빠 맘마/이 낱말만 겨우 알고 있는 너를 안아도/아 세상은 너무나 가득 차 오르는구나/너희들을 볼 때마다/혹시 내가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무서워진다 - 길일기 ‘사랑가’
인삼에 희망을 걸다
그는 조상대대로 인삼농사를 지어왔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을 거들어 농사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특히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동생들을 데리고 인삼포장에 가서 잡초를 뽑아야 했고, 계속되는 농사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꿀벌을 치고 싶어 했다. 인삼밭은 마을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깊은 숲 속에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올 때면 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멀게 서대산의 저녁노을이 뻗어 있었다. 그때 꽃과 어울리는 벌들의 세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왔고, 벌들이 잉잉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묘하게도 구원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인삼농사를 짓는데, 아버지께서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그때 마을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친척들이 많았다. 그래서 시작된 23년간의 공직생활. 금산군청에는 인삼계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인삼계에 근무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업축제라는 인삼축제업무를 보기도 했다.
그의 아내가 시집을 오던 날,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비포장도로를 타고 금산에 오면서 처할머니께서는 한 시간 동안이나 울었다고 한다. 대전에서 금산까지 국도로 와 본 사람은 알 터이지만 보이는 것은 산밖에 없고 갈수록 첩첩산중인지라, 어린 손주를 산속에 두고 온다고 생각하니 적잖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큰 딸아이는 결혼을 한 이듬해 태어났는데, 이름을 유미라고 지었고, 지금 그가 운영하는 농장도 딸아이의 이름을 따서 ‘유미네농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유미가 태어났을 때 어린 딸에게 꿀을 먹이겠다고 양봉을 시작했는데, 그 딸이 이제 스물네 살의 처녀가 되었으니 꿀벌을 친 지도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그만큼 그가 ‘아카시아의 분노’로 입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4년부터 대체사업으로 시작한 홍삼이 그 아픔을 치유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홍삼에 ‘길일기표’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비록 혼자서 제조도 하고 판매도 하는 1인 공장에 불과하지만, 그 품질만큼은 자기 이름을 걸어도 될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당초에는 대여섯 명이 그의 홍삼을 먹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1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홍삼으로 얻는 연간소득만도 3억 원에 이른다.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씩 인삼밭에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부고라도 올라치면 먼저 인삼밭 울타리에 꽂아 그를 알리고 인삼밭에 들어갈 정도로 신령스럽게 여겼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의 은혜로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하늘, 사람, 땅, 즉 천지인 삼재의 기운을 받고 인삼이 자라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꿀벌이든 인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 소통하며, 그 소통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그는 최근 그동안 농사 틈틈이 써온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는 아직까지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다.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 알렉산더 S. 니일 ‘써머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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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3인 소리는 나를 만나기 전에 한바탕 울고 왔다며 눈이 벌게 있었다. 진학상담을 하다가 치열한 바깥세상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불안해졌다는 소리는, 그 불안함 때문이 아니라 주위의 격려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된 안도감으로 울었다고 했다. 중학교 때 우연히 여행 겸 간디학교에 놀러왔다가 예쁜 건물과 편안한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는 이 아이는, 대학에 진학해 무대미술을 전공하는 것이 꿈이다. 남자친구가 불어주는 민들레 홀씨로 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마음을 풀었다. |
박기원 선생님.
성큼 오월로 다가선 하늘은 높고, 산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제가 오월의 문턱에서 간디학교를 찾은 이유는, 너무도 의례적이기는 하지만 오월을 맞아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제도교육 아래서 질식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을 이미 어떤(그것이 어떤 것이든) 교육관에 물든 교육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사자인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승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대안학교를 다닌 대안학교의 성골이다. 그의 부모는 일찍이 대안교육에 눈을 떠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유학교를 설립한 주축이기도 했다. 이제 고3인 승우는 문예창작학과를 지망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을 좋아한다는 그의 문학적 소양이 내 기를 형편없이 죽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항상 꿈꾸는 듯한 그의 ‘문학적 눈매’가 나는 한없이 부러웠다. 그는 지금 인근 농가에서 두 친구와 함께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
처음 우리는 그가 우리 국적이 아니기를 바랐고, 이민사회를 핑계로 우리에게 어떤 저해도 없기를 바랐고, 그것이 총기 소지를 비롯한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 ‘대 테러국가’의 국내적인 사회문제이기를 바랐고, 기어이 초강대국 시민들의 성숙(?)한 태도에 안도했습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사이 어느 누구도 한 이민 2세의 불행을 이해의 관점에서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한 가족을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로 나누어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로 몰고 가는 데 동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불행한 사건이 어쩌면 교육, 개방, 양극화, 폭력화, 넓게는 이민사회까지 포함하여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알리는 조짐일지도 모르는데도 그 본질을 캐묻는 데 소홀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저는 이참에 간디학교 아이들에게서 그 문제의 본질과 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결과만을 빼놓고는 어쩌면 동류항일 수도 있는 그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하지만 솔직히 저는 적이 실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얼핏 아이들은 관점은 고사하고 논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장하자면,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통상적인 수준의 답변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간디학교 아이들에게도 그것은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을까요.
석훈이와 서현이는 각기 창원과 광주에서 일반고등학교를 다니다 얼마 전 간디학교로 전학 온 고2 영·호남 신(新) 동기생이다. 그들은 출신지만큼이나 성장배경과 사고방식에서 서로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찌푸리거나 피식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희망으로 절친해 있었다. |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른들의 생각이 아니라 아이들의 몫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도권의 아이든 대안학교의 아이든 그들은 어차피 자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갈 것이고, 거기서 이런저런 장애물들을 만날 것이고, 때론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때론 고통스러워 하고 때론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역시 아이들의 몫이고, 어른들의 일은 단지 아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찌 보면,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행복 이전에 희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청의 그 먼 길을 돌아온 지금, 저는 그때 아이들을 바라만 보았지 한번 보듬어주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많지만 좀 더 깊어진 후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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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간디학교에 다니는 동욱이는 제천간디학교 중학과정 선배인 병우를 만나러 왔다. 이 아이의 집은 원래 산청인데도, 중학과정을 마친 후 제천간디학교가 더 마음에 들어 그냥 남게 되었다고 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동욱이는 아직까지 진로조차 정하지 못한 자신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무빙 스쿨(이동수업) 과제로 ‘노래와 기타’를 선정했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때 비만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는 동욱이는 지금도 언제 다시 비만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불안해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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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 때로 우리는 자네를 김유정의 화신이라고 했지. 삼십 년대 김유정의 그 담박함, 우직할 정도의 그 수줍음을 빼다 박은데다 유정이 글쓰기에 쏟아 붓던 그런 열정, 그 신명으로 산국농장 가꾸기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자네 부인 말대로 ‘일밖에 모르는 사람’의 그 외고집으로 한길을 가는 그 모습이 유정의 그 이미지와 닮았다는 그런 뜻에서였지.
-전상국 ‘여보게, 산지기시인, 술 한 잔 받게나’ 중에서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토요일 오후/산막에 앉아/오지 않는 전화의 코드를 뽑는다/빗소릴 들으면/진종일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아도/그대 가슴 붉은 사과알처럼/뜨겁다는 걸/미처 알기나 하는가//사과나무 잎을 타고/흐르는 빗물이/정갈하다/그렇게 마음을 헹구어냈으면//비 맞는 풀들의/생기 넘친 환성이/나를 왕이 되게 한다/왕이 되어 전화의 코드를 다시 꽂는다
-김희목 ‘비 오는 날의 환상’ 전문
산국농장 과수원지기로, 나무를 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이 분은, 비록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이 분은 늘 누구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엉겅퀴와 이야기하고, 어느 날은 복사꽃 아래서 복사꽃 이야기에 취해 있습니다. 밤꽃이 자라면 밤꽃의 향내가 또 이 분을 아름답게 합니다. -최돈선 ‘하얀 분’ 중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침 움푹한 떡시루 같다고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 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세상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김유정 ‘오월의 산골작이’ 중에서
그가 도무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명색이 시집을 두 권씩이나 낸 시인이지만,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그로서는 되도 않는 ‘시인 행세’가 영판 사기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 자기변명을 한다손 치더라도 자연 앞에서 누구나 시인이 될 뿐이며, 아니 자연 그 자체가 이미 시거늘 대체 시인이란 웬 말이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며, 자연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그가 진자 농심이고 꽃을 즐길 줄 아는 그가 진짜 시심임을 어찌 모르랴.
선대 때부터 일구어온 춘천 후평동의 산국농장이 도시로 편입되자, 그 개발보상비를 들고 실레마을로 내려온 그에게 시심을 일깨워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작가 전상국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고는 하지만 그와 작가는 사실 그리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다. 끼리끼리 어울리기 마련인 학창시절부터 그는 키가 작았고, 작가는 키가 컸다. 꿈 또한 달랐다. 그는 진즉부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지을 작정이었고, 작가는 학창시절부터 문재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 두 사람을 새삼 각별하게 묶어준 것은 바로 김유정이었다. 일찍이 작가 김유정에 심취한 전상국은 유정의 고향마을을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한 고등학교 동창의 존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작가의 눈에는 묵묵히 농사일에만 매달려 있는 동창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정의 모습과 닮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농심 안에 담겨 있는 시심을 보았고, 그것을 흔들어 깨어나게 했다.
사실 김유정문학촌의 구상이 무르익은 곳도 바로 산국농장이었다. 그들을 비롯한 몇몇 지인들이 마치 ‘도원(桃園)의 결의’인 양 산국농장의 복사꽃 아래서 김유정문학촌 조성의 꿈을 다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김유정문학촌의 촌장이 되었고, 시인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산국농장은 김유정을 찾아든 ‘산골나그네’들에게 포근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떡시루 안의 봄잔치
그 마지막 날인 4월 29일 아침,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김유정 문학기행열차가 경춘선을 달려 김유정역에 참가자들을 내려놓는다.
원래 ‘신남역’이었던 이 작은 시골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람의 실명을
딴 역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어떤 위인도 아닌 한낱(?) 글쟁이의 이름이라니!
마을에서는 문학제 행사가 한창이다. 풍물장터가 열리고, 떡메를 치고… 행사는 김유정의 소설처럼 소박하고 향토색 짙게 펼쳐진다. 이 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봄·봄, 동백꽃의 점순이를 찾습니다’였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키는 작지만 야무지고 당찬 캐릭터와 이미지를 지닌 여성을 선발한다. 지난해 ‘동백꽃 점순이’로 뽑힌 박상임씨(66)도 다시 행사장을 찾았다. 평창에서 요가원을 운영한다는 그녀는 자신이 공교롭게도 박씨인지라, 당대의 명창이자 명기였던 박록주에게 실연을 당한 김유정의 한을 풀어준 듯해서 한없이 기쁘다고 했다. 행사 중간에 깜짝인물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진짜 점순이의 딸이 나타난 것. 실명은 아니지만 실존인물이었다는 봉필영감의 외손녀인 최금자씨(67)가 그 주인공이다.
뒤이어 마을 논밭에서 닭싸움이 벌어졌다. 소설 속에서처럼 고추장을 먹이며 연신 싸움을 재촉해보지만, 영문도 모른 체 끌려나온 닭들은 좀체 붙으려 들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끓는 물! 끓는 물!”을 연호하고, 누구는 “닭들이 사귄다”고 야유하고, 누구는 “암탉을 데려오라”고 소리치고, 누구는 꽁무니를 빼는 닭을 잡으려 다이빙을 해대고, 기어이 닭싸움은 사람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누군가 토종닭만 출전시킨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외래종 싸움닭을 투계장 안에 밀어넣은 탓이었다. 소란도 잠시, 엉성한 닭싸움이 끝나고 사람들이 닭을 멀리 날려 보내면서, 떡시루 안의 봄잔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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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길, 5·18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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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무더기로 꽃잎 떨어지고 이럴 수는 없다고 이럴 수는 없다고 가뿐 숨 몰아쉬고 벌린 입 앙다물고 도망쳐도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는 막다른 길 차라리 죽어 상무관으로 가거나 도청 어둠 속에 총알받이로 남거나 눈물로 빚은 주먹밥 피에 젖은 운동화 아득하고 아득하게 멀어져가고
넋이로다 넋이로다 스물 하고도 일곱 번 어느 구천을 떠돌던 넋이로다 죽어서도 찢겨지고 죽어서도 버림받고 죽어서도 팔려다니고 죽어서도 죽임당한 가엾은 넋이로다 씻겨보세 씻겨보세 씻길수록 설운 그대 넋이여 이제는 다만 사라지지만 말고 살아 돌아오시게 부디 살아 돌아오셔서 살아서도 죽은 모든 넋들 남김없이 씻겨주시게 - 졸시 ‘5·18 씻김굿’
지난 4월 26일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는 진도씻김굿 공연이 열렸다. 개교 55주년을 기념하고 여수대학교와의 통합에 따른 갈등의 앙금을 씻어내려는 행사이기는 했지만, 때가 때인지라 굿은 마치 당연하기라도 하듯 스물일곱 돌을 맞는 5·18에 대한 해원으로 이어졌다. 굿의 영매들은 오월 영령을 불러내 씻김을 하려 했지만, 정작 씻김을 필요로 한 것은 죽은 영령들이 아니라 살아남아 부끄러운 우리들 넋이었다.
기억
1980년 봄, 그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성길씨는 법대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광주고 5년 선배였지만 학번은 성길씨와 같았다. 성길 씨는 재수시절 학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그는 선배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죽음이 너무 늦었다”고 슬퍼했다. 그럴진대, 성길씨는 도대체 자신은 또 얼마나 늦어버린 것인지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 14일부터 전남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도청 앞 분수대를 둘러싸고 벌어진 민족민주성회는 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날이 날인지라 학생들은 이 땅에서 군부쿠데타가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외쳐댔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나 둘 횃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수많은 대중 앞에서 ‘우리가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게 하고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라고 연신 사자후를 토했지만, 집행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아래를 지키던 성길씨는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무리 평화대행진이라고는 하지만, 자칫 방화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횃불시위를 앞두고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횃불시위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끝이 났고, 시위대는 주변을 정리한 후 자진해산했다. 성길씨는 적이 안도했고, 그윽이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태풍전야의 고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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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전남대 교정 17일 하루를 관망 속에 보낸 성길 씨는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그토록 평화적 해결을 바랐건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광주시내 각 대학에도 휴교령과 함께 계엄군이 진주했다. 아침 10시께, 등교하던 학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 사이에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 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복개되기 전의 용봉천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투석으로 맞섰다.
5월 20일, 광주시외버스터미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연통을 넣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관원들이 혈안이 되어 자신을 붙잡으러 다닌다는 절망스런 전언뿐이었다. 심지어 박관현이 계엄군에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성길씨는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새벽녘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강진 행 버스에 올라탔다. 고향인 완도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버스의 제일 앞자리에 보란 듯 태연을 가장하고 앉았지만, 막상 차가 출발하자 성길씨는 공포심과 좌절감으로 한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도망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성길씨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쳤다. 차창 밖으론 광주의 어둑한 새벽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그날 죽은 자들만을 빼고, 그날 죽지 못한 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봄놀이 한마당을 펼쳤다. 2007년 4월 28일 오전 11시, 광주 인근의 송산유원지에는 1000여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매년 치러온 ‘민주가족 합동세배’의 연장선상에서 이 지역 선후배들이 함께하는 소통의 자리를 고민하던 끝에 개최된 행사였다. 성길씨는 이날 사회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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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날의 정신은 희미해졌고, 남은 자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때론 흩어지고 때론 반목하고 때론 대립하기까지 했다. 가해자정권의 보상은 그렇다고 치고, 피해자정권의 배상까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주의 현실은 여전히 무겁고 어둡기만 했다. 그 오랜 앙금과 침전을 털어버리려 마련한 자리였다. 애써 ‘가벼운 마음으로 지난날의 광주와 오늘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다행히 모두 표정이 밝았다. ‘무슨 결론을 얻자는 것이 아니므로 끼리끼리 모여 부담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랬다. 어찌 보면 그 작은 ‘풀이’ 속에 대동세상의 꿈이 남아 있었다. 헛된 구호와 헛된 싸움과 헛된 망령이 아닌 진정한 화해 속에서, 비로소 그날의 빛은 단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오랜 빚까지 물리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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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석 새벽 3시. 하늘과 땅이 조용히 기지개를 켜고 나면 산사도 조용히 눈을 뜬다. 산사의 하루는 도량석 목탁소리로 시작된다. 도량석 목탁소리는 작은 소리에서 다시 큰 소리로 목탁이 세 번 오르내림으로 시작된다. 작은 소리에서 시작함은 마음을 놓고 있는 미물과 도량 내의 모든 식구에 대한 배려요, 크게 울리는 것은 작은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도량 내의 모든 이에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힘찬 외침이다.
종송 산사의 아침은 일체중생과 함께할 수 있는 큰 배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종송이다. 매일 새벽 종송을 욀 때마다 수행자는 바른 깨달음의 길을 향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종소리로 장엄하고, 염불로 장엄한다.
사물시연 산사에서는 아침, 저녁 예불의식 전 사물(법고·목어·운판·범종)을 친다. 말과 글로써 진리를 전달할 수 없는 축생과 습생, 나는 짐승, 지옥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인 것이다.
예불 예불시간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에 귀의하며 또 그것을 받들어 행하는 스님들에게 귀의한다. 예불문이 그러하듯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이 의식에서 모든 수행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여러 불보살, 10대제자인 나한들과 삼삼조사 그리고 스님들께 마음을 다하여 귀의함을 고하며, 이로써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일시에 성불하기를 기원한다. 이것이 예불의 지극함이다.
- 운문사 ‘무명을 깨우는 새벽의 소리’
*운문사는 경북 청도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표적인 비구니사찰이다. 현재 260여 명의 비구니스님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행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 수를 자랑한다. 운문사의 새벽예불은 그 청정함과 웅장함으로 장엄을 이룬다. 들머리의 소나무숲이 아름다우며, 경내의 처진소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어쩌자고 부처님은 또 오시는가
어쩌자고 새벽은 또 오는 것인가. 간밤의 미망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무명(無明)의 새벽이 온다. 운문사 솔바람을 타고 오는 무명은 질기고도 가녀리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가유라위의 석씨정사에서 노니시면서 모든 큰 비구들과 함께 하셨다. 그때 부처님의 양어머니 대애도 구담미가 부처님 처소에 찾아와 여인도 부처님의 법 가운데 출가하여 도를 닦을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만 두십시오. 그만 두십시오. 구담미여. 여인으로서 나의 법률에 들어와 가사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청정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킬지니. 일찍이 상념을 일으키지 말고 편안히 하여 삿된 생각이나 욕심 없이 마음을 고요히 비우는 것으로 오락을 삼을지니.
어진 아난은 대애도의 마음을 헤아려 어머니를 대신해 부처님께 여인도 힘써 나가면 사문과를 얻을 수 있도록 출가허락을 내리실 것을 간청하였다.
그만 두라. 그만 두라. 아난아. 여인으로서 나의 법률에 들어와 사문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한 집안에 딸이 많고 아들이 적으면 그 집안은 날로 쇠약해질 것이니. 그리고 마치 논의 벼이삭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때에 모진 이슬이나 재해가 있다면 좋은 곡식이 상하게 되는 것처럼, 이제 여인을 나의 법률에 들이면 반드시 불법의 청정범행이 오래도록 흥성할 수 없게 되느니. - 대애도비구니경
내 마음속의 부처님은 내게 나지막이 이른다.
부처님이 무너지니 나도 무너진다. 운문사 새벽 솔바람은 무명 속에서도 하염없이 꽃잎을 떨어뜨린다. 어쩌자고 부처님은 또 오시는 것인가.
*비구니란 ‘걸식하는 여성’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비쿠슈니(bhiksuni)’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재가불자들의 보시에 의해 생활하면서 모든 욕망을 끊고 오직 수행과 전법에만 전념하는 여자스님을 일컫는다. 남성의 출가자를 비구(比丘)라 하고, 여성으로서 출가한 사람을 비구니(比丘尼)라 한다. 처음 부처님은 여성 출가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해 조건을 달았다. 그것은 비구니는 설령 자신보다 뒤에 출가한 비구라 할지라도 그를 공경해야 하며, 또 비구의 교단에서 떨어진 독립된 장소에 살아서는 안 된다는 등, 여덟 가지 조항의 규칙으로 부과했다. 실제로 비구의 계(戒)는 250조로 제정된 반면 비구니의 계는 348조로 되어 있어 비구에 비해 제한이 많고, 종단의 중책은 비구들이 맡는 등 차별이 존재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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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해녀들의 삶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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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장마 속의 해녀, 조일리, 2000 _ 제주에서는 4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내리는 비를 고사리장마라고 부른다. 그때쯤 고사리나물을 많이 채취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해녀들은 물질을 험하고 힘든 일로 생각해 자식들에겐 고된 물질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이성은 |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없는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추운 날 더운 날 비 오는 날에도/저 바다 저 물결에 시달리는 몸/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우는 아기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 강관순 ‘해녀가’ 중에서
저는 1942년 우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독립유공자 강관순입니다. 역시 저의 어머님께서는 해녀였으며, 그때 생산했던 물건을 일본사람들이 제값을 안 주고 착취하는 것을 보고 느끼신 아버님께서 옥고 중에 제주 해녀의 노래를 지어 면회 가셨던 친구분 부인에게 담배개비처럼 둘둘 말아서 제주에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해녀질을 배워 홍콩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까지 돈 벌러 갔었고, 지금도 제주에서 해녀질을 해오고 있습니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센 날엔 저의 아버님 작사하신 노래를 불러보기도 합니다. - 우도 해녀 강길여
해녀들의 삶
17일 낮 12시쯤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해안가에서 해녀작업을 하던 이모 할머니(73)가 누운 자세로 물 위에 떠오른 것을 동료 해녀들이 발견, 119가 후송했으나 숨졌다. - 한라일보 2006. 5. 18자
이 짧은 보도기사는 태왁 하나에만 의지한 채 질곡의 삶을 살아온 제주 해녀들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주에서는 ‘아들 나민 엉뎅이 때리곡 똘을 나민 도새기 잡으라(아들을 낳으면 엉덩이 때리고 딸을 낳으면 돼지 잡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척박한 섬에서 해녀의 역할은 가정 생계의 주요한 수단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들은 여덟 살 때부터 자맥질을 시작했고, 열여섯 살이 되면 물질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녀들에게 바다는 놀이터이자 일터였고, 삶의 전부였다. 젊어서는 유목민처럼 동서남해안, 흑산도와 백령도, 멀리 일본과 홍콩, 중국, 러시아로 떠돌며 ‘바깥물질’을 해야 했고, 나이 들어서도 유모차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가야 했다. 귓병과 관절염, 두통과 피부병, 부분적 기형 등 오랜 잠수로 엉망이 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우황청심환과 뇌신, 진통제와 감기약 따위를 무시로 삼키면서.
산아제한이나 피임이라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던 그 시절에 팔남매를 낳아 살게 되었다. … 친정어머니는 저더러 걱정하지 말라, 우도에서 딸 둘만을 낳으면 부자 된단다, 너희도 부자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자주 들었다. 그때는 공부가 최선이 아니라, 잠수질 배워 돈 버는 것을 자랑삼았다. 아이들도 상급학교 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 잠수라는 직업 하며 후회해 본 적도 없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 바다는 매일매일 오라고 손짓한다. - 차임화(1935년 우도 오봉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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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천진리, 2003 _ 해녀가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휘파람소리를 숨비소리라 한다. |
해녀들의 삶을 기록하다
서른두 살 무렵 여름, 나는 훌쩍 제주 우도로 떠났다. 아무도 반겨줄 사람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우선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신비한 고요 속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 마을은 아름다웠다. 해안가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모인 해녀들이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바다 한가운데 태왁이 떠오르고 숨비소리를 내며 해녀들이 물질을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른두 살의 처녀사진가를 훌쩍 섬 속의 섬으로 떠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사랑도 일도, 되는 것 하나 없던 도회에서 도망치듯 나선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가슴속 깊이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어떤 간절함이, 그 간절함이 주는 슬픔이 그녀를 낯설고도 익숙한 바다로 불러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 역시 ‘작고 아름다웠지만, 슬프고 우울하기도 했던’ 바닷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에게 ‘바다의 바람과 물고기와 물질하는 여자’는 결코 ‘낯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우도의 해안가에서 눈을 감았을 때 그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또 어떤 바다였을까.
해녀들을 촬영하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욕먹기 일쑤였고, 촬영 중에 쫓겨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해녀들의 빠른 어조는 짧고 강렬해서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칠순 해녀의 인생사와 제주 사투리를 이해하기란 마치 한라산을 오르는 일처럼 힘겨웠다. 만날 때마다 새로웠고 언제나 굳은 각오가 필요했다.
그녀는 해녀들의 진솔한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아예 그녀들 곁에서 살았다. 그녀들과 함께 마늘밭에서 김을 매고, 자맥질을 해댔으며, 그녀들이 아플 때면 그 아픈 육신을 데리고 본섬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심지어 수중촬영을 위해 스킨스쿠버를 배우기까지 했다. 해녀들의 일상은 노동의 연속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녀의 일상 역시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러기를 일곱 해, 마침내 그녀는 ‘할망(할머니)들의 바당(바다)’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진들을 건져 올렸고, 그가 도망치듯 빠져나온 도회에서 첫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전시회를 마치던 날, 마치 어떤 징조처럼 제주에서 부고가 날아들었다. 김용안 할머니. 1924년생인 할머니는 그녀의 카메라 앞에서 차렷 자세라도 취해주는 그나마 몇 안 되는 흔쾌한 동조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부산으로 대구로 돌면서 그녀는 온통 제주 우도로 쏠리는 조급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는 6월 9일부터 30일까지 제주해녀박물관에서 ‘해녀’ 사진전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귀환을 의미한다. 마치 영정사진을 모시듯 해녀의 사진을 앞세워 그녀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건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액자를 싸안고 헤엄쳐서라도 바다를 건널 작정이다. 그 바다에서 또 다른 숨비소리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에.
홀로 오남매를 키우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신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렇게 우도 해녀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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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하는 해녀, 조일리, 2000 _ 산소공급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무자맥질하는 해녀. 하루에도 천 갈래 물속을 수백 번 오르내리는 해녀들에게는 매순간이 생과 사의 경계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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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왁을 짚은 해녀, 조일리, 2006 _ 태왁은 물 위에 띄워놓고 의지하여 잠시 쉬기도 하고,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얹고 헤엄치는 데 쓰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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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주의보, 조일리, 2000 _ 천초 공동작업 중에 태풍이 불어 가마니를 서둘러 운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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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굿, 천진리, 2002 _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영등송별제. 서천진동 당동산 종달잇당에서 심방(무당)이 희생제물인 장닭을 던지면서 한 해의 액운을 막기 위한 액막이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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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굿, 조일리, 2003 _ 비양동 돈짓당(영등할망당)은 비양동사람들만 다니는 해신당이다. 돈짓당은 넓적한 돌로 만든 궤가 있고, 이 궤에다 신위를 모신 울타리형 돌담이다. 잠수굿이 끝나고 심방과 해녀가 제를 지내고 있다. |
이 여자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슬픈 바다가 숨쉬고 있는 것일까. |
푸른 우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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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 사람들은/늪과 함께 하루를 연다/물안개 자욱한 새벽/쪽배를 타고/마름과 생이가래,/개구리밥이 만든 초록의 비단 위를/미끄러지듯 나아가 고기를 잡고/늪 바닥이나 수초 줄기에 붙은/고동을 건져올린다/그들에게 늪은/모든 것을 내주고/그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아침이 오고, 사방 곳곳/타악 탁, 탁 습지식물들의 씨방 터지는 소리/장대로 배를 밀며 귀가하는/등 뒤, 은전처럼 빛나는 햇살더미가/삶의 무게 터트려주는 것이다/기우뚱, 한쪽으로 기운/낡은 쪽배의/저 중심/늪은, 우포 사람들의 일생을 안다
-배한봉 ‘우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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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자연학습원의 생태학습을 지켜보고 있는 강병국 이사. 그는 ‘한국의 늪’, ‘우포늪’, ‘주남저수지’ 등의 책을 펴냈으며, 현재 낙동강 하구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다. |
무제치늪의 소동과 용늪의 소멸
‘보잘 것 없는’ 도롱뇽들이나 사는 무제치늪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기어이 늪에 빠지고 말았다. 기가 막힌 욕설과 입에 담기 어려운 험구가 난무하고, 온갖 논리들이 논리도 아닌 채로 흘러다녔다. 도덕적 비난에다 단식의 과학적 분석까지 동원된 무자비한 공격은 마침내 한 비구니에 대한 성적 모욕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비구니는 단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멸로 쓰러졌다. 한바탕 소동이 끝났을 때, 그 수렁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찔레꽃과 미루나무가 어우러진 우포늪의 봄날. 봄이면 우포늪에는 수양버들과 내버들에 한껏 물이 오르고, 자운영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
1997년 우리나라가 람사협약(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면서 첫 보호습지로 지정된 용늪의 처지를 살펴보자. 무제치늪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고층습원이었던 용늪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6년이었다. 당시 한국자연보존연구소와 미국 스미소니언연구소의 DMZ 공동학술조사과정에서 발견한 용늪의 존재는 학계에 흥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해발 1,304미터의 대암산 정상부에 자연 발생한 용늪은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이탄층(식물이 죽은 뒤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여 형성된 층)을 통해 그 지역의 기후변화와 식생의 변천과정을 밝혀낼 수 있는 ‘자연의 고문서’이자 ‘타임캡슐’이었기 때문이다.
용늪은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불현듯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미군 헬기가 용늪을 헬기장으로 착각해 착륙하려다 추락하면서 늪을 훼손했다는 확인불능의 이야기부터, 대암산 고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에서 스케이트장을 조성하기 위해 늪을 절개했다느니, 거꾸로 군부대에서는 무분별하게 들이닥친 학술조사팀이나 탐방객들로 늪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느니 하는 설왕설래 속에서 작은 용늪은 소멸되어버렸고, 큰 용늪마저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4000년을 넘는 수명을 지닌 늪 하나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사라지기까지는 채 40년도 걸리지 않았다.
푸른 우포, 푸른 사람들
유어면 세진리 생태공원은 안내소 및 전망대를 갖추고 있어 탐방객들이 줄을 잇는다. |
우리나라 최초로 사단법인체로 출범한 환경단체이기도 한 ‘푸른 우포 사람들’의 활동영역은 다양하다. 우포자연학습원을 운영,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생태학습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포늪에 급속도로 유입되고 있는 외래종(황소개구리, 붉은귀거북, 베스, 블루길, 최근에는 뉴트리아라는 서양쥐 종류까지) 개체 줄이기, 폐그물 걷어내기 등을 비롯한 쓰레기 수거, 토종물고기 놓아주기, 불법 낚시 및 사냥 감시활동 등 우포늪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는 한편, ‘푸른 우포 축제’ 등 행사도 벌이고 있다. 내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람사총회(2008. 10. 28~11. 4, 경남 창녕 우포늪과 창원 주남저수지 일원)를 앞두고는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문화마당을 열어 생명을 주제로 한 다채로운 행사를 펼쳐나갈 계획도 가지고 있다.
우포늪의 여름 새벽. 멀리 젖은 화왕산이 보인다. 화왕산(火旺山)은 우포늪의 수기(水氣)를 다스리기 위해 붙은 이름이다. |
우포에는 늪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이 땅에 잘못 내려놓은 말씀과/행위들이 화해의 이름으로 먼저 와 있습니다.
… 우포에 가면 그리움이 보입니다./우포에 가면 아직은 희망이 보입니다.
-이광석 ‘우포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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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 주민들은 쪽배를 타고 나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거둬들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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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띠좀잠자리. 여름부터 가을까지 우포늪은 잠자리의 천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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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연꽃은 우포늪을 대표하는 수생식물이다. |
우포늪은 경남 창녕군 유어면·이방면·대합면에 걸쳐 있는 자연늪지로,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1억4000만 년 전 한반도가 생성될 시기에 만들어졌다. 담수면적 70만 평으로 국내 최대의 자연늪지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 가운데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3월 2일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습지가 되었다.
서해교전, 그 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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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아!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 아들아,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며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 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과 수많은 기계에 의지하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폐기능 소생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이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나 꿰매고 배는 열어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는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박혀 있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 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 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 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 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 “나 왔어”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 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복받쳐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기공과 나와 치기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 않다. 여러 사람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번듯하게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 없는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 서해교전 당시(2002년 6월 29일)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 해 9월 20일 숨진 고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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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무렵 산부인과병원 조리실에서 일하던 이경진 씨는 흘긋 TV 화면을 보다가 마치 뒤통수를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교전 발생’이라는 자막뉴스가 화면 하단을 흘러 다니고 있었다. 순간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휩싸고 지나갔다. 그녀는 정신없이 해군 제2함대로 전화를 걸어 악을 쓰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함정이 어떤 배인가요? 설마 윤영하 정장의 참수리호는 아니겠지요!”
상대는 답이 없었고, 불길한 예감은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밤중에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간 그녀는 또 한번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을 억지로 밀고 들어갔지만 누구도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 바닥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박동혁이 에미란 말이야! 동혁이 어디 있어!”
의무병이었던 동혁이는 온몸의 피를 서해바다에 쏟아버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살아서, 살아서 돌아왔다! 그때부터 동혁이는 ‘제2의 교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교전은 느닷없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닥친 것이었지만, 두 번째 교전은 어쩌면 결말을 예비한 채, 홀로 치러내야 했다. 그러했기에 80여 일간의 사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녀 역시 한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모두 너무 고통스러우니 이제 그만 놓아주자고 했을 때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가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살고 싶어…. 이제 정말 잘할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아이가 두 번째 교전을 마치고 장렬히 산화했을 때, 그녀의 가슴속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종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깨어져버렸고, 마지막 남은 소리 하나가 바닥 모를 나락으로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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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현충일을 맞아 대전 현충원으로 가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막사를 나서면서 박남균·이경진 부부(그들은 이제 쉰두 살이 된 동갑내기 부부다)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텃밭의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막사 안에서 같이 기거하고 있는 소들은 누가 먹여주지 않으면 그대로 굶을 형편이었다. 사실 진짜 걱정은 오늘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2만~3만 원쯤 쥐어줄 요량으로 이웃의 손이라도 빌리면 되겠지만, 6월 20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서해교전 전사상자 후원회부터, 6월 28일 대전 국군군의학교에 건립되는 동혁이의 흉상 제막식 등에 이르기까지 행사가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집이랄 것도 없는, 소 우리를 겸한 하우스일 뿐이지만, 이곳은 한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꿈이 담긴 곳이었다. 동혁이가 기어이 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 몸통만이라도 남은 아이를 붙안고 살아갈 작정으로 보아둔 땅이었다. 아이가 떠나고, 넋을 놓은 부부는 밥을 먹다가도 울고, 일을 하다가도 울었다. 바닷가에 가서도 울고, 저수지 곁에서도 울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남편이 마누라라도 살려야겠다고, 반은 정신이 나간 아내를 끌고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 2003년 3월의 일이었다.
어릴 적에 농촌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평생 사우디로, 건설현장으로 목수일을 하면서 살아온 박씨로서는 모든 것이 어설프기만 했다. 하긴 이미 맥을 놓아버린 판에 일 요량이 있으면 무슨 소용일까마는. 마늘을 키우니 마늘이 죽었고, 소를 키우니 소가 죽었다. 모든 것을 잊으려고 술 한 잔 걸치고 고꾸라져 잔 것이 몇 날이었던가. 그래도 산야의 푸른 기라도 보니 조금은 숨구멍이라도 트이는 듯했다. 부부는 그나마 기운을 되찾았고, 마치 누군가의 숨결이라도 되듯, 텃밭의 것과 우리의 것에 마음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미소 한 마리가 건강한 새끼를 낳았다.
현충원 묘역에서 만나 안면이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이번에도 영락없이 위로의 말씀을 건넨다. 한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그러면 제법 마음이 삭혀질 것이라고.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이야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라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조국의 홀대를 원망하고, 한쪽에서는 평화를 위한 인내를 종용한다. 그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서해에서 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제3의 교전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찌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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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은 1999년 6월,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연평도해전이 일어난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교전이다. 한·일 월드컵대회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 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측 경계선을 침범하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남한 해군의 고속정 2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경고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대비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했다. 이어 10시 43분께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나머지 1척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 10시 55분께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다. 이 교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했으며, 19명이 부상했다. 또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는데,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동춘서커스단의 곡예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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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창부처럼 몰락해버린 서커스…. 천막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어디엘 가도 전깃불 밑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세상은 변해갔지만, 가설무대는 공연장소를 구하기마저 어려워져 변두리의 벽돌공장 부근이나 김장시장이 열리는 시장 옆 공터에서 막을 올리며 천막무대는 늙은 창부처럼 몰락해갔다. 화장을 해도 주름살을 가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창부의 얼굴처럼, 세월은 곡예단의 얼굴을 밟고 지나갔던 것이다. - 한수산 ‘부초(浮草)’ 중에서
‘길’에서 ‘태양의 서커스’까지
잠파노와 같이 있는 게 네 운명이야. 난 알 수 없지만 이 조그만 돌멩이도 다 쓸모가 있을 거야.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이란 없는 거야. 머리가 좀 모자라도 너도 무슨 쓸모가 반드시 있을 거야.
‘얼간이’는 잠파노에게 죽임을 당하고, 쫓기던 길 위에서 젤소미나와 헤어진 잠파노는 몇 년 후 후미진 부둣가에서 슬픈 노랫가락을 듣는다. 어느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는 젤소미나가 흥얼거리던 노래였고, ‘얼간이’가 젤소미나에게 가르쳐준 노래였다. 그 여인에게서 노래의 주인이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잠파노는 텅 빈 바닷가에서 목 놓아 울부짖는다.
나는 외톨이야….
세월이 바뀌어 1984년 캐나다 퀘벡에서 초연되었다는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에서 퀴담(익명의 행인)에 의해 길로 나서는 조(Zoe)는 일상의 따분함에 지친 소녀일 뿐이다. 서커스는 마침내 쇼가 되고, 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휘황한 불빛 아래 무대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단지 그 불빛에 넋을 놓을 뿐이다. 그래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조는 ‘슬픔’이라니. 그 슬픔은 얼핏 젤소미나의 슬픔을 닮은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나어린 창부의 얼굴화장처럼 그냥 경박하거나 시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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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서커스단의 현실
서커스가 이 땅에 처음 말뚝을 박은 것은 1911년 5월 1일, 일본의 ‘고사쿠라’ 곡예단이 부산에서 공연을 가지면서였다. 이때까지 흥행의 대종을 이루던 사당패는 개화의 물결에 밀려 이미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 구경거리의 불모지에 뛰어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통감정치와 더불어 대규모의 흥행집단을 끌고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십여 개의 단체가 한반도와 만주까지를 오르내리며 그 펄럭이는 천막을 올렸다.
“그랬지. 아니타니 기노시타니하는 곡마단이 서울에 올 때면 얼마나 화려했는가. 파고다공원 옆은 단골장소였지. 규모도 대단했고. 만주공연을 가면 또 어땠나. 남부여대해서 이불보따리에 바가지 하나 올려놓고 고국산천을 떠난 사람들이 공연 끝나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향소식을 묻지 않던가.” - 한수산 ‘부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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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고 박동춘 씨가 조선인 30여 명을 모아 창단한다. 1927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선을 보였고,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한때 단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허장강, 서영춘, 백금녀, 배삼룡, 남철, 남성남, 장항선, 정훈희 등이 이곳에 몸을 담기도 했다. 어느덧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은 ‘태양의 서커스’시대가 되었건만, 동춘서커스단은 여직 잠파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그나마 천막막사가 컨테이너하우스로 바뀌고 3대 단장인 박세환 씨가 명함에 ‘동춘엔터테인먼트 대표’에 ‘서울예술대학 겸임교수’를 박고 다니지만, 속내를 들여다볼작시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우아누리’(어릴 때 서커스단에 들어온 사람)를 구하기도 어려우니 공연의 태반은 중국 기예단이나 러시아 볼쇼이로 끌어간다. 실낱같이 남은 애환마저 ‘남의 것’으로 채워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애환이야말로 진짜 애환일지도 모른다. 내남할 것 없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넋들은 가엾다. 이역만리에 와서 줄을 타고 공을 굴리는 그들을 볼 때, 가슴에 고여 있던 슬픔이 문득 되살아난다. 말도 서툰 그들이 우리를 보고 말한다. 자, 슬픔을 걷고 웃음을 지어보세요. 아직 이렇듯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러나 그들이 열길 허공에서 빈 몸짓으로 휘청일 때, 애써 감춘 눈물자국이 드러나고 우리의 현실은 남루한 깃발로 나부낀다. 그래, 세월이 밟고 간 것이 어찌 곡예단의 얼굴뿐이랴.
거제 ‘우리배연구소’ 박영종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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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조선 명종 때 개발해 임진왜란 때 크게 활동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이었다. 28~34m 정도의 길이에 2층으로 되어 100명 이상이 탈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배로, 1층 갑판에서는 노젓기를 담당하는 격군(格軍)이 안전하게 노를 저었고, 2층 갑판에서는 포를 쏘고 전투를 담당했다. 또한 2층 갑판 위에는 판옥이라는 높은 누각을 설치했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여기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판옥선은 크고 튼튼하여 임진왜란 당시 일본 배를 부딪쳐서 부수고, 튼튼한 2층 갑판에서는 위력이 센 무겁고 큰 천자포를 쏘아서 전투에서 승리했다.
작은 배에서 큰 배로
부산대 기계과를 졸업한 박영종씨(53·현 우리배연구소 소장 겸 영공방 대표)는 1981년 대우조선에 입사했다. 입사 후 처음 배치를 받은 곳이 설계부 모델실. 입사서류 취미란에 서슴없이 ‘모형제작’이라고 쓴 것이 발단이었다. 그는 주로 선박 내부의 파이프라인 설계모형을 만드는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기를 20여 년. 2000년 3월, 그는 처음으로 심각한 암초에 부딪쳤다. 당시 회사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간의 업무시스템에도 획기적인 혁신이 요구되고 있었다. 부장 4년차였던 그는 자신의 미래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경력으로 무리 없이 적응해갈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서는 그에 딱 맞게 성장해온 후배들과 경쟁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한 채 항해를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를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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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배연구소로 쓰이고 있는 거북선 앞에 선 박영종·전혜영 부부. 숫기 많은 박 소장은 연애시절 찰흙으로 빚은 아내의 얼굴 모형을 살짝 놓고 감으로써 마음을 대신했다. |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작업실에서 판옥선의 돛을 매만지는 박 소장. |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든 것은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면서였다. 영공방 제품이 드라마 소품으로 납품되기도 했지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함께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순신 붐’이 일어났고, 그가 개발한 판옥선 및 거북선 모형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생산에 한계가 있다 보니 물건이 없어 못 팔 지경이었다. 2004년 통영수산과학관의 요청으로 한선 등 20여 점을 납품한 것을 필두로 대형제품에 대한 주문도 줄을 이었다. 충남 아산시의 요청으로 2.5m 크기의 정교한 거북선과 판옥선을 납품하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유선(遊船)을 만들어 띄우기도 했다. 현재 개관을 앞둔 광양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신축사옥 마린월드 앞에는 길이 25m에 이르는 대형 판옥선이 공사를 마치고 제막식만을 기다리고 있다.
거북선 키트는 ‘이순신 붐’ 을 타고 영공방을 기반 위에 올려놓은 효자상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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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대우조선소의 선박건조 광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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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지의 유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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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사옥 마린월드 앞에 세워진 판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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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李箱) ‘거울’
신체적 욕구는 나의 상상력과 무의식에 강력히 자극을 주고 있다. 감정과 의식을 꼬여내거나 부추겨 끄집어내야 한다. 몸과 마음은 둘로 되어 있지만, 날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욕구에 순응하는 것뿐이다. 그저 여기에 의지할 뿐이다. 그래, 나는 하나되어 쓴다. 지껄인다. 그래 더더욱 지껄이고 싶다. 욕정 안에 있을 때만 난 세상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 세상의 모든 레몬을 내가 독식하고 싶다. 내가 독식하고 싶다. 내가…. -연극 ‘상이(箱李)’ 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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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주수정씨(40)는 지난 한 달 동안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아내 변동림으로 살았다. 아니, 연습기간까지 치면 석 달 이상을 그렇게 살았다. 1936년, 이상과 결혼한 변동림은 겨우 3개월 남짓 이상과 살았을 뿐, 폐병을 안고 훌쩍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이 이듬해 도쿄에서 객사함으로써 홀로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결혼한다. 두 천재작가에게 짧거나 긴 동반이자 뮤즈였던 그녀는 2007년, 대학로에서 이번에는 한 중견배우의 뮤즈가 되었다.
수정씨는 대본을 받아든 순간부터 오로지 변동림과만 지냈다. 되도록 바깥 출입도 삼갔고, 극단에 갈 때도 곧바로 극단으로만 직행했다.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원래부터 많은 이와 잦은 교류를 갖는 스타일도 아니기는 했지만. 공연은 평일 한 차례, 토·일요일은 두 차례. 비록 소극장이기는 했으나, 보통 객석의 7~8할은 채울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연이 끝난 후 결산을 해보면, 아마도 적자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떤 때는 관객 수보다 무대 위의 연기자 수가 더 많기도 한 대학로 순수연극의 현실에서.
7월 1일, 6시 공연이 막을 내리면 아쉬움과 서운함 속에서 쫑파티가 열리고, 사람들은 연극에 대한 저마다의 열정을 토로하고, 연극계의 어려운 현실을 개탄하고, 서로 꿈을 이야기하고, 모두 얼큰하게 취해서 또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갈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주머니 속에 남은 출연료 등이라고 해봤자 통 큰 세상의 하룻밤 술값으로도 모자라겠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또 한 작품을 해냈다는 뿌듯함조차 어찌 없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수정씨는 또한 알고 있다. 다음 날, 숙취에서 깨어나면 제법 너덜해진 대본과 함께 어김없이 한동안 자신을 앓게 할 작품의 후유증이 남게 될 것임을.
분장실에서 다음 공연을 위해 분장을 하던 수정 씨는 문득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얼굴은 불혹의 나이에 이른, 자신의 얼굴이면서 자신의 얼굴이 아니기도 하다. 이제 제법 연기의 맛을 알 연조에 이르렀지만, 새로운 배역은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요구하므로 두렵기만 하다. 더구나 무대 위에서 그녀는 그 얼굴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그래서 연극이 인생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삶이 항시 두려운 것처럼 연극 또한 두렵다. 더욱이 ‘욕망이란 보여진 것 속에 있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누구의 말처럼, 그 얼굴 속에 어떤 욕망이 슬며시 감춰져 있을지 모를 일임에야.
수정씨의 꿈은 언젠가 김갑수 선배처럼 자신만의 전용극장을 갖는 것이다. 그 꿈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자신의 몸짓을 가다듬는다. 차비를 걱정하고 식대를 걱정해야 하는 연극계의 어려운 현실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녀는 뮤지컬이고 드라마고 기회만 있다면 출연해서 유명해지고 싶기도 하다. 그것은 비단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라도 있어 대학로의 연극판이 살아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연극은 관객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대학로에 코미디와 상업연극들만 그나마 관객들을 모으고, 뮤지컬이나 ‘패션화’된 공연에의 쏠림현상이 계속된다면, 순수연극은 그만큼 설 땅을 잃게 된다. 그것은 단지 연극무대의 상실이 아니라, 우리네 문화, 궁극적으로는 우리네 삶의 천박함으로 이어진다. 연극은 모든 공연예술의 원천이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고독을 채우는 수단이 있다. 그것은 연극이다. 알베르 까뮈에게 연극은 무한히 늘어난 삶이었다. 연극이 보여주는 그 수없이 다양한 거울 속에서는 삶에 대한 사랑이 충족될 수 있었다. 연극인이란 ‘제2의 신’이라는 아주 강한 느낌을 그는 품고 있었다. -장 그르니에 ‘카뮈를 추억하며’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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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탑골공원 담장기와도 흠씬 젖고/고가차도 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정태춘 ‘92년 장마, 종로에서’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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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장마는 유난히도 짧았다. 7월 9일부터 23일까지 단지 보름 만에 장마는 끝이 났다. 1993년 10월에 발표한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몇 가지 주요한 시의를 띠고 있었다. 음반사전심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비합법적인 방법(사전심의 없이)으로 출반, 판매, 배포를 강행한 기념비적인 음반이었고, 그 결과는 1996년 위헌판정으로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는 성과로 나타났다. 사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정태춘이 형식적인 사전심의를 거쳐 1990년에 발표한 ‘아,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오히려 사전심의가 필요 없을 만한 곡들이었다. 한편으로 1992년 여름은 그 해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3당 야합(‘아, 대한민국’의 1990년)’으로 민주화의 깃발이 참담히 꺾일 음울한 조짐을 보여주던 이른바 ‘환멸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5년 후 이 땅에는 미증유의 IMF환란이 찾아들었다.
‘잃어버린…’인지 ‘되찾은…’인지 모를 10년이 또 지나고 2007년 여름, 장마는 다시 시작되었다. 장마가 시작되자마자 기다리지 않아도, 깃발군중은 대학로에서 청계천으로, 종로로, 광화문으로 넘실거렸다. ‘한·미FTA 반대’를 외치는 금속노조 총파업의 대열은 그 금속성에도 불구하고 장맛비에 흠씬 젖어들었다. 그를 뒤로 하고, 청계천 분신의 현장 곁에 세워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은빛 동상은 청계천이 아니라 아스팔트 다리에 발을 묻은 채, 아니 발이 묶인 채 우두커니 비를 맞고 있었다. 잠시 잿빛 하늘을 올려다 보니, 비에 젖은 비둘기들 힘없이 공중을 날아오른다. 그들이 ‘낮은 자세’를 취할 때면, 아스팔트 위에는 으레 음식물 찌꺼기가 버려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들로 비둘기들은 한껏 비만해졌지만, 그 비만의 내면에는 끊임없는 공복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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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어르신’들이 탑골공원에서 자리를 옮긴 종묘공원은 어떠한가. 빗속에서 장기판을 벌리고, 정자의 주춧돌을 베게 삼아 한뎃잠을 자고, 하릴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지만, 그 속내에는 까닭 모를 분개가 팽배해 있었다. 어깨가 조금만 부딪혀도 사단이 벌어지고, 전도의 목소리에도 공연히 화를 돋운다. 지나치던 우산이 목덜미에 비를 흩뿌리니, 대뜸 욕설이 난무한다. 그래도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산이 그런 것’이고, 욕을 해대는 이유도 ‘욕을 먹으면 오래 살기’ 때문이란다. 좀더 나이든 층은 더 젊은것들의 버르장머리를 탓하고, 그 반대는 ‘고려장’ 운운하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대꾸로 맞선다. 어떤가. 종묘가 그러할 때, 사직의 판국 역시 ‘검증’과 ‘통합’으로 소란스러우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부끄러운 마로니에 거리를 지나 혜화동 로터리로 접어들면, 이번에는 난데없이 필리핀 거리가 나타난다.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들이 혜화동성당을 다니면서 성당 앞에 벼룩시장 비슷한 것을 열었던 모양이다. 그 수효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제는 100여 m에 이르는 제법 어엿한 ‘작은 필리핀’을 형성했다. 필리피노들은 타갈로그어(필리핀어) 미사시간을 전후해 판을 벌리고, 고국에서 공수해온 물건을 팔고 사고, 고향의 소식을 나눈다. 하지만 그 구간만 넘어서면, 거리는 여전히 낯선 이국땅일 뿐이다. 그대, 고향까지의 거리는 얼마쯤인가. 그대, 언제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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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종로통으로 돌아오면, 거리엔 하나둘 휘황한 불빛들이 켜지고 빗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준비한다. 그 불빛 아래 가수 ‘비’의 사진을 타고 내려온 빗물과, 종각의 척화비를 적신 빗물과, 국세청 뒤 하나투어의 상공을 선회한 빗물과, 종묘공원 ‘박카스 아줌마’의 돗자리를 적신 빗물과, 고궁의 담장기와 위에, 청계천 전태일 동상의 등줄기로, 종3의 낡은 골목길에, 대학로 피에로의 빨간 코끝에, 젖은 붉은 깃발 끝에, 필리핀 거리의 좌판 위로, 다시 국립서울대학교유지비를 타고 내린 빗물들 모두 모여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가문 어느 집’으로나 흘러가면 좋으련만, 흐르고 흘러서 기어이 ‘한반도 대운하’의 수계로 흘러가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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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개이면 서쪽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저 구로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소리로/후여,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빨간 신호등에 멈춰서는 사람들 이마 위로/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소리로/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정태춘 ‘92년 장마, 종로에서’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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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다. 술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 수 있었으니. 모두 부러워 같이 가자고 따라나서는 사람이 줄을 섰다. 나 또한 늘 가슴이 설레었다. 처음엔 순전히 술과 기행이라는 두 글자가 어울릴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술 좋은 곳은 물이 좋고, 물 좋은 곳은 산이 좋고, 산 좋은 곳은 경치도 좋을 터이니, 경치에 취해보고 술에 취해보자는 게 의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땅에 전통 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설렘 반 불안 반으로 길을 떠났는데, 망외로 얻은 게 많았다. 길에서 만난 우리 술들은 고목에서 돋아나는 새순처럼, 뿌리를 추적할 수 없는 죽순처럼 창창히 자라 오르고 있었다. 비록 잎은 여리고 줄기는 가늘지만, 그 술들은 고목처럼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술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날들이 허무하고 무심하게 여겨졌다. 술을 마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왔던가. 그런데 정작 이렇게 맛있는 우리 술은 모르고 있었다니.
-허시명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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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씨는 일요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한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술 기행 코너의 취재를 위해서 강원 횡성의 복분자농장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통에 기어이 눈을 뜨고 만 아내에게 슬며시 동행을 떠보지만, 이것저것 일정을 캐묻던 아내는 이내 시큰둥하게 눈을 감아버린다. 소설을 쓰는 아내는 글쟁이임을 핑계로 시명씨와 공동으로 음식에세이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매번 선뜻 길을 따라나서지는 않는다. 하긴 오늘의 일정이야 와인동호회의 행사에 맞춘 것이라 그들의 행사를 따라다니면서 인터뷰 좀 하고, 와인 몇 잔쯤 품평으로 마실 것이 뻔하니 그리 새로울 것도, 특별히 호기심이 동할 이유도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웬 여행작가 하나가 시명씨를 취재한답시고 따라붙을 예정이니, 더욱 부자연스러울 게 번연할 일이었다. 자기도 여행작가이니 여행작가에 대한 이야기쯤은 스스로 써도 될 법하건만, 무슨 액자소설이라도 쓸 작정인지….
아내가 그 정도면 아들놈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릴 적부터 그토록 여행길에 달고 다닌 놈이었건만, 머리가 크면서 도통 쉽게 따라나서는 법이 없다. 한술 더 떠서 이 핑계 저 핑계 끝에 불참을 선언하고는, 아버지의 귀가시간이나 묻는다. 간섭 없이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되는지 확인해볼 심산이리라. 시명씨는 문득 언젠가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썼던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 공개적인 글에서 시명씨는 ‘어릴 적 이사 말고는 여행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은근히 아버지를 닦아세운 적이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방안퉁수로 지내던 작자는 어찌어찌하다 여행작가가 되었고, 그 아들은 복에 겨워 나들잇길 하나에도 조건을 달기 일쑤라니!
오늘은 그래도 여행작가를 취재하겠다는 여행작가의 차편에 동승할 예정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쥐꼬리만한 고료에 경비도 무시하지 못할 처지이기는 하지만, 술을 전문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하면서 시음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니, 차는 항상 마음 한쪽에 걸려 있는 애물단지였다. 고료 이야기가 나왔으니 얘기지, 매체나 사보 등에 연재하며 받는 고료로는 경비조차 충당하기 어렵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같은 지면에 실리는 원고라도 여행작가는 발로 뛰며(그것도 지방 구석구석) 취재를 하고 사진까지 찍어야 하니, 그 공력과 비용 면에서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나중에 책으로 묶어낸다 해도, 여행 관련 서적의 순환주기가 너무 빠른 탓에 인세수익에 대해 크게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동안 10여 권의 책을 펴냈지만, 몇 권을 빼고는 초판 5000부 이상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이는 여행작가더러 ‘놀러다니며 먹고 산다’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다 속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하긴 먹고 살 길만 있으면 여행작가처럼 좋은 직업도 없을지 모른다. 게다가 좋아서 하는 일임에야. 여행작가협회 대외협력이사를 맡고 있는 시명씨의 생각은 이래저래 복잡하다.
오전에 찾은 곳은 둔내에 있는 천금기씨의 복분자 농장이다. 한때 풍천장어와 짝을 이뤄 고창의 특산물쯤으로 여겼던 복분자는 웰빙바람을 타고 전국 각지로 산지가 확대되었다. 비교적 다른 작물보다 재배가 쉽고, 소득도 높은 편이어서 이제 어지간한 농촌이면 안 심는 곳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정도다. 농장주인 천금기씨는 한 기업체에서 회계일을 보다가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횡성으로 내려와 복분자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이다. 한 10여 년 복분자를 키우면서 이제 제법 노하우를 쌓은 천씨는 최근 붐이 일기 시작한 와인바람을 타고 복분자와인 생산에 나섰다. 아직 본격적으로 정통와인에 견줄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 했지만, 청정자연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생산한 재료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농장으로 와인만들기 체험을 온 ‘와인원정대’에게 좋은 와인을 담글 수 있는 비결로 “먹기도 아까운 걸로 술을 담가라”라고 서슴없이 이른다. 그만큼 재료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고, 그 재료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복분자 수확 체험이 끝난 후, 점심으로 곤드레나물밥이 나왔다. 와인만들기 회원 중에 바비큐 전문가가 있어 통바비큐를 구워내고, 반주로 지난달에 담근 고창산 복분자와인이 가세했다. 흥이 오르니 어찌 여흥이 없으랴. 회원 중 아이디 ‘베짱이’가 나무그늘에 앉아 기타를 치며 멋지게 요들송을 불러댔고, 회원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젊음은 젊음 그대로도 이미 아름다우련만, 이렇듯 자연 속에, 사람들 속에서 그 흥취를 여지없이 발산하니, 예가 바로 무릉도원이었다. 회원들과 함께 와인담그기 체험까지 마친 시명씨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같은 횡성군의 초원리계곡에 있는 디오니캐슬로 발길을 옮겼다.
디오니캐슬은 펜션과 레스토랑식 시음장을 함께 갖춘 멋진 양조장이다. 외국 와이너리(와인양조장)를 고루 돌아본 사람들조차, 이 땅에도 이런 곳이 있냐며 감탄하고 돌아간다는 곳이다. 기획실장 일을 맡아보고 있는 김홍철씨는 순전히 와인이 너무 좋아서, 와인을 너무 사랑해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이 일에 뛰어든 사람이다. 복분자와 다래로 만든 와인을 사이에 놓고 그와 나누는 와인이야기는 끝이 없다. 와이너리들과 와인마니아들에게는 그들만의 오묘한 세계가 있다. 비록 잘 모르는 사람은 호사취미의 하나로 쉽게 치부해버릴지 몰라도, 어떤 한 가지에 빠진다는 것은, 그래서 미친다는 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시명씨 역시 ‘낯선 것에 대한 그리움’에 미쳐 살아오지 않았던가. 시음 삼아 틈틈이 마신 와인에 제법 취기가 오른 시명씨는 기분 좋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산골짜기를 내려서니, 길은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결국 시명씨의 가슴속으로 이어질 터였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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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 twojobs@empal.com
그는 1961년 남해안 손죽열도의 평도에서 태어났고, 전라도 광주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잡지사에서 5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다. 편집회사를 운영하다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고 싶어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전국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그 첫 결실로 역사와 문학 기행집 ‘조선문인기행’을 냈다.
2000년부터 술 취재를 하다가 2004년부터는 술 빚는 법도 배우기 시작했고, 일본주류총합연구소에서 일본청주 빚는 법도 배웠다. 현재는 명지대 산업대학원에서 전통 술의 이론과 실습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술 기행 책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를 냈으며, 여행 책으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여행 40’ 등이 있다.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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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가진 일반적 상징은 낭만과 고독, 혹은 그와 비슷한 표현들로 계열화된다. 그러나 등대를 ‘낭만’의 전유물로 인정해온 문약(文弱)이나 문학소녀와 같은 취향 혹은 편향에 전면 동의할 수는 없다. 등대는 예나 지금이나 엄연히 ‘관공서’다. 등대가 관공서라는 것은 근대국가의 제도적 산물이라는 것과, 등대원은 국가공무원 기술직 종사자인 항로표지원이라는 것을 뜻한다. 통념상의 ‘등대지기’라는 말도 1920년대 식민지시대의 애잔한 취향이 빚어낸 신조어일 뿐이다. 예로부터 항로표지원, 아니면 등대원 정도가 적확한 표현이거니와 등대원 자신도 ‘등대지기’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낸 우리 등대는 불행하게도 독립적 근대국가와는 무관하게 제국의 배를 인도하는 ‘제국의 불빛’으로 작동하게 된다. 즉 이 책은 등대에 관한 기존의 통념인 ‘낭만의 불빛’에 더하여 ‘제국의 불빛’에 주목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대로, ‘인정사정없는 냉혹함’과 ‘평화, 안식, 영원성’이란 양면성이 우리 등대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주강현 ‘등대-제국의 불빛에서 근대의 풍경으로’ 서문 중에서
박만근 소장은 ‘빠른 아들뻘’ 되는 김태영 등대원에게 항상 건강하고, 안전에 유의하고, 틈틈이 공부하라고 가르친다. |
서울에서 시속 110킬로미터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기를 무려 4시간 남짓, 차는 길의 끝 목포에 이른다. 거기서부터는 바다가 열리니, 당연히 뱃길로 또 나아가기를 4시간 정도, 이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이 나라의 최서남단 가거도가 거기 있다.
너무 멀고 험해서/오히려 바다 같지 않은/거기/있는지조차/없는지조차 모르던 섬//쓸 만한 인물들을 역정 내며/유배 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이곳까지는/차마 생각 못했던//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파도로 성 쌓아/대대로 지켜오며//후박나무 그늘 아래서/하느님 부처님 공자님/당할아버지까지 한식구로 한데 어우러져/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비바람 불면 자고/비바람 자면 일어나/파도 밀치며/바람 밀치며/한스런 노랫가락 부른다
-조태일 ‘가거도’ 중에서
유배를 보낼 생각조차 차마 하지 못했던 그 섬에서도 육로로 걸어서 3시간, 아니면 배를 얻어 타고 한 30분~40분쯤 더 들어가야 비로소 가거도 등대가 나온다. 가거도 등대는 ‘제국의 불빛’시대인 1907년에 처음 불을 밝혔다니까, 올해로 꼭 100년 희년을 맞는 셈이다. 그 숱한 세월 동안 거센 파도와 싸우며 바다를 지켜온 가거도 등대. 유배조차 보내지 못했던 섬을 ‘그래도 살 만하다’고 살아온 섬사람들만큼이나, 유배보다 더한 삶을 살아온 ‘등대지기’들의 애환이 거기 있다.
1950년 당시 등대와 마을의 차이는 등대에서는 자가발전을 하여 전기를 사용하였고, 마을에서는 호롱불을 켜놓고 생활한 것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당시 등대직원들의 근무지 애로점은 식생활, 의료혜택, 교통, 자녀교육이었으며, 보급선이 몇 개월 만에 오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져 마을에서 빌려 먹는 것이 일이었으며, 환자가 생겼을 때는 자가치료를 한다든가 급한 환자는 명이 길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또 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육지의 가족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며, 육지로 직원들이 나들이할 때는 교통편이라고 해야 돛단배를 이용해야 하므로 역풍일 때는 15일 이상을 선실 내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옷은 형편없고 이와 벼룩이 얼마나 많은지 잡지는 못하고 털어서 입었다고 전한다
-해양수산부 사이트 ‘등대와 바다’ 중에서
사람이 그리운 백구는 아무나 보고 잘 따른다. |
박만근(51) 소장이 여러 차례 중매를 부탁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하다. 그래도 김 대원은 등대원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전기기사자격증을 취득, 해양수산부 항로표지기능직 공무원이 된 지 2년이 넘었다. 취업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시험에 응시할 때만 해도 2명 모집에 50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몰렸다.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여윈 후 홀로 생활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어 기뻤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 없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 가거도 등대에 근무하는 등대원은 박 소장과 김 대원, 강남욱 차석(그는 마침 휴가 중이었다) 등 3명. 아, 또 있다. 이름 지어주기도 뭐해서 그냥 ‘백구’라고 부르는 암컷 개 한 마리. 그렇지만 백구는 가거도 등대 근무년도만 따져서는 최고참에 속하는 5년차다(등대원들은 보통 2년마다 한 번씩 관 내에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작은 개의 눈매에도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담겨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그동안 내가 만난 등대원들 역시 대부분 선한 눈매를 지니고 있기 십상이어서 오히려 가슴 한쪽이 시려오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시쳇말로 ‘도를 닦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등대원들은 당연히 서로서로 형제처럼, 부모자식처럼 지낸다.
박 소장은 등대원 경력 20년이 넘는 고참이다. 순천 출신으로 목포에서 소방대원으로 일하다 등대원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팔자도 평생 봉사와 헌신으로 지내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어릴 적 홍도 등대를 보면서 느꼈던 묘한 정감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직을 하였다는 그는, 지금껏 등대원직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근무수칙을 담은 편람과, 그 안의 모르는 용어들을 찾기 위한 사전과, 기계고장, 단전, 악천후를 대비한 장갑, 손전등, 우의를 항상 끼고 살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다니 대충 알 만하지 않은가. “어떤 이가 내 빛을 보고 길을 찾는다. … 항상 등대를 생각하라, 등대를 생각하라” 박 소장이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말은, 박 소장 자신에게도 그대로 ‘성경말씀’과 다르지 않다.
현재 전국의 유인등대 수는 43곳에, 등대원만 153명. 환경의 변화와 기술발전에 따른 자동화로 갈수록 그 수효가 줄어가는 추세다. 목포지방해양수산청 관내만 해도 10곳이던 것이 최근 들어 8곳으로 줄었다. 근래 해양수산부에서는 일부 등대의 조형을 현대적으로 바꾸고 숙소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는 등 등대를 친수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도 좋지만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지켜온 등대와 등대원들의 애환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노력이 더 시급하다. ‘등대 찾기는 배꾼의 예감을 배우는 일’이며, ‘밤바다에 바람을 거역하다 호되게 당하고, 안개 속을 헤매다 사경에 이른 사람만이 등대의 무한한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거늘, ‘등대지기’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그냥 ‘근대의 풍경’쯤으로 사위어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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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시간 중의 바다낚시는 등대원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다. |
가거도는 보통 ‘소흑산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명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행정구역상 그렇게 불렀던 것이고, 예로부터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가가도(嘉佳島, 可佳島)’로 불리다가, 1896년부터 ‘가히 살 만한 섬’이라 하여 ‘가거도(可居島)’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행정지명은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다. 현지 주민들도 꼭 가거도라고 부르며, 마치 흑산도에 딸린 섬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소흑산도란 말을 쓰면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가거도 등대의 공식명칭은 아직까지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소흑산도항로표지관리소’다. 한 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
마지막 동강 뗏목꾼 홍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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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왔더니/삼급수로 전락해서/쉬리 매자 사라진 데를/며칠 전에 떠나왔는지 모를 동강이//
너 잘 있었느냐고/동강도 잘 있느냐고/난 이제 한강 되었다고/글썽이며 반짝이네//멀리 보면서
눈 맞춰주지 않는/사람들이 섭섭해서//저리도 반짝반짝/나를 반기며 촉촉한 한강물/동강이네 -홍정임 ‘안부’ 전문
동강 뗏목꾼들에게 가장 격한 여울은 황새여울과 된꼬까리다. 장마로 급격히 불어난 물살은 허벅지까지 감기어든다. 그래(노)를 잡은 손에 실컷 힘을 줘보지만, 물에 젖은 그래는 물살을 거슬리기도 전에 손아귀를 벗어나기 일쑤다. 일순, 앞전이 치솟더니 급류를 탄 떼는 시커먼 암초를 향해 치닫는다. 떼는 물론 뗏목꾼까지 일시에 깨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대라! 틀어라! 박아라! 어떻게 급류를 빠져나왔는지 모르는 사이, 온몸은 후줄근하게 젖어 있다. 만지에 이를 즈음 물살은 잦아들고 떼는 가까스로 나루에 걸터앉았다. 온몸에 맥이 풀리고, 단내 나는 목젖은 한기를 녹여줄 막걸리부터 찾는다.
우리 집의 서방님은 배를 타고 가셨는데/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다녀가셨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건넜으니/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내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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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거운리에 사는 홍원도씨(74)는 비록 늙은 모습이기는 했지만 전산옥의 실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지나루에서 술을 팔던 전산옥은 자그마한 키에 용모가 뛰어나고 아라리소리를 잘 해 뗏목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녀가 아흔이 넘는 수명을 누리다가 세상을 뜬 후, 뗏목꾼들은 그녀의 여식이 영월 읍내에 차린 술집으로 뻔질나게 드나든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푸는 회포라야 떼를 몰고 다니던 시절에 대한 추억담이 대부분이었다.
홍원도씨가 처음 떼를 탄 것은 열아홉 살쯤이었다.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강원도 산골 농사로는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떼를 타면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정선쯤에서 뗏목을 엮어 동강과 남한강을 타고 서울 마포나루까지 한 번 다녀오면 품삯으로 소 한 마리 값은 너끈히 건질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떼돈 번다’는 말이 뗏목일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는 마흔 무렵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떼를 타면서 결혼도 했고, 7남매를 낳아 길렀다.
뗏목일은 강물이 풀리는 3~4월이면 시작되었는데, 뗏목의 출발점은 일정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목장에서 가장 가까운 강가에서 떼를 엮었기 때문에 그 지점은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뗏목은 통나무 도막 200개 정도를 엮어 한 바닥을 이루는데, 그 길이는 30m, 폭은 4~5m 정도였다. 보통 세 바닥을 이어서 뗏목을 띄우는데, 그 길이가 100m가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 뗏목을 엮는 데는 칡이나 느릅나무 줄기, 새끼 등이 사용되었고, 뗏목을 엮는 데만 2~3일이 걸렸다. 뗏목의 앞뒤에는 노의 구실을 하는 그래를 매달았는데, 2인 1조일 때는 물길에 익숙한 경험자나 담이 센 사람이 앞을 맡았고, 초보자가 뒤를 맡았다.
다행히 홍원도씨는 약간의 술 빼고는 일절 딴짓을 하지 않아 팔당에 댐이 들어서면서 뗏목길이 끊길 때까지 알뜰하게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부부간의 사이도 좋았고, 자식들도 잘 자라 모두 대처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다만 홍원도씨는 큰딸 정임씨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애틋하다. 어쩌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정임씨지만 시집가서 영월에 살면서 뒤늦게 시를 쓴다고 한다. 앞에 인용한 ‘안부’가 바로 정임씨의 시다. 시를 잘 모르는 홍원도씨지만 어릴 때부터 유달리 순하고 착하던 딸의 시를 볼 때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금 홍원도씨 내외는 거운리에서 강변상회라는 민박을 겸한 상점을 열고 있다. 환갑 때 노후대비 삼아 마련한 가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상대하는 손님이 동강에 래프팅을 즐기러 온 젊은이들이다. 한때 자신이 목숨을 걸고 다니던 물길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희희낙락거리며 떠다니는 젊은이들을 보고 어떤 생각이 있을 법도 한데, 뜻밖에 그들을 보는 시선이 관대하다.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선배 격으로서 오랜 관록에서 오는 너그러움일까. 홍원도씨는 래프팅족들이 벌이는 어지간한 소란에도 개의치 않는다. 한 번은 동강에서 영업을 하는 래프팅업체들이 선무 삼아 마을 주민들에게 래프팅을 타도록 했던 모양이다. 홍원도씨는 마을 노인들을 이끌고 보란 듯이 래프팅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 래프팅 코스라는 것이 그 옛날 홍원도씨가 뗏목을 타고 다니던 물길에 다름 아니며, 사투를 벌이며 급류와 물굽이를 넘던 그에게 래프팅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하지 않았으리라.
동강에 완전히 뗏목이 사라져버린 지금, 홍원도씨는 1년에 한 번, 동강축제 때라야 마을 사람들을 모아 뗏목타기 시연에 나선다. 거운리에는 과거 뗏목을 탔던 이들이 서너 사람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서울까지 원정을 나선 경험으로는 자신이 유일하기에 시연 때면 항상 앞전에 선다. 비록 시연이라고는 하지만, 도도하게 흘러내려오는 뗏목을 보고 있자면 삶의 유장한 흐름이 느껴진다. 뗏목도, 그 뗏목을 실어나르던 강물도 모두 흘러가버렸고, 애환으로 넘치던 세월 역시 흘러가버렸다. 이제 강을 가득 메우고 있는 래프트들도, 그들이 일으키는 작은 소란들도 어느 결엔가 모두 흘러가버리리라.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거늘.
구민 판소리, 산 공부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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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따라서 갈까부다. 바람도 수여 넘고 구름도 수여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다 수여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서 갈까부다. 하날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일도 보련마는, 우리 임 계신 곳은 무슨 물이 막혔간디 이다지 못 보는고.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 동풍 연자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허여 볼까. 뉘 년의 꼬염을 듣고 여영 이별이 되랴는가. 어쩔거나. 어쩔거나. 아이고, 이를 어쩔거나. 아무도 모르게 설리 운다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
옥계의 계곡은 길고도 깊다. 강원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골짜기에 구민(口民) 가족 중 한 사람이 새로 터전을 잡았다. 주수천 물줄기를 따라 한라시멘트공장을 지나 성황뎅이 절골 아래쯤, 옛 한보옥광산이 있던 그 언저리다. 쫓기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 노고도 위로할 겸 길닦음도 할 겸, 구민 판소리 가족들이 오랜만에 산(山) 공부에 나섰다. 고삿상이 차려지고, 마을주민들과 함께 판을 벌였다. 길놀이가 시작되자, 마을주민들은 스스럼없이 장구를 매고 북채를 두드리며 어깨춤을 추어댔다. 그 신명이 소리였다. 그 소리가 신명이었다. 소리는 그렇게 삶 속에 스며들고, 삶은 스스로 판을 벌여 소리로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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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 배일동(43)의 소리 안에는 언제나 삶에 대한 ‘짠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그는 어머니를 찾아 시장바닥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곡진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문득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생각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 고단한 삶들을 소리로 풀어내고 싶다는. 그때 그는 이미 어설픈 ‘또랑광대’(시골 또랑에서나 노는 광대)로서나마 소리를 접하고 있었다. 우연히 순천국악원 앞을 지나다가 듣게 된 소리에 빠져, 그때부터 국악원을 드나들며 ‘토막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생머리’ 탓이었는지 그가 시장바닥에서 만난 삶의 모습은 어린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후 그는 삶에 대한 ‘짠한 마음’을 놓아버렸을 때 그에게서 소리는 죽는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홀연 배에서 내려, 뒤늦게 소리의 길로 나아갔다. 돈이 아니라 소리로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어리석고도 부푼 꿈을 안고서. 순천의 염금향 선생이 첫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었던 성우향 선생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리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서울에 계신 성 선생을 찾아 짐을 싸들고 올라가 선생 밑에서 ‘마당쇠(총무)’ 노릇을 하면서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않을 정도로 소리에 미쳐들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성우향 선생은 그런 그에게 “살다 살다 별놈 다 봤다”며 “소리하다 죽을 놈”이라고까지 했다. 성우향 선생이 그에게 소리의 품새와 재주를 가르쳐주었다면, 남원의 강도근 선생은 소리의 골격과 정신을 깨우쳐주었다. ‘득음’의 경지를 넘어 ‘득도’에 이른 선생에게서 비로소 소리가 어떠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장바닥이 그의 소리의 속내라면, 산은 그에게 소리 공부의 ‘책상머리’였다. 일찍이 강도근 선생이 소리를 깨우친 선암사 인근의 ‘기운 좋은’ 자리에 천막을 치고 산천에 의지해 전진하기를 2년, 겨우 기본적인 깨침을 얻은 그에게 스승들은 이제 국립극장 같은 곳이라도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그는 그런 권유들을 뿌리치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천성적으로 타고난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소리의 세계는 아직 멀고도 아득하기만 했다. 지리산 달궁계곡의 한 이름 없는 폭포가 그가 칩거한 자리였다. 밤낮없이 소리에 몰두하기를 3년, 그가 북채로 장단을 두드려대던 바위에 서서히 금이 가더니 기어이 두 동강이 나고야 말았다. 이어 한겨울의 눈보라가 쏟아지던 날, 그의 목은 그야말로 ‘단박에’ 터져버렸다. 그것은 돈오(頓悟)였다. 그리고 2년여를 더 추스른 끝에 마침내 산을 내려오던 날, 마을사람들은 그가 소리를 깨치던 그 폭포를 ‘일동폭포’라고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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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2년부터 2년간 광주시립국극단에서 상임단원으로 일했다. 산을 내려온 후 서울국립극장에 응모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다 될 듯하던 그 일은 막판에 틀어졌다. 상심이 컸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바꿔먹었다. 광주시립국극단에서 더욱 절감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서 내야 할 소리와 그가 추구해야 할 소리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하던 ‘공무’를 접고 상경, 종로구 소격동에서 구민판소리학원(016-713-7252)을 열었다. 현재 그에게서 소리를 배우고 있는 문하생은 학생 11명에 일반인 20명. 수입은 보잘것없지만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자유롭게 자기의 소리를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호주 브리스베인에서 열린 2007 그린파크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공연을 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다. 국내에서 자꾸만 판소리의 무대가 좁아들어 가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그곳에서 처음 판소리의 세계를 접한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열광을 넘어 전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소리’라고 격찬했고, 기존 무대음향으로는 도저히 받쳐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소리의 세계에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가사도 잘 모르는 ‘쑥대머리’를 듣고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옥계의 계곡은 깊고도 넓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 바다로 가지만, 소리는 산을 넘어 하늘로 퍼져갔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였고, 사람의 삶이 이루는 소리였고, 구민 판소리 가족들이 영원히 화두공안(話頭公案)으로 삼고 있는 소리이기도 했다.
구민 배일동 1991년 성우향 선생께 춘향가, 심청가 사사 1994년 강도근 선생께 수궁가, 흥보가 사사 1995~2001년 지리산 산 공부 2002~2003년 광주시립국극단 상임단원 역임 2002년 전주세계소리축제 명창초청공연 2003년 세계월드컵기념 한일대축제 창극 ‘현해탄에 핀 매화’ 주연 공연 2004년 국립국악원 주최 중견명창 5인전 초청공연 2006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2007년 호주 BRISBANE GREENPARK FESTIBAL 출전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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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출 할머니는 1943년 가을에 동원되어, 1944년 정초 목단강위안소에 도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얼마 전 탈출할 때까지 위안부로 생활했다.
할머니는 1928년 10월 26일 경북 상주군 화동면 의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이를 모두 열둘을 낳았는데 일출은 그중 막내다. 일출이 태어났을 때 이미 위의 다섯 형제가 죽어 일곱이 남았다. 일출이 막내니 부모는 이미 많이 늙었고 농사를 지었다.
…하고 나서 그 담에는 또 거석하니까니 피도 나고 이러니까니 약이랑 넣어야 되잖아요. 그러니 딴 방에다 옮겼어요. 그래 가지고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쪼그만 하니까, 자꾸 바꿔서 부르니까, 그러고 나서 내가 그렇게 막 오줌 싸면 막 피가 나오고 이러니까, 그것들이 그 담에는 딴 방으로 날 옮겨주데요. 그래 가지고 병원에 가서 약도 넣고 했어요. 그 쪼그만한 걸. 그래 그렇게 해가지고, 또 내가 좀 있다가 내가 좀 앓았어. 막 그러니까, 요 아래가 헐고 하니까 또 열이 나요. 열이 나다 또 나쁜 병이 또 왔지. 그래 엎친 데다 뭐 덮치게 됐지.
여름이 되자 군인들은 일출의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옮는다고 차에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도착해보니 산기슭에 장작을 쌓아놓았다.
“불을 놓고 기름을 붓고 사람을 거기다 올려놓아 태워 죽이잖아.”
그때 산에서 한국인 남자들이 내려와 군인들과 격투를 벌이고 일출을 업고 도망했다.
“조선옷 입은 사람들이 내려와 가지고 나를 끌고 멀리멀리 갔어요. 산을 몇 개 몇 개 넘어 번갈아 나를 업고 갔어요.”
그 조선 사람들은 일출을 깊은 산 속에 있는 어느 조선 사람 집에 데려다주고 갔다. 거기서 한동안 조리를 하여 몸이 나은 일출은 다른 조선 사람을 따라 길림으로 나왔다. 그해 조선족인 노씨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1946년도에 해방군으로 나가고, 1950년도 한국전쟁에 중국군으로 나가 죽었다.
일출이 열아홉 살 때 어린 딸도 죽었다. 일출은 그해에 해방군의 간호사로 나갔다. 스물서너 살에 제대하여 길림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혼자 살다가 서른 살이 넘어 중국인과 재혼했다.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1962년 무렵에 고향에 오려고 아이를 업고 평양까지 내려왔으나, 휴전선이 가로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일로 중국에서는 한동안 스파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46살에 퇴직하여 이후 연금으로 생활해왔다. 슬하에 2남1녀가 있다. 남편이 계속 바람을 피워 한국으로 오기 10여 년 전에 이혼했다.
그동안 두세 차례 고국을 방문했으나, 국적 회복을 망설이다가 2000년, 드디어 국적을 되찾았다. 현재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 강일출 할머니의 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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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일), 오랜만에 나눔의 집이 북적거렸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개관 9주년 및 광복절 기념행사가 열리는 까닭이었다. 이 날은 마침 지난달 30일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된 뒤이기도 했고, 8월 5일부터 시작된 한·일 대학생 워크숍 ‘피스로드 캠프’를 마친 바로 다음 날이기도 했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 전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열리던 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피스로드에 참가한 한·일 대학생들과 초·중·고등학교 학생 50여 명 등만 할머니들의 시위를 성원할 뿐, 어찌 보면 쓸쓸하기조차 한 그날의 집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그곳에 있던 일본인 학생들이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일본인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되묻고 싶었다. 어쩌면 가해 당사자들의 일원이기도 한 그 젊은이들이 그렇게나마 위안부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을진대, 이승연이나 이영훈이나 지만원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어김없이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를 표출하던 우리 사회가 그 열기가 사그라지고 난 뒤에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했느냐고.
그런 물음을 안고 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을 찾은 나는 그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심사가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판에 가지고 간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무실에 들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음 급한 누군가가 현관에 세워놓은 내 우산을 들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작은 일로 나는 필요 이상의, 공연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마치 예견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하루 종일 온갖 짜증으로 이어졌다. 미리 인터뷰 약속을 받아둔 일본인 자원봉사자 후루하시 아야는 피스로드 참가 중 갑작스레 맹장염을 일으킨 한 학생을 간병하기 위해 양평의 병원에 가 있다는 것이고, 그녀를 대신하기로 한 가라키 유이는 행사 진행을 핑계로 말붙이기조차 어려웠다. 그에 아랑곳없이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미국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 서옥자 위원장의 미국 결의안 발의부터 통과까지 경위 보고에 이어,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지역구 의원들과 함께 ‘어두운 구석’에 들러 바쁜 걸음으로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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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둘러보다 한 일본인 여대생을 주목했다. 그녀는 일본 오사카에서 온 교환학생으로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려 왔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의례적인 답변만 들을지도 모를 이곳 관계자들보다는 그녀에게서 더 솔직한 답변을 들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엉뚱한 곳에서 막히고 말았다. 처음에는 언어소통이 문제였다. 억지로 겨우겨우 말문을 튼 나는 나눔의 집 연구원으로 있는 일본인 무라야마 잇페이의 힘을 빌리려 했다. 그러나 웬걸! 나는 엉뚱하게도 이번에는 그의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왜 인터뷰를 하려 하느냐, 동의는 충분히 받았느냐, 어디서 왜 사진을 찍으려 하느냐는 등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녀와 빠른 일본말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겨우 동의를 얻어 받아낸 대답과 강일출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마저 취소해달라는 ‘통보’를 전달해왔다. 하긴 그 답이라고 해야 별다를 바 없는 의례적인 답변이기는 했지만. 여기서 강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차마 옮기지 않겠다. 다만 나는 내가 처음 취재하려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잠시 헷갈려 혼란스러웠다는 것만 밝힌다.
나중에 이를 다독이고자 하는 한국인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침해하기도, 다른 사람에게서 침해받기도 싫어하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이고(일본 사람의 특성이 있으면 한국 사람의 특성도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고(그렇다면 더더욱 그렇다), 피스로드 행사 진행으로 신경이 날카로운 탓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잇페이 본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본국에 알려질 수도 있으므로 상당히 조심스럽다는 것이며, 자기들 생각과는 배치된 기사가 나간 전례도 종종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있고, 생각도 알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내가 그들에게 답변(더더욱 본국에 돌아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을 강요라도 했으며, 그들에게 억지 참회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달라고 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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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되고 난 다음, 한국 사회가 보인 반응은 차치해놓고, 일본이 보인 반응은 이미 충분히 예견한 것처럼 치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강제’냐 ‘자발’이냐를 놓고 따지지만(이에 동조하는 한국인도 있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그에 앞서 그 모든 것이 어디서 비롯했는가. 그 모든 원인인 침략과 전쟁을 벌인 원죄자로서, 사무라이처럼 할복은 못할지언정 ‘앗싸리’하게 사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안겨준 행동을 참회하지 않는다면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용’이 아니라 인용해서 말하자면) ‘일본은 없다’. 차라리 이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깨끗이 사죄하고, 그런 연후에 자국 의회에서 ‘인디언결의안’이라도 통과시켜라.
취재를 접고 원댕이골 나눔의 집을 빠져나오는데,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는 나는 속절없이 비를 맞을 뿐이었지만, 그 빗속에 길가의 무궁화꽃이 채 피지도 못한 채 ‘툭’ 하니 봉우리로 떨어져내렸다. 그런데, 그 우산은 어느 누가 가져간 것일까.
나눔의 집(031-768-0064)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로부터 성적 희생을 강요당했던 생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1992년 6월에 결성된 나눔의 집 건립추진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자는 취지로 불교계 및 사회 각계에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으로 나눔의 집 개소식을 했다. 이후로 명륜동·혜화동을 거쳐, 1995년 12월 한 독자가 기증한 경기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소재 2100여㎡의 대지에 600여㎡의 노인주거복지시설을 신축했다. 현재는 2800여㎡의 대지에 1998년 개관한 역사관을 포함 990여㎡건물이 있다. |
수요집회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시위를 처음 시작한 것을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였다. 제774차 수요집회는 마침 62돌을 맞는 광복전 오전 12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날 일본대사관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동시에 일본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다. 하나는 위안부할머니들의 수요집회였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HID)에서 벌인 광복 62주년 기념 태극기대회였다. 때가 때이니만큼 수요집회에는 대선주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이 많이 몰렸고, 태극기대회에는 사진기자들이 주로 몰렸다. 내용 |
수색역 앞 형제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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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한꺼번에 싸게 사서/마구 쓰다가/망가지면 내다버리는/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나는 당장 버스에서/뛰어내리고 싶다/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며/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모루 위에서 벼리고/숫돌에 갈아/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꼬부랑 호미가 되어/소나무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온통 부끄러워지고/직지사 해우소/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똥덩이처럼 느껴질 때/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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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씨는 오늘 영 일진이 좋지 않았다. 8월이 다 가고 있는데도 날은 갈수록 뜨거워지는 듯했고, 당뇨 탓인지 몸은 왠지 무겁기만 했다. 손에 자꾸 땀이 차고 헛메질이 잦더니 기어이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고 말았다. 철근 하나를 모양대로 휘려고 하는데 영 뜻대로 되지 않아 어거지로 메를 내리치는 순간, 반대편 끝이 튕겨나가면서 옆에서 일하고 있던 형 상준씨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형은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고, 손 사이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여덟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하루라도 안 다치면 오히려 이상한 대장간 일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같은 사고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상준씨는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집으로 들어가버렸지만, 혼자 남은 상남씨는 이래저래 기분이 찜찜하다.
수색역 앞 지금의 자리에서 형과 함께 ‘형제대장간’(02-304-7156)을 연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자기야 한동안 ‘딴짓’을 하다가 들어왔지만, 형은 초등학교를 마친 후부터 애오라지 쇠를 만지며 살아왔다. 류상준(57)·상남(49) 형제가 대장일을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태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제의 아버지는 형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소 발굽에 다는 편자를 만들고 신기는 ‘장인’이었다. 한낱 ‘소발굽장이’를 장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아버지의 솜씨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생활의 여유가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당신 스스로 그랬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맏이와 막내쯤에만 조금 신경을 쓸 정도였다. 넷째, 다섯째인 상준·상남 형제에게도 그런 분위기는 자연스러웠고, 놀기 좋아하는 두 형제는 애당초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모래내로 수색으로 휩쓸고 다니기에 바빴다. 그래도 아버지의 내력을 타고난 것일까, 형은 모래내에서 대장간을 열고 있던 옆집 아저씨에게서 대장일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병을 앓다 돌아가시면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고, 형의 대장일은 평생 직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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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저씨 밑에서 일을 배우던 상준씨는 1977년쯤 암사동에서 직접 대장간을 차렸다. 동생 상남씨는 대장간 한켠에 기계를 들여놓고 자기 일을 하면서 형을 도왔다. 당시 어찌나 일이 많던지 상남씨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메질에 나서야 했는데, 그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듣기도 했으며, 그 일은 두고두고 어머니에 대한 죄스런 마음으로 남기도 했다. 한동안 상준씨 밑에서 풀무를 돌리던 상남씨는 독립을 해보겠다며 떡가게를 차려 나갔고, 그래도 수완은 있었던지 한때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애써 번 돈을 다 날려버린 상남씨는 다시 형 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딱 1년만 있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건만, 그 1년이 어느덧 10년이 되어버렸다.
상남씨는 화덕 안의 시우쇠 하나를 꺼내어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세월 동안 가끔 형과 다투기도 했지만, 그래도 형은 형이니까 동생은 동생이니까 하며 서로 잘 삭이곤 했다. 싸움의 소재래야 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형은 어떤 일이건 항상 완벽주의자여서 그렇게 정밀해야 할 필요도 없는 공사용 대못 하나를 놓고도 몇 번이고 재고 다듬기 일쑤였다. 동생은 그런 형의 성정을 자꾸 탓하지만, 그 속내에는 형이 되도록 힘들이지 않고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지금이야 ‘하기 싫을 정도’로 일감이 밀린다고는 하지만, 이 놈의 대장장이 일은 아무리 일감이 많더라도 한꺼번에 처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고를 쌓아두며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몸으로 먹고사는 처지에 아프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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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씨는 그 쇠를 담금질하면서 다시 생각을 돌렸다. 그래도 중국산 싸구려들의 틈새에서 이만큼 버틸 수 있는 것도 형의 그런 장인정신 덕택이었다. ‘형이야 대장장이 일을 그만두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만 자신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토록 비지땀을 흘려가며 만든 호미 한 자루가 어느 농가의 헛간에라도 버젓이 걸려 있다면, 그 호미 한 자루가 마침내 쓰임새를 다하고 다시 불길 속으로 되돌려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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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씨는 화덕의 불을 내리고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한 마음에 술이라도 한잔 살 작정이었다. 그러나 형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평소에 상준씨는 천근만근 피곤한 몸을 늘 술로 달래곤 했다. 그래서 일을 마칠 때쯤이면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핑계 김에 푹 쉬도록 하자. 내일이면 아무리 말려도 머리를 싸매고라도 다시 대장간으로 나올 위인이 아닌가. 상남씨는 대장간의 셔터를 내리면서 문득 아침에 아내가 “오늘은 좀 일찍 들어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늘이 바로 상남씨의 ‘귀 빠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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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역 앞의 형제대장간이 있는 곳은 철도청 부지로 2009년 9월이면 신규 노선 확장에 따라 비워줘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자리를 내줄테니 오라고 하는 곳도 있지만, 그동안 정도 쌓이고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니 되도록 옮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동안 언론에 자주 소개되면서(심지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나 드라마를 찍기도 했다) 초등학교 같은 데서 견학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는데, 장소가 협소한 탓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견학은커녕 조그만 전시라도 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은 데다 안전사고의 위험도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그들의 바람에 덧붙여, 이참에 아예 철도청에서 부지를 내주고 ‘도심 속의 대장간’을 살아 있는 박물관쯤으로 만드는 것은. 돈을 들여 없는 박물관(그것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박제된 민속품이나 전시하는)을 만드는 판에 이런 특색 있는 박물관을 만든다면 하루아침에 명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같은 철로 먹고사는 처지기도 하고. |
꿈의 낙원인가, 낙원에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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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주검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애달픈 국토의 막내’ 울릉도 앞바다에 죽도(竹島)가 떠 있다. 도동항에서 뱃길로 20분 거리인 죽도는 이름 그대로 대나무(섬조릿대)로 가득한 섬이다. 일본사람들은 대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 하여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만 진짜 대나무섬은 바로 죽도인 셈이다. 또 죽도는 울릉도에 딸린 44개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자 유일한 유인도다. 하지만 현재 죽도의 주민이라고는 김길철(59)·유곤 부자 고작 2명이고, 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채 30~40분이 걸리지 않는다. 김씨가 처음 죽도에 들어온 것은 30여 년 전.
“배가 고파서 들어왔죠. 그나마 밭이 있어 옥수수나 감자 따위는 길러 먹을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죽도에는 세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도 나오지 않아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 견디다 못해 모두 섬을 떠나고 김씨 가족만 남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섬에 들어와 ‘죽도록’ 고생하며 함께 삶의 터전을 일구던 아내는 6년 전 섬 끝에서 산나물을 캐다 발을 헛디뎌 추락사하고 말았다. 둘만 남은 부자는 끝내 섬을 떠나지 못하고 지금은 산더덕을 키우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죽도가 울릉도 해상관광의 한 코스가 되면서 섬에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가게를 열면서 살림살이가 한결 나아졌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두 부자의 애틋한 사연을 소개하면서 죽도는 ‘부자섬’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 두 부자는 꽤나 유명인사가 되었다.
죽도는 울릉도 본섬 앞바다에 떠서 ‘울릉도의 정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봄이면 노란 유채꽃밭이 화사하고, 여름에는 하얀 섬바디꽃이 환상적이며, 가을이 오면 억새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또 죽도 전망대에 서면 울릉도의 윤곽을 가장 울릉도답게 조망할 수 있다. 최근 울릉군에서는 죽도를 고품격 ‘자연원(自然園)’으로 개발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그 1단계 공사를 한창 마무리 중이다. 1단계 공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조각공원 조성사업이다. 우선 죽도의 해안을 따라가는 산책로 곳곳에 국내 유명작가의 조형물 5점을 설치했는데, 그 조형성이 죽도와 울릉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죽도 선착장에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부자집’에 이르기 전 관문 격인 조형물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앞으로 3차에 걸친 관광지 재개발 사업이 마무리되고 죽도에 리조트가 들어서면 죽도는 이제 잠시 둘러가는 섬에서 하룻밤 묶어갈 수 있는 섬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것으로 죽도는 정말 ‘꿈의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깍새와 명이’라는 것이 있다. 조선 세종 때 왜구들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시행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한동안 무인지경이 되었던 울릉도는 고종 때인 1887년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하면서 새 역사를 시작했지만, 당시 섬으로 이주한 개척민들의 삶은 궁박하기 짝이 없었다. 나리분지를 제외하고는 깎아지른 절벽과 비탈만 있는 섬에서 사람들은 투막집을 짓고 비탈밭을 일구며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까치와 비슷한 새인 깍새를 잡아 소금에 절여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며 겨울을 났고, 겨울이 끝날 즈음에는 산야에 막 돋기 시작한 산마늘을 뜯어먹으며 연명했다. 그때 개척민들의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산마늘을 울릉도 사람들은 지금도 ‘명(命)이’라고 부르며 잊지 않고 있다. 울릉도의 척박한 삶은 죽도와 죽도의 부자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들은 결코 낙원을 꿈꾸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낙원인지도 몰랐다. 그 오랜 고통이 기어이 낙원의 꿈을 이룰 것인가. 죽도전망대에서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홀로섬’을 그리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하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해묵은 분쟁이 심화되면서 문화재청은 독도 리모델링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일을 맡은 건축가 승효상씨는 독도를 직접 방문한 후 “독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 각종 인공시설은 이런 독도의 아름다움을 저해하는 측면이 많다”며 “독도는 독도다워야 한다. 건축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잇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독도는 그 표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독도라는 장소성을 살려내는 핵심 개념으로 ‘장소의 혼(Genius Loci)’을 내세운 그는 “독도는 우리의 정체성과 원형을 확인하는 모멘트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 후 독도의 리모델링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독도든 죽도든 ‘장소의 혼’이 살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
들어라, 내면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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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아.
이 밤길을 너는 먼저 달려가 새벽 산길을 비추고 있거라.
이 어둠 저편 누가 플래시를 버르장머리 없이 비추며 온다.
두려워 말라. 그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어둠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무서운 것은, 다가오는 물체를 크게 보는 내 마음 속에 있다.
네가 자라서 너의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몇 차례
불심검문을 당하고 굴욕을 통과하여 더 탄탄해진
내 길을 갈 때 너도 알게 되리라.
쉽게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먼 새벽 산정에 이르는 길을.
- 황지우 ‘나는 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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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김병규
‘문도(聞道)- 도에 대해 듣다’, 57×35㎝ |
10세 때 벽강 김호 선생 문하 입문
14세 때 한국서예공모전 최연소 입선
호남대학교 미술학과(한국화) 졸업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및 한국화 부문 입선
전라남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중국·대만·일본·미국·뉴질랜드·몽골·터키 등 교류 및 초대전
2007년 국내 첫 개인전 (순천문화예술회관, 5. 29~6. 4)
우보는 오랜만에 아내의 손을 잡고 나들이길에 나섰다. 광주에 있던 서실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지도 벌써 세 달이 다 되어간다. 아내는 임신 3개월째다. 첫딸 지인이를 낳고 3년 만의 임신. ‘미운 세 살’이라던가. 지인이는 요즘 자기 고집을 곧잘 내세운다. 아내는 그 고집이 영락없이 아빠를 빼닮은 것이라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고집 없이는 살아낼 수 없는 40여 년 세월이었다. 들을 수 없는,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것은 내면에 가득한 어떤 집념이었다. 아이인들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숱한 장애를 만나지 않겠는가. 그럴 때면 아이도 알게 되리라. 그 장애를 헤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임을.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혼이 있어 그토록 어렵게라도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우보 김병규(45)는 196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인 일곱 살 때 청각을 잃었다.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거문도에 놀러 갔다가 뇌척수막염을 앓게 되면서다. 요즘 의학이라면 너끈히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영민하던 아이는 어이없이 소리를 잃었다. 후에 순천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가르친 아버지 김종홍 교수는 맏아들에게 닥친 불행 앞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청각을 잃으면서 발음까지 어눌해진 아이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냈다. 어떻게든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키워내고자 하는 의지였지만, 아이는 거기서 숱한 놀림과 따돌림을 홀로 이겨내야 했다. 그 고통의 그늘에서 아이는 마음의 위안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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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 판소리 교실을 나온 우보는 아내와 함께 종로통을 거닐었다. 종로는 그에게 소중한 인연을 맺어준 곳이다. 5년 전 인사동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처음 지금의 아내 장혜영씨(40)를 만났다. 당시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한국화를 그리던 아내는 인사동을 돌다가 우연히 그 전시회에 들렀다고 한다. 솔직히 처음 우보의 장애 때문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지만, 우보의 우직함에 끌려 이내 그의 반려가 되기로 했다. 운보 김기창의 곁에 우향 박래현이 있었던 것처럼, 아내는 우보의 반려이자 예술적 동지이자 세상과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통역사이기도 했다. 아내는 가끔 세상의 풍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보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세상과 제한적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그의 운명이고, 오히려 그 운명이 그의 예술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힘인 것을.
장혜영 ‘봄’, 제40회 전라남도 미술대전 한국화 대상작(2004) |
안산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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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의원은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다. - 백석 ‘고향’ 전문
원곡동의 한 다방에서 만난 두 여성은 멀리 하얼빈이나 베이징에서 온 조선족들이다. 그들의 고향은 엄연히 중국이지만, 이미 버리고 왔으므로 아니 버림받고 왔으므로 이제 고향은 이곳 원곡동이거나 아니면 없다. 하얼빈에서 온 김향(그들은 ‘양’이란 말보다 향기로울 ‘향’자를 써달라고 했다)은 사십대 중반이고, 베이징에서 온 조향은 삼십대 초반이다.
김향은 원래 중국 오상현 소산자 출신으로, 그곳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어디 출신이라고 하는데, 관심이 없어 물어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갓 스물에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해 그해 딸 하나를 낳았다. 남편은 인물 좋고 체격 좋고 수완 좋은 멀쩡한 위인으로 결혼 후 하얼빈으로 나와 장사를 해서 돈도 좀 벌었다. 그러나 씀씀이가 헤퍼 돈을 모으지는 못한 모양이다. 게다가 밖에 나가면 그렇게 사람 좋은 위인이 집에만 들어오면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거의 매일 매질을 당하면서 숱하게 헤어질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또 막상 헤어져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참고 살아왔다. 부산 어디쯤에 시숙이 되는 사람이 살고 있어 그의 초청으로 3년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남편은 공사판을 떠돌며 막일을 했고, 그녀는 공장이나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지만 원래 몸도 약한 데다 그동안의 고생으로 골병이 들다시피해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당연히 원곡동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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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의 경우는 더욱 어렵다. 부산 출신인 아버지와 북한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딸로 곱게 자라왔고, 대학까지 나와 북경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다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이혼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어렵게 살던 아버지가 말기암으로 쓰러지자, 치료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가능성은 희박했고 치료비도 감당키 어려워 아버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한국에 남아서 아버지의 치료비를 벌기로 작정했다. 그녀 역시 당연히 원곡동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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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떠도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서럽다. 고향 역시 사람의 마음 밖을 떠도니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은 유선이 아니라 무선으로도 얼마든지 천리만리 밖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고향은, 사람은 서로 밖으로만 떠도니 상대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신이 부대끼고 있는 삶들이, 살아내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그대의 고향이고, 그 삶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그 어느 곳이 당신의 고향이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사이 꿈속에서 누군가 내 맥을 짚는데, 그 손길이 하도 따스하고 부드러워 그 속에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국경 없는 마을 ‘국경 없는 마을’은 경기 안산시 원곡동에 형성된 외국인노동자 집단주거지역이다. 이 지역은 인근 시화·반월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몰려 살면서 마치 특구처럼 되어버린 곳이다. 초기 외국인노동자들의 애환을 받아내던 ‘국경 없는 마을’은 서서히 그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국경 없는 마을’은 이 지역 외국인노동자, 코시안, 원주민들의 삶을 담은 박채란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인권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야기책이라면 인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정직하게 인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내 관심사는 제도라기보다 ‘각각의 사정’이고 법이라기보다 ‘인간’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부분은 즐겁고, 어떤 부분은 슬프고, 또 어떤 부분은 패배적이거나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모든 것의 수용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
‘동하이모’의 SG워너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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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다행이다/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것/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다행이다/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것/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 이적 ‘다행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한 것인가. ‘동하이모’(41)는 대전에서 성남으로 가는 내내 행복했다. 오늘은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SG워너비 4집 발매 기념 전국 투어 콘서트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날이다. 오늘 공연을 놓치면 아마도 해가 바뀌기 전까지는 그들의 공식 콘서트를 볼 수 없다. 벼르고 별렀건만 하마터면 이번 공연을 놓칠 뻔했다. 매번 서두르지 않고는 예매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일이 생겨 다른 사람에게 오픈 예매를 미뤄놓았다가, 그이마저 예매를 놓쳤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낙심했던가.
그러니 공연 티켓을 구하지 못한 것은 낙심 이전에 난감한 일이었다. ‘동하이모’는 먼저 현아양의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웬걸, 마침 공연날짜에 갑작스레 학교에서 개최하는 지방발표회가 있어 현아양도 참석치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그쪽은 그나마 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도 문제였지만 그녀 자신도 그 공연을 놓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동하이모’가 달리 동하(채동하, SG워너비 보컬) 이모이겠는가. 그녀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넣은 끝에 기어이, 가까스로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자랑스레 연락을 넣었건만, 작자는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콘서트에 초대받은 김에 소위 ‘팬의 세계’를 취재하고 싶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정도 모른 채 그날 공연에 현아양을 무대로 불러올려 인사라도 시킬 요량으로 SG워너비 쪽에 미리 연락을 넣기로 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현아양의 사정을 알리고 부랴부랴 그 ‘기획’을 취소시켜야 했다. 어쩌면 작은 감동일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친 아쉬움도 아쉬움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더욱 아쉬워할 현아양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눈앞이 잠시 캄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인회라도 한 번 가고 싶은 것이 현아양의 애타는 소원이었는데…. 그녀 역시 단 한 번도 ‘워너비 삼형제’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지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도 SG워너비의 공연을 보러가는 마음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설렌다. 이번 길에는 동생(39)과 조카(15) 그리고 ‘동하만’(37)도 동행했다. 그녀는 SG워너비 개인 팬카페 ‘별 속에 동하’(donghalove012) 회원으로, 같은 대전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처럼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총 7만여 명에 이른다는 SG워너비 팬클럽 회원 중 동하 개인 팬카페 소속만도 1만7400명에 이른다. 그들은 모두 SG워너비의 열성 팬들이기도 하지만, 특히 동하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동하이모’가 SG워너비의 팬이 된 것도 다 동하 때문이었다. 2002년인가, 그녀는 우연히 레코드가게 앞을 지나다가 동하가 솔로시절 불렀던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난 후부터 그의 노래 ‘죽을 만큼 사랑했어요’처럼 그를 죽고도 남을 만큼 사랑하게 되었다. 보이스가 어떻고, 감성이니 호소력이니 그런 것은 잘 모른다. 30대 중반을 넘긴 한 여자는 어쩌다가 조카뻘이나 되는 한 어린(?) 가수에게 그만 온통 넋을 빼앗기고 말았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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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동하가 김진호·김용준과 함께 SG워너비를 결성한 이후 그녀의 본격적인 ‘팬 행각’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그냥 듣기만 하던 데서 벗어나, 같은 해의 대전콘서트 이후 SG워너비의 콘서트라면 불원천리 달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하던 그녀가 타지의 콘서트에 쫓아다닌다는 일은 시간도 돈도 버겁기만 했다. 그럼에도 기를 쓰고 가려는 그녀를 보고 남편이 던진 말은 “미쳤군!” 단 한 마디. 그것은 가장 명료하고도 엄연한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착한 남편은 안달이 난 ‘미친 아내’를 위해 간간히 기사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같이 콘서트를 보고 난 후 아내의 감상을 묻는 질문에 마지못해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가 SG워너비보다 김건모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안다. 그녀에게는 중3과 중1의 두 딸이 있다. 아이들 역시 SG워너비보다 FT아일랜드를 더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그들을 ‘SG워너비만큼이나’ 사랑한다.
오늘 공연은 최고였다. 어쩌면 그것은 올해 마지막 공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긴 기다림 때문이기도 하리라.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SG워너비의 음악은 음반보다 공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음반보다 공연실황을 MP3로 다운받아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2년째 음반판매량에서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공연 역시 항상 매진을 기록하는 것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이리라. 그들의 공연장에는 20대뿐 아니라 30대에서 40대까지, 심지어 50대이거나 일본에서 온 중년부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팬으로 넘쳐난다. 그 속에는 ‘유리아’(34) 같은 이미 낯익은 얼굴도 많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일행은 제각각 공연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느라 한껏 들떠 있었다. 지난 해에 직장을 그만둔 후 ‘동하이모’에게 그들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만 여겨진다. 오랜 직장생활 속에서, 그 의례적인 관계 속에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큰 갈망이었던가. 열기로 들뜬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동하의 목소리가 더없이 절절하다.
슬픈 가시나무새처럼/나 그댈 위해 노래 부르리/평생 단 한번의 노래라면/그댈 위해 부르리/나의 두 눈이 먼다 해도/그대라면 나는 바라보리/내 두 발이 못 쓰게 된다고 해도/나 그대에게로 가리
SG워너비 SG워너비(WannaBe)는 ‘사이먼과 가펑클처럼 되고 싶다’는 뜻이다. ‘SG워너비’ 워너비인 ‘동하이모’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의 음악을 닮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룬 음악성과 오랫동안 한결 같은 자세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SG워너비는 2004년 1집 ‘WannaBe+’로 데뷔한 이래 ‘살다가’ 등 숱한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뛰어난 가창력과 그 또래 같지 않은 깊은 인간적 속내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4집의 타이틀곡 ‘아리랑’은 국악과 판소리를 접목한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노래로 그들의 음악세계가 한층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동하이모’의 사랑 동하는 오는 10월 말 ‘풋루스’라는 뮤지컬에도 출연한다(이것은 ‘동하이모’의 홍보성 멘트다). 그래, 좋다. 동하여, 비상하라. 비상하라, 채동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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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기차의 미덕은 순전히 기다림에 있다. 그러나 남평역에서 기차는 기다리지 않아도 왔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고, 뗑뗑거리고 기차는 밀려와 섰지만 내리는 이도 타야 할 이도 없었다. 멋쩍은 기차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모르는 척 가을들판의 누런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뒤를 실없는 여운이 발을 질질 끌며 따라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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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역이 그래도 세간에 제법 알려진 것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그 시를 모티브로 한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 덕분이었다.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지 문학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역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남평역은 사평역의 모델로서 일약 간이역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1일 평균 이용객이 5명도 채 되지 않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단 한 명의 손님조차 없는 이 역은 가끔 관련 기사의 취재원이 되기도 하고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도 하면서 승객 수보다 더 많은 탐방객을 맞기도 했다.
시인이 ‘사평역에서’를 쓴 해가 1980년이라고 하니 어쩌면 동진씨의 철도원 이력과 그 맥을 같이 할지도 모른다. 그해 동진씨는 군에서 제대했으나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80년 서울의 봄’은 광주에서 무더기 낙화로 지고, 세상은 어수선하고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그는 호구의 일환으로 철도공무원이 되었다. 동진씨는 알고 있을까. ‘사평역에서’가 그 무참한 ‘80년 봄’을 지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때에 세상에 나온 시라는 것을. ‘남평역’과 ‘사평역’의 유사성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미 ‘사평역’과 ‘남평역’은 그의 이력 속에서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기차를 기다린다/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길 위가 편안하리라
- 김수영 ‘간이역’ 중에서
기차가 지나가고, 바람이 들녘을 덮어오자 아직 베이지 못한 벼들이 한쪽으로 쓸려 눕는다. 앵남역으로 가는 길은 부질없는 선을 넘어 활처럼 휘어든다. 앵남역은 나주를 벗어나 화순을 만나는 길목, 광주에서 도곡온천으로 가는 길목에 맨몸을 드러내놓고 누워 있다. 말이 역이지 건널목과 승강장, 안내판 덜렁 하나가 그 전부다. 거기에 키 작고 늙은 측백나무 한 그루가 가로등보다 더 긴 그림자와 신호등보다 더 짙은 시그널을 보낸다. 게다가 앵남역은 작년 말로 그 보잘 것 없는 임무조차 끝내고 마침내 퇴역했다. 건널목을 지키는 간수 조영근씨(61) 역시 2005년에 남평역에서 퇴역한 전직 역무원이다.
‘5·18항쟁 유적지’의 하나로 최근 멀끔하게 탈바꿈한 화순역을 지나 화순장으로 간다. 노끈으로 엉성하게 묶은 약초들과 툇밭에서 금방 따온 듯한 푸성귀들을 ‘폴러’ 나온 아지매들이 닭장 안의 닭들보다 먼저 졸고 있다. ‘참새방앗간’에는 곡식을 찧으러 나온 게 아니라 근질한 입방아를 찧기 위해 모여든 늙은 참새들로 가득하다. 애저 한 점에 막걸리를 거나하게 들이킨 촌로의 풀어진 눈매무새가 왠지 싸하다. 그 초라한 왁자지껄함에 등을 떠밀려 시장 밖으로 나선다. 어디로 가야 할까. 경전선은 화순역을 지나자마자 능주 쪽으로 이미 몸을 틀어버렸고, 겨우 남은 화순선은 퇴락한 화순광업소 앞에 아예 멈춰버렸다.
동면을 지나 남면으로 내려가면 사평역 없는 사평이 나온다. 하지만 사평역 없는 사평이 훨씬 사평역답다. 사평에는 역 대신 오래된 버스정류장이 허름하게 서 있고,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서면 개천가에 낡은 장옥들이 함석지붕을 맞배로 늘어뜨린 채 줄지어 서 있다. 예전에 다리 아래로 더러운 화장실이 있었고, 그 앞에 풀빵을 파는 점포가 있었고, 시장을 사이에 끼고 풀빵집 맞은편에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 아래 ‘똥갈보’들이 술을 파는 색싯집이 있었다 한다.
다시 눈을 돌리면 다슬기 그득했던 개천 너머로 새로 선 양조장 건물이 보이고, 그 근처는 보나마나 오래된 다슬기집들이다. 사진관의 유리창 안에는 낡은 젊음이 흑백으로 웃고 있다. 사평에는 역이 없으므로 당연히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는다. 설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움으로 오는 것이며, 이내 그리움만 남긴 채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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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스 안에서 톱밥 한줌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 넣어본다. 흐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 임철우 ‘사평역’ 중에서
즐거운 고행- 달리는 사람들
-1952년 헬싱키올림픽 5000m, 1만 m, 마라톤 우승자 에밀 자토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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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무더위가 물러가자 이 땅의 마라토너들이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더기로 몰려다니며 가을단풍보다 더 화려한 형형색색으로 신작로를 물들일 것이었다. 기원전 490년, 필리피데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을 홀로 내달렸지만, 현대의 후계자들은 더 이상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병을 이겨내기 위해, 실패를 이겨내기 위해,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아니면 그냥 무엇인가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기꺼이 고행의 길을 간다. 이 땅에 새삼 마라톤의 열풍이 불어닥친 후, 일요일이면 이 땅에는 페르시아 군대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산지사방을 내달린다. 그들이 왜 그렇게 달리는지 ‘당신이 마라톤을 알아?’라는 책을 통해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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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은 왠지 살면서 좀 더 고통스런 일들을 맞닥뜨렸을 때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라톤대회에서 번호 달고 뛰게 될 것이란 느낌이 늘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겨울, 나는 충분히 괴로웠다. 일과 삶에서 쌓았던 자신감 대신 회의와 의문이 지나치게 몰려왔고, 이룬 건 없었다. 나는 어느새 서른다섯 살의 고집스런 독신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무의미하던 어느 날, 문득 마라톤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심장 광화문 한복판을 달리는 국제대회였고 때는 무르익은 봄, 3월이었다. 나의 심장도 설레다. 그래. 3월, 봄. 마라톤을 뛰고 나면, 다른 무언가도 시작될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그 먼 거리를 뛰고 싶어졌고 주저 없이 결정했다. 이번이야!
그러나 고통 속에는 고요함이 살아 있다. 맛볼 수 없는 성취감도. 그래, 나는 되지 않는 고시생활로 20대를 얼룩지게 했고, 30대에는 남들처럼 직장생활에 몰두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된 40대에 사업을 꿈꾸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나의 거취로 인해 향방이 결정되리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내 약속이기도 하다. 고통이 클수록 성취감도 큰 법! 적어도 내 아이에겐 일그러진 이 얼굴이 아니라 힘차게 뛰어가는 아빠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 삶은 이렇게 희망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40대에 사업이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 구윤회씨는 부도 위기에 처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의 순간, 마라톤으로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골인 후 스피드 칩을 반납하고 누워 있는 자기에게 누군가가 완주 메달을 찾아다주었을 때,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산모가 산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찾듯 메달을 보여달라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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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의 늦깎이 마라토너 조병주는 경력 3년 만에 메달 20여 개를 목에 걸었고, 그 중 두 번의 풀코스 완주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4시간대를 목표로 달린 2002년 한 마라톤대회에서 어이없게도 5시간 50분에야 거의 꼴찌로 완주하고 나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앞으로 더 열심히 달리라는 채찍으로 생각하며 다음 대회를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나이가 더해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는 기록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월 7일 파주의 임진각 일원에서는 ‘세계 한인의 날’ 제정 기념을 겸한 통일마라톤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참가자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한 1만1000여 명. 그야말로 북새통이었으나, 최근의 추세에 비추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연간 400개에 이르는 각종 마라톤대회가 전국 각처에서 개최되는데, 어지간하면 수천 명에 달하는 것은 보통이며, 소위 ‘메이저급 대회’에는 2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린다. 이 날 통일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구구한 사연 역시 여느 마라톤대회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 10㎞ 우승자 임우빈씨(42)는 우유 배달을 하는 냉장트럭을 운전하는 맹렬 직업여성으로, 화성 ‘싱싱축구단’의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축구선수이기도 하다. 2남1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마라톤대회 네 번째 출전 만에 난생 처음 우승컵을 안았다”며 기뻐했다. 여자 풀코스에서 1위를 차지한 김영희씨(43)는 4년 전만 해도 마라톤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우연히 마라톤 클럽에 가입한 후 이제는 아예 ‘마라톤 전도사’로 변신했다. “마라톤을 하면 힘든 고비를 이겨내고 완주하는 인내력을 배울 수 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결코 굶어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라톤 예찬론이다. 남자 5㎞ 우승자인 류태우씨(28)는 이번 마라톤대회에 출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두 번의 교통사고를 겪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부러지고 왼쪽 무릎인대가 부분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지난해 10㎞ 우승에 이어 또 다시 시상대에 섰다. 그는 중국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변 동료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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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달리는가. 달리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기관차’ 자토벡의 말처럼 인간이기에 달릴 수도 있고, 무엇인가에 쫓겨서 아니면 무엇인가를 쫓아서 달릴 수도 있다. 그것이 고통이든 행복이든 달리는 동안만큼은 동일하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달리는 동안 몸은 힘든데도 정신이 맑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신비로운 상태)’는 달리기의 극치다. ‘인생이 마라톤’이듯 ‘마라톤은 인생’이다. 자, 이제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자. 하지만 나는 신발끈을 고쳐 매기에도 이미 숨이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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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마라톤대회에서 만난 나성배씨(58·회사원) 가족은 단란하기만 한 마라톤 가족이었다. 동갑내기인 부인 엄필남씨와, 역시 동갑내기인 아들 선권(34·회사원)·서수정씨 내외가 각기 하프, 5㎞(수정씨만 아이를 안고) 코스에 도전했고, 모두 완주했다. 손녀 호인이(20개월)가 할아버지의 2시간 15분 주파 목표를 열심히 응원했지만, 이날 나씨의 기록은 애석하게도 2시간 16분이었다. 선권씨가 가장 빠른 2시간 10분, 어머니 엄씨가 2시간 45분에야 골인했는데, 그 이유가 ‘너무 배가 고파 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건강가족 파이팅! |
합천 바람흔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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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아이들은 어른 되나
얼마나 먼 바다 건너야 하얀 새는 쉴 수 있나
얼마나 긴 세월 흘러야 사람들은 자유 얻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긴 세월 흘러야 저 산들은 바다 되나
얼마나 여러 번 올려 봐야 푸른 하늘 볼 수 있나
얼마나 큰 소리 외쳐야 이 노래가 들려지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긴 밤을 지새야 푸른 불빛 볼 수 있나
얼마나 높은 산 넘어야 고운 사람 만나보나
얼마나 큰 눈물 흘려야 환한 웃음 가져보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 밥 딜런 ‘바람만이 아는 대답’
아주, 아주 멋진 미술관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고! 이 미술관에 가시려면 자가용, 사진기, 애인(또는 애인 후보)이 필요합니다.
- 우리 미술관 갈까? http://cafe.daum.net/adelle
합천호를 지나면서 물빛은 산빛으로 바뀐다. 봄이면 핏빛 철쭉으로 화려한 황매산은, 이제 능성이마다 은빛 억새로 빛난다. 아참, 한 군데 빠뜨린 곳이 있다. 호반도로를 달리다 보면 전혀 낯선 풍경 하나를 만난다. 이름인 즉 ‘합천영상테마파크’인데, 이곳에 들어서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일제시대가 된다. 원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장이었던 곳이 TV드라마 ‘서울 1945’(이 드라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을 친일로 그렸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에 이어 ‘경성 스캔들’을 촬영하면서 그리 되었다.
황매산 아랫도리 모산재에는 ‘순결바위’가 있다. 마치 한 바위가 둘로 쪼개진 듯한 형상으로, 안내판에는 ‘평소 사생활이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으며, 만약 들어간다 해도 바위가 오므라들어 나올 수 없다는 전설이 있다’고 쓰여 있다. 모산재 밑에는 영암사지가 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이 고즈넉한 곳인데, 후에 들어선 영암사 입구에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현수막이 길게 걸려 있다. ‘종교 편향 왜곡보도 조선일보 거부한다’. 아마도 최근 벌어진 서울에서의 스캔들 관련인 듯싶지만, 어차피 세속의 일이므로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길이 마침내 대기리로 들어서면 멀리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계단 진 논 사이로 또 다른 이물들이 나타난다. 철물로 만든 커다란 바람개비들이다. 바람개비는 모두 22개로, 22는 바람 속에 스며 있는 산소의 함유율이라나 뭐라나. 1996년 한 털보 설치미술가가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들어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일설에 따르면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다니다 그 터를 잡았다고도 한다). 그는 여기에 조형물을 설치하고 작은 미술관을 세웠다. 그는 직접 작품을 만든 작가이기도 하고 건축가이기도 하면서, 관장이자 큐레이터이고 사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만 바람의 흔적일 뿐이라고 했다. 이곳에 바람이 남긴 흔적은 한 큐레이터 출신 여교수가 일으킨 바람의 흔적과는 영 딴판이다. 이 미술관에서는 입장료도 받지 않을 뿐더러 대관료도 받지 않는다. 그 흔한 관의 지원도 없다. 수입이라고는 ‘미친차(美親茶, 천궁·작약·당귀·황기 등으로 만든 한방차)’나 ‘바람차’ 따위를 팔아 얻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손님들이 알아서 끓여 마시고 돈통에 자율적으로 찻값을 넣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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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관장이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떠나버린 후, 한 사람 거쳐 지난해부터 이 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정미선(41) 관장은 더욱 가관이다. 부산 출신인 그녀는 전공이 음악으로,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이래 기타, 바이올린부터 단소, 장고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다. 그녀는 소프라노이기도 하고, ‘꽃반지 끼고’ 등을 즐겨 부르는 무명 가수이기도 하다. 한때 산에 미쳐, 12년 동안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 속에서 산야초와 함께 산야초처럼 살기도 했다. 미술관을 떠맡게 된 것도 산에서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술관을 맡은 후 전시회에 라이브 공연을 접목시켰다.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구경 온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바람흔적미술관은 철저히 작가 위주로 운영한다. 누구든 이곳에서 작품전을 열고 싶으면 열 수 있고, 미술관 측의 어떤 간섭이나 기획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작가의 생각을 떠받들어주는 것도 아니지만. 단지 관장으로서 권한이 있다면 자신의 ‘느낌’이 대관 승낙의 기준이 된다는 점 정도다. 비록 별 볼일 없는 산골짜기 미술관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널리 입소문이 나면서 이 미술관의 집객 능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주말이면 400~500명의 이르는 관람객이 몰려드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전시회 관람이 주목적은 아니지만. 아무튼 전시회의 목적이 더 많은 관객과의 소통이라면, 그런 점에서 생각지도 않게 쏠쏠히 재미를 보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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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적더라도 대관료나 입장료를 받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으냐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다. 시설 개선은커녕 도색 비용조차 없어 작품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귀가 솔깃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 관장은 아직까지는 고개를 젓는다. 욕심은 부릴수록 느는 것이며, 그 욕심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욕심만 남게 된다.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그것에 채워넣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마음과,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마음이면 된다. 기실 이 미술관에서 정녕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며, 그 어느 누구도 그 아름다움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정 관장은 방명록에 쓰인 예쁜 글귀들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얻는다. 어쨌든 아직까지 바람개비들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내가 바람흔적미술관을 찾았을 때 마침 미술관에서는 ‘자연 속의 상상’ 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가회초등학교 아이들의 소박한 크레파스전이다. 출품작가들이라야 정 관장의 딸 박타령(3학년, 진짜 실명이다)의 친구들이다. 정 관장은 산 속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타령이가 있는 그대로 자라주는 것에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그녀는 언젠가 멀리 욕지도 연화분교생 전원(5명)이 이곳에 견학왔을 때, 그들 앞에서 노래를 하면서 느꼈던 짠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토록 해맑고 예쁘기만한 아이들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비치던 까닭 모를 서글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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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관장은 ‘바람흔적’에는 떠남과 머뭄을 함께 함축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 안에는 가고 싶은 곳과 머무는 곳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도 그랬지만, 지난해 겨울 내내 바람하고 지내면서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따뜻했던가. 미술관을 나서면서 나는 초대관장이 제2의 바람흔적미술관을 열었다는 남해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바람의 흔적을 따라가보고 싶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좋다. 나는 그냥 내키는 대로 달려보기로 하고, 바람을 저어 차를 몰았다. 차창을 내리고 밖으로 팔을 뻗쳐보니 손바닥에 시원한 가을바람이 가득하다. 그러나 문득 움켜쥐려 하니 손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민들레를 사랑한 리틀맘 수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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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펐다. 너무 너무 슬펐다. 아파서 죽을 것 같고, 슬퍼서 죽을 것 같고, 무서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다. 지금 이 차가운 화장실에서 혼자 땀범벅이 돼 아기를 낳고 있는 내 신세가 너무나 슬펐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아… 눈앞이 노랗게 되도록 아픈데, 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신음 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다. 아… 뭐가 나오려는 느낌이 난다. 아기가 나오나 보다. 아기가.
그때 밖에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문을 똑똑 두드린다. 겨우 손을 뻗어 똑똑 두드려줬다. 뭐라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것 같다. 내려다 보니 바닥에 핏물이 흥건하다. 핏물은 화장실 문 밖에까지 흘러나가 있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배가 아프다. 너무 아프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내 입에선 대답 대신 신음 소리가 나왔다. 또, 또, 뭔가 내 밑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엄마, 엄마, 엄… 마…, 응애…. - 대한사회복지회 엮음 ‘별을 보내다’ 중에서
민들레는 봄소식을 알린 후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부터 민들레는 그렇게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가난한 집 처마 밑에 떨어져 한 송이 꽃으로 피워졌습니다. 민들레는 갈매기의 등에도 오르고 산에도 오르고 들판에도 흩어져 바람을 타고 자유로이 여행을 합니다. 민들레야…. 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고운 잎 활짝 피어 모두의 가슴에 희망으로 피어나거라. 민들레야…. 이거 하나만 기억해줄래? 내 가슴 속에는 항상 네가 피어 있다는 것을…. 민들레야, 사랑한다.
오는 11월 1일부터 대학로 상명아트홀에서 공연하는 ‘민들레를 사랑한 리틀맘 수정이’(연출 조재현, 극본 이민욱)는 18살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형식의 모노드라마이다. ‘리틀맘 현상’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배우 김부선이 스스로 미혼모임을 고백하여 화제가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에는 방송인 허수경의 ‘싱글맘 스토리’가 알려져 얘깃거리가 되었고, 마침내 ‘18세 엄마 이주영의 육아일기’를 쓴 이주영이나 ‘KBS 인간극장-소녀, 엄마가 되다’의 김설희의 경우처럼 당당히, 공개적으로 리틀맘의 삶을 살아가는 사례까지 이르렀다. 미혼모에서 리틀맘까지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얼핏 세상의 인식이 참 많이 바뀐 듯도 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수정이였더라도 아이를 낳았을 것 같아요.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이주영의 사진과 글이 인터넷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TV 프로그램까지 소개되면서 불거진 논란은 우리 사회의 미혼모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10대에 실수로 임신한 미혼모를 마치 스타처럼 추켜세웠다’는 비난 글부터 ‘아이들이 방송을 보고 무엇을 배울지 모르겠다’ ‘방송이 청소년들의 탈선을 되레 부추기는 것 같아 걱정된다’는 힐난이 잇따랐고, ‘이제 사고 쳐서 임신해도 사회가 인정해주고 스타까지 만들어줄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성인 미혼모도 문제인 마당에 10대 어린 엄마를 이해해야 마치 현대인이고 지식인인 양 방송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태도’라는 의견까지 올라왔다. ‘음지에 있는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줬다’ ‘낙태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리틀맘이라고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옹호글부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책임은 누구나 질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격려도 다수 있었지만 부정과 비난이 대세를 이뤘다.
- 고2인 은하는 동갑내기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수술을 하지 못하고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아이를 낳았다. 처음에는 자식이 없는 집으로 입양시키기로 했으나, 막상 갓 태어난 아이를 안아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자신이 키우기로 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실을 안 아버지에 의해 친권을 포기당하고, 재차 입양할 집을 찾아야만 했다.
- 고3인 유정이는 이혼한 아빠와 살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니다가, 이웃한 주유소 아르바이트 오빠를 만나 아이를 가졌다. 학교를 자퇴한 유정이는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낳은 후 한때 기를 생각도 해봤지만, 형편상 끝내 아이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빠는 ‘다음에 우리가 자리 잡고 결혼하면 우리 아기 꼭 찾아오자’며 달래보지만, 유정이는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 정순이의 집은 딸만 셋인 딸부잣집이었다. 건축일을 하던 아버지는 술주정이 심했고 툭 하면 엄마와 딸들에게 손찌검을 해댔고, 견디다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중학교를 마친 정순이는 구미에 있는 한 공장에 취직했고, 공장에 딸린 산업체 여고를 다녔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두고 삼촌이 운영하던 식당에서 서빙일을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 사실 남자와는 사랑이라고 말할 만큼 특별한 감정도 아니었고 아이를 키울 형편도 못되었으므로 부득불 입양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정순이는 다시 공장생활을 시작했고, 회사 언니의 소개로 대학생을 만나 두 번째 임신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어떡하다 때를 놓친 그녀는 또 다시 미혼모가 되었다. 남자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안 후 돌아서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임신 중 아버지까지 여읜 그녀는 두 번째 아이마저 입양을 보낸 후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녀의 나이 이제 19살이다.
- 제천에 사는 선희는 중학교 3학년 때 임신을 했다. 놀랍고 무서웠지만 아기 아빠와 상의 끝에 아이를 낳기로 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생긴 아이를 지우는 건 아이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양가 부모의 반대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둘은 가출했고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외지로 나가 아이 아빠가 웨이터와 공사장 인부로 전전하면서 어렵사리 아이를 키웠고, 2년 후 고향에 돌아와 떳떳하게 보금자리를 꾸몄다. 혼인신고도 하고 두 번째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경제적 부담은 여전히 큰 짐이다. 관청에 도움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별반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한 해 3000명이 넘는 청소년이 출산을 하고 있으며, 직접 아이를 기르는 10대 미혼모의 수가 6000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매일 10여 명의 아이가 병원에서 보호시설에서, 심지어 길거리에서 화장실 찬 바닥에서 태어나고 있다. 어린 미혼모들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버림받고 있다. 간혹 당당하게 스스로 힘으로 아이를 키우는 아이들도 있으나, 그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냉대와 학업 중단, 무지한 육아교육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태어난 아이의 생명도 엄연히 존엄한 하나의 생명이며 그 모성 역시 충분히 보호받아야만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제까지 아이들이 아이들을 키우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들의 행위와 그 결과는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사회가 함께 안고 풀어가야 할 문제일 뿐이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잊힌 듯했던 과거의 일들이 불현듯 양심을 찌르며 되살아난다.
당신은 어떠한가.
◀연출 조재현, 출연 오주은, 극본 이민욱 |
]‘카지노 앵벌이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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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원랜드 앵벌이다. 알뜰살뜰 모은 돈에다 빚까지 내어 생돈 11억을 날리고, 아직도 대박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하고 카지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인생의 패배자로, 도박중독증 환자로 여긴다. 한때는 나도 우리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시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 편히 쉴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조차 없다. 카지노 손님들에게 달라붙어 눈치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살아가는 즐거움과 행복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고,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와 미련도 사라졌다. 희망의 빛과 시간개념조차 느껴지지 않는 진공상태의 삶, 나도 모르게 차가운 눈물만 흘릴 뿐이다.
- 김완 ‘카지노 앵벌이의 하루’ 중에서
유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왔다. 어느 날 친구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카지노 이야기가 나왔다. 그동안 장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먼 딴 나라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지만 은근히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가끔 재미삼아 하는 화투에서 유난스러운 승부욕 탓인지 결코 잃는 법이 없었던 그였다. 언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언뜻 내비친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였는데….
얼마 후 그날 모임에 같이 있었던 한 친구놈에게 전화가 왔다. 마침 강원랜드 쪽에 일을 보러 갈 작정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장사에 쫓기는 처지였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지만 넉넉히 12시간 정도면 일도 보고 한 두어 시간 카지노도 들를 수 있다는 말에 바람도 쐴 겸 하고 따라나섰다. 가는 차 안에서 친구놈에게 들은 게임방식이 전부였다. 그는 30만 원을 들여 생전 처음 블랙잭이라는 것을 해봤고, 결과는 250만 원을 따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가 보내는 미끼였고 달콤한 유혹의 시작이었다.
이게 내가 살길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뼈빠지게 일해야 했던 것은 그렇다 치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1억 원씩이나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로서는 이제야 비로소 승부도 빠르고 유독 분석적인 자신의 성격과도 딱 부합하는 벌이 겸 놀이를 찾아냈다고 여겼다. 그리고 모든 것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3개월 만에 1억 원을 잃었다. 이번에는 될 듯 될 듯 안 되는 게임에서 어떻게든 잃은 돈을 되찾겠다는 집념에 매달렸다. 그것이 어떻게 번 돈인데…. 그리고 6개월 만에 10억 원을 더 잃었다. 끌고 갔던 차를 전당포에 넘긴 것은 물론이고, 가게를 빼고 집도 넘겼다. 이혼을 당하고, 친구도 친척도 모두 잃었다. 그동안 내일 당장 줘야 할 직원들 월급을 몽땅 날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핸들을 벼랑 쪽으로 틀려 했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것은 채 40이 되기도 전에 찾아온 인생의 ‘오링’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카지노 앵벌이가 되었다.
<경향신문> |
‘강랜(강원랜드)’ 카지노 앵벌이들의 주 수입원은 ARS 미당첨이거나 뒷번호 당첨에게 자리를 팔거나, 한꺼번에 여러 게임이나 상한액 이상으로 베팅하려는 전주(錢主)를 대신해 게임을 해주고 얻는 커미션이다. 이들은 대부분 강랜에서 완전 ‘오링’되어 오갈 데도 없는 ‘개털’들로 카지노에 빌붙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앵벌이들의 생존이 가능한 것은 강랜 카지노의 기형적(?) 규제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에 자기 돈 내고 게임을 하면서 입장 순서를 추첨으로 배정받아야 하고, 아무리 ‘촉’이 올라도 일정 이상 베팅을 할 수 없는 제한규정을 누구보다도 원망했던 당사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불합리한 규제에 기대어 먹고산다.
‘오방이’ 김완씨(40)에 의하면 현재 강랜의 앵벌이급들은 7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들은 ‘A급 중독자’면서 강랜의 상주인(常住人)이고, 앵벌이는 그들에게 일종의 직업인 셈이다. 빈털터리인 채로 사회로 복귀하기도 어렵지만, 어렵게 일자리를 잡는다 해도 거기서 얻는 소득보다 앵벌이로 얻는 수입이 훨씬 더 많다. 비록 그 돈은 최저생활비만 빼고 몽땅 다시 강랜에 환원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한때나마 큰돈(지금은 다 잃어버렸지만)을 만졌던 사람이 대부분인지라 더더욱 그렇다. 오방이는 앵벌이짓이 가능한 강랜의 기형적 구조가 그들의 사회 복귀를 가로막는 셈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강원랜드 카지노는 폐광지역 발전과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명분 아래 정부와 강원도가 주도하는 범국가적인 사업인 ‘탄광지역 개발촉진지구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1995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공포하여 내국인 출입 카지노 건설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였고, 1999년 스몰카지노를, 2003년에는 메인카지노를 개장하였다. 현재까지 연인원 840만 명 이상이 입장하였고, 그 중 절반 정도는 반복적으로 드나드는 1500명 정도의 중독자로 이루어진 연인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정 지역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있다’는 강랜 카지노는 사고가 터지고 원성이 드높아질 때마다 규제를 강화하여 왔다. 보상당사자인 사북 일대 주민들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현재 대부분 지역상권을 외지인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숱한 원주민들이 보상과 개발에 따른 이익을 다시 강랜에 토해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강랜은 현지인 월 1회 이상 출입제한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이것은 엄연히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왕 내국인 출입허가를 내려놓고 특정지역 거주인이라 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또 무언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미 도박중독에 빠진 원주민들은 제한조치를 피해 주민등록지를 이웃 지역으로 옮기는 소위 ‘위장전입’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담배소송의 경우처럼 카지노의 폐해를 들어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 피해로 따지자면 담배는 도박에 댈 일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규제가 심해질수록 더 좋은 환경에서 마음놓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마카오나 라스베이거스로 빠져나간다며,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왕 만든 거 대폭적으로 규제를 철폐하고 더 나아가 복수의 내국인 출입 카지노를 허가해 서로 경쟁하면서 서비스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지노도 이제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워가야 한다는 논리와 함께.
어떤 이는 강랜이 있는 백운산을 ‘사람 죽이는 산’이라고 한다. 탄광시대에 숱한 광부가 막장에서 매몰되었으며, 사북사태가 일어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이제 생각지도 않았던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많을 때는 일주일에도 몇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도 검기만 한 백운산 운탄로(運炭路)는 예전에 꽃을 꺾으며 넘었다는 화절령(花折嶺)으로 이어진다. 운탄로도 쓸모를 잃은 지금, 누가 또 꽃을 꺾는가. 아무리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의 삶이 파괴된다면 그것은 나라가 할 짓이 아니다. 돈이 된다면 매춘과 같은 향락사업까지도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워나갈 것인가. 경마에, 경륜에, 경정에, 로또에, 심지어 개나 지렁이 경주까지라도 시켜서 내기를 걸려는 도박공화국에서 그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카지노 앵벌이의 하루’라는 책을 내면서 이제는 그것 때문에라도 아직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는, 반은 글쟁이고 반은 앵벌이가 되었다는 김완씨의 소망은 절절하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강랜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공연한 흥분을 불러 일으키는 붉은 카펫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생활의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 역시 슬픔도 기쁨도 똑같이 느낄 줄 아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죽은 편집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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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기 짓고 윤구병·김형윤·설호정 엮은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 여는 글
지난 역사와 다가오는 역사를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전통이라면 변화는 그 둘을 갈라서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만남과 갈라섬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이로워야만 우리에게 중요한 줄로 압니다. 전통을 내세울 때도, 변화를 촉구할 때도 늘 사람의 사람다운 세상살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샘이깊은물의 생각’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멍에를 벗고 서른 해를 보내는 동안에, 남녘과 북녘의 분단 속에서나마 눈부신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문의 업적이 잘 삭여져서 토박이 민중의 피와 살이 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이것은 교육이 질보다 양에 기울어졌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공부보다는 ‘외우는’ 공부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교육이 ‘생각하는’ 교육을 시키는 일을 힘껏 거들고, 학문과 토박이 민중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는 데 힘써야 합니다. -‘배움나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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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낙안읍성. 가운데-짓다 만 한창기기념관안의 전통가옥. 오른쪽_한창기의 무덤. 생전에 그이가 꿈을 펼치고 싶었던 순천 낙안읍성 근처에 그이의 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
‘뿌리깊은나무’의 발행-편집인 한창기 선생이 타계한 지 꼭 10년 만에 그이의 생각을 담은 책 세 권이 나왔다.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으로 이름 지은 세 권의 책은 한 탁월한 편집인의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작고 가느다란’ 생각들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작고 가느다란 생각들이 곧 ‘뿌리깊은나무’의 깊은 뿌리였고 ‘샘이깊은물’의 깊은 샘이었다.
이 책을 펴내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좇는 우리 사회에 ‘삼십 년 전 한 문화인의 사유’를 던지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를 담은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글은 대부분 괜찮다. 당시에 세계인이었던 한창기 선생님의 사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흥미롭다.
벌교의 홍교. 그이의 고향 벌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이기도 한데, 생전에 그이는 소설 속에 나오는 벌교 사투리의 잘못을 짚어낼 정도로 토박이 우리말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
그이는 1936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났다. 평범하게 성장했지만 공부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순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사법고시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외려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떴다. 중학시절부터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들으며 혼자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8군 영내에서 귀국 군인들을 상대로 비행기표와 영어 성경책을 팔아 꽤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결국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이는 미국 시카고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사에서 발간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이 땅에 보급하는 일에 나서면서 신화적인 세일즈맨이 되었다. 당시 고가에 순 영어판인 백과사전을,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개발 이익을 거머진 졸부들의 과시욕을 교묘히 자극해 장서용으로 팔아넘겼고,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과급 영업사원 제도를 시행했으며, ‘아프리카에서도 모피코트를 팔 것’이라는 둥 ‘해수욕장으로 바캉스 가서 덜렁 수영복 한 장만 입고도 백과사전 몇 질은 예약받고 온다’는 둥 세일즈업계에 숱한 신화를 더해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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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징광옹기. 가운데-징광잎차. 오른쪽-조선물집 한가솜씨의 천연염색. 옹기와 잎차는 그이의 동생 한상훈과(그이가 죽은 후 1년 뒤 작고) 제수씨 차정금에 의해 유지되었고, 천연염색은 그이의 권유를 받은 조카 한광석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
이후 그이가 이룬 문화적 업적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배운 바 없고 볼품없는 민중들의 삶을 복원한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과 남한 땅 곳곳을 발로 누벼 기록한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발간 같은 선구적인 출판사업부터, 당시 천대받던 이 땅의 소리꾼들에게 한복을 사 입혀가면서 5년 동안 100회에 걸쳐 판소리 발표 무대를 열어 판소리 중흥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고, 한옥과 한복, 옹기와 유기, 전통 차와 천연염색 등 퇴색해가던 우리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급에도 앞장섰다. 그 모든 것이 그이의 탁월한 안목과 식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뿌리깊은나무'의 초대 편집장 윤구병은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입사면접 때 처음 그이를 만났다. 화사한 보랏빛 넥타이를 맨 젊은 사장은 대뜸 "이런 깡패 집단엔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었고, 그 대답은 "밥 빌어먹으러"였다. |
그이가 세상을 뜬 후 세상이 그이를 위해 해준 일이라고는 최근 들어 그이의 소망처였던 낙안읍성 아래 한창기기념관을 짓다 만(다시 재개할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이 고작이다. ‘뿌리깊은나무’의 복간은 고사하고 ‘샘이깊은물’조차 폐간된 지 오래고, 낙안읍성은 자꾸만 고풍을 잃은 채 상업관광지로 되어간다. 그이가 생전에 쏟아부었던 그 많던 문화적 기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알고서 보면 작금의 우리 문화 곳곳에서 그의 생각과 실천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하다못해 ‘한창기편집상’ 하나 없는 세상에서 나는 부질없는 어떤 그리움만 안고 살아간다. 하기야 나 역시 그이의 넓고 큰 그늘에서 어설픈 흉내내기에도 급급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다시 들판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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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
눈물 뿌리지 않는다면
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
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
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네 몸뚱이, 죽어
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
구름만 덮일 뿐 모두가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
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
어찌
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 안도현 ‘모항 가는 길’
변산반도의 아랫도리가 시작되는 곳쯤에 곰소만을 껴안은 모항마을이 있다. 도청리 호랑가시나무군락 아래서 내려다본 모항은 너무도 아늑하여 하마 눈물이 날 지경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시 눈물겹기는 마찬가지다. ‘띠목’이라고 불리는 모항에서 나고 자란 박형진(50) 시인은 초등학교만 마친 이래 이제껏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으면서 시를 써왔다. 시도 시지만 걸쭉한 입담으로 써내려간 고향사람들의 이야기(‘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에는 ‘징허디 징헌’ 그 무엇이 스며 있다.
장불(바다의 모래톱이나 자갈톱)에 끌어올려진 배의 장 속에서 갑열의 큰집 조카들이 작은아버지의 시체를 건졌다. 노인의 마지막 기지로 가라앉는 배의 장 속에 뛰어들어갔기에 서글프게도 자기의 시체를 잃지 않은 것이다. 갑열과 그 어린 아들의 시체는 뒤늦게 끌어올려진 그물 속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발견되었다. 삼대의 세 구 시체는 고지의 평평한 곳에 거적을 펴고 함께 누이고 다시 거적으로 덮었다. 일가붙이들의 울음소리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바다에 의지해 먹고사는 동네사람들인지라 자기 일처럼 두려움에 휩싸였는데, 그물에는 그때껏 잘 잡히지 않던 덕재가 수도 없이 들러붙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 줄포만의 아슬아슬한 꽁댕잇배
갑열이 삼대가 죽어 거적에 싸이던 날도, 종태가 죽던 날도 고막녀는 춤을 추었다. 고막녀는 종태의 막내동생인데 어릴 때 하도 울어싼다고 아버지 몽치씨가 문 열고 포대기 채로 마당 눈밭에 집어던져 실성이 된 것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종태는 ‘인생은 굵고 짧게 살아야 된다’고 그것이 무슨 대단한 말인 양 항상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는데, 그 말대로 겨우 서른한 살에 딸 아들 남매로 대를 이수아놓고(이어놓고) 죽었다. 눈이 오던 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남매가 무슨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하얀 상복을 입고 떨며 두리번거리며 상청에 서 있는데 고막녀는 마당을 겅정겅정 뛰며 까르르 웃어대며 얼싸 좋다아 소리를 쳐가며 팔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 고막녀와 뱃동무
봄이 되어서 숙모네 마당가에 있던 앵두나무에 꽃이 필 무렵이면 겨우내 방안에만 누워 있던 봉니 누님도 가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마루에 나앉아 있었다. 물 길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가면 나를 불러서는 사탕 같은 것을 하나씩 쥐어주었는데, 까만 통치마, 하얀 옥양목 저고리에 삼단 같은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백짓장 같은 창백한 얼굴에도 커다란 눈은 더없이 서글서글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키를 낮춰 속삭이듯 말을 걸어올 때면 비릿하고 달착지근하고 더운 숨결이 느껴져 나는 귓불이 화끈거렸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다는 처녀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앓아누워 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느껴져서 신비하기까지 했다. - 봉니 누님과 허드렛샘
1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렇게 썼다. 비록 이런저런 사연을 품에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항은 그냥 멀찍이 바라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롭게만 보였다.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어찌나 한가로운지 호랑가시나무 이파리 위에 노니는 햇살의 가벼운 몸짓조차 마치 심심파적인 양 여겨질 정도였다. 하나 그것은 속 모르는 이야기였다. 1년 전 내가 제법 높직한(모항 바닷가에 비해서) 곳에 자리 잡은 시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웃통을 벗어부치고 밭을 갈다 괭이자루를 부러뜨린 모양이었다. 새로 자루를 해 박으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면에라도 다녀와야 할 판이었으니, 불쑥 찾아든 작자가 영 성가시기만 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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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_지난해 여름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본 모항. 지금의 모항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다. 지난해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_모항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솔섬의 낙조. 누구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다만 보이는 빛일 뿐이다. |
1년 만에, 이번에는 가을걷이도 끝났으니 조금 나으려니 하고 다시 그 집을 찾았을 때, 마침 그는 하릴없이 마루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유치원 아이들을 돌보는 아내가 일을 마치는 시간에 대어 승합차로 아이들을 부리러 가기 전 잠깐 짬이 난 터라 했다. 한 해 농사를 얼추 마무리했건만 그에게서는 홀가분함보다 어쩐지 몸의 기운이 죄다 빠져나간 듯한 허허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앞서 해안도로에서 잠시 모항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받은 실망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쩜 단 한 해 만에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예전부터 풍광 좋고 아늑한 바다를 끼고 있는 탓에, 더구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바람에 이미 개발의 손때를 타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도가 한결 우악스러워져 마을 여기저기를 시멘트길들이 마구 헤집어다니고 있었고, 국적불명의 건물들이 이곳저곳 들어서면서 이제껏 살아온 집들과 그 대비를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불멸의 이순신’인가 뭔가 하는 드라마를 찍으면서 사용했던 ‘방송용 배’들이 그대로 묶여 있어 외려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단지 내 마음의 풍경일 뿐인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것들만 빼고는 햇빛도 바람도, 바다도 사람도 여전히 슬프도록 아름답다. 이래저래 생각을 궁굴리고 있는 사이 용달차 한 대가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누구에겐가 이 집 창을 하나 갈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인데,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갈긴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다음에 다시 한 번 들려줄 것을 간구한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사정이 영 여의치 않은 눈치다. 젊어서부터 한눈팔지 않고 농사에만 매달려왔고, 지금은 논 1200평에 밭 1600평이라는 아주 많다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적지만도 않은 땅을 부치고는 있지만 자급자족하며 살기에도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그는 최근 농기구에 관한 이야기를 묶은 책 한 권을 탈고했다. 봄의 쟁기며, 여름의 호미하며 각기의 농기구들은 하나같이 나름의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 갈수록 그 쓸모는 세상 밖으로 밀려나기만 한다. 그것을 부리는 사람들조차 하나둘 떠나가고, 그렇게 빈 들판에 남은 씨앗 하나 있다 한들 무엇으로 다시 움트게 할 것인가. 낫과 곡괭이들, 논밭 갈고 거두어들일 때 신명으로 춤을 추지만, 어느 날 문득 뒤엎고 베는 무기로서 들판을 내달릴지도 모를 일이거늘. 그가 쏜살같이 제 ‘임무’를 마치고 모항의 그 허름한 막걸리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사람 대신 갓 잡은 병치를 씹었다. 이제 모항 막걸리집에서 사람을 씹는 일조차 점점 기운을 잃어간다. 포구의 노천 부뚜막에서는 멸치를 삶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그 위로 떨어지는 11월의 마지막 빛이 더없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숨은 빛-밀양 ‘벌레 이야기’
- 이청준 ‘벌레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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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선배. 나는 당신 앞에 닥친 불행 앞에서 참람하게 말을 잃습니다. 오지랖 넓고 가난한 신문쟁이의 마누라로서, 두 남매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토록 고분하고 착실하게 세상을 살아왔건만,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암 선고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길고 지루한 투병기간이 이어지고, 그래도 희망의 실낱을 놓지 않고 있을 즈음, 이게 웬 청천벽력이란 말입니까.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어미 앞에서 새파랗게 젊은 딸내미가 먼저 삶의 끈을 놓아버리다니요.
톱 모델을 꿈꾸던 아이였습니다. 말수는 적지만 그런 만큼 생각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모델선발대회를 앞두고 불의의 화상사고를 당했을 때만 해도 일이 그 지경까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모델에게는 치명적인 허벅다리 화상이었지만 그래도 수술로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불행의 신은 그렇게 진저리나도록 끈질겨야만 했을까요. 수술은 의료사고를 부르고, 거듭되는 재수술로 이식된 아이의 살은 자꾸만 괴사했습니다. 그래도 그게 끝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분쟁 속에서도 어쨌든 아이는 퇴원을 했고, 다시 자기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랬기에 정말 몰랐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갑작스레 어미의 앙마른 가슴팍에 돌이킬 수 없는 원망으로 남게 될 줄은, 졸업식 때 가보지도 못한 무심한 아버지의 휴대전화 속에 감사의 메시지로만 남게 될 줄은.
영화 ‘밀양’(원작 이청준 ‘벌레 이야기’) 속에서 신애(전도연 분)는 종찬(송강호 분)에게 묻습니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종찬은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여기 밀양은 한나라당이고… 경기가 엉망이고, 부산과 가까워 말씨도 부산 말씨고, 인구는 뭐 마이 줄었고….
서른세 살, 남편을 잃은 그녀는 아들 준과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고 있다. 이미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피아니스트의 희망도 남편에 대한 꿈도…. 이 작은 도시에서 그만큼 작은 피아노학원을 연 후 그녀는 새 시작을 기약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내 곧 연약한 애벌레처럼 웅크린 그녀의 등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밀양 외곽 5㎞… 그는 신애를 처음 만난다. 고장으로 서버린 그녀의 차가 카센터 사장인 그를 불렀던 것. 그리고 이 낯선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처럼 잊혀지지 않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밀양과 닮아 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그만큼의 욕심과 그만큼의 속물성과 또 그만큼의 순진함이 배어 있는 남자. 마을 잔치나 상갓집에 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누구처럼 그는 신애의 삶에 스며든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서 있다. 한 번쯤은 그녀가 자신의 눈을 바라봐주길 기다리며….
밀양의 햇볕은 낡고 오래되었습니다. 밀양강가에 숨길 것도 없이 드러나 있는 영남루와 긴 늪이 말라버린 기회송림의 소나무들은 낡고 오래된 햇볕에 젖어 있습니다. 아랑의 전설은 가뭇하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아리랑 가락조차 이제는 끊어져버렸습니다. 밀양교 건너 용두교 건너 밀양역 쪽으로 저어가면 낡은 적산가옥 곁에 한가로운 점포들 길게 늘어선 가곡동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영화를 찍었다지요. 신애의 피아노학원을 지나 영화 속의 교회로 접어들면 길가의 국화꽃 뉘엿한 가을볕에 시들고, 교회 십자가 밑에 한 아이가 혼자 놀고 있습니다. 그 많던 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영화 속에서 아이를 잃은 신애를 만나러 온 신애의 동생이 종찬에게 묻습니다. 밀양은 어떤 곳이죠? 그를 밀양역으로 바래다주던 종찬은 머쓱하게 대답합니다. 다 똑같죠. 사람 사는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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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같은 절망적 자각은 미물 같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로서 그의 삶 자체를 끝장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섭리의 세계를 함께 부수고 싶은 한계적 욕망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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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것은 지난 4월 26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5·18씻김굿’ 때였다. 몇 차례 씻김굿을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먼발치에서였다. 굿이라면 지레 오금이 저리며 슬그머니 외면하기 십상인 나로서는 바로 옆에서 굿판을 지켜본다는 것이 여간 신경 저린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이 죽은 자의 넋을 씻기는 씻김굿이고, 거기 불려나온 넋이 5·18 영령이었음에야. ‘나오서사 넋이야 나오서사 혼백아…’ 이 천하의 ‘무(巫)쟁이’는 그런 나의 섬약에는 아랑곳없이 잘도 구음(口音)을 다스려갔다. 누구는 그의 소리의 기승(技勝)을 타박하지만 어차피 나로서는 그를 가려 들을 귀도 없었고, 그 전에 이미 노련한 무기(巫氣)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의 소리는 그렇게 밀고 당기며 아득하게 굴러만 가는데, 징을 두드리는 그의 얼굴에는 여직 넉넉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마지막 씻김굿판은 지난 11월 24일 진도군청 앞 철마광장에서 그의 딸이자 단골(무당)인 미옥(45)이 주재했고, 그는 소리로서라도 씻기는 자가 아니라 그냥 망자였다. 그의 오랜 친구 강준섭의 ‘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가 길을 열었고, 진도의 큰무당 채정례가 그 길에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단골 미옥이 본격적으로 씻김을 행하기 전에 그의 막내딸 윤정(28)이 살풀이춤을 추었다.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막내는 마치 바리데기와도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심지어 소리조차 없이 흐느꼈다. 그래도 고인의 단골딸은 의젓했다. 그녀는 남은 가족들에게서 고인의 넋을 끌어올리며 울고 웃었다. 그녀는 기구한 가족사를 풀어내고 씻김으로써 망자의 넋을 달랬다. 영돗말이가 섞이고 길닦음으로 이어지는 동안 능수능란하기만 한 그녀였지만, 그 많은 씻김판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리고도 아직 남은 눈물이 있었는지 연신 눈물을 쏟고 쏟았다. 그 눈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외려 따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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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옥은 한때 그 지긋지긋한 세습 무계(巫系)의 업에서 벗어나고자 어지간히 몸부림쳤다. 다니던 국악고를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광주로 내려가 양품점 종업원을 하기도 했고 옷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세속 남자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진도로 내려와 소주방을 차렸다. 남편과 함께 술판을 바라지하면서 굿판을 지워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안에는 무업에 대한 세상의 천대와,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깊고 깊은 애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다시 무업으로 돌아갔다. 그런 것이 업이었다.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굿판에 나가기를 거듭하면서 차츰 단골로서 단련되어 갔다. 처음에는 어머니 정숙자(그녀는 4년 전 세상을 떴다)의 도움 없이는 굿판을 끝까지 이끌어나갈 역량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망자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까지도 곧잘 위무하는 정도는 되었다. 이 날 그녀는 종천에 이르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아까부터 술김에 공연이 딴지를 붙던 문상객 하나와 맞붙었다. 그러다가 아는 얼굴이 비치니 반갑게 얼싸안기도 했다. 그토록 끈질긴 삶과 그토록 끈질긴 죽음 중 그 어느 것이 그녀를 그토록 억세고도 다감하게 만들었을까.
상사소리는 어디를 갔다가/때를 찾아서 다시 온데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다시 오지를 못하나니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뒷산은 점점 가까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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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고인은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고자 했다. 스스로 죄 없고 여유 있어야 남을 위해 빌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 죽은 자로서의 위엄과 신성과 평정을 되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전에 하 많고 많은 넋들을 씻겼고 이제 스스로도 씻김을 받았으니 그의 넋이야 깨끗하고도 순결할 터였다.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되 넋은 영원하니 죽음이 결코 끝은 아니었다.
늙어 늙어 만년 주야/다시 젊지 못하리라/하늘이 멀다 해도/초경에 이슬 오고/북경이 멀다 해도/세월 따라 백발이요/저승길이 멀다 해도/아차 한번 죽어지면/대문 밖이 저승일세/신이로~나아냐 장성고나라도고나/에~에~에이야 나니냐실어헤이야 - 진도 씻김굿 중 ‘초가망석’
포장마차에서 하늘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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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당뇨합병증으로 인한 심장병으로 영남대 의료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다. 그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어느정도 건강을 되찾은 다음, 대구 성서공단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삶의 별을 바라보았다 한다. 그 기적이, 그 희망이 나는 부럽다. 벼랑 끝에서 하늘을 본다는데….
인생은 나에게/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눈이 내리는 날에도/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인생은 나에게/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 정호승 ‘술 한 잔’
옆자리에서 늦은 연인 한 쌍이 세상사와는 아랑곳없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소곤거렸고, 뒤늦게 작업복 차림의 동료 두 사람이 주인아주머니와 마주 앉으면서 어느덧 포장마차는 만원이 되었다. 더는 기다릴 것도 없이 밤은 이슥해져 갔고, 다시 하나둘 제 불빛 속으로 돌아간 뒤 이윽고 포장마차는 처음의 풍경으로 남았다. 대설을 앞두고 일기예보는 대설주의보를 알렸는데, 밤하늘은 별을 감춘 채 단지 꾸무정할 뿐이었다. 눈이 내린다면 그 눈은 서설일까, 아니면 폭설일까.
언젠가는 나도 홀로일 것이다/새벽 잠에서 깨어나/등불 올리고/염주 돌리는 어머니의 손목처럼//오늘도 나는/떠들썩한 포장마차에서/홀로 남겨지는 연습을 한다/마시다 버려진 빈 술잔처럼 - 이길원 ‘언젠가는’
슬픈 이반-‘Gayful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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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198×년 선데이서울에 실린 ‘호모’ 관련 가십기사를 오려 책갈피에 끼워둔 이들
199×년 종로에 입성하여 첫사랑에 웃고 울며 20대를 보낸 이들
2003년 11월 ‘친구사이’에서 게이프라이드를 노래하기 시작한 이들
2006년 12월 첫 공연을 통해 편견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세상에 말을 건넨 이들
나의 중학교 때 짝꿍은 유난히 ‘여성 성향’이 강했다. 곱상한 외모에 성격은 새침했고, 책이나 노트 등을 늘 가슴에 안고 다녔고, 나와 함께 이동할 때면 꼭 손을 잡거나 팔짱을 꼈다. 그럴 때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 손이 하도 부드럽고 따뜻하여 속으로는 야릇하기까지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 애의 살가움이, 다정다감함이 너무도 좋았다.
지난 12월 9일, 일요일 오후, 홍대 앞 라이브 홀 ‘상상마당’에서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작은 공연이 펼쳐졌다. ‘게이풀 선데이’- 제2회 G-보이스 정기공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마련한 공연이다. 시작 전부터 하나둘, 삼삼오오 사람이 몰려들더니, 객석 120석 규모의 공연장은 어느새 만원이 되었다. 동성 커플도 있었고, 이성 커플도 있었고, 솔로도 있었고, 외국인도 있었고, 인권단체 회원도 있었고, 유명 연예인도 있었고, ‘일반의’ 어쭙잖은 객원기자도 하나 있었다.
국회의원 노회찬씨는 2006년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례법’을 발의한 후, 2007년 한 해 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특히 성전환자 하리수씨의 입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2007년 제8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간담회’를 주최하는 등 성소수자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법무부는 지난 10월 2일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하고, 이 법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 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10월 31일, 법무부는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의 차별금지 대상에서 원안의 20개 항목 중 성적 지향을 비롯해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사항, 병력, 출신 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 처분의 전력 7개 항목을 특별한 이유조차 명시하지 않은 채 삭제했다. 또 애초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안에 명시되어 있었던 ‘성별’에 대한 정의조항까지 삭제, 트랜스젠더의 존재 근거를 없앴다. 이에는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도 동성애와 차별금지 대상 사이에는 분명한 윤리적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다른 차별금지 대상에 대해서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국민이 거의 없는 반면에, 동성애에 대해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국민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당수 국민이 동성애를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상황에서, 동성애를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것을 낡은 관습이나 종교라고 무시하며 차별이라고 금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 길원평 ‘동성애차별금지법안의 문제점’ 중에서
어쨌든 이 날 공연은 ‘Be Our Guest’를 오프닝 곡으로 막을 올렸다. 제1부 ‘그때 그 사람’, 제2부 ‘우리들의 사랑’, 제3부 ‘언니의 꿈’으로 이어진 공연 사이사이 여장이 등장하는 등 깜짝 이벤트가 펼쳐져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 날 사회를 본 ‘피터팬’과 그의 애인 ‘데이님’ 사이의 공개적인 ‘사랑의 언약식’이었다. 이제 마흔세 살의 피터팬은 영화사 ‘청년필름’의 대표로, 갓 스물두 살의 대학생 데이님을 반려로 맞았다. 그들은 커플링을 주고받았고, 사랑의 키스도 주고받았다. 19년의 나이차를 뛰어넘는 그들의 눈물겨운 사랑이야 미뤄 짐작키 어렵지 않을 터였고, 이제 1월이면 데이님이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어서 그 애틋함이 더했다.
1시간 30여 분의 공연은 앵콜곡 ‘거위의 꿈’ ‘금관의 예수’ 등으로 끝이 났다. 그들의 목소리는 감미로우면서도 간절했고, 그 목소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 날 공연에 참가한 21명의 단원은 공연이 끝난 후 울고 또 울었다. 특히 처음 공연에 참가한 이들의 심정은 더욱 각별했다. 그렇게라도 가까스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 그들은 비로소 숨어 쉬던 숨을 토해냈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었다. 나 역시 그것이 엄연히 프라이버시임에도 그렇게까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가 짠해서 울었다. 그 날의 공연은 이제껏 내가 본 공연 중 가장 따뜻한 공연이었고, 그 따뜻함은 오롯이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코 동성애를 권장할 생각도 없고, 또 옹호할 힘도 없다. 그렇다고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도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에서 일찌감치 멀리 ‘아우팅’되었음을 ‘커밍아웃’하지 않을 수 없는 ‘비정체적’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슬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일반이면 어떻고 이반이면 어떻고, 또 삼반이면 어떤가.
커밍아웃은 성적 소수자에게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성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타인에게도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스스로 당당하게 말하는 행위입니다. 또 커밍아웃은 다른 성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적 소수자가 바로 눈앞에, 아주 가까이 머물러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일입니다. 없는 것, 또는 부정적으로 치부되던 동성애를 가시화하고, 동성애가 이성애와 사랑의 대상이 다를 뿐인 보통의 감정이라는 것을 내보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이성애만 ‘정상’으로 여기고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성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 친구사이 ‘커밍아웃 가이드’ 중에서
‘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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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밭에서 일하다가 애를 낳았다”고 하지요. 과장된 면이 있지만, 그만큼 출산은 어렵고 괴로운 ‘숙제’가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밟아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선사한 축복이며 선물이지요.
아기할매를 찾는 임산부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불안해하고 초조해합니다. 아기를 낳을 때 너무 아프면 어떻게 하나, 아기는 건강할까, 태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임신 기간은 잘 보낼 수 있을까…. 아기할매는 그런 임산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녀들은 아기를 잉태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힘이 이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 서란희 ‘자연 그대로 아기 낳는 법’ 중에서
아기할매 서란희씨(59). 그이는 마치 오롯이 ‘산파역’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하다. 조산원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36년, 그이의 손으로 맞이한 아기만도 2만 명이 훨씬 넘는다. 큰 놈 작은 놈, 잘난 놈 못난 놈, 제각기 태생이야 다 다를 수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만은 결코 다를 수 없다. 그래서 그이는 신령님이나 삼신할미처럼 없는 아이를 점지해줄 수는 없지만 나오려는 아이는 잘도 받아준다.
그이는 아버지에게서 두 번의 생명을 얻었다.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것은 물론, 어린시절 큰 병에 걸려 거의 죽다시피 한 것을 심혈을 기울여 구완해냈다. 그러나 딸에 대한 사랑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명문 부산여고를 나와 서울대 불문과를 꿈꾸던 그이를 ‘외지로 내보냈다간 딸년 다 망친다’는 이유로 가로막았다. 그이는 할 수 없이 문학도의 꿈을 접고 부산대 간호대로 진로를 바꿨다. 그것은 당시 ‘서독 파견 바람’을 타고 독일이라도 가서 어떻게든 꿈을 이루겠다는 심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잠시 직장생활을 거쳐 일신기독병원에서 조산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그 역시 낌새를 눈치 챈 아버지 때문에 일찍이 무산되었다. 외지에도 내보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외국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아버지는 ‘인물은 없지만 머리 하나만은 똑똑한’ 딸애를 얼른 시집보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 생각하고, 진주 출신의 집안 좋고 머리 좋은 신랑감을 골라 맺어주었다. 나중에 공학박사가 된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 그이는 답십리에 자리를 잡았다. 제법 넉넉했던 시댁에서는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 세라도 치고 살라며 널찍한 이층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집이 바로 현재의 일신조산원이다.
당시 답십리는 서울의 변두리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미나리꽝 투성인, 시골이나 진배없는 곳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아낙들은 병원은 커녕 산파조차 없는 판잣집에서 애를 낳았고, 심지어 일을 하러 가다가 길바닥에서 애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부터 그이는 어려운 처지의 산모들을 집으로 끌어들였고, 그이의 집은 자연스레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조산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주변의 조산원과 병원 들의 계속되는 고발 으름장에 덜컥 겁이 난 그이는 마침내 ‘일신조산원’ 간판을 내걸고 자의 반 타의 반 정식 조산원의 길로 나섰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제왕절개율을 자랑(?)하는 것은 조산원의 감소와 맞닿아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인권분만 전문가 미셀 오당 박사는 “제왕절개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어김없이 의사에 비해 조산사의 비율이 낮게 나타난다. 한국에 제왕절개율이 높은 이유는 조산사가 부족해지면서 의료진의 개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1971년 그이가 처음 조산원의 문을 열 때만 해도 700여 곳에 달하던 서울의 조산원은 줄고 줄어 이제 제대로 된 조산원은 불과 몇 곳 되지 않는다.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상대적으로 출산 사고의 위험이 높고 시설이 열악한 조산원이 감소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태아감별이나 임신중절 등 태아의 인권에 반하는 행위들이 판을 치고 있고, 세계 최저의 출산율에다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하는 현실이, 분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산파역의 상실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는 데 있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개인의 생활이 향상된다 한들 생명의 가치가 얕보이고 탄생의 의미가 바랜다면, 어디에 희망과 꿈을 둘 것인가.
그이의 조산원을 찾던 날, 한 젊은 부부가 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 이정환씨(30)와 경찰공무원인 김성은씨(32) 부부였는데, 그들은 결혼 1년차 신혼부부였고 첫아이였다. 초음파 조사 결과, 아이는 엉덩이를 산도(産道) 쪽으로 향하고 있는 둔위, 일종의 역아(逆兒)였다. 병원에서라면 꼼짝없이 제왕절개수술을 권유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산원에서 자연분만하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처음 세상으로 나오는 문을 칼로 열어젖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19일 오후 7시 15분, 오랜 산통 끝에 아이는 아이할매의 손에 이끌려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체중 2.76㎏, 신장 48㎝의 건강한 여아였다. 워낙 건강 체질인 산모는 금새 정신을 차려 아이를 찾았고, 아빠는 아이의 탯줄을 자르며 감격해했다. 그렇게 아이의 탯줄은 끊겼고, 이제 세상을 스스로 감내해야 할 배꼽으로 남았다. 아빠는 갈수록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자리를 찾기 어려워지는 세상에, 그래도 제몫을 다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아이의 할아버지가 바꿀 테지만 ‘푸름’이라는 이름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동생 둘쯤은 더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조산원 밖으로는 마침 그날이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인 대선 후보의 압승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아이는 과연 어떻게 자라날 것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큰일을 이루시거나 크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하실 때 매우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 분은 지진을 일으키시거나 번개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아기가 평범한 가정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하신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으시고, 기다리신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지진도 번개도 전쟁도 아니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아기들이다. - E T 설리번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때는 바야흐로 새해다.
떠돌이별, 어깨춤, 선무당 임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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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릴 적 작두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대면 그 물이
땅속 깊이 마중나가 큰물을 데불고 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임의진 ‘마중물이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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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꽃 피는 마을 |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그의 형이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침묵하는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 그가 17살 때, 그의 형이 마침내 하늘나라로 올라간 후 그는 겨우 침묵 속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의 슬픔을 알아채버렸다. 조숙한 이 아이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면서도 사람을 그리워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장래 희망을 ‘사람’이라고 적었다가 담임에게 불려가 실컷 매를 맞았다. 그로써 그의 고교시절도 잠정 중단되었고, 그는 5년 만에 겨우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한 신학대학을 마치고, ‘마르크스의 머리와 예수의 가슴’을 지닌 채 강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교회 중 하나가 있었다. 너무도 가난해서 전도사조차 둘 수 없었던 교회였다. 너무도 가난해서 교회조차 다닐 수 없는 마을에 있는 교회였다. 그는 그 가난에 안주했다. 그는 가난하면서 볕만 좋은 그 마을을 ‘참꽃 피는 마을’이라고 부르고, 그 언덕배기에 볕만 좋은 교회를 ‘남녘교회’라고 이름 짓고 마침내, 당연히 가난한 목자가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그는 멀리 남쪽마을에서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가난한 이들과 이웃하여 살아가는 젊은 목사다. 어떤 날은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면서 철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곧 댐이 들어선다는 강에 나가 하루 종일 강물만 바라보고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동네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술 한잔을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집이 떠나가라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감고 툇마루에 드러누워 있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쪽지로 묶어 나누고, 돈이 다 떨어져 본의 아닌 칩거에 들어간 그를 한동안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런 때는 그가 더욱 그리웠다.
- 그를 조금 아는 사람 류시화
그는 가난하면서 오지게 오지랖만 넓은 목사였다. 월간 ‘참꽃 피는 마을’ 발간(1995), 풍물교실 ‘참꽃마을’ 개설(1996), 광주에 ‘작은 연못 교회’ 창립(1997),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운동 전개(1997)… 무등산 보호 환경음악회 ‘풍경소리’ 증심사와 공동진행(2002) 등등등 통일마당으로, 환경운동으로, 유기농으로, 예술문화마당으로, 절마당으로 안 끼는 데가 없었다. 기여 작은 시골교회에는 참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움으로 1998년 독일의 슈피겔지가 이곳을 ‘아름다운 교회’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딱 10년 만에 마침내, 겨우 안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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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행자의 노래 |
그는 보헤미안이었다. 집시였다. ‘떠돌이별’이었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구가 많은 사람’인 덕분이라고 하지만, 이 땅을 벗어났을 때 그는 ‘국제 노숙자’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에트랑제를 모아 2003년부터 컴필레이션 음반 ‘여행자의 노래’를 내기 시작해 이제껏 4집에 이르고 있다. 1집에는 혼자 떠나는 여행길 동무가 되어준 노래 ‘Ohio’, 가슴에 품은 달빛 같은 노래 ‘La Luna’, 물거품이 된 날 고개를 떨구며 듣는 ‘Caruso’ 등이 수록되었고, 포크록 가수 김두수가 부른 ‘Danny Boy’에다 아예 자신이 직접 부른 ‘Wayfaring Stranger’를 삽입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그녀에게’의 베니그로를 만나러 가는 길. 바보는 식물인간이 된 아가씨를 사랑하다 죽은 베니그로뿐만은 아니리라. 세기의 바보 돈키호테는 어떠한가. 돈키호테의 고향 카스티야라만치, 그곳의 풍차를 바람과 함께 돌리다보면 나도 어느새 바보 같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리.
그는 내친 김에 의형제이자 ‘자유혼’의 신화적 가수 김두수의 부추김을 받아 ‘가수의 길’로 나섰다. 2004년 첫 노래모음집 ‘하얀 새’를 낸 데 이어 2006년에는 명실상부한 자작곡 위주의 독집 음반 ‘집시의 혀’를 내놓았다. ‘집시의 혀’는 일본의 정상급 만돌린 주자이며 기타리스트인 야노 토시히로와, 한국과 일본의 평화디딤돌이며 실험성 짙은 ‘접목음악’을 추구하는 록그룹 ‘곱창전골’의 리더 사토 유키에, 그리고 펀펀한 포크록 마당에서 새뚝 솟아오른 신인 여성 포키 수니, 그밖의 여러 집시족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에 참여했다. 그의 노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에서는 홀대를, 일본에서는 인정을’ 받는다. 어차피 우리가 그의 노래에서 상업적 프로페셔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저 ‘한 예술가의 음악적 퍼포먼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의 질펀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독특한 핸드페인팅으로 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무당벌레를 즐겨 그리는 그는 얼마 전에는 사진작가 김홍희, 목판화가 류연복, 시인 박남준, 서양화가 한희원과 함께 ‘우리 시대 전방위 다종예술가 5인의 오락가락전(五樂街樂展)’을 열기도 했다.
오五Oh! 다섯이어서 즐겁고五樂, 길에서 만나니 더더욱 즐거워라街樂!
#3 회선재의 선무당 |
그는 여전히 바쁘다. ‘오락가락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두수의 다섯 번째 음반 ‘열흘 나비’ 발매 기념 콘서트의 연출을 맡아 의기로 헤집고 다녔고, 홍대 앞 ‘요기가갤러리’에서 열린 불가사의한 음악회 ‘불가사리’에 전격 출연해 자신의 곡 ‘체 게바라’를 연주하는 아방가르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목사도 환경운동가도 시인도 수필가도 동화작가도 가수도 화가도 아니다. 더구나 혁명가도 아니다. 그냥 ‘노는 사람’이다. ‘노는 임씨’다. ‘어깨춤’이다. 그에게서 ‘노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가장 평화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전위적인 ‘짓거리’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억눌림’을 대리해 풀어주는 해방구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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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목사직에서 해배되고 난 후 담양의 수북에 칩거를 마련했다. 집 이름은 ‘회선재(回仙齋)’고 당호는 ‘선무당(仙舞堂)’이다. 원래 알고 지내던 스님이 절터로 마련해둔 곳으로, 홀연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맡겨두었다. 남향으로, 서재에 앉으면 무등산의 산그늘이 아련하다. 수많은 책 하며 2만 장이 넘는 CD 하며 온갖 잡동사니로 그야말로 무당집이다. 세상에서 돌아오면, 그는 이곳에서 티베트 발바리 ‘추’와 검정 차우차우 개 ‘마오쩌순’과 함께 ‘중보다 더 중같이’ 산다. 아니다. 가끔은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임씨’로 어울리고, 간혹 읍내의 관방제 앞 할매국수집에 들러 자신의 안부를 전해주고, 삶은 계란을 먹으며 ‘삶은 계란’이라고 깨닫기도 한다. 경향신문에 짧은 글과 그림을 곁들인 ‘시골편지’를 써서 ‘사람’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나도 ‘잡’하기로 하면 어지간히 빠지지 않는 축에 들지만, 그 앞에서는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의 ‘빽’에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가 ‘이제는 돌아와’ 회선재에서 선경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는 결코 사람 잡는 선무당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선무당이고, 그의 모든 ‘짓’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서 ‘삶을 그리워하는 삶’으로서 자유분방임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제는 그가 그토록 소망하는 따뜻한 시 한 편이거나, 적어도 가끔은 스스로를 위무하는 그런 ‘마중물’로 고여 있을 때도 있었으면 하는 주제 넘는 바람 때문이다. 그는 임의진이다(www.sunmoodang.com).
공군 제314방공관제대대 황병산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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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황병산 관제대대는 눈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많을 때는 30cm가 넘는 폭설도 예사고, 내린 눈 위에 또 눈이 내려 덮이니 무릎까지 차는 눈에 갇히기 일쑤다. 1400m 황병산 고지. 산 아래서 차를 타고 올라도 40분은 너끈히 걸리는데, 아무리 사륜구동차라 하더라도 중턱을 넘어서부터는 평소에도 꼭 체인을 쳐야 한다.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산꼭대기 부대에까지 올려다 준 운전병 정찬용 상병은 이곳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는다고 했다. 지난해 겨울의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눈길 운전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고참들조차도 첫눈이 내린 후 눈길 지형을 익히는 데 적어도 일주일쯤은 허비해야 한다. 해마다 눈길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몇 번씩 헛되이 미끄러진 연후에야 비로소 눈길을 타고 다닌다. 그래도 다행히 올해 들어 아직까지 큰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관령 일대에서도 가장 눈 많기로 유명한 황병산에서 눈을 피해가기란 애시당초 틀린 일이며, 갑자기 폭설이라도 닥치면 2~3일씩 두절되기도 하는 것이니 대비태세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트릴 수 없다.
저번에 할머니께 편지를 보냈는데 눈이 어두우셔서 제대로 읽기나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끔 아버지랑 같이 술도 마시게 되었지요. 그때마다 느끼는 건데, 저희 남매에게 엄하면서도 항상 당신의 권위보다 저희 의견을 들어주시고 저희의 가치관을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어머니 없이 저희 남매 키우느라 많이 힘드셨을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도 많이 아팠는데,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하는 모습뿐이네요. 아버지! 어리기만 하던 제가 어느새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렸네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휴가 때 함께 포장마차 가요. 할머니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사랑합니다!
처음에 아들을 진주에 내려놓고 돌아오면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선이 고운 아이라 군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등학교 때 발목을 다친 적이 있어서 많이 걸으면 몸에 무리가 갈 텐데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괜스레 어릴 적에 아버지가 일찍 떠난 것까지 걱정이 돼서 한시도 마음이 놓인 적이 없었습니다. …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분들과 군인들을 생각하면, 이 땅의 귀함이 감동으로 흐릅니다. 아들이 멀리에서 군 복무를 하느라 한 번도 면회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아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점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부대장님을 비롯한 부대원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무쪼록 모두 건강하게 잘 생활하십시오!
지난해 1월 이곳으로 부임한 최증조 대대장은 대대원들에게 늘 ‘기본’을 강조한다. 방공관제기능의 자동화에 따라 관제기능보다는 공중감시레이더의 24시간 무중단 운영이 최대의 임무인 만큼 평소 대비태세의 만전을 기하는 데 있어 기본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대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마침 이날 황병산 관제대대에는 신병 세 명이 새로 배속되어 왔다. 대학에서 반도체를 전공한 임승만, 행정을 전공한 김태주, 전기를 전공한 지창현 이병이다. TV 프로 ‘인간극장’에서 공군 부부의 사연을 보고 막연히 공군에 대한 선망을 키운 사병도 있었고, 그냥 친구 따라 입대한 사병도 있었다. 한 사병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군 생활을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와 함께 남다른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이들을 바라보는 배상호 병장의 눈길은 사뭇 들떠 있었다. 그는 이제 전역을 3개월 남짓 앞둔 말년병장이다. 그 역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전역이 코앞에 다가섰다. 그는 군대에 와서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때 마침 검열기간이 겹쳐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이겨내고 전역 후 사회 복귀에 대한 부푼 꿈에 젖어 있다. 대학에서 생명화학을 전공한 그는 해외 유학을 다녀온 후 화장품을 개발하는 분야에 몸담는 것이 꿈이다. 2년여의 군대경력이 신병을 바라보는 눈길에 안쓰러움과 함께 따뜻한 토닥거림을 담게 한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나 역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다음 날 백두대간 위로 새로운 해가 장병들의 기상시간보다 더 늦게 떠올랐다. 기자와 함께 황병산 관제대대를 찾은 오산공군기지 관제단 소속 정기봉 소위는 여기 운영계장이자 학군 선배인 김욱현 대위와 함께 사위에 가득한 빛을 바라보며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냥 매일같이, 당연히 반복되는 줄로만 알았던 해뜸이 이토록 장엄한 것이었다니. 정 소위는 그 아름다움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의 작은 숨결 하나로, 청춘 하나로 그 아름다움을 지켜내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감동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고, 나는 또 다른 감동으로 그 순결한 ‘공군의 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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